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홍기 포철 감독, “나, 청주 가서 대단한 놈 봐서!”
⊙ 成年 이전에 아시안컵 득점왕에 오른 건 최순호가 유일
⊙ “‘뛰는 축구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대세이던 시절… 보기에 따라서는 제 플레이 스타일이 게으르게 보일 수도 있었을 것”
⊙ 박태준 전 포철 회장 총애… 박태준 모친상 때 사흘 내내 빈소 지켜
⊙ 成年 이전에 아시안컵 득점왕에 오른 건 최순호가 유일
⊙ “‘뛰는 축구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대세이던 시절… 보기에 따라서는 제 플레이 스타일이 게으르게 보일 수도 있었을 것”
⊙ 박태준 전 포철 회장 총애… 박태준 모친상 때 사흘 내내 빈소 지켜
- 사진=조준우
축구를 아는 한국인의 마음속엔 제왕(帝王)의 계보(系譜)가 있다. 김용식(金容植·1910~1985년) - 최정민(崔貞敏·1930~1983년) - 이회택(李會澤·1946~) - 차범근(車範根·1953~)으로 이어지는 왕위계승도(王位繼承圖)다. 현재의 제왕은 손흥민(孫興慜), 직전의 에이스는 박지성(朴智星), 그 위로는 황선홍(黃善洪)과 홍명보(洪明甫)가 자리할 터이다.
그렇다면 홍황 쌍웅과 차범근 사이의 제왕은 누구? 전쟁통에도 1만 일 개인훈련을 거르지 않은 축구 구도자(求道者)로, ‘조선과 일본에서 축구’ 하면 떠올리던 이름 김용식, 평양에서 자라 1·4후퇴 때 월남(越南), 태극마크를 가슴에 달고 아시안컵 2연패를 완성한 황금의 다리 최정민, 월북한 부친 탓에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혜성처럼 나타나 아시아를 평정한 방랑검객(放浪劍客) 이회택, 칭기즈 칸 이후 유럽을 석권한 유이(唯二)한 아시아인, 불세출(不世出)의 윙어 ‘갈색의 폭격기’ 차범근의 뒤로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최순호(崔淳鎬·59)다.
“나, 청주 가서 대단한 놈 봐서!”
최순호의 등장은 은둔(隱遁) 절정고수(絶頂高手)가 강호(江湖)에 등장한 과정과 닮았다. 1978년 어느 날, 축구인들 사이에서 소문이 돌았다. 한홍기(韓洪基·1925~1996년) 포항제철 감독이 여러 자리에서 “나, 청주(淸州) 가서 대단한 놈 봐서!”라는 말을 반복한다는 이야기였다. 평안도 출신으로, 마음 놓고 축구를 하기 위해 1947년에 월남, 국가대표 감독을 역임한 한 감독은 과묵하고 진중한 성격이었다. ‘선수 보는 눈은 세계 수준’이라고 자타가 공인하던 점잖은 명감독이, 그토록 신난 표정으로 잔뜩 흥분해서, 만나는 사람마다 자랑한다는 ‘청주의 대단한 놈’은 과연 누구인가.
최순호의 명성(名聲)이 축구계를 넘어 일반계로 넘어온 건 1980년 여름이다. 7월 18일(동대문 1대2 패), 21일(구덕 2대0 승), 23일(동대문 1대2 패)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치른 보아비스타(포르투갈)와의 3연전. 만 18세의 대표팀 막내 22번 최순호는 3경기 연속 득점의 신화(神話)를 쓴다.
놀라운 점은 그 3골의 득점 방식이 모두 달랐고, 한국 축구에서 볼 수 없었던 유형의 득점이라는 사실이었다. 첫 경기 어시스트는 박상인(朴商寅). 페널티 박스 모서리 부근에서 날린 슛이 오른쪽 골대를 맞고 다시 자기 발 앞으로 튀어오자 최순호에게 논스톱으로 패스했다. 슈팅할 때 전진, 공이 골포스트를 맞는 순간 곧바로 돌아 나오던 최순호는 골문을 등지고 뛰어나오는 동작 중에 감각적인 힐킥으로 득점을 올렸다. 두 번째 골은 이영무(李榮武)의 패스를 받아 공을 거의 건드리지 않고 수비를 등진 채 유연하게 턴, 달려 나오는 골키퍼를 보며 골문 구석으로 툭 밀어 넣은 부드러운 한 방이었다. 만 18세 소년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침착하고 정밀하며 여유가 넘치는 터치였다. 3차전 득점은 전반 2분 만에 터진 장쾌한 대포알 슛. 공중볼 경합 상황에서 이정일(李正日)이 머리로 떨궈주자 최순호는 전진해 있던 골키퍼를 바라보며 벼락같은 20m 중거리슛을 욱여넣었다. 골키퍼의 점프 타이밍 자체를 빼앗은 일발 강타였다.
‘뒤에도 눈을 가진 야생마’
언론은 ‘뒤에도 눈을 가진 야생마’가 나타났다며 환호했다. 4월 모스크바올림픽 예선 탈락, 차범근·허정무(許丁茂) 두 기둥의 유럽행, 박상인의 고별경기 후 독일행, 조영증(趙榮增)·조광래(趙廣來)의 부상으로, ‘사상 최약체 대표팀’이라는 우려가 팽배하던 시절이다.
― 이 경기가 대표팀 데뷔전이었나요.
“아닙니다. 그해 6월에 차범근 선배님이 프랑크푸르트 소속으로 내한(來韓) 경기를 하셨잖아요. 그때가 대표팀 데뷔전이었는데 교체 멤버로 들어가 거의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전문가들도 제가 그 경기에 출전했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를 정도입니다.”
보아비스타와의 3연전 이후 어디를 가도 사람들이 최순호를 알아봤다. 거리를 걷기가 불편할 정도였다. 고향에서도 난리가 났다.
그가 명실상부한 국민 영웅으로 떠오른 건 2개월 뒤다. 쿠웨이트에서 열린 제7회 아시안컵. 최순호는 조별리그 첫 경기 말레이시아전 1골(1대1 무승부), 2차전 카타르전 1득점 1어시스트(2대0 승), 3차전 쿠웨이트전 2골(3대0 승), 4차전 UAE전 3득점 1도움(4대1 승) 등 무려 7골을 터뜨리며 득점왕에 올랐다. 충격적인 국제무대 데뷔였다.
20세 이전에 대표팀에 뽑힌 선수들은 더러 있다. 하지만 성년(成年) 이전에 아시안컵 득점왕에 오른 건 아시아 축구 역사상 아직까지는 최순호가 유일하다. ‘손세이셔널’ 이전에 ‘순세이셔널’이 있었던 것이다. 한국은 준결승에서 역사적인 남북대결 끝에 정해원(丁海遠·1959~2020년)의 두 골로 2대1 역전승을 했고, 결승에서는 홈팀 쿠웨이트에 0대3으로 졌다. 남북대결로 탈진한 결과였다.
9월 21일 쿠웨이트와의 예선전. 후반 25분, 권오손(權五孫)의 크로스를 받아 번개같이 나타난 최순호가 무시무시한 스피드로 쇄도하며 속도를 죽이지 않고 점프, 그야말로 핵탄두처럼 날아오르며 강력한 추가 골을 터뜨렸다. 어지간한 킥보다도 빠르고 길게 날아간 ‘빨랫줄 같은 헤드업’이었다. 결승전 때 양측 선수단을 격려하러 피치로 내려온 쿠웨이트 축구협회 회장이 최순호 앞에서 악수한 뒤 잠깐 멈춰 웃으며 이마를 만지고 갔을 정도였다.
해방 후 첫 남북대결
준결승전 대(對)북한전도 화제였다. 당시의 남북대결은 비장미(悲壯美)가 넘치는 초(超)국가적 관심사였다. 축구의 승패가 체제의 우열과 직결된다고 믿는 사람도 많았다. 맞대결 패전(敗戰)의 후유증이 엄청나서, 상대의 전력(戰力)이 강하면 예선리그에서 일부러 지는 한이 있더라도 다른 한쪽이 미리 알아서 피해 갈 정도였다.
1980년 아시안컵 준결승은 남북이 드디어 만나 처음으로 승패를 가리는 역사적인 무대였다. 비기면 승부차기까지 가서 끝을 보는 승부였기 때문이다.
