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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책부록
  1. 2010년 6월호

[金鎔一] 잘나갔던 농구선수에게도 6·25는 전쟁이었다

51일간 서대문 형무소 수감, 하루 식량은 밀알 10여 개
우이동~평양 20여 일 행군에 수감자 3000명 중 600여 명 사망
거지꼴로 꿈에 그리던 고향 왔지만 한 달 만에 다시 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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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鎔一 전 대한체육회 상무이사
⊙ 1923년 출생. 일본 동경 만몽전문학교, 우석대 법정대학 졸업.
⊙ 국방부 국군체육회 사무국장, 대한체육회 상무이사,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
    한국체육인동호회 전무이사.
  6·25 당시 28세였던 나는 실업팀 농구선수였다. 내가 속한 영등포 고려방직은 실업농구팀 중에서도 상당히 우수한 팀이었다. 나는 황해도 재령 출신으로, 광복된 해 실시된 ‘광복 경축 체육대회’에 장수산 농구팀으로 출전했다가 고려방직에 스카우트되어 서울로 왔다. 당시 다른 선수들과 영등포의 고려방직 안에 있는 합숙소(사택아파트 301호)에 살고 있었다. 부모님은 황해도에 있었다.
 
  6·25가 터졌단 소식을 듣고 이틀 후, 선수들과 함께 남하(南下)를 시작했다. 한참을 걸어 안양 근처를 지나게 됐다. 거기서 회사 의무실장이던 윤정현 박사를 만났다. 그렇게 함께 피란을 가게 됐는데, 그의 부인이 아이를 낳은 지 한 달밖에 안 돼 오래 걷지 못했다. 10리, 20리씩 걷다가 안산쯤 가니 날이 저물었다. 이름 모를 농가에 들어가 부인과 아이를 건넌방에 재웠다. 윤 박사와 나는 외양간의 짚 위에서 잠을 청했다.
 
  새벽에 눈을 떠 보니 누군가 내 이마에 총을 대고 서 있었다. 인민군이었다. 그 인민군은 “너희 뭐 하는 놈들이냐”며 소리쳤고, 나는 남쪽으로 가던 길이라고 답했다. 그는 전국이 벌써 다 점령됐으니 올라가지 않으면 쏘겠다고 윽박질렀다. 더 피란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 다시 서울 합숙소로 돌아왔다. 그렇게 합숙소에 홀로 있는데, 7월 25일에 장총을 든 인민군과 고자질한 사람이 와서 아파트 철문을 두드렸다.
 
  “이 새끼 너 이북 놈이지?”
 
  인민군은 내가 이북 출신이니 서북청년단이라며 고랑을 채우고, 등에 총을 대고 영등포 경찰서로 끌고가 유치장에 가뒀다. 그 후 나는 이유를 모른 채 매질을 당했다. 이전에 철도공작청의 공산당 노동자들이 공산화 폭동을 일으켰을 때, 서북청년단원들이 정부에서 총을 지급받아 함께 소탕한 사건이 있었다. 조사원들은 내가 그 사건에 연루돼 있지 않았느냐며 자술서를 쓰라고 강요했다. “난 그런 거 모른다. 난 농구선수로 운동만 했다”고 말해도 개수작이라며 후려쳤다. 네다섯 번 문초당했을까. 그들은 초주검이 된 나를 정치보위부로 이송했다. 정치보위부 총책임 수사관이 광복 전 만주에 있을 때 아는 사람이라 혹시 살려주진 않을까 기대했으나, 별다른 도움 없이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됐다.
 
 
  두 평 형무소에 10명, 밀알 10여 알이 하루 식량
 
  그렇게 형무소 살이가 시작됐다. 내가 있던 방은 4사(舍)10호였다. 같은 방 식구들은 경찰관, 공무원, 교원, 정치인 출신 등이었다. 이북 출신들은 3분의 1 정도 됐다. 이런 구성원이 아주 작은 방에 10명씩, 전체적으로는 대략 3000명이 넘었다. 그중에는 국회의원 출마자, 법관, 중앙청 공무원, 영화배우 등의 인사들도 섞여 있었다.
 
