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MB(이동멀티미디어방송)폰의 광고 모습.
지난 30여 년간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이 말이 주는 의미는 명확했다. 초등학생부터 주부까지, 대덕연구단지 하면 ‘과학과 기술’을 떠올렸다. 대덕연구단지는 지난 2005년 관련 특별법이 마련되면서 32년간 사용해 왔던 이름을 ‘대덕연구개발특구’(이하 대덕특구)로 변경했다. 하지만 아직 사람들은 이 용어에 익숙지 않아 여전히 ‘대덕연구단지’라고 부른다.
지난해 10월 민주당 金富謙(김부겸·51겚믄?교육과학기술위원장) 의원은 <위클리 조선>과 인터뷰에서 현재의 대덕특구를 방문한 소감을 이렇게 밝혔다.
“朴正熙(박정희) 대통령이라는 지도자가 국민소득이 300달러밖에 되지 않던 시대에 어떻게 이런 장기적인 비전을 갖고 과학기술연구에 투자했을까 하는 안목에 고개가 숙여졌다. 당장 눈앞에 이익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중략) 돌아와서 과거 민주화운동을 함께했던 선배들에게 그 충격을 고백했다. 그때 그분들은 30~40년 후를 준비하고 내다본 것이었다.”
김부겸 의원의 얘기처럼, 대덕연구단지와 박정희 대통령은 떼어놓을 수 없다. 趙甲濟(조갑제) 前(전) 月刊朝鮮(월간조선) 대표의 저서 <박정희>에 따르면, 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대부터 한국 산업구조가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 바뀌자 고급기술 개발의 필요성을 절감했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새로운 연구소들을 서울 홍릉 일대 연구단지에 설립하려 했으나, 건설 용지가 부족했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대덕이다.
1978년부터 약 30년간 대덕연구단지에서는 엄청난 기술들이 탄생했고, 그 기술들은 대한민국에 풍부한 먹을거리를 제공했다. 대덕특구로 改名한 이곳에서는 여전히 그 작업이 진행 중이다. 대덕특구의 대표적 특산품과 현재 만들고 있는 특산품을 소개한다.
반도체 강국 코리아, 신화의 시작 - 64M DRAM
삼성전자는 지난 1992년 11월 전 세계 최초로 64M DRAM 시제품을 만들었다. 이때부터 반도체 강국 코리아의 신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하지만 이 신화를 작성한 筆者(필자)는 삼성전자 혼자가 아니다. 대덕특구에 있는 ETRI(한국전자통신연구원)가 이 신화의 숨어 있는 저자다. ETRI는 국책 연구기관으로 컴퓨터와 반도체 등의 전자 부문과 통신 부문의 기술을 연구, 개발하는 곳이다.
지난 1991년 4월 ETRI는 차세대 DRAM 핵심 단위 소자를 발명했다. 이 소자는 통상적인 개념을 뛰어넘어 소비전력을 극소화하는 동시에, 동작 속도를 극대화할 수 있었다. ETRI는 이 기반 위에서 1992년 11월 선폭 0.4㎛, 칩 크기 210㎟ 수준의 64M DRAM 시제품 개발에 성공했다. 16M DRAM 개발로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일본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우리나라는, 64M DRAM의 개발로 일본을 넘어, 메모리 반도체 분야의 세계 정상에 우뚝 서게 됐다.
ETRI 김희철 홍보팀장은 “64M DRAM을 개발하면서 향후 256M DRAM 이상에서도 적용할 수 있는 기술을 구축한 것이 더 큰 의미를 지닌다”고 했다.
ETRI는 56M DRAM 개발부터는 선행 연구만 담당하고 기업이 기술개발을 주도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1988년 4M DRAM, 1991년 16M DRAM, 1992년 64M DRAM, 그리고 1994년 256M DRAM 개발까지, ETRI는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우리나라 메모리 반도체 분야의 기술력을 10년 만에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ETRI는 지난 1995년 9월 세계 최초로 아르곤 레이저광학계를 개발해 국내 반도체 기술을 메가(M) 시대에서 기가(G) 시대로 진화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한국산업연구원에 따르면, 2010년 국내 DRAM 산업부문 예상 매출액은 약 289조원이다. 반도체라는 대한민국의 특산품은 대전특구에서 자랐고 이곳에서 수확된 것이다.
휴대폰 강국의 비밀 - CDMA 상용화
지난 2008년 세계 휴대폰 시장에서 삼성전자는 1억9700만대를 팔아 세계 2위에 올랐다. LG전자는 1억70만대를 팔아 2007년 5위에서 두 계단 뛰어올라 3위로 올라섰다. 1위 핀란드 업체 노키아를 제외하면, 3强(강) 가운데 두 곳이 한국 기업이다. 한국이 휴대폰 강국이 된 배경에도 역시 ETRI가 있다.
