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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책부록
  1. 2005년 4월호

[연재 再開] 근대화 혁명가 朴正熙의 생애 (9권2장)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尹必鏞 사령관 숙청의 뒤안길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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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조치로 일체의 반대세력을 침묵시킴으로써 「권력의 化身」이 된 朴正熙는 측근의 권력관계를 냉정하고 非情하게 관리했다. 수경사령관 尹必鏞과 정보부장 李厚洛이 가까워지는 것을 지켜보던 그는 육군보안사령관 姜昌成을 내세워 尹장군을 제거함으로써 李부장을 혼비백산케 했다. 대통령으로부터 신뢰를 회복하려던 李厚洛은 「金大中 납치」라는 죽을 꾀를 생각해 낸다. 朴대통령은 권력을 안정시킴으로써, 국력을 조직하여 능률을 극대화시키고, 단기간 내에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을 건설하여 金日成을 재기불능케 하겠다는 자신의 꿈을 성취하려고 했다. 그에게 권력은 인권탄압이나 好衣好食의 수단이 아니라 국가건설의 도구였다.
  최근 기자는 朴正熙 대통령 재임 시절 청와대 비서실에서 매일 기록했던 대통령 면담일지를 입수했다. 대통령의 면담·회의·행사참여 기록인데, 朴대통령 재임 18년을 연구하는 데 1차적 자료일 것이다. 시간대별로 적혀 있는 이 일지를 읽어 보면 현대사의 비밀들이 많이 풀리기도 한다.
 
  예컨대 1972년 10월10일 오후 청와대 書道室(서도실)에선 대통령 주재下에 「임시회의」라는 게 열렸다. 오후 2시부터 7시15분까지 5시간15분이나 걸린 이 회의 참석자는 쟁쟁하다.
 
  대통령 이외에 金鍾泌 국무총리, 丁一權 공화당 의장, 李厚洛 정보부장, 申稙秀 법무부 장관, 金正濂 비서실장, 崔圭夏 특별보좌관, 柳赫仁 정무비서관. 이들은 유신선포에 따른 준비 회의를 한 것이다. 유신과 계엄령 선포를 오는 10월17일에 하기로 최종 결정한 것도 이 회의였다.
 
  1972년 10월11일의 일지를 보면 朴대통령은 오전 11시35분부터 15분간 盧載鉉 육군참모총장을 불러 유신선포에 따른 계엄준비를 지시한 것으로 추정된다. 盧총장은 계엄사령관에 임명될 사람이었다.
 
  이날 朴대통령은 오후에 金正濂 비서실장과 康濟天 의전관, 그리고 閔獻基 주치의를 데리고 승용차 편으로 고향 경북 구미의 큰형 東熙씨 상가에 도착, 조문했다. 그날밤을 구미전자수출공단 숙소에서 보낸 朴대통령은 다음날엔 큰형의 영결식과 하관식에 참석했다가 자동차 편으로 귀경했다.
 
  憲政을 중단시킨 제2의 쿠데타인 유신선포를 사흘 앞둔 10월14일 朴대통령은 오전 10시부터 2시간30분 동안 청와대 지하 회의실에서 유신선포 최종 점검 모임을 가졌다. 참석자는 대통령 이외에 金鍾泌 국무총리, 李厚洛 정보부장, 丁一權 공화당 의장, 金溶植 외무장관, 劉載興 국방장관, 崔圭夏 외교특별보좌관, 徐鐘哲 안보특별보좌관, 金正濂 비서실장, 盧載鉉 육군참모총장이었다. 유신선포 하루 전인 10월16일 朴대통령은 오후 1시23분부터 25분 동안 姜昌成 육군보안사령관을 불러 유신선포에 따른 준비를 지시했다.
 
  1972년 10월17일은 朴正熙 대통령에게는 1961년 5월16일과 함께 운명적인 날이었다. 이날 그의 행적을 청와대 접견일지를 통해서 再구성해 본다.
 
  대통령은 오전 9시30분에 金溶植 외무장관을 불러 곧 발표할 유신조치에 대한 외무부의 대책을 지시했다. 일본과 미국 대사에 대한 공식통보도 지시했다. 대통령은 오전 9시40분에 書道室에서 崔圭夏, 朴振煥, 朴鍾鴻씨 등 특별보좌관 회의를 소집하고 유신조치에 대해서 설명했다. 이 회의 도중 李厚洛 정보부장, 金溶植 외무장관, 金正濂 비서실장이 긴급보고를 하기 위해 朴대통령을 몇 차례 집무실로 모시고 나갔다.
 
  朴대통령은 오전 11시25분부터 金正濂 비서실장, 李厚洛 정보부장, 金溶植 외무장관, 金鍾泌 총리, 丁一權 공화당 의장과 점심을 함께 하면서 오후에 발표할 비상조치를 논의했다.
 
  이날 특이한 것은 오후 3시11분부터 34분간 申範植 서울신문사장이 대통령을 만난 것과 그의 뒤를 이어 공화당 車智澈 의원이 20분간 대통령을 만나고 간 사실이다. 두 사람은 이 무렵 朴대통령을 공·사석에서 자주 만났고, 곧 중요한 역사적 사건에 연루된다.
 
  朴대통령은 오후 4시4분부터 白斗鎭 국회의장, 閔復基 대법원장을 초치하여 유신선포에 대하여 통보했다. 곧 계엄사령관이 될 盧載鉉 육군참모총장도 다시 불렀다.
 
  이날 오후 6시부터 37분간 대접견실에서 있었던 비상국무회의는 국회해산, 헌법효력 중단을 결정한 대통령의 뜻을 받아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기로 의결했다.
 
 
  냉혹한 권력자의 얼굴
 
  유신선포 다음날인 1972년 10월18일에도 朴대통령은 바빴다. 전날 국회를 해산하고 헌정을 중단시킨 뒤 전국 비상계엄령을 선포함으로써 5·16에 이어 제2의 쿠데타를 감행한 그는 11년 전 한강을 건너온 기분으로 임했다. 비상사태 선포를 전후하여 朴대통령을 만난 사람들은 찬 바람이 돌 정도로 결의에 차 있던 朴대통령이 야전사령관처럼 보였다고 기억한다.
 
  朴대통령은 대충 네 가지 얼굴을 갖고 있었다. 국가경영자, 즉 CEO로서의 얼굴, 교사로서의 얼굴, 전략가로서의 얼굴, 그리고 권력자로서의 얼굴이 그것이었다. CEO 朴正熙는 치밀한 사람이고, 교사로서의 朴正熙는 엄격하되 자상했고, 전략가로서의 그는 深謀遠慮(심모원려)의 사색가였으며, 권력자로서의 朴대통령은 냉엄하고 냉혹했다. 이해 10월 하순의 朴正熙는 바로 권력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10월18일 아침 朴대통령은 유신헌법을 연구하고 있었던 헌법학회장 韓泰淵 교수를 불러 20분간 의견을 들었다. 오전 10시5분부터 1시간20분 동안 그는 중앙대책협의회의를 소접견실에서 주재했다. 이 자리에는 당시 한국의 국가핵심지도부가 전원 참석했다.
 
  金鍾泌 국무총리, 丁一權 공화당 의장, 金溶植 외무장관, 金玄玉 내무장관, 申稙秀 법무장관, 劉載興 국방장관, 閔寬植 문교장관, 尹胄榮 문공장관, 李厚洛 정보부장, 李敏雨 계엄부사령관, 金正濂 비서실장, 朴鐘圭 경호실장, 洪性澈 정무수석, 金聖鎭 공보수석, 金詩珍 민정수석.
 
  유신 쿠데타의 사령관은 朴대통령, 작전참모는 李厚洛 부장이었고, 사령부는 정보부였다. 이때의 정보부는 정부 위에 군림하고 있던 권력자 朴正熙의 채찍이요, 고삐였다. 정보부의 힘은 朴대통령의 신임과 대통령에 대한 부장의 접근권에서 나오고 있었다.
 
  따라서 이날 회의도 李厚洛 부장이 주재하다시피 하면서 각 부처의 대책을 점검했다. 회의가 끝난 뒤 朴대통령은 李부장, 金총리, 丁의장을 따로 만나 은밀한 이야기를 25분간 나누었다. 金비서실장의 배석도 허용되지 않았다.
 
  이날 오후 4시부터 약 30분간 朴대통령은 全軍의 주요지휘관 53명과 劉載興 국방장관, 盧載鉉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 崔世寅 1군사령관, 朴元根 2군 사령관을 불러 비상조치의 배경을 설명했다. 총구로써 張勉 정부를 뒤엎고 정권을 잡았던 朴대통령은 권력의 기본이 군대라는 것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朴대통령은 이날 오후 6시47분부터 9시까지 궁정동 中情사무실, 즉 10·26의 무대가 되는 安家에 가서 저녁을 먹었다. 참석자들은 白斗鎭 국회의장, 金鍾泌 총리, 丁一權 공화당의장, 張坰淳 국회 부의장, 金溶植 외무장관, 李秉禧 의원, 李厚洛 부장, 金正濂 실장이었다.
 
  朴대통령은 다음날(10월19일)에도 중앙대책회의를 주재했다. 그는 일본대사를 초치하여 비상조치에 대한 배경을 설명해 주었다. 오후 4시 사위인 韓丙起 의원이 찾아와 50분간 장인을 만나고 갔다. 韓의원의 부인은 朴대통령과 첫부인 김호남 여사 사이에서 난 朴在玉씨였다.
 
 
  韓信 장군을 敬遠
 
  유신 선포 나흘째인 10월20일 朴대통령은 중앙대책회의를 주재한 뒤에 언론계 인사들을 불러 비상조치에 대한 이해를 구했다. 합동통신 사장 李源京, 원로 언론인 薛國煥, 기자 출신 정치인 徐仁錫, 동양통신 기자 沈鍊燮, 그리고 李桓儀 문화방송 사장이 불려 왔다. 대통령은 또 내무장관, 서울·부산 시장과 지방의 지사들을 저녁식사에 초대하여 놓고 비상조치를 설명해 주었다.
 
  10월21일 필립 C. 하비브 미국대사가 오후 7시에 朴대통령을 찾아와 닉슨 미국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했다. 닉슨 대통령은 이 편지에서 내정불간섭 원칙을 천명하면서도 韓美동맹관계상 이번 조치에 대한 양국 간의 사전 협의가 없었다는 점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
 
  하비브 대사는 세 시간 동안 朴대통령과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金正濂 비서실장과 曺相鎬 의전수석(통역)이 배석했다.
 
