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李承晩)이 귀국한 지 1주일 뒤인 1945년 10월 23일에 그가 묵고 있던 조선호텔에서 한국민주당, 국민당, 건국동맹, 조선공산당을 포함한 50여개 정당 및 사회단체 대표 200명가량이 모여 안재홍(安在鴻)의 주동으로 독립촉성중앙협의회(獨立促成中央協議會)를 결성하고 이승만을 회장으로 추대했다. 이승만은 그것이 모든 정파(政派)가 “한덩어리로 뭉친” 한국인의 “책임있는 기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승만은 서둘러 거처를 돈암장(敦岩莊)으로 옮겼다. 하루에도 300~400명씩 몰려드는 인파 때문이었다.
11월 2일 천도교(天道敎) 강당에서 열린 독촉중협(獨促中協)의 제1차 회의에는 정당 및 사회단체 대표들뿐만 아니라 일반시민들도 몰려들어 성황을 이루었다. 의장인 이승만은 이 회의에서 채택한 결의문도 직접 작성했는데, 공산당의 박헌영(朴憲永)은 결의문이 미국을 너무 비판했다고 이의를 제기하여 수정하기로 했다. 회의는 중앙집행위원을 선출할 전형위원 7명을 선정하기로 하고, 전형위원 선정은 이승만에게 위임했다.
하지 장군은 이승만이 독촉중협을 성공적으로 출범시킨 것을 보고 흡족해했다. 그는 이승만과 김구(金九)를 중심으로 과도적 한국행정부 설립 구상을 맥아더에게 보고했다.
1. ‘李承晩現像’으로 政黨統合運動 급진전
독립운동의 설화적 인물 이승만의 갑작스러운 귀국이 몰고온 열풍은 가히 ‘이승만 현상’이라고 할 만했다. 그것은 혼돈을 거듭하는 해방정국에 큰 전기를 초래하는 위력으로 작용했다. 신문들은 “우리의 최고지도자”, “독립운동의 선구자”, “혁명전선의 거인”, “건국의 아버지” 등으로 호칭하면서 연일 이승만 뉴스로 지면을 도배했다. 언제 지은 것인지 이승만의 오언절구(五言絶句)가 귀국 이튿날 자 신문에 발표되기도 했다.1)
失題 제목을 잃음
忘老唯思國 늙음을 잊고 나라생각뿐이었네
槿域三千里. 근역[무궁화땅] 삼천리.
雖貧不議飢 가난해도 굶는다 소리내지 않고
誰開太平基. 그 누가 태평의 터전을 열꼬.
뒤이어 소설가 박종화(朴鍾和)의 “헌시―민족의 거인 우남 이승만선생께”라는 시도 실리고,2) “이승만박사일생”,3) “이승만박사의 투쟁생애”4) 등의 연재물과 청년시절의 옥중생활 사진 등도 크게 실렸다. 대한독립협회(大韓獨立協會)라는 단체에서는 이승만의 귀국 제1성을 취입한 레코드판을 제작하여 각 학교와 기관에 배포하기도 했다.5)
이때의 신문들은 대부분이 좌경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기사뿐만 아니라 사설에서까지 이승만에 대하여 “하시다” 등의 존댓말을 썼다. 그것은 개화기 신문들의 왕실 기사에서나 볼 수 있었던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한 달 남짓 뒤에 김구가 귀국할 때에도 그러지 않았다. 그러면서 “일찍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세운 마사릭(Tomas G. Masaryk) 대통령의 망명생활은 이같이 장구하지는 않았던 것이며, 중화민국의 영구한 총리 손문(孫文)의 일생도 이같이 고난의 기록은 아니었다”6)라고 이승만을 추앙했다.
“平民의 자격으로 歸國했다고 했으나…”
이승만의 귀국과 관련하여 신문들은 비교적 정확한 인식을 하고 있었다. 『매일신보(每日新報)』는 이승만이 도착한 이튿날 다음과 같은 해설 기사를 실었다.
“이승만박사의 귀국은 우리 정국에서 중대한 파문을 던질 것이다. … 그동안 조선의 미국군정당국의 의향이라고 할만한 점을 살펴도 현재 여러 정당이 있어서 논의가 분분하니 이래서는 안되겠다, 하루바삐 전 정당이 조선의 완전독립이라는 최대의 운동 목표를 향하야 행동을 같이 하도록 뭉쳐야 할 것이다 라는 의견을 가지고 현재의 정당운동을 더욱 강력하게 전 민중적인 신망과 권위를 가지게 할 필요가 있다고 하야, 조선내에서만 아니고 해외에 있는 국내국민의 신망높으신 분을 귀국케하야 각 정당운동을 강력히 지도하려는 의도이었음을 알 수 있다. …”
그리하여 본국정부와 연락하여 미국에 있는 이승만을 귀국시켰다는 것이었다. 이 해설기사는 앞으로의 정국전개를 다음과 같이 전망했다.
“이박사는 한 평민의 자격으로 귀국한 것이라고 극히 겸손한 태도를 보이고 있으나 박사의 귀국은 군정당국에 대한 협조와 아울러 금후 국내의 건국운동을 강력히 추진시키도록 전력을 다하실 것은 물론이다. … 또 그뿐이 아니고 이박사의 귀국에 따라서 중경(重慶)에 있는 임시정부요인도 머지않아 한두분 이박사와 마찬가지로 역시 ‘개인의 자격’으로 귀국하야 이박사와 같이 당면의 민중의 독립운동을 추진시킬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금후의 우리 독립국가건설의 큰 운동은 여러 가지 각도로 극히 활발히 전개될 것으로 보인다.”7)
申興雨 “李承晩이 트루먼이 내어준 美軍用機 타고 왔다”
이승만은 귀국한 이튿날부터 몰려드는 방문객들을 접견하기에 눈코 뜰 사이가 없었다. 10월 17일 오전에 군정청 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와서는 신흥우(申興雨), 장덕수(張德秀), 이훈구(李勳求), 임영신(任永信) 등을 만났다.8)
한성감옥서때의 옥중동지였던 신흥우는 일본점령기에도 한국YMCA의 대표자격으로 호놀룰루에서 열린 태평양회의를 비롯하여 기독교 관계의 각종 국제회의에 참석하면서 이승만을 만났고, 1925년에는 이승만이 이끄는 동지회(同志會)와 연계하여 국내의 이승만 지지단체로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를 조직했으며, 그 때문에 1938년에 일본 경찰에 검거되기도 했었다(『月刊朝鮮』 2005년 11월호, 「호놀룰루太平洋會議의 韓國代表團」참조).
신흥우가 이승만과 면담한 이야기도 신문에 크게 보도되었는데, 신흥우는 이승만이 트루먼(Harry S. Truman) 미국 대통령 등이 미군용기를 제공하고 모든 편의를 도와주어서 귀국하게 되었다고 말했다는 것이었다.9) 이러한 기사는 이승만의 귀국사실이 턱없이 과장되어 전해지게 했다.
신흥우의 말보다 더욱 희떠운 것은 여운형의 반응이었다. 여운형은 기자들에게 자신이 이승만을 안 것은 한-일합병 이전에 이승만이 연희전문학교의 전신인 서울 컬레지에서 심리학을 강의할 때에 청강생으로서 그 강의를 들은 때부터라고 말하고, “인민공화국으로서는 주석으로 맞이할 것이고 여운형 개인으로서는 선배로 맞이할 것”이라고 말했다. 인민공화국에서는 “주석, 즉 대통령으로” 추대하였고, “국가조직법이라든지 임시헌장에 대통령독재에 가까울만치 되어 있어서 … 박사의 의사대로 부서라든지 국가체계라든지를 결정할 예정으로” 되어 있다고 했다. 그리하여 이승만이 “민족최고의 지도자로서 잘 지도해 주실 것이므로” 자기는 “그 지도에 충실히 복종할 뿐”이라는 것이었다. 여운형은 또 이승만이 “동양화(東洋畵)를 잘하시고 한시(漢詩)에도 조예가 깊으며 … 동양의 역사와 사상을 잘 알고 계신다”고도 했다.10) 조선공산당의 이현상(李鉉相)도 이승만이 “우리의 자주독립을 위하야 무조건 통일하자는데에는 절대 동감이다”라고 말했다.11)
여운형은 이날 오후 2시에 인민공화국 부주석 자격으로 국무총리 허헌(許憲)과 함께 보안부장 최용달(崔容達), 서기장 이강국(李康國)을 대동하고 조선호텔로 이승만을 예방했다. 그들은 8월 15일 이후의 국내정세보고서와 참고자료들을 챙겨 가지고 갔다. 이승만은 이들이 인민공화국 대표 자격으로 면담을 요청한다는 윤치영(尹致暎)의 말을 듣고, 개인자격이 아닌 인민공화국 대표 자격으로는 만날 수 없고 또 아직 여독이 풀리지 않았다면서 다음에 만나자고 했다.12) 그러면서도 그는 이들이 제출한 8월 15일 이후의 국내정세보고서와 참고자료들은 받았다.13)
이승만은 매일 오후 2시를 각계 인사들과 면담하는 시간으로 정하여 발표한 다음 이날 저녁에 있을 라디오 방송 연설문을 준비했다.
일곱 번 되풀이된 귀국肉聲放送
저녁 7시30분부터 20분동안 서울중앙방송국의 전파를 통하여 흘러 나오는 이승만의 육성을 들은 국민들이 얼마나 놀라고 감격했을 것인가는 상상하기에 어렵지 않다. 이승만은 다음과 같은 말로 연설을 시작했다.
“조선을 떠난지 33년만에 처음으로 돌아와서 그립던 산천과 고국남녀 동포를 만나니 기뻐서 웃고도 싶고 슬퍼서 울고도 싶다.…”
이어 그는 중국에 있는 임시정부 당국자들과 상의하여 김구와 같이 돌아오려고 했으나 “중국방면에 여러 가지 장해가 많아서” 함께 오지 못했다고 말하고, 미국군용비행기로 태평양을 건너왔다고 했다. 이승만은 먼저 미국정부와 약속한 대로 ‘개인자격’으로 귀국한 사실을 강조했다.
그는 이어 “이 말을 일반 동포에게 일일이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하고는, 미국은 트루먼 대통령이하 정부당국자들이나 전 국민이 한국의 독립을 절대로 주장하고 있고, 귀국하면서 보니까 맥아더 대장, 하지 중장, 아널드(Archibald V. Arnold) 소장은 모두 우리의 동정자들이었다고 말했다. 미국정부의 정책이나 국민여론을 훤히 꿰뚫고 있고 특히 귀국도중에 미군정부의 최고책임자들을 만나서 깊은 대화를 나눈 듯이 시사한 것은 국민들로 하여금 그의 권위를 실감하게 했다.14)
이승만의 이 육성녹음은 일곱번이나 되풀이하여 방송되었다.15)
人民共和國은 主席귀국歡迎聲明 내고 歡迎會 준비
이승만이 미국정부와 주한미군정부의 지원으로 귀국했다고 판단한 인민공화국 관계자들은 이승만이 인민공화국 주석직을 수락할 것을 촉구했다. 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는 10월 18일에 이승만의 귀국을 환영하는 정중한 담화를 발표했다.
“조선인민공화국 주석 이승만박사는 드디어 귀국하였다. 삼천만 민중의 경앙대망(敬仰待望)의 적(的)이었던 만큼 전국은 환호로 넘치고 있다. 우리 해방운동에 있어 이박사의 위공(偉功)은 다시 말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조선인민공화국 주석으로서의 추대는 조선 인민의 총의이며 이러한 의미에 있어 해방조선은 독립조선으로의 위대한 지도자에게 충심의 감사와 만강의 환영을 바치는 것이다.”
중앙인민위원회는 또 주석 이승만박사 환영회를 곧 개최하기로 결의하고, 홍남표(洪南杓), 최용달, 이강국, 이여성(李如星), 홍덕유(洪悳裕), 조동호(趙東祜), 이상훈(李相薰) 7명을 준비위원으로 선정했다.16)
이튿날 오후 2시에는 60명가량의 각 정당 인사들과 친지들이 모여들어 개별 면담은 도저히 할 수 없었다. 이날의 상황은 기자들에게도 공개되었다. 이승만은 내방자 전원과 한사람씩 악수를 하면서 인사를 나누었다.
“백관수(白寬洙) 올시다.”
“오! 예. 재미 좋십니까?”
이승만은 한사람 한사람 소개받을 때마다 “오! 예”를 연발했다.
“김병로(金炳魯)입니다. 이렇게 건강한 모습을 뵈오니 대단히 감사합니다.”
“고맙소. 많이 일해주시오.”
“오 마이 디어 닥터 리” 하고 손을 내미는 여성은 연희전문학교 교수 최순주(崔淳周)의 부인이었다. 그녀는 하와이 한인중앙학원 시절의 제자였다. 이승만은 “오! 디어” 하며 그녀의 손을 잡고 영어로 잠시 하와이 동포 소식을 전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안재홍(安在鴻)과 만나는 장면이었다. 안재홍이 이끄는 국민당은 이날 오후 1시에 당원총회를 열어 이승만에게 최대의 경의와 최고의 예의를 표하는 감사 결의를 하고 그 결의문을 가지고 안재홍, 박용의(朴容義), 이승복(李承福), 이의식(李義植) 4명이 방문한 것이었다.
이승만이 1912년 봄에 105인사건을 피하여 두 번째로 도미하면서 도쿄에 들렀을 때에 안재홍은 와세다(早稻田)대학 학생으로서 그를 만났다. 그 뒤로 안재홍은 이승만이 발행하는 『태평양잡지』에 글을 기고하기도 했고, 1925년에 동지회의 국내지부로 흥업구락부가 비밀리에 결성될 때에도 참가했다. 또 1927년에 안재홍이 중심이 되어 국내에 신간회(新幹會)가 결성되자 이승만은 미주와 하와이에 신간회지부 결성문제를 검토하기도 했다.
안재홍은 이승만 앞으로 나와 안경을 반쯤 벗으며 감격에 사무쳐 말이 얼른 나오지 않는지 눈물을 짓고 한참 섰다가 입을 열었다.
“안재홍입니다. 이렇게 뵈오니 다만 고맙습니다.”
이승만도 힘있게 악수를 하면서 말했다.
“수고하십니다. 또 만나서 이야기합시다.”
별도로 다시 만나자는 뜻이었다. 이날의 방문객 가운데에는 최익한(崔益翰), 정광호(鄭廣浩), 한학수(韓學洙) 등 장안파공산당 인사들도 있었다. 안재홍은 10월 20일 저녁에 국민당 수뇌부와 함께 이승만을 다시 방문했다.
卽席演說로 參席者들 감동시켜
방문객들과의 악수가 끝나자 이승만은 다음과 같은 요지의 즉석연설을 했다. “여러분이 불초한 나를 지도자로 환영해 준 것에 대하야 만강의 치하를 드리는 바이며, 그렇게 지도자로 추대해준다면 나는 여러분을 유도해 나갈 자신과 책임을 갖지 않으면 안될 줄 안다. 그러나 우리의 과거의 운동계를 살펴볼 때에 거기에는 민족의 반역자가 없지 않아 이들의 모반으로 우리의 운동은 그 종국의 결실을 보지 못한 것이 수삼회가 아닌 만큼, 지금 이 자리에서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본의가 아니나, 만일에 여러분 중에서 나를 환영해주는 그 기분이 작심삼일로 그친다면 그 역시 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이러한 경우가 만분의 일이라도 있다면 나는 단호히 그와 상대하야 최후까지 투쟁할 것을 사양치 않을 것이며, 노골(老骨)이라 할지라도 과거의 경험을 살리어 죽음이라도 불사하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급한 문제, 즉 합동통일을 유일한 방법수단으로 하야 자주독립의 조급한 실현을 도모할 것만이 우리에게 맡겨진 절대한 과제라는 것을 믿고, 오직 이 길을 위하야 단합하는 전진이 있기만 바랄 뿐이다. … ”17)
그것은 참석자들로 하여금 이승만의 투사로서의 이러저러한 설화를 실감하게 하는 웅변이었다.
