송월주 전 조계종 총무원장
⊙ 1935년 출생. 정읍농고 졸업. 서울시립대 중퇴. 화엄사 대교과 졸업. 동국대 행정대학원
행정학과 수료. 원광대 명예철학박사.
⊙ 금산사 주지,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 교무부장, 제17대, 28대 조계종 총무원 원장,
경제정의실천연합 공동대표, 현 사단법인 지구촌공생회 이사장·永華寺 회주.
그해 나는 만 열다섯 살로 서울 중동중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서울에 있는 학교에 다니고 있었지만, 내가 6·25를 맞은 것은 고향인 전북 정읍에서였다. 그해 2대 총선인 5·30 선거가 있었고, 고향 정읍에서 선거에 출마한 맏형을 지원하기 위해 나는 고향에 내려가 있었다. 당시 둘째 형님도 전주에서 출마한 상태였다.⊙ 1935년 출생. 정읍농고 졸업. 서울시립대 중퇴. 화엄사 대교과 졸업. 동국대 행정대학원
행정학과 수료. 원광대 명예철학박사.
⊙ 금산사 주지,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 교무부장, 제17대, 28대 조계종 총무원 원장,
경제정의실천연합 공동대표, 현 사단법인 지구촌공생회 이사장·永華寺 회주.
일제강점기 우리 집은 500석 규모의 농사를 짓는 이른바 지주집안이었다. 김제 만경 들이 우리 집의 터전이었다. 당시 우리 마을은 120여 가구가 모여 살았는데 우리 집이 가장 잘살았다고 한다. 덕분에 맏형은 동국대를 졸업할 수 있었고, 둘째 형도 연희전문을 졸업할 수 있었다. 맏형은 중동중에서 역사를 가르쳤고, 둘째 형도 전주농고에서 교사를 했다. 하지만 두 분 다 5·30 선거에서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맏형은 낙선한 후 곧바로 자신의 집이 있는 서울 냉천동으로 돌아갔지만, 나는 그대로 고향에 머물러 있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고향에 머물러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기억한다. 9남매 중 막내였기 때문에 부모님 곁에 더 머물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 않나 싶다.
모내기가 끝나 갈 무렵이었던가. 인민군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하지만 내가 살고 있는 인구 1만명 정도의 정읍군 산외면은 조용했다. 멀리서조차 포성도 없었고 총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비행기의 폭격음도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들에서 일했고, 저녁에는 집마다 굴뚝에서 연기가 한가롭게 피어올랐다.
전쟁 발발이 우리의 삶을 바꾼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전쟁 발발 후 근 10여 일은 그랬다. 7월 초였던가. 일군의 인민군이 바람처럼 우리 마을을 지나갔고 평화로웠던 우리 마을의 일상은 깨졌다. 인민군이 우리 마을에 상주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지나간 후 우리 마을에는 인민위원회와 보안소가 설치됐다. 인민위원회 산하에 청년단체와 여성단체들도 만들어졌다.
재산 몰수
토지를 공평하게 분배한다는 명분으로 우리 집 재산은 인민위원회에 몰수당했다. 곳간에 있던 양식들도 다 들고 갔다. 초근목피까지는 아니지만 난생 처음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아침은 겨우 밥을 먹을 수 있었지만 점심과 저녁은 밀죽이나 수제비로 때웠다.
다행히 나는 인민군 입대 권유를 받지 않았다. 만 17세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각종 부역에 동원됐다. 농사일도 제대로 할 줄 몰랐던 나는 산에 가서 나무를 해 오는 일을 맡았다. 그때까지 우리 집을 떠나지 않고 있던 머슴 두 명을 포함해서 온 가족이 지게를 지고 산으로 가서 나무를 해 왔다. 지게질이 엉성했던 나는 잡풀을 긁어모으는 등의 허드렛일을 맡았다.
당시 기억에 남는 것 중의 하나가 인민위원회가 거둬들인 현물세다. 그들은 직접 논으로 가서 나락을 한알 한알 세어서 현물세를 부과했다. 콩 등 밭작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로서는 그런 행동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그런 행동을 통해서 주민들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우리 마을 인민위원회에서는 현물세를 받아가지 못했다. 추수가 끝나기도 전에 인민군이 후퇴를 했기 때문이다.
몸은 힘들었지만 외양상 우리 가족은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재산을 몰수당해 빈털터리가 된 선친께서는 가족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잘난 척하지 마라. 사는 둥 마는 둥 살아라. 사치하고 집 꾸미지 말고 검소하고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
한마디로 이런 난국에서는 모나지 않고 조용하게 살아야 해를 당하지 않는다는 일종의 처세술을 우리 가족에게 가르치신 것이었다. 선친의 말씀대로 우리 가족은 조용히 숨죽이며 살았다. 다행히 우리 집에서 머슴 살던 사람 가운데 인민위원회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우리 집에 해코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생활은 잠시뿐이었다. 공포 분위기가 우리 마을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우리 마을에 경찰 가족이 있었는데 인민위원회에서 그 집을 불태워버린 것이었다. 이웃 마을을 포함해서 10여 채의 가옥이 그렇게 사라졌다. 다행히 대부분의 경찰 가족은 피란을 간 후였기 때문에 인명피해는 없었다. 가장 재미있는 구경거리 중의 하나가 불구경이라고 하지만, 나는 거기서 증오를 봤다. 그때부터 이미 종교적 심성이 있었는지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때 위장병을 얻었는데 지금도 소화가 잘되지 않으면 그때의 장면들이 떠오르곤 한다.