  10월22일 朴대통령은 金鍾泌 총리를 불러 미국대사가 전해 준 닉슨의 친서에 대한 답신에 관해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金총리가 금명간 워싱턴을 방문하여 닉슨 대통령에게 朴대통령의 친서를 전하고 유신에 대한 설명을 하기로 결정했다.
 
  이날 朴대통령은 군부의 두 실세인 尹必鏞 수경사령관과 姜昌成 육군보안사령관을 불러 약 네 시간 요담했다. 수도방위를 책임진 尹장군과 군부의 동향을 감시하는 것이 임무인 姜장군은 육사 8기 동기였으나, 직무상 상호감시·견제해야 하는 처지였다.
 
  朴대통령이 유신선포 넉 달 전인 6월에 徐鐘喆 육군참모총장 후임에 盧載鉉 대장을 임명하였을 때 李厚洛 부장은 劉載興국방장관에게 『이 인사를 보면 각하께서 조만간에 계엄령을 펴실 것입니다』라고 이야기했다(劉載興 회고록 「격동의 세월」).
 
  劉장관은 徐총장 후임에 韓信 대장을 대통령에게 추천하고 있었다. 朴대통령의 반응도 호의적이었다. 李부장도 韓대장을 밀었다. 6·25 전쟁의 영웅인 韓信 대장은 깨끗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해서 軍에서 가장 신망이 높았다.
 
  朴대통령은 유신선포에 따른 계엄령을 펼 경우 韓信 대장이 계엄사령관이 되는 것은 부담스럽다고 판단한 듯하다. 계엄령을 펴면 사령관에게 권력이 집중되어 대통령 다음 가는 강자가 된다. 만약 그 계엄사령관이 韓信처럼 정치를 싫어하고 쿠데타를 반대하는 원칙주의자라면 대통령으로서는 불안해진다. 朴대통령은 군인으로서는 韓信을 높게 평가했으나 계엄사령관으로서는 거북했다. 朴대통령은 그래서 부담이 적은 盧載鉉 장군을 육군참모총장으로, 韓信 대장을 지휘병력이 없는 합참의장으로 임명한 것이다.
 
  朴대통령은 수줍어하고 겸손한 사람이었지만, 권력 관리에 관한 한 어떤 도전이나 위험도 허용하지 않았다. 권력을 관리하는 측근들, 즉 정보부장·수경사령관·보안사령관·軍요직 인사들에게 朴대통령은 존경의 대상이라기보다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劉載興 국방장관이 유신조치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사전 통보를 받은 것은 金鍾泌 총리가 劉장관을 총리실로 오게 한 뒤 며칠 뒤 발표될 비상조치를 설명해 줄 때였다고 한다. 金총리는 劉장관에게 동의 여부를 물었다. 劉장관은 『북한과 대화하는 체제를 정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군부의 책임자가 비상조치에 동의해 준 셈이었다.
 
 
  대통령-閔耭植의 車中 대화
 
  1973년 1월1일과 2일 朴대통령은 신년하례를 생략하고 속리산으로 가서 이틀간 쉬다가 돌아왔다. 閔耭植·金鍾哲(한국화약 회장)이 동행했다.
 
  대통령은 1971년부터 1976년까지는 5월, 10월에 4박5일 예정으로 속리산을 찾곤 했다. 그럴 때마다 대통령이 만나는 사람은 육군참모총장 출신의 공화당 의원 閔耭植이었다. 두 사람은 술을 밤새워 마시곤 했다. 陸英修 여사가 閔의원에게 『제발 저 양반 술 많이 드시지 않도록 해주세요』라고 부탁하면, 閔의원은 『제가 다 마셔버릴 것이니 안심하십시오』라고 했다. 朴대통령의 장모까지 찾아와서 閔의원에게 술을 많이 하지 않도록 부탁하기도 했다.
 
  朴대통령은 술자리에서도 국정과 관계 있는 말을 많이 했다고 한다. 閔의원은 「저분은 어떻게 국정의 세부 사항까지 저렇게 많이 알까. 아마도 대통령이 되기 위하여 태어나신 분이다」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때 朴대통령은 이상한 음주 습관이 있었다.
 
  한 자리에서 2시간 정도 마신 다음엔 다른 방으로 옮겨가 또 마시는 것이었다. 밤샘을 하면서 술을 마실 때는 대여섯 번 방을 옮겨다니곤 했다.
 
  朴대통령은 술에 약한 사람은 낮추어 보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 사람들과 합석한 대통령은 가끔 閔의원에게 눈짓을 보내면서 『저 친구, 술도 한잔 못 하면서 일은 어떻게 하는지…』라고 쑥덕거리곤 했다.
 
  閔耭植은 짓궂은 농담을 잘했지만 그것은 항상 言中有骨(언중유골)이었다. 1970년 초 정계에서 유명했던 고급콜걸 鄭仁淑씨가 오빠에게 피살되었다. 朴正熙 대통령이 관계한 여자라느니, 범인도 오빠가 아니라느니 하는 소문이 퍼졌고 국회에서도 문제가 되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이 여인과 朴대통령은 아무런 관계가 없었고, 범인은 오빠임이 분명하다.
 
  이 무렵 閔耭植씨가 朴대통령의 기동차에 함께 타고 땅콩을 안주 삼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런 대화가 오고갔다.
 
  『閔장군, 그 ○○○이라는 배우를 모르시오』
 
  『압니다』
 
  『이거 큰일 났소. 북한 방송에 나오고, 그걸 갖고 ○○이란 놈은 야당놈과 짜고 부추기고 있고』
 
  『그런 소문이 돌기는 합니다만』
 
  『아니 무슨 얘기를 하는 거요. 내가 그런 일을 저지를 사람이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몇 달 전부터 시중에 파다하게 퍼졌으니… 엔조이했다고요』
 
  『아니 당신도 그 얘기를 믿습니까』
 
  『나는 안 믿습니다만 시중에서 자꾸 떠드니…』
 
  『그럼 육인수나 당 간부들도 압니까』
 
  『글쎄 소문이 났으니』
 
  朴대통령은 뒤에 타고 있던 공화당 중진을 불렀다.
 
  『나와 ○○○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소』
 
  그들은 우물쭈물하다가 돌아갔다. 閔의원은 속으로 남자가 한두 번쯤 그러면 어떻느냐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다시 閔耭植이 말했다.
 
  『그쪽 배우가 피해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 배우의 어머니가 음식점을 하는데 대통령과 가깝다는 소문이 돌아 손님이 오지 않는답니다』
 
  『아니 閔장군이 그걸 어떻게 아오. 왜 그런 얘기를 듣고도 나에게 안 했소』
 
  『다 아실 줄 알고 안 했지요. 누군가는 보상을 해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여보 그럼 나 보고 보상하라는 거요?』
 
  『왜 대통령께서 보상합니까』
 
  이날 대화는 이것으로 끝났다. 閔耭植은 생전의 기록에서 朴正熙 대통령의 결백을 믿는다면서 『가까이에서 오랫동안 지켜본 朴대통령은 눈물이 있는 한 인간』이었다고 했다.
 
 
  8·3 조치는 성공했다
 
  朴正熙 대통령은 연설이나 기자회견을 국민 설득의 기회로 활용했다. 매년 1월 초에 열린 연두기자회견은 3~4시간 정도 진행되었다. 일문일답이 오고 가는 기자회견이 아니었다. 朴대통령이 강의하듯이 국정을 설명하는 장소였다. 대통령에 의한 일종의 국정보고대회였다.
 
  요사이 이런 기자회견 기록을 읽어 보면 朴대통령이 어떤 철학과 전략으로 국가를 경영해 갔는지 아주 명료하게 떠오른다. 朴대통령의 말은 대중정치인들의 말과는 사뭇 달랐다. 도덕과 명분을 앞세운 말이 아니라 비전과 방법론, 사례와 통계를 주로 구사한 말이었다.
 
  과장이 적고 정확한 단어를 사용하려고 애쓰다가 보니 그의 말은 듣기엔 재미가 적었다. 세월이 지나서 그의 비전이 적중했고 그의 꿈이 이뤄진 것을 확인한 뒤에 읽어 보니 朴대통령은 기자들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국민들을 보면서, 또 역사와 미래를 향해서 증언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朴正熙 연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료는 그가 썼던 책과 연설문이다. 그의 말과 글은 그의 것이었고, 거짓과 과장이 적기 때문에 믿을 수 있다.
 
  1973년 1월12일 기자회견에서 朴대통령은 전 해에 있었던 8·3 사채동결조치의 성과를 자랑했다.
 
  『그런데, 그 실적과 효과를 지금부터 구체적으로 말씀드린다면, 8·3 조치에 의한 私債 동결 조치에 따른 신고 액수는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3450여억원이었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 우리나라의 전체 통화량과 거의 맞먹는 액수였습니다.
 
  그 당시 우리 통화량이 4000 몇백억원이라고 기억합니다마는, 우리도 우리나라의 사채가 이렇게 많이 돌아다니는 것은 미처 몰랐었습니다. 이러한 사채를 쓰고 있는 기업에 대해 금리를 낮추어 주고 상환 기한을 연장해 주었습니다. 전체 사채의 약 4분의 1에 해당하는 805억원이 출자로 전환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정부는 은행 금리를 대폭적으로 인하했고, 2000억원에 달하는 貸煥을 해 주었고, 642억원에 달하는 산업 합리화 자금을 방출했습니다.
 
  기업의 부담을 1000억원 가량 경감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 기업의 체질을 강화시키고, 재무 구조를 개선하며, 우리 경제가 앞으로 안정된 바탕 위에서 고도 성장을 지속할 수 있는 하나의 기틀이 마련되었다고 보겠습니다.
 
  예년 같으면 추석이다, 김장 때다, 또 크리스마스다, 연말 연시다 하면 으레 물가가 오르고 또 오르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작년 8·3 조치 이후 연말까지는 도매 물가나 소비자 물가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안정 내지는 하락 추세를 보여 도매 물가가 0.1% 오르고, 소비자 물가는 1.5%가 오히려 하락하는 현상을 나타냈습니다. 이것은 해방 이후 우리 경제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현상입니다.
 
  작년 수출 목표 17억5000만 달러, 이것은 처음에 목표 그 자체도 국제 경제가 불황에 빠져 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겠느냐는 얘기가 많았습니다마는, 그것을 초과해서 18억 달러를 약간 초과 달성했습니다. 무역과 무역외 수지에 있어서, 작년에는 약 3억 달러의 흑자를 나타냈는데, 이런 것을 8·3 조치의 효과로 들 수 있겠습니다』
 
 
  한국적 민주주의와 중화학 공업
 
  이날 연두기자회견에서 朴正熙 대통령은 자신의 정치소신과 국가비전을 밝혔다. 이날의 기자회견은 유신조치 이후 최초로 작심하고 자신의 생각을 토로할 기회였다. 그는 「민족과 국가라는 것은 영생하는」 존재라고 규정한 뒤 이렇게 말했다.
 
