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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통해 지금을 읽는 ‘新당의통략’ 〈4〉

왜 하필 선조 때 당쟁의 불이 피어올랐나

글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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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준경, 죽기 전에 “朋黨의 私論을 없애야 한다”고 유언
⊙ 파주의 이이·송익필·성혼 중심으로 西人 형성… 신분상 문제 있는 송익필 대신 이이 앞세워
⊙ 이이는 東人과 西人의 갈등을 중재한 인물이 아니라 西人의 몸통… 당대에도 ‘심의겸의 黨’으로 비판받아
⊙ “(이이·성혼·박순 등은) 저들끼리 서로 찬양하고 저들끼리 서로 聲勢를 도와…”(송응개의 비판)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 과정 수료 / 前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西人의 중심인물 율곡 이이.
  이건창(李建昌·1852~1898년)의 《당의통략(黨議通略)》은 서인(西人) 중에서 소수파던 소론(少論) 입장에서 저술됐다. 그는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를 자서(自序)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당의(黨議)를 먼저 한 것은 이유가 있다. 우리 국조의 당폐(黨弊)란 역대에 보지 못하던 것이어서, 목릉(穆陵·선조) 을해(乙亥·1575년)로부터 원릉(元陵·영조) 을해(1755년)에 이르기까지 180년 동안에 공사 간의 문자를 기재한 것이 십에 칠, 팔은 다른 일이 아니고 모두 남의 시비, 득실, 사정(邪正), 충역(忠逆)을 의논할 것 없이 대체로 당론에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날에 정사(正史)를 쓰는 이는 반드시 먼저 당의를 간략하게 추려 옛날 사마천의 글과 반고의 뜻을 모방하여 별도로 한 부(部)를 만들어놓은 뒤라야 그 다른 일이 정리되어 문란해지지 않을 것이다.”
 
  즉 이미 조선 역사의 기록은 당쟁에 의해 채색됨이 심하기 때문에 조선에 관한 정사(正史)를 쓰고자 할 경우 어떤 주장이나 의견이 어느 당파(黨派)에서 나온 것인지를 감안한 다음에 그 타당성을 검토해야 한다는 말이다. 일종의 지식사회학적 성찰이라 할 것이다. 물론 《당의통략》 또한 이 같은 지식사회학적 성찰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완전무결한 ‘객관적 입장’이란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은 필자 또한 마찬가지다.
 
 
  이준경의 유언
 
  이런 한계를 인정하는 가운데 《당의통략》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보자. 이건창은 선조를 임금으로 즉위시킨 사실상의 일등공신인 영의정 이준경(李浚慶·1499~1572년)이 선조 5년(1572년) 7월 7일 세상을 떠나면서 선조에게 올린 유언을 담은 짧은 상소 유차(遺箚)에서 그 책을 시작하고 있다.
 
  흔히 우리는 그보다 3년 후인 선조 8년에 심의겸(沈義謙)과 김효원(金孝元)이 이조(吏曹)의 하급관리 인사권을 가진 전랑(銓郞・하급 관리 인사권을 가진 관리)직을 두고 대립하면서 당쟁이 시작됐다고 배웠다. 그러나 이는 ‘원인’이나 ‘시발점’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도 미미하다. 오히려 그 사건은 ‘표면화의 계기’일 뿐이다. 원인(遠因)은 우리가 앞서 세 차례에 걸쳐 살펴본 대로 주희(朱熹)의 도학(道學)이 도입돼 조선의 사림(士林)이라는 사람들이 교조적(敎條的)으로 받드는 데서 이미 예견된 것이다. 중인(中因)은 명종(明宗)을 끝으로 조선 왕실의 적통(嫡統)이 끊어지고 방계승통(傍系承統)으로 어린 선조가 즉위한 것이다. 근인(近因)은 조광조(趙光祖) 이후 숨죽였던 도학의 무리가 다시 고개를 쳐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건창은 이를 직접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근인과 관련해서는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주었다.
 

  이때 이준경은 “흙 속으로 들어가는 신(臣) 아무개가 아룁니다”로 시작하는 유차에서 네 가지를 선조에게 당부했다. 앞의 둘은 제왕으로 갖춰야 할 자질로 학문과 위엄을 이야기하고, 뒤의 둘은 붕당(朋黨)의 출현이 임박했으니 임금 자신이 군자와 소인을 잘 분별해 군자는 쓰고 소인은 버리고 이어서 붕당의 사론(私論·사사로운 논의)을 없애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마지막을 보자.
 
