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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대통령 브라질 룰라의 비결

‘가능한 범위 내의 개혁’ 추진한 협상가

글 : 이성형  서울대 라틴아메리카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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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임자 카르도수 대통령, 인플레 잡고 개혁정책 추진해 룰라 성공의 기틀 마련
⊙ 중국 경제성장에 따라 철광석·대두박·대두유 등 1차산품 수출 特需, 재임 중 수출 2배 신장
⊙ ‘기아제로’ 프로그램 추진, 복지확대-성장의 善순환 구조 만들어내
⊙ 미국 중심 국제질서에 반기, 南美통합에 노력
⊙ 개혁과제 피해 가 “더 좋은 브라질 만들 기회 놓쳤다”는 비판도

李成炯
⊙ 1959년생. 부산대 회계학과 졸업, 서울대 정치학 박사.
⊙ 서울대 지역종합연구소 연구원, 서울대 국제지역원 초빙교수, 멕시코 과달라하라대(UdeG)·
    엘 콜레히오 데 메히코·과달라하라자치대 초빙교수, 이화여대 조교수.
    現 서울대 라틴아메리카연구소 교수.
⊙ 저서 : 《라틴아메리카 자본주의 논쟁사》 《라틴아메리카, 영원한 위기의 정치경제》
    《콜럼버스가 서쪽으로 간 까닭은?》 《라틴아메리카의 문화적 민족주의》
    《대홍수: 라틴아메리카 신자유주의 20년의 경험》 등.
지난 1월 1일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 취임식에서 퇴임하는 룰라 전 대통령(오른쪽)이 지우마 호세프 신임 대통령에게 대통령 휘장을 달아주고 있다.
  “하느님은 브라질리언이다.”
 
  브라질 사람들의 자긍심을 잘 표현하는 말이다. 심지어 예수님도 ‘바이아’ 아니면 ‘벨렝두파타’에서 태어났다고 말한다. ‘벨렝’은 베들레헴의 포르투갈어 표기이고 ‘벨렝두파타’나 ‘바이아’는 브라질의 지명이다. 하느님은 브라질에서 세계를 창조했고, 녹색의 에덴동산도 브라질에 있었단다.
 
  전직 재무장관이자 탁월한 경제평론가인 브레세르-페레이라가 이 말을 이렇게 고쳤다.
 
  “룰라 정부 시절 하느님은 브라질리언이셨다.”
 
  룰라 정부는 운이 억세게 좋았다는 뜻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리라. 그는 지난 8년간 밀어붙였어야 할 개혁사안들이 묻혀 버리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브레세르-페레이라와 같은 식자층(識者層)은 “브라질은 더 잘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지난 대선(大選)에서 야당 후보 세하도 이를 선거 슬로건으로 채택했다.
 
  그랬다. 룰라는 운이 좋았다. 그는 임기 말에 자신이 억세게 운 좋은 사나이라고 말했다. “배고픈 노동자가 공화국 대통령이 되다니, 이건 정상(正常)이 아니다. 나는 여기서 하느님의 손가락을 본다.”
 
  그는 자신의 성공을 때때로 종교적 언어로 표현했다. 하느님의 손을 늘 느낀다는 것이다.
 
 
  룰라 성공의 기반 닦은 카르도수
 
카르도수 전 대통령은 일련의 개혁정책과 인플레 잡기 성공으로 룰라 성공의 기반을 마련했다.
  첫 번째 대운(大運)은 훌륭한 전임(前任) 대통령을 맞은 것이다. 민주화 이후 브라질 대통령들은 하나같이 하이퍼 인플레이션 아니면 부패 스캔들로 낙마(落馬)하면서 후임자에게 해결해야 할 정치적·경제적 부채를 남겨 두었다. 후임자는 뒤치다꺼리하다가 세월을 보냈고, 임기 말이면 다시 불안해진 경제를 남겨두고 홀연히 떠났다. 엔리케 카르도수 대통령(1995~2002년)에 와서야 이 악순환(惡循環)이 멈췄다.
 