  『하나의 민족이란 것은 영원한 생명체입니다. 따라서 민족의 안태와 번영을 위해서는 그 민족의 후견인으로서 국가가 반드시 있어야겠습니다. 국가는 민족의 후견인입니다. 국가 없는 민족의 발전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朴대통령은 10월 유신을 단행하게 된 자신의 정치관을 가차없는 국회 비판으로 시작했다. 그는 『국력배양을 저해한 가장 큰 요인의 하나는, 이 자리에서 솔직하게 말해서 과거 국회의 非능률에 있었다고 나는 단정한다』라고 했다. 그는 또 『우리의 모든 행동을 생산과 직결시키는 것이 10월 유신 질서의 기본방향이다』고 말했다. 유신의 목적은 『국력의 배양과 국력의 조직화』란 것이다. 그는 또 『능률적이고 낭비 없는, 생산에 직결되는 정치제도』를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이름지었다.
 
  이날 朴대통령은 『고도성장을 지속해 나가기 위해서는 중화학공업을 중점적으로 육성해 나가야 한다』고 선언했다. 10월 유신으로 조직된 국력을 중화학공업에 집중시킴으로써 방위산업을 건설함은 물론 수출의 확충을 기한다는 핵심전략이 피력된 것이었다. 유신 시기와 겹치는 중화학 건설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정치비용을 최소화하여 국가체제의 군살을 빼게 한 朴대통령은 고도의 효율을 지니게 된 이 국가기능을 중화학공업 건설에 집중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성공함으로써 한국은 중량급 국가로 바뀌고 10년 뒤에 꽃이 피는 민주화의 기반을 착실하게 놓게 된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朴대통령은 전 해의 남북 7·4 공동성명의 배경에 대해서 털어놓았다.
 
  『「북한의 도발행위가 계속되면 언젠가는 예기치 않던 전쟁이 재발할지도 모른다. 우리 측의 자제에도 한계가 있다. 또 다시 동족상잔의 비극을 되풀이해서는 안 되겠다.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전쟁 재발만은 막아야겠다」 이것이 나의 결심이었습니다. 나는 정보부장을 평양에 보낼 때 과거 우리 삼국시대의 역사를 회상해 보았습니다. 신라의 김춘추가 김유신과 의논을 해가지고 단신 고구려의 평양을 방문했습니다. 고구려는 김춘추를 억류하고 돌려보내지 않았으나 탈출해서 나왔는데, 이런 모험도 감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孫永吉과 全斗煥·盧泰愚
 
  1973년 1월7일.
 
  朴正熙 대통령의 면담일지를 읽다가 보면 재미있는 대목을 발견하게 된다. 권위주의 정권下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통령이 누구와 만나는가이기 때문이다.
 
  1973년 1월7일은 일요일인데, 이날 朴대통령은 首警司 참모장 孫永吉 준장과 공수특전단장 全斗煥 준장을 청와대 집무실에서 만났다. 면담기록엔 낮 12시24분부터 오후 2시41분까지로 되어 있다. 아마도 점심식사를 함께 했을 것이다. 대통령이 40代 초반의 젊은 준장을 이렇게 대우하니 이들이 軍內에서 하나회를 만들어 큰 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다.
 
  孫·全 두 준장은 육사 11기 출신이었다. 孫준장은 위관장교 시절 朴正熙 장군의 전속부관으로 따라다녔고, 全준장은 최고회의 의장비서실에서 근무했다. 朴대통령은 장군 시절부터 정규육사 출신 장교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그는 한국군의 미래가 이들에게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면서 격려했다.
 
  盧泰愚 前 대통령은 1955년에 육사를 졸업하고(11기) 朴正熙 준장이 사단장으로 있던 5사단에 배치되었다. 朴사단장이 사격장 공사를 지휘하던 그를 불러 점심을 함께 했다. 부대에 돌아가려고 경례를 하는 盧중위에게 朴사단장이 『내가 바닷가로 오리사냥을 가는데 같이 가자』고 했다. 盧중위는 『저는 임무가 있어 못 가겠습니다』라고 했다.
 
  『무슨 임무?』
 
  『사격장을 닦다가 왔습니다. 그래서 못가겠습니다』
 
  『할 수 없지. 잘 가게』
 
  盧중위가 돌아서는데 朴사단장이 다시 부르더니 『내가 사단을 떠나게 되었어』라고 했다.
 
  『어디로 가십니까』
 
  『아마도 陸大로 갈 거야』
 
  盧중위는 착잡했지만 할 말도 없어서 『잘 가십시오』하고 경례를 붙이고 나왔다. 5·16 군사혁명 뒤 盧소령을 만난 朴의장은 『야 임마, 그때 내가 서운했다』고 했다.
 
  孫·全 두 사람은 일찍부터 정치장교의 역할을 했다. 1963년 2월18일 朴正熙 의장이 민정불참-원대복귀를 선언하자 두 사람은 동기생들과 함께 장충동 의장 공관을 찾아갔다. 이들이 응접실에서 기다리는데 陸英修 여사가 나왔다.
 
  『이 양반이 일을 저질러 놓고 다시 軍에 돌아가겠다니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이미 내친 발걸음인데 정치를 하셔야지요. 여러분들이 생각을 바꾸시도록 건의 좀 해주세요』
 
  朴의장에게 청년장교들이 그런 건의를 하자 의장은 『여러분의 뜻을 잘 알아요. 그러나 정치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야』라고 했다. 민정불참 선언이 하나의 전술이라는 말투였다.
 
  朴대통령은 全斗煥이 중심이 되어 만든 「하나회」를 후원했다. 정보부가 軍內 사조직을 소탕해야 한다는 건의를 하자 방첩대를 시켜 형식적인 조사를 하고 끝내도록 했다. 육사 11기의 선두주자였던 全·孫 두 사람은 중령 시절 청와대 경호를 맡은 수경사 30대대장으로 근무했다. 孫永吉이 먼저였고, 그가 全斗煥을 후임으로 추천했다. 朴대통령은 두 사람을 가끔 식사자리에 초청하기도 했다.
 
  朴대통령이 키운 하나회 중심의 정규육사 출신들은 그 報恩을, 10·26 사건 이후에 하게 된다. 全斗煥 국군보안사령관은 합수본부장으로서 朴대통령 시해범 金載圭 일당을 단죄하는 것이 서거한 朴대통령에 대한 의리라고 믿었다. 이들은 국가원수 시해사건은 성역 없이 수사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鄭昇和 계엄사령관까지 연행하려다가 12·12 사건을 일으키고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 정권을 향해 진격했다.
 
  朴대통령이 자신의 친위세력으로 키운 하나회와 정규육사 출신 장교단은 10·26 사건 이후에 유신이 매도당하는 분위기에서도 유신의 당위성을 확신하고 있었다. 이들은 朴正熙의 죽음을 민주화의 好機로 보고 있었던 정치인들과는 달리 그의 죽음을 국가안보의 위기라고 해석했다. 정규육사 출신 장교단에 대한 朴대통령의 오랜 투자는 그의 死後 격하를 막았다.
 
  朴대통령이 키운 하나회 출신들이 그의 사망 후 13년간 한국을 이끌고 가면서 朴正熙에 대한 흠집내기를 잘 막았기 때문이다. 제5공화국 시절 안기부와 문공부의 중요한 일 중의 하나는 月刊朝鮮과 신동아에 朴대통령에 대한 폭로기사가 못 나오게 막는 일이었다.
 
 
  朴대통령의 현장 중시
 
  朴대통령은 매년 1월 중순의 연두기자회견이 끝나면 2월 중순까지 약 한 달간 각 부처와 지방을 순시하면서 업무현황을 파악하고 지침을 내렸다. 朴대통령의 부처 및 지방순시는 허례를 빼고 실무를 중점적으로 챙기는 가장 강도 높은 현장수업이었다. 朴대통령이 국정의 구석구석까지 알 정도로 업무파악이 완벽했던 것은 18년간 이런 현장순시를 많이 하여 실무자들의 견해를 들었기 때문이다.
 
  1973년 1월15일 朴대통령은 오전엔 경제기획원, 오후엔 재무부를 순시했다. 朴대통령은 국세청과 관세청 직원들에게 「큰 야망이 없는 사람은 小利에 끌리기 쉽다」는 「牧民心書」의 한 구절을 인용하기도 했다. 다음날 朴대통령은 오전엔 농림부, 오후엔 상공부를 순시했다. 농림부 순시 때 그는 농민 위에 군림하려는 공직자의 자세를 직설적으로 비판했다.
 
  『토지개량조합은 농민으로부터 水稅를 받아 월급에 보너스까지 타먹고 코로나나 크라운차를 타고 다니고 있다는데, 세단 타고 다니면서 무슨 토지개량을 한다는 것입니까.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것이 우리의 실정에 맞아요』
 
  그는 국민들을 향해서도 일침을 놓았다.
 
  『경기米가 아닌 통일벼 같은 것은 못 먹겠다고 생각하는 주부들의 사고방식을 뜯어 고쳐야 합니다』
 
  1월17일 朴대통령은 건설부와 과학기술처를 순시했다. 1월18일 朴대통령은 큰 형 東熙옹의 백일 脫喪에 다녀왔다. 아들 志晩군과 朴鐘圭 경호실장만 데리고 갔다.
 
  다음날 朴대통령은 교통부와 체신부를 순시하고 청와대로 돌아와 오후 3시35분부터 25분 동안 尹必鏞 수경사령관의 업무보고를 들었다. 석 달 만에 처음으로 尹사령관이 청와대에 들어온 것이다. 이때는 벌써 대통령의 마음이 그로부터 떠나고 있었다. 반면 姜昌成 육군보안사령관은 자주 대통령 경호실장과 함께 골프를 치면서 尹사령관에 대한 수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1월21일 朴대통령은 닉슨 대통령의 특사인 알렉산드 헤이그 장군(뒤에 닉슨의 비서실장, 레이건 대통령 시절 국무장관)을 접견했다. 헤이그는 타결이 임박한 베트남휴전협상안에 대해서 설명했다. 朴대통령은 이 휴전협상안이 결국은 베트남을 붕괴시킬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두 시간에 걸친 면담에서 많은 문제점을 제기했다. 朴대통령은 특히 휴전안이, 미군은 베트남에서 철수하도록 하면서 베트남에 들어온 월맹군의 철수를 조건화하지 않은 것은 치명적인 결과를 부를 것이라고 경고했다.
 
