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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책부록
  1. 2009년 8월호

金鍾七 천진온천호텔 사장

호텔 투숙률 83% 중국 속의 ‘작은 한국’ 만들어

金南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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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칠 천진온천호텔 사장.
  일본에 가면 초밥이 있고 한국에는 불고기가 있듯이, 중국 톈진(天津)에 가면 천진장청온천빈관(이하 천진온천호텔)이 있다. 톈진에서는 그만큼 유명한 존재다. 지난 1997년 개장한 천진온천호텔(객실 330석)은 작은 한국이다. 호텔 직원 전원이 한국어를 구사하고 호텔 내에는 한식당, 라듐온천이 나오는 한국식 사우나, 한국식 일식당, 한국식 중식당, 한국식 미용실, 한국식 당구장, 한국식 노래방, 한국 여행사 등등이 있다. 심지어 호텔 2층에는 한인교회인 엘림교회가 있다. 톈진 내에 있는 교회 중 규모가 가장 커서 주일 모임 때는 1000여 명의 신자가 몰린다.
 
  주변도 온통 한국판이다. 호텔 인근에 한라산, 꼴통네 감자탕, 고려삼계탕 등 한국 식당과 한국 상점들이 즐비하다. 천진온천호텔이 있는 허시구(河西區) 일대는 톈진에서 한국인이 가장 많이 모여 사는 곳이다.
 
  현재 톈진에 거주하는 인구는 상주인구 4만여 명, 유학생과 유동인구를 포함하면 5만명 내외라는 게 이곳 한인들의 추산이다. 톈진 교민들은 천진온천호텔 金鍾七(김종칠·69) 사장을 5만여 톈진 한인사회의 터줏대감으로 꼽는다. 1990년대 초반 변변한 한국호텔이 없을 때, 천진온천호텔은 이곳 주재원들과 사업가들, 현지 교민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다. 이들은 말 설고, 물 선 중국 땅에서 일하느라 긴장된 마음과 몸을 이 호텔에서 풀었다.
 
 
  호텔 투숙률 83%
 
  “어제(토요일) 톈진 시내 주요 호텔 투숙률이 48%였는데, 우리는 83%였소. 톈진에 오는 한국 사람들이 우리 호텔을 이만큼 좋아해요. 그런데 김 기자는 왜 다른 호텔에서 불편하게 자는 거요?”
 
  지난 6월 28일 천진온천호텔에서 만난 김종칠 사장이 필자의 숙소가 다른 중국 호텔이라는 얘길 듣자 마자 한 얘기다. 이날 베이징(北京)-톈진 일대의 수은주는 39℃ 내외. 머리에서부터 땀을 줄줄 흘리는 필자에게 김 사장은 “일단 1층에 있는 온천에서 목욕부터 하자”고 권했다.
 
  1층 로비에서는 중국어를 들어볼 수 없었다. 눈에 익은 머리 스타일과 옷차림의 여자들부터, 호텔 로비를 가로지르며 뛰어 다니는 아이들까지 모두 한국인이었다. 호텔 내 안내판도 중국어보다 한국어 표시가 눈에 더 잘 띄었다.
 
  호텔 1층에 있는 온천에서는 지하 150m에서 라듐과 유황성분이 가득한 온천수를 하루 200여t씩 끌어 올린다. 온천뿐만 아니라 호텔 객실에서 사용하는 온수도 이 온천수를 사용한다. 온천 내부는 크지 않았지만, 남녀 공용인 작은 찜질방, 휴게실, 안마실이 갖춰져 있었다.
 
  욕탕으로 들어가자 TV에서 한국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었다. 욕탕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스피커에서 한국어가 흘러나오는 통에, 서울 어느 사우나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온천탕에 몸을 담가 보니 물이 미끈미끈했다. 김 사장은 “온천수가 워낙 부드러워서 바닥이 미끄러우니 조심하라”고 했다.
 
 
  용인민속촌의 아버지
 
천진온천호텔 입구에 서 있는 김종칠 사장.