  우리는 51일 동안 갇혀 있었다. 추운 밤이면 서로의 배와 등을 꼭 껴안고 잤다. 식량은 하루 한 끼였다. 영화배우 전창근(全昌根)씨가 들통에 담긴 볶은 밀을 작은 놋그릇에 배급해 주는 일을 맡았다. 볶은 밀은 제대로 씻기지 않아 돌이 붙어 있고 더러웠다. 그것마저 손에 덜면 바깥으로 흘러서 먹을 수 있는 건 10여 알 정도였다. 하루 한 번, 그걸 먹는 시간이 유일한 자유시간이었다.
 
  형무소는 서대문구 현저동에 있었는데, 아침이면 골목에서 “야, ○○아 학교 가자~” 하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그러면 그 또래 아이를 집에 두고 온 수감자들이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러던 9월 16일 새벽 2~3시쯤 북한 인민군들이 촛불을 켜 들고 “다 나오라”며 3000여 명의 수감자를 형무소 마당에 4열종대로 앉혀 수를 세고 쇠고랑을 채웠다. 서로의 팔에 밧줄을 묶어 도망가지 못하게 했다. 그 후 전차를 타고 청량리에 도착해 대학 강당에서 하룻밤을 새우고, 그날 저녁 북쪽을 향해 걷기 시작하는데 그 길이 평양까지 가는 납북길이 되었다.
 
 
  못 걷는 노인들은 총살
 
6.25 당시 북으로 끌려가는 납북자들.

  우리는 허리를 굽히고 걸어야 했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허리를 펴면, 양쪽에서 걷던 인민군이 긴 몽둥이로 때렸다. 폭격을 피하기 위해서 밤에만 행군했다. 첫날 새벽녘 우이동 숲 속을 지나며 세 사람이 달아나다 붙들렸다. 그들은 우리 앞에 뒷짐을 지고 무릎이 꿇렸다. 인민군은 “도망치면 이렇게 된다, 명령대로 하라”며 공개총살을 했다.
 
  걷는 동안 음식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 허기도 괴로웠지만, 추위가 더 견디기 힘들었다. 우리는 여름에 붙잡혀 와 대부분 반바지에 반팔 차림이었다. 9월 말이라 밤엔 많이 추웠는데 그 모습으로 험한 산을 넘고 강가에서 밤샘을 했다. 나 역시 집에서 입던 반팔 러닝셔츠에 얇은 반바지 차림이었다. 바지 주머니를 뜯어서 주머니 안감을 종아리 쪽에 붙이고, 양말도 뒤를 따서 발목 위로 길게 올려 신었다. 걷다가 가마니 같은 걸 발견하면 덮어썼다. 거지꼴이었다. 우리 일행 끝에는 여자도 200~300명 정도 따라오고 있었는데 그들은 노란 포대로 적삼과 치마를 만들어 입었다.
 
  맨발로 걸어가는 사람도 많았다. 걷다가 신이 벗겨져도 여럿이 함께 줄에 묶여 끌려가는 통에 신을 줍지 못하기 때문이다. 후에 평양 형무소에서 조우하게 된 아는 형도 벗겨진 신을 줍지 못해 맨발로 걸었다. 형의 발뒤꿈치는 전부 벗겨져 너덜너덜했고, 샛노란 부분에 구더기가 우글우글했다.
 
  형무소에 있다 보니 70~80세 된 노인들은 하체를 거의 못 쓰게 되었다. 젊은이들도 견디기 힘든 행군에, 노인들은 질질 끌려갔다. 뒤처지는 노인이 생기면, 행군을 잠시 멈춘 후 그들을 열외로 빼냈다. 남은 사람들은 다시 걸었다. 걸어가는 우리 등 뒤로 ‘탕탕’ 총소리가 들려왔다. 나를 포함한 젊은이들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렇게 노인들은 죽어나갔다. “하나님 아버지시여”, “이승만 대통령 만세”, “대한민국 만세”하는 그들의 마지막 외침이 뒤에서 메아리쳤다.
 
