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은 석유를 쓰는 세계 각국에 똑같이 주어졌다. 한국이 이 시련을 이겨내니 상대적으로 훨씬 앞서가게 된 것이다. 석유파동은 그때까지 비슷하던 태국,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국가를 한국이 결정적으로 추월하게 된 계기였다.
- 4차 中東戰. 골란고원으로 진격하는 이스라엘 탱크부대.
金鍾泌 총리가 부름을 받고 청와대로 들어갔더니 대통령과 李厚洛 중앙정보부장이 앉아 있는데, 李부장은 꾸중을 들은 듯 얼굴이 벌게져 있었다고 한다.
朴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金大中 건으로 총리가 일본에 한번 갔다 와야겠어. 외무부 쪽에서 그렇게 이야기해』
『제가 가야 한다면 가겠습니다. 그런데 사과를 하려고 해도 진상은 알고 가야지요』
李厚洛 부장은 아무 말이 없었다.
청와대를 나온 金鍾泌 총리는 李부장을 총리공관으로 불러서 따졌다고 한다. 李부장은 「납치의 진상은 모른다」고 뻔한 거짓말을 했다. 정보부의 소행이라는 것을 대통령으로부터 들어 알고 있었던 金총리는 『지금까지는 선배 대접을 했는데 이제부터는 생각을 달리 하겠다』고 해놓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험한 말을 하면서 때리려는 자세를 취했다고 한다.
李부장은 그런 수모를 당하고도 끝까지 납치는 자신이 시켜서 한 일이란 자백을 하지 않았다. 그때 金총리는 친한 일본기자로부터 『한국의 책임 있는 고관이 「金大中 납치는 대통령의 허가下에 이뤄진 것」이란 말을 하더라』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이 고관이 李부장이란 판단을 한 金총리는 더욱 화가 났다.
이것을 따지니 李부장은 말을 더듬으면서 극구 부인했다.
『그, 그, 그런 이야기 절대로 안 했습니다』
『아니, 일은 당신네들이 저질러 놓고 내가 사과하러 가야 하는데 진상을 알아야 할 것이 아닙니까. 하도 화가 나서 그랬는데 여하튼 가긴 가겠습니다. 그만 가보세요』
金 前 총리는 지금도 金大中 납치는 대통령의 총애를 잃은 李부장이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해놓고 몰래 대통령에게 자신이 한 것이라고 귀띔하여 대통령의 약점을 잡아 놓으려는 물귀신 작전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해두면 대통령이 자신을 해임하지 못할 것이라고 李부장은 계산했을 것이다.


1973년 11월1일 金溶植 외무장관은 金大中 납치사건으로 시작된 韓日 양국의 갈등이 그동안의 외교 교섭에 의해서 종결되게 되었다고 발표했다. 金장관은 일본 측이 범행 가담자로 지목한 金東雲 서기관(정보부 소속의 駐日 대사관 근무자)을 면직했으며, 『金大中씨가 귀국 전 일본에서 한 언동에 관해서는 反국가적 언동을 再犯하지 않는다면 그 책임을 묻지 않을 것이다』고 말했다. 그는 또 다음날 金鍾泌 총리가 일본을 방문하여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총리에게 유감을 표명할 것이라고 밝혔다.
11월2일 오전 김포공항을 출발한 대한항공 여객기 안에서 金총리는 고민에 빠졌다.
「무슨 말로써 유감을 표명할 것인가, 국가체면을 구기지 않으면서 당당하게 사과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한편으로는 李厚洛이 저지른 일을 자신이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화도 났다. 여객기가 도쿄 하네다 공항에 내렸을 때 여승무원이 다가오더니 『총리님, 오늘 제가 재떨이를 세 번이나 비웠습니다』라고 말했다.
金총리는 비행기 사다리를 걸어서 내려오면서도 생각에 잠겨 발을 헛디뎌 쓰러질 뻔했다. 마중 나왔던 오히라 외상이 붙들어 주었다. 그 11년 전 金鍾泌 당시 정보부장은 오히라 외상과 요담하여 對日청구권자금에 대해서 합의한 적이 있었다. 오히라 외상(나중에 총리)은 이즘엔 다나카 총리와 일종의 공동정권을 꾸려 가고 있었다. 「金-오히라 메모」의 두 주인공은 총리공관으로 직행했다.
접견실에서 있었던 회담에 일본 측에서는 다나카 총리, 오히라 외상, 외무성 아시아 국장이 참석했다. 한국 측에선 金鍾泌 총리와 李湖 駐日대사 및 수행원들이 참석했다.

金鍾泌 총리는 朴대통령의 친서를 다나카 총리에게 전한 뒤 본론에 들어갔다. 그는 이 자리에서의 대화를 최근 이렇게 회고했다.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金大中이란 사람이 지금 서울에 와 있다. 그 경위에 대해서는 우리 정부가 수사를 하고 있다. 어쨌든 이번 일로 일본 국민들과 총리에게 걱정을 끼친 점 유감으로 생각한다. 金大中씨는 대한민국에 돌아와 있으므로 대한민국 법에 따라서 정부가 그 경위를 수사하고 있으며, 일본 정부가 수사한 자료가 있으면 제공해 주기 바란다. 우리가 수사한 자료도 일본 측에 알려 주겠다. 우리 정부는 금후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다나카 총리는 이렇게 받았다.
『대한민국 총리가 직접 이렇게 와서 유감을 표명해 주신 것을 높게 평가한다. 이제 金大中 건으로 야기된 외교적 접촉은 이것으로써 일단 종료된 것으로 이해한다』
이때 오히라 외상이 말했다.
『아니, 국회에 나가서 답변하고 설명해야 할 사람은 난데, 이런 식으로 끝내면 곤란하지 않는가』
다나카 총리는 『그것은 당신이 알아서 할 일이야. 이제 다 끝났어』라고 못을 박았다.
金총리는 「金大中씨가 납치되었다」는 표현을 쓰지 않으려고 애썼다. 수사가 진행 중이므로 진상은 알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다나카 총리로부터 만족할 만한 대답을 듣고 나서 金총리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일본 정부가 金大中씨에 대해서 여권 목적과 위배되는 정치활동을 하도록 방치한 것이 이런 결과를 빚은 한 원인이다. 金씨는 병 치료 목적으로 출국했으며, 미국에 갔다가 일본으로 再입국할 때 정치활동을 못 하도록 하고 허가를 해주었는데, 일본 정부가 그의 정치활동을 제지하지 않았다는 것은 유감이다. 물론 우리 정부도 金씨에 대한 조치를 취해 달라고 요청하지 않은 잘못이 있다.
만약 중국 사람이 東京에서 정치활동을 했다면 일본 정부는 그런 사람을 北京으로 추방했을 것 아닌가.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내버려 두었다면 일본 정부도 책임이 있다. 앞으로 이런 일이 없도록 각별히 주의해 주었으면 한다』
다나카 총리는 옆자리에 있던 오히라 외상에게 『어떻게 된 일인가』라고 물었다.
오히라 외상은 『가나야마 前 駐韓 일본 대사가 알선을 해서 再입국을 시켜 주었다』고 말했다.
다나카는 『金大中씨를 별건 체포하느냐』고 물었다.
『그 문제는 사법부에서 할 일이지만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다나카 총리는 농담 비슷하게 『金大中씨가 다시는 일본에 오지 않도록 해주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공식 회담이 끝나자 다나카 총리는 金총리에게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고 했다. 金총리는 『오늘은 그럴 기분이 아니다. 우리 대사관 직원들과 저녁을 함께 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金鍾泌이 공화당 의장 시절 다나카는 사토 총리 밑에서 자민당의 간사장으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호 교류가 있었다. 日帝 시대 대전에서 토건업을 한 적이 있는 다나카는 金총리와는 가까웠고 金永善(민주당 시절 재무장관, 후에 駐日대사)씨와는 日帝 시절부터 친면이 있었다.
이날도 다나카 총리는 단순명쾌하게 결론을 내려 주었다. 오히라 외상이 다나카의 결단에 이견을 제시하는 시늉을 한 것은 배석한 외무성 간부의 기록을 의식한 행동으로 보였다.
金鍾泌 총리는 다음날(11월3일) 귀국하여 청와대로 직행, 朴대통령에게 보고한 뒤 5일 국회 본회의에서 일본 측과의 합의 내용을 공개했다. 金총리는 『일본 정부가 金大中씨에게 여권 목적 이외의 정치활동을 허용했고, 우리도 이에 대해 일본 정부로 하여금 제지하거나 국외에 나가도록 해달라고 요청했어야 옳았는데, 이 점 소홀했음을 인정한다』고 말했다〉