  1월22일 朴대통령은 문교부를 순시한 자리에서 「국적 있는 교육」을 강조했다. 그는 기존 교육의 방향에 의문을 제기했다.
 
  『교육이란 피교육자로 하여금 사명의식을 분발시켜 가난한 농촌을 보면 富强策을 생각케 하고 붉은 산을 보면 푸른 산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을 길러야 합니다』
 
  朴대통령은 내무부 순시에선 잘하는 마을을 우선적으로 지원한다는 새마을 운동의 원칙을 새삼 강조했다.
 
  『당분간은 저 마을에는 돈을 주고 왜 우리 마을에는 돈을 주지 않는가라는 불평따위는 들은 체 만 체해도 좋습니다』
 
  2월4일 朴대통령은 안양 컨트리 클럽에서 골프를 쳤다. 朴鐘圭 경호실장, 姜昌成 육군보안사령관이 李秉喆 삼성회장, 金容完 전경련 회장과 함께 했다. 姜사령관은 그 이틀 전에도 朴대통령을 獨對했다. 朴정권 시대 측근들의 힘은 얼마나 자주 대통령을 만나느냐에 의해서 서열이 결정될 정도였다. 이미 그 횟수에서 姜보안사령관은 尹必鏞 수경사령관을 앞지르고 있었다. 尹必鏞-李厚洛의 밀착에 대응하는 朴鐘圭-姜昌成 구도를 만들어 놓고 구경하고 있었던 것이 朴대통령이었다. 남은 것은 이 대립구도의 균형을 무너뜨릴 사건이었다. 그것은 朴대통령만이 만들 수 있는 것이었다.
 
 
  지시는 이렇게 하는 것
 
  2월6일 朴대통령은 감사원(원장 李錫濟)을 순시하는 자리에서 감사의 원칙을 제시했다. 대통령이 업무지침을 어떤 식으로 해야 하는가에 대한 모범답안이 될 만하여 소개한다.
 
  <가. 10월 유신 과업 수행에 있어 감사원이 담당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공무원의 紀綱을 확립하는 일이며, 이를 통해 일반국민들에게도 영향을 주어 종국적으로는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는 것입니다.
 
  나. 현재 우리나라에는 2만6000여 기관에서 2조4000억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예산을 집행하고 있습니다. 속담에 「열 사람이 도둑 하나를 잡지 못한다」는 말이 있듯이 이처럼 많은 기관을 감사원에서 일일이 다 감사를 하고 비위를 적발해 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므로 역시 중점적인 감사를 해야겠습니다.
 
  또한 적은 인원으로 많은 대상 기관을 효과적으로 감사하고 단속하자면 고도의 감사 지식과 기술이 필요할 것입니다. 따라서 감사원 직원들은 평소 감사업무에 대한 연구에 더욱 주력하여 풍부한 지식과 고도의 감사기술을 갖고 권위 있는 감사를 할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감사의 권위와 공정성이 보장된다면 비록 중점감사만을 실시하더라도 모든 기관이 사전에 스스로 비위를 시정하려고 노력할 것이며 자체단속도 더욱 강화할 것이므로, 결국은 일부 기관에 대한 감사가 전체기관에 대한 영향을 미치고 모든 기강이 스스로 바로잡혀 나갈 것입니다. 나는 이것이 바람직한 감사의 효과라고 생각합니다>
 
  朴대통령은 지시를 할 때 오해가 일어날 소지를 없애기 위해 정확하면서도 쉬운 말을 한다. 그가 사안의 핵심을 적확하게 파악하고 있으므로 가능한 것이다. 상황파악이 제대로 안 된 상태에서 높은 사람이 지시를 할 때는 총론이나 원론, 때로는 말장난만 늘어놓는다. 핵심을 정확히 파악한다는 것은 말을 할 때뿐 아니라 일을 할 때도 낭비가 적다는 이야기이다.
 
 
  『차별정책을 펴라!』
 
  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경영자(CEO)로 평가될 朴正熙의 성공비결 중 하나는 행정에도 경쟁개념을 도입했다는 점이다. 그는 1973년 연두순시를 하면서 「새마을 사업 지원의 추진 방향」을 이렇게 설명했다.
 
  『새마을 사업은 우수부락부터 우선적으로 지원하여 추진해야 합니다. 과거에 우리는 여러 가지 운동을 전개하여 보았으나, 별로 두드러진 성과를 올리지 못했는데 그 가장 큰 원인은 정부에서 모든 부락에 대해서 일률적으로 똑같이 분배해 주는 식으로 지원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한정된 예산을 가지고 전체 부락에 고루 나눴기 때문에 지원자금이 영세하여 소기의 투자효과를 거둘 수 없었고, 또 스스로 잘 살아 보려는 의욕도 없고, 부지런히 일하지도 않는 부락을 아무리 도와주어 보았자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식」으로 아무런 효과를 거둘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수부락부터 우선 지원하면 잘하는 우수부락은 놀라울 정도로 발전하고, 그렇지 않은 부락은 뒤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며, 결과적으로 이들 부락 사이에는 많은 격차가 생길 것입니다.
 
  물론, 부락 간에 격차가 생기는 것 자체는 가슴 아픈 일이지만, 그러나 뒤떨어진 부락 사람들도 우수부락 사람들이 부지런히 일하여 잘 살게 된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게 되면 이에 자극을 받아 조만간 분발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정부는 이 마을도 지원해 줌으로써 궁극적으로는 모든 부락이 차례로 다 고루 잘 살게 되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얼핏 보기에는 이렇게 추진해 가는 것이 시간이 걸리고 지루하게 보일지 모르나 결과적으로는 훨씬 빠르고 성과 있는 방법이 된다고 믿습니다. 새마을 운동 실적을 심사하고 평가할 때는 명확한 기준이 있어야 하겠으며, 그 다음에는 객관적이고도 공정한 심사가 이뤄져야 하겠습니다.
 
  그저 막연한 추상적 기준이나 외양만 보고 잘 되었다는 식의 평가를 해서는 안됩니다. 심사기준에는 주민들의 소득증대를 주된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朴대통령은 기계적 평등을 자원낭비와 非효율적인 것으로 배척하고 의도적으로 차등 지원을 하여 마을과 마을 사이에 경쟁을 붙인 것이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픈 사람은 그 사촌을 따라잡기 위하여 부지런하게 일해야지 계속 배만 움켜쥐고 있다가는 정부로부터 일전 한 푼 받지 못하는 제도를 만든 것이다. 이런 차등 지원책이 결과적으로는 전국 마을이 다 잘 사는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그는 확신했다. 「차등을 통한 평등구현」과 「평등을 통한 불평등 自招」 중 前者를 선택한 것이다.
 
 
  애국을 나무심기로 표현하라
 
  1973년 1월24일.
 
  朴대통령은 전국 치안 및 예비군 관계관 중앙회의의 유시를 통해서 7·4 공동성명 이후 진행되고 있던 남북대화에 대해서 아주 현실적이고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지금으로서는 그들을 결코 믿을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접촉을 하여 한 가지 뚜렷이 안 것이 있다면 그것은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기본 전략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으며, 우리 남한을 적화통일하겠다는 야욕은 하나도 포기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주변 정세와 세계적인 조류에 맞추어서 방법과 전술만을 약간 바꾸었을 뿐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북한은 금년에 들어서도 「4대 군사노선을 철통같이 다그쳐 나가야 한다」고 계속 주장하고 있습니다. 「4대 군사노선」이란 全국토의 요새화, 全인민의 무장화, 全인민군의 간부화, 장비의 현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알기로는 그들은 입으로는 7·4 공동성명이니 평화통일 운운했지만 자기들이 무력 남침을 하지 않겠다는 공식적인 발언을 한 적은 아직 한 번도 없습니다.
 
  「대화는 대화고, 혁명은 어디까지나 혁명이다」라는 말이 아마 그들 속심의 솔직한 표현일 것입니다』
 
 
  1973년 4월5일.
 
  朴대통령은 식목일 기념일, 새마을 운동 행사에 나가면 꼭 긴 연설을 했다. 연설이라기보다는 강의였다. 이런 강의식 연설을 통해서 그는 자신의 비전과 열정을 직설적으로 쏟아 부었다. 이날도 그는 열을 냈다.
 
  『이 땅은 우리 조상들이 살다 갔고,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고, 또 언젠가는 우리가 죽어서 모두 이 조국 강산에 묻혀야 될 땅입니다. 또한, 길이길이 우리 후손들이 이 땅에서 살아야 될 것입니다. 여기는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조국이요, 조국의 강산입니다.
 
  그 사랑하는 표시를 무엇으로 해야 되겠습니까? 우리는 당분간 「애국」이란 말은 입에서 딱 떼어 버리고, 우선 산에다 나무를 심고 나무를 아끼고 이 조국 강산을 하루바삐 울울창창하게 만듭시다. 그런 상태를 만드는 것, 이것이 무엇보다도 나라를 사랑하는 길인 것입니다』
 
 
  1973년 4월17일.
 
  朴대통령은 전국경제인대회 치사를 통해서 기업의 사회적 의무와 윤리를 강조한다. 朴대통령이 대기업 중시 정책을 쓴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정서는 재벌적이라기보다는 서민적이었다. 그는 노동조합의 활동을 규제했지만 그 자신이 노조위원장이란 자세로 재벌총수들에게 富의 사회적 환원을 강조하곤 했다.
 
  『넷째로, 모든 기업인은 노동 조건의 개선과 노동자의 복지 향상에 최선을 다하고 국민 민복에 기여한다는 투철한 사명 의식을 길러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기업의 이윤은 사회에 되돌린다는 大義에 투철한 기업이 되어야겠다는 것입니다.
 
  정부가 지난해 막대한 재정 부담을 무릅쓰고 「경제의 안정과 성장에 관한 8·3 긴급 조치」를 취했던 것도 기업의 이윤만을 보장해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업의 건전한 성장 없이는 경제의 발전과 국민 생활의 향상을 기대할 수 없다는 기업의 공익성 때문에 취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尹必鏞 계열 숙청
 
  1973년 4월28일.
 
  朴正熙 대통령을 가장 오랫동안 모신 측근이자 군부內 실력자이던 尹必鏞 장군이 육군보안사에 연행된 것은 1973년 3월9일, 정식 구속된 것은 3월26일, 軍 검찰에 의해 기소된 것은 4월17일, 비공개 공판 끝에 육군보통군법회의에서 선고가 있었던 것이 4월28일이었다. 尹必鏞 소장, 孫永吉 준장 등 10명의 장교들이 군복을 입은 차렷 자세로 선고를 받는 사진이 이 날짜 석간에 실리면서 그들의 「죄상」이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그 소스는 판결문과 국방부 장관 담화문이었다. 내용은 尹장군 등의 부정·부패적 사생활, 軍內 사조직 운영을 중점 부각시키는 것이었다. 판결문은 법률적 판단을 한 내용이 아니라 「치부와 엽색행각에 치달음으로써 反유신적 죄악을 자행했다」는 식의 인신공격적인 규탄문이었다.
 
