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承晩은 11월 5일의 정례기자회견에서 獨促中協을 결성하는데 공산당이 협력해 준 데 대해 감사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틀 뒤에는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人民共和國의 主席職을 수락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呂運亨은 建國同盟을 朝鮮人民黨으로 개편하고 11월 12일에 천도교회관에서 결당식을 거행했다.
李承晩은 金九의 귀국을 기다려 獨促中協의 활동을 중지하고, 美軍政府의 활동을 적극 지원했다. 軍政府는 10월 30일에 「法令 제19호」로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11월 13일에는 「법령 제28호」로 군정청에 국방사령부를 설치했다. 그리고 본국정부에 대해서는 한국에 대한 信託統治 정책을 폐기할 것을 건의했다.
아널드 장군은 朴憲永에게 ‘人民共和國’을 ‘人民共和黨’으로 바꿀 것을 권했으나, 박헌영은 인민공화국은 “정치적 계몽운동을 하는 학교”라면서 하지의 요구를 거부했다.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가 열리고 있는 11월 21일에 李承晩은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나는 共産黨에 대하여 호감을 가진 사람”이라면서, “앞으로 우리 政府의 경제정책을 쓸 때에도 공산주의에서 채용할 점이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공산당의 독촉중협 탈퇴를 막기 위한 배려에서였다. 그러나 조선공산당의 李康國은 “李博士의 통일운동은 통일을 도리어 분열로 유도하였다”고 비판했다.
1. 人民共和國 主席職 취임 拒否
11월 2일에 천도교회관에서 개최된 제1차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이하 독촉중협) 회의에서 채택된 「연합국과 아메리카합중국 민중에게 보내는 결의문」을 수정하기 위한 회의는 이튿날 바로 돈암장(敦岩莊)에서 열렸다. 수정위원으로 선정된 여운형(呂運亨), 안재홍(安在鴻), 이갑성(李甲成) 세 사람과 이승만이 만났다. 또 한 사람의 수정위원인 조선공산당의 박헌영(朴憲永)은 이날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수정위원들은 지나치게 자극적으로 표현한 몇 부분을 수정하기로 합의했다.1) 이승만은 세 수정위원들의 의견에 따라 문구 일부를 수정한 결의문을 이튿날 연합국에 발송했다.2) 수정된 결의문에는 ‘인식사항’ (3)항의 “동년에 경성에서 건설된 임시정부의 취지에 의하야”라고 한성정부의 정통성을 은근히 강조한 구절도 삭제되어 있어서 흥미롭다.3) 그것은 아마 임시정부 설립 당시에 상해에 있었던 여운형의 제의에 따른 것이었을 것이다.
박헌영이 수정위원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것은 전날 회의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 공산당이 독촉중협에 참가한 것은 이승만의 “무조건 뭉치자”는 주장에 따라 정당통합운동이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함께 인민공화국을 만든 여운형 그룹도 이승만의 독촉중협 결성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헌영은 이날 별도로 기자회견을 갖고, “지금까지 우리는 이 박사 밑에서 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하려고 하였으나, 2일의 이 박사 결의문으로 보아 박사와 우리 사이에 커다란 정치의견의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였다”고 말하고, 일본제국주의 잔존세력을 철저히 구축하고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를 제거한 연후에 “진보적 민주주의 요소를 총망라하여” 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하고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통일된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조선공산당은 이승만의 「결의문」이 “조선민족 전체의 의사라고 볼 수 없는 문제를 취급하여 연합국의 그릇되지 않은 처치에 대하여서까지 질문 혹 논란하는” “경솔하기 짝이 없는” 것이라고 비판하고, 자신들의 입장과 요구사항을 밝히는 별도의 메시지 초안을 발표했다.4)
“親日派裁判은 政府수립 뒤에”
이승만은 11월 5일에 출입기자들과 정례회견을 가졌다. 이승만은 먼저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요인 30여명이 이날 중경을 출발하여 11월 10일 안으로 귀국할 것이라는 뉴스부터 전했다. 이승만은 그러나 임시정부가 정식으로 국제승인을 받지 않았으므로 김구도 ‘개인자격’으로 귀국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5)
이승만은 이어 “독촉중협은 3천만 민중이 하나가 되고 또는 한 입을 통하야 말하는 통일된 단체”라고 말하고, “이 단체의 결성에 공산당에서 협력해 준 데 대하야 깊이 감사한다”고 덧붙였다.6) 그러나 수정위원들의 모임에 박헌영이 참석하지 않은 것은 옳지 않다고 나무라면서, “공산당의 제의는 신중히 듣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공산당이 요구하는 핵심사안인 친일파와 민족반역자 배제문제에 대한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물론 친일파나 민족반역자는 일소하여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우선 우리의 힘을 뭉쳐 놓고 볼 일이다. 그러한 불순분자를 지금 당장 외국인의 손으로 처벌하여 주기를 우리는 원치 않는다. 우리의 강토를 찾아낸 후에 우리 손으로 재판해야 할 줄 믿는다.”
그러면서 그는 기자들에게 친일파 명단을 서면으로 작성해 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김구가 귀국하면 통합운동과 어떤 관계를 갖게 될 것 같으냐는 질문에는 “전폭적으로 손을 맞잡고 나가 줄 줄 믿는다”고 잘라 말했다. 그리고 인민공화국의 해체설이 떠도는데 무슨 정보를 들었느냐고 묻자 “내일 아침 방송에서 대답하겠다”고 말했다.7) 임시정부의 귀국이 임박한 시점에서 이승만은 인민공화국 주석문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혀야 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신문에는 이승만이 11월 6일 아침에 ‘중대방송’을 한다는 예고기사가 실리기도 했다.8)
『뉴욕타임스』는 金九의 役割에 기대
김구일행의 귀국에 대해서는 미국신문들도 관심을 기울였다. 이승만이 귀국한 직후에 행한 38도선 문제에 대한 주장에 지지를 표명함으로써 미국무부를 당혹스럽게 했던 『뉴욕타임스(The New York Times)』는 임시정부요인들이 중경을 떠난 이튿날인 11월 6일자에 다음과 같은 사설을 실었다.
“한국에서는 가장 최근의 집계로 43개를 헤아리는 정당 또는 정파 사이에 그들이 원하는 자주적인 한국의 정부 형태나 그 성격에 대해서는 물론 그 목표를 어떤 방법으로 달성할 것인지 합의하는 데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들은 나라가 미국과 소련의 점령지역으로 분할되고, 두 지역 사이에는 교류가 거의 없고, 점령군이 언제 철수할지에 대해서조차 아무런 약속을 받지 못한 채 한국인들은 정치적 공백상태에 빠졌다. 1919년에 서울에서 조직된 이래 중국에서 유지되어 온 한국임시정부의 70세 대통령[주석] 김구가 귀국하면 아마도 지금은 분명하지 않은 통합을 이루는데 어느 정도 기여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이 사설은 11월 4일에 중경에서 있었던 한국임시정부요인 송별회에서 장개석(蔣介石) 총통이 “전 동아시아 민족의 평화와 자유를 위하여 우리는 먼저 한국의 독립과 자유를 성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한국에 대한 국민당의 유일한 원칙이다”라고 한 말을 인용하면서, “우리는 그것이 또한 우리 정부와 소비에트 정부의 대한정책(對韓政策)의 첫 번째 원칙이기를 바란다”고 주장했다.9)
11월 6일 오전 7시로 예정되었던 이승만의 중대연설은 갑자기 연기되었다. 왜냐하면 이날 오후 2시에 명월관에서 열기로 한 이박사환영 청년단체대표회 간담회에 이승만이 참석하는 문제를 두고 주최쪽과 이승만의 비서진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조선해방청년동맹, 학병동맹, 조선노농청년동맹 등 26개 좌익계 청년단체들은 청년단체대표회를 구성하고 이날 이승만을 초청하여 간담회를 열기로 한 것이었다. 이승만이 불참하자 밤 11시반쯤에 대표 100여명이 돈암장으로 몰려가서 이승만이 이튿날 아침에 방송연설을 하기 전에 자신들의 ‘우국지정(憂國之情)의 진언’을 들어줄 것을 요청했으나 이승만은 이미 취침 중이라고 했다. 청년대표들은 이튿날 아침 이승만이 방송연설을 하기 전에 다시 돈암장으로 찾아가서 자신들의 결의문을 전달했다. 결의문은 이승만이 인민공화국 주석에 취임할 것을 촉구하면서, “만일 이를 거부할 경우에는 이 박사를 지도자로서 지지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민족통일전선 분열의 책임자로 인정한다”고 공언했다. 이들의 결의문은 또 임시정부요인들의 귀국을 환영한다고 말하면서도, 그러나 “이 선배 요인들도 인민공화국에 참가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지도자가 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10)
人民共和國의 主席취임을 거부
이승만은 드디어 11월 7일 오전 8시30분부터 25분 동안 서울중앙방송국의 라디오방송을 통하여 인민공화국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이승만은 먼저 “우리는 비상한 기회에 당면하였다. 한편 좋기도 하고 한편 까딱 잘못하면 위험도 한 기회다”라고 전제한 다음, “우리나라가 해방은 되었으나 아직도 국권을 회복하지 못한 것은 전혀 일본의 악선전에 의한 것”이었고, 이러한 악선전 때문에 신탁통치 주장까지 나오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승만은 신탁통치를 배격하고 하루라도 빨리 자주독립 국가로 만들기 위하여 “모든 정당이 한 단체를 이루어 자치의 능력이 있는 것을 보이기 위하여 공산당까지 한데 뭉치기로 결정하여 만든 것이 독촉중협”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인민공화국 주석으로는 취임할 수 없다며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
“그런데 내가 고국에 돌아와 보니 인민공화국이 조직되어 있고 나를 주석으로 선정하였다 하니, 나를 이만치 생각해 준 것은 감사하나 나는 그것을 공식으로나 비공식으로 무관계함을 알리려 하였으나, 각 인도자의 입장에 대해서도 생각할 점이 있고 노력하는 여러분을 생각하야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종래에 한국임시정부에 복종하야 김구씨를 옹호하야 온 터이니, 임시정부가 들어와서 정식 타협이 있기 전에는 다른 정부나 정당에는 이름을 줄 수 없다. … 정부는 하나이다. 군정부에서는 조선인민공화정당은 허락하나 국(國)의 명칭은 허락하지 않는다. 지금 조선의 정부는 군정청정부가 하나 있을 뿐이다. …”
이처럼 이승만은 인민공화국의 주석취임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인민공화국의 존재 자체를 부인한 다음, 독촉중협의 위상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는 정부도 아니고 정부의 대표기관도 아니다. 임시정부가 각국의 승인을 받는 국권을 회복할 때까지 각 정당이 대동단결하야 과도기적 일을 하자는 단체이다. 각 지방에서도 이와 같이 알고 모든 단체가 합하야 공동기관을 세우고 서울의 중앙협의회로 대표자를 파송하야 중앙에서 하는 것에 따라오기 바란다. …”
이승만은 이처럼 지방에서도 각 단체들이 합동하여 자발적으로 독촉중협에 참가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김구일행의 귀국 이야기를 덧붙였다.
“김구씨 이하 임시정부 각 요인이 수일내로 서울에 도착한다. 이 정부가 연합국의 정식 승인 없이 들어옴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전국이 대동단결하야 이 정부를 맞이하면 각국의 승인도 빨리 받을 것이다. 장개석씨는 나의 친구요 또 김구씨의 친구이다. 이 정부가 들어옴에 당하야 전국이 대환영할 줄 믿는다.”11)
이승만이 장개석과의 친분을 강조한 것은 11월 4일에 장개석이 김구일행을 위한 송별회를 베풀었고 그 자리에서 고무적인 연설을 했다는 사실이 국내 신문에도 크게 보도되었기 때문이다.
共産黨도 獨促中協을 脫退하지는 않아
이 방송에 대해 인민공화국 관계자들이 크게 반발하는 것은 당연했다. 인민공화국 국무총리 허헌(許憲)은 “이 박사가 취한 오늘의 태도는 민족통일전선 결성기운이 성숙해 가고 있는 현단계에 도리어 통일을 혼란에 빠지게 하고 말았다”고 주장하고, “이 박사의 주석취임 문제는 이로써 해소한다”고 선언했다.12) 또 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는 11월 9일에 이승만의 방송을 비난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담화는 “진정한 애국자, 민족지도자로서의 이 박사가 할 수 있는 통일운동은 혼란된 조선의 민족진영을 정리하고 진보적 민주주의 요소를 결집하여 민족통일전선을 더욱더 광범 확고케 함으로써만 조선독립 완성에 기여할 수 있었던” 것인데 “모략분자에게 둘러싸여 가지고” 그러지 못했고, 그리하여 11월 2일에 천도교회관에서 있었던 회합은 “비민주주의적인 것이요 그 의사진행이 모략적, 편당적인 결과가 되고 말았다”고 힐난했다. 그리고 인민공화국 주석취임을 거부하기까지의 모든 태도를 종합하여 “이제부터는 그를 초당파인으로 취급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13) 그러나 그것은 조선공산당의 독촉중협 탈퇴를 표명한 것은 아니었다. 미군정부로부터 ‘국’ 대신에 ‘당’이라는 호칭을 사용할 것을 종용받고 있는 입장에서 주석 취임을 거부한다는 이유만으로 이승만의 국민적인 명성을 완전히 배척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중앙인민위원회의 성명이 있고 이틀 뒤인 11월 11일에 인민공화국의 선전부장이자 조선공산당 중앙위원인 이관술(李觀述)이 “우리는 모든 반동, 모든 비민주주의적 책동, 모든 민족분열적 음모를 분쇄하면서 민족통일전선을 결성시키려고 고심분투해 왔다”고 전제하고, “그러므로 민족통일을 주장하는 중앙협의회에 적극적으로 참가한다”14)고 말하고 있는 것이 그러한 사정을 말해 준다.
建國同盟은 朝鮮人民黨으로 개편돼
여운형은 건국준비위원회 때부터 자신의 직계 조직이었던 건국동맹(建國同盟)을 10월 10일에 정당조직으로 개편하여 운영하고 있었는데, 건국동맹은 11월 2일에 임시총회를 열고 당명을 조선인민당(朝鮮人民黨)으로 개칭했다. 조선인민당은 11월 4일에는 중앙위원회를 열고 독촉중협 참가단체의 성격을 심사할 것과 38도 이북의 지방정당 대표와 도행정위원장을 참가시키도록 요청할 것을 결의하는 등으로 독촉중협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고 있었다. 조선인민당은 이어 고려국민동맹(高麗國民同盟), 십오회(十五會), 인민동지회(人民同志會) 등의 군소정치단체를 통합하여 11월 12일 오후에 천도교회관 강당에서 성대한 결당식을 거행했다.
조선인민당의 성격은 이날의 결당식에서 발표된 「선언」에 잘 표명되어 있다. 「선언」은 “조선인민당은 근로대중을 중심으로 한 전 민족의 완전한 해방을 그 기본이념으로 하며, 조선의 완전독립과 민주주의 국가의 실현을 그 현실적인 과제로 한다”라고 천명하고, “기본이념을 등한시하고 현실적 요청에만 얽매여 있는 것이 역사의 진전을 지연시키는 행위라면, 기본이념에만 급급하야 그 현실적 과제를 무시하는 것도 역사의 발전을 지연시키는 동일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라고 하여 중도노선의 정당성격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조선인민당의 「강령」은 (1) 조선민족의 총역량을 집결하야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의 건설을 기함. (2) 계획경제제도를 확립하야 전 민족의 완전해방을 기함. (3) 진보적 민족문화를 건설하야 전 인류문화 향상에 공헌함을 기함이라는 3개 항이었다.15) 조선공산당이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를 뜻하는 ‘진보적 민주주의’를 표방한 데 비하여 인민당이 ‘진정한 민주주의’를 표방한 것은 공산당과의 차별성을 나타내고자 한 고충을 짐작하게 한다. ‘진보적’이라는 용어는 (3)항에서 사용되었다.
위원장 여운형은 개회사에서 이 세 가지 「강령」과 국민개로(國民皆勞), 국민개병(國民皆兵), 상호신양(相互信讓), 공공협동(公共協同), 일치단결의 다섯 가지 윤리가 조선인민당의 삼강오륜(三綱五倫)이라고 그 특유의 레토릭을 구사하면서 열변을 토했다.16) 위의 「선언」이나 「강령」보다도 인민당 총무부에서 발행한 “당의 성격을 정확히 파악하자”라는 글이 조선인민당의 입장을 한결 실감나게 설명해 준다.
“한국민주당이 자산계급을 대표한 계급당이요 조선공산당이 무산계급을 대표한 계급당임에 비하야 우리 당은 반동분자만을 제외하고 노동자, 농민, 소시민, 자본가, 지주까지 포괄한 전 인민을 대표한 대중정당인 것이다. 그러므로 형식상으로 보아 좌익중간당이라고 할 수 있으니, 현실과업 수행과정에서는 가장 전위적이라는 것을 명념(銘念)해야 한다. 항간에서 반동분자의 고의로, 혹은 무지로 우리 당을 공산당의 한 외곽단체처럼 혼선시키려는 경향이 있으나, 이것은 천만부당한 낭설이다. 다만 조선의 실정을 정확히 파악한 공산당이 우리 인민당 노선으로 접근하면서 동일한 보조를 취하고 있으므로 우리와 우의적 관계를 가지고 있을 따름이다. …”17)
그러나 이렇게 출범한 조선인민당이 결국 조선공산당에 통합되어 남조선노동당을 결성하는 것은 뒤에서 보는 바와 같다.