10월 19일에는 유억겸(兪億兼), 김활란(金活蘭), 이극로(李克魯), 오천석(吳天錫), 이묘묵(李卯默), 정인과(鄭仁果), 백낙준(白樂濬), 현동완(玄東完) 등 각계 인사 80여명이 이승만을 예방했다.18)
이날 이승만은 우리의 급한 문제는 “삼천리 강산을 찾는 것”이라면서 북한문제를 거론했다. 이때는 북조선5도인민위원회 연합대회가 열리고 조선공산당 북부조선분국이 결성된지 1주일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만일에 여러분이 나를 따르겠다면 나도 끝까지 싸움으로 일생을 마치겠다. 우리는 민생을 위하야 죽기를 배우자. 북쪽문제가 캄캄하다. 지금이라도 뛰어가서 보고싶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나아갈 길이 있는 것을 확신한다. 나에게 계획이 있다. 우리도 각각 한자리씩 분담해서 충실히 일하자. 돈과 힘을 모아서 이 국가를 위하야 바치자. 그리하여 이 국가의 목숨을 살리자!”19)
이러한 이승만의 연설은, “나에게 계획이 있다”는 단호한 주장에서 보듯이, 추종자들에게 확신을 심어줌으로써 자신의 지도력을 강화하는 대중정치가의 전형적인 정치행태였다.
金潤晶이 찾아와 “살려달라”고 애원해
이날 오후 2시쯤에는 인민공화국의 허헌, 홍남표, 최용달, 이강국이 이승만을 다시 예방했다. 이승만은 허헌과 30분가량 자리를 따로 했는데, 허헌은 이승만에게 “평소부터 존경했다”고 말하고 인민공화국의 수립 경위를 설명했다. 허헌은 이승만이 “인민공화국의 주석으로 추대된 것은 조선인민의 총의”라고 강조하고, 인민공화국 주석으로 취임해 줄 것을 간곡히 요청했다.20) 이 자리에 배석했던 한국민주당(이하 한민당)의 허정(許政)은 허헌에게 “선생님을 진정으로 존경한다면 어떻게 인민공화국 주석을 맡아달라고 할 수 있단 말이오?”하고 큰 소리로 항의했다. 이승만은 당황해하는 허헌을 바라보다가 자신은 일당일파에 몸을 담을 수 없고 지금 시급히 해야 할 일은 전 민족을 단합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21) 그것은 인민공화국 주석 취임 요청을 에둘러 거절하는 말이었다.
몰려드는 인파 가운데에서 한가지 특기할만한 것은 이승만이 일생동안 잊지 못했던 배반자 김윤정(金潤晶)이 찾아온 일이었다. 김윤정은 1905년에 이승만이 하와이의 윤병구(尹炳求) 목사와 함께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을 만나고 하와이 동포들의 청원서를 포츠머스 강화회의에 제출하기 위한 외교활동을 벌일 때에 주미공사관의 참서관으로 있으면서 이들의 활동을 무산시켰던 인물이었다(『月刊朝鮮』 2002년 12월호, 「청년 李承晩, 디어도어 루스벨트 大統領을 만나 호소하다」 참조). 한-일 합병 뒤로는 줄곧 부일협력자로 살아온 김윤정은 조선총독부 중추원(中樞院)의 참의로 있으면서 8·15해방을 맞았고, 9월 28일에 군정장관 아널드에 의하여 중추원 참의에서 파면되었다. 이승만은 뒷날 “내가 처음 환국하여 조선호텔로 들어올 적에 모든 동포가 환영하는 중에 김윤정이 따라와서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 후에는 다시 보이지 않더니 근자에 들으니 벌써 세상을 떠났다 합니다” 하고 적었다.22)
非政治團體 주동으로 政黨統合運動 추진돼
이승만이 귀국하자마자 각 정당정파가 무조건 함께 뭉칠 것을 외치고 나옴에 따라 9월중순부터 여러 갈래로 추진되고 있던 정당통합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정당통합운동은 비정치단체가 주동하여 정당협력을 추진시키는 방법, 비슷한 정당들의 통합, 정당들 사이의 정책 협력, 중요 정당지도자들의 간담회 등의 방식으로 전개되었다.23)
비정치단체가 주동한 정당통합운동의 하나는 손공린(孫公璘)의 조선건국협찬회(朝鮮建國協贊會)를 중심으로 하여 주로 우파민족주의 계열 군소정당들의 통합을 목표로 한 운동이었다. 이들은 9월 26일에 24개 가맹단체와 3개 운동단체가 참가하여 각당 통일전선 결성대표대회를 개최한데 이어 10월 20일에는 국일관에서 안재홍의 국민당, 이갑성(李甲成)의 신조선당, 최익환(崔益煥)의 대한인민정치당, 김진호(金鎭浩)의 조선혁명당 등 10개 정당의 당수 및 대표 50여명이 회동하여 정당합동간담회를 열었다.24)
비정치단체가 주동한 또 하나의 정당통합운동은 각당통일기성회(各黨統一期成會)에 의하여 추진되었다. 전국정치운동자후원회, 조선어학회, 학술원, 조선문화건설 중앙협의회 등 30여개의 비정치단체들은 9월 17일에 이극로(李克魯)를 중심으로 정치위원 10명을 선정하고, 9월 26일에는 천도교회관 강당에서 통일전선결성대회를 열었다. 이들은 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와 한민당의 통합을 요구했다.
앞에서 본 대로, 10월 5일에 양근환(梁謹煥)의 주선으로 동대문밖 임종상(林宗相)의 집에서 여운형, 송진우(宋鎭禹), 안재홍, 허헌 등 각 정파 대표자들이 8월 15일 이후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여 간담회를 개최한 것도 이러한 상황에 따른 것이었다. 이날의 간담회에는 공산당의 박헌영만 대리를 보냈었다(『月刊朝鮮』 2010년 7월호,「朝鮮人民共和國의 主席과 內務部長」참조).
“呂氏가 잘못했다고 종이에 써가지고 도장을 찍어와야 …”
정당통합운동의 대표적인 움직임은 한민당, 국민당, 조선공산당, 건국동맹을 포함한 32개 정당 및 사회단체 대표 55명이 10월 10일에 YMCA회관에 모여 북위 38도선문제와 일본인 재산 매매금지 및 거주제한문제에 관한 결의를 하고 상설기구로 각정당 행동통일위원회를 조직한 것이었다. 이승만이 귀국 제1성으로 정당통합을 역설하자 각정당 행동통일위원회가 바로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행동통일위원회는 10월 17일과 18일 이틀에 걸쳐서 회의를 열고 먼저 중요 정당의 당수 회합을 주선하기로 결의했다. 10월 5일의 간담회에 이은 두번째 당수회합이 될 것이었다. 그리하여 교섭위원으로 이갑성, 명제세(明濟世), 박문희(朴文熹) 등을 선정하여 각당 당수들과 교섭을 벌였다. 먼저 지난 당수간담회에 불참했던 박헌영으로부터 이번 회합에는 꼭 참석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국민당의 안재홍도 쾌락했다. 건국동맹의 여운형도 “통일을 위해서라면 무조건 참석하겠다”고 말했다. 한민당의 송진우만 부정적이었다. 송진우는 밤중에 집으로 찾아간 기자에게 “문제는 간단하다. 전번에도 그분네하고 회의를 한 일이 있지만, 근본적으로 인민공화국과 중경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두가지 정부가 대립되고 있는 한 몇 번 만나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요는 여(呂)씨가 인민공화국을 성립시킨 것을 잘못했다고 서면에 써서 도장을 찍어가지고 오지 않는 한 절대로 공식회담에는 참석하지 못하겠다” 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기자가 여운형은 통합을 위하여 인민공화국까지도 해산시킬 의사가 있는 것 같다고 하자 송진우는 “여씨의 그 의사를 누가 증명할 수 있는가. … 오늘이라도 그들이 실제로 인민공화국을 해산하며 그것을 수립한 일을 사죄한다면 얼마든지 만나겠다”하고 한마디로 일축했다.
이처럼 송진우는 인민공화국을 수립한 주동자가 여운형이고 건국준비위원회이래의 정국혼란의 큰 책임은 여운형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송진우는 그러나 10월 19일 오후 2시에 개최하기로 되어있는 40여개 단체의 회합에는 한민당에서도 대표를 파견하겠다고 말했다.25)
한민당은 이날 선전부 명의로 이승만이 전날 예방한 한민당 선전부장 함상훈(咸尙勳)에게 자기는 “김구씨를 절대로 지지한다”면서, “우리는 김구씨를 중심으로 정부를 조직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말했다는 내용의 전단을 만들어 배포했다.26)
행동통일위원회는 10월 19일 오후 2시부터 을지로 입구의 일본생명 빌딩[지금의 SK 네트웍스 본사 건물자리] 2층에서 다시 회의를 열었다. 이날 회의는 여운형, 안재홍, 이현상, 원세훈(元世勳), 김약수(金若水) 등 좌우익의 지도자들이 참가한 가운데 이갑성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이날 참가자들은 한국이 독립을 얻기 위해서는 정당통합이 먼저 달성되어야 하며, 이것을 통하여 독립의 정당성을 국제 여론에 호소해야 한다는 데에 뜻을 같이했다. 그리고 이러한 견해를 하지 장군에게 건의하여 국제여론을 일으키기로 했다.27) 이들은 회의를 마치자 조선호텔로 이승만을 찾아갔다.28) 38도선문제와 일본인재산매매금지문제에 대한 지침을 묻는 대표들에게 이승만은 그러한 지엽적인 문제보다는 정당통합이 시급히 이루어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리하여 10월23일 오후2시에 조선호텔에서 2명씩의 각정당 대표자들이 참석하는 회의를 개최하기로 했다.29)
2. 1週日만에 결성된 “民族統一의 集結?”
이승만이 일반 군중앞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10월 20일 오전 11시부터 미군정청 앞마당에서 열린 서울시민 주최 연합군환영회 자리에서였다. 환영회에는 서울과 인근지방으로부터 3만명 가량의 인파가 몰렸다. 그것은 미군진주 이후 처음 열린 공식 연합군환영회였다. 미군군악대와 고려교향악단이 4대국 국가를 차례로 연주하는 동안 미군비행기가 식장 위를 선회하며 장엄한 분위기를 돋우었다.
환영준비위원장 이인(李仁)의 개회사와 사무총장 조병옥(趙炳玉)의 환영사에 이어 하지 사령관의 답사가 있었다. 하지는 간단한 답사를 한 다음 이승만을 소개했다.
“한국은 자유이다. 자유란 위대한 것이다. 나는 한국이 영구히 자유로운 나라가 되기를 희망한다. 그런데 이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 일생을 바쳐 해외에서 싸운 분이 계시다. 그분이 지금 우리 앞에 계시다.”
하지는 옆에 앉은 이승만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 성대한 환영회도 위대한 한국의 지도자를 맞이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분은 압박자에게 쫓기어 조국을 떠났었지만, 그분의 힘은 크다. 그분은 개인의 야심이라고는 전혀 없다. 그분이 살아서 여기 와 계신다. 여러분은 그분이 이 자리에서 동포에게 ‘헬로’ 하고 외쳐 주기를 희망한다.”
그러면서 하지는 이승만의 등단을 청했다.30) 이승만의 연설은 예고된 환영회 순서에는 없던 것이었다. 이승만은 웃음을 띠며 마이크 앞으로 나와 먼저 영어로 하지와 아널드에게 인사말을 한 다음 한국어로 연설을 했다. 이승만은 국민의 가장 큰 관심사인 38도선문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번에 도쿄에서 맥아더 대장이 나에게 북위 38도선문제는 어떻게 된 일인가 하고 질문을 하였으며 이곳에 와서 하지 중장과 아널드 소장에게서도 이러한 질문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이를 대답 못했다. 그러나 문제를 잘 알고 잘 대답할 사람이 있으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문제를 알아야겠고 알아야할 권리가 있는 줄 안다. 그것을 아는 길은 자기를 버리고 다 합치는 그 길밖에 없으며, 이 길을 위하여 나는 앞잡이로 나설터이니 여러분도 다 같이 나와 함께 나아가자. …”31)
이 시점에서 하지 장군이 이승만에게 얼마나 큰 기대를 하고 있었는가는 이튿날 새벽에 이승만이 올리버(Robert T. Oliver)에게 쓴 편지에 잘 드러나 있다. 아침부터 몰려드는 방문객 때문에 이승만은 새벽 5시30분에 일어나서 침대에서 이 편지를 썼다.
임시정부나 해외한족연합위원회 관계자 등 재미 독립운동자들의 귀국과 관련해서 이승만은 “우리는 김구와 함께 공산주의 그룹을 제외한 몇몇 다른 사람들을 중경으로부터 데려올 계획을 하고 있다”, “하지 장군은 전경무(田耕武)를 포함한 6명의 군사령부 허가신청자들에게는 기다리라고 명령하고 윤병구에게만 귀국을 허가했다”고 적었다. 그것은 이승만의 의견이 반영된 조치였음을 말할 나위도 없다. 더욱 눈길을 끄는 것은 “하지 장군은 국무부에 초기정책을 변경하지 않으면 상황은 더욱 악화될 것이다 … 등등을 적어 보낸 성명의 사본을 나에게 보냈다”는 대목이다.32) 이처럼 하지는 군정부의 비밀공문서까지 보여주면서 이승만을 성원했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대표 김호(金呼), 송종익(宋鍾翊), 한시대(韓始大), 김병연(金秉堧), 김성락(金聖樂), 전경무 6명은 11월 4일에야 귀국했다.33)
政黨統合에 共産黨도 참가해야
이승만이 정당통합운동을 추진하면서 가장 신경을 쓴 것은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좌파인사들까지 참가시키는 문제였다. 그것은 하지 장군 등 미군정부 간부들이 이승만에게 기대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승만은 10월 22일 오후 1시30분에 조선호텔에서 재경신문기자단과 정식으로 회견을 가졌는데, 이 자리에서도 그는 공산당을 의식한 여러가지 이야기를 했다. 38도선문제와 관련하여 소련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1896년의 아관파천(俄館播遷)때의 일까지 거론하면서 소련에 대한 친근감을 표시했다.
“나는 미국에 있을 때에 모스크바에서 전한 소식을 들으면 나는 반공주의자라는 지칭을 받았으나, 나 자신은 소련에 대하여 하등의 감정이 없다. 얼마 전에 워싱턴에 있는 소련대사에게 서울주재 소련영사가 보고한 바에 의하면 조선을 소련통치하에 두리라고 할 듯한데 귀하의 의견을 들려달라고 한 일이 있다. 러시아와 조선은 1884년에 통상협정을 한 일이 있어서 실제적 우의가 좋았고, 또 1895년에 명성황후(明成皇后)께서 일인에게 모해(謀害)를 당했을 때에 고종께서 아관[俄館: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 계신 일이라든지, 일인의 압정을 피하여 시베리아로 유랑의 길을 떠난 한인들을 후히 지도 보호해준 사실과 교통 외교가 전부터 특수하다는 것을 나는 주미소련대사에게 역설했던 것이다.…”
이승만은 이렇게 말하고는 “그러나 오늘의 현상에 비추어 국제적 우의도 좋으나 우리나라의 생명 주권도 국제적 우의보다 선결해야 할 문제라는 것을 나는 또한 주장하고 싶다”고 역설했다.
38도선 이북에서는 모든 권리가 인민의 수중으로 들어갔는데 이남은 그렇지 않으니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우선 강토환원(疆土還元)부터 해야한다면서 모호하게 대답했다. 강토환원부터 해야한다는 말은 소련군 점령아래 있는 북한지역을 찾아야 한다는 뜻으로서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그러한 이승만이 북한에서는 모든 권리가 인민의 수중으로 들어갔다는 기자들과 이 시점에서 입씨름을 벌일 필요는 없었다.