  대한일보 사장 金連俊씨의 수재의연금 횡령사건에 대한 수사를 尹장군이 압력을 넣어 중단시켰다는 대목이 눈길을 끌었다. 그 얼마 뒤 金씨는 횡령 혐의로 구속되고(나중에 무죄 판결을 받음) 대한일보는 폐간되었다.
 
  이날 징역 15년에서 2년까지의 유죄선고를 받은 사람은 尹必鏞 소장(징역 15년)과 수경사 참모장 孫永吉 준장(육사 11기. 징역 15년)을 비롯하여, 육군본부 진급인사실 보좌관 金成培 준장, 육본중앙수사단장 池聖漢 대령, 26사단 연대장 權翊鉉 대령(나중에 무죄 확정. 육사 11기. 뒤에 민정당 대표), 육본 진급인사실 辛再基 대령(육사 13기. 뒤에 민자당 의원) 등 10명이었다. 기소는 되지 않았으나 尹必鏞 계열로 알려졌던 장교들 30여 명이 전역당했다.
 
  이들은 盧泰愚 대통령 시절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을 지냈던 安敎德(육사 11기)을 비롯하여, 鄭東喆(육사 12기. 506보안대장), 裵命國(육사 14기. 청와대 민정비서관실 파견. 뒤에 민자당 의원), 朴正基(육사 14기. 뒤에 韓電 사장), 金相球(육사 15기. 뒤에 민자당 의원), 鄭奉和(육사 18기. 수경사령관 비서실장) 등이었다. 이때 숙청되었던 군인들이 5공화국 때 重用되는 경향이 있었다.
 
  尹장군 계열의 숙청은 정보부로도 번져 李厚洛 부장의 고향(울산) 후배인 李載杰 감찰실장이 구속되었고 30여 명이 해직되었다. 李실장은 동향인 孫永吉 수경사 비서실장과 연락하여 사이가 좋지 않던 李부장과 尹소장을 친하게 만들어 준 것이 화가 되었다. 이 사실은 이 사건의 핵심적 의미를 담고 있다.
 
  尹必鏞 계열의 숙청은 朴正熙 대통령이 갖고 있던 권력자 고유의 의심과 불안을 반영한다. 그는 전 해의 7·4 공동선언 이후 李厚洛 정보부장의 대중적 인기가 높아지는 것을 주시하고 있었다. 李부장은 朴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제2의 5·16 쿠데타」인 10월 유신도 기획, 실행했고 많은 여당 국회의원 후보를 추천하는 등 새로운 정치판을 짜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1973년 초 李厚洛 부장의 영향력이나 그에 대한 대통령의 신임은 절정에 달해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위기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다. 朴대통령이 내려다보니 尹必鏞 수경사령관까지도 李厚洛 부장과 가까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朴대통령은 권력의 4대 파수꾼인 정보부장, 육군보안사령관, 수경사령관, 경호실장을 서로 견제시켜 놓음으로써 권력의 안정을 기하는 방식을 애호했다. 尹必鏞 장군도 李厚洛 부장에 대한 좋지 않은 정보를 대통령에게 많이 올렸다. 그를 잘라야 한다는 건의도 했다. 그런데 尹장군이 朴대통령에게 올린 보고서 내용이 李부장에게 넘어가는 것이었다. 李부장이 尹장군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그렇게 못마땅하냐』고 말한 적도 있었다. 尹장군은 李부장에 대한 대통령의 신임이 굳다는 판단을 한 뒤에는 그에 대한 견제役을 회피했다.
 
 
  『군인이 국회로 진출해야』
 
  尹장군은, 李부장이 평양에 들어가서 金日成을 만나고 온 뒤엔 그에 대한 평가도 달리 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李부장과 尹장군 두 사람의 측근이 나서서 권부의 2大 실세를 친하게 만들고 있었다. 朴대통령으로서는 심기가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1972년 10월17일의 유신선포와 동시에 계엄령이 선포된 직후 李厚洛 정보부장은 요인들을 초대하여 저녁 식사 자리를 마련했다. 尹必鏞 수경사령관도 초청되었다. 尹장군이 그 자리에 가보니 李부장 이외에 朴鐘圭 경호실장과 대기업 회장 몇 명도 있었다. 尹장군은 『계엄下인데 두 사람 이상이 모이면 내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이건 불법집회입니다』라고 농담을 했다.
 
  李부장은 『그래서 우리가 尹장군을 모신 것이 아닙니까. 계엄업무로 고생하시는데 우리가 격려금이라도 내놓아야겠습니다』라고 했다. 李부장은 참석자들의 지갑을 털게 해서 수백만원을 몽땅 尹장군에게 건네주었다. 이날 尹장군은 軍 선배인 李부장을 『형님』이라고 불렀다. 尹장군은 또 李부장에게 『앞으로 구성될 국회에는 軍 출신들이 많이 들어갈 수 있도록 해주시오』라는 부탁도 했다.
 
  『이제 어차피 계엄정치를 하게 되었으니 군인이 정치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러려면 유정회 의원의 3분의 1을 장군, 영관, 위관급 출신자들로 메워야 합니다. 태국처럼 군인들이 국회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게 대통령한테 건의해 주시오』
 
  李부장은 『각하께 보고하여 30석 정도는 마련해 보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尹장군이 나중에 들으니 이런 보고를 받은 朴대통령이 『건방진 놈들, 지들이 뭔데 국회의원을 마음대로 고르려고 해』라면서 화를 냈다는 것이었다. 이런 모습들을 대통령 편에 서서 지켜보던 이가 朴鐘圭 경호실장이었다.
 
  尹必鏞 사건의 단초가 된 뉴코리아 골프장에서의 申範植 사장의 提報도 朴鐘圭 실장이 미리 그 이야기를 듣고 자연스럽게 대통령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그 자리를 마련했던 것으로 보인다.
 
 
  골프장에서 있었던 일
 
  尹必鏞씨는 자신이 거세된 경위에 대해서는 이렇게 설명했다.
 
  『1972년 말인가, 1973년 초인가 하루는 朴鐘圭 경호실장이 저를 보자고 하더니 전날 뉴코리아 골프장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골프 한 코스를 돈 뒤 커피숍에서 朴대통령, 申範植 당시 서울신문사장, 朴鐘圭경호실장이 담소를 하고 있었다. 申사장이 느닷없이 이런 말을 꺼냈다는 것이다.
 
  『각하께서 연만하시니 더 노쇠하시기 전에 후계자를 키우셔야 한다는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李厚洛 부장이 후계자로 좋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朴대통령은 『미친 놈들, 내가 아직 노망하려면 멀었는데』라고 대수롭지 않게 받았다. 세 사람은 다시 골프장으로 나갔다. 골프를 다 치고 필드에서 나왔을 때 朴대통령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그는 申사장에게 무섭게 물었다.
 
  『아까 그 말 말이야, 누가 그런 소릴 했어? 李厚洛이가 그랬나?』
 
  朴鐘圭의 설명에 따르면 申사장은 그 자리에 꿇어앉았다고 한다.
 
  『이름을 못 대겠습니다』
 
  朴실장이 권총을 뽑아 『이름을 대라』고 위협했다는 것이었다. 申사장은 『尹必鏞 장군이 그럽디다』라고 했다는 게 朴실장의 설명이었다. 尹사령관은 그 말을 듣자마자 피가 역류하는 듯하여 전화기를 들고 申사장을 부르려 했으나 朴실장이 말렸다. 朴실장은 『이 문제는 나한테 맡겨 주십시오』라고 했다.
 
  『제가 형무소에 있으면서 아무리 생각해도 왜 申씨가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이해가 안 돼, 어떤 추리까지 해 보았습니다. 그때까지 申씨는 저와는 가깝고 李부장과는 사이가 아주 나빴어요. 그런데 7·4 성명과 유신 이후에 李부장의 힘이 세어지니까 혹시 李부장이 후계자가 되면 어쩌나 하는 공포심에서 직접 각하의 의중을 시험해 보고자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닐까…. 그러다가 무섭게 추궁하니까 다급해서 내 이름을 갖다 붙인 것이고…. 대통령께서도 제가 그런 말을 했다고 하면 가볍게 넘겨 버릴 것이란 계산에서 말입니다. 그전에 申씨와 함께한 술자리에서 노망 운운하는 이야기가 오간 적은 있었습니다』
 
  尹씨에 따르면 유신선포 뒤의 어느 날 申씨가 尹사령관, 鄭韶永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 金詩珍 민정수석비서관, 육군본부 池聖漢 대령 등을 이태원 식당으로 초대하여 대접을 했다. 이 자리에서 申씨는 대강 이런 뜻의 말을 했다는 것이다.
 
  『각하께 정말로 충성하는 분이라면 「각하께서 연만하셔서 노쇠하시기 전에 청와대를 물러나십시오. 우리가 모시겠습니다. 그러면 영원한 대통령이 되십니다」 이렇게 말씀드려야 합니다. 그런 말씀을 하실 분은 尹장군뿐이십니다』
 
  尹사령관은 『술집에서 당치도 않은 말씀하십니다』면서 입을 막았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조사받을 때 보니 申씨가 한 말은 내가 한 말로 돼 있고, 내가 한 좋은 말은 전부 거두절미하여 오해하기 좋게 만들어 놓았더군요』
 
  尹必鏞 사건의 발단이 되었다는 뉴코리아 골프장에서 있었던 일은 언제인가? 기자가 입수한 朴대통령 업무일지 1972년11월호분을 찾아보았다. 이 무렵은 유신조치에 따른 비상계엄 기간임에도 朴대통령은 골프장에 자주 나갔다. 申範植 서울신문사장이 말동무로 따라다녔다.
 
  11월5일 한양 컨트리 클럽에서 대통령, 朴경호실장, 申範植 회동.
 
  11월12일(일) 대통령, 경호실장, 申範植이 뉴코리아 골프장行(이것이 朴실장이 말한 문제의 회동으로 추정되나 1973년 초의 일이라는 주장도 있다).
 
  11월18일에도 뉴코리아 클럽에서 골프.
 
  흥미로운 것은 이 무렵 朴대통령이 尹必鏞 수경사령관은 거의 만나지 않고 육군보안사령관 姜昌成 소장을 자주 청와대로 불러 만나고 있었다는 점이다. 尹장군에 대한 감시역인 姜장군을 대통령이 자주 만난다는 것은 尹장군에 대한 신임이 약해졌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특히 유의할 대목은 11월12일의 뉴코리아 골프장 회동 직후 姜昌成 사령관의 청와대 출입이 부쩍 잦아졌다는 점이다.
 