  냉정하고 합리적인 반면 사교성이나 대중적 친화력하곤 거리가 멀었던 카르도수 대통령은 임기 내내 낡은 제도를 개혁하는 데 안간힘을 쏟았고, 결국 후임자에게 좋은 유산을 남겼다. 그는 ‘헤알 플랜(real plan·1994년 7월 1헤알을 1달러로 고정시킨 화폐개혁)’이란 안정화 계획으로 고질적이고 만성적인 인플레이션을 종식시켰고, 브라질 경제를 경쟁과 개방으로 이끌었다. 카르도수는 바르가스 대통령 시절(민중주의 시대)에 만들어진 코포라티즘(Corporatism·협동조합주의) 제도와 공(公)기업 체제로는 브라질 경제를 혁신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독과점(獨寡占)과 비(非)효율성에 찌든 공기업 체제를 대거 민영화(民營化)하여 혁신과 경쟁의 바람을 불어넣었다. 카르도수는 하원(下院)에서 헌법조항을 수정하는 데 필요한 60%의 지지를 얻지 못할 때에는 대통령 명령으로 개혁조치를 밀어붙였다.
 
  또 예산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서민복지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빈곤층을 줄이는 데도 큰 기여를 했다. 그의 재임기간 동안 빈곤층은 10% 이상 줄었다. 1993년에 42%에 달했던 빈곤층은 2000년 32%로 줄어들었다. 교육개혁에도 힘을 써 고등교육보다는 초·중등 교육에 투입되는 예산의 비중을 늘렸다. 물론 두 번째 임기 말에 금융위기가 도래하여 힘든 시절을 보냈지만, 그가 집권한 8년은 룰라 시대의 승승장구를 준비한 제도개혁기이기도 했다.
 
  카르도수 역시 성공한 대통령으로 국민들에게 박수를 받으며 플라알투궁(宮·브라질대통령관저)을 떠났다. 룰라 정부의 성공은 카르도수 8년의 연장선상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
 
 
  대외적으로만 좌파적 행태 보여
 
  작년 말 브라질 사람들은 물론, 전(全)세계인들이 룰라의 아름다운 퇴진을 지켜보았다. 국정(國政)운영에 대한 지지도가 87%나 되었다. 어떻게 이런 경이로운 기록이 나올 수 있을까?
 
  한국 언론과 세계 언론은 엄청난 지면을 할애하여 그의 성공과 소통과 화합의 리더십을 격찬했다. 역사적으로 전무후무(前無後無)한 기록일 것이다. 2005년에 여당 내 정치적 부패 스캔들이 일어나 정치적 위기를 맞이했을 당시에 언론은 룰라의 재선(再選)이 물 건너갔다고 전망했다. 하지만 그는 거뜬하게 재선에 성공했고, 심지어 자신이 지명한 여성후보가 정권 재(再)창출에 성공하는 기쁨까지 누리게 되었다.
 
  87%의 지지도는 전통적인 지지층은 물론, 반대자들도 지지자로 돌아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자들도 룰라의 국정운영을 높이 평가한다. 왜냐하면 좌파(左派)의 이미지와는 달리 기득권층(旣得權層)의 이해를 위협하는 정책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룰라의 좌파적 행태는 주로 대외정책에서 이란 지지나, 미국을 견제하고 남미(南美)통합을 주도하는 모습으로 표현되었지, 국내 정치에서는 별로 볼 수 없었다. 대외(對外)정책에서 자주성을 강조하는 행태는 ‘할 말을 하는 대국(大國)’의 이미지로 국민에게 부각되었고, 이것 역시 정치적으로 이득이 되었다.
 
 
  新자유주의 정책과 세계화 수용
 
  브라질 정치의 좌우를 넘나드는 그 높은 인기도는 결국 어디에 기인하는 것일까? 그의 리더십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국내외의 호조건에 기인하는 것일까? 필자는 인기도의 이유를 굳이 찾자면 억세게 좋은 운에다, 균형감각이 돋보이는 리더십에 기인한다고 본다. 운칠기삼(運七氣三)이라고나 할까.
 
  첫째, 앞에서 언급했듯이, 룰라가 전임 대통령으로 고질적인 인플레이션을 잡고 경제정책의 틀을 정초한 엔리케 카르도수를 이었다는 것도 행운이었다.
 
