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정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투명성’과 ‘책임감’ 갖고 현장에 뛰어드는 행동력 필요
글로벌 스탠더드를 표방하는 많은 미디어가 독자와 시청자의 신뢰를 잃고 있다
오사와 분고(大澤文護) 마이니치신문 서울지국장
⊙ 1957년 도쿄(東京)출생.
⊙ 1980년 마이니치신문(每日新聞)입사. 同신문 외신부 근무(1992~97)·서울특파원서울지국장
(1997~02)·외신부부장(2002~04)·필리핀 마닐라지국장(2004~08)·외신부편집위원(2008~09) 역임.
現 마이니치신문서울지국장.
⊙ 취재분야: 한반도 및 동남아시아 정세, 남북통일 문제
현재의 전쟁·분쟁 보도는 영상 중심으로 전해지고 있다. 걸프전(戰)에서 미국 TV가 바그다드 공습을 세계에 생중계하고, 미사일에 장착된 카메라로 목표 지점 도달까지 촬영한 영상 또한 세계 곳곳에 퍼졌다.글로벌 스탠더드를 표방하는 많은 미디어가 독자와 시청자의 신뢰를 잃고 있다
오사와 분고(大澤文護) 마이니치신문 서울지국장
⊙ 1957년 도쿄(東京)출생.
⊙ 1980년 마이니치신문(每日新聞)입사. 同신문 외신부 근무(1992~97)·서울특파원서울지국장
(1997~02)·외신부부장(2002~04)·필리핀 마닐라지국장(2004~08)·외신부편집위원(2008~09) 역임.
現 마이니치신문서울지국장.
⊙ 취재분야: 한반도 및 동남아시아 정세, 남북통일 문제
걸프전 등을 겪으면서 일본에는 이러한 기법이 미디어가 전쟁·분쟁을 보도하는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듯한 분위기가 있었다. 정말 그러한가? 아무리 속보로 전한들, 아무리 상세하게 보도한들 현장에 있는 사람들의 숨소리와 마음이 전해지지 않는다면 훗날 후세들에게는 단지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하는 센세이셔널리즘으로 비치지는 않을까?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필자는 마이니치신문(每日新聞) 외신부에서 때로는 특파원으로서 분쟁 지역의 현장을 취재했고, 때로는 본사 데스크에서 전장(戰場)에서 동료가 보내오는 원고를 받아 보았다. 지금도 국제 보도 현장에서 취재 활동을 하는 기자의 한 사람으로서, 고민 끝에 도달한 하나의 결론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라크의 목소리
취재 조건이 열악한 현장으로 향할 때마다 항상 머릿속에 떠올리는 기사가 있다. 2003년 3월, 당시의 미국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 전쟁을 개시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마이니치신문과 제휴 관계를 맺은 조선일보에서 워싱턴 특파원으로 근무하던 여기자 강인선(姜仁仙)씨는 미군을 동행 취재하는 임베드(embed) 프로그램에 참여, 종군기자(從軍記者)로서 현지에 파견되었다.
마이니치신문은 강 기자가 현지에서 조선일보 본사로 보낸 종군기를 동시 게재하기로 했고, 마이니치 신문 외신부 한반도 취재팀이 번역을 담당했다. 당시 마이니치신문이 게재한 강 기자의 종군기 제목을 무작위로 몇 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약혼자는 전선으로, 여군은 울었다 ▲숨도 쉴 수 없는 모랫바람, 자동차 행렬 이어져 ▲해방군? 주민들은 무관심 ▲끝까지 보고 싶은 생각과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반반 ▲손 씻을 물도 없어 손끝이 갈라져 ▲동물 이하의 생활, 美 기자는 귀국 ▲일주일에 끝나다니 웃기는 이야기 ▲마지막 기사를 어떻게 쓸까 ▲옅어진 공포, 되살아나는 일상 ▲사막에 핀 분홍 장미 두 송이 ▲40일째, 전장을 뒤로하며 온종일 울었다.(마이니치 신문에 게재된 제목임-편집자 注)
어느 것도 대규모 전투나 역사적 사건을 그린 르포는 아니었지만, 연재 기간 중 마이니치신문 본사(本社)에는 독자들의 수많은 편지와 메일, 전화가 쏟아졌다. 미국의 거대 미디어가 쏟아내는 미 정부·미군 관련 정보에서는 결코 접할 수 없었던 미군들의 불안한 심정, 이라크 일반 민중의 비참한 모습들,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중심에 세운 르포르타주 기법에 ‘신선한 감동을 느꼈다’는 일본 독자들의 호평이 쇄도했다.
