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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진단

샤를리 에브도 사건과 표현의 자유

자유의 크기와 위험은 자유로워지려는 의지에 비례한다

글 : 박성희  이화여대 커뮤니케이션 미디어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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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晟希
⊙ 美 컬럼비아대 사회학과 졸업, 美 퍼듀대 대학원 언론학 박사.
⊙ 《조선일보》기자, 대통령직속미래기획委 위원, 방송통신委 심의위원 역임.
    現이화여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의 습격이 있은 후인 1월 13일 나온 《샤를리 에브도》의 표지. ‘나는 샤를리다’라는 슬로건을 들고 있는 무하마드 위에 ‘모든 것을 용서한다’는 글이 함께 적혀 있다.
  21세기 ‘표현의 자유’의 최전선(最前線)은 아마도 프랑스 파리가 아닐까 싶다. 왕정에 맞선 시민들의 자유주의 사상을 배양한 18세기 서구 계몽주의 산실이자 볼테르와 루소의 나라 프랑스에서, 자유는 아직도 현재형으로 신장하는 중이다. 파리지앵들은 투쟁과 피로 쟁취한 자유를 아직도 피 흘리며 지켜 내고 있다. 지난 달 무하마드를 불경스럽게 묘사했다는 이유로 무장한 이슬람 과격분자가 난입해 12명의 기자를 조준 사격한 사건으로 경찰을 포함해 모두 17명이 목숨을 잃는 대참사로 전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풍자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Charlie Hebdo)》 피격사건이 그것이다. ‘나폴레옹 시대에도 볼 수 없었던 문화의 최전선’이라는 표현처럼, 이번 샤를리 피격사건이 던지는 파장은 국경과 대륙을 넘어 격렬하게 번져 가고 있다.
 
  전세계는 우선 무자비한 공격을 비난하며 사건 직후 파리에서 150만명이 참가한 퍼레이드에서 ‘나도 샤를리다(I am Charlie)’를 외치며 총에 맞은 ‘표현의 자유’를 애도하는 데 뜻을 같이했다. 그러나 곧 사건은, 표현의 자유냐 불필요한 도발이냐를 놓고 여론을 양분시키는 데 이르렀고, ‘나는 샤를리가 아니다(I am not charlie)’ ‘나는 아메드다(I am Ahmed: 이번 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무슬림 경찰)’라는 구호도 뒤를 이었다.
 
  앵글로 색슨과 프랑스, 유럽 대륙과 미국은 이번 사건이 드러낸 문화적 민감성에 대해 각기 다른 편차의 반응을 나타냈다. 만화가를 죽이는 일은 18세기 이후 찾아볼 수 없는 극도의 야만적 행위라는 반응에서부터, 다른 종교적 믿음을 존중하고 문화적 민감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지적에 이르기까지, 샤를리 사건은 표현의 자유가 제한되어야 하는 범위에 대한 새로운 논쟁을 불붙였다.
 
  특히 요즘은 걷잡을 수 없이 빠른 기술의 발달로 인터넷상에 번져 가는 자유와 책임의 문제가 각국의 화두가 되고 있는 시점이다. 샤를리 에브도 사건이 중요한 이유는 이렇게 복잡한 상황에서 다양한 논쟁의 한복판에서 가장 처절하게 펜의 자유를 구가했기 때문이다.
 
  《샤를리 에브도》는 1970년에 설립된 풍자 주간지이다. 전신(前身)은 드골의 죽음을 풍자해 비판을 받고 문을 닫은 주간지 《하라키리》로, 종교인, 정치인, 기업인 할 것 없이 다양한 대상을 성역없이 풍자하는 것을 편집 방향으로 삼아 왔다. 그 때문에 초기 부수가 3만 부밖에 되지 않는 이 작은 매체는 거침없는 풍자와 비판으로 각계의 표적이 되어 왔다. 2011년 아랍의 봄 특집호를 낸 후 폭탄공격을 받았고, 2012년에는 프랑스 정부의 권고를 무시하고 성적 포즈를 취한 나체의 무하마드를 게재하기도 했다. 테러를 우려한 당시 프랑스 외무상 로랑 파비우스(Laurent Fabius)는 전세계 20개국의 대사관과 문화센터와 학교를 닫으며 “불에 기름을 붓는 것이 현명한 일인가?”고 반문했다. 이슬람 율법은 아무리 멋있게 그렸더라도 무하마드의 그림은 불경한 것으로 금지하고 있다. 그 후 샤를리 에브도는 경찰의 지속적인 경호를 받았는데, 경호하던 경찰 중 한 명도 이번에 목숨을 잃었다.
 
