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초구에는 대법원(좌)과 대검찰청(우) 등 법조 관련 기관들이 밀집해 있다.
그 물음에는 月刊朝鮮과 조선일보에 대한 애정과 함께 ‘그로 인해 기자나 회사가 어떤 불이익은 당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걱정이 담겨 있었다. 그럴 때마다 하는 답변이 “옛날처럼 남산이나 서빙고에 불려가는 일은 없는데, 대신 서초동으로 곧잘 불려다닙니다”였다.
그러면 우파 인사들은 “그게 무슨 소리요?” 하고 다시 묻는다. 답변은 대강 이렇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처럼 국정원이나 기무사 같은 정보기관에 시달리는 일은 이제 없습니다. 대신 이 정권이나 좌파세력들은 명예훼손 소송을 걸어 비판 언론을 못 살게 굴고 재갈을 물리려 듭니다. 그러다 보니 요즘 저희는 서초동에 자주 드나들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 드리면 그분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다. 서초구 서초동에는 법원과 검찰청이 있다.
서소문에서 꽃마을로
![]() |
법원과 검찰청 등 법조단지가 있는 서초구 서초동에는 변호사 사무실들이 밀집해 있다. |
원래 대법원 대검찰청 등은 서울 서소문에 있었다. 현재의 서울시립미술관이 대법원, 서울시청(임시청사)은 대검찰청이었다. 기구와 인원의 확장으로 기존 청사가 좁아지자 새로운 청사 부지를 찾고 있던 대법원과 법무부는 마침 서울시가 청사를 이전하기 위해 확보하고 있던 지금의 법조단지 부지에 주목했다.
결국 1989년 3월 법원행정처와 법무부는 서울시와 부지교환계약을 체결했다. 서소문동에 있는 법원-검찰청 부지와 현재 법원단지 일대의 서울시청 예정 부지를 교환한 것이다.
법원 및 검찰청사들이 서초동으로 옮겨오기 시작한 것은 1989년 8월 서울형사지방법원 등이 이전하면서부터였다.
서울고등법원, 서울중앙지방법원, 서울고등검찰청, 서울중앙지방검찰청 등이 자리 잡은 법조단지는 조선시대 효령대군의 장인으로 집현전 대제학을 지낸 鄭易(정역)의 집이 있던 곳이다. 이후 해주 정씨들이 많이 들어와 살았다 하여 鄭谷(정곡)이라고 불렸다. 법원단지 인근에 있는 4개 棟(동)으로 되어 있는 정곡빌딩의 이름은 여기서 유래했다.
법원단지가 들어서기 전 이 일대는 ‘꽃마을’이라고 불렸다. 1981년 서울 사당동·양재동 등에 거주하던 철거민들이 이주하면서 마을이 형성됐는데, 1987년부터 花園(화원)을 경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꽃마을’이라고 불리게 됐다.
1992년경 서소문에서 서초동으로 사무실을 옮긴 嚴相益(엄상익) 변호사는 “내가 서초동에 들어올 때만 해도 주위에 꽃마을 사람들이 사는 비닐하우스들이 많이 있었다. 얼마 전까지 내 변호사 사무실이 있던 교대역 사거리 부근에서는 요즘 노숙자 같은 차림의 철거민들이 텐트를 치고 살았다”고 말했다. 엄 변호사는 “나도 꽃마을 사람들처럼 사무실 옆 빈터에 배추와 호박을 심어 수확해 먹곤 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서초동에서만 사무실을 네 번 옮겼다고 했다.
“서릿벌에 서릿집 들어서다”
![]() |
서초동에 있는 한 건물의 안내판. 입주 사무실 대부분이 변호사 사무실이다. |
1995년 8월 대검찰청이, 그해 12월 대법원이 지금의 자리에 들어오면서 법조단지 조성은 일단락됐다.
대검찰청이 서초동 청사에 입주한 다음날인 1995년 8월 2일, 李圭泰(이규태) 조선일보 논설고문은 <이규태 칼럼>에 쓴 글에서 “서초동 법조타운은 우연의 일치치고는 신기할 정도로 터를 잘 잡았다”고 주장했다.
<법을 집행하는 法曹(법조)를 霜臺(상대)라 하고 法典(법전)을 霜典(상전)이라 하며 법관을 秋官(추관), 엄정한 법집행을 秋霜(추상) 같다고 한다. 엄한 법의 집행을 냉철한 서리에 비견했음을 알 수 있다.