“38도선 이북에 대한 비난과 여러가지 사실을 다 듣고 있으므로 종합적인 해답도 들어 갈 것이나, 하여간 침묵을 지킬 수는 없다. 남북의 우리 강토를 회복해야하므로 북방에서 어떠한 복리를 그곳 주민에게 주든 혹은 남방 미군이 어떠한 복리를 주든 이러한 분할적 복리로서 만족한 것이 아니므로 우선 강토환원의 장애는 제거해야 할 것이다.…”
인민공화국 인사들의 주석취임 요청에 자신이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보도에 대해서 묻자 이승만은 “들으니까 주석으로 추천되었다고도 하나 전혀 알지 못하는 일이며, 취임하겠다고 호의를 표한 일도 없다” 하고 조심스럽게 부인했다. 그러고는 “내일 이 자리에서 각 정당 대표들과 회동하고, 그들의 제안을 들어 종합적으로 검토한 뒤에 구체적인 방책을 강구해 낼 작정”이라고 밝혔다.34)
기자회견이 끝나자 이승만은 망우리 묘지로 손병희(孫秉熙)와 안창호(安昌浩)의 묘소를 찾아갔다. 3·1운동때 민족대표 33인의 대표자였던 손병희와 상해임시정부의 실질적인 지도자였던 안창호의 묘소를 찾은 것은 퍽 상징성이 있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손병희의 묘는 찾을 수 없었다.35)
“지금 이 자리는 歷史를 만드는 모임”
맥아더 장군이나 하지 장군이 기대한 대로 이승만이 좌우익 정파를 망라한 “민족통일의 집결체”를 결성하는 데에는 긴 시일이 걸리지 않았다. 이승만이 귀국한지 1주일 뒤인 10월 23일 오후2시에 그가 묵고 있는 조선호텔에서 한민당, 국민당, 건국동맹, 조선공산당을 포함한 크고 작은 50여 정당 및 사회단체의 2명씩의 대표 200명가량이 모여 정당통합운동에 관한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는 이를테면 이승만의 “귀국후의 첫 정치공작”36)이었다.
회의소집 목적을 설명한 이승만의 개회사는 참석자들의 사명감과 자긍심을 자극하는 전형적인 선동정치가의 연설이었다.
“지금 이 자리는 역사를 만드는 모임이다. 내가 만리 타국에서 고국으로 돌아올 때의 유일한 목적은 여러분과 모여 간담을 헤치고 손을 맞잡고 서로 앞날의 일을 어떻게 해 나갈까를 논의하겠다는 것이었다. 그 순서를 결정하자는 것이 이 모임이다. 나의 이 모임에 바라는 바는 진실로 크다. 여러분도 클 것이다. 이 방안의 공기는 조용하나 세계 각국이 이 한곳을 지금 주목하고 있다.…”
이승만은 자신이 이 자리에서 희망하고 또 듣고싶은 것은 “무슨 정부조직이나 대행할 기관”을 만들자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임시정부를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요인들을 다음과 같이 추어올렸다.
“그 임시정부를 떠받들고 있는 사람들은 피를 흘려 싸워온 사람들이요 각국의 승인을 받은 터이다. 그분들도 하루바삐 고국에 돌아와 여러분과 손을 잡고 함께 우리들의 굳센 나라를 세우기를 염원하고 있다. 김구선생은 명예나 권리를 원하는 분이 아니다. 자신의 생명까지도 모르실 분이다. 전 인민이 좋은 정부를 조직하면 거기에 따라가실 분이다. 임시정부가 곧 못들어오는 이유는 중국공산당의 간섭이 있었던 듯싶다. … 그리하여 전 국민이 바라는 인도자를 내세워 민심을 통솔하게 되면 세계 각국도 우리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듯하면서도, 김구는 전인민이 좋은 정부를 조직하면 거기에 따라갈 사람이라고 한데서 보듯이, 미묘한 뉘앙스를 함축한 말이었다. 이승만은 이어 모든 정파가 “한덩어리로 뭉칠 것”을 강조했다.
이승만은 다음과 같은 수사로 열변을 마무리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억지로 뭉치라고 강요하지도 아니하고 또 뭉쳐 만들려 하지도 아니한다. 여러분들이 뭉쳐서 조선사람들에게 실감을 가르쳐라. … 우리가 죽으려면 죽고 살려면 살 길이 이 자리에 있다. 깊이 생각하라. 나의 묻고자 하는 것은, 듣고자 하는 것은 어느 단체의 편협된 의견이 아니라 3천만 민족의 원하는 바를 대표하는 부르짖음이다. 타국사람이 조선을 알려고 하면 곧 가서 물어볼 만한 책임있는 기관을 만들어야 한다. … 그리하여 이 방을 나갈 때에는 기쁨의 만세를 부르고 나가도록 약속하자.”
그러나 “정부조직이나 대행할 기관”도 아니면서, 조선을 알려고 하는 외국사람이 곧 가서 물어볼 만한 “책임있는 기관”이란 성격이 애매할 수밖에 없었다.
獨立促成中央協議會 결성하고 會長으로 추대돼
이승만의 연설이 끝나고 각 단체 대표들의 토론이 어어졌다. 토론자들의 의견이 한결같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먼저 좌익단체인 학병동맹(學兵同盟)의 대표는 “대동단결하려면 먼저 매국노와 민족반역자를 처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공산당의 이현상은 문제는 둘중의 하나인데 그것은 “대한임시정부를 모셔다가 개조하느냐 그대로 두느냐와 조선인민공화국을 더욱 강화시켜 국내 해외를 망라하여 재조직하느냐에 있다”고 잘라 말했다. 그러므로 전민족의 대표가 모여 좀더 신중히 의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한민당의 원세훈은 “임시정부를 국가의 최고기관으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하고, 그 기관 아래서 민족반역자나 매국노도 처단해야 하며 북위 38도문제도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건국동맹(建國同盟)의 이기석(李基錫·李傑笑)은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인민공화국은 대립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느 특정한 정부에 의미를 두는 것보다는 정당의 통합이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절충론을 폈다.
이어 민중당(民衆黨) 대표와 여자국민당(女子國民黨)의 임영신으로부터 모든 것을 무조건으로 이승만에게 일임하여 그의 지도아래 움직이자는 동의가 있어서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그러자 이승만은 각당에서 대표 한사람씩을 추천하여 그들로 합동위원회를 조직하고, 이 합동위원회가 며칠안에 모여 구체적 방법을 강구하자고 제의했다. 이때에 안재홍이 나서서 각당 대표 한사람씩으로 구성될 회의 명칭을 독립촉성중앙협의회(獨立促成中央協議會)라고 하고, 회장에 이승만을 추대할 것과 회장에게 회의 소집에 관한 일체의 권한을 위임할 것을 제의했다. 안재홍의 제의는 만장일치의 박수로 가결되었다.37) 건국준비위원회의 명칭을 창안했던 안재홍은 두 번째로 역사적인 기관의 명칭을 지은 것이다.
안재홍의 주도로 독촉중협의 결성작업을 마친 이승만은 오후 4시부터 종로 YMCA 대강당에서 열린 전조선신문기자대회에 참석했다. 그는 지난날 자신도 『협성회회보』와 『제국신문(帝國新聞)』의 기자로 활동했던 일을 설명하면서 기자들의 책임감을 강조하는 축사를 했다.38)
敦岩莊으로 居處 옮겨
이튿날 이승만은 성북구 돈암동에 있는 장진섭(張震燮)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광산업으로 치부한 장진섭은 같은 황해도 출신인 장덕수의 부탁을 받고 자기 집을 내어놓았다. 산중턱에 위치한 이 집은 양옥과 한옥이 따로 있고 정원도 넓었다. 양옥은 이승만이 쓰고 한옥은 윤치영을 비롯한 비서들이 썼다. 이때부터 이 집을 돈암장(敦岩莊)이라고 불렀다.
이승만이 서둘러 돈암장으로 거처를 옮긴 것은 하루에도 300~400명씩 이승만을 보겠다고 몰려드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호텔로비는 시장처럼 붐볐고 갓쓴 시골 노인들은 화장실을 찾지 못하여 아무데서나 방뇨를 하고 떠들었다. 그리하여 미군 헌병이 줄을 치고 방문객을 정렬시키는 형편이었다.39) 이승만이 돈암장으로 옮긴 뒤로도 스미스(Smith) 부관은 매일 돈암장으로 출근하여 이승만을 도왔다. 하지 장군은 무장한 미군헌병 1개 분대와 학병출신으로 미군정에 소속되어 있는 한국인 청년학도병 13명을 이치업(李致業) 대위 인솔로 보내주어 돈암장을 경비하게 했다.40)
돈암장으로 옮기면서 이승만의 생활비는 한민당에서 대기로 했는데, 송진우는 약속대로 매달 꼬박꼬박 10만원 내지 15만원의 생활비를 보내왔다.41) 이승만의 활동자금은 거의가 한민당 관계자들로부터 나왔다. 조선 제일의 부호인 태창직물(泰昌織物)의 백낙승(白樂承)도 송진우의 권유로 이승만을 후원했고, 김성수(金性洙)도 이승만의 생활비 일부를 부담했다. 이렇게 들어오는 후원금은 윤치영, 허정, 송필만(宋必滿)이 관리했다.42) 비서진도 확충되었는데, 미국에 유학하여 허정이 『삼일신보(三一申報)』를 발행하는 일을 도왔고 귀국해서는 국일관 지배인으로 있었던 이기붕(李起鵬)은 이때부터 돈암장의 살림을 총괄했다.43) 국학자 정인보(鄭寅普)의 문하생 윤석오(尹錫五)도 송진우의 주선으로 이승만의 비서가 되었다.
빈센트의 信託統治 발언으로 政局 요동쳐
독촉중협의 결성과 때를 같이하여 서울정국은 미국무부 극동국장 빈센트(John C. Vincent)의 한국신탁통치 발언문제로 또다시 요동쳤다. 빈센트는 10월 20일에 미국외교정책협회(Foreign Policy Association)에서 “극동에서의 전후시기”라는 제목으로 한 연설을 통하여, 한국은 오랫동안 일본 통치아래 있었기 때문에 자치를 행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므로 당분간 미국, 소련, 영국, 중국 4개국이 공동관리하는 신탁통치를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빈센트의 이날의 발언은 비록 비공식적이기는 했으나 4개국이 합의한 한국처리 방침을 미국무부 고위관리가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천명한 것이었다. 이 뉴스가 서울에 전해진 것은 10월 22일이었다. 이승만이 독촉중협을 결성하는 날인 10월 23일 오전에 아널드 군정장관을 방문한 것도 빈센트의 발언에 대한 대책을 협의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44) 하지 장군은 맥아더 장군과 협의하기 위하여 10월 24일 아침에 급히 도쿄로 갔다.45)
우려했던 신탁통치문제가 빈센트의 발언으로 현실문제로 나타나자 각 정당은 일제히 반대하고 나섰다. 안재홍은 한국에서 신탁통치가 실시되지 않기 위해서는 진행중의 정당통합작업이 빨리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했고,46) 한민당은 10월 25일 아침에 간부회의를 열어 신탁관리제는 한국인을 모욕하는 발언이라고 규정하고 이승만과 다른 정당들과 함께 한국의 절대독립을 위한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47) 좌익인사들도 일제히 반대하고 나왔다. 인민공화국은 해방 이후에 인민공화국이 조직된 것이 곧 한국의 자치능력이 갖추어져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주장했고,48) 조선공산당의 정태식(鄭泰植)은 다른 당과 공조하여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펼쳐나가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49) 건국동맹도 신탁통치는 한국을 짧은 시간안에 관찰한 근시안적인 발상이며 한국국민의 의사에 반대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50)
한국인들의 심한 반발에 부딪히자 미군정부는 당황했다. 급히 도쿄에 다녀온 하지 장군은 10월28일에 이승만을 만나 빈센트의 신탁통치 발언은 반드시 실현될 사항은 아니라고 말했고,51) 10월 31일에 송진우를 만나서는 한국의 지식인들에게 전해달라면서 “신탁통치를 운운하나 이것은 극동국장 일개인의 의견이요, 그 사람이 조선정치를 좌우할 지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조선사람이 결속하여 독립할만한 힘을 보이면 이제라도 나는 독립을 승인하겠다”라고 권한밖의 발언까지 했다.52) 아널드 군정장관도 10월 30일에 기자들에게 빈센트의 발언은 개인의 의사에 지나지 않고 미국정부의 공식 방침은 아니라고 비슷한 말을 했다.53) 한민당은 하지의 말을 「조선지식계급에게 소(訴)함」이라는 전단으로 만들어 배포했다.54)
한편 각정당행동통일위원회는 10월 26일에 각 정당 및 단체대표 100여명이 일본생명 빌딩에서 회의를 열고 신탁통치문제와 독촉중협문제를 집중적으로 논의했다. 회의는 신탁통치 반대 여론을 일으키기 위한 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그 실행위원으로 국민당의 안재홍, 조선공산당의 김형선(金炯善), 통일기성회의 이갑성 세사람을 지명하고, 신탁통치에 절대 반대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독촉중협문제에 관해서는 강화해야 한다는 전제로 여러 가지 의견이 나왔으나, 결국 “민의를 존중하는 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하여 인민공화국정부와 해외임시정부의 양 진영이 모두 납득할 수 있는 조직체가 되도록” 이승만에게 진언하기로 결의했다. 그리고 독촉중협의 발전과정을 보아서 적당한 시기에 행동통일위원회는 해산하기로 했다.55)
3.「聯合國과 아메리카民衆에게 보내는 決議文」
독촉중협이 명실상부한 민족통일의 집결체가 되기 위해서는 좌익정파들도 적극적으로 참가해야 했다. 좌익세력 가운데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참가한 그룹은 장안파공산당 인사들이었다. 10월 13일에 평양에서 열린 조선공산당 서북5도책임자 및 열성자대회에 참가했다가 극좌적인 트로츠키즘의 오류를 범했다는 비판을 받고 돌아온 장안파공산당 인사들은 김준연(金俊淵), 서상일(徐相日), 장택상(張澤相) 등 국민대회준비회 인사들의 주선으로 10월 17일에 명월관에서 한민당 및 국민당 대표들과 회합을 갖고 행동통일을 협의했다. 그리고 10월 24일에 동본사(東本社)의 국민대회준비회 사무실에서 다시 회의를 열고 중경임시정부 지지 등 3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하는 한편,56) 독촉중협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기로 했다.57)
“완전한 등화관제 아래” 열린 敦岩莊 회의
이승만은 10월25일부터 각 정파대표들과 협의를 시작했다. 맨 먼저 만난 인사들은 한민당, 국민당, 장안파공산당 대표들이었다. 이들은 이날 오후에 돈암장으로 이승만을 방문하고, 장시간에 걸쳐 회담했다. 참석자들은 한민당의 송진우, 원세훈, 백관수, 함상훈(咸尙勳), 박찬희(朴瓚熙), 국민당의 안재홍, 국민대회준비회의 서상일, 김준연, 장안파공산당의 최익한, 최성환(崔星煥), 서병조(徐柄肇) 등이었다.『매일신보』는 이 회의에 대해, 먼저 이승만박사로부터 미묘복잡한 국제정세의 설명이 장시간에 걸쳐 있은 다음 각 정당대표들 사이에 의견교환이 있었는데, 오후 4시까지 이어진 회의는 “완전한 등화관제 아래” 거행되어 상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고 맹랑한 표현을 써서 보도했다.58) 빈센트의 신탁통치 발언문제와 독촉중협 운영 방안문제가 집중적으로 논의되었을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 자리에서 이승만은 “국내전선의 통일만 있으면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한 여러문제를 해결할 자신이 있다”고 말했다고 보도되기도 했다.59)
한편 안재홍은 10월 26일에 양주(楊州)의 시골집에서 상경한 여운형을 만났는데, 그 자리에서 두사람은 “국내전선통일은 이박사에 대한 국민적 신망이 최고조인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 없다”는데 의견이 일치했다.60) 그렇지만 안재홍과 여운형의 독촉중협에 대한 인식에는 차이가 있었다. 안재홍이 독촉중협을 귀국을 앞둔 중경임시정부를 맞아들여 효과적인 건국사업을 추진하게 하는 정당통합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데 비하여, 여운형은 중경임시정부와 인민공화국을 포함한 국내 및 해외의 각 정파를 망라한 과도연립정권의 수립을 위한 기관으로 상정했다.61) 그것은 행동통일위원회 인사들이 이승만에게 임시정부와 인민공화국 양 진영이 모두 납득할 수 있는 독촉중협이 되어줄 것을 진언하기로 한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여운형은 이날밤 돈암장으로 이승만을 찾아가서 두시간 동안 정당통합문제를 숙의했다. 이승만은 여운형에게 신탁통치 등 한국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당통합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강조했다.62) 여운형은 11월 1일 오전 10시에 다시 돈암장을 방문하여 두시간 동안 이승만과 요담했다.63)
朴憲永은 親日派배제 요구
이승만은 10월 29일에는 조선공산당의 박헌영을 돈암장으로 초청했다. 이승만은 전날 도쿄에 다녀온 하지와 만나서 신탁통치문제 등 당면문제를 심도있게 논의했는데, 이 자리에서는 정당통합운동에 공산당을 참가시키는 문제도 거론되었을 것이다.