  김종칠 사장은 한국외대 영어과 4학년 때인 1964년 11월 국제관광공사(한국관광공사의 前身) 공채시험에 합격했다. 훗날 ‘관광대사’로 불린 김종칠 사장의 관광 인생 45년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처음에는 자신의 직업이 맘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관광공사에서 처음 맡은 일이 전화당번이었어요. 대학 졸업하고 그 짓을 하려니 한숨이 나오더군요. 6개월을 꾹 참고 외국인들을 상대로 전화통역을 했습니다. 당시 관광공사 사장이 吳在璟(오재경·90·후에 공보처 장관)씨였는데, 불평 없이 일하는 저를 눈여겨본 모양이에요. 1년 반이 지나자 사장 비서실로 보내 주더군요. 이후 관광공사에서 승승장구했어요. 하루도 쉬지 않고 일했거든요. 그러다 좋은 기회가 왔어요.”
 
  김 사장은 1972년 梁潤世(양윤세·78·후에 동력자원부 장관) 청와대 경제 제3비서관의 관광정책 담당으로 일하게 됐다. 그는 청와대에서 일할 때, 일본 청소년들의 한국 수학여행 유치를 처음으로 기획, 실시했다. 청와대에서 근무할 때 김종칠 사장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용인민속촌’이었다.
 
  “당시 새마을 사업이 한창이었어요. 새마을 사업의 상징이 새마을 노래에 나오는 것처럼 ‘초가집도 없애고~’예요.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초가집도 우리 전통가옥 형태인데 이렇게 모조리 없애면 전통가옥이 통째로 사라질 것 같았어요. 그래서 ‘초가집 전통을 살리자’는 구상이 확대된 것이 용인민속촌입니다. 문헌과 기록이 없는 조선 이전까지는 몰라도 조선조 500년의 우리 전통과 문화를 보존해서 후세에 알리자는 복안이었죠.”
 
  ― 정부에서 반대를 하지 않던가요.
 
  “당연히 탐탁지 않게 여겼죠. 그래서 朴正熙(박정희) 대통령이 결재할 기안을 철저히 준비했어요. 기안의 서두에 결론부터 적었어요.”
 
  당시 그가 용인민속촌 기안에 썼던 첫 문장은 이렇다.
 
  “용인민속촌은 전통민속자원을 보존, 전승 계발하고 박물관적 현장학습적 교육시설로 활용하는 한편 관광자원화하겠다.”
 
  그가 올린 기안은 대통령 결재를 무사히 통과했고, 용인민속촌은 지난 40여 년간 우리 전통을 엿보는 통로가 되고 있다.
 
 
  세계 신문에 서울 일기예보 게재
 
  김 사장은 “1974년 관광공사로 복귀했는데, 관광공사 LA 지사장으로 일할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며 이렇게 말했다.
 
  “1979년부터 관광공사 LA 지사장을 맡았어요. 1982년 6월 어느 날인가 를 보는데, 갑자기 한국 날씨가 궁금한 거예요. 날씨란에 전 세계 52개 도시의 날씨가 나와 있는데, 서울 날씨가 없었어요. 그래서 지주회사의 회장인 챈들러 씨에게 간곡하게 편지를 썼어요. 그랬더니 ‘날씨 정보서비스는 AP통신에서 제공받는데, AP에 알리겠다’는 편지가 왔어요. 며칠 후 날씨란 편집자가 연락을 해 왔더군요. ‘당신의 노력으로 뿐만 아니라, AP통신과 계약한 세계 모든 신문에 서울 일기예보가 나오게 됐다’고 했어요. 정말 감격했습니다.”
 
  미국 서부의 관문인 LA 공항에 한국어 안내문 서비스가 시작된 것도 그의 노력 덕분이다. 1982년 당시 LA 공항에는 독일어, 프랑스어, 중국어, 일어, 스페인어 안내문이 있는데 한국어 안내문이 없었다. 그는 당시 공항 국장이었던 크립튼 무어 씨를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저녁 식사자리에서 김 사장은 무어 국장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LA 공항에 승객이나 화물 취급 순위로 KAL이 JAL, 유나이티드 항공 다음입니다. 그만큼 한국이 LA 공항에 돈을 많이 벌어다 준다는 건데, 한국어 안내문이 없다는 건 말이 안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김종칠 사장과 저녁식사를 한 얼마 후, LA 공항 전체에 한국어 안내문이 걸렸다고 한다.
 
