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阿Q의 시 읽기 〈1〉 토머스 하디의 〈그가 죽인 사람〉

‘묘하고 별난 게 전쟁이지!’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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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문학은 인간 운명과의 조우다. 셰익스피어는 비극 《맥베스》에서 “인생은 실체가 없는 망령, 백치가 떠드는 이야기”라고 했다. 그 이야기가 문학이다. 문학의 갈래 가운데 시는, 군더더기를 발라낸 날 선 철사와 같은 언어의 조립이다. 철심을 눌러 세상과 운명을 그린 장르가 시다. 국내보다 해외 시를 중심으로 인간 운명을 갈파한 좋은 시 한 편을 소개한다. 많은 성원 부탁드린다. ‘아Q’는 루쉰의 《아Q정전(阿Q正傳)》(1921년 작)에 나오는 인물로 바보다. 미워할 수 없는, 나와 당신의 자화상이다.
1차 세계대전 당시의 전투 모습.
  그가 죽인 사람
  - 토머스 하디(김천봉 譯)
 
  “그와 내가 그냥 칙칙한
  어느 옛 술집에서 만났다면,
  둘이 앉아 술잔 주고받으며
  거나하게 취했으련만!
 
  “하필 보병으로 배치되어,
  얼굴 맞대고 노려보며,
  그는 나를 나는 그를 쏘다가,
  그 자리에서 그를 죽였다.
 
  “나는 그를 쏴 죽였다 왜냐면 ‐
  왜냐면 그는 나의 적이었기에,
  그뿐: 물론 그는 나의 적이었다,
  틀림없이 그랬다. 어쩌면
 
  “그도 무심코 덜컥 입대한 게
  아닌가 싶었으리‐꼭 나처럼 ‐
  일자리 잃고 ‐ 세간도 다 처분한 터에 ‐
  딱히 다른 이유 없이.
 
  “그래, 묘하고 별난 게 전쟁이지!
  어느 바에서 만나면 술을 대접하든가,
  푼돈쯤은 도와줘도 좋을 만한
  사람을 쏴서 쓰러뜨리니.”
 
 
  The Man He Killed
  By Thomas Hardy
 
  “Had he and I but met
  By some old ancient inn,
  We should have sat us down to wet
  Right many a nipperkin!
 
  “But ranged as infantry,
  And staring face to face,
  I shot at him as he at me,
  And killed him in his place.
 
  “I shot him dead because ‐
  Because he was my foe,
  Just so: my foe of course he was;
  That's clear enough; although
 
  “He thought he'd 'list, perhaps,
  Off-hand like ‐ just as I ‐
  Was out of work ‐had sold his traps ‐
  No other reason why.
 
  “Yes; quaint and curious war is!
  You shoot a fellow down
  You'd treat if met where any bar is,
  Or help to half-a-crown.”
 
 
   장편소설 《테스》를 쓴 토머스 하디(1840~1928)가 쓴 시다. 하디는 인간의 의지와 그 의지를 짓밟아 뭉개는 운명과의 비극적 충돌을 주로 작품에 담았다. 인간과 신(神)의 갈등은 하디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주제다.
 
  〈그가 죽인 사람〉은 하디가 남긴 전쟁을 주제로 한 여러 시편 중 하나다. 화자(話者)는 마치 더듬거리는 듯한 어조, 이미 취해 있는 말투다. 왁자지껄한 선술집 테이블에 엎드려 술잔을 움켜쥔 채 독백하고 있는 듯하다.
 
  자신의 총에 죽은, 자신과 똑같이 생긴 그(The man)를 떠올린다. 지우고 싶지만 잊을 수 없다. 자신이 쏘아 죽인 병사가 누구의 적도 될 수 없음을 안다. 시인은 5연에서 ‘그래, 묘하고 별난 게 전쟁이지!’라고 읊조린다. 마치 신을 향한 빈정거림처럼 들린다.
 
  김동인의 단편 〈배따라기〉(1921년 작)를 이 시에 비유하면 어떨까. 아내는 동생과 수상한 관계다. 형은 둘 관계를 의심하고 억울한 아내는 자살한다. 동생도 가출,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형은 뱃일을 하며 세상을 떠다닌다. 10년 만에 형제가 우연히 만난다. 동생이 형에게 건넨 말.
 
  “형님, 저거 다 운명이외다.”
 
  운명이란 무엇인가. 죽고 죽이는, 파투가 난 인간 삶이 신의 책임인가, 인간과 악의 결탁인가, 개인의 책임인가,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그저 팔자소관인가.
 
  6월 25일은 6·25 발발 66주기다. 동족상잔과 이산(離散)의 상처가 아직도 한국인의 심장을 뜨겁게 핥는다. 자문해 본다. 6·25는 신의 의지인가, 악마(김일성과 이데올로기)의 간교인가, 한민족의 팔자인가.
 
 
  미를 버린 문학은 진절머리
 
  글쓰기(문학)는 미학의 산물이다. 그러나 인간의 운명과 맞닥뜨린 문학은 미(美)를 버릴 수밖에 없다. 미를 버린 문학은 진절머리다. 아이러니다. 아이러니는 인간 운명과 닮았다.
 
  베트남 전쟁을 그린 월남파병 작가 박영한의 장편 《인간의 새벽》(1979년 작)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어느 쪽이거나 간에 전쟁의 명분은 무성하고 그 속에서 고통당하며 메말라가는 개인이란 이름의 잡초… 아버지는 프랑스군이, 오빠는 연합군에 의해서. 어머니와 동생은 민족해방전선이. 집은 미군 헬리콥터가… 얼마나 완전무결한 아이러니냐.”
 
  운명의 아이러니, 그게 인간이다. 전쟁도 거대한 운명의 아이러니가 아닐까.
 
 
  …그 어느 세상부터/생긴 대로 살아온 이 서러운 삶들 위에//
 
  어제는 인공기(人共旗) 오늘은 태극기/관언(關焉)할 바 없는 기폭이 나부껴 있다.
 
  - 유치환의 시 〈기의 의미〉(1951년 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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