이승만과 박헌영은 배석자없이 오후 4시부터 7시까지 세시간이나 의견을 나누었다. 회담내용은 박헌영이 러시아어로 작성한 기록만 보존되어있다. 이승만은 조선공산당도 독촉중협에 적극적으로 참가할 것을 촉구했고, 박헌영은 그 전제조건으로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를 배제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우리는 현시점에서 타국의 힘을 빌려 친일분자들과 민족반역자들을 처단할 수는 없다. 우리는 독립을 달성한 뒤에 자신의 정부의 힘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헌영은 장차 수립될 정부에 친일파가 들어와 정부안에서 지도적 지위를 차지하는 것을 어떻게 허용할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박헌영의 주장은 결국 우파민족주의그룹의 중심 세력인 한민당을 정당통합운동에서 배제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승만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다. 이승만이 자신도 장차 수립될 정부에 친일파가 들어와서는 안된다는 점에 동의한다고 하자, 박헌영은 “그렇다면 아직 문제될 것이 없다”고 양해했다.
두사람은 이어 인민공화국문제를 두고 설전을 벌였다. 이승만은 하지 중장이 인민공화국을 강제로 해산시키겠다고 말하는 것을 자기가 인민공화국을 조직한 사람들에게 정부를 해산하도록 설득하겠다고 약속하여 군정청의 강제 해산 조치를 중지시켰다고 말했다. 그러자 박헌영은 “미군정 아래서는 조선인들이 자신의 정부를 수립할 수 없다는 국제협약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고 강변하면서, 인민공화국은 이승만의 정치활동에 방해가 되는 존재가 아니라고 역설했다.64) 박헌영은 이승만과 면담하기에 앞서 10월 27일에 반도호텔의 하지 중장 사무실에서 그를 면담했었는데, 그 자리에서 하지는 미군정부의 시책에 공산당이 협조해 줄 것을 당부했고 이에 대해 박헌영은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를 배제한 상태에서 “진보적 민주주의 통일조국을 건설하려는 조선공산당의 정치노선은 미국의 이해와도 일치한다”고 주장했다.65) 이승만과 박헌영의 회담이 있은 뒤에 박헌영은 11월 2일에 천도교 강당에서 열리는 독촉중협 회의에 참석하기로 했다.
決議文 직접 作成하고 회의 주재
박헌영을 포함한 모든 정파의 대표들과 일련의 회담을 마친 이승만은 독촉중협의 두번째 공식회의를 11월 2일 오후2시에 천도교대강당에서 열기로 했다. 10월 23일에 조선호텔에서 열린 회의는 독촉중협의 발기인대회 같은 것이었고, 실제로는 이날의 회의가 창립대회인 제1차 회의였다. 이승만은 이 회의에서 채택할 「4개연합국과 아메리카민중에게 보내는 결의문」을 자신이 직접 영문과 국문 두가지로 작성했다.
이날의 회의에는 50여 정당과 사회단체 대표자들이 해방이후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인 것이었다. 회의 참석자들뿐만 아니라 회의를 참관하려고 몰려온 시민들로 회의장은 물론 바깥까지 붐볐다. 이승만은 처음부터 끝까지 의장으로서 회의를 직접 주재했다. 이승만은 개회사에서 “이 기관은 3천만 민중을 대표하여 독립을 촉성하는 중요한 회이다. … 시급한 문제는 38도선 철폐문제와 신탁관리 반대이며, 이것을 해결하려면 왈가왈부로 각당이 싸우지 말고 합심하여 완전독립을 기해야 한다. 이 관점에서 4대연합국과 미국민중에게 이 결의문을 보내자”라고 제의했다.66)
이승만은 이어 자신이 작성해온 결의문을 낭독했다. 그것은 주로 미국인들을 상대로 한 내용이었다. 결의문은 먼저 해방이후에 여러 정당이 발생했고 또 정당들 사이에 의견의 차이가 없지 않았으나, 그것은 민주주의 발전과정에 보통 있는 일이요 또한 “아메리카 민중이 그 모든 제도를 발달시키느라고 밟아온 길”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제 서울에 있는 각 정당은 독립촉성중앙협의회로 완전히 결합되었다고 말했다. 결의문은 이어 한국은 주권국가로서 영토적, 정치적, 행정적 모든 특권을 회복하는 권리를 요구한다고 말하고, 한국분단과 관련하여 연합국을 맹렬히 비판했다.
“조선을 남북의 양 점령구역으로 분할한 가장 중대한 과오는 우리의 자취(自取)한 바가 아니요 우리에게 강제된 바이다. 우리나라는 양단이 되었다. …귀 열국은 조선 사람이 분열되었으므로 자유국민의 자격이 없다 하나, 우리 조선을 마치 양단된 몸과 같이 양단한 것은 우리가 자취한 것이 아니요 귀 열국이 강행한 것을 이에 선명(宣明)하지 아니할 수 없다.… 우리는 맥아더 대장이나 하지 중장이나 군정장관 아널드 소장이나 이 양단정책에 대하여 하등 주지한 바가 없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 사실 그들은 우리 주장과 요구에 대하여 공평과 호의의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우리는 이 사태에 관한 책임자를 알고자하며 조선의 장래 운명을 결정함에 있어서 가장 중대한 관계가 있는 이 사실에 관하여 귀 열국의 명백한 성명을 요구하여 마지 아니한다. …”
이승만은 한국분단과 관련하여 그의 지론인 얄타밀약설을 넌지시 부각시키면서 연합국의 책임을 강조한 것이었다. 결의문은 이어 극동국장 빈센트의 신탁통치 발언에 대해 “우리는 이 제안이 미국의 조선정책에서 또한 중대한 과오가 될 것을 지적한다”고 비판했다.
1年이내에 總選擧 실시할 수 있어
결의문은 이처럼 연합국, 특히 미국정부의 대한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한 다음 연합국에 대한 ‘인식사항’으로 다음의 세가지를 들었다.
(1) 우리는 자주(自主)할진대 1년이내에 국내를 안돈(安頓)할 수 있을뿐 아니라 외국의 물질적, 기술적 후원으로써 비교적 단시일내에 평화로운 정상생활을 회복할 수 있다. 이 사실을 부인하는 자는 아직도 일본인 선전술에 마취되어 있는 자들이다.
(2) 우리는 연합국과 우호관계로써 협력할 것이며, 극동평화유지에 응분의 노력을 경주할 것이다.
(3) 우리 임시정부가 연합국의 승인하에 환도하면 1년이내에 국민선거를 단행할 것이요, 1919년에 선포된 독립선언서와 동년에 서울에서 건설된 임시정부의 취지에 의하야 천명된 민주주의의 정치원칙을 어디든지 존중할 것이다.67)
이렇듯이 이승만은 이 ‘인식사항’에서도 자신을 집정관총재로 선출했던 한성정부(漢城政府)의 정통성을 강조하는 집념을 보였다. 결의문은 이어 “조선인은 연합국과 싸운 일이 없고 따라서 연합국은 조선을 정복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귀 열국에 지적한다”고 말하고, 지난 40년 동안 일본과 싸워온 조선이 2차대전에서 한층 더 큰 규모로 대일전에 참여하지 못한 것은 “우리가 무기대여법의 정부와 민주주의국의 병기창으로부터 물질적 원조를 받지 못한데 기인한 것뿐이다”라고 다시한번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행정부를 꼬집었다.
이승만은 다음과 같은 말로 결의문을 마무리했다.
“우리는 정복된 적군의 대우에는 분격한다. 그것은 우리에 대한 일대 불의인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타개할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허여하기를 요구한다. 귀 열국이 참으로 우리의 행동으로써 우리를 판단할 것이요 우리에 대한 타(他)의 말로써 판단할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단연코 공동신탁제도를 거부하며, 기타 여하한 종류를 물론하고 완전독립 이외의 모든 정책을 반대한다.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위하여 전 생명을 바치기로 결의하였다. …”68)
朴憲永 “李承晩의 決議文이 너무 反美的”
이승만의 결의문 낭독이 끝나고 각 정당 대표들의 토론이 진행되었다. 우선 이 결의문을 연합국에 발송할 것인가에 대해 한민당의 원세훈과 국민당의 안재홍의 찬성 발언이 있어서 그대로 가결되었다. 이어 결의문 자체에 대한 가부토론에 들어갔다. 인민공화국의 농수산부 대리 이광(李珖)은 38도선문제에 대한 내용이 빈약하다고 주장했다. 가장 심각한 문제 제기를 하고 나선 것은 조선공산당 총서기 박헌영이었다. 그는 결의문 가운데 “우리 조선을 … 양단한 것은 우리가 자취한 것이 아니요 귀 열국이 강행한 것을 이에 선명하지 아니할 수 없다”는 구절과 ‘인식사항’ (3)항 가운데 “우리 임시정부가 연합국의 승인하에 …” 운운하는 것은 부당하다면서 삭제를 요구했다. 공산주의자의 우두머리인 박헌영이 친미주의자 이승만이 작성한 결의문이 한국을 해방시켜준 미국을 부당하게 비판했다고 하여 내용 일부의 삭제를 요구한 것이었다. 박헌영은 또 친일파를 철저히 배격함으로써만 민족통일이 완성된다는 원칙을 채택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이러한 요구들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공산당은 독촉중협에서 탈퇴하겠다고 열변을 토했다. 이어 한 학생대표가 이승만을 주석으로 하는 조선인민공화국 절대지지의 결의문을 낭독하다가 제지를 받고 결의문을 이승만에게 제출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장내가 소연하자 여운형이 “이박사의 결의문은 필요하며 38도선문제 및 신탁통치문제 해결 요구의 의의는 좋으나, 문구의 부당과 일부의 불충분한 점을 수정하자” 하고 문구의 수정을 제의하여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그리하여 여운형, 안재홍, 박헌영, 이갑성 네사람이 수정위원으로 선정되었다.
중앙집행위원 선정과 총본부 구성 방식을 두고도 각 정당의 입장 차이가 드러났으나, 안재홍의 제의에 따라 중앙집행위원 선출을 위한 전형위원 7명을 선정하되 그 선정은 이승만에게 위임하기로 결의했다.69) 이에 대해서는 박헌영도 손을 들어 찬성을 표시했다.70)
이승만은 폐회사에서 다시 민족단합을 길게 역설하고, “만일에 우리가 일치단결하여 민족통일전선을 건설하면 앞으로 3개월 이내에 반드시 서광이 올 것”이라고 자신에 찬 어조로 역설했다.71)
하지는 만족하여 맥아더에게 보고
하지 장군은 이승만이 독촉중협을 성공적으로 출범시킨 것을 보고 흡족해했다. 그는 11월 5일에 맥아더 장군에게 보낸 전문에서 “이승만박사의 존재는 다양한 정당의 통합과 여러 이념의 연합에 바람직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하고, 모든 한국인의 일차적인 염원도 독립과 자치를 획득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김구의 한국행이 확정된 것 같은데, 그가 도착하면 더 큰 통합을 위하여 이승만과 협력할 것으로 기대된다면서 앞으로의 계획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본관은 추가적으로 한국으로 귀환시킬 한국인들을 심사하는 일을 돕고, 현 군정부의 경제 재건계획에 대한 대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도출하며, 정부기구의 쇄신과 중앙정부 수반 휘하의 책임있는 정부직위에 실무자들로나 명목상의 장으로 적합하고 대표성있는 인물을 임명하는 일을 도울 대표성있고 확충된 연합고문회의를 설치하는데 이박사와 김구의 협력을 활용할 계획이다. …”
이처럼 하지는 이승만이 귀국할 때에 도쿄에서 애치슨(George Atcheson) 재일본 정치고문대리와 협의했고, 자신의 정치고문 베닝호프(H. Merrell Benninghoff)가 업무협의차 본국으로 떠날 때에 전한 메모랜덤에서 밝힌 자신의 구상을 실천에 옮길 방안으로 우선 기존의 고문회의를 이승만과 김구를 중심으로 확대할 것을 계획하고 있었다. 하지의 보고전문은 결론으로 “만일 이러한 작업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면 우리의 감독아래 시험적으로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만족할 수 있을 만한 가칭 과도적 한국행정부(AIB Korean Administration)를 설립하고, 적당한 시간이 지난 뒤에 총선거를 통하여 국민정부를 선출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72).
이승만이 서둘러 독촉중협을 결성한 것은 미군정부의 이러한 기본 구상과 깊이 관련된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 李承晩,「失題」,『自由新聞』 1945년 10월 17일자. 2) 朴鍾和,「獻詩-民族의 巨人 雩南李承晩先生께」,『自由新聞』 1945년 10월 20일자. 3)『自由新聞』1945년 10월 18일자~24일자,「李博士一生」. 4) 『新朝鮮報』1945년 10월 22일자, 26일자,「李承晩博士의 鬪爭生涯」. 5) 『中央新聞』1945년 11월 4일자,「李博士第一聲레코─드配布」.
6) 『自由新聞』1945년 10월 16일자,「社說: 李承晩博士를 歡迎함」. 7) 『每日新報』1945년 10월 17일자,「李博士歸國과 今後政局」. 8) 『自由新聞』1945년 10월 18일자,「名士陸續還至」. 9) 『新朝鮮報』1945년 10월 19일자,「李博士 맞이해 申興雨氏談」. 10) 『新朝鮮報』1945년 10월 18일자,「偉大한 指導者에 充實히 服從할 뿐」. 11) 『新朝鮮報』1945년 10월 18일자,「各黨의 統一促進」.
12) 『新朝鮮報』1945년 10월 19일자,「八月十五日後의 經過를 李博士에 文書로 報告」; 尹致暎, 『尹致暎의 20世紀』, 삼성출판사, 1991, p. 158. 13) 『每日新報』1945년 10월 18일자,「李博士歸國歡迎, 人民委員會談話發表」. 14) 『自由新聞』1945년 10월 19일자,「사랑하는 三千萬兄弟여 自主獨立에 一心協力하자」. 15) 雩南實錄編纂會,『雩南實錄(資料篇)』, 悅話堂, 1976, p. 309. 16) 『每日新報』1945년 10월 18일자,「李博士歸國歡迎」;『自由新聞』1945년 10월 19일자,「李博士歡迎會」.
17) 『每日新報』1945년 10월 19일자,「知名人士會見席上에서 李承晩博士熱辯」;『自由新聞』1945년 10월 19일자,「政黨統一의 示唆, 聲淚俱下의 熱辯!」. 18) 『自由新聞』1945년 10월 20일자,「우선 三千里江山 찻고 物과 心을 祖國에 밧치자」. 19) 『自由新聞』1945년 10월 20일자,「李博士三日會見」. 20) 『自由新聞』1945년 10월 21일자,「共和國主席就任懇請에 李博士好意를 表示」. 21) 許政,『내일을 위한 證言』, 샘터, 1979, pp. 116~117.
22) 『서울신문』1949년 6월 25일자,「尹炳求翁葬禮式에 李大統領吊辭」. 23) 남광규,「해방직후(1945. 9-11) 정당협력운동의 실패와 이승만, 박헌영의 임정견제」,『國際政治論叢』제46집 1호, 韓國國際政治學會, 2006. 4, pp. 145~147. 24) 『自由新聞』1945년 10월 14일자,「民族統一戰線을 爲하야 朝鮮建國協贊會活躍」및 10월 23일자,「民族統一戰線結成目標」. 25) 『每日新報』1945년 10월 19일자,「戰線統一俄然進展, 各黨首領繼續鳩首熟議」. 26) 李革 編, 『愛國삐라全集(第一輯)』, 祖國文化社, 1946, pp. 50~51.
27) 『自由新聞』1945년 10월 20일자,「李博士歸國을 契機로 各黨首統一期成會談」. 28) 『自由新聞』1945년 10월 21일자,「獨立促成意見一致, 李博士에 各黨首共同決議傳達」. 29) 『新朝鮮報』1945년 10월 22일자,「各黨代表者 李博士와 協議」. 30) 『每日新報』 1945년 10월 21일자, 「大衆앞에 첫번 盟誓, 聯合軍歡迎會壇上을 빌어서 李博士獅子吼」, 「建國의 決意도 鞏固」. 31) 『自由新聞』 1945년 10월 21일자, 「團合하라! 하지中將紹介로 李承晩博士大熱辯」. 32) Rhee to Oliver, Oct.21, 1945, Oliver Papers,『大韓民國史資料集(28) 李承晩關係書翰資料集(1)』, 國史編纂委員會, 1996, pp. 56~57.