 
  姜昌成 보안사령관
 
  1972년 11월14일 오전 朴대통령은 姜장군을 불러 약 30분간 요담했다. 그 이틀 전의 골프 회동 때 申範植 사장의 提報가 있었다면 이날 朴대통령은 姜장군에게 수경사령관과 李厚洛 부장의 관계에 대한 뒷조사를 지시했을 가능성이 크다.
 
  11월18일에도 대통령은 姜장군을 초치하여 약 한 시간 동안 이야기했다. 그 이틀 뒤 姜昌成 장군은 또 대통령에게 불려와 약 40분간 요담했다. 11월29일에도 姜장군은 대통령을 만나 35분간 軍內의 동향을 보고했다. 尹장군에 대한 첩보수집 결과도 알렸을 것이다.
 
  尹必鏞 사건의 진행과정에 대한 각자의 주장을 검증하려면 1973년 3, 4월의 朴대통령 업무일지를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朴대통령은 전해 11월 뉴코리아 골프장에서 申範植 서울신문사장으로부터 尹必鏞 수경사령관의 불순한 언동에 대해서 보고를 받은 지 넉 달 만인 1973년 3월8일에 姜昌成 육군보안사령관을 불러 수사를 지시한다.
 
  이 넉 달 동안 朴대통령은 姜장군, 朴鐘圭 경호실장, 그리고 軍內의 다른 루트를 통해서 尹장군에 대한 첩보를 보고받고 숙청을 결심하기에 이른 것이다. 尹장군의 발언뿐 아니라 李厚洛 정보부장과의 밀착이 수사 지시의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1973년 3월8일 낮 12시7분에 朴대통령은 姜昌成 소장을 초치하여 35분까지 28분간 尹사령관에 대한 수사지시를 내렸다. 姜장군은 『대통령이 나에게 수사를 지시하면서 「全斗煥 준장에게도 물어 봐」라고 말했다』고 기억한다. 朴대통령은 한 장짜리 보고서를 건네주면서 『직위 고하를 막론하고 철저히 조사하라』고 강조했다. 그 보고서는 申사장의 제보가 요약된 것이었다. 姜장군이 대통령 집무실에서 물러나오는데 朴鐘圭 경호실장이 들러 주었으면 좋겠다는 연락을 해왔다. 경호실장 방에 들렀더니 朴실장은 대단히 흥분하여 『모조리 잡아 넣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姜昌成 보안사령관은 수사관들에게 조사를 지시하고, 별도로 수도경비사 소속의 지휘관 몇 명을 불러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수사에 저항하지 말고 협조해 달라』고 당부, 사전조치를 취했다는 것이다. 姜사령관은 尹必鏞 소장에게 전화를 걸어 『퇴근길에 한번 들러 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두 사람은 육사 8기생으로 동기생인데다가 장성진급도 같은 날에 했다. 姜씨가 중앙정보부 차장보와 육군보안사령관을 거치는 동안 수도경비사령관인 尹소장과는 업무상으로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왔었다. 姜소장은 尹소장에게 수사에 착수했음을 알렸다. 尹소장은 모함이라고 펄쩍 뛴 뒤 『모든 것을 姜사령관에게 맡길 것이니 선처해 달라』고 했다고 한다.
 
  姜소장은 『이 문제를 푸는 길은 각하께 찾아가 사과하는 것뿐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尹장군은 3월9일 해임되고 보안사로 연행된다.
 
 
  『너도 그 자리에 있었다면서?』
 
  바로 이 무렵 池聖漢 육군본부 중앙수사단장(대령)에게 金詩珍 정보비서관이 전화를 걸어왔다. 金비서관은 떨리는 목소리로 『빨리 내 방으로 오라』고 했다. 池聖漢 대령은 청와대 비서실에서 현역으로 근무했고 朴대통령의 신임도 두터웠다. 池대령이 金비서관을 찾아갔더니 『그날 우리 尹장군 하고 저녁 먹은 날이 며칠이지?』하고 물었다.
 
  池대령은 『작년 연말입니다』라고 했다. 申範植 서울신문사장의 부탁으로 이태원동 식사 자리를 만든 것이 池대령이었다.
 
  金비서관은 그 몇 시간 전에 朴대통령에게 불려갔다는 것이다. 대통령은 대뜸 『내가 너를 신임하여 그 자리를 맡겼는데 못된 자들 하고 돌아다니면서 술이나 마시고 나를 두고는 영감이니 노망이니 뭐니 그 따위 소리만 한다면서. 너도 그 자리에 있었다면서?』
 
  朴대통령이 말한 그 자리란 尹必鏞, 申範植, 鄭韶永, 金詩珍, 池聖漢이 만났던 이태원동의 식사자리였다. 金비서관은 『각하, 그 자리에서는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다. 대통령은 『이 친구야, 더 알아봐』라고 했다.
 
  池대령도 그 식사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대통령에게 불경스러운 이야기는 나온 적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池대령은 청와대에서 바로 수도경비사령부로 직행했다. 尹必鏞 장군은 장교식당에서 식사 중이었다. 池대령이 『그날 申範植 사장과 만났을 때 무슨 말씀을 하신 겁니까』라고 물었다. 尹사령관은 『허, 왜 자꾸 그것 가지고 이야기가 있는지 모르겠네. 얼마 전에도 朴鐘圭 경호실장이 나한테 그것을 물어와서 내가 다 이야기해 주었는데…』라고 했다. 尹사령관은 이런 부연설명을 했다.
 
  『그날 식사자리에서 나와 申사장이 화장실에 다녀오다가 홀의 소파에 앉아 이야기를 하던 중 그 이야기가 나왔다. 申사장과 「이제부터는 朴대통령이 건강하셔야 한다, 각하의 판단이 흐려지시면 물러날 시기를 우리가 알려드려야 한다」는 정도의 이야기를 했다. 그게 전부인데 왜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다』
 
  池대령은 다시 申範植 서울신문사장을 찾아가 물었다. 申사장도 『맞아, 맞아. 尹장군이 말한 게 맞아』라고 했다. 안심한 池대령은 金詩珍 정보비서관을 찾아가 자신이 파악한 내용을 보고했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鄭韶永 경제수석 비서관이 들어왔다. 이태원동 식사모임의 동석자였던 그도 조금 전에 朴대통령에게 불려갔다는 것이다. 대통령은 『자네도 그 자리에서 날 욕했다면서』는 취지로 이야기했다고 한다. 鄭수석은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고도의 모략입니다』라고 말했다. 鄭韶永 수석이 대통령 집무실을 물러나오는데 대통령이 전화 단추를 누르더니 『姜昌成 보안사령관 대줘!』라고 말하는 게 등 뒤로 들렸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金詩珍 비서관은 그 자리에서 姜昌成 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金詩珍 비서관이 각하께서 오해하고 있다는 취지로 이야기했더니 姜사령관은 이렇게 말했다.
 
  『무슨 말씀입니까. 尹사령관이 불경스런 이야기를 했다는 것을 申範植 사장이 다 시인했습니다. 보안사에서 조사했고 그때 申範植 사장이 그렇게 진술했습니다』
 
  金詩珍 비서관은 얼굴이 하얗게 되더니 『申시장이 시인했대. 나도 이제 그만둬야겠어』라고 했다. 池聖漢 대령은 『가만 계십시오. 제가 한번 더 갔다 오겠습니다』라고 말한 뒤 申範植 사장을 다시 찾아갔다. 외투 속에 녹음기를 숨기고 가서 대화를 녹음했다. 申사장은 『내가 시인을 했다고? 무슨 소리야 아까 말한 그대로야』라고 했다. 池대령은 『틀림 없지요?』라고 확인을 받은 뒤 사장실을 나와 녹취록을 작성하여 金詩珍 비서관에게 전달했다.
 
  申사장은 池聖漢 대령이 나간 뒤 姜昌成 보안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신변보호를 요청했다고 한다. 池聖漢 대령도 며칠 후 구속되어 다른 尹必鏞 계열사람들과 함께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재판에 넘겨졌던 그는 나중에 무죄로 석방되었다.
 
  전역 뒤 기업인으로 변신했고, 마주협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던 池聖漢씨는 『이 사건은 유신조치 뒤에 영향력이 커진 李厚洛 부장과 尹사령관이 밀착되어 가는 것을 의심하고 있던 朴正熙 대통령에게 朴鐘圭, 申範植 두 사람이 과장된 보고를 올린 것이 계기가 되었다. 수사를 지시받은 姜昌成 보안사령관은 尹사령관이 군복을 벗기는 선에서 그쳤으면 좋은데 가혹한 수사로 억울한 희생자를 너무 많이 만들었다』고 평했다.
 
 
  朴대통령, 李厚洛을 안 만나 줘
 
  朴대통령 업무일지를 살펴보면 姜소장의 육군보안사령부는 즉각적으로, 또 집중적으로 尹必鏞 사령관과 그 계열 장교들에 대한 수사에 착수한 뒤 수시로 대통령에게 상황을 直報했음을 알 수 있다.
 
  3월9일 朴대통령은 오전 10시10분부터 37분간 姜장군의 수사착수 보고를 들었다. 그 한 시간 뒤 朴대통령은 劉載興 국방장관과 李敏雨 육군참모차장을 불러 尹必鏞 수경사령관의 교체를 지시했다. 후임은 육사 8기인 陳鍾埰 소장이었다.
 
  이날 오후 3시25분 李厚洛 정보부장은 대통령을 만나 약 55분간 업무보고를 했다. 자신의 운명에 큰 그림자를 남기게 될 尹必鏞 수사가 시작된 것을 알았을 李부장은 상당히 불안했을 것이다.
 
  다음날인 3월10일에도 姜昌成 사령관은 오전 9시27분부터 30분 동안 수사상황을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보안사령관이 거의 매일 대통령에게 직보하고 있었다. 이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수도권의 안전을 책임진 수경사사령관에 대한 조사였음으로 대통령도 신경을 무척 썼다. 대통령은 3월12일 오전 10시55분 신임 수경 사령관 陳鍾埰 소장을 불러 부대 장악에 만전을 기하라고 지시했다.
 
  1973년 3, 4월 중 朴대통령의 업무일지를 보면 중대한 변화가 감지된다.
 