서초동 법조타운은 우연의 일치치고는 신기할 정도로 터를 잘 잡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서초’라는 지명을 거슬러 올라가면 법을 상징하는 서리에 귀결되기 때문이다. 이곳에 서리가 많이 내렸던지 서릿벌이 서릿불로 다시 서리풀- 霜草(상초) -서초로 변전해 내린 것이다. 서릿벌에 서릿집이 들어섰으니 이제 그 집에 추상 같은 정신만이 담겨지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다.>
법조단지답게 이곳을 둘러싼 訟事(송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15명이 “1981년 서울시가 시청 이전을 위해 땅을 강제 수용했으나 결과적으로 수용목적에 어긋나는 법원·검찰청사가 들어섰으니 땅의 原(원)소유주인 자신들에게 다시 還賣(환매)해 주어야 한다”면서 행정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이들은 “수용 당시 서울시가 평당 5만원의 헐값에 사들인 다음 서소문 땅의 법무부 측에 621억원에 소유권을 넘긴 것은 서울시가 시청 이전을 미끼로 장사를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대법원은 “법률상 가능한 公益(공익)사업 변경이므로 땅을 원소유주에게 돌려줄 필요가 없다. 서울시가 청사 등의 건립을 백지화하고 대법원 및 대검청사 부지와 맞바꾼 만큼 당초 수용목적이 바뀐 것은 사실이나, 市(시) 청사건립과 대법원·대검청사 건립은 모두 같은 성격의 公用(공용)사업으로 공익사업의 변환에 해당된다”고 판결했다.
대법원 청사 옆에는 對北(대북)정보수집을 담당하는 국군정보사령부가 있다. 1980년대 초반 정보사령관을 지냈던 한 軍(군)고위인사는 후일 국방부장관 재직 중의 비리 때문에 검찰청사에 불려나가는 처지가 됐다. 이때 그는 수사검사에게 “내가 정보사령관을 할 때 검찰청 이전에 도움을 많이 줬다”고 말하면서 분위기를 부드럽게 해 보려 했지만 검사가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 바람에 머쓱해 했다고 한다.
전국 판사의 29%, 변호사의 22.8% 근무
현재 서초동에는 대법원 외에도 서울고등법원, 서울중앙지방법원, 서울가정법원, 서울행정법원, 그리고 법원행정처, 법원도서관 등이 있다. 여기에 근무하는 법관들(대법관 포함)은 모두 696명에 달한다. 지난 1월 현재 우리나라 법관 총수는 2377명이니 전국 법관의 29% 가량이 서초동에 근무하는 셈이다. 서초동 소재 법원에서 근무하는 공무원(법관 제외)은 1655명.
법조인들을 양성하는 사법연수원도 1982년부터 서초동 법원단지에 있었으나 2001년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장항동으로 이전했다. 한편 서울행정법원과 서울가정법원은 2012년 6월 서초구 양재동으로 이전할 예정이다.
법원에 대응해서 대검찰청과 서울고등검찰청, 서울중앙지방검찰청도 있다. 여기에 근무하는 검사는 모두 355명, 1,847명인 전국 검사의 19%에 해당한다.
바늘 가는 데 실이 따르는 법. 검찰과 법원을 따라 변호사와 법무사들도 서초동에 밀집해 있다. 서초구청 통계에 의하면 서초구에는 2827명의 변호사가 개업해 있다(2008년 현재). 이는 전국 변호사(1만2386명)의 22.8%, 서울 시내 변호사의 39.9%에 해당한다. 변호사 사무실은 1145개소, 종사자는 7058명에 달한다.
서소문에서 16년간 변호사 생활을 하다가 작년 11월에 서초동으로 옮긴 李憲(이헌·‘시민과 함께하는 변호사들’ 공동대표) 변호사는 이렇게 말했다.
“서소문에 사무실이 있을 때는 내가 변호사라는 것을 의식할 필요가 없었어요. 우리 사무실은 그 일대에 있는 다른 업종의 사무실들을 포함한 수많은 사무실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니까요. 그때는 그런 자유로움이 좋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서초동에서는 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의 태반이 법조와 관련된 분들이에요. 글자 그대로 ‘법조타운에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변호사 입장에서 법원이 가깝다는 것은 다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큰 장점입니다.”
전체 변호사들을 대변하는 대한변호사협회, 소위 진보성향 변호사들의 모임인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서민들을 위한 법률救助(구조)를 담당하는 대한법률구조공단도 법조단지 인근에 자리하고 있다.