  둘째, 국제경제의 환경도 좋았다. 임기 8년간 세계경제는 2009년의 위기를 제외하곤 호조세였고, 브라질의 수출은 2배 이상 증가했다. 무역수지 흑자(黑字)는 매년 200억~400억 달러나 되었다. 브라질의 국가위험도는 안정적인 경제운영에 힘입어 선거 당시의 2400베이스 포인트에서 200으로 줄어들었다. 이렇게 보면 내외의 호조건이 룰라의 국정운영에 큰 도움이 된 것으로 보인다.
 
  셋째, 동반성장 정책의 효과도 컸다. 빈곤층을 획기적으로 줄이고, 최저(最低)임금을 대폭 인상한 정책은 보수적인 미디어와 야당으로부터 “포퓰리즘”, “매표 행위”라고 공격을 받았지만, 내수(內需)시장을 획기적으로 확대하여 복지확대-성장의 선(善)순환을 만들어 냈다.
 
  룰라의 리더십은 내외적으로 좋았던 환경 속에서 빛을 발했다. 그는 카르도수 정부의 8년간 업적을 “저주받은 유산”으로 폄하하고, 빚더미를 물려받았다고 푸념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세계화(世界化)를 되돌릴 수 없는 사실로 받아들였고, 임기 초기부터 전임 정부의 신(新)자유주의 개혁정책에 수정을 가하지 않기로 맘을 먹었던 것이다. 오히려 그는 좌파 정당으로 신자유주의 척결을 슬로건으로 내건 노동자당(PT)에서 급진좌파 세력을 밀어내면서 당의 노선을 중도좌파 실용주의 쪽으로 끌어내었다. 룰라를 지지하는 당내 다수파(Articulacao)는 이런 변화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선거판에서 인기를 유지하려면 중도세력의 표심이 중요했고, 중도세력은 브라질 사회의 급진적 개혁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중국 경제성장으로 1차 産品 特需 맞아

 
중국의 경제성장에 힘입어 브라질은 철광석 등 1차 산품 수출이 급증했으며, 양국간 관계도 돈독해졌다. 사진은 2004년 5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양국 정상회담.
  사실 8년간의 임기 속에서 선거공약은 ‘기아 제로’를 제외하고는 거의 무시되었다. 먼저 룰라는 지지기반의 기대와는 크게 동떨어진 보수적인 경제정책을 이어갔다. 전임자 카르도수 대통령이 만들어 놓은 틀을 거의 고치지 않았고, 국제통화기금이 강제한 조건도 충실히 이행했다. 내외 채무의 원리금(元利金)을 우선적으로 상환해야 했기에(예산지출의 40%), 긴축 기조의 경제정책을 유지해야 했고, 국민들에게 약속한 사회적 지출은 미룰 수밖에 없었다.
 
  임기 초기에 성장률을 높이기엔 어려운 조건이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중국발(發) 훈풍이 불었다. 중국의 중화학 공업화는 엄청난 철광석 수요로 연결되었고, 식생활의 개선은 대두유와 대두박 수요로 나타났다. 육류 소비의 증가는 곧 콩기름과 사료용 대두박에 대한 수요로 연결된 것이다. 양질의 철광석, 토지가 풍부한 브라질 경제는 로또 복권에 당첨된 것처럼 1차산품 붐에 들떴다. 중국은 2009년에 미국을 제치고 브라질의 최대 교역국으로 부상했다. 양국(兩國)은 현재 전략적 파트너십을 맺고 있고, 경제적 차원을 넘어서 국제정치 무대에서도 공조를 과시하고 있다.
 
  마치 하느님의 손이 작용한 듯 보였다. 카르도수 8년간 수출은 50% 증가한 데 그쳤다. 하지만 룰라 8년 동안 200%나 증가했다. 수요도 증가했고, 상품 가격도 올랐다. 중국 붐에 이어서, 브릭스(BRICs) 경제의 장밋빛 시나리오도 유포되었다. 브라질 경제의 미래가 밝게 보이자, 오랫동안 브라질 코스트(Brazil cost) 때문에 투자를 기피하던 분위기도 일변했다. 외국인 투자가 줄을 이었다. 거대한 내수시장에다 수출 특수(特需)까지 가세한 경제는 순풍에 돛을 단 듯이 나아졌다. 룰라의 임기 8년간 브라질 경제는 낮은 인플레이션 가운데 평균 5%의 성장을 이어갔다. 대외채무도 크게 줄었고, 정부 재정 사정도 호전되었다. 그 결과 2008년에는 채권국으로 등극한 데 이어 투자등급으로 상향 조정되었다.
 