  “붕당의 사론을 없애야 합니다. 지금의 사람들은 잘못한 과실이 없고 또 법에 어긋난 일이 없더라도 자기와 한마디만 서로 맞지 않으면 배척하여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행동을 다잡는다거나 독서하는 데 힘쓰지 않으면서 고담대언(高談大言)으로 친구나 사귀는 자를 훌륭하게 여김으로써 마침내 허위(虛僞)의 풍조가 생겨났습니다. 군자는 함께 어울려도 의심하지 마시고 소인은 저희 무리와 함께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좋습니다. 이 일은 바로 전하께서 공정하게 보신 바이니 이런 폐단을 제거하는 데 힘쓰셔야 할 때입니다.”
 
 
  ‘심의겸의 黨’
 
  이를 잘 읽어보면 앞일을 예견한 것이 아니라 이미 그런 풍조가 생겨났음을 고발하고 있다. 다행히 실록의 사관(史官)은 사평(史評) 두 가지를 달아놓아 우리에게 이 문제를 더 파고들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첫째 “이때에 심의겸이 외척으로 뭇 소인들과 체결해 조정을 어지럽힐 조짐이 있었기 때문에 이를 지적한 것이다”.
 
  둘째 “공(이준경)은 임금을 아끼고 세상을 염려해 죽는 날에도 이런 차자를 남겼으니 참으로 옛날의 곧은 신하[直臣]라 할 것이다. 당시에 심의겸의 당이 이 차자를 지적해 ‘건조무미한 말’이라는 소(疏)를 올려 배척하기까지 했으니 참으로 군자의 말을 소인은 싫어하는 것이다”.
 
  다시 심의겸이다. 도대체 심의겸은 누구인가? 심의겸은 1535년생으로 이때 38세였다. 아버지는 명종의 장인 심강(沈鋼)이니 명종 비(妃) 인순왕후(仁順王后) 심씨(沈氏)의 동생이다. 처음에는 이황(李滉)에게 배웠다. 22세 때인 1552년 문과에 급제해 외척(外戚)으로서 핵심 요직인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쳤고, 1572년에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올랐다.
 
  이때 김종직(金宗直) 계통의 김효원이 이조정랑(6품직)으로 천거되자 심의겸은 김효원이 예전에 권신(權臣) 윤원형(尹元衡)의 집에 기거한 사실을 들어 권신에게 아부한 자라며 반대했다. 2년이 지난 1574년 김효원은 결국 이조정랑에 임명됐다. 이듬해인 1575년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沈忠謙)이 천거되자 김효원은 전랑(銓郞) 자리가 외척의 사유물이 될 수 없다고 반대해 심의겸과 김효원의 충돌이 본격화됐다.
 
  그런데 이런 일이 생기기 이미 3년 전인 1572년에 이준경은 이와 같은 유차를 올렸고 사관은 곧바로 “심의겸이 외척으로 뭇 소인들과 체결해” “심의겸의 당”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이들은 누구인가?
 
 
  ‘파주 三賢’과 송익필
 
노론의 거두 송시열.
  이제 우리는 조선 중기 정치사 혹은 당쟁사의 가장 내밀한 지점에 발을 내디뎠다. 지역적으로는 경기도 파주에 담긴 역사의 단편을 읽어내는 작업이다. ‘파주 삼현(三賢)’이라는 말이 있다. 이이(李珥·1536~1584년), 송익필(宋翼弼·1534~1599년), 성혼(成渾·1535~1598년) 세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2004년 보물 제1415호로 지정된 《삼현수간(三賢手簡)》은 송익필의 아들 송취대(宋就大)가 이 세 사람의 편지와 답장 등을 모아서 한 권의 책으로 엮은 것이다.
 
  조선 당쟁사에서 가장 큰 규모와 세력을 형성한 서인은 이 세 사람에게서 생겨났다. 그 후 노론(老論)과 소론이 갈릴 때 소론의 정신적 지주는 성혼이 됐다. 반면에 서인 및 노론은 송익필의 제자인 김장생(金長生·1548~1631년), 김장생의 제자인 송시열(宋時烈·1607~1689년)로 맥을 이어간다. 사실 이이의 역할은 미미했다. 관직 생활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이렇다 할 제자도 길러낸 바가 없다. 이것이 실상에 가깝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책에서 이이에 대해 ‘당쟁을 조정하려 했던 인물’이라고 배웠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이이는 송익필 다음가는 서인의 이론가이자 조정에서 서인의 이익을 대변하려 한 인물일 뿐이다. 왜냐하면 송익필에게는 출신이 미천하고, 조광조를 지원한 정승 안당(安搪) 집안을 몰락으로 이끈 고변(告變)사건의 주인공 송사련(宋祀連)의 아들이라는 딱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인들은 은근슬쩍 이이를 ‘서인의 지주’로 부각하고 송익필의 이름은 지워버렸다. 이런 일은 선조, 광해군, 인조, 효종, 현종, 숙종 때까지 줄곧 이어졌다.
 