“대회 기간 내내 남북 대표팀이 같은 숙소를 썼어요. 뷔페식당에서 마주치기도 하고… 처음 봤을 때는 ‘언제 와서?’라는 북한 사투리만 들어도 바짝 긴장했었는데, 시간이 지나니까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축구 선수로서도 그 대회는 제가 국가대표 생활에 익숙해지는 과정이었어요. 무서움을 몰랐고, 선수로서 만들어지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죠. 요즘 말로 포텐이, 그러니까 잠재력이 확 터졌어요. 경기 당일, 심리적 압박감이 없지는 않았지만, 다른 경기와 비교해 특별히 더 긴장하지는 않았습니다. 편안했어요. 경기 중에 북한 선수들이 거친 말을 해도 전혀 마음의 동요가 없었죠.”
남북 간 대결은 신경전부터 시작되었다. 북한은 주장 간의 페넌트 교환을 거부했다. 20분 한국 선수의 핸드볼 반칙으로 얻은 페널티킥을 북한 주장 김종만이 골키퍼 오른편 구석으로 정확하게 찔러 넣어 0대1. 북한은 결사적으로 지키는 축구를 하며 스코어를 굳히려고 했다. 중동에서 일하던 근로자 응원단 수천 명의 응원이 이날 승부의 분수령이다.
“종료 15분을 남기고 관중석에서 ‘때려잡자 김일성!’ ‘무찌르자 공산당!’을 연호했어요. 북한 선수들의 몸이 굳는 게 보였습니다. 자기들끼리 눈 마주치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종료 10분 전 조광래 선배의 크로스가 중간에 걸리고 우리 공격진과 북한 수비진이 뒤엉켜서 혼전이 벌어졌죠. 이강조(李康助) 선배가 기어이 크로스를 올렸는데 공이 제 점프를 살짝 넘어갔습니다.”
최순호 뒤에서 뛰어오른 정해원이 정확하게 이마에 공을 맞췄다. 대각선 방향으로 날아간 공은 북한 골문 상단을 꿰뚫었다. 최순호의 점프 때문에, 북한 골키퍼 김강일은 자기 왼편 상단으로 비행하는 볼을 제자리에 서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배구로 치면, 완벽한 시간차 공격이 들어간 셈이었다.
87분, 이번에는 이강조와 이영무가 2대1 패스로 북한 왼편을 돌파, 문전으로 패스를 연결했고, 달려들던 정해원이 왼발 대각선 강슛으로 기적의 역전 골을 성공시켰다. 올드팬들의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전설의 명승부다.
‘한국 축구의 대들보 최순호를 아끼자’
이 무렵부터 최순호의 몸은 자기 것이 아니었다. 그는 ‘대한의 아들’이었다. 1980년 그의 일정표를 보자. 4월 대통령금배 포항제철 소속으로 출전, 5월 대표팀 발탁 후 태릉선수촌 입촌 및 합숙 시작, 6월 프랑크푸르트와 3연전, 7월 보아비스타와 3연전, 8월 국가대표 2진 충무와의 3연전, 8월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우승(6경기 출전 3득점), 9월 아시안컵 참가, 10월 포항제철 소속으로 전국체전 출전, 11월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아시아 청소년대회 동부 지역 예선에서 7골 득점으로 득점왕 등극. 7개월 동안 대표팀, 청소년 대표팀 경기로만 21게임에 나가 20골을 넣었다.
‘한국 축구의 대들보 최순호를 아끼자’라는 신문 기사가 나올 정도였다. 기사에는 ‘최순호 본인이 피로를 호소하고 있다’는 문장이 나오고, “보름만 쉬면 원이 없겠다”는 최순호의 멘트도 실려 있다.
무리(無理)를 이기는 장사는 없다. 부상이 찾아왔다. 그가 1981년 6월의 대통령배에 나서지 못한 이유다. 치료 이후 출전한 경기 중 하이라이트는 1981년 10월 3일부터 18일까지 호주에서 열렸던 제3회 U-20 월드컵이다. 최순호는 한국팀 주장으로 참가, 10월 3일 멜버른에서 열린 첫 경기에서 2득점 2도움의 대활약을 펼치며 강적 이탈리아를 4대1로 꺾는다. 세계적인 명문클럽 유벤투스(Juventus)가 그를 스카우팅 리포트에 올려놓은 계기다.
“경기 후에 이탈리아팀 단장이 찾아왔어요. 이분이 인터밀란 단장이기도 했는데, ‘추천하겠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외국팀의 입단 제안은 1980년 보아비스타가 처음이었죠. 3연전 후 서울 모 호텔에서 통역과 만나자더니 ‘10만 달러를 주겠다’고 하더군요. 잠실 시영아파트가 200만원 하던 시절입니다. 그때는 그 돈이 이적료인지 연봉인지도 몰랐고, 유럽 축구에 대한 동경은 많았지만 정보가 너무 없어서 뭐라고 대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병역(兵役)도 미필이라 출국 자체가 어렵기도 했고요.”
한국은 2차전 루마니아와의 경기를 초반 실점으로 0대1로 내준 뒤 최종전에서 브라질에 0대3으로 완패하며 짐을 쌌다. 유벤투스는 세 경기 내내 최순호를 정밀 관찰했고, 1990년까지 그를 따라다녔다. 플라티니에 버금가는 게임메이커의 가능성을 보았다고 했다. 아시아 최고의 선수가 아니라, 세계 정상급으로 연마(鍊磨) 가능한 희대의 원석(原石)으로 보았다는 뜻이다. 그때, 혹은 보아비스타의 서류에 사인해 최순호가 유럽으로 떠났다면 한국 축구사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초등학교 5학년 때 축구 시작
‘만약에’는 부질없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최순호의 축구계 입문도 절반은 우연이다. 그의 생가는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면 사창리 16번지. 아버지 최시범(崔時範·89)과 어머니 김금신(金今新·2009년 작고) 사이 2남 2녀 중 둘째다. 장형 최경호(67)는 동네에서 수재 소리를 들었다. 형의 명문 청주고 합격이 가족 전체가 청주로 이사한 배경이다.
“형 공부시킨다고 대처로 나온 거죠. 농사일하시던 아버지는 집 짓는 곳 인부 등 여러 가지 일을 하셨고, 어머니도 일거리를 찾아다니셨습니다.”
전학 간 청주 한벌국민학교에 축구부가 있었던 건 한국 축구사의 행운이다. 반 대항 육상경기에 대표로 뛰고, 점심시간마다 공을 차는 모습을 보고 감독님이 제의를 했다.
“2002년 보궐선거, 2003년 선거 등 재선 충북교육감을 지내신 김천호(1943~2005년) 선생님이 담임 선생님이셨어요. 태권도 7단에 탁구도 선수급이셨습니다. 아버지는 ‘축구를 하면 나중에 뭘 먹고사느냐?’며 반대하셨는데 선생님께서 ‘그럼 내가 우리 집에 데리고 가서 먹이고 재우면서 실력을 파악해보겠다. 한 달 뒤에 다시 말씀 나누자’고 설득하셨죠. 나중에 아버지가 ‘그렇게 말씀하시니 믿음이 가더라’고 하셨어요.”
당시 같은 집에 기거하던 1년 후배가 88올림픽 탁구 개인 단식 은메달리스트 김기택(金基澤)이다.
“5학년 때 축구를 시작했는데,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김천호 선생님이 즐겁게 운동하라고 분위기를 잡아주셨어요. 충북 도내 대회에서 예선 통과하면 짜장면, 3위 이상이면 탕수육 추가, 우승하면 닭고기·돼지고기 파티를 했던 추억도 잊을 수 없습니다.”
골키퍼 제외한 모든 포지션 거쳐
가난한 소년에겐 특식과 학비 면제, 팀 숙소 무료 숙식이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중학교는 청주 명문 대성중으로 진학했다. 유명한 후배로는 2011년 아시안컵 득점왕 구자철(具滋哲)이 있다. 고등학교는 같은 재단인 청주상고에 입학했다. 1년 선배로 정성교, 이재희, 1년 후배로 신상근, 최상국, 정기동 등이 뛰던 막강한 전력이었다.
초・중・고를 거치며 그가 소화한 포지션은 골키퍼를 제외한 모든 포지션. 중학교 3학년이던 1976년 뚜렷한 목표를 세웠다. 실업축구 포항제철(浦項製鐵) 입단이다. 1973년 창단, 이회택, 김호(金浩) 등 전·현직 국가대표급 선수를 끌어모은 포항제철 축구단은 ‘사설(私設) 국가대표팀’으로 불렸다. ‘아시아를 넘어, 세계에서도 통하는 선수들을 기르자’는, 진정한 축구팬 박태준(朴泰俊) 회장의 강력한 의지가 작동한 결과였다. 중학생 최순호에게는 TV 중계에 나오는 포철 선수들의 플레이도 황홀했고, 흑백TV라 실제 색깔을 볼 수는 없었지만 쇳물색 상의도 정말로 멋져 보였다.
