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麟求
⊙ 1931년 대전 출생.
⊙ 대전 중·고, 충남대 법학과 졸업. 충남대 행정대학원 수료. 충남대 명예 법학박사.
⊙ 1951년 학도병 자원 입대, 미 공병학교 유학. 1967년 육군 중령 예편.
⊙ 1970년 계룡건설 인수, 계룡건설산업 회장 역임.
⊙ 13대, 15대 국회의원(대덕 연기). 자민련 부총재 역임.
⊙ 현 계룡건설산업 명예회장, 계룡장학재단 이사장.
⊙ 1931년 대전 출생.
⊙ 대전 중·고, 충남대 법학과 졸업. 충남대 행정대학원 수료. 충남대 명예 법학박사.
⊙ 1951년 학도병 자원 입대, 미 공병학교 유학. 1967년 육군 중령 예편.
⊙ 1970년 계룡건설 인수, 계룡건설산업 회장 역임.
⊙ 13대, 15대 국회의원(대덕 연기). 자민련 부총재 역임.
⊙ 현 계룡건설산업 명예회장, 계룡장학재단 이사장.
李麟求(이인구·77) 계룡건설 명예회장은 스스로를 “대전의 터줏대감”이라고 했다. 그는 “閑山(한산) 이씨 종가를 비롯해 직계 9대는 지난 700여 년간 한 번도 충청도를 떠난 적이 없다”고 했다.
1970년 1월 20일 계룡건설을 인수한 이인구 명예회장은 40여 년간 계룡건설을 전국 시공능력 평가순위 21위의 건설업체로 성장시켰다. 그는 “우리 회사의 본사가 대전을 떠나 서울로 갈 이유가 전혀 없다”면서 “리슈빌 아파트 브랜드는 삼성 래미안이나 LG 자이보다 대전시민들에게 더 사랑을 받고 있다”고 했다.
계룡건설은 작년 한 해 건설시장 침체에도 불구하고 전년대비 25.8% 증가한 1조 350억원의 매출을 달성했고, 540억원의 흑자를 기록했다. 창립 39주년을 맞는 올해는 受注(수주) 2조1000억원, 매출 1조3000억원, 전국 10위권의 건설업체 진입을 목표로 하고 있다.
계룡건설은 2008년말 현재 신규수주 1조4500억, 수주잔고 3조5000억, 회사채 부문 기업신용평가 A 등급으로 안정적인 재무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기업신용 평가에서 높은 등급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이 명예회장의 ‘무차입 경영’ 방침 덕분이다.
계룡건설은 다수의 신기술 및 특허를 바탕으로 선진기술력을 선보이고 있다. 특히 최근 한국건축문화대상 본상, 대한민국 최고아파트 대상, 건설협력증진 대상 등 굵직굵직한 상을 수상했다.
불 끄고 사는 회장님
이 명예회장 집무실은 최소한의 부분만 제외하고는 내부 형광등이 거의 소등돼 있었고, 쓰지 않는 컴퓨터 전원은 모두 뽑혀 있었다. 그는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전 계열사 차원의 강도 높은 원가절감과 경영혁신을 진행 중”이라고 했다.
국내 30대 대기업들이 대졸 신입사원의 연봉을 삭감하는 가운데 계룡건설은 지난 2월 25일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임금 무삭감, 인원 무감축, 신규고용 창출 확대 등을 골자로 하는 ‘2無(무)1加(가) 선언’을 발표했다.
그는 필자에게 계룡건설의 ‘임금 무삭감, 인원 무감축, 신규고용 확대’ 선언을 보도한 14개 언론사의 신문 스크랩을 보여주며 “임금동결, 반납이라는 모호하고 선언적인 내용보다 한 단계 발전한 실천방안으로 향후 기업들의 좋은 선례가 될 수 있을 것”이라면서 “社內(사내) 에너지 절약, 원가절감 노력만 철저히 해도 임금삭감을 안 해도 되고, 아까운 인재들을 해고하지 않고 더 뽑을 수 있다”고 했다.
-중견기업으로서 2무1가 운동을 실천하려면 경영에 부담은 안됩니까.