  이런 실상 왜곡을 바로잡으려 한 사람은 훗날 노론의 거두인 송준길(宋浚吉·1606~1672년)과 송시열이었다. 그가 행장을 쓰고 안 쓰고에 따라 당파가 갈리고 명망이 오르내렸던 송시열이 송익필을 위한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는데 그 서두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지난번 동춘(同春) 송준길이 나에게 말하기를 ‘문원공(文元公·김장생) 김 선생이 율곡 이 선생을 스승으로 모셔 도(道)가 이루어지고 덕(德)이 높게 되었는데 그가 관건(關鍵)을 열 수 있도록 기초를 다져준 분이 구봉(龜峯·송익필) 선생이었다는 것은 속일 수가 없는 사실이오. 선생의 문하에서 상당수에 달하는 명현(明賢) 거공(巨公)이 배출되었는데도 선생이 세상을 뜬 후 70여 년이 되도록 묘도에 비갈이 없으니 아마도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아니겠소’라고 했다.”
 
 
 
西人의 聖地 파주

 
송익필의 제자 김장생.
  여기서도 약간의 오도(誤導)가 있다. 김장생은 줄곧 송익필을 곁에서 스승으로 모셨고 이이에게는 20대 때 잠깐 《소학(小學)》 등을 배운 것뿐이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김장생을 인물사전 등에서 찾아보면 ‘이이의 제자’ 혹은 ‘이이와 송익필의 문인’ 등으로 표기되고 있다. 영향을 받은 것은 있겠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이이는 김장생에게는 스승 송익필의 붕(朋)이라고 봐야 한다. 그럼에도 송익필을 숨겨야 했고 이이를 그 자리에 올려야 했기에 김장생의 ‘스승’ 문제가 혼선을 빚어왔던 것이다. 학계에서 이 문제는 이제 분명히 정리해야 할 것이다.
 
  다시 ‘파주 삼현’으로 돌아가자. 관직 길이 막힌 송익필은 지금의 출판단지가 있는 심학산(옛 이름은 구봉산) 자락에서 평생 제자들을 길렀다. 그의 호 ‘구봉(龜峯)’은 그 산 이름에서 딴 것이다. 이이는 거기서 동북쪽으로 30km쯤 떨어진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에서 자랐다. ‘율곡’이란 호도 거기서 온 것이다. 성혼은 다시 거기서 동북쪽으로 7km쯤 떨어진 같은 파평면 눌노리에서 자랐다. 우계(牛溪)라고도 하는데 성혼의 호가 ‘우계’다. 송익필은 임진왜란 때 충청도로 피란을 가서 죽었기 때문에 충청도 당진의 숨은골[隱谷]이란 곳에 묻혀 있지만 이이와 성혼의 묘소는 각각 율곡리와 눌노리에 있다.
 
  이처럼 경기도 파주는 조선 당쟁의 주류(主流)이자 도그마로서 주자학을 신봉한 서인의 성지(聖地)라고 할 수 있다. ‘삼현’에는 못 들었지만 거의 동년배인 이 세 사람과 뜻이 맞은 인물이 바로 심의겸이다. 심의겸의 근거지는 광탄(廣灘)이다. 역시 파주다. 지금도 파주시 광탄면 신산리에 심의겸의 묘소가 있다.
 
  네 사람은 이미 파주라는 지역을 기반으로 깊은 교결을 맺고 있었다. 그리고 조정 내 파워는 말할 것도 없이 심의겸이 가장 컸다. 사관이 ‘심의겸의 당’이라고 한 것은 바로 이 세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다. 무엇보다 당시 사관은 이들을 ‘뭇 소인’이라고 부르고 있다.
 
