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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년 8월호

宣鍾泰 청도 남산호텔 사장

한국식 호텔문화로 중국인들 사로잡아

金容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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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1월 오픈 이래 평균 객실 점유율 65%
4성급 호텔이지만 내부시설 5성급 능가한다는 평
선종태 청도 남산호텔 사장
  칭다오(靑島) 국제공항에서 시내 쪽으로 15분 정도 달리면 최근 한국인들이 투자한 공장들이 속속 입주하고 있는 센양구(城陽區) 위황링(玉皇)공업구가 나타난다. 이 공업구의 한복판 대로변에 아담하게 서 있는 건물이 남산호텔(사장 宣鍾泰 )이다.
 
  칭다오에 한국인이 투자하여 설립한 최초의 호텔인 남산호텔은 4성급 호텔로서 총 건평 8739㎡의 5층 건물에 객실은 총 71개(딜럭스 스위트룸 16, 딜럭스 더블룸 46, 스위트룸 9). 1층에는 고급 한식당과 일식당, 커피숍이 있고, 2층에는 400석 규모의 행사장과 세미나룸이 마련되어 있다.
 
  로비에 들어서면 ‘보토치노’라는 이탈리아 자연 대리석을 사용하여 시공을 한 덕에 중후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宣鍾泰(선종태) 남산호텔 사장은 “호텔 내부 장식을 할 때 63빌딩의 인테리어를 담당한 분을 초빙하여 한국의 정서가 물씬 풍기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그의 설명이다.
 
  “호텔룸의 가구는 모두 품격 높은 원목가구를 들여놓았고 벽지와 벽지를 바르는 풀, 커튼, 실내장식품들도 모두 한국에서 최고급품들만 엄선해다가 썼습니다. 또 전 객실을 온돌 난방시스템으로 시공하여 최대한 편안하게 휴식할 수 있도록 배려했기 때문에 칭다오에서 최고로 치는 5성급 샹그릴라 호텔보다 객실 수준이 더 낫다는 평을 듣고 있어요. 고풍스러운 미와 모던한 감각 그리고 한국정서, 이것이 저희 호텔의 콘셉트입니다.”
 
  선종태 사장은 “덕분에 칭다오를 찾는 한국의 VIP들이 저희 호텔을 자주 찾으신다”고 말했다. 특히 영화배우 정준호, 코미디언 서세원씨 등 연예인 단골 손님도 많다고 한다. 선 사장은 “비록 한국식 디자인과 한국 정서를 감안해 지었지만 우리의 주 타깃은 중국인”이라고 설명했다.
 
 
  중국인 투숙객 점차 늘어
 
  투숙객의 유형을 보면 오픈 초기에는 100%가 한국인이었으나 한국식 호텔문화가 중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면서 중국인 투숙객이 늘기 시작, 현재는 한국인 60%, 중국인 40% 정도라고 한다. 선 사장은 “조만간 중국인 투숙객이 더 많아져 2~3년 내에는 중국인 투숙객이 70~80%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지금까지 선종태 사장이 이 호텔 건립에 투자한 총 투자비는 약 100억원. 2007년 11월 21일 개관 이래 평균 객실 점유율은 65~70% 선이었는데, 최근의 세계적인 경기침체 여파로 올해 들어선 50%를 밑돌고 있다고 한다. 陳容瑞(진용서) 총경리는 “최근에 예약이 되어 있던 큰 행사들이 줄줄이 취소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면서 “올 1~3월은 바닥을 쳤고, 4~5월부터 회복 국면으로 들어서면서 5월부턴 예년 수준의 객실 점유율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객실 점유율이 50%만 넘으면 운영에는 지장이 없다”고 말했다.
 
  이 호텔의 창업자 선종태 사장은 서울 신촌에서 서비스업으로 사업 기반을 닦은 후 다른 영역에 도전할 만한 것이 없을까 고민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2002년 2월 22일로 기억합니다. 칭다오에서 가방공장을 운영하는 형님의 부탁으로 처음 중국땅을 밟았습니다. 공항 근무자들이 인민복을 입고 뻣뻣한 자세로 일하는 것을 보면서 ‘중국은 아직도 공산주의 잔재가 많이 남아 있구나’ 하고 느꼈어요.”
 
  그러나 막상 칭다오 시내로 들어오자 이 도시가 마치 하와이 같다는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항구도시로서 일찍부터 해외 문물을 받아들인 데다가 과거 독일의 조계지가 설치되어 이국적인 풍경에 마음을 빼앗긴 탓이다.
 
  형님을 대신하여 가방공장을 관리하면서 그는 칭다오 지역 정부 관원들과 긴밀한 인간관계를 맺었고, 형님으로부터 “칭다오에는 한국 사람이 편안하게 머물 수 있는 호텔이나 모텔이 없어 불편을 겪고 있는데 네가 호텔을 하나 지어 운영해 보면 어떠냐” 하는 제안에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고 한다.
 
 
  중국 시장 만만하게 봤다가 큰 낭패 당해
 
청도 남산호텔 모습. 한국식 온돌 난방 시스템, 이탈리아제 대리석 시공, 각종 실내장식을 고급 한국식으로 꾸며 5성호텔보다 객실 분위기가 더 좋은 4성호텔이란 평을 듣고 있다.