“물론 부담되지요. 하지만 그 정도는 원가절감 운동을 강력하게 하면 만회가 됩니다. 직원들 스스로도 감봉, 감원이 없도록 대중교통 이용하고, 이면지를 사용하고, 접대비를 줄이는 등 원가절감 운동에 적극 호응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원가절감 덕분에 작년에 540억원의 흑자를 보았고, 그 자신감으로 올해도 또 하는 겁니다.”
이인구 명예회장은 고려 후기의 문신 牧隱 李穡(목은 이색)의 19세손으로, 1931년 충남 대덕군 동면 효평리에서 태어났다. 이 회장은 대전중 5학년 때인 1950년 7월 학도병으로 자원 입대, 영천지구 전투에 참전했다.
그는 301공병교육대에서 초단기 사관후보생 과정에 응시해 합격했고, 육군종합학교를 마치고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육군종합학교 임관 당시, 18세였던 그는 장교임관 연령 미달로 불합격됐으나, 판정관이 그의 ‘물건’을 확인하고 신체적으로 성년임을 인정해 임관시켰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초급장교 시절 별명이 ‘잠지 소위’였다.
그는 1951년 공병학교 교관으로 부임한다. 이인구 회장이 평생직업으로 ‘건설’과 인연을 맺는 순간이었다. 1952년 미국 국방성은 한국에 공병장교 40명으로 구성된 특별군사반 파견을 요청했다. 대전중 입학부터 수석을 놓치지 않았던 그는 40여 명의 선발장교 가운데 소위로서는 유일하게 합격해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5·16 거사에 가담, 경부고속도로 건설
그는 미국 육군공병학교 초등군사반 유학을 마친 후 미 국방성 매뉴얼섹션(군사교범총국)과 신병훈련소를 찾아다니며 수많은 기술자료를 구해 왔다. 이는 육군 공병이 戰後(전후)복구에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귀중한 기술자료들이었다.
1953년 2월 귀국 후 그는 공병학교 교관으로 육군대학과 육군사관학교에 특강을 나갔다. 1961년 그가 대전지역을 관할하는 제3관구사령부 1202공병단 작전과장(소령)으로 있을 때,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쿠데타에 적극 가담, 부대 지휘 과정에서 그는 쿠데타 진압군의 총격에 사살당할 뻔했으나 평소 친분이 있던 부연대장인 김영진 중령의 도움으로 위기를 면했다고 한다.
쿠데타 성공 후 혁명주체 세력으로서 국가재건최고회의에 들어갔고, 그는 1968년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참여하게 된다.
“박정희 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 건설계획을 발표하고, 그 기획을 육군 공병감과 건설부장관에게 맡겼어요. 공병감은 7인 실무위원회를 구성하고 저를 팀장으로 지명했습니다. 20일간 서울~부산을 헬기로 20여 회 왕복정찰을 한 후 노선확정을 위해 대통령께 보고했어요.”
실무팀장 이인구 중령이 丁一權(정일권) 국무총리, 재무부장관, 건설부장관을 비롯한 5~6명의 관계장관, 참모총장, 공병감이 배석한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경부고속도로 노선확정을 위한 보고를 시작했다.
이 중령이 “공사비용을 산출해 보니 450억원이 소요된다”고 보고하자 박 대통령의 눈빛이 달라졌다고 한다. 박 대통령의 입에서 고함이 터져나왔다.
“도둑놈들! 나는 군인만큼은 믿어 왔다. 그런데 너희들 다 도둑놈들이다. 설명 끝!”
육군본부에 복귀한 이 중령은 공병감에게 호된 질책을 받았다.
“자초지종을 알아보았지요. 박 대통령은 우리가 준 노선지도를 鄭周永(정주영) 현대건설 사장에게 넘겨 견적을 미리 뽑았고, 정 사장은 300억원이면 가능하다는 견적을 보고했던 겁니다. 현대건설 견적책임자를 수소문해 알아보니, 항목별 공사견적은 우리 것과 오차 범위로 大同小異(대동소이)했지만, 현대건설 견적에는 토지보상비, 실시설계비, 감독비 등 아예 누락된 항목이 있었어요. 나는 퇴짜당한 견적표와 현대건설 견적표를 한눈에 비교한 차트를 만들었습니다. 그 차트를 걸어놓고 막 설명을 하려는데 표를 훑어보던 대통령이 ‘도둑놈은 따로 있구먼, 저희들이 받아먹을 돈만 견적한 거 아니야! 지난번에 내가 실수했어! 그대로 승인하니 다음 차례 준비에 만전을 기하도록!’ 하십디다.”