  그렇게 걸어 우이동에서 의정부를 지나, 동두천, 한탄강을 따라 수안까지 갔다. ‘이렇게 가다가 함경도에서 죽이려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마을에서 전 부치는 냄새가 코를 찌르는 걸로 봐서 추석이었다. 그때 개천에서 밤을 새우고 있었는데 인민군들이 우리에게 노래를 시켰다. 우리 일행 중에는 가수 이난영(李蘭影)씨의 남편인 김해송(金海松)씨가 있었는데 그때 그분이 굉장히 슬픈 노래를 불렀다. 여기저기서 훌쩍훌쩍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빨로 새끼줄을 끊고 대로로 뛰어들어 탈출
 
  수안을 지나 10월 10일쯤 평양형무소에 도착했다. 그때 숫자 집계를 했는데 2400여 명이 남아 있었다. 매일 밤 총살로 죽어나가던 사람들, 이래도 저래도 죽는다며 목숨 걸고 도망친 사람들. 납북 길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방증해 주는 숫자였다.
 
  서울형무소 방보다 약간 더 큼직한 감옥에 40명이 들어가 지냈다. 거기서 당시 대한통운 직원이었던 이사룡씨를 만났다. 그는 미군 라디오를 듣다가 반동이라며 붙잡혀 왔다고 했다. 우리는 “죽으나 사나 여기서 달아나자”는 이야기만 주고받았다. 3~4일 정도 지났을까, 자는데 꿈속에 아버지가 나왔다.
 
  “용일아… 용일아…, 가서 술 사와라.”
 
  아버지 뒤로 안개가 깔렸고….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이게 무슨 꿈일까….’ 기분이 묘했다. 그때 철창 밖으로 인민군들이 촛불을 들고 왔다갔다하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를 다른 곳으로 옮기려는지, 철창문을 열며 나오라고 했다.
 
  다른 방 사람들은 먼저 어디로 끌려간 모양이었다. 광장에는 앞의 방과 우리 방 사람들 80명만 남아 있었다. 인민군들은 우리를 4열종대로 세운 다음 뒷짐을 지게 하고 포승줄로 서로의 손을 엮었다. 서울서 갈 때와는 달리 쇠고랑도 차지 않고, 밧줄이 아닌 새끼줄로 묶기에 ‘멀리 안 끌고 가는구나. 어디 가까이 가서 우릴 묻어 죽이려는 모양이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사룡씨에게 “기회를 봐서 난 꼭 달아나겠다”고 다짐을 했다.
 
  총을 든 4명이 우리 전부를 인솔해 가는데, 따라가면서 보니 아는 장소였다. 서문교회 종각을 지나며, ‘이쪽으로 가면 숭실중학교 농구하러 가던 곳이고, 이쪽으로 가면 우리 이모네 집이 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기회였다. 어둠 속에 이빨로 새끼줄을 다 끊었는데도 주변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했다. “어이, 사룡이… 이것 좀….” 마지막 새끼줄은 이사룡씨가 끊어줬다.
 
  기마자세로 잠시 앉아 있다가 “옆으로 가, 일어섯!” 할 때 대열에서 이탈해 죽을 힘을 다해 뛰었다. “사람 달아납니다!” 앞뒤 사람이 소리쳤다. 한 사람이 도망치면 앞뒤에 있는 사람이 총살을 당하기 때문이었다. 등 뒤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차에 치여 죽든, 총에 맞아 죽든, 그대로 따라가서 죽든 마찬가지다’라는 생각뿐이었다. 트럭이 막 지나다니는 찻길을 달렸다. 찻길 건너 반대편 골목으로 도망치는데, 인솔하던 보초 두 명이 총을 쏘면서 쫓아왔다. ‘탕, 탕’ 하는 소리가 들렸다. 곧 힘이 다 빠졌다. 골목길로 들어가 ‘이젠 죽었구나’ 하며 담 뒤에 한참 엎드려 있으니 곧 잠잠해졌다. 내가 도망간 틈에 도망쳐 나온 이사룡씨가 어느새 옆에 다가와 있었다. 이사룡씨 뒤로 한 명이 더 따라왔는데 키가 크고 기골이 장대했다. 누구냐고 물으니 “황해도 신천 사람인데, 선생님들이 달아날 때는 뭔가 생각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나도 도망쳐 나왔다”고 했다. 그의 주머니에 있던 유리조각으로 남은 포승줄을 다 잘라냈다.
 
