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吳源哲의 역사를 바꾼 브리핑
● 비밀자료-「韓民統과 金大中과 북한」
● 李厚洛 증언-『망명정부 세워 金日成과 만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내가 지시』
● 朴대통령, 李龍澤 수사국장에게 李厚洛 내사 지시
● CIA가 金大中 살린 것이 아니다
1973년 1월 연두기자회견에서 중화학공업 건설을 선언한 朴正熙 대통령은 1월31일 오후 청와대 국산병기전시실에서 吳源哲(오원철) 경제제2수석비서관으로부터 방위산업 건설 및 공업구조 개편에 대한 보고를 들었다. ● 비밀자료-「韓民統과 金大中과 북한」
● 李厚洛 증언-『망명정부 세워 金日成과 만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내가 지시』
● 朴대통령, 李龍澤 수사국장에게 李厚洛 내사 지시
● CIA가 金大中 살린 것이 아니다
吳수석이 보고하기 전 의전실에 『브리핑에 적어도 네 시간은 걸릴 것 같다』라고 하니 의전실 쪽에서는 『각하의 결정사항이다. 그날 오후 각하 일정은 없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두 가지 중요한 안건이 동시에 상정되었다. 이날 보고로써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은 접목이 되어 큰 울타리로 생각한다면 한 가지 사업으로 통합 되는 것이다. 吳수석의 회고에 따르면 이날 브리핑은 중화학공업 건설에 국가의 命運을 걸기로 결심한 역사적인 사건이다.
朴대통령 이하 金鍾泌 국무총리, 太完善 부총리, 南悳佑 재무, 劉載興 국방, 李洛善 상공, 張禮準 건설, 崔亨變 과기처, 閔寬植 문교, 沈汶澤 국방과학연구소 소장, 청와대에서는 金正濂 비서실장 이하 관계 특별보좌관, 수석비서관이 참석했다. 좁은 방에 큰 의자는 3개만 놓고 나머지는 소형 간이의자를 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작은 방에서 국무회의격인 회의가 개최된 예는 전무후무했다.
오후 1시가 가까워 오자 각 장관들이 속속 도착했다. 장관들은 장소가 어딘지 몰라 직원들의 안내를 받아서 들어왔다.
이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진열된 兵器(병기)를 보고 모두 놀라는 눈치였다. 우선 청와대 안에 병기진열실이 있는 것을 보고, 朴대통령의 방위산업에 대한 강한 의지를 피부로 느꼈다. 그간 개발된 국산 병기의 종류에 놀라는 듯했고 신기해했다. 朴대통령도 그런 뜻으로 전시실을 만든 것이다.
오후 1시 정각에 회의가 시작되었다. 회의라고 했지만 吳수석의 브리핑이었다. 吳수석은 방위산업 및 중화학공업 건설계획에 대해선 그동안 대통령에게는 수시로 보고를 했지만,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는 朴대통령이 세부계획에까지 확신을 갖도록 해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국무총리 이하 국무위원은, 중화학공업 육성 내지는 「공업구조 개편」에 대해서 처음으로 설명을 듣는 기회였다. 이 회의에서 반대가 나오면 중화학공업은 출발도 하기 전에 백지화된다. 吳수석으로서는 死活을 거는 중대사가 된 것이다. 그래서 방위산업에 관한 보고는 시간 관계상 대폭 줄이고 본론인 「공업구조 개편론」 보고에 들어갔다(이하 吳源哲 비망록).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은 表裏一體(표리일체)입니다. 우선 화약공장 문제부터 설명하겠습니다. 화약을 생산하는 기초원료는 질산입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비료공장에 사용됩니다만 우리나라는 요소비료만 생산하고 있기 때문에 기초화공약품을 생산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번 중화학공업 계획을 추진하면서 질산을 위시한 無機(무기) 화공약품을 대량 공급할 수 있는 종합화학공장을 건설하겠습니다. 국내 화학공업 발전을 위한 기반도 구축될 것입니다. 평상시에는 비료생산에 더 많은 양이 사용되지만 비상시에는 주로 화약 제조용으로 공급되겠습니다(注: 제7비료, 즉 남해화학 이야기). 그리고 그 공장 근처에 현대적 화약공장을 건설하겠습니다. 새로운 현대식 공장입니다(여천 한국화약 제2공장).
포탄공장은 소구경에서 대구경까지 만들 수 있는 공장을 신설하겠습니다. 위치는 물론 남쪽입니다. 1972년 8월에 정부승인이 나고 9월에 착공해서 현재 건설 중에 있습니다. 포탄을 생산하는 데 화약도 필요하지만 탄피로서 놋쇠가 필요합니다. 소구경 탄에는 납(鉛·연)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 금속, 즉 銅(동)과 아연과 鉛의 제련소를 온산공업기지에 건설하게 됩니다.
두 번째가 조선소입니다. 어느 조선소나 민간용 배를 만드는 곳이라면 크기는 다르지만 군함도 건조할 수 있습니다. 이번 중화학공업 계획에서는 어떠한 대형 군함이라도 건조할 수 있는 대형 조선소를 건설하겠습니다. 필요하다면 초대형 항공모함도 건조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어 놓겠습니다. 이 계획에서 새로 건설하는 조선소는 보안상 진해 해군기지 가까운 곳에 위치하게 될 것입니다. 해군이 방어를 맡아 주게 되기 때문입니다. 가능하다면 진해만 안에 건설토록 하겠습니다(注: 진해만 입구에 위치하는 옥포조선소 및 진해만 안에 있는 삼성조선소).
전자병기는 구미공업기지에서 생산하게 됩니다. 기존 공장도 (구미)공업기지로 이전시키며, 신설되는 전자병기 공장은 (구미)공업기지 외에는 건설하지 못하도록 하겠습니다.
끝으로 기계공업 쪽입니다. 방위산업의 근간은 기계공업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기계공업은 아직 유치원 단계입니다. 이번 기회에 국제적 기계공업으로 키워 나가겠습니다. 어떠한 기계제품도 만들 수 있는 기계공업, 즉 정밀기계 제품부터 초대형 제품까지 못 만드는 것이 없는 기계공업으로 만들겠습니다. 이런 기계공장들을 한 곳에 모아서 창원에다 건설하겠습니다.
저는 일본 용역회사에 부탁해서 일본에서 제일 큰 기계공장의 규모를 알아 달라고 했습니다. 2∼3일 전에 들어온 보고는 일본의 제일 큰 기계공장은 히타치라고 합니다. 히타치는 전기제품부터 기계 일체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발전소도 만들고 있고 군함에 쓸 대형 엔진도 제작하고 있습니다. 기차와 병기도 만들고 있습니다. 못 만드는 기계가 없습니다. 소위 종합기계 메이커입니다. 지금 중화학공장을 추진하면서 우리나라는 히타치 기계공장과 똑같은 규모의 공장을 한 세트만이라도 설치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창원공업기지에 모아서 건설코자 합니다』

『각하! 창원기계공업기지가 완성되면 각종 대구경 포에서부터 탱크·장갑차가 생산되고, 항공기용 제트 엔진에서부터 군함에 쓸 대형 엔진까지도 모두 생산 가능합니다. 방위산업의 기초소재가 되는 특수강 공장도 최신 공장을 건설하겠습니다. 民需用(민수용)으로는 각종 기계뿐 아니라 산업용 기계 및 장치, 선박 또는 자동차 부품, 객차, 기관차, 선박용 초대형 엔진 등이 나오게 됩니다. 화학공장 등 각 플랜트도 생산됩니다. 과거에는 완전히 수입에 의존하던 발전소도 제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계획만 잘 짜면 병기나 민수품이 동일한 기계공장에서 생산이 가능합니다. 바로 창원에 이러한 시설을 갖추고자 합니다.
각하, 중화학공업 육성이나 방위산업 육성이나 똑같은 하나의 사업입니다. 병기란 중화학공업에서 나오는 제품입니다. 중화학공장은, 평화시에는 산업기계를 만드는 곳이고 비상시에는 병기가 나오는 곳입니다. 후진국에서는 중화학공업이 발달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외국에서 병기를 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후진국이 중화학공업을 육성할 수 없습니다. 돈과 기술이 없다는 것도 문제지만 가장 큰 애로점은 수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수요가 생겨난 것입니다. 산업기계 쪽에서도 수요가 생겨났고, 방위산업 쪽에서 수요가 나왔습니다. 이 좋은 기회를 놓치면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올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은 상부상조하는 역사적인 절호의 기회입니다.
후진국에서 중화학공업, 특히 기계공업을 육성 못 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기술부족입니다. 성능이 나쁜 기계는 국내에서건 해외에서건 사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더욱이 병기라는 것은 성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한, 쓸모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미군병기와 성능이 똑같은 병기를 생산할 수 있는 기술개발을 끝낸 단계입니다.
고도의 병기도 국산화할 수 있다는 자신이 생겼습니다. 국제수준의 병기를 만든다는 것은, 우리나라 기계공업의 수준을 국제수준까지 일시에 향상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말해 줍니다. 고쳐 말하면 방위산업을 육성함으로써 기계공업의 수준이 향상되어 산업기계의 수출까지 가능해진다는 뜻입니다. 一石二鳥입니다. 검사제도를 확립시키는 것도 똑같습니다. 병기생산을 할 때의 검사방법을 그대로 쓰면, 산업기계도 품질을 보장할 수 있게 됩니다. 기능공이나 기술자의 자질향상도 정밀병기를 만들어 봄으로써 가능하다고 보입니다.
공업의 지방분산 문제도 방위산업을 육성할 때 해결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서울이나 수도권에 있는 어느 기업체가, 만사가 불편한 시골구석에 가겠다고 나서겠습니까? 그러나 방위산업을 하고자 하는 기업에 대해,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면서 방위산업의 보안 때문에 창원으로 가라고 권하면, 그때 비로소 가능하다고 보입니다. 즉 공업의 지방분산과 방위산업의 안보문제가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중화학공업 육성은 만일 지금 안 한다 해도, 어느 때인가 꼭 해야 되는 사업입니다. 방위산업도 똑같은 입장입니다. 그렇다면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을 따로 분리해서 육성하는 것보다는 이 두 사업을 같은 울타리 안에서 생각해서, 즉 한 시스템으로 생각해서 추진하는 것이 합리적이고 경제적입니다. 우리나라의 現 실정으로 보아서는 방위산업 쪽을 前面에 내세우고 기계공업을 육성해야 출발이 용이하다고 판단됩니다. 이런 의미에선 안보문제가 초긴장에 이르고 있는 최근의 사태가 중화학공업을 육성하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됩니다.
병기생산 쪽에서만 생각해도 세계 최신기계를 설치한 현대식 새 공장에서 대포나 탱크가 쏟아져 나온다면, 국군병사도 그 성능을 믿어 주고 사기가 충천할 것입니다. 어두컴컴한 하코방 공장에서 정밀병기가 나오는 장면이 신문에 공표된다면, 병사들의 사기뿐 아니라 국민들도 실망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중화학공장의 웅장한 모습들은 국민의 사기 진작에도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국민들은 우리나라가 총 한 자루도 못 만드는 데 비해, 북한은 개인 화기는 물론 대포·탱크·잠수함까지 만들어 쓰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번 중화학공업 건설로써, 우리나라의 병기생산 능력을 북한이 감히 따라오지 못하는 수준으로 끌어올리고자 합니다. 아울러 미국을 위시한 우방국에도 우리나라의 국력을 과시하겠다는 계획입니다』

