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을 보내면서 朴대통령은 일기를 썼다.
<1977년 12월31일 맑음. 달력에는 마지막 한 장이 남았다. 이제 몇 시간만 지나면 1977년 丁巳年(정사년)은 영원한 역사 속에 흘러가 버린다. 그리고 또 이 밤이 지나면 1978년 戊午年(무오년)이 밝아올 것이다. 지나간 정사년은 우리 민족사에 길이 특기할 雄飛跳躍(웅비도약)의 해였다. 民族中興(민족중흥)의 새 역사 창조의 이정표가 되리라.
종로 보신각에서 除夜(제야)의 종소리가 들려온다. 금명, 묵은 해는 떠나간다. 그리고 새해가 밝아온다. 종소리를 들으며 천지신명에게 두 손을 합장하고 경건히 기구하였다. 새해에도 조국 대한민국에 평화와 번영과 영광을 베풀어 주시고 우리 모두 總和團結(총화단결)하여 민족중흥의 새 역사를 위하여 보람 있고 위대한 성공이 있는 해가 되도록 하여 주옵소서>
돌이켜 보면 1979년의 대파국은 1978년에 시작되었다는 느낌이 든다. 이 해는 朴대통령이 집권한 지 18년, 유신체제가 출범한 지 7년째 되는 해였다. 월남 赤化(적화) 직후 일체의 反정권적 행위를 금지시킨 긴급조치 9호가 발효된 지도 4년째로 접어들자 민주화 운동 세력도 공포에서 벗어나 저항을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한국기독교학생회총연맹의 통계에 따르면 反정부 학생사건은 1975년엔 10건, 1976년엔 13건, 1977년엔 23건으로 늘더니 1978년엔 31건으로 급증했다.
1978년의 학생사건 중 3분의 2는 그해 5월18일에 있었던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와 그해 7월6일에 있었던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제9代 대통령 선거를 전후하여 일어났다.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있었던 통일주체국민회의 제1차 회의는 2578명의 대의원이 참석해 2577명이, 단독출마한 朴正熙 후보를 임기 6년의 차기 대통령으로 찍음으로써 99.9%의 찬성률을 기록했다.
1978년은 또 3大 스캔들의 해였다. 기업부정(한국사회 실세들에 대한 현대아파트 부정분양 사건), 공무원 부정(경북교육위원회의 가짜 교사 사건), 정치인의 타락(成樂鉉 스캔들)으로 이어진 3大 사건은 유달리 더웠던 이 해 여름에 몰려 터졌다.
「국력의 조직화, 능률의 극대화」를 구호로 내건 朴정권은 전해 수출 100억 달러를 돌파하고, 중화학 공업 건설, 새마을 운동, 中東건설 시장 진출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있었지만 장기집권에 대한 국민들의 싫증과 성장의 그늘 속 불만은 소리 없이 퍼져 가고 있었다. 朴대통령은 韓美갈등이 해소국면으로 돌아서고, 카터의 주한미군 철수 계획도 내부 반발로 어렵게 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음인지 사회의 바닥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큰 변화를 感知(감지)하지 못하고 自己成就(자기성취)에 대한 過信(과신)과 人事(인사)에서의 온정주의로 기울고 있었다.

1978년 1월11일, 朴대통령은 청와대 출입 기자단을 초청해서 오찬을 함께 했다.
『서울에 있는 버스 안내양들에게 방한복을 한 벌씩 선물로 주었더니, 그것을 안 지방 버스 안내양들이 자기네들도 해달라고 해서 인원을 알아보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1만5000명이나 됩디다. 그것을 내 활동비로 다 해 줘서 이 달에는 내 호주머니가 벌써 바닥이 났어』
朴대통령은 그 뒤 안내양들의 방한복을 만들어 준 회사 사장에게 친필로 감사편지를 보냈다.
<태흥무역회사 權泰興 사장 귀하.
어린 나이에 가정 형편이 불허하여 상급학교에 진학도 못하고 직업전선에 나와서 고된 일을 하면서 국민들에게 봉사하고 있는 소녀들에게 조그마한 선물 하나씩을 보내어 그들의 노고를 위로하고 격려할까 하는 뜻에서 귀사에게 부탁을 하였던 것인데, 귀하께서 그 취지를 忖度(촌탁)하시고 성심껏 협조하여 주신 데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이 물품을 받은 안내양들도 이것을 알게 되면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하고 더욱 성실한 마음가짐으로 자기들이 맡은 일에 성심성의 열심히 일을 하리라고 믿습니다>
한 기자가 벌써부터 사전 선거 운동이 과열기미를 보인다는 말을 꺼냈다.
『빨리 해서 끝내 버릴까? 일부 정치인들이 정치 不在라고 하다가도 국회를 열면 별별 소리를 다 하더군. 國政감사가 있을 때 같으면 더 시끄러웠을 겁니다. 마치 어사 출두한 기분으로 선거에 임하는 것 같아요』
대통령은 국회를 전혀 생산적인 것으로 보지 않았다.
『우리가 지금 할 일은 국가기강을 세우는 것입니다. 정신문화를 부흥시켜야 해요. 경제와 정신문화는 같이 발전을 시켜야지 先後를 따지면 안 되는 겁니다. 선거 때가 되면 우선 이기고 봐야겠다는 생각에 유권자를 계속 풀어놓다가 보니까 일본이 오늘과 같은 반성을 하는 것 아닙니까. 국민들의 욕구를 한없이 들어주다가는 그 고삐를 잡기가 어려워요. 어느 정도 억제하다가 경제 성장에 맞추어서 슬슬 풀어 주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렇게 해서 정치와 정신문화가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것이 정치의 正道(정도)라는 것을 알아야 해요』
화제가 外貨(외화) 문제로 넘어갔다.
『美貨(미화)는 만일에 있을지도 모를 전쟁에 대비해서라도 축적해야 합니다. 통일이 힘겨루기라고 할 경우, 金日成과 내가 씨름 경기를 가질 수 있는 자리만 마련된다면 나는 자신 있어』

1978년 1월18일 연두기자회견을 가진 날 朴대통령은 일기를 썼다.
<기자회견을 10시 정각 중앙청 회의실에서 가졌다. 목감기가 아직 완전 회복되지 않아서 음성이 약간 탁하고 맑지 못하였으나 강행을 하다. 2시간 50분이 걸렸다.
희망과 자신과 의욕에 가득 찬 새해다. 조국 근대화와 민족중흥의 그날이 눈앞에 다가선 것 같다. 국제정치의 激浪(격랑) 속에서 北傀가 호시탐탐 남침의 기회를 노리고 있는 이 긴박한 한반도의 정세. 나날이 각박해 가는 세계경제의 추세, 외교에는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다고 하는 속담처럼 제각기 自國의 국가이익을 위해서는 의리도 신의도 없는 냉혹한 昨今(작금)의 국제정세.
오직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힘뿐이다. 힘, 힘이 없고 힘을 기르는 데 힘쓰지 않는 민족은 살아남을 땅이 없다. 이것은 진리다. 진리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내 곁에 있다.
이제 우리에게도 어두운, 지루한 밤은 가고 새날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 밝아온 새 아침에 지금 살고 있다. 이 밝은 새날은 우리가 역사상 처음으로 大雄飛(대웅비)를 기약받은 새 역사의 출발점이다. 금년은 그중의 한 해다.
물질문명의 풍요와 발맞추어서 정신문화에도 꽃을 피우기 위하여, 전통문화에도 꽃을 피우기 위하여 조상들의 얼과 슬기가 맥박 치는 문화적인 자주성도 정립해 나가야 하겠다. 풍요하면서도 균형을 유지하고, 모든 혜택이 균점되게끔 정책방향을 지향해 나가야 하겠고, 道義(도의)와 인정이 충만한 사회를 건설해 나가야 하겠다. 이것이 우리가 지향하는 복지사회다>
朴대통령은 경제발전에 주력한 것같이 보이지만 의외로 정신력을 重視했다. 그는 민주주의가 主權在民의 원칙에 입각하고 있으나 권력을 만들어 내는 그 국민들이 성숙되지 않으면 선거 때마다 선동꾼들에게 넘어가 위선자나 사기꾼들을 뽑아 나라를 망친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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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부사관 과정 교육을 받기 위해 원주에 왔던 아들 지만(오른쪽에서 두 번째) 육사생도를 찾아온 朴正熙 대통령, 그의 두 딸 근혜·근영과 정승화 육사교장(왼쪽에서 두 번째). |
1978년 1월30일 朴正熙의 일기에는 아들 이야기가 등장한다.
<작년 오늘 志晩(지만)이를 데리고 육군사관학교에 갔었다. 志晩이는 입교(가입교)차 머리를 바싹 깎고 오늘부터 육사생도가 되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출발 채비를 하고 있었다. 아침 식사를 가족이 모여서 들고 있었으나 志晩이는 집을 떠나는 것이 섭섭해서인지 묵묵히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이제까지 한집에서 같이 살면서 한 번도 떨어져 산 적이 없었다.
3년 전 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부터는 부모형제 한가족이 얼마나 그립고 소중한 것인지 더욱 절감하게 되었다. 단 삼남매, 그중에서 하나가 또 육사에 입교하게 되니 집안이 더욱 호젓한 감을 느끼게 되었다.
1학기만 지나면 매주 외출로 집에 올 줄 알면서도 먼 길을 떠나는 것처럼, 모두가 큰 이별이나 하는 것처럼, 입학을 축하하면서도 또 한쪽으로는 심각한 표정들이었다. 朝飯(조반) 후 내 차에 志晩이를 태우고 같이 육사로 갔다. 날씨가 몹시도 한랭했다.
이제까지 어린애 취급하던 志晩이를 육사, 군 학교에 입교시키려고 하니 부모의 마음은 무엇인지 불안하게만 느껴졌었다. 육사 현관까지 가서 『몸조심하고 열심히 잘해라』하고 격려를 하고 혼자 집으로 돌아오는 심정은 퍽이나 허전하기만 했다.
그때로부터 1년이 지났다. 이제 늠름한 사관생도가 되었다. 그저께 외출 나와서 의기양양하다. 지난 1년을 통해서 자식을 군에 보낸 부모의 심정이 어떤 것이란 것을 처음으로 맛보게 되었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정이란 다 마찬가지리라>
1978년 2월3일 朴대통령은 특별한 계기도 없이 비서실장에서부터 청와대의 말단 직원에 이르기까지 생활에 보태 쓰라고 일률적으로 100만원씩을 주었다.