33) 『自由新聞』 1945년 11월 6일자, 「在美六同胞實業家 4日公路로 歸朝」. 34) 『自由新聞』1945년 10월 23일자,「한덩어리로 뭉쳐라, 李博士新聞記者團과 會見絶叫」. 35) 『每日新報』1945년 10월 23일자,「島山, 義庵墓에 李承晩博士參拜」;『自由新聞』1945년 10월 23일자,「島山, 尤庵先生山所로」. 36) 『新朝鮮報』1945년 10월 25일자,「統一戰線의 一步前進」.
37) 『每日新報』1945년 10월 25일자,「二百餘名各黨代表會合 歷史的團結熟議」.
38) 『自由新聞』1945년 10월 25일자,「四社二百五十名出席 戰鬪的言論陳構築宣言」. 39) 윤치영,「나의 이력서(44) 敦岩莊시절」,『한국일보』1981년 9월 11일자. 40) 尹致暎, 『앞의 책, p. 161. 41) 古下先生傳記編纂委員會 編,『獨立을 향한 執念-古下宋鎭禹傳記』, 東亞日報社, 1990, p. 472. 42) 宋必滿 證言, 曺圭河-李庚文-姜聲才,『南北의 對話』, 고려원, 1987, p. 94. 43) 尹致暎, 앞의 책, pp. 161~162. 44) 『自由新聞』1945년 10월 24일자,「李承晩博士 아長官과 要談」. 45) 『自由新聞』1945년 10월 25일자,「하지中將急遽渡日에 注目」. 46) 『每日新報』1945년 10월 24일자, 「虛報이기를 切望한다」. 47) 『自由新聞』1945년 10월 26일자,「信託統治反對 韓國民主黨에서 決議」. 48) 『每日新報』1945년 10월 26일자,「生命을 걸고 排擊」. 49) 『每日新報』 1945년 10월 29일자, 「信託統治反對聲明」. 50) 『自由新聞』1945년 10월 28일자,「絶對自主獨立」및 10월 31일자,「民意를 歪曲捏造하는 徒輩들의 暗躍아닌가」.
51) 『自由新聞』1945년 10월 28일자,「李博士 하지中將, 今日注目되는 會見」및 10월 30일자,「信託統治說의 暗影拂拭도 三千萬의 完全集結로 可能」. 52) 『自由新聞』1945년 11월 5일자,「朝鮮의 幸福과 自由爲하야 大衆에 浸透實踐하라」. 53) 『每日新報』1945년 10월 31일자,「信託統治說은 個人意見」. 54) 李革 編, 앞의 책, pp, 56~58. 55) 『每日新報』1945년 10월 29일자,「信託統治反對聲明, 各政黨行動統一全體委員會決議」. 56) 『自由新聞』1945년 10월 27일자,「獨立戰線統一코저 三黨一致團結決定」. 57) 宋南憲,『解放三年史Ⅰ』, 까치, 1985, p. 233. 58) 『每日新報』1945년 10월 28일자,「某處에서 秘密會談」. 59) 『新朝鮮報』1945년 10월 26일자,「獨立促成中央協議會 具體的構成案을 討議」. 60) 『自由新聞』1945년 10월 27일자,「李博士를 中心으로 各黨首往來活潑, 呂安兩氏意見一致」. 61) 남광규, 앞의 글, p. 149. 62) 『自由新聞』1945년 10월 27일자,「李博士를 中心으로 各黨首往來活潑, 呂安兩氏意見一致」.
63) 『自由新聞』1945년 11월 2일자,「李承晩博士와 呂運亨氏要談」. 64) 「박헌영 동지와 이승만 박사의 회담」(1945. 10. 31), 이정박헌영전집편집위원회,『이정박헌영전집(2)』, 역사비평사, 2004, pp. 66~68. 65) 「조선공산당 총비서 박헌영 동지와 미 제24군사령관 하지 중장의 회담」(1945. 10. 27),『이정박헌영전집(2)』, pp. 62~66. 66) 『每日新報』1945년 11월 4일자,「感激깊은 第一回獨立促成中央協議會經過」.
67) 『自由新聞』1945년 11월 3일자,「李博士起草決議書全文」. 68) 위와 같음.
69) 『每日新報』1945년 11월 4일자,「感激깊은 第一回獨立促成中央協議會經過」. 70) 金?洙 口述,『遲耘 金?洙』,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9, pp. 151~152. 71) 『新朝鮮報』1945년 11월 3일자,「李承晩博士團結을 絶叫」. 72) MacArthur to Marshall, Nov.5, 1945,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45, vol. Ⅵ, Government Printing Office, 1969, p. 1112.
이승만은 서둘러 거처를 돈암장(敦岩莊)으로 옮겼다. 하루에도 300~400명씩 몰려드는 인파 때문이었다.
11월 2일 천도교(天道敎) 강당에서 열린 독촉중협(獨促中協)의 제1차 회의에는 정당 및 사회단체 대표들뿐만 아니라 일반시민들도 몰려들어 성황을 이루었다. 의장인 이승만은 이 회의에서 채택한 결의문도 직접 작성했는데, 공산당의 박헌영(朴憲永)은 결의문이 미국을 너무 비판했다고 이의를 제기하여 수정하기로 했다. 회의는 중앙집행위원을 선출할 전형위원 7명을 선정하기로 하고, 전형위원 선정은 이승만에게 위임했다.
하지 장군은 이승만이 독촉중협을 성공적으로 출범시킨 것을 보고 흡족해했다. 그는 이승만과 김구(金九)를 중심으로 과도적 한국행정부 설립 구상을 맥아더에게 보고했다.
1. ‘李承晩現像’으로 政黨統合運動 급진전

失題 제목을 잃음
忘老唯思國 늙음을 잊고 나라생각뿐이었네
槿域三千里. 근역[무궁화땅] 삼천리.
雖貧不議飢 가난해도 굶는다 소리내지 않고
誰開太平基. 그 누가 태평의 터전을 열꼬.
뒤이어 소설가 박종화(朴鍾和)의 “헌시―민족의 거인 우남 이승만선생께”라는 시도 실리고,2) “이승만박사일생”,3) “이승만박사의 투쟁생애”4) 등의 연재물과 청년시절의 옥중생활 사진 등도 크게 실렸다. 대한독립협회(大韓獨立協會)라는 단체에서는 이승만의 귀국 제1성을 취입한 레코드판을 제작하여 각 학교와 기관에 배포하기도 했다.5)
이때의 신문들은 대부분이 좌경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기사뿐만 아니라 사설에서까지 이승만에 대하여 “하시다” 등의 존댓말을 썼다. 그것은 개화기 신문들의 왕실 기사에서나 볼 수 있었던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한 달 남짓 뒤에 김구가 귀국할 때에도 그러지 않았다. 그러면서 “일찍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세운 마사릭(Tomas G. Masaryk) 대통령의 망명생활은 이같이 장구하지는 않았던 것이며, 중화민국의 영구한 총리 손문(孫文)의 일생도 이같이 고난의 기록은 아니었다”6)라고 이승만을 추앙했다.
“平民의 자격으로 歸國했다고 했으나…”
이승만의 귀국과 관련하여 신문들은 비교적 정확한 인식을 하고 있었다. 『매일신보(每日新報)』는 이승만이 도착한 이튿날 다음과 같은 해설 기사를 실었다.
“이승만박사의 귀국은 우리 정국에서 중대한 파문을 던질 것이다. … 그동안 조선의 미국군정당국의 의향이라고 할만한 점을 살펴도 현재 여러 정당이 있어서 논의가 분분하니 이래서는 안되겠다, 하루바삐 전 정당이 조선의 완전독립이라는 최대의 운동 목표를 향하야 행동을 같이 하도록 뭉쳐야 할 것이다 라는 의견을 가지고 현재의 정당운동을 더욱 강력하게 전 민중적인 신망과 권위를 가지게 할 필요가 있다고 하야, 조선내에서만 아니고 해외에 있는 국내국민의 신망높으신 분을 귀국케하야 각 정당운동을 강력히 지도하려는 의도이었음을 알 수 있다. …”
그리하여 본국정부와 연락하여 미국에 있는 이승만을 귀국시켰다는 것이었다. 이 해설기사는 앞으로의 정국전개를 다음과 같이 전망했다.
“이박사는 한 평민의 자격으로 귀국한 것이라고 극히 겸손한 태도를 보이고 있으나 박사의 귀국은 군정당국에 대한 협조와 아울러 금후 국내의 건국운동을 강력히 추진시키도록 전력을 다하실 것은 물론이다. … 또 그뿐이 아니고 이박사의 귀국에 따라서 중경(重慶)에 있는 임시정부요인도 머지않아 한두분 이박사와 마찬가지로 역시 ‘개인의 자격’으로 귀국하야 이박사와 같이 당면의 민중의 독립운동을 추진시킬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금후의 우리 독립국가건설의 큰 운동은 여러 가지 각도로 극히 활발히 전개될 것으로 보인다.”7)
申興雨 “李承晩이 트루먼이 내어준 美軍用機 타고 왔다”
이승만은 귀국한 이튿날부터 몰려드는 방문객들을 접견하기에 눈코 뜰 사이가 없었다. 10월 17일 오전에 군정청 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와서는 신흥우(申興雨), 장덕수(張德秀), 이훈구(李勳求), 임영신(任永信) 등을 만났다.8)
한성감옥서때의 옥중동지였던 신흥우는 일본점령기에도 한국YMCA의 대표자격으로 호놀룰루에서 열린 태평양회의를 비롯하여 기독교 관계의 각종 국제회의에 참석하면서 이승만을 만났고, 1925년에는 이승만이 이끄는 동지회(同志會)와 연계하여 국내의 이승만 지지단체로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를 조직했으며, 그 때문에 1938년에 일본 경찰에 검거되기도 했었다(『月刊朝鮮』 2005년 11월호, 「호놀룰루太平洋會議의 韓國代表團」참조).
신흥우가 이승만과 면담한 이야기도 신문에 크게 보도되었는데, 신흥우는 이승만이 트루먼(Harry S. Truman) 미국 대통령 등이 미군용기를 제공하고 모든 편의를 도와주어서 귀국하게 되었다고 말했다는 것이었다.9) 이러한 기사는 이승만의 귀국사실이 턱없이 과장되어 전해지게 했다.
신흥우의 말보다 더욱 희떠운 것은 여운형의 반응이었다. 여운형은 기자들에게 자신이 이승만을 안 것은 한-일합병 이전에 이승만이 연희전문학교의 전신인 서울 컬레지에서 심리학을 강의할 때에 청강생으로서 그 강의를 들은 때부터라고 말하고, “인민공화국으로서는 주석으로 맞이할 것이고 여운형 개인으로서는 선배로 맞이할 것”이라고 말했다. 인민공화국에서는 “주석, 즉 대통령으로” 추대하였고, “국가조직법이라든지 임시헌장에 대통령독재에 가까울만치 되어 있어서 … 박사의 의사대로 부서라든지 국가체계라든지를 결정할 예정으로” 되어 있다고 했다. 그리하여 이승만이 “민족최고의 지도자로서 잘 지도해 주실 것이므로” 자기는 “그 지도에 충실히 복종할 뿐”이라는 것이었다. 여운형은 또 이승만이 “동양화(東洋畵)를 잘하시고 한시(漢詩)에도 조예가 깊으며 … 동양의 역사와 사상을 잘 알고 계신다”고도 했다.10) 조선공산당의 이현상(李鉉相)도 이승만이 “우리의 자주독립을 위하야 무조건 통일하자는데에는 절대 동감이다”라고 말했다.11)
여운형은 이날 오후 2시에 인민공화국 부주석 자격으로 국무총리 허헌(許憲)과 함께 보안부장 최용달(崔容達), 서기장 이강국(李康國)을 대동하고 조선호텔로 이승만을 예방했다. 그들은 8월 15일 이후의 국내정세보고서와 참고자료들을 챙겨 가지고 갔다. 이승만은 이들이 인민공화국 대표 자격으로 면담을 요청한다는 윤치영(尹致暎)의 말을 듣고, 개인자격이 아닌 인민공화국 대표 자격으로는 만날 수 없고 또 아직 여독이 풀리지 않았다면서 다음에 만나자고 했다.12) 그러면서도 그는 이들이 제출한 8월 15일 이후의 국내정세보고서와 참고자료들은 받았다.13)
이승만은 매일 오후 2시를 각계 인사들과 면담하는 시간으로 정하여 발표한 다음 이날 저녁에 있을 라디오 방송 연설문을 준비했다.
저녁 7시30분부터 20분동안 서울중앙방송국의 전파를 통하여 흘러 나오는 이승만의 육성을 들은 국민들이 얼마나 놀라고 감격했을 것인가는 상상하기에 어렵지 않다. 이승만은 다음과 같은 말로 연설을 시작했다.
“조선을 떠난지 33년만에 처음으로 돌아와서 그립던 산천과 고국남녀 동포를 만나니 기뻐서 웃고도 싶고 슬퍼서 울고도 싶다.…”
이어 그는 중국에 있는 임시정부 당국자들과 상의하여 김구와 같이 돌아오려고 했으나 “중국방면에 여러 가지 장해가 많아서” 함께 오지 못했다고 말하고, 미국군용비행기로 태평양을 건너왔다고 했다. 이승만은 먼저 미국정부와 약속한 대로 ‘개인자격’으로 귀국한 사실을 강조했다.
그는 이어 “이 말을 일반 동포에게 일일이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하고는, 미국은 트루먼 대통령이하 정부당국자들이나 전 국민이 한국의 독립을 절대로 주장하고 있고, 귀국하면서 보니까 맥아더 대장, 하지 중장, 아널드(Archibald V. Arnold) 소장은 모두 우리의 동정자들이었다고 말했다. 미국정부의 정책이나 국민여론을 훤히 꿰뚫고 있고 특히 귀국도중에 미군정부의 최고책임자들을 만나서 깊은 대화를 나눈 듯이 시사한 것은 국민들로 하여금 그의 권위를 실감하게 했다.14)
이승만의 이 육성녹음은 일곱번이나 되풀이하여 방송되었다.15)
人民共和國은 主席귀국歡迎聲明 내고 歡迎會 준비
이승만이 미국정부와 주한미군정부의 지원으로 귀국했다고 판단한 인민공화국 관계자들은 이승만이 인민공화국 주석직을 수락할 것을 촉구했다. 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는 10월 18일에 이승만의 귀국을 환영하는 정중한 담화를 발표했다.
“조선인민공화국 주석 이승만박사는 드디어 귀국하였다. 삼천만 민중의 경앙대망(敬仰待望)의 적(的)이었던 만큼 전국은 환호로 넘치고 있다. 우리 해방운동에 있어 이박사의 위공(偉功)은 다시 말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조선인민공화국 주석으로서의 추대는 조선 인민의 총의이며 이러한 의미에 있어 해방조선은 독립조선으로의 위대한 지도자에게 충심의 감사와 만강의 환영을 바치는 것이다.”
중앙인민위원회는 또 주석 이승만박사 환영회를 곧 개최하기로 결의하고, 홍남표(洪南杓), 최용달, 이강국, 이여성(李如星), 홍덕유(洪悳裕), 조동호(趙東祜), 이상훈(李相薰) 7명을 준비위원으로 선정했다.16)
이튿날 오후 2시에는 60명가량의 각 정당 인사들과 친지들이 모여들어 개별 면담은 도저히 할 수 없었다. 이날의 상황은 기자들에게도 공개되었다. 이승만은 내방자 전원과 한사람씩 악수를 하면서 인사를 나누었다.
“백관수(白寬洙) 올시다.”
“오! 예. 재미 좋십니까?”
이승만은 한사람 한사람 소개받을 때마다 “오! 예”를 연발했다.
“김병로(金炳魯)입니다. 이렇게 건강한 모습을 뵈오니 대단히 감사합니다.”
“고맙소. 많이 일해주시오.”