吳수석은 여기까지 설명하고 말을 끊었다. 朴대통령을 보니 만족해하는 듯했다. 朴대통령은 빙그레 웃으며 『吳 수석! 커피나 한 잔씩 들고 계속하지』라고 했다. 브리핑 시간은 벌써 두 시간을 훨씬 넘어섰다. 장관들이 더 급했던 모양이었다. 생리작용도 필요했고 담배 생각도 났을 것이며, 더구나 딱딱한 소형 의자에 앉아서 두 시간이나 브리핑을 듣자니 피로했을 것이다. 한쪽에서는 직원들이 커피를 준비하느라 비상이 걸렸다.
장관들은 방에서 나와 화장실에도 가고 담배도 피웠다. 신선한 공기를 마신 후 다시 방으로 들어오면서 어디서 구했는지 재떨이를 갖고 왔다. 커피를 마신 후 브리핑은 다시 시작되었다. 吳수석은 이미 브리핑의 클라이맥스를 넘은지라 여유가 생겼다. 브리핑의 내용은 중화학공업 6개 업종에 대한 세부육성 계획이었다. 그는 요점만 설명하였다. 겨울철이라 해는 이미 기울기 시작했다. 브리핑이 네 시간 가까이 걸린 셈이었다. 그는 브리핑 자료의 마지막 장을 들추었다. 여기에는 큰 글씨로 「감사합니다」라는 다섯 자만 써 있었다. 吳수석은 오른쪽 손에 브리핑 棒(봉)을 수직으로 든 정자세로 『이상으로 브리핑을 마치겠습니다』라고 했다. 이 순간 장내는 일시에 조용해졌다.
朴대통령 차례가 된 것이다. 朴대통령은 소파에 기댔던 몸을 일으켜 꼿꼿이 세우고는 양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吳 수석, 돈이 얼마나 들지?』
온화한 표정의 조용한 말투였다.
『내·외자 합쳐 약 100억 달러입니다』
대통령은 고개를 한 번 천천히 상하로 움직이더니, 먼 산을 바라보듯 시선을 위로 옮겼다.
『南재무! 돈을 낼 수 있소?』
대통령은 바로 뒷줄에 있던 南悳祐 재무장관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질문을 했다. 朴대통령의 이 뜻은 『돈을 마련해 보라』는 지시와 같은 내용이다.
南장관은 『액수가 커서…』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朴대통령은 엄숙하나 조용한 말투로 『내가 전쟁을 하자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 하고는 말을 끊었다가 천천히 입을 뗐다.
『일본은 국가의 운명을 걸고 전쟁을 일으켰는데도 국민들은 기꺼이 따라주었다』
朴대통령은 말을 또 끊고 잠시 후 이렇게 말했다.
『태평양전쟁 때 패전을 해서 국민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었지만』
대통령은 여기서 또 말을 끊은 후 『이 정도의 사업에 협조를 안 해주어서야 되나』라고 말했다. 대통령은 金鍾泌 국무총리를 향해 일방적으로 통고하듯이 단호하게 말했다.
『총리! 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를 구성토록 하시오. 그리고 중화학공업을 육성하는 데 필요한 외자도입 조치를 하시오』

이것으로 역사적인 회의는 끝났다. 이날 朴대통령의 결심에 의해 1972년 10월17일의 유신쿠데타의 목표와 意義(의의)는 중화학공업 건설로 설정된 셈이다. 이날 朴대통령은 유신조치로써 국력을 조직화하고 능률을 극대화하여 중화학공업을 건설한다는 것을 국가목표로 분명히 설정했다. 5·16 군사쿠데타가 근대화 혁명을 목표로 하여 성공시킴으로써 「5·16 군사혁명」이란 호칭을 받아도 손색없게 되었다면, 10·17 유신쿠데타는 중화학공업 혁명을 이룩했으나 아직 쿠데타 대접을 받고 있다.
중화학공업 건설의 참모장 역할을 했던 吳源哲씨의 주장을 소개한다.
<중화학공업 건설의 중간 목표는 100억 달러 수출, 1인당 1000달러 국민소득을 1980년대 초에 이룩함으로써 국력 면에서 북한을 압도, 북한으로부터의 위협에 대처하자는 것이었다. 10월 유신은 대통령 간선제 등 체제개혁이었고, 중화학공업은 10월 유신의 혁명과업이었다. 정치적 개혁에만 치중하여 유신 시기를 평가하면 안 된다. 10월 유신이 중화학공업 건설을 만들어 낸 정치적 기반조성이었다는 점을 간과하면 역사를 온전하게 보는 것이 아니다>
유신독재기로 불리는 1972~1979년의 시기는 중화학공업 건설기와 겹쳐 있다. 이때 건설한 조선·전자·기계·제철·자동차·석유화학·원자력 등 중화학공업이 그 뒤 한국을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밀어올렸다. 동시에 1970년대 중반에 가서부터는 北韓을 경제적으로 완전히 압도하게 되었고, 年間 군사비 지출에서도 남한이 앞서게 된다. 1980년대의 민주화도 중화학공업이 뒷받침된 경제성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1980년대 10년간 한국은 중화학공업의 가동으로 年평균 10.5%의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이는 세계 200여 개국 중 1등이었다.
지금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집약적인 핵심산업을 이렇게 세트로 가지고 있는 나라는 미국·일본·독일·한국 정도이다. 한국이 자유통일을 넘어 선진국, 그것도 영국·프랑스 수준의 선진 강대국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산업기반 건설이, 1973년 1월31일의 吳源哲 수석 보고와 朴대통령의 결심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아도 큰 과장은 아닐 듯하다.
문제는 중화학공업 건설에 치명적이 될 만한 사건이 이로부터 9개월 뒤 일어난다는 점이다. 4차 중동전쟁으로 석유값이 4개월 사이 네 배로 뛴다. 朴대통령은 이때도 중화학공업 건설의 결심을 포기하거나 근본적 수정을 하지 않았다. 그는 『지휘관은 한 번 결정하면 불리해도 밀고 나가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유리하다』는 행동원칙을 견지했다. 버티기로 들어간 朴대통령에게 찾아온 活路(활로)가 중동건설 시장 진출이었다.

朴대통령식 국정운영의 핵심은 큰 일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고, 추진력과 일을 야무지게 매듭짓는 능력의 소유자를 찾아서 適所(적소)에 배치한 뒤 전폭적으로 부하들을 밀어 주되 일의 진행과정을 정기적으로 점검 확인한 점이다. 朴대통령은 軍 지휘관 시절부터 『지시는 5%, 확인이 95%이다』는 말을 할 만큼 중간 점검을 중시했다.
<대통령은 직·간접적인 검증을 거친 후에야 행정부에 인재를 등용했다. 정치인이나 軍 출신자들을 입각시킬 경우에도 일단 공기업, 또는 관련 연구기관, 정치권 등에서 행정경험을 쌓는 과정을 눈여겨보면서 능력과 적성을 평가한 후, 즉 어느 정도 검증 절차를 거친 후 중용하곤 하였다(金龍煥 당시 재무장관 회고록 「임자, 자네가 사령관 아닌가」)>
吳源哲 제2경제수석이 기획한 중화학·방위산업 동시건설안을 실천에 옮기기로 결심한 朴대통령은 1973년 5월 金龍煥 재무차관을 대통령특별보좌관으로 임명하여 중화학공업 건설의 정책적 뒷받침을 지시했다. 金보좌관은 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의 기획단장도 겸임했다. 金龍煥씨는 金正濂 비서실장 보좌관으로 일하던 그 전해에 「8·3 사채동결 조치」의 비밀 계획을 전담하여 성공시킴으로써 대통령의 인정을 받고 있었다.
朴대통령은 8·3 조치 발표 6일 전에 金龍煥씨를 불러 『발표와 함께 임자를 재무부 차관으로 발령을 낼 테니 사채동결 정책을 반드시 성공시켜 우리 경제를 살리도록 하라』고 말했다. 당시 재무장관 南悳祐씨도 金차관에게 8·3 조치의 집행을 일임하였다. 朴대통령은 국가 중대사에 대해서는 그 분야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을 앉혀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朴대통령은 방위산업을 「민간 주도-정부 뒷받침」의 시스템으로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많은 나라에서는 무기생산을 국방예산과 직결된 공기업 형태의 국가 주도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국방부는 국가 주도형 방위산업 건설을, 청와대와 경제부처는 민간 주도를 주장했는데, 朴대통령은 민간 주도 쪽에 손을 들어 주었다.