1978년 3월31일 朴대통령은 기자들과 점심 식사를 했다. 기자들은 朴대통령에게 외유를 하시라고 권유했다. 朴대통령이 외유를 자주 하지 않아서 청와대 출입기자들도 수행하여 나갈 기회가 거의 없었다.
『오라는 데는 많으나 가고 싶지가 않아요. 中東에는 한 번쯤 가보고 싶지만, 지난번 공화당 吉典植(길전식) 사무총장이 中東에 다녀와서 하는 말이, 내가 아니면 근혜라도 보내 달라고 했다고 하더군.
하긴 아프리카에서 가봉 대통령이 두 번씩 왔다 갔고, 그 후에 몇 나라에서 국가원수가 다녀간 일이 있기는 하지. 기자단은 매년 밖에 나가 보지 그래요. 내년에는 내가 남미 지역을 주선해 줄 생각이 있는데, 어떻소? 참, 총리가 금년에 어디 간다고 하는 것 같던데, 청와대 나오는 기자는 정치부죠. 어느 부 기자들이 외국에 많이 나가나?』
『경제부와 국회 출입기자가 많이 나갑니다』
『외국에 많이 나가 봐야 합니다』
朴대통령은 외국을 방문할 때 弱小국가의 대통령으로 대접받기가 싫다는 생각이었다. 나라가 부강해진 뒤 당당한 방문을 희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자들이 주부클럽에서 부녀자들에게 운전을 가르쳐 주고 있다는 보고를 하자, 대통령은 다시 한국인들의 억척스런 생활력을 언급했다.
『여기 천장 도배도 여자들이 했어요. 이런 도배 일도 하고, 자녀들도 봐 주면서 힘들게 사는 사람들도 많은 모양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돈만 번다면 무슨 일이든 다 하지. 월남전 때도 베트콩의 총격이 무서워서 메콩강에서 탄약을 실어 나르는 배는 어느 누구도 타지 않으려 했는데, 한국 사람들이 타고 운반했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朴대통령은 또 아르헨티나 기자를 만났던 얘기를 전해 주며 자랑했다.
『얼마 전에 한국을 다녀간 아르헨티나 기자가 서구 문명의 공해를 입지 않은 곳은 한국뿐이라고 말했다고 하던데, 정신적인 면에 있어서는 앞으로 우리가 가장 나은 나라가 될 겁니다. 구라파 정치인들은 보디가드를 데리고 다녀야 한다지 않아? 이탈리아에서는 작년에 2000건 이상의 테러가 있었다고 하던데, 우리는 그런 일이 없지 않아요』
이야기가 박동선 사건으로 악화된 韓美 관계에 이르자, 朴대통령은 미국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金東祚(김동조) 대사에 대한 미국 의회의 증언 요구(편집자 注: 미국 측은 코리아게이트 사건과 관련하여 前 駐美대사 金東祚씨에 대한 조사를 우리 정부에 요청해 놓고 있었다)는 그들이 암만 애써도 안 되는 문제야. 외무장관을 시켜서 스나이더 대사에게도 안 된다고 전했어요. 미국이 약속한 무기 지원을 안 해 줘도 좋아요』
朴대통령은 유고슬라비아의 티토 대통령이 제의한, 남북한과 미국의 3者 회담에 대한 생각을 피력했다.
『티토가 작년에 金日成을 만난 뒤에 카터에게 미국과 북괴의 협상 주선을 제의했다가 미국이 이에 불응하니까 다시 남북한과 미국의 3者 협상을 제의한 모양인데, 우리에게는 필요 없는 일입니다. 그때 미국은 약간 흐뭇했던 모양이지만, 그렇게 되면 월남과 같은 꼴이 되고 말아. 월남처럼 우리가 미국의 뒤만 따라다니게 된다면 무슨 창피겠소.
미국은 아시아에서 철군하는 마당에 정치적으로 이를 이용하기 위해 흥미를 보이는 모양인데, 북괴와 미국의 협상이 성과가 없으리라는 것은 그들이 더 잘 알고 있어요. 키신저가 이야기한 4者 회담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金日成이 일본 사람들에게 말했다는 정보를 들었는데, 북괴는 미국과 협상을 하게 되면 중도에 한국 정부의 참석에 찬성하는 대신 한국 대통령을 바꿀 것을 조건으로 요구할 심산이라는 거야. 金日成이 월남 패망 때 월남의 혼란해진 政情(정정)을 잊지 못하고 한반도에 그것을 적용해 보려는 심산이지. 미국과 북괴, 둘이서 협상한다고 해도 우리가 찬성하지 않으면 그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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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대통령은「비무장 KAL기를 향해 미사일을 쏜 소련은 그 人命경시로 해서 반드시 망할 것」이라고 日記에 썼다. |
1978년 4월10일, 朴대통령은 또 죽은 부인의 추억을 일기에 담았다.
<화창한 봄날이다. 後庭(후정)의 목련이 활짝 피었다. 봄이 오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저 청초한 꽃 한 송이, 그윽한 향기도 예와 다름없다. 저 꽃이 피면 『어쩌면 저렇게도 희고 깨끗하고 아름다울까?』하고 좋아하던 아내의 활짝 웃는 얼굴이 불현듯 떠오른다>
대한항공 여객기가 항로를 잘못 들어 소련 영공으로 들어갔다가 소련 전투기로부터 마시일 공격을 받고 무르만스크의 얼어붙은 호수에 불시착한 사건이 발생했다. 朴대통령은 일기에 이렇게 썼다.
<1978년 4월21일(금) 맑음. 서울-파리 간을 취항하는 대한항공기(707호기)가 21일 파리 오를리 공항을 떠나 서울로 운항하던 중 소련領 무르만스크 부근에서 야간 凍土(동토) 호수 위에 불시착했다는 소식이 미국 방공망 레이더에 포착되어 통보되어 왔다. 아직까지는 사고의 원인도 알 수 없고 승무원과 승객들의 안부도 알 수 없다. 소련과는 국교가 없는 관계로 미국 등 우방국을 통하여 간접적으로밖에는 정보를 입수하는 방법이 없어 초조한 마음으로 外信 등 그 밖의 정보를 기다리고 있다.
1978년 4월24일(월) 맑음. 18시경 KAL기가 사고기의 승객·승무원을 태우고 김포에 착륙했다. 사망자 1명의 유해가 먼저 내리고 부상자와 일반 승객들이 가족·친지, 기타 모든 국민들의 영접을 받으며 귀국하다.
위급한 상황에서 취한 우리 승무원들의 침착하고도 여유 있는 긴급조치와 한국인 승객들이 질서 있는 행동을 한 데 대한 칭찬의 소리가 대단하다. 그 동안 소리 없이 심어진 한국인이라는 높은 긍지와 總和(총화)의 힘으로 다져진 단결심이, 시시각각 생명의 위험이 다가오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각자 행동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교양과 훈련이 쌓인 데서 우러난 결과가 아니겠는가 생각된다. 특히 그 비행기는 태극기가 붙어 있는 우리 대한민국의 여객기이고, 그 비행기 조종사와 승무원들이 전원 우리나라 사람이라는 데서 더욱 더 자제심과 책임감이 생긴 것이 아닌가도 생각된다.
영국인 승객 한 사람은 호수 위에 불시착을 하는데 활주로에 내리는 것 같았다고 한다. 뒤에 동체로써 착륙했다는 것을 알고 神技(신기)에 가까운 조종기술에 감탄했다고 술회하고 있었다.
1978년 4월25일(화) 맑음. 불시착을 했던 대한항공기가 돌아와서 어젯밤부터 승무원과 승객들의 체험담을 종합해 본 결과 사고의 원인은 역시 계기의 고장이 틀림없는 듯하다.
원인이야 여하튼 100여 명의 승객이 타고 있는 비무장한 여객기에 대한 소련 공군의 총격행위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인도적인 견지에서 마땅히 규탄을 받아야 할 것이다. 천수백 년 전 신라시대에 우리의 조상들은 인명존중을 최대의 가치로 규정하고, 殺生(살생)은 필히 有擇(유택)하라고 가르쳤다. 이것이 문명사회의 가치관이다. 人命(인명)을 경시하는 문명은 진정한 문명이라고 할 수 없으며 반드시 멸망할 것이다>

1978년 5월10일, 오후 4시경 朴槿惠씨는 기자들과 테니스를 친 뒤 라커에 앉아서 환담을 나누었다. 기자들은 대통령의 鼻炎(비염)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난 것을 축하한다면서 큰 令愛(영애)에게 朴대통령과 자리를 함께할 수 있도록 주선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우연히 朴대통령이 운동복 차림으로 라커로 왔다. 朴대통령은 기자들이 수술 성공을 축하하자 『작은 일에도 신경을 써 주어 고맙다』고 했다.
대통령은 자신부터 예법에 철저했다. 한 비서관이 대통령에게 보고를 하고 돌아서 나가는데 와이셔츠 뒷자락이 바지 밖으로 삐져나와 있었다. 그 뒤 대통령은 비서실장을 불러서 그 비서관에게 옷을 단정히 입도록 주의를 주라고 지시했다.
金正濂(김정렴) 비서실장은 새로 임명되는 직원에겐 늘 당부했다.
『각하는 단정한 것을 좋아하시니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바지도 항상 줄을 세워서 입고, 그리고 구두도 항상 닦고 다니시오』
당시 청와대는 직원이 아니면 출입을 못했으나 예외적으로 특별히 지정한 구두닦이 두 사람만은 출입할 수 있었다.
1978년 여름 어느 날, 대통령은 전·현직 육·해·공 참모총장들과 전·현직 장관들을 초청해 다과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는 金信(김신) 前 교통부 장관과 沈興善(심흥선) 前 총무처 장관도 참석했는데, 두 사람 다 喪妻(상처)해 혼자 살고 있었다. 우연히 두 사람은 구석 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朴대통령이 다가갔다. 金信 장관이 대통령에게 말을 건넸다.
『각하, 딴생각하지 마시고 재혼하시죠』
『재혼은 무슨 재혼…. 여기 홀아비 세 명만 같이 모였는데, 우리 「홀아비會」나 하나 만들까?』

