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남는 물리학자가 되는 것이 꿈”
자리에마주앉자 그가 묻는다.
“사진은 안 찍나요?”
촬영에 대비, 아침에 이발소를 다녀왔다는 얘기다. 치밀하고 적극적인 그의 성향 한 자락이 슬쩍 드러난다. 팀원들과 함께 쓰는 그의 사무실엔 책이 별로 없다. 과학자란 정보의 포식자 아닌가? 책을 이미 머리에 집어넣은 탓인가? 그가 말한다.
“책이 왜 많이 필요하죠? 인터넷에 모든 정보들이 들어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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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자통신연구원 김현탁 박사. |
實利(실리)와 實用(실용)을 중시하는 성향이 엿보인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의 金鉉卓(김현탁·51) 박사. 그는 이름 날리는 과학자다.
‘모트 假說(가설)’이란 게 있다. 1949년, 영국의 물리학자 네빌 모트 교수에 의해 제기된 설이다. 전기가 통하지 않는 절연체도 미세한 충격을 가하면 전기가 통하는 금속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으로 이른바 ‘금속절연체 전이(MIT) 이론’이다. 이 가설은 이후 56년간 그 어느 물리학자도 증명하지 못했는데, 지난 2005년 김 박사가 세계 최초로 증명해 보였다.
이로써 김 박사는 하루아침에 스타가 됐다. “萬有引力(만유인력) 발견 이후 최대의 발견”이라는 찬사까지 있었다. 그러나 성과 부풀리기가 아닌가 하는 혐의를 제기한 물리학회의 저항(?) 때문에 한동안 잡음이 일었다. 2007년, 김 박사의 해당 논문이 세계 최고권위의 미국 <사이언스>誌(지)에 게재됨으로써 논란은 그쳤다.
김 박사팀은 전류가 통하지 않는 바나듐옥사이드라는 不導體(부도체)에 전압 충격을 가해 전류가 흐르도록 하는 실험에 성공했다. 현재의 半導體(반도체) 소자의 절반은 도체이고, 절반은 부도체이다. 부도체 소자의 경우 열이 많이 난다. 그런데 ‘금속절연체 전이’를 적용해 열이 덜 나는 소자를 만들 수가 있는 것이다. 엄청난 열로 인한 에너지 낭비를 현저하게 줄일 수 있다는 얘기다.
이 획기적인 연구 성과는 반도체보다 더 작으면서도 전기는 금속처럼 잘 흐르는 극소형 소자 개발에 적용돼 휴대전화 등 각종 전자기기를 소형화할 수 있으며, 過(과)전압에 따른 각종 전기장치와 기기 고장을 원천적으로 막는 소자를 개발할 수 있다. 차세대 디스플레이, 메모리, 光(광)소자, 열감지 센서 등 광범위한 분야에 적용돼 약 1000억 달러(약 150조원)로 추정되는 세계시장을 선점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은 흔히 노벨상에 갈증을 느낀다. 한국의 과학계에서도 노벨상 가망성이 있는 학자들을 손가락으로 꼽아보기도 하는데, 김 박사도 물망에 오른다. 그러나 그는 노벨상에 별 관심이 없다.
“국내 과학계도 이제 어느 정도의 기초는 됐습니다. 미국이나 일본에 비해 연구자 숫자가 적고 근성도 부족하지만 어느 분야에서건 노벨상이 나올지도 모를 상황입니다. 그러나 노벨상을 받기 위해 공부하는 것은 아닙니다. 노벨상이야 어쨌건 ‘중요한 연구를 조금은 했구나’ 하는 자긍심을 가질 뿐이죠.”
“과학자에게 자유를 주지 않는 나라”
그의 음성은 카랑카랑 공간을 울린다. 하나의 세계에 몰입된 자 특유의 맹렬함과 생동감이 완연하다. 그의 일상에 휴식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생활 자체가 연구 활동”이라는 것이다. 연구 자료를 집에까지 끌고 가며, 기차에서도 논문을 본다. 모든 대화도 연구의 연장이다. 불교식으로 얘기하자면 五體投地(오체투지)다.
이 야무진 과학자에게 멍청한 질문을 한다. “대체 궁극의 그 무엇을 위해 성난 수말처럼 그토록 뛰느냐”고. 그가 말한다.
“그거 간단해요. 역사에 남을 훌륭한 물리학자, 그게 꿈이었거든요.”
그렇다면 과학자가 꿈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건 무엇인가. ‘무진장한 노력’ 이외에 뾰족한 수가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물론 노력으로 돌파할 수 없는 상황의 한계라는 것도 있다.