돌관공정으로 대전공설운동장 건설
청와대를 나서는데 경호실장이 이 중령에게 유골함보다 큰 상자를 건네며 “각하의 하사금이니 받아가라”고 했다. 돈을 세어 보니 1000원짜리 신권으로 2000만원이었다. 이 중령은 공병감에게 돈을 전하면서 “각하의 하사금을 뜻있게 쓰자”고 건의했고, 그 덕에 전국 공병대 내무반에 각하의 하사품으로 라디오를 지급했다고 한다.
이인구 회장과 박 대통령과의 인연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가 군에서 제대하고 계룡건설을 인수하여 건설업을 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대전시는 1979년 전국체전을 위해 대전공설운동장을 건설키로 했다. 1977년 鄭石謨(정석모) 충남도지사는 공설운동장 공사를 지명입찰에 부쳤고, 공사를 수주한 동서건설이 이듬해 부도가 나면서 경기장은 기초공사 상태로 방치돼 있었다. 이대로 가면 국가행사를 他(타)도로 옮기는 수밖에 없었다.
“새로 부임한 孫守益(손수익) 충남도지사가 건설협회 지부장인 저를 찾아와 ‘대전의 건설사가 공사를 맡아달라’고 했습니다. 5대 건설사 사장이 모여 의논한 결과 ‘기일 내 준공은 도저히 불가능하다’며 전부 빠졌어요. 저는 ‘이인구의 명예를 걸고 공기 내에 해내겠다’면서 전권을 위임 받았습니다.”
이 회장은 운동장 내외에 수백 개의 외등을 설치하고 밤낮으로 직원들을 독려했다. 그 결과 며칠 만에 공사현장은 생기를 찾았고 대회 일주일 전인 10월 4일 준공됐다. 이 회장은 운동장 잔디밭에서 간단한 위로잔치를 하다 피로로 쓰러지기도 했다.
1979년 10월 26일, 삽교천 방조제공사 준공식이 있었다. 이인구 회장은 대전공설운동장 건립 공로로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대통령 표창을 받는 날이었다.
“그날 마지막 순서로 박 대통령이 제게 표창장과 휘장을 달아주셨습니다. 그때 손을 꽉 쥐면서 악수를 해주셨는데, 그분의 온기를 느낀 지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그분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제가 박 대통령 生前(생전)의 마지막 施賞者(시상자)가 될 줄이야 꿈엔들 알았겠습니까. 어쨌든 혁명에서 시작된 인연이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서 마지막 가시는 길까지 이어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계룡건설 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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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공병학교 유학시절의 이인구 회장. |
이인구 회장은 1967년 18년의 군생활을 마치고 중령으로 전역했다. 그는 18년간 공병장교로 근무하면서 군에 토목건축의 최신 공법을 도입하고, 공병학교에서 신공법을 전파한 공병의 산 교과서였다. 그런 살아있는 지식을 직접 건설회사를 경영하면서 적용하고 싶어 창업을 했다고 한다.
그는 퇴직금 200만원, 대흥동 20평짜리 집을 담보로 미국으로 날아가 知人(지인)의 소개로 현금차관 300만 달러를 유치했다. 이것을 시드머니로 하여 건설자재와 중장비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유등천의 광권을 양도받아 모래, 작은 자갈, 큰 자갈로 분류하는 기계를 사용해 사업을 확장했다. 여유가 생기자 불도저, 페이로더, 덤프트럭, 콘크리트 믹서 등 중장비를 사들였다.
이 와중에 공병 후배장교였던 김형식 사장이 그에게 당시 페이퍼 컴퍼니였던 계룡건설 인수를 의뢰했다.
