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개 강소국에서 정치는 助演. 정치세력이 분열되거나 파당이 생기면 예외 없이 정치권 단결
⊙ 유럽 강소국들이 약육강식의 정글에서 번영할 수 있었던 이유는 프로 정신으로 무장한 문화 덕분
金成進 동덕여대 교양교직학부 교수
⊙ 1959년 경북 선산 출생.
⊙ 대구 계성고, 고려대 영문학과 및 同 대학원 정치외교학과 졸업. 헝가리 학술원 정치학 박사.
⊙ 유럽 강소국들이 약육강식의 정글에서 번영할 수 있었던 이유는 프로 정신으로 무장한 문화 덕분
金成進 동덕여대 교양교직학부 교수
⊙ 1959년 경북 선산 출생.
⊙ 대구 계성고, 고려대 영문학과 및 同 대학원 정치외교학과 졸업. 헝가리 학술원 정치학 박사.
- 벨기에는 작은 것이라도 늘 세계 최고를 지향한다. 특히 초콜릿과 맥주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우리나라는 1996년 국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면서 선진국 꿈을 꿨다. ‘선진국 클럽’이라 불린 OECD에 가입하자마자 외환위기에 헛발을 디뎌 그대로 산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우리는 절치부심 지난 10여 년을 부지런히 돌을 굴려 올렸지만 여전히 선진국 문턱에 머물고 있다. 시지프스의 악몽을 연상케 한다.
그간 주요 경제지표를 절대치로 놓고 보면 개선되긴 했다. 그런데 OECD 국가들과 비교하면 제자리걸음이거나 뒷걸음질이었다. 지금은 중턱을 오르내리며 숨을 고르고 있는 형세다. 다시 아래로 떨어지느냐 정상을 밟을 수 있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다.
영국의 정치가 처칠(1874~1965)의 정치 초년병 시절 이런 일이 있었다. ‘당선 확실’로 생각하던 선거에서 낙선해 주저앉고 말았다. 집안에 틀어박힌 채 그저 창 밖만 멍하니 보고 있었는데 건너편 건축 공사장에서 벽돌공이 일하는 게 보였다. 한 장, 한 장 천천히 벽을 쌓아가는 듯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큰 담벼락이 나타났다. 처칠은 무릎을 탁 쳤다. 기초부터 차근차근 다져야 결국 정상에 오를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다.
사실 대한민국은 작고 촘촘한 벽돌이 아니라 공장에서 급조한 대형 시멘트 블록으로 성큼성큼 지어 올린 집이다. ‘압축 성장’으로 불리는 이유다. 밑바닥에서 중진국으로 치고 올라오는데엔 더없이 완벽한 모델이었다. 그러나 높이 지을수록 곳곳에 바람이 숭숭 불어 들어오고 물이 샜다. 빨리 지을 수는 있었지만 높이 쌓을수록 약해졌다. 그게 바로 지금 우리의 모습이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다. 벽돌공의 지혜를 구해야 한다. 작지만 강한 유럽의 작은 나라들은 우리의 모범이 될 진정한 벽돌공들이다. 역사도 환경도 우리와 전혀 다르지만 그들의 정신을 접목해 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어떤 재난과 위기도 극복할 비책을 이미 역사의 지혜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바이킹 3형제인 덴마크·스웨덴·노르웨이, 그리고 베네룩스 3국으로 불리는 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에서 벽돌공의 지혜를 구했다. 초미니 국가이면서도 세계일류가 된 모나코와 안도라도 뒤져보았다. 작지만 강한 8개의 유럽 국가를 통해 대한민국이 진정한 선진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조건을 찾아보았다.
분열하면 망한다
8개 强小國(강소국)은 유럽의 남쪽 끝에서 북쪽 끝까지 널리 퍼져 있다. 한 울타리에 사는 사람들조차 3만명(모나코)에서 1600만명(네덜란드)까지 제각각이지만 비집고 들어가 보면 약속이나 한 듯 국가를 움직이는 정신은 거의 같다.
