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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년 6월호

[연재] 근대화 혁명가 朴正熙의 생애 (10권5장) -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마지막 10日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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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지도자들은 그들의 관심과 정력을 대중매체로부터 각광을 받고 여론조사에서 호의적인 반응을 얻는 데 소모하고, 다른 지도자들은 일에 모든 정력을 집중하고 자신들의 평가를 역사의 심판에 맡긴다. 朴대통령 각하가 바로 눈앞의 현실에 집착하는 분이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1979년 10월19일 李光耀 싱가포르 총리의 晩餐辭)

권력과 부패의 늪 속에 발을 담그고, 三面의 敵으로부터 공격을 당해 가면서, 자신도 지킬 수 없는 도덕과 명분론을 무기로 삼아 대책 없는 비난을 業으로 삼는 위선적 守舊 지식인 세력의 도전을 극복하여 조국 근대화를 이룩해야 했던 朴正熙의 절대고독. 거기서 우러난 獨白이 바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였다.
1979년 10월19일 李光耀 싱가포르 총리에게 훈장을 수여하는 朴正熙 대통령.
  1979년 10월17일 오전 朴正熙 대통령은 金載圭 정보부장, 具滋春 내무장관, 金桂元 비서실장, 柳赫仁 정무1수석, 高建 정무2수석 비서관들을 불러 어제 있었던 부산 시위에 대해 보고를 들었다. 오후엔 부산에 갔다가 온 朴瓚鉉 문교장관으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具滋春 내무장관이 오전에 비행기로 부산에 내려와 시청·시경을 둘러보았다. 그는 오후에 부산시청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具장관은 『200여 명이 경찰에 연행됐는데 100여 명이 불량배였다』면서 『지각 없는 행위엔 단호히 대처하겠다』고 했다. 한 기자가 『이 회견 내용을 보도하는 것은 긴급조치 9호에 위반되지 않느냐』고 물었다. 具장관은 『괜찮다』고 했다.
 
  具장관의 경고를 보도하는 형식으로 부산사태는 알려졌다.
 
  이날 朴대통령은 자신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던 車智澈 경호실장과 세 번 만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朴대통령은 오후 2시40분부터 4시5분까지는 이발을 했다. 저녁 6시 청와대 영빈관에선 유신선포 7주년 기념 만찬이 열렸다. 모든 장관들과 유정회·공화당 의원 등 여당권 인사들이 참석했다. KBS 전속악단도 나와 있었다.
 
  朴대통령은 만찬장에서 주요인사들을 접견한 뒤 만찬회장을 돌며 의원들과 어울려 각 지방의 농사 作況, 大田의 전국體典, 의원 외교 등을 화제로 삼아 환담했다. 『해외여행을 해보니 우리나라의 빈부 격차는 극히 작은 편』이라는 어느 의원의 얘기를 들은 朴대통령은 『세계은행 통계에도 우리나라는 貧富 격차가 작은 나라로 기록돼 있더라』고 응답했다.
 
  鄭在虎 유정회 대변인은 한산도 담배를 피우고 있던 崔圭夏 총리를 만나자 『부산사태가 어떻게 돼 가느냐』고 물었다. 崔총리는 『잘 진압이 되어 평온을 찾았다』고 했다. 헤드 테이블엔 朴대통령을 비롯해 金鍾泌, 白斗鎭, 丁一權, 太完善, 李孝祥, 朴浚圭 등이 자리 잡았다. 식사는 뷔페식이었다. 식사 뒤의 여흥 시간엔 위키 리가 사회를 보았다. 가수 현인·백설희·김정구가 나와 「신라의 달밤」 등 흘러간 옛 노래를 불렀다. 분위기가 무르익어 갔다.
 
 
  찬 공기가 감도는 대통령 주변
 
  참석자들의 뇌리에는 전날 밤의 부산 데모가 사라지지 않는 것 같았다. 朴문교장관은 부산 서구가 선거구인 공화당 朴燦鍾 의원을 만나자 『부산에 가 보니 신민당 의원 사직서를 선별수리한다는 말이 기름을 부었어』라고 했다. 다른 의원들도 朴장관과 朴의원에게 다가와 부산사태에 대해 물었다. 이들의 걱정과는 별도로 무대 위는 흥겹게 돌아가고 있었다.
 
  공화당 최영철 의원이 사회를 맡더니 『공화·유정 노래 시합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공화당 대표선수는 崔載九였다. 당시 국회에는 3大 가수로 꼽히는 의원이 있었는데 그 3인은 崔載九·鄭在虎·金守漢(신민당)이었다. 崔의원은 『나는 최소한 열 곡은 불러야 마이크를 넘기는 버릇이 있다』고 한마디를 하더니 옛 노래를 불러 대기 시작했다. 朴대통령의 애창곡인 「짝사랑」도 불렀다. 崔의원의 독무대가 너무 길어지자 공화당 申炯植 사무총장이 독특한 손짓으로 사인을 보냈다. 崔의원은 『강요에 못 이겨 하단한다』면서 물러났다.
 
  마이크를 받은 사람은 「유정회의 입」 鄭在虎였다. 그는 『노래를 부르기 전에 이 자리를 빌어 말씀드릴 것이 있다』고 운을 떼더니 詩를 낭송하듯 읊어 나갔다.
 
  『조국 근대화를 향한 각하의 뜨거운 눈동자 가장자리에는 항상 눈물이 괴어 있습니다. 눈물의 그림자가 보입니다. 이렇게 풍만한 인정과 뜨거운 집념의 영도자를 받들어 모신다는 것은 나의 행복입니다. 우리 오늘 유신 7주년을 맞아 신명을 바쳐 일할 것을 함께 다짐합시다』
 
  鄭의원은 이어서 「삼각지 로터리에…」, 「나그네 설움」, 그리고 묘하게도 「바보 같은 사나이」를 부르고 내려갔다. 朴대통령은 鄭의원에게 『가수로 轉業하지』라고 평했다. 사회자 최영철이 「엽전 열닷 냥」을 부르고 노래 시합을 끝냈다.
 
  이때쯤 朴대통령 주변에서 찬 공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만찬 도중 具滋春 내무장관은 몇 차례 朴대통령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무슨 보고인가를 했다. 朴대통령은 그때마다 『뭣들 하고 있는 거야』라고 역정을 내고 안색이 바뀌더니 노래 시합이 끝났을 땐 표정이 아주 굳어 있었다. 申炯植은 청와대 비서진들이 빨리 끝내 주었으면 하는 사인을 보내는 걸 받아 밤 9시쯤 만찬을 끝내도록 했다.
 
 
  金鍾泌과의 마지막 대화
 
  이날부터 서울에서는 제12차 연례 韓美안보협의회가 열리고 있었다. 3일간 열린 이 협의회에는 해럴드 브라운 美 국방장관이 참석했다. 李光耀 싱가포르 총리가 한국을 방문하고 있을 때였다. 朴대통령으로선 부산사태가 이래저래 체면이 서지 않는 사건이 돼 버렸다.
 
  만찬이 끝나자 총리와 내무장관 등 각료들이 한구석에 모여 뭔가 수근거리고 있었다. 鄭在虎는 부산사태가 진정되었으니 그 후속 조처를 상의하는 모양이라고 추측하고 별 생각 없이 다른 의원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나와 2차를 하러 갔다. 이 만찬장에서 朴대통령 옆자리에 앉아 있었던 金鍾泌은 그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 합석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때 내가 영감(필자 注: 朴대통령)과 한 테이블에 앉았는데, 具滋春 내무장관이 들락거리면서 영감 귀에 대고 뭐라고 그러니까 영감 표정이 굳어집디다. 내가 그때 부산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듣고 들어갔는데, 속으로 정말 큰일이다 싶어서 걱정이 되더군요. 말기가 왔구나 하는 게 피부로 느껴졌어요. 나는 그 자리에서 흥도 안 나고 밥도 안 먹혔습니다. 그냥 먹는 시늉만 하고 있는데 영감도 나를 쳐다보고 계셨는지 이러시데요.
 
  「왜 그렇게 식사를 안 해?」
 
  「먹고 있습니다」
 
  「에이, 안 먹는데. 청와대 밥이 맛이 없나?」
 
  내가 식사를 하지 않는 게 못마땅하셨던 겁니다. 그날 밤 헤어지는데 영감이 「어디 안 가지?」 그러세요.
 
  「예. 갈 데 없습니다. 서울에 있겠습니다」
 
  「내 곧 부를 테니까 연락하거든 들어와」, 그러구 헤어졌어요. 이게 영감을 마지막 뵌 겁니다』
 
 
  여관으로 최루 가스 발사
 
  국제신문 사회부 趙甲濟 기자는 청와대 만찬이 있던 그 시각, 즉 10월17일 밤 8시쯤 부산 광복동 거리에 있었다. 거리는 젊은이들로 메워져 있었다. 책가방을 낀 교련복 차림의 대학생들, 더벅머리 재수생들, 근처 상점이나 술집 종업원들, 멋쩍은 표정으로 먼 곳을 바라다보는 대학교수들, 데모 주모자를 잡겠다는 사복형사들이 뒤섞여 있었다.
 
  군중은 놀라울 만큼 조용했다. 초조하고 안타까운 표정의 그들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다. 경찰은 점포 주인들에겐 문을 닫도록, 시민들에겐 집으로 돌아가도록 마이크 방송으로 권하고 돌아다녔다. 자리를 뜨는 시민들은 아무도 없었다. 군중은 이런 팽팽한 긴장감을 깨뜨리는 일이 일어날 때마다 조건반사적인 반응을 보였다. 로열호텔에서 모임을 끝낸 사람들이 몰려나오자 아무런 까닭 없이 그쪽으로 밀려갔다. 사람이 사람을 모았다. 어떤 곳에 사람들이 몰려 있으면 그 사람들을 구경하려고 또 사람들이 모였다.
 
  밤 9시30분쯤부터 군중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휘파람 소리, 야유인지 환호성인지 모를 부르짖음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면서 분위기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50명쯤의 청년들이 길 복판으로 나섰다. 어깨동무를 하더니 시청을 향해 나아갔다.
 
  경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페퍼포그를 뿌리면서 지프차가 어슬렁어슬렁 굴러오는 것이었다. 그 뒤로 진압경찰이 따라왔다. 그들은 군중을 향해서 사과탄을 던졌다. 데모대의 선두는 흰 연기와 폭발음에 휩싸였다. 시위대는 무너져 내렸다. 선두부터 흩어지기 시작했다. 趙기자도 골목으로 달아났다. 무엇에 채여 그는 넘어졌다. 뒤따라 달아나던 사람들이 잇따라 그의 위를 덮치며 넘어졌다. 趙기자는 부리나케 일어나 근처 여관으로 뛰어들었다. 뒤따라 서너 명의 시민들이 숨어들자 여관 주인은 현관문을 닫고는 안으로 사라졌다.
 