朴대통령은 『방위산업은 중화학공업과 연계되어 있는데, 무기생산만 전담하는 공기업형으로 육성했다가 수요가 포화상태에 이르면 기업의 채산성이 악화될 수 있다. 따라서 민간기업이 무기와 일반상품을 함께 생산하도록 해놓아야 불황에 따른 피해를 줄일 수 있다. 정부는 이 업체들을 뒷받침해야 한다』는 쪽으로 입장을 정리한 것이다.
중화학공업기획단장이 된 金龍煥씨는 경제기획원 물가국장 徐錫俊씨(나중에 경제부총리, 아웅산 테러로 사망)를 부단장으로 데리고 왔다. 金龍煥 팀은 첫 작품으로서 「중화학공업육성계획」을 내놓았다.
이 보고서는 1980년대를 복지사회·고도산업사회로 만들기 위해서는 중화학공업화에 따른 공업구조의 고도화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대통령은 1973년 8월에 金龍煥 특별보좌관을 경제제1수석으로 승진시켰다. 金수석은 화공 엔지니어 출신인 吳源哲 경제제2수석(중화학공업기획단장 겸임)을 도와 중화학공업化의 자금동원과 산업기지 건설을 해냈다.
중화학공업단지의 건설은 산업기지개발공사를 설립하여 하기로 했다. 수자원개발공사 사장으로서 뛰어난 추진력이 검증된 安京模씨가 산업기지개발공사 사장으로 임명되었다. 1974년 4월1일부터 1979년 12월14일까지 창원·여천·온산·안정·구미·포항·북평·아산의 8개 산업기지가 만들어졌다.
중화학공업 건설에는 자금이 많이 들고 투자회수에도 시간이 많이 걸린다. 국내 저축률이 25% 이상 되어야 추진할 수 있는 대사업이었다. 당시 국내 저축률은 15% 정도였다. 吳수석의 비교법에 따르면 수출이 연간 18억 달러 하던 때 중화학공업 건설에 100억 달러를 넣어야 한다는 것은 지금 기준으로는 7000억 달러를 조달하는 것과 같은 자원 집중이었다. 金龍煥 경제제1수석은 중화학공업 자원확보를 위해 국민투자기금을 만들기로 했다. 1973년 12월14일에 국민투자기금법이 제정되었다.
이 기금의 대부분은 국민투자채권을 금융기관이 매입하는 방법으로 출연했다. 기금설립 초기엔 은행의 경우 예금증가액의 10~39%, 보험회사의 경우 수입보험료의 40~50%, 공공기금의 경우 여유자금의 약 90%를 이 기금에 출연했다. 시중은행의 예금까지 국민투자기금에 편입시킴으로써 1978년 무렵부터 중화학공업 중복투자 및 과잉투자의 부담이 금융부문에 전가되자 제5공화국 출범 직후 중화학투자 조정이 이뤄지게 되었다.
중화학공업 건설의 사령관인 朴대통령은 기술에 밝고 창조적 발상을 많이 하는 吳源哲 경제제2수석을 참모장으로 쓰되, 재정에 밝고 꼼꼼한 金龍煥 경제제1수석을 통해서 보완과 견제를 해가면서 그의 마지막 대도박을 밀고 나간다. 吳·金 두 수석 다 패기만만한 40代였다.

朴正熙 대통령은 현장시찰을 아주 입체적으로 했다. 육로로, 해로로, 그리고 하늘에서 국토의 변화와 개발을 확인했다. 포병 장교 시절부터 지도 읽기에 도통했고, 사물을 시각적으로 인식하고 상상하는 능력이 탁월했던 그는 현장 시찰 도중 『이제는 내가 그린 그림을 보는 것 같아』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1973년 6월1~2일의 朴대통령 영동지방 시찰길을 따라 가보자.
朴대통령은 6월1일 오전 11시 청와대 헬기장에서 강릉으로 출발했다. 대관령 상공이 짙은 안개로 뒤덮여 헬기가 뜰 수 없게 되자 평창군의 하진부리에 착륙했다. 朴대통령은 민간용 코로나 승용차를 수배하여 대관령 고개를 넘었다. 그는 대관령국민학교 앞에 차를 멈추게 하더니 마구잡이로 파헤쳐진 산줄기를 가리키면서 항공사진을 찍어 두고 山地개간을 단속하라고 지시했다. 오후 2시20분에 강릉 비치호텔에 도착한 대통령 일행은 늦은 점심을 먹었다.
다음날(6월2일) 대통령 일행은 승용차편으로 강릉을 출발하여 묵호에 도착했다. 묵호항 확장계획을 보고받은 그는 다시 북평의 쌍용시멘트 공장을 찾았다. 이 공장에서 점심을 먹던 朴대통령은 우리나라의 환경정책에 영향을 줄 중대 발언을 했다.
陳鳳鉉 쌍용사장이 『공장 주변의 주민들이 공해를 걱정한다』고 하자 朴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일본의 어느 학자는 「공해문제를 너무 걱정하면 공업발전은 불가능하다」고 말했어요. 이 정도를 가지고서는 아직 공해라고 할 것까지는 없을 것 같으니 지나친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 좋겠어요』
朴대통령은 오후에 다시 헬기를 타고 속초지역을 시찰한 뒤 경포대 헬기장에 착륙했다.
6월11일 경제기획원이 주관한 월간경제동향보고에서 관례대로 새마을운동 성공사례 발표가 있었다. 朴대통령은 충북괴산군에서 온 朴周植 새마을지도자와 함께 점심을 먹다가 『마을 사람들이 함께 일을 끝내 놓고 점심을 같이 드는 기분이 어떻더냐』고 묻기도 했다.
朴씨가 『옆마을에서 먼저 새마을운동을 벌여 달라지는 것을 보고,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우리 마을도 시작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 이야기를 듣던 朴대통령은 옆자리에 있던 金玄玉 내무장관에게 지시했다.
『金장관, 朴지도자 말을 잘 들었지요. 우수부락 우선지원의 원칙은 절대 수정하지 말고 밀고 나가야 합니다』
이즈음 전국적으로 불붙기 시작한 새마을운동에서 朴대통령이 중시한 것은 지도자 양성 교육이었다. 1971년 말에 朴대통령은 농림부 장관에게 새마을 교육의 지침을 내렸다.
『1년에 3만5000명의 지도자를 양성하겠다는 식의 조잡한 계획만으로는 효과가 없을 것이다. 농촌개발에 평생을 바치겠다는 사람들을 잘 선발하여 한 번에 20~30명이라도 좋으니 2~3주 동안 오직 정신계발에만 치중하는 교육계획을 세워 보라. 그와 같은 교육 분위기는 마치 참선하는 것과 같아야 할 것이다』
농림부는 새마을지도자 교육을 담당할 강사진의 명단을 대통령에게 올렸다. 종교인들과 저명인사들이 많았다. 강사진의 명단을 훑어보던 朴대통령은 직접 종교인과 저명인사들의 이름을 지웠다.
『새마을운동 성공사례를 발굴하여 새마을지도자로 하여금 발표하게 하고 그에 관한 토론을 하게 하는 것이 더 효과가 있을 거요』
朴대통령은 지식인의 공허한 관념론보다는 새마을운동 현장의 경험에서 배울 것이 더 많다고 판단한 것이다.
農協대학 교수로 있던 金準씨가 새마을 지도자 연수원의 원장으로 발탁되었다. 1972년 1월부터 시작된 새마을 교육은 1973년부터는 수원의 농민회관을 교육장으로 빌려 쓰게 되었다. 朴대통령은 새마을 교육을 위해서 법을 새로 만들거나 건물을 짓지 않고, 있는 건물과 인력을 이용하게 했다. 朴대통령이 지시한 성공사례 발표와 이에 대한 분임토의는 가장 선진된 실무교육이었다. 분임토의의 주제를 보면 「어떻게 하면 주민들을 새마을운동에 참여시킬 것인가」가 압도적으로 많아다.
새마을운동에 소극적인 사람들은 너무 가난한 사람들과 부자, 그리고 노년층과 나이 어린 사람들이었다. 참여도가 높은 쪽은 마을에서 계속 살아야 하는 중년층이었다. 새마을운동은 많은 여성지도자들을 배출했다. 인습의 굴레를 벗어난 여성들의 열정적인 참여가 새마을운동을 全국민운동으로 확산시켰다.
고위공무원들과 사회지도층 인사들도 새마을 교육을 받게 되었고 농촌 새마을운동이 도시·공장 새마을운동으로 번져 나갔다. 이런 확산은 朴대통령이 나서서 마을마다 경쟁을 붙이고 교육으로써 지도자群을 양성하는 데 성공했으며, 여성들의 참여를 불러냈기 때문이었다.

1973년 7월3일 오후 2시 포항종합제철 1기 설비종합준공식이 현장에서 있었다. 朴대통령이 國運을 걸고 추진하던 중화학공업 건설의 첫 물증이 눈앞에 드러난 것이다. 朴대통령은 국내외의 반대를 꺾어 가면서 종합제철공장 건설을 추진했다. 세계개발은행(IBRD)과 미국 국제개발처(USAID) 등 차관을 대야 할 외국기관들이 한국의 실력으로는 종합제철공장 건설이 어림도 없다는 평가를 하고 있었다. 朴忠勳 경제부총리도 소극적이었다.
無望해 보이던 상황을 타개한 것은 朴대통령의 집념과 의지였다. 최근 발간된 「포스코35年史」는 1969년 5월22일의 朴대통령 지시를 「자주적 103만t 사업계획수립」 지시라고 표현했다. 이날 朴대통령은 朴경제부총리, 金正濂 상공부 장관, 朴泰俊 포철 사장 등에게 『세계개발은행에만 의존하지 말고 자주적 판단下에서 계획을 추진하되 정부는 이를 강력히 지원하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규모와 경제성, 그리고 차관선에 대해서 「우리 스스로의 판단」을 해보자는 것이었다.
6월2일 朴대통령은 미온적이던 朴부총리를 경질하고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 金鶴烈씨를 부총리로 임명했다.
우리가 주체가 된 계획을 짜보자고 하니 규모도 외국기관에서 타당하다고 생각했던 租鋼 年産 60만t의 거의 두 배인 103만t으로 늘었고, 그것도 200만t으로 즉시 증설한다는 계획이 나왔다. 차관선도 歐美 루트를 포기하고 對日청구권 자금에서 조달하기로 계획하고 일본 정부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일본통인 朴泰俊 회장은 일본의 政財界 사람들을 만나 청구권 자금을 쓸 수 있도록 호소하고 철강 3社로부터는 기술제공에 협력한다는 각서를 받아내는 등 포철 건설의 主役이 되었다.
1970년 4월1일부터 외자 711억원(1억7800만 달러), 내자 493억원 합계 1204억원을 투자하여 건설한 103만t짜리 포철 준공식 치사에서 朴대통령은 1980년대를 향한 비전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이 공장은 금년부터 계속해서 260만t으로 확장 공사를 하고, 또 계속해서 1979년 말까지는 700만t 규모까지 확장할 계획을 지금 추진하고 있습니다.
또한, 정부는 1980년대에 가면 우리나라의 철강 수요가 국내만 하더라도 약 1200만t 내지 1300만t을 넘을 것이라는 추정下에 포항종합제철의 1차, 2차 확장 공사와는 별도로 이와 병행하여 年産 약 1000만t 규모의 제2종합제철공장 건설을 지금 추진 중에 있습니다.
100억 달러 수출을 할 때가 되면 총수출량에 있어서 중화학 분야의 제품이 차지하는 비율이 전체의 약 60%를 넘게 될 것입니다. 100억 달러 수출에서 약 60억 달러 이상은 중화학 분야의 제품이 나가야 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눈여겨볼 부분은 朴대통령의 예측이 수학적으로 적중했다는 점이다. 포항제철은 1978년 12월8일 제3기 증설로 年産 550만t 규모를 갖추었다. 이어서 1981년 2월18일엔 제4기 증설로 850만t 규모로 커졌다. 朴대통령이 예언했던 대로 全斗煥 정부는 1980년대에 광양제철소 건설을 추진하여 1990년대에는 年産 2000만t 생산체제를 구축하는 것이다. 朴대통령의 위대성은 불가능하게 보이는 비전을 제시하고 이를 실천시킨 점이다.