“계룡건설 인수 당시만 해도 50개 대전지역 건설회사 가운데 꼴찌였습니다. 지금껏 경리는 과장-부장-이사-상무-전무-사장-회장을 맡아 온 李源甫(이원보)씨입니다. 회사 경영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무차입경영 방침도 이때 생겨났습니다. 당대의 서예 대가인 又荷 閔衡植(우하 민형식) 선생이 써준 회사 좌우명 一路邁進(일로매진) 휘호를 계룡건설 임원실에 걸어놓고 앞만 쳐다보고 나가고 있습니다. 지금은 충남 랭킹 1위 기업으로 ISO국제인증까지 받았죠.”
이인구 회장은 13대, 15대 두 차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15대 국회 때 열린 한보청문회에서 그는 자민련 간사로 鄭泰守(정태수) 한보 회장은 물론, 金泳三(김영삼) 대통령의 아들 金賢哲(김현철)씨에게 날카로운 질문공세를 퍼부어 ‘청문회 스타’가 됐다.
정치에서 영원히 은퇴
-정계에서 활동했는데, 당시의 생활을 회고하신다면.
“군생활 때나 민간 기업인으로 활동할 때나 정치인을 보는 인식이 좋지 않았습니다. 국회의원을 ‘쌈꾼, 욕쟁이, 거수기’로 폄하했었죠. 제 나이 50대 후반에 이르렀을 때 소위 6·29선언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새 시대가 온 것 같다, 대통령도 직선제로 선출하고 국회도 크게 변할 것이다. 새 시대를 여는 초기에는 기존 정치에 물들지 않은 내가 국회에 진출해 보자는 생각으로 13대 국회에 진출했던 것입니다.
그때 한사코 만류하던 아내가 ‘욕지거리 싸움은 절대 하지 않고 소신껏, 양심껏 하되 절대 두 번 이상은 국회의원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표밭의 최전선에서 함께 뛰겠다’는 약속을 해 13, 15대 두 번만 하고 여한 없이 정치은퇴를 선언했습니다.”
현재 그는 현실정치에 절대 불개입, 불간여의 원칙을 고수하고 있단다. 그는 선거철이 되면 회사 출입문에 정치인들을 만나지 않겠다는 안내문을 내붙인다고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10년 전 정계은퇴를 선언한 이후 정치와 담을 쌓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지역에서 정치지망생들의 발길이 이어지니 난감하지요. 이제는 기업들이 선거로부터 자유로워져 기업활동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정치권이 도와줘야 합니다.”
그는 “정계 은퇴한 이후 서울에 한 번도 올라간 적이 없다”면서 “서울에 가면 정치인을 만나게 되고, 예전의 생활에 대한 유혹을 받을 것 같아 해외에 나갈 때도 서울을 경유하지 않고 인천으로 직행한다”고 했다.
이인구 회장은 1992년 계룡장학재단을 설립, 총 64억원을 출연했다. 계룡장학재단의 총 자산은 200억원 규모. 지금까지 연인원 9000여 명에게 23억원의 장학금을 지급했고, 올해는 연인원 500여 명에게 4억여 원의 장학금을 지급할 계획이라고 한다.
계룡장학재단은 유림경로효친 대상, 광개토대왕비 복제비 건립사업, 병자호란의 三學士碑(삼학사비) 중건사업, 李舜臣(이순신) 장군 동상 건립사업, 독도 우리땅 밟기 운동, 유관순 열사 전기 발간사업, 金佐鎭(김좌진) 장군 추모사업 등 공익문화사업을 벌여 왔다.
“14대 총선에서 낙선 후 아내와 함께 한달 동안 유럽 등지로 외유를 하고 돌아와 장학재단을 설립했습니다. 그동안 정치하느라 썼던 돈은 연 5억원은 됐습니다. 그 1년 분을 장학재단에 기금으로 낸다. 이렇게 해서 출발한 장학재단이 해마다 기금을 증액 출연해 지금은 출자자산이 64억, 자산 평가액이 200억원이 넘는 중견 장학재단이 됐어요.”