左傾 지식인들도 李承晩을 대통령 적격자로
독촉중협의 결성을 전후한 시기의 이승만의 명성이 어느 정도였는가는 선구회(先驅會)라는 한 중도파 단체가 실시한 여론조사에 잘 나타나 있다. 선구회는 10월 10일부터 11월 9일까지 한 달 동안 각 정당, 언론기관, 문화단체, 학교 등 105개 단체의 종사자들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실시했는데, 그것은 8·15 해방 이후에 처음으로 실시된 비교적 큰 규모의 여론조사였다. 설문의 내용은 1) 양심적인 지도자 2) 희망하는 정부조직 형태 3) 내각 후보 4) 과거 혁명가의 4개 항이었고, 설문지는 1,957장이 배부되어 설문에 따라 626장(회수율 32%), 978장(50%)이 회수되었다. 양심적인 지도자는 여운형 33%, 이승만 21%, 김구 18%, 박헌영 16%, 이관술 12%, 김일성(金日成) 9%의 순위였고, 과거의 대표적 조선 혁명가로는 여운형 195, 이승만 176, 박헌영 168, 김구 156, 허헌 78, 김일성 72, 안재홍 59, 김규식(金奎植) 52의 순위로 나타났다. 그러나 대통령 후보로는 이승만 431, 김구 293, 여운형 78, 무응답 176으로서, 압도적 다수가 이승만을 꼽았다. 다른 내각후보로는 내무부장에 김구 195, 여운형 118, 안재홍 59, 허헌 58의 차례로, 외무부장은 여운형 274, 이승만 137, 김규식 58, 김구 55의 차례로, 재무부장은 조만식(曺晩植) 176, 김성수(金性洙) 98, 정태식(鄭泰植) 39, 김규식 37의 차례로, 군무부장은 김일성 309, 김원봉(金元鳳) 98, 이청천(李靑天) 78, 김규식 27, 사법부장은 허헌 371, 김병로(金炳魯) 58, 최동오(崔東旿) 52, 이강국(李康國) 42의 차례로, 문교부장은 안재홍 275, 김성수 68, 노동부장은 박헌영 371, 여운형 38로 나타났다. 그리고 ‘인민공화국 부서 그대로’라는 응답이 152, ‘임시정부 부서 그대로’가 52였다.18)
좌경적 성향이 강했던 당시의 지식인층에서 이승만을 대통령 적임자로 생각하는 응답자가 이처럼 많았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일반국민들은 그러한 성향이 훨씬 더 강했을 것이다.19)
金九의 귀국 기다려 獨促中協 활동 보류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요인들의 귀국뉴스가 전해지자 국민들은 다시 한번 흥분의 도가니에 싸였다. 이승만은 김구일행이 귀국할 때까지 독촉중협의 활동을 중지하기로 하고, 11월 2일의 천도교회관 회의에서 위임받은 전형위원 7명의 선정작업도 보류했다.20) 그것은 김구를 독촉중협에 참여시키기 위한 배려에서였다. 그는 독촉중협과 김구가 앞으로 어떤 관계를 가지게 될 것이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나로서는 단언할 수 없으나 물론 그 취지에는 찬성할 줄 믿는다”라고 신중하게 대답했다.21)
임시정부 환영준비 분위기는 요란했다. 11월 9일에는 김석황(金錫璜), 김하선(金河善) 등을 중심으로 한 한국독립당계 인사들이 임시정부영수환국 전국환영대회를 개최하기로 하고, 그 준비기구로 김석황 자신이 위원장이 되고 좌우익을 망라한 각 정당대표와 각계 인사 50명으로 구성된 영접부를 비롯하여 경호부, 교섭부, 보도부, 재무부, 정보부 등의 부서에 참여할 300명 가량의 방대한 명단을 발표했다. 이들은 그러면서 환영방법은 “임시정부를 공식으로 맞아들이느냐 또는 이승만 박사 때와 같이 비공식으로 하느냐 하는 근본문제에 대하여 군정당국과 절충 중”이라고 했다.22)
임시정부요인들의 귀국이 늦어지면서 경쟁적으로 환영행사를 준비하느라고 마찰을 빚기까지 하던 준비단체 대표들은 여러 차례 접촉한 끝에 11월 16일에 동본사(東本社) 강당에서 송진우(宋鎭禹), 백관수(白寬洙), 김준연(金俊淵) 등 해외지도자영접위원회 인사들과 김석황, 김하선 등 임시정부영수환국 전국환영회 인사들이 회합을 갖고 후자의 이름으로 통합하기로 합의했다.23)
임시정부 특파사무국에서는 임시정부요인들의 귀국보도가 있자 숙사 물색을 서둘러 11월 8일에는 운니동의 운현궁(雲峴宮)과 서대문에 있는 광산왕 최창학(崔昌學)의 집 등 여덟 곳으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24) 그러나 최종적으로 최창학의 대리석 2층 집이 김구일행의 숙사로 결정되고, 뒤에 도착한 요인들은 충무로에 있는 한미(韓美)호텔에 임시로 묵었다가 뒤에 운현궁으로 옮겼다. 최창학을 설득한 것은 평소에 그와 교분이 있던 김석황이었다.25)
이승만은 11월 13일 오후에 최창학의 집에 가서 방과 설비를 둘러보고 “이만하면 김구선생의 숙소로 손색이 없다”고 말했다.26)
敦岩莊 찾아온 朴氏부인
이 무렵의 어느날 이승만의 마음속 깊이 잠재해 있는 아련한 상처를 자극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33년 전에 두 번째로 고국을 떠나면서 사실상의 합의이혼을 하고 헤어졌던 박씨부인이 돈암장을 찾아온 것이다. 이때의 일을 윤치영(尹致暎)은 “그 노부인은 인품으로나 언사에서 바로 짐작되는 데가 있어서” 이승만에게 안내했고, “나로서는 두 분의 만남을 지켜보며 남다른 인정의 기미를 헤아려 서로 간에 예절이나 태도에서 느낀 바가 많았다”고 회고했다. 이승만은 윤치영으로 하여금 박씨부인을 정중하고 후하게 대접하여 보내게 했다. 그리고 그 뒤로 소식이 끊겼다. 윤치영은 “이 박사는 기구한 운명으로 맺어졌던 이 부인에게 인간적인 성의와 대우를 다한 것이었고, 그 부인 역시 스스로 공인으로서의 이 박사 입장을 세워 주는 미덕을 보여주었다는 생각이다”라고 적어 놓았다.27)
오달진 성품으로 생활력이 강했던 박씨부인은 유식하고 세련된 신여성이 되어 황해도에서 전도생활로 세월을 보내다가 해방이 되자 38선을 넘어와서 인천에서 양자 은수(恩秀)와 함께 살고 있었다.28) 이때까지 이승만의 호적은 창신동 625번지의 옛집으로 등재되어 있었다. 이승만이 두 번째로 출국한 뒤 조선총독부에서 호적정리를 할 때에 박씨부인이 박승선(朴承善)이라고 남편과 시아버지의 이름자 한 자씩을 따서 지은 이름으로 신고했을 이 호적에는 ‘처 박승선’, ‘장남 이은수(李恩秀)’로 기재되어 있었다. 이은수는 물론 이승만과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이 호적은 1947년에 처(妻)의 관계 및 친자관계 부존재 확인 판결과 이승만의 이화동 이적에 따라 말소되었다.29)
6·25전쟁이 터지고 9·28수복이 되자 이승만은 경무대 경찰서장 남태우(南泰祐)에게 박승선의 생사와 거처를 알아보게 했다. 그러나 이때는 박승선이 피란처에서 공산군에게 피살당한 뒤였다고 한다.30)
2. 美軍政府와 國務部의 알력
하지(John R. Hodge) 장군은 11월 2일에 도쿄(東京)의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에게 한국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이 심각한 국면에 이르렀음을 보고하는 전보를 쳤다. 하지는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이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그들이 지배권을 장악할지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말하고, “대부분의 과격분자들이 소련의 사주를 받고 있는 것이 틀림없으나, 확실한 증거를 포착할 수 없다”고 했다. 하지는 또 한국인들은 기본적으로 공산주의를 지지하거나 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대다수는 실제로 민족주의자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했다.
공산주의자들의 모든 행동이 잘 훈련된 외부전문가 그룹의 선동을 받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데, “가능하면 실질적인 강경조치는 피하려고 하나, 부득이 그러한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게 될지 모른다”고 고충을 털어놓았다. 하지는 다음과 같은 [추신]을 덧붙였다.
“이곳에서 알려진 정보로는 소련인들은 38도선 이북에 일본군의 무기로 무장한 한국인 군대를 편성하고 있다는 심증을 굳게 한다.”31)
하지 장군이 [추신]에서 언급한 내용은 사실이었다. 8·15와 함께 북한에서는 조만식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 세력의 무장대인 자위대(自衛隊), 지하운동을 하던 현준혁(玄俊赫), 오기섭(吳琪燮), 장시우(張時雨) 등 국내 공산주의자들이 조직한 치안대(治安隊), 그리고 김일성 그룹이 귀국한 뒤에 조직한 적위대(赤衛隊)의 세 무장그룹이 주도권 장악을 위한 경쟁을 벌였다. 그러나 소련군 사령관 치스차코프(Ivan H. Chistiakov) 대장은 10월 12일에 발표한 「소련 제25군 사령관의 명령서」를 통하여 모든 무장단체를 해산시키고, 이 세 단체원 가운데에서 2,000명을 선발하여 10월 21일에 진남포에 보안대(保安隊)를 창설했다. 이어 북한 6개 도(道)에는 도 보안대가 설치되었다.32) 하지가 입수한 북한의 동향은 이러한 상황을 말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國務部의 주장을 戰爭部가 반박
맥아더는 11월 5일에 하지의 이 11월 2일자 전문과 독촉중협 발족과 관련하여 보낸 11월 5일자 전문을 마셜(George C. Marshall) 참모총장에게 타전했고, 마셜은 그것을 국무부에 전했다. 국무부는 당황했다. 하지의 제안은 4대국 공동관리에 의한 신탁통치라는 국무부의 대한정책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국무부의 정책은 소련의 전폭적인 협조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빈센트(John C. Vincent) 극동국장은 11월 7일에 전쟁부[육군부]의 연락장교 비트럽(Russel L. Vittrup) 대령에게 하지의 제안에 대한 국무부의 견해를 적은 메모랜덤을 보냈다. 빈센트는 먼저 하지 장군의 11월 2일자 전문은 용납할 수 없는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에 대하여 충분히 설명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군사적인 견지에서 자기가 취할지 모를 조치내용도 적시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또한 빈센트는 미국정부나 주한미군사령관이 김구 그룹과 같은 특정한 한국인 그룹이나 이승만과 같은 특정한 한국인 개인을 다른 한국인들에 반하여 미국인들이 지지한다는 인상을 줄 만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 미국정부가 견지해 온 일관된 정책임을 강조했다. 그런데 하지가 제안한 것과 같은 조치는 군정부가 당면한 정치적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소련군사령관으로 하여금 자기지역 안에 있는 비슷한 그룹을 지원하게 하여 통일한국의 건설을 지연시킬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33)
그러자 전쟁부 차관보 맥클로이(John J. McCloy)가 11월 13일에 국무차관 애치슨(Dean Acheson) 앞으로 보낸 편지를 통하여 빈센트의 주장을 반박하고 나섰다. 맥클로이는 참모들을 대동하고 6주 동안 세계를 순방했는데, 마지막 기착지가 도쿄였다. 그는 도쿄에 머무는 동안 빈센트의 신탁통치 발언 파문으로 급히 도쿄를 방문한 하지를 장시간 만났다.34) 맥클로이는 먼저 번즈(James Byrnes) 국무장관, 애치슨 차관, 그리고 빈센트 국장과 함께 한국상황에 대하여 토론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빈센트의 메모랜덤은 “우리가 한국에서 당면하고 있는 참으로 긴급한 현실을 외면하려는 것”이라고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그는 하지가 거의 모든 한국인들이 ‘망명 한국인들’에 대하여 큰 존경과 신뢰를 하고 있고 미군이 진주할 때에 왜 중경의 ‘망명정부’와 김구 및 그 동료들을 같이 데리고 오지 않았는지 이상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고 했다. 맥클로이는 또 “하지 장군은 이승만 박사를 상당히 중시하고 있으며, 그가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고 적었다. “그는 공산주의 지도자들과 협상하는 데 이 박사를 활용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맥클로이는 “우리는 하지에게 모든 방법으로 공산주의 문제에 대한 더 많은 정보와 그들이 우리의 목표를 파괴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에 대한 그의 의견을 제시하게 하는 동시에 그로 하여금 너무 지나치지 않은 범위에서 그가 할 수 있는 한 많은 망명 한국인을 활용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못 박았다.35)
이러한 맥클로이의 반박을 받은 빈센트는 11월 16일에 애치슨 차관에게 메모랜덤을 제출했다. 이 메모랜덤에서 빈센트는 (1) 국무부는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가 우리 정부의 공식정책이라는 사실을 하지 장군이 확실하게 공식으로 통보받기를 바라고, (2) 임시정부의 관리들이 임용되는 것은 임시정부와의 관계 때문이 아니라 그들 개인의 능력 때문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게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그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해명했다.36)
美軍政府의 「國家非常事態宣言」 도와
김구일행의 귀국을 기다리는 동안 이승만은 미군정부의 시책에 적극 협조했다. 군정청은 10월 30일에 「법령 제19호」로 「국가비상사태선언(Declaration of National Emergency)」을 포고하고, (1) 노동쟁의조정을 위한 조정위원회의 설치 (2) 암시장의 단속 (3) 안녕질서의 확보 (4) 신문사의 등록제 실시를 공표했다.37) 그리고 11월 10일에는 『매일신보(每日新報)』를 정간시켰다.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였던 『매일신보』는 8·15해방 이후 종업원자치위원회에 의하여 운영되고 있었다. 10월 2일에 『매일신보』의 재산을 접수한 미군정부는 한국인 주주들에게 주주총회를 소집하여 경영진을 새로 구성하게 했다. 좌우파를 망라하여 새로 구성된 경영진은 3·1운동 때에 민족대표의 한 사람이었던 오세창(吳世昌)을 사장으로 추대하고 제호를 『서울신문』으로 바꾸어 11월 23일부터 신문을 속간했다.38) 이와 함께 『조선일보(朝鮮日報)』도 『서울신문』의 시설을 이용하여 11월 23일에 복간되고, 『동아일보(東亞日報)』도 조선총독부의 일본어 기관지 『게이조(京城)일보』의 시설을 이용하여 12월 1일에 복간되었다. 그리하여 민족주의 정파들은 비로소 비슷한 성향의 신문을 갖게 되었다.