「포철 神話」의 연출자는 朴正熙, 주연배우는 朴泰俊이었다.
1969년 12월 포항종합제철 공사현장에서 朴泰俊 사장은 황량한 모래벌판에 사원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외쳤다.
『우리 조상의 혈세로 짓는 제철소입니다. 실패하면 조상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 목숨 걸고 일해야 합니다. 실패란 있을 수 없습니다. 실패하면 우리 모두 「우향우」해서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어야 합니다. 기필코 제철소를 성공시켜 나라와 조상의 은혜에 보답합시다』(이대환 지음, 현암사 발간 「박태준」에서 인용)
朴泰俊 사장은 포철을 지을 때부터 정치적 압력이나 관료적 행정처리, 그리고 인사청탁을 배제해야 한다는 결심을 했다. 그는 우선 일본에서 설비를 구매할 때 포철이 공급업자의 선정 주체가 되지 못하고 정부기관을 통해서 해야 하는 것을 시정해야겠다고 별렀다. 문제는 朴대통령에게 直訴(직소)할 수 있는 기회를 잡는 일이었다.
1970년 2월3일 대통령이 포철의 공사진척 상황을 보고받고 싶어 한다고 비서실에서 朴사장에게 연락이 왔다.
위에 인용한 책에 따르면 朴사장이 대통령 집무실에서 브리핑을 하려고 하니 대통령은 배석 비서관들에게 나가 있으라고 했다고 한다. 이윽고 朴대통령이 말했다.
『완벽주의자인 임자가 알아서 잘하고 있을 텐데, 보고는 무슨 보고. 그래 일은 순조롭게 되어 가나?』
『구매절차에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건가』
朴대통령은 설비구매 과정에서 포철이 당면한 어려움과 시정건의를 朴사장으로부터 다 듣더니 이렇게 말했다.
『지금 건의한 내용을 여기에 간략히 적어 봐』
朴사장이 메모지에 쓴 것을 읽어본 朴대통령은 메모지의 상단 좌측 모서리에 친필서명을 한 뒤 도로 내밀었다.
『내 생각에 임자에게는 이게 필요할 것 같아. 어려울 때마다 나를 만나러 오기 거북할 것 같아서 아예 서명해 주는 거야. 고생이 많을 텐데 소신대로 밀고 나가게』
포철 역사에서 「종이마패」로 불리는 이 메모지를 朴사장은 한 번도 써먹지는 않았다고 한다.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이 등뒤에 있다는 확신이 朴사장으로 하여금 포철을 정치와 행정의 견제나 간여로부터 지켜갈 수 있게 했을 것이다. 金正濂 비서실장에 따르면 朴대통령은 공기업 사장 중 朴泰俊 사장만 청와대에서 獨對했다고 한다.
朴대통령은 어떤 면에선 기업인들의 조련사이기도 했다. 鄭周永 같은 야성의 인물도 朴대통령 앞에서는 유순해졌다. 대통령의 私心 없는 독려가 기업인들을 마음에서부터 움직였다.
鄭周永 현대그룹 회장에게 조선업을 권유했던 이는 金鶴烈 당시 경제부총리였다. 鄭회장은 조선소 건설을 위한 차관을 도입하기 위하여 일본·미국을 돌아다녔다. 鄭회장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정신 나간 사람」 대접을 받았다고 했다. 鄭회장은 金부총리를 찾아가서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된다. 기권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金부총리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朴正熙 대통령은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鄭周永 회장이 나서서 하겠다고 했으니 조선소가 꼭 되는 줄 알고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金부총리는 『이제 와서 못 하겠다는 보고를 올릴 수 없으니 함께 들어가서 직접 대통령한테 말하라』고 했다. 며칠 후 金부총리, 鄭회장, 朴대통령이 한 자리에 앉았다. 鄭회장이 말했다.
『그동안 여기저기 쫓아다녀 봤지만 일본도 미국도 아예 상대를 안 해줍니다. 「아직 초보적인 기술단계에 있는 너희가 무슨 조선이며 몇십만t이냐」는 식이니 도저히 안 되겠습니다』
朴대통령이 역정을 냈다.
『金부총리, 앞으로는 鄭회장이 어떤 사업을 한다고 해도 전부 거절하시오. 정부가 상대도 하지 말란 말이오』
그러고는 입을 꽉 다물고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朴대통령이 담배 한 대를 피워 물고 鄭회장한테도 권했다. 鄭회장은 원래 담배를 피우지 않았는데 거절할 입장이 아니라 대통령이 불을 붙여 준 담배를 뻐끔뻐끔 피울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경제부총리가 적극 지원하겠다는데, 그래, 그거 하나 못 하겠다고 鄭회장이 여기서 체념하고 포기해요? 처음에 하겠다고 할 때는 일이 쉽다고 생각했어요? 어려운 것 알았을 거 아뇨? 그러면서도 나선 거면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떻게 하든 해내야지. 그저 한 번 해보고는 안 되니까 못 하겠다, 그러는 게 있을 수 있소?』
鄭회장은 할 말이 없었다.
『이건 꼭 해야만 하오. 鄭회장! 일본·미국으로 다녔다니, 그럼 이번에는 구라파로 나가 찾아봐요. 무슨 일이 있어도 이건 꼭 해야 하는 일이니까 빨리 구라파로 뛰어가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다시 한 번 열심히 뛰어보겠습니다』
(「이 땅에 태어나서-나의 살아온 이야기」 中에서/솔)

중앙정보부(이하 中情) 공작선 「龍金號(용금호)」는 全長 52m에 536t의 1000마력짜리 배였다. 1944년 미국에서 제작되어 제2차 세계대전 때는 戰時물자 수송선으로 사용되었다. 中情은 이 배를 1972년 5월22일 부산지방해운항만청에 화물선으로 등록하였다. 소유자는 「정운길」로 되어 있다. 정운길은 용금호를 관리하던 두 中情 요원 중 한 사람으로서 선원들의 증언에 의하면 소령이었다고 한다.
1973년 7월24일 용금호는 부산 4부두에서 출항했다. 中情 요원이 출항 직전에 선장·항해사·기관장·통신장·操機長을 불러 모았다. 갑판장 이점조씨에 따르면 中情 요원은 『우리가 金大中씨를 납치하러 간다』고 말해 주더란 것이다. 中情은 용금호가 출항하기 직전에 선원 두 명을 교체했다. 새로 들어온 사람은 선원이 아니라 특수요원이었다. 용금호는 7월26일 시고쿠(四國)의 북쪽 다카마쓰항에 도착했다. 여기서 화물을 부린 배는 7월29일 오사카 외항에 도착했다.
용금호의 갑판원 林益春씨에 따르면 中情 요원이 그에게 『혹시 당수나 쿵푸를 한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金大中씨를 납치하기 위해 용금호에서 내린 사람은 두 요원과 선장·조기장·기관부원 등 다섯 명이라고 한다.
8월8일 오전 金大中씨는 도쿄 팔레스 호텔에 묵고 있던 통일당 당수 梁一東과 金敬仁 의원을 2212호실로 찾아가서 점심을 함께 했다. 낮 12시50분쯤 金大中씨가 방에서 나와 엘리베이터 쪽으로 갈 때 옆방에서 뛰쳐나온 中情 요원들이 그를 끌고 2210호실로 들어갔다. 괴한들은 金씨를 침대에 눕히고 눈과 입을 막은 뒤 마취약을 묻힌 손수건을 金씨의 코에 들이댔다. 金씨를 전송하기 위해 나왔던 金敬仁 의원은 다른 괴한 두 명에 의해 梁의원이 있던 방으로 끌려 들어갔다. 나중에 일본 경찰은 이 방에서 駐日 한국대사관 소속 1등 서기관 金東雲씨의 지문을 채취했다.
괴한 두 명은 기절한 金大中씨를 부축하여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서 기다리고 있던 요코하마 주재 한국총영상관의 副영사 차에 실었다. 차는 오사카로 달리기 시작했다. 납치자들은 도중에 中情이 운영하던 安家로 金大中씨를 데리고 들어가 손과 발을 묶고 얼굴은 코만 남기고 테이프로 감쌌다.
다음날 저녁 무렵 납치자들은 金씨를 모터보트에 태워 오사카 외항에 있던 용금호로 데리고 왔다. 납치범들은 金씨를 갑판 밑 닻줄을 넣어 두는 좁은 공간에 구겨 넣었다.
용금호가 오사카항을 출항하기 전 일본 관리들이 올라와 선원수첩을 확인하고 내려갔다.
한여름이라 맨발로 갑판 위를 걸을 수없을 정도의 무더위였으니 金씨의 고통은 대단했다. 金大中씨에게 식사를 제공했는데 그때는 손목을 묶은 줄도 풀었다. 金씨는 식사를 갖고 온 선원에게 『지금 이 배가 어디로 가고 있나. 내가 남한테 잘못한 일이 없는데』라고 말했다. 金씨는 식사는 하지 않고 기도를 계속했다.
용금호가 현해탄을 건너 부산항으로 접근할 때 中情 요원들은 金씨를 기관실로 옮겼다. 용금호의 선원들은 金大中씨의 몸에 돌을 매달아 수장시키려고 했다는 설을 부정하고 있다. 구출용 비행기도 오지 않았고 조명탄도 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배에 오를 때 金씨의 얼굴은 얻어맞은 듯 부어 있었으나 배에 있을 때 구타는 없었다고 한다.
용금호가 8월11일 밤 부산항에 도착할 때까지 선원들은 걱정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들은 中情 요원들이 만약 金大中씨를 바다에 빠뜨려 죽인다면 증거인멸을 위해 자신들도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선원들은 「저 양반이 살아서 부산에 가야 우리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신경이 매우 날카로워졌다는 것이다.