 
  기득권자 이익 침해 안 해
 
  유일하게 선거공약을 충실히 실천한 것은 “기아 제로”란 슬로건이었다. 그는 브라질 국민이라면 끼니를 걸러서는 안 된다고 선거에서 외쳤다. 그는 전임 카르도수 대통령 정부가 만든 빈민층 취학지원 프로그램을 확대 개편하여 ‘가족기금’을 만들었다. 빈곤층 1200만 가구가 아동 취학을 조건으로 정액(定額)의 현금 지원을 받았다. GDP의 0.5% 정도의 예산으로 정부는 5000만명의 상황을 개선하였고, 내수시장의 확대에도 도움을 주었다. 수혜지역은 당연히 압도적인 여당 지지표로 화답(和答)했다. 최저임금도 8년 임기 중에 104유로에서 211유로로 두 배 증가했다. 같은 기간 물가상승률을 제외하고도 두 배나 올랐던 것이다.
 
  하지만 기득권층의 이해에 영향을 주는 구조개혁 정책들은 거의 실행하지 않았다. 무(無)토지자들이 기대했던 농지개혁은 미미했다. 경작이 가능한 미경작지 3억ha 가운데 겨우 4000만ha를 20만 가구에 재분배하는 데 그쳐 지지 단체인 무토지자운동(MST)을 실망시켰다.
 
  브라질의 복잡하고도 불평등한 세제(稅制)를 손보는 것도 미뤄 놓았다. 세수(稅收)의 49%가 부가가치세로 충당되고, 소득세는 겨우 20%에 그친다. 가난한 사람들의 부담이 크고, 부자들에게 그만큼 유리한 세제인 것이다. OECD 평균을 보면 부가가치세의 비중은 31%에 그치고 소득세 비중은 35%가 넘는다.
 
  임기 중에 여러 차례 정치적 부패 사건으로 정국이 출렁거렸다. 브라질의 정치제도는 20년이 넘는 민주화의 역정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후진적(後進的)이다. 기형적인 선거제도로 인한 다수당(多數黨) 난립 속에서, 후원-수혜의 정치가 뿌리를 내려 정치적 부패를 도려내기가 대단히 힘든 구조이다. 룰라 정부도 스캔들이 터질 때마다 선거법 개정과 정치자금 제도의 개혁을 추진하겠다고 말했지만 공염불(空念佛)에 그치고 말았다. 어떻게 보면 주요한 구조개혁 사안들은 모두 미래로 미뤄 놓은 것이다.
 
 
 
‘가능한 범위 내에서’ 개혁 추구

 
룰라는 노동운동가 출신이면서도 급진개혁 대신 ‘가능한 범위 내’에서의 개혁을 추진했다.
  그런데도 87%의 지지도라니. 모든 게 경제가 잘 굴러간 덕분이다. 부자들은 더 큰 부자가 되었고, 가난한 사람들은 일자리를 구했고 소득도 늘었다. 빈곤층은 2000년의 35%에서 2009년 22.6%로 줄었다. 중간층의 무게도 커졌다. 임기 내에 3000만명 이상이 신규로 중간층에 진입했다. 국민들의 1인당 소득도 임기 초에 비하여 20% 이상 증가했다. 비록 불평등의 구조가 획기적으로 개선되진 않았지만, 저마다 조그만 성취를 얻을 수 있었다.
 