  이번 사건으로 희생된 47세의 샤르보니에(Charbonnier)는 20년 동안 샤를리 에브도에서 일하며 숱한 위협에 노출되었으나 그때마다 “무릎 꿇고 사느니 서서 죽겠다”며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2012년 알자지라와 인터뷰에서 자신의 풍자 대상은 종교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주제를 다룬다며 표현의 자유에 대한 자신감을 보였다. 그의 신념은 볼테르의 사회풍자 정신, 그리고 19세기 자유주의 사상가인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이 《자유론(On Liberty)》에서 “한 사람을 뺀 인류가 같은 의견을 갖고 있고 그 한 사람만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면, 인류가 그 사람을 침묵시키는 것은 그 사람이 인류 전체를 침묵시킬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당화될 수 없다”고 한 말에 근거했을 것이다.
 
 
  르몽드 “언론의 자유는 절대적인 자유”
 
영국의 카투니스트 제임스 길레이가 그린 나폴레옹 일가를 조롱하는 카툰. 나폴레옹은 길레이의 카툰이 유럽의 모든 군대들보다 더 자신에게 치명적이었다고 평가했다.
  대단한 사상적 논변이 아닌, 우습게 그린 그림 한 장이 글로벌 이슈가 되는 이유는, 언어의 장벽 없이 즉시 전세계적으로 퍼지는 카툰(만화)의 커뮤니케이션 효과 때문이다. 캐나다의 문화역사학자 지트 히어(Jeet Heer)에 따르면 일찍이 나폴레옹도 “제임스 길레이(James Gillray)가 그린 캐리커처 한 장이 유럽의 모든 군대들이 합친 것보다 더 나를 끌어내렸다”고 불평했다고 한다. 그 후 루이 필립 왕은 자신을 갈강추아(Gargantua)에 빗대 뚱뚱하게 그린 만화가 오노레 도미에(Honore Daumier)를 ‘팸플릿은 의견의 반역이며 캐리커처는 폭력이다’라는 논리로 감옥에 처넣었고, 1835년 검열법을 새로 제정했을 때 캐리커처(크레용 검열이라고 부름)가 주 대상이 되었다. 여기에 신성(神聖)모독죄(blasphemy)의 요소가 합쳐지면 검열의 힘은 더 세져, 수많은 만화가들이 감옥 신세를 면치 못했다.
 
  유럽에서 정치만화가 권력을 공격하는 역사는 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컬럼비아 대학 역사학 교수인 사이몬 샤마(Simon Schama)에 따르면, 유럽에서 왕정이 약화되며 권력의 공백이 생기면서 어떠한 권위나 존경의 대상을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당시 정당들은 총과 칼 아닌 말과 그림으로 격하게 대립했다고 한다. 19세기 들어 유럽에서 유대인이나 아일랜드인 같은 소수민족의 불평이 있었으나 그들의 불만은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자연히 이들을 대변할 이익집단이 생겨났다. 다양화한 사회에서 검열에 맞서면서 20세기 들어 지하만평이 탄생했는데, 《샤를리 에브도》는 1960년대 프랑스를 지배한 제한적인 표현자유 법과의 투쟁을 거치면서 생겨난 매체라는 것이다.
 
  만화가들의 수난은 계속 이어져 지난해 8월에는 바샤 알 아사드(Bashar al-Assad) 대통령의 실각 관련 내용을 그린 만화가 알리 파자트(Ali Farzat)가 복면을 쓰고 권총 든 괴한에 의해 오른 팔과 손가락 두 개가 부러지는 사건이 있었다. 1987년 쿠웨이트 신문 《알 카바스(Al Qabas)》의 런던지국에서는 정치만평을 그린 나지 알 알리(Naji al-Ali)가 암살당하기도 했다. 사악한 반(反)유대 캐리커처를 그린 율리우스 스트라이허(Julius Streicher, 나치 신문 Der Sturmer 편집장)는 뉴렌버그 전범재판에서 나치 고위 관리가 아닌 유일한 민간인으로 처형되었다.
 