“고등학교 3년 동안 최대한 노력하자고 결심하고 독하게 운동했습니다. 구체적인 훈련 프로그램을 짜고 하루 4회씩, 하루도 거르지 않고 훈련했죠. 새벽과 오전에는 개인훈련, 오후 단체훈련, 저녁에는 한 번 더 개인훈련을 하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노력하는 자를 돕는다던가. 각각 다른 성향의 감독을 만난 것도 최순호의 천운(天運)이다. 1학년 때의 지도자는 국가대표를 역임한 조성달 감독. 당대 최고의 테크니션 가운데 하나로 불리던 조 감독은 최순호에게 개인훈련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개인지도를 아끼지 않았다. 지루할 수도 있는 기본 기술을 무수히 반복하고 몸에 익힌 건 오로지 조성달 감독의 지도 덕분이다. 섬세한 움직임, 발 모양, 페이크 동작 등을 이때 완성했다. 지금도 최순호가 생각하는 ‘축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다. 조성달 감독은 ‘네가 잘하는 걸 하는 것보다 상대를 힘들게 하라’고 했다. 잊을 수 없는 경구(警句)다.
체육교사였던 조 감독의 전근으로 2학년 때 부임한 교사 겸 감독은 청주상고 선배로 경희대, 한일은행에서 활약한 유인권 감독. 기본기를 마스터한 최순호에게, 체력을 중시하며 매일 청주상고 운동장에서 우암산까지 구보를 시킨 훈련법은 신(神)이 내린 스케줄이었다. 페트병 두 개를 양손에 가지고 뛰어가서 약수를 받아와야 했기에, 편법이 통할 여지도 없었다.
한홍기 감독

고2 때 전국적으로 소문이 나면서 대학과 실업팀들이 연습경기차 청주상고를 찾았다. 서울 잠실 숙소를 사용하던 포항제철이 이례적으로 청주까지 내려왔다. 노장 수비수가 고교생 최순호를 전담 마크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국가대표 주전 수비수를 역임했던 박영태였다. 한홍기 감독의 지시였다고 했다.
고3에 올라가니 포항제철에서 촉탁 발령을 냈다. 1979년 2월에 박태준 회장께 인사를 드리고, 봄부터 ‘촉탁사원’ 신분으로 잠실 포철 축구단 숙소로 출근했다. 초봉은 9만원. 포항제철에서는 김정남(金正男) 코치에게 일대일 지도를 받았다. 역시 한홍기 감독의 심모원려(深謀遠慮)였다. 1980년 김정남 코치가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자신 있게 최순호를 발탁한 배경이다.
공부를 포기하지 말라는 형의 조언을 듣고, 광운대 전기공학과 야간부에 입학(80학번), 졸업할 때 전기공사기사 1급 자격증도 땄다. 수원공고 출신 박지성이 콘크리트 기사 자격증을 따기 한참 전의 일이다. 광운대 소속으로는 4학년 때 전국체전 서울시 예선, 대학연맹전 등에 출전했다.
포항제철 한홍기 감독은 최순호의 축구 인생에 있어서 아버지와 같은 분이다. 하고 싶은 축구를 마음껏 하라고 했다. 요한 크루이프의 경기 테이프를 주면서 ‘저렇게 멋있게 축구를 해라. 우리는 물론, 상대 팀에까지 영향을 미쳐야 잘하는 선수다’라며 격려했다. 천재의 자유분방(自由奔放)한 창의력을 마음껏 발휘하라고 기회를 준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저는 개성이 강한 선수였어요. 당시 한국 축구의 관행을 따르기보다는 제 스타일의 축구를 하고 싶었습니다. 대표팀 때도, 제 기준으로는 훈련량이 많아 경기에 지장을 줄 정도였습니다. ‘한국에서는 뛰는 축구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대세이던 시절이죠. 저는 공격수의 최고 덕목은 집중력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어슬렁거리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튀어나오는 선수가 일류 스트라이커죠. 저는 볼이 올 때도 터치를 많이 하지 않습니다. 터치를 하면 수비수가 방향을 읽거든요. 여유 있게 움직이면서도 수비수를 얼마든지 따돌릴 수 있는데, 보기에 따라서는 제 플레이 스타일이 게으르게 보일 수도 있는 겁니다. 인정합니다.”
‘5인 선수촌 탈출사건’
최순호의 플레이 스타일에는 기존의 한국 축구 플레이 패턴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었다. 시대(時代)와 불화(不和)하는 건 천재들의 숙명일까? 한국 축구는 그의 천재성과 창의력을 100% 빼내지 못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농구 대통령’ 허재(許載)의 천재성이 여러 곳에서 상흔을 남긴 것처럼, 최순호의 생애도 굴곡과 그늘이 여럿이다.
한홍기 감독이 포항제철 부단장, 축구협회 부회장 등 행정직으로 영전하면서, 선수 최순호에게 슬럼프가 찾아왔다. 1981년 대통령배, 1984년 아시안컵은 부상으로 아예 나서지 못했고, 1982년 스페인월드컵 예선, 1984년 LA올림픽 예선에선 오일머니의 위력에 막혀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1983년엔 감독의 지도 방식에 반발해 이태호(李泰鎬), 박경훈(朴景勳), 변병주(邊炳柱), 최인영(崔仁榮) 등과 이른바 ‘5인 선수촌 탈출사건’을 감행했다가 ‘3년 선수 자격 정지’라는 중징계를 받기도 했다. 20대 초반의 젊은 선수들로 구성한 대표팀이 1차 예선에서 부진한 경기력을 보이자, 징계는 풀렸고 최순호는 대표팀에 복귀했다.
문제는 이 무렵부터 축구를 하는 것이 재미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팀 변화에 따른 적응에 실패했고, 연령상으로는 절정의 시기였지만 정신적·육체적 컨디션은 최상이 아니었다. 허리부상, 뼈의 실금 등 잔부상도 이어졌다.
그를 잡아준 건 한홍기다. 당시는 프로 선수도 태릉선수촌에서 합숙하고, 경기 하루나 이틀 전 소속팀에 복귀해서 경기를 치르고 다시 선수촌으로 복귀하던 시절이다. 최순호는 공중전화로 한홍기 감독과 소통했다. 대표팀 경기를 하면 한홍기 감독은 최순호의 플레이를 분석하고, “다음엔 이렇게 해봐라”는 조언을 주었다. 특정 플레이를 서로 세세하게 복기(復碁)했다. 텔레파시가 통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프로축구 출범
그 무렵, ‘축구를 꼭 해야겠다’는 간절함을 다시 이어간 계기가 둘 있다. 하나는 1982년 월드컵 직접 관전이다.
“프로축구 출범 전이었는데도 포항제철은 브라질로 전지훈련을 떠났습니다. 한홍기 감독님의 배려였죠. 브라질 가는 길에 스페인에 들러 30여 명 선수단 전원이 세비야에서 서독과 프랑스의 준결승전, 마드리드에서 이탈리아와 서독의 결승전을 봤습니다.”
서독과 프랑스의 준결승전은 연장전에서 2골을 먼저 넣은 프랑스가 3대1로 앞서가다 3대3 동점 허용 후 승부차기에서 무너진, 월드컵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명승부다. 서독이 먼저 승부차기에서 실축(失蹴)했지만, 프랑스가 연이어 실축하며 승패가 뒤집혔다. 서독의 실축 키커는 전 한국대표팀 감독 슈틸리케다. 결승전은 3대1 이탈리아의 승리. 1938년 이후 44년 만에 이룩한 이탈리아의 3번째 우승이다. ‘카이사르가 축구장에 돌아왔다’고 불리는 역사적인 명경기다.
“황홀했습니다. 운동장을 가득 메운 관중, 진지한 열기, 나부끼는 깃발, 얼굴 분장, 선수들의 사소한 동작 하나하나에 스타디움 전체가 반응하는데, 딱 반으로 나뉘어 한쪽은 열광하고 한쪽은 비명을 지르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경기 내내 ‘축구가 이런 것이구나. 나도 월드컵에 반드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두 번째 계기는 1983년 프로축구의 출범이다.