공포
인민위원회가 공포 분위기 조성을 위해 동원한 또 다른 방법은 처형이었다.
우리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도화동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그곳에 경찰이 있었는데 피란을 가지 못하고 인민위원회에 체포를 당했다. 인민재판에서 그에게 사형이 언도되었다. 그에 대한 처형이 있던 날 인민위원회는 주변 마을 사람들을 처형 장소로 모이게 했다. 우리 집에서는 선친께서 머슴 한 명을 데리고 처형장에 참석했다. 처형 장면을 목격하고 오신 선친께서는 음식도 제대로 들 수 없을 만큼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수많은 사람 앞에서 죽창으로 처형을 했다는 것이었다. 생사람을 그토록 잔인하게 죽이는 모습을 보시고 크게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 이야기를 선친으로부터 전해 들은 나 역시 모골이 송연해졌고 공포감에 휩싸였다. 차라리 처절한 전쟁터였다면 그런 공포를 못 느꼈을지도 모른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닥칠지 모를 죽음에 대한 공포. 우리는 하루하루를 그렇게 가위눌린 듯 살아야 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그 경찰 외에 우리 마을 부근에서는 죽고 죽이는 학살이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전국 곳곳에서 수많은 양민이 학살당한 것을 감안하면 우리 고향의 6·25는 참으로 너무나 조용한 6·25였던 셈이다.
우리 마을에서는 아니지만 멀리서나마 총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때는 9·28 수복 후였다. 9·28 수복 후 하늘을 나는 B-29를 볼 수 있었다. 어디로 폭격을 할지 몰라서 불안했지만 그 장면을 보고 나서야 우리나라가 전쟁 중이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빨치산과의 전투도 벌어졌다. 미처 후퇴를 하지 못한 빨치산들은 임실, 순창 등 지리산 자락으로 들어갔다가 밤이면 몰래 마을로 내려와 식량을 빼앗아 갔다. 어떤 때는 소까지 끌고 가서 잡아먹기도 했다. 그 와중에 우리 토벌대와 전투가 벌어지곤 했는데 그때 총소리 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출가
전쟁 중에 나는 정읍농고에서 학업을 계속했다. 졸업 후 서울로 다시 올라와 서울시립대의 전신인 시립농대에 진학했다. 고등학교 시절 나의 꿈은 마도로스였다. 망망대해를 가르는 배의 선장이 되어 세계 곳곳을 누비고 싶었다.
형님들의 영향을 받았는지 정치도 하고 싶었다. 통솔하고 지도하는 능력이 내게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꿈들을 접고 출가(出家)를 선택했다. 아마 내가 출가를 선택한 데에는 6·25전쟁이라는, 우리 민족이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비극도 한 요인이 되었던 것 같다.
시립농대에 진학한 후 본 서울은 참상 그 자체였다. 눈에 보이는 것은 무너지고 부서진 건물들뿐이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초근목피로 연명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정치권은 물론이고 사람과 사람들 사이의 다툼은 끝없이 계속됐다. 나라는 민주주의 국가라고 하지만 어느 것 하나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 운영되는 것이 없었다. 약육강식의 사회였다.
그런 장면들을 지켜보며 서로 싸우지 않고 평화로운 통일국가에서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전쟁의 상처가 아물지 않고 있던 1954년 나는 우연한 기회에 승려가 된 초등학교 동창을 서울 조계사에서 만났다. 그 친구는 속리산 법주사에 있었다. 그 친구로부터 주소를 받아 든 얼마 후 나는 속리산 법주사로 향했다. 법주사로 가는 길에 만난 풍경들이 너무 좋았다. 조그만 강이 있었고 숲이 우거져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2km를 걸어가야 했는데 하늘을 향해 치솟은 나무들의 자태가 너무나 아름다웠다. 나는 그 길에서 평화를 느꼈다.
법주사에서 만난 스님들의 모습도 공손하고 평화로웠다. 남북 간의 대결이 격심해지고 정치적, 경제적으로 혼란이 극심하여 나라가 무척 어수선한 상황에서 나는 평화를 만난 것이다. 사회적 혼란상 앞에서 인생무상을 느끼던 차에 무상하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를 깊이 고뇌하던 내가 출가 입산하여 불도를 닦게 된 계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정리=金成東 月刊朝鮮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