겨울철을 앞두고 가장 긴급한 민생문제는 연료와 식량을 확보하는 문제였다. 이승만은 11월 12일의 정례기자회견에서 석탄 및 양곡문제와 관련하여 국민의 협조를 당부했다. 그는 채탄작업이 가장 긴급한 문제인데, 조선인 가운데에는 기술자가 없어서 부득이 일본인 기술자를 쓰지 않을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조선인 직원들의 반대가 있어서 딜레마에 빠져 있다고 말했다. 이승만은 임진왜란 때에 일본인들이 우수한 조선인 기술자들을 데려다가 사역시킨 일을 사쓰마야키(薩摩燒)의 유래를 들어 설명하고, 또 소련에서 2차대전 때에 파괴된 시설을 복구시키는 데 많은 독일인을 사역시키고 있는 사실을 보기로 들면서, “필요하지 않은 일본인은 빨리 퇴거시키되, 필요한 최소한의 일본 기술요원은 잡아 두어서 실컷 부리고” 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금년은 풍년이 들어서 450만석의 잉여양곡이 생길 것이라고 말하고, 이것을 일본에 팔아서 건국에 필요한 물자를 사오려는 것이 군정부당국의 생각인데, 농가에서 양곡시세가 오르기를 바라 팔지 않는 경향이 있다면서, “동포애를 발휘하여 되도록 군정부당국의 지시와 요망에 응하여 필요한 소비량을 제하고는 팔기 바란다”고 설득했다.39)
“資本과 勞動이 平均히 利益 누리게”
이승만은 11월 14일 오후에는 서울중앙방송국의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국민들의 각성과 분발을 촉구하는 긴 연설을 했다. 그는 “선동하는 자들이 있어서 민중의 사욕과 불평을 고취하야 경향각처에 불소한 폐해를 주는 일이 있다고 한다”라고 전제하고 다섯 가지 폐단을 설명했다. 첫째는 노동자들의 동맹파업이었다. 나라를 찾아 가지고 자유독립의 기초를 세우려는 이때에는 “설혹 불공평한 대우를 받을지라도 애국애족하는 마음으로 참고 민국건설에 도움이 되도록 힘써야” 하고, “기계 하나라도 놀려서는 안 될 것이라고 결심해야 된다”고 강조했다. 둘째는 농민들이 추수를 하지 않는 폐단이고, 셋째는 탄광이 폐쇄된 일이었다. 넷째는 친일분자들의 징벌 문제였다. 이승만은 나라를 팔고 동족을 잔해(殘害)한 자들을 낱낱이 처벌하여 “국민성을 청결케 해 놓아야” 국가의 장구한 기초가 바로잡힐 줄로 믿는다고 말하고, 그러나 그 일은 국권을 회복한 뒤에 “우리 법정에서 심판 처리하는 것이 옳을 것”이라고 그의 지론을 다시금 강조했다. 다섯째는 양반계급과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문제였다. 이승만은 “임시정부는 완고한 양반계급이요 자본주의자들이므로 민주주의에 방해가 될 것”이라고 선동하는 자들이 있다면서, 그러한 주장이 얼마나 사실과 다른가를 한성정부의 강령을 들어 설명했다. 그러고는 토지분배와 노사관계에 대한 자신의 비전을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지금 군정부에서 모든 일본인의 토지와 부동산을 봉쇄해 두었으니 일후에 우리 정부에서 법으로 안정(安定)하고 각 농민에게 상당하게 분배하야 연기(年期)를 한하고 경작하게 될 것이다. 공업을 권려하되 법률로 결정하야 자본과 노동이 평균히 이익을 누리게 하고 국가의 부강을 도모하게 하려 한다.”40)
이승만의 방송은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졌던 것 같다. 11월 14일은 수요일이었는데, 미군정부는 이때부터 이승만으로 하여금 매주 수요일 저녁에 서울중앙방송국에서 라디오 연설을 하도록 했다.41)
美軍政府는 다시 「朝鮮政府의 計劃과 政策」 聲明
이승만이 김구의 도착을 기다려 독촉중협의 활동을 중지하고 있는 동안에도 정국은 부산하게 움직였다. 각정당행동통일위원회는 11월 14일 오후에 천도교회관에서 장안파공산당을 비롯한 30여개 정치단체 대표자들이 모여 이갑성을 의장으로 한 임시전체위원회를 열었다. 의제는 위원회해체 문제와 각정당통합 문제 두 가지였다. 토의결과 위원회해체 문제는 이승만 중심의 독촉중협이 그 목적을 완성할 때까지 이에 협조하기 위하여 보류하기로 하고, 정당통합 문제는 각 정당의 의견이 일치되지 못한 채 산회했다.42)
같은 날 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는 11월 20일부터 서울에서 전국인민위원회 대표대회를 개최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면서 이 회의를 위해 각 지방에서도 지방정세보고, 자료수집, 의안제출 등의 준비를 진행하고 있고, 또 이미 발표한 대로 46년 3월 1일에 제2차 인민대표자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라고 했다.43)
이러한 상황에서 미군정부는 11월 16일에 「조선정부의 계획과 정책」이라는 장문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 문서는 (1) 조선군정의 일반원칙과 정책 (2) 조선정부수립에 관한 일반문제 (3) 전반적 정부[관리]교체 계획 (4) 중앙정부 (5) 지방청[도청] (6) 조선경제상태 (7) 장래의 계획 (8) 각자가 자기의 정부를 위하여 할 수 있는 사항이라는 8개 항에 걸쳐 군정부의 시정현황과 앞으로의 계획을 일반국민들에게 홍보하는 내용이었다. 이를테면 (7)항은 “군정청 지도하에 우수하고 안정된 조선정부가 수립된 뒤에는 두 가지 중요한 시책을 쓸 것이다”라면서 다음의 두 가지를 들었다.
“그 하나는 미국의 원조를 받을 목적으로 조선과 미국 간에 긴밀한 민간관계를 형성한다. 이 계획 중에는 재정적 원조[차관], 농공업의 원료, 기계공구, 의약품과 의료시설의 지원과 모든 교육부문에서의 학생과 교수의 교환 등의 문제를 포함함은 물론이요 조선의 기술자, 의사, 법률가, 상업전문가 및 그밖의 부문에 필요한 인재의 양성을 위하여 미국인 전문가를 조선으로 초청하는 계획도 포함된다. …”
두 번째는 다음과 같은 매우 함축적인 내용이었다.
“제2는, 그리고 최후의 정책은 군정하의 조선정부를 어떻게 참된 조선인의 민주주의 정부로 전환[발전]시키느냐 하는 문제다. 이 계획은 조선의 민주주의 달성을 위한 조선인의 계획이라야 하고, 또 조선의 지도자는 그러한 목적을 위하여 이미 활동을 개시하고 있다.”44)
이 문서가 “이미 활동을 개시하고 있다”고 한 조선의 지도자란 이승만과 독촉중협 주동자들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軍政府에 國防司令部 설치
이 시기에 미군정부가 실시한 조치 가운데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한국군대 창설을 위한 정부기구를 설치한 것이었다. 군정청은 11월 13일에 「법령 제28호」로 군정청에 국방사령부(Office of the Director of National Defence)를 설치하고(제1조), 조선총독부 군무국을 군정청기구로 창설하며, 군무국 안에 육군부와 해군부를 설치하기로 했다(제2조). 그리고 어떠한 개인이나 단체도 국방사령관의 인가 없이는 군무국의 관할에 속하는 행동을 할 수 없게 했다(제3조). 그것은 8·15해방 이후에 다양한 군경력에 따라 자연발생적으로 결성되어 있는 사설 군사단체들을 정리하여 한국의 독립에 필요한 군사력을 양성하는 동시에 당면해서는 치안유지를 위한 경찰업무를 보조하게 하자는 취지에서 고안된 것이었다. 11월 현재 남한에는 이응준(李應俊), 김석원(金錫源) 등 일본육사 출신들을 중심으로 8월 말에 결성된 조선임시군사위원회와 그 산하의 치안대총사령부, 학도지원병 출신들이 9월 1일에 결성한 학병동맹(學兵同盟), 건국준비위원회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9월 7일에 조직된 조선국군준비대(朝鮮國軍準備隊), 독립군 출신의 오광선(吳光鮮)이 광복군 총사령 이청천과 연락하며 11월 6일에 결성한 광복군 국내지대(光復軍國內支隊) 등을 비롯하여 군정청에 등록된 단체만도 30개에 이를 정도로 난립해 있었다.45) 거기에 위에서 본 것과 같은 북한의 무장단체 해산 조치와 보안대 창설 사실도 자극이 되었을 것이다.
“臨時政府歡迎 소동은 그만두어야”
상해에 머물고 있던 김구일행의 귀국은 지연되고 있었다. 아널드(Archibald V. Arnold) 군정장관은 11월 13일의 기자회견에서 김구가 어떤 자격으로 귀국하며 언제 귀국하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김구씨는 이승만 박사와 마찬가지로 개인자격으로 입국한다. 김구씨가 다년간 조선독립을 위하여 굳세게 싸워 왔고 또 귀국하면 모국의 발전을 위하여 노력할 것이므로 김구씨 일행의 귀국을 환영하는 바이다. 그러나 언제 귀국할는지는 아직 확실히 알 수 없다.”46)
한편 이승만은 11월 19일 정례기자회견에서 김구일행의 귀국과 관련하여 몇 가지 뼈 있는 말을 했다. 그는 먼저 “중경임시정부의 귀국문제로 소란한 모양이나 하지 중장에게 반드시 연락이 있을 터이고 나도 알게 될 터이므로 책임있는 발표가 있을 때까지 환영소동은 그만두어야 할 것이다”라고 일침을 가했다. 중경임시정부가 귀국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기자들의 질문에는 “그분들은 단체로 귀국하려고 하고 군정부 당국은 개인으로 두서너 분씩 오는 것을 원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임시정부요인들은 정부로 인정하기를 요구하고 있지 않느냐고 기자들이 다그쳐 묻자 그는 “이곳 군정부 당국은 정책을 결정할 권리는 없다. 미국무부 또는 국제적 협의 없이는 중경임시정부를 인정하고 안하는 결정은 못 짓는다”라고 잘라 말했다.47) 이처럼 임시정부요인들을 미국무부의 방침에 따라 개인자격으로 귀국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고, 그나마도 하지 장군과 이승만은 몇 사람씩 나누어서 귀국시키려 했던 것이다. 그것은 김구 직계만을 반대파들과 분리하여 먼저 귀국시키려고 했기 때문이다. 윤치영과 윤석오(尹錫五)는 임시정부요인들이 귀국하기 전에 이승만과 송진우는 인민공화국을 타도하기 위하여 임시정부 정통론을 적극적으로 내세우되 일단 귀국하여 정국이 다소 질서가 잡히고 나면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이 독립정부 수립을 기해야 한다는 데 합의하고 있었다고 증언했다.48)
信託統治 창안자 랭던이 信託統治 폐기 건의
이 시기의 미군정부의 한국문제 처리구상은 11월 20일에 하지 장군의 정치고문대리 랭던(William Langdon)이 번즈 국무장관에게 보낸 전문에 구체적으로 표명되어 있다. 1930년대 초반에 서울주재 미국영사로 근무했던 랭던은 전후 대한정책과 관련하여 신탁통치 방안을 창안한 장본인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月刊朝鮮』 2007년 6월호, 「美-日戰爭으로 슬픔의 눈물은 끝났다!」참조). 그는 하지의 정치고문 베닝호프(H. Merrell Benninghoff)가 업무협의를 위해 귀국한 직후인 10월 20일에 베닝호프의 대리로 서울에 도착했다.
랭던은 전문에서 먼저 “해방된 한국에서 한달 동안 관찰하고 또 그 이전에 한국에서 근무한 경험에 비추어, 신탁통치를 이곳의 현실적 조건에 적용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나 현실적 관점에서 타당하다고 확신할 수 없으며, 따라서 우리는 그 안을 폐기해야 한다고 믿는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미군정부가 본국정부의 기본정책인 신탁통치안을 폐기할 것을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건의한 것이었다.
랭던은 이어 “김구그룹은 해방된 한국의 최초의 정부로서 경쟁상대가 없고 모든 정파나 정당들이 준합법적(quasi-legitimate)으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이 중경임시정부와의 접촉을 경계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그러고는 “김구에 대한 높은 평가는 미국으로 하여금 한국인들의 비난이나 원망을 살 염려가 없는 건설적인 대한정책을 시도할 기회를 제공한다”면서 다음과 같은 과정의 정책을 시행할 것을 건의했다.
(1) 미군사령관은 김구에게 군정부 안에 몇몇 정치그룹을 대표하는 협의회(council)를 구성하여 한국의 정부형태를 연구하고 준비하게 하며, 정무위원회(Governing Commission)를 조직하게 한다. 군정부는 이 위원회에 여러 가지 편의와 조언과 운영자금을 제공한다.
(2) 정무위원회를 현재 전 한국의 조직으로 급속히 수립되고 있는 군정부와 통합시킨다.
(3) 정무위원회는 과도정부로서 군정부를 계승하며, 사령관은 거부권과 함께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미국인 감독과 고문의 임명권을 갖는다.
(4) 다른 관계 3국(영국, 중국, 소련)에 대하여 정무위원회에 미국인을 대신할 약간의 감독과 고문을 파견하도록 요청한다.
(5) 정무위원회는 국가수반을 선거한다.
(6) 선출된 국가수반에 의하여 구성된 정부는 외국의 승인을 얻으며, 조약을 체결하고 외교사절을 파견한다. 그리고 한국은 국제연합기구(UNO)에 가입한다.
[주] 이러한 과정의 어느 단계에서, 아마도 (4)와 (5)의 중간쯤에서, 소련과 상호 철군과 정무위원회의 권한을 소련지역으로까지 확장하는 데 관한 협정을 맺는다. 위의 계획은 사전에 소련에 통고해야 하며, 협의회가 정무위원으로 지명한 소련지역내 인사들이 서울에 오는 것을 소련이 허락함으로써 이 계획이 더욱 진전되도록 소련의 협조를 촉구해야 한다. 그러나 만일 소련의 참여가 실현되지 않더라도 이 계획은 38도 이남의 한국에서 실시되어야 한다.49)
미군정부는 김구의 인기가 고조되고 있는 분위기를 이용하여 신탁통치안을 포기하는 동시에 지금까지의 몇 가지 구상보다 한결 구체화된 정무위원회라는 기구의 설치를 제안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물론 하지가 11월 5일에 맥아더에게 보낸 전문에서 보듯이, 이승만이 추진하는 독촉중협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하지 장군이나 랭던은 이승만과 김구의 연대를 확신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군정부가 “이 중앙협의회를 국정회의(國政會議) 또는 국무회의(國務會議)의 명의로 모아 …” 운영할 것을 생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50) 그리고 그것은 남한만의 단독적인 기구나 정부수립을 상정한 것이 아니었음은 위의 랭던 건의문의 [주]의 설명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3. “나는 共産黨에 대하여 好感을 가진 사람”
모든 정파가 참가한 한국 국민의 “책임있는 기관”으로 발족한 독촉중협이 랭던이 말하는 정무위원회 같은 기관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인민공화국의 존재가 정리되어야 했다. 10월 10일에 아널드 군정장관이 모멸적인 성명으로 인민공화국을 부인한 이후 군정부는 여러 통로를 통하여 인민공화국의 해체를 종용하고 있었다.
11월 20일부터 사흘 동안 개최된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에서 행한 인민공화국 국무총리 허헌의 설명에 따르면 그동안의 경위는 다음과 같았다.
대표적인 교섭통로는 인민공화국 부주석 여운형이었다. 여운형은 군정청의 연락을 받고 10월 28일에 아널드 군정장관을 방문했다. 아널드는 여운형에게 “한 나라에는 두 정부가 있을 수 없다. 조선의 독립은 약속되어 있으나 아직 조선의 통치는 군정부가 하고 있다. 인민공화국의 명칭은 취소하라”는 공문을 수교했다. 그것은 인민공화국 인사들에게 청천벽력이었다. 급히 소집된 관계자들의 회의에서 토의한 결과 국제법상으로 군정관리하에 정부가 있을 수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것은 물론 견강부회였다. 여운형은 이튿날 군정청을 방문하여 설득하려고 했으나 허사였다. 군정청은 인민공화국의 ‘국(國)’자를 ‘당(黨)’자로 바꾸어 인민공화당으로 만들라고 권고했다. 군정청과 여운형의 실랑이는 1주일 넘게 계속되었다.
共産黨의 외곽단체로 全國勞動組合評議會 결성
공산주의자들의 힘은 조직력이다. 8·15해방과 더불어 서울과 인천을 비롯한 전국에 직장단위 노동조합이 조직되고 있었는데, 공산당은 그것을 산업별 노동조합으로 정비하고 전국 규모로 통합하는 작업을 일찍부터 벌여 왔다. 그리하여 9월 26일에는 10개의 산업별 노동조합 대표 51명이 모여 전국적인 조직을 결성하기 위한 준비회의를 열었고, 뒤이어 11월 5일, 6일 이틀 동안 서울의 중앙극장에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朝鮮勞動組合全國評議會: 이하 全評) 결성대회를 개최했다. 회의에는 금속, 철도, 통신, 토건, 전기, 어업, 섬유, 식료품, 조선, 광업, 출판 등의 산업별 노동조합 대표 505명이 참가했는데, 이들은 남북 40여개 지방 50여만명의 노동자 대표라고 했다. 대회는 먼저 “조선무산계급의 수령이요 애국자”인 박헌영과 “해외에서 자주독립을 위하여 싸워 준” 김일성을 비롯한 소련, 미국, 영국, 프랑스의 노동조합 비서와 중국의 모택동(毛澤東)을 명예의장으로 추대했다. 대회는 이어 긴급동의로 (1) 조선무산계급의 수령 박헌영 동무에게 감사메시지를 보낼 것 (2) 조선무산계급운동을 교란하는 이영(李英)일파[장안파공산당]를 단호히 배격할 것 (3) 조선민족통일전선에 대한 박헌영 동무의 노선을 절대 지지할 것 (4) 연합국 노동자계급과 미-소 양군 사령관에게 감사메시지를 보낼 것을 결의했다. 대회는 이어 각 산업별 노동조합의 현황보고가 있은 다음 1) 최저임금제 확립 2) 8시간노동제 실시 등 노동권 요구에서 시작하여 10) 민족반역자 및 친일파 소유의 일체의 기업을 공장위원회에서 관리 15) 조선인민공화국 지지 등을 포함한 17개 항의 「행동강령」을 채택했다.51) 이 「행동강령」은 11월 24일에 중앙집행위원회 상임위원회가 20개 항으로 정리하여 발표했다.52) 그것은 전평이 공산당과 인민공화국의 가장 강력한 외곽단체로 조직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人民共和國은 政治的啓蒙運動하는 政治學校”
11월 9일에 이르러 아널드는 여운형을 통하여 허헌을 불렀다. 허헌은 마침 고열이 있어서 중앙인민위원이자 인민공화국 내무부장대리인 김계림(金桂林)을 대신 보냈는데, 민정장관 프레스컷(Brainard F. Prescott) 대령은 허헌이 “생명이 위험하지 않을 정도라면 자동차를 타고 오라”고 말했다.
허헌을 보자 아널드는 “일전에 보낸 것은 결론이 어찌되었는가?” 하고 물었다. 허헌이 결론을 짓지 못했다고 하자 아널드는 “당신이 반대해서 그런 게 아니냐?”고 몰아붙였다. 두 사람의 대화는 1시간40분이나 계속되었다. 허헌은 인민공화국을 해체하는 문제는 명년 3월 1일에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결정될 것이라고 말했다.
