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9월12일 오전 청와대 서재에서 朴대통령은 金載圭 중앙정보부장, 白光鉉 수사국장, 큰 영애 朴槿惠를 앉혀 놓고 구국봉사단 총재 崔太敏의 非行혐의에 대해 親鞫을 했다. 朴대통령은 崔씨를 큰딸로부터 멀리 떼어 놓으라고 지시했으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
- 1975년 10월14일 영동-동해고속도로 개통 테이프를 끊은 직후 환영하는 주민들에게 손을 흔들며 답례하는 朴대통령. 뒤로 車智澈 경호실장과 金載圭 건설부 장관이 보인다. 대통령 왼쪽에 박상범 경호관이 보이고 안경 낀 金載圭 뒤로는 全斗煥 前 대통령의 동생 전경환 경호관이 보인다. 이들은 1979년 10월26일 밤 역사의 무대에 다시 등장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1975년 5월21일 오전 10시30분부터 두 시간 동안 金泳三 신민당 총재와 朴대통령의 회담이 있었다. 金총재는 李宅敦 대변인을 데리고 청와대로 왔다. 朴·金 회담에는 아무도 배석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요담이 끝난 뒤 청와대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점심을 함께 했다.
金正濂 비서실장에 따르면 두 사람은 표정이 아주 밝았으며, 화제도 발랄했다고 한다. 식사 후 朴대통령은 金실장과 수석비서관들에게 회담 내용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나는 金총재에게 한국과 미국 정보기관이 파악한 북한의 남침 준비상황을 자세히 설명했다. 만약 북한이 남침하면 韓美 양국 대통령이 승인한 「서울 死守 7일 작전」, 또는 「9일 격퇴작전」을 시행할 것이라고 했다. 월남의 멸망 원인이 국론분열에 있었음을 지적하고 초당적 총력안보에 협력해 줄 것을 요청했고, 金총재도 약속했다.
金총재는 유신헌법의 개정을 요구했다. 나는 이미 국민투표에 의해 투표자의 73%가 유신헌법 존속을 지지했음을 상기시켰다. 金총재는 계속하여 유신헌법 개정을 주장하기에 나는 『북한으로부터 남침 위협이 현저히 줄어들면 헌법도 개정할 수 있다』고 말하고 영수회담을 마쳤다>
金泳三 당시 총재가 나중에 필자 등에게 설명한 회담 내용은 약간 다르다.
<朴대통령은 커피를 내어 왔다. 창 밖을 보니 새가 한 마리 날아와 있었다. 나는 작년에 陸여사가 당한 사고에 대해 조의를 표했다. 朴正熙는 창 밖의 새를 가리키면서 『金총재, 내 신세가 저 새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앞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인간적으로 참 안됐다는 생각을 했다.
朴대통령은 아시아 지도를 꺼내 놓고 한반도와 그 주변정세를 내게 들려주었다. 설명이 끝나자 나는 유신헌법 개정을 요구했다. 대화가 길어졌다. 내가 거듭 『민주주의 하자』고 요구하니 朴正熙는 『金총재』하고 불러 놓고는 한동안 말을 끊었다.
『金총재, 나 욕심 없습니다. 집사람은 공산당한테 총 맞아 죽고, 이런 절간 같은 데서 오래 살 생각 없습니다. 민주주의 하겠습니다. 그러니 조금만 시간을 주십시오』
朴正熙가 눈물을 보이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럼 언제 할 거냐』고 따지고 들었을 것이다. 그의 눈물 때문에 그를 몰아세우려던 내 마음도 다소 풀렸다. 『꼭 민주주의 하겠다』는 그의 말은 『이번 임기를 마지막으로 물러나겠다』는 뜻으로 들렸다. 朴正熙는 뒤이어 『金총재, 이 이야기는 절대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합시다』 하며 말을 꺼냈다.
『조선 사람들은 문제가 있어요. 내가 정권을 내놓는다고 미리 알려지면 금방 이상한 일들이 생겨날 겁니다. 대통령으로 일하는 데 여러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나는 金大中씨 문제를 제기했다. 朴正熙는 金大中이 해외에서 비겁하게 反韓운동을 벌였다고 격렬하게 비난했다. 나는 金大中이 납치되어 왔으므로 원상회복시켜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아일보에 대한 광고탄압 문제도 심각하게 제기했다. 회담이 있기 며칠 전 金相万 동아일보 회장이 나를 만나자고 하더니 朴대통령에게 광고탄압건을 이야기해 달라고 부탁했다. 朴正熙는 『동아일보 광고사태를 풀어야 한다고 말한 사람은 金총재뿐이다』고 하더니 상기된 표정으로 동아일보를 비난했다. 그는 『金총재의 뜻을 잘 알겠으니 나에게 맡겨 주시오』라고 했다. 광고사태가 풀릴 것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金泳三 총재는 그날 신민당으로 돌아와서는 당직자들에게 회담내용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해주지 않아 오해를 많이 샀다. 金총재는 회담 뒤 상당히 고무된 표정이었다고 한다. 그는 친밀한 언론인을 만나자 『이제 金大中이는 끝났어』라고 좋아하더라고 한다. 그는 朴대통령이 1978년에 임기를 끝내기 전에 유신헌법을 개정할 것이며, 다음 대통령 直選에서는 金大中씨가 출마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다.
朴대통령이 金大中씨를 격렬하게 비난하는 이야기를 듣고 그런 오판을 했을지 모른다. 어쨌든 이 영수회담 이후 신민당은 유신체제에 대한 도전을 포기한 듯했다. 긴급조치 9호로 해서 일체의 改憲운동이 불법화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金泳三씨는 회고록에서 속았다고 고백했다.
金泳三 총재가 朴대통령으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說에 대해서 당시 정치자금을 관리하던 金正濂 비서실장은 『절대로 그런 일이 없었다』고 강조했다.
朴대통령은 긴급조치 9호 선포에 이은 金泳三 총재와의 회담을 통해서 야당을 온순하게 만들어 놓는 데 성공했다. 그 다음 해에는 朴대통령과 인간적으로나 이념적으로 가까웠던 李哲承씨가 신민당 당수로 선출되었다. 朴정권은 야당과는 일종의 밀월기에 들어갔다.
1975년 5월부터 金총재가 再등장하는 1979년 5월까지의 4년간 朴대통령은 국내의 민주화운동에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경제개발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 기간 朴대통령이 고심한 것은 韓美관계의 악화였다. 한국의 핵무기 개발 시도, 미국에서 駐韓미군 철수론의 대두, 카터의 철군 추진에 이어 朴東宣의 對美로비 내막이 미국 언론에 의하여 폭로되어 코리아게이트 사건으로 확대되었다.
미국으로 달아난 金炯旭 前 정보부장이 美 의회 증언대에 서서 대통령과 관계된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 폭로하고, 워싱턴 政街에서 反朴여론이 드세졌다. 1979년에 들어가면 韓美관계의 파탄이 국내정치로 돌아 들어와서 결국 10·26 사건으로 연결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침묵의 4년간은 1979년의 대폭발을 향해 발화온도가 상승해 간 기간이기도 했다.