서초동에는 또 법원·검찰청 등에 제출하는 문서의 작성 등을 담당하는 법무사(舊 사법서사)가 482명이 있어 전국 법무사의 8.2%, 서울 시내 법무사의 42%에 해당한다. 151개 법무사 사무소에 713명이 근무하고 있다. 법무사는 변호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서초동 밀집도가 떨어지는 셈이다. 이에 대해 대한법무사회 관계자는 “법무사들은 등기사무를 많이 취급하는데, 등기소는 전국 각지에 散在(산재)해 있기 때문에 변호사들처럼 서초동에 몰려 있을 필요가 없어서”라고 말했다. 그밖에 녹취 등 법원이나 검찰 관련 용역을 제공하는 업소(55개소)에서 213명이 일하고 있다.
장사하기 어려운 곳
‘법조 3輪(륜)’이라고 하는 법원·검찰 ·변호사들이 모여 있다 보니 법조단지 나름 특색이 생겼다. 첫째는 遊動(유동)인구가 많다는 점. 엄상익 변호사는 “원래 서소문 시절부터 ‘법조단지 인근은 서울역 다음으로 유동인구가 많다’고 할 정도로 유동인구가 많았다”면서 “서초동 법조단지 일대도 낮에는 사람들로 붐비지만, 밤이 되면 적막강산”이라고 말했다. 엄 변호사는 “이 동네 식당 장사는 점심 한때 장사”라고 했다. 한 변호사 사무소 사무장으로 있는 홍현철씨의 말도 비슷했다.
“점심때 법조단지 인근 음식점들을 보면 사람들로 바글바글해요. 실상을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엄청나게 장사가 잘되는 것 같죠. 하지만 점심때만 그럴 뿐이에요. 저녁때는 몇몇 유명한 집 빼고는 모두 파리만 날려요.”
법조단지 근처에서 2년간 음식점을 하다가 얼마 전 문을 닫은 송영준씨는 “법조단지 근처는 업종을 불문하고 장기간 장사하기가 쉽지 않은 곳”이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땅값이 비싸다 보니 권리금이나 임대료가 비싸서 2년 내에 투자한 돈을 회수하지 못하면 견디기 어려운 곳입니다. 게다가 2005년부터 시작된 토요 休務(휴무), 경기 불황, 임대료 상승 등으로 수지 맞추기가 더욱 어려워졌어요. 가게 임대 기간이 2년인데, 이를 연장하지 못하고 간판을 내리는 경우가 많아요. 한마디로 빛 좋은 개살구죠.”
그는 “어려운 것은 변호사도 마찬가지”라면서 “확인되지 않은 얘기지만, 빌딩주인들의 말에 의하면 이 동네 변호사의 30%는 임대료를 제때 내지 못한다고 한다”고 말했다.
그럼 술집은 어떨까? 홍현철씨는 “법조단지 근처에는 낮에는 음식점, 밤에는 술집밖에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룸살롱이나 단란주점 같은 업소는 생각처럼 많지 않다고 한다. 송영준씨의 말이다.
“법조타운 일대에는 룸살롱이나 단란주점처럼 여자가 나오는 술집은 거의 없어요. 그런 종류의 술집에서 놀려면 다른 동네로 가겠죠. 대신 가볍게 양주를 마실 수 있는 술집들이 많아요. 그런 곳들은 고객관리만 잘하면 꽤 오래 가죠.”
![]() |
서초동 법조단지 대로변에 법원판결에 대한 불만을 호소하는 현수막들이 가득 걸려 있다. |
1인 시위로 몸살
각종 1인 시위는 서초동 법조단지의 낯익은 풍속도 가운데 하나다. 엄상익 변호사는 “법원이나 검찰, 혹은 변호사들을 겨냥한 1인 시위가 매일같이 벌어진다”고 말했다. 1인 시위를 벌이는 사람들은 대개 법원이나 검찰, 변호사의 잘못으로 억울하게 당했다고 호소하는 사람들이다. 변호사 사무장 홍현철씨는 “이 동네에 있다 보면 송사로 인생을 보내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고 말했다.
“대법원 청사에서 봤던 할머니를 고법, 중앙지법 청사에서 또 본 경우도 있어요. 못 배운 것 같은 할머니가 USB에 뭔가 자료를 담아 와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더군요. 좋은 대학교 나온 멀끔한 사람이 1심에서 이겼을 때는 ‘정의는 살아 있다’고 좋아하다가, 2심에서 뒤집어지니까 ‘대한민국 판사 못 믿겠다’고 피켓을 들고 나서는 것도 봤습니다.”
각종 현안이 발생하면 그와 관련된 불똥이 서초동으로 튀기도 한다. 黃禹錫(황우석) 교수 사건 때에는 그의 지지자들이 검찰청사 앞에서 촛불시위를 벌였고, 盧武鉉(노무현) 전 대통령의 검찰 소환 때에는 노사모 회원들이 노란풍선을 흔들며 검찰청사 앞으로 몰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