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鍾明 中都日報 기업·연구단지 팀장〈cmpark60@hanmail.net〉
대덕연구개발특구(이하 대덕특구)는 한국을 대표하는 R&D 허브(hub)다. 수도권을 제외하고는 국내 최고의 기술력을 보유한 곳이다. 그러나 李明博(이명박) 정부 들어 이런 명성이 흔들릴 위기에 처해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 행정도시 예정지의 자족기능 강화를 위해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를 조성하겠다고 공약했다. 이에 따라 대전시는 새 정부 출범 후 대덕특구를 중심으로 한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조성을 건의하고 있지만 정작 정부는 별 반응이 없다. 자칫하면 새로운 연구원 설립에 따른 대덕특구의 동반 하향 평준화가 우려되는 상황이다.
중복투자 우려
정부의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종합추진계획은 3000명 규모의 세계적 수준의 기초과학연구원을 설립하고 대형연구시설로 중이온가속기를 설치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하지만 이미 조성된 인프라를 연계한 벨트 조성보다는 과학도시를 신규로 조성하겠다는 것이어서 대덕특구 인프라와의 중복될 뿐만 아니라, 이미 구축된 대덕특구의 연구소·기업의 유출마저 예상되고 있는 상항이다.
김영빈 대전시 과학협력 담당은 “정부의 공청회 및 각종 간담회에서 대덕특구 출연연구기관과의 중복 문제 등을 지속적으로 제시했으나 뚜렷한 대응방안이 없는 상태”라며 “대덕특구의 기존 인프라를 최대한 활용해 기초과학연구원과 중이온가속기를 설립하고 발전 가능성이 큰 세종시 및 오송, 오창을 연계하는 것이 ‘최소 투자로 최대 효과’라는 실용정부 이념에도 부합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예산지원이 지지부진한 것도 대덕특구에 대한 정부의 의지를 의심케 하는 대목이다. 盧武鉉(노무현) 정권 시절인 2004년 3월 제42회 국정과제 회의에서 대덕연구개발특구 육성방침이 결정돼 2005년 7월 대덕연구개발 등의 육성에 관한 특별법이 시행에 들어갔다.
이에 따라 2006년부터 2010년까지 매년 1000여 억원씩 모두 6600억원을 들여 연구성과 사업화를 촉진하고, 벤처 생태계 조성 및 글로벌 환경 구축 등의 특구육성종합계획이 마련됐다. 하지만 2005년 100억, 2006년 250억, 2007년 500억, 2008년 615억, 2009년 580억원 등 모두 2045억원만이 투자돼 목표연도인 내년 1년을 앞두고 고작 31%만 투입됐을 뿐이다.
대덕연구개발특구특별법 제정에 참여했던 金宣根(김선근) 대전대 교수는 “특별법 제정 당시 연구활동, 기업활동, 외국인 거주여건 조성 등이 망라됐으나 관련 부처 간에 이견으로 상당부분 삭제되고 말았다”며 “우리나라 최고 연구자원 집적지인 대덕특구의 연구자원을 활용하는 것이 새 정부가 지향하는 효율성에도 부합한다”고 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대통령 후보 시절 대전지역을 대상으로 내건 공약도 지지부진하기는 마찬가지다. 한나라당 李漢久(이한구) 정책위 의장이 2007년 11월 말 대전시당에서 발표한 공약은 모두 7가지. 이 중 ▲대덕 첨단기술 산업화단지 조성 ▲첨단 과학기술 테마벨트 조성 ▲로봇연구 및 생산 클러스터 구축 ▲자기부상열차 연구·생산 집적화단지 조성 ▲암전문 치료장비 개발 집적화단지 조성 등 대덕특구와 관련된 것이 모두 5가지에 이른다. 하지만 대통령 취임 후 이렇다 할 진전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대전시 중구 태평동에서 사업하는 시민 김남규(45)씨는 “이명박 정부가 대전에 공약한 내용 중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추진되지 않고 있다는 언론보도를 접할 때마다 지역 차별을 당하는 것 같아 기분이 언짢다”며 “정부가 경제를 살리겠다며 예산을 많이 만들어 조기에 집행하겠다고 하는데 대전 경제를 살리고 대한민국 경제를 살리는 길은 대덕특구를 제대로 활용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두 번의 국책사업 유치 실패
첨단의료복합단지, 한국뇌연구원,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등 주요 국책사업 입지가 올 상반기에 결정된다. 그러나 대덕특구엔 기회이자 동시에 위기로 다가오고 있다. 입지 여건상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음에도 로봇랜드 유치 좌절 때와 같이 또다시 정치적 입김에 의해 좌우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대전시는 로봇랜드나 자기부상열차 시범노선 유치에 두 번이나 실패한 경험을 뼈아픈 교훈 삼아 첨단의료복합단지 유치를 위해 2년 넘게 공을 들여왔다. 두 번에 걸친 국책사업 실패를 토대로 국책사업 유치 시스템을 가동하고 자체 역량도 정확히 진단해 정치인과 중앙부처 공무원의 네트워크도 강화했다.