이 4년간 한국은 中東 건설 시장에 진출하고 중화학공업 건설과 새마을 운동에 성공하여 1960년대의 輕量級 국가에서 中量級 국가로 업그레이드되었다. 이 기간에 朴대통령이 정력적으로 밀고 나간 자주국방력 강화 정책도 결실을 보기 시작하여 연간 국방비 지출 면에서 한국은 1976년부터 북한을 앞서기 시작한다. 1977년부터는 의료보험이 직장에서부터 도입되었다.
朴대통령이 유신을 선포하면서 노렸던, 국력의 조직화와 능률의 극대화에 의한 富國强兵(부국강병)이란 목표는 달성했으나 권력구조의 심층부에서는 자기파괴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다.
야당이 정권도전 세력으로서는 무력화되고, 여당은 擧手機 역할로 전락했다. 정치로부터 오는 낭비요인은 거의 사라졌으나, 朴대통령의 통치이념인 한국식 민주주의를 신념화하여 대중 속에 뿌리 내릴 수 있는 이념적 보수정당은 만들어지지 못했다. 공화당과 유정회는 지식인 층과 국민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대통령과 정보부의 명령만 수행하는 권력기생 조직이 되어 버렸다. 朴대통령은 야당을 무력화시킴으로써 결국은 여당도 약화시켰다.
유신의 심장이던 朴대통령이 죽자 自生力이 결여되었던 권력기생적 체질의 공화당과 유정회는 정규육사 출신 장교단에게 권력을 넘겨주었다. 朴대통령이 全斗煥, 盧泰愚로 대표되는 정규육사-하나회 출신 將校들을 총애하여 이들을 軍內의 엘리트 집단으로 키운 것이, 결국은 10·26 이후 권력공백기 때 이들이 진공상태를 메우게 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朴대통령은 정규육사 출신 장교단을 자신의 정치적 후계자로 예비한 셈이었다. 특히 그가 1979년 초에 정규육사 출신의 대표인 全斗煥 소장을, 비상시 국군의 신경망을 장악할 수 있는 국군보안사령관으로 임명한 것은 결정적 선택이었다.
1975년 3월4일 헨리 키신저 美 국무장관은 망해 가는 월남 대책에 바쁜 가운데서도 서울·캐나다·프랑스·일본·오스트리아 주재 미국대사 앞으로 電文을 보내 한국 정부의 비밀 핵무기 개발계획을 반드시 막아야 한다고 지시한다. 이 훈령은 구체적으로 이런 정책들을 제시했다.
〈1. 미국은 국제적 공급 국가들과의 공조 속에서, 한국이 민감한 기술과 장비에 접근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한국에 대한 원자로 판매에 완전한 IAEA(국제원자력기구)의 안전 규칙을 적용하는 것은 물론, 한국이 자체적 핵무기 개발에 이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민감한 기술과 장비들의 판매를 제한해야 한다. 우리는 한국이 (캐나다에서) 캔두(CANDU)형 원자로를 획득하는 것이 再처리 기술의 확대로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점에 특히 관심을 갖고 있다.
2. 한국으로 하여금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토록 압력을 가해야 한다. 캐나다는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
3. 한국의 핵시설에 대한 우리의 첩보 및 감시능력을 높이고, 관련 분야에서 한국의 기술적 상태에 대한 정보를 확대해야 한다. 우리는 핵에너지 관련 기관들에 대한 정기적 방문조사를 더 자주 할 계획이며 훈련된 기술자들로 하여금 사찰 횟수를 늘리도록 할 생각이다〉
駐韓 美대사관도 1975년 3월12일 국무부에 보낸 다음의 電文에서, 한국이 핵무기 개발을 하는 데는 10년이 채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우리는 한국이 핵무기를 개발하는 데 필요한 시간은 10년이 훨씬 안 될 것으로 판단한다. 우리가 확보한 여러 정보들에 따르면, 한국의 지도부는 핵무기 개발에 높은 우선 순위를 두고 있으며 1980년대 초에 그 결과가 나타나기를 기대하고 있다. 한국인의 저돌적 추진력과 그들이 이미 확보하고 있는 높은 기술 수준, 그리고 외국의 전문 인력을 불러들일 수도 있다는 사실과 상부로부터의 강한 독려 등을 감안할 때, 그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또한 제3국으로부터 핵무기 관련 장비와 기술을 도입할 수 있는 한국의 구매력에 대해서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핵무기 개발에 따른 정치적·경제적 부담이 한국의 움직임을 저지할 것이라는 견해에 대해서 우리는 의구심을 품고 있다. 한국이 제3국으로부터 (관련 물질과 기계) 구입을 선택할 경우, 한국에 대한 우리의 통제력은 크게 약화될 것이다.
이 분야에 관한 한 한국은 아주 위험한 목적을 가진, 끈질기고 거친 고객이다. 우리가 早期에 단호하게 행동하는 것만이 최상의 성공 기회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믿는다〉
핵무기 개발을 둘러싸고 벌어지던 韓美간의 긴장관계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 스나이더 駐韓 美대사였다. 그는 朴대통령과 직접 면담하여 미국의 우려를 전달하는 위치에 있었고, 본부에 대해서 한국의 의도를 적극 개진하고 자신의 대안을 설명했음이 최근 공개된 미국의 외교문서에서 나타난다.
다음 電文에서 주목되는 것은, 미사일과 핵무기 등을 개발해야겠다는 朴대통령의 의지가 미국의 안보 공약에 대한 불신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스나이더 대사의 지적이다.
바로 하루 전 사이공으로 월맹군이 진주하여 베트남戰이 공산진영의 승리로 끝나 서울이 위기감에 휩싸여 있을 때인 1975년 5월1일, 스나이더 駐韓 美대사는 키신저 국무장관에게 이런 보고서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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核개발저지 工作의 현장 책임자였던 스나이더 駐韓 미국대사. |
〈요지: 어제 스나이더와의 면담에서 朴대통령은 한국형 미사일을 개발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밝혔다.
朴대통령은 미국 정부가 (미사일 기술에 대한) 한국과 록히드社의 계약을 승인해 주지 않은 문제를 거론했다. 이에 대해 나는 미국 정부가 그동안 한국의 미사일 개발과 관련된 여러 차례의 지원 요청을 받았으나, 이는 미국 정부가 일본이나 西유럽 국가들 같은 선진국에도 개방을 통제하는 첨단 기술의 수출 문제이며, 미국은 이 분야에서 강력한 독점적 경쟁력을 유지하기를 바라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한국의 요청에 대해서는 우리가 韓美 양국 간 상호 협력의 기반이 되는 한국의 장기적 계획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실정이며, 분명히 알려 준다면 개별 항목들에 대해서는 수출허가가 이루어질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朴대통령은 향후 수년간의 계획에 대해 설명해 주겠다고 하면서, 국방과학연구소 장을 나와 접촉토록 조치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는 향후 3~5년 이내에 단거리 미사일을 개발하도록 지시해 놓고 있다고 밝혔다. 만약 미국이 도와줄 태세가 되어 있지 않다면 한국으로서는 제3국으로부터라도 지원을 받아야 할 형편이라고 덧붙였다.
朴대통령은 그로 인한 한국의 재정적 부담을 인정하면서도 『우리는 비 오는 날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이 駐韓미군의 철수 계획을 한국 정부에 정식으로 통보할 때까지 미사일 개발을 늦춘다면 그것은 너무 늦기 때문에 한국으로서는 「有備無患」의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다고 그는 말했다.
나는 朴대통령에게 미사일 개발비가 결코 낮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며, 바람직한 방법은 미국과 협력하는 길이라고 지적했다.
朴대통령은 결론적으로 한국 정부는 군수품 조달에서 自立을 목표로 하기로 결심했다며, 특히 미군이 철수할 경우에 대비하여 미사일 개발을 중시하고 있으니 미국이 이 분야에서 가능한 모든 지원을 제공해 주기를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나는 미군 철수에 관한 朴대통령의 우려를 다시 한 번 누그러뜨리기 위해 그의 미사일 전략을 더 이상 거론하지 않고, 그처럼 중차대한 전략적 결정은 상호 합의가 따라야 하니 향후 안보협의회에서 다루자고 제안했다. 朴대통령은 한국의 국방장관으로 하여금 내가 워싱턴에 신속히 보고할 수 있도록 이 문제에 대해 보다 상세히 브리핑하도록 지시하겠다고 말했다.
의견: 지금까지 수차에 걸친 면담에서 朴대통령은 미군 철수에 대비한 한국의 자주국방 계획을 구체적으로 밝혀 왔다. 이번 면담에서 그는 다시 한 번 미군 철수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며, 그래도 미군이 한국에 주둔해 있는 동안 자립적인 군수산업을 신속히 건설하겠다는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았다.
朴대통령의 국방 정책에 대해 충분하고도 조속한 검토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촉구한다. 현재 美 의원들의 태도를 감안할 때, 미군 철수에 대한 朴대통령의 우려도 무시할 수 없으며, 다른 대안을 모색하는 그의 계획도 무시할 수 없다〉

이 電文에서 보듯이, 朴대통령은 이날 3~5년 이내에 地對地 미사일을 개발하겠다고 스나이더 대사에게 밝혔는데, 그 3년4개월 뒤인 1978년 9월, 사정거리 180km의 국산 地對地 미사일인 「백곰」의 시험발사에 성공한다. 朴대통령이 목표달성의 시기를 밝힌 계획들은 거의 이뤄진다. 그는 말을 아꼈지만 公言한 것은 지켰다.
駐韓 미국대사 스나이더에게 朴대통령이 직설적으로 주한미군 철수를 예상하고 있다고 밝힌 점은 인상적이다. 朴대통령은 월남이 망해 가는 과정을 가까이 지켜보면서 미군이 파리 휴전협정에 따라 월남에서 철수한 뒤엔 對월남 방위공약을 지키지 않고 월맹의 명백한 협정위반을 방치한 사실을 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미국을 휩쓸고 있는 反戰여론에 휘둘리는 美 의회가 미국 대통령의 발목을 잡고 있는 한 대통령의 對韓 방위공약도 믿을 수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닉슨의 對월남 방어공약을 무력화시킨 것이 美 의회의 「인도지나 반도 무력사용不可 결의」가 아니었던가.
駐韓미군이 수년 내 철수할 것이라는 朴대통령의 예상은 적중했다. 그 다음 해(1976년) 대통령 선거에서 카터 후보는 駐韓미군 철수를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하여 철군계획을 추진하게 된다. 朴대통령이 월남 패망과 駐韓미군 철수의 예감 속에서 추진한 핵무기 개발은 그러나 再처리 시설 도입 교섭 단계에서부터 미국의 정보망에 걸려 외교적 압력을 받게 된다.
朴대통령도 굳이 핵무기 개발의지를 숨기려 하지 않았다. 거의 半공개적으로 추진한 것이다. 물론 당시 한국은 核비확산조약(NPT)에 가입하지 않아 국제법적으로는 핵무기 개발을 막을 명분이 미국엔 없었다. 그렇더라도 1974년에 인도가 핵실험을 하는 것을 보고 놀란 미국이 작심하고 한국의 핵무기 개발을 저지하기로 결심한 것을 모를 리 없는 朴대통령은 핵무기 개발을 아주 비싼 값에 포기하는 代案도 생각한다.
프랑스製 사용後 핵연료 再처리 시설 도입계획을 둘러싼 韓美 간의 갈등이 깊어지는 가운데 朴대통령은 1975년 6월7일 오전 10시30분부터 두 시간 동안 미국의 시사평론가 로버트 D 노박과 인터뷰했다.
朴대통령은 『우리는 핵무기 개발능력을 갖고 있으나 개발계획에는 착수하지 않았다』면서도 『만약 미국의 핵우산이 철수된다면 자구책으로서 핵무기 개발에 들어갈 것이다』고 말했다. 朴대통령의 이 발언이 미국 언론에서 보도된 직후 작성된 美 국무부의 정책건의서는 최근 공개되었다. 이 문서는 미국 정부가, 한국 정부는 물론 프랑스(재처리 시설 도입 대상국)와 캐나다(NRX연구로 도입관련)에 대해서도 압력을 가했음을 확인해 주고 있다.