  이때였다. 페퍼포그 분사기를 짊어진 두 경찰관이 현관문을 박차고 뛰어들며 현관과 복도에서 서성대는 손님들의 코앞에서 바로 가스를 뿜어 댔다. 趙기자는 그들이 파리약을 뿌리는 사람들 같다고 생각했다. 기침, 눈물, 아우성. 잠옷 바람으로, 더러운 속옷 바람으로 투숙객들이 콜록대면서 뛰쳐나왔다. 그들은 변소 옆에 붙은 세면장으로 달려갔다. 우선 눈을 물로 씻어 내야 따가운 통증이 가실 것 같았다. 趙기자는 하얀 가스를 피해 변소로 들어갔다가 여관 밖으로 달아났다. 어두운 골목에서는 흩어졌던 청년들이 군데군데 다시 모이고 있었다. 부산 남교회 앞에는 대학생, 재수생, 접객업소 종업원들이 뒤섞인 50명쯤의 군중이 한창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이래선 안 되겠다. 복수를 하자』
 
  『안 된다. 폭력을 써선 안 된다』
 
  『폭력엔 폭력으로 맞서는 수밖에 도리가 없지 않은가』
 
  결국 강경론이 이겼다. 그들은 빈 맥주병을 머리 위로 휘두르면서 골목을 지나 큰길가 경찰 진압부대를 향해 나아갔다.
 
1979년 10월17일 부산 지역에 대한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후 중앙청을 나서는 국무위원들.

 
  비상계엄령
 
  17일 밤 9시 鄭昇和 육군참모총장은 공관에 머물고 있었다.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다.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가니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朴대통령을 비롯하여 金桂元, 車智澈 실장, 金載圭 정보부장이 보였다. 具滋春 내무장관, 盧載鉉 국방장관과 청와대 수석비서관들도 있었다. 위기일수록 침착한 朴대통령은 鄭총장에게 자리를 권하더니 金載圭 부장에게 부산사태를 설명해 주라고 지시했다. 설명이 끝나자 朴대통령은 鄭총장을 향해서 말했다.
 
  『鄭장군, 현행법에는 육군참모총장이 치안유지를 경찰이 할 수 없다고 판단했을 때는 직접 계엄선포를 한 뒤 국무회의의 추인을 받을 수 있다고 되어 있어요. 지금 각의를 소집하자니 너무 늦을 것 같아. 그러니 鄭총장이 부산 지역에 계엄을 선포하고 추인을 요청해 주시오』
 
  朴대통령은 계엄사령관으로는 누가 좋으냐고 물었다. 鄭총장은 朴贊兢 군수사령관을 추천하여 허락을 받았다. 車실장이 그 자리에서 전화로 朴장군을 불러내더니 전화기를 鄭총장에게 건네주었다. 鄭총장이 朴사령관에게 계엄선포 사실을 알리고 병력배치를 지시하려고 하는데, 朴대통령이 갑자기 『鄭장군, 잠깐 기다려요』라고 했다. 朴대통령은 시계를 보더니 『11시에 국무회의를 할 수 있겠는데… 鄭장군 계엄준비만 해두시오』라고 했다.
 
  朴사령관은 부산에는 실병력이 충분하지 않다고 鄭총장에게 보고했다. 朴대통령은 어느 부대를 신속히 투입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鄭총장은 공수여단이 좋겠다고 말했다. 대뜸 朴대통령이 車실장을 향해서 『車실장, 1개 여단을 동원해!』라고 했다. 깜짝 놀란 鄭총장이 『각하, 공수단은 실장이 동원을 명령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대통령은 『그런가?』하고 씩 웃었다.
 
  金聖鎭 문공부 장관은 崔圭夏 총리의 지시를 받아 총무처에 임시국무회의 소집을 위한 연락을 취할 것을 통보했다. 이때가 밤 10시30분. 비상연락을 받은 장관들은 중앙청 3층의 국무회의실로 모여들었다. 밤 11시30분에 총리 주재로 국무회의가 열렸다. 具내무장관이 부산사태를 보고한 후, 盧載鉉 국방장관이 비상계엄 선포를 제안했다. 金致烈 법무장관이 이견을 제기했다.
 
  『부산 지방에서 데모가 난 것은 金泳三 의원 제명의 후유증이며, 민주주의가 짓밟혔다고 생각한 시민 감정의 폭발이라고 봅니다. 이런 부산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게 되면 정부가 마지막 비상수단을 행사하지 않고서는 통치능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평가를 받을까 두렵습니다. 관광·무역·경제에 미치는 악영향도 생각해야 합니다. 비상계엄령이 아니더라도 시장·도지사는 경찰력으로 수습하지 못할 경우, 인근 軍부대의 지원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각하께선 올바른 정책 건의는 받아들일 분이니 崔총리께서는 비상계엄령 선포의 유보를 진언해 주셨으면 합니다』
 
  金장관의 말에 동조한 것은 申鉉碻 부총리뿐이었다. 토의 10여 분 만에 崔총리는 부산 지역에 대한 비상계엄령 선포안을 의결했다. 회의가 끝난 뒤 몇몇 국무위원들이 金致烈 장관에게 『잘했다』고 했으나 金장관은 『그런 말은 회의 때 해야지』라면서 화를 냈다. 이날 총무처장관 沈宜煥은 병석에 있어 차관 崔澤元이 대신 참석했다. 그는 계엄령 선포 의결이 끝난 뒤 국무위원들의 서명을 받았다. 李用熙 통일원 장관이 『나는 서명을 못 하겠다』고 버티어 崔차관이 설득하느라 애를 먹었다.
 
 
  마지막 日記
 
  비상계엄령은 「전쟁 또는 전쟁에 준하는 사변에 있어서 적의 포위 공격으로 인해 사회 질서가 교란된 지역에 선포한다」(계엄법)고 돼 있었다. 부산사태는 크게 잡아도 위수령 대상밖에 되지 않았다. 관계 장관인 具滋春 내무, 盧載鉉 국방, 朴瓚鉉 문교장관도 개인적으로는 「비상계엄을 펼 만한 사태는 아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고 했다.
 
  朴대통령의 속셈은 부산사태의 불티가 다른 지역으로 튀기 전에 신속히 진화한다는 것이었다. 病勢의 초기에 고단위 투약을 한다는 전략이었다. 이런 신속·과잉 대응의 기층심리엔 강박관념이 자리 잡고 있는 법이다. 겉으로는 朴대통령이 확고부동한 통치력을 행사하여 국내 치안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심리적으로는 오히려 쫓기고 몰리는 기분에 빠져 있었다. 데모가 金泳三의 본거지에서 일어났다는 점도 그의 결단에 영향을 주었다. 겉으론 강하지만 속으로는 약하고, 물리적으로는 막강하지만 심리적으로는 취약한 유신정권의 모순이 부산사태를 통해 노출된 것이다.
 
  朴대통령은 부산 지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생애 마지막 일기를 썼다.
 
  <7년 전을 회고하니 감회가 깊으나 지나간 7년간은 우리나라 역사에 기록될 중요한 시기이기도 하였다. 일부 反체제인사들은 현 체제에 대하여 집요하게 반발을 하지만 모든 것은 後世에 史家들이 공정히 평가하기를 바랄 뿐>
 
  부산 지역 2관구 사령부 소속 병력이 사태 악화에 대비하여 17일 밤 부산시내로 이동하기 시작한 것은 계엄령 선포 세 시간 전인 밤 8시30분쯤이었다. 밤 8시34분 부산진서 상황실엔 『무장 군인들을 가득 태운 軍 트럭들이 서면 지하도 근방을 지나 시내로 들어가고 있다』는 보고가 접수되었다.
 
  그때만 해도 부산 경찰은 아무리 강경책을 쓴다 해도 위수령 정도가 선포될 것으로 짐작하고 있었다. 시내로 들어간 2관구 소속 병력은 일단 부산역에 집결하여 상부로부터 명령을 기다렸다. 시민들은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낌새를 차리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비상계엄령이 17일 밤 11시를 기해 부산에 선포될 것이란 통보가 부산의 경찰·정보부·군부대에 떨어진 것은 밤 10시30분이었다.
 
  『밤 11시를 기해 비상계엄령이 선포됐고 통행금지 시간이 한 시간 당겨져 밤 11시부터 시행되니 선량한 시민들은 빨리 집으로 돌아가 주십시오』
 
  경찰은 이런 안내방송을 밤 11시 이전에 하고 다녔다. 임시 국무회의가 18일 0시를 기해 비상계엄령을 선포키로 의결한 것은 17일 밤 11시30분께였고 이 사실이 방송국 임시뉴스로 보도된 것도 그때였기 때문에 혼선이 빚어졌다. 일부 경찰서에선 밤 11시부터 통행금지 위반자 단속을 실시하여 멋도 모르는 시민들을 잡아가기도 했다.
 
  밤 11시 이후에도 데모대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파출소를 습격하고 유리창을 깨고 오토바이를 불태웠다. 서부서 구덕파출소는 18일 0시에 습격을 받았다. 400명쯤 되는 군중은 유리창·자전거·오토바이를 닥치는 대로 파괴한 뒤 두 갈래로 흩어져 달아났다. 이때 마침 軍 병력이 대신동으로 배치돼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데모 군중 2000명쯤은 법원 앞과 옛 영남극장 앞에 다시 모여 구호를 외쳤다. 서부경찰서가 全병력을 동원, 이들을 쫓아 버린 것은 18일 새벽 2시였다.
 
  육군 군수사령관 朴贊兢 중장은 이날 한국을 방문한 대만의 3성 장군을 해운대 비치호텔에서 접대했다. 그는 밤 9시30분쯤 숙소에 돌아왔다. 朴장군은 전날의 시위사태를 알고 있었으나 큰 위기감은 느끼지 않았다. 朴중장이 숙소에 돌아온 직후 청와대 車智澈 경호실장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청와대에서 부산사태에 대해 협의 중에 있으니 계엄령 선포에 대비해 달라는 메시지였다. 朴중장은 부산시장, 2관구 사령관, 군수기지사령부 참모장 등을 사령부로 불러 1차적인 지침을 시달했다.
 
 
  金載圭의 부산 출장
 
  金載圭는 18일 새벽 2시쯤 부산의 계엄사령부(군수기지사령부)에 나타났다. 야간 비행으로 급히 내려온 것이었다. 金載圭는 朴興柱 대령(수행 비서관)등 참모들을 데리고 왔다. 그는 부산지역계엄사령관 朴贊兢 중장에게 朴대통령의 지시를 구두로 전달했다. 그 골자는 『데모의 징후가 여러 타 지역에서도 엿보이니까 빨리 사태를 진정시키라』는 것이었다.
 
  朴중장은 金載圭가 3군단장일 때 그 휘하에서 사단장으로 1년 정도 근무해서 친면이 있었다. 金載圭는 18일 아침 계엄사령부에서 열린 계엄위원회의에 참석했다. 崔錫元 부산시장을 비롯, 부산지검장, 시경국장, 교육감, 관구 사령관, 법원장 등 계엄위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金載圭는 이렇게 말했다.
 