 
  팥밥 만 시래깃국, 며칠 두고 조금씩 먹어
 
  갖은 고생을 하고 긴장이 풀리니 앞이 다 노래졌다. 이젠 더 못 가겠다 싶었다. 아무 집에나 들어가서 무작정 도와달라 해볼까 했지만, 이사룡씨의 독려로 겨우 걸어 이모네 집을 찾아갔다. 누가 봐도 형무소에서 탈출한 거지꼴이었다. 혹시나 붙잡힐까 봐 파출소와 보초들의 눈을 피해 가며 이비인후과를 하는 이모네 병원에 도착했지만, 이모 가족은 이미 피란 간 상태였다. 뒷문으로 돌아가 발로 문을 꽝 차니까 20세 갓 될 법한 젊은 아가씨가 나왔다. 그러고는 우리 몰골을 보자마자 대문을 닫으려고 했다. 가뜩이나 더러운 모습이었는데, 오는 길에 길목마다 쌓여 있던 석탄가루를 밟아 엉망진창이었다. 아가씨가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내가 이모 이름을 대며 “이모 없느냐”고 하자 그제야 내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아가씨는 내 얼굴이 이모 얼굴 닮은 걸 인정하며, 여기 뒤채는 할머니와 자신이 같이 살고 있는 집이라고 했다. 그리고 말소리를 죽이며, “이 근처는 전부 공산당 집이니 알게 되면 우리 전부 죽는다”고 했다.
 
  이사룡씨와 나는 “날이 이렇게 환하게 밝아서 나가라는 건 우리 죽으라는 소리”라며 얼마간 숨겨 달라고 떼를 썼다. 다행히 인심이 좋았다. 그 집 할머니가 쪽문 쪽을 가리키면서 숨어 있으라고 했다. 거지가 안방 차지하는 격이었다. 너무 배가 고파서 뭐 먹을 것이 없나 하고 부엌을 살폈는데 여름에 냉면 해 먹고 남은 메밀가루가 손가락만큼 남아 있었다. 물에 반죽을 해 삶아서 이사룡씨와 조금씩 뜯어 먹었다. 그 후 쪽문으로 들어가 숨었다.
 
  할머니가 다음 날 아침에 시래깃국에 팥밥을 말아 숟가락 두 개를 꽂아 줬는데 그게 너무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났다. 한 번에 다 먹을 수 있을 만큼 배가 고팠지만, 얼마나 숨어 있게 될지 모르므로 며칠 동안 아껴 먹었다. 나흘쯤 지났을까. 군에 입대시킬 장정을 찾느라 인민군이 대문을 발로 꽝꽝 차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부엌칼을 들고 ‘죽으나 사나 둘 중 하나다’라는 각오뿐이었다. 다행히 들키지 않았다. 10월 19일 새벽 4~5시쯤,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바바바, 바바바” 하는 총소리가 났다. 점점 크게 들려왔다. 할머니가 “국군이 들어온대요, 국군이!” 하고 소리쳤다. 다리가 풀렸다.
 
 
  평양에서 맞은 국군, 만세 소린 안 나오고 눈물만
 
  집 안으로 나왔더니 이모부가 입던 여름 양복바지가 가장 먼저 보였다. 너덜너덜한 바지를 벗고 옷을 갈아입고 봤더니, 다리 힘이 너무 풀려 걸을 수가 없었다. 바깥에서 “만세! 만세!”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모부가 쓰던 지팡이를 짚고 거리로 나가니까 이미 국군은 지나간 상태였다. 나는 서 있지 못해 길바닥에 앉아서 사람들을 따라 “만세” 하고 외치려는데, 목청 높일 힘도 없었다. 눈물만 나왔다. 사람들은 곧 전부 집으로 돌아갔다. 나와 이사룡씨는 갈 곳도, 먹을 것도 없었다.
 