  이런 풍자만화의 글로벌 영향력은 지구촌 사회의 문화 다양성 논쟁과 맞물리며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새로운 이정표가 되었다. 즉 풍자의 대상이 된 집단이 새로운 청중으로 부상하면서 이들에 대한 고려 내지는 문화적 민감성이 요구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다문화 사회로 갈수록 두드러지고, 단일문화 사회라도 다문화 이슈가 제기되는 곳일수록 민감도가 높아진다.
 
  당장 이번 샤를리 사건을 보도하며 사건을 촉발시킨 문제의 만화를 재(再)게재해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데에서 국가별로 다양한 편차가 드러났다. 우선 유사한 문제로 법정 다툼을 겪었던 덴마크의 경우(비록 무죄판결을 받았으나) 만화를 내보내지 않기로 결정했다. 반면 《르몽드》 편집국장인 제롬 페놀리오(Jerome Fenoglio)는 문제의 그림을 다시 싣기로 결정하며 “중요한 자료이고 모두가 봐야 한다고 생각하며 문제의 만화가 모욕적 메시지를 싣지 않고 있다고 판단한다”는 이유를 달았다. 그는 《샤를리 에브도》의 편집 방향과 관련, “웃기지도 않고, 불필요하게 사람을 자극하는 측면이 있지만, 매체의 판단이므로 존중한다”며 “언론의 자유는 절대적인 자유이다”라는 옹호론을 폈다.
 
 
  《뉴욕타임스》 “(문제의 만화는) 공격적이고 불필요”
 
  이에 비해 건국 초기부터 다문화국가로 출발한 미국의 경우는 훨씬 신중하다. CNN의 수석편집인인 리처드 그리피스(Richard Griffith, senior editorial director)는 재게재하지 않기로 결정을 하면서 “비록 우리는 문제의 만평을 보여주지 못하지만, 말로 자세하게 설명해 주기를 권장한다”고 보도 지침을 내보냈다. 문제의 만화를 보여주지 않고 말로 돌려서 설명하는 것이 시청자를 오도하고 테러리스트에 굴복하는 것이라는 비판도 있었으나 그는 입장을 유지했다.
 
  《뉴욕타임스》는 문제의 만화가 ‘공격적이고 불필요하다(offensive and gratuitous)’는 이유로 싣지 않기로 결정했다. 《워싱턴 포스트》의 경우 과거 샤를리의 모하마드 관련 만화를 뉴스면이 아닌 여론면(Op-ed)에 실었는데, 게재 이유로 마틴 바론(Martin Baron) 편집인은 “우리의 편집 기준을 위반하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적시해서, 불필요하게 공격적(deliberately, pointedly, needlessly offensive)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고 이유를 밝히고 있다. 《허핑턴포스트》도 문제의 그림을 싣지 않았다. AP 역시 “우리는 종교, 인종, 성적 취향에 근거해 사람들을 조롱하거나 자극하는 목적의 행동과 이미지의 전파통로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로 싣지 않았다.
 
  다양한 종교와 사상의 존중을 헌법적 가치로 여기는 미국에서는 대학에서 교수가 종교 편향적 강의를 해도 퇴출되는 분위기다. 《뉴욕타임스》의 한 칼럼에 따르면 미국은 《샤를리 에브도》의 자유정신은 높이 사지만, 문제의 만화가가 미국에서 강연을 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제동을 걸었다.
 
  미국과 앵글로색슨 전통을 공유하는 영국의 경우도 다시 게재하는 것에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가디언》지는 “샤를리는 지지하지만 우리의 정상적인 편집 관례는 아니다”며 리프린트하지 않았고, 《더 타임스》의 경우 샤를리의 다른 만화는 실은 적이 있으나 종교적인 내용은 배제했다.
 
  이례적으로 교황은 “다른 종교적 믿음을 조롱거리로 삼아서는 안 되며 그 경우 반응이 있을 것이다”라고 이슬람 쪽의 입장을 이해하는 느낌의 발언을 했으나, 이에 대해 영국의 데이비드 카메론 수상은 “누군가 내 종교를 비방한다면 불쾌하겠지만 자유국가에서는 보복할 수 없다. 정치인의 역할은 표현의 자유를 위한 법을 다시금 지지하는 것이며, 법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입장을 재확인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라고 대응했다.
 