1973년 12월 朴대통령이 改閣을 하면서 李厚洛 정보부장을 해임하고 후임에 申稙秀 법무장관을 임명한 것은, 金大中 납치사건으로 인한 韓日 갈등이 金鍾泌 총리의 訪日 유감표명으로 해소되었기 때문이다.
朴대통령은 이때 金溶植 외무장관을 金東祚 駐美 한국대사로, 李湖 駐日 한국대사를 金永善씨로 교체했다.
이때 李厚洛 부장은 이미 權府 내에서 힘을 잃은 상태였다. 金鍾泌 총리, 朴鐘圭 경호실장뿐 아니라 陸英修 여사도 그를 싫어했다. 朴대통령에게 일상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이들이 모두 李부장을 성토하는 분위기였다.
특히 陸여사는 한 사건 때문에 화가 나 있었다. 이 무렵 陸여사 앞으로 한 장의 진정서가 도착했다. 요지는 정보부 직원이 민간인인 진정인의 채권채무 문제에 개입하여 진정인을 연행, 고문하여 허리뼈를 다치게 했다는 것이었다.
陸여사는 이 편지를 청와대 민정수석실에 넘겨 조사해 달라고 부탁했다. 민정실에서 진정인이 입원해 있던 병원으로 사람을 보내 조사를 해보았더니 그 주장이 사실인 듯했다. 이 보고를 받은 陸여사는 朴대통령에게 알렸다. 朴대통령은 李厚洛 부장을 불러 따졌다. 李부장은 며칠 후 그 진정 내용은 모함이란 보고를 올렸다.
대통령은 청와대 사정특보로 있던 洪鍾哲과 그 아래 崔大賢 검사를 불러 특별조사를 지시하고는 수시로 진행상황을 확인했다. 崔검사가 정보부를 상대로 조사해보니 진정인의 주장이 사실로 밝혀졌다. 朴대통령은 대단히 화가 났다. 그 며칠 후 李부장은 해임되었다.
李厚洛은 해임된 직후 몰래 출국했다. 申稙秀 후임 부장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당시 駐英 한국대사는 육군참모총장 출신 崔慶祿이었고, 정보부에서 파견 나온 공사는 金東根이었다.
金씨는 李厚洛 정보부장 밑에서 보안차장보로 근무하면서 10월 유신을 준비하는 데 관여한 이였다. 1973년 12월 초순 金공사에게 정보부 李哲熙 차장보가 전화를 걸어왔다.
『李厚洛 부장이 출국한 뒤 행방이 확인되지 않는데 영국으로 간 것이 틀림없는 것 같다. 소재를 파악하여 보고하라』
金東根 공사는 부하직원인 李鍾贊(前 국정원장)과 함께 백방으로 알아보았으나 확인이 되질 않았다. 金공사는 영국 사람 중에 Lee라는 성을 가진 사람이 그렇게 많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金공사는 『李부장은 영국에 오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그가 나중에야 안 사실은 李부장이 영국 런던에 도착한 뒤 시내로 들어오지 않고 히드로 공항 옆 홀리데이 인 호텔에서 하룻밤을 자고 중남미로 떠난 것이었다.

하비브 駐韓 미국대사가 李厚洛 건으로 朴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자리에 金鍾泌 총리도 있었다고 한다. 미국 CIA는 李厚洛이 출국한 뒤 그의 행적을 추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비브 대사는 『지금 李厚洛씨가 바하마에 가 있는데 망명신청을 할지도 모른다는 첩보가 있다』고 말했다. 대통령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무 말 없이 담배만 빨고 있다가 하비브가 나간 뒤 金총리에게 『그놈, 당장 잡아와야겠어』라고 내뱉듯이 말했다.
몇 사람의 밀사가 李厚洛을 만나러 갔다. 李씨는 金炯旭 前 정보부장이 유신 직후 미국으로 달아나 버린 사건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10년 이상 朴대통령의 최측근으로서 권력과 금력을 마음껏 누렸던 李厚洛이었다. 후임 정보부장이 자신을 뒷조사하여 벌거벗겨 놓기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란 것은 적지 않은 惡役의 담당자였던 그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런 그를 안심시키는 공작이 진행된 직후였다. 런던의 金東根 공사에게 국제전화가 걸려왔다. 李厚洛이었다. 그는 『몸이 아파서 치료를 받고 이제 돌아가려고 한다. 본부에 보고해 주었으면 좋겠다. 런던을 거쳐서 가겠다』고 했다. 런던에 온 李厚洛은 崔대사와 식사만 한 끼 한 뒤 홍콩으로 갔다.
홍콩에 도착한 李厚洛은 金鍾泌 총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더듬는 말투로 『비, 비, 비행장에서 체포 안 합니까』라고 물었다.
『체포는 무슨 체폽니까. 정보부장 지내신 분이 외국을 돌아다니니까 모양이 안 좋습니다. 빨리 들어오세요. 들어와서 각하께 사죄하고 하회를 기다립시오』
『정말 비행장에서 체포 안 합니까?』
『잠시 기다려요. 여기 옆에 申稙秀 정보부장이 와 있으니까 두 분이 이야기해 보세요』
전화기를 받아든 申부장은 『부장님, 체포 안 합니다. 빨리 들어오세요』라고 했다.
대통령 면담日誌를 보면 李厚洛의 귀국(2월17일) 직후인 1974년 3월6일 오후 5시16분~6시15분 사이 대통령이 李씨를 집무실로 「招致」한 것으로 적혀 있다. 이 자리에서 李씨는 용서를 얻고 근신하라는 충고를 받았다. 李厚洛은 충무市의 해안에 있는 호텔에 장기투숙한다.

1974년 4월3일, 북한 노동당 對南공작부서인 연락부 제1부부장 이완기가 남포연락소 공작조장 金用珪를 불렀다. 이완기는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지금 李厚洛이 해외에 나갔다가 귀국하여 충무호텔 2층 특실에서 휴양 중이란 정보가 들어왔다. 당중앙(김정일)에 보고했더니 납치해 오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남포연락소는 30명으로 납치조를 편성하여 훈련에 들어갔다. 李씨의 주치의와 경호원까지 납치하기로 했다. 金用珪팀은 남포시 와우도 휴양소를 가상 표적으로 설정하고 마취실습과 모의훈련에 들어갔다. 사회안전부 부부장 이명선을 실험대상으로 하고 그 옆방에 경호원들을 배치했다. 공작조의 납치실험은 매번 성공적이었다.
10여 일 뒤 납치요원들은 두 척의 공작선을 타고 남쪽으로 향했다. 중국 측 해안에 붙어 남하하던 중 배가 上海 부근에 이르렀을 때 공작을 중지한다는 연락이 왔다. 납치대상인 李厚洛이 충무를 떠났다는 것이었다. 서울 출신인 金씨는 2년 뒤 거제도로 남파되었다가 동료 간첩 두 명을 사살하고 귀순했다.
金正日은 1978년엔 이완기를 시켜 崔銀姬·申相玉 부부를 납치해 온다. 외국인·한국인·요인납치는 金正日의 전공과목이 된다.