아널드가 “인민공화국은 민족주의자가 한 사람 있을지 말지 하고 모두 공산주의자들이다. 당신도 공산주의자 아닌가?” 하고 따지면서 인민공화국 해체를 거듭 촉구하자, 허헌은 “전 인민이 인민공화국을 수립한 것이므로 나나 중앙인민위원이 결정할 수 없다. 다만 전 민중이 하는 것이다.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를 11월 20일에 열어서 답변해 주겠다” 하고 대답했다.
이튿날 정보과장 아스 소령은 허헌에게 “하지 장군과 아널드 장군이 말하기를 일전에 인민공화국의 ‘국’자는 떼기로 했다는데 어떻게 했느냐?”고 물으면서, 그것을 신문에 발표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하여 허헌은 11월 20일까지 기다려 달라고 간청했다고 한다.53) 대회 개최의 허가가 나고 더구나 대회 첫날 아널드 장군이 대회장에 나타나 축사를 한 것을 보면 아스 소령의 말에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아널드는 이어 11월 13일에는 조선공산당의 총비서 박헌영을 불러서 설득했다. 아널드가 인민공화국과 어떤 관계에 있느냐고 묻자 박헌영은 특별한 관계는 없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러나 조선인민공화국에서는 여운형씨와 같은 나의 동지들이 일하고 있다. 인민공화국은 어떠한 경우에도 군정청에 대립하는 기관이 아니다. 인민공화국은 정치적 계몽운동을 수행하는 정치학교의 성격을 띠고 있다. 나는 이러한 의미에서 인민공화국이 정당하고 유용한 조직이라고 생각한다.”54)
박헌영도 이제 미군정부 책임자에게 인민공화국이 한국의 유일한 정부라고는 주장할 수 없었다.
이틀 뒤인 11월 15일에는 하지 장군이 박헌영을 만났다. 10월 27일에 처음 만난 뒤에 두 번째로 만난 것이었다. 하지는 먼저 군정청의 임무에 관한 여러가지 사항을 설명하는 가운데 군무국을 설치한 일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현재 조직 중에 있는 군무국의 기능은 “공중의 안녕질서를 보장하고 경찰을 보조하며 언론과 종교의 자유를 수호하고 사유재산의 불가침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박헌영은 하지에게 “조선인민공화국 인민위원회는 한국에 약속된 독립이 성취될 때까지 한국에서 권력의 창출을 돕고 준비하는 정치단체들 가운데 하나이다. 아직 인민공화국이 자기 수중에 권력을 획득하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군정청은 조선인민공화국을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말했다.
하지는 인민공화국이 정부 성격을 포기하고 정당으로 바꾸라고 권고하면서, “조선인민공화국 성원들은 군정청에 대립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박헌영은 “우리는 군정청에 반대하고 있지 않으며 인민공화국을 군정청에 대립시키고 있지 않다”고 응수했다고 한다.55)
全國人民委員會代表者大會에 참석한 아널드 장군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는 11월 20일부터 22일까지 천도교회관 강당에서 열렸다. 회의는 북한지역을 포함한 25개 시, 175개 군의 대표 610명과 도인민위원 40명이 참가한 대규모 집회였다. 인민공화국 서기국장 이강국이 의장으로서 회의를 주재했다.
개회사와 인민공화국 탄생 경과보고를 하게 되어 있는 여운형은 회의기간 내내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는데, 개회사를 대신한 허헌은 여운형이 “연일 정치적 활동에 건강을 상실하시어” 참석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인민공화국 탄생 경과보고는 조두원(趙斗元)이 원고를 대독했다.
인민공화국이 정당으로 탈바꿈하기를 기대하면서 회의에 참석한 아널드는 축사에서 “지금 우리는 어떠한 정당이나 단체를 후원하는 것이 아니라 군정청과 한국 건국에 협력하면 환영한다”고 전제하고, “군정청은 한국의 유일한 정부”이고, “이 정부를 앞으로 몇달 동안 한국사람들이 어느 정도로 지지하는지 연합국에서 주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한국사람들은 한국이 연합국의 감시하에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하고,” “몇 개월 동안에 민족통일전선을 취하여 독립의 용의와 능력이 있다는 것을 연합국에 보여야 한다”고 주장했다.56)
대회순서의 가장 중요한 것은 조선공산당 정치국원이자 인민공화국 외교부장대리인 강진(姜進)의 「국제정세보고」와 이강국의 「국내정세보고」로 된 「정치보고」였다. 강진은 베트남, 그리스, 중국 등의 사태를 설명하면서 “소련 이외에는 완전한 민주주의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 다음, 중앙인민위원회에 대한 국민의 신임투표를 제안하고 “중앙인민위원회를 무시하는 여하한 정권도 조선에는 수립할 수 없다”고 역설했다.
이강국의 「국내정세보고」 가운데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정당통일 운동과 관련하여 이승만을 맹렬히 비난한 점이었다. 이강국은 “10월 16일에 이승만 박사의 귀국을 계기로 정당통일 운동은 아연 활기를 띠어 … 10월 23일에 이 박사를 회장으로 한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결성하자 인민의 시청(視聽)은 이에 집중되었고, 이 박사에 대한 신망은 중앙협의회에 대한 기대로 변하였다. … 그러나 그 뒤 누차 거듭 성명한 이 박사의 통일론이 친일파나 민족반역자까지도 함께 싸고도는 무원칙적 이론과 대중과 유리된 비민주주의적 태도에서 일보도 구체적으로 전진치 못하여 민중은 이 박사의 정치적 면목을 의심하였고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 대한 관심은 사라지기 시작하였다”고 역설했다. 그리고 11월 7일에 인민공화국 주석 취임거부 성명을 계기로 “이 박사의 통일운동은 통일을 도리어 분열로, 정돈을 혼란으로 유도하였다”고 비판했다. 이강국은 결론으로 이승만의 행동은 다음 두 가지 점을 명백히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첫째로 이 박사의 무조건통일론이 초당파적 통일론이 아니라 3천만 총의를 무시한 1당파적 입장의 통일론인 것, … 둘째로 이 박사 자신의 귀국 제1성에서 언급하였던 한 평민, 한 시민으로서의 자격 운운도 임시정부의 한 요인이라는 성명에 의하야 일시적 정치기술상 엄폐수단이었던 것을 명백히 한 것”이라는 것이었다.57)
“나는 共産黨에 대하야 好感을 가진 사람”
이승만은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회의의 이틀째 회의가 열린 11월 21일 저녁에 서울중앙방송국의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공산당에 대한 나의 관념”이라는 제목으로 연설을 했다. 이승만의 연설은 인민공화국 주석취임을 거부하는 방송을 한 뒤로 이승만과 독촉중협을 맹렬히 공격하고 있는 공산당 인사들이 독촉중협을 탈퇴하지 않도록 무마하기 위한 고충이 역력한 내용이었다. 이승만은 먼저 공산당 인사들이 인민공화국을 만든 동기가 사욕이나 불의에서 나온 것이 아닌 줄 믿는다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자초로 공산당에 대하야 호감을 가진 사람이다. 그 주의에 대하여도 찬성하므로 일후에 우리 정부에서 경제정책을 세울 적에 공산주의에서 채용할 것이 여러 가지 있다. 농민은 땅이 있고 빈민은 이식이 있게 할 것이다. 나는 공산주의에 얼마만큼의 동정자이다. 시베리아 눈바람에 갖은 풍상을 겪으며 고국을 위하여 혈전고투하는 동포들과 악독한 왜적의 압박하에서 지하공작으로 백전불굴하고 배일항전하던 공산당원들을 나는 공산당원으로 보지 않고 훌륭한 애국자로 인정한다. 왜적이 항복한 뒤에 각국의 승인을 얻기 위하야 인민공화국을 세운 것이 사욕이나 불의의 생각이 아닌 줄로 믿는다. …”
이때에 이승만이 한 말, 곧 일후에 우리 정부에서 경제정책을 세울 적에 공산주의에서 채용할 것이 여러가지 있다고 한 말이 얼마나 진정성이 있는 말이었는가는 뒷날 제헌헌법의 경제조항의 제정과정과 관련하여 심도있게 톺아볼 만한 가치가 있다. 이승만은 이어 공산주의자들을 두 종류로 나누어 설명했다.
“첫째는 공산주의가 경제방면으로 근로대중에게 복리를 줄 것이니 이것을 채용하자는 목적으로 주장하는 인사들이다. 이러한 공산주의에 나는 얼마만큼 찬성한다. 둘째는 경제정책의 이해는 어찌되었든지 공산정부를 성립하기만을 위하여 무책임하게 각 방면으로 선동하는 중에서 분쟁이 생겨서 국가에 손해를 끼치는 이들이니, 이러한 자칭 공산주의자가 참으로 염려되는 점이다. 이러한 분자들이 나라 안에 있어서 국민이 분열되고 골육이 상쟁하는 참화를 양성하니, 나는 이러한 공산분자로 인연하여 근심한다. …”
이승만은 이들이 일본인들의 자금을 지원받아 각 지방에 소요를 일으키고 인심을 이산시켜 미군정부가 밀려 나가기를 도모하고 있다고 말하고, 이들로 말미암아 “애국하는 공산당원들의 명예가 손상되고,” 장차 한국과 러시아 사이의 친선을 손상시킬지 모른다고 주장했다.
이승만은 그러한 폐단을 중국과 폴란드의 내전을 들어 설명하고 나서, 그러한 상황을 막을 방법은 우국애족하는 모든 남녀에게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당부했다.
“각각 제 정신을 차려서 이런 선동에 흔들리지 말고 각도 각군에 단체를 조직하여 서로 밀접하게 연결하며 촌촌면면을 심방하며 선전해서 모든 동포로 하여금 그 위험한 내용을 알게 하는 것이 유일한 방책이다. …”58)
이처럼 이승만은 세상없어도 공산당을 독촉중협에서 탈퇴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독촉중협이 좌우익의 모든 정파를 포괄하는 “민의의 대표기관”이 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의 이러한 주장이 공산주의자들을 얼마나 설득할 수 있었는가는 적이 의심스럽다.
사흘 동안 열린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는 미군정부가 기대한 것과는 반대로 인민공화국 사수를 위한 결의대회가 되고 말았다. 폭력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 대회와 관련하여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그동안 독촉중협에 열성적으로 협조하면서 박헌영의 재건파공산당과는 별도의 행동을 취해 왔고 그 때문에 이번 대표자대회에서도 비판을 받은 이영, 최익한(崔益翰) 등의 장안파공산당이 대회가 끝난 이튿날인 11월 23일에 마침내 해소를 결의하고 해소성명서를 발표한 사실이었다.59)⊙
1) 『自由新聞』1945년 11월 5일자, 「決議書三修正委員 敦岩莊에 모혀 첫 協議」. 2) 『自由新聞』 1945년 11월 7일자, 「決議書를 若干修正 聯合國에 發送」. 3) 『每日新報』 1945년 11월 7일자, 「修正된 決議書內容」.
4) 『自由新聞』 1945년 11월 4일자, 「聯合國에 보낼 決議文, 共産黨에서 反對表明」. 5) 『每日新報』 1945년 11월 6일자,「金九氏以下?名의 一行 今月十日內로 入京」. 6) 『自由新聞』 1945년 11월 6일자, 「共産黨協力에 感謝」. 7) 『新朝鮮報』 1945년 11월 6일자, 「軍政에 積極協力하고 鞏固히 團結하자」;『每日新報』 1945년 11월 6일자,「叛逆者와 親日派는 統一에서 除外한다」. 8) 『新朝鮮報』 1945년 11월 6일자, 「李承晩博士, 今朝重大放送」;『每日新報』 1945년 11월 6일자, 「李博士放送, 六日午前七時」. 9) The New York Times, Nov.6, 1945, “A United, Free Korea.”
10) 『自由新聞』 1945년 11월 8일자, 「李博士來參懇願타 靑年代表者會流會」;『中央新聞』 1945년 11월 8일자, 「李博士不參으로 靑年團?代表會主催懇談會流會」. 11) 『新朝鮮報』 1945년 11월 8일자, 「李博士放送要旨」;『自由新聞』 1945년 11월 8일자, 「人民共和國主席은 受諾할 수 없다」. 12) 『中央新聞』 1945년 11월 9일자, 「李博士態度는 유감, 人民共和國許憲氏談」. 13) 『新朝鮮報』 1945년 11월 10일자, 「李博士放送과 人民委員會의 聲明」;『自由新聞』 1945년 11월 10일자, 「主席拒否는 遺憾」.
14) 『新朝鮮報』 1945년 11월 12일자, 「獨立促成中央協議會에 朝共서 積極參加」. 15) 심지연, 『人民黨硏究』,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1991, pp. 229~230. 16) 『中央新聞』 1945년 11월 13일자, 「朝鮮人民黨結黨式盛大」. 17) 朝鮮人民黨, 『人民黨의 路線 ─ 人民黨文獻』, 新文化硏究所, 1946, p. 2 ; 李萬珪, 『呂運亨先生鬪爭史』, 民主文化社, 1946, pp. 274~275.
18) 先驅會本部輿論調査部, 「朝鮮指導人物輿論調査發表」, 『先驅』1945년 12월호, pp. 45~52. 19) 정병준,『우남 이승만 연구 ─ 한국 근대국가의 형성과 우파의 길』, 역사비평사, 2005, pp. 472~473. 20) 『自由新聞』 1945년 11월 13일자, 「定例會見에 李博士談」. 21) 『中央新聞』 1945년 11월 10일자, 「各黨各層을 總網羅, 臨時政府歡迎陣結成」. 22) 『自由新聞』 1945년 11월 9일자, 「金九主席歡迎의 前奏」. 23) 『自由新聞』 1945년 11월 18일자, 「臨時政府領袖歡迎에 國內意見完全統一」. 24) 『自由新聞』 1945년 11월 9일자, 「臨時政府要人宿舍」. 25) 선우진 지음, 최기영 엮음, 『백범 선생과 함께한 나날들 ─ 백범 김구 비서 선우진 회고록』, 푸른역사, 2009, pp. 51~52. 26) 『自由新聞』 1945년 11월 15일자,「李承晩博士, 金九氏宿所될 곳 訪問」. 27) 尹致暎, 『尹致暎의 20世紀』, 삼성출판사, 1991, p. 162. 28) 曺惠子, 「人間李承晩의 새傳記(4)」, 『女性中央』 1983년 4월호, p. 363.
29) 『한국일보』 1975년 3월 18일자, 「人間李承晩百年(7)」. 30) 曺惠子, 앞의 글, pp. 362~363. 31) Hodge to MacArthur, Nov.2, 1945,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이하 FRUS) 1945, vol. Ⅵ, United States Government Printing Office, 1969, p. 1106. 32) 張俊翼, 『北韓人民軍隊史』, 瑞文堂, 1991, pp. 32~35, pp. 36~37. 33) Vincent to Vittrup, Nov.7, 1945, FRUS 1945, vol. Ⅵ, p. 1114. 34) 정병준, 「주한미군정의 ‘임시한국행정부’ 수립 구상과 독립촉성중앙협의회」, 『역사와 현실』 제19호, 역사비평사, 1996, pp. 147~148.
35) McCloy to Acheson, Nov.13, 1945, FRUS 1945, vol. Ⅵ, pp. 1123~1124. 36) Vincent to Acheson, Nov.16, 1945, FRUS 1945, vol. Ⅵ, p. 1127. 37) 在朝鮮美國陸軍司令部軍政廳,「指令 제19호」(1945. 10. 30). 38) 정진석, 『언론조선총독부』, 커뮤니케이션북스, 2005, pp. 277~316 및 김동선, 「해방직후 『매일신보』의 성격변화와 『서울신문』의 창간」, 『한국민족운동사연구』 63, 민족운동사학회, 2010. 6 참조. 39) 『自由新聞』 1945년 11월 13일자, 「?八度以南의 收穫 二千六百萬石」.
40) 『新朝鮮報』 1945년 11월 16~18일자, 「李博士放送要旨①②③」. 41) 『自由新聞』 1945년 11월 17일자, 「李博士每週放送」. 42) 『自由新聞』 1945년 11월 16일자, 「各黨行動全體委員 中央協議會에 協調」. 43) 『自由新聞』 1945년 11월 16일자,「日中央人民委員代表大會」. 44) 『新朝鮮報』 1945년 11월 17일자, 18일자, 19일자, 20일자, 「軍政의 現況과 將來(一)(二)(三)(四)」.
45) 戰史編纂委員會 編, 『韓國戰爭史(Ⅰ) 解放과 建軍』, 國防部, 1967, pp. 247~256 ; 韓鎔源, 『創軍』, 博英社, 1984, pp. 26~29. 46) 『中央新聞』 1945년 11월 14일자, 「金九氏歸國은 個人資格」. 47) 『自由新聞』 1945년 11월 20일자, 「臨時政府歸國은 個人的으로!」. 48) 尹致暎 및 尹錫五 證言, 孫世一, 『李承晩과 金九』, 一潮閣, 1970, p. 201.