그 첫 번째 비결은 바로 정치의 역할이다. 본래 정당정치의 목적은 정권창출이다. 정권은 권력을 쥐어주며 정치인은 그 권력을 향유한다. 그래서 정치게임은 生死(생사)를 건 생존게임의 형상을 띤다.
그런데 이들 8개 강소국에서 정치는 主演(주연)이 아니라 助演(조연) 역할에 충실하다. 경제를 잘 돌아가게 하고 국민 복지를 높이는 데 더욱 열심이다. 조정과 통합의 ‘그림자 역할’에 사활을 건다. 정권을 잡기 위해 정치활동을 하는 건 맞지만 국민을 더 잘살게 하고 더 편안하게 해 주는 치열한 경쟁에 더 가깝다.
정치가 이렇게 된 데엔 역사적으로 지녀온 위기의식의 역할이 컸다. 내부 정치세력이 분열되거나 파당이 생기면 작은 나라로서는 예외 없이 주변 강대국 침략의 빌미가 됐다. 그 뼈저린 역사의 교훈이 정치의 모습을 바꾸게 했다.
게다가 어떤 특정 정당도 유효득표의 50%를 얻는 경우가 거의 없어 연립정부 구성이 일상사가 됐다. 그러다 보니 주요 이슈에 대한 합종연횡이 상례화됐고 대화와 타협을 통한 의제 설정·집행이 톱니바퀴 물려 돌아가듯 순조롭다.
한국 정치는 불행히도 사회갈등과 분열의 진원지로 악명을 떨쳐 왔다. 정치의 파장으로 사회가 분열하고 국민 경제가 휘청거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가장 큰 이유는 정치권의 위기의식 불감증이다.
한국사회 곳곳에 내재한 갈등 구조가 지뢰처럼 묻혀 있지만 정치인들은 애써 이를 외면한다. 오히려 갈등구조를 정치에 역이용하기도 한다. 국가의 백년대계보다는 자신의 차기 선거와 관련된 치적 쌓기에 더 열심이다.
한반도를 둘러싼 위기와 기회에 대한 냉정한 정치권의 각성이야말로 지금과 같은 일방적 대립과 주장의 정치문화를 바꿀 수 있다. 대한민국의 발전과 국민의 진정한 복리를 위해 경쟁하는 새로운 정치문화 구축 없이 4만 달러의 선진국 진입은 여전히 높은 장벽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갈등해결 시스템 완비
인간이 사는 곳엔 늘 갈등이 있게 마련이다. 특히 21세기엔 국내문제뿐만 아니라 외교적 사안을 놓고도 국민 간에 심각한 갈등이 생긴다. 유럽의 8개 강소국에서도 끊임없이 문제가 생기고 갈등이 발생한다.
그런데 우리와 다른 게 하나 있다. 갈등을 통합·조정하는 관행과 제도가 완비되어 있는 것이다. 개인, 기업, 사회, 국가라는 각각의 차원에서, 그리고 갈등의 심화 정도에 따라 단계적 처방이 사회관행과 법·제도로 정비되어 있다.
유럽에서도 내부 갈등이 심했던 스웨덴에선 국가조사위원회(SOU)제도라는 갈등해결 시스템을 만들었다. 어느 정당이 법안을 제출하더라도 반드시 조사위원회를 가동해 법안의 찬반에서 파급효과, 그리고 미래에 이르기까지 모든 조사를 도맡아 하는 기관이다. 전문가도 포함되고 당연히 일반 국민들의 의사도 충분히 반영한다.
勞使(노사) 갈등에 관한 한 룩셈부르크는 세계 최고의 해결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노사 갈등을 피하기 위한 2중, 3중의 해결 장치가 핵심이다. 1921년 이후 지금까지 노사분규는 한 건도 보고된 적이 없다. 철강산업의 침체로 심각한 경제 위기가 발생했고, 철강회사 종업원들이 회사에서 내쫓기는 상황이 발생한 1970년대에도 파업은 없었다.