“당시 제 월급이 24만원이었는데, 프로축구 첫 연봉은 2700만원이었습니다. 수입이 10배가 늘어난 겁니다. ‘프로축구 선수’가 번듯하고 선망의 직업으로 떠오른 거죠. 매 경기 걸린 승리수당도 10만원에서 30만원 정도였으니 살림이 확 피었고, 축구 선수의 사회적 지위가 급상승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장인, “나라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나 마찬가지”
결혼은 1985년 3월 24일에 했다. 정해원의 소개로 처음 만났다. 아내는 정해원의 아내와 같은 대학 선후배다. “여자친구는 안 되고, 아내와 약혼자만 참석할 수 있는 선수단 만찬에 가겠느냐?”는 우회(迂廻) 어법으로 프러포즈를 했고, “나라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나 마찬가지니 잘 해줘라”는 장인어른의 지원사격이 큰 힘이 됐다. “월드컵 예선이 중요하니 빨리 진행하자”는 압박전술도 통했다.
슬하에 아들 둘. 장남은 1986년 월드컵 대회 중에, 차남은 서울올림픽 대회 중에 태어났다. 장남의 생일은 1986년 6월 10일. 최순호가 이탈리아전에서 동점 골을 터뜨리며 분전한 경기 바로 전날이다. 경기는 한국의 2대3 패. 최순호는 1골 1도움으로 펄펄 날았다. 한국의 두 번째 골 득점자는 허정무다.
1986년 월드컵은 한국이 32년 만에 본선에 복귀한 기념비적 대회다. 1차 예선 말레이시아와의 원정경기 패배 후 김정남 감독이 소방수로 투입되었고, 최순호에게 자기 스타일의 축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렸다. 1차, 2차 예선을 돌파한 한국의 최종예선 상대는 숙적 일본. 1985년 10월 26일 도쿄 원정경기에서 최순호는 한국이 올린 2득점 모두를 어시스트했다. 일본 수비수 둘의 움직임, 반대편으로 침투하는 이태호의 스피드를 고려하며 건네준 추가 골 어시스트가 이날 경기의 분수령이었다. 무서우리만큼 냉정하고 침착한 자세로 수비수 사이로 찔러준 명품 패스였다. 한국의 2대1 승.
“너 없으면 안 돼”
11월 3일 잠실에서 벌어진 최종전. 국민들의 관심도 최고조에 달했다. 거리에선 자동차 운행이 멈추고, 극렬했던 학생 데모도 발발이 전무(全無)했다. 모든 눈과 귀가 잠실로 모였다. 이 경기의 에이스도 최순호였다. 후반 16분, 중앙에서 날아온 박창선(朴昌善)의 크로스를 받아 거의 제자리에서 어깨 움직임으로 수비수를 따돌리는 복싱 스텝을 선보이며 찬스를 만들었다. 의도적으로 발목에 얹은 무회전 킥은 반대편 골포스트 하단을 때렸고, 허정무가 튕겨 나오는 공을 득점으로 연결했다. 허정무는 벤치 쪽으로 달려갔고, 반대편에서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최순호의 얼굴이 TV 화면을 가득 채웠다.
“제가 허정무 선배님 쪽으로 뛰어갈 상태가 아니었어요. 전반 43분에 마크맨 이시카미에게 장딴지를 차였는데, 순간적으로 무릎이 쑥 나갔다가 들어오는 느낌이었어요. 라커룸 치료방에 누워 ‘오늘 경기는 여기까지구나’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김정남 감독님이 들어오셨어요. ‘순호야, 해야 돼. 너 없으면 안 돼’라고 귓속말을 하시더군요.”
국민 여러분께 다른 차원의 축구를 볼 기회를 꼭 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무리를 했고, 테이핑을 하고 출전을 감행했다. 후반전 때 거의 뛰지 못했던 배경이다. 골 찬스도 어슬렁거리다 만들어낸 것이다. 골 세리머니를 하러 경기장 반대편으로 뛰어갈 몸이 아니었다. 경기 직후 가장 먼저 한 일이 무릎 깁스다. 당일 저녁, 모든 선수단이 출연한 KBS 국민축하 특집 생방송에 아픈 표정으로 출연했던 이유다.
“‘순호 초이’를 아느냐?”
1986년 월드컵은 콜롬비아가 유치했다가 여러 사정으로 1983년 개최를 포기했다. 미국, 캐나다, 브라질과의 경합을 거쳐 멕시코가 유치에 성공했고, 1985년 12월 각 대륙의 본선 진출국인 한국, 헝가리, 알제리를 초청해 친선대회를 개최했다. 1개 조별리그 운영을 테스트하는 이벤트였다. 선수단과 동행하기는 했지만, 최순호는 여전히 부상 중이어서 뛸 몸이 아니었다.
헝가리전(12월 9일. 0대1 패), 멕시코전(12월 11일. 1대2 패)을 마치자 한국 선수단으로 손님들이 찾아왔다. 유벤투스 스카우트 팀이었다. “최순호를 보려고 여기까지 왔는데,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 아니냐”는 호소에 한홍기 단장은 “12월 13일 알제리전 후반에 20분 정도 뛰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최순호는 단독 찬스에서 골키퍼의 움직임을 빼앗는 절묘한 멈춤 킥으로 공을 골문 구석으로 데굴데굴 굴려 넣었다.
경기 후 한홍기 단장을 찾은 스카우트들의 평은 “축구를 어떻게 하는지 아는 선수다(He knows how to play)”.
필자가 해외유학 중이던 1990년대 중반, 런던발 로마행 비행기 안에서 만난 옆자리 승객은 소생의 국적을 확인하자 “‘순호 초이’를 아느냐”고 했다. 유벤투스의 전직 스카우트라며, 유벤투스가 몇 년을 따라다녔어도 협상테이블에 앉히지조차 못한 선수는 순호 초이가 유일하다는 말도 했다. 월드컵이 끝나고, 또 다른 이탈리아팀 피사는 대한축구협회에 최순호의 스카우트에 필요한 절차를 알려달라는 전문(電文)을 보내기도 했다. 1990년까지 국내에서 활동해야 병역 의무를 다한다는 점이 해외 이적의 걸림돌이었다.
최순호가 스스로 꼽은 ‘인생 최고의 골’인 1986년 멕시코월드컵 본선 이탈리아와의 경기에서 후반 17분 터뜨린 동점 골은 AFP 등 외신이 꼽은 ‘환상의 황금골’이기도 하다. ‘절묘한 사이드 스텝으로 수비수 둘을 제치고 예측할 수 없는 순간 동작으로 그물을 출렁였다’는 묘사 뒤에 AFP는 “최순호가 함부르크 SV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있다”고 썼다.
“첫 경기 아르헨티나전은 1대3 완패였죠. 축구의 차원이 달랐어요. 공 차는 방식, 움직임이 몇 수 위였습니다. 2차전 불가리아전은 고산지대 적응에 어려움을 겪어서 뛰지 못했습니다. 세 번째 경기는 멕시코시티가 아니라 저지대인 푸에블라에서 열렸어요. 오른쪽으로 꺾으며 스피드를 살려 90도 턴하는 동작으로 슛을 때렸는데, 오른쪽 발등에 그야말로 제대로 얹혔습니다.”
박태준과 최순호
제왕의 축구 이야기는 무궁무진하고 흥미진진했다. 그 이야기들을 다 담지는 못하더라도 박태준 회장과의 인연은 빼놓을 수 없다. 당시 포철에서는 숙원사업 서류나 현안 문제를 결재받을 때 최순호를 동반하면 일이 잘 풀린다는 전설이 있었다.
“저도 나중에 들었습니다. 회장님이 저를 각별하게 아껴주셨어요. 저만 보면 늘 흐뭇해하셨죠. 고등학생 어린아이를 데려다 국가대표로 만들었으니까, 성장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곁에서 지켜봤다는 생각이 든다고 하셨습니다. 달걀이 수탉으로 커가는 느낌 아니셨을까요.”
그래서 독대(獨對)나 사적(私的)인 만남이 잦았다. 자주 뵈었기에 둘이서 함께 사진 찍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 용평리조트에서 우연히 마주쳤는데, 고등학교 감독들과 반주를 한 상태라 뵙지 못했다. 박 회장이 “괜찮다”고 했는데도 “다음에 뵙겠습니다”라고 한 것이 지금도 평생의 한(恨)으로 남아 있다.