1975년 7월2일, 브렌트 스코우크로프트 대통령 안보보좌관에게 보낸 로버트 잉거솔 국무장관 代行의 정책 건의서 요지.
〈한국의 핵무기 획득은 극도로 위험하며 미국의 주요한 이해관계에 대해 직접적 타격을 줄 것이다. 이같은 위기를 막기 위해서는 한국이 再처리 시설 및 플루토늄을 보유하는 것을 저지해야 한다.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두 번째 원자로인 고리 2호기를 도입하기 위해 미국 수출입은행에 1억3200만 달러의 차관을 요청했고, 추가적으로 1억1700만 달러의 신용을 요구했다. 수출입은행의 케이시 총재는, 한국內 사용後 핵연료들의 문제에 우리가 안심해도 좋다고 통보할 때까지 이 차관에 대한 청문회를 연기하기로 의회와 합의했다. 우리가 의회에 대해, 한국이 再처리 시설 계획을 포기했다고 확인해 주지 않는 한 이 차관을 집행할 수 없게 되었다.
캐나다와 프랑스의 태도: 지난 3월의 정책 지침에 따라 우리는 캐나다 정부와 접촉했다. 캐나다는 향후 한국에 대한 원자력 지원 문제에서 우리와 긴밀히 협의키로 했다. 우리는 또 최근 런던에서 열린 (핵 관련 기술 및 장비) 공급자 회의에 앞서 프랑스와 접촉했다. 우리는 프랑스에 대해서, 한국이 프랑스로부터 再처리 시설을 도입하려는 계획을 포기하도록 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알려 주었다.
프랑스는 우리의 관심에 이해를 표시했고, 再처리 시설 판매는 큰 상업적 이해가 걸린 것은 아니며, 만약 프랑스 회사가 계약 종결에 따른 비용을 보상받을 수만 있다면 우리의 계약 포기 요구에 반대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암시했다.
한국에 대한 접근: 우리는 현재 진행 중인 한국 측 원자력 분야 인사들과의 협의에서 미국이 제공한 원자로에서 나오는 사용後 핵연료의 再처리 계획에 대해서는 미국이 거부권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우리는 이에 대한 그들의 확인을 다시 요청했으며, 그들의 확인을 들은 후에라야 (짓고 있는) 고리 1호 원자로에 대한 美 핵통제위원회의 수출 허가를 요청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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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대통령에게 核개발 포기를 우회적으로 설득한 제임스 슐레진저 美 국방장관. |
위의 문서는 미국이 국가적인 의지를 실어 한국에 대해서 핵포기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는 증거이다. 우선 고리 2호 원자로 건설계획과 관련하여 한국 측이 신청한 약 2억5000만 달러의 미국 차관 및 신용대출을 약점으로 잡아 묶어 두기로 한 것이다. 미국은 이와 함께 프랑스와 캐나다에 압력을 넣어 핵무기 개발에 이용될 것이 뻔한 再처리 시설과 연구용 원자로 판매를 중지하도록 설득하기 시작했다.
미국 측은 또 韓美 원자로 협정에 의거하여, 한국에서 미국 회사가 지은 원자로에서 나오는 사용後 핵연료를 再처리할 경우의 모든 계획에 대해서는 미국이 최종결정권을 갖고 있음을 상기시키기도 했다. 이런 법적 권한에 대해서 한국 측의 확인을 받고 나서야 당시 건설 중이던 고리 원자력 1호기에 대한 미국 측의 사용승인이 떨어질 것이라고 협박했다. 미국은 2중 3중으로 한국을 압박하기 시작한 것이다.
스나이더 駐韓 미국대사는 朴대통령에게 직접 압력을 넣으면 오기가 센 대통령의 반발을 부를 것이라고 판단하여 아래로부터 계통을 밟아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는 먼저 원자력 기술 관련 업무를 관장하는 과기처 장관·외무 장관을 만나고, 金正濂 실장에게 미국의 입장을 전달했다. 청와대의 관례에 따라 스나이더 대사를 주로 상대한 사람은 金正濂 실장이었다. 金실장은 정기적으로 스나이더 대사의 관저에 가서 점심을 들면서 韓美 간의 공통관심사에 대해서 의견을 나눴다.
스나이더 대사는 核개발 포기를 위한 설득의 창구로 金正濂 실장을 활용했다. 金실장은 『스나이더 대사로부터 핵폭탄이란 말이 나온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했다. 스나이더 대사는 다만 프랑스로부터 사용後 핵연료 再처리 시설을 도입하는 것을 취소해 달라는 요구만 했다고 한다.
再처리 시설이 없으면 아무리 원자력 발전소가 많아도 핵폭탄의 원료가 되는 플루토늄을 뽑아낼 수 없다. 그래서 스나이더 대사는 「핵개발」이란 직설적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再처리 시설 포기만 요구했던 것이다.
스나이더 대사의 핵개발 포기 설득 작전을 지원하러 나선 것은 포드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운 제임스 슐레진저 국방장관이었다. 그는 1975년 8월26일, 27일 양일 간 서울에서 열린 韓美 연례안보협의회에 참석했다. 美 국방장관이 이 회의에 참석한 것은 1971년 이후 처음이었다. 슐레진저 장관은 8월27일 徐鐘喆 국방장관과 함께 가진 공동 기자회견에서 중요한 언급을 했다.
『駐韓미군의 地上軍이 막강하므로 핵무기를 쓸 기회가 없겠지만 핵무기를 최후 수단으로 보유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는 朴대통령이 걱정하는 미국의 핵우산이 건재함을 밝히고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도록 설득하기 위한 언명이었다.
8월27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2시42분까지 거의 네 시간 동안 슐레진저 장관은 청와대에서 朴대통령을 만났다. 대통령은 처음 1시간 20분 동안은 소접견실에서 슐레진저 장관, 스나이더 대사, 브라운 美 합참의장, 스틸웰 駐韓유엔군사령관, 위컴 군사보좌관, 徐鐘喆 국방부 장관, 盧載鉉 합참의장, 金正濂 비서실장, 崔侊洙 의전수석과 환담했다. 이들은 점심을 함께 했다. 그 직후 슐레진저 장관과 스나이더 대사는 朴대통령과 40분간 만나 심각한 이야기를 나눴다.
슐레진저는 朴대통령과 일종의 禪문답을 했다고 한다. 朴대통령은 비밀 핵개발계획을 인정하지 않았고, 슐레진저는 한국의 핵개발계획을 알고 있다는 이야기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슐레진저는 그러나 『朴대통령이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챈 듯했다』고 나중에 술회했다. 슐레진저가 이 자리에서 분명히 한 것은 「한국이 핵무기 개발을 강행할 경우 韓美관계가 와해될 수 있다」는 암시였다.

이 해 가을과 겨울에 걸쳐서 워싱턴에서는 필립 하비브 東아시아·태평양담당 국무차관보가 咸秉春 駐美 한국대사를 통해서 압력을 넣었다. 하비브는 스나이더의 전임 한국대사였다. 하비브는 프랑스로부터 再처리 시설을 도입하려는 계획을 취소해 줄 것을 요구했다. 咸대사로부터 보고를 받은 朴대통령은 「국가적 신의에 관한 문제」라면서 미국 측의 요구를 거절했다.
다음은 1975년 10월31일, 미국 국무부에 보낸 駐韓 美대사관의 電文.
〈한국 정부는 프랑스로부터 실험용 再처리 시설의 구입을 취소하라는 우리의 요구를 두 번째로 거절했고, 현재 우리는 이 문제를 놓고 곤경에 처해 있다. 한국의 이 같은 거절은 朴대통령의 주관下에서 심사숙고 끝에 결정된 것이 분명하다.
프랑스로 하여금 계약이 최종적으로 체결되기 전에 판매 계획을 중단토록 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방안은 다음의 네 가지이다.
(1) 더 이상 추가적인 대응을 하지 않음으로써 한국 정부로 하여금 核(원자력 발전 등) 분야에서는 미국의 지원 없이는 일 추진이 어렵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도록 하는 방안.
(2) 재처리 시설의 판매 문제는 묵인하고, 국제적 사찰뿐만 아니라 미국과의 쌍무적 사찰을 받아들이겠다는 한국의 방안을 허용하는 방안.
(3) 再처리 시설 구입 계약의 일시 중단이라는 중재안을 가지고 다시 한 번 朴대통령을 직접 접촉하는 방안.
(4) 非타협적 태도로 계속 朴대통령에게 압력을 행사하는 방안.
(1)案과 (2)案의 경우, 계산된 부담을 감수하면서 상황을 방치하면, 그 결과 미국에서는 한국에 적대적인 여론이 형성되고 美 의회는 군사원조의 삭감은 물론 고리 2호기 건설을 위한 차관도 부결시키려 할 것이다. 이런 압력을 받게 되면 한국은 결국 굴복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역시 그런 여론에 시달릴 것이며, 그것은 한국에서 우리의 이해관계에 적대적 영향을 미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의 再처리 시설 확보가 기정사실화됨으로써 그것을 다시 뒤집는다는 것은 아주 어려워질 것이다.
(2)案은 한국 정부의 제안을 받아들이되 용도 변경을 막기 위해 査察을 굳혀 나가는 방안이다. 그러나 (2)案의 약점은 한국이 NPT 또는 IAEA의 사찰이나 제3국의 사찰을 거부하려 들 경우 확실한 대응책이 없다는 것이다. 그보다도 더욱 큰 문제는 韓美 양국 사이에 심리적으로 되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면 장차 이곳에서 우리의 이해관계는 치명적인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앞서 지적한 대로 (3)案과 (4)案, 즉 朴대통령을 직접 접촉하는 방안만이 성공의 전망이 있다고 믿는다. 우리에게는 다양한 카드가 있으며, 朴대통령도 결국은 현실주의자다. 따라서 우선은 朴대통령을 접촉하는 경우가 가장 바람직하다. 문제는 그에게 도전장을 던질 것이냐, 아니면 중재안을 갖고 그를 만날 것이냐이다〉

고리 2호기 차관 중단, 군사원조 지원 중단 등의 압력에도 굴복하지 않던 한국 정부는 1975년 12월부터 프랑스로부터의 再처리 시설 도입을 포기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기 시작했다. 다음에 소개되는 駐韓 美대사관의 電文들은 한국 정부가 물러서는 명분으로 미국으로부터 원자력 관련 협력을 받는다는 代價를 선택, 미국의 요구에 응하는 과정을 보여 주고 있다.
1975년 12월10일, 국무부로 보내는 스나이더 駐韓 美대사의 電文.
〈워싱턴에 있는 咸秉春 駐韓 한국대사를 가급적 빨리 우리 측의 고위급 인사가 만나 우리의 관심 사항을 전달해 주기 바란다. 그 만남의 내용이 朴대통령에게 충분히 전달된 후 나는 다음주에 朴대통령을 만날 것이다. 나는 한국의 金鍾泌 국무총리를 만난 자리에서, 한국이 만약 프랑스로부터 再처리 시설 도입을 강행할 경우 韓美 관계에 미칠 엄청난 악영향에 대해 언급했다. 따라서 咸대사와의 면담에서도 우리는 그것이 단지 원자력 분야에서의 협력만이 아니라, 美 의회의 한국에 대한 안보지원에 대해서도 부정적 행동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우리는 부정적 측면뿐만 아니라 궁극적인 방향과 목표도 함께 제시함으로써 韓美 양국의 관계를 유지, 강화시키기 위해 협력하도록 요구해야 할 것이다〉
같은 날, 국무부로 보내는 駐韓 美대사의 또 하나의 電文.
〈12월10일 南悳祐 부총리는, 12월9일 이 문제와 관련하여 총리 주재의 고위 대책회의가 있었으나, 자신은 국회 출석 관계로 이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의 제안에 대한 반응이 그리 좋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다시 한 번 한국이 우리의 요청을 거부할 경우 초래될 부정적 영향들에 대해 언급했고, 그는 사안의 심각성을 고려하여 총리와 상의해 보겠다고 말했다〉
金鍾泌씨는 최근 『朴대통령은 이때 핵개발을 강행하면 韓美관계가 결딴날 수 있다는 위험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처럼 핵무기를 당장 만들지 않되 만들 수 있는 기술을 연구, 비축해두는 쪽으로 방향 선회를 하기로 했던 것이다』고 말했다.
1975년 12월16일, 국무부로 보내는 駐韓 美대사관의 電文.
〈국무총리의 지시로 과기처 장관 대신 과기처 차관 등이 스나이더 대사를 면담했다. 이들은 만약 한국이 프랑스로부터 再처리 시설 도입을 포기할 경우 미국이 원자력 분야에서 구체적으로 어떠한 협력을 제공할 용의가 있는가를 문의했다. 그들의 질문은 다음과 같다.(생략)
스나이더 대사가 『한국의 이런 질문에 대한 미국의 구체적 답변이 있을 때까지 한국은 프랑스로부터의 再처리 시설 도입 문제에 대해 결정을 미룰 것이냐』고 묻자, 과기처 차관은 『한국은 공식적으로 再처리 시설을 포기하겠다고 약속한 적이 없다』고 답변했다.
대화 과정에서 한국의 과기처 차관은, 미국의 기술적 지원이 아주 바람직한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은 더 이상 과거와 같이 기술적 지원을 미국에만 의존할 수 없다며, 한국 정부가 앞으로는 그 기술 제공자를 다원화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했다.
그는 우리가 제시할 수 있는 구체적인 지원 내용을 파악하라는 지시를 받고 있는 것 같았다.
좀더 명확한 답을 얻기 위해 나는 金正濂 대통령 비서실장을 접촉했는데, 현안 문제에 대한 최종 결정은 우리 측 답변이 도착할 때까지 연기되리라는 것이 그의 말이었다. 그는 또한 우리를 접촉한 사람들의 보고를 받았다며 朴대통령도 이 사안의 정치적 중요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의 답변이 도착하면 朴대통령의 주관下에 문제를 다시 한 번 심사숙고하게 될 것이라며, 그때까지는 내가 朴대통령을 직접 만나는 것을 연기해 달라고 요청했다.
어쩌면 이것은 우리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책략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작은 희망의 빛이 생긴 것도 사실이다. 나는 물론 이 문제를 놓고 金東祚 외무 장관과도 접촉해 왔다. 그는 이 문제의 정치적 중요성을 아주 잘 인지하고 있다〉