  姜昌成 육군보안사령관이 하루가 멀다 하고 대통령을 獨對하여 보고를 하는 동안 거의 매일 대통령을 만나던 李厚洛 정보부장의 청와대 출입이 줄어든다. 朴대통령이 부르지 않았던지 면담요청을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3월21일에서 4월2일까지 朴대통령은 李厚洛 정보부장을 한 번밖에 만나 주지 않았다. 그 한 번이란 것도 15분간의 보고였다. 4월3일 李부장으로부터 약 50분간 보고를 받았던 대통령은 다시 4월8일까지 그를 만나 주지 않았다. 그가 4월9일 밤 10시에 李부장을 만나 준 시간은 불과 5분이었다.
 
  거의 매일, 하루에도 몇 차례 찾던 정보부장을 대통령이 근 보름간이나 소외시켜버린 것이다. 이 기간에 姜昌成 육군보안사령관은 대통령에게 獨對보고를 세 번 올렸다. 그 보고의 핵심은 尹必鏞과 李厚洛 부장의 밀착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朴대통령은 이 기간 중 金致烈 정보부 차장을 한 번 불러 결재를 해준 것으로 나타나 있다. 노골적으로 부장을 따돌린 셈이었다. 朴대통령이란 태양의 둘레를 도는 행성에 불과했던 李厚洛 부장의 초조와 불안은 대단했을 것이다. 朴대통령은 이런 조치를 통해서 李부장에게 확실한 경고신호를 보낸 것이었다.
 
  朴대통령이 이 무렵 李厚洛 정보부장에 대해서 의구심을 갖고 보는 대목이 또 하나 있었다. 朴대통령은 1972년 5월에 평양에 가서 金日成을 만나고 와서 하는 행동에서 북한 측의 영향을 감지했던 것이다. 7·4 공동성명 문안부터 북한의 對南공작노선을 상당히 반영하였고, 한때 李厚洛 부장은 북한 측이 요구하는 보안법 폐지를 추진하다가 金鍾泌 총리의 강한 반대와 朴대통령의 신경질적인 반응에 부딪혀 포기한 적도 있었다.
 
  朴대통령은 남북회담을 하면서도 金日成의 약속이나 말에 아무런 신뢰를 두지 않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자료가 있다. 1972년 8월 남북적십자 본회담이 평양에서 열렸다. 朴대통령은 돌아온 남측 대표 李範錫씨 일행을 격려하는 자리에서 북한당국을 상대할 때의 지침을 내렸다.
 
 
  [남북적십자 본회담 시 朴대통령 지침]
 
  1. 평양에서 있었던 일은 공식·비공식을 막론하고 모두 보고해야 한다.
 
  2. 공산주의자들과 접촉할 때는 사전에 전략을 세워놓고 해야 한다.
 
  3. 북한 위정자들과 우리가 핏줄이 같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4. 우리 적십자사는 인도적 사업이라고 보나 북한은 정치적 사업으로 본다.
 
  5. 북한 요인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모두 정치적이다.
 
  6. 우리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는 신념이 있어야 한다.
 
  7. 술을 마실 때도 상대방이 공산당이란 사실을 잊지 마라.
 
  8. 북한 사람들과는 어떤 자리에서도 감상적으로 흐르지 마라.
 
  9. 북한이 남한 언론을 비판하면 자문위원들은 즉각 반박하라.
 
  10. 대표단과 자문위원 사이는 긴밀한 협의를 하되 매일 저녁 결산토록 하라.
 
 
  당시 權府에서 李厚洛 부장의 獨走를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던 이는 金鍾泌 총리와 朴鐘圭 경호실장이었다. 尹必鏞의 수경사와 姜昌成 소장의 보안사는 전통적으로 라이벌 관계였다. 이런 권력 갈등하에서 李부장과 가까워진 尹必鏞 장군이 도마 위에 오른 것이다.
 
  尹必鏞 사건은 李厚洛 정보부장을 초조하게 만들었고, 그가 대통령의 신임을 다시 얻기 위하여 저지른 金大中 납치사건은 결국 자신의 몰락을 불렀다. 金大中 납치에 대한 일본 언론의 집중보도로 생긴 反韓감정 속에서 文世光의 살의가 탄생하여, 陸英修 여사 피살을 부른다. 이 사건으로 朴鐘圭 실장은 해임된다. 陸여사의 퇴장은 朴대통령의 내면을 흔들어 결국 그의 몰락으로 이어진다. 尹必鏞 사건 수사에 따른 군맥의 浮沈(부침)은 5공화국 출범에도 흔적을 남긴다.
 
  尹必鏞 세력 제거는 그 영향의 심도에서 朴대통령 시절의 최대 사건이다.
 
 
  구속 면한 李厚洛
 
  육군보안사령부의 수사에서 드러난 사실은 尹장군에 의한 후계자 옹립說과는 거리가 멀었다. 尹장군이 申範植, 金詩珍 정보비서관 등과 어울려 술을 마시면서 朴대통령의 건강과 후계자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한 부분과, 尹소장이 李厚洛 중앙정보부장을 찾아가서 역시 후계자 옹립문제 등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일종의 「불경죄」로 몰리게 된 것이란다.
 
  朴대통령의 업무일지를 보면 수사 착수 18일째인 3월26일 姜昌成 사령관은 오전에 약 2시간에 걸쳐 대통령에게 중간수사 결과를 보고했다. 3월29일 姜사령관은 서재에서 대통령에게 수사보고를 올렸는데, 오후 2시12분부터 세 시간이 걸렸다.
 
  이 자리에는 朴鐘圭 경호실장과 金正濂 비서실장이 동석했다. 보고를 다 들은 뒤 朴대통령은 노기를 띠며 『李厚洛이까지도 잡아 넣어』라고 했다는 것이 姜씨의 증언이다. 朴실장도 이에 동조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姜사령관은 수사를 확대하지 않도록 건의했다는 것이다. 金실장도 거들고 해서 결국 尹소장과 그 부하들만 처리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姜소장은 『각하의 측근이 모반했다는 인상을 주면 정치하는 데 어려움이 따를 것이니 이 사건은 일반 형사사건으로 만들어 발표해야 한다』고 건의해 尹장군과 그 부하들을 수뢰·직권남용 등의 죄명으로 처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金正濂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은 「李厚洛부장까지 구속해야 한다」는 姜사령관의 수사보고에 대해서 『그렇게 하면 대통령의 권위가 손상되니 당분간 보류하면 좋겠다』는 건의를 자신이 했고, 姜사령관도 동의하니 대통령이 건의를 받아들였다고 회고록에서 밝혔다. 金실장의 증언은, 姜소장의 주장과는 다소 뉘앙스가 다르지만 李厚洛 정보부장이 감옥行을 할 뻔했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姜昌成 육군보안사령관은 尹必鏞 사령관 수사를 하다가 그가 후원했던 軍內의 정규육사 출신 사조직인 하나회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이들에 대해서도 수사를 진행했다. 하나회의 회장인 全斗煥 준장, 前 회장인 權翊鉉 대령, 盧泰愚 대령도 조사대상에 포함되었다.
 
  姜사령관의 증언.
 
  『대통령의 최종결심을 받기 위해서 차트에 하나회 조직표를 그려 대통령에게 가지고 갔지요. 당시 하나회 회원들이 70~80명 되었을 것입니다. 대통령은 한 사람, 한 사람 이름 위에 직접 ○,× 표시를 하면서 「全斗煥이든 盧泰愚이든 尹必鏞과 어울려 못된 짓을 했으면 다 잡아 넣어」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姜사령관의 증언에 따르면 朴鐘圭 경호실장이 全·盧 두 사람을 적극적으로 비호하여 다치지 않도록 했다고 한다. 하나회는 朴대통령의 애호下에서 조직되었으므로 姜사령관이 이 조직을 깊게 수사할 수 없었다.
 
  1973년 여름 朴대통령은 태릉 골프장에서 朴鐘圭 경호실장, 姜昌成 사령관, 崔宇根 육사교장과 함께 골프를 쳤다. 朴대통령은 姜사령관에게 조용히 『姜장군 때문에 경상도 장군의 씨가 마른다고 불평이 커』라고 말했다. 골프장에서 돌아와 보니 자신이 3관구 사령관으로 발령이 나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姜장군은 『나중에 알고 보니 李厚洛이 陳鍾埰 수경사령관을 시켜 나의 경질을 건의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권력운용의 화신」으로 불리는 朴대통령은 보안사령관을 시켜 수경사령관을 치고 정보부장을 혼내 주게 한 뒤 다시 그 보안사령관을 친 것이다. 姜사령관이 대통령의 친위세력으로 자라고 있던 하나회 장교들을 친 것이 조직적 반발을 부른 측면도 있다.
 
  姜장군은 중장으로 진급하지 못하고 전역한 뒤 항만청장으로 일하던 중 10·26 사건 후 全斗煥 등 하나회 출신들의 득세를 목격했다. 항망청장에서 물러난 뒤 그는 수뢰혐의로 구속기소되어 2년5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尹必鏞 세력을 친 데 대한 보복이었다.
 
 
  호랑이를 기른 격
 
  尹必鏞씨는 스스로 『내가 朴正熙 대통령의 측근에 가장 오래 있었던 사람이다』고 말한다. 물론 朴正熙의 군대 시절부터 계산해서다. 1954년 朴正熙 준장이 5사단장으로 부임하여 대대장인 그를 군수참모로 발탁한 뒤 1973년 3월 구속되어 군복을 벗을 때까지, 꼭 20년간 朴正熙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닌 것이 尹必鏞씨다. 朴正熙 장군은 5사단장, 7사단장, 1군참모장, 군수기지사령관, 1관구사령관으로 자리를 옮길 때마다 尹중령을 데리고 다니면서 군수참모, 참모장, 보좌관, 비서실장 등 최측근 요직에 앉혔다.
 
  朴대통령은 5·16 뒤에도 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 육군방첩대장, 수도경비사령관 등의 권력핵심부에 그를 두었다. 朴대통령과 직접 인연을 맺은 20년간의 軍 생활 가운데 15년간은 거의 매일 朴대통령을 만날 수 있는 자리에 있었다. 따라서 그는 朴正熙를 가장 잘 아는 사람으로 꼽힌다. 더구나 그는 朴正熙의 인정뿐 아니라 비정까지 맛본 사람이다.
 
  尹씨는 그토록 오랫동안 모셨던 朴대통령과 금이 가게 된 계기는 「尹必鏞 사건」 훨씬 전이었다고 말했다.
 