― 박태준 회장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제가 감히 논할 수 있는 분이 아니시죠. 사회적인 주제, 도덕, 윤리에 관해 말씀하실 때는 표정과 어투가 단호했지만, 차분한 이야기를 하실 때는 눈가가 촉촉해질 만큼 감성이 풍부하셨어요. 만날 때마다 ‘나라를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자네는 축구를 열심히 하는 것이 애국하는 거야’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지금도 회장님의 사랑과 관심에 보답하자는 심정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박태준 사람’이라서 최순호가 받은 불이익도 있다. 1991년 말 은퇴 후 프랑스에서 코치 연수 중이던 1993년 3월, 느닷없이 ‘해촉한다’는 연락이 왔다. “시대적 상황으로 이해해달라”는 말과 함께였다. 남은 계약 기간도 지켜줄 수 없다고 했다.
귀국 후 바로 일본으로 가 박태준 회장을 뵈었다. 두 번째 만남에선 ‘15평 숙소’로 불러주셨다. 정치적 유배(流配)라는 생각이 들었다. 1994년 10월 9일 박태준 회장 모친상 때 최순호가 사흘 내내 빈소를 지키며 조문객을 안내한 배경이다. 이 사실이 신문에 보도되었고 그래서 다른 불이익을 당할 가능성도 커졌지만, 최순호에게는 그것이 ‘당연히 해야 하는 사람의 도리’였을 뿐이다.
미래 축구꿈나무 양성
최순호의 현직은 포항스틸러스 축구단 기술이사다. 초·중·고 팀을 관리하며 미래의 주역들을 기른다. 아이들에게 즐겁고 재미있게 운동하는 환경을 만들어주려고 한다. 기회가 닿는다면, U-18, 16, 14, 12처럼 2년 터울의 팀을 만들고 싶다. 예산이 더 필요하겠지만, 빅클럽처럼 1년 터울로 팀을 운영하는 것도 미래의 꿈 가운데 하나다. 최순호의 축구는 우아하며 아름다웠다. 피치 위에서 시간을 마음대로 늦추고 당기며, 최순호는 오케스트라 지휘자처럼 공을 찼다. 그가 꿈꾸는 축구도 우아하고 아름다울 것이다. 미래의 천재들도 행복할 것이다.⊙
그렇다면 홍황 쌍웅과 차범근 사이의 제왕은 누구? 전쟁통에도 1만 일 개인훈련을 거르지 않은 축구 구도자(求道者)로, ‘조선과 일본에서 축구’ 하면 떠올리던 이름 김용식, 평양에서 자라 1·4후퇴 때 월남(越南), 태극마크를 가슴에 달고 아시안컵 2연패를 완성한 황금의 다리 최정민, 월북한 부친 탓에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혜성처럼 나타나 아시아를 평정한 방랑검객(放浪劍客) 이회택, 칭기즈 칸 이후 유럽을 석권한 유이(唯二)한 아시아인, 불세출(不世出)의 윙어 ‘갈색의 폭격기’ 차범근의 뒤로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최순호(崔淳鎬·59)다.
“나, 청주 가서 대단한 놈 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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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FA U-17 월드컵대회에서의 최순호. 사진=조선DB |
최순호의 명성(名聲)이 축구계를 넘어 일반계로 넘어온 건 1980년 여름이다. 7월 18일(동대문 1대2 패), 21일(구덕 2대0 승), 23일(동대문 1대2 패)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치른 보아비스타(포르투갈)와의 3연전. 만 18세의 대표팀 막내 22번 최순호는 3경기 연속 득점의 신화(神話)를 쓴다.
놀라운 점은 그 3골의 득점 방식이 모두 달랐고, 한국 축구에서 볼 수 없었던 유형의 득점이라는 사실이었다. 첫 경기 어시스트는 박상인(朴商寅). 페널티 박스 모서리 부근에서 날린 슛이 오른쪽 골대를 맞고 다시 자기 발 앞으로 튀어오자 최순호에게 논스톱으로 패스했다. 슈팅할 때 전진, 공이 골포스트를 맞는 순간 곧바로 돌아 나오던 최순호는 골문을 등지고 뛰어나오는 동작 중에 감각적인 힐킥으로 득점을 올렸다. 두 번째 골은 이영무(李榮武)의 패스를 받아 공을 거의 건드리지 않고 수비를 등진 채 유연하게 턴, 달려 나오는 골키퍼를 보며 골문 구석으로 툭 밀어 넣은 부드러운 한 방이었다. 만 18세 소년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침착하고 정밀하며 여유가 넘치는 터치였다. 3차전 득점은 전반 2분 만에 터진 장쾌한 대포알 슛. 공중볼 경합 상황에서 이정일(李正日)이 머리로 떨궈주자 최순호는 전진해 있던 골키퍼를 바라보며 벼락같은 20m 중거리슛을 욱여넣었다. 골키퍼의 점프 타이밍 자체를 빼앗은 일발 강타였다.
‘뒤에도 눈을 가진 야생마’
언론은 ‘뒤에도 눈을 가진 야생마’가 나타났다며 환호했다. 4월 모스크바올림픽 예선 탈락, 차범근·허정무(許丁茂) 두 기둥의 유럽행, 박상인의 고별경기 후 독일행, 조영증(趙榮增)·조광래(趙廣來)의 부상으로, ‘사상 최약체 대표팀’이라는 우려가 팽배하던 시절이다.
― 이 경기가 대표팀 데뷔전이었나요.
“아닙니다. 그해 6월에 차범근 선배님이 프랑크푸르트 소속으로 내한(來韓) 경기를 하셨잖아요. 그때가 대표팀 데뷔전이었는데 교체 멤버로 들어가 거의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전문가들도 제가 그 경기에 출전했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를 정도입니다.”
보아비스타와의 3연전 이후 어디를 가도 사람들이 최순호를 알아봤다. 거리를 걷기가 불편할 정도였다. 고향에서도 난리가 났다.
그가 명실상부한 국민 영웅으로 떠오른 건 2개월 뒤다. 쿠웨이트에서 열린 제7회 아시안컵. 최순호는 조별리그 첫 경기 말레이시아전 1골(1대1 무승부), 2차전 카타르전 1득점 1어시스트(2대0 승), 3차전 쿠웨이트전 2골(3대0 승), 4차전 UAE전 3득점 1도움(4대1 승) 등 무려 7골을 터뜨리며 득점왕에 올랐다. 충격적인 국제무대 데뷔였다.
20세 이전에 대표팀에 뽑힌 선수들은 더러 있다. 하지만 성년(成年) 이전에 아시안컵 득점왕에 오른 건 아시아 축구 역사상 아직까지는 최순호가 유일하다. ‘손세이셔널’ 이전에 ‘순세이셔널’이 있었던 것이다. 한국은 준결승에서 역사적인 남북대결 끝에 정해원(丁海遠·1959~2020년)의 두 골로 2대1 역전승을 했고, 결승에서는 홈팀 쿠웨이트에 0대3으로 졌다. 남북대결로 탈진한 결과였다.
9월 21일 쿠웨이트와의 예선전. 후반 25분, 권오손(權五孫)의 크로스를 받아 번개같이 나타난 최순호가 무시무시한 스피드로 쇄도하며 속도를 죽이지 않고 점프, 그야말로 핵탄두처럼 날아오르며 강력한 추가 골을 터뜨렸다. 어지간한 킥보다도 빠르고 길게 날아간 ‘빨랫줄 같은 헤드업’이었다. 결승전 때 양측 선수단을 격려하러 피치로 내려온 쿠웨이트 축구협회 회장이 최순호 앞에서 악수한 뒤 잠깐 멈춰 웃으며 이마를 만지고 갔을 정도였다.
해방 후 첫 남북대결
준결승전 대(對)북한전도 화제였다. 당시의 남북대결은 비장미(悲壯美)가 넘치는 초(超)국가적 관심사였다. 축구의 승패가 체제의 우열과 직결된다고 믿는 사람도 많았다. 맞대결 패전(敗戰)의 후유증이 엄청나서, 상대의 전력(戰力)이 강하면 예선리그에서 일부러 지는 한이 있더라도 다른 한쪽이 미리 알아서 피해 갈 정도였다.
1980년 아시안컵 준결승은 남북이 드디어 만나 처음으로 승패를 가리는 역사적인 무대였다. 비기면 승부차기까지 가서 끝을 보는 승부였기 때문이다.