1973년 10월6일 이집트와 시리아의 이스라엘에 대한 기습공격으로 시작된 제4차 中東전쟁은 제1차 오일 쇼크(석유파동)를 격발시켰다. 세계인의 삶에 크나큰 큰 영향을 끼치고 여러 나라의 國運을 바꾼 석유파동은 특히 한국인과 朴정권에 큰 危機를 가져왔다.
석유를 거의 全量 중동에서 수입하고 있었던 한국은 당시 主油從炭(주유종탄) 정책으로 전환하여 에너지 多소비산업인 중화학공업 건설에 매달려 있었고 수출에 목을 매고 있었다. 넉 달 만에 네 배로 뛴 석유값 인상으로 치명타를 맞기에 안성맞춤인 나라였다.
그러나 朴정권은 놀라운 순발력과 조직력으로써 이 석유위기를 轉禍爲福(전화위복)의 好機로 이용한다. 다른 나라들이 휘청거리고 있을 때 한국만이 중동건설 시장을 개척하면서 고도성장과 수출드라이브 및 중화학 집중투자를 계속한다.
1977년에 가면 중동건설 시장에서 번 돈으로 중동에서 원유를 수입할 수 있을 정도가 된다. 석유위기는 한국을 비슷한 수준의 나라들로부터 떼어내 한 차원 격상시켰다. 이런 위기극복이 朴대통령의 유신체제가 아니었더라면 과연 가능했을까 하는 것이 흥미로운 쟁점이다.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 담당 吳源哲 경제2수석 비서관은 업무상 제4차 중동전쟁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이집트가 초전에 주도권을 잡고 소련제 미사일과 로켓으로 이스라엘의 공군과 戰車들을 격파해가는 것을 보고 그는 「한반도에서 다시 전쟁이 나면 소련제 新무기에 의해 막심한 피해를 보겠구나」하는 걱정으로 마음이 무거웠다.
미국의 닉슨 행정부는 10월10일 『소련이 이집트와 시리아에 대규모 군수물자를 공수하기 시작했다』고 경고하더니 15일 이스라엘에 대한 무기 지원을 결정했다.
이에 자극을 받은 아랍 6개 산유국 회의는 16일 쿠웨이트에서 긴급회동했다. 이 회의는 원유값을 종전의 배럴당 3.12달러에서 3.65달러로 인상한다고 발표했다. 17일엔 석유수출국기구(OPEC) 대표들이 쿠웨이트에서 회동하여 이스라엘의 아랍점령지 철수를 요구하면서 9월로 소급하여 매월 5%의 원유 減産조치를 취하기로 의결했다. 18일엔 아부다비, 이어서 사우디 아라비아가 對美 斷油를 선언했다.

11월4일엔 OPEC이 원유생산량의 25%를 감산키로 결정했다. 이 산유국 대표들은 석유소비국을 우호국과 非우호국으로 분류하고 우호국에 대해서는 9월 수준으로 원유를 공급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때 비로소 한국은 親美·親이스라엘 때문에 非우호국으로 분류되어 석유공급이 줄어들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1월6일 대한석유공사의 운영자이자 원유공급자인 걸프는 11월 이후 원유를 30% 줄여서 공급하겠다고 통보해 왔다. 칼텍스는 호남정유에 10% 감량을, 유니온 오일은 경인에너지에 20% 감량 계획을 알려왔다.
11월8일 정부는 에너지 절약 1단계 조치를 발표했다. 난방유류 5% 절감, 걷기운동, 대낮 소등 생활화, 광고 네온사인 규제, 목욕탕 신규허가 억제, 관광 레저 여행 규제 등의 대책이었다.
이날 金正濂 비서실장이 吳源哲 수석을 불렀다. 아무 설명도 없이 金실장은 吳수석을 데리고 서재의 朴대통령 앞으로 갔다. 金실장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각하, 석유 구하러 吳源哲이를 보내야겠습니다. 정유공장 건설할 때부터 관여하여 석유 3社의 최고위층과 친분이 많습니다』
吳源哲은 엉겁결에 『제가 간들 석유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라고 말했다. 金실장은 吳수석의 팔을 끌고 대통령 앞으로 나갔다. 朴대통령은 吳수석의 당황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더니 한마디만 했다.
『다녀와! 내일 떠나도록 해』
『예, 다녀오겠습니다』
吳源哲 수석은 朴대통령이 원유공급 3社 회장들에게 보내는 친서를 품고 김광모 비서관만 데리고 미국行 비행기에 올랐다.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밤인데도 잠이 올 리가 없었다. 식욕이 있을 리 없다. 머리가 아프다 못해 빠개지는 것 같았다.(「한국형 경제건설」 6권)>
吳수석은 걸프의 밥 도시 회장을 비롯해 칼텍스, 유니온 오일의 최고경영자들을 만나 담판을 지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한국에 대한 減量공급 통보를 철회한 정도가 아니라 종전 공급량보다 오히려 늘려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개선장군처럼 돌아온 吳수석은 11월17일 대통령에게 보고하러 들어갔다. 朴대통령은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회의용 탁자 쪽으로 갔다. 朴대통령은 『吳수석, 수고했어』라고 딱 한 마디했다. 그리고는 커피를 시켰다. 이것이 최고의 칭찬이다. 朴대통령은 같은 식구인 청와대 직원들에게는 좀처럼 공개적인 칭찬을 하지 않았다.
朴대통령은 12월에 들어가선 외무장관 출신인 崔圭夏 외교특보를 특사로 삼아 중동 산유국에 사절단을 보냈다. 이들 나라에 한국을 非우호국이 아닌 우호국으로 대해 줄 것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崔특보는 吳수석을 여러 번 불러 석유 공부를 하고 갔다. 특사 일행은 崔특보 이외에 金正泰 외무부 경제차관보, 崔鐘明 상공부 차관보, 全民濟 全인터내셔날 사장이었다.
崔특사는 12월15일 사우디에 도착하자마자 이스라엘의 점령지 철수 등 親아랍정책을 발표했다. 그러자 사우디 정부는 파이잘 국왕과의 면담일정을 잡아 주었다. 꼼꼼한 崔圭夏 특사는 저녁에 수행원 전원을 모아 놓고 파이잘 국왕에게 설명할 내용을 새벽 2시까지 되풀이 연습했다.
다음날 파이잘 국왕에게 崔특사는 연습한 그대로 자세히 긴 설명을 했다. 왕은 참을성 있게 다 들어 주었다. 崔특사가 공산주의와 대결하고 있는 한국의 상황을 설명한 데 대해서 파이잘 왕은 『공산주의보다 더 나쁜 것이 시오니즘이다. 이 악마 같은 시오니즘을 몰아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 뒤 사우디 정부는 한국을 우호국으로 분류하여 원유공급 제한 조치를 해제해 주었다.
이어서 쿠웨이트 국왕을 방문한 崔특사는 한국에 대한 원유 특별배정을 호소했다. 왕이 『어떤 나라나 공평하게 다룬다』고 답해도 崔특사는 세 번이나 『그래도 남은 원유가 있지 않겠는가』라고 매달렸다. 왕은 영어로 『내 말을 못 알아듣소?』라고 힐난조로 말했다. 崔특사는 쿠웨이트 정부가 한국을 중립국으로 대우한다는 약속을 받아 냈다.

1973년 12월 崔圭夏 특사의 중동방문 사절단에 민간인 全民濟씨가 참여한 배경은 이렇다. SK의 전신인 「鮮京(선경)」의 설립자 崔鍾建·崔鍾賢 형제는 1972년에 日産 15만 배럴 규모의 제4정유공장 인가를 받아놓고 원유공급線을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구하기 위하여 뛰고 있었다.
정유공장 사업에 공동으로 참여키로 한 일본의 종합상사 이토추(伊藤忠)의 전설적 인물인 세지마 류조 부사장이 對사우디 공작을 지휘했다.
선경이 한국 측 실무책임자로 초빙한 사람은 정유산업의 생리에 밝은 全民濟(全엔지니어링) 대표였다. 그를 보좌하면서 중동 출장을 많이 다닌 젊은 대리가 金昌浩(뒤에 SK 유통사장)였다. 석유파동이 일어나기 전인 1973년 8월 선경의 崔鍾賢 사장과 崔鍾明 상공부 차관보를 중심으로 한 民官 사절단이 사우디를 방문했다. 이때 선경과 이토추가 잡은 인맥이 대단했다.
중동 관련 정보망이 좋았던 이토추는 파이잘 국왕의 오른팔이자 정보기관장인 K씨를 겨냥했다. K씨는 왕비의 친동생이기도 했다. K씨는 협상에 나오지 않고 베드라위라는 조카를 내세웠다. 30代 미남인 그는 제다에 불포화 폴리에스테르 樹脂(수지)공장을 건립하려고 했다.
선경·이토추·데이진이 함께 株主로 참여하고 全엔지니어링도 공장건설을 맡고 株主가 되기로 했다. 民官 사절단은 사우디의 국영석유회사인 페트로민을 방문하여 원유공급에 대한 긍정적인 답변을 듣고 귀국했다.
그 두 달 뒤 석유위기가 닥쳤다. 崔圭夏 특사가 사우디로 갈 때 崔鍾明, 全民濟, 金昌浩 팀도 따라갔다. 崔특사는 파이잘 국왕을 만난 뒤 먼저 돌아가고 全民濟-金昌浩 팀은 베드라위를 통해서 마무리를 해야 했다. 베드라위는 사우디 실력자들의 견해를 이렇게 전했다.
『한국이 우호국이 되어 斷油 조치(엠바고)를 풀려면 먼저 이스라엘과 단교하고 親아랍 선언을 해야 한다. 이를 크게 보도되도록 해주었으면 한다』
金昌浩는 이 메시지를 가지고 귀국하여 崔鍾賢 사장에게 보고했다. 崔사장은 형(崔鍾建)이 별세하여 장례식을 마친 지 며칠 되지 않았다. 崔사장은 정부 측과 교섭하여 사우디 측의 뜻을 이행하도록 했다. 이것이 사우디의 對한국 엠바고 해제를 가져왔다는 것이 金昌浩씨의 주장이다. 석유위기가 닥치자 이토추는 제4정유공장 건설에서 발을 뺐다.
선경의 崔鍾賢 회장은 정유공장 건설의 꿈은 일단 접었으나 K씨의 대리인 베드라위에게 약속했던 수지공장 건설에 대한 투자는 약속대로 지켰다. 이 義理로 해서 사우디와 K씨의 崔鍾賢에 대한 신뢰는 不動의 것으로 된다.
사우디 측은 1979년 제2차 석유파동이 왔을 때 드디어 崔회장에게 정유공장의 꿈(油公 인수)을 이루게 하는 하루 5만 배럴의 원유공급권을 선물한다.