朴대통령은 유신헌법 제정 때부터 체육관에서 추대받는 식의 대통령 선출방법에 대해서 불만이 많았다. 1978년 7월6일 그런 식으로 99.9%의 지지를 받아 6년 임기의 제9代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朴대통령은 유신헌법 개정과 후계자 문제를 놓고 고민한다. 그는 金正濂 비서실장과 柳赫仁 정무수석 비서관을 불러 헌법 개정 검토를 지시했다. 金正濂 실장은 정보부장을 그만두고 쉬고 있던 申稙秀씨에게 그 연구를 부탁했다.
朴대통령이 내린 지침은 경쟁이 가능한 대통령 선출방식으로 개헌하고, 자신의 임기가 끝나기 1년 전에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국무총리에게 대통령 권한대행을 시키되 국무총리엔 미리 金鍾泌씨를 임명해 둔다는 것이었다.
金正濂씨는 『朴대통령이 JP를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었음이 확실하다. 다만 나를 포함해서 아무도 그 이야기를 JP에게 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金正濂 실장은 또 朴대통령이 퇴임 후에 살 집 자리도 보고 다녔다고 한다. 金씨의 증언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과연 朴대통령이 임기 중 사임을 진지하게 생각했을까에 대해서는 의문시하는 측근들도 있다. 이즈음 朴대통령이 2000년을 내다보면서 구상하고 있었던 국토개조사업 같은 것들을 보면 계속적인 집권을 전제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78년 9월26일, 朴대통령은 서산에서 고대하던 국산 유도탄(미사일) 발사를 참관했다. 朴대통령의 致辭(치사)가 있었다.
『「하면 된다」는 결의가 여기서 성공했습니다. 유도탄 제작에 참가했던 학자들 대부분이 가망이 없다고 떠나갔는데, 여기 남아 있는 소수의 과학자들이 유도탄 제작을 성공시킨 것입니다. 여러분의 기술과 인내가 이번 일을 해냈습니다. 정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그 자리에 참석한 과학자들은 유도탄이 목표물을 맞히는 모습을 보고는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朴대통령은 일기에 이날의 감동을 담았다.
<1978년 9월26일(화) 맑음. 금일 오후 충남 서산군 안흥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유도탄 시험발사가 있었다. 1974년 5월 유도무기 개발에 관한 방침이 수립되어 불과 4년 동안에 로켓 유도탄 등 무기개발을 성공적으로 완성하여 금일 관계관들 참관下에 역사적인 시험발사가 있었다.
① 對전차 로켓(3.5인치 로켓을 더 발전시킨 것)
② 다연발 로켓(28연발, 사거리 20km)
③ 중거리 로켓, 가칭 황룡(사거리 50km, 어네스트 존과 유사)
④ 장거리 유도탄, 가칭 백곰(사거리 150km, 유효반경 350m, 나이키와 유사함)
네 종목 다 성공적이었다. 그동안 우리 과학자들과 기술진의 노고를 높이 치하하다. 歸路(귀로)에 삽교천 방조제 공사장에 잠깐 내려서 공사현장을 시찰하고 현장에서 수고하는 농업진흥공사 직원들을 격려하다. 進度(진도) 74%, 1979년 말 완공예정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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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대통령은 유도탄 시험발사를 성공시킨 吳源哲 수석을「국보적 존재」라고 평했다. |

1978년 9월30일. 오후에 테니스가 끝난 후에 청와대 식당에서 朴대통령이 기자들과 식사를 함께 했다. 미사일 발사 성공이 화제가 되었다.
『그때까지 내가 있을지 그만둘지는 몰라도 앞으로 10년이면 강국이 될 자신이 있습니다. (미사일 개발을 성공시킨) 吳源哲(오원철) 수석은 국보적 존재입니다』
이때 기자들이 李厚洛(이후락), 朴鐘圭(박종규)씨의 공천에 대해 질문을 했다.
『李厚洛은 공화당 공천을 안 줄 생각이오. 나도 몰랐던 金大中 사건에 대해서 아직도 외국에서는 나와 관련을 지어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공천을 주면 이를 시인하는 격이 되지 않겠소. 무소속으로 나가는 것은 자유이고. 李실장이 이해하겠지』
기자들은 또 訪美 가능성에 대해 질문을 했다.
『카터가 보기 싫어서 안 갑니다. 카터가 오면 몰라도. 내년 봄에 일본에는 갈 것 같아요. 작년에 카터의 법률 고문인 조지아州에 거주하는 제임스 커버 씨가 조지아 대학의 안낙영 교수를 통해 「金大中 등 反정부 인사를 석방하면 카터가 만나겠다고 한다」고 나에게 제의를 해왔으나 거절했소. 금년에도 安교수가 나를 만나고자 했으나 비서관을 시켜서 만나게 하고, 나는 만나 주지 않았어요.
윤보선씨와는 두 번 싸웠지만, 그때 그 사람이 당선되고 나서 나라가 잘될 거라는 판단만 서면 양보할 생각까지 가진 일이 있었는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잘할 것 같지가 않더군. 우리나라는 이대로 가면 10년 후에는 틀림없이 강국이 될 겁니다』
朴대통령은 「강국이 된다」라는 마지막 말은 못 박듯 두 번 강조했다.

1978년 10월14일 오후에 대통령과 청와대 직원 전원이 청와대 뒷산에 올라가서 쓰레기를 주우며 자연보호 운동을 했다. 작업이 시작되고 나서 잠시 뒤 직원들 바로 뒤에서 끝이 뾰족한 T자형 지팡이와 봉지를 들고 朴대통령이 다가오며 쓰레기를 주웠다. 朴대통령은 앞서 가던 鮮于煉 비서관에게 말했다.
『비서실장이 먼저 인솔하고 올라간 모양이지. 그래도 이렇게 많이 나오지 않아서야 실장에게 기합을 좀 넣어야겠군』
『오늘 작업은 팀을 나누어서 하고 있습니다. 실장님 팀은 먼저 올라가셔서 이리로 내려오고 계시고, 우리 팀은 올라가다가 중간 지점에서 합류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 여기 책임자는 누군가?』
『접니다』
『저 엉터리 좀 봐. 그래서 이렇게 제대로 줍지 못했구먼』
대통령은 직원들이 놓친, 바위틈이나 구석구석에 박혀 있는 쓰레기를 주울 때마다 『정화 작업을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엉터리로 하면 쓰나』하고 웃으면서 계속 鮮于煉씨를 「엉터리」라고 놀렸다. 이렇게 쓰레기 줍는 행사는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꼭 있었다.
1978년 12월12일로 예정된 제10代 국회의원 선거에 대해서 朴대통령은 예전처럼 신경을 쓰지 않았다. 지금은 고인이 된 柳赫仁 당시 정무수석에 따르면 朴대통령은 국회의석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유정회 의원들을 대통령이 지명할 수 있는데 무리하게 공화당을 밀어줄 필요가 없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선거 책임자인 金載圭 정보부장과 金致烈 내무장관도 官權(관권) 선거 배격을 건의했다. 이렇게 하여 12·12 선거는 가장 깨끗하게 치러진 선거가 되었지만 그 결과는 朴정권에 이롭지 못했다.
당선자는 공화당 68명, 李哲承 총재가 이끌던 신민당 61명, 통일당 3명, 무소속 22명이었다. 총득표수에서는 신민당 후보들이 공화당보다 1.1% 포인트를 더 얻었다. 물론 신민당은 여러 지역구에서 복수공천을 했으므로 「사실상의 야당 승리」란 주장이 수학적으로는 맞지 않았지만 정서적으로는 먹혀 들었다.
朴대통령은 깨끗한 선거를 했다는 자부심을 믿고 공화당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12월14일 대통령은 『공명선거로써 또 한번의 혁명을 성취했다』는 소감을 밝혔다. 15일에는 『국회의석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유정회를 의식하고서도 국민들이 공화당에 그 정도의 표를 준 것은 평가할 만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親與 무소속의 표를 합치면 공화당이 더 많아질 것이다』고 하여 득표율에 신경을 쓰고 있음을 내비쳤다.