49) Langdon to Byrnes, Nov.20, 1945, FRUS 1945, vol. Ⅵ, pp. 1131~1132. 50) 「獨立促成中央協議會中央執行委員會 第一回會議錄」, 『雩南李承晩文書 東文篇(十三) 建國期文書 1』, 延世大學校現代韓國學硏究所, 1998, p. 68.
51) 『解放日報』 1945년 11월 15일자, 「朝鮮勞動組合全國評議會結成」. 52) 『解放日報』 1945년 11월 24일자, 「全評의 行動綱領」. 53) 許憲의 報告, 『全國人民委員會代表者大會議事錄』, 全國人民委員會, 1946, pp. 78~81. 54) 「조선공산당중앙위원회 총비서 박헌영 동지와 미군정청장 아널드 소장의 회담」, 『이정박헌영전집(2)』, p. 86. 55) 「조선공산당중앙위원회 총비서 박헌영 동지와 미제24군사령관 하지 중장의 회담」, 『이정박헌영전집(2)』, p. 89.
56) 『全國人民委員會代表者大會議事錄』, p. 4. 57) 위의 책, pp. 54~55.
58) 『서울신문』 1945년 11월 23일자, 「過激한 思想은 有害」;『自由新聞』 1945년 11월 23일자, 「骨肉相爭을 避하라」;『新朝鮮報』 1945년 11월 23일자, 「共産黨과 나의 見解」. 59) 『新朝鮮報』1945년 11월 24일자,「共産黨統一 長安派云云解消」;『朝鮮人民報』1945년 11월 25일자,「社說:共産黨唯一化」;『解放日報』1945년 11월 29일자,「社說:反黨派解消에 對하야」.
呂運亨은 建國同盟을 朝鮮人民黨으로 개편하고 11월 12일에 천도교회관에서 결당식을 거행했다.
李承晩은 金九의 귀국을 기다려 獨促中協의 활동을 중지하고, 美軍政府의 활동을 적극 지원했다. 軍政府는 10월 30일에 「法令 제19호」로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11월 13일에는 「법령 제28호」로 군정청에 국방사령부를 설치했다. 그리고 본국정부에 대해서는 한국에 대한 信託統治 정책을 폐기할 것을 건의했다.
아널드 장군은 朴憲永에게 ‘人民共和國’을 ‘人民共和黨’으로 바꿀 것을 권했으나, 박헌영은 인민공화국은 “정치적 계몽운동을 하는 학교”라면서 하지의 요구를 거부했다.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가 열리고 있는 11월 21일에 李承晩은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나는 共産黨에 대하여 호감을 가진 사람”이라면서, “앞으로 우리 政府의 경제정책을 쓸 때에도 공산주의에서 채용할 점이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공산당의 독촉중협 탈퇴를 막기 위한 배려에서였다. 그러나 조선공산당의 李康國은 “李博士의 통일운동은 통일을 도리어 분열로 유도하였다”고 비판했다.
1. 人民共和國 主席職 취임 拒否

박헌영이 수정위원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것은 전날 회의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 공산당이 독촉중협에 참가한 것은 이승만의 “무조건 뭉치자”는 주장에 따라 정당통합운동이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함께 인민공화국을 만든 여운형 그룹도 이승만의 독촉중협 결성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헌영은 이날 별도로 기자회견을 갖고, “지금까지 우리는 이 박사 밑에서 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하려고 하였으나, 2일의 이 박사 결의문으로 보아 박사와 우리 사이에 커다란 정치의견의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였다”고 말하고, 일본제국주의 잔존세력을 철저히 구축하고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를 제거한 연후에 “진보적 민주주의 요소를 총망라하여” 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하고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통일된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조선공산당은 이승만의 「결의문」이 “조선민족 전체의 의사라고 볼 수 없는 문제를 취급하여 연합국의 그릇되지 않은 처치에 대하여서까지 질문 혹 논란하는” “경솔하기 짝이 없는” 것이라고 비판하고, 자신들의 입장과 요구사항을 밝히는 별도의 메시지 초안을 발표했다.4)
“親日派裁判은 政府수립 뒤에”
이승만은 11월 5일에 출입기자들과 정례회견을 가졌다. 이승만은 먼저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요인 30여명이 이날 중경을 출발하여 11월 10일 안으로 귀국할 것이라는 뉴스부터 전했다. 이승만은 그러나 임시정부가 정식으로 국제승인을 받지 않았으므로 김구도 ‘개인자격’으로 귀국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5)
이승만은 이어 “독촉중협은 3천만 민중이 하나가 되고 또는 한 입을 통하야 말하는 통일된 단체”라고 말하고, “이 단체의 결성에 공산당에서 협력해 준 데 대하야 깊이 감사한다”고 덧붙였다.6) 그러나 수정위원들의 모임에 박헌영이 참석하지 않은 것은 옳지 않다고 나무라면서, “공산당의 제의는 신중히 듣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공산당이 요구하는 핵심사안인 친일파와 민족반역자 배제문제에 대한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물론 친일파나 민족반역자는 일소하여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우선 우리의 힘을 뭉쳐 놓고 볼 일이다. 그러한 불순분자를 지금 당장 외국인의 손으로 처벌하여 주기를 우리는 원치 않는다. 우리의 강토를 찾아낸 후에 우리 손으로 재판해야 할 줄 믿는다.”
그러면서 그는 기자들에게 친일파 명단을 서면으로 작성해 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김구가 귀국하면 통합운동과 어떤 관계를 갖게 될 것 같으냐는 질문에는 “전폭적으로 손을 맞잡고 나가 줄 줄 믿는다”고 잘라 말했다. 그리고 인민공화국의 해체설이 떠도는데 무슨 정보를 들었느냐고 묻자 “내일 아침 방송에서 대답하겠다”고 말했다.7) 임시정부의 귀국이 임박한 시점에서 이승만은 인민공화국 주석문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혀야 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신문에는 이승만이 11월 6일 아침에 ‘중대방송’을 한다는 예고기사가 실리기도 했다.8)
『뉴욕타임스』는 金九의 役割에 기대
김구일행의 귀국에 대해서는 미국신문들도 관심을 기울였다. 이승만이 귀국한 직후에 행한 38도선 문제에 대한 주장에 지지를 표명함으로써 미국무부를 당혹스럽게 했던 『뉴욕타임스(The New York Times)』는 임시정부요인들이 중경을 떠난 이튿날인 11월 6일자에 다음과 같은 사설을 실었다.
“한국에서는 가장 최근의 집계로 43개를 헤아리는 정당 또는 정파 사이에 그들이 원하는 자주적인 한국의 정부 형태나 그 성격에 대해서는 물론 그 목표를 어떤 방법으로 달성할 것인지 합의하는 데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들은 나라가 미국과 소련의 점령지역으로 분할되고, 두 지역 사이에는 교류가 거의 없고, 점령군이 언제 철수할지에 대해서조차 아무런 약속을 받지 못한 채 한국인들은 정치적 공백상태에 빠졌다. 1919년에 서울에서 조직된 이래 중국에서 유지되어 온 한국임시정부의 70세 대통령[주석] 김구가 귀국하면 아마도 지금은 분명하지 않은 통합을 이루는데 어느 정도 기여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이 사설은 11월 4일에 중경에서 있었던 한국임시정부요인 송별회에서 장개석(蔣介石) 총통이 “전 동아시아 민족의 평화와 자유를 위하여 우리는 먼저 한국의 독립과 자유를 성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한국에 대한 국민당의 유일한 원칙이다”라고 한 말을 인용하면서, “우리는 그것이 또한 우리 정부와 소비에트 정부의 대한정책(對韓政策)의 첫 번째 원칙이기를 바란다”고 주장했다.9)
11월 6일 오전 7시로 예정되었던 이승만의 중대연설은 갑자기 연기되었다. 왜냐하면 이날 오후 2시에 명월관에서 열기로 한 이박사환영 청년단체대표회 간담회에 이승만이 참석하는 문제를 두고 주최쪽과 이승만의 비서진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조선해방청년동맹, 학병동맹, 조선노농청년동맹 등 26개 좌익계 청년단체들은 청년단체대표회를 구성하고 이날 이승만을 초청하여 간담회를 열기로 한 것이었다. 이승만이 불참하자 밤 11시반쯤에 대표 100여명이 돈암장으로 몰려가서 이승만이 이튿날 아침에 방송연설을 하기 전에 자신들의 ‘우국지정(憂國之情)의 진언’을 들어줄 것을 요청했으나 이승만은 이미 취침 중이라고 했다. 청년대표들은 이튿날 아침 이승만이 방송연설을 하기 전에 다시 돈암장으로 찾아가서 자신들의 결의문을 전달했다. 결의문은 이승만이 인민공화국 주석에 취임할 것을 촉구하면서, “만일 이를 거부할 경우에는 이 박사를 지도자로서 지지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민족통일전선 분열의 책임자로 인정한다”고 공언했다. 이들의 결의문은 또 임시정부요인들의 귀국을 환영한다고 말하면서도, 그러나 “이 선배 요인들도 인민공화국에 참가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지도자가 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10)
이승만은 드디어 11월 7일 오전 8시30분부터 25분 동안 서울중앙방송국의 라디오방송을 통하여 인민공화국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이승만은 먼저 “우리는 비상한 기회에 당면하였다. 한편 좋기도 하고 한편 까딱 잘못하면 위험도 한 기회다”라고 전제한 다음, “우리나라가 해방은 되었으나 아직도 국권을 회복하지 못한 것은 전혀 일본의 악선전에 의한 것”이었고, 이러한 악선전 때문에 신탁통치 주장까지 나오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승만은 신탁통치를 배격하고 하루라도 빨리 자주독립 국가로 만들기 위하여 “모든 정당이 한 단체를 이루어 자치의 능력이 있는 것을 보이기 위하여 공산당까지 한데 뭉치기로 결정하여 만든 것이 독촉중협”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인민공화국 주석으로는 취임할 수 없다며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
“그런데 내가 고국에 돌아와 보니 인민공화국이 조직되어 있고 나를 주석으로 선정하였다 하니, 나를 이만치 생각해 준 것은 감사하나 나는 그것을 공식으로나 비공식으로 무관계함을 알리려 하였으나, 각 인도자의 입장에 대해서도 생각할 점이 있고 노력하는 여러분을 생각하야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종래에 한국임시정부에 복종하야 김구씨를 옹호하야 온 터이니, 임시정부가 들어와서 정식 타협이 있기 전에는 다른 정부나 정당에는 이름을 줄 수 없다. … 정부는 하나이다. 군정부에서는 조선인민공화정당은 허락하나 국(國)의 명칭은 허락하지 않는다. 지금 조선의 정부는 군정청정부가 하나 있을 뿐이다. …”
이처럼 이승만은 인민공화국의 주석취임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인민공화국의 존재 자체를 부인한 다음, 독촉중협의 위상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는 정부도 아니고 정부의 대표기관도 아니다. 임시정부가 각국의 승인을 받는 국권을 회복할 때까지 각 정당이 대동단결하야 과도기적 일을 하자는 단체이다. 각 지방에서도 이와 같이 알고 모든 단체가 합하야 공동기관을 세우고 서울의 중앙협의회로 대표자를 파송하야 중앙에서 하는 것에 따라오기 바란다. …”
이승만은 이처럼 지방에서도 각 단체들이 합동하여 자발적으로 독촉중협에 참가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김구일행의 귀국 이야기를 덧붙였다.
“김구씨 이하 임시정부 각 요인이 수일내로 서울에 도착한다. 이 정부가 연합국의 정식 승인 없이 들어옴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전국이 대동단결하야 이 정부를 맞이하면 각국의 승인도 빨리 받을 것이다. 장개석씨는 나의 친구요 또 김구씨의 친구이다. 이 정부가 들어옴에 당하야 전국이 대환영할 줄 믿는다.”11)
이승만이 장개석과의 친분을 강조한 것은 11월 4일에 장개석이 김구일행을 위한 송별회를 베풀었고 그 자리에서 고무적인 연설을 했다는 사실이 국내 신문에도 크게 보도되었기 때문이다.
共産黨도 獨促中協을 脫退하지는 않아
이 방송에 대해 인민공화국 관계자들이 크게 반발하는 것은 당연했다. 인민공화국 국무총리 허헌(許憲)은 “이 박사가 취한 오늘의 태도는 민족통일전선 결성기운이 성숙해 가고 있는 현단계에 도리어 통일을 혼란에 빠지게 하고 말았다”고 주장하고, “이 박사의 주석취임 문제는 이로써 해소한다”고 선언했다.12) 또 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는 11월 9일에 이승만의 방송을 비난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담화는 “진정한 애국자, 민족지도자로서의 이 박사가 할 수 있는 통일운동은 혼란된 조선의 민족진영을 정리하고 진보적 민주주의 요소를 결집하여 민족통일전선을 더욱더 광범 확고케 함으로써만 조선독립 완성에 기여할 수 있었던” 것인데 “모략분자에게 둘러싸여 가지고” 그러지 못했고, 그리하여 11월 2일에 천도교회관에서 있었던 회합은 “비민주주의적인 것이요 그 의사진행이 모략적, 편당적인 결과가 되고 말았다”고 힐난했다. 그리고 인민공화국 주석취임을 거부하기까지의 모든 태도를 종합하여 “이제부터는 그를 초당파인으로 취급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13) 그러나 그것은 조선공산당의 독촉중협 탈퇴를 표명한 것은 아니었다. 미군정부로부터 ‘국’ 대신에 ‘당’이라는 호칭을 사용할 것을 종용받고 있는 입장에서 주석 취임을 거부한다는 이유만으로 이승만의 국민적인 명성을 완전히 배척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중앙인민위원회의 성명이 있고 이틀 뒤인 11월 11일에 인민공화국의 선전부장이자 조선공산당 중앙위원인 이관술(李觀述)이 “우리는 모든 반동, 모든 비민주주의적 책동, 모든 민족분열적 음모를 분쇄하면서 민족통일전선을 결성시키려고 고심분투해 왔다”고 전제하고, “그러므로 민족통일을 주장하는 중앙협의회에 적극적으로 참가한다”14)고 말하고 있는 것이 그러한 사정을 말해 준다.
여운형은 건국준비위원회 때부터 자신의 직계 조직이었던 건국동맹(建國同盟)을 10월 10일에 정당조직으로 개편하여 운영하고 있었는데, 건국동맹은 11월 2일에 임시총회를 열고 당명을 조선인민당(朝鮮人民黨)으로 개칭했다. 조선인민당은 11월 4일에는 중앙위원회를 열고 독촉중협 참가단체의 성격을 심사할 것과 38도 이북의 지방정당 대표와 도행정위원장을 참가시키도록 요청할 것을 결의하는 등으로 독촉중협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고 있었다. 조선인민당은 이어 고려국민동맹(高麗國民同盟), 십오회(十五會), 인민동지회(人民同志會) 등의 군소정치단체를 통합하여 11월 12일 오후에 천도교회관 강당에서 성대한 결당식을 거행했다.
조선인민당의 성격은 이날의 결당식에서 발표된 「선언」에 잘 표명되어 있다. 「선언」은 “조선인민당은 근로대중을 중심으로 한 전 민족의 완전한 해방을 그 기본이념으로 하며, 조선의 완전독립과 민주주의 국가의 실현을 그 현실적인 과제로 한다”라고 천명하고, “기본이념을 등한시하고 현실적 요청에만 얽매여 있는 것이 역사의 진전을 지연시키는 행위라면, 기본이념에만 급급하야 그 현실적 과제를 무시하는 것도 역사의 발전을 지연시키는 동일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라고 하여 중도노선의 정당성격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조선인민당의 「강령」은 (1) 조선민족의 총역량을 집결하야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의 건설을 기함. (2) 계획경제제도를 확립하야 전 민족의 완전해방을 기함. (3) 진보적 민족문화를 건설하야 전 인류문화 향상에 공헌함을 기함이라는 3개 항이었다.15) 조선공산당이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를 뜻하는 ‘진보적 민주주의’를 표방한 데 비하여 인민당이 ‘진정한 민주주의’를 표방한 것은 공산당과의 차별성을 나타내고자 한 고충을 짐작하게 한다. ‘진보적’이라는 용어는 (3)항에서 사용되었다.
위원장 여운형은 개회사에서 이 세 가지 「강령」과 국민개로(國民皆勞), 국민개병(國民皆兵), 상호신양(相互信讓), 공공협동(公共協同), 일치단결의 다섯 가지 윤리가 조선인민당의 삼강오륜(三綱五倫)이라고 그 특유의 레토릭을 구사하면서 열변을 토했다.16) 위의 「선언」이나 「강령」보다도 인민당 총무부에서 발행한 “당의 성격을 정확히 파악하자”라는 글이 조선인민당의 입장을 한결 실감나게 설명해 준다.
“한국민주당이 자산계급을 대표한 계급당이요 조선공산당이 무산계급을 대표한 계급당임에 비하야 우리 당은 반동분자만을 제외하고 노동자, 농민, 소시민, 자본가, 지주까지 포괄한 전 인민을 대표한 대중정당인 것이다. 그러므로 형식상으로 보아 좌익중간당이라고 할 수 있으니, 현실과업 수행과정에서는 가장 전위적이라는 것을 명념(銘念)해야 한다. 항간에서 반동분자의 고의로, 혹은 무지로 우리 당을 공산당의 한 외곽단체처럼 혼선시키려는 경향이 있으나, 이것은 천만부당한 낭설이다. 다만 조선의 실정을 정확히 파악한 공산당이 우리 인민당 노선으로 접근하면서 동일한 보조를 취하고 있으므로 우리와 우의적 관계를 가지고 있을 따름이다. …”17)
그러나 이렇게 출범한 조선인민당이 결국 조선공산당에 통합되어 남조선노동당을 결성하는 것은 뒤에서 보는 바와 같다.