  그는 시장조사와 주변 환경조사를 하면서 중국이 만만하게 보였다고 한다. 제도도 어수룩하고 돈이 굴러다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면서 “잘만 하면 크게 성공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2002년 9월, 선종태 사장은 정식으로 중국으로 이주를 했다. 그는 중국에 뼈를 묻을 각오로 60만 달러와 전 가족이 이삿짐을 싸들고 칭다오로 건너왔고, 칭다오시 정부에 정식으로 사업자 등록까지 냈다.
 
  그는 센양구의 한 지역을 점 찍고, 2002년 9월 센양구 인민정부의 허가를 받아 투지구매 계약을 체결했다. 그런데 협상 과정에서는 “일단 투자만 하면 모든 것을 일사천리로 해결해 주겠다”고 입이 닳도록 이야기하던 중국인들은 막상 토지를 구입하고 나자 태도가 돌변했다.
 
  칭다오에 외국인이 호텔을 짓는다는 소식에 대해 주변에서 호텔을 경영하던 중국인들이 노골적으로 견제를 했고, 중국 정부도 외국인이 제조업이 아닌 서비스업종에 투자하는 것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기 때문.
 
  2003년 8월, 청천병력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정부 관원이 “중국 중앙정부에서 토지법을 개정하여 모든 투자는 무조건 경매를 통해 낙찰을 받아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반드시 산둥성 토지청의 판매지표가 있어야 한다”면서 차일피일 시간을 끌기 시작했다.
 
  그는 토지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다 쓰러져 수차례 병원에 실려가 중환자실 신세를 지기도 했다. 그는 “죽어도 중국에서 죽는다”는 각오로 이곳저곳 사람들을 만나 해결방법을 찾아낸 덕에 2005년 9월, 정식 경매 절차를 거쳐 현재의 토지를 낙찰받았다.
 
  힘겹게 산 하나를 넘자 또다시 거대한 산이 나타났다. 공사시공 비준 절차가 한국과 비교하면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했기 때문이다. 온갖 우여곡절 끝에 공사시공 비준 절차를 거쳐 8개월 만인 2006년 9월 착공과 동시에 국유토지사용권을 취득했다. 그해 연말 토목공사 준공과 동시에 호텔에 대한 건물소유 권리증도 받아 모든 법적, 제도적, 절차적 문제가 해결됐다. 선 사장의 설명.
 
  “토지와 건물 소유 권리증을 받아내기까지 4년여 기간은 제 인생에 있어 가장 모진 세월이었습니다. 주변 知人(지인)들은 ‘호텔 들어서기 전에 사람 죽겠다. 그만 포기하라’고 말렸지만 저는 ‘죽으면 죽었지 포기할 수 없다. 나는 이 땅에 반드시 호텔을 짓는다’고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중국 내륙으로 호텔 체인망 진출 구상
 
  그는 건물의 설계 과정에서 한국의 유명 건축가와 디자이너, 그리고 최고 기술을 가진 匠人(장인) 20여 명을 초빙하여 내부 설비공사를 했다. 드디어 2007년 11월 21일 駐(주) 칭다오한국영사관의 김선흥 총영사와 센양구의 유표명 부서기를 비롯한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관식을 갖고 영업을 개시했다.
 
  선종태 사장의 꿈은 남산호텔 건립이 시작이다. 그동안 7년여 중국땅에서 생고생을 해 가며 얻은 사업 노하우에 대해 그는 “사막 한복판에 떨어져도 살아남을 자신이 있을 정도”라고 했다. 그의 설명이다.
 
  “남산호텔을 기반으로 하여 중국 내륙 쪽으로 호텔 체인을 내는 것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현재 중국의 연안지역은 거대한 글로벌 호텔 체인이 이미 선점해서 파고들어갈 여지가 없지만 내륙 쪽의 지방 도시들은 아직 시장성이 충분합니다. 규모를 적게 하되 시설은 남산호텔 규모로 알차게 지으면 경쟁력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함께 선 사장이 주목하는 분야는 웨딩업이다. 중국에는 결혼식을 할 만한 마땅한 장소가 없어 현재 남산호텔의 2층 행사장은 토·일요일에는 예식 예약이 밀려 있다고 한다. 선 사장은 소형 호텔과 웨딩업을 결합한 형태로 중국 내륙으로 진출하여 체인망을 구성한다는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그는 중국 진출을 꿈꾸는 한국인에게 이렇게 조언했다.
 
  “저는 중국에 오자마자 중국어를 공부하면서 통역 없이 현지인들과 부딪쳤습니다. 만약 한국이었다면 이처럼 엄청난 노력을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 불가능한 일에 내 모든 것을 바쳐 도전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을 겁니다. 저는 처음 중국에 진출할 때 중국에 인생의 모든 것을 건다는 각오로 가족을 다 데리고 왔습니다. 일종의 배수진을 친 셈이죠. 저는 중국 진출을 검토하는 한국인 여러분도 저와 같은 비장한 각오로 도전한다면 이루지 못할 꿈은 없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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