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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년 7월호

우리동네 예찬

내게는 서울특별시 서초특별구 방배특별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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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안진 시인·서울대 명예교수
⊙ 1941년 경북 안동 출생.
⊙ 서울대 사범대 교육학과 졸업. 同 대학원 교육심리학 석사,
    미 플로리다주립대 교육심리학 철학 박사.
⊙ 서울대 생활과학대 소비자아동학부 교수 역임.
⊙ 저서: 시집 <누이>, 산문집 <지란지교를 꿈꾸며> 등 다수.
⊙ 상훈: 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월탄문학상, 소월시문학상 특별상 등.
짙푸른 숲에 둘러싸인 방배동 성당.
  우리 단지로 이사 온 누가 건의한 적이 있다. 집이 오래되었으니 재건축을 하자고. 주민들은 대경실색 불같이 화를 냈다. 이유가 뭐냐고.
 
  집값이 엄청 올라간다는 대답에 모두 놀라 “이렇게 살기 좋은 집을 재건축이라니? 어디서 저런 사람이 이사왔느냐”고 쑤군거렸고, 그 댁은 일년 남짓 살다가 이사를 가 버렸다. 재건축 업자들이 여러 해를 두고 수없이 들쑤셔대도 아직도 쑤셔지지 않고 있다. 우리 동네 주민들 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될 게다.
 
  나는 직장이 가까워서 이사했는데, 살기 좋아 30년 넘게 눌러 살고 있어, 내게는 서울특별시 서초특별구 방배특별동이다. 우선 시내까지 교통이 너무 편하다. 어떤 이유가 주민 모두를 오래오래 붙잡아 두거나, 신도시 등 다른 곳으로 이사 갔다가도 다시 돌아오게 하는지 모르나 이유를 따지면 수없이 많을 것이다.
 
  주민들 대다수가 30년 넘도록 때 없이 마주치며 익혀 온 얼굴들이다. 商街(상가) 주인들은 밤중에도 와서 고장난 데를 고쳐준다. 정말로 이웃사촌다운 사촌으로 살고 있다. 유치원 다니던 아이들이 시집 장가 가서야 이사 간다고들 웃어댄다. 고향이 아니면서 고향 같고, 시골도 아니면서 시골 같지만, 시내까지 30~40분이면 충분하다. 전철 버스 모두 다니는 사통팔달의 도심이면서도 시내보다 5도 낮은 공기 맑은 방배3동! 여기를 두고 어디로 이사 간단 말인가?
 
 
  뻐꾸기 소리에 잠깨는 동네
 
방배동 성당 내부.

  오늘도 앞산 우면산 뻐꾸기가 새벽잠을 깨웠다. 십여 곳이나 되는 약수터에서 또는 산마루에서 들려오는 야호~ 소리가 시끄럽기도 하다. 앞산까지 다니기 싫은 주민들은 전주 이씨 효령대군파의 산이 껴안듯 둘러친 성당 뒷산을 아침저녁으로 오른다. 우면산보다는 낮은 언덕 같지만, 요즘은 문 열지 않아도 아카시아 꽃향기가 새어 들어와 낮잠도 깨운다.
 
  집 뒤로 효령대군 묘소와 청권사가 있어, 봄이면 청매화 꽃이 눈부시다. 설거지하다 내다보면 효령대군 능침과 둘러선 솔숲이 눈을 시원하게 해준다. 문화재 동네라서 건물 높이도 한정되어 있고, 그 산자락에 방배동 성당이 널찍한 주차장을 데리고 있어, 최고의 결혼식장으로 꼽힌다고 한다. 뒷산 역시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대법원과 서리풀 공원으로 이어져 효령대군 능이 있는 방배역까지는, ‘몽마르트르 언덕’이니 ‘시인의 길’이니 ‘사색의 언덕’이니 등 다채로운 이름으로 불리면서 역시 조용한 숲 속이다.
 
  국제적으로 손색없는 대도시 서울 시민으로 살면서도, 눈감아도 눈떠도 사계절 자연의 변화를 직접 체험하며 살 수 있는 동네가 방배3동 외에 또 있을까? 외국인들은 이런 주거지가 서울에 있었다니 놀랍다고들 한다. 그럼에도 큰 병원과 명문 중·고교가 많고, 재래시장도 있으며 손쉽게 아무 때 아무 거나 구할 수 있는 작은 상가들도 여기저기 많이 끼어 있다. 백화점이 없어서, 필요 없이 드나들면서 과소비하지 않아도 되니 더 없이 좋다.
 
  백화점에 가 어슬렁거릴 시간에 앞산 옆산 뒷산을 산책할 수 있어 좋다. 무엇보다 주민들 대부분이 아주 건실하여 아이들 키우기에 좋았다는 것이다. 우리 동네만의 격조와 품위를 유지하면서, 시속에 출렁거리지 않는 건실한 주민들의 양식 높은 의식 수준 덕분에, 한번 이사오면 누구도 눌러 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사 오기 30여 년 전 하루 두 시간씩 통근차를 타야 했다. 24시간 중 두 시간을 길에서 보내야 한다면 잠자는 시간까지 합쳐 일할 시간이 너무 짧았다. 통근차에서 내다보며 살폈다. 여기쯤이면 10~15분 정도 걸릴까?
 