1973년 8월8일 朴대통령은 오전에 鄭韶永 신임 농수산부 장관에게 임명장을 주었다. 金鍾泌 총리, 金正濂 실장 등이 배석했다. 朴대통령이 점심 식사를 마치고 집무실에 들어가자마자 金正濂 비서실장이 황급히 들어왔다. 외국 통신의 영문기사를 들고 온 그는 『金大中씨가 도쿄에서 납치되었답니다』라고 보고했다. 바로 전에 金聖鎭 공보수석이 그 외신자료를 가지고 金실장 방에 뛰어 들어왔던 것이다.
『정말이야! 무슨 일일까?』
朴대통령의 반응도 놀라움이었다고 한다. 金실장이 사무실에 돌아와 한 30분 정도 있으니 朴대통령이 인터폰으로 『무슨 새로운 소식이 있느냐』고 물었다. 金실장은 외국 통신의 속보를 보고했다. 朴대통령은 집무실로 오라고 했다. 朴대통령은 金실장에게 『만약 金大中 납치가 사실이라면 네 가지가 상정된다』고 말했다.
『첫째, 중앙정보부의 공작일지 모른다. 둘째, 일본 우익의 소행일 가능성이 있다. 셋째, 在日거류민단의 과잉충성이 일으킨 사건일지도 모른다. 넷째, 金大中씨의 자작극일 가능성이다. 실장은 즉시 정보부장과 경호실장, 그리고 在日거류민단을 관리하는 부서를 체크하여 보고하라』
대통령 집무실을 물러난 金실장은 李厚洛 정보부장, 朴鐘圭 경호실장, 그리고 유관부서장들에게 전화를 걸어 관련 여부를 물었다. 朴실장은 일본의 우익단체 사람들과 교분이 두터웠다. 朴대통령은 그런 朴실장이 몰래 우익인사들을 시켜 金大中씨를 혼내 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던 것이다. 金실장은 대통령에게 『우리 쪽에서는 아무도 관계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라고 보고했다. 朴대통령은 『그렇다면 金大中씨의 하부조직이 자작극을 벌이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고 했다.
朴대통령은 이날 신관회의실에서 週例안보회의를 소집했다. 李厚洛 정보부장도 참석했다.
다음날 朴대통령은 신임 유엔군 사령관 스틸웰 대장을 접견하고 오후엔 정부 여당 연석회의를 주재했다. 8월10일에는 국무회의를 주재했다. 朴대통령은 8월11일엔 오전 11시15분부터 55분까지 李厚洛정보부장으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이 자리에서 李부장이, 「지금 정보부 공작선이 金大中씨를 납치하여 데리고 오는 중」이란 보고를 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으나 그 뒤의 朴대통령 행동으로 미뤄보아 그런 보고가 있었던 같지 않다.
이날은 토요일이었는데 朴대통령은 오후 2시30분부터 밤 10시까지 뉴코리아 골프장에서 金振晩 공화당 의원, 조선공사사장 南宮鍊씨와 골프를 함께 친 뒤 식사를 했다. 다음날에도 朴대통령은 오전 11시25분부터 밤 10시까지 뉴 코리아 골프장에서 金振晩·南宮鍊씨와 함께 골프를 쳤다.

8월13일 월요일 오후 3시8분~4시37분, 이때 李厚洛 정보부장이 집무실에서 朴대통령에게 金大中 납치를 실토한 것으로 보인다. 李부장은 『이미 金씨가 한국 땅에 와 있고 오늘 밤에 귀가시킬 작정이다』라고 보고했을 것이다. 金正濂 비서실장에 따르면 朴대통령은 이날 오후 자신을 부르더니 『金大中이가 서울에 와 있대. 놀랍고 엄청난 일이야. 조금이라고 위해가 가해져서는 안 되는데…』라고 말하더란 것이다.
한편 金鍾泌 국무총리는 이날 밤 鄭韶永 농수산부 장관과 함께 전국의 목장실태를 살펴보고 광주에 들렀다가 金大中씨가 괴한들에게 이끌려 집앞까지 와서 풀려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朴대통령은 다음날 오전 9시30분부터 20분간 집무실에서 金大中 납치 관련 대책회의를 가졌다. 申稙秀 법무장관, 尹胄榮 문공장관, 鄭相千 내부차관, 尹錫憲 외무차관, 李厚洛 정보부장, 金正濂 비서실장이 참석했다. 이 회의는 일단 金大中 납치 수사본부를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이날 오후 4시 金鍾泌 총리가 朴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집무실에 들어가니 대통령은 화가 잔뜩 나 있었다.
『임잔 몰랐어?』
『아, 제가 어떻게 압니까?』
『이후락, 이자가 그를 옆에다 갖다 놓고 나서야 나한테 이야기를 하는 거야』
다음날 朴대통령은 오전 10시45분부터 정오까지 申稙秀 법무장관과 李厚洛 정보부장을 불러 金大中 납치 사건 대책을 논의했다. 朴대통령은 형식적으로 특별수사본부를 설치하고는, 일본에서의 수사 경과를 지켜보기로 했다.
朴대통령은 한편으로 정보부의 李龍澤 국장을 불러 진상조사 특명을 내렸다.
그전에 李厚洛 정보부장은 金大中씨와 친숙한 李龍澤 수사국장에게 金씨를 데려오라는 임무를 준 적이 있었다.
『李厚洛 부장은 나에게 「직접 가서 설득해 동반 귀국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러면서 李부장은, 金大中씨의 일체의 언동에 대해 불문에 부치고 적절한 시기에 정치를 재개할 수 있도록 보장해 주겠다는 조건도 제시했습니다. 그래서 갈 준비를 했습니다』
李국장이 李姬鎬 여사에게 전화를 했더니 李여사는 『李국장이 가서 설득해도 그분은 귀국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마침 그 무렵 미국에 살고 있던 李여사의 친척이 한국에 왔다. 이 친척을 통해 李국장의 편지와 함께 李여사도 편지를 써서 DJ에게 보냈다. 金大中씨로부터 『나도 이제부터 일절 정치활동은 안 하겠다. 가능하면 미국에서 공부를 하겠다』는 답장이 왔다고 한다.
그러자 李여사가 먼저 李국장에게 같이 가자고 제의해 왔다. 李여사는 『내 말은 듣지 않는데, 李국장이 직접 가서 해외 언동에 대해서 불문에 부친다는 보장을 해주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李국장은 李여사의 제의를 李부장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李여사에 대한 여권 발급이 자꾸 늦어졌다. 李국장은 『당시 朴대통령이 國法을 어긴 사람을 그냥 두면 안 된다고 반대해 李여사가 가지 못하게 된 것』으로 추측했다.
李龍澤씨의 증언.
『金大中씨가 나타난 다음날일 거예요. 청와대에서 극비로 즉시 들어오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朴대통령은 처음에 「자네가 했나」라고 바로 물었습니다. 아니라고 했더니, 「동백림 사건 때는 어떻게 잡아왔느냐」고 재차 물었습니다. 그때는 국내부서에서 수사를 다해서 해외담당 차장에게 자료를 넘겼다고 말했습니다. 朴대통령은 「KT(당시 대통령은 金大中씨를 그렇게 불렀다) 건에 대해서 누가 했는지 자네가 한번 조사해 봐」라고 지시하면서 「누구한테도 보고하지 말고 은밀히 하라. 자네가 조사하고 있는 것을 알려고 하거나 압력을 넣는 사람이 있으면 즉각 보고하라」고 말했습니다. 朴대통령은 그런 면에서는 아주 섬세해요. 저는 그 순간, 朴대통령이 DJ 납치에 개입하지 않았음을 알았습니다』

李국장은 아무리 그래도 李厚洛 부장에게는 보고를 해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여 궁정동의 부장 사무실로 찾아갔다. 李부장은 이미 李국장이 대통령을 만나고 나온 사실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 순간 李부장은 말을 더 더듬었고 커피를 연거푸 마시면서 담배 피우는 손을 떨었다.
李국장은 청와대에 다녀온 것과 대통령으로부터 조사 지시를 받았다는 사실을 李부장에게 말해 주었다.
李국장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런데 왜 데려왔습니까』
李부장이 설명한 요지는 이러했다.
<金大中씨가 한민통을 만들어 그 의장으로 취임하면 망명정부 수반 행세를 할 것이란 정보가 들어왔다. 망명정부 수반 자격으로서 북한을 방문하여 金日成과 만나면 연방제 통일에 합의할 것이고 북한측은 한국 정부를 괴뢰시하게 될 것이다. 진행 중인 남북대화도 중단될 것이다.
金大中을 평양으로 데리고 가려는 북한의 공작이 진행 중이고 金大中씨도 주변 인물들에게 의견을 묻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그래서 한민통 결성 대회를 하기 전에, 북한이 손을 쓰기 전에 그를 잡아온 것이다>
이런 설명을 한 뒤 李厚洛 부장은 『장일훈 치안국장을 잘 알지요. 그쪽에서 냄새를 맡은 것 같으니 李국장이 손을 써 신문에 나지 않도록 해줘요』라고 부탁했다. 물러난 李국장은 장일훈 치안국장을 만나 물어보았다. 張국장은 부산 4부두를 관할하는 경찰부서에서 정보가 올라왔다고 했다. 경찰이 오래 전부터 정보부의 공작선으로 파악하고 있었던 용금호가 며칠 전 밤에 부산 4부두에 닿았다는 것이다. 선원들이 술에 잔뜩 취한 것 같은 사람을 부축하여 내렸다. 선원들은 그 사람의 머리를 웃옷으로 덮어씌웠다. 초소 경찰관이 『저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용금호 선원인데, 술에 취했다』
용금호 선원들은 그 사람을 데리고 앰뷸런스에 탔다. 이를 본 경찰관이 앰뷸런스의 차 번호를 적어두었다가 상부에 보고한 것이다. 李龍澤 국장이 그 번호를 받아 정보부로 돌아와 운송부서에 확인하니 정보부가 운영하는 앰뷸런스임이 밝혀졌다. 李국장은 바로 앰뷸런스의 운전사를 불렀다.
『부산 4부두에서 태운 술취한 사람이 누구였지?』
『KT였습니다』
『태우고 어디로 갔나』
『충청도에 있는 우리 安家로 갔습니다』
『누가 한 것 같아』
『공작단이지 누구이겠습니까』
『밖으로 절대로 이야기하지 말게』
李龍澤 국장은 H 해외공작국장을 만났다. H국장은 金大中 납치에 대해서 자랑스럽게 털어놓았다. 그 요지는 이러했다.
〈KT가 망명정부의 수반으로 취임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서둘러 데려왔다. 그를 죽이라는 명령은 받은 적이 없다. 비행기가 왔기 때문에 그를 살려 주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일본 해상보안청 비행기가 순찰 중 상공을 지나간 정도이다.
金大中씨를 기관실에 묶어 놓았는데 갑판으로 데리고 올라온 것은 바깥 공기를 마시고 햇볕을 쪼이게 하려는 목적이었지 죽이려 한 것은 아니었다. 칼도 가지고 가지 않았다. 끈을 가지고 간 것은 그를 마취시켜 묶어서 내리려고 했던 것인데 호텔이 너무 높고 대낮이어서 엘리베이터로 내려온 것이다〉
李국장은 朴대통령을 찾아가 조사결과를 보고했다. 朴대통령은 낙담한 모습이었다.
『李국장, 옛날 말에 조선 망하고 大國 망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 자가 나를 완전히 망칠 작정을 한 것이구먼』
『朴대통령은 「이걸 어떻게 처리하지」라면서 걱정했어요. 진상을 그대로 밝히면 일본에서 원상회복과 함께 국가배상을 요구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각하, 일본을 잘 아는 金鍾泌 총리와 의논해 보면 어떻겠습니까」고 건의했습니다. JP는 그해 11월 진사사절로 일본에 가서 사과하고 돌아와 정치적 타결을 이뤄 냈습니다』