朴대통령의 소신과는 달리 與圈(여권) 내에서는 선거 결과를 스스로 패배라고 인식하고 책임소재를 가리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개인이나 조직이 외부의 도전에 직면할 때 자신의 논리를 지키지 못하고 외부의 논리를 받아들이면 반드시 패배의식을 갖게 되고 이는 내부 분열이나 붕괴로 이어진다. 청와대 민정수석실에서 이 무렵 작성하여 여권內 주요인사들에게 나눠 준 「선거분석자료」가 그런 문서이다.
<선거 결과 도시 서민층이 거의 여당을 외면한 듯한 결과를 빚게 한 것은, 그간 정부의 중간관리층이 경제가 성장되고 생활에 여유를 갖게 될수록 이에 파생하는 국민의 불평불만도 그만큼 다양화되고 비례한다는 民心 추세를 깨닫지 못하고 성과만 올리면 국민은 무조건 따라오게 마련이라는 행정부의 일방적이고 관료적인 풍조가 조성되었기 때문임.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국민의 희생쯤은 감수해도 무방하다는 자만심이 부지불식간에 공무원 사회에 쌓이게 됨으로써 시행착오를 저질러도 국민에게 미안하다는 사과 한 마디 없는 것이 예사가 되었음>
朴정권 안에선 어느 새 「선거敗因(패인)」이란 말이 굳어지고 그 책임을 내각과 청와대 비서실에 묻는 쪽으로 가닥이 잡혀 갔다. 12월22일 朴대통령은 내각과 비서실을 개편했다. 金正濂 대통령 비서실장이 駐日대사로 내정되면서 물러나고 짧게 중앙정보부장을 지냈던 金桂元 前 駐대만 대사가 새 실장으로 임명되었다. 朴대통령은, 崔圭夏 총리를 유임시켰으나 南悳祐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등 11개 부처 장관을 바꾸었다.
음악을 좋아하고 유순한 성격의 金桂元씨는 朴대통령과 같은 포병 출신으로서 軍 시절부터 가까웠다. 5·16 주체세력은 아니었지만 朴대통령에 의해 육군참모총장·정보부장까지 올랐고, 金載圭와는 특별한 인연을 갖고 있었다. 金載圭가 교통사고를 당해 중태에 빠졌을 때 그를 업고 병원으로 옮겨 살려 준 사람이 그였다.

金載圭는 대만대사를 오래 하고 있던 金桂元씨를 귀국시켜 공화당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시키려 했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朴대통령에게 비서실장으로 추천했고, 車智澈 경호실장도 편을 들었다고 한다. 車실장은 外柔內剛(외유내강)하면서도 깐깐하여 자신의 업무영역을 침범당하지 않았던 金正濂 실장이 거북했을 것이다.
金桂元씨는 朴대통령에게 자신이 비서실장에 부적격이라고 사양했으나 朴대통령은 『행정은 몰라도 돼. 나하고 말동무만 하면 돼』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金桂元씨는 거의 7년간 한국을 떠나 있었기 때문에 국내사정, 특히 정치상황에 대해서는 어두웠다. 상황을 개척하고 돌파하는 성격도 아니었다. 대통령이 그런 金씨를 곁에 두려고 했던 것은, 정권유지 및 국정운영에 대한 자신감과 나태함을 동시에 보여 준다. 외부 상황은 급변사태로 몰려가는데 朴대통령은 장기집권의 타성과 안일에 빠져 태풍 속의 눈처럼 한가한 모습이었다. 항상 긴장하여 역사의 흐름, 민심 동향과 맞물려 있어야 하는 대통령이 헛돌기 시작했다는 증거가 비서실장 인사였다.
金桂元씨가 비서실장이 되면서부터 車智澈 실장의 영향력이 커지고 金載圭 정보부장은 약화된다. 金실장마저 車실장의 越權(월권)을 통제할 수 없게 된다. 권위주의 정권하에서는 권력자를 누가 자주 만나느냐가 파워 게임의 승부처이다. 金桂元씨에 따르면 車실장이 金 부장의 대통령 면담을 통제하는 바람에 자신이 그를 불러 데리고 들어가 보고시키곤 했다는 것이다. 朴대통령은 車실장을 편애하고 그런 車실장을 軍 선배들인 비서실장과 정보부장이 증오하는 감정적 균열이 대통령 주변에서 소리 없이 진행되기 시작한 것이다.
1979년 新正 연휴 기간에 朴대통령은 가족들과 함께 부산 해운대와 경주를 돌았다. 이 순간 이란에선 팔레비 왕조가 붕괴되고 있었다. 팔레비의 서구식 근대화 정책에 도전한 호메이니의 이슬람 원리주의 혁명이 비밀경찰과 군대를 무력화시키고 있는 가운데 팔레비 왕의 출국이 임박했다는 보도가 잇따르고 있었다.
이때는 朴대통령도 이란 사태가 자신의 운명에 큰 영향을 끼치리라곤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뒤의 사태전개는 예상 밖의 결과를 만들어 낸다. 이란의 석유생산량이 줄어들자 제2차 오일 쇼크가 일어나 기름값이 배럴당 30달러까지 두 배로 치솟는다. 유신정권이 好況期(호황기)에 벌여 놓았던 중화학공업 사업이 큰 타격을 받고, 물가高·해고사태·租稅(조세)저항이 일어난다. 여기에 金泳三 의원 제명과 같은 정치적 사건이 기름을 붓고 드디어 학생시위에 중산층이 가담하는 釜馬사태가 터진다.

朴대통령은 1979년 2월1일자로 1군사령관 鄭昇和 대장을 육군참모총장으로 임명했다. 그는 盧載鉉 국방장관이 공식적으로 통보해 주기 5분 전 金載圭 정보부장으로부터 축하 전화를 받았다. 약 30분 뒤엔 車智澈 경호실장이 마침 1군사령부를 방문 중이던 李在田 경호실 차장(육군중장)을 통해서 鄭장군에게 축하의 뜻을 전했다. 李중장은 『車실장이 이 점을 꼭 전해 달라고 당부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들은 이야기를 전했다.
『어느 모로 보나 후임총장은 鄭장군이 되어야 하는데, 盧국방이 鄭장군을 빼고 朴○○ 장군을 추천했답니다. 그런데, 각하께서 친히 인사기록 카드를 뽑아 鄭장군을 지명했습니다. 車실장은 「장관이 그럴 수 있느냐」고 흥분하고 있습니다』
鄭장군은 「車실장이 나와 盧국방장관을 이간질시키려는구나」라고 생각했다. 「국방장관과 육군참모총장의 사이가 나빠지면 나라가 망할 수도 있는데 경호실장이란 자가 이런 짓을 하는구나」라고 걱정했는데, 며칠 뒤 만난 金載圭 부장은 자신이 대통령에게 鄭장군의 충성심을 강조했다고 생색을 냈다.
朴대통령의 이 인사는 10·26 사건과 12·12 사건의 현장에 鄭昇和란 인물을 등장시키는 계기가 된 역사적 의미가 있으므로 더 자세히 알아본다. 金桂元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의 증언을 소개한다.
『어느 날 대통령 집무실에 내가 앉아 있는데 盧국방장관이 들어왔어요. 「육군총장 인사의 건」을 보고한다고 하기에 저는 일어서 나오려고 했습니다. 朴 대통령이 「金실장, 어딜 가? 그냥 앉아 있어」라고 하십디다.
盧장관은 한 사람에 대해서만 열심히 설명하면서 육군총장으로 추천하는데 대통령께서는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어요. 제가 포병 후배이기도 한 盧장관에게 「각하께 복수로 추천해 선택받도록 해야지 왜 그래요?」라고 했습니다.
그제야 盧장관은 다른 서류를 한 장 꺼냈어요. 아마도 그는 복수추천을 하려고 왔다가 車智澈 실장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는 한 사람만 민 것 같았습니다. 朴대통령은 나중에 내놓은 서류를 훑어보더니 「이 사람이 좋겠군」이라고 찍었는데, 그 사람이 鄭昇和 장군이었습니다』
그해 3월 盧장관과 鄭총장은 2군 사령관으로 옮겨가는 陳鍾埰(진종채) 국군보안사령관의 후임으로 全斗煥(전두환) 1사단장을 추천하기로 합의했다고 한다. 물론 朴대통령은 全소장을 임명했다. 이 직책의 무게로 보아 형식이야 어떻든 朴대통령이 직접 5·16 군사혁명 때부터 측근에 두고 아꼈던 全斗煥 장군을 지명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1987년 4월에 全斗煥 당시 대통령이 술회한 내용을 당시 통치사료 담당 공보비서관 金聲翊(김성익)씨가 기록했다.
『옛날에 朴正熙 대통령이 최고회의 의장을 할 때 나에게 국회의원 선거에 나가라고 하는 걸 안 나갔어요. 張都暎 사건이 끝나고 얼마 안 됐을 때였는데 사무실에 오라고 해서 갔었어요.
나를 보고 「全대위, 국회의원 출마 안 하겠냐」고 그래. 내가 깜짝 놀라 「제가 어떻게 국회의원을 합니까」 하니, 「하면 하는 거지 왜 못 해」라고 해. 「아닙니다. 저는 군대에 있는 게 좋습니다」라고 했어. 「군인 하려고 사관학교에 갔지, 국회의원 하려고 간 게 아닙니다」라고 했어. 朴대통령이, 「자네가 필요하다」고 해. 시간을 달라고, 의논도 해 봐야겠다고 했더니 「남자가 하는 일에 상의는 무슨…」 하더니 이틀 후에 오라고 해.
내가 尹必鏞 비서실장과 의논했어요. 잘 말씀드려 달라고 했는데 朴의장이 또 불러. 생각해 봤냐고. 「나는 돈도 없고 군대에도 충성스러운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라고 했는데, 그때부터 朴대통령이 나를 특별한 사람으로 보는 거야. 내가 어디 가 있어도 골치 아픈 일이 있으면 나를 불렀어요. 군대 얘기도 물어 보고 그랬어. 나는 항상 그 양반한테 희망적인 얘기를 많이 했어요. 1년에 한 두 번씩은 부르셨어요. 이 식당, 여기에서 陸여사도 함께, 분식 권장할 때인데 분식으로 식사도 했어. 陸여사가 만든 거라고 했는데 별로 맛은 없었지만 나는 食性이 좋으니 두 그릇 정도 먹었어요.
내가 끝까지 국회의원 출마를 거절한 게 인상적이었던 것 같고 참신한 육사 출신으로 본 것 같아.
경호실 작전 차장보로 있을 때 내가 계속 나가겠다고 했어요. 車智澈 경호실장과 내가 사이가 나빴어. 車智澈이 원래 내 밑에 있었어. 그 사람이 육사 12기 시험에 떨어지고 그 다음에 포병 학교를 가서 포병장교가 된 사람이지. 자존심이 강해. 나와 함께 미국에 갔는데 그 사람이 미국 사람과 싸움을 해서 퇴교를 당하게 돼 있었어. 한국 학생장인 나한테 그 사람을 위해서 변호할 시간이 주어졌어요. 내가 대위 때였는데 못 하는 영어지만 열변을 토했어요.
이 사람이 훈련을 하다가 미국 장교는 10분 만에 교대를 시키고 외국 장교는 40분씩이나 교대를 안 시키는 데에 화가 나서 미국 군인을 때린 거야. 폭행을 하면 그 사람들은 큰 잘못으로 쳐요. 그 때 일행이 張基梧·崔世昌 장군 등이었는데 내가 제일 선임자였어.
그때 외국 장교에 대한 차별 대우가 있었어요. 언어 장벽 때문에 모두 고생했어. 車대위가 외국인의 불만을 대표해서 때린 것이라고 내가 변호를 해서 결국 용서를 받았어. 그 사람이 육사 12기 시험에 떨어진 것을 스스로 비밀에 부쳤는데 그 때문인지 陸士 출신을 매우 싫어했어. 그런 관계였는데 그 사람이 경호실장이 되고 내가 그 밑에 왔어. 내가 사단장으로 나가야 할 때인데, 朴대통령이 직접 사인을 해서 경호실에 오게 된 거야.
내가 화가 나서 예편해 버리려 했어. 朴世直이가 국방장관 보좌관이었는데 徐鐘喆 장관한테 면담 신청을 해서 저를 예편시키는 겁니까 물으니 朴대통령이 사인한 메모지를 꺼내면서 보라고 해.
車智澈이가 여러 가지 일을 삐뚤어지게 해. 중령으로 예편하고 국회의원을 한 사람인데, 경호실장하면서 꼭 국회의원을 상대하고 높은 장군을 경호실에다 데려다 놓아. 車智澈이가 나한테 경호실장 뺏길까 봐 굉장히 신경 쓰는 것 같았어. 내가 내보내 달라고 했어. 내가 소장이 되고 나서였어. 朴대통령과 金載圭, 車智澈, 나 이렇게 골프장에서 저녁을 먹는데 朴대통령이 「사단장을 꼭 해보고 싶은가」라고 물어서 「軍의 희망이 사단장 아닙니까」 하니 「그래, 사단장 해 봐야 될 거야」라고 해. 그래서 사단장으로 나갔어요. 사단장으로 나갔으니 보안사령관으로 갈 수 있었던 거지.
朴대통령도 내가 군대를 좋아하고 순수하게 나가니 마음에 드는가 봐.
사실은 그분이 10월26일에 돌아가셨지만 10월27일에 내가 보안사령관으로서 보고를 하도록 돼 있었어. 金載圭·車智澈, 그리고 정당 관계 암투가 있어 朴대통령이 상당히 위험할 것 같았어. 두툼한 보고서를 만들었어. 朴대통령은 보고서를 올리면 상대방한테 주어 버리는 성격이 있어요. 직접 그 사람을 불러서 주의를 줄 용기가 없는 거야. 정치 자금도 車智澈을 통해서 받고 신세를 너무 많이 지니 정면으로 말은 못 하고 보고서를 주어 버리는 거지. 보고서를 낸 사람만 죽게 돼.
보안사에서도 陳鍾埰 전임 사령관이 나가면서 나한테 보고서를 내지 말라고 했어요. 내면 죽는다고 하면서. 그러면 누가 朴대통령을 깨우쳐 주느냐, 내가 盧載鉉 국방장관에게도 얘기했어. 비서실 내부도 엉망이고 友軍(우군) 싸움이 金日成이와의 싸움보다 더 심했어. 망하려니 그런가 봐. 그래서 내가 10월27일쯤 대통령에게 보고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했어. 몇 번이나 읽어 보고 연습도 하고 보고 준비를 다 했었는데 朴대통령이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결국은 이렇게 오는구나 하고 생각했어』