 
  율곡의 〈論朋黨疏〉
 
  실제로 이준경의 유차가 올라간 직후 이이가 가장 먼저 그것을 비판하는 〈논붕당소(論朋黨疏)〉를 써서 올렸다. 이때 이이는 관직을 그만두고 처가가 있는 황해도 해주와 파주를 오가며 지낼 때였다. 홍문관 응교였다가 물러나 관직에 있지도 않은 이이가 격한 논조의 소를 올렸다는 것은 ‘심의겸의 당’과 ‘뭇 소인’ 중에 바로 자신이 포함돼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조실록》은 처음으로 수정작업이 이뤄진 실록이다. 즉 《선조수정실록》은 훗날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권력을 잡은 서인들이 인조와 효종 대에 걸쳐 다시 쓴 것이다. 이이의 〈논붕당소〉도 《선조실록》에는 언급조차 없지만 《선조수정실록》 1572년(선조 5년) 7월에는 전문이 다 실려 있다. 참고로 《선조수정실록》은 1년부터 임진왜란이 일어난 25년까지는 날짜를 특정할 수 없다며 모두 ‘1일’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이이는 먼저 이준경이 우려한 네 가지 항목 모두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붕당론은 전혀 근거가 없는 난언(亂言)에 불과하다고 폄하했다. 그의 상소는 상당 부분 이준경에 대한 인신공격으로 가득 차 있다.
 
  “선(善)을 좋아하는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식견이 밝지 못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재기(才器)가 부족하며, 선비를 사랑하는 뜻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거만하여 자기를 높였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시정에 시끄러운 말이 왁자하게 퍼져 여우와 쥐 같은 무리들이 사림을 음해하고자 하였는데, 준경이 주동자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이이는 ‘붕당은 전혀 없다’며 이준경이 붕당 운운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일 것이라고 단정한다.
 
  “준경이 붕당을 한다고 지목하는 사람들이 한때의 청망(淸望)이요 공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어서, 만약 이름을 밝혀 말하면 특별히 사림에 죄를 얻을 뿐 아니라 소인으로 귀착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유언을 통해 이 같은 이야기를 한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옛날 사람은 죽을 때 그 말이 착했는데 지금의 이 사람은 그 말이 악하니, 이상한 일이도다.”
 
 
 
유성룡과 정철

 
西人의 대변인 역할을 했던 정철.
  이런 글이 올라가자 대간(臺諫) 중에는 이준경을 추죄(追罪)할 것을 주장하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이때 홍문관 수찬 유성룡(柳成龍)이 나섰다.
 
  “그 말은 사실 옳지 않으나 그 잘못을 가려내면 그만이지, 죄를 청하기까지 하는 것은 대신을 대우하는 체모에 손상이 될 듯하다.”
 
  그런데 서인 입장에서 서술된 《선조수정실록》도 세월이 흐르고 난 때문인지 명백하게 자신들의 정신적 지주(支柱)인 이이가 아니라 이준경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이때 노당(老黨)·소당(少黨)의 설이 사라지지 않았으므로 이준경은 그것이 장차 화근이 되지 않을까 우려하였고, 또 기대승(奇大升·1527~1572년) 등이 선배에게 붙지 않는 것을 미워한 나머지 이 유차를 지어 제재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 뜻은 구신(舊臣)을 부식하자는 데 있었는데, 사론(士論)이 이는 사화가 일어날 조짐이라고 하여 떠들썩하게 논변하니, 상이 모두 물리쳤다.
 
  그 후 10여 년이 지나 동(東)·서(西) 논이 크게 일어났다. 대체로 그때는 이른바 소당(少黨)은 이미 선진(先進)이 되었고 후진이 다시 전일 구신의 부류와 합쳐 같은 당이 되어 세력이 더욱 강성해져서 탄핵하고 배격하는 일이 지난날 사람들보다 한결 심했다. 그러나 만성적인 풍조를 혁신하고 세도(世道)를 만회하자는 논의는 다시 조정에 나오지 않았으니 국가의 피해가 심각했다. 그러므로 뒷사람이 이준경에게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있어 그 일을 예언했다고 했으니, 그 전말은 상고해서 알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소당은 이미 선진이 되었고”라는 말은 심의겸의 당, 즉 훗날의 서인을 가리키고 “후진이 다시 전일 구신의 부류와 합쳐 같은 당이 되어”는 동인을 가리킨다. 기대승은 바로 이해, 즉 1572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당쟁과는 무관했다. 오히려 파주 4인방과 가까운 또 한 사람은 정철(鄭澈·1536~1593년)이었다.
 
  이이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조정에서 당론을 대변하는 역할을 맡게 되는 정철은 1589년 우의정에 올라 정여립(鄭汝立) 사건을 키워 동인들을 추방하고 서인 집권을 이뤄내지만 1591년에 광해군을 세자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 이른바 건저의(建儲議) 사건으로 축출되고 극변으로 유배를 가야 했다. 당쟁의 최전선에서 당쟁을 사생결단의 투쟁으로 악화시킨 장본인 중 한 사람이다.
 