지금 30여 년 전의 석유파동 시대를 뒤돌아보면 석유수출기구(OPEC)라는 이름이 유엔과 쌍벽을 이루는 세계정부였던 느낌이 든다. 이 기구의 상징적 인물인 사우디의 야마니 석유장관은 그의 말 한 마디가 세계 언론의 1면 머리기사였다.
이 시기에 대한 기억이 이미지로 남는 것은 거의 매일이다시피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던 신문의 머리기사 제목이다. 제목대는 시커먼 바탕에 「引上」이란 낱말로 뒤덮였다. 인상률도 보통 40~50%였고 세 자리 수도 많았다. 1973년 겨울의 거리는 어두워졌고, 어두워지니 뺑소니 사고가 늘었다. 세상이 바뀌고 있었다. 값싼 석유로 쓰인 대량생산·대량소비 시대 역사의 한 章이 넘어가고 있었다. 「큰 것은 좋은 것이다」는 시대정신은 「작은 것이 아름답다」로 변하고 있었다.
석유파동 시대의 한 실무책임자였던 吳源哲 경제2수석의 표현을 빌리면 『1973년 크리스마스 전날 아침 배달된 신문을 보고 국민들은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것이 아닌가 하고 놀랐다』
석유수출기구가 10월16일에 배럴당 5.119달러로 약 70% 올렸던 원유값을 1974년 1월1일을 기하여 배럴당 11.651달러로 다시 약 100% 인상한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1973년 1월1일 원유값이 배럴당 2.591달러였으니 1년 사이 네 배로 뛴 것이다.
이에 따라 한국의 연간 원유수입액은 1973년의 3억519만 달러에서 1974년엔 11억78만 달러로 3.5배 늘었다. 세계가 원유값의 급등으로 몸살을 앓는데 모든 분야에서 석유파동에 가장 취약하게 노출되었던 한국은 急死할 지경이었다. 원유값의 폭등은 기름과 기름에서 나온 수많은 석유제품을 쓰는 산업뿐 아니라 농산물·설탕·조미료·대중목욕비 등 간접부문을 포함하여 全사회의 모든 분야에 원가 상승 압력을 가했다.


그 결과로 1974년의 도매물가는 전년도 대비 44.6%가 늘었다. 이는 6·25 전쟁 후 최대치였다. 수입물품값도 한 해 동안 31.2%가 올랐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한국엔 1차 오일쇼크가 없었다! 통계가 이를 입증한다. 1973년 한국의 국민총생산 증가율, 즉 경제성장률은 13.2%였다. 석유파동을 정면으로 받은 1974년의 성장률은 마이너스가 아니라 8.1%였다. 1973년의 광공업 성장률은 27.7%였다. 원유값 폭등에 가장 예민한 광공업의 부가가치는 1974년에도 15.3%나 증가했다. 수출은 1973년에 전년 대비 98.6%가 늘었다. 1974년에도 수출은 38.3% 늘었다. 모두가 세계적인 기록이다. 수치상으로는 석유파동이 없었던 것이다. 吳源哲 경제수석은 그 비결을 이렇게 요약했다.
<우리나라에 에너지 위기가 닥쳐왔다. 자칫 잘못됐다면 우리나라는 돌이킬 수 없는 경제파탄에 빠져서 다시는 헤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정부와 국민이 합심해서 이 시련을 극복하고 기적적인 발전을 했다>
시련은 석유를 쓰는 세계 각국에 똑같이 주어졌다. 한국만이 이 시련을 이겨내니 상대적으로 훨씬 앞서가게 된 것이다. 석유파동은 그때까지 비슷하던 태국·말레이시아 등 동남아국가를 한국이 결정적으로 추월하게 된 계기였다.
1974년의 국민총생산(GDP) 실질증가율을 보면 일본은 -2%, 미국은 -0.6%, 영국 -1.8%, 프랑스 3%였는데 한국만은 7.1%였다. 1975년에도 한국의 성장률이 주요 산업국들 중에선 최고였다.
정부와 국민을 합심시켜 석유파동을 극복하여 轉禍爲福으로 만든 朴正熙 정부의 리더십은 그래서 영원한 연구대상이다.
金鍾泌 당시 총리에 따르면 朴대통령은 「석유자원이 몇십 년치밖에 남지 않았다」는 식의 비관론을 믿지 않았으며, 석유위기도 일시적일 것이라고 확신하고는 중화학공업 건설 전략을 수정하지 않고 밀고 나갔다는 것이다.
1973년 10월부터 시작된 석유파동은 한국에 석유부족, 물가폭등, 국제수지 악화라는 3重苦를 동시에 몰고 왔다. 석유 부족은 1974년에 들어서면 석유수출기구가 원유 增産을 결의하여 해소되었다.
정부는 전반기엔 석유 사용 10% 절감, 국내 석유값 30% 인상, 긴급조치 3호로 대응했다. 후반기엔 국내 석유값 82% 인상, 두 달 뒤 다시 22.3% 인상, 그리고 환율 21% 인상(이는 모든 수입품값이 그만큼 인상된다는 뜻이다), 국내 석유값 31.3% 인상으로 대처했다.
석유 사용 10% 절감책은 「국영기업체와 관공서의 電球(전구) 중 3분의 1 빼기」, 「다방·음식점·목욕탕의 영업시간 단축」, 「공휴일 자가용 운행 규제」, 「텔레비전 방영시간 하루 4시간 단축」식이었다. 여러 부문에서 조금씩 노력하면 이 절약분이 쌓여서 10% 절감을 가능케 한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절약할 게 생활 속에 의외로 많다는 것을 깨우쳐 준 것이 석유파동이었다.
석유값이 오르니 석탄과 연탄의 가격경쟁력이 살아났다. 석탄 소비량이 급증하자 사양길에 들어섰던 탄광이 다시 활기를 띠었다. 저질탄도 써야 했으니 부산에선 주부들이 자주 꺼지는 연탄을 내던지면서 시위를 했다.