  룰라는 ‘가능한 범위 내에서’ 개혁을 추구했다. 가능주의(possibilism)란 용어가 유행할 정도로 개혁 사안은 비켜 갔고, 저항이 심한 구조개혁의 사안들은 모두 미래로 넘겼다. 어떻게 보면 개혁을 하지 않았기에 정치적 저항이 없었고, 인기도도 높이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좌파의 반발이 부분적으로 있었지만, 이들 역시 뚜렷한 대안(代案)이 없었기에 룰라를 미는 수밖에 없었다. 또 외부환경이 너무 좋았다. 중국발 1차산품 수출 붐, 대형 유전(油田) 발견, 올림픽과 월드컵 유치와 같은 하느님의 손이 임기 내내 룰라 정부를 도왔다. 브라질은 카르도수 정부 8년과 룰라 정부 8년을 거치면서 환골탈태(換骨奪胎)를 했고, 지역강국을 넘어서 세계 속의 강대국으로 발돋움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룰라는 그런 국운 상승기를 대표하는 리더로 8년을 보낸 것이다.
 
 
  “더 좋은 브라질 만들 기회 놓쳤다”는 비판도
 
  지난 연말에 내외 언론은 연일 룰라의 성공을 격찬하는 데 지면을 아끼지 않았다. 국내 언론도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룰라 특집을 다뤘고, 모두 부러운 눈초리로 21세기 경제강국 브라질을 바라다보았다.
 
  대부분의 신문들이 대동소이(大同小異)하게 브라질의 최근 상황을 룰라 개인의 업적으로 치부하고 있었다. 87%의 지지도라면 비정상적인 것이고, 비정상의 근원은 무엇일까. 이런 근본적인 질문은 보이지 않았다.
 
  브라질 언론이나 외신(外信)들은 룰라의 리더십을 칭찬만 하지는 않았다. 스페인 신문 ≪엘파이스≫의 한 기사가 다루듯, 브라질은 ‘룰라 이상’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빗대어 설명한 ‘운칠기삼’ 비유도, 브라질의 기적이 룰라 개인의 노력보다는 내외 환경 변수, 전임 대통령의 개혁 노력 등이 어우러져 이뤄진 복합적인 결과물이란 점을 강조한다.
 
  하지만 우리 언론의 보도 태도는 룰라를 영웅시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어떻게 보면 답답한 국내 정치 상황에 대비된, 먼 나라 이야기를 빗대어 무언가를 배설하고 있다는 느낌도 받았다. 어떤 글은 현실정치와 무리하게 연결시키려고도 했다.
 
  룰라는 어떻게 보면 브라질의 선진화(先進化)를 위해 실행되었어야 할 개혁의제를 추진할 가장 적합한 대통령이었을 것이다. 카리스마, 설득력, 내외의 호조건이 있었기에 세제개혁, 농지개혁, 노동법, 정치개혁을 추진하기에 가장 적합한 리더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무리한 개혁을 추진하지 않았다. 정치권의 다수가 합의하지 않는다면, 국론(國論)분열을 일으킬 사안은 모두 피했다. 그래서 많은 지식인들은 ‘더 좋은 브라질’을 만들 좋은 시절을 실기(失機)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절제된 리더십과 가능한 영역 내에서의 개혁이 브라질 사회의 국론을 통일시켰고, 내외의 호조건을 타고 좋은 성과를 냈다고 말할 수 있다. 또 국내 갈등의 소지가 별로 없는 국제무대에서의 활동을 통해 브라질의 국익(國益)을 창달하여, 이를 국내의 지지표로 바꿀 수 있었다. 룰라의 87% 지지도는 이런 내외 조건과 그의 리더십이 묘하게 어우러진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협상가형 정치인
 
  룰라는 난세의 영웅은 아니지만 리더로서 훌륭한 덕목을 지니고 있다. 일단 투사보다는 협상가 기질이 강했다. 뛰어난 협상가는 판과 세를 읽는 데 능하다. 그렇기에 15%의 의석을 지닌 노동자당을 이끌고, 연정(聯政) 대통령(coalitional presidentialism)의 역할을 잘 수행했다. 대통령보다는 연정 수상(首相)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연정 내부에 생길 수 있는 파열음을 잘 막아 냈다. 비록 2005년의 정치적 스캔들이 터지긴 했지만, 의외로 연정 대통령제는 잘 움직였다. 룰라는 정확한 지분(持分)협상을 통해 참여정당의 불만을 잠재울 수 있었고, 또 예산의 합리적 배분으로 중앙정부와 주(州)정부 간의 관계도 매끄럽게 처리했다.
 