현재 장학사업 활동 예산은 연간 8억~10억원 규모로 60%는 장학금 지급, 40%는 향토문화사업에 투자하고 있단다.
‘태안 기적’의 주인공
2004년 10월 26일, 이인구 회장은 계룡장학재단 사업의 일환으로 충남 천안시 독립기념관에 광개토대왕비 복제비를 기증했다. 현재 독립기념관 겨레의 집 앞에 설치된 광개토대왕비는 국가정보원, 전쟁기념관 등지에 있는 광개토대왕비 모조비의 재질(섬유강화플라스틱, FRP)과 다른 광개토대왕비의 원석과 같은 돌로 된 실물 크기의 복제비다.
이 회장은 광개토대왕비 원비(높이 6.4m)를 그대로 재현하기 위해 중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원비와 같은 재질의 돌(응회암)을 구했다. 응회암은 1억년 전 백두산 폭발 때 화산재가 쌓여 형성된 돌이다.
이 회장은 “80t 가량의 이 원석을 중국측에 ‘가공용 석재’라고 속이고, 특수 트레일러 차량으로 톈진(天津)항을 통해 인천항으로 이송했다”면서 “그 과정에서 교량과 가옥 등이 훼손돼 보상비도 만만치 않게 물어야 했다”고 했다. 지금 광개토대왕비는 독립기념관의 명물이 됐다.
이인구 회장은 2007년 12월 7일 발생한 허베이 스피리트호 기름유출 사고 때 태안사태 대책위원회 자문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기름방제 복구지원비로 3억원을 기탁한 것을 비롯해 회사의 장비를 동원, 오염지역 복구에 나서 천리포와 만리포 해수욕장 복구를 전담했다.
“100만명이 넘는 자원봉사 기적이 펼쳐졌지만 해안가 주변의 기름 방제와 자갈닦기에 그쳐 아쉬웠습니다. 정작 생태적으로 중요한 갯벌복원에는 정부와 지자체가 소홀히 했어요.”
이 회장은 우선 천리포와 만리포 해수욕장의 복구를 전담하기로 하고 중장비와 인력 등 1억여 원에 상당하는 지원을 했다. 그는 李完九(이완구) 충남도지사에게 “지금 방제사업으로는 해수욕장과 갯벌을 살릴 수 없다”며 “방제를 무료로 해줄 테니 내게 전권을 달라”고 했다.
그는 해수욕장 방제에 회사의 굴착기를 동원, 건설현장에서 쌓인 노하우를 바탕으로 일명 ‘트렌치 공법’을 개발해 적용했다. 미국 학회에서도 놀란 이인구 회장의 아이디어였다.
“해수욕장은 일정한 경사가 있습니다. 중장비를 동원해 모래사장을 수박에 줄을 긋듯 2m 깊이로 파서 쌓아 모래제방을 만들면, 제방의 모래무게가 모래를 눌러 짜 트렌치(도랑)로 기름이 빠집니다. 이런 원리로 전체 해수욕장을 굴착해 대부분의 기름을 제거했고, 기름을 완전 제거하기 위해 모래사장에 기름 먹는 박테리아를 주사했습니다. 이 방식은 미국 국립해양연구원에서 세계 최초의 오염제거 방식으로 소개됐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산타마리아 해변이 기름으로 오염이 됐는데, 7년 동안 해수욕을 못했습니다. 우리는 지난해 6월에 논스톱으로 해수욕장을 오픈하는 기적을 달성했습니다.”
대전시민에게 名品 시민의 숲 기증
이 회장은 갯벌 복원에 더 주목했다. 갯벌은 한 번 오염되면 30~50년간 양식을 못하기 때문이었다.
“태안은 3억3000만㎡(1억평) 면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갯벌 양식장입니다. 태안 군민들이 갯벌에서 조개를 잡아 생업을 해 나갑니다. 궁리하다가 갯벌의 試料(시료)를 채취해 미국 환경보호청 산하 국책연구소에 보냈고, ‘갯벌에 기름기를 제거한다고 뒤집어 놓지 말고 자연치유에 맡기면 2~3년 만에 원상복귀 될 수 있다’는 통보를 받았어요. 대신 자연치유를 돕는 약품을 갯벌에 조금씩 뿌려주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 말대로 했더니 거짓말처럼 작년 8월에 갯벌이 개방되고 다시 조개를 잡고 있습니다. 해수욕장 개장하는 날, 태안시에서 명예태안시민증을 주었고, 정부에서 유류오염방제 공훈으로 국무총리 표창을 주더군요.”