  적어도 심의겸은 ‘파주 4인방’에 포함돼 있을 뿐만 아니라 초기에는 매우 중요한 정치적 비중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西人의 계륵, 심의겸 문제
 
  심의겸, 한쪽에서는 ‘외척이면서도 사림을 보호한 인물’이라고 높이 평가하는 반면, 다른 쪽에서는 ‘나라를 어지럽히고 조정을 잘못 이끈 죄[迷國誤朝之罪]’가 있다고 혹독하게 비판한다. 비판하는 쪽에서는 심의겸이 이이·송익필·성혼 등 사림과 가까이한 것도 ‘속내를 감추고 명예를 얻고자 스스로 사림에게 빌붙었다’고 폄하한다.
 
  대체로 파주 4인과 정철 등은 20세를 전후해서 친교를 맺게 되고 학문적·정치적 동지가 됐다. 이들이 한 덩어리가 되는 데 백인걸(白仁傑·1497~1579년)과 《토정비결》의 저자인 이지함(李之菡)의 형 이지번(李之蕃)의 역할이 컸다.
 
  먼저 이이는 이지함의 한산 이씨 집안과 오랜 교분이 있어 이지번이 살던 구봉산 아래를 자주 찾았고, 이 과정에서 같은 곳에 살던 송익필과 교분이 맺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성혼은 원래 한양에서 살다가 1539년 아버지 성수침(成守琛·1493~1564)이 처가가 있는 우계로 낙향하는 바람에 이곳에서 살게 됐다. 성혼은 어려서 백인걸 문하에서 공부했는데 백인걸은 조광조의 제자이며 명종 때 많은 시련을 겪었다. 선조 때 대사간에 오르기도 했으나 1571년 파주로 물러나 살았다. 이이와 이미 깊은 친분이 있던 백인걸이기에 성혼도 이를 통해 이이와 교분을 맺었다. 이렇게 되면서 송익필·이이·성혼은 의기투합한 것이었다.
 
  심의겸의 경우는 이이가 다리 역할을 해 나머지 사람들과 교결(交結)을 맺을 수 있었다. 우선 두 사람의 집안은 조금 멀기는 하지만 연결이 돼 있었다. 심의겸의 조부 심연원(沈連源·1491~1558년)에게는 심봉원(沈逢源·1497~1574년)이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심봉원이 이이의 할머니 남양 홍씨의 종모제(從母弟)였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이이는 심봉원의 집을 다니며 심씨 집안 사람들과 교분을 쌓았다. 실제로 이이는 심의겸의 아버지 심강의 제문을 짓기도 했다.
 
 
  심의겸 축출
 
  한편 선조로서는 대비의 친동생이 조정에 있다는 것은 여간 부담스러운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자신이 방계승통이라 정통성을 갖춘 명종의 왕비던 대비의 존재감이 클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심의겸은 벼슬은 참판이나 관찰사 정도였지만 서인의 당파를 사실상 이끌면서 조정에서도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러다 결국 선조 14년(1581년) 7월 사헌부 장령 정인홍(鄭仁弘·1536~1623년)이 강력 주장해 심의겸은 마침내 파직된다. 당시 대사헌은 이이였지만 부하인 장령 정인홍의 요구를 물리치기 어려울 만큼 심의겸 문제는 선조의 조정에서 암 덩어리로 자라고 있었는지 모른다. 당시 정인홍이 올린 글의 일부다.
 
  “심의겸은 폐부(肺腑) 같은 척속(戚屬)으로 세업(世業)을 빙자하여 조정의 권력을 농락하면서 기세를 크게 불려 6~7년 이래로 조정의 여론을 분열시켰으니 그 나라를 어지럽히고 조정을 잘못 이끈 죄[迷國誤朝之罪]가 큽니다. 바라건대 호오(好惡)를 분명히 보이시어 인심을 진정시키소서.”
 

  이때 선조가 심의겸을 파직하면서 답한 말 속에 파직의 사유가 고스란히 들어 있다.
 
  “그대들도 또한 스스로 자신의 일을 살펴서 신하가 붕당을 지으면 종말에는 반드시 주멸(誅滅)된다는 것을 경계하라.”
 