“오 마이 디어 닥터 리” 하고 손을 내미는 여성은 연희전문학교 교수 최순주(崔淳周)의 부인이었다. 그녀는 하와이 한인중앙학원 시절의 제자였다. 이승만은 “오! 디어” 하며 그녀의 손을 잡고 영어로 잠시 하와이 동포 소식을 전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안재홍(安在鴻)과 만나는 장면이었다. 안재홍이 이끄는 국민당은 이날 오후 1시에 당원총회를 열어 이승만에게 최대의 경의와 최고의 예의를 표하는 감사 결의를 하고 그 결의문을 가지고 안재홍, 박용의(朴容義), 이승복(李承福), 이의식(李義植) 4명이 방문한 것이었다.
이승만이 1912년 봄에 105인사건을 피하여 두 번째로 도미하면서 도쿄에 들렀을 때에 안재홍은 와세다(早稻田)대학 학생으로서 그를 만났다. 그 뒤로 안재홍은 이승만이 발행하는 『태평양잡지』에 글을 기고하기도 했고, 1925년에 동지회의 국내지부로 흥업구락부가 비밀리에 결성될 때에도 참가했다. 또 1927년에 안재홍이 중심이 되어 국내에 신간회(新幹會)가 결성되자 이승만은 미주와 하와이에 신간회지부 결성문제를 검토하기도 했다.
안재홍은 이승만 앞으로 나와 안경을 반쯤 벗으며 감격에 사무쳐 말이 얼른 나오지 않는지 눈물을 짓고 한참 섰다가 입을 열었다.
“안재홍입니다. 이렇게 뵈오니 다만 고맙습니다.”
이승만도 힘있게 악수를 하면서 말했다.
“수고하십니다. 또 만나서 이야기합시다.”
별도로 다시 만나자는 뜻이었다. 이날의 방문객 가운데에는 최익한(崔益翰), 정광호(鄭廣浩), 한학수(韓學洙) 등 장안파공산당 인사들도 있었다. 안재홍은 10월 20일 저녁에 국민당 수뇌부와 함께 이승만을 다시 방문했다.
방문객들과의 악수가 끝나자 이승만은 다음과 같은 요지의 즉석연설을 했다. “여러분이 불초한 나를 지도자로 환영해 준 것에 대하야 만강의 치하를 드리는 바이며, 그렇게 지도자로 추대해준다면 나는 여러분을 유도해 나갈 자신과 책임을 갖지 않으면 안될 줄 안다. 그러나 우리의 과거의 운동계를 살펴볼 때에 거기에는 민족의 반역자가 없지 않아 이들의 모반으로 우리의 운동은 그 종국의 결실을 보지 못한 것이 수삼회가 아닌 만큼, 지금 이 자리에서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본의가 아니나, 만일에 여러분 중에서 나를 환영해주는 그 기분이 작심삼일로 그친다면 그 역시 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이러한 경우가 만분의 일이라도 있다면 나는 단호히 그와 상대하야 최후까지 투쟁할 것을 사양치 않을 것이며, 노골(老骨)이라 할지라도 과거의 경험을 살리어 죽음이라도 불사하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급한 문제, 즉 합동통일을 유일한 방법수단으로 하야 자주독립의 조급한 실현을 도모할 것만이 우리에게 맡겨진 절대한 과제라는 것을 믿고, 오직 이 길을 위하야 단합하는 전진이 있기만 바랄 뿐이다. … ”17)
그것은 참석자들로 하여금 이승만의 투사로서의 이러저러한 설화를 실감하게 하는 웅변이었다.
10월 19일에는 유억겸(兪億兼), 김활란(金活蘭), 이극로(李克魯), 오천석(吳天錫), 이묘묵(李卯默), 정인과(鄭仁果), 백낙준(白樂濬), 현동완(玄東完) 등 각계 인사 80여명이 이승만을 예방했다.18)
이날 이승만은 우리의 급한 문제는 “삼천리 강산을 찾는 것”이라면서 북한문제를 거론했다. 이때는 북조선5도인민위원회 연합대회가 열리고 조선공산당 북부조선분국이 결성된지 1주일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만일에 여러분이 나를 따르겠다면 나도 끝까지 싸움으로 일생을 마치겠다. 우리는 민생을 위하야 죽기를 배우자. 북쪽문제가 캄캄하다. 지금이라도 뛰어가서 보고싶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나아갈 길이 있는 것을 확신한다. 나에게 계획이 있다. 우리도 각각 한자리씩 분담해서 충실히 일하자. 돈과 힘을 모아서 이 국가를 위하야 바치자. 그리하여 이 국가의 목숨을 살리자!”19)
이러한 이승만의 연설은, “나에게 계획이 있다”는 단호한 주장에서 보듯이, 추종자들에게 확신을 심어줌으로써 자신의 지도력을 강화하는 대중정치가의 전형적인 정치행태였다.
金潤晶이 찾아와 “살려달라”고 애원해
이날 오후 2시쯤에는 인민공화국의 허헌, 홍남표, 최용달, 이강국이 이승만을 다시 예방했다. 이승만은 허헌과 30분가량 자리를 따로 했는데, 허헌은 이승만에게 “평소부터 존경했다”고 말하고 인민공화국의 수립 경위를 설명했다. 허헌은 이승만이 “인민공화국의 주석으로 추대된 것은 조선인민의 총의”라고 강조하고, 인민공화국 주석으로 취임해 줄 것을 간곡히 요청했다.20) 이 자리에 배석했던 한국민주당(이하 한민당)의 허정(許政)은 허헌에게 “선생님을 진정으로 존경한다면 어떻게 인민공화국 주석을 맡아달라고 할 수 있단 말이오?”하고 큰 소리로 항의했다. 이승만은 당황해하는 허헌을 바라보다가 자신은 일당일파에 몸을 담을 수 없고 지금 시급히 해야 할 일은 전 민족을 단합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21) 그것은 인민공화국 주석 취임 요청을 에둘러 거절하는 말이었다.
몰려드는 인파 가운데에서 한가지 특기할만한 것은 이승만이 일생동안 잊지 못했던 배반자 김윤정(金潤晶)이 찾아온 일이었다. 김윤정은 1905년에 이승만이 하와이의 윤병구(尹炳求) 목사와 함께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을 만나고 하와이 동포들의 청원서를 포츠머스 강화회의에 제출하기 위한 외교활동을 벌일 때에 주미공사관의 참서관으로 있으면서 이들의 활동을 무산시켰던 인물이었다(『月刊朝鮮』 2002년 12월호, 「청년 李承晩, 디어도어 루스벨트 大統領을 만나 호소하다」 참조). 한-일 합병 뒤로는 줄곧 부일협력자로 살아온 김윤정은 조선총독부 중추원(中樞院)의 참의로 있으면서 8·15해방을 맞았고, 9월 28일에 군정장관 아널드에 의하여 중추원 참의에서 파면되었다. 이승만은 뒷날 “내가 처음 환국하여 조선호텔로 들어올 적에 모든 동포가 환영하는 중에 김윤정이 따라와서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 후에는 다시 보이지 않더니 근자에 들으니 벌써 세상을 떠났다 합니다” 하고 적었다.22)
非政治團體 주동으로 政黨統合運動 추진돼
이승만이 귀국하자마자 각 정당정파가 무조건 함께 뭉칠 것을 외치고 나옴에 따라 9월중순부터 여러 갈래로 추진되고 있던 정당통합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정당통합운동은 비정치단체가 주동하여 정당협력을 추진시키는 방법, 비슷한 정당들의 통합, 정당들 사이의 정책 협력, 중요 정당지도자들의 간담회 등의 방식으로 전개되었다.23)
비정치단체가 주동한 정당통합운동의 하나는 손공린(孫公璘)의 조선건국협찬회(朝鮮建國協贊會)를 중심으로 하여 주로 우파민족주의 계열 군소정당들의 통합을 목표로 한 운동이었다. 이들은 9월 26일에 24개 가맹단체와 3개 운동단체가 참가하여 각당 통일전선 결성대표대회를 개최한데 이어 10월 20일에는 국일관에서 안재홍의 국민당, 이갑성(李甲成)의 신조선당, 최익환(崔益煥)의 대한인민정치당, 김진호(金鎭浩)의 조선혁명당 등 10개 정당의 당수 및 대표 50여명이 회동하여 정당합동간담회를 열었다.24)
비정치단체가 주동한 또 하나의 정당통합운동은 각당통일기성회(各黨統一期成會)에 의하여 추진되었다. 전국정치운동자후원회, 조선어학회, 학술원, 조선문화건설 중앙협의회 등 30여개의 비정치단체들은 9월 17일에 이극로(李克魯)를 중심으로 정치위원 10명을 선정하고, 9월 26일에는 천도교회관 강당에서 통일전선결성대회를 열었다. 이들은 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와 한민당의 통합을 요구했다.
앞에서 본 대로, 10월 5일에 양근환(梁謹煥)의 주선으로 동대문밖 임종상(林宗相)의 집에서 여운형, 송진우(宋鎭禹), 안재홍, 허헌 등 각 정파 대표자들이 8월 15일 이후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여 간담회를 개최한 것도 이러한 상황에 따른 것이었다. 이날의 간담회에는 공산당의 박헌영만 대리를 보냈었다(『月刊朝鮮』 2010년 7월호,「朝鮮人民共和國의 主席과 內務部長」참조).
“呂氏가 잘못했다고 종이에 써가지고 도장을 찍어와야 …”
정당통합운동의 대표적인 움직임은 한민당, 국민당, 조선공산당, 건국동맹을 포함한 32개 정당 및 사회단체 대표 55명이 10월 10일에 YMCA회관에 모여 북위 38도선문제와 일본인 재산 매매금지 및 거주제한문제에 관한 결의를 하고 상설기구로 각정당 행동통일위원회를 조직한 것이었다. 이승만이 귀국 제1성으로 정당통합을 역설하자 각정당 행동통일위원회가 바로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행동통일위원회는 10월 17일과 18일 이틀에 걸쳐서 회의를 열고 먼저 중요 정당의 당수 회합을 주선하기로 결의했다. 10월 5일의 간담회에 이은 두번째 당수회합이 될 것이었다. 그리하여 교섭위원으로 이갑성, 명제세(明濟世), 박문희(朴文熹) 등을 선정하여 각당 당수들과 교섭을 벌였다. 먼저 지난 당수간담회에 불참했던 박헌영으로부터 이번 회합에는 꼭 참석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국민당의 안재홍도 쾌락했다. 건국동맹의 여운형도 “통일을 위해서라면 무조건 참석하겠다”고 말했다. 한민당의 송진우만 부정적이었다. 송진우는 밤중에 집으로 찾아간 기자에게 “문제는 간단하다. 전번에도 그분네하고 회의를 한 일이 있지만, 근본적으로 인민공화국과 중경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두가지 정부가 대립되고 있는 한 몇 번 만나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요는 여(呂)씨가 인민공화국을 성립시킨 것을 잘못했다고 서면에 써서 도장을 찍어가지고 오지 않는 한 절대로 공식회담에는 참석하지 못하겠다” 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기자가 여운형은 통합을 위하여 인민공화국까지도 해산시킬 의사가 있는 것 같다고 하자 송진우는 “여씨의 그 의사를 누가 증명할 수 있는가. … 오늘이라도 그들이 실제로 인민공화국을 해산하며 그것을 수립한 일을 사죄한다면 얼마든지 만나겠다”하고 한마디로 일축했다.
이처럼 송진우는 인민공화국을 수립한 주동자가 여운형이고 건국준비위원회이래의 정국혼란의 큰 책임은 여운형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송진우는 그러나 10월 19일 오후 2시에 개최하기로 되어있는 40여개 단체의 회합에는 한민당에서도 대표를 파견하겠다고 말했다.25)
한민당은 이날 선전부 명의로 이승만이 전날 예방한 한민당 선전부장 함상훈(咸尙勳)에게 자기는 “김구씨를 절대로 지지한다”면서, “우리는 김구씨를 중심으로 정부를 조직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말했다는 내용의 전단을 만들어 배포했다.26)
행동통일위원회는 10월 19일 오후 2시부터 을지로 입구의 일본생명 빌딩[지금의 SK 네트웍스 본사 건물자리] 2층에서 다시 회의를 열었다. 이날 회의는 여운형, 안재홍, 이현상, 원세훈(元世勳), 김약수(金若水) 등 좌우익의 지도자들이 참가한 가운데 이갑성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이날 참가자들은 한국이 독립을 얻기 위해서는 정당통합이 먼저 달성되어야 하며, 이것을 통하여 독립의 정당성을 국제 여론에 호소해야 한다는 데에 뜻을 같이했다. 그리고 이러한 견해를 하지 장군에게 건의하여 국제여론을 일으키기로 했다.27) 이들은 회의를 마치자 조선호텔로 이승만을 찾아갔다.28) 38도선문제와 일본인재산매매금지문제에 대한 지침을 묻는 대표들에게 이승만은 그러한 지엽적인 문제보다는 정당통합이 시급히 이루어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리하여 10월23일 오후2시에 조선호텔에서 2명씩의 각정당 대표자들이 참석하는 회의를 개최하기로 했다.29)
2. 1週日만에 결성된 “民族統一의 集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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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0월 20일에 열린 聯合軍환영회에 운집한 3만여명의 群衆 앞에서 연설하는 李承晩. |
환영준비위원장 이인(李仁)의 개회사와 사무총장 조병옥(趙炳玉)의 환영사에 이어 하지 사령관의 답사가 있었다. 하지는 간단한 답사를 한 다음 이승만을 소개했다.
“한국은 자유이다. 자유란 위대한 것이다. 나는 한국이 영구히 자유로운 나라가 되기를 희망한다. 그런데 이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 일생을 바쳐 해외에서 싸운 분이 계시다. 그분이 지금 우리 앞에 계시다.”
하지는 옆에 앉은 이승만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 성대한 환영회도 위대한 한국의 지도자를 맞이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분은 압박자에게 쫓기어 조국을 떠났었지만, 그분의 힘은 크다. 그분은 개인의 야심이라고는 전혀 없다. 그분이 살아서 여기 와 계신다. 여러분은 그분이 이 자리에서 동포에게 ‘헬로’ 하고 외쳐 주기를 희망한다.”
그러면서 하지는 이승만의 등단을 청했다.30) 이승만의 연설은 예고된 환영회 순서에는 없던 것이었다. 이승만은 웃음을 띠며 마이크 앞으로 나와 먼저 영어로 하지와 아널드에게 인사말을 한 다음 한국어로 연설을 했다. 이승만은 국민의 가장 큰 관심사인 38도선문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번에 도쿄에서 맥아더 대장이 나에게 북위 38도선문제는 어떻게 된 일인가 하고 질문을 하였으며 이곳에 와서 하지 중장과 아널드 소장에게서도 이러한 질문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이를 대답 못했다. 그러나 문제를 잘 알고 잘 대답할 사람이 있으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문제를 알아야겠고 알아야할 권리가 있는 줄 안다. 그것을 아는 길은 자기를 버리고 다 합치는 그 길밖에 없으며, 이 길을 위하여 나는 앞잡이로 나설터이니 여러분도 다 같이 나와 함께 나아가자. …”31)
이 시점에서 하지 장군이 이승만에게 얼마나 큰 기대를 하고 있었는가는 이튿날 새벽에 이승만이 올리버(Robert T. Oliver)에게 쓴 편지에 잘 드러나 있다. 아침부터 몰려드는 방문객 때문에 이승만은 새벽 5시30분에 일어나서 침대에서 이 편지를 썼다.
임시정부나 해외한족연합위원회 관계자 등 재미 독립운동자들의 귀국과 관련해서 이승만은 “우리는 김구와 함께 공산주의 그룹을 제외한 몇몇 다른 사람들을 중경으로부터 데려올 계획을 하고 있다”, “하지 장군은 전경무(田耕武)를 포함한 6명의 군사령부 허가신청자들에게는 기다리라고 명령하고 윤병구에게만 귀국을 허가했다”고 적었다. 그것은 이승만의 의견이 반영된 조치였음을 말할 나위도 없다. 더욱 눈길을 끄는 것은 “하지 장군은 국무부에 초기정책을 변경하지 않으면 상황은 더욱 악화될 것이다 … 등등을 적어 보낸 성명의 사본을 나에게 보냈다”는 대목이다.32) 이처럼 하지는 군정부의 비밀공문서까지 보여주면서 이승만을 성원했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대표 김호(金呼), 송종익(宋鍾翊), 한시대(韓始大), 김병연(金秉堧), 김성락(金聖樂), 전경무 6명은 11월 4일에야 귀국했다.33)
政黨統合에 共産黨도 참가해야
이승만이 정당통합운동을 추진하면서 가장 신경을 쓴 것은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좌파인사들까지 참가시키는 문제였다. 그것은 하지 장군 등 미군정부 간부들이 이승만에게 기대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승만은 10월 22일 오후 1시30분에 조선호텔에서 재경신문기자단과 정식으로 회견을 가졌는데, 이 자리에서도 그는 공산당을 의식한 여러가지 이야기를 했다. 38도선문제와 관련하여 소련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1896년의 아관파천(俄館播遷)때의 일까지 거론하면서 소련에 대한 친근감을 표시했다.