  그렇게 거지처럼 앉아 있으니까 한 무리의 남녀가 “젊은이들은 누구요?” 하며 말을 걸었다. 그들은 공산당에게 끌려간 가족을 찾으러 형무소에 갔다가 여기저기 핏자국만 보고 돌아왔다고 했다. 우리 사정을 듣고는 “웬만하면 집으로 모셔 밥이라도 한 그릇 해 드리고 싶은데 그럴 상황이 못 된다”며 우리 손에 평양 돈을 쥐여주었다. “적지만 이 돈으로 뭐라도 사 먹으라”, 울면서 돈을 건네는 통에 함께 울었다.
 
  우리는 하릴없이 이모 집으로 들어가 이모가 오는 걸 기다렸다. 3일 후 이모가 절간 아이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우리는 서로를 부여잡고 그동안의 고생을 이야기하며 한참을 울었다. 일단 씻어야 해서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머리를 빗으니까 이가 와글와글했다.
 
  그 후, 헌병대가 도움을 줘서 배를 타고 대동강을 건넜다. 서울 오는 트럭까지 얻어 타고 달리다가 나는 사리원(沙里院)에서 내리고, 이사룡씨는 서울로 갔다. 사리원에서 재령까지는 50리였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몸이었는데, 집에 간다는 사실이 너무 좋아서 몇 번 쉬지도 않고 단숨에 집에 도착했다.
 
  5개월 만에 도착한 집에는 거지꼴에 걷지도 못하는 내 모습에 놀라신 어머니 혼자 나를 맞이해 주셨다. 60세 넘은 어머니는 노인의 모습이었고, 교인이 돼 있었다. 아버지는 그 사이에 돌아가셨다. 상주가 없어 고모가 상주 노릇을 했다고 한다.
 
  나는 고향집에 돌아온 후 대소변을 받아내야 할 정도로 움직이지 못했다. 15일 정도 누워만 지냈다. 내가 돌아왔다는 소식에 어머니가 다니는 교회 친구들이 와서 “하나님 아버지, 용일이를 보살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며 기도해 주고 찬송가를 불러 줬다. 조금씩 걷는 연습을 하며 겨우겨우 걸어다녔다. 그렇게 한 달쯤 더 있는데 12월 4일 밤, 다시 전쟁이라며 중공군이 들어온다고 했다.
 
 
  미군 폭격에 달구지 끌던 소의 몸통만 남아
 
  기쁨은 잠깐이었다. 또 전쟁이 났다는 소식에 어머니와 함께 고향을 떠났다. 캄캄한 밤중에 140리를 걸어 해주로 가야 했다. 돈을 내고 이웃집 달구지에 어머니를 태웠다. 어두워서 서로를 잃어버릴까 봐 새끼줄로 어머니와 내 몸을 묶고 나는 졸면서 쫓아갔다. 30리를 걸었는데 어머니가 “더 이상 난 안 가겠다”고 했다. “오마이, 딸이 서울에 있지 않습니까? 여기서 죽겠습니까, 가겠습니까?” 하면서 억지로 끌고 갔다. 그렇게 50리를 걷던 중 “꽝” 하는 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미군 비행기가 투하한 폭탄이 길 한복판을 때린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길바닥에 엎드렸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나 홀로 엎드려 있고 그 많던 사람이 다 길 밖으로 피신해 있었다. “오마이, 오마이!” 하고 어머니를 찾으니까 안 간다던 노인이 40미터 바깥에 도망쳐 서 있었다. 나를 두고 혼자 도망간 게 미안했던지 저 멀리서 겸연쩍은 웃음을 지었다. 서로 웃었다. 연기가 지나가고 나서 보니 우리 집 달구지를 끌던 소가 머리에 직격탄을 맞아 몸통만 남아 있었다. 폭격 바람에 아이를 업고 가던 한 아주머니가 흙벽에 붙어 죽어 있었다. 처참한 모습이었다.
 