 
  “중국 내 嫌韓論 미미한 상태”
 
  김 사장과 목욕을 끝낸 후, 일행은 2층 일식당에서 한·중·일식으로 저식사를 했다. 2층 식당에서는 한식, 일식, 중식을 모두 먹을 수 있다. 동행한 정생균 톈진 금사력그룹 총경리는 “일식과 중식이 모두 한국식이어서, 중국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 관광객들과 주재원들에게 인기가 높다”고 했다. 저녁식사를 하면서 김 사장과 대화를 나눴다.
 
  ― 최근 중국 내에서 ‘嫌韓論(혐한론)’이 나온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1997년에 중국에 왔을 당시, 중국인들은 한국을 매우 높게 평가했어요. 시간이 조금 흐르니까, 우리나라에 대한 인식이 묘하게 변했어요. 한국 사람들이 잘산다고 거들먹거린 게 발단이었어요. 그러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일부 중국 인터넷 매체들이 한국을 비하하기 시작하자, 네티즌들이 혐한론을 들먹이더군요. 전체 중국인들이 한국을 폄하한 것은 아니지만, 큰일 나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중국 ‘CCTV 1’과 중국 3대 신문 가운데 人民日報(인민일보), 光明日報(광명일보) 등에 편지를 보냈어요.”
 
  김종칠 사장이 중국의 주요 언론사에 보낸 편지 내용은 이렇다.
 
  “중국과 한국은 지난 2000년 동안 문화, 경제적으로 교류를 해 왔다. 한국이 일제시대 항일투쟁을 했을 때, 중국은 우리에게 애국지사들이 자주독립투쟁을 벌일 수 있었던 무대를 제공했다. 1992년 정식 수교한 이래, 두 나라는 서로 제3의 무역 대상국이 됐다. 앞으로 경제뿐만 아니라 문화교류를 통해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해야지 지금처럼 중국 언론과 인민들이 한국을 경시하고 폄하해서는 안된다. 한국은 중국의 문화와 중국인들의 힘을 존중하고 믿으니, 한국과 중국은 서로 거울 삼아 함께 발전하자.”
 
  ― 반응이 어땠습니까.
 
  “중국 CCTV와 인민일보, 광명일보 등에서 저를 인터뷰하기 위해 호텔에 왔습니다. 인민일보 부주필은 인민일보에 ‘월드컵 이후 사색’이라는 칼럼을 썼습니다. 제 편지를 소개하며, 중국 일부 언론과 인민들이 한국을 폄하해서 中韓(중한) 관계에 악영향을 미치면 안된다는 내용이었어요. 저를 인터뷰한 언론은 중국 정부의 국영방송이고 기관지입니다. 이들이 저를 인터뷰한 건 중국 정부가 중국의 일부 매체와 인민들에게 ‘쓸데없이 한국을 자극하지 말라’고 경고를 한 겁니다.”
 
  ―그 이후에 중국 내 혐한론이 사그라졌나요.
 
  “일부 군소 인터넷 매체에서 혐한론이 나오기는 하지만 미미합니다. 중국에서는 CCTV 1과 인민일보, 광명일보 등에서 공개적으로 한국을 비난하지 않는다면, 중국 내 혐한론은 의미가 없는 거예요. 제가 만난 중국 주요 언론사 간부들의 얘기입니다. 이들은 ‘동북공정도 중국 3대 신문과 CCTV에서 공개적으로 주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 정부가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해요.
 
  “지난 2년여 간 한국과 중국은 경제교류에만 바빠서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어요. 중국 시장에서 우리 기업들이 더욱 성공하려면, 중국 문화를 더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중국인들의 감정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잘못된 정보를 듣고 지레짐작으로 중국을 무시하거나 중국인들의 눈치를 봐서는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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