1973년 8월28일 오후 6시 평양방송은 남북조절위원회 평양 측 金英柱 공동위원장 명의로 된 성명서를 발표했다. 金英柱는 이 성명에서 중앙정보부가 金大中 납치를 주도했고, 李厚洛 정보부장이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애국적 민주인사를 체포·탄압하고 있으므로 남북회담을 계속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북한 측 성명서를 분석해 보면 그들이 남북회담을 일방적으로 중단시킨 것은, 朴대통령의 그해 6·23 선언 때문임을 알 수 있다.
朴대통령의 6·23 선언은 한국이 북한과 함께 UN에 동시가입하고, 공산권 국가에 대해서도 문호를 개방할 용의가 있음을 선언한 것이다. 그 핵심은 아래 4개항이었다.
〈4. 우리는 긴장 완화와 국제 협조에 도움이 된다면 북한이 우리와 같이 국제기구에 참여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5. 국제연합의 다수 회원국의 뜻이려면 통일에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전제下에 우리는 북한과 함께 국제연합에 가입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우리는 국제연합 가입 전이라도 대한민국 대표가 참석하는 국련 총회에서의 「한국 문제」 토의에 북한 측이 같이 초청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6. 대한민국은 호예 평등의 원칙下에 모든 국가에게 문호를 개방할 것이며, 우리와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는 국가들도 우리에게 문호를 개방할 것을 촉진한다.
7. 대한민국의 대외 정책은 평화 선린에 그 기본을 두고 있으며, 우방들과의 기존 유대 관계는 이를 더욱 공고히 해 나갈 것임을 再천명한다.
나는 이상에서 밝힌 정책 중 對북한 관계 사항은 통일이 성취될 때까지 과도적 기간 중의 잠정 조치로서, 이는 결코 우리가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여 둡니다〉
다음날 李厚洛 부장은 내외신 기자회견을 갖고 평양 측의 대화중단 선언을 비판했다.
『북한 측의 일방적인 대화중단 선언은 한반도의 진정한 평화와 통일을 지향하는 가장 합리적이며 현실적인 정책인 6·23선언에 대한 국내외의 높은 평가와 지지에 당황한 나머지 대화를 깸으로써 평화통일 노력 자체를 파탄시키려는 것이다』
북한 측은 남북적십자회담도 중단시켰다. 이로써 만 2년간의 남북대화 시기는 문을 닫게 되었다(의례적인 실무자급의 남북접촉은 계속되었다).
李厚洛의 중앙정보부가 주도권을 잡고 진행한 이 남북회담을 거치면서 朴正熙 대통령과 金日成의 권력은 강화되었다. 金正濂 당시 비서실장이 정확히 토로한 대로 李厚洛은 7·4 공동성명 이후의 드라마틱한 상황전개를 기회로 삼아 朴正熙 대통령에게 유신조치를 건의했고, 朴대통령은 자신의 평소 소신에 부합하는 李부장의 발상을 받아들였다.
朴대통령은 『이후락은 내 생각을 늘 한 발 앞서 읽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5·16 군사혁명이 朴正熙 사령관-金鍾泌 작전참모 체제로 이뤄졌던 데 비해서 10·17 유신쿠데타는 朴正熙 사령관-李厚洛 작전참모 체제로 성사되었다. 金鍾泌·李厚洛은 각각의 쿠데타 성공 이후 2인자로 떠올랐다가 권력투쟁에 휘말려 밀려나게 되었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이 있다.

李厚洛 당시 정보부장은 1987년 10월호 「신동아」 인터뷰에서 金大中 납치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구체적으로 金大中씨의 어떤 활동이 그토록 유해하다고 생각했습니까.
『내가 1972년 5월24일 金日成을 만났을 때 金日成이 「남쪽에는 통일방식을 달리하는 민주인사들도 많데요」 이런 말을 합디다. 그때 내가 상당히 쇼크를 받았어요. 「역시 통일문제에 대한 의견이 이러쿵저러쿵 나오는 것은 우리의 약점이구나」 하는 것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그런데 金大中씨가 미국에서 소위 「한국민주화촉진국민회의」를 만들어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연설도 하고, 그러다 보니까 모이는 사람들이 다 민주인사는 아니고 정말 위험스러운 인사들도 있었어요….
그중의 어떤 사람들은 국민회의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망명정부를 세우자 하는 이야기를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만에 하나라도 그런 일 없기를 바라지만 일부인사가 주장하는 대로 망명정부가 이루어졌을 때는 이 나라 꼴이 어떻게 되겠느냐 하는 이러한 기우도 나에게는 사실상 없지 않았어요. 그러한 점을 고려해서 결국은 윤리적으로 가슴 아픈 일이지만 이 사람을 본국으로 데려와야 되겠다 하는 그러한 생각이 참 많았습니다』
―그 무렵 金大中씨가 공화국 연방제를 주장한 것도 납치 사건의 한 요인이 됐습니까.
『그해 6월23일 金日成이가, 체코 총서기인가 뭔가가 평양에 왔을 때 고려연방제를 말한 것은 자기 나름대로의 철학에 의한 통일론인 만큼 그것을 시비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金大中씨가) 하필이면 이름을 왜 공화국 연방제를 내걸어요. 나는 진짜 기절할 정도로 쇼크를 받았어요. 지금도 그 말 들으면 온몸에 소름이 끼쳐요. 어떻게 할 수 없나 봐요』〉
북한정권의 지령으로 만들어진 韓民統의 초대 의장으로 추대된 金大中씨는 취임하기 직전에 강제귀국당했으나, 1981년 우리 대법원은 金大中씨의 한민통 관련 역할을 국가보안법상의 「反國家단체 구성 및 수괴」로 확정했다.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약칭 韓民統-편집자 注) 일본본부는 정부를 참칭하고 대한민국을 변란할 목적으로 불법조직된 反國家단체인 북괴 및 反國家단체인 在日조선인 총연합회(편집자 注 - 약칭 조총련)의 지령에 의거 구성되고 그 자금 지원을 받아 그 목적수행을 위하여 활동하는 反國家단체라 함이 本院의 견해로 하는 바이오(下略)」라고 했다.
月刊朝鮮은 1998년에 「金大中의 韓民統 조직 및 내란 음모 사건」 수사·재판기록을 구할 수 있었다. 金泳三 정부 때 이뤄졌던 12·12 사건 및 5·18 사건 재판 때의 참고 자료로서 金大中 사건 기록이 법정에 제출되었고 이를 계기로 하여 이 미공개 자료가 우리 손에 넘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 가운데 주목할 만한 자료가 駐日 한국대사관에서 1980년 여름에 계엄사 합동수사본부로 보낸, 영사증명서가 붙은 「조총련·한민통 일본본부·金大中 관계」에 대한 심층 보고서이다.
1980년 7월3일에 합동수사본부가 駐日 한국대사관에 한민통 일본본부, 同 기관지 民族時報, 同 중요구성 간부들의 성격과 활동상황에 대하여 조회를 했고 그 回報로서 온 것이 이 문서였다. 영사증명서가 붙은 것은 법정에 제출될 때 이 문서의 공신력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다.