  일단 심의겸의 기세가 꺾이자 이때부터 이듬해까지 1년 가까이 이이·심의겸·성혼·정철 등이 붕당을 이루고 영의정 박순(朴淳)이 후견인 역할을 한 정황에 대한 폭로가 계속 이어졌다. 박순이 왜 하필이면 서인의 후견인 역할을 하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당의통략》에서 실마리를 던지고 있다.
 
  “박순이 우의정이 되었을 때 대간(大諫) 허엽(許曄)이 조그마한 일로 박순을 심문해 고찰하자 박순이 스스로 우의정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로부터 당론(黨論)이 드디어 나눠졌다.”
 
  조광조 뒤에 안당이 있었다면 이들 뒤에는 박순이 자리한 형세였던 것이다. 심의겸 문제를 비판하는 집단은 동인이었다. 이 점을 감안하고서 선조 16년(1583년) 7월 16일 대사간(大司諫) 송응개(宋應漑·1536~1588년)가 선조에게 아뢴 내용은 그동안 가려진 ‘파주 4인방’의 관계를 속속들이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자료라 할 것이다. 관련 부분만을 인용한다. 무엇보다 서인 입장에서 다시 집필한 《선조수정실록》에 기록된 내용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이와 심의겸
 
  〈이이(李珥)는 원래 일개 중으로 임금과 어버이를 버리고 인륜(人倫)에 죄를 지었습니다. 그의 죄를 논하자면 이미 선유(先儒)들의 정론(定論)이 있습니다. 변신하여 환속(還俗)한 뒤에 권문(權門)에서 가축처럼 길러진 것[豢養]을 이 세상의 청의(淸議)는 용서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가 처음 상사(上舍)에 뽑혀 알성(謁聖)할 때 관(館)에 있는 많은 선비들은 그와 동렬이 되는 것을 수치로 여겨 통알(通謁)을 불허했는데, 마침 (심연원의 동생인) 심통원(沈通源)이 자기의 심복을 보내 앞뒤에서 분주히 소통의 길을 열어놓음으로써 비로소 행세할 수 있었습니다. 급기야 출신(出身)한 후에는 심의겸(沈義謙)의 천발(薦拔·천거)을 받아 청현(淸顯)의 길이 트였으므로 그와 심복(心腹) 관계를 맺어 생사를 함께하게 되었으니 그가 일생 동안 가진 마음을 더욱 알 만합니다.
 
  다만 중간에 자칭 학문을 한다 하고 문장으로 꾸며 당시의 이른바 사류(士類)와 박순의 무리에 붙어 생사를 함께할 벗으로 삼고 은밀히 서로 폐부(肺腑)를 결탁하여 시론(時論)을 주도하였던 것인데, 그때로 말하면 심의겸이 외척이라는 권세를 빙자하여 왕망(王莽)·양기(梁冀)와 같은 세력[두 사람 모두 서한(西漢) 때의 외척-편집자 주]으로 천헌(天憲·조정의 법령)과 국명(國命)을 입과 손으로 요리하던 때였습니다.
 
  이준경은 고명(顧命)의 원로대신이었는데도 그가 자기에게 제재를 가한 것을 분히 여겨 암암리에 저배(抵排)를 가함으로써 그 위치에 편안히 있지 못하게 만들었고, 정대년(鄭大年)은 선조(先朝)의 기구(耆舊·원로)이며 김난상(金鸞祥)은 을사년의 유직(遺直)이었지만 의겸에게 붙지 않았다가 모두 현척(顯斥)을 당하였으며, 만약 자기와 가까운 사이라면 일개 낭관(郞官)이 외임에 보직돼 나가게 되어도 온 조정이 나서서 그의 유임을 청하게 만들 만큼 저들 무리끼리 사원(私援)을 해 못하는 짓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조정의 명령이 조정에서는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의겸과 박순에게서 나오던 때였습니다.
 
  그 당시 전하께서는 입승(入承)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아 비록 식자 간에는 통분을 느끼는 자가 있었지만 당시로서야 누가 감히 그의 세염(勢熖·세력의 기세)을 무서워하지 않고 주상께 아뢸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때 이이는 비록 산림(山林)으로 자처하고는 있었으나 실지로는 당시 모주(謀主)로서 서로 안팎에서 도왔으니, 이는 의겸이 이이에 대하여 자기를 성취시킨 잊기 어려운 은혜가 있었고, 이이는 또 의겸에 대하여 성세(聲勢·조정의 발언권)로 서로 후원해주는 힘이 있었기 때문으로 그 점에 관하여는 나라 사람들이 모두 분명히 알고 있는 사실들입니다. 다만 이이가 감히 소야(疎野)의 태도로 산림(山林) 사이를 출몰하면서 마치 나오기 어려워하는 듯한 태도를 보임으로써 헛된 명예가 높아 그를 믿고 그에게 의혹된 자가 많았던 것입니다.
 