“나는 미국에 있을 때에 모스크바에서 전한 소식을 들으면 나는 반공주의자라는 지칭을 받았으나, 나 자신은 소련에 대하여 하등의 감정이 없다. 얼마 전에 워싱턴에 있는 소련대사에게 서울주재 소련영사가 보고한 바에 의하면 조선을 소련통치하에 두리라고 할 듯한데 귀하의 의견을 들려달라고 한 일이 있다. 러시아와 조선은 1884년에 통상협정을 한 일이 있어서 실제적 우의가 좋았고, 또 1895년에 명성황후(明成皇后)께서 일인에게 모해(謀害)를 당했을 때에 고종께서 아관[俄館: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 계신 일이라든지, 일인의 압정을 피하여 시베리아로 유랑의 길을 떠난 한인들을 후히 지도 보호해준 사실과 교통 외교가 전부터 특수하다는 것을 나는 주미소련대사에게 역설했던 것이다.…”
이승만은 이렇게 말하고는 “그러나 오늘의 현상에 비추어 국제적 우의도 좋으나 우리나라의 생명 주권도 국제적 우의보다 선결해야 할 문제라는 것을 나는 또한 주장하고 싶다”고 역설했다.
38도선 이북에서는 모든 권리가 인민의 수중으로 들어갔는데 이남은 그렇지 않으니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우선 강토환원(疆土還元)부터 해야한다면서 모호하게 대답했다. 강토환원부터 해야한다는 말은 소련군 점령아래 있는 북한지역을 찾아야 한다는 뜻으로서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그러한 이승만이 북한에서는 모든 권리가 인민의 수중으로 들어갔다는 기자들과 이 시점에서 입씨름을 벌일 필요는 없었다.
“38도선 이북에 대한 비난과 여러가지 사실을 다 듣고 있으므로 종합적인 해답도 들어 갈 것이나, 하여간 침묵을 지킬 수는 없다. 남북의 우리 강토를 회복해야하므로 북방에서 어떠한 복리를 그곳 주민에게 주든 혹은 남방 미군이 어떠한 복리를 주든 이러한 분할적 복리로서 만족한 것이 아니므로 우선 강토환원의 장애는 제거해야 할 것이다.…”
인민공화국 인사들의 주석취임 요청에 자신이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보도에 대해서 묻자 이승만은 “들으니까 주석으로 추천되었다고도 하나 전혀 알지 못하는 일이며, 취임하겠다고 호의를 표한 일도 없다” 하고 조심스럽게 부인했다. 그러고는 “내일 이 자리에서 각 정당 대표들과 회동하고, 그들의 제안을 들어 종합적으로 검토한 뒤에 구체적인 방책을 강구해 낼 작정”이라고 밝혔다.34)
기자회견이 끝나자 이승만은 망우리 묘지로 손병희(孫秉熙)와 안창호(安昌浩)의 묘소를 찾아갔다. 3·1운동때 민족대표 33인의 대표자였던 손병희와 상해임시정부의 실질적인 지도자였던 안창호의 묘소를 찾은 것은 퍽 상징성이 있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손병희의 묘는 찾을 수 없었다.35)
“지금 이 자리는 歷史를 만드는 모임”
맥아더 장군이나 하지 장군이 기대한 대로 이승만이 좌우익 정파를 망라한 “민족통일의 집결체”를 결성하는 데에는 긴 시일이 걸리지 않았다. 이승만이 귀국한지 1주일 뒤인 10월 23일 오후2시에 그가 묵고 있는 조선호텔에서 한민당, 국민당, 건국동맹, 조선공산당을 포함한 크고 작은 50여 정당 및 사회단체의 2명씩의 대표 200명가량이 모여 정당통합운동에 관한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는 이를테면 이승만의 “귀국후의 첫 정치공작”36)이었다.
회의소집 목적을 설명한 이승만의 개회사는 참석자들의 사명감과 자긍심을 자극하는 전형적인 선동정치가의 연설이었다.
“지금 이 자리는 역사를 만드는 모임이다. 내가 만리 타국에서 고국으로 돌아올 때의 유일한 목적은 여러분과 모여 간담을 헤치고 손을 맞잡고 서로 앞날의 일을 어떻게 해 나갈까를 논의하겠다는 것이었다. 그 순서를 결정하자는 것이 이 모임이다. 나의 이 모임에 바라는 바는 진실로 크다. 여러분도 클 것이다. 이 방안의 공기는 조용하나 세계 각국이 이 한곳을 지금 주목하고 있다.…”
이승만은 자신이 이 자리에서 희망하고 또 듣고싶은 것은 “무슨 정부조직이나 대행할 기관”을 만들자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임시정부를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요인들을 다음과 같이 추어올렸다.
“그 임시정부를 떠받들고 있는 사람들은 피를 흘려 싸워온 사람들이요 각국의 승인을 받은 터이다. 그분들도 하루바삐 고국에 돌아와 여러분과 손을 잡고 함께 우리들의 굳센 나라를 세우기를 염원하고 있다. 김구선생은 명예나 권리를 원하는 분이 아니다. 자신의 생명까지도 모르실 분이다. 전 인민이 좋은 정부를 조직하면 거기에 따라가실 분이다. 임시정부가 곧 못들어오는 이유는 중국공산당의 간섭이 있었던 듯싶다. … 그리하여 전 국민이 바라는 인도자를 내세워 민심을 통솔하게 되면 세계 각국도 우리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듯하면서도, 김구는 전인민이 좋은 정부를 조직하면 거기에 따라갈 사람이라고 한데서 보듯이, 미묘한 뉘앙스를 함축한 말이었다. 이승만은 이어 모든 정파가 “한덩어리로 뭉칠 것”을 강조했다.
이승만은 다음과 같은 수사로 열변을 마무리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억지로 뭉치라고 강요하지도 아니하고 또 뭉쳐 만들려 하지도 아니한다. 여러분들이 뭉쳐서 조선사람들에게 실감을 가르쳐라. … 우리가 죽으려면 죽고 살려면 살 길이 이 자리에 있다. 깊이 생각하라. 나의 묻고자 하는 것은, 듣고자 하는 것은 어느 단체의 편협된 의견이 아니라 3천만 민족의 원하는 바를 대표하는 부르짖음이다. 타국사람이 조선을 알려고 하면 곧 가서 물어볼 만한 책임있는 기관을 만들어야 한다. … 그리하여 이 방을 나갈 때에는 기쁨의 만세를 부르고 나가도록 약속하자.”
그러나 “정부조직이나 대행할 기관”도 아니면서, 조선을 알려고 하는 외국사람이 곧 가서 물어볼 만한 “책임있는 기관”이란 성격이 애매할 수밖에 없었다.
獨立促成中央協議會 결성하고 會長으로 추대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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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0월 23일에 政黨 및 社會團體代表 200여명이 모여 獨立促成中央協議會를 결성하고 李承晩을 會長으로 추대했다. 이날의 會議를 報道한 新聞紙面. |
이어 민중당(民衆黨) 대표와 여자국민당(女子國民黨)의 임영신으로부터 모든 것을 무조건으로 이승만에게 일임하여 그의 지도아래 움직이자는 동의가 있어서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그러자 이승만은 각당에서 대표 한사람씩을 추천하여 그들로 합동위원회를 조직하고, 이 합동위원회가 며칠안에 모여 구체적 방법을 강구하자고 제의했다. 이때에 안재홍이 나서서 각당 대표 한사람씩으로 구성될 회의 명칭을 독립촉성중앙협의회(獨立促成中央協議會)라고 하고, 회장에 이승만을 추대할 것과 회장에게 회의 소집에 관한 일체의 권한을 위임할 것을 제의했다. 안재홍의 제의는 만장일치의 박수로 가결되었다.37) 건국준비위원회의 명칭을 창안했던 안재홍은 두 번째로 역사적인 기관의 명칭을 지은 것이다.
안재홍의 주도로 독촉중협의 결성작업을 마친 이승만은 오후 4시부터 종로 YMCA 대강당에서 열린 전조선신문기자대회에 참석했다. 그는 지난날 자신도 『협성회회보』와 『제국신문(帝國新聞)』의 기자로 활동했던 일을 설명하면서 기자들의 책임감을 강조하는 축사를 했다.38)
敦岩莊으로 居處 옮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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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3일의 政黨 및 社會團體代表會議에서 연설하는 李承晩. |
이승만이 서둘러 돈암장으로 거처를 옮긴 것은 하루에도 300~400명씩 이승만을 보겠다고 몰려드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호텔로비는 시장처럼 붐볐고 갓쓴 시골 노인들은 화장실을 찾지 못하여 아무데서나 방뇨를 하고 떠들었다. 그리하여 미군 헌병이 줄을 치고 방문객을 정렬시키는 형편이었다.39) 이승만이 돈암장으로 옮긴 뒤로도 스미스(Smith) 부관은 매일 돈암장으로 출근하여 이승만을 도왔다. 하지 장군은 무장한 미군헌병 1개 분대와 학병출신으로 미군정에 소속되어 있는 한국인 청년학도병 13명을 이치업(李致業) 대위 인솔로 보내주어 돈암장을 경비하게 했다.40)
돈암장으로 옮기면서 이승만의 생활비는 한민당에서 대기로 했는데, 송진우는 약속대로 매달 꼬박꼬박 10만원 내지 15만원의 생활비를 보내왔다.41) 이승만의 활동자금은 거의가 한민당 관계자들로부터 나왔다. 조선 제일의 부호인 태창직물(泰昌織物)의 백낙승(白樂承)도 송진우의 권유로 이승만을 후원했고, 김성수(金性洙)도 이승만의 생활비 일부를 부담했다. 이렇게 들어오는 후원금은 윤치영, 허정, 송필만(宋必滿)이 관리했다.42) 비서진도 확충되었는데, 미국에 유학하여 허정이 『삼일신보(三一申報)』를 발행하는 일을 도왔고 귀국해서는 국일관 지배인으로 있었던 이기붕(李起鵬)은 이때부터 돈암장의 살림을 총괄했다.43) 국학자 정인보(鄭寅普)의 문하생 윤석오(尹錫五)도 송진우의 주선으로 이승만의 비서가 되었다.
빈센트의 信託統治 발언으로 政局 요동쳐
독촉중협의 결성과 때를 같이하여 서울정국은 미국무부 극동국장 빈센트(John C. Vincent)의 한국신탁통치 발언문제로 또다시 요동쳤다. 빈센트는 10월 20일에 미국외교정책협회(Foreign Policy Association)에서 “극동에서의 전후시기”라는 제목으로 한 연설을 통하여, 한국은 오랫동안 일본 통치아래 있었기 때문에 자치를 행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므로 당분간 미국, 소련, 영국, 중국 4개국이 공동관리하는 신탁통치를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빈센트의 이날의 발언은 비록 비공식적이기는 했으나 4개국이 합의한 한국처리 방침을 미국무부 고위관리가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천명한 것이었다. 이 뉴스가 서울에 전해진 것은 10월 22일이었다. 이승만이 독촉중협을 결성하는 날인 10월 23일 오전에 아널드 군정장관을 방문한 것도 빈센트의 발언에 대한 대책을 협의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44) 하지 장군은 맥아더 장군과 협의하기 위하여 10월 24일 아침에 급히 도쿄로 갔다.45)
우려했던 신탁통치문제가 빈센트의 발언으로 현실문제로 나타나자 각 정당은 일제히 반대하고 나섰다. 안재홍은 한국에서 신탁통치가 실시되지 않기 위해서는 진행중의 정당통합작업이 빨리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했고,46) 한민당은 10월 25일 아침에 간부회의를 열어 신탁관리제는 한국인을 모욕하는 발언이라고 규정하고 이승만과 다른 정당들과 함께 한국의 절대독립을 위한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47) 좌익인사들도 일제히 반대하고 나왔다. 인민공화국은 해방 이후에 인민공화국이 조직된 것이 곧 한국의 자치능력이 갖추어져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주장했고,48) 조선공산당의 정태식(鄭泰植)은 다른 당과 공조하여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펼쳐나가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49) 건국동맹도 신탁통치는 한국을 짧은 시간안에 관찰한 근시안적인 발상이며 한국국민의 의사에 반대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50)
한국인들의 심한 반발에 부딪히자 미군정부는 당황했다. 급히 도쿄에 다녀온 하지 장군은 10월28일에 이승만을 만나 빈센트의 신탁통치 발언은 반드시 실현될 사항은 아니라고 말했고,51) 10월 31일에 송진우를 만나서는 한국의 지식인들에게 전해달라면서 “신탁통치를 운운하나 이것은 극동국장 일개인의 의견이요, 그 사람이 조선정치를 좌우할 지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조선사람이 결속하여 독립할만한 힘을 보이면 이제라도 나는 독립을 승인하겠다”라고 권한밖의 발언까지 했다.52) 아널드 군정장관도 10월 30일에 기자들에게 빈센트의 발언은 개인의 의사에 지나지 않고 미국정부의 공식 방침은 아니라고 비슷한 말을 했다.53) 한민당은 하지의 말을 「조선지식계급에게 소(訴)함」이라는 전단으로 만들어 배포했다.54)
한편 각정당행동통일위원회는 10월 26일에 각 정당 및 단체대표 100여명이 일본생명 빌딩에서 회의를 열고 신탁통치문제와 독촉중협문제를 집중적으로 논의했다. 회의는 신탁통치 반대 여론을 일으키기 위한 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그 실행위원으로 국민당의 안재홍, 조선공산당의 김형선(金炯善), 통일기성회의 이갑성 세사람을 지명하고, 신탁통치에 절대 반대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독촉중협문제에 관해서는 강화해야 한다는 전제로 여러 가지 의견이 나왔으나, 결국 “민의를 존중하는 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하여 인민공화국정부와 해외임시정부의 양 진영이 모두 납득할 수 있는 조직체가 되도록” 이승만에게 진언하기로 결의했다. 그리고 독촉중협의 발전과정을 보아서 적당한 시기에 행동통일위원회는 해산하기로 했다.55)
3.「聯合國과 아메리카民衆에게 보내는 決議文」
독촉중협이 명실상부한 민족통일의 집결체가 되기 위해서는 좌익정파들도 적극적으로 참가해야 했다. 좌익세력 가운데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참가한 그룹은 장안파공산당 인사들이었다. 10월 13일에 평양에서 열린 조선공산당 서북5도책임자 및 열성자대회에 참가했다가 극좌적인 트로츠키즘의 오류를 범했다는 비판을 받고 돌아온 장안파공산당 인사들은 김준연(金俊淵), 서상일(徐相日), 장택상(張澤相) 등 국민대회준비회 인사들의 주선으로 10월 17일에 명월관에서 한민당 및 국민당 대표들과 회합을 갖고 행동통일을 협의했다. 그리고 10월 24일에 동본사(東本社)의 국민대회준비회 사무실에서 다시 회의를 열고 중경임시정부 지지 등 3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하는 한편,56) 독촉중협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기로 했다.57)
“완전한 등화관제 아래” 열린 敦岩莊 회의
이승만은 10월25일부터 각 정파대표들과 협의를 시작했다. 맨 먼저 만난 인사들은 한민당, 국민당, 장안파공산당 대표들이었다. 이들은 이날 오후에 돈암장으로 이승만을 방문하고, 장시간에 걸쳐 회담했다. 참석자들은 한민당의 송진우, 원세훈, 백관수, 함상훈(咸尙勳), 박찬희(朴瓚熙), 국민당의 안재홍, 국민대회준비회의 서상일, 김준연, 장안파공산당의 최익한, 최성환(崔星煥), 서병조(徐柄肇) 등이었다.『매일신보』는 이 회의에 대해, 먼저 이승만박사로부터 미묘복잡한 국제정세의 설명이 장시간에 걸쳐 있은 다음 각 정당대표들 사이에 의견교환이 있었는데, 오후 4시까지 이어진 회의는 “완전한 등화관제 아래” 거행되어 상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고 맹랑한 표현을 써서 보도했다.58) 빈센트의 신탁통치 발언문제와 독촉중협 운영 방안문제가 집중적으로 논의되었을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 자리에서 이승만은 “국내전선의 통일만 있으면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한 여러문제를 해결할 자신이 있다”고 말했다고 보도되기도 했다.59)
한편 안재홍은 10월 26일에 양주(楊州)의 시골집에서 상경한 여운형을 만났는데, 그 자리에서 두사람은 “국내전선통일은 이박사에 대한 국민적 신망이 최고조인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 없다”는데 의견이 일치했다.60) 그렇지만 안재홍과 여운형의 독촉중협에 대한 인식에는 차이가 있었다. 안재홍이 독촉중협을 귀국을 앞둔 중경임시정부를 맞아들여 효과적인 건국사업을 추진하게 하는 정당통합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데 비하여, 여운형은 중경임시정부와 인민공화국을 포함한 국내 및 해외의 각 정파를 망라한 과도연립정권의 수립을 위한 기관으로 상정했다.61) 그것은 행동통일위원회 인사들이 이승만에게 임시정부와 인민공화국 양 진영이 모두 납득할 수 있는 독촉중협이 되어줄 것을 진언하기로 한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여운형은 이날밤 돈암장으로 이승만을 찾아가서 두시간 동안 정당통합문제를 숙의했다. 이승만은 여운형에게 신탁통치 등 한국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당통합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강조했다.62) 여운형은 11월 1일 오전 10시에 다시 돈암장을 방문하여 두시간 동안 이승만과 요담했다.63)
朴憲永은 親日派배제 요구
이승만은 10월 29일에는 조선공산당의 박헌영을 돈암장으로 초청했다. 이승만은 전날 도쿄에 다녀온 하지와 만나서 신탁통치문제 등 당면문제를 심도있게 논의했는데, 이 자리에서는 정당통합운동에 공산당을 참가시키는 문제도 거론되었을 것이다.