프랑스로부터의 再처리 시설 도입 계획이 취소되는 쪽으로 대세가 굳혀짐에 따라 駐韓 美대사관은 비교적 여유 있는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 1976년 1월 우리 정부는 프랑스의 SGN社와 맺었던 再처리 시설 건설 계약의 파기를 프랑스에 요청했으며 프랑스도 이를 받아들여 핵개발 계획은 외형상 좌절하게 된다.
1976년 1월5일, 국무부로 보낸 駐韓 美대사의 電文.
〈요지: 한국의 프랑스 再처리 시설 도입을 취소시킴으로써 核 확산을 막고자 하는 미국 정부의 목표는 朴대통령과의 정면 대립을 불사하거나 또는 그의 체면과 위신을 손상시키지 않고서도 달성될 수 있다. (중간 부분이 대거 삭제됨) 따라서 나는 본부의 훈령을 다음과 같이 수정해 줄 것을 제안한다.
(A) 미국 정부는 한국이 프랑스와 맺은 계약에서 再처리 시설 도입을 再검토키로 한 결정을 높이 평가하며 환영한다.
(B) 우리는 한국이 미국의 깊은 우려감을 인식하고, 이 문제가 향후 韓美관계 전반에 갖고 있는 중대한 의미를 인식하고 있음을 높이 평가한다.
(C) 미국의 희망은 바로 이 시점에서 再처리 시설 계약의 완전한 취소이다.
(D) 이 계약이 완전히 취소되지 않을 경우 美 의회와 미국인들의 의혹은 더욱 더 증폭될 것이다. 따라서 미국 정부는 고리 2호기의 차관 문제에 대해 의회의 승인을 받으려 노력하지 않을 것이다.
(E)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가 우리의 합의 도출 능력을 신뢰한다면 미국은 상호 협력의 범위에 대해 조속히 합의한다는 목표 아래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분야에서의 협력에 관한 협의를 진행시킬 태세가 되어 있다.
(F) 따라서 우리는 한국과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분야에서 韓美 양국의 상호 협력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가급적 빠른 시일 안에 미국의 대표단을 파견할 태세가 되어 있다. 또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분야에서 한국·프랑스·캐나다 사이의 협력을 방해하지 않을 것이다〉
워싱턴 포스트 기자 출신인 돈 오버도퍼는 「두 개의 한국」이란 책에서 『이 에피소드는 미국이 마음만 먹으면 남한 정부가 아무리 완강한 의지력으로 추진하는 일이라도 능히 저지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고 평했다. 사태가 일단락된 후 스나이더 대사는 브렌트 스코우크로프트 안보보좌관에게 보낸 電文에서 『가장 걱정스러운 것은 한국이 핵무기와 미사일을 개발하여 독자적인 생존을 추구하고 자주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朴대통령의 열망과 의지』라고 지적했다. 그는 朴대통령이 이런 모험을 하게 된 데는 미국 측의 태도에도 문제가 있다고 했다.
스나이더 대사는 1975년 6월 미국 정부에 대해서 韓美관계를 전면적으로 再검토하여 새로운 관계 정립을 할 필요가 있다는 12페이지 보고서를 제출한 바 있었다. 이 보고서에서 그는 『미국의 불확실한 태도 때문에 朴대통령은 언젠가 닥쳐올 미군철수에 대비하고 있고, 그 대책으로서 남한內에서 반대자 탄압과 핵무기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고 분석했었다.
柳炳賢 당시 합참본부장은 『朴대통령은 핵무기 개발을 중지하라는 지시를 내릴 때 깔끔하게 했다. 관련 서류나 시설을 숨겨놓고 비밀개발을 계속하라는 식의 지저분한 지시가 아닌 깨끗한 단념이란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물론 그 뒤 朴대통령은 원자력 발전의 기술 사이클을 완성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핵무기 개발에도 쓰일 수 있는 관련기술을 개발하고 미사일 발사에도 성공하지만, 핵폭탄을 직접 제조한다든지 플루토늄을 밀수입하는 식의 시도는 해본 적이 없다. 미국 측도 플루토늄 再처리 시설이 없다면 핵무기는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핵개발 문제는 이로써 종결된 것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미국의 경제학자 리처드 M. 스티어즈가 쓴 鄭周永 현대그룹 창업자 전기 「메이드 인 코리아」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기업인들에게 朴正熙 정권은 경제개발에 대해서 실현성이 있는 계획을 명확히 제시했다. 규칙과 원칙은 투명했고, 기업은 합리성과 자신감을 갖고 투자할 수 있었다. 朴정권의 권위주의적인 스타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대체로 부정부패하지 않았다. 朴대통령이 자신이 아니라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데 헌신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에 기업인은 그를 신뢰했다. 그들은 동시에 朴대통령을 겁냈다. 기업에 대한 朴대통령의 요구조건은 오직 하나였다. 무조건 納期를 맞추라는 것이었다. 이에 실패하면 朴대통령의 눈 밖에 나고 정부 차관이나 공사를 얻을 수 없게 된다>
스티어즈는 京釜고속도로를 닦을 때 朴 대통령을 보좌했던 한 기술자의 이야기를 이렇게 소개했다.
<朴대통령은 매우 까다로운 사람이다. 나는 그가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였다고 생각한다. 그의 지휘봉은 타고 다니던 헬리콥터였다. 그는 헬리콥터를 타고 올랐다 내렸다를 되풀이했다. 어느 날은 지질학자들을 태우고 현장에 와서 왜 터널공사를 하는 데 산사태가 났는가를 묻고, 다른 날엔 유엔의 水理학자들을 데리고 나타나서 왜 우리 기술진이 수량자료를 잘못 계산했는지 따졌다. 화요일에 해답이 나오지 않으면 그는 목요일에 또 나타났다>
1973년부터 시작된 중화학공업 건설은 그 규모가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호주국립대학의 김형아 교수는 朴正熙의 근대화 전략을 연구한 책에서 朴대통령은 정보수사기관을 국가운영의 지휘봉처럼 이용했다고 썼다. 朴대통령이 유신체제가 제대로 기능할 수 있도록 하는 지휘봉 또는 채찍으로 사용한 기관은 비서실 이외에 중앙정보부·감사원·국군보안사·검찰·경찰·경호실이었다. 대통령은 이들 기관들을 직접 지휘했고 이 기관들끼리 서로 감시, 견제하도록 독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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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대통령과 金正濂 비서실장. |
朴대통령을 가장 오래 모신 金正濂 비서실장은 『나·중앙정보부장·경호실장은 비서실의 사전허가 없이 언제든지 대통령에게 보고할 수 있었으나, 나의 재임 중에는 경호실장의 보고는 극히 드물었다. 법무 장관과 검찰총장의 중요한 수사보고 및 보안사령관의 긴급보고도 당일 청취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정보부장과 경호실장은 비서실장이 보고한 뒤에 하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정보부장·보안사령관·검찰총장이 보고할 때는 비서실에서 배석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유신 시절에 여당은 사실상 정보부에 종속되어 있었다. 朴대통령은 정당·군대·치안·정보기관은 자신이 직접 관리하면서 경제는 金正濂 비서실장에게 거의 전담시켰다. 1969~1978년까지 9년3개월간 金실장은 사실상 경제담당 부통령이었다.
그는 청와대 경제 비서관들과 경제장관(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 포함) 및 금융기관과 경제연구소들을 총괄적으로 지휘했다. 全斗煥 정부 시절 金在益 경제수석 비서관이 全대통령의 신임을 받아 경제정책 수립 집행에 큰 역할을 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金正濂 실장의 역할은 그보다 훨씬 컸고 오래였으며, 범위가 넓었다.
다만, 金실장은 자신을 「도승지」라고 부르면서 철저하게 드러내지 않고 일했고, 朴대통령이 죽은 이후에도 자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의 막강했던 역할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金실장은 특히 정부고위직 人事에 대해서 대통령 다음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改閣 때 朴대통령은 국방·법무·내무장관, 무임소 장관을 제외한 全부처의 장관에 대해서는 金실장에게 후보자를 복수로 건의할 것을 지시하곤 했다. 金실장이 명단을 올리면 대통령은 이를 기초로 하여 총리와 상의에 들어갔다. 총리의 건의로 명단에 없는 사람이 임명되기도 했지만 거의 명단에 오른 사람들 중에서 임명되었다고 한다. 공화당과 유정회 의장에게는 사전 통보를 하는 정도였다.
朴대통령은 차관 인선은 대체로 장관에게 맡겼으나 국세청장·관세청장·철도청장·항만청장을 직접 지명했다. 軍 인사의 경우엔 장성급 이상에 한하여 국방장관이 각군 참모총장을 데리고 와서 대통령에게 보고해서 재가를 받았다. 이 자리엔 비서실장도 배석하지 않았다. 법무부와 검찰 고위간부에 대한 인사도 법무부 장관이 검찰총장과 함께 대통령에게 보고하여 재가를 받았다.
金正濂 실장은 한국은행 조사부 출신이었다. 금융계를 잘 아는 그는 자연히 은행권 인사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재무장관이 금융기관의 인사에 대해서 대통령에게 품신할 때는 꼭 한국은행 총재의 의견을 묻도록 부탁했다고 한다.
큰 금융사고나 부실기업이 발생했을 때 대통령은 최종 수습책으로서 후임자를 결정하는데 이때 金실장의 의견을 반드시 물었다. 金실장은 『내가 잘 알고 있는 금융인은 한국은행에서 같이 근무한 선배나 동료들뿐이었기 때문에 그들 중에서 천거했고 그대로 결정이 났다』고 말했다.
外柔內剛(외유내강)한 金正濂 비서실장은 朴대통령에게 지시받을 때는 항상 不動자세를 취했다고 한다. 아주 부드러운 인상을 가진 그는 公的인 일에 대해서는 차가울 정도로 냉정하고 엄격했다. 金실장은 점심은 항상 청와대 식당에서 들었다. 朴대통령의 취향 때문에 청와대의 점심은 국수일 경우가 많았다. 그는 청와대 참모들을 군대식으로 지휘했다. 金실장은 유신의 통치철학을 청와대 비서실의 운영에서부터 실천했다.
유신의 모토였던 「국력의 조직화, 능률의 극대화」를 대통령 이상으로 실천한 것이 金실장이었다. 그는 금융인 출신 경제관료로 유명했지만 日帝시대엔 일본군 장교 생활도 짧게 했다. 강경상업을 졸업한 그는 규슈(九州)의 오이다 高商에 들어갔다. 이 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는 구마모토 예비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년간 장교교육을 받았다. 그때의 심정을 그는 회고록 「한국경제정책30年史」 (중앙일보)에서 이렇게 썼다.
<이왕 징집된 이상 인간답게, 남아답게, 씩씩하게 그리고 한국 출신 아무개는 일본인보다 더 훌륭했다는 평을 듣고 죽어 가겠다고 생각했다. 이왕 죽을 바에는 조국의 독립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도록 값있게 죽어야겠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훈련·작업·내무반 생활 등 모든 생활 및 행동 면에서 「조센징이지만 돼먹었다」는 소리를 듣고자 노력했다. 朝夕의 완전군장 軍歌구보 때는 나도 힘이 드나 낙오하려는 동료의 소총을 대신 메고 뛰었고, 숙제와 시험준비를 하는 시간에도 늘 기꺼이 사역에 자원했으며, 동료의 몫까지 거들었다. 육체적 고통은 격심하였지만 정신적으로는 홀가분한 나날을 보냈다>