이라크 전쟁이라는 대규모 전쟁 종결 선언 1년 후, 마이니치신문 1면 칼럼 ‘여록(餘錄)’에 다음과 같은 글이 게재됐다.
<‘그로부터 아직 1년도 채 흐르지 않았구나’라고 생각했다. 작년 3월 20일 미군의 바그다드 공습과 함께 이라크 전쟁이 시작되었다. 사이렌, 총성, 연기, 뿌옇게 변해 가는 하늘. TV에서 바그다드의 심상치 않은 광경이 흘렀다.
▲당시 미군 보급부대에 종군했던 한국 조선일보의 강인선 기자의 르포가 본지에 게재되었다. 모래 돌풍 속에서 적 그림자에 떨며 바그다드를 향해 떠도는 소부대. 지휘관, 병사들, 그리고 ‘날개가 있다면 도망치고 싶다’고 외치고 싶은 기자 자신의 전장 심리가 휴대전화로 전해 오는 글 속에 배어 있었다. (중략) 바그다드를 뒤로할 때 강인선씨는 미군 장교에게 물었다. ‘(대량살상무기가) 만일 존재하지 않는다면 대체 무엇 때문에 이 참혹한 전쟁을 해야만 했는가?’ 무력으로 다른 나라를 공격할 수 있다는 생각은 ‘머리로는 이해해도 마음은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반전주의자도 박애주의자도 아니지만 그런 생각이 든 것은 ‘자신이 한 번도 무력으로 다른 나라를 제압한 일이 없는 약한 나라의 국민이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일본인도 ‘무력으로 다른 나라를 제압하지 않은 나라’가 되겠다고 반세기 전 헌법으로 다짐한 국민이었다.>
강 기자의 종군기는 국경을 넘어 일본 독자들과 칼럼니스트의 마음을 울리는 세계성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파그라스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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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바라본 파그라스씨의 바나나 농장. |
강 기자의 종군기에 비하면 보잘것없지만, 필자도 이전에 근무했던 필리핀에서 잊지 못할 취재를 경험했다. 민다나오 섬의 독립을 주장하는 이슬람교 과격파 세력이 정부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이 섬의 내륙 지방은 지금도 외국인 기자가 출입하기에는 매우 위험한 지역이다.
그러나 그곳에 이슬람 주민들을 새로운 사상으로 이끌고 있는 젊은 리더가 있다는 이야기에 꼭 한 번 만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지인을 통해 연락을 취했더니 민다나오 섬 최대 도시인 다바오시 공항에서 기다리라는 연락을 받았다.
2008년 1월, 땅 위의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한 남국(南國)의 태양이 지평선 위로 얼굴을 내밀기 직전인 새벽, 공항에서 소형 단발 비행기가 필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부(副) 조종석에 앉아 있던 티셔츠와 청바지 차림의 건장한 남성이 돌아보며 뒷좌석에 앉은 내게 “어서 오십시오”라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가 바로 비즈니스를 통해 이슬람 사회의 발전과 개혁을 이루자고 주장하는 젊은 지도자 파그라스(Pagras, 당시 47세) 씨였다.
16세기 필리핀은 대항해시대의 패자(覇者)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다. 그때까지 민다나오 섬에는 이슬람교도의 유력 일족이 ‘영주’로 군림하여 섬을 ‘반사 모로(Bansa Moro: 이슬람의 나라)’라 부르며 통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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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월8일, 필리핀 반정부 세력의 근거지인 민다나오섬에서 만난 파그라스씨(가운데 흰옷). 이슬람 교도의 지도자인 그는 “무력투쟁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며 이슬람교도와 전사들을 데리고 바나나 농장을 개간했다. |
그 유력 일족의 자손인 파그라스 씨는 1997년 미국, 이탈리아, 사우디아라비아 각국의 자본과 제휴하여 민다나오 섬 내륙에 있는 고향 다투 파그라스(Datu Pagras) 마을에서 1600ha의 바나나 농장 개발에 착수했다. 관개(灌漑)에는 세계 최고로 일컬어지는 이스라엘의 기술을 도입했다. 바나나 농장에서 종사하는 노동자는 약 2000명. 그 80%는 현지 이슬람교도다.
이슬람교도 유력자로서 이슬람 전사들을 배출해 온 파그라스가(家)의 당주(當主)가 왜 미국 자본을 도입하고 이슬람교도가 가장 적대시하는 이스라엘의 기술까지 도입해서 바나나 농장을 시작했을까?