  남에게 돈을 주어 달구지를 끌게 하고, 다시 해주까지 걸었다. 해주 여관에 이틀 묵고서 연안까지 갔다. 거기서 고향 친구들을 만났다. 그중에는 장동필이라는 학교 선배도 있었다. 우리는 인천까지 가기로 의견을 모았다. 후배들, 장동필 선배 식구와 함께 배를 타고 강화도 초지리로 가 피신했다. 작은 초가집에 재령 사람 23명이 숨어 2~3일쯤 시간을 보냈다. 강화도도 안전하지 않아, 서울로 가야 한단 생각이 들었다. 밖으로 나가 보니 경찰들이 그들의 가족들을 태울 배 한 척만 남기고 우리가 타고 온 6척의 배를 다 태우고 부쉈다. 경찰들은 “우리가 배를 타고 간 뒤, 인민군이 남은 배를 타고 인천으로 따라 들어올 수 있으니까 없애야 한다”고 했다.
 
  우리 전부 강화도에 갇힐 판이었다. 경찰서는 5리 밖에 있었다. 나는 지팡이를 짚고 경찰서로 걸어가서 재령 사람 23명을 다 태워야 한다고 교섭했다. 더 탈 수 있는 인원은 5명뿐이라고 했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고향 사람들은 서로 자기가 타겠다고 난리가 났다.
 
  내가 교섭을 했기 때문에 나와 어머니는 다행히 배에 탈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내게 나머지 세 명을 고를 기회를 줬다. 나는 선배인 장동필 형의 가족을 택했다. 그러나 동필이 형의 가족 역시 6명이나 됐다. 동필 형은 노모(老母)를 강화도에 남기고, 아이들을 데리고 배에 오른다는 힘든 결정을 했다. 동필 형의 어머니는 떠나는 배를 보며 “너희라도 가서 잘살아라”며 울먹였다. 서운함보다도 자식 사랑이 우선인 어머니의 고결함에 우린 그쪽을 보지 못한 채 고개를 옷깃에 묻었다. 배는 물살을 잘못 타 중국 쪽으로 가는 바람에 한 달 만에 서울에 도착했다.
 
 
  태극기 들고 평양 가야 하기 때문에 난 죽을 수 없어
 
  서울에 도착한 이틀 후인 1월 1일, 나는 총알받이를 하는 방위군으로 또 끌려 나가게 됐다. 몸은 여전히 만신창이였다. “이제 진짜 죽었구나!” 끌려온 다른 사람들과 함께 돈화문에 대기하고 있는데, 원서동으로 통하는 문을 지키고 서 있는 보초병이 보였다. 그에게 몰래 “내가 이렇게 살아왔는데, 한번만 좀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보초병은 잠시 망설이더니 원서동으로 통하는 문을 열어 줬다. 그렇게 풀려났다. 그 뒤에도 여러 번 다시 잡혀 들어갔는데, 당시 유명했던 오제도 검사 동생 분의 도움으로 나이를 세살 올린 가짜 신분증을 만들어 도망쳤다.
 
  “더 이상 서울에 못 있겠다.” 나는 서울에서 벗어나 부산으로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누님 댁에 어머니를 맡기고, “부산에 가겠다. 어머니는 잘 계시라”고 했다. 어머니는 금가락지 20개를 내 손에 쥐여줬다. 그리고 내가 돌아서려니까 나 장가갈 때를 위해 준비해 놓은 비단까지 꺼내 줬다. “용일아, 부산 가서 잘살아라.” 그렇게 어머니가 준 물건들은 부산에서 날 버티게 했다.
 
  추억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아프고, 자다가도 몸서리쳐지는 그때의 기억은 이후 내 삶에서 잊히려야 잊힐 수 없는 쇠말뚝같이 박혀 있다. 지금도 밤에 자다가 깨면 ‘내가 이제 죽었나…’ 하고 생각할 정도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한참을 지나다 ‘뎅, 뎅’ 울리는 시계 종소리가 들리면 ‘김용일은 살아 있다’고 느끼곤 한다.
 
  평양형무소에서 만난 사람들, 총살로 죽었던 사람들, 돌아오지 못한 무고한 사람들…. 그들이 항상 내 꿈에 등장한다. 나는 살아남은 자로서의 죄책감에서 한시도 자유롭지 못했다. 내가 살아가는 단 한 가지 이유는 언젠가 태극기를 들고 평양으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정리=李彩炫 月刊朝鮮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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