지난 1991년 당시 미국의 TDMA, 유럽의 GSM, 일본의 PDC 방식이 세계 표준방식으로 채택되기 위해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다. ETRI는 이때 미국 퀄컴社(사)로부터 CDMA 기술 개발 제안을 받았다. 퀄컴은 이 기술의 원천기술을 개발했지만, 이를 발전시켜 실제 휴대폰 시스템으로 채택하는 상용화 기술이 없었다.
ETRI 측에 따르면, 당시 양승택 ETRI 소장과 안병성 단장은 고민을 거듭했다고 한다. CDMA 기술 개발을 반대하는 여론이 높았기 때문이다. ETRI 김희철 홍보팀장은 “당시 미국에서도 TDMA 방식이 표준화되어 있었다”며 “이 상황에서 또 다른 이동통신 기술을 개발할 필요가 있느냐는 여론이 높았다”고 말했다.
또 수천억에서 수조 원을 들이는 선진국과 달리 불과 670억원에 불과한 예산도 큰 장애가 됐다. 하지만 ETRI는 CDMA 기술 상용화에 뛰어들었다. 선진국 기술에 종속되지 않고 우리만의 휴대폰 시스템을 개발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ETRI와 퀄컴은 지난 1991년부터 연구를 시작했다. 당시 체신부는 CDMA 상용화를 성공시키기 위해 이동통신 기술개발사업관리단을 설치하고 당시 徐廷旭(서정욱·75·후에 과학기술부장관) KIST 단장에게 단장직을 맡겼다.
ETRI는 주간 보고제, 기술분석 프로그램 등을 도입해 프로젝트 진행상황을 철저히 관리했다. 이런 과정 덕분에 개발기간을 크게 단축하여 최초로 KCS(Korean Cellular System)-1이 개발됐다. 이 시스템을 토대로 기능을 추가하고 재설계를 시도해 시제품인 KCS-2를 제작했고, 1994년 4월 KCS-2 첫 통화 시험에 성공했다.
이후 1995년 6월 9일 서울 코엑스 무역센터에서 CDMA 상용 시험통화 시연회가 개최됐다. 시연회에서 CDMA 시스템이 장착된 휴대폰이 우렁차게 벨이 울리면서 휴대폰 강국 한국의 역사가 시작됐다.
ETRI는 CDMA 상용화 성공으로 지난 10년간 미국 퀄컴사로부터 3000억원이 넘는 로열티를 받았다. 기술 개발비 670억원의 약 4배에 달하는 금액이다. 대전특구지원본부에 따르면, CDMA 상용화로 인한 경제적 가치는 지금까지 약 56조4000억원에 달한다.
IT 혁명의 밑거름 - TDX(全전자교환기) 개발
한국이 휴대폰 강국이 된 배경에는 CDMA 기술 상용화가 있었다. 그렇다면 CDMA 기술을 개발할 수 있는 원동력은 어디에 있을까. 유선전화 시스템의 핵심인 TDX(전전자교환기) 개발이 그 원천이었다. 국내 기술진은 TDX를 개발한 노하우를 통해 한 차원 더 높은 기술인 CDMA를 개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교환기는 이용자가 건 전화번호로 통화를 연결해 준다. 이는 유선전화 시스템의 핵심장비다. 전화가 처음 상용화됐을 때, 교환 작업을 사람이 직접 했다. 과거 우체국에 있던 전화교환원을 떠올려 보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이후 교환기는 기계식을 거쳐 半(반)전자교환기, 全(전)전자교환기로 진화했다. TDX는 유선전화 시스템의 정점에 있는 기술이다.
TDX 국산화 논의는 1976년부터 시작됐다. 당시 우리나라는 전화 적체가 심각한 상황이었다. 경제 규모가 확대되면서 전화 수요는 폭증했지만 교환기 등 인프라의 미비로 직장이나 가정에서 전화 한 대 놓으려면 몇 년씩 기다려야 했다.
그렇다고 값비싼 외국 기종의 전자교환기를 수입하는 것은 생고생을 해 가며 어렵게 벌어들인 외화를 유출시키는 행위였다. 때문에 정부와 산업계의 지상명령은 ‘전전자교환기의 국산화’였다.
하지만 반대 여론이 만만치 않았다. 1982년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예산인 240억원이 TDX 개발에 배정됐다. KTRI(ETRI의 前身)의 1981년 연구개발비 예산이 24억원이었다. 吳明(오명·70) 前(전) 정통부 장관은 “정치권에서는 TDX 개발을 ‘무모한 국책사업’이라고 질타하면서 ‘이처럼 성공 가능성이 불투명한 사업에 돈을 쏟아 붓느니, 차라리 한강다리를 하나 더 놔라’고 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1982년 초 KTRI 崔順達(최순달·78) 소장은 이른바 ‘TDX 血書(혈서)’라 불리는 한 장의 각서를 崔侊洙(최광수·74) 체신부장관에게 전달한다. 각서의 내용은 이랬다.