1973년 12월5일 太完善 경제기획원장관, 南悳祐 재무장관, 鄭韶永 농수산 장관, 張禮準 상공장관은 합동기자회견을 갖고 석유류(30%), 전기값(7%), 비료(30%), 나일론絲(32.6%), 설탕(16.7%), 배합사료(25.5%), 전분(42%), 판유리(25.5%), 목장우유(15%), 분유(10.8%)의 인상률을 발표했다.
소비자들은 이에 대해 생필품 사재기로 대응했다. 언론은 부자들이 화장지 등의 사재기에 앞장선다고 비판했다. 그때 비로소 한국에선 화장지가 양변기와 함께 널리 쓰이기 시작할 때였다. 일본인들조차 한국에 관광 온 김에 화장지를 사 가지고 갔다.
朴대통령은 유신선포 직후인 1972년 11월30일 1980년대를 향한 비전을 수치로 요약하여 발표했었다. 1981년에 가면 국민소득이 1인당 1000달러, 수출이 100억 달러가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1969년 朴대통령은 金鍾泌을 청와대로 불러 대통령 3選 개헌案에 지지해 줄 것을 설득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임자도 잘 알다시피 우리는 한강을 건너올 때 이미 조국 근대화에 목숨을 걸지 않았나. 1960년대에 겨우 먹는 문제를 해결했는데, 1970년대엔 공업화를 해야 돼. 함께 죽자고 혁명을 해놓고 이제 와서 혼자 살겠다는 거야?』
이처럼 朴대통령의 전략은 간명했다. 1960년대는 식량문제 해결, 1970년대는 중화학공업 건설. 朴대통령은 중화학공업 건설을 선언한 1973년의 연두기자회견 직후 『올해 물가 인상은 3% 이내로 억제하라』고 지시했었다. 석유파동은 한국을 경공업 국가에서 탈피시켜 세계적인 공업대국으로 만들겠다는 朴대통령의 신념과 집념에 대한 도전이었다.


1973년 11월 중순 朴대통령은 보유외환이 바닥나고 있다는 보고를 접하자 太完善 경제기획원 장관에게 종합 대책을 마련하여 보고하도록 지시했다. 12월 중순 그 보고회가 열렸다.
朴대통령은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太부총리, 수고했습니다. 워낙 중요한 사안이니 청와대에서 다시 검토하여 결론을 내도록 합시다』
대통령은 집무실로 돌아와서 金龍煥 경제1수석 비서관을 불렀다.
『경제기획원에 한 달 동안이나 시간을 주어서 대책을 마련하라고 했는데,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 그렇게 미지근하게 대응해 가지고는 이 난국을 극복하기 어려울 것 같아. 임자가 한번 다시 만들어 봐』
金龍煥 수석은 새해 1월10일을 목표로 정하고 비밀돌관작업에 들어갔다. 그 1년 전 8·3 私債 동결조치案을 비밀리에 만들었던 金수석은 그때 팀(심형섭씨 등 4명)을 다시 모았다. 여기에다가 高炳祐(뒤에 건설부 장관), 河東善, 宋炳循(은행감독원장 역임), 李相熙씨를 합류시키고 북악 파크호텔에서 실무작업에 들어갔다.
金수석은 1974년 1월10일에 완성된 계획서를 12일에 대통령에게 보고하여 재가받았다. 문서 제목은 「대통령 긴급조치 제3호와 이의 관련사항에 관한 보고」였다.
金수석은 긴급조치의 목적을 이렇게 설정했다.
<석유파동으로 야기된 악성 인플레이션을 완화하기 위하여 정부·기업·소비자의 공동노력을 조직화하고 低소득층의 부담경감과 국민생활의 안정을 도모하는 한편, 강력한 소비절약을 유도하여 석유파동의 충격을 극복하려는 것이다>
1월14일 청와대에서 朴대통령은 국무회의를 주재하여 긴급조치안을 의결했다. 긴급조치 선포에 따른 대통령 담화문을 金수석이 낭독하여 통과시키려는 순간 閔寬植 문교장관이 소리를 질렀다.
『각하, 틀린 글자가 하나 있습니다. 「心氣一轉」이 아니라 「心機一轉」입니다』
誤字, 脫字가 없도록 수십 번 원고를 확인했던 金龍煥은 가슴이 철렁 했다. 朴대통령은 웃으면서 이렇게 넘어갔다.
『통상 우리가 쓰는 한자는 「心機一轉」이 맞는데, 氣자로 쓴 「心氣一轉」도 좋지 않습니까. 마음과 기분을 한번 가다듬자는 뜻인데 더 좋은 것 같습니다』
원안대로 통과되었다. 金수석은 밤낮없이 고생한 실무진의 사기를 꺾지 않으려고 배려해 준 대통령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저분을 위해서는 더욱 분골쇄신해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나왔다. 그 뒤 官報에도 「心氣一轉」으로 나갔다.
온 세계와 나라가 석유파동에 휩쓸려 들어가 미래에 대한 전망이 어두워질 때 朴正熙 대통령은 근대화 철학의 제자들인 전국 새마을지도자들의 대회에서 연설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1973년 11월22일 광주에서 열렸던 이 대회에서 朴대통령이 한 유시는 그의 열정과 논리가 녹아 든 「역사를 향한 증언」이자 「한국적 민주주의」 선언이었다. 무엇보다도 이 연설문을 읽어 보면 바로 곁에서 근대화 혁명가의 숨결이 들려오고 맥박이 고동치는 것을 느낀다. 권력자의 연설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한 戰中세대의 호소문이라고 생각하면서 읽어 보자.


그는 우선 새마을운동을 「잘살기 운동」이라고 요약했다.
<새마을운동이란 무엇이냐? 나는 작년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에게 간단히 쉽게 말하여 「잘살기 운동이다」라고 정의했습니다. 나 혼자 잘 먹고, 잘 입고, 고대광실 좋은 집에서 사는 것만이 잘사는 것이 아니라, 부지런하고 자존심이 강하고 서로 협동을 하여 서로서로 도와서 땀 흘려 가면서 나도 잘살고, 우리 이웃도 잘살고, 우리 고장도 잘살고, 우리나라도 잘사는 것이다, 이렇게 나는 강조했습니다.
그것만 가지고도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 세대뿐만 아니라 우리들 후손들에게 자랑스러운 유산을 물려줄 수 있는 부강한 나라,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어서 자손들에게 물려주는 것, 이것이 참되게 잘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후손들에게 다시는 가난이라는 유산을 절대 물려주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것이 새마을운동의 궁극적인 목표라는 것을 작년에도 강조했고, 오늘 이 자리에서 다시 한 번 여러분들에게 또 우리 온 국민들에게 再강조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다시는 가난한 나라, 가난한 나라의 백성, 못사는 나라의 국민, 못난 백성이라는 소리를 들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과거 일제 시대 또는 해방 직후 그리고 6·25 전쟁을 전후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이 해외에 나가면 외국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당신 어느 나라 사람이오』 이렇게 물을 때에 자주정신과 주체의식이 없는 사람들 가운데는 『나는 한국 사람이오』라고 대답하는 것을 부끄럽고 떳떳하지 못하게 생각하여 말을 못 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당신 어느 나라 사람이오』, 『나는 동양 사람이오』, 『동양에도 여러 나라가 있는데 중국 사람이오, 일본 사람이오』, 『아니오』, 『그럼 어디요』, 『한국이오』, 『한국이 어디에 있더라』 또 아는 사람은 『아 - 한국전쟁 때 그 피란민들이 몰려 다니던 그 한국말이오』 과거 우리가 외국에 나가면 이런 말을 들은 적이 많이 있었습니다.
앞으로는 어디에 나가서 『당신 어느 나라 사람이오』, 『나는 대한 민국 사람이오』하고 떳떳하게 가슴을 펴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나라를 만들자, 특히 우리 후손들에게는 어디에 나가서도 조금도 구김살 없이 가슴을 활짝 펴고 떳떳하게 「대한민국 사람」이란 것을 자랑할 수 있는 그런 사회를 만들어서 물려주자, 이것이 우리가 노리고 있는 새마을운동의 궁극적인 목정인 것입니다>.