1970년대 유신체제의 사령탑에 앉아 있었던 朴대통령과 金실장은 일제 때 장교생활을 하면서 국가주의적인 정신력을 단련했던 사람이고, 이런 자세가 체제의 운영 면에 반영되었다. 두 사람으로 대표되는 당시의 한국 지도층은 크고 작은 차이는 있으나 일제 시대의 교육과 체험을 통해서 독립정신·鬪志·국가관·公人의식의 소양을 갖춘 이들이 많았다.
지금 일부 左派세력들이 이런 사람들을 親日派로 매도하는 것은 위선적인 형식논리이다. 식민지 시대에 宗主國이 제공하는 선진문물을 배워서 기필코 독립을 쟁취하고 되찾은 조국을 위해서 배운 지식을 바치겠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제3세계의 독립과 건국의 지도자가 된 것은 戰後 세계적인 추세였다. 인도의 네루와 간디, 아프리카 대부분의 독립·혁명 지도자들, 그리고 싱가포르의 李光耀(이광요)나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같은 이들이다.
유신체제의 참모장 역할을 했던 「군인적 민간인」 金正濂은 1945년 8월6일 아침 히로시마에 있었다. 그의 생생한 증언은 역사적 가치가 있다.
<히로시마 軍管區 교육대에서 견습사관으로서 再교육을 받고 있던 우리는 그날 아침 교육대 교정에 모이고 있었다. 열중의 누군가가 『저기 B29가 간다』고 소리치기에 상공을 쳐다보니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에 하얀 飛行雲을 끌면서 거의 30도 각도로 상승하는 B29 한 대가 보였다. 아침의 강한 햇살을 받아 그 B29는 반짝반짝 빛났다.
그 전날 하루 종일 파상내습으로 공습경보가 계속 발령 중에 있었으므로 사이렌도 울리지 않았으며, 폭음도 들리지 않았다. 정찰비행이겠지 하는 순간 사진 찍을 때 터지는 마그네슘의 광선보다 더 강한 황백 광선이 번쩍 하더니 갑자기 천지가 암흑으로 변했다(그때가 오전 8시15분이었다).
새카만 밤이 된 것이다. 동시에 불덩어리가 등에 붙은 듯하더니 몸이 공중에 떴다가 땅에 떨어졌다. 이 순간 나는 소이탄의 집중공격을 받은 것으로 생각했다. 암흑 속에서 『소이탄이다! 대피, 대피!』 소리치면서 지면을 구르며 옷에 붙은 불을 끄고 방공호로 뛰어갔다.
그러나 폭탄은 떨어지지 않았다. 잠시 지평선에서부터 암흑이 걷히기 시작했다. 아침이 다시 오는 것 같았다. 사방을 둘러보니 교육대 바로 뒤의 거대한 히로시마城이 돌과 흙과 목재의 더미로 변해 있었다. 교육대 교사는 廢목재를 쌓아 놓은 모양으로 변해 있었고, 해안 방면을 보니 큰 연돌 몇 개와 철근 콘크리트組 고층건물의 골조가 몇 개 보일 뿐 히로시마 시내의 건물은 모두 파괴되어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등에 화상을 입었다. 눈·코·입만 남겨 놓고 얼굴 후두부와 목에 화상을 입어 피부가 떨어져 나갔으며, 좌우의 손에도 화상을 입었다. 새끼 손가락 부분은 살점이 날아가 뼈만 앙상하게 보였다. 그래도 나는 中정도의 상처에 속했다. (중략)
한참 걸으니 강둑에 다다랐다. 人山人海인데 화상과 부상을 당한 시민과 군인들이었다. 이때 기차가 철교를 지나가는 것과 같은 굉음이 들리기에 사방을 살펴보았더니 불덩어리의 회오리바람이 선풍을 일으키면서 돌진해 오는 것이었다. 나는 둑 아래로 뛰어내렸다. 불덩어리의 회오리바람은 방향을 바꾸었다>

金소위와 원자폭탄을 맞은 교육대는 폭탄이 터진 爆心에서 2km 이내에 있었다. 金소위는 오카야마 연대에서 50명의 견습사관을 인솔하여 교육대에 왔기 때문에 동료들이 피폭당한 뒤 어떻게 되었는지 행방을 찾아다녔다고 한다. 히데히라 마코토라는 동료 견습사관과 함께 아수라장이 된 히로시마 시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절반 정도를 찾아내 오카야마로 보냈다. 金소위는 인솔자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4일간 방사능이 남아 있는 시내를 돌아다닌 것이다. 그는 오카야마 원대에 복귀한 뒤에야 병원에 입원했다.
이 병원에서 그는 본격적으로 원자병을 앓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이 몽땅 빠지고 열이 40℃까지 올랐다. 옆 병상에서는 환자들이 하나둘씩 죽어 가고 있었다. 일본이 항복한 후 그래도 질서가 유지되던 軍 병원도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의사들과 간호원들이 하나둘씩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때 원자폭탄이 투하될 때 함께 인솔자의 의무를 다했던 히데히라 사관이 아버지와 함께 金소위를 찾아와 자신의 고향에 함께 가자고 했다. 오카야마 山地에 있는 히데히라의 본가는 양계농장이었다. 이 집에서 金正濂씨는 친구와 함께 치료와 간호를 받았다. 히데히라의 아버지는 의사를 데리고 와서 아들과 金소위를 최선을 다해서 치료해 주었다. 원자탄 피폭자에 대한 치료법이 알려지지도 않은 상황인 데도 의사는 스스로 개발한 혈청주사 치료를 해주었는데, 이것이 결과적으로 金소위를 살렸다고 한다.
10월에 金소위의 형이 찾아와 그를 데리고 귀국했다. 히데히라는 그해를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1954년 한국은행에 근무하던 金소위는 히로시마에 들른 길에 거기에 있던 미국의 원자폭탄 희생자 병원에서 진료를 받아 보았다고 한다. 의사들은 金소위가 爆心 가장 가까운 곳에서 생존한 사람이란 측면에서 매우 흥미를 가지고 진료했다. 진료 결과 金소위는 아무 이상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金실장이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원자폭탄이 떨어진 날 일본장교와 함께 뒷수습을 했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그 일본인의 집에서 당시로서는 최선의 치료를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정신력을 가진 사람들이 朴대통령을 중심으로 뭉쳐서 1970년대 격동기에 중화학공업과 자주국방 건설사업을 밀고 나갔다는 점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
1970년대 한국의 지도층은 일제 식민지 시대와 6·25 전쟁기를 온몸으로 겪었던 40~50代였다. 이들로부터 단련된 당시의 20~30代도 대단한 투지와 생존력을 갖고 있었다. 식민지와 전쟁기를 통해서 국가의 소중함을 알게 된 한국인들은 북한의 남침위협을 저지하는 「둑」을 빨리 쌓지 않으면 먹힌다는 강박관념도 갖고 있었다. 朴대통령은 월남 패망 이후엔 3~5년 이내에 駐韓미군이 철수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그 전에 자주국방력을 갖추어야 한다면서 핵무기와 미사일을 개발하고 방위산업을 건설하는 등 시간에 쫓기면서 일했다. 이런 분위기가 결과적으로는 유신시대를 한국 역사상 가장 생산적인 전환기로 만들었던 것이다.
6·25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의 심리특성에 대하여 미국의 저명한 동양학자 루시안 파이는 「아시아의 권력과 정치」에서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처음에는 죽은 친척과 친지들 때문에 죄책감을 느낀다. 이런 죄의식을 극복하기 위하여 그들은 자신들이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려 한다. 이런 생각은 위험에 처해서도 「나만은 무사할 것」이라는 자신감으로 변하고 어떤 모험도 감수하려는 공격적 태도를 갖게 한다.
한국의 공무원들과 민간인들 모두는 항상 자신들은 예외적으로 運(운)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위대한 과업을 수행하도록 운명지워진 인간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전쟁 체험은 그들에게 어려운 과업은 어떻게 조직적으로 대처하면 극복할 수 있는가 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한국 사회 전체가 의무·희생·책임감에 기초한 군사문화의 효율성에 길들여진 가운데 한국인들은 살아남은 인간답게 무엇이든지 과감하게 생각하고 거창한 일을 해낼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라는 생각을 하도록 고무되었다>

1975년 5월 일체의 反정부 행위를 금지시킨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된 이후 야당 언론과 학생·종교인들이 다시 목소리를 높이는 1979년까지의 4년간이 朴대통령 집권기간 중 가장 안정된 시절이었다. 이 기간에 중화학공업 건설을 핵심으로 하는 한국의 경제발전이 비약적으로 이뤄졌다.
朴대통령을 즐겁게 만든 것은 새마을 운동이었고 괴롭힌 것은 韓美관계의 악화였다. 이 4년간은 정치의 침묵 시대이자 경제 개발과 관련된 행정의 전성 시대였다. 이 시기 朴대통령은 총리·비서실장·정보부장 세 사람을 중심으로 國政을 이끌었다. 총리에게는 국내의 시국사건과 행정의 조정, 비서실장에겐 경제조정, 정보부장에겐 정치조정을 맡기고, 자신은 국방외교를 중심으로 한 安保를 직접 챙겼다. 朴대통령은 공화당과 유정회를 정보부의 아래 기관 정도로 인식했다.
1971년에 임명되어 1975년 12월에 사임할 때까지의 4년 반 동안 金鍾泌 국무총리의 역할이 매우 컸다. 金총리는 1973년 12월 李厚洛 정보부장이 물러나고 申稙秀씨가 후임으로 임명된 이후에는 제2인자에 가해지는 질시와 견제로부터 해방되어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反정부 시위 등 시국사건에 대한 대책회의를 정기적으로 주재한 것도 金총리였다. 다른 총리였다면 정보부장이 고분고분 따르지 않았을 터인데 申稙秀 부장은 오래 전부터 金총리와 가까웠다. 이 회의에는 대통령 비서실장(나중엔 정무수석)과 정보부장도 참석하였고, 金총리가 결론을 내렸다. 金正濂씨는 『金총리는 민주적으로 의견을 개진케 하고 단호하게 결론을 내렸다. 자신만만한 일처리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金正濂은 1969년 비서실장으로 취임할 때부터 경제문제에 대해서는 대통령으로부터 거의 全權을 위임받았다. 형식상으로는 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가 경제팀의 팀장이었으나, 부총리와 경제장관들을 이끌고 조정해 간 것은 金正濂씨였다. 그는 권한을 강제적으로 행사하기보다는 조정하고 유도하는 방향으로 사용했다.
『저는 장관들이 기분 나쁘지 않게 일하도록 하는 데 신경을 썼습니다. 대통령에게는 장관들이 잘하는 것을 꼭 보고하여 그 장관들을 칭찬하도록 했습니다. 장관들도 내가 그들을 돕는 사람이지 방해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믿어 주었기 때문에 협조했습니다. 관련 부처의 의견이 다를 때 제가 조정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물론 중대 사안은 대통령에게 보고하여 최종 승인을 받았습니다.
대통령은 경제에 관해서는 저에게 많은 권한을 위임해 주셨지만 직접 챙기시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대통령은 매월 열리는 월간경제동향보고회와 수출진흥확대회의, 그리고 분기별로 한 번씩 열리는 심사분석보고회의와 방위산업진흥회의를 주재했고, 수시로 개발현장을 찾아 확인했습니다. 연두의 각 부처 및 지방순시도 현장확인의 한 방법이었습니다』