“대회 기간 내내 남북 대표팀이 같은 숙소를 썼어요. 뷔페식당에서 마주치기도 하고… 처음 봤을 때는 ‘언제 와서?’라는 북한 사투리만 들어도 바짝 긴장했었는데, 시간이 지나니까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축구 선수로서도 그 대회는 제가 국가대표 생활에 익숙해지는 과정이었어요. 무서움을 몰랐고, 선수로서 만들어지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죠. 요즘 말로 포텐이, 그러니까 잠재력이 확 터졌어요. 경기 당일, 심리적 압박감이 없지는 않았지만, 다른 경기와 비교해 특별히 더 긴장하지는 않았습니다. 편안했어요. 경기 중에 북한 선수들이 거친 말을 해도 전혀 마음의 동요가 없었죠.”
남북 간 대결은 신경전부터 시작되었다. 북한은 주장 간의 페넌트 교환을 거부했다. 20분 한국 선수의 핸드볼 반칙으로 얻은 페널티킥을 북한 주장 김종만이 골키퍼 오른편 구석으로 정확하게 찔러 넣어 0대1. 북한은 결사적으로 지키는 축구를 하며 스코어를 굳히려고 했다. 중동에서 일하던 근로자 응원단 수천 명의 응원이 이날 승부의 분수령이다.
“종료 15분을 남기고 관중석에서 ‘때려잡자 김일성!’ ‘무찌르자 공산당!’을 연호했어요. 북한 선수들의 몸이 굳는 게 보였습니다. 자기들끼리 눈 마주치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종료 10분 전 조광래 선배의 크로스가 중간에 걸리고 우리 공격진과 북한 수비진이 뒤엉켜서 혼전이 벌어졌죠. 이강조(李康助) 선배가 기어이 크로스를 올렸는데 공이 제 점프를 살짝 넘어갔습니다.”
최순호 뒤에서 뛰어오른 정해원이 정확하게 이마에 공을 맞췄다. 대각선 방향으로 날아간 공은 북한 골문 상단을 꿰뚫었다. 최순호의 점프 때문에, 북한 골키퍼 김강일은 자기 왼편 상단으로 비행하는 볼을 제자리에 서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배구로 치면, 완벽한 시간차 공격이 들어간 셈이었다.
87분, 이번에는 이강조와 이영무가 2대1 패스로 북한 왼편을 돌파, 문전으로 패스를 연결했고, 달려들던 정해원이 왼발 대각선 강슛으로 기적의 역전 골을 성공시켰다. 올드팬들의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전설의 명승부다.
이 무렵부터 최순호의 몸은 자기 것이 아니었다. 그는 ‘대한의 아들’이었다. 1980년 그의 일정표를 보자. 4월 대통령금배 포항제철 소속으로 출전, 5월 대표팀 발탁 후 태릉선수촌 입촌 및 합숙 시작, 6월 프랑크푸르트와 3연전, 7월 보아비스타와 3연전, 8월 국가대표 2진 충무와의 3연전, 8월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우승(6경기 출전 3득점), 9월 아시안컵 참가, 10월 포항제철 소속으로 전국체전 출전, 11월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아시아 청소년대회 동부 지역 예선에서 7골 득점으로 득점왕 등극. 7개월 동안 대표팀, 청소년 대표팀 경기로만 21게임에 나가 20골을 넣었다.
‘한국 축구의 대들보 최순호를 아끼자’라는 신문 기사가 나올 정도였다. 기사에는 ‘최순호 본인이 피로를 호소하고 있다’는 문장이 나오고, “보름만 쉬면 원이 없겠다”는 최순호의 멘트도 실려 있다.
무리(無理)를 이기는 장사는 없다. 부상이 찾아왔다. 그가 1981년 6월의 대통령배에 나서지 못한 이유다. 치료 이후 출전한 경기 중 하이라이트는 1981년 10월 3일부터 18일까지 호주에서 열렸던 제3회 U-20 월드컵이다. 최순호는 한국팀 주장으로 참가, 10월 3일 멜버른에서 열린 첫 경기에서 2득점 2도움의 대활약을 펼치며 강적 이탈리아를 4대1로 꺾는다. 세계적인 명문클럽 유벤투스(Juventus)가 그를 스카우팅 리포트에 올려놓은 계기다.
“경기 후에 이탈리아팀 단장이 찾아왔어요. 이분이 인터밀란 단장이기도 했는데, ‘추천하겠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외국팀의 입단 제안은 1980년 보아비스타가 처음이었죠. 3연전 후 서울 모 호텔에서 통역과 만나자더니 ‘10만 달러를 주겠다’고 하더군요. 잠실 시영아파트가 200만원 하던 시절입니다. 그때는 그 돈이 이적료인지 연봉인지도 몰랐고, 유럽 축구에 대한 동경은 많았지만 정보가 너무 없어서 뭐라고 대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병역(兵役)도 미필이라 출국 자체가 어렵기도 했고요.”
한국은 2차전 루마니아와의 경기를 초반 실점으로 0대1로 내준 뒤 최종전에서 브라질에 0대3으로 완패하며 짐을 쌌다. 유벤투스는 세 경기 내내 최순호를 정밀 관찰했고, 1990년까지 그를 따라다녔다. 플라티니에 버금가는 게임메이커의 가능성을 보았다고 했다. 아시아 최고의 선수가 아니라, 세계 정상급으로 연마(鍊磨) 가능한 희대의 원석(原石)으로 보았다는 뜻이다. 그때, 혹은 보아비스타의 서류에 사인해 최순호가 유럽으로 떠났다면 한국 축구사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초등학교 5학년 때 축구 시작
‘만약에’는 부질없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최순호의 축구계 입문도 절반은 우연이다. 그의 생가는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면 사창리 16번지. 아버지 최시범(崔時範·89)과 어머니 김금신(金今新·2009년 작고) 사이 2남 2녀 중 둘째다. 장형 최경호(67)는 동네에서 수재 소리를 들었다. 형의 명문 청주고 합격이 가족 전체가 청주로 이사한 배경이다.
“형 공부시킨다고 대처로 나온 거죠. 농사일하시던 아버지는 집 짓는 곳 인부 등 여러 가지 일을 하셨고, 어머니도 일거리를 찾아다니셨습니다.”
전학 간 청주 한벌국민학교에 축구부가 있었던 건 한국 축구사의 행운이다. 반 대항 육상경기에 대표로 뛰고, 점심시간마다 공을 차는 모습을 보고 감독님이 제의를 했다.
“2002년 보궐선거, 2003년 선거 등 재선 충북교육감을 지내신 김천호(1943~2005년) 선생님이 담임 선생님이셨어요. 태권도 7단에 탁구도 선수급이셨습니다. 아버지는 ‘축구를 하면 나중에 뭘 먹고사느냐?’며 반대하셨는데 선생님께서 ‘그럼 내가 우리 집에 데리고 가서 먹이고 재우면서 실력을 파악해보겠다. 한 달 뒤에 다시 말씀 나누자’고 설득하셨죠. 나중에 아버지가 ‘그렇게 말씀하시니 믿음이 가더라’고 하셨어요.”
당시 같은 집에 기거하던 1년 후배가 88올림픽 탁구 개인 단식 은메달리스트 김기택(金基澤)이다.
“5학년 때 축구를 시작했는데,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김천호 선생님이 즐겁게 운동하라고 분위기를 잡아주셨어요. 충북 도내 대회에서 예선 통과하면 짜장면, 3위 이상이면 탕수육 추가, 우승하면 닭고기·돼지고기 파티를 했던 추억도 잊을 수 없습니다.”
골키퍼 제외한 모든 포지션 거쳐
가난한 소년에겐 특식과 학비 면제, 팀 숙소 무료 숙식이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중학교는 청주 명문 대성중으로 진학했다. 유명한 후배로는 2011년 아시안컵 득점왕 구자철(具滋哲)이 있다. 고등학교는 같은 재단인 청주상고에 입학했다. 1년 선배로 정성교, 이재희, 1년 후배로 신상근, 최상국, 정기동 등이 뛰던 막강한 전력이었다.
초・중・고를 거치며 그가 소화한 포지션은 골키퍼를 제외한 모든 포지션. 중학교 3학년이던 1976년 뚜렷한 목표를 세웠다. 실업축구 포항제철(浦項製鐵) 입단이다. 1973년 창단, 이회택, 김호(金浩) 등 전·현직 국가대표급 선수를 끌어모은 포항제철 축구단은 ‘사설(私設) 국가대표팀’으로 불렸다. ‘아시아를 넘어, 세계에서도 통하는 선수들을 기르자’는, 진정한 축구팬 박태준(朴泰俊) 회장의 강력한 의지가 작동한 결과였다. 중학생 최순호에게는 TV 중계에 나오는 포철 선수들의 플레이도 황홀했고, 흑백TV라 실제 색깔을 볼 수는 없었지만 쇳물색 상의도 정말로 멋져 보였다.