그의 열띤 이야기는 계속된다.
<그렇다면 이처럼 살기 좋은 우리 고장을 만들자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첫째는 부지런해야 합니다. 즉 근면입니다. 옛말에 「일근은 선지장이요, 일태는 악지장」이란 말이 있습니다. 한문입니다만, 「一勤」 한 일 자 부지런한 근 자, 한 번 부지런한 것은 「善之(선지)」, 착한 것의 으뜸 가는 것이다. 부지런한 것이 모든 선의 으뜸가는 것이다. 「一怠(일태)는 악지장(惡之長)」이란 게으르다는 것은 나쁜 것 중에서도 으뜸 가는 것이다. 이런 옛말이 있습니다. 근면하지 못한 사람이 백마디 말을 해 보았자 그것은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자조정신이 강해야 되겠습니다. 서로 협동을 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근면·자조·협동 이것이 새마을운동의 행동 강령입니다. 따라서 이 운동은 조국 근대화를 위한 일대 약진운동이요, 동시에 汎국민적인 정신혁명운동이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따라서 이 운동은 반드시 행동과 실천이 뒤따라야 합니다. 이론이나 말만 가지고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새마을운동은 하나의 행동철학입니다. 또한 이 운동은 반드시 주민의 소득 증대와 직결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해 둡니다. 소득 증대를 수반하지 않는 운동은 처음에는 모두 열을 올려서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 열의가 식어 버리고 주민들이 흥미를 느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朴대통령이 도덕성과 정신력을 강조하는 것은 반드시 행동을 유발하기 위한 동기부여의 목적이지 말장난에 머물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는 또 사명감의 고취만으로는 인간을 지속적으로 움직이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소득증대라는 이기심이 더해져야 한다는 뜻이다.
朴대통령은 利他心과 이기심이란 두 심리적 동기를 통합하여 국민들에게 호소했기 때문에 설득력이 강했다.
朴대통령은 歷史書를 많이 읽었다. 그가 역사에서 발견한 과거와 미래에 대한 통찰이 그의 신념체계를 형성했다. 역사에서 그는 자신의 고독한 결단을 합리화할 수 있는 많은 사례들을 발견했고, 『너희들은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그러나 역사는 나의 편에 설 것이다』라는 자신감을 정당화할 수 있었다. 대중은 자신을 알아주지 못할지라도 역사는 자신의 편이란 생각이 용기의 샘이었다. 이날도 그는 역사에서 용기와 사명감을 끌어내려고 한다.

<오늘 이 자리에서도 여러분들에게 73년도판 성공 사례집 두툼한 책이 한 권씩 배포될 것입니다. 이것은 내년도에 가면 74년도판, 다음 해에는 75년도판, 이렇게 앞으로 계속 우리 농촌 근대화 과정에 있어서 하나의 역사로서 편찬하여 후세에까지 남기려고 합니다.
후세에 우리 자손들이 이 책을 읽어서 우리의 조상들이 이처럼 훌륭한 마을을 만들고 나라를 건설하기 위하여 이만큼 피땀을 흘려가면서 노력했구나 하는 그 사실을 우리 후손들이 알게 될 때, 과연 그들이 어떠한 느낌을 가지겠는가? 우리 후손들로 하여금 「우리도 이래 가지고는 안 되겠다, 게을러서는 안 되겠다, 조상들의 뜻을 받들어야 하겠다」는 감명과 감동을 느끼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민족의 얼인 것입니다.
우리가 옛날 희랍의 역사를 읽어 보면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트로이 전쟁」에 참전한 아테네 시민들이 그들이 죽을 때 자손들을 불러 놓고 유언을 하기에 『너의 조상이 누구냐고 묻거든, 너는 서슴지 말고 「우리의 조상은 트로이 전쟁에 참전한 용사였다」고 떳떳이 일러 주라』 이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앞으로 나이가 들어 늙으면 죽을 때가 올 것입니다. 나는 우리 자손들에게 『후세에 너의 조상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나의 조상은 1970년대에 새마을운동에 앞장서서 알뜰하게 일한 바로 저 마을의 농민이었다」고 대답하라』는 유언을 남기는 것이 가장 보람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朴正熙 대통령은 민주주의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 불가피성과 당위성을 인정하면서도 그는 서구의 최신 민주주의가 그 경험이 일천한 한국에서는 그대로 적용될 수 없다고 확신했다. 이런 확신은 한국의 발전단계와 봉건적 잔재, 그리고 한국인의 민족성에 대한 통찰에서 우러나온 하나의 신념이었다.
다수 지식인이 독재화라고 비판했던 10월 유신도 朴대통령의 사전에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적 토양에 알맞은 한국적 민주주의의 실천이었다. 그는 이날 「새마을 운동이야말로 한국적 민주주의의 실천도장」이란 유명한 말을 남긴다.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결론적으로 몇 가지를 여러분들에게 말하자고 합니다. 첫째로, 새마을운동은 『한국적 민주주의의 실천 도장이다』 나는 이렇게 강조하는 바입니다. 왜냐 하면 새마을운동은 한두 사람이 모여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온 부락 사람들이 전부 참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선 부락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그 부락에서 가장 신망이 높고 창의적이며 헌신적인 부락 지도자를 전체 의사에 따라 뽑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부락의 발전을 위하여 모든 사람의 좋은 의견을 들어 종합을 하고 모든 사람의 동의를 얻어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코 한두 사람의 의견을 가지고 이것이 추진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의 의견을 듣고, 모든 사람의 동의를 얻은 다음에는 그 부락 전체의 이익이 될 수 있는 사업을 선택하고, 그 다음에는 남녀노소가 전부 참여하여 서로 협동하고 땀 흘려 이 일을 추진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얻어진 성과, 여기에서 얻어진 소득은 부락민들에게 골고루 공평하게 돌아가야 되고, 또 부락민들에게 동의를 얻어 일부 소득을 부락 공동 기금으로 저축해야 합니다. 그 저축한 것이 어느 정도 축적이 되면 또다시 부락 사람들의 전체의 의견을 모아서 부락 공동 이익 사업을 결의하여 이를 추진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마을운동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과정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민주주의적인 방법이며 참다운 민주주의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나는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새마을운동과 같이 점차적인 훈련과 실천을 통해 하나하나 뿌리를 박아 나갈 때 비로소 정착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앉아서 놀고 먹고, 선거 한 번 치르고 나면 전부 정부에 의지하면 된다는 의존심만 양성하고, 與野·아랫동네, 이 마을·저 마을이 전부 분열하여 서로 싸우고 욕하고 하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나는 이런 민주주의가 오래 가면 그 사회는 멸망한다고 생각합니다>

1974년 1월14일의 「국민생활의 안정을 위한 긴급조치의 공포시행에 따르는 대통령 특별담화문」에서 朴대통령은 『우리나라 경제만은 「불황 속의 인플레」에 말려들지 말고 이것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자』고 했다. 그는 또 『우리가 걸어온 길은 탄탄대로가 아니었고 태산준령을 넘고 거센 풍랑을 헤쳐나가듯 여러 가지 난관을 극복하면서 세계적인 성장과 발전을 기록해 왔다』고 했다. 朴대통령은 직전에 긴급조치 1, 2호로써 反정부 세력을 엄단하기로 한 것에 대해서는 이렇게 설명했다.
『이 같은 국가현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일부 인사와 불순분자들이 反유신적인 활동을 자행하여 국가안보에까지 위협을 미치게 되었기 때문에 부득이 정부는 이를 먼저 제거하는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긴급조치 3호는 저소득층 부담 경감, 영세민 취로사업 확대, 임금체불과 부당해고 엄단, 정부예산 절감, 중소상공업자 지원, 농민보호 대책이 主調(주조)였다. 吳源哲 수석은 이 긴급조치의 효과를 「질서 회복」으로 해석했다.
『석유파동이란 것은 질서가 무너졌다는 뜻입니다. 러시아워 때 서로 먼저 가려고 하다가 자동차가 서로 엉켜 버린 것과 같은 현상이 경제에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교통순경이 등장하여 이 엉킨 차들을 풀어 주어야 하는데 대통령 긴급조치가 그런 역할을 했습니다. 국민들이 대통령 말을 믿고 사재기를 중단하는 등 질서가 회복되니 정부도 물가체계를 재편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입니다』
1974년 2월1일 정부는 유류값을 평균 82%, 전기값을 30%, 해운요금을 최고 109%, 항공요금을 60% 인상했다. 2월5일엔 생필품, 건축자재, 신문용지 등의 값을 대폭 인상했다. 정부가 통제하던 물건 및 서비스 요금을 최하 10%, 최고 100% 올린 것은 유사 이래 처음일 것이다. 그럼에도 시장과 국민들은 차분하게 받아들였다. 매점매석, 사재기, 품귀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吳源哲 수석의 표현을 빌리면 『폭풍 후의 고요함과 같았다. 남은 것은 할퀴고 간 상처뿐』이었다.
이때 석유쇼크를 「재앙으로 위장된 행운」으로 만드는 일들이 일어난다. 행운은 최선을 다한 사람에게 찾아온다는 것이 朴대통령의 한국에도 적용된다. 中東 진출을 위한 탐색이 시작된 것이다. 한국의 현대사는 터널을 지나 새로운 무대로 진입하는 것이다.