朴대통령은 「경제개발이란 교향악의 지휘자였고, 지휘봉은 헬리콥터였다」는 말도 있듯이 헬기를 많이 이용했다. 朴대통령 전용헬기의 副조종사로 일했던 한 공군장교 출신은 이렇게 말했다.
『그분의 자리엔 항상 지도와 쌍안경이 있었습니다. 쌍안경으로 내려보다가 공사현장이나 개발현장이 나타나면 수행자들에게 설명을 해주고 모르면 묻기도 했습니다. 앞자리에 있는 두 조종사는 대통령이 물을 경우에 대비하여 공부를 해두지만 그래도 모를 때는 해당 부서에 전화를 걸어 사실을 확인한 뒤 보고하기도 했습니다.
헬리콥터에 타면 흔들리는 리듬으로 해서 졸리게 됩니다. 대통령을 수행한 장관들은 꾸벅꾸벅 졸고 가끔은 조종사도 졸음이 와서 멍이 들 정도로 허벅지를 꼬집습니다. 朴대통령은 한 번도 조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항상 무엇을 보고 생각하고 확인하는 등 깨어 있었습니다』
朴대통령은 자동차나 집무실에서도 토막잠이나 낮잠을 자지 않았다고 한다. 측근들에게 그는 「늘 깨어 있었던 사람」, 「늘 사색하는 超人」이었다.
朴대통령은 「조직운영의 귀재」라는 평을 받고 있다. 복잡하고 긴박한 사건들이 연속해서 터지는 가운데서도 朴대통령은 좀처럼 당황한다거나 낭패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有備無患(유비무환)」이란 말은 국정지표이기도 했지만 그의 생활철학이기도 했다. 그는 앞을 내다보면서 만약의 사태에 늘 대비했다.
그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시간이 많았다. 국정의 대강을 국무총리·비서실장·정보부장에게 맡겨놓고 각부의 행정은 장관에게 일임했다. 차관 인사는 장관이 재량껏 하도록 하고 공동책임을 지웠다. 『朴대통령이 자신의 시간을 많이 가지고 굵직한 사안에 대해서 사색에 사색을 거듭할 수 있었던 것은 適材適所(적재적소)의 원칙에 따라 당시 최고의 엘리트들을 부렸기 때문』이라고 金正濂씨는 말했다.
朴대통령은 유능하게 보이는 관료는 과장 시절부터 눈여겨 보면서 경력관리를 하고 적극적으로 밀어 주었다. 吳源哲·金龍煥 등 장관·수석으로 발탁된 사람들은 朴대통령이 과장·국장 시절부터 그 능력을 인정하고 시험도 해보면서 人材(인재)로 키웠던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사람을 適所에 배치했기 때문에 믿고 맡길 수 있었고, 자신은 몇 가지 정기점검의 고삐를 장악하여 여유 있게 국가조직을 끌고 갈 수 있었다.
朴대통령에게 있어서 정보부는 야당과 언론을 감시하고 규제하는 기관일 뿐 아니라 국가조직의 고삐이자 채찍이기도 했다. 정보부는 대통령의 시각에서, 국가적 관점에서 사안을 판단할 수 있었기 때문에 부처이기주의에 함몰된 행정관료들이 놓치기 쉬운 국정의 문제점을 발견하여 이를 시정하도록 조정하곤 했다. 이런 경우엔 국가의 윤활유 역할을 했다.

낡은 청와대 본관 2층의 반은 대통령의 숙소였고, 나머지 반은 비서실장 사무실이었다. 金正濂 실장은 오전 8시에 출근하여 30분에서 한 시간 정도 수석비서관 회의를 주재했다. 오전 9시에 대통령이 2층에서 계단을 통해 내려와 서재로 불리는 집무실에 들어갔다는 연락이 오면 金실장은 곧바로 대통령에게 보고차 들어갔다. 관계 수석비서관을 데리고 들어가기도 했다. 金실장의 보고는 항상 口頭였다. 경호실장이 보고할 것이 있을 경우에도 비서실장이 한 뒤에 하도록 규율을 잡아 놓았다고 한다.
이런 질서는 金실장이 그만두고 金桂元씨가 실장이 된 뒤로는 문란해졌고, 이것이 10·26 사건의 한 원인이 되었다. 朴대통령은 읽고 난 정보보고서 가운데 주요인사의 부정부패나 스캔들과 관련된 정보철만 뜯어내 보관한 뒤 나머지 보고서를 비서실장에게 주어 관련부처에 통보하도록 했다.
한번은 車智澈 경호실장이 집에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했다는 정보가 대통령에게 보고되었다. 朴대통령은 金실장에게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車실장은 홀어머니를 모시고 있었다. 이 老母가 관절염이 심해 2층을 올라가기가 힘들어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한 것이었다. 보고받은 대통령이 양해했다고 한다.
金실장에게 정기적으로 올라오는 보고서가 하나 있었다. 金鍾泌(JP)씨에 대한 동향보고였다. 민정수석 비서관이 어떻게 수집했는지 소스를 밝히지 않은 채 주로 JP에 대한 나쁜 정보보고서를 대통령에게 올리는 것이었다. 이 보고서 결재란엔 비서실장 난이 없었다. 민정수석이 직접 대통령에게 갖다 바치는 문서였는데, 실장도 알아두라는 뜻으로 보여 주는 것이었다. 金실장은 이 보고서를 읽고서 의심이 생겼다고 한다. 보고서는 金鍾泌씨 바로 옆에서 그의 一擧手一投足을 지켜본 사람이 쓴 것 같았다. 영화를 보고 해설하는 식의 보고서인데, 그 眞僞를 확인할 방법이 없는 듯했다.
주로 金鍾泌씨가 朴대통령의 후계를 노리고 있고, 그 주변에 이를 부추기는 인물들이 많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보고서를 대통령이 계속해서 받아 보면 JP를 나쁘게 보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金실장은 이 「JP 동향보고」를 중단시켰다. 朴대통령도 왜 보고가 올라오지 않느냐고 재촉하지 않았다.
1975년 말 朴대통령 주치의와 金鍾泌 총리 주치의가 같이 金실장을 찾아왔다. 두 사람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면서 건의했다. 그 요지는 金총리에게 신경마비 증세가 생겼는데 절대적인 요양이 필요하고, 만약 무리하면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이었다. 金실장은 즉시 朴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대통령도 매우 놀라는 것이었다.
즉각 金총리를 들어오라고 했다. 金총리는 대통령을 만나고 나오더니 대기 중이던 金실장을 향해 싱긋 웃으면서 『실장이 보고했구먼. 그동안 신세 많이 졌어요』라고 악수했다. 그해 12월 朴대통령은 崔圭夏 특별보좌관을 총리로 발령하는 등 대폭적인 개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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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太敏씨는 朴槿惠씨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여 청와대의 골칫거리를 만들었다. |
1975년부터 金正濂 비서실장의 골칫거리가 하나 생겼다.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하던 朴槿惠씨가 구국봉사단 총재 崔太敏에 대한 지원을 金실장에게 부탁하는 것이었다. 朴씨가 모 건설업자에게 융자를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해 알아보면 崔太敏과 관련 있는 업자였다. 金실장은 박승규 민정수석에게 『큰 영애에 대해서 오점이 생기면 안 되니 주의 깊게 관찰하라』고 시킨 뒤 대통령에게 건의했다고 한다.
『큰 영애가 필요한 돈이 있다고 하면 각하께서 저한테 이야기해 주십시오. 소리 안 나게 돈을 만들어 각하께 드리겠습니다』
朴대통령도 그렇게 하겠다고 했으나 崔씨에 대한 정보 보고가 끊이질 않았다. 수석비서관 회의에서도 자주 거론되었다. 崔씨는 구국봉사단을 이끌고 새마을 사업의 하나로서 새마음갖기 운동을 한다고 했기 때문에 새마을 담당 장관이던 金致烈 장관도 崔씨를 지원했다.
崔太敏이란 이름이 언론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75년 12월31일자 조선일보이다. 1975년 送年소감을 밝히는 난에 그는 대한구국선교단 총재로서 이런 글을 썼다.
<印支사태를 계기로 더욱 절실해진 국방력 강화를 위해 우리 기독교인들이 생명을 바칠 각오로 구국십자군을 창설한 것, 이와 더불어 기독교인들이 더욱 단합하게 된 것, 그리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봉사의 한 방법으로 야간무료진료센터를 개설한 것들이 뜻 깊은 일이다>
1976년 9월22일 朴槿惠씨는 구국여성봉사단의 수원·화성지부 결성대회에 참석하여 격려사를 했다. 수원시민회관에서 열린 이 대회에는 趙炳奎 경기도지사 등 지방유지와 봉사단원 2500명이 참석했다. 대통령 영애의 지원을 받는 이 단체가 準관변단체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증거이다.
그때 崔太敏씨를 조사했던 한 경찰고위 간부는 朴槿惠·崔太敏 두 사람의 인연을 이렇게 설명했다.
<崔太敏은 1975년 1월쯤 朴槿惠씨 앞으로 편지를 썼다.
「어젯밤 꿈에 국모님을 뵈었습니다. 국모님 말씀이 내 딸을 보살펴 달라고 부탁하시는 것이었습니다…」
槿惠양의 비서실에서 이 편지를 넣어 주었다. 朴槿惠는 편지를 다 읽고는 崔씨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때 나이 칠십을 바라보던 崔太敏은 늙은 아내와 장성한 여러 자녀를 두고 있었는 데도 얼굴의 피부가 팽팽한 童顔이었다. 몸집은 작으면서도 다부져 보였다. 朴槿惠씨가 최초의 사회활동(구국여성봉사단)을 하게 된 계기는 崔太敏의 권고에 의해서였다.
1975년 2월 朴槿惠씨는 나에게 崔太敏에 대해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崔太敏을 만나러 갔더니, 崔씨는 당황한 모습이었다. 내가 槿惠양의 부탁으로 왔다고 했더니 崔씨는 갑자기 거만해졌다. 나는 뒷조사를 시켰다. 崔씨가 자유당 시절에 경찰관을 지냈다는 것, 정규과정을 밟은 목사가 아니라는 사실 등이 드러났다. 나는 직접 朴正熙 대통령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朴대통령은 이 정보를 槿惠양에게 알려 주고, 주의를 주었다.
朴대통령은 으레 그러듯 「누가 그러더라」는 식으로 정보의 소스를 밝혔다. 朴槿惠씨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 『그럴 수가 있느냐』고 섭섭해했다. 나는 그 뒤로 대통령과 槿惠를 만날 수 없게 되었다>