그는 젊은 시절 한때 연구를 버리고 회사에 취직한 적이 있었다. 생계를 위해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어려움 있으면 당해야 한다!” 이게 그의 소신이다. 그러나 열심히 하면 반드시 運(운)이 따라준다는 게 世事(세사)를 바라보는 그의 기본 관점이며, 그 견본이 바로 자신이라 자부한다. 이런 그가 보는 국내 과학계의 폐단은 무엇일까.
“과학자에겐 자유와 창의성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자유라는 걸 주지 않습니다. 자유를 노는 걸로 오해합니다. 제가 일본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3년간 ‘꽃 중의 꽃’이라 부를 만한 졸병 교수 시절을 보냈어요. 그런데 충분한 자유를 주더군요. 국내 같으면 어림없죠. 이제 막 박사학위를 받은 학자에게 일본 같은 자유를 주는 대신 실적을 빨리 내라고 혹독하게 쥐어짜게 되어 있거든요. 일본은 그렇지 않습니다. ‘꽃 중의 꽃’, 그런 위치를 누릴 수 있는 학문 풍토가 있기에 일본이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고 있는 겁니다. 한국은 ‘꽃 중의 꽃’ 부분이 매우 취약합니다.”
劉龍박사 한국과학기술원·KAIST
“노벨상에 대한 환상을 버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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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학기술원특훈교수 유룡 박사. |
어려서부터 과학자의 꿈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농민의 아들로 자라며, 그저 한시 빨리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어 공부를 열심히 했다. 호롱불 아래의 주경야독 덕분에 서울대 화학공학과에 합격할 수 있었다. 이후, 등록금도 없고 병역특례 혜택도 받을 수 있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 석사 과정에 들어감으로써 비로소 과학자의 포부를 품었다. 포부는 관철됐다. 이제 그는 ‘국보급 과학자’라는 소리를 듣는다. 한국과학기술원 특훈교수 劉龍(유룡·54) 박사다.
유 박사는 2007년 11월, 국가과학자위원회로부터 ‘국가과학자’로 선정됐다. 국가과학자에게는 매년 15억원씩 최대 6년간 연구비가 지급된다. 파격적인 대우다. 유 박사는 나노 多孔性(다공성) 탄소물질 연구분야에서 세계적인 과학자다. 그는 2∼50㎚(나노미터·10억분의 1m)에 해당하는 메조영역 크기의 구멍이 규칙적으로 배열된 메조다공성 탄소물질을 만들어 주목을 받았다.
그는 이산화규소 물질 속에 분자나 원자들을 조립시키는 새로운 합성법인 ‘나노주형합성법’을 개발, 누구나 손쉽게 나노 수준 크기의 다공성탄소물질을 만들 수 있도록 했다. 이 물질은 석유화학 제품을 만들 때 화학반응을 촉진시키는 촉매제, 하이브리드 자동차에 쓰이는 연료전지와 수퍼축전기, 차세대 연료기체저장매체, 비료, 의료기기 등 매우 다양한 분야에 활용될 수 있다.
이러한 성과를 인정받아 유 박사는 주목을 받았지만, 그는 “나노 분야가 잠실운동장이라고 한다면 제가 연구하는 분야는 손바닥 크기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과학자에게는 타고 난 적성이 있어야 합니다. 왕성한 知的(지적) 욕구와 호기심, 모험심 같은 게 필요한 것이죠. 창의성은 이런 것에서 나옵니다. 문학에서 창의성이 요구되듯이 과학도 똑같습니다. 창의적인 과학자는 기존의 인습이나 관행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사고의 자유는 중요한 거예요. 서양 과학이 발전한 것은 그들의 자유로운 사고방식과 생활의 결과입니다.”
“논문 편수로 과학자 평가하는 것은 후진적”
유 박사는 국내 과학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의 하나로 논문 편수로 과학자를 평가하는 풍조를 꼽는다. 그는 “<네이처>나 <사이언스> 같은 과학 저널에 논문을 발표해야 반드시 좋은 과학자인가”라고 묻는다.
“연간 발표되는 논문의 量(양)이 그 나라의 과학 수준을 대변하는 것으로 알지만, 문제는 논문의 質(질)입니다. 소설가가 多作(다작)을 한다고 해서 그게 다 秀作(수작)인가요? 과학도 마찬가지죠. 국내에서 과학자를 평가하는 기준의 90%는 논문 숫자에 두고 있습니다. 매우 후진적인 평가 방식이죠.”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그는 네 가지 방법이 있다고 말한다.
“첫째는 국제학회에서의 활동상이나 업적을 평가해야 합니다. 둘째는, 논문의 彼引用(피인용) 빈도를 봐야 합니다. 셋째는 좋은 저널에 논문을 냈느냐의 문제, 그리고 넷째가 논문 편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