全斗煥 장군이 10·26 사건이 났을 때 국군 보안사령관 자리에 있지 않았더라면 비록 그가 정규육사 장교단 출신의 자연스러운 리더였다고 하더라도 격동기의 주도권을 잡지 못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朴대통령은 軍內의 지휘부로 올라서고 있던 정규육사 장교단 출신의 지도적 인물에게 보안사령관이란 날개를 달아 주는 인사를 함으로써 자신의 死後를 관리하도록 한 셈이다.
全장군은 10·26 사건 뒤의 혼란기에 朴대통령 시해에 가담했던 金載圭 세력뿐 아니라 자신의 눈에 기회주의적으로 보였던 鄭昇和 세력까지 제거하고 집권한 뒤엔 朴대통령 격하 움직임을 차단하였을 뿐 아니라 朴대통령 시절의 경제개발 유산을 이어받아 1980년대 세계 제1위의 고속성장을 이끌었다. 성공적 死後 관리였다. 「全斗煥 없는 朴正熙는 없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 점에서 「全斗煥 보안사령관 인사」는 결정적 의미를 갖는다.
최근 全斗煥 前 대통령은 측근들에게 자신이 朴대통령의 총애를 받게 된 계기가 된 사건을 소개했다. 1968년 1월21일 金日成이 보낸 124軍 특공대가 청와대를 습격한 직후의 일이다. 청와대 외곽 경비부대장이던 全斗煥 중령은 金日成의 숙소를 습격하여 그의 목을 따오는 작전계획을 세우고 훈련까지 한 뒤 이를 대통령에게 보고했다고 한다. 울화가 차 있던 朴대통령은 충성스러운 부하의 용감한 보복계획을 허가하지는 않았으나 감동을 받았다는 것이다.
全斗煥 장군은 당시 「車智澈 사람」으로 알려졌으나 보안사령관이 된 뒤에는 車실장의 영향권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당시 영관장교들은 軍 수뇌부가 車 실장한테 굴종한다고 보아 경멸하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全사령관은 당당히 맞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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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2월1일 朴正熙 대통령에게 보직신고를 하는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왼쪽에서 두 번째는 노재현 국방장관, 김계원 비서실장. |

1979년 1월29일 朴正熙 대통령은 남북조절委 회담에 나가는 통일원 간부에게 이런 메모를 써주었다.
<北傀의 陷井
1. 南韓 政府 不認: 北傀外廓團體와 同一格下
2. 調節委 技能無力化
3. 「大民族會義」로써 統一戰線戰略試圖: 外軍撤收論議, 聯邦制 지지논의
4. 我側戰力增强計劃中斷, 現狀凍結, 裝備導入禁止
5. DMZ內 工事中止: 南侵땅굴防害 없이 工事해 내려오자는 것
6. 平和攻勢로 美軍撤收 促進
7. 앞으로 中斷時 責任轉稼>
이 메모를 읽어 보면 朴대통령은 북한 金日成의 노림수를 정확히 읽고 있었고 이를 한 장의 메모지에 더도 덜도 없이 깔끔하게 요약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메모를 해설하면 이런 이야기가 된다.
<북한은 이번 회담에 이런 함정을 파놓고 이런 전략으로 나올 것이다.
첫째, 그들은 한국 정부를 인정하지 않는다. 한국정부를 그들 외곽단체의 하나쯤으로 취급하려고 한다. 둘째, 그들은 조절위원회의 기능을 無力化시키려고 획책할 것이다. 셋째, 그들은 남북 간의 모든 단체가 참여하는 대민족회의를 열자고 주장하여 통일전선전략을 밀고 나올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회의에서 외군철수 및 연방제 지지를 논의하자고 덤빌 것이다. 넷째, 그들은 한국군의 戰力증강계획을 중단하고 현상태로 동결하도록 요구하고 장비 도입도 하지 말라고 억지를 부릴 것이다. 다섯째, 비무장지대 안에서 공사를 하지 말도록 요구함으로써 그 안에서 자신들이 남침용 땅굴을 파는 것을 방해받지 않으려 할 것이다. 여섯째, 평화공세로 주한미군 철수 분위기를 띄울 것이다. 일곱째, 회담이 중단될 때 그 책임을 우리 쪽에 전가하기 위한 함정을 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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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당 전당대회에서 李哲承 총재에게 역전승해 새 총재로 뽑힌 金泳三 의원. |
1979년 3월21일 청와대 경내 賞春齋(상춘재) 건물에서는 청와대 출입기자를 위한 만찬이 있었다. 청와대를 출입하다가 내근으로 돌아간 기자들도 초대되었다. 오후 5시 반쯤 朴槿惠씨와 함께 들어온 대통령은 기자들과 일일이 악수를 한 뒤 앉았다. 이날 식탁 위엔 김포 막걸리에 맥주를 섞은 술병이 놓여 있었다. 한두 사발만 들이켜도 금방 醉氣(취기)가 오르는 술이었다. 기자들이 피운 담배로 연기가 자욱했다. 朴대통령은 『하루 서너 갑을 피우던 담배를 최근 끊어 가고 있다. 어제는 두 대를 피웠다』고 했다.
『나는 담배를 많이 피울 때에도 집에 오면 피우지 않았어요. 금연을 시작한 뒤 텔레비전 연속극에서 탤런트들이 담배를 멋있게 피우고 있는 장면을 보면 또 유혹이 생긴단 말이야』
기자들은 하루 전 상춘재에서 車智澈 경호실장이 신임 여당 간부들과 국회 상임위원장들을 초청한 만찬을 주최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車실장이 대통령 代役을 한 셈이었다. 朴대통령이 자연스럽게 의문을 풀어 주었다.
『이 별채를 지은 뒤 집들이를 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가 많았는데, 마침 며칠 전 국회간부들이 새로 뽑혔으니 여당 신임간부들까지 합쳐서 (車실장에게) 「네가 한잔 내라」고 얘기해서 어젯밤에 축하만찬이 있었지』
기자들은 朴대통령이 車실장을 「네」라고 부르는 데 놀랐다. 朴대통령이 車智澈을 아들처럼 생각한다는 인상을 주었다. 朴대통령은 신민당 총재 선거에 출마를 이날 선언한 金泳三 의원을 의식하는 발언을 많이 했다. 화제가 두 달 전 무너진 이란의 팔레비 정권에 미치자 대통령은 목소리를 높였다.
『金泳三이가 호메이니처럼 될 것으로 보는 모양인데, 천만의 말씀이야. 얼마 전 다녀간 홀브루크(美 국부차관보)도 한국의 정치는 한국이 알아서 할 일이고 자기로서는 말할 입장이 아니라고 했어. 그 사람은 심지어 「공산정권만 아니면 다 좋습니다」라고 말하더군』
朴대통령은 金泳三 의원이 국회의장으로 지명된 白斗鎭에 대한 취임반대 운동을 주도한 데 대해서 역정을 냈다.
『白의장이 유정회이기 때문에 반대한다면 유정회 의원을 뽑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도 선출하는 만큼 나에 대해서도 반대한다는 뜻이 아닌가. 金泳三이가 유신체제를 뒤엎겠다고 나선다면 우리는 「예, 예」하고 손 놓고 있겠는가. 金泳三이가 지금까지 법을 위반한 것이 일곱 건이나 되는데 신민당 전당대회 전엔 절대로 안 잡아 넣을 거야. 金泳三이가 신민당 총재로 당선되는 일은 없을 거야. 내가 물러난 뒤 金泳三이든 누구든 집권해서 국민이 행복하게 된다면 그때는 언론이 밀어 주어도 좋아요. 언론이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충정에서라면 얼마든지 나를 비판해도 좋아요』