“결국 무력 투쟁과 정치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가족들은 하나 둘 죽어 갔고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가난했다. 이슬람 사회의 구세대들은 내가 하는 일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빈곤이 해소되면 싸울 이유도 사라진다. 생활이 윤택해지면 교육도 받을 수 있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다. 구체적인 성과는 지금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슬픔과 권력 투쟁만 일삼는 정치에 대한 절망이 그를 분쟁에서 비즈니스 세계로 이끌었다.
‘정부군’ 대(對) ‘이슬람 무장세력’. 그러한 기존의 시각만으로 민다나오 문제를 바라보았던 과거 기사나 정부 견해로는 상상할 수 없는 젊은 지도자의 도전이 민다나오 섬의 깊은 숲 속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그 도전에 동참하는 많은 이슬람 주민이 있었다. 필자에게는 그러한 사실을 앞으로도 세상에 전해야 할 책임이 있다.
퍼스널 스탠더드
글로벌 스탠더드란 무엇인가? 필자가 항상 곁에 두고 사용하는 일본 국어사전 <고지엔(廣辭苑)>(岩波書店 발행)에는 ‘세계적인, 지구 규모의’ 라고 되어 있다. 영어가 지배하는 국제사회에서 비(非) 영어권 미디어가 ‘글로벌 스탠더드’가 되기란 쉽지 않다.
그러면 모든 기자가 영어를 구사하여 영어로 기사와 정보를 발신하면 세계의 중심이 되고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아니, 그것은 단지 꿈에 불과하다.
그런 일에 힘을 쏟기 이전에 글로벌 스탠더드를 표방하는 세계의 많은 미디어가 독자와 시청자의 신뢰를 잃고 있다는 현실을 생각해야 한다. 많은 독자가 신문을 읽는 것 이상으로 시간을 들여 인터넷 정보 검색에 열중하고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사람들이 무엇에 관심을 갖는지는 인터넷을 통한 블로그나 유튜브의 동화상(動畵像)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우리 기존 미디어가 독자와 시청자들의 신뢰를 얻기 위한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인터넷 정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투명성’과 ‘책임감’으로 강 기자와 같이 현지에 뛰어드는 행동력이 필요하다. 기존 관념으로 흐려진 눈을 씻어내고 민다나오 섬 숲 속으로 향하는 순수함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기자의 존재에서 비롯된 기사는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필터를 통해도 절대로 퇴색하지 않는 빛을 갖는다.
경제발전과 국가의 영향력 확대를 과시하며 그 힘을 배경으로 막대한 자본을 쏟아 부어 최첨단 통신기기를 갖추고 정부나 권력자와의 연결고리를 이용하여 서둘러 글로벌 스탠더드를 확립하고자 발돋움하는 것은 위험한 생각이다. 먼저 자신의 발로 현장을 보고 자신의 감성으로 진실을 찾으려는 ‘퍼스널 스탠더드’를 갖춘 기자를 키워 내는 일이, 그게 어느 나라든 상관없이 미디어가 지향할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韓日 미디어의 글로벌 스탠더드
마지막으로 필자가 한반도 문제에 대해 공부한 이래 은사로 모시고 있는 정치학자 이치카와 마사아키(市川正明) 선생을 소개하겠다.
현재 도쿄에 거주하는 이치카와 선생님은 한국에서 태어나 전후(戰後)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일본에서 연구자로서의 삶을 선택한 분이다. 80세를 맞이한 이치카와 선생님은 다방면에 걸친 업적을 남겼다.
특히 일본의 원훈(元勳),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안중근(安重根)의 <동양평화론> 초고를 발견하여 널리 세계에 소개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선생님의 업적이 없었다면 안중근 사상의 핵심은 후세에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10여 년 전에 뇌출혈로 쓰러졌으나 지금도 투병 생활을 하며 한일(韓日)관계사와 관련된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근본 자료를 밝혀냄으로써 문제의 본질을 계속해서 규명해 가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진정한 상호 신뢰는 불가능하다. 한일 양국은 그 중요성을 진지한 자세로 직시해야 한다”라는 메시지를 세상에 던지고 있다.
올해는 한일병합 100년이 되는 해다. 우리 미디어에 몸담은 사람들은 선구자의 생각을 가슴에 새기고 양국의 대립과 증오를 부추기는 일 없이 상호 이해와 신뢰 구축을 위해 최대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것이 한일 양국 미디어의 ‘글로벌 스탠더드’를 키우는 커다란 토대가 된다. 필자는 그렇게 스스로 다짐하며 하루하루 취재 활동에 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