  『4·19는 우리 軍의 수치였다. 계엄군이 본분을 이탈, 시민과 합세한 것은 잘못된 일이었다. 이번에는 軍의 본분에 충실하라』
 
  金부장은 또 1964년의 6·3 사태 때 6사단장으로서 서울지구 계엄 업무를 맡았던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金載圭의 이 부산 출장은 그와 朴대통령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하나의 요인이 됐다. 부산에서 그가 보고 듣고 판단하고, 또 이용하려고 한 것이 10·26의 중요한 동기가 됐기 때문이다. 부산사태는 金載圭의 마음을 통해 계산되고, 과장되고, 왜곡되기도 하면서 커 가고 있었다.
 
  金載圭가 밤중에 부산사태의 현장을 살피고 있던 바로 그 순간 丁一權 前 총리는 악몽을 꾸고 있었다. 그는 생전에 이런 증언을 남겼다.
 
  『朴대통령의 얼굴이 온통 피투성이였습니다. 눈꺼풀에도 피가 엉겨붙어 있었어요. 그런 얼굴로 대통령은 「정형!」이라고 부르며 저를 껴안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면서 「이놈들, 이놈들」 하며 쓰러졌습니다. 이 순간 나는 깨어났는데, 집사람을 깨워 꿈 이야기를 했더니, 아내는 「꿈에 피를 보면 좋은 일이 생긴다」고 저를 안심시킵디다. 전에도 큰 사건 전에 들어맞는 꿈을 몇 번 꾼 적이 있어 불안을 떨쳐 버릴 수 없었습니다』
 
 
  발포는 사령관의 肉聲명령으로
 
  부산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면서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된 군수사령관 朴贊兢 중장(뒤에 총무처 장관)은 「발포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다. 간밤에 들이닥친 金載圭는 『사태를 빨리 수습하고, 연행자들을 서둘러 선별하라』는 朴正熙 대통령의 지침만 전달했을 뿐 발포문제에 대해선 일언반구 언급이 없었다.
 
  朴사령관은 경찰이 시위 군중에 밀려서 軍이 나서게 된 것이니까 軍까지 밀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으나, 발포를 최악의 순간까지 억제하는 지침을 휘하 부대에 내렸다.
 
  <첫째, 사령관의 직접 명령에 의해서만 발포를 할 수 있다.
 
  둘째, 이 직접 명령은 문서를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면담을 통해서 받아야 한다. 급박한 상황에서 전화로 발포 지시를 받아야 할 땐 먼저 사령관의 육성을 확인해야 한다>
 
  정부는 계엄 선포 첫날 신속하게 병력을 투입했다. 18일 새벽에 서울로부터 1개 공수특전 여단이 날아왔고, 아침에는 포항으로부터 1개 해병연대가 부산으로 이동했다. 부산의 현지 병력과 합쳐서 계엄군의 규모는 5500명에 달했다.
 
  19일에 다시 2개 공수여단 병력 3600명이 추가로 투입되었다. 약 9100명으로 불어난 軍 병력에다가 약 1800명의 경찰 병력을 더해 총 1만900명의 계엄병력이 편성되었다. 이들 중 1500명가량은 휴교에 들어간 10개 대학에 배치되었다. 부산시청, 방송국 등 주요 공공건물 26개 소에서 약 6000명이 경비에 임했고, 나머지 3400명은 기동 부대로서 시내를 순찰하는 등의 임무를 받았다.
 
  朴장군은 계엄군에게 실탄을 지급하지 말도록 지시했다. 최루탄도 소·중대장에게만 주었다. 데모대는 개머리판으로 진압토록 했다. 1개 소대에 경찰관 1∼2명을 배치시켰다. 현지 사정에 밝은 경찰관이 데모 군중 속에서 불량배를 지적해 주면 그들을 붙잡기 위해서였다. 朴장군은 이번 데모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하여 여론조사를 실시하도록 합동수사단에 명령했다.
 
  그는 지게꾼에서 대학교수까지 각계각층의 여론을 정확히 수집하도록 지시했다. 며칠 뒤 집계 분석된 여론조사의 결과에 따르면 부산 시위의 가장 큰 원인은 「경제 침체에 의한 서민·상인층의 불만」으로 나타났다. 다음이 金泳三 의원 제명 뒤 야당 의원들이 낸 의원직 사퇴서에 대해서 여당 측이 선별수리한다는 보도였다. 석유 파동에 의한 경기 침체와 金泳三 제명이 2大 요인이었다는 얘기다.
 
 
  공수부대의 과잉진압
 
  18일 오전 10시, 간밤에 부산에 온 金載圭는 부산대학교에 나타났다. 본관 현관에서 박기채 총장이 그를 맞았다. 金載圭는 의례적인 말투로 『학생들은 어떻습니까?』고 물었다. 朴총장이 총장실로 안내하려니까 金부장은 『사실은 우리 부대가 여기 주둔하게 돼서 한번 찾아보고 싶어 왔다』면서 『수고하십시오』라고 말하곤 軍부대의 지휘부가 들어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金부장은 침착했고 잔말이 통 없었다.
 
  정부가 계엄령 선포 직후 전투력이 가장 뛰어난 공수단과 해병대를 긴급 투입한 것은 부산사태를 철저하게 진압하겠다는 의지를 보여 준 것이었다. 특수훈련을 받고 특수전에 쓰이도록 만들어진 공수부대는 시위자들은 물론이고 일반시민들에게도 무차별 폭행을 가했다. 이로써 6·25 전쟁 이후 처음으로 일반인들이 군인들에 대한 악감정을 갖게 되었다. 특전사령부나 軍 지휘부에서는 이 과잉진압을 성공사례로 평가하여 1980년 5월18일 광주에 또 공수단을 투입하였다가 유혈사태를 부른다.
 
  동래구 동상동 신희철(회사원·당시 37세)씨는 18일 밤 8시50분쯤 서구 충무동 상륙다방 앞에서 공수부대 군인들에게 끌려가 개머리판으로 얻어맞아 머리를 크게 다쳤다. 뇌좌상과 뇌경막 손상을 당한 그는 봉생 신경외과에서 뇌수술까지 받았다.
 
  부산지구 당감동에 사는 금은방 종업원인 전병진(당시 32세)씨는 계엄령 첫날인 10월18일 밤 9시30분쯤 서면 태화극장 앞에서 택시를 먼저 잡으려고 찻길로 조금 나가 서 있었다. 앞당겨진 통행금지시간이 30분밖에 남지 않아 시민들은 서로 먼저 타려고 법석을 떨고 있었다. 이때 공수부대 한 소대병력이 찻길을 따라 남쪽으로 행진해 오고 있었다. 그들은 앞에 걸리는 사람들을 청소하듯 해버렸다.
 
  술에 조금 취해 있었던 전병진씨는 미처 피할 틈도 없이 당했다.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몇 대나 맞았는지 구둣발로 얼마나 채였는지 알 수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정차한 택시 꽁무니에서 몸을 피하고 있었다. 군인 네 명이 다시 그를 끌어내 발길질과 개머리판으로 녹초를 만들었다. 그는 쓰러졌다. 군인들이 다 지나갔을 때 그는 벌떡 일어났다. 얼굴에서 피가 쏟아지고 있었다. 갑자기 머리가 핑 돌았다. 지하도를 건너서 한독병원을 찾았다. 한독병원에서는 간단한 응급치료만 해주고 자가용에 태워 당감동 한태일 신경외과로 옮겨다 주었다.
 
  진단을 해보니 앞 이빨 다섯 개가 부려졌고 오른쪽 귀 위의 머리뼈에 분쇄골절이 생겼음이 드러났다. 그는 분쇄골절된 부분을 잘라 내는 수술과 그 자리에 플라스틱을 대신 끼우는 수술을 두 차례 받았다.
 
  공수부대에서 쓰는 곤봉은 야간 전투에 쓰도록 만든 것으로서 경찰관의 그것보다 훨씬 길며 조금 휘어 있어 이슬람 기병들의 환도처럼 생겼다.
 
  시민들은 길바닥에 꿇어앉혀져 몽둥이질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못 본 체하고 지나가는 버릇을 익혀야 했다. 구타를 말리려다가 얻어맞기도 했다. 경찰관들도 안전하지 못했다. 동부경찰서 ㄱ경위는 두 형사와 함께 남포동에 나왔다가 공수부대 군인 두 명이 한 시민을 개머리판과 발길질로 심하게 때리는 것을 보았다. ㄱ경위는 불끈 화가 치밀었다. 몇째 동생 나이밖에 안 되는 그 군인들에게 『이러면 안 된다』고 타일렀다.
 
  『넌 뭐야?』
 
  『경찰관이다』
 
  ㄱ경위는 신분증을 보여 주었다. 이때 대위 계급장을 단 장교가 오더니 버럭 고함을 질렀다.
 
  『경찰 같은 것 쓸데없어. 이 새끼들 조져!』
 
  이 명령이 떨어지자 근처에 배치돼 있던 공수부대 사병들 10여 명이 몰려와 세 경찰관을 으슥한 골목으로 끌고 갔다. 주먹과 발길이 어지럽게 오갔다. ㄱ경위는 전치 2주의 상처, 형사 한 명은 고막을 다쳤다.
 
  군인들에게 맞아 다친 시민들의 80% 이상이 머리에 상처를 입었다. 다친 시민들의 진단 병명을 늘어놓으면 군인들이 어떻게 두들겨 팼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창자파열, 뇌좌상, 뇌진탕, 전두부파열상, 후두부열창, 안면열창, 안면부내부열창, 전신타박상, 뇌경막손상….
 
 
  휴강령이 마산사태 불러
 
부산에 비상계엄령이 내리고 진주한 군인들.

  18일 마산 경남대학교. 점심 때 도서관 앞 잔디밭에선 이야기꽃이 피고 있었다. 경제과 3학년엔 부산에서 통학하던 학생이 둘 있었다. 이 두 학생은 부산 데모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다른 학생들은 귀를 쫑긋하여 듣고 있었다. 이날 아침 학생들은 부산에 비상계엄령이 내려졌다는 사실을 알고 등교했다. 학교 게시판에는 「박정희 파쇼정권 타도」라고 쓰인 격문이 붙어 있었다. 술렁대는 분위기 속에서 점심시간이 끝나 가고 있었는데, 이때 느닷없이 교내 스피커에서 『오늘은 휴강을 실시하니 학생들은 빨리 집으로 돌아가 주기 바랍니다』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학생들은 웅성웅성했다.
 
  『우리는 데모도 안 했는데…』
 
  학생들은 납득할 수 없는 휴강령에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부산 데모가 경찰의 개입으로 확대된 것과 똑같이 마산 데모에 기름을 부은 것은 이 휴강 조처였다.
 