“연구원 일동은 TDX 개발에 실패할 경우, 어떤 처벌이라도 달게 받을 것을 서약한다.”
KTRI 연구원들과 당시 국내 통신기기 메이커인 삼성, LG, 대우 등에서 파견된 기술진은 5년간 선진 각국의 전전자교환기를 해체하여 국산화 작업에 돌입했고, 관련 논문 수백 편을 분석하여 소프트웨어 개발에 돌입한 결과, 1985년 3월 한국은 세계 열 번째로 TDX 개발에 성공했다. 그때부터 우리나라는 전전자교환기 국산화에 돌입, 음성은 물론 각종 데이터, 화상까지 전송해 주는 획기적인 시스템을 마련함으로써 IT 혁명의 기폭제 역할을 하게 된다.
ETRI의 2001년 집계 결과에 따르면, 1982년부터 2001년까지 TDX 연구개발비로 모두 1500억원을 투자했다. 초기 투자비는 240억원이지만, 상위 버전을 만들기 위해 추가 비용이 투입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청나게 남는 장사였다. TDX 국산화 성공으로 수입대체 효과 4조3406억원, 수출 1조458억원 등 모두 5조3864억원의 경제효과를 창출했다.
특히 CDMA(부호분할다중접속)와 와이브로(휴대인터넷) 세계 첫 상용화, 디지털멀티미디어방송(DMB) 상용화 등의 초석이 됐다는 점에서 TDX 개발의 경제적 부가가치는 매년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신약 개발 강국의 시작 - 에이즈 치료 후보물질 개발
에이즈(AIDS)는 ‘20세기의 흑사병’이라 불린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지난 2004년 전 세계 인구 가운데 5600만명이 HIV에 감염, 280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조사됐다. 아직 완전한 치료제는 없지만, 다양한 에이즈 치료제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관련 시장도 매년 성장하고 있다.
한국화학연구원의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06년 에이즈 치료약 시장은 91억 달러. 최근 5년간 매년 13% 성장률을 보이고 있다. 이런 수치로 가면 2009년 121억 달러(18조원), 2012년에 160억 달러(24조원) 규모로 늘어날 전망이다.
에이즈 치료제 시장은 미국과 유럽의 다국적 제약 회사가 장악하고 있다. 아직 이렇다 할 에이즈 치료제를 개발하지 못했던 우리나라가 이제 도전장을 내밀었다. 첫 도전치고는 꽤 당차다.
지난 2008년 7월 대덕특구에 있는 화학연구원의 孫鍾贊(손종찬·57) 박사팀이 기존 약품보다 부작용이 적은 에이즈 치료제 후보물질을 개발했다. 화학연구원은 에이즈 치료제 시장점유율 1위인 미국계 다국적 제약사인 길리아드社(사)에 기술이전 계약을 체결했다.
이번 계약에 따라 화학연구원은 길리아드로부터 1차 기술료 10억원을 포함한 정액기술료 85억원과 2028년까지 매출에 따른 경상기술료(러닝 로열티)를 받는다. 전체 로열티 규모가 약 4500억원이 넘는다. 화학연구원 오헌승 원장의 설명이다.
“길리아드는 지난해 하반기에 미국 식품의약국(FDA)에 임상시험을 신청했습니다. 약 5년 뒤면 상용화가 가능해 길리아드로부터 2013년부터 2028년까지 매년 300억원(15년간 4500억원) 규모의 러닝 로열티를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손종찬 박사팀이 만든 후보물질의 효능은 어떨까. 손종찬 박사의 이야기다.
“기존 치료제의 신경계통 부작용과 유전적 독성을 최소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했습니다. 하루 한 번 투여하는 편리성과 약효 덕분에 기존 치료제를 대체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어요.”
손박사 팀은 1998년부터 지식경제부를 포함한 정부 지원금 22억원과 2006년부터 길리아드와의 공동연구비 5억4000만원 등 모두 27억4000만원을 들여, 이번 후보물질 개발에 성공했다. 손 박사는 10년 동안 연구를 하면서 실패를 거듭했다. 연구를 중도에 포기하려고도 했다. 손 박사의 얘기다.
“국내는 아직 신약개발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상황이라, 가시적 성과가 도출되기 힘든 연구를 지속하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에이즈 치료제를 시장에 내놓겠다’는 당초 목표를 유보했습니다. 아무 것도 남기지 않는 것이 억울해서, 논문이라도 남기기 위해 벨기에 ‘레가연구소’에 그간 연구해온 화합물에 대한 테스트를 의뢰했어요.”