  협상능력에 이어 뛰어난 능력은 의제설정 능력이었다. 그는 대선의 슬로건으로 ‘기아 제로’를 내걸었다.
 
  “브라질 국민이라면 세 끼 밥은 먹어야 한다.”
 
  대단히 설득력이 강한 이 슬로건으로 상대방 후보와 차별화했다. 사실 상대방 후보의 정당인 사회민주당도 빈곤층 감축에 획기적인 공이 있었는데도 말이다. 룰라는 이 슬로건을 바탕으로 인구의 4분의 1이 혜택을 받는 가족기금을 만들 수 있었고, 여러모로 선거에서 수혜를 받게 된다.
 
  그는 세력을 만들 줄 알았고, 상대를 설득하는 능력도 대단했다. 금속노련(勞聯)의 지도자로서 잔뼈가 굵었기에, 항상 가능한 범위 내에서 최대한 이익을 이끌어 내는 협상에 열과 성을 다했다. 세 번의 대선에서 실패하고 마지막 기회를 엿보던 2002년에 그는 진보세력의 집권을 위해서 보수파와 악수하기로 했다. 중도파의 표를 흡수하고 시장친화적인 이미지를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보수정당인 자유당 출신으로 개신교도이자 섬유재벌인 알렝카르를 부통령 후보로 영입하였다. 10%가 넘는 개신교도의 표를 얻을 수 있었고, 결국 과반수 획득에 성공했다. 말년에 룰라는 이런 농을 할 수도 있었다.
 
  “이제 개신교 목사의 설교도 흉내낼 수 있다.”
 
  룰라의 담론(談論) 전략 가운데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에둘러 표현하지 않고, 쉬운 말로 솔직하게 표현하는 정공법이었다.
 
 
  買票스캔들, 정공법으로 돌파
 
2009년 10월, 2016년 하계올림픽을 유치한 후 룰라 대통령이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며 기뻐하고 있다.
  2005년도에 소위 ‘월급 스캔들’이 터졌을 때였다. 여당인 노동자당이 하원에서 법안을 통과하거나 헌법 수정을 위해서는 여러 군소(群小)정당의 표를 모아야만 했다. 개중에 소수당의 표는 직접 의원에게 정액 금액을 지불하고 지지를 구했다. 결국 노동자당의 정치자금이 문제가 되었고, 실력자들이 줄줄이 엮여 들어갔다. 하지만 브라질 정치환경에서 이런 매표(買票) 행위는 선거법과 정치자금제도의 대대적인 개혁이 없이는 불가피한 측면도 있었다. 룰라의 재선은 물 건너간 것처럼 보였다.
 
  룰라는 국민들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브라질의 정치인들이 ‘두 개의 계정(dois caixas)’을 가지고 있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 아니냐(‘두 개의 계정’이란 선관위에 공식적으로 보고하는 계정과 정치인이 따로 관리하는 비밀장부 두 개를 말한다. 국회의원은 돈이 많이 드는 스폿광고 때문에 늘 여윳돈을 모아 두어야 하고, 이를 위해 이권 청탁과 개입을 마다하지 않는다).
 
  여당인 노동자당은 15%의 의석밖에 없고, 헌법 조항의 수정을 위해서는 60%의 지지표를 구해야 했다. 중간 규모급의 정당들은 장관직 등으로 여당연립의 울타리에 묶어 둘 수 있지만, 그래도 모자라는 지지표는 결국 돈을 주고 사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스캔들이 발생한 것인데, 이를 도덕주의로 몰고 가면 너무 현실과 동떨어진 비판이 된다. 그러니 시간을 두고 관련 사안을 개혁하기로 하고, 너무 몰아붙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런 취지로 말을 했다. 룰라의 변명은 언론과 야당의 공격을 받았지만, 그의 지지도는 40%대 이하로 떨어지지 않았다. 이후 지지도는 회복되었고, 재선에도 무난히 성공했다. 사람들은 노동자당의 부패를 욕했지만, 룰라에겐 면죄부(免罪符)를 주었다.
 