1973년 한국의 경상수지 적자는 3억880만 달러였는데, 1974년에는 20억 2270만 달러로 늘었다. 자본거래 통계를 보면 1973년엔 2억9000만 달러를 빌리면 됐는데 1974년엔 19억9480만 달러를 빌려 와야 했다. 경제총사령관인 金正濂 비서실장은 출근하자마자 부도 직전으로 몰린 회사 사장처럼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야 했다.
『오늘 결제 준비는 되었나』
『어제 홍콩에서 돈을 꾸어 오겠다는 것은 해결됐어』
『걸프에게 주는 원유대금은 며칠만 기다리라고 해』
吳源哲 경제2수석비서관의 회고에 따르면 중동 진출과 관련하여 朴대통령에게 최초의 보고를 올린 것은 1974년 1월30일이라고 한다. 마침 사우디 아라비아 나제르 기획상이 訪韓하게 되어 있어 중동에 대한 한국 기업의 진출 방향을 구상한 것이었다.
吳수석은 석유위기가 발생하기 전에 유럽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건설회사 三煥의 직원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 三煥은 한국 기업체로서는 처음으로 사우디에서 고속도로 건설공사를 따내 일을 하고 있었다. 그때 삼환 직원은 서울시장이 초청한 제다 市長 부부와 동행하고 있었다. 비행기가 도쿄에 가까워지자 제다 시장 부인이 양장으로 갈아 입었다. 어찌나 아름다운지 클레오파트라를 연상케했다. 吳수석은 귀국 후 삼환 직원을 불러 사우디의 상황을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吳수석은 오일달러가 모이는 중동 시장을 겨냥하여 군수품의 판매, 공장건설, 토목, 건축, 기술 인력 수출을 생각했다. 1월30일 오전 吳수석으로부터 中東 진출 관련 보고를 받은 朴대통령은 『국내 업자들을 불러다가 설명회를 개최하고 중동 진출에 적극적으로 나서라는 뜻을 전하라』고 했다. 그날 오후 吳수석이 다른 건으로 결재를 받으러 갔더니 朴대통령은 『중동 진출 건에 대해 좀더 자세히 설명해 봐』라고 했다. 吳수석은 군대식으로 목소리에 힘을 주어 보고했다.
『각하, 우리나라에는 세 가지 장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우수한 인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중동은 작업환경이 가장 나쁜 곳입니다. 고온이고 사막지대입니다. 오락도 없는 곳입니다. 이렇게 나쁜 조건이야말로 우리나라에게는 극히 유리한 조건이 됩니다. 우리나라에는 군인정신으로 무장한 수십만 명의 제대장병들이 있습니다. 월남에서의 경험도 있습니다. 각하, 에너지 위기는 國難의 일종입니다. 한국 男兒가 국난을 극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까지는 어린 여공들이 수출을 해서 우리 경제를 지탱해 왔습니다만 이번에는 남자가 나서야 할 때가 아니겠습니까.
둘째, 우리나라 남자 기능공들의 인건비는 선진국보다는 훨씬 싸고 기술수준은 후진국보다 월등합니다. 세 번째가 工期단축인데 이 부문은 우리 건설업체가 자신 있습니다. 경부고속도로 공사式으로 돌관작업을 하는 데는 소질이 있습니다』
『吳수석, 소신이 있어 좋구먼』
『각하, 중동에 진출하자면 뒷거래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이 방면에도 소질이 있지 않습니까』
朴대통령은 소리를 내어 웃었다.

朴대통령 시절의 관료들은 일을 발상하여 실천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이 매우 짧았다. 2월13일 나제르 사우디 기획상이 訪韓하는 것을 기회로 삼아 2월16일에는 한국-사우디 경제협력위원회가 창립되었다. 4월25일엔 張禮準 상공부 장관이 민간기업체장들을 데리고 중동 방문길에 올랐다. 張장관은 나제르 기획상이 마련한 만찬장에서 軍에서 차출해 간 태권도 유단자 두 사람의 시범을 보여 호평을 받았다. 사우디 왕실의 경호실과 군대에서 태권도 사범들을 초청하게 되었다.
張禮準 장관은, 한국과 사우디 정부는 40억 달러가 들어갈 리야드 도시 건설에 우리 건설업체가 참여하고 고속도로 건설엔 한일개발이 참여키로 하는 등의 합의를 했다고 발표했다. 맨 처음 중동에 진출했던 삼환은 제다市의 美化공사를 수주했다. 삼환은 工期를 단축하기 위해 밤에도 횃불을 피워 놓고 작업을 했다. 이곳을 지나던 파이잘 국왕이 놀랐고 한국업체에 대한 인상이 좋아졌다고 한다.
1974년 9월 개각 때 朴대통령은 우직한 金載圭를 건설부 장관에 임명하였다. 대통령은 임명장을 주면서 『오일쇼크로 인한 외환위기는 오일쇼크로 부자가 된 중동에서 처방책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金장관은 간부들을 불러 놓고 『중동이라는 커다란 시장을 먹기 위해선 우리 업체들의 입이 너무 좁다. 입을 넓히는 작업을 하라』고 지시했다.
건설부는 비밀 작업 끝에 중동에 진출하려는 건설회사들을 정부가 책임지고 지원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즉, 해외건설 회사에 대해서는 국내 은행이 물적 담보 없이도 신용으로 지급보증을 해주고, 건설수출 소득에 대해서는 법인세를 50% 감면해 주며, 25개 업체의 공동출자로 한국해외건설주식회사(KOCC)를 설립키로 했다.
이 안에 대해서 기획원과 재무부는 반대했다. 위험도가 높은 해외건설에 대해 신용으로 지급보증을 해주었다가 사고가 나면 은행도 함께 망한다는 것이었다.
金正濂 비서실장의 증언에 따르면 1975년 하반기 어느 날 수출진흥확대회의가 끝난 뒤 중앙청 국무위원 식당에서 朴대통령, 국무총리, 관계장관, 경제4단체장이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 金載圭 장관이 이 문제를 제기했다.
즉, 건설부 장관이 허가한 해외건설업체에 대해서는 은행이 무조건 지불보증을 해주어야 한다고 했고, 金龍煥 재무부 장관은 최대한 협조하겠지만 지불보증은 선별적으로 해야 한다고 맞섰다. 南悳祐 기획원장관 겸 부총리는 재무부 편을 들고 경제단체장들은 건설부 편이었다. 여기서 朴대통령은 건설부와 기업의 편을 들어 주었다.
朴대통령은 이렇게 정리했다.
<재무부의 주장도 일리가 있지만 선별적 지불보증은 은행의 보수성에 비추어 업체의 中東진출에 지장을 줄 것이다. 은행은 무조건 지불보증을 하되 건설부 장관은 업자를 엄선해서 허가하라>
金正濂 실장은 청와대로 돌아오자 金載圭 장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金장관, 우리 업자들끼리의 과당경쟁과 부실공사를 막아야 합니다. 그래야 은행의 지불보증에 따른 사고를 막을 수 있습니다. 해외진출 허가는 엄선에 엄선을 기해야 합니다』
『알았습니다. 동감합니다. 업계에서 아무리 아우성을 치더라도 20개 이내로 진출업체를 제한하겠습니다』
그 뒤 1년간 더 재직한 金載圭 장관은 약속을 지켰다. 1978년 총선을 앞두고 지방건설업자들이 공화당을 통해서 中東에 진출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요청했다. 金실장은 반대했으나 건설부는 기회의 균등을 내세워 58개 회사에 허가를 내주었다. 中東 건설시장은 한국업체들끼리의 과잉출혈경쟁, 기술인력 빼내기 싸움터로 변했고 1980년으로 넘어가면 해외건설 부실사태를 낳게 된다.