  프랑스에서는 오래전인 1791년에 모독죄(blasphemy law)가 폐지되었고, 그 결과 명예훼손죄와 혐오스피치를 가르는 기준이 모호해졌다. 역설적이게도 프랑스는 매우 제한적인 프라이버시법과, 유럽연합(EU) 국가 중 가장 강한 혐오스피치방지법(Hate Speech Law), 그리고 유대인 대학살 부인 방지법을 갖고 있다. 작년에는 반테러법이 강화되기도 했다. 어떤 이는 이런 제도적 분위기가 이번 샤를리 사건에 영향을 주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번 사건을 보는 프랑스 내 여론도 갈라져, 표현의 자유를 지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도 있지만, 《샤를리 에브도》를 ‘무례하고 음탕하며 불경스럽고 비종교적인, 프랑스 혁명의 잔재(프랑스 언론인 Anne-Elizabeth Moutet)’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표현의 자유 갈등이야말로 21세기의 글로벌 현상
 
개리 클레멘트라는 카투니스트가 그린 만평. 카투니스트들이 테러리즘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이번 사건이 터지자 유럽 내 다른 국가들도 유사한 위협을 받는 일이 벌어져, 벨기에 신문 《르 스와르(Le Soir)》에는 편집국을 날려 버리겠다는 협박전화가 걸려 왔고, 독일 《함부르크 모르겐포스트》 신문사 창문으로는 돌멩이와 화염병이 투척되기도 했다.
 
  미국은 문제의 그림을 내보내는 데는 신중하면서도 이번 사건이 언론 자유에 냉각효과를 가져오지 않을까 우려하는 분위기다. 문화적 민감성과 비판 대상에 대한 배려가 곧 언론 자유의 축소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전세계 언론이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번 사건으로 유럽과 미국은 물론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걸친 세계 각국에서 반유대주의에 대한 제재나 이슬람의 문화적 정체성 등 종교나 이념이 다양하게 연관된 표현의 자유 관련 이슈들이 다시 부각되며 새로운 준거점을 찾느라 분주한 모습이다. 말하자면 샤를리 사건은 ‘표현의 자유’의 가치와 문화적 민감성의 기준을 다시 환기시킨 사건인 셈이다.
 
  그래서인지 샤를리 에브도의 풍자가들은 총에 맞아 사망했으나, 샤를리 에브도의 목소리는 더욱 높아졌다. 사건 당일 늦게 출근하여 변을 면한 만화가가 바로 다음 날 만평을 그려서 내보냈고, 휴가에서 돌아온 또 다른 직원도 만평 그리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사망한 만화가들의 과거 작품들을 다시 내보내는가 하면, 정부와 민간단체의 지원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회사가 쑥대밭이 된 다음에도 《리베라시옹》의 도움으로 평소 6만 부를 훌쩍 넘는 300만 부를 찍고, 이를 다시 16개국 언어로 번역해 내보내고 있다.
 
  자유는 그 자유를 찾는 절실함과 용기의 크기만큼 신장한다. 투쟁을 통해 쟁취한 자유는 그만큼 지켜야 하는 명분 또한 분명하다. 표현의 자유는 기본적인 인권의 하나로서 법으로 보호되고 있으나, 결국 자유를 구현하는 것은 시민사회의 용기(civil courage)임을 샤를리 사건은 말해 준다.
 
  이번 사건이 던지는 함의에 대해 표현의 자유 분야의 세계적 석학인 염규호 오리건대 석좌교수는 최근 미국 언론과의 서면 인터뷰에서 “21세기 ‘펜의 전쟁’ 시대를 예고하는 사건”으로 해석했다. 염 교수는 “표현의 자유는 언제나 현실보다는 이상에 가까운 것이었으나, 최근 들어 세계 각국에서 보다 현실에 가까운 차원으로 내려오면서 직접적이고 인지적인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면서 “표현의 자유는 이제 폭력적인 공격의 손쉬운 대상이 되어 버렸으며, 그 결과는 지역적이지 않고 전지구적이다”라고 진단했다. 표현의 자유란 인간의 기본 권리이므로 지구상의 어느 한 곳에서 공격당하는 것을 본 사람들은 바로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염 교수는 표현의 자유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야말로 사람들의 표현 욕구가 점점 강해지고 매체도 발달하는 21세기의 글로벌 현상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또 인터넷이 일상화한 사회에서 표현의 자유와 그에 따르는 책임 문제가 더욱 중요해질 것이라고 보았다. 샤를리 사건은 멀리 유럽에서 이슬람 문화권과 연관되어 벌어진 사건이지만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에 던지는 시사점이 적지 않다. 미래의 전쟁을 가장 먼저, 가장 격렬하게 몸소 보여준 프랑스가 21세기 ‘표현의 자유’의 최전선(最前線)인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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