기업단위, 산업 부문, 정부와의 ‘勞使政(노사정) 회의’에 이르기까지 단계별로 중재절차가 철저히 가동된다. 심지어 경영자들의 상공회의소를 상대하는 노동자회의소까지 구성되어 있다. 룩셈부르크가 국민소득 10만 달러에 도달하게 된 기반이었던 금융허브 산업도 무분규의 역사를 써온 갈등해결 시스템이 그 비결이었다.
사회 곳곳에서 끊임없이 끓어오르는 갈등을 적절하게 해결해 나가는 제도화, 그리고 이를 지켜나가는 문화의 정착이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이와 같은 갈등구조를 해결해 나가는 제도와 문화가 정착되지 못한다면 선진국의 꿈은 사상누각이 될 수도 있다.
국제투명성기구(TI)가 발표하는 한국의 부패지수는 전 세계에서 매년 40~50위권을 맴돌고 있다. 투명성은 곧 사회의 효율성과 상관관계다. 사회가 투명하지 못하면 인재의 적재적소 배치도 거의 불가능하다. 자원과 인재의 낭비가 도를 지나칠 수 있다. 대부분의 후진국이 항상 부패지수 상위 랭킹을 차지하는 이유다.
유럽의 8개 강소국은 예외 없이 유리처럼 투명한 사회를 만들었다. 2008년 국제투명성기구(TI)가 발표한 부패지수를 보면 덴마크와 스웨덴 등이 9.3으로 가장 깨끗한 나라에 속한다.
노르웨이의 경우 북해유전이나 수력발전 등 기간산업을 이끌어가는 기업은 공기업이다. 노르웨이 경제를 좌우하는 게 공기업이다 보니 정부의 리더십과 투명성이 전제되지 않으면 재앙이 될 수도 있다. 어떤 국영기업체도 투명하고 부정이 낄 소지가 없다. 정부의 운영도 마찬가지다. 유럽 강소국들의 일류경제 뒤에는 투명한 정부와 투명한 기업, 그리고 정직한 개인이 있다는 평범한 사실을 깨닫게 해 준다.
앞서가는 공교육 시스템
유럽 8개국 정부는 전 세계에서도 가장 많은 公(공)교육비를 지출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특히 덴마크·스웨덴·노르웨이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6%를 교육비로 지출해 세계에서 가장 높다. 이들 국가의 교육은 최근 독일이 벤치마킹할 정도로 앞서가고 있다.
한국의 경우 공교육비 부담률은 4%대지만 민간 부담률이 거의 3%에 달한다. 게다가 私(사)교육비는 세계에서 가장 높을 정도다. 시간이 지날수록 공교육은 황폐화되고 사교육시장은 팽창하고 있다.
게다가 이들 8개 강소국의 교육제도는 끊임없이 진화하며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손질해 가고 있다. 교육이 살아서 숨 쉰다. 교육이 다른 부문을 앞서나가며 우수 인재를 계속 공급해 주고 있다.
언어 교육만 봐도 교육의 질이 다르다. 룩셈부르크는 ‘완벽한 다중언어 사회’다. 50만명도 되지 않는 인구가 고유어인 레체부르크語(어)를 그대로 쓰며 보존하고 있다. 프랑스어와 독일어, 여기에 영어까지 모국어 수준으로 쓴다. “영어를 배우려면 네덜란드로 가라”는 얘기도 있다. 영국보다 영어를 더 잘 가르칠 만큼 교육이 우수하다는 설명이다.
게다가 우수한 공교육제도는 富(부)의 대물림, 빈곤의 대물림도 막아준다. 기회의 나라라는 미국과 비교해 보면 명확하다. 부모세대와 자식세대 간의 소득이 100% 일치할 경우를 1로 하고 완전히 부(혹은 가난)가 역전될 경우를 0으로 상정하면 미국은 0.54로 부모의 부나 가난이 자식에게 대물림될 확률이 50%를 넘는다.