이 駐日 대사관의 보고서가 중요한 것은 이 자료가 법정에서 증거로 채택되어 金大中 피고인의 유죄를 확정짓는 핵심적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 보고서는, 金大中씨와 함께 한민통 일본본부(이하 韓民統으로 약칭)를 만든 郭東儀(곽동의)·裵東湖(배동호)·金載華(김재화) 등 핵심 요원들이, 본인들은 民團 비판 세력으로 위장하고 있으나 실은 조총련의 조종을 받는 북한 간첩·親北인사들이라고 단정하는 한편 그들의 조직적·사상적 뿌리를 세밀하게 소개하고 있다.
駐日 한국대사관의 보고서는 金大中씨도 배동호·곽동의·김재화 등이 조총련의 조종을 받는 인사들이란 사실을 알았을 것이라고 기록했다.
「특히 1973년 3월경 당시 민단 가나가와 현본부 의장 박성준이 金大中에게 배동호, 곽동의는 조총련과 합작하여 베트콩파와 한 패거리가 되어 反韓 활동을 하면서 民團을 망치고 있다는 경고를 한 바 있으므로 同 배동호·곽동의를 비롯한 베트콩파들은 북괴 또는 조총련의 사주를 받아 민단을 와해하고 反국가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보며(下略)」
이 보고서는 韓民統의 성격을 이렇게 요약했다.
「한민통은 표면상으로는 反민단 투쟁 단체인 양 위장하고 있으나 金大中의 구상에 의하여 결성되어 조총련의 배후 조종을 받고 있음. 한민통을 주도하는 곽동의는 북괴에서 간첩교육을 받은 간첩이고, 배동호 역시 곽동의와 사상적으로 밀착한 용공분자로서 조총련과 연대투쟁 체제를 구축하고 북괴의 목적사항 실행을 위해 각종 행사를 공동 개최하는 등 대한민국 전복과 적화통일을 위하여 공동투쟁을 전개하고 있음」
이 보고서는 조총련이 韓民統에 대해서 지원한 자금의 내역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전하고 있다.
「조총련은 한민통에 反韓 데모 동원, 反韓 집회 개최, 북괴 및 조총련 선전 활동 등 비용으로 활동 高潮期(고조기)인 1973년 8월~1975년 12월은 매월 1000만 엔, 최성황기인 1976년 1월~1977년 12월은 매월 1000만 엔, 퇴조기인 1978년 1월~1979년 7월은 매월 500만~1000만 엔, 再고조기인 1979년 8월~1980년 2월은 매월 1000만 엔 등을 지원하여 왔음」
「1971년 3월25일 곽동의는 조총련 중앙위원회 부의장 김병식으로부터 민단 와해 공작 및 對南공작 사업 자금 5000만 엔을 받았다는 확실한 첩보가 있음」
「金大中에 대하여는 1972년 10월~1973년 8월 베트콩파인 김종충이 金大中의 한민통 조직 등 활동비조로 10여 차례에 걸쳐서 약 1000만 엔, 배동호가 金大中의 滯日 호텔비 및 한민통 조직 자금 보조비 명목으로 5차례에 걸쳐 500만 엔, 渡美 여비 1회 2000달러, 정재준 등 베트콩파 사업가들이 金大中의 체류비·활동비·여비 등 명목으로 4차에 걸쳐 약 2000만 엔 등을 제공하여 金大中은 同 자금으로 일본 한민통 및 미국 한민통 조직 자금으로 사용하였다고 하며, 그중 김종충 및 배동호가 金大中에게 제공한 자금은 同人 등이 특별한 사업이나 수입원이 없는 자들인 것으로 보아 조총련에서 지원한 것이 확실시되고 있음」
이 보고서의 끝에는 駐日 한국대사관의 일등 서기관 鄭樂衆(정낙중·영사) 명의로 「위의 사실을 증명함」이라는 영사증명이 붙어 있다.
對共수사관 출신인 鄭樂衆씨는 『내가 부하 직원들을 시켜서 함께 만든 보고서이다』고 말하고 『지금도 그 보고서의 정확성을 믿는다』고 했다.
上記 보고서는 駐日 대사관의 정보담당관들이 다년간 韓民統을 관찰하면서 축적한 정보를 정리한 것이지 갑자기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는 느낌을 준다. 조총련의 자금이 한민통으로 지원된 부분에 대한 정보는 구체적인데 한민통 내부에 정보부의 정보망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1973년 8월16일 오후 6시30분쯤 청와대 식당에서 朴대통령은 비서진들과 막걸리 파티를 열었다. 경호 문제가 화제로 오르자, 대통령이 말했다.
『沿道(연도) 경비는 사전에 행차를 알리는 것이므로 적절치 못해. 그리고 자동차로 지방에 다녀올 때도 서울시장이 뻔질나게 나오는데 그 시간에 자기 일이나 하지. 그런 필요 없는 짓 하지 말라고 일러 줘요』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쯤 대통령은 사투리 이야기를 꺼냈다.
『軍 생활을 하면서 各道에서 모인 출신 장교들 때문에 평안도·함경도·경상도 사투리를 섞어서 썼던 적이 있어. 지금도 그 버릇이 좀 남아 있을 거야. 윤태일 서울시장과 이주일 감사원장이 어떻게 말하는 줄 아나? 「앙이 먹겠다」, 「앙이 술 마시겠다」고 얘기해. 일본도 가고시마 사투리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어』
대통령이 尹시장과 李원장의 말투를 그대로 흉내내어 비서관들도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대통령도 소리내어 웃었다.
1973년 9월7일. 이 날짜 조선일보는 「당국에 바라는 우리의 충정, 결단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라는 제목의 사설을 싣고 金大中 납치사건의 진상을 밝힐 것을 정부에 요구했다. 사설의 필자는 鮮于煇 (선우휘) 주필이었다.
이날 朴대통령은 李厚洛 정보부장이 보고차 들르자 이렇게 말했다.
『어이 李부장, 정보부는 사람 잡아 가두는 데라는 말이 있는데 鮮于주필도 잡아넣을 거야?』
대통령의 말투는 잡아넣어서는 안 된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 일본 마이니치 신문에 이 사설의 全文이 실렸다. 鮮于주필은 수원에 있는 친지 집으로 피신했다.
며칠 뒤 鮮于煇의 동생 鮮于鍊(선우련) 공보비서관은 청와대 구내 이발소에서 이발을 하고 나오는 대통령을 우연히 만났다.
『요즘 형님은 잘 계신가?』
『형님은 사설 때문에 정보부가 잡으려고 해서 피신 중입니다. 닭고기를 좋아하는 형님이 피신 중에 닭고기를 많이 먹어 살이 무척 쪘습니다』
『무슨 소리야? 내가 잡아넣지 말라고 했는데. 내가 정보부장에게 전화할 테니 형님에게 오늘 저녁 마음 놓고 나오시도록 전해요』
대통령의 그 말이 있고 난 뒤 鮮于煇 주필은 다시 모습을 나타내었고, 일주일이 더 지나서는 鮮于鍊과 함께 대통령이 초대한 위로 술자리에 함께 참석했다. 한참 동안 술을 마시다가 대통령이 몹시 불쾌하다는 듯 불쑥 이런 말을 꺼냈다.
『그놈 말이야. 머리가 좋고 빨리 돌아간다고 내가 중용했더니만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해 가지고 나를 국제적으로 망신당하도록 하고 있어』
『그래도 충성하느라고 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게 바로 과잉 충성이오』

李厚洛 前 정보부장은 『朴대통령이 金大中씨를 납치하라고 지시한 적은 없다』고 말해 왔다. 그는 『내가 朴대통령에게 납치 사실을 알린 것은 우리 배가 金大中씨를 데리고 오사카항을 떠난 이후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1980년 봄에 李厚洛씨가 울산 同鄕 친구이자 金大中씨와도 친했던 최영근(국회의원 역임)씨를 통해서 金씨에게 『당신 납치는 朴대통령이 지시하여 이뤄진 것이다』는 취지의 말을 전했다는 說도 있다. 기자가 1985년에 崔씨를 만나 물었더니 그는 자신이 그런 말을 들었다고 확인해 주었다. 그의 증언을 소개한다.
〈나는 李厚洛·金大中씨 두 사람과 각각 별도로 오랜 친교가 있다. 최고회의 공보실장 시절의 李厚洛씨에게 金씨를 처음 소개해 준 것도 나다. 10·26 뒤 나는 李厚洛씨를 만났다. 지금은 솔직하게 말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어 물어 보았다. 그의 해명은 대강 이랬다.
『金大中씨가 해외에서 朴대통령에 대한 비난을 개시한 지 얼마 안 된 어느 날 사석에서 朴대통령은 불쾌한 어조로 金씨를 없애라는 뜻의 욕설을 했다. 나는 농담으로 넘겨버렸다. 그 며칠 뒤 朴대통령은 청와대로 날 부르더니 정색을 하고 이 문제를 金鍾泌씨와도 이야기한 것이라며 엄명을 내리는 것이었다. 나는 고민했다. 金씨를 죽였을 경우, 그 책임이 언젠가는 나한테 올 것이라는 걸 모를 만큼 내가 바보는 아니지 않는가. 결국 나는 납치를 해서 한국에 그를 데려다 놓는 선으로 대통령의 명령을 소화하기로 했다. 그래서 애당초부터 납치였지 제거 지시가 아니었다』
나는 李厚洛씨의 이 말을 1980년 봄에 金大中씨에게 전해주었다. 金씨는 李厚洛씨가 자신의 목숨을 살렸다는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李厚洛씨는 자신의 해명을 뒷받침할 만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았으므로 증거는 없다고 봐야겠다. 다만 수십 년간 李씨와 사귀어 온 나로서는 그가 시키지도 않은 납치를 스스로 할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너무나 이해타산에 밝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朴대통령 측근들의 증언들을 종합하면 압도적으로 李厚洛 정보부장이 독단적으로 金大中 납치를 지시한 것으로 결론이 나게 되어 있다. 인간 朴正熙에 대한 체험과 이해가 깊은 사람들일수록 『그분은 政敵살해를 명령할 사람이 아니다』고 못 박는다. 李厚洛씨가 최영근씨한테 비밀을 털어놓았다는 시점은 金大中씨가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보였던 1980년 봄이었다.
살길을 찾기 위해서 죽은 朴대통령에게 책임을 전가하면서 동시에 당시 金大中씨의 경쟁자였던 金鍾泌씨도 물고 들어가려고 했을 수도 있다. 金씨를 살려서 데려오면 국제문제가 생길 것이 뻔한데 왜 李厚洛 부장이 그런 바보짓을 스스로 했겠느냐 하는 주장이 꼭 설득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때의 정보부였다면 한국의 反共단체가 金大中씨를 납치해 온 것처럼 위장하고 검찰과 경찰은 수사를 해도 범인을 밝혀내지 못했다고 영구미제 사건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방향으로 사건을 은폐하려 하였던 정보부의 음모를 뒤집어버린 것은 일본 경찰이었다.
그들은 납치에 가담했던 駐日 한국대사관의 金東雲 1등서기관 지문을 현장에서 채취하는 데 성공하여 金서기관을 소환하려 했던 것이다. 金서기관이 소환을 피해 먼저 귀국하면서 정보부의 소행임이 입증되었다(물론 韓日 양국 사이에선 金東雲 서기관이 상부 지시 없이 가담한 것으로 하여 사건을 덮었다).
朴대통령이 金大中씨가 서울로 돌아온 직후 정보부 李龍澤 국장에게 진상조사를 지시한 것을 보면 이 사건을 괴한들이 한 것으로 조작하여 덮어두려는 뜻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정보부가 진상조사를 하면 결국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李厚洛 부장이 金大中씨의 해외 언동에 대한 보고를 朴대통령에게 자주 올리니까 朴대통령이 신경질을 냈고, 이를 납치 지시로 해석하기로 한 李厚洛 부장이 「대통령의 뜻을 한발 앞서 시행한다」는 소신에 따라 金大中씨를 납치했다가 자신의 신세를 망친 경우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미국이 1973년의 납치 사건 때 金大中씨를 살리는 데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당시 美 CIA 서울지부장이던 도널드 그레그(뒤에 駐韓 미국대사 역임), 당시 駐韓 미국대사 필립 하비브가 그런 사람들이다. 돈 오버도퍼 기자가 쓴 「두 개의 코리아」란 책에서도 그런 주장이 소개되어 있다. 이 책은 하비브 대사가 金大中 납치 직후 주모자가 정보부임을 알아내고 朴대통령 정부의 고위인사에게 金大中씨를 죽이면 韓美관계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고 썼다.
미국이 金大中씨를 살렸다는 주장은 과장이다. 金大中 납치에 직접 관여했던 李厚洛 부장, 정보부 공작단 간부들, 납치선의 선원들은 한결같이 『애당초 金大中씨를 죽이라는 지시나 계획이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미국 CIA의 역할은 많은 경우 과대평가되고 있으며 그들은 그것을 즐기기도 한다. 미국인들은 또한 李厚洛 부장을 물러나게 하는 데 CIA가 작용을 했다고 주장하나 이 또한 과장이다. CIA가 그런 노력을 한 것은 사실이다.
金大中 강제귀국 4일 뒤인 1973년 8월17일자 美 국무성의 비망록엔 이런 대목이 있다.
<우리는 이 문제를 CIA와 의논하고 있다. CIA는 李厚洛 부장과의 관계에 대해서 신중한 검토를 하고 있다. CIA는 한국의 안정과 관련하여 李厚洛을 겨냥한 어떤 행동을 실천에 옮길 것을 생각 중이다>
1978년 미국의회에서 나온 「韓美관계 보고서」는 「미국 측이 朴鐘圭 경호실장을 통해서 朴대통령에게 李부장에 대한 불만과 李씨의 그런 행동이 韓美관계에 악영향을 끼칠 것임을 통보했다」고 썼다.
李厚洛 부장은 1973년 12월3일에 해임되었다. 朴대통령은 金大中 납치 사건 직후 이미 그를 해임시키려고 마음먹었으나 그렇게 하면 한국 정부가 정보부의 납치 실행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韓日관계가 11월 초 金鍾泌 국무총리의 사과 訪日로 정상화될 때까지 기다렸던 것이다. 朴대통령 귀에 李부장에 대한 미국 측의 불만이 전달되었다고 해도 이미 나 있는 결심에 별다른 영향은 미치지 않았을 것이다.
1973년 12월3일 朴대통령은 10부 장관을 바꾸면서 李厚洛 부장을 해임시키고 후임에 申稙秀 법무장관을 임명했다. 대통령 공보수석 비서관 金聖鎭씨는 李부장의 몰락을 보면서 1년 전의 한 장면이 생각났다고 한다.
그날은 유신선포 직후였다. 李부장이 유신조치에 고생을 했다고 청와대·軍장성·정보부 간부·내무 관료들을 초청하여 큰 저녁식사 모임을 마련했다. 金수석이 그 자리에 갔더니 「술잔을 들고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담소를 하는 자리인데, 李부장 주위에는 비집고 들어갈 틈조차 없을 정도로 아첨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버렸고, 다른 자리는 이 빠진 것처럼 듬성듬성 비어 있었다」고 한다. 金수석은 「이 자리는 내가 올 곳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슬그머니 빠져나왔는데 자신도 모르게 울음이 터져나오더란 것이다. 金수석은 그때 일을 생각하면서 지금 李厚洛 부장의 심경은 어떠할까에 생각이 미치자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1973년 11월2일. 합동통신 趙成天 기자가 駐日 특파원으로 전출하는 것을 축하하는 저녁 식사 모임이 朴대통령 초청으로 청와대에서 있었다. 趙成天, 崔鍾哲(동아방송), 李鎔昇(경향신문), 그리고 비서관 중에서는 김성진, 유혁인, 권숙정, 선우련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대통령은 국민성에 대한 얘기를 시작으로 긴 시간 이야기했다.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은 잘살고, 게으른 사람은 못사는 사회야말로 건전한 사회인 것입니다. 그런데 간혹 게으른 사람이 잘사는 경우가 있는 것 같은데, 이건 죄다 수상한 일이야』
朴대통령은 대화 중간에 잠시 中東의 産油국가들에 대한 언급을 하고 난 후, 화제를 또다시 국민성 문제로 돌렸다.
『자연의 혜택으로 국민이 오히려 게을러지고 진취성이 없어지면 그 국민의 장래는 어두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자연의 혜택이 많았던 곳은 오히려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의식주의 불편함이 없었기 때문에 일을 하지 않으려고 했고, 빈둥빈둥 놀다 보니 때는 이미 늦었고…. 결국 남방 지대의 국민들이 미개국으로 남게 된 것은 앞에서 말한 근면성과 깊은 관계가 있어요. 때문에 자연의 혜택 여부보다는 국민들의 근면성 여하에 따라 경제력이 좌우된다고 확신합니다』
1973년 11월9일. 대통령 내외는 청와대 출입기자단에게 오찬을 베풀었다.
『지금부터 내가 한 말들은 극비 사항에 해당되기 때문에 보도되지 않도록 하시오』
대통령은 기자들에게 보도 금지(off the record)를 요청한 후에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주된 내용은 남북관계와 주한미군에 관한 것, 대통령이 알고 있는 각종 정보와 계획, 韓美 간의 민감한 문제 등이었다.
『북한이 남북회담을 할 때, 당초에는 미군 철수를 요구하며 미국內의 여론을 환기시켜 실효를 거둬 보려고 하였으나, 오히려 그 반응은 반대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미군이 한국에 계속 남아 있어야 한다는 여론이 생기니까 대화를 끊으려 하고 있어요.
현재로선 남북조절위원회나 적십자회담 모두 아무런 성과가 없습니다. 굳이 의의를 찾는다면 단지 회담을 하고 있다는 것뿐입니다.
남북대화는 우리의 국력이 월등하게 강해 金日成이 스스로 「이제 무력으로는 도저히 승산이 없다」고 自認하게 될 때만이 비로소 가능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무장을 더욱 강화하고, 이에 바탕이 되는 경제력을 키워야 하는 것입니다』
대통령은 북한의 정세를 좀더 자세하게 분석해 주었다.
『(제4차) 中東戰이 일어났을 때, 나는 한반도의 안보를 무척 걱정했습니다. 물론 지금 이 순간에도 북괴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대비 태세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기습으로 상대국 영토를 점령한 후 휴전하는 中東戰의 사례가 金日成에게 어떤 모험심을 일으키게 할지도 모릅니다.
요즘 보면 평화협정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하는가 본데, 북한의 저의를 잘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 평화협정을 제의하는 것은 진정으로 건설적인 결과를 기대하고 그런 제안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을 질질 끌다가 전술상 자기들에게 유리할 때 회담 결렬의 책임을 우리에게 덮어씌우고, 무력 적화통일을 하려는 심사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런 내용들을 국민들이 자세히 알 필요가 있어요.
금년 유엔 총회에서의 남북 대결은 어떤 쪽의 案이 통과되더라도 그대로 실천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번 대결은 누가 지지국을 많이 얻느냐 하는 스코어戰에 불과할 것입니다』
대통령의 환담은 무기 구입 부분에서는 비장함마저 엿보였다.
『앞으로 안보를 위해 정말 필요한 것은 對空火器(대공화기)입니다. 이 화기 가격은 한 개에 10만 달러 정도라고 하는데, 가령 미국이 팔지 않을 경우에는 구라파에서라도 꼭 사올 계획입니다』

