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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년 4월호

두바이의 이중성 - 위대한 개츠비, 그리고 위대한 두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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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들이 범상치 않은 화려함을 뽐내기 위해서는 치러야 할 代價가 있다. 그리고 종종 그 代價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떠넘겨진다.

손예린 서울大 영어영문학과
서울大와 교육부가 주관한 저소득층 청소년 대상 멘토링 프로그램 참여.
두바이의 개발현장에는 반드시 그럴 듯한 모형과 조감도를 만들어 놓고 외국 투자자들의 투자를 유혹한다. 외국 자본의 투자에 걸림돌이 되는 모든 규제는 혁파되어 두바이는「기업 天國」이나 다름없다.
  두바이는 화려했다.
 
  만약 이 도시를 사람으로 표현한다면 미국 작가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의 주인공 개츠비가 알맞을 것이다. 이 소설은 192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密酒(밀주)를 제조하여 벼락부자가 된 개츠비의 이상과 꿈을 그리고 있다.
 
  「위대한 개츠비」라는 이름의 의미는 이중적이다. 개츠비는 불가능해 보이는 꿈을 좇는 인간의 의지를 보여 주었기에 위대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가 원했던 대상의 가치가 의문시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가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동원했던 수단이 도덕적으로 올바르지 않았다는 점에서 「위대한 개츠비」라는 이름은 反語的(반어적)인 뉘앙스를 지닌다. 개츠비의 경우에서처럼, 두바이의 위대함에는 이중적인 면이 있다.
 
  개츠비의 파티를 위해 2주일에 한 번씩 한 무리의 피고용인들이 수백 피트의 천과 색색의 전구를 가지고 그의 집을 찾아온다. 그들은 요란스러운 장식으로 집을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만들어 버린다.
 
  두바이라는 호황의 파티 현장에서도 역시 凡人들은 꿈꿀 엄두도 내지 못했던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누가 로봇이 조종하는 낙타 경기를 생각이나 했을까? 두바이의 낙타 경주의 기수인 어린이들이 학대를 당하고 있다는 국제사회의 비난이 쏟아지자 셰이크 모하메드가 「로봇으로 낙타 경주를 하면 어떻겠느냐」는 아이디어를 내 놓았다고 한다, 겨울에도 정오에는 더운 감이 있는 사막에 스키장을 세울 마음을 먹을 수 있겠는가?
 
  다시 개츠비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개츠비는 순수하지만 고지식한 열정으로 옛 사랑을 되찾으려고 애쓴다. 그에게 있어 데이지라는 여인은 수도자가 추구하는 열반과 같은 존재다. 하지만 데이지는 그런 순수한 꿈의 대상으로 적합한 인물은 아니다. 그녀는 사랑보다 돈을 선택하는 인물이고, 귀엽지만 천박하며 황금만능주의적인 속물이다.
 
 
  두바이인들이 추구하는 이상은?
 
낙타와 셰이크 자이드 로드의 초현대식 고층건물들은 두바이의 전통과 현대를 상징하는 아이콘이다.

  두바이 사람들은 그들이 추구하는 이상을 무엇으로 설정하고 있는가? 그들은 무엇이 「진보」라고 생각하는가?
 
  내 눈에는 두바이 사람들이 위의 질문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차를 타고 지나가다 차 문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투어 중인 우리에게 『Dubai is the best!』라고 외칠 정도로 두바이 사람들은 自國(자국)에 대한 자긍심이 강하다. 두바이가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는 일을 많이 벌였으니 자기 나라를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自國民(자국민)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부유하게 살 수 있는 경제구조(두바이에는 관세와 규제가 없는 대신, 외국인이나 외국기업이 사업을 하려면 두바이 국민에게 스폰서를 받아야 한다. 그 代價로 두바이 국민들에게는 먹고 살기에 차고 넘치는 돈이 돌아온다고 한다)는 부작용을 낳았다.
 
  사람들이 풍요로운 물질문명을 향유하는 데 몰두하게 된 것이다. 이는 자연스레 두바이의 現 정치체제 존속과 연결된다. 경제적으로는 선진국이지만 정치적으로는 후진적인 독재王政(왕정) 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두바이에 모든 사람들이 정치에 참여할 의무와 권리가 주어지는 민주주의가 정착될 날은 요원하다.
 
  두바이 사람들은 배부르고 등 따뜻하니 현재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기 힘들다. 두바이 지도자들은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우민화 정책」을 펴고 있는 셈이다.
 
 
  희망을 주는 지도자와 『대통령 못해 먹겠다』는 지도자
 
  그러나 「불가능은 없다」는 전제 아래 국민들에게 잘 살 수 있다는 꿈과 희망을 주는 두바이 지도자와, 『대통령 못해 먹겠다』라는 상소리를 국민들에게 내뱉어 버리는 한국의 지도자, 그리고 공포정치를 통해 독재 체제를 유지하면서 일부 상류층의 사치를 위해 절대 다수의 국민들이 굶주리는 북한 지도자를 비교할 때 누가 가장 올바른 지도자像에 가까운지는 대답하기 쉽다.
 
  개츠비는 그를 자기 아내의 불륜 상대로 오해한 자동차 정비공의 총에 맞아 억울하게 죽는다. 개츠비가 비참한 종말을 맞았으니 불가능해 보이는 꿈을 꾸는 두바이도 끝이 좋지 않으리라는 억지 논리는 펴지 않겠다.
 
  두바이가 꾸고 있는 번영의 꿈―문제점도 많지만―그 열정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나무 한 그루, 맑은 물이 흐르는 수로, 경치 좋은 해변마저 사람이 만들어 낸 이 도시에서 인공美의 극치를 느낄 수 있었다. 팜 아일랜드 안내실에서 보았던 홍보 영상이 떠오른다.
 
  인공섬을 만들기 위해 여러 대의 크레인들이 돌과 모래를 끊임없이 바다로 쏟아 붓던 장면이다. 두바이는 주어진 자연에 연연하지 않고 자연마저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 낸 정열적인 인간들이 꾸는 꿈의 현장이었다. 먼 옛날 바빌론에 세워졌다는 바벨탑과 같은 도시, 두바이. 이 바벨탑은 하늘에 닿게 될까? 그 결과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상상하고 도전하고 실천에 옮긴 「인간의 힘」을 높이 사 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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