그런데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등 북유럽은 0.2에 머물렀다. 부모가 부자든 또는 가난하든 부모와 자식의 세대 간 貧富(빈부) 대물림이 가장 낮은 사회다.
우리의 교육은 처음부터 끝까지 대학입시를 맴돈다. 수능시험이 교육의 목적이 되다 보니 21세기형 창의적 인재양성은 구호에 불과하다. 게다가 한국의 대학입시 승패는 아버지의 경제력, 어머니의 정보력이 좌우한다는 볼멘소리마저 나온다.
모든 국민이 머리를 맞대고 진지하게 다시 교육개혁을 고민해야 한다. 정부는 한국의 전체 교육시스템을 개혁할 수 있는 장기 플랜을 마련해 나가야 한다.
프로정신이 살아 있는 사회
유럽 강소국들이 약육강식의 정글에서 살아남고 번영할 수 있었던 것은 전문가 정신으로 무장한 문화 덕택이다. 프로정신이 모든 분야에 뿌리 내렸다. 정치도 전문가들이 맡고 경제도 전문가들이 운용한다. 다른 나라를 상대하는 외교 분야의 전문가들은 말할 나위도 없다.
전문가들은 유연한 사고와 전략적 행동을 전제로 극단의 國益(국익)을 추구한다. 그들에게도 진보와 보수, 좌와 우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그들의 진정한 차이는 전략적인 것이지 목적의 차이는 거의 없다. 처음도 끝도 강한 나라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그것은 이들 나라가 역사에서 배워 체득한 지혜이다.
벨기에는 작은 것이라도 늘 세계 최고를 지향한다. 초콜릿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수제품은 모두 벨기에에서 만들어지거나 벨기에 匠人(장인)들의 손을 거쳤다. 벨기에 맥주는 맛으로도 세계를 정복했지만 시장 점유율로도 세계 최고다.
중세시대인 1366년 창업된 인터브루는 최근 미국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버드와이저 생산회사 안호이저-부시까지 집어삼켰다. 이 회사의 맥주시장 세계 점유율은 25%나 된다. 한국의 세 개 맥주회사 가운데 두 회사도 이 회사 계열사다.
한국에 전문가정신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정치 과잉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정치가 모든 분야의 우위에 있어 전문가들이 설 자리가 없다. 교수, 공무원, 기업인, 언론인, 법조인에 이르기까지 각 분야의 적지 않은 전문가들이 선거철만 되면 유력한 대통령 후보 사무실을 기웃거리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정치권력이 모든 것을 다 해결할 수 있다는 前(전) 근대적 사회의 유산이 아직도 한국에 살아 있다.
더욱이 地緣(지연), 學緣(학연), 血緣(혈연)이라는 전근대적 커넥션이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자신의 적성에 맞는 대학보다는 이른바 ‘좋은 대학’을 고집하는 이유도 실은 그 대학이 가진 학연에 기대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프로정신이 살아 있지 못하다는 방증이다.
프로페셔널이 살아남기 힘든 사회가 진정한 선진국이 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 정치에서 경제에서 그리고 사회 각 분야에 이르기까지 진정한 전문가 정신이 고취되어야 한다. 각 분야의 1등이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프로정신만이 4만 달러의 선진국을 약속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유럽 8국은 역사와 환경이 우리와는 완전히 다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같이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처음으로 개척하며 자신들만의 발전 모델을 만들어왔고, 또 성공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이들 8국 중 어떤 나라도 우리가 그대로 따라갈 전례가 될 수 없다. 다만 그들이 가진 지혜에서 우리에게 적합한 것을 가져와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비약적 경제발전을 이룩했던 1960~70년대 한국식 모델처럼 이제 4만 달러의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새 모델을 만들어 도전할 때다. 그런 점에서 유럽의 8개 강소국의 지혜는 새 모델을 논의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