육군경리감 출신인 黃寅性씨(뒤에 국무총리 역임)가 전북지사로 부임한 지 한 달가량 된 1973년 11월22일 오후 3시쯤이었다. 朴대통령이 다음날 광주에서 거행될 새마을지도자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호남고속도로 전주 인터체인지를 통과하여 광주로 갈 예정이니 지사는 가능하면 전주 인터체인지에서 배웅을 하고 뒤따라 광주에 오는 것이 좋겠다」는 金玄玉 내무장관의 연락이 있었다(이하는 黃寅性 회고록 「나의 짧은 한국 紀行」에서 인용).
黃지사는 지시대로 했고, 마침 대통령 일행의 차량행렬이 경호차를 선두로 질주해 가기에 도로변에서 그저 머리 숙여 경례를 했다. 행렬은 그대로 통과하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대통령 승용차가 급정거했다. 金正濂 비서실장이 차에서 내려 『黃지사!』 하고 부르며 빨리 오라고 손짓을 했다.
金비서실장이 운전기사 옆자리로 옮겨 앉자 대통령은 반가운 표정으로 『黃지사, 잘하고 있소?』 하며 자신의 옆자리에 타라고 했다. 黃지사는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라 당황하였다. 아무것도 보고할 준비가 돼 있지 않아서 그저 차창 밖으로 보이는 큰 산을 가리키며 그 이름을 소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무심코 지나가는 말처럼 이야기했다.
『지난번 각하께서 호남고속도로 준공식 때 광주만 다녀가셨다고 해서 이 고장에서는 좀 섭섭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朴대통령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그래? 黃지사, 정읍 내장산에도 호텔이 하나 있다고 하던데 손님들이 많이 있나? 호텔이 잘 만한가?』
『예, 썩 좋은 호텔은 아닙니다만 관광객들이 늘고 있습니다』
이 대답이 화근이 되었다. 대통령은 金 비서실장에게 말하였다.
『金실장, 내일 광주에서 올라오면서 하룻저녁 내장산에서 자고 가면 어때?』
金비서실장은 대통령 말씀이니 『예, 그렇게 하시지요』 하였다.
『그럼 손님이 많으면 다음으로 하고, 그렇지 않으면 하룻저녁 자고 갑시다. 광주에 가서 한번 알아보시오』

광주 관광호텔에 도착하자, 黃지사는 전주에 있는 부지사한테 전화를 걸어 보안상 문제 때문에 구체적인 상황은 말하지 못하고 내무국장 책임下에 지금 즉시 내장산 관광호텔에 가서 대대적인 청소를 하고 모든 준비를 갖추라고 말해 두었다.
그런데 저녁 식사 후 金비서실장으로부터 당황한 목소리로 전화가 왔다.
『黃지사, 우리 경호답사팀이 내장산 호텔을 가보고 왔는데 그 호텔은 말이 호텔이지 여관만도 못하고 시설도 형편 없어 도저히 대통령께서 유숙하실 수는 없다고 하니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黃지사는 바로 金비서실장 방으로 올라갔다.
『나는 자신이 없으니 그러면 내일 상경하는 길에 내장사나 잠깐 돌아보시고 올라가시도록 하시지요』
이렇게 대안을 숙의한 후 대통령께 보고하여 내장산 호텔에서는 차만 한잔 하고 내장사의 시찰을 하기로 했다. 黃지사는 참 잘 됐다고 생각하고 한시름 놓았다. 당초 대통령 일행의 계획은 대전 유성호텔에서 일박하게 되어 있었다.
朴대통령은 그 다음날 광주에서 행사를 마치고 바로 내장산 호텔에 도착하였다. 朴대통령은 홀가분한 기분으로 차를 한잔 한 다음 백지에 정읍시가지 약도를 그리며 정읍 우회도로를 건설할 것과 내장산 관광단지를 現 위치에 건설할 것, 그리고 지사 책임下에 내장사의 복원사업을 추진할 것을 지시했다. 말하자면 지사 취임 후 대통령이 이 지역에 방문한 첫 선물을 준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는 벌떡 일어나서 침실 쪽으로 가면서 『이 사람들이 여기가 어때서 못 잔다는 거야?』 하고는 침대방과 화장실까지 들여다보더니 그대로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이런 데 오면 아무데서나 자는 거지 뭐. 비서실장, 나는 여기서 자고 가겠어』
가장 큰 낭패를 당한 것은 黃지사였다. 黃지사는 한 시간 전에 먼저 내장산에 와서 보고는 그냥 한 번 돌아보고 가기로 결정한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조그마하고 허술하기 짝이 없는 호텔에서 대통령 일행이 유한다고 하니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전주에서 요리사를 데리고 오기에는 시간이 맞지 않아 결국 그 호텔 주방에서 준비한 일반 저녁식사를 대통령에게 대접해야 했다.
그 다음날 아침도 흔히 전주에서 하는 콩나물죽을 준비하여 조찬으로 때우니 黃지사로서는 몸둘 바를 몰랐다. 대통령은 그런 조찬을 들면서 『솔직히 어제 저녁은 좀 시원치 않았는데 오늘 아침 콩나물죽은 맛이 있구먼』 하고 그를 위로해 주었다.
전날 밤 黃지사는 대통령이 자는 것을 확인하고 잠자리에 들려고 종종 밖으로 나가서 살펴보았으나 새벽 1시까지도 불이 켜 있었다. 그는 의아하게 생각했으나 후에 알고 보니 대통령은 그날 밤에 새마을운동의 노래 가사(1~4절)를 작사하였다고 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