  귀가하는 학생들은 저절로 길목인 도서관 앞으로 모여들었다. 군중이 되면 용기도 전염된다. 누가 나서 주기를 바라는 분위기가 됐다. 말하자면 인화물질에 기름은 끼얹어졌는데 성냥을 그어 댈 사람이 아직 안 나타난 상황이었다.
 
  부산이나 마산사태의 발단은 모두 우발적인 것 같아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因果관계가 분명하다. 부산에서 鄭光敏이 한 역할을 마산에서 한 것이 국제개발학과 2학년 정인권(당시 22세)이었다. 두 鄭군은 울컥하는 충동적 심정으로 성냥을 그어 댄 것이 아니라 오랜 고민과 결심의 결과에 따라 행동한 것이었다.
 
  정인권은 며칠 전부터 일곱 명의 학생들과 데모 계획을 짜 놓고 있었다. 중간시험이 시작되는 10월21일을 D 데이로 잡고 있었다. 휴업이 길어지면 D 데이를 지킬 수 없게 된다. 당황한 정인권은 대책을 의논하려고 동료들을 찾아 우왕좌왕하다가 스스로 결단을 내렸다. 그는 학생들 앞으로 나섰다.
 
  『부산 학생들과 같이 싸우자』
 
  『3·15 정신을 되살리자』
 
  『부모들이 피땀 흘려 공부시킨 것이 이럴 때 바보처럼 가만히 있으라고 한 줄 아느냐』
 
  鄭군의 일장 연설은 학생들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그는 뇌관을 터뜨렸고, 그 다음부터는 학생과 시민의 자체 추진력에 의해 저절로 굴러갈 것이었다. 그 뒤로는 鄭군이 다시 지도자로 나설 필요조차 없었다.
 
  마산 시위도 부산과 거의 같은 생리로 진행됐다. 학생들은 어깨동무를 하고 구호를 외치며 학교 바깥으로 나가려 했다. 정문 앞을 경찰이 막자 『3·15 의거탑에서 만나자』, 『불종거리(의거탑에서 가까움)에서 만나자』고 속삭였다. 일부는 담을 뛰어넘어, 일부는 집으로 가는 체하다 정문을 통해 노동자와 시민들이 기다리는 시내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4·19는 시작됐습니다』
 
  金載圭는 18일 오후 항공편으로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갔다. 그는 10·26 사건의 재판과정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부산사태는 그 진상이 일반 국민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본인이 확인한 바로는 불순세력이나 정치세력의 배후조종이나 사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순수한 일반 시민에 의한 민중봉기로서 시민이 데모대원에게 음료수와 맥주를 날라다 주고 피신처를 제공하는 등 데모하는 사람과 시민이 완전히 의기투합하여 한 덩어리가 되어 있었고, 수십 대의 경찰차와 수십 개 소의 파출소를 파괴하였을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본인이 부산을 다녀오면서 바로 朴대통령에게 보고를 드린 일이 있습니다. 김계원, 차지철 실장이 동석하여 저녁식사를 막 끝낸 식당에서였습니다. 부산사태는 체제저항과 정책 불신 및 물가高에 대한 반발에 조세저항까지 겹친 民亂이라는 것과 전국 5대 도시로 확산될 것이라는 것 및 따라서 정부로서는 근본적인 대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것 등 본인이 직접 시찰하고 판단한 대로 솔직하게 보고를 드렸음은 물론입니다.
 
  그랬더니 朴대통령은 버럭 화를 내더니 앞으로 「부산 같은 사태가 생기면 이제는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다. 자유당 때는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명령을 하여 사형을 당하였지만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하면 대통령인 나를 누가 사형하겠느냐」고 역정을 내셨고, 같은 자리에 있던 車실장은 이 말 끝에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을 죽이고도 까딱없었는데 우리도 데모대원 100만~200만 명 정도 죽인다고 까딱 있겠습니까」 하는 무시무시한 말들을 함부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朴대통령의 이와 같은 반응은 절대로 말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본인의 판단이었습니다.
 
  朴대통령은 누구보다도 본인이 잘 압니다. 그는 군인 출신이고 절대로 물러설 줄을 모르는 분입니다. 더구나 10월 유신 이후 집권욕이 애국심보다 훨씬 강해져서, 심지어 국가의 안보조차도 집권욕의 아래에 두고 있던 분입니다. 李承晩 대통령과 여러모로 비교도 하여 보았지만 朴대통령은 李박사와는 달라서 물러설 줄을 모르고 어떠한 저항이 있더라도 기필코 방어해 내고 말 분입니다.
 
  4·19와 같은 사태가 오면 국민과 정부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질 것은 분명하고 그렇게 되면 얼마나 많은 국민이 희생될 것인지 상상하기에 어렵지 아니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4·19와 같은 사태는 눈앞에 다가왔고 아니 부산에서 이미 4·19와 같은 사태는 벌어지고 있었습니다>(「항소이유 보충서」 中 발췌)
 
  金載圭는 1979년 초에 일어난 이란 혁명에 대해 연구를 시킨 적이 있었다. 일반 시민의 봉기를 제압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얘기를 평소에 자주 했다. 그는 부산사태의 현장 시찰을 하고 서울에 올라와서는 부산에 연고가 있는 간부들을 현지로 내려보내 사태의 원인을 분석하도록 지시했다.
 
 
  李光耀의 찬사
 
  부산 시위 현장에 다녀온 직후의 金載圭를 가장 가까이에서 관찰했던 사람은 김봉태였다. 金載圭 부인의 여동생 남편으로서 의사인 김봉태씨는 퇴근 뒤 거의 매일 남산 기슭의 정보부장 공관으로 손위 동서를 찾아갔다. 金載圭 부부와 저녁을 먹으면서 가끔 충고를 하기도 했다. 金씨는 이렇게 기억했다.
 
  『부산사태를 시찰하고 돌아온 다음날인가, 저녁식사 때 이런 대화를 나눈 기억이 납니다. 제가 「民亂이라면 반란 아닙니까」라고 되물었더니 그분은 「자네가 그런 말을 하나」고 하더니 「그렇지, 그건 민중봉기야, 민중봉기」라고 말하더군요』
 
  이날부터 金載圭의 분위기는 싹 달라졌다고 한다. 식탁에서도 말이 없었고 굳은 표정으로 무엇을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았다. 사람도 피했다. 저녁식사 뒤에는 여느 때처럼 잡담도 하지 않고 바로 2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金載圭는 10월24일 당시 공화당 의원 李厚洛을 만났을 때 지나치는 말처럼 『제가 싹 해치우겠습니다』고 했다고 한다. 李厚洛은 그때는 『신민당을 해치우겠다』는 뜻으로 알아들었다는 것이다. 金載圭가 존경했던 李鍾贊 장군(당시 유정회 의원)도 이 무렵 金을 찾아가 『유정회 의원을 더 이상 못 해먹겠다』고 하소연을 했다. 金載圭는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라고 사정하더란 것이다.
 
  朴대통령은 19일 오후 싱가포르 李光耀 총리의 예방을 받았다. 李총리는 16일에 來韓했었다. 朴대통령은 李총리에게 우리 농촌에 대한 인상을 물었다. 李총리는 『농민의 생활 수준이 대단히 높은 데 놀랐다』고 답했다. 대접견실에서 훈장 수여와 기념 촬영이 끝나자 두 사람은 서재로 옮겨 요담에 들어갔다. 창가에는 가을 양광이 따스하게 비치고 있었다. 이날 朴대통령은 대단히 만족해하였다. 李총리와 뜻이 통했던 것이다.
 
  그해 6월 말에 있었던 카터 대통령과의 거북한 만남과는 대조적인 대면이었다. 朴正熙, 李光耀 두 사람 다 공산주의자와 싸워 가면서 아시아의 후진국을 개발도상국으로 도약시키는 데 성공한 국가 지도자인 만큼 서로의 고뇌를 同病相憐의 마음으로 이해했던 것 같다.
 
  이날 저녁에 베풀어진 만찬에서 李光耀 총리는 답사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대한민국의 성공과 경제 번영은 대한민국 국민과 그 지도자들의 자질이 어떠한가를 가장 잘 나타내는 징표이며, 한국이 공업·농업 분야에서 이룩한 발전은 다양하고 뚜렷하다. 이와 같은 발전은 첫째, 능력 있고 추진력이 강한 국민과 둘째, 확고한 지도력 없이는 성취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지도자들은 그들의 관심과 정력을 대중매체로부터 각광을 받고 여론조사에서 호의적인 반응을 얻는 데 소모하고, 다른 지도자들은 일에 모든 정력을 집중하고 자신들의 평가를 역사의 심판에 맡긴다. 朴대통령 각하가 바로 눈앞의 현실에 집착하는 분이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산에 위수령 발동
 
  그러나 이날 밤에도 마산시내에선 격렬한 폭동이 이틀째 계속됐다. 朴대통령은 직접 부산지구 계엄사령관 朴贊兢 중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朴대통령은 『마산은 당신의 책임 구역이 아니지만, 현지 부대장과 의논하여, 자네의 책임 지역으로 생각하고 도와주라』고 말했다. 朴장군은 부산에 내려온 공수특전사 2개 여단 중 1개 여단을 마산으로 급파했다. 마산에 위수령이 발동된 것은 20일 정오였다.
 
  마산 지역 사단장 조옥식 소장은 『경남지사의 요청에 의해 국방장관의 승인을 얻어 마산시 일원에 위수령을 발동한다』고 했다. 위수령은 그 지역 행정책임자의 요청에 의해서 내려지게 돼 있지만, 金聖柱 당시 경남지사는 병력을 요청한 사실이 없었다. 모든 실제 행동은 청와대 주변의 권력 핵심에서 이뤄졌고, 발표는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朴대통령은 신속한 강경 진압책과 함께 시국수습 방안의 연구를 직접 지시했다. 20일쯤 朴대통령은 공화당 申炯植 사무총장에게 전화를 걸어 『시국 수습에 관한 당 의원들의 의견을 수집 보고하라. 발언 내용에 대한 일체의 책임은 내가 질 테니 정확한 보고를 올려라』고 명령했다. 정보부뿐만 아니라 경찰, 검찰, 행정 조직, 그리고 車智澈의 사적인 정보기관까지 정권의 모든 촉각은 釜馬사태의 원인 규명과 그 대응책 수립 쪽으로 가동되기 시작했다
 
  10월21일은 일요일이었다. 유정회 趙一濟 의원은 金桂元 비서실장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다. 정보부에서 국내 정치담당 과장·국장·차장보를 오래 지낸 趙의원은 과거 상관인 金실장 집으로 찾아갔다. 金실장은 시국 수습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유신선포 무렵에 국내 정치를 총괄했던 趙의원은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유신헌법의 정신이 지금 왜곡되고 있습니다. 당초의 헌법 정신은 대통령이 黨籍을 갖지 않고 초당적 차원에서 국정을 통괄하고, 국무총리는 야당도 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2원집정제적인 요소가 있는 헌법입니다. 그래야 대통령이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지명할 수 있는 정당성을 갖게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朴대통령께서 공화당 총재직을 맡아 여당의 당수가 되셨습니다.
 