 
  이이의 조정과 화합
 
  그렇게 되자 이이는 출처(出處)와 진퇴(進退)에 있어 걸핏하면 전현(前賢・옛 현인)을 원용하면서 자신만이 세상에 우뚝 서 시비(是非)에는 초연한 것처럼 자처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의겸이 (정인홍 등이 주도한) 청의(淸議)의 버림을 받았을 때도 이이가 마음속으로는 비록 분하게 여겼으나 겉으로는 서로 아무 관계가 없는 듯이 짐짓 전리(田里)로 물러가 시세(時勢)를 관망하다가는 팔을 내두르며 조제(調劑·조정)·보합(保合·화합)의 말을 내세우면서 마음을 합쳐 협공(協恭)하자는 말로 세상을 고무 현혹하고, 또 그를 위해 소까지 올리면서 심의겸의 단점과 함께 김효원의 장점을 거론함으로써 지극히 공정하다는 이름을 얻어내려고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이이가 아래로는 당세(當世)를 속인 것인데도 사람들이 깨닫지 못했고, 위로는 전하를 속인 것인데도 역시 깨닫지 못하셨던 것입니다. 아아, 자기 마음은 속일 수 있어도 뭇 사람의 마음을 속이기는 어렵고 전하를 속일 수는 있어도 귀신을 속이기는 어려운 것이어서 이이의 속셈이 그대로 한번 행해지자 나라 사람들은 이미 그의 간폐(肝肺)를 훤히 들여다보았던 것입니다.
 
  지난번 장령 정인홍이 의겸을 탄핵했을 때 이이는 장관(長官)으로서 사사로이 인홍을 만나 힘을 다해 구해(救解)하다가 인홍이 결국 그의 말을 듣지 않자 뜻을 굽혀 그를 따르면서 마치 애당초 의겸의 죄상을 몰랐던 것처럼 시치미를 떼었고, 급기야 인홍이 정철이 의겸에게 붙었다 하여 아울러 논하자, 이이는 또 이르기를 ‘정철이 의겸에 대하여 비록 정은 서로 깊지만 기미(氣味)와 심사(心事)에 있어서는 두 사람이 전혀 다르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정철을 그 와중에서 빼내기 위한 것이었지만 사실은 바로 자신의 변명이었던 것입니다.
 
 
  西人의 감싸주기 행태
 
  공론이 일어난 뒤에는 이이가 감히 터놓고 의겸의 처지를 다시 두둔하지는 못하였지만, 그러나 그가 한 짓들은 모두 의겸을 위한 것이 아님이 없었습니다. 비록 성상께서 진정(鎭定)에 힘쓰셨기 때문에 동서(東西)의 설이 겨우 잠잠해지기는 하였지만, 그때 이이는 감히 터놓고 배척을 가하여 심지어 소사(疏辭)에까지 나타내어서 겉으로는 조제(調劑)의 설에 가탁(假託)하면서 내심 상대를 무너뜨릴 모책을 자행하였으니 그의 계략이 역시 간사하다고 하겠습니다. 처음에는 둘 다 옳지 못하다고 창언(倡言)했다가, 그다음에는 의겸을 위해 변명하면서 심지어 ‘의겸은 좋은 쪽은 지향하고 있고 죄악이라곤 별로 없다’고 했고 끝에 가서는 ‘정철과는 전혀 다르다’고 하여 전후 3차에 걸쳐 의겸을 논하면서 그때마다 말을 바꾸었으니 그의 마음을 알 만합니다.
 