당시 白斗鎭 파동에서 야당 편을 가장 강하게 들었던 동아일보 청와대 출입 강성재 기자는 불안했다. 그는 다른 사람을 방패삼아 朴대통령의 눈길을 피하고 있었는데 드디어 朴대통령이 소리쳤다.
『동아일보 강기자! 강기자 어딨어?』
『예, 여기 있습니다』
『내가 물러가고 金泳三이가 잡으면 동아일보가 행복하게 될 것 같아! 동아일보가 그러면 안 돼!』
강성재 기자는 가만있다가는 대통령의 힐난을 수긍하는 것처럼 될 것 같았다.
『언론자유가 있어야 국민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 줄 수 있고, 아픈 곳도 치유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정권에도 도움이 되는 것 아닙니까. 동아일보가 야당 얘기를 많이 쓴 것도, 정부에 대해서 비판적인 기사를 쓴 것도 사실이지만, 모두가 나라가 잘 되라는 뜻에서 한 만큼, 이 점 각하께서 오해가 없으셨으면 합니다』
40代 초반 기자의 대통령에 대한 말대꾸에 분위기가 딱딱해졌다. 다른 기자가 화제를 재빨리 돌렸다.
『각하, 이제 치안도 정착되었으니 야간 통행금지를 해제하실 용의는 없으십니까』
朴대통령은 조금 전의 화제를 잊은 듯 금방 대답했다.
『통행금지를 해제해 달라고? 좋아요. 내일부터 밤 10시로 앞당기지 뭐』
웃음이 터졌다. 朴대통령은 醉氣(취기)가 올라서 자신이 말을 너무 헤프게 했다는 생각을 했다.
『이건 모두 오프 더 레코드야. (옆자리에 있던 근혜씨를 향해서) 아버지가 다 털어놓기 전에 사인을 보내!』
만찬은 저녁 7시30분쯤 끝났다. 朴대통령이 정원으로 나가 배웅할 자세를 잡자 기자들이 일렬로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평소 대통령은 취해 있다가도 일어날 때는 금방 당당한 자세로 돌아가곤 했었는데 이날은 좀 흔들렸다.
朴대통령과 악수할 차례가 강성재 기자에게 오자 林芳鉉 대변인이 『동아일보 강성재 기잡니다』라고 새삼 소개했다. 그 순간 다소 흔들리던 朴대통령은 중심을 잡고서 『뭐, 강기자라고?』 하더니 자신의 머리로 姜기자의 이마를 들이받았다. 姜기자가 어리둥절하게 서 있고 朴대통령은 머리를 만지면서 『얼얼한데』라고 했다. 대변인과 딸이 朴대통령을 양쪽에서 부축하여 청와대 본관 쪽으로 모셨다.
姜기자는 흐트러진 대통령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뭔가 불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고 한다. 그 10여 일 후 청와대 기자단은 무슨 일로 상춘재 아래 잔디밭에서 朴대통령을 다시 만날 기회가 있었다. 21명의 출입기자들이 여기 저기 흩어져 앉자 朴대통령이 정색을 하고 엄숙하게 말했다.
『듣자 하니 지난번에 내가 동아일보 姜기자에게 실수를 한 모양인데 이 자리를 빌려 姜기자에게 정식으로 사과합니다』
姜기자는 「그 정도 가지고 공개 사과까지 하다니」하는 생각으로 坐不安席(좌불안석)이 되었다. 朴대통령은 아랫사람들에게 예의를 지키는 것에 철저했다. 이발 시간을 잡아두었다가 회의가 길어져 늦어지면 직접 이발소로 와서 이발사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으면서 『한 10분만 기다려 주게』라고 말하고 갔다. 만취 상태에서 돌아와 아들 志晩군의 침대에서 자고 일어나선 아들을 부른 뒤 『어제 밤에는 미안했다』고 사과하는 정도였다.

朴대통령이 1979년 5월30일로 예정된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金泳三 의원이 총재가 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의지를 기자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표명할 정도였으니 車智澈과 金載圭의 落選공작도 집요했다. 전당대회 며칠 전 金載圭 부장은 롯데호텔의 한 방에서 金泳三과 만났다. 두 金씨는 같은 金寧金氏였는데 이 만남을 주선한 사람도 문중 사람이었다. 이 자리에서 金부장은 『피는 물보다 진합니다』라면서 金泳三 의원에게 총재후보를 사퇴하도록 설득했다고 한다.
『대통령 각하의 생각이 확고합니다. 그분이 정권에 도전하는 사람을 가만두겠습니까』
金泳三은 이를 거절했지만 金載圭에 대해서는 인간적으로 호감을 가졌다고 한다.
신민당 전당대회 하루 전 연금 중이던 金大中씨가 중국집 아서원에서 열리는 金泳三 지지자들 단합대회에 참석하려 한다는 첩보가 정보부에 입수되었다. 참모들은 金大中씨의 외출을 강제저지할 것을 건의했다. 金載圭는 이 건의를 묵살했다.
金大中씨는 이런 증언을 한 적이 있다.
『당시 나는 가택연금 상태에 있었다. 신민당 총재선거 기간 중엔 연금이 강화되었다. 나는 金泳三씨를 밀기로 하고 趙尹衡씨 등 총재경선 후보 세 명을 사퇴시켰다. 그런데 그날 저녁에 집을 나섰는 데도 이상하게 경찰이 나를 막지 않았다』
金大中씨는 그 길로 아서원에 갔다. 약 800명의 대의원들이 모여 있었다. 金씨는 한 시간 동안 열변을 토했다. 그 요지는 『이번 총재경선은 親유신파와 反유신파의 대결이다. 金泳三 후보를 전폭적으로 밀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택시 합승을 예로 들면서 李哲承 총재의 중도통합론을 비판했다.
『독재는 북쪽이고, 反독재투쟁은 남쪽인데, 정반대로 가는 사람들끼리 어떻게 중도통합을 한다는 것인가』
그가 1973년 8월에 도쿄에서 납치되어 온 후 처음 한 이 공개 연설은 다음날의 투표 결과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79년 10·26 사건이 일어나기 며칠 전 당시 상공부 차관보 金東圭씨는 金寧金氏 같은 문중사람이기도 한 金載圭 정보부장을 관사로 찾아갔다. 이 자리에서 金부장은 『내가 공작을 해보니 金泳三씨를 밀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金大中씨의 연금을 하루만 풀어준 것이야. 누군가가 후세에 이 사실을 증언할 수 있어야 할 것 같아 말해 두는 거야』라고 하더란 것이다.
이런 증언들로 미뤄 金載圭가 정의감에서든, 車智澈에 대한 反感에서든, 또는 같은 문중 사람에 대한 애정에서든 일종의 사보타주를 하여 金泳三의 총재 당선을 도왔다는 가능성이 제기된다.
신민당은 1979년 5월30일 마포의 새 黨舍(당사)에서 전당대회를 열고 2차 결선 투표에서 金泳三 후보를 새 총재로 선출했다. 金씨는 재석 과반수보다 두 표가 많은 376표를 얻었고, 1차 투표 때 1위였던 李哲承 총재는 367표를 얻었다. 1차 투표 때 92표를 얻어 3등을 했던 李基澤 후보가, 마포 당사 앞에 모여 金泳三 지지 聲援(성원)을 보내고 있었던 대학생들과 청년당원들의 영향을 받아 결선 투표 때 金泳三 지지를 선언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한 作家의 방청기는 이 全黨대회의 역사적 의미를 이렇게 전했다.
<나는 예상 밖의 대역전 드라마를 감격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민주회복의 새 시대가 마침내 열렸음을 믿자고 그는 선언했다. 너무 격앙하여 기표소에 들어가 주먹을 치며 우는 대의원이 있었다. 그러다간 뛰어나와 손바닥이 깨지도록 박수를 치는 대의원이 있었던 것이다. 그만큼 이번 신민당 전당대회는 한마디로 희망이었다. 뭔지는 모른다고 나는 우선 말해 두겠다. 그러나 李哲承씨가 아니고 金泳三씨가 黨首가 된 것이 왜 이렇게 느낌이 다른 것일까>
필자는 이때 金泳三 의원의 지역구인 부산 서구 지역 경찰서를 출입하는 사회부 기자였다. 金泳三 총재가 등장한 다음날 아침 경찰서로 나갔더니 정보과 형사 한 사람이 즐거운 듯 말했다.
『간밤에 우리 관내에서 소주가 많이 팔렸대요』
역사의 흐름이 두 표 차이로 크게 선회하기 시작한 것이다.