  야당 입장에서 보면 정권장악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극한투쟁이 안 될 수 있겠습니까. 이제는 우리나라의 체구도 커졌으니 옷을 갈아입어야 합니다. 대통령이 공화당 총재직을 내놓고 국방, 통일문제 등 큰 줄기만 붙들고 자질구레한 건 민주화시켜야 합니다』
 
  金실장은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그 며칠 전 朴대통령이 『金실장,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공화당 총재를 맡은 건 잘못된 것 같아』라고 말하더란 것이다. 10년간 대만에서 대사 생활을 하는 바람에 국내 정치정세에 어두워진 金실장은 무슨 뜻인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는 것이다. 金실장은 『그런 질문을 다시 할지 모르니 건의서를 하나 써 달라』고 부탁했다.
 
  이 날짜 내외통신에 따르면 북한은 20일에 이른바 조국전선중앙위 긴급확대회의를 소집한 데 이어 21일에는 평양시 군중대회라는 걸 열고, 부산사태의 전국적인 확산을 겨냥하여 한국 대학생 및 시민들의 反정부 투쟁을 극렬하게 선동했다는 것이다.
 
 
  南民戰을 배후 조직으로 오해
 
  朴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공화당은 이틀간 무역회관 식당에서 상임위원회별로 모여 의원들의 시국수습책을 들었다. 식당 문을 닫아걸고 기자들의 출입도 막았다. 申炯植 사무총장은 『발언내용은 내가 책임진다』는 대통령의 말을 전하고 『한 사람도 빠지지 말고 이야기해야 한다』고 했다. 오랜만에 언론자유를 얻은 여당 의원들은 솔직한 이야기들을 쏟아 놓았다.
 
  『정보부장을 바꾸라』
 
  『청와대 비서실을 개편해야 한다』
 
  『후계자를 빨리 부상시켜야 한다』는 이야기에 이어 『각하께서 한번 쉬시는 게 좋겠다』는 말까지 나왔다.
 
  申총장은 이 발언들을 첨삭하지 않고 충실히 기록하여 두툼한 보고서를 만들었다. 청와대로 이 보고서를 가져가기 직전인 24일 대통령 비서실에서 전화가 왔다.
 
  『각하께서 그 보고를 안 듣겠다고 하십니다』
 
  白斗鎭 당시 국회의장은 이 무렵 金載圭의 직접 전화를 받았다.
 
  『釜馬사태를 조종한 것은 공산계열인 南民戰 조직이라는 증거가 나오기 시작했다』는 내용이었다. 金부장의 이 통보는 부산 수사진의 보고를 그대로 전한 것으로 보인다. 金正燮 제2차장보도 10·26 뒤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에서 조사를 받을 때, 釜馬사태의 배후 조직을 ①南民戰 ②기독교 계통 ③불평불만분자라고 진술한 것으로 미루어 「南民戰 조종」 쪽으로 수사 방향이 기울고 있었던 것 같다. 당시 부산의 수사진은 서울에서 내려와 시위를 지휘하다가 현장에서 연행된 운동권 학생 황모씨를 南民戰이라고 착각하여 조사를 벌이고 있었는데 이것이 과장 보고된 듯하다.
 
  10월18∼25일 사이 金載圭는 釜馬사태에 대해 매우 엇갈리는 말을 했다. 측근들이나 知人들에겐 사석에서 釜馬사태가 장기집권에 대한 厭症(염증)에서 비롯됐고 배후는 없다고 말하곤 했지만 공식회의에선 상투적인 원인 분석 결과를 보고하곤 했다.
 
  林芳鉉 당시 청와대 대변인(뒤에 민정당 의원)은 이렇게 기억했다.
 
  『관계자 회의에서 金載圭는 부마사태의 주모자를 첫째 신민당, 둘째 학생, 셋째 제5열의 개입 등 세 갈래로 추정, 조사를 하고 있다고 보고하는 것을 들었다. 朴대통령을 마주 보지도 못하고 아래로 시선을 비껴 던진 채 풀 죽은 표정으로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 정보부장이 저런 애매한 보고를 해선 곤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金致烈 법무장관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안보회의에서 김재규의 보고사항 중 신민당이 조종했다는 내용이 분명히 들어 있었다. 나는 다른 계통으로 부산사태에 대한 정보를 받고 있었으므로 「저게 아닌데」 하는 생각을 했다』
 
  金載圭는 부산사태를 현지시찰하고 돌아온 직후 정보부 간부들을 모아 놓고 이런 말을 했다(제2차장보 金正燮 진술).
 
  『부산에 가 보니 300만 시민 중 70% 이상이 유신체제를 지지하고 30% 이하가 반대하는 정도의 민심이다. 부산시가나 항만은 유신 후에 눈부신 발전을 하고 있어 일부 시민이 호응했다고 해도 행정관청에서 과감한 시정만 하면 곧 회복될 것이다』
 
 
  金致烈과 밀담
 
  1979년 10월22일 金致烈 법무장관은 朴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밤에 청와대에 들어갔다. 두 사람은 장시간 釜馬사태 등 時局문제를 이야기했다. 다음날도 金致烈 장관은 두 번째의 단독 면담을 했다. 金장관은 난국을 타개할 근본 대책으로 유신헌법의 개정을 건의했다. 개헌의 골자는 유정회 제도를 없애고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대통령 간선제를 바꾸자는 것이었다.
 
  朴대통령은 『나도 같은 의견이다』는 태도를 보였다. 金장관은 이를 『개헌 문제를 연구해 보라』는 뜻으로 해석했다. 첫날 면담 도중 朴대통령은 『정보부에서 몇 년 근무했지』 하고 물었다. 金장관은 1970∼1973년 사이 金桂元·李厚洛 부장 아래서 차장으로 일한 적이 있었다. 朴대통령의 물음에서 金장관은 대통령이 자신을 정보부장감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朴대통령과 金장관의 면담 직후 권력층 주변에선 「후임 정보부장은 金致烈」이란 얘기가 돌았다. 당시 공화당 의원이었던 李厚洛은 10월24일에 같은 선거구 출신인 신민당 의원 崔炯佑를 만나 당직 사퇴를 권유하면서 그런 귀띔을 했다.
 
  金장관은 신민당 金泳三 총재에 대한 의원직 제명 직전엔 『강경책이 百藥之長(백약지장)이라면 팔레비나 소모사의 말로가 왜 그렇게 되었겠습니까』라는 일종의 「상소문」을 개인적으로 朴대통령에게 올린 적도 있었다. 이러한 金장관에게 朴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자리를 맡기기로 결심했다면 그것은 정국의 근본적인 전환뿐만 아니라 유신체제의 進路에 대한 재검토를 뜻하는 것이었으리라. 金載圭도 자신의 후임으로 金致烈 장관의 이름이 오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가능성이 있다. 상당수 정보부 간부들도 『금명간 부장이 바뀐다』고 믿고 있었을 정도였으니까 金載圭로서는 『내가 해치울 수 있는 시간도 며칠 남지 않았다』는 강박관념이 생겼을 것이다.
 
 
  釜馬사태 종합대책
 
  玄鴻柱 국장은 10월22일 오후 2시부터 청와대에서 釜馬사태에 대한 중간 보고를 했다. 朴대통령, 金載圭 정보부장, 金桂元 비서실장을 비롯하여 내무·국방·법무·문교·문공장관 등이 참석한 자리였다. 玄국장은 보고서의 제목을 「부산·마산 소요사건의 실태와 대책」이라고 붙였다. 그 요지는 이러했다.
 
  <이번 사태는 단순한 학생데모가 아니라 시민 일부가 가담한 폭동에 가까운 소요였다. 시민들이 가세한 이유는 각 계층별로 차이는 있으나 租稅저항, 일선 경찰관 등 행정기관의 부조리에 대한 불만, 貧富격차에 따른 위화감, 변화에 대한 기대감 등이다. 민심 수습을 위한 각종 대책과 함께 현 정부가 안정되어 있으나 정체함이 없이 항상 쇄신하는 정부라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정부 각 부처가 국민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원대한 비전을 제시하고 항상 새로운 면모를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구체적으로는 부산·마산 사건 수사결과를 빨리 발표할 것, 지방도시의 소요진압능력을 강화할 것, 관계기관의 예방정보활동을 강화할 것, 서민생활 안정대책을 세울 것 등이다>
 
  朴대통령은 이 보고에 대단히 만족했다. 그는 『이 보고서를 국무위원들에게 읽어 주고 총리 책임 하에 대책을 시행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朴대통령은 또 『이번 사태는 충분히 사전에 예방할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중앙정보부, 내무부 등 정보기관의 활동이 미흡하였다』고 지적했다. 이날 오후 5시 釜馬사태 대책 수립을 위한 긴급 국무회의가 소집되었다. 대통령 대신 崔圭夏 국무총리가 주재했다.
 
  10월23일 오전 金載圭 정보부장은 부장실에서 간부들을 불러 놓고 어제 청와대에서 있었던 대책회의 결과를 설명했다. 그는 『각하께서 中情은 그동안 무엇을 했는가, 학원 내의 정보망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크게 꾸중을 하셨다』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金부장은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지적사항을 그대로 전달하는 성격이었다.
 
  10월24일 정보부 기정국장 玄鴻柱씨는 상부로부터 『내일 청와대에서 안보대책회의가 열린다. 보고서를 준비하라』는 지시를 다시 받았다. 그는 22일 보고문서를 토대로 새로운 보고서를 작성했다.
 
 
  朴鐘圭의 마지막 시도
 
  신민당 黃珞周 총무는 10월23일 정보부 金正燮 차장보로부터 만나자는 전화를 받았다. 黃의원은 24일 오전 약속된 장소인 서울시청 근방 백남빌딩의 한 사무실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金正燮 차장보의 부하가 불쑥 전화기를 내밀었다. 엉겁결에 받았다. 金載圭였다.
 
  『아이구, 黃총무님 오랜만입니다. 중대한 문제가 있으니 지금 이리로 와 주십시오, 안내는 金차장보가 할 겁니다』
 
  黃총무를 태운 뉴 코로나가 당도한 곳은 궁정동의 정보부장 사무실이었다. 문 앞에서 낯익은 金부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응접실로 黃珞周를 안내한 金載圭는 30분 동안 딴소리를 했다. 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야기를 하더니 『지도자는 후퇴를 잘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朴대통령의 위대성에 대해서는 열을 내 말했다. 이윽고 釜馬사태 이야기가 나왔다.
 