 
  변화에 대한 적응력
 
  그는 정치투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노조활동 가운데서도 허황된 슬로건이나 거창한 정치담론을 대단히 싫어했다. 노조 지도자 시절에 누군가가 자신의 정체성을 물어보았다. 당신은 트로츠키주의자입니까, 아니면 사민주의자입니까. 질문자는 아마도 공산당 계열에 우호적인 노조 지도자였으리라. 룰라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나는 금속노동자일 뿐입니다.” 유머 감각이 느껴지는 이 멘트 속에서 그는 쓸데없는 논쟁으로 날을 지새우는 엘리트 운동가들에 대한 경멸감도 담아 내었다. 대신에 그는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았고, 거리의 언어로 노동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엘리트의 전유물이었던 브라질 정치판에 그는 이단아였다. ‘빈자의 브라질’은 룰라를 통해 새로운 희망을 발견했다.
 
  그는 새로운 변화에 대한 적응능력이 뛰어났다. 노동자당(PT)은 상파울루 산업공단의 노동운동, 가톨릭 교회의 진보적 섹터, 그리고 교원노조와 같은 사회운동 단체들이 민주화 국면에 창설한 사회주의 정당이었다. 이들은 소수의 가진 자들이 좌지우지하는 브라질 사회를 아래로부터 개혁하고자 했다. 농지개혁, 사회적 재부의 재분배를 통해 빈부격차 해소, 금융천국(고금리 수혜자 천국)의 해체, 생산자 중심의 사회를 꿈꾸었다. 노동자당은 민주화 이후 지방정부나 중앙정부에서 각개약진하여 일거에 브라질의 대표적인 정당으로 발돋움했다. 하지만 선거정치에 노출되고 전국적 정당으로 자라면서 노동자당은 논란에 휩싸였다.
 
  무엇보다 선거정치에서 승리를 하자면 중간층의 표를 흡수해야만 한다. 노동자당도 일종의 ‘중위자 투표 모델’로 수렴되면서 급진적인 요소가 탈색되었다. 이념정당인 노동자당도 캐치올 정당(catch-all party)으로 탈바꿈했고, 이 와중에서 선거전문가들이 당에서 중용되는 전문가 정당으로 바뀌었다. 이제 ‘사회주의 브라질’ 슬로건으로 ‘부르주아 브라질’을 공격하던 방식을 버려야 했다. 이런 변화 과정에 룰라는 앞장섰다. 그는 선거 승리를 위해서는 실용주의적인 태도를 취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했다. 노동자당의 뿌리를 강조하고 이념적 순수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좌파세력들은 그를 공격했지만, 털북숭이 룰라는 청바지 차림을 벗고 아르마니 양복으로 갈아입었고, 슬로건도 “룰라, 평화와 사랑”으로 바꾸었다. 그가 이념지향적인 지도자였다면 이런 변신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 중심 체제에 반기 들어
 
룰라는 이란의 핵개발에 반대하는 미국의 입장을 비판하는 등 외교에서는 독자노선을 견지했다. 사진은 2009년 11월 아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하는 룰라 대통령.
  국제무대에서의 행보 또한 룰라의 리더십을 확인할 수 있는 장(場)이다. 국제사회에서 브라질 엘리트들을 가리켜 “포르투갈어로 말하는 텍사스인들”이라고 말한다. 어딜 가나 말이 많다는 뜻이다.
 
  이들은 강대국 브라질의 ‘명백한 운명’을 즐겨 이야기하고, 자신들은 늘 A 매치에서 뛰는 선수들처럼 행동한다. 이들이 즐기는 담론도 헤게모니의 변천, 지정학(地政學), 지구온난화, 세계적 빈곤 해소 방안, 남남(南南)협력과 같은 거대담론들이다.
 