첨단의료복합단지는 정부가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혁신클러스터로 구축하기 위해 30년 동안 모두 5조6000억원이 투입되는 대형 프로젝트다. 이에 전국의 10여 개 지자체가 저마다 자신의 지역이 최적지라는 논리를 펴며 지역 정치권과 공조 속에 치열한 유치전을 펴고 있다. 대전은 국가 간 경쟁이 가속화하는 상황에서 타 지역 조성 시 최소 20~30년 뒤 효과가 발생하는 데 반해 ‘최소 투자로 최대 효과를 조기에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는 점을 강점으로 내세우고 있다.
세계적 추세로나 전국에 산재한 38개 분야별 의료클러스터·센터와의 연계를 위해서도 풍부한 연구인력과 인프라가 구축된 대덕특구를 허브형으로 조성하는 것이 성공 가능성을 가장 크게 한다는 판단에서다. 盧承武(노승무) 충남대 교수는 “대덕특구는 지난 30여 년간 30조원이 투자돼 첨단기술과 융합기술 등 기본이 잘 갖춰진 유일한 곳”이라며 “다른 곳에 조성해 성과를 얻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기를 기다리기보다 여건이 갖춰진 대덕특구에 첨복단지를 조성해 의료산업의 국가경쟁력을 조기에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 같은 2년여에 걸친 각고의 노력과 타 지역에 비해 탁월한 입지 우위에도 입지 선정이 다가오면서 대한민국의 장래 먹을거리를 책임질 일이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결정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정치권 일각에서 ‘과학벨트는 충청권으로, 첨단복합의료단지는 타 지역으로’ 등의 음모론이 제기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李相珉(이상민) 자유선진당 의원은 지난 2월 25일 대전시청에서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토론회’를 가진 자리에서 “정부는 행정도시에 과학벨트를 자리 잡게 하고 이명박 대통령의 공약을 지켰다는 명분을 챙기면서 행정도시는 축소, 변경시키려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든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와 대덕특구가 별개로 추진될 경우 30여 년 30조원의 국민혈세가 투입된 과학기술의 메카라는 국가자산이 유실되고,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도 알맹이 없는 팻말만 걸어놓은 속 빈 강정으로 전락할 우려가 크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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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효(왼쪽에서 여섯번째) 대전시장, 양명승(다섯번째) 원자력연구원장, 이재도(일곱번째) 화학연구원장 등 참석자들이 첨단의료복합단지 대전 유치를 위해 협력하기로 했다. |
“대덕특구의 장점 살려야”
시민들 사이에선 대전이 또다시 정치적 흥정의 희생물이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에서 ‘대전은 버려진 자식’이라는 자조마저 쏟아지고 있다. 시민 민장홍(50·중구 목동)씨는 “대덕특구라는 우리나라 최고의 R&D 인프라가 있음에도 로봇랜드, 자기부상열차 때와 같이 첨복단지 입지 선정이 정치적 입김에 따라 결정되는 게 아닌지 걱정된다”며 “국가 경쟁력과 관련된 일을 정치적 이해득실로 판단하는 것은 나라 경영의 正道(정도)가 아닐 뿐만 아니라 대전을 대놓고 깔보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대전참여자치시민연대 금홍섭 사무처장은 “국책사업은 지역균형발전과 신성장동력의 확보 차원에서 지역의 여건이나 특성을 감안해 정치적 이해관계 등에 흔들리지 않고 추진돼야 마땅하다”며 “그렇지만 과거 자기부상열차나 로봇랜드 등의 국책사업은 심의절차 과정에서 수도권 인사에 의해 수도권 입지가 결정됐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고 평가했다. 금 처장은 이어 “국책사업에 대한 지역간 경쟁이 수도권규제 완화의 반발을 무마하거나 악용돼서는 곤란하다”며 “투명한 절차와 국민이 납득할 만한 과정 속에서 입지 선정이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대전은 지금 30여 년 동안 30조원 넘는 엄청난 재원을 들여 키워낸 대덕특구가 대한민국의 성장동력으로 그 위상을 지속하느냐 아니면 정치적 판단의 결과로 ‘미운 오리새끼’로 전락하느냐 그 갈림길 앞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