崔太敏과 朴槿惠씨의 관계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10·26 이후였다. 朴대통령을 죽인 金載圭가 재판과 수사과정에서 朴대통령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면서였다. 그 요지는 이러했다.
<1978년 무렵 金載圭 정보부장은 구국여성봉사단을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崔太敏의 비행을 검사 출신인 白光鉉 수사국장에게 조사시켰다. 朴升圭 민정수석 비서관이 여러 차례 비행보고를 대통령에게 올렸는 데도 먹혀들지 않아 그가 나섰다는 것이다. 崔씨가, 여러 재벌 총수들이 구국봉사단에 기탁한 수십억원을 변칙적으로 관리한 사실, 여성 관련 스캔들이 드러났다.
金부장이 조사결과를 보고하자 朴대통령은,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확인작업을 벌였다. 옛 임금의 親鞠(친국)을 연상시키는 방식이었다. 朴대통령은 한쪽에 金부장·白국장, 그 반대편에 朴槿惠를 앉히고 신문하기 시작했다. 딸은 울면서 『그런 일이 없다』고 했다. 판단이 서지 않았는지 대통령은 검찰에 또 수사를 지시했다. 검찰의 조사결과도 金부장의 그것과 같았다. 그러나 崔太敏은 구국봉사단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그는 명예총재로 뒤로 물러난 것 같았지만 총재가 된 朴槿惠에게 계속 영향을 끼쳤다>
10·26 사건 뒤 金載圭는 朴대통령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姜信玉 변호사에게 털어놓았다.
『각하, 일본도 보십시오. 큰 영애는 적십자사 같은 데나 관여하도록 해야지 이런 데서는 손을 떼게 해야 합니다』
朴槿惠씨는 金부장에게 『왜 남의 프라이버시 문제까지 조사하느냐』고 항의했다는 것이다. 金부장은 공정하게 조사했고, 『돈이 필요하면 내가 주겠다』면서 제발 손을 떼도록 부탁했다고 한다. 金載圭는, 명예총재로 물러나서도 구국여성봉사단에 대해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崔太敏에게 집요한 관심을 두었다.
1979년 5월에 『崔목사가 계속해서 대통령 큰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그자는 백해무익한 놈이다. 교통사고라도 나서 죽어 없어져야 할 놈이다』고 화를 냈다고 한다. 5·17 직후 계엄사에서는 崔씨를 붙들어 가 부정사실과 축재사실을 확인했으나, 대통령의 가족과 관련된 사안이라 덮었다는 것이다.
金載圭의 범행 동기를 수사한 한 관계자는 『金부장은 이 사건 처리로 대통령에 대해 실망했고, 존경심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이 사건이 시해 동기의 하나다』라고 했다.
朴槿惠씨는 지금까지 일관되게 崔씨를 전폭적으로 변호하면서 그에 대한 부정적인 정보는 음해라고 말하고 있다. 이제부터는 증거를 찾아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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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9월12일 오전에 金載圭 정보부장과 白光鉉 수사국장이 朴대통령에게 崔太敏 관련 보고를 했다는 것을 보여 주는「대통령 면담 日誌」. |
鮮于煉 당시 공보비서관은 자신의 업무가 아닌 데도 朴槿惠씨의 일을 돕고 있었다. 그가 생전에 남긴 비망록에 이런 구절이 보인다.
<1977년 9월20일.
지난 9월12일 밤, 대통령은 槿惠양과 金載圭 중앙정보부장 및 白光鉉 정보부 7국장을 배석시킨 가운데 구국봉사단 崔太敏의 부정부패와 뇌물수수 혐의에 대해 親鞫을 했다. 朴대통령은 오늘 나에게 큰 영애인 槿惠양과 관련해 물의를 일으켰던 崔太敏 구국봉사단 총재를 거세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대통령이 나에게 지시한 내용은 세 가지였다.
『崔太敏을 거세하고, 향후 槿惠와 청와대 주변에 얼씬도 못 하게 하라. 구국봉사단 관련 단체는 모두 해체하고』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나는 곧 槿惠양에게 가서 이 사실을 알렸다. 槿惠양은 얼굴이 하얘지더니 낙담한 표정으로 눈물을 지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제가 각하께 다시 보고드릴 테니 기다려 봐요』
며칠 뒤 다시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槿惠양 문제를 여쭈었다.
『각하, 큰 영애가 영부인이 돌아가신 뒤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대리하고 있는데, 하고 있던 단체를 모두 해체하면 영애의 체면이 깎입니다. 구국여성봉사단만은 계속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대통령은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침묵을 지키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자네, 崔太敏을 가까이 안 하게 할 수 있나? 崔와 槿惠를 접근시키지 않는다는 조건을 붙여서 자네에게 허락할 테니, 그건 따로 의논해서 계속 일하도록 하게. 사실 지난번에 내가 특명을 내리고 나서도 槿惠가 엄마도 없는데 일까지 중단시켜서 가엾기도 하고, 나도 마음이 아팠어.
자네가 구국여성봉사단만은 허락해 달라고 하니 나로서도 괴롭지만, 어떤 의미로는 내 마음이 편안해지네. 내 뜻을 알아서 정말 잘해 주기 바라네. 이제는 절대 잡음이 나지 않겠지. 내가 그간 새마음봉사단에 관해 崔太敏과 관련한 보고가 올라올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네. 늘그막에 애들이라도 잘 돼야 내가 마음이라도 편안하지 않겠는가. 나를 좀 도와주게』>

조선일보 1977년 12월8일자 사회면에는 「대통령 영애 朴槿惠양이 사단법인 구국여성봉사단의 총재로 취임했다」는 1단짜리 기사가 실렸다.
救國여성봉사단과 救國봉사단은 그동안 임의단체로 활동해왔는데 이번에 구국봉사단은 해체하고 구국여성봉사단은 문공부 장관의 설립인가를 받은 사단법인체로 발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봉사단은 앞으로 忠孝(충효)에 바탕을 둔 새마음갖기 운동과 사회봉사활동 및 문화사업을 추진하게 된다고 했다.
鮮于煉씨는 또 이런 후일담을 비망록에 남겼다.
<대통령이 돌아가시고 國葬이 끝난 직후에 槿惠양 등이 신당동 집으로 옮기기 위해 집수리를 하고 있을 때, 나는 신당동 집에 갔다가 全斗煥 합동수사본부장을 만났다. 그는 신당동 집수리를 직접 감독하고 있었다.
『全장군, 내가 부탁할 것이 있소. 3년 전에 朴대통령이 나에게 崔太敏을 거세하라는 지시를 내렸었는데, 그게 몇 달 못 가서 흐지부지되고 말았소. 崔太敏이 다시 영애를 따라다니는 것을 대통령에게 보고해서 깨끗하게 처단해야 했었는데, 영애가 부탁하는 통에 내 마음이 아파 보고를 못 하고 오늘에 이르렀소. 그게 이제는 朴대통령의 언명이 아니라 유언이 되고 말았소. 합수본부장이니 그 힘으로 崔太敏을 영애에게 접근 못 하도록 해주시오. 방법은 全장군이 알아서 해주시고』
그런 부탁을 하고 난 이틀 뒤에 나는 다시 全장군을 만났다.
『鮮于의원, 崔太敏 문제는 나도 해결하지 못하겠습니다. 鮮于의원 얘기를 듣고 영애에게 崔太敏 처리의 양해를 구하기 위해 말씀을 드렸더니, 영애가 「崔太敏은 내가 처리할 테니 나한테 맡겨 달라」고 부탁하더군요. 각하도 계시지 않은데 내가 어떻게 영애 부탁을 거역하겠습니까』
『여보, 영애가 崔太敏에게 현혹돼 그를 거세하라는 건데 그걸 영애에게 말하는 사람이 어디 있소!』
全장군의 말을 들은 나는 어이가 없어서 면박을 주었다. 몇 달 뒤 확인해 보니 全장군은 결국 崔를 강원도 산골로 쫓아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鮮于煉씨의 비망록을 읽어 보면 朴대통령이 金載圭 주장대로 무턱대고 딸을 감싼 것은 아니란 사실을 알 수 있다. 어머니를 잃고서 퍼스트 레이디 역할에 재미를 붙인 딸에게 매정하게 대하지 못하는 아버지의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이 비망록의 정확성을 알아보기 위하여 대통령의 親鞠이 있었다는 1977년 9월12일자 대통령 면담록을 찾아내 확인했다.
이날 오전 10시20분부터 11시25분까지 金載圭 정보부장, 白光鉉 수사국장이 서재에서 朴대통령에게 보고를 올린 것으로 되어 있다. 아마 이 자리에 朴槿惠씨가 불려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면담록에 따르면 오전 11시25분부터 10분간 金載圭 정보부장이 따로 대통령에게 보고했고, 이날 오후 5시35분부터 20분간 또 朴대통령을 만나고 갔다. 이 문서는 문제의 親鞠을 확인해 주는 유일한 증거물일 것이다.
全斗煥 당시 대통령의 가장 가까운 측근이었던 許和平씨는 5공화국 초기에 새마음봉사단을 해체하는 일을 맡았다고 한다. 그는 朴槿惠씨를 찾아가 『우리는 朴대통령의 명예를 지켜 드려야 하는데 새마음봉사단이 대통령의 명예에 累(누)가 되었다. 그러니 이를 해체시키는 것을 양해해 달라』는 취지로 통보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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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국여성봉사단 발단식에 참석한 朴槿惠씨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뒤에 안경낀 사람은 崔太敏으로 보인다. |
朴대통령 시절 정보기관에 몸담았던 사람들은 朴대통령이 정보부의 보고를 왕조시대의 친국式으로 처리한 데 대해서 이해할 수 없다고 평한다.
朴槿惠씨는 崔씨에 대한 어떤 비판에 대해서도 음해론으로써 그를 철저하게 옹호하는데, 이는 다른 객관적인 증언들과 부합되지 않는다.
우선, 당시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하고 있던 朴槿惠씨에 대해서 음해할 만한 세력이 없었다. 정보부도 비서실도 대통령과 딸을 아끼는 마음에서 直言을 했다고 봐야 한다. 다만, 崔씨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빚어져 상당히 과장된 정보가 올라갔을 가능성은 있다.
朴槿惠씨는 崔太敏씨가 하려던 게 모두 좋은 일뿐이니 『다소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떠들 일은 아니다』라는 식으로 매우 주관적 판단을 했을지 모른다. 구국여성봉사단에 돈을 가져다 주는 기업 쪽에서도 압력을 받아 마지 못해 낸다고 했을 리는 없고, 『제발 받아 달라』는 식으로 자진 기부 방식을 취했을 것이다.
朴槿惠씨처럼 정상적 생활인과는 다른 체험에 익숙해 바닥 民心을 잘 모르는 권력의 심장부 사람으로서는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다. 권력의 한복판에 있는 사람은 의외로 그 권력이 보통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자신을 위한다면서 惡役을 맡겠다고 달려드는 사람을 멀리 하기란 그렇게 쉽지 않다.
오늘날 한나라당 대표가 되어 있는 朴槿惠씨에게 崔太敏 건이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崔씨에 대한 그때의 誤判이 金正日에 대한 침묵과 어떤 관련성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다. 2002년 한나라당을 탈당한 朴의원은 金正日이 내준 특별기를 타고 가서 그를 만났으며, 판문점을 통해 돌아왔다. 파격적인 특별대우였다. 이후 지금까지 朴대표는 金正日에 대한 비판을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 책임자인 金正日을 비판하지 않고서는 북한정권의 非行도, 盧정권의 굴욕적인 對北정책도 견제할 수 없다.
국민행동본부는 광고를 통해서 「어머니를 죽인 원수와 만나 오누이처럼 사진을 찍고 와서는 한나라당까지 끌고 들어가서 金正日에 대해 침묵하도록 하고 盧정권의 對北정책 비판도 포기했다」고 비판한다.
金正日은 朴의원을 만난 자리에서 朴대통령을 칭찬했고 『국립묘지에 가서 묘소에 참배하고 싶다』는 말까지 했다고 전한다. 崔太敏과 金正日에 대한 朴대표의 납득하기 힘든 태도는 20代 처녀의 몸으로 퍼스트 레이디役을 했던 사람의 「인간 본성과 세상 물정에 대한 순진한 오판」 때문인가?
崔씨에 대한 오판이 朴대통령의 운명에 다소간의 영향을 끼쳤다고 하더라도 국가적인 사안은 아니었다. 체제수호 정당을 자임하는 巨大야당 대표인 朴대표의 현재진행 중인 金正日에 대한 오판과 침묵은 국가적 문제이다. 대한민국 수호세력의 챔피언이 되어야 할 자리에 있는 사람이 민족반역자에게 침묵함으로써 救國운동이 결정적 장애를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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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咸秉春 駐美 대사가 백악관에서 닉슨 대통령에게 信任狀을 제정하고 있다. |
유신조치 후 朴대통령이 與野 정치인들과 만나는 횟수가 줄어들고 정부 쪽 인사들하고만 주로 접촉한 것이 대통령의 민심동향 파악에 지장을 주어 세상 돌아가는 것에 대한 감각이 무디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특히 1974년 8월15일 文世光의 저격으로 陸英修 여사가 사망한 다음 새로 경호실장이 된 車智澈은 경호를 강화하여 대통령과 일반인들 사이에 장벽을 만들었다. 대통령이 골프장에 나가면 그 앞뒤를 봉쇄하여 거의 혼자서 치도록 한 점이 그러하다.
金正濂 당시 비서실장은 『대통령의 외부접촉이 줄어들었지만 특보 10명이 바깥 민심을 전하고 자신의 전문영역 안에서 直言을 서슴지 않았기 때문에 민심 파악에는 문제가 없었다』고 말했다.
대통령 특보로 지명된 사람들은 咸秉春·朴振煥·朴鍾鴻씨처럼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이고, 동시에 할 말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각자의 인맥이 있어 그 네트워크를 통해서 수집한 정보를 대통령에게 아주 편한 입장에서 건의할 수 있었다고 한다. 특보들은 대통령과 함께 한담을 할 기회가 많았다고 한다.
金正濂씨는 특히 咸秉春씨의 역할을 높게 평가했다. 연세大 교수를 하다가 특보로 임명되었던 咸秉春씨는 미국의 정치와 역사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그는 韓美관계가 나빠져 가는 과정에서 朴대통령을 말리기도 하고, 격려하기도 했다고 한다. 咸秉春 특보는 『미국이 한국에 대해서 아무리 압력을 넣고 비난을 해도 절대로 한국을 버릴 수는 없다. 한국은 중국과 소련을 견제하는 데 꼭 필요한 미국의 不沈航母(불침항모) 역할을 하고 있다』고 대통령에게 말했다.
그는 또 『미국이 한국의 인권문제를 트집잡고 있는데 미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럴 자격이 없다. 서부개척 시대에 인디언들에게 한 짓, 링컨이 남북전쟁 때 영장 없이 사람들을 구속한 것, 제2차 세계대전 때 수십만 명의 일본계 미국인들을 수용소로 보낸 일들을 생각해 보면 그들이 한국의 인권문제를 거론할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咸秉春씨는 그러나 朴대통령이 미국의 압력에 대해서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극구 말렸다고 한다.
咸秉春씨는 駐美대사로 가서도 미국의 정치인·언론인들을 상대로 한국의 입장을 설득하는 역할을 열심히 했다. 咸秉春씨는 미국에서 공부한 사람답지 않게 한국의 입장을 역사적 관점에서 주체적으로 설명하는 사람이었다. 법학을 전공한 그는 한국의 역사·민속에 대해서 조예가 깊었다. 조국이 처한 현실과 전통을 이해한 바탕에서 미국식 문물을 주체적으로 흡수한 사람이란 점에서 朴대통령의 철학과 맞았다. 金正濂 실장은 朴대통령의 자주정신을 논리적으로 뒷받침한 사람으로서 咸秉春씨와 철학자 朴鍾鴻씨를 꼽았다.