  룰라는 브라질의 지정학적 메갈로마니아를 애써 실천에 옮긴 정치인이었다. 그가 집권한 뒤에 대외(對外)정책에 몇 가지 변화가 있었다. 전임의 카르도수 정부와 달리 미국에 대해 ‘노(NO)’라고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단 미국이 주도하던 ‘미주(美洲)자유무역지대’안에 대해 거부의 메시지를 보냈다. 미국이 농산물 시장을 개방하지 않는 한, 브라질을 포함한 남미 전체는 지적(知的)소유권이나 서비스 부문의 개방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표명했다. 또 칸쿤 회의에서 제3세계 국가들을 G-20으로 묶어서, 선진국 주도의 세계무역기구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G-20은 결국 도하 개발의제의 전진을 중지시켰다. 룰라 정부는 이란의 핵(核)개발에 대해서도 미국의 입장을 일방주의라며 비난하고 나섰다. 코펜하겐 기후회의에서도 브라질은 온실가스 감축에 높은 목표치를 제시하며 선진국들을 압박하고 나섰다.
 
  브라질은 나아가 세계정치의 다극화(多極化)를 표방하고 나섰다. 브릭스 정상회담, 입사(IBSA·인도-브라질-남아공) 포럼 등을 통해 러시아, 중국, 인도, 남아공과의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돈독히 하였다. 이들 모두 구미(歐美) 중심의 세계질서의 다극화를 꾀하는 나라들인지라, 브라질과의 협력을 자연스레 받아들였다.
 
  브라질은 미국 주도의 미주질서에 대항하기 위해 남미 통합에도 힘을 썼다. 특히 메르코수르(Mercosur·남미공동시장, 아르헨티나·브라질·파라과이·우루과이·베네수엘라를 포괄하는 경제공동체) 내 무역활성화에도 힘썼다. 남미국가 전체를 묶는 ‘남미국가연합(Unasur)’을 창설했고, 나아가 남미의 에너지, 물류(物流) 인프라를 통합하는 IIRSA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도 했다. 남미의 명실상부한 맹주(盟主)로 등극한 것이다.
 
  임기 8년 가운데 거의 1년을 해외순방으로 보내면서 국제무대에서 활동한 룰라 대통령이었다. 방문 국가도 60개국이 넘었다. 그의 왕성한 활동은 대국 브라질의 이미지를 만방에 알리는 기회가 되었고, 아울러 국민들의 자긍심을 높이는 계기도 되었다. 임기 막바지에 올림픽과 월드컵 대회를 유치한 것은 바로 이런 국제적 노력이 구체화된 것이었다.
 
 
  정국 시끄러울수록 룰라 개입 가능성 커져
 
  어떻게 보면 룰라는 욕심을 내지 않고 전임자의 정책을 잘 가꾸고 확장시켜 브라질 경제와 사회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그렇기에 그가 받은 박수 가운데 일부는 전임 대통령 카르도수에게 전해 주어야 할 것이다. 또 중국발 특수, 우호적인 국제환경도 그가 정치적으로 성공한 대통령이 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후임 대통령인 지우마 호세프는 이런 룰라의 후광을 업고 새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호세프 대통령에게 미래는 어떻게 전개될까?
 
  일단 룰라 대통령 시절의 정책기조가 그대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각료 가운데 절반 가량이 룰라 정부의 인물로 채워졌다. 내각 총리 격인 관방(官房)장관을 재무장관 출신인 안토니우 팔로치가 맡았다. 두 정부를 잇는 가교적(架橋的)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연립형 대통령제인지라, 연립여당 내부의 교통정리가 중요한데, 정무(政務)에 문외한인 호세프는 이 분야에는 룰라의 조언과 개입을 받아들일 것이다. 하지만 새해 벽두부터 연립여당에서 노동자당 다음으로 중요한 정당인 브라질민주운동당(PMDB)이 장관직 배정에 불만을 품고 어필을 하였다. 정국이 시끄러울수록 룰라의 개입 가능성이 커질 것이다.
 
  2011년의 경제는 작년의 과열경기와 재정지출로 인해 조정 국면을 맞이할 가능성이 크다. 고(高)평가된 헤알화도 수출 경기의 확대에 발목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외국자본의 유입으로 엄청나게 오른 보베스파 지수(指數·브라질 증시 지수)도 조정국면에 들어가면 크게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브라질 경제는 일시적인 조정국면을 거쳐 다시 재도약의 기회를 포착할 것이다. 브라질은 더 이상 ‘미래의 국가’가 아니라 대국화(大國化)를 현재진행형으로 실현하고 있는 국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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