  『신문에선 양아치와 불량배가 데모했다고 하지만 실은 선량한 시민들과 학생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난국을 수습 못 하면 광화문 네거리가 피바다가 됩니다. 이걸 수습할 분은 나와 黃총무뿐입니다』
 
  이렇게 해서 본론이 시작됐다. 金載圭는 『난국 수습을 위해선 金泳三 총재가 당의 일선에서 물러나야 하며, 黃총무도 원내총무직을 사퇴해 주어야겠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서 『金泳三 총재는 나와는 같은 피가 섞인 一家가 아닌가. 내가 그분이 망할 일을 하겠는가. 黃총무도 사퇴하면 경영하고 있는 진해여상의 확장을 도와주겠고 2∼3년 뒤에는 롤백할 수 있도록 밀어주겠다』고 미끼를 던졌다.
 
  黃총무는 김재규가 말을 조리 있게 잘하는 데 놀랐다. 金載圭는 계속해서 『만약 黃총무가 불응하면, 감옥에 안 보낼 수가 없다. 총무에 대한 모든 비위조사는 다 돼 있다』고 위협했다. 釜馬사태가 진정 기미를 보이자 金載圭는 중단된 신민당 당직자 사퇴 공작을 再開했다. 그는 李厚洛 공화당 의원에게 부탁하여, 崔炯佑 의원이 당기위원장에서 사퇴하도록 설득하도록 했다. 金載圭의 의도는 黃총무 등 당직자들을 사퇴시키고 鄭運甲 代行체제를 출범시켜 조종하려는 것이었다.
 
  黃의원은 오후 4시쯤 『선약이 있다』고 거짓말을 한 뒤 궁정동 사무실을 나왔다. 金載圭는 문 밖까지 따라 나오면서 부탁했다.
 
  『내일 기자회견을 통해 사퇴를 발표해 주세요. 일을 잘 처리하고 함께 진해의 맑은 공기나 마시러 갑시다』
 
  黃의원은 그 길로 같은 선거구의 공화당 의원 朴鐘圭(前 대통령 경호실장)를 찾아갔다. 朴의원은 黃의원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바로 청와대에 대통령 면담 신청을 했다. 오후 5시30분쯤 崔侊洙 의전수석비서관이 『지금 바로 들어오시랍니다』라고 연락을 해왔다.
 
  이날(10월24일) 朴正熙 대통령은 車智澈 경호실장을 오전 9시53분부터 10시55분까지 만나는 것으로 日課를 시작했다. 그 직후 金載圭 부장을 불러 32분간 보고를 받았다. 朴대통령은 오후 2시엔 조지 볼 前 美 국무차관의 예방을 받고 「한국미술5천년전」 圖錄을 선물했다. 대통령은 오후 4시50분부터 6시까지 金桂元 비서실장, 柳赫仁 정무1수석, 申稙秀 특보, 金淇春 검사를 불러 시국대책에 대해서 논의했다. 이들은 6시부터 저녁식사를 시작했다. 6시10분에는 면담신청을 했던 朴鐘圭가 합류했다. 朴의원이 집무실 옆 식당으로 들어가니 대통령과 측근들이 칵테일을 들고 있었다.
 
  『馬山은 어땠어? 자네 집은 피해 없었나?』
 
  朴鐘圭는 보고 들은 釜馬사태의 심각성을 이야기하고, 온건한 대책을 건의했다. 7시반쯤 저녁식사가 끝나고 다른 사람들이 일어서는데 朴대통령은 『자네는 남게』라고 했다. 두 사람만 남자 朴鐘圭는 『각하, 오늘 낮에 黃珞周 총무가 찾아왔습니다』라고 말문을 열었다.
 
  『김재규를 만났대?』
 
  『그런 말은 없었습니다. 만났더라도 그런 말 하지 말라고 주의를 받았겠죠』
 
  『알아. 아까 다 보고받았어』
 
  朴鐘圭는 金泳三 의원직 제명과 선별수리론의 부당성을 험구까지 섞어 가면서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는 공화당의 경직성도 비판했다. 두 시간쯤 이야기를 했는데 朴대통령은 『그렇다면 자네가 나서서 일단 金泳三과 의견을 나누어 보게』라고 했다.
 
 
  「신민당 조종설」에 집착한 청와대
 
  10월25일 오전 8시30분부터 오후 1시30분 사이 수도경비사령부에서는 공안관계 각 시도 기관장들을 소집하여 시국문제에 대한 설명회를 가졌다. 李在田 경호실 차장과 청와대 金淇春 검사가 나와서 서울 지역에서 시위가 일어날 경우의 대비책을 설명하고 부대에선 시위 진압을 시범했다. 이 모임에 참석했던 정보부의 6개 지부장들이 부장을 만나기 위하여 본부에 갔더니 金載圭는 황급히 외출하면서 악수만 했다.
 
  金載圭 정보부장은 10월25일 오전 11시20분부터 30분간 안전국장 金瑾洙씨로부터 釜馬사태에 대한 수사상황을 보고받았다. 金국장은 「反유신 및 總和저해사범」에 대한 수사를 맡고 있었으므로 釜馬사태가 터지자 부하 30명을 현지에 내려보내 수사를 지휘하고 있었다.
 
  이날 그는 釜馬사태에서 신민당의 개입 여부에 대한 수사 상황을 보고했다. 신민당 지구당의 선전·총무·부위원장급들을 검거하여 조사하라는 청와대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金載圭 부장은 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金국장에게 『청와대가 입수한 첩보라는데, 오는 29일 전국적으로 대학가에서 시위가 벌어질 것이라 하니 정보 수집에 만전을 기하라』고 지시했다. 釜馬사태 이후 사무실에서 자고 있었던 金국장은 이날 오후 「29일 시위설 첩보」를 확인하기 위해 전국의 조직을 점검했다.
 
  金桂元 비서실장은 10·26 사건 뒤 軍검찰 신문에서 이런 말을 했었다.
 
  『부산사태에 대하여 차지철은 각하에게 신민당이 배후 조종한 폭동이라고 해서 선입견을 갖게 하고, 중앙정보부는 조사결과 신민당이 아니고 남조선민족해방전선 등 불온단체와 일부 反정부 학생들이 가담했다고 보고했으나 각하로부터 거절당하고 오히려 야단을 맞게 되자 金載圭는 그 원인이 차지철의 농간에 의한 것이라고 눈치 채고 분노가 극도에 달한 바 있습니다』
 
  釜馬사태는 이처럼 金載圭와 車智澈의 갈등을 증폭시켰다. 특히 朴대통령이 車실장의 엉터리 정보보고에 넘어가 부산사태를 金泳三 총재의 신민당원들이 사주한 것이란 선입견을 갖게 되고, 그런 조작된 결론이 나오도록 金載圭의 정보부를 압박해 간 것은, 결과적으로 자신의 生을 단축시키고 만다.
 
 
  『그건 고약한 일인데』
 
  1979년 10월25일은 목요일이었는데 맑았다. 이날 朴대통령은 으레 그러하듯이 車智澈 경호실장을 만나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했다. 오전 9시40분부터 10시15분 사이 약 35분간 車실장은 시국 및 야당 동향에 대해서 보고했다. 朴대통령은 그 직후 朴鐘圭 공화당 의원을 집무실로 불러 23분간 대화했다.
 
  朴鐘圭는 이날 아침 신민당 黃珞周 총무와 아침을 먹으면서 전날 밤 朴대통령과 나눴던 대화내용을 알려주었다. 朴의원은 『金泳三 총재의 태도를 빨리 통보해 달라』고 했다. 金총재를 만나고 나온 黃의원은 朴의원에게 『金총재도 난국 수습엔 동감이다. 긴급조치 9호의 철폐와 민주화 추진은 선행돼야 한다. 야당분열 공작도 중단돼야 한다』는 뜻을 전했다. 朴鐘圭는 朴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金泳三의 뜻을 전했다. 朴鐘圭는 생전에 『朴대통령께선 金총재가 제시한 조건을 거의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고 말한 바 있다.
 
  朴대통령은 「단, 앞으로 질서파괴와 폭력을 수반하는 불법행위는 없어야 한다」고 친필로 메모를 해주었다는 것이다. 朴鐘圭가 대통령 집무실에서 나오는데 입구에 車智澈 경호실장의 보좌관이 기다리고 있다가 『실장님이 점심을 대접하고 싶다고 하십니다』고 했다. 朴의원은 『시간이 없으니 차나 한잔 들고 가자』면서 경호실장실로 들어갔다. 車실장은 朴의원을 「실장님」이라고 부르면서 깍듯이 대했다.
 
  『이틀 동안 각하와 무슨 말씀을 나누셨습니까』
 
  『중요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었어』
 
  朴의원은 퉁명스럽게 하대하는 말을 했다.
 
  『혹시 金載圭 정보부장을 바꾸겠다는 말씀은 안 하셨습니까』
 
  朴鐘圭는 「金과 車의 불화가 이 정도로 깊은가」 하고 탄식했다고 한다. 朴鐘圭는 車를 높게 평가하지 않고 있었다. 그를 부하로 데리고 있을 때 그의 성품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우쭐해하지만 소심하고 겁이 많은 것이 車智澈이었다. 그래서 1974년에 후임을 천거할 때도 朴鐘圭는 吳定根을 밀어 대통령의 내락까지 받았었다고 한다. 朴대통령은 나중에 태도를 바꿔 車를 선택했다.
 
  오전 11시 金溶植 駐美대사가 출국인사차 朴대통령을 방문했다. 대통령은 金 대사를 위해서 집무실 바깥 뜰에서 점심식사를 마련했다. 이 자리엔 金桂元 비서실장, 崔侊洙 의전수석, 柳赫仁 정무수석, 그리고 朴振煥 특별보좌관이 늦게 참석했다. 이날 배석했던 柳赫仁씨(작고)의 생전 회고에 따르면 朴正熙는 스르르 떨어지는 오동나무 낙엽을 한 잎 줍더니 아주 감상적인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리더라고 한다.
 
  『오동나무 낙엽 하나가 가을이 깊어감을 알린다고 했는데…』
 
  餘命을 하루 남짓 남긴 그의 모습은 처연하고 스산하여 그날 오찬 참석자들의 뇌리에 오랫동안 남았다. 朴대통령은 늦게 연락을 받고 온 朴특보에게 스테이크 한 덩어리를 건네주면서 더 먹으라고 권하곤 다른 동석자들과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朴박사 고향이 마산인데, 이번 사태를 어떻게 생각해?』라고 물었다. 朴특보는 며칠 전 마산에 사는 친척들을 만나 들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민심이 떠나 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국민들이 새마을운동에도 옛날처럼 열을 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지방관리들이 올리는 새마을 관계 보고나 통계도 과장된 것이 많습니다. 정부와 국민이 뭔가 헛돌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건 고약한 일인데』
 
  『12월 초에 장충체육관에서 열 새마을지도자대회도 박수만 요란하지 김이 빠질 것 같습니다』
 
  朴특보의 말을 한참 듣고 있던 朴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그래, 그것 참. 부산 광복동에서 파출소에 불을 질렀는데, 옆에 있던 방티장수들이 손뼉을 쳤다는 거야. 그렇다고 그 아줌마들을 좌익이라고 할 수 있어? 평소에 그 파출소에서 노점 아주머니들을 얼마나 괴롭혔으면 그랬겠어. 역시 이것은 정당에 맡겨야 할 문제가 아니라 정부가 나서서 책임지고 해결해야 할 문제야』
 
  말을 끝맺자 朴대통령은 벌떡 일어섰는데, 朴특보의 눈에는 「결연한 의지」의 표시 같았다. 비서관이 오더니 『회의 시간이 다 됐다』고 대통령에게 알렸다.
 