1975년 7월 미국 메릴랜드州 포트미드의 국가안전보장국(NSA) 사무실에서 정보분석관 존 암스트롱은 북한군 탱크들을 항공촬영한 사진들을 살펴보다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기존자료와 비교해 보니 탱크수가 엄청나게 늘어난 것이다. 비무장지대 북쪽 계곡에 전에는 없었던 戰車사단이 등장했고, 그 규모는 전차 270대, 장갑차량 100대 규모였다.
암스트롱은 북한군의 戰車가 기존 정보판단보다도 약 80%가 증강되었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를 상부에 보고했다. 놀란 국방부는 35명의 분석팀을 새로 만들어 북한군 戰力에 대한 종합적인 再평가 작업에 들어갔다. 1978년 이 분석팀이 미군 고위층에 보고한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북한은 약 700개의 대대를 보유하고 있는데 이는 10년 전에 비교해 두 배 이상 증강된 규모이다. 전차와 야포는 한국군의 두 배이다. 지상군의 규모는 기존의 48만5000명에서 68만 명으로 늘었다. 이들 병력의 상당수는 휴전선에 근접 배치되어 있다>
1979년 1월 초 이 분석내용이 육군에서 발간하는 「아미 타임스」에 누출되어 보도되었고, 미국의 언론은 이를 크게 인용하여 보도했다. 주한미군 철수를 강행하려던 카터 대통령의 논리적 근거를 허무는 보고서였다. 그 전에 이미 이 보고를 받았던 카터 대통령은 1978년에 1개 전투여단 병력을 철수하려던 당초의 계획 규모를 축소하여 1개 대대 800명과 非전투요원 2600명만을 철수하도록 했던 것이다.
1979년에 들어서 카터의 주한미군 철수 계획은 더 이상의 추진력을 상실한 상태가 되었다. 카터는 2월9일 상원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새로 평가된 북한 군사력의 영향을 검증하는 동안 추가 철군을 보류한다」는 결정을 발표했다.
미국 백악관의 국가안보위원회에서 東아시아 문제를 담당하면서 주한미군 철수 반대 입장에 섰던 윌리엄 글라이스틴씨는 1978년 여름 주한미국 대사로 부임했다. 그는 7년 전에 쓴 회고록에서 『아무리 생각해 봐도 카터의 철군 추진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다』고 혹평했다.
<다행히 미국 정치제도의 안전밸브는 그 성능을 유감 없이 발휘했다. 대통령의 보좌관들은 효과적으로 그를 설득했고, 의회는 대통령을 공론의 場으로 끌어내 언론과 함께 공정한 검증을 했다. 카터 대통령은 자신의 고집을 꺾고 국가적 판단을 수용했다>

글라이스틴 前 대사가 묘사한 카터의 인권정책은 요사이 盧武鉉 정권이 벌이는 소동과 흡사하다. 그는 회고록에서 『카터는 인권문제에 병적으로 집착했다』고 썼다.
<그는 인권문제 기구를 신설했다. 인권운동에 가담했던 친구들을 끌어들여 인권문제 전도사 역할을 하도록 했다. 카터는 그들에게 의회內의 동조자들과 협조하도록 지시하고, 행정부內 인사들에게는 인권문제에 대한 관심이 업무평가의 주요 척도가 될 것임을 강조했다.
정부인사들과 인권운동가들의 과거사 논쟁과 긴장관계가 밖에서 안으로 옮겨지는 결과를 빚었다. 인권문제로 특채된 사람들은 한국 정부와 관련된 거의 모든 사항에 인권문제를 최우선적으로 고려하기를 바랐다. 거의 매일 그들은 한국 정부를 맹렬히 비난하는 성명을 냈다>
글라이스틴 前 대사는 자신이 이들 인권그룹과 맞서 한국을 변호하는 입장에서 일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인권문제 담당이던 국무부 차관 워런 크리스토퍼(클린턴 시절의 국무장관) 그룹 회의에 참가할 때마다 피고가 된 기분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대부분의 회의 참석자들이 아시아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아시아 국가들이 다른 분야에서 이룩한 성과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내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국의 경우 안보를 공고히 하고 경제발전을 이룩했으며 富와 교육기회의 공정분배, 국민들의 사회적 力動性을 무시해선 안 될 일이었다. 한국의 농민들과 노동자들에게는 이런 업적이 중산층이 추구하던 개인의 정치권리보다 더욱 중요했다>(중앙M&B 刊, 글라이스틴 회고록-「알려지지 않은 역사」에서 인용).
글라이스틴이 개탄한 것은 카터의 인권전도사들이 朴대통령 개인에 대한 공개적 비난을 통해서 인권을 개선해 보려고 하는 시도였다. 그는 「우리가 朴대통령에게서 합법적 지도자의 망토를 벗기는 것으로 보이면 또 다른 쿠데타를 불러와 다른 군부 지도자가 그 자리를 채울 뿐이며 그런 사람이 朴正熙보다 더 민주적일 것이라는 보장도 없을 것이었다. 그들은 세상물정을 모르는 소리만 했고, 반대로 그들은 나를 아시아 독재정권의 옹호자로 여겼다」고 기록했다.
민주화운동 在野 세력의 공세가 거세지고 선명투쟁 노선의 金泳三 총재가 등장하던 1978년에서 1979년 상반기 미국과 한국은 인권문제, 주한미군 철수 문제, 코리아게이트 사건 등으로 불편했던 관계를 해소하려는 노력을 시작한다.
1978년 중반에 이르면 코리아게이트 사건 조사도 종결단계로 접어들었다. 11월 중간선거가 끝나면 신문지면에서 사라질 것이라고 판단한 글라이스틴 대사는 1979년에 韓美 頂上회담을 개최해 韓美관계를 정상화시키려는 계획을 홀브루크 차관과 밴스 국무장관에게 보고해 허락을 받았다. 워싱턴에선 朴대통령이 인권개선 노력을 보여야 頂上회담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1978년 10월25일 朴대통령을 만나 頂上회담에 관한 미국측 의사를 전했다. 朴대통령도 頂上회담에는 긍정적이었으나 인권개선을 조건으로 거는 데 대해서는 거부반응을 보였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北京(북경)에서 미국 선교사 아버지로부터 태어나 중국에서 자란 사람이었다. 예일 대학교를 졸업한 이후 직업외교관이 되었고, 東아시아를 전공으로 하였다. 그는 아시아 사람들을 다루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인권개선의 필요성을 대통령에게 건의할 수 있는 인물들과 자주 접촉을 했다. 그와 CIA 지부장은 朴東鎭 외무장관과 金載圭 중앙정보부장을 만나 솔직한 이야기를 나눴다. 당시 美 CIA 한국 지부장은 로버트 브루스터였다.

朴대통령은 1978년 12월 한국 인권문제의 상징적 인물인 金大中씨 등 정치범 상당수를 석방하였다. 홀브루크 차관보는 1979년 3월 朴대통령을 면담하고 頂上회담의 성공을 위해서 긴급조치 9호를 해제하고 구금자를 석방하면 주한미군 철수 문제에서 호의적 성과가 있을 것임을 암시했다. 즉, 주한미군 철수 포기와 인권개선을 맞바꾸고자 한 것이다.
頂上회담 준비과정에서 카터는 세상물정을 모르는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또 다시 드러냈다. 그가 한국을 방문하는 동안 朴대통령과의 회담에 金日成을 동참시키고 싶다는 뜻을 글라이스틴 대사에게 전하고 한국 측과 협의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韓美관계가 정상화되었음을 과시하려고 마련한 회담장에서 朴대통령의 敵을 돋보이게 하려는 이런 짓을 강요하면 사임하겠다고 워싱턴에 통보했다.
美 국무부에선 카터의 체면을 세워 주기 위해서 頂上회담 때 북한 측에 韓·美·北 3者회담을 제의하는 방향으로 한국 측과 협의하도록 수정지시했다. 1979년 6월4일 글라이스틴 대사가 朴대통령을 만나 조심스럽게 이 제안을 설명하니, 朴대통령은 「북한이 그런 제안을 받아들일지는 의심스럽다면서 한번 해보자」는 정도의 반응을 보였다. 朴대통령은 이날 핵심적인 질문을 던졌다.
『나는 카터 대통령이 우리 편인지, 아니면 이집트와 이스라엘 간의 캠프 데이비드 회담에서처럼 남북한 사이에서 중재자로서 중간위치를 고수할 것인지 궁금하다』
카터 대통령은 金大中씨를 만나고 싶어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이 발상에 강력히 반대하는 電文을 보냈다.
<만약 金大中씨와의 만남을 고집한다면 訪韓의 긍정적 성과 가능성은 사라지고 분위기는 즉시 냉각될 것이며 朴대통령은 이를 개인적 모욕으로 받아들여 우리의 모든 노력을 수포로 돌리고 말 것이다>
카터는 밴스 국무장관에게 朴대통령과의 회담을 취소하더라도 金씨를 만나겠다고 화를 냈으나 결국 고집을 꺾었다.