  그가 대사간으로 부름을 받고 올 때는 그가 지나는 곳의 읍에서 곡식 100석을 공공연하게 받아 자기 본가로 실어 보내는 등 모든 이해관계가 있는 곳이면 행여 미치지 못할세라 조금도 고기(顧忌)하는 바가 없었는데, 이는 입 있는 사람이면 다 말하고 있는 것으로서 원근(遠近)의 웃음거리였고 타매(唾罵)가 길에 가득한 실정입니다. 그가 법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방자하게 굴면서 몸가짐의 무상함이 한결같이 이에 이르렀는데도 현재 박순은 입을 모아 찬양하면서 전하를 속이고 있으니 그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성혼은 박순 등이 천양(薦揚)한 사람으로 사실은 의겸과 대대로 친분이 두터운 사이이고 또 박순과도 교계(交契)가 매우 깊은 사이이며, 이이와는 골육(骨肉)보다 더한 정분이 있어서, 성혼의 입장에서는 오직 그 세 사람이 있음을 알 뿐 공론이 있는 것은 도무지 모르기 때문에 그들의 말이라면 모두 옳다고만 주장할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평일의 논의(論議)도 그들은 마치 한 입에서 나온 듯이 언제나 일치하였고, 지난번 상소 중에도 경상(卿相)들을 낱낱이 헐뜯어 모두 속류(俗流)로 만듦으로써 오직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맡기려 하였는데, 그 뜻은 박순과 이이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저들끼리 서로 찬양하고 저들끼리 서로 성세(聲勢)를 도와 만약 의겸의 죄를 논하면 이이가 나서서 구해(救解)하고, 이이의 과실을 지적하면 박순과 성혼이 또 서로 영호(營護)하여 돌아가면서 서로를 이끌어 기어코 천총(天聰)을 가렸습니다. 그리하여 감히 삼사(三司)가 논한 것을 불공평(不公平)하다고 하는데 그러한 성혼의 마음은 과연 공평한 데서 나온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계미삼찬
 
  마지막에 성혼에 대한 언급이 나온 것은 삼사(三司: 사헌부·사간원·홍문관)에서 이이를 탄핵하자 성혼이 이를 반박하는 글을 올렸기 때문이다. 이로써 ‘파주 4인방’의 실상은 어느 정도 드러났다고 본다. 송응개의 이 말에 대해 선조는 이렇게 답했다.
 
  “네 말이 다 옳다고 해도 지금에 와서야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불충(不忠)이다. 직에서 물러나라.”
 
  선조는 송응개의 말에서도 ‘당파성(黨派性)’이 지나치다고 느낀 것이다. 이이는 두 달 후인 9월에 조정에 들어와 이조판서에 오른다. 송응개를 비롯한 동인의 참패였다. 이때 선조가 했다는 말이 《당의통략》에 실려 있다.
 
  “이이는 진실로 군자다. 이이와 같다면 당이 있는 것이 근심이 아니라 오직 당이 적을까 근심이다. 나도 주희의 말대로 이이나 성혼의 당에 들고 싶다.”
 
  이조판서에 제수된 이이는 송응개와 더불어 자신을 공박했던 동인의 박근원(朴謹元·1525~1585년)과 허봉(許·1551~1588년)에 대해서 용서해줄 것을 청했다. 선조는 허락하지 않고 송응개를 비롯해 삼사의 책임자였던 이들을 함경도 쪽으로 유배 보냈다. 이들을 서인은 ‘계미삼찬(癸未三竄)’이라고 불렀다. 찬(竄)은 유배와 같은 뜻이다. 그런데 《당의통략》에는 흥미로운 문장 하나가 실려 있다.
 
  “그러나 이이는 끝까지 송응개는 용서해달라고 청하지 않았다.”
 
  그만큼 그의 글이 서운했던 것이다.
 
 
  노수신의 이이에 대한 평
 
  그런데 이듬해 이이는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 선조는 갑자기 이이에 대한 생각을 바꾼다. 영의정 노수신(盧守愼)이 삼찬을 용서해줄 것을 청하자 선조는 이를 허락했다. 1585년의 일이다. 그런데 《당의통략》에 따르면 이때 선조는 이렇게 말한다.
 
  “송응개 등이 이이를 간사하다고 말했는데 이이는 과연 간사한가?”
 
  이에 노수신이 답했다.
 
  “이이는 자신에게 아첨하는 것을 기뻐했던 사람입니다.”
 
  군자가 아니라 소인이라는 뜻이다. 노수신은 《논어》에 나오는 다음 말을 압축해서 한 것이다.
 
  공자(孔子)가 말했다.
 
  “군자는 섬기기는 쉬워도 기쁘게 하기는 어려우니, 기쁘게 하기를 도리로써 하지 않으면 기뻐하지 아니하고, 사람을 부리면서도 그 그릇에 맞게 부린다. 소인은 섬기기는 어려워도 기쁘게 하기는 쉬우니, 기쁘게 하기를 비록 도리로써 하지 않아도 기뻐하고, 사람을 부리면서도 능력이 완비되기를 요구한다.”
 
  에둘러 말했지만 노수신의 말은 이이는 군자라고 할 수 없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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