“고등학교 3년 동안 최대한 노력하자고 결심하고 독하게 운동했습니다. 구체적인 훈련 프로그램을 짜고 하루 4회씩, 하루도 거르지 않고 훈련했죠. 새벽과 오전에는 개인훈련, 오후 단체훈련, 저녁에는 한 번 더 개인훈련을 하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노력하는 자를 돕는다던가. 각각 다른 성향의 감독을 만난 것도 최순호의 천운(天運)이다. 1학년 때의 지도자는 국가대표를 역임한 조성달 감독. 당대 최고의 테크니션 가운데 하나로 불리던 조 감독은 최순호에게 개인훈련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개인지도를 아끼지 않았다. 지루할 수도 있는 기본 기술을 무수히 반복하고 몸에 익힌 건 오로지 조성달 감독의 지도 덕분이다. 섬세한 움직임, 발 모양, 페이크 동작 등을 이때 완성했다. 지금도 최순호가 생각하는 ‘축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다. 조성달 감독은 ‘네가 잘하는 걸 하는 것보다 상대를 힘들게 하라’고 했다. 잊을 수 없는 경구(警句)다.
체육교사였던 조 감독의 전근으로 2학년 때 부임한 교사 겸 감독은 청주상고 선배로 경희대, 한일은행에서 활약한 유인권 감독. 기본기를 마스터한 최순호에게, 체력을 중시하며 매일 청주상고 운동장에서 우암산까지 구보를 시킨 훈련법은 신(神)이 내린 스케줄이었다. 페트병 두 개를 양손에 가지고 뛰어가서 약수를 받아와야 했기에, 편법이 통할 여지도 없었다.

고2 때 전국적으로 소문이 나면서 대학과 실업팀들이 연습경기차 청주상고를 찾았다. 서울 잠실 숙소를 사용하던 포항제철이 이례적으로 청주까지 내려왔다. 노장 수비수가 고교생 최순호를 전담 마크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국가대표 주전 수비수를 역임했던 박영태였다. 한홍기 감독의 지시였다고 했다.
고3에 올라가니 포항제철에서 촉탁 발령을 냈다. 1979년 2월에 박태준 회장께 인사를 드리고, 봄부터 ‘촉탁사원’ 신분으로 잠실 포철 축구단 숙소로 출근했다. 초봉은 9만원. 포항제철에서는 김정남(金正男) 코치에게 일대일 지도를 받았다. 역시 한홍기 감독의 심모원려(深謀遠慮)였다. 1980년 김정남 코치가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자신 있게 최순호를 발탁한 배경이다.
공부를 포기하지 말라는 형의 조언을 듣고, 광운대 전기공학과 야간부에 입학(80학번), 졸업할 때 전기공사기사 1급 자격증도 땄다. 수원공고 출신 박지성이 콘크리트 기사 자격증을 따기 한참 전의 일이다. 광운대 소속으로는 4학년 때 전국체전 서울시 예선, 대학연맹전 등에 출전했다.
포항제철 한홍기 감독은 최순호의 축구 인생에 있어서 아버지와 같은 분이다. 하고 싶은 축구를 마음껏 하라고 했다. 요한 크루이프의 경기 테이프를 주면서 ‘저렇게 멋있게 축구를 해라. 우리는 물론, 상대 팀에까지 영향을 미쳐야 잘하는 선수다’라며 격려했다. 천재의 자유분방(自由奔放)한 창의력을 마음껏 발휘하라고 기회를 준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저는 개성이 강한 선수였어요. 당시 한국 축구의 관행을 따르기보다는 제 스타일의 축구를 하고 싶었습니다. 대표팀 때도, 제 기준으로는 훈련량이 많아 경기에 지장을 줄 정도였습니다. ‘한국에서는 뛰는 축구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대세이던 시절이죠. 저는 공격수의 최고 덕목은 집중력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어슬렁거리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튀어나오는 선수가 일류 스트라이커죠. 저는 볼이 올 때도 터치를 많이 하지 않습니다. 터치를 하면 수비수가 방향을 읽거든요. 여유 있게 움직이면서도 수비수를 얼마든지 따돌릴 수 있는데, 보기에 따라서는 제 플레이 스타일이 게으르게 보일 수도 있는 겁니다. 인정합니다.”
‘5인 선수촌 탈출사건’
최순호의 플레이 스타일에는 기존의 한국 축구 플레이 패턴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었다. 시대(時代)와 불화(不和)하는 건 천재들의 숙명일까? 한국 축구는 그의 천재성과 창의력을 100% 빼내지 못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농구 대통령’ 허재(許載)의 천재성이 여러 곳에서 상흔을 남긴 것처럼, 최순호의 생애도 굴곡과 그늘이 여럿이다.
한홍기 감독이 포항제철 부단장, 축구협회 부회장 등 행정직으로 영전하면서, 선수 최순호에게 슬럼프가 찾아왔다. 1981년 대통령배, 1984년 아시안컵은 부상으로 아예 나서지 못했고, 1982년 스페인월드컵 예선, 1984년 LA올림픽 예선에선 오일머니의 위력에 막혀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1983년엔 감독의 지도 방식에 반발해 이태호(李泰鎬), 박경훈(朴景勳), 변병주(邊炳柱), 최인영(崔仁榮) 등과 이른바 ‘5인 선수촌 탈출사건’을 감행했다가 ‘3년 선수 자격 정지’라는 중징계를 받기도 했다. 20대 초반의 젊은 선수들로 구성한 대표팀이 1차 예선에서 부진한 경기력을 보이자, 징계는 풀렸고 최순호는 대표팀에 복귀했다.
문제는 이 무렵부터 축구를 하는 것이 재미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팀 변화에 따른 적응에 실패했고, 연령상으로는 절정의 시기였지만 정신적·육체적 컨디션은 최상이 아니었다. 허리부상, 뼈의 실금 등 잔부상도 이어졌다.
그를 잡아준 건 한홍기다. 당시는 프로 선수도 태릉선수촌에서 합숙하고, 경기 하루나 이틀 전 소속팀에 복귀해서 경기를 치르고 다시 선수촌으로 복귀하던 시절이다. 최순호는 공중전화로 한홍기 감독과 소통했다. 대표팀 경기를 하면 한홍기 감독은 최순호의 플레이를 분석하고, “다음엔 이렇게 해봐라”는 조언을 주었다. 특정 플레이를 서로 세세하게 복기(復碁)했다. 텔레파시가 통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프로축구 출범
그 무렵, ‘축구를 꼭 해야겠다’는 간절함을 다시 이어간 계기가 둘 있다. 하나는 1982년 월드컵 직접 관전이다.
“프로축구 출범 전이었는데도 포항제철은 브라질로 전지훈련을 떠났습니다. 한홍기 감독님의 배려였죠. 브라질 가는 길에 스페인에 들러 30여 명 선수단 전원이 세비야에서 서독과 프랑스의 준결승전, 마드리드에서 이탈리아와 서독의 결승전을 봤습니다.”
서독과 프랑스의 준결승전은 연장전에서 2골을 먼저 넣은 프랑스가 3대1로 앞서가다 3대3 동점 허용 후 승부차기에서 무너진, 월드컵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명승부다. 서독이 먼저 승부차기에서 실축(失蹴)했지만, 프랑스가 연이어 실축하며 승패가 뒤집혔다. 서독의 실축 키커는 전 한국대표팀 감독 슈틸리케다. 결승전은 3대1 이탈리아의 승리. 1938년 이후 44년 만에 이룩한 이탈리아의 3번째 우승이다. ‘카이사르가 축구장에 돌아왔다’고 불리는 역사적인 명경기다.
“황홀했습니다. 운동장을 가득 메운 관중, 진지한 열기, 나부끼는 깃발, 얼굴 분장, 선수들의 사소한 동작 하나하나에 스타디움 전체가 반응하는데, 딱 반으로 나뉘어 한쪽은 열광하고 한쪽은 비명을 지르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경기 내내 ‘축구가 이런 것이구나. 나도 월드컵에 반드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두 번째 계기는 1983년 프로축구의 출범이다.