左傾 지식인들도 李承晩을 대통령 적격자로
독촉중협의 결성을 전후한 시기의 이승만의 명성이 어느 정도였는가는 선구회(先驅會)라는 한 중도파 단체가 실시한 여론조사에 잘 나타나 있다. 선구회는 10월 10일부터 11월 9일까지 한 달 동안 각 정당, 언론기관, 문화단체, 학교 등 105개 단체의 종사자들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실시했는데, 그것은 8·15 해방 이후에 처음으로 실시된 비교적 큰 규모의 여론조사였다. 설문의 내용은 1) 양심적인 지도자 2) 희망하는 정부조직 형태 3) 내각 후보 4) 과거 혁명가의 4개 항이었고, 설문지는 1,957장이 배부되어 설문에 따라 626장(회수율 32%), 978장(50%)이 회수되었다. 양심적인 지도자는 여운형 33%, 이승만 21%, 김구 18%, 박헌영 16%, 이관술 12%, 김일성(金日成) 9%의 순위였고, 과거의 대표적 조선 혁명가로는 여운형 195, 이승만 176, 박헌영 168, 김구 156, 허헌 78, 김일성 72, 안재홍 59, 김규식(金奎植) 52의 순위로 나타났다. 그러나 대통령 후보로는 이승만 431, 김구 293, 여운형 78, 무응답 176으로서, 압도적 다수가 이승만을 꼽았다. 다른 내각후보로는 내무부장에 김구 195, 여운형 118, 안재홍 59, 허헌 58의 차례로, 외무부장은 여운형 274, 이승만 137, 김규식 58, 김구 55의 차례로, 재무부장은 조만식(曺晩植) 176, 김성수(金性洙) 98, 정태식(鄭泰植) 39, 김규식 37의 차례로, 군무부장은 김일성 309, 김원봉(金元鳳) 98, 이청천(李靑天) 78, 김규식 27, 사법부장은 허헌 371, 김병로(金炳魯) 58, 최동오(崔東旿) 52, 이강국(李康國) 42의 차례로, 문교부장은 안재홍 275, 김성수 68, 노동부장은 박헌영 371, 여운형 38로 나타났다. 그리고 ‘인민공화국 부서 그대로’라는 응답이 152, ‘임시정부 부서 그대로’가 52였다.18)
좌경적 성향이 강했던 당시의 지식인층에서 이승만을 대통령 적임자로 생각하는 응답자가 이처럼 많았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일반국민들은 그러한 성향이 훨씬 더 강했을 것이다.19)
金九의 귀국 기다려 獨促中協 활동 보류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요인들의 귀국뉴스가 전해지자 국민들은 다시 한번 흥분의 도가니에 싸였다. 이승만은 김구일행이 귀국할 때까지 독촉중협의 활동을 중지하기로 하고, 11월 2일의 천도교회관 회의에서 위임받은 전형위원 7명의 선정작업도 보류했다.20) 그것은 김구를 독촉중협에 참여시키기 위한 배려에서였다. 그는 독촉중협과 김구가 앞으로 어떤 관계를 가지게 될 것이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나로서는 단언할 수 없으나 물론 그 취지에는 찬성할 줄 믿는다”라고 신중하게 대답했다.21)
임시정부 환영준비 분위기는 요란했다. 11월 9일에는 김석황(金錫璜), 김하선(金河善) 등을 중심으로 한 한국독립당계 인사들이 임시정부영수환국 전국환영대회를 개최하기로 하고, 그 준비기구로 김석황 자신이 위원장이 되고 좌우익을 망라한 각 정당대표와 각계 인사 50명으로 구성된 영접부를 비롯하여 경호부, 교섭부, 보도부, 재무부, 정보부 등의 부서에 참여할 300명 가량의 방대한 명단을 발표했다. 이들은 그러면서 환영방법은 “임시정부를 공식으로 맞아들이느냐 또는 이승만 박사 때와 같이 비공식으로 하느냐 하는 근본문제에 대하여 군정당국과 절충 중”이라고 했다.22)
임시정부요인들의 귀국이 늦어지면서 경쟁적으로 환영행사를 준비하느라고 마찰을 빚기까지 하던 준비단체 대표들은 여러 차례 접촉한 끝에 11월 16일에 동본사(東本社) 강당에서 송진우(宋鎭禹), 백관수(白寬洙), 김준연(金俊淵) 등 해외지도자영접위원회 인사들과 김석황, 김하선 등 임시정부영수환국 전국환영회 인사들이 회합을 갖고 후자의 이름으로 통합하기로 합의했다.23)
임시정부 특파사무국에서는 임시정부요인들의 귀국보도가 있자 숙사 물색을 서둘러 11월 8일에는 운니동의 운현궁(雲峴宮)과 서대문에 있는 광산왕 최창학(崔昌學)의 집 등 여덟 곳으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24) 그러나 최종적으로 최창학의 대리석 2층 집이 김구일행의 숙사로 결정되고, 뒤에 도착한 요인들은 충무로에 있는 한미(韓美)호텔에 임시로 묵었다가 뒤에 운현궁으로 옮겼다. 최창학을 설득한 것은 평소에 그와 교분이 있던 김석황이었다.25)
이승만은 11월 13일 오후에 최창학의 집에 가서 방과 설비를 둘러보고 “이만하면 김구선생의 숙소로 손색이 없다”고 말했다.26)
敦岩莊 찾아온 朴氏부인
이 무렵의 어느날 이승만의 마음속 깊이 잠재해 있는 아련한 상처를 자극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33년 전에 두 번째로 고국을 떠나면서 사실상의 합의이혼을 하고 헤어졌던 박씨부인이 돈암장을 찾아온 것이다. 이때의 일을 윤치영(尹致暎)은 “그 노부인은 인품으로나 언사에서 바로 짐작되는 데가 있어서” 이승만에게 안내했고, “나로서는 두 분의 만남을 지켜보며 남다른 인정의 기미를 헤아려 서로 간에 예절이나 태도에서 느낀 바가 많았다”고 회고했다. 이승만은 윤치영으로 하여금 박씨부인을 정중하고 후하게 대접하여 보내게 했다. 그리고 그 뒤로 소식이 끊겼다. 윤치영은 “이 박사는 기구한 운명으로 맺어졌던 이 부인에게 인간적인 성의와 대우를 다한 것이었고, 그 부인 역시 스스로 공인으로서의 이 박사 입장을 세워 주는 미덕을 보여주었다는 생각이다”라고 적어 놓았다.27)
오달진 성품으로 생활력이 강했던 박씨부인은 유식하고 세련된 신여성이 되어 황해도에서 전도생활로 세월을 보내다가 해방이 되자 38선을 넘어와서 인천에서 양자 은수(恩秀)와 함께 살고 있었다.28) 이때까지 이승만의 호적은 창신동 625번지의 옛집으로 등재되어 있었다. 이승만이 두 번째로 출국한 뒤 조선총독부에서 호적정리를 할 때에 박씨부인이 박승선(朴承善)이라고 남편과 시아버지의 이름자 한 자씩을 따서 지은 이름으로 신고했을 이 호적에는 ‘처 박승선’, ‘장남 이은수(李恩秀)’로 기재되어 있었다. 이은수는 물론 이승만과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이 호적은 1947년에 처(妻)의 관계 및 친자관계 부존재 확인 판결과 이승만의 이화동 이적에 따라 말소되었다.29)
6·25전쟁이 터지고 9·28수복이 되자 이승만은 경무대 경찰서장 남태우(南泰祐)에게 박승선의 생사와 거처를 알아보게 했다. 그러나 이때는 박승선이 피란처에서 공산군에게 피살당한 뒤였다고 한다.30)
2. 美軍政府와 國務部의 알력
하지(John R. Hodge) 장군은 11월 2일에 도쿄(東京)의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에게 한국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이 심각한 국면에 이르렀음을 보고하는 전보를 쳤다. 하지는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이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그들이 지배권을 장악할지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말하고, “대부분의 과격분자들이 소련의 사주를 받고 있는 것이 틀림없으나, 확실한 증거를 포착할 수 없다”고 했다. 하지는 또 한국인들은 기본적으로 공산주의를 지지하거나 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대다수는 실제로 민족주의자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했다.
공산주의자들의 모든 행동이 잘 훈련된 외부전문가 그룹의 선동을 받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데, “가능하면 실질적인 강경조치는 피하려고 하나, 부득이 그러한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게 될지 모른다”고 고충을 털어놓았다. 하지는 다음과 같은 [추신]을 덧붙였다.
“이곳에서 알려진 정보로는 소련인들은 38도선 이북에 일본군의 무기로 무장한 한국인 군대를 편성하고 있다는 심증을 굳게 한다.”31)
하지 장군이 [추신]에서 언급한 내용은 사실이었다. 8·15와 함께 북한에서는 조만식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 세력의 무장대인 자위대(自衛隊), 지하운동을 하던 현준혁(玄俊赫), 오기섭(吳琪燮), 장시우(張時雨) 등 국내 공산주의자들이 조직한 치안대(治安隊), 그리고 김일성 그룹이 귀국한 뒤에 조직한 적위대(赤衛隊)의 세 무장그룹이 주도권 장악을 위한 경쟁을 벌였다. 그러나 소련군 사령관 치스차코프(Ivan H. Chistiakov) 대장은 10월 12일에 발표한 「소련 제25군 사령관의 명령서」를 통하여 모든 무장단체를 해산시키고, 이 세 단체원 가운데에서 2,000명을 선발하여 10월 21일에 진남포에 보안대(保安隊)를 창설했다. 이어 북한 6개 도(道)에는 도 보안대가 설치되었다.32) 하지가 입수한 북한의 동향은 이러한 상황을 말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國務部의 주장을 戰爭部가 반박
맥아더는 11월 5일에 하지의 이 11월 2일자 전문과 독촉중협 발족과 관련하여 보낸 11월 5일자 전문을 마셜(George C. Marshall) 참모총장에게 타전했고, 마셜은 그것을 국무부에 전했다. 국무부는 당황했다. 하지의 제안은 4대국 공동관리에 의한 신탁통치라는 국무부의 대한정책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국무부의 정책은 소련의 전폭적인 협조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빈센트(John C. Vincent) 극동국장은 11월 7일에 전쟁부[육군부]의 연락장교 비트럽(Russel L. Vittrup) 대령에게 하지의 제안에 대한 국무부의 견해를 적은 메모랜덤을 보냈다. 빈센트는 먼저 하지 장군의 11월 2일자 전문은 용납할 수 없는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에 대하여 충분히 설명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군사적인 견지에서 자기가 취할지 모를 조치내용도 적시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또한 빈센트는 미국정부나 주한미군사령관이 김구 그룹과 같은 특정한 한국인 그룹이나 이승만과 같은 특정한 한국인 개인을 다른 한국인들에 반하여 미국인들이 지지한다는 인상을 줄 만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 미국정부가 견지해 온 일관된 정책임을 강조했다. 그런데 하지가 제안한 것과 같은 조치는 군정부가 당면한 정치적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소련군사령관으로 하여금 자기지역 안에 있는 비슷한 그룹을 지원하게 하여 통일한국의 건설을 지연시킬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33)
그러자 전쟁부 차관보 맥클로이(John J. McCloy)가 11월 13일에 국무차관 애치슨(Dean Acheson) 앞으로 보낸 편지를 통하여 빈센트의 주장을 반박하고 나섰다. 맥클로이는 참모들을 대동하고 6주 동안 세계를 순방했는데, 마지막 기착지가 도쿄였다. 그는 도쿄에 머무는 동안 빈센트의 신탁통치 발언 파문으로 급히 도쿄를 방문한 하지를 장시간 만났다.34) 맥클로이는 먼저 번즈(James Byrnes) 국무장관, 애치슨 차관, 그리고 빈센트 국장과 함께 한국상황에 대하여 토론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빈센트의 메모랜덤은 “우리가 한국에서 당면하고 있는 참으로 긴급한 현실을 외면하려는 것”이라고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그는 하지가 거의 모든 한국인들이 ‘망명 한국인들’에 대하여 큰 존경과 신뢰를 하고 있고 미군이 진주할 때에 왜 중경의 ‘망명정부’와 김구 및 그 동료들을 같이 데리고 오지 않았는지 이상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고 했다. 맥클로이는 또 “하지 장군은 이승만 박사를 상당히 중시하고 있으며, 그가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고 적었다. “그는 공산주의 지도자들과 협상하는 데 이 박사를 활용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맥클로이는 “우리는 하지에게 모든 방법으로 공산주의 문제에 대한 더 많은 정보와 그들이 우리의 목표를 파괴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에 대한 그의 의견을 제시하게 하는 동시에 그로 하여금 너무 지나치지 않은 범위에서 그가 할 수 있는 한 많은 망명 한국인을 활용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못 박았다.35)
이러한 맥클로이의 반박을 받은 빈센트는 11월 16일에 애치슨 차관에게 메모랜덤을 제출했다. 이 메모랜덤에서 빈센트는 (1) 국무부는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가 우리 정부의 공식정책이라는 사실을 하지 장군이 확실하게 공식으로 통보받기를 바라고, (2) 임시정부의 관리들이 임용되는 것은 임시정부와의 관계 때문이 아니라 그들 개인의 능력 때문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게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그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해명했다.36)
美軍政府의 「國家非常事態宣言」 도와
김구일행의 귀국을 기다리는 동안 이승만은 미군정부의 시책에 적극 협조했다. 군정청은 10월 30일에 「법령 제19호」로 「국가비상사태선언(Declaration of National Emergency)」을 포고하고, (1) 노동쟁의조정을 위한 조정위원회의 설치 (2) 암시장의 단속 (3) 안녕질서의 확보 (4) 신문사의 등록제 실시를 공표했다.37) 그리고 11월 10일에는 『매일신보(每日新報)』를 정간시켰다.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였던 『매일신보』는 8·15해방 이후 종업원자치위원회에 의하여 운영되고 있었다. 10월 2일에 『매일신보』의 재산을 접수한 미군정부는 한국인 주주들에게 주주총회를 소집하여 경영진을 새로 구성하게 했다. 좌우파를 망라하여 새로 구성된 경영진은 3·1운동 때에 민족대표의 한 사람이었던 오세창(吳世昌)을 사장으로 추대하고 제호를 『서울신문』으로 바꾸어 11월 23일부터 신문을 속간했다.38) 이와 함께 『조선일보(朝鮮日報)』도 『서울신문』의 시설을 이용하여 11월 23일에 복간되고, 『동아일보(東亞日報)』도 조선총독부의 일본어 기관지 『게이조(京城)일보』의 시설을 이용하여 12월 1일에 복간되었다. 그리하여 민족주의 정파들은 비로소 비슷한 성향의 신문을 갖게 되었다.
겨울철을 앞두고 가장 긴급한 민생문제는 연료와 식량을 확보하는 문제였다. 이승만은 11월 12일의 정례기자회견에서 석탄 및 양곡문제와 관련하여 국민의 협조를 당부했다. 그는 채탄작업이 가장 긴급한 문제인데, 조선인 가운데에는 기술자가 없어서 부득이 일본인 기술자를 쓰지 않을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조선인 직원들의 반대가 있어서 딜레마에 빠져 있다고 말했다. 이승만은 임진왜란 때에 일본인들이 우수한 조선인 기술자들을 데려다가 사역시킨 일을 사쓰마야키(薩摩燒)의 유래를 들어 설명하고, 또 소련에서 2차대전 때에 파괴된 시설을 복구시키는 데 많은 독일인을 사역시키고 있는 사실을 보기로 들면서, “필요하지 않은 일본인은 빨리 퇴거시키되, 필요한 최소한의 일본 기술요원은 잡아 두어서 실컷 부리고” 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금년은 풍년이 들어서 450만석의 잉여양곡이 생길 것이라고 말하고, 이것을 일본에 팔아서 건국에 필요한 물자를 사오려는 것이 군정부당국의 생각인데, 농가에서 양곡시세가 오르기를 바라 팔지 않는 경향이 있다면서, “동포애를 발휘하여 되도록 군정부당국의 지시와 요망에 응하여 필요한 소비량을 제하고는 팔기 바란다”고 설득했다.39)
“資本과 勞動이 平均히 利益 누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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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軍政府가 발표한 “軍政의 現在와 將來”를 크게 보도한 신문 지면. |
“지금 군정부에서 모든 일본인의 토지와 부동산을 봉쇄해 두었으니 일후에 우리 정부에서 법으로 안정(安定)하고 각 농민에게 상당하게 분배하야 연기(年期)를 한하고 경작하게 될 것이다. 공업을 권려하되 법률로 결정하야 자본과 노동이 평균히 이익을 누리게 하고 국가의 부강을 도모하게 하려 한다.”40)
이승만의 방송은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졌던 것 같다. 11월 14일은 수요일이었는데, 미군정부는 이때부터 이승만으로 하여금 매주 수요일 저녁에 서울중앙방송국에서 라디오 연설을 하도록 했다.41)
美軍政府는 다시 「朝鮮政府의 計劃과 政策」 聲明
이승만이 김구의 도착을 기다려 독촉중협의 활동을 중지하고 있는 동안에도 정국은 부산하게 움직였다. 각정당행동통일위원회는 11월 14일 오후에 천도교회관에서 장안파공산당을 비롯한 30여개 정치단체 대표자들이 모여 이갑성을 의장으로 한 임시전체위원회를 열었다. 의제는 위원회해체 문제와 각정당통합 문제 두 가지였다. 토의결과 위원회해체 문제는 이승만 중심의 독촉중협이 그 목적을 완성할 때까지 이에 협조하기 위하여 보류하기로 하고, 정당통합 문제는 각 정당의 의견이 일치되지 못한 채 산회했다.42)
같은 날 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는 11월 20일부터 서울에서 전국인민위원회 대표대회를 개최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면서 이 회의를 위해 각 지방에서도 지방정세보고, 자료수집, 의안제출 등의 준비를 진행하고 있고, 또 이미 발표한 대로 46년 3월 1일에 제2차 인민대표자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라고 했다.43)
이러한 상황에서 미군정부는 11월 16일에 「조선정부의 계획과 정책」이라는 장문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 문서는 (1) 조선군정의 일반원칙과 정책 (2) 조선정부수립에 관한 일반문제 (3) 전반적 정부[관리]교체 계획 (4) 중앙정부 (5) 지방청[도청] (6) 조선경제상태 (7) 장래의 계획 (8) 각자가 자기의 정부를 위하여 할 수 있는 사항이라는 8개 항에 걸쳐 군정부의 시정현황과 앞으로의 계획을 일반국민들에게 홍보하는 내용이었다. 이를테면 (7)항은 “군정청 지도하에 우수하고 안정된 조선정부가 수립된 뒤에는 두 가지 중요한 시책을 쓸 것이다”라면서 다음의 두 가지를 들었다.