朴正熙 대통령은 권력을 잡고도 영혼의 순수성이 오염되지 않은 드문 인물이었다. 그는 집권한 뒤에도 권력과 금력을 남용하는 실력자들에 대해서는 가혹하게 대했다. 한편으로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식지 않았다. 이런 성향은 그의 출신과 한때 사회주의에 홀렸던 前歷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사회주의와 결별한 뒤에도 버리지 않았던 좌파적 성향(반골적·평등지향적·약자보호의식 등)을 우파적 근대화의 동력으로 쓴 사람이었다.
朴대통령 밑에서 공화당 의장과 정책委 의장을 지낸 朴浚圭씨의 증언이다.
〈1977년도 예산안을 확정하기 위한 당정회의가 열렸을 때이다. 南悳祐 부총리가 당시 공화당 정책委 의장이던 朴浚圭에게 부탁했다.
『우리가 아무리 각하께 이야기를 드려도 소용이 없으니 朴의장께서 꼭 진언해 주십시오. 내년에 너무 많은 농가개량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인플레가 생깁니다. 줄였으면 좋겠다고 말씀해 주세요』
朴의장은 회의 도중 주문대로 발언했다. 朴대통령은 『그건 그대로 해』라고 잘라 버렸다. 회의가 끝나고 나오려는데 대통령이 朴의장을 불렀다.
『아까 그 이야기는 공화당 생각이 아니지? 그 관료들에게 맡겨 두었다가는 아무 것도 안 돼!』
朴의장은 『농민들도 부담이 크다고 울상입니다』라고 했다. 대통령이 말했다.
『농민들이 언제 스스로 자기들 생활을 개선하고자 나선 적이 있나요. 당장은 좀 어렵겠지만 일단 해놓으면 이익이 되는 거야』〉
朴대통령이 재벌을 늘 감시하면서 지나치지 못하게 하려 했다는 증거로서 朴浚圭씨는 이런 일화를 소개했다.
『어느 날 朴대통령이 불러서 갔더니 「재벌들이 문화재단을 만들어 돈을 많이 빼돌리고 탈세를 하는데 그것 규제 좀 하지」라고 해요. 「그건 정부입법으로 하시죠」라고 대답했더니 「朴의장이 유정회 具泰會 정책委 의장하고 상의해서 법안을 만들어」라고 하는 거예요.
나는 종고모의 남편이 李秉喆 회장이고, 具의장은 금성(지금의 LG)그룹 집안이 아닙니까. 그런 사람들을 시켜 재벌규제법안을 만들게 한 朴대통령은 무서운 분입니다. 종고모가 호암문화재단에 들어가 있는 집에서 살고 있었는데 법이 통과된 이후 그 집을 문화재단에 넘겨 주고 나왔어요. 「하나밖에 없는 종고모를 못살게 하려고 준규가 집까지 빼앗아 내쫓았다」고 원망을 많이 했어요』
朴대통령은 재벌이 너무 비대해진다고 걱정하는 사람들에겐 이렇게 말했다.
『알아. 그래도 경제발전에는 이게 가장 빠른 길이야. 이렇게 어느 정도 가고 그때 가서 재벌을 규제하자. 내가 재벌들을 속속들이 다 알아. 내가 거기 안 넘어갈 거야. 걱정하지 마』

朴대통령은 월간경제동향보고회가 끝나면 꼭 표창받은 새마을 지도자 및 모범 근로자들과 식사를 함께 하면서 실무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1975년 5월8일 경제기획원에서 있었던 대화를 소개한다.
〈朴대통령: (국제화학 梁正模 사장에게) 요즈음 수출이 어떻습니까?
梁사장: 어렵습니다. 조금씩 나아지고 있습니다.
朴대통령: 조업단축은 안 하시오?
梁사장: 직공이 많아 오더가 없으면 운영이 곤란합니다. 그러나 조업단축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朴대통령: 손해 볼 때는 적자를 내더라도 조업단축을 하지 말고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이 다음 경기가 좋아진 뒤에도 종업원이 열심히 일할 게 아니겠습니까? 梁사장, 金여사 같은 장기근속 사원에겐 아파트 같은 것이나 마련해 주시오. 지금 셋집에서 산다는데 나하고 梁사장하고 반반씩 부담하여 아파트 한 칸 사줍시다.
梁사장: 그렇게 하겠습니다.
朴대통령: 사업가들이 요즈음 공산주의자들이 쳐들어온다고 동요하지 않나요?
梁사장: 그렇지 않습니다.
朴대통령: 우리는 폭탄이 떨어질 땐 잠시 피했다가 다시 공장에 들어가 생산하는 정신으로 일해야 합니다〉

朴대통령이 이들과 나눈 대화록을 읽어 보면 수치가 많이 들어간 실무적 이야기가 主이다. 대통령이, 관념적인 헛소리가 일체 생략된, 생활과 밀착된 대화를 서민들과 나눌 수 있었다는 것은, 지식인들이 본 것과 전혀 다른 모습의 유신시대가 존재했음을 의미한다. 1975년 10월6일 월간경제동향보고회 직후의 대화이다.
〈朴대통령: (대한전선 공장기술부) 金松씨는 월소득이 얼마나 됩니까?
金松: 11만7000원입니다.
대통령: 세금 떼고 그렇게 됩니까?
金松: 집에 들여가는 것은 8만원 정도 됩니다.
朴대통령: 11만원이면 정부관리로 어느 급일까?
金龍煥 재무장관: 국장급의 2갑3호봉을 기준으로 할 때 11만700원입니다.
朴대통령: (완도군 새마을 지도자 田宰眞씨에게) 가족은 얼마나 되며 섬에서 생활하는 데 생활비가 얼마 듭니까?
田宰眞: 식비, 부식비 빼고 여섯 식구가 3만원 듭니다.
朴대통령: 田지도자의 연간소득은 얼마입니까?
田宰眞: 200만원 정도입니다.
朴대통령: (완도군수에게) 완도군에 소득이 100만원 넘는 부락이 몇 개며, 140만원은 언제 넘어서겠소?
군수: 100만원 넘는 부락은 네 개이고, 자립마을은 1978년에, 기초마을은 1981년에 가면 140만원이 넘겠습니다〉
朴대통령은 한 농민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을 때 가장 기뻤을 것이다.
『지금 농촌은 옛날과 많이 달라졌습니다. 옛날에는 100원 있으면 100원을 보태서 200원을 쓰려고 했는데, 요즘은 50원이 있으면 50원을 더 벌어서 100원을 만들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