1979년 6월29일 카터는 도쿄에서 7개국 경제頂上회담을 마치고 김포로 들어오게 되어 있었다. 김포 지역의 안개로 착륙이 늦어져 영접 나간 朴대통령은 거의 두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보도진에 둘러싸인 채 朴대통령과 악수만 나눈 카터 대통령은 시동을 걸고 대기 중이던 美 해병대 헬기를 타고 회오리바람만 남긴 채 동두천 미군부대로 떠났다.
朴東鎭 외무장관이 곁에서 지켜보니 「양 대통령은 非사교적인 성향이 있을 뿐 아니라 초면인 관계로 악수는 했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다소 서먹서먹한 인상을 주었다」(朴東鎭 회고록 「길은 멀어도 뜻은 하나」. 동아출판사 刊)
6월30일 여의도 광장에서 환영행사를 같이 하고 청와대로 들어온 두 대통령은 제1차 頂上회담에 들어갔다. 미국 측에서는 밴스 국무장관, 브라운 국방장관, 브레진스키 안보보좌관, 글라이스틴 대사, 배시 주한미군 사령관이 배석했다. 한국 측에선 崔圭夏 총리, 朴東鎭 외무장관, 盧載鉉 국방장관, 徐鐘喆 안보특보, 金溶植 주미대사, 金桂元 비서실장, 그리고 통역을 맡은 崔侊洙 의전수석 비서관이 배석했다.
朴외무장관은 韓美 간에 사전에 협의한 회담진행 방식을 미리 朴대통령에게 보고해 두었는데, 회담은 처음부터 이상하게 흘러갔다. 朴대통령은 회담을 어떻게 진행하겠다는 것을 설명하여 상대방의 양해를 구하는 관례를 무시하고, 곧 바로 주한미군 철수 문제를 꺼냈다. 회담을 준비하면서 미국 측이 가장 신경을 썼던 것이 이 부분이었다. 美 국무부 홀브루크 차관보는, 이미 주한미군 철수 계획은 사실상 포기된 마당에 朴대통령이 새삼 이 문제를 거론해서 카터의 자존심을 상하게 해선 안 된다고 金溶植 대사에게 신신당부를 해놓았을 뿐 아니라 여러 경로를 통해서 재삼 다짐을 받아 놓았던 것이다.
朴대통령은 자신이 메모해 둔 종이를 꺼내 놓고 일방통행식이고 강의조의 발언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통역시간을 포함해 45분간 진행되었다. 배석했던 글라이스틴 대사는 이를 「장황하고 딱딱한 연설조의 주장」이었다고 표현했다. 朴외무장관은 『일방통행식 발언이었을 뿐만 아니라 통역을 통해 하는 말이었으므로 매우 지루한 시간』이었다고 했다. 朴대통령이 강조한 것은 주한미군이 한국의 방위뿐 아니라 東아시아와 자유세계의 방어를 위해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金溶植 대사가 보니 카터 대통령은 펜을 들고 메모지에 무엇인가 쓰는 자세를 취했는데 경청하는 것 같지 않았다.

朴대통령은 자신의 발언에 열중하여 카터의 불쾌감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느꼈다고 하더라도 약 3년간 카터의 인권정책과 철군계획으로 속이 상할 대로 상해 있었던 그로서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쏟아 놓아야 할 판이었다. 朴대통령은 손가락으로 탁자를 「탁 탁」 치면서 「안보강의」를 계속했는데 이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나오는 행동이었다.
카터의 턱 근육이 조용히 씰룩거렸다. 해럴드 브라운 국방장관은 옆자리의 글라이스틴 대사에게 『대통령의 표정을 보니 매우 화가 나 있는 것 같다』고 귀띔했다. 카터는 메모를 써서 브라운 장관과 밴스 장관에게 슬쩍 넘겼다. 거기엔 「만약 朴正熙가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주한미군 전원을 철수시키고 말겠소」라고 적혀 있었다.
朴대통령의 연설조 발언이 끝나자 카터도 반격을 시작했다. 『인구도 많고 경제력도 우세한 한국은 왜 북한이 군사력의 優位를 점하도록 허용했는가』라고 공박했다. 韓美관계의 정상화를 목표로 했던 회담이 바야흐로 舌戰場이 될 판이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과거 여러 번 頂上회담에 배석했지만 그날의 두 사람처럼 회담 자체를 엉망으로 만든 지도자들은 본 적이 없다』고 회고록에서 고백했다. 그는 『韓美관계 개선을 위한 우리의 노력이 물거품이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 외에도 한국에 주재하는 미국의 고위 외교관으로서 개인적 실패감을 억누를 수 없었다』고 한다.
회담 중 휴식이 있었다. 미국인들은 그들끼리, 한국인들은 따로 모였다. 두 頂上의 험악한 언쟁으로 분위기가 무거워져 서로 대화조차 나누려 하지 않았다. 휴식이 끝나자 두 대통령은 기록자만 데리고 단독 회담에 들어갔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별실에서 기다리는 것이 「정말로 고통스러웠다」고 했다.
단독회담은 본격적인 공방전이 되었다. 카터는 『朴대통령이 요구한 철군계획의 완전한 동결을 거부하고 아무런 약속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 『한국정부가 방위비를 더 지출해 남북한 戰力 불균형을 감소시켜야 할 것이 아니냐』고 들이댔다. 朴대통령은 『방위비 지출을 늘리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면서 『한국은 북한과 여러 가지 여건이 다르다』고 지적했다. 드디어 카터가 인권문제를 들고 나와 긴급조치 9호의 해제를 요구했다. 朴대통령은 북한의 위협으로 가까운 장래에 해제하는 것은 어렵다면서 『助言에 유의하겠다』고 넘겼다.
단독회담을 하고 나오는 두 대통령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카터 대통령은 청와대를 떠나면서 미국대사 관저로 향하는 자신의 車에 밴스·브라운·브레진스키, 그리고 글라이스틴 대사를 태웠다. 그는 즉시 글라이스틴 대사를 힐난했다. 그 사이 차가 한 10분간 청와대 본관 앞을 떠나지 못했다. 전송 나온 金桂元 비서실장은 차가 떠날 때까지 한참 기다려야 했다. 대사관저로 가는 車中에서도 카터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글라이스틴 대사를 향해서 삿대질까지 했다.
『왜 그는 한국의 군사비 지출을 최소한 미국 수준(GDP의 6%)으로 늘리지 않는가. 왜 그는 정치적 자유화를 위한 조치에 반대하는가』
글라이스틴은 朴正熙를 위한 변호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朴대통령은 철군문제에 있어서 만족스러운 대답을 듣지 못해 난감했을 것입니다. 한국은 개발도상국으로서는 과도한 방위비를 부담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과거 한국 군부의 독재적 경향을 우려해 의도적으로 방위비 증액 요구를 자제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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頂上회담에서 朴대통령은 45분간 일방적으로「안보강의」를 하여 카터를 화나게 했다. |

카터는 글라이스틴 대사의 주장을 일축하고 또다시 朴정권의 인권탄압을 규탄했다. 자동차가 대사 관저 현관 앞에 도착했는 데도 車中 토론은 계속되었다. 밴스·브라운 장관도 끼어들어 몰리는 글라이스틴을 감쌌다. 욕을 실컷 먹은 글라이스틴은 카터에게 물었다.
『朴대통령이 무엇을 해주기를 기대하는가?』
카터는 두 가지를 주문했다. 「한국이 국방비 지출을 국내총생산(GDP)의 6%까지 높일 것」과 「괄목할 만한 인권신장 조치 약속을 받아 내라」는 것이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각하가 돌아가시기 전에 최선의 결과를 만들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제서야 카터는 차에서 내렸다. 카터를 예방하기 위하여 뒤따라온 崔圭夏 국무총리, 朴東鎭 외무장관들이 탄 승용차가 긴 행렬을 이루며 대사 관저 정문을 지나 길에까지 늘어서 있었다.
그날 오후 밴스 장관과 홀브루크 차관은 金溶植 대사를 통해서, 글라이스틴 대사는 金桂元 비서실장과 崔侊洙 의전수석을 통해서 朴대통령에게 두 가지 주문을 전했다. 그날은 토요일이었는데 오후에 金桂元 실장이 글라이스틴 대사에게 연락을 취했다. 「전날 頂上회담에서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부분이 있으므로 내일 오후 밴스 국무장관을 朴대통령이 따로 만나기를 원한다」는 전갈이었다. 金실장은 대사에게 『좋은 소식을 기대해도 좋다』고 말했다.
이런 경과가 카터 대통령에게 보고되어 그의 기분도 좋아졌다. 6월30일 밤 청와대 國賓 만찬장의 분위기도 한결 부드러웠다. 7월1일 朴대통령은 밴스 국무장관에게 방위비 지출을 GDP의 6%로 올릴 것을 약속하고, 카터 대통령의 인권에 관한 생각을 「이해한다」고 말했다.
카터 대통령이 그날 오후 離韓 인사차 朴대통령을 찾아왔을 때도 실속 있는 대화가 오고 갔다. 먼저 카터 대통령은 『방위비 증액 요구를 받아들여 준 데 대해서 감사하고, 워싱턴으로 돌아가면 주한미군의 계속 주둔에 대한 朴대통령의 희망을 고려해 「만족할 만한」 결론을 내겠다』고 약속했다.
이는 朴대통령이 오랫동안 고대하던 말이었다. 끝으로 카터는 인권개선 조치가 양국 간의 가장 중요한 문제임을 강조했다. 朴대통령은 『현재로서는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지 확언할 수 없으나 각하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김포공항으로 향하는 리무진에 동승했다. 카터는 朴대통령에게 『종교가 있느냐』고 물었다. 어린 시절 고향에서 교회의 주일학교에 다닌 경험밖에 없는 그는 『없다』고 했다. 카터는 『각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그는 침례교회 목사 김장환씨를 보내 『우리의 신앙에 관해 알려드리고 싶다』고 덧붙였다. 朴대통령은 평소부터 잘 아는 金목사를 환영하겠다고 했다.
카터가 탄 전용기가 이륙하자 朴대통령은 드문 웃음을 짓더니 글라이스틴 대사를 껴안았다. 朴正熙로서도 스트레스를 크게 받았던 3일간이었다. 이로써 정권적 차원에서 가장 큰 골칫거리인 韓美 갈등이 완전히 해소되었다고 그는 생각했을 것이다. 글라이스틴 대사도 그렇게 낙관했다. 한국 현대사는 그러나 권력자의 희망대로 굴러가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또 다른 진짜 위기가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