이인구 회장은 私財(사재) 100억원을 들여 대전시 유성구 유성구청앞 갑천 삼각주 일대의 5만7400㎡(1만7400평) 부지에 대전시민의 숲을 조성하고 있다. 이 공원은 계룡건설이 직접 시공해 완공 후 대전시에 기부채납할 예정이다.
-어떤 계기로 ‘대전시민의 숲’을 조성해 대전시민들에게 기증하기로 한 겁니까.
“2007년 4월 18일은 제 77세 喜壽(희수)였습니다. 기업활동을 하면 배당금 등 私財(사재)를 모을 수 있습니다. 나는 희수기념사업으로 100억원을 사회에 환원할 방법을 곰곰이 생각하고 이를 朴城孝(박성효) 대전시장과 상의했습니다. 결국 그 돈으로 대전에 ‘명품 공원’을 조성하기로 하고 대전시와 양해각서(MOU)를 체결한 겁니다. 공사는 2007년 10월 시작했고, 현재 80% 공정이 진척되고 있습니다. 준공 즉시 이 조성물은 대전시에 기부채납합니다. 올해 대전의 전국체전과 우주대회를 앞두고 7월말 완공계획으로 있습니다.”
-시민의 숲 건설과정에서 모델로 삼은 공원이 있습니까.
“15명으로 시민의 숲 자문위원단을 구성해 국내 6군데, 일본의 삿포로공원, 도쿄의 히비야공원 등 일본 전역의 공원을 벤치마킹했습니다. 공원 설계는 테마파크 공원 설계로 권위가 있는 삼성에버랜드에 맡겼습니다. 교목류 1600여 주, 관목류 6만여 주, 초화류 13만여 본이 심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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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12일 대전 유성구청 맞은편에 조성중인 ‘유성 시민의 숲’ 현장에서 계룡건설 이인구(왼쪽) 명예회장이 박성효 대전시장(오른쪽 두번째), 진동규 유성구청장 등 참석자에게 조감도를 설명하고 있다. |
지역사랑의 징표
이 회장은 ‘대전시민의 숲’ 추진과정에서 여러가지 걸림돌이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먼저 대전시가 확보하려던 용지는 국토해양부 소유여서 무상 양여를 받는 데 7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2007년 10월 간신히 착공했지만 이번에는 예정지 안에 있는 유성구청 소유의 땅(9000여㎡)이 문제였다. 유성구청이 평생학습원 예정지라는 이유로 대체용지 확보와 건축비 지원을 대전시에 요구하면서 공사가 지연된 것이다. 이 회장은 대전시와 유성시가 ‘핑퐁게임’을 벌이자 기부를 철회하겠다며 으름장을 놓았고, 결국 대전시가 부지대금을 지불하는 것으로 일단락됐다고 한다.
오는 7월 대전시에 시민의 숲이 완공되면, 유성온천~시민의 숲~한밭수목원~엑스포과학공원에 이르는 갑천변 생태 녹지축이 완성될 전망이다.
박성효 대전시장은 지난해 6월 공원 중간공정 공개설명회에 참석, “시민의 휴식공간이 유성온천에서부터 시작해 시민의 숲과 갑천 등으로 이어져 유성활성화의 시발점이 될 것”이라면서 “특히 새로운 기부문화의 한 형태로서 시민의 숲은 국내 최초이며, 이 회장의 지역에 대한 애정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라고 말했다.
이인구 회장은 “40년 전 雅號(아호)를 넉넉한 숲, 우거진 숲, 재산도 넉넉해지길 바라는 뜻의 裕林(유림)으로 지었다”면서 “숲이 우거지고 사계절 꽃이 피는 시민의 휴식공간을 만든다고 생각하니 비로소 ‘대전사랑의 왕초’가 된 느낌”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