“그 하나는 미국의 원조를 받을 목적으로 조선과 미국 간에 긴밀한 민간관계를 형성한다. 이 계획 중에는 재정적 원조[차관], 농공업의 원료, 기계공구, 의약품과 의료시설의 지원과 모든 교육부문에서의 학생과 교수의 교환 등의 문제를 포함함은 물론이요 조선의 기술자, 의사, 법률가, 상업전문가 및 그밖의 부문에 필요한 인재의 양성을 위하여 미국인 전문가를 조선으로 초청하는 계획도 포함된다. …”
두 번째는 다음과 같은 매우 함축적인 내용이었다.
“제2는, 그리고 최후의 정책은 군정하의 조선정부를 어떻게 참된 조선인의 민주주의 정부로 전환[발전]시키느냐 하는 문제다. 이 계획은 조선의 민주주의 달성을 위한 조선인의 계획이라야 하고, 또 조선의 지도자는 그러한 목적을 위하여 이미 활동을 개시하고 있다.”44)
이 문서가 “이미 활동을 개시하고 있다”고 한 조선의 지도자란 이승만과 독촉중협 주동자들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軍政府에 國防司令部 설치
이 시기에 미군정부가 실시한 조치 가운데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한국군대 창설을 위한 정부기구를 설치한 것이었다. 군정청은 11월 13일에 「법령 제28호」로 군정청에 국방사령부(Office of the Director of National Defence)를 설치하고(제1조), 조선총독부 군무국을 군정청기구로 창설하며, 군무국 안에 육군부와 해군부를 설치하기로 했다(제2조). 그리고 어떠한 개인이나 단체도 국방사령관의 인가 없이는 군무국의 관할에 속하는 행동을 할 수 없게 했다(제3조). 그것은 8·15해방 이후에 다양한 군경력에 따라 자연발생적으로 결성되어 있는 사설 군사단체들을 정리하여 한국의 독립에 필요한 군사력을 양성하는 동시에 당면해서는 치안유지를 위한 경찰업무를 보조하게 하자는 취지에서 고안된 것이었다. 11월 현재 남한에는 이응준(李應俊), 김석원(金錫源) 등 일본육사 출신들을 중심으로 8월 말에 결성된 조선임시군사위원회와 그 산하의 치안대총사령부, 학도지원병 출신들이 9월 1일에 결성한 학병동맹(學兵同盟), 건국준비위원회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9월 7일에 조직된 조선국군준비대(朝鮮國軍準備隊), 독립군 출신의 오광선(吳光鮮)이 광복군 총사령 이청천과 연락하며 11월 6일에 결성한 광복군 국내지대(光復軍國內支隊) 등을 비롯하여 군정청에 등록된 단체만도 30개에 이를 정도로 난립해 있었다.45) 거기에 위에서 본 것과 같은 북한의 무장단체 해산 조치와 보안대 창설 사실도 자극이 되었을 것이다.
“臨時政府歡迎 소동은 그만두어야”
상해에 머물고 있던 김구일행의 귀국은 지연되고 있었다. 아널드(Archibald V. Arnold) 군정장관은 11월 13일의 기자회견에서 김구가 어떤 자격으로 귀국하며 언제 귀국하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김구씨는 이승만 박사와 마찬가지로 개인자격으로 입국한다. 김구씨가 다년간 조선독립을 위하여 굳세게 싸워 왔고 또 귀국하면 모국의 발전을 위하여 노력할 것이므로 김구씨 일행의 귀국을 환영하는 바이다. 그러나 언제 귀국할는지는 아직 확실히 알 수 없다.”46)
한편 이승만은 11월 19일 정례기자회견에서 김구일행의 귀국과 관련하여 몇 가지 뼈 있는 말을 했다. 그는 먼저 “중경임시정부의 귀국문제로 소란한 모양이나 하지 중장에게 반드시 연락이 있을 터이고 나도 알게 될 터이므로 책임있는 발표가 있을 때까지 환영소동은 그만두어야 할 것이다”라고 일침을 가했다. 중경임시정부가 귀국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기자들의 질문에는 “그분들은 단체로 귀국하려고 하고 군정부 당국은 개인으로 두서너 분씩 오는 것을 원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임시정부요인들은 정부로 인정하기를 요구하고 있지 않느냐고 기자들이 다그쳐 묻자 그는 “이곳 군정부 당국은 정책을 결정할 권리는 없다. 미국무부 또는 국제적 협의 없이는 중경임시정부를 인정하고 안하는 결정은 못 짓는다”라고 잘라 말했다.47) 이처럼 임시정부요인들을 미국무부의 방침에 따라 개인자격으로 귀국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고, 그나마도 하지 장군과 이승만은 몇 사람씩 나누어서 귀국시키려 했던 것이다. 그것은 김구 직계만을 반대파들과 분리하여 먼저 귀국시키려고 했기 때문이다. 윤치영과 윤석오(尹錫五)는 임시정부요인들이 귀국하기 전에 이승만과 송진우는 인민공화국을 타도하기 위하여 임시정부 정통론을 적극적으로 내세우되 일단 귀국하여 정국이 다소 질서가 잡히고 나면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이 독립정부 수립을 기해야 한다는 데 합의하고 있었다고 증언했다.48)
信託統治 창안자 랭던이 信託統治 폐기 건의
이 시기의 미군정부의 한국문제 처리구상은 11월 20일에 하지 장군의 정치고문대리 랭던(William Langdon)이 번즈 국무장관에게 보낸 전문에 구체적으로 표명되어 있다. 1930년대 초반에 서울주재 미국영사로 근무했던 랭던은 전후 대한정책과 관련하여 신탁통치 방안을 창안한 장본인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月刊朝鮮』 2007년 6월호, 「美-日戰爭으로 슬픔의 눈물은 끝났다!」참조). 그는 하지의 정치고문 베닝호프(H. Merrell Benninghoff)가 업무협의를 위해 귀국한 직후인 10월 20일에 베닝호프의 대리로 서울에 도착했다.
랭던은 전문에서 먼저 “해방된 한국에서 한달 동안 관찰하고 또 그 이전에 한국에서 근무한 경험에 비추어, 신탁통치를 이곳의 현실적 조건에 적용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나 현실적 관점에서 타당하다고 확신할 수 없으며, 따라서 우리는 그 안을 폐기해야 한다고 믿는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미군정부가 본국정부의 기본정책인 신탁통치안을 폐기할 것을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건의한 것이었다.
랭던은 이어 “김구그룹은 해방된 한국의 최초의 정부로서 경쟁상대가 없고 모든 정파나 정당들이 준합법적(quasi-legitimate)으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이 중경임시정부와의 접촉을 경계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그러고는 “김구에 대한 높은 평가는 미국으로 하여금 한국인들의 비난이나 원망을 살 염려가 없는 건설적인 대한정책을 시도할 기회를 제공한다”면서 다음과 같은 과정의 정책을 시행할 것을 건의했다.
(1) 미군사령관은 김구에게 군정부 안에 몇몇 정치그룹을 대표하는 협의회(council)를 구성하여 한국의 정부형태를 연구하고 준비하게 하며, 정무위원회(Governing Commission)를 조직하게 한다. 군정부는 이 위원회에 여러 가지 편의와 조언과 운영자금을 제공한다.
(2) 정무위원회를 현재 전 한국의 조직으로 급속히 수립되고 있는 군정부와 통합시킨다.
(3) 정무위원회는 과도정부로서 군정부를 계승하며, 사령관은 거부권과 함께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미국인 감독과 고문의 임명권을 갖는다.
(4) 다른 관계 3국(영국, 중국, 소련)에 대하여 정무위원회에 미국인을 대신할 약간의 감독과 고문을 파견하도록 요청한다.
(5) 정무위원회는 국가수반을 선거한다.
(6) 선출된 국가수반에 의하여 구성된 정부는 외국의 승인을 얻으며, 조약을 체결하고 외교사절을 파견한다. 그리고 한국은 국제연합기구(UNO)에 가입한다.
[주] 이러한 과정의 어느 단계에서, 아마도 (4)와 (5)의 중간쯤에서, 소련과 상호 철군과 정무위원회의 권한을 소련지역으로까지 확장하는 데 관한 협정을 맺는다. 위의 계획은 사전에 소련에 통고해야 하며, 협의회가 정무위원으로 지명한 소련지역내 인사들이 서울에 오는 것을 소련이 허락함으로써 이 계획이 더욱 진전되도록 소련의 협조를 촉구해야 한다. 그러나 만일 소련의 참여가 실현되지 않더라도 이 계획은 38도 이남의 한국에서 실시되어야 한다.49)
미군정부는 김구의 인기가 고조되고 있는 분위기를 이용하여 신탁통치안을 포기하는 동시에 지금까지의 몇 가지 구상보다 한결 구체화된 정무위원회라는 기구의 설치를 제안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물론 하지가 11월 5일에 맥아더에게 보낸 전문에서 보듯이, 이승만이 추진하는 독촉중협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하지 장군이나 랭던은 이승만과 김구의 연대를 확신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군정부가 “이 중앙협의회를 국정회의(國政會議) 또는 국무회의(國務會議)의 명의로 모아 …” 운영할 것을 생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50) 그리고 그것은 남한만의 단독적인 기구나 정부수립을 상정한 것이 아니었음은 위의 랭던 건의문의 [주]의 설명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3. “나는 共産黨에 대하여 好感을 가진 사람”
모든 정파가 참가한 한국 국민의 “책임있는 기관”으로 발족한 독촉중협이 랭던이 말하는 정무위원회 같은 기관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인민공화국의 존재가 정리되어야 했다. 10월 10일에 아널드 군정장관이 모멸적인 성명으로 인민공화국을 부인한 이후 군정부는 여러 통로를 통하여 인민공화국의 해체를 종용하고 있었다.
11월 20일부터 사흘 동안 개최된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에서 행한 인민공화국 국무총리 허헌의 설명에 따르면 그동안의 경위는 다음과 같았다.
대표적인 교섭통로는 인민공화국 부주석 여운형이었다. 여운형은 군정청의 연락을 받고 10월 28일에 아널드 군정장관을 방문했다. 아널드는 여운형에게 “한 나라에는 두 정부가 있을 수 없다. 조선의 독립은 약속되어 있으나 아직 조선의 통치는 군정부가 하고 있다. 인민공화국의 명칭은 취소하라”는 공문을 수교했다. 그것은 인민공화국 인사들에게 청천벽력이었다. 급히 소집된 관계자들의 회의에서 토의한 결과 국제법상으로 군정관리하에 정부가 있을 수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것은 물론 견강부회였다. 여운형은 이튿날 군정청을 방문하여 설득하려고 했으나 허사였다. 군정청은 인민공화국의 ‘국(國)’자를 ‘당(黨)’자로 바꾸어 인민공화당으로 만들라고 권고했다. 군정청과 여운형의 실랑이는 1주일 넘게 계속되었다.
共産黨의 외곽단체로 全國勞動組合評議會 결성
공산주의자들의 힘은 조직력이다. 8·15해방과 더불어 서울과 인천을 비롯한 전국에 직장단위 노동조합이 조직되고 있었는데, 공산당은 그것을 산업별 노동조합으로 정비하고 전국 규모로 통합하는 작업을 일찍부터 벌여 왔다. 그리하여 9월 26일에는 10개의 산업별 노동조합 대표 51명이 모여 전국적인 조직을 결성하기 위한 준비회의를 열었고, 뒤이어 11월 5일, 6일 이틀 동안 서울의 중앙극장에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朝鮮勞動組合全國評議會: 이하 全評) 결성대회를 개최했다. 회의에는 금속, 철도, 통신, 토건, 전기, 어업, 섬유, 식료품, 조선, 광업, 출판 등의 산업별 노동조합 대표 505명이 참가했는데, 이들은 남북 40여개 지방 50여만명의 노동자 대표라고 했다. 대회는 먼저 “조선무산계급의 수령이요 애국자”인 박헌영과 “해외에서 자주독립을 위하여 싸워 준” 김일성을 비롯한 소련, 미국, 영국, 프랑스의 노동조합 비서와 중국의 모택동(毛澤東)을 명예의장으로 추대했다. 대회는 이어 긴급동의로 (1) 조선무산계급의 수령 박헌영 동무에게 감사메시지를 보낼 것 (2) 조선무산계급운동을 교란하는 이영(李英)일파[장안파공산당]를 단호히 배격할 것 (3) 조선민족통일전선에 대한 박헌영 동무의 노선을 절대 지지할 것 (4) 연합국 노동자계급과 미-소 양군 사령관에게 감사메시지를 보낼 것을 결의했다. 대회는 이어 각 산업별 노동조합의 현황보고가 있은 다음 1) 최저임금제 확립 2) 8시간노동제 실시 등 노동권 요구에서 시작하여 10) 민족반역자 및 친일파 소유의 일체의 기업을 공장위원회에서 관리 15) 조선인민공화국 지지 등을 포함한 17개 항의 「행동강령」을 채택했다.51) 이 「행동강령」은 11월 24일에 중앙집행위원회 상임위원회가 20개 항으로 정리하여 발표했다.52) 그것은 전평이 공산당과 인민공화국의 가장 강력한 외곽단체로 조직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人民共和國은 政治的啓蒙運動하는 政治學校”
11월 9일에 이르러 아널드는 여운형을 통하여 허헌을 불렀다. 허헌은 마침 고열이 있어서 중앙인민위원이자 인민공화국 내무부장대리인 김계림(金桂林)을 대신 보냈는데, 민정장관 프레스컷(Brainard F. Prescott) 대령은 허헌이 “생명이 위험하지 않을 정도라면 자동차를 타고 오라”고 말했다.
허헌을 보자 아널드는 “일전에 보낸 것은 결론이 어찌되었는가?” 하고 물었다. 허헌이 결론을 짓지 못했다고 하자 아널드는 “당신이 반대해서 그런 게 아니냐?”고 몰아붙였다. 두 사람의 대화는 1시간40분이나 계속되었다. 허헌은 인민공화국을 해체하는 문제는 명년 3월 1일에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결정될 것이라고 말했다.
아널드가 “인민공화국은 민족주의자가 한 사람 있을지 말지 하고 모두 공산주의자들이다. 당신도 공산주의자 아닌가?” 하고 따지면서 인민공화국 해체를 거듭 촉구하자, 허헌은 “전 인민이 인민공화국을 수립한 것이므로 나나 중앙인민위원이 결정할 수 없다. 다만 전 민중이 하는 것이다.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를 11월 20일에 열어서 답변해 주겠다” 하고 대답했다.
이튿날 정보과장 아스 소령은 허헌에게 “하지 장군과 아널드 장군이 말하기를 일전에 인민공화국의 ‘국’자는 떼기로 했다는데 어떻게 했느냐?”고 물으면서, 그것을 신문에 발표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하여 허헌은 11월 20일까지 기다려 달라고 간청했다고 한다.53) 대회 개최의 허가가 나고 더구나 대회 첫날 아널드 장군이 대회장에 나타나 축사를 한 것을 보면 아스 소령의 말에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아널드는 이어 11월 13일에는 조선공산당의 총비서 박헌영을 불러서 설득했다. 아널드가 인민공화국과 어떤 관계에 있느냐고 묻자 박헌영은 특별한 관계는 없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러나 조선인민공화국에서는 여운형씨와 같은 나의 동지들이 일하고 있다. 인민공화국은 어떠한 경우에도 군정청에 대립하는 기관이 아니다. 인민공화국은 정치적 계몽운동을 수행하는 정치학교의 성격을 띠고 있다. 나는 이러한 의미에서 인민공화국이 정당하고 유용한 조직이라고 생각한다.”54)
박헌영도 이제 미군정부 책임자에게 인민공화국이 한국의 유일한 정부라고는 주장할 수 없었다.