 
  『미군이 있는 한 데모는 계속된다』
 
  이날 청와대 소접견실에서 열린 안보대책회의 主題는 아흐레 전에 터졌던 釜馬사태였다. 崔圭夏 총리, 金載圭 정보부장, 具滋春 내무장관 등 안보관련 책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玄鴻柱 정보부 企政국장이 종합보고를 했다. 玄국장의 보고 중에 사태의 원인으로서 「장기집권」을 지적하는 내용이 나오자 朴대통령은 『정부의 失政보다는 金泳三이의 영향이 더 크다』고 논평했다.
 
  보고를 다 들은 朴대통령은 이런 요지의 지시를 했다.
 
  『이번 사태에 대해 정보부·내무부 등 정부기관은 크게 반성해야 한다. 사전 정보활동이 부족했고 初動대응이 잘못되어 큰 소요로 확대되었다. 일선 공무원들의 對民자세가 불손·불친절·불성실하여 국민들의 불만이 크다. 이런 對民자세를 바로잡기 위하여 노력하라. 한국에서 데모는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한 계속될 것이다』
 
  朴대통령이 『데모는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한 계속될 것이다』고 말한 것이 흥미롭다. 朴대통령은 5·16 혁명 직후에 쓴 글이나 책에서부터 「한국인의 사대주의 근성」을 근대화의 가장 큰 걸림돌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조선조 당파싸움의 원인도, 事大主義 정책에 따라 국방조차 중국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양반들은 사소한 데 목숨을 거는 권력투쟁에만 전념한 때문이라고 보았다. 광복 후에도 이런 전통이 이어져 학생들과 정치인 및 지식인들은, 국방에 대해서는 미군이 알아서 해줄 것이니 우리 문제가 아니라고 밀어 놓고 사회혼란만 야기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視覺이었다.
 
  그는 『자주국방을 할 수 없는 나라는 진정한 독립국가라고 볼 수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죽기 하루 전까지도 한국인의 사대성을 개탄하고 있었다. 인간이든 국가든 자신의 생존을 남에게 맡겨 놓고 사소한 데 목숨을 거는 것은 성숙된 人格이나 國格을 갖추는 데 결정적 장애요인이 된다는 문제의식을 죽을 때까지 견지했던 것이 朴대통령이었다.
 
  오후 4시13분에 회의는 끝나고 朴대통령은 참석자들과 함께 대접견실로 옮겨 「나라 잃은 사람들」이라는 20분짜리 월남패망 관련 영화를 보았다. 朴대통령은 4시50분부터 5시38분까지 金載圭 정보부장의 보고를 받았다. 이 자리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고갔는지 알 수 없으나 이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 공식 만남이 되었다. 朴대통령은 5시38분부터 6시12분까지 崔圭夏 총리의 보고를 받았다.
 
 
  역사의 짐을 내려놓다
 
  10월26일 새벽, 잠자리에서 朴鐘圭는 전화벨 소리를 들었다. 시계를 봤더니 새벽 2시였다. 수화기를 드니 朴대통령이었다.
 
  『자네 어제 낮에 나한테 한 말이 틀림없지? 아침에 삽교천에 가는데 돌아와서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도록 하세』
 
  朴대통령은 상당히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10월26일 정보부 企政국장 玄鴻柱씨는 오전 11시쯤 예산관계 문서의 결재를 받기 위해서 金載圭 부장 비서실로 올라갔다. 대기하는 다른 국장들이 많았다. 비서실 직원에게 『결재를 받을 수 있을 때 알려 달라』고 한 뒤 내려왔다. 오후 2시쯤 비서실로부터 연락이 와서 金부장에게 다섯 건의 서류 결재를 받았다. 약5분이 걸렸다. 玄국장은 특이사항을 눈치 채지 못했다. 다른 국장들도 결재를 기다리고 있었다.
 
  朴대통령과 金載圭를 가장 가까이 모셨던 두 사람은 10월26일 저녁 7시40분에 궁정동 식당에서 일어날 일을 짐작도 할 수 없었다. 10월26일 오후 2시 시점에선 金載圭 자신도 다섯 시간 뒤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지르게 될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날의 만찬은 朴대통령이 선택한 시간과 장소였다. 車智澈로부터 만찬이 있다는 연락을 받고 나서야 金載圭는 비로소 弑害(시해) 계획에 착수했으므로 아주 피동적으로 이뤄진 擧事였다.
 
  그날 낮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 다녀온 朴대통령은 매우 기분이 좋았다. 그런 기분이 만찬에까지 연장되었더라면 金載圭는 마음을 바꾸어 먹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날 술자리에서 朴대통령은 車智澈이 엉터리 정보보고로써 그의 뇌리에 심어 놓았던 신민당의 釜馬사태 개입설에 집착하여 金載圭를 향해서 짜증을 냈고, 이것이 金載圭 마음의 뇌관을 건드렸던 것이다. 자신의 죽을 자리를 선택하고 그런 죽음을 부른 것은 朴正熙였다.
 
  그는 총격이 오가는 가운데서 의연하게 죽음을 맞았다. 가슴 관통상을 당하고도 비명 한 번 지르지 않고 곁의 두 여인에게 『난 괜찮아』라고 했다. 피가 샘솟는 朴正熙의 등을 맨손으로 틀어막고 있었던 申再順씨는 『그분은 체념한 듯 담담하게 죽음을 맞았다』고 증언했다.
 
  1979년 11월3일 國葬 때 崔圭夏 대통령권한대행이 朴正熙의 靈前에 건국훈장을 바칠 때 국립교향악단은 교향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를 연주했다. 독일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작곡한 이 장엄한 곡은 독일 철학자 니체가 쓴 同名의 책 序文을 표현한 곡이다. 니체는 이 序文에서 「인간이란 실로 더러운 강물일 뿐이다」고 썼다. 그는 이어서 「그러한 인간이 스스로를 더럽히지 않고 이 강물을 삼켜 버리려면 모름지기 바다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덧붙였다.
 
  朴正熙는 죽을 때도 그러한 超人의 순수성을 보여 주었다. 병원에서 그의 屍身을 만졌던 의사들은 『시계는 허름한 세이코이고, 넥타이핀의 鍍金은 벗겨져 있었으며, 혁대는 해져 있어 꿈에도 대통령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그의 死後 청와대를 정리하던 측근들은 집무실과 침실의 변기 물통에서 節水用 벽돌 한 장씩을 발견했다.
 
  장교 시절부터 『淸濁을 함께 들이마시는 사람』이라는 평을 들었던 朴正熙는 대통령이 된 뒤에 『충무공은 참 잘 죽으신 분이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두 사람 다 역사가 부여한 시대적 임무를 완수하고 죽었다. 그랬으므로 죽음을 맞았을 때도 苦痛보다는 역사의 짐을 내려놓는 홀가분함마저 느끼지 않았을까?
 
 
  정보부 간부들의 진술: 金載圭의 妄想에 대하여
 
  10·26 사건 뒤 계엄사 합동수사본부(본부장 全斗煥 국군보안사령관)는 정보부의 국장급 간부들을 연행하여 金載圭와 관련성 여부를 조사했다. 수사관들은 金載圭의 범행 동기에 대해서 아는 대로 이야기해 달라고 공통적으로 질문했다. 몇 사람의 답변을 소개한다.
 
  金瑾洙 안전국장은 합동수사본부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범행(대통령 시해) 전에는 생각지 못했지만 이런 일이 일어난 후에 곰곰이 생각해 보니, 첫째는 김재규의 강경일변도의 성격 및 과대망상적인 자만심에서 온 것이고, 둘째로는 중앙정보부장이라는 막강한 위치에 있으면서 자기 명령에 따라 부하나 평소에 친분관계를 유지해 왔던 군부가 자기 뜻대로 움직일 것이라는 誤判을 했으며, 셋째 최근 일련의 사태와 국내 정국 혼란에 대한 무능한 수습능력에 대하여 각하로부터 불신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서 저지른 어처구니없는 범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보부의 李炳豪 기획판단국장은 金載圭의 범행 동기에 대해서 이렇게 추측했다.
 
  <최근에 돌았던 정보부장 해임설 등으로 인하여 김재규가 자기의 지위가 위태롭다고 생각한 것 같으며, 정보부장의 막중한 위치로 보아 감히 정권을 차지할 수도 있다고 망상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정보부 총무국장 朱鎭均씨는 金載圭의 범행 동기에 대해서 이렇게 진술했다.
 
  <첫째는 김재규의 무능력으로 인한 각하의 불신임이고, 둘째는 최근에 있었던 요직 개편설과 더불어 정보부장 경질설이 나돌았기 때문입니다. 후임으로는 金致烈 법무장관이나 具滋春 내무장관이 될 것이라는 말이 돌고 있어 본인이 불안하게 느꼈을 것이고, 셋째는 정권야욕에 대한 망상이라고 생각됩니다.
 
  1. 3년 동안 정보부장으로 재직하면서 권력의 맛을 보았으며
 
  2. 정보부장은 사실상 政界 제2인자로 취급되는 경우가 있으므로 그 다음 자리는 대통령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특히 대통령 선출방법에 있어서는 대의원의 소집과 투표에 정보부 각 지부가 작용하면 자기도 대통령이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 같으며
 
  3. 釜馬사태 시 일부 시민들이 가세한 것을 보고 자신이 시해하면 시민들의 지지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망상을 갖게 된 것 같습니다.
 
  4. 김재규가 부임한 후 2차장 산하 2국 군사과를 대폭 강화하여 운영하였습니다. 과장을 장군으로 하고 각군 담당관을 전에는 대위, 소령, 일반직으로 하였으나 여기에 대령 한 명씩을 추가하여 보강하고 북괴 정보, 해외 정보 등 각종 정보 보고를 함으로써 각군 총장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다는 시책을 추진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軍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으며, 특히 자신이 육군 중장 출신이므로 軍을 장악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5. 사후 수습에 있어서도 中情부장이 일반 행정기관이나 수사기관에도 영향을 미쳐 무난히 처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金載圭의 정치참모로서 국내 정치를 조정하는 일을 했고, 10·26 사건 때 옆집에서 鄭昇和 장군을 접대했던 제2차장보 金正燮씨는 이렇게 진술했다.
 
