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문제에 대한 과민반응, IT기술과 민족주의가 만났을 때 보여주는 ‘성숙함 결여’는 문제
‘세계화’는커녕 최소한의 개방조차 꺼리는 북한과 동행하기 위해 철저한 준비해야
베른하르트 젤리거 한스자이델 재단 한국사무소 대표
⊙ 1970년 독일 도르트문트 출생.
⊙ 獨크리스티안-알브레히트대 경제학과 졸업. 佛파리제1대학교(판테온 소르본) 경제학 석사,
獨크리스티안-알브레히트대 경제학 박사.
⊙ 獨크리스티안-알브레히트대 경제정책연구소 연구원, 獨비텐-헤르데케대 문화비교경제연구소
연구원,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조교수, 서울대 행정대학원 초빙교수 역임.
나는 독일 킬의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과정을 마친 후 김영삼(金泳三) 정부 시절부터 시행된 세계화(世界化) 정책 덕분에 한국에서 첫 경력을 쌓을 수 있었다. 당시 많은 국제대학원이 외국인 교수를 초빙하면 정부로부터 지원금을 받았는데, 나는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에 초빙되어 유럽 경제에 대한 강의를 맡게 된 것이다.‘세계화’는커녕 최소한의 개방조차 꺼리는 북한과 동행하기 위해 철저한 준비해야
베른하르트 젤리거 한스자이델 재단 한국사무소 대표
⊙ 1970년 독일 도르트문트 출생.
⊙ 獨크리스티안-알브레히트대 경제학과 졸업. 佛파리제1대학교(판테온 소르본) 경제학 석사,
獨크리스티안-알브레히트대 경제학 박사.
⊙ 獨크리스티안-알브레히트대 경제정책연구소 연구원, 獨비텐-헤르데케대 문화비교경제연구소
연구원,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조교수, 서울대 행정대학원 초빙교수 역임.
내가 한국에 첫 발을 디딘 것은 1998년 9월이었다. 바로 그 전 해에 금융위기가 아시아를 덮쳤다. 한국이 OECD에 가입했을 때 불었던 국제화에 대한 낙관주의는 막을 내렸다.
사실 많은 친구가 당시 위기국가 중 하나였던 한국으로 향하는 나를 말렸다. 한국의 경제는 몇 년 동안 무너져 있을 듯했다. 식당·술집·노래방에서는 ‘IMF 가격’이란 것을 제시했다. 그것은 좋은 흥정이기도 했지만, IMF(국제통화기금) 등 세계경제기구와 그들의 처방전(지역경제는 불합리하게 보였던)에 대한 분노의 표현이기도 했다.
世界化에 대한 적응력 놀라워
외환(外換)위기 이후 집권한 김대중(金大中) 정부는 글로벌 가치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이것은 말레이시아가 취했던 국가주의적 내지 아시아 중심의 접근과는 많은 부분에서, 예를 들면 아시아 금융위기 여파와 같은 부분에서 다른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동시에 이것은 다소 편파적인 접근이었다. 글로벌 가치를 적극 수용하는 한국의 전략은 한국을 세계의 시선 속으로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한국으로 끌어오는 것이었다. 이 전략은 한국을 세계의 다른 지역과 적극적으로 통합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한국을 ‘동(東)아시아의 허브(Hub)’, 즉 지역중심으로 만드는 것에 가까웠다.
이 ‘허브’란 아이디어는 거의 무궁무진하게 응용이 가능했다. 금융허브, R&D 허브, 의료관광 허브, 교육 허브…. 무엇이든 이름만 붙이면 됐다. 심지어 ‘동북아(東北亞) 균형자’론까지 나왔다.
실질적인 면에서 세계화는 세계에 대한 개방(開放)을 의미했다. 다른 어떤 영역보다 외국인 투자에 대한 개방이 현저했다. 부분적으로 이는 외환위기 직후 한국의 기업 가치가 낮아진 덕분이기도 했다. 외국인 투자로 인한 고통과 분노에도 불구하고 은행 부문과 같은 곳에서 개방 정책이 이어졌다. 글로벌 개방과 국제금융기구가 수용을 강요했던 고통스러운 처방전은 한국이 외환위기를 극복하면서 자연스럽게 정당화됐다.