“당시 제 월급이 24만원이었는데, 프로축구 첫 연봉은 2700만원이었습니다. 수입이 10배가 늘어난 겁니다. ‘프로축구 선수’가 번듯하고 선망의 직업으로 떠오른 거죠. 매 경기 걸린 승리수당도 10만원에서 30만원 정도였으니 살림이 확 피었고, 축구 선수의 사회적 지위가 급상승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장인, “나라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나 마찬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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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호가 1986년 멕시코월드컵 이탈리아전에서 통쾌한 중거리슛을 넣은 뒤 환호하고 있다. 사진=조선DB |
슬하에 아들 둘. 장남은 1986년 월드컵 대회 중에, 차남은 서울올림픽 대회 중에 태어났다. 장남의 생일은 1986년 6월 10일. 최순호가 이탈리아전에서 동점 골을 터뜨리며 분전한 경기 바로 전날이다. 경기는 한국의 2대3 패. 최순호는 1골 1도움으로 펄펄 날았다. 한국의 두 번째 골 득점자는 허정무다.
1986년 월드컵은 한국이 32년 만에 본선에 복귀한 기념비적 대회다. 1차 예선 말레이시아와의 원정경기 패배 후 김정남 감독이 소방수로 투입되었고, 최순호에게 자기 스타일의 축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렸다. 1차, 2차 예선을 돌파한 한국의 최종예선 상대는 숙적 일본. 1985년 10월 26일 도쿄 원정경기에서 최순호는 한국이 올린 2득점 모두를 어시스트했다. 일본 수비수 둘의 움직임, 반대편으로 침투하는 이태호의 스피드를 고려하며 건네준 추가 골 어시스트가 이날 경기의 분수령이었다. 무서우리만큼 냉정하고 침착한 자세로 수비수 사이로 찔러준 명품 패스였다. 한국의 2대1 승.
“너 없으면 안 돼”
11월 3일 잠실에서 벌어진 최종전. 국민들의 관심도 최고조에 달했다. 거리에선 자동차 운행이 멈추고, 극렬했던 학생 데모도 발발이 전무(全無)했다. 모든 눈과 귀가 잠실로 모였다. 이 경기의 에이스도 최순호였다. 후반 16분, 중앙에서 날아온 박창선(朴昌善)의 크로스를 받아 거의 제자리에서 어깨 움직임으로 수비수를 따돌리는 복싱 스텝을 선보이며 찬스를 만들었다. 의도적으로 발목에 얹은 무회전 킥은 반대편 골포스트 하단을 때렸고, 허정무가 튕겨 나오는 공을 득점으로 연결했다. 허정무는 벤치 쪽으로 달려갔고, 반대편에서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최순호의 얼굴이 TV 화면을 가득 채웠다.
“제가 허정무 선배님 쪽으로 뛰어갈 상태가 아니었어요. 전반 43분에 마크맨 이시카미에게 장딴지를 차였는데, 순간적으로 무릎이 쑥 나갔다가 들어오는 느낌이었어요. 라커룸 치료방에 누워 ‘오늘 경기는 여기까지구나’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김정남 감독님이 들어오셨어요. ‘순호야, 해야 돼. 너 없으면 안 돼’라고 귓속말을 하시더군요.”
국민 여러분께 다른 차원의 축구를 볼 기회를 꼭 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무리를 했고, 테이핑을 하고 출전을 감행했다. 후반전 때 거의 뛰지 못했던 배경이다. 골 찬스도 어슬렁거리다 만들어낸 것이다. 골 세리머니를 하러 경기장 반대편으로 뛰어갈 몸이 아니었다. 경기 직후 가장 먼저 한 일이 무릎 깁스다. 당일 저녁, 모든 선수단이 출연한 KBS 국민축하 특집 생방송에 아픈 표정으로 출연했던 이유다.
“‘순호 초이’를 아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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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멕시코전. 종료 2분 전 최순호가 페널티에리어 좌측 20m 지점에서 중거리슛을 시도하고 있다. 사진=조선DB |
헝가리전(12월 9일. 0대1 패), 멕시코전(12월 11일. 1대2 패)을 마치자 한국 선수단으로 손님들이 찾아왔다. 유벤투스 스카우트 팀이었다. “최순호를 보려고 여기까지 왔는데,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 아니냐”는 호소에 한홍기 단장은 “12월 13일 알제리전 후반에 20분 정도 뛰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최순호는 단독 찬스에서 골키퍼의 움직임을 빼앗는 절묘한 멈춤 킥으로 공을 골문 구석으로 데굴데굴 굴려 넣었다.
경기 후 한홍기 단장을 찾은 스카우트들의 평은 “축구를 어떻게 하는지 아는 선수다(He knows how to play)”.
필자가 해외유학 중이던 1990년대 중반, 런던발 로마행 비행기 안에서 만난 옆자리 승객은 소생의 국적을 확인하자 “‘순호 초이’를 아느냐”고 했다. 유벤투스의 전직 스카우트라며, 유벤투스가 몇 년을 따라다녔어도 협상테이블에 앉히지조차 못한 선수는 순호 초이가 유일하다는 말도 했다. 월드컵이 끝나고, 또 다른 이탈리아팀 피사는 대한축구협회에 최순호의 스카우트에 필요한 절차를 알려달라는 전문(電文)을 보내기도 했다. 1990년까지 국내에서 활동해야 병역 의무를 다한다는 점이 해외 이적의 걸림돌이었다.
최순호가 스스로 꼽은 ‘인생 최고의 골’인 1986년 멕시코월드컵 본선 이탈리아와의 경기에서 후반 17분 터뜨린 동점 골은 AFP 등 외신이 꼽은 ‘환상의 황금골’이기도 하다. ‘절묘한 사이드 스텝으로 수비수 둘을 제치고 예측할 수 없는 순간 동작으로 그물을 출렁였다’는 묘사 뒤에 AFP는 “최순호가 함부르크 SV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있다”고 썼다.
“첫 경기 아르헨티나전은 1대3 완패였죠. 축구의 차원이 달랐어요. 공 차는 방식, 움직임이 몇 수 위였습니다. 2차전 불가리아전은 고산지대 적응에 어려움을 겪어서 뛰지 못했습니다. 세 번째 경기는 멕시코시티가 아니라 저지대인 푸에블라에서 열렸어요. 오른쪽으로 꺾으며 스피드를 살려 90도 턴하는 동작으로 슛을 때렸는데, 오른쪽 발등에 그야말로 제대로 얹혔습니다.”
박태준과 최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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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준 전 포철 회장. |
“저도 나중에 들었습니다. 회장님이 저를 각별하게 아껴주셨어요. 저만 보면 늘 흐뭇해하셨죠. 고등학생 어린아이를 데려다 국가대표로 만들었으니까, 성장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곁에서 지켜봤다는 생각이 든다고 하셨습니다. 달걀이 수탉으로 커가는 느낌 아니셨을까요.”
그래서 독대(獨對)나 사적(私的)인 만남이 잦았다. 자주 뵈었기에 둘이서 함께 사진 찍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 용평리조트에서 우연히 마주쳤는데, 고등학교 감독들과 반주를 한 상태라 뵙지 못했다. 박 회장이 “괜찮다”고 했는데도 “다음에 뵙겠습니다”라고 한 것이 지금도 평생의 한(恨)으로 남아 있다.
― 박태준 회장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제가 감히 논할 수 있는 분이 아니시죠. 사회적인 주제, 도덕, 윤리에 관해 말씀하실 때는 표정과 어투가 단호했지만, 차분한 이야기를 하실 때는 눈가가 촉촉해질 만큼 감성이 풍부하셨어요. 만날 때마다 ‘나라를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자네는 축구를 열심히 하는 것이 애국하는 거야’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지금도 회장님의 사랑과 관심에 보답하자는 심정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박태준 사람’이라서 최순호가 받은 불이익도 있다. 1991년 말 은퇴 후 프랑스에서 코치 연수 중이던 1993년 3월, 느닷없이 ‘해촉한다’는 연락이 왔다. “시대적 상황으로 이해해달라”는 말과 함께였다. 남은 계약 기간도 지켜줄 수 없다고 했다.
귀국 후 바로 일본으로 가 박태준 회장을 뵈었다. 두 번째 만남에선 ‘15평 숙소’로 불러주셨다. 정치적 유배(流配)라는 생각이 들었다. 1994년 10월 9일 박태준 회장 모친상 때 최순호가 사흘 내내 빈소를 지키며 조문객을 안내한 배경이다. 이 사실이 신문에 보도되었고 그래서 다른 불이익을 당할 가능성도 커졌지만, 최순호에게는 그것이 ‘당연히 해야 하는 사람의 도리’였을 뿐이다.
미래 축구꿈나무 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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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내셔널리그 우승을 차지한 최순호 울산현대미포조선 감독이 선수들에게 헹가래를 받고 있다. 사진=뉴시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