  그렇게 호시탐탐 살펴보던 중, 벌판 같은 황야에 아파트 건물이 올라서고 있는 것을 보았다. 바로 옆에는 시멘트 벽돌을 찍는 공터가 있었고, 야생 아주까리 등이 멋대로 자라고 있었다. 옳구나! 저 집으로 이사해야겠다. 마음은 먹었지만 어떻게 산담? 점심시간에 이 고민을 투덜거리자, 직장 동료들은 짓고 있는 아파트는 집값을 한꺼번에 내지 않고, 또 요즘같이 아파트 시세가 없는 때가 구입하기 좋은 때라고들 했다.
 
  그날 퇴근길에 버스에서 무작정 내렸으나 그곳에는 소개소가 없었다. 공사현장을 어기적거리자 누군가가 왜 왔느냐고 물었고, 사정을 듣더니 따라오라고 해 포장마차 같은 곳으로 따라들어 갔더니, 프리미엄이라는 것은 물론 없고 밀린 연체금도 주인이 물어 줄 테니 평수가 큰 집을 사라고 했다.
 
  그때 눈 딱 감고 큰 평수를 샀어야 했는데, 그러자니 큰 평수 유지할 걱정부터 앞섰다. 깜량이 모자랐던 걸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아무튼 웃돈 한 푼 없이 두 복부인이 합자금으로 당첨되었다는 집을 분양가에 샀으나, 중도금이 문제였다.
 
  5만원만 모이면 세운상가 몇 층에 있던 분양사무소에 갖다 바쳤다. 어느 날은 분양사무소 직원이 “사모님! 이번이 서른한 번째네요”라며 안쓰런 표정으로 “성의가 대단하다”던 말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럼에도 밀리기만 하는 중도금에 독촉장 한 번 안 보냈고 밀린 이자도 한 푼 물게 하지 않았다. 회사명이 대한생명이라던가, 신동아건설이라던가, 아무튼 사장님이 최순영 교회 장로님이라 그렇다던 말을 아직도 기억하는 이유이다.
 
 
  좋은 이웃들과 이웃사촌으로
 
  직장까지는 8~9분 정도 걸렸다. 그 아파트에 20년 더 살았다. 더 오래 살려면 도배며 집수리도 해야 한다는데 엄두가 나지 않았다. 부동산은 마주칠 때마다 팔고 다른 곳에 더 잘 지은 집으로 이사가라고 권했다.
 
  ‘정히 이 동네가 좋으면 골목 건너로 이사하면 되지 않느냐. 아파트에 살아 봤으니 빌라에도 살아 보라. 소개비가 많은 쪽은 안 받겠다’는 꾐이 계속됐고, 드디어 꾐에 빠졌다. 한쪽 소개비 공짜로 정원이 예쁘다는 빌라로 이사 왔다.
 
  골목 하나 건너는데 20년 걸렸고 2층에서 3층으로 올라오는 데도 20년이 걸린 셈이다. 단독주택 같아, 집앞의 모과나무가 사철 내내 커튼이 되어 주고, 자고 나면 누런 모과알이 베란다 바닥에 떨어져 있곤 한다. 겨울에는 볕이 너무 잘 들어 커튼을 치고 11년째 산다. 30여 년을 한동네 한골목을 사이하고 살고 있다.
 
  오래 살다 보니 다른 어디로 이사가고 싶은 생각은 해본 적도 없다. 동회는 담 너머이고 파출소는 동회 옆이며, 매일 아침 에어로빅 다니는 여성회관은 파출소 옆이다. 청소년회관이나 여성회관의 다양한 프로그램은 주민들 요구에 맞고 저렴하여, 나도 월 4만5000원 내고 매일 아침 1시간씩 땀 흘려 운동하고 샤워까지 하고 와도 1시간30분이면 충분한데, 하루종일이 걸린다는 골프를 왜 다녀?
 
  매주 무료영화 보고 주민이 만든 김밥이나 샌드위치 사 와서 점심으로 때우기도 한다. 동회에서는 요가, 스포츠댄스, 국선도 등을 월 수강료 1만원으로, 컴퓨터는 무료로 제공한다.
 
  사통팔달의 지하철역까지는 하이힐 신고도 3분 거리, 갑자기 비가 와도 신문지 1/2장도 안 젖는 거리다. 그래서 한번 와 본 분들은 서울 시내에 이렇게 집 값 싼 곳이 있다니 믿어지지 않는다고 감탄하면서 많이 이사 와 知人(지인)들도 많아졌다. 시인, 평론가, 수필, 소설가, 아동문학가들이 길 건넛집 이웃들이 되었다. 교수동네 교수동으로 별명도 나 있으니, 좀 있으면 문인동네 시인동으로 이름날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나는 평생을 이 동네에서 살려 한다. 서초구 방배3동! 너무너무 좋은 이름이다. 아니 좋은 동네 이름을 만들어야 하기에, 뿌리 박은 주민들 모두 자기 마을을 더 좋게 만들려고 애쓰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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