현대건설은 中東 진출을 둘러싸고 鄭周永·鄭仁永 형제가 충돌했다. 鄭회장은 「우물쭈물하고 있다가는 機先을 놓치고 시장은 기득권을 가진 회사들에 의해 분할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부스러기만 주워 먹을 수밖에 없다」라고 걱정했다.
『어렵고 힘든 일을 안 하고 살면 편하다. 그냥 편하게 주저앉아 쉬운 일만 한다면 회사 발전은 포기해야 하고, 각 기업이 그런 식이면 국가도 희망이 없다. 돈을 잡으려면 돈이 많은 中東으로 가야 한다』
동생 鄭仁永 사장은 이란의 조선소 공사를 수주하여 中東 시장을 개척한 사람이지만 대형공사 수주는 모험이라고 반대했다.
1975년10월 바레인의 아스리 조선소 건설 공사는 1억 달러짜리였다. 鄭仁永 사장은 이 공사의 수주를 반대했다. 鄭周永 회장은 中東 선발대가 왜 발빠르게 움직이지 않느냐고 화를 내는데, 동생은 中東공사 계약 관련자를 파면시키겠다고 엄포를 놓고 있었다. 鄭周永 회장은 鄭仁永 사장과 中東진출 반대론자들을 한꺼번에 내보냈다. 鄭회장은 李明博을 국내담당 사장, 李春林을 해외담당 사장으로 승진시켰다. 당시 李明博은 30代 중반이었다.
현대가 중동으로 진출하니 공사 규모가 달라졌다. 현대는 1975년 11월엔 1억9000만 달러짜리 사우디 해군기지 공사를 따내더니 이듬해 6월엔 9억4000만 달러짜리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수주했다.
1973년에 한국업체들은 中東에서 2400만 달러의 공사를 수주했었다. 中東진출이 조직적으로 시작된 1974년엔 8881만 달러, 1975년엔 7억5121만 달러, 1976년엔 24억2911만 달러, 1977년엔 33억8700만 달러, 1978년엔 약 80억 달러, 1979년엔 약 60억 달러, 1980년엔 약 80억 달러, 1981년엔 126억 달러로 수주액이 늘었다.
절정기인 1978년에 中東진출 한국 건설 노동자와 관련업체 종사자들은 14만2000명에 이르렀다. 베트남에 이은 두 번째의 거대한 해외진출 민족체험이었다. 朴正熙 대통령은 石油위기와 정면승부하여 中東진출로써 한국경제와 한국인의 새로운 활동공간을 창조한 것이다.

석유파동과 中東 진출, 그리고 중화학공업건설의 경제 3大 주제를 관리했던 1970년대의 네 인물이 있다. 비서실장으로서 경제정책의 총사령탑 역할을 했던 金正濂, 재무장관과 경제기획원 장관을 역임한 南悳祐, 경제제1수석비서관과 재무부장관을 지냈던 金龍煥,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 담당이었단 경제제2수석비서관 吳源哲.
당시 金실장과 南장관은 50代, 吳·金씨는 40代였다. 이 네 사람은 10여 년 전부터 왕성한 저술과 강연활동을 통해서 朴대통령의 업적과 지도력을 전파하고 있다. 1970년대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이 네 사람의 증언과 기록은 안심하고 인용할 수 있다. 대통령을 지근 거리에서 모시면서 國政의 핵심을 다루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증언에서 드러나는 朴대통령의 국가경영술은 철학·전략·전술·정책·실천이 일관되게 흐르고, 입체적으로 짜인 아름다운 건축물 같다. 朴대통령의 국가 운영에서 발견되는 일관성과 입체성의 비결은 무엇인가. 그는 골똘한 사색과 독서를 통해서 밑그림을 그리고 거기에다가 치밀한 설계와 신속한 실천, 그리고 철저한 확인으로써 속을 채워 갔다.
겉으로는 엄정하고 경직되어 보이는 그의 국가경영술은 안으로 들어가 보면 의외로 부드러웠다.
그는 역사의 원리와 인간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 여기서 우러난 전략과 실천은 단순명쾌했다. 말장난이나 현학적 관념론이 낄 틈이 없는 실용성과 합리성이 거기에 있었다.
[朴正熙 리더십 12계명]
1. 화합형 정책 결정: 朴대통령은 무엇보다도 듣는 사람이었다. 엉터리 보고라도 끝까지 들어 주었다. 좀처럼 즉석에서 반대하지 않았다. 일단 본인의 의견을 제시한 뒤 주무장관이 다시 한 번 심사숙고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대통령의 지시가 아니라 주무장관이 발안한 정책이 채택되는 방식을 취하도록 했다. 그렇게 해야 정책에 대한 주인의식이 생기고 일을 할 때 신바람이 나는 것이다. 朴대통령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남을 통해서 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2. 민주적 정책 결정: 朴대통령은 어떤 회의에서도 먼저 발언하지 않았다. 토론을 시켜 문제가 제기되고 찬반의견의 방향이 잡혀 가면 그때 결론을 도출하고 필요한 보충지시를 내렸다. 당시의 정치체제와는 다르게 경제정책의 결정과정은 민주적이었다.
3. 생산적 회의: 朴대통령은 월간경제동향보고, 수출진흥확대회의(무역진흥회의), 청와대 국무회의, 국가기본운영계획 심사분석회의, 방위산업진흥확대회의를 정례화하였다. 이들 회의는 대통령이 국정을 종합적으로 규칙적으로 파악 점검하고 살아 있는 정보를 얻는 기회였다.
4. 철저한 확인과 일관된 실천: 朴대통령은 계획수립에 20%, 실천과정의 확인에 80%의 시간을 썼다고 한다. 중앙부처 및 지방 순시 등 현장 시찰을 자주 한 것도 집행의 확인과 사람들의 사기 진작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원칙을 견지하면서도 계획의 수정이 필요할 때는 토론절차를 거쳐 신속하게 했다.
5. 국민의 각성과 참여: 朴대통령은 국민들이 自助정신을 발휘하여 자발적으로 건설에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데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는 인간과 조직의 정신력에 주목한 사람이다. 그는 민족성처럼 되었던 패배의식과의 싸움에 이긴 사람이다. 그는 경부고속도로 건설 같은 눈에 띄는 구체적 업적을 통해서 국민들의 체념과 자학을 자신감으로 교체해 갔다. 의욕을 불어넣기 위해 「새마을 노래」, 「나의 조국」도 작사 작곡했다
6. 정부는 맏형, 기업은 戰士: 朴대통령은 경제관료와 기업인이 이견을 보이면 대부분의 경우 기업인 편을 들어 주었다. 그는 정부 주도형 경제개발정책을 채택했으나 기업이 엔진이고, 경제전선의 戰士는 기업인이라고 생각했다. 대통령은 기업 엘리트를 존중해 주었고, 기업인들은 「대통령은 우리 편」이라고 생각했다.
7. 내각에 권한과 책임 위임: 청와대 비서실이 장관 위에 군림하는 것을 금지시켰고, 장관의 인사권을 존중했다.
8. 관료 엘리트 중시, 학자들은 자문역: 실천력을 중시하던 朴대통령은 집행기관장으로서는 학자를 거의 쓰지 않았다. 학자들은 자문역으로만 부렸다. 거의 유일한 예외는 서강대학교 교수 출신인 南悳祐 부총리였다. 南부총리도 실무능력의 검증을 거친 다음에 중용되었다.
9. 정치와 군대의 압력 차단: 그는 관료들이 국익과 효율성의 원칙下에서 소신대로 일할 수 있도록 군인들과 정치인들의 경제에 대한 개입을 차단하고 견제했다. 군대의 힘으로써 집권한 사람이 군대의 영향력을 차단한 예는 매우 드물 것이다.
10. 경제발전 우선주의: 朴대통령은 경제발전이 결국은 안보와 민주주의 발전으로 연결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先경제발전, 後민주화」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에 따른 비난에 대해서는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로 대응했다.
11. 시장의 한 멤버로서의 정부: 朴대통령은 정부가 시장의 규제자가 아니라 한 참여자라고 생각했다. 朴대통령 시절의 정부는 시장 지배자라기보다는 시장의 일원으로서 시장 기능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했다. 정부는 기업가·은행가·개혁가로서의 역할도 했다. 電力·철강 등 민간기업이 감당하기 어려운 부분은 정부가 公기업을 만들어서 맡아서 하되, 경영은 민간기업 방식으로 운영되도록 했다.
「官治경제가 아니라 대통령이 CEO로 뛴 주식회사 대한민국이었다.(김용환)」
12. 주요 전략 선택의 적중: 朴대통령이 채택한 수출주도형 공업화정책, 중점 투자전략, 先성장-後분배 전략, 과감한 외자유치 전략은 모두 성공했다. 朴대통령은 정책과 전술은 수시로 변경했지만 철학과 전략은 18년 동안 그대로 밀고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