  <金載圭는 (부하들이) 조직적으로 목숨을 바치고 충성을 맹세할 위인이 되지 못합니다. 혼자서 과대망상을 그려 본 것이지 그것을 입 밖에 내어 세력을 규합할 만한 대담한 인물이 되지 못하므로 배후세력도 있을 수 없다고 판단됩니다. 원래 머리가 그리 명석한 편이 못 되고, 말이 비교적 적으나, 자존심을 상했을 때 반발하는 반사작용이 강한 편이라고 보아 왔습니다. 일종의 소영웅주의적인 발상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玄鴻柱 기획정책국장은 이렇게 진술했다.
 
  <도저히 짐작이 가지 않는 일이나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국내 정치 상황이 혼미를 거듭하고 있는 데다가 정보부장으로서 이를 수습하지 못하게 되자 이에 따른 업무의 중압감 때문에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된 것이 아닌가 짐작될 뿐입니다>
 
 
  朴정권은 이렇게 해서 무너졌다
 
  제5공화국의 탄생에 母胎 역할을 했던 국군보안사령부가 중심이 되어 만든 「第5共和國前史」라는 책이 있다. 10·26 사건과 12·12 사건을 아주 사실적으로 다루고 있어 좋은 史料(사료)이기도 하다. 이 책은 朴正熙 대통령의 죽음을 부른 10·26 사건을 「측근들의 갈등과 부패」라는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유신체제가 막을 연 후 모든 권력이 대통령 1인에게 백지위임된 이후 이들 측근의 권한은 상대적으로 커졌고, 이를 이용한 그들의 非理와 越權행위 등 폐습은 점점 深化되어 갔다.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부정부패로 만연되어 있었지만, 권력의 핵심기관으로서 이런 악습의 온상은 주로 청와대 비서실, 경호실, 그리고 정보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권력기관들을 거쳐 간 수뇌들의 하나 같은 공통점은 무엇보다도 朴대통령 개인에 대한 충성심과 권력의 核에 있다는 사실을 이용한 私利私慾(사리사욕)이었다. 권력이 1인에 집중된 체제 자체의 모순에 의한 부작용이었으며, 측근의 고질적 非理는 시중에 유언비어를 나돌게 하였고, 경우에 따라 비난의 화살은 朴대통령에게 돌려지는 自繩自縛(자승자박)의 결과를 연출하기도 했다.
 
  체제가 硬化될수록 측근들의 비리는 심화되어 가는 경향이었다. 이제는 그들의 비리가 축재 이상의 다른 방향으로까지 비화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측근들끼리의 越權행위에 의한 알력이었으며, 車智澈과 金載圭의 알력은 극에 달해 마침내 대통령을 시해하는 10·26 사건으로까지 몰고 갔다.
 
  朴대통령의 車智澈에 대한 지나친 신임은 각종 정책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방대한 조직을 바탕으로 수집·종합된 중앙정보부장 金載圭의 정보나 건의보다도 경호실장 車智澈의 단편적이고 편견 섞인 건의를 받아들이는 결과를 초래했다.
 
  중앙정보부장이 對신민당 공작을 해서 대통령께 보고하러 가면 경호실장이 미리 보고를 해서 대통령의 결심이 끝난 후가 허다했다. 이런 경우는 통상 강경한 방향으로 결심한 연후가 되어 중앙정보부장이 비교적 온건한 방향의 건의를 해도 허사가 되기 일쑤였다. 車智澈은 학원 데모설 등에 관해서도 단편적인 첩보를 사실인 양 朴대통령에게 보고하여 『왜 정보부는 이것도 모르고 있는가』라고 朴대통령이 정보부장을 힐책하곤 했으나 車智澈이 보고한 날짜에 소요사태가 발생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車智澈은 朴대통령을 독재자이며, 강경하고 자비심 없는 사람으로 만드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경호방법에 있어서도 시내 고층건물의 청와대로 향한 문의 폐쇄를 강요하여 국민과 대통령의 거리를 점점 멀어지게 만들었다. 그는 死後 조사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蓄財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경호실장의 본연의 임무를 넘어서 정치문제에 개입하여 憲政질서를 문란하게 했다는 점은 蓄財 이상의 非理임에 틀림없다.
 
  車실장은 10·26 사건 이전 한 달여 전부터 권총을 부관에게 맡기고 다님으로써 金載圭가 朴대통령에게 총을 겨누었을 때 응사 한번 해보지 못하고 자신은 물론이고 朴대통령까지 不歸의 客이 되도록 했다. 한마디로 1979년의 경호실은 밖에서 보기에는 위풍당당하고 화려했지만 내실을 기하지 못했다. 外華內貧이 적절한 표현일지 모른다.
 
  1970년대 말 朴대통령 측근들의 지배적인 분위기는 그들이 힘을 합하여 대통령을 보좌하여 어려운 사태를 성공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부서장이 그 일의 해결에 결정적인 공을 세웠는가, 누가 대통령의 칭찬을 받는가 하는 삼척동자들의 놀음과 같은 충성심 경쟁 현상이었다.
 
  10·26 사건 이후 合搜本部의 권력형 부정축재자 수사에서 밝혀진 내용들은 권력의 측근과 그 주위가 얼마나 부패했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한마디로 장기집권은 새로운 특권층을 만들어 냈고, 특권층은 부정부패의 온상이 되었다. 임무를 도외시한 축재와 이권개입은 他부서의 업무를 침범했고, 급기야는 권력층 간의 알력이 생겼다. 기관 간의 알력은 국론 통일을 저해하였으며 국민들의 對정부 신뢰도를 저하시켜 이 땅의 불신풍조를 싹트게 했고, 갖가지 사회적 돌풍을 몰고 왔다. 이런 일련의 사태는 1979년의 잇단 정치파동, 사회소요 등과 복합되어 측근들 간의 알력을 더욱 가속화하여 끝내는 자기들이 모시던 대통령을 시해할 수 있는 분위기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미리 써 놓은 遺言
 
  이렇게 준열하게 朴정권의 말로를 진단하고 문제점을 지적했던 5공화국 세력들은 약 10년간 집권하면서 그 朴정권보다 더한 부패상을 보여 주었다. 그 5공화국을 단죄했던 소위 민주투사들마저 집권한 뒤에는 군인 출신자들의 정권에 못지않은 부패상을 보이고 있다. 정치부패를 근절하려면 또 한번의 혁명이 필요한데 문제는 그 혁명의 주체세력도 부패하고 말 것이란 예감이다.
 
  朴正熙의 꿈은 自主的 근대화를 통한 民族中興(민족중흥)이었다. 그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권력과 부패의 늪 속에 발을 담그고, 三面의 敵으로부터 공격을 당해 가면서, 자신들도 지킬 수 없는 도덕과 명분론을 무기로 삼아 대책 없는 비난을 業으로 삼는 위선적 守舊 지식인 세력의 도전을 극복해야 했다. 그를 공격한 세력은 좌익뿐이 아니었다. 민주주의의 경험이 한 세대도 안 되는 나라가 서구식 先進 민주주의를 그대로 따라 하지 않는다고 朴正熙를 독재로 몰았던 관념론자들이 더 많았다. 이들은 카터類의 미국인들로부터 응원을 받고 있었다.
 
  기회주의자들과 기능주의자들이 主流를 형성한 정권 안에서 오직 朴正熙만이 이들 위선자들과 맞설 수 있는 논리와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러한 朴正熙의 절대고독이 담긴 獨白이 바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였다. 朴正熙의 소망은 「소박하고, 근면하고, 성실한 서민사회가 바탕이 된 자주 독립된 한국의 창건」이었다.
 
  그는 1963년 자신의 魂을 불어넣어 쓴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동시에 이것은 본인의 생리이다』고 말했다. 그는 이 책에 미리 이렇게 유언해 놓았던 것이다.
 
  <본인이 특권계층, 파벌적 계보를 부정하고 군림사회를 증오하는 所以(소이)도 여기에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본인은 한마디로 말해서 서민 속에서 나고, 자라고, 일하고, 그리하여 그 서민의 人情 속에서 生이 끝나기를 염원한다> (연재 끝)●
 
 

 
  ▣ 연재를 끝내면서
 
  필자는 근대화 혁명가 朴正熙의 생애를 傳記형식으로 기록하는 시도를 지난 9년간 斷續的(단속적)으로 해왔다. 1997년 9월부터 조선일보에 연재를 시작했고, 2000년부터는 月刊朝鮮으로 지면을 옮겼다. 지금까지 쓴 분량은 350페이지짜리 10권 분량이다. 올해 안에 全10권의 전집으로 발간할 예정이다.
 
  드라마틱한 생애와 거대한 업적으로 인해 한국인으로서 가장 많은 傳記의 주인공이 될 인물이 朴正熙이다. 미국에서 링컨 傳記가 수만 種이 되는 것처럼.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는 앞으로 나올 그런 수많은 傳記의 첫 작품이란 의미가 있다. 제대로 朴正熙를 쓰는 데는 10권으로도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오래 살았더라도 회고록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국토를 「내가 그린 그림」이라고 생각했듯이 이 대한민국의 모습이 바로 자신의 회고록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전기를 쓰는 가운데 나의 朴正熙觀도 다소 바뀌었다. 10여 년 전엔 그의 일기를 읽으면서 「초등학생처럼 쓴 유치한 感想文」이란 느낌을 가졌다. 요사이 다시 읽어 보니 「유치함」이 「순수함」으로 바뀌는 것이었다.
 
  60代 권력자가 어린아이처럼 솔직한 감정을 담아 「유치한」 감상문을 매일 밤마다 쓸 수 있었으니 나는 『朴正熙는 권력으로 부패하지 않은 魂의 소유자였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의 최후가 車智澈 같았다면 그의 위대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좀 찜찜한 추억이 되었을 것이다. 그의 진면목은 죽음의 모습이었다. 인간은 산 대로 죽는다!
 
  傳記 연재는 끝났으나 朴正熙에 대한 나의 탐험은 계속될 것이다. 그의 살아간 모습은 나, 아버지, 삼촌들의 삶이었기 때문에, 그를 통해서 민족사의 가장 깊은 고민과 성취를 느껴 볼 수 있는 것이다. 盧武鉉이 오늘날 한국인의 얼굴이듯이 朴正熙는 開發年代 한국인의 얼굴이었다.
 
  연재 기사를 읽어 주신 분들의 격려와 비판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취재에 응해 주신 분들은 이 傳記의 동업자였다. 특히 月刊朝鮮 기자로서 자료 수집을 도왔던 李東昱씨의 역할이 컸다. 朴正熙의 위대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늘에서 떨어진 영웅이 아니다. 李承晩이 깔아 놓은 것들과 全斗煥의 마무리役이 없었더라면 우리가 기억하는 그런 朴正熙는 없었다.
 
  나의 글을 읽고서 21세기型 朴正熙가 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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