이틀 뒤인 11월 15일에는 하지 장군이 박헌영을 만났다. 10월 27일에 처음 만난 뒤에 두 번째로 만난 것이었다. 하지는 먼저 군정청의 임무에 관한 여러가지 사항을 설명하는 가운데 군무국을 설치한 일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현재 조직 중에 있는 군무국의 기능은 “공중의 안녕질서를 보장하고 경찰을 보조하며 언론과 종교의 자유를 수호하고 사유재산의 불가침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박헌영은 하지에게 “조선인민공화국 인민위원회는 한국에 약속된 독립이 성취될 때까지 한국에서 권력의 창출을 돕고 준비하는 정치단체들 가운데 하나이다. 아직 인민공화국이 자기 수중에 권력을 획득하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군정청은 조선인민공화국을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말했다.
하지는 인민공화국이 정부 성격을 포기하고 정당으로 바꾸라고 권고하면서, “조선인민공화국 성원들은 군정청에 대립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박헌영은 “우리는 군정청에 반대하고 있지 않으며 인민공화국을 군정청에 대립시키고 있지 않다”고 응수했다고 한다.55)
全國人民委員會代表者大會에 참석한 아널드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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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國人民委員會 대표자대회에는 남북한에서 650명의 대표들이 참가하여 인민공화국 死守를 결의했다. |
개회사와 인민공화국 탄생 경과보고를 하게 되어 있는 여운형은 회의기간 내내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는데, 개회사를 대신한 허헌은 여운형이 “연일 정치적 활동에 건강을 상실하시어” 참석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인민공화국 탄생 경과보고는 조두원(趙斗元)이 원고를 대독했다.
인민공화국이 정당으로 탈바꿈하기를 기대하면서 회의에 참석한 아널드는 축사에서 “지금 우리는 어떠한 정당이나 단체를 후원하는 것이 아니라 군정청과 한국 건국에 협력하면 환영한다”고 전제하고, “군정청은 한국의 유일한 정부”이고, “이 정부를 앞으로 몇달 동안 한국사람들이 어느 정도로 지지하는지 연합국에서 주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한국사람들은 한국이 연합국의 감시하에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하고,” “몇 개월 동안에 민족통일전선을 취하여 독립의 용의와 능력이 있다는 것을 연합국에 보여야 한다”고 주장했다.56)
대회순서의 가장 중요한 것은 조선공산당 정치국원이자 인민공화국 외교부장대리인 강진(姜進)의 「국제정세보고」와 이강국의 「국내정세보고」로 된 「정치보고」였다. 강진은 베트남, 그리스, 중국 등의 사태를 설명하면서 “소련 이외에는 완전한 민주주의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 다음, 중앙인민위원회에 대한 국민의 신임투표를 제안하고 “중앙인민위원회를 무시하는 여하한 정권도 조선에는 수립할 수 없다”고 역설했다.
이강국의 「국내정세보고」 가운데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정당통일 운동과 관련하여 이승만을 맹렬히 비난한 점이었다. 이강국은 “10월 16일에 이승만 박사의 귀국을 계기로 정당통일 운동은 아연 활기를 띠어 … 10월 23일에 이 박사를 회장으로 한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결성하자 인민의 시청(視聽)은 이에 집중되었고, 이 박사에 대한 신망은 중앙협의회에 대한 기대로 변하였다. … 그러나 그 뒤 누차 거듭 성명한 이 박사의 통일론이 친일파나 민족반역자까지도 함께 싸고도는 무원칙적 이론과 대중과 유리된 비민주주의적 태도에서 일보도 구체적으로 전진치 못하여 민중은 이 박사의 정치적 면목을 의심하였고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 대한 관심은 사라지기 시작하였다”고 역설했다. 그리고 11월 7일에 인민공화국 주석 취임거부 성명을 계기로 “이 박사의 통일운동은 통일을 도리어 분열로, 정돈을 혼란으로 유도하였다”고 비판했다. 이강국은 결론으로 이승만의 행동은 다음 두 가지 점을 명백히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첫째로 이 박사의 무조건통일론이 초당파적 통일론이 아니라 3천만 총의를 무시한 1당파적 입장의 통일론인 것, … 둘째로 이 박사 자신의 귀국 제1성에서 언급하였던 한 평민, 한 시민으로서의 자격 운운도 임시정부의 한 요인이라는 성명에 의하야 일시적 정치기술상 엄폐수단이었던 것을 명백히 한 것”이라는 것이었다.57)
“나는 共産黨에 대하야 好感을 가진 사람”
이승만은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회의의 이틀째 회의가 열린 11월 21일 저녁에 서울중앙방송국의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공산당에 대한 나의 관념”이라는 제목으로 연설을 했다. 이승만의 연설은 인민공화국 주석취임을 거부하는 방송을 한 뒤로 이승만과 독촉중협을 맹렬히 공격하고 있는 공산당 인사들이 독촉중협을 탈퇴하지 않도록 무마하기 위한 고충이 역력한 내용이었다. 이승만은 먼저 공산당 인사들이 인민공화국을 만든 동기가 사욕이나 불의에서 나온 것이 아닌 줄 믿는다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자초로 공산당에 대하야 호감을 가진 사람이다. 그 주의에 대하여도 찬성하므로 일후에 우리 정부에서 경제정책을 세울 적에 공산주의에서 채용할 것이 여러 가지 있다. 농민은 땅이 있고 빈민은 이식이 있게 할 것이다. 나는 공산주의에 얼마만큼의 동정자이다. 시베리아 눈바람에 갖은 풍상을 겪으며 고국을 위하여 혈전고투하는 동포들과 악독한 왜적의 압박하에서 지하공작으로 백전불굴하고 배일항전하던 공산당원들을 나는 공산당원으로 보지 않고 훌륭한 애국자로 인정한다. 왜적이 항복한 뒤에 각국의 승인을 얻기 위하야 인민공화국을 세운 것이 사욕이나 불의의 생각이 아닌 줄로 믿는다. …”
이때에 이승만이 한 말, 곧 일후에 우리 정부에서 경제정책을 세울 적에 공산주의에서 채용할 것이 여러가지 있다고 한 말이 얼마나 진정성이 있는 말이었는가는 뒷날 제헌헌법의 경제조항의 제정과정과 관련하여 심도있게 톺아볼 만한 가치가 있다. 이승만은 이어 공산주의자들을 두 종류로 나누어 설명했다.
“첫째는 공산주의가 경제방면으로 근로대중에게 복리를 줄 것이니 이것을 채용하자는 목적으로 주장하는 인사들이다. 이러한 공산주의에 나는 얼마만큼 찬성한다. 둘째는 경제정책의 이해는 어찌되었든지 공산정부를 성립하기만을 위하여 무책임하게 각 방면으로 선동하는 중에서 분쟁이 생겨서 국가에 손해를 끼치는 이들이니, 이러한 자칭 공산주의자가 참으로 염려되는 점이다. 이러한 분자들이 나라 안에 있어서 국민이 분열되고 골육이 상쟁하는 참화를 양성하니, 나는 이러한 공산분자로 인연하여 근심한다. …”
이승만은 이들이 일본인들의 자금을 지원받아 각 지방에 소요를 일으키고 인심을 이산시켜 미군정부가 밀려 나가기를 도모하고 있다고 말하고, 이들로 말미암아 “애국하는 공산당원들의 명예가 손상되고,” 장차 한국과 러시아 사이의 친선을 손상시킬지 모른다고 주장했다.
이승만은 그러한 폐단을 중국과 폴란드의 내전을 들어 설명하고 나서, 그러한 상황을 막을 방법은 우국애족하는 모든 남녀에게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당부했다.
“각각 제 정신을 차려서 이런 선동에 흔들리지 말고 각도 각군에 단체를 조직하여 서로 밀접하게 연결하며 촌촌면면을 심방하며 선전해서 모든 동포로 하여금 그 위험한 내용을 알게 하는 것이 유일한 방책이다. …”58)
이처럼 이승만은 세상없어도 공산당을 독촉중협에서 탈퇴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독촉중협이 좌우익의 모든 정파를 포괄하는 “민의의 대표기관”이 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의 이러한 주장이 공산주의자들을 얼마나 설득할 수 있었는가는 적이 의심스럽다.
사흘 동안 열린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는 미군정부가 기대한 것과는 반대로 인민공화국 사수를 위한 결의대회가 되고 말았다. 폭력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 대회와 관련하여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그동안 독촉중협에 열성적으로 협조하면서 박헌영의 재건파공산당과는 별도의 행동을 취해 왔고 그 때문에 이번 대표자대회에서도 비판을 받은 이영, 최익한(崔益翰) 등의 장안파공산당이 대회가 끝난 이튿날인 11월 23일에 마침내 해소를 결의하고 해소성명서를 발표한 사실이었다.59)⊙
1) 『自由新聞』1945년 11월 5일자, 「決議書三修正委員 敦岩莊에 모혀 첫 協議」. 2) 『自由新聞』 1945년 11월 7일자, 「決議書를 若干修正 聯合國에 發送」. 3) 『每日新報』 1945년 11월 7일자, 「修正된 決議書內容」.
4) 『自由新聞』 1945년 11월 4일자, 「聯合國에 보낼 決議文, 共産黨에서 反對表明」. 5) 『每日新報』 1945년 11월 6일자,「金九氏以下?名의 一行 今月十日內로 入京」. 6) 『自由新聞』 1945년 11월 6일자, 「共産黨協力에 感謝」. 7) 『新朝鮮報』 1945년 11월 6일자, 「軍政에 積極協力하고 鞏固히 團結하자」;『每日新報』 1945년 11월 6일자,「叛逆者와 親日派는 統一에서 除外한다」. 8) 『新朝鮮報』 1945년 11월 6일자, 「李承晩博士, 今朝重大放送」;『每日新報』 1945년 11월 6일자, 「李博士放送, 六日午前七時」. 9) The New York Times, Nov.6, 1945, “A United, Free Korea.”
10) 『自由新聞』 1945년 11월 8일자, 「李博士來參懇願타 靑年代表者會流會」;『中央新聞』 1945년 11월 8일자, 「李博士不參으로 靑年團?代表會主催懇談會流會」. 11) 『新朝鮮報』 1945년 11월 8일자, 「李博士放送要旨」;『自由新聞』 1945년 11월 8일자, 「人民共和國主席은 受諾할 수 없다」. 12) 『中央新聞』 1945년 11월 9일자, 「李博士態度는 유감, 人民共和國許憲氏談」. 13) 『新朝鮮報』 1945년 11월 10일자, 「李博士放送과 人民委員會의 聲明」;『自由新聞』 1945년 11월 10일자, 「主席拒否는 遺憾」.
14) 『新朝鮮報』 1945년 11월 12일자, 「獨立促成中央協議會에 朝共서 積極參加」. 15) 심지연, 『人民黨硏究』,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1991, pp. 229~230. 16) 『中央新聞』 1945년 11월 13일자, 「朝鮮人民黨結黨式盛大」. 17) 朝鮮人民黨, 『人民黨의 路線 ─ 人民黨文獻』, 新文化硏究所, 1946, p. 2 ; 李萬珪, 『呂運亨先生鬪爭史』, 民主文化社, 1946, pp. 274~275.
18) 先驅會本部輿論調査部, 「朝鮮指導人物輿論調査發表」, 『先驅』1945년 12월호, pp. 45~52. 19) 정병준,『우남 이승만 연구 ─ 한국 근대국가의 형성과 우파의 길』, 역사비평사, 2005, pp. 472~473. 20) 『自由新聞』 1945년 11월 13일자, 「定例會見에 李博士談」. 21) 『中央新聞』 1945년 11월 10일자, 「各黨各層을 總網羅, 臨時政府歡迎陣結成」. 22) 『自由新聞』 1945년 11월 9일자, 「金九主席歡迎의 前奏」. 23) 『自由新聞』 1945년 11월 18일자, 「臨時政府領袖歡迎에 國內意見完全統一」. 24) 『自由新聞』 1945년 11월 9일자, 「臨時政府要人宿舍」. 25) 선우진 지음, 최기영 엮음, 『백범 선생과 함께한 나날들 ─ 백범 김구 비서 선우진 회고록』, 푸른역사, 2009, pp. 51~52. 26) 『自由新聞』 1945년 11월 15일자,「李承晩博士, 金九氏宿所될 곳 訪問」. 27) 尹致暎, 『尹致暎의 20世紀』, 삼성출판사, 1991, p. 162. 28) 曺惠子, 「人間李承晩의 새傳記(4)」, 『女性中央』 1983년 4월호, p. 363.
29) 『한국일보』 1975년 3월 18일자, 「人間李承晩百年(7)」. 30) 曺惠子, 앞의 글, pp. 362~363. 31) Hodge to MacArthur, Nov.2, 1945,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이하 FRUS) 1945, vol. Ⅵ, United States Government Printing Office, 1969, p. 1106. 32) 張俊翼, 『北韓人民軍隊史』, 瑞文堂, 1991, pp. 32~35, pp. 36~37. 33) Vincent to Vittrup, Nov.7, 1945, FRUS 1945, vol. Ⅵ, p. 1114. 34) 정병준, 「주한미군정의 ‘임시한국행정부’ 수립 구상과 독립촉성중앙협의회」, 『역사와 현실』 제19호, 역사비평사, 1996, pp. 147~148.
35) McCloy to Acheson, Nov.13, 1945, FRUS 1945, vol. Ⅵ, pp. 1123~1124. 36) Vincent to Acheson, Nov.16, 1945, FRUS 1945, vol. Ⅵ, p. 1127. 37) 在朝鮮美國陸軍司令部軍政廳,「指令 제19호」(1945. 10. 30). 38) 정진석, 『언론조선총독부』, 커뮤니케이션북스, 2005, pp. 277~316 및 김동선, 「해방직후 『매일신보』의 성격변화와 『서울신문』의 창간」, 『한국민족운동사연구』 63, 민족운동사학회, 2010. 6 참조. 39) 『自由新聞』 1945년 11월 13일자, 「?八度以南의 收穫 二千六百萬石」.
40) 『新朝鮮報』 1945년 11월 16~18일자, 「李博士放送要旨①②③」. 41) 『自由新聞』 1945년 11월 17일자, 「李博士每週放送」. 42) 『自由新聞』 1945년 11월 16일자, 「各黨行動全體委員 中央協議會에 協調」. 43) 『自由新聞』 1945년 11월 16일자,「日中央人民委員代表大會」. 44) 『新朝鮮報』 1945년 11월 17일자, 18일자, 19일자, 20일자, 「軍政의 現況과 將來(一)(二)(三)(四)」.
45) 戰史編纂委員會 編, 『韓國戰爭史(Ⅰ) 解放과 建軍』, 國防部, 1967, pp. 247~256 ; 韓鎔源, 『創軍』, 博英社, 1984, pp. 26~29. 46) 『中央新聞』 1945년 11월 14일자, 「金九氏歸國은 個人資格」. 47) 『自由新聞』 1945년 11월 20일자, 「臨時政府歸國은 個人的으로!」. 48) 尹致暎 및 尹錫五 證言, 孫世一, 『李承晩과 金九』, 一潮閣, 1970, p. 201.
49) Langdon to Byrnes, Nov.20, 1945, FRUS 1945, vol. Ⅵ, pp. 1131~1132. 50) 「獨立促成中央協議會中央執行委員會 第一回會議錄」, 『雩南李承晩文書 東文篇(十三) 建國期文書 1』, 延世大學校現代韓國學硏究所, 1998, p. 68.
51) 『解放日報』 1945년 11월 15일자, 「朝鮮勞動組合全國評議會結成」. 52) 『解放日報』 1945년 11월 24일자, 「全評의 行動綱領」. 53) 許憲의 報告, 『全國人民委員會代表者大會議事錄』, 全國人民委員會, 1946, pp. 78~81. 54) 「조선공산당중앙위원회 총비서 박헌영 동지와 미군정청장 아널드 소장의 회담」, 『이정박헌영전집(2)』, p. 86. 55) 「조선공산당중앙위원회 총비서 박헌영 동지와 미제24군사령관 하지 중장의 회담」, 『이정박헌영전집(2)』, p. 89.
56) 『全國人民委員會代表者大會議事錄』, p. 4. 57) 위의 책, pp. 54~55.
58) 『서울신문』 1945년 11월 23일자, 「過激한 思想은 有害」;『自由新聞』 1945년 11월 23일자, 「骨肉相爭을 避하라」;『新朝鮮報』 1945년 11월 23일자, 「共産黨과 나의 見解」. 59) 『新朝鮮報』1945년 11월 24일자,「共産黨統一 長安派云云解消」;『朝鮮人民報』1945년 11월 25일자,「社說:共産黨唯一化」;『解放日報』1945년 11월 29일자,「社說:反黨派解消에 對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