  『朴대통령이 두 번의 임기로 그만두신다는 것이 기정사실로 되어 있었던 1967년 어느 날에 제(당시 육군방첩대장)가 청와대에 들어가 진언을 했어요. 「후계자에게 모든 것을 맡겨 버리면 너무 무책임한 것 아닙니까. 공약사항도 다 못 지킨 것이 있고 하니 각하께서 당 총재로서 계속 후계자를 뒷바라지해야 할 것으로 봅니다. 총재실을 개편하도록 하십시오」 이렇게 말씀드렸는데 그분의 반응이 너무나 의외였습니다. 좀처럼 언성을 높이지 않으시는 분인데 벌떡 일어나시더니, 「네 할 일이나 잘 해!」 하고 호통을 치시는데 내 평생에 그렇게 화난 표정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 이튿날 다른 일로 李厚洛 실장 방에 가 있는데 朴대통령께서 지나치다가 들어오셔서, 「어이, 李실장, 내가 어제 尹장군에게 기합을 넣었는데, 자네가 오늘 한 번 더 기합 줘!」 하십디다. 저는 그것으로 그분의 분이 풀린 것으로 알았는데, 다음날부터 청와대 면회가 잘 안 되더니 얼마 뒤 사단장으로 전보되었어요』
 
  이때 朴대통령은 3選개헌을 구상하고 있을 때였다. 그것을 모르는 尹준장이 정권이양 뒤의 후견인 역할을 건의하자, 아픈 곳을 찔린 반사작용으로 그토록 화를 냈던 것으로 보인다.
 
  尹준장은 1968년 1월8일자로 소장으로 진급했다. 육사 8기생 가운데 가장 빨랐다. 그는 진급과 함께 방첩부대장에서 일선 사단장으로 전보되었다. 사단장으로 있을 때 金聖恩 국방장관이 부르더니 『얼마 전 각하를 만났는데 尹장군에 대해서 좋지 않은 말씀을 많이 하시더라』고 했다.
 
  『그토록 키워 주었는데, 호랑이를 기른 격이 됐다고 말씀하시더랍디다. 저는 「임기문제에 대해서 제가 한 이야기를 아직도 오해하시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뒤 제가 駐越 맹호부대장으로 임명되어 베트남에 가게 되었습니다. 출발하기 며칠 전에 대통령께서 직접 전화를 걸어서 식사를 같이 하고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청와대에서 단 둘이서 식사를 함께 했습니다.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서 제가 말씀을 드렸지요. 「각하는 높은 데서 넓게 보시고, 저는 낮은 데서 좁게 보기 때문에 각하께 불충한 말씀도 많이 올렸는데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분은 저의 손을 잡더니, 「괜찮아, 괜찮아」라고 하셨어요. 이것으로 오해가 풀린 것으로 알았습니다』
 
 
  사람을 쓰고 버리는 사람
 
  尹必鏞 소장은 베트남에서 귀국한 직후인 1970년 1월 수도경비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사실은 그때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 내정돼 있었어요. 그런데 당시 軍內의 인맥이 徐鐘喆 참모총장 그룹과 金載圭 보안사령관·韓信 장군 등 2기생 그룹으로 갈라져 있었어요. 徐총장 쪽에서 저를 천거한 겁니다. 대통령께서 徐총장의 천거를 받아들이긴 했지만 석연찮은 표정이었다는 이야기를 뒤에 들었습니다』
 
  尹必鏞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은 1971년 4월의 대통령 선거 뒤 朴대통령이 『국가안보를 정략적 차원에 맡겨선 안 된다. 이렇게 돈 드는 선거를 해선 국가적 낭비다. 먹고살 정도로 돼야 민주주의가 가능한 것 아닌가』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뭔가 새로운 구상을 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朴대통령이 춘천에서 육사 8기생 출신 사단장들과 술을 함께 마신 뒤 이렇게 말했다는 정보도 尹소장에게 들어왔다.
 
  『너희들이 尹必鏞이 동기생이구먼. 겁나는 것은 金大中이가 아니야. 尹必鏞이 겁이 나』
 
  尹必鏞씨는 『그때 국방장관이나 육군참모총장을 결정할 때는 나의 의견이 가장 많이 반영된 것도 사실이다』고 했다.
 
  尹장군은 朴대통령이 자신을 친 것은 『역적모의를 했다고 해서가 아니고 李厚洛 부장에게 경고를 보내기 위함이었다』고 해석했다.
 
  『저는 朴대통령이 사람을 쓸 때 그 사람됨을 훤히 알고 일정기간 쓰신 다음엔 버리신다는 것을 잘 알고 또 각오도 하고 있었습니다. 朴正熙란 보호막이 무너진다면 제일 먼저 희생되는 것은 저라고 생각하고 있었죠. 朴대통령은 실수 없는 분입니다. 내가 모의하지 않았다는 것을 모르실 분이 아니에요.
 
  金鍾泌은 탄압해서 다스렸고, 李厚洛은 그저 잔재주 피우는 것을 받아 주면서 다루었죠. 李부장이 金日成을 만나고 와서 우쭐대는 것 같으니까 모델 케이스로 나를 치면서 「너희들도 똑바로 해」라는 경고를 보낸 것이지요.
 
  내가 잡혀 들어간 뒤 金炯旭 前 정보부장이 도망가고, 李厚洛씨도 부장에서 해임된 뒤 장기간 외국으로 피해 있다가 보장을 받고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제가 당한 뒤로는 측근들 사이에 누구 누구가 친하다는 말이 없어졌어요. 親JP니 反JP니 하는 말도 사라졌어요』
 
  朴대통령은 친자식처럼 아끼던 尹장군을 희생양으로 삼아 권력핵심부를 정리정돈했다는 이야기이다.
 
  朴대통령은, 1971년 10월의 항명파동 때 여당內의 독자세력(4인방)을 숙청한 데 이어 자신의 권력측근들 안에서도 독자세력을 이룰 만한 소지를 없애 버렸다는 이야기이다.
 
  유신체제의 목표인 국력의 조직화와 능률의 극대화에 방해물이 될 만한 여권內 정치세력을 정리해 버린 것이다. 일견 朴대통령은 국정에 전념할 수 있는 정지작업을 완료한 듯했으나 여기에 함정이 생기고 있었다.
 
  李厚洛은 尹必鏞 사령관의 숙청이 자신을 겨냥한 것이며, 대통령의 신뢰가 약해지고 있음을 알고 대책을 강구한다. 이즈음부터 대통령에 대한 그의 보고 때마다 「해외에서의 金大中 反韓활동」 항목이 올라간다. 그는 「죽을 꾀」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朴대통령은 처음엔 반응이 없었으나 같은 보고가 계속되자 『정보부는 왜 발생보고만 올리나. 대책은 없는가』라고 말했다.
 
 
  『나를 환송할 시간에 일이나 하지』
 
  1973년 4월15일 저녁.
 
  鮮于煉 공보비서관이 당직을 하고 있는데 朴대통령이 불렀다. 朴대통령은 의전 비서실에서 약 20분간 얘기를 나누었다. 기자 출신인 鮮于煉은 거침없이 이야기했다.
 
  『현재 고위층 관리들, 특히 장관들이 시책을 펴 나가는 데 있어서 대통령으로부터 점수 따는 일에만 열중하는, 이른바 「포인트주의」가 성행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각하로부터 치하 말씀 듣는 것에 중점을 두다 보니 개중에는 국민이 불편을 느끼는 일들을 서슴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름철을 앞두고 양수기, 管井(관정) 등 수리 기재와 시설, 그리고 저수지 등의 관리가 엉망인데도 불구하고 감독 기관장들이 각하의 꾸지람을 들을까 염려하여 서로를 감싸 주면서 각하께 보고하지 않는 사례가 허다합니다』
 
  그는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했다.
 
  『북괴가 허위 선전하고 있는 6·25 북침설에 대해 언론기관에서 이를 반박하려 했으나, 남북회담을 의식한 당국의 제지로 언론이 북괴 주장을 반박하지 못한 사실이 몇 번 있습니다』
 
  鮮于煉씨가 보고를 하는 동안 대통령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보고가 끝나자, 대통령은 그제야 눈을 뜨고 입을 열었다.
 
  『장관들이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 같아. 요즘 정신이 해이해진 것은 사실이야. 유신이 자기들 하는 일을 편하게 해주기 위해 만든 것으로 착각들을 하고 있어.
 
  내가 듣기에는 고급 관리들이 유신을 내세워서 오히려 일을 간단히 편하게 해나가는 것 같아. 이런 것들을 잘못하면 내가 생각했던 유신의 본뜻을 국민들이 왜곡하여 해석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어. 나는 유신 단행 후 공무원들이 일을 간단하게 해치운다는 소리를 몇 번이나 들었는데, 「아비 마음을 아들이 모른다」고 하는 우리 속담을 연상하게 되는구먼』
 
 
  1973년 5월10일.
 
  청와대 근무자들에 대한 대통령의 특별 지시가 있었다.
 
  <첫째, 비서관이나 행정관 및 고용직 전원은 출근 시간을 엄수할 것.
 
  둘째, 근무시간 중에는 외출을 금할 것.
 
  셋째, 공용 외출 시에는 상급자에게 사전 승인을 받고 연락처를 명백히 할 것.
 
  넷째, 외식은 전원 금하고 부처와의 연락·타협을 위한 오찬도 금할 것. 단, 외국 인사와의 오찬이나 실장의 승인을 받은 공식 오찬은 제외한다.
 
  그리고 이들 사항을 위반할 때는 즉각 파면한다>
 
  전날 낮에 대통령이 급히 張禮準 상공장관을 불렀는데 세 시간이 넘게 연락이 없었던 것이 이 지시를 내리게 한 원인이었다. 후에 張장관은 『치과에 갔었는데 비서관들이 모르고 있었다』 라고 해명하였다.
 
 
  1973년 6월13일.
 
  대통령은 비서진 6, 7명을 불러 식당에서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비서관들이 식당에 들어가니 식탁에는 이미 술상이 차려져 있었다. 대통령의 술상엔 거의 대부분 막걸리가 올랐었는데, 이날은 처음 보는 술병이 놓여 있었다. 술병에는 「法酒(법주)」라고 쓰여 있었다.
 
  자리를 잡고 비서관들이 잔을 채우려 하자, 대통령은 『가만히 있어』 하면서 한 사람씩 돌아가며 술을 따라 주었다.
 
  『이게 오늘 처음 나온 법주인데, 이 법주라는 것은 경주 지방에서 내려오는 특주라는 거야』
 
  술잔이 다 차고 모두들 함께 마실 기미를 보이자, 대통령은 다시 제지시키며 말했다.
 
  『잠깐, 처음 나온 법주니 술 좋아하는 鮮于 비서관이 먼저 먹어 보고 평가한 다음에 마십시다』
 
  『합격입니다. 이만하면 괜찮은데요』
 
  『鮮于 비서관이 합격이라니, 이 술 허가해 줘야겠구먼. 그럼 같이 마시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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