그런데 테스트 결과가 기대 이상이었다. 결과에 고무된 ‘레가 연구소’의 주선으로 타미플루(경구용 독감 치료제) 개발의 주역인 길리아드社(사)의 金正恩(김정은) 부사장과연결돼 공동작업 끝에 후보물질 개발에 성공했다.
우주를 여는 기술 - 인공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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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해양기상위성 상상도. |
지난해 우리나라는 첫 우주인을 배출했고, 올해는 전남 고흥의 외나로도에서 소형 인공위성 발사체인 KSLV-I을 발사한다. 自國(자국) 위성을 자국의 발사체로 쏘아 올리는 것은 우주개발에 있어 상당히 큰 의미를 갖는다. 李柱鎭(이주진) 항공우주연구원장의 이야기다.
“2009년 2월 말 현재, 자국에서 위성발사에 성공한 나라는 최근 위성발사에 성공한 이란을 포함하여 9개국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우리나라가 위성발사에 성공할 경우, 사실상 세계 10위권의 우주강국에 진입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나라의 인공위성 역사는 선진국에 비하면 일천하다. 1992년 8월 실험용 소형 과학위성인 우리별 1호를 발사하면서 비로소 자국 인공위성을 소유한 나라가 되었다. 이듬해인 1993년 KAIST 인공위성연구센터는 우리별 1호 개발 중에 획득한 기술을 활용해 우리별 2호를 국내에서 개발하여 발사에 성공했다. 1999년 5월 26일 성공적으로 발사된 우리별 3호는 기존의 우리별 1호 및 2호의 개발경험을 바탕으로, 국내에서 독자적으로 설계한 최초의 국내 고유 위성모델이다.
기상, 통신 등에 사용되는 상업위성의 발사는 1999년에 이르러 처음 성공했다. 1999년 12월 21일 아리랑위성 1호를 발사했고, 2006년 7월 28일에 아리랑위성 2호를 발사하여 운용하고 있다. 현재 2010년 발사 예정의 아리랑위성 5호와 2011년 발사 예정의 아리랑위성 3호를 개발 중에 있다. 이들 실용위성은 대규모 자연재해 감시, 각종 자원의 이용실태, 지리정보시스템 구축, 지도제작 등 다양한 분야에 활용된다.
올해 말 또 하나의 위성이 발사를 기다리고 있다. 이른바 정지궤도 위성인 통신해양기상위성이다. 현재 항공우주연구원과 프랑스 업체가 공동으로 제작해 발사체에 탑재한 상황에서 다양한 시험을 진행 중이다. 정지궤도 위성 제작 발사는 우주산업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항공우주연구원 崔聖奉(최성봉·50) 통신해양기상위성사업단장의 설명이다.
“저궤도 위성은 지상 약 600~800㎞ 상공에 떠 있습니다. 반면 정지궤도 위성은 지상에 약 3만6500㎞ 상공에서 지구의 자전속도에 맞춰 함께 움직입니다. 그래서 항상 그 위치에 정지해 있는 것 같다고 해서 정지궤도 위성이에요. 현재 해상관측, 기상관측을 위해서는 일본의 정지궤도 위성에서 보내준 자료를 받아서 활용하고 있어요. 하지만 일본과 관계가 틀어 질 경우, 이 자료를 못 받을 수도 있어요. 우리가 정지궤도 위성을 보유하면 이런 위험이 줄어들고, 현재 40분 간격으로 받는 자료를 15분 간격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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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봉 통신해양기상위성사업단장. |
최 단장은 정지궤도 위성을 보유해야 하는 다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정지궤도 위성에서 내려다보면 지구가 완전한 구가 됩니다. 이는 全(전)지구적인 데이터를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기상관측, 각종 해양관측, 지도 제작을 위한 관측 때 거시적인 자료를 얻을 수 있어요. 저궤도 위성에서 찍은 미시적인 자료와 합치면 더욱 정확한 데이터를 보유할 수 있는 겁니다.”
최 단장은 “정지궤도까지 위성을 올리려면 매우 높은 기술력이 필요하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정지궤도 위성은 지상 250㎞에서 발사체와 분리돼, 지상 약 600㎞에서 타원형을 그리며 세 번 추진하여 3만6500㎞에 도달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자체 추진기술이 발달해야 합니다. 또 그 높은 곳에서 지상과 통신을 해야 하니 통신기술이 매우 정교해야 하죠. 마지막으로 전력을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전지기술이 우수해야 합니다. 때문에 정지궤도 위성을 제작하는 동안 각 분야의 기술력이 크게 향상됩니다. 우리나라가 정지궤도 위성을 독자적으로 보유해야 앞으로 인공위성 산업에서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