한국에서 지낸 12년을 돌아보면, 한국이 짧은 기간 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이뤄냈는지 알 수 있다. 오늘날 한국은 확실히 글로벌 세계에 그 기반을 두고 있으며, 세계적 리더십을 열망하기까지 한다. 경제위기를 헤쳐나가는 한국의 능력은 다른 나라들의 감탄을 자아낸다. 한국은 수십억 달러 규모의 회사와 글로벌 브랜드를 만들어내고,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평균적으로 월등한 성장률을 유지하면서, 글로벌 경제위기에 매우 잘 대처하고 있다.
한국은 경제 못지않게 중요한 ‘문화적 세계화’라는 ‘연성 사안(軟性 事案·soft issues)’과 관련해서도 긍정적인 동력을 많이 갖고 있다. ‘한류(韓流)’는 의심의 여지 없이 동남아(東南亞) 및 동북아 지역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한국이 OECD의 개발원조위원회(DAC)나 G20의 일원이 되어 글로벌 리더십을 행사하게 된 것은 대단히 상징적인 일이다.
IT기술과 민족주의가 만났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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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는 IT기술과 민족주의가 만났을 때, 성숙함이 결여된 한국사회의 단면을 보여주었다. |
반면 한국에는 이곳에서 상당 기간 살았고, 한국이 이룩한 성과를 존경하는 외국인조차도 당황하게 만드는 문제들이 있다.
거의 정기적이다시피 물리적으로 싸우는 국회의원들의 모습은 재미있을지 몰라도, 확실히 한국의 나쁜 모습이다.
역사 문제와 관련된 과민반응도 문제다. 지난 정부 시절 ‘각박한 역사전쟁’ 운운하던 것과 비교할 때, 현(現) 정부가 인접 국가와의 역사 갈등, 혹은 지난 시절의 한국 역사와 관련해 합리적이고 미래지향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IT 등 기술 리더십이 민족주의적인 태도와 만날 때 나타나는 결과를 보면, 한국을 ‘성숙한 사회’라고 말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한국의 존엄성을 침해당했다고 생각할 때 네티즌들이 보여주는 흥분은 그 좋은 예다. 그것이 별로 중요치 않은 출신에 대한 비판 때문이건, 스포츠경기에서 한국 선수가 받은 부당한 대우 때문이건 간에, ‘공공(公共)의 적(敵)’으로 찍힌 사람의 주소나 얼굴을 인터넷에 공개하거나, 그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2008년 서울 도심(都心)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2MB(네티즌들이 이명박 대통령을 비하하는 말)가 내건 모든 것’에 반대하는 대규모 집회로 마비됐다. 시청률을 좇는 무원칙한 미디어들의 위험한 연합, 선거에서 잃은 것을 거리에서 찾으려는 정치인, 이념편향적인 교사들에 의해 선동된 순진한 학생…. 그들은 급속하게 발전한 한국사회가 얼마나 성숙함이 결여된 사회인가를 보여줬다. 정부는
한국인의 기술낙관주의
내가 관찰한 바로는 한국에서는 기술낙관주의가 어떤 의심이나 주저함(내가 유럽인으로서 익숙한)도 없이 세계적 과제들에 부응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가 내세우는 ‘녹색성장’은 기술혁신과 배짱으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성공적인 전략의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녹색성장’은 하나의 뛰어난 레토릭(수사·修辭)으로 시작됐을지 모르지만, 이미 단순한 마케팅 기법을 뛰어넘었다(‘녹색성장’의 몇몇 요소는 그렇게 녹색답지 않지만 말이다).
한국의 장래는 대체로 긍정적이다. 한 가지 부정적인 요소가 있다면, 남한이 북한보다 월등하게 발전한 결과 남북한 간의 격차가 점점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그렇다고 한국이 발전하지 말았어야 했다거나, 지나치게 발전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20년 전 독일이 통일됐을 때, 동서독 간의 경제적·문화적 격차는 오늘날 남북한에 비해 훨씬 적었다(부분적으로 이는 대부분의 동독인이 서독 TV와 라디오를 상대적으로 거리낌없이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독일인은 통일 후 20년간 동서독 간의 문화적 차이 때문에 예상치 못한 어려움을 겪었다. 탈북자(脫北者)들에게서 보듯, 이 점에서 한국은 독일보다 더 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때문에 한국이 글로벌 경제체제 속에서, ‘세계화’는커녕 최소한의 개방조차 꺼리는 북한과 동행하기 위해 철저한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이 글은 저자 개인의 의견이며, 한스자이델 재단의 입장과는 무관(無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