이승만과 박헌영은 배석자없이 오후 4시부터 7시까지 세시간이나 의견을 나누었다. 회담내용은 박헌영이 러시아어로 작성한 기록만 보존되어있다. 이승만은 조선공산당도 독촉중협에 적극적으로 참가할 것을 촉구했고, 박헌영은 그 전제조건으로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를 배제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우리는 현시점에서 타국의 힘을 빌려 친일분자들과 민족반역자들을 처단할 수는 없다. 우리는 독립을 달성한 뒤에 자신의 정부의 힘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헌영은 장차 수립될 정부에 친일파가 들어와 정부안에서 지도적 지위를 차지하는 것을 어떻게 허용할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박헌영의 주장은 결국 우파민족주의그룹의 중심 세력인 한민당을 정당통합운동에서 배제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승만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다. 이승만이 자신도 장차 수립될 정부에 친일파가 들어와서는 안된다는 점에 동의한다고 하자, 박헌영은 “그렇다면 아직 문제될 것이 없다”고 양해했다.
두사람은 이어 인민공화국문제를 두고 설전을 벌였다. 이승만은 하지 중장이 인민공화국을 강제로 해산시키겠다고 말하는 것을 자기가 인민공화국을 조직한 사람들에게 정부를 해산하도록 설득하겠다고 약속하여 군정청의 강제 해산 조치를 중지시켰다고 말했다. 그러자 박헌영은 “미군정 아래서는 조선인들이 자신의 정부를 수립할 수 없다는 국제협약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고 강변하면서, 인민공화국은 이승만의 정치활동에 방해가 되는 존재가 아니라고 역설했다.64) 박헌영은 이승만과 면담하기에 앞서 10월 27일에 반도호텔의 하지 중장 사무실에서 그를 면담했었는데, 그 자리에서 하지는 미군정부의 시책에 공산당이 협조해 줄 것을 당부했고 이에 대해 박헌영은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를 배제한 상태에서 “진보적 민주주의 통일조국을 건설하려는 조선공산당의 정치노선은 미국의 이해와도 일치한다”고 주장했다.65) 이승만과 박헌영의 회담이 있은 뒤에 박헌영은 11월 2일에 천도교 강당에서 열리는 독촉중협 회의에 참석하기로 했다.
決議文 직접 作成하고 회의 주재
박헌영을 포함한 모든 정파의 대표들과 일련의 회담을 마친 이승만은 독촉중협의 두번째 공식회의를 11월 2일 오후2시에 천도교대강당에서 열기로 했다. 10월 23일에 조선호텔에서 열린 회의는 독촉중협의 발기인대회 같은 것이었고, 실제로는 이날의 회의가 창립대회인 제1차 회의였다. 이승만은 이 회의에서 채택할 「4개연합국과 아메리카민중에게 보내는 결의문」을 자신이 직접 영문과 국문 두가지로 작성했다.
이날의 회의에는 50여 정당과 사회단체 대표자들이 해방이후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인 것이었다. 회의 참석자들뿐만 아니라 회의를 참관하려고 몰려온 시민들로 회의장은 물론 바깥까지 붐볐다. 이승만은 처음부터 끝까지 의장으로서 회의를 직접 주재했다. 이승만은 개회사에서 “이 기관은 3천만 민중을 대표하여 독립을 촉성하는 중요한 회이다. … 시급한 문제는 38도선 철폐문제와 신탁관리 반대이며, 이것을 해결하려면 왈가왈부로 각당이 싸우지 말고 합심하여 완전독립을 기해야 한다. 이 관점에서 4대연합국과 미국민중에게 이 결의문을 보내자”라고 제의했다.66)
이승만은 이어 자신이 작성해온 결의문을 낭독했다. 그것은 주로 미국인들을 상대로 한 내용이었다. 결의문은 먼저 해방이후에 여러 정당이 발생했고 또 정당들 사이에 의견의 차이가 없지 않았으나, 그것은 민주주의 발전과정에 보통 있는 일이요 또한 “아메리카 민중이 그 모든 제도를 발달시키느라고 밟아온 길”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제 서울에 있는 각 정당은 독립촉성중앙협의회로 완전히 결합되었다고 말했다. 결의문은 이어 한국은 주권국가로서 영토적, 정치적, 행정적 모든 특권을 회복하는 권리를 요구한다고 말하고, 한국분단과 관련하여 연합국을 맹렬히 비판했다.
“조선을 남북의 양 점령구역으로 분할한 가장 중대한 과오는 우리의 자취(自取)한 바가 아니요 우리에게 강제된 바이다. 우리나라는 양단이 되었다. …귀 열국은 조선 사람이 분열되었으므로 자유국민의 자격이 없다 하나, 우리 조선을 마치 양단된 몸과 같이 양단한 것은 우리가 자취한 것이 아니요 귀 열국이 강행한 것을 이에 선명(宣明)하지 아니할 수 없다.… 우리는 맥아더 대장이나 하지 중장이나 군정장관 아널드 소장이나 이 양단정책에 대하여 하등 주지한 바가 없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 사실 그들은 우리 주장과 요구에 대하여 공평과 호의의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우리는 이 사태에 관한 책임자를 알고자하며 조선의 장래 운명을 결정함에 있어서 가장 중대한 관계가 있는 이 사실에 관하여 귀 열국의 명백한 성명을 요구하여 마지 아니한다. …”
이승만은 한국분단과 관련하여 그의 지론인 얄타밀약설을 넌지시 부각시키면서 연합국의 책임을 강조한 것이었다. 결의문은 이어 극동국장 빈센트의 신탁통치 발언에 대해 “우리는 이 제안이 미국의 조선정책에서 또한 중대한 과오가 될 것을 지적한다”고 비판했다.
1年이내에 總選擧 실시할 수 있어
결의문은 이처럼 연합국, 특히 미국정부의 대한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한 다음 연합국에 대한 ‘인식사항’으로 다음의 세가지를 들었다.
(1) 우리는 자주(自主)할진대 1년이내에 국내를 안돈(安頓)할 수 있을뿐 아니라 외국의 물질적, 기술적 후원으로써 비교적 단시일내에 평화로운 정상생활을 회복할 수 있다. 이 사실을 부인하는 자는 아직도 일본인 선전술에 마취되어 있는 자들이다.
(2) 우리는 연합국과 우호관계로써 협력할 것이며, 극동평화유지에 응분의 노력을 경주할 것이다.
(3) 우리 임시정부가 연합국의 승인하에 환도하면 1년이내에 국민선거를 단행할 것이요, 1919년에 선포된 독립선언서와 동년에 서울에서 건설된 임시정부의 취지에 의하야 천명된 민주주의의 정치원칙을 어디든지 존중할 것이다.67)
이렇듯이 이승만은 이 ‘인식사항’에서도 자신을 집정관총재로 선출했던 한성정부(漢城政府)의 정통성을 강조하는 집념을 보였다. 결의문은 이어 “조선인은 연합국과 싸운 일이 없고 따라서 연합국은 조선을 정복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귀 열국에 지적한다”고 말하고, 지난 40년 동안 일본과 싸워온 조선이 2차대전에서 한층 더 큰 규모로 대일전에 참여하지 못한 것은 “우리가 무기대여법의 정부와 민주주의국의 병기창으로부터 물질적 원조를 받지 못한데 기인한 것뿐이다”라고 다시한번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행정부를 꼬집었다.
이승만은 다음과 같은 말로 결의문을 마무리했다.
“우리는 정복된 적군의 대우에는 분격한다. 그것은 우리에 대한 일대 불의인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타개할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허여하기를 요구한다. 귀 열국이 참으로 우리의 행동으로써 우리를 판단할 것이요 우리에 대한 타(他)의 말로써 판단할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단연코 공동신탁제도를 거부하며, 기타 여하한 종류를 물론하고 완전독립 이외의 모든 정책을 반대한다.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위하여 전 생명을 바치기로 결의하였다. …”68)
朴憲永 “李承晩의 決議文이 너무 反美的”
이승만의 결의문 낭독이 끝나고 각 정당 대표들의 토론이 진행되었다. 우선 이 결의문을 연합국에 발송할 것인가에 대해 한민당의 원세훈과 국민당의 안재홍의 찬성 발언이 있어서 그대로 가결되었다. 이어 결의문 자체에 대한 가부토론에 들어갔다. 인민공화국의 농수산부 대리 이광(李珖)은 38도선문제에 대한 내용이 빈약하다고 주장했다. 가장 심각한 문제 제기를 하고 나선 것은 조선공산당 총서기 박헌영이었다. 그는 결의문 가운데 “우리 조선을 … 양단한 것은 우리가 자취한 것이 아니요 귀 열국이 강행한 것을 이에 선명하지 아니할 수 없다”는 구절과 ‘인식사항’ (3)항 가운데 “우리 임시정부가 연합국의 승인하에 …” 운운하는 것은 부당하다면서 삭제를 요구했다. 공산주의자의 우두머리인 박헌영이 친미주의자 이승만이 작성한 결의문이 한국을 해방시켜준 미국을 부당하게 비판했다고 하여 내용 일부의 삭제를 요구한 것이었다. 박헌영은 또 친일파를 철저히 배격함으로써만 민족통일이 완성된다는 원칙을 채택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이러한 요구들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공산당은 독촉중협에서 탈퇴하겠다고 열변을 토했다. 이어 한 학생대표가 이승만을 주석으로 하는 조선인민공화국 절대지지의 결의문을 낭독하다가 제지를 받고 결의문을 이승만에게 제출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장내가 소연하자 여운형이 “이박사의 결의문은 필요하며 38도선문제 및 신탁통치문제 해결 요구의 의의는 좋으나, 문구의 부당과 일부의 불충분한 점을 수정하자” 하고 문구의 수정을 제의하여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그리하여 여운형, 안재홍, 박헌영, 이갑성 네사람이 수정위원으로 선정되었다.
중앙집행위원 선정과 총본부 구성 방식을 두고도 각 정당의 입장 차이가 드러났으나, 안재홍의 제의에 따라 중앙집행위원 선출을 위한 전형위원 7명을 선정하되 그 선정은 이승만에게 위임하기로 결의했다.69) 이에 대해서는 박헌영도 손을 들어 찬성을 표시했다.70)
이승만은 폐회사에서 다시 민족단합을 길게 역설하고, “만일에 우리가 일치단결하여 민족통일전선을 건설하면 앞으로 3개월 이내에 반드시 서광이 올 것”이라고 자신에 찬 어조로 역설했다.71)
하지는 만족하여 맥아더에게 보고
하지 장군은 이승만이 독촉중협을 성공적으로 출범시킨 것을 보고 흡족해했다. 그는 11월 5일에 맥아더 장군에게 보낸 전문에서 “이승만박사의 존재는 다양한 정당의 통합과 여러 이념의 연합에 바람직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하고, 모든 한국인의 일차적인 염원도 독립과 자치를 획득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김구의 한국행이 확정된 것 같은데, 그가 도착하면 더 큰 통합을 위하여 이승만과 협력할 것으로 기대된다면서 앞으로의 계획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본관은 추가적으로 한국으로 귀환시킬 한국인들을 심사하는 일을 돕고, 현 군정부의 경제 재건계획에 대한 대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도출하며, 정부기구의 쇄신과 중앙정부 수반 휘하의 책임있는 정부직위에 실무자들로나 명목상의 장으로 적합하고 대표성있는 인물을 임명하는 일을 도울 대표성있고 확충된 연합고문회의를 설치하는데 이박사와 김구의 협력을 활용할 계획이다. …”
이처럼 하지는 이승만이 귀국할 때에 도쿄에서 애치슨(George Atcheson) 재일본 정치고문대리와 협의했고, 자신의 정치고문 베닝호프(H. Merrell Benninghoff)가 업무협의차 본국으로 떠날 때에 전한 메모랜덤에서 밝힌 자신의 구상을 실천에 옮길 방안으로 우선 기존의 고문회의를 이승만과 김구를 중심으로 확대할 것을 계획하고 있었다. 하지의 보고전문은 결론으로 “만일 이러한 작업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면 우리의 감독아래 시험적으로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만족할 수 있을 만한 가칭 과도적 한국행정부(AIB Korean Administration)를 설립하고, 적당한 시간이 지난 뒤에 총선거를 통하여 국민정부를 선출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72).
이승만이 서둘러 독촉중협을 결성한 것은 미군정부의 이러한 기본 구상과 깊이 관련된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 李承晩,「失題」,『自由新聞』 1945년 10월 17일자. 2) 朴鍾和,「獻詩-民族의 巨人 雩南李承晩先生께」,『自由新聞』 1945년 10월 20일자. 3)『自由新聞』1945년 10월 18일자~24일자,「李博士一生」. 4) 『新朝鮮報』1945년 10월 22일자, 26일자,「李承晩博士의 鬪爭生涯」. 5) 『中央新聞』1945년 11월 4일자,「李博士第一聲레코─드配布」.
6) 『自由新聞』1945년 10월 16일자,「社說: 李承晩博士를 歡迎함」. 7) 『每日新報』1945년 10월 17일자,「李博士歸國과 今後政局」. 8) 『自由新聞』1945년 10월 18일자,「名士陸續還至」. 9) 『新朝鮮報』1945년 10월 19일자,「李博士 맞이해 申興雨氏談」. 10) 『新朝鮮報』1945년 10월 18일자,「偉大한 指導者에 充實히 服從할 뿐」. 11) 『新朝鮮報』1945년 10월 18일자,「各黨의 統一促進」.
12) 『新朝鮮報』1945년 10월 19일자,「八月十五日後의 經過를 李博士에 文書로 報告」; 尹致暎, 『尹致暎의 20世紀』, 삼성출판사, 1991, p. 158. 13) 『每日新報』1945년 10월 18일자,「李博士歸國歡迎, 人民委員會談話發表」. 14) 『自由新聞』1945년 10월 19일자,「사랑하는 三千萬兄弟여 自主獨立에 一心協力하자」. 15) 雩南實錄編纂會,『雩南實錄(資料篇)』, 悅話堂, 1976, p. 309. 16) 『每日新報』1945년 10월 18일자,「李博士歸國歡迎」;『自由新聞』1945년 10월 19일자,「李博士歡迎會」.
17) 『每日新報』1945년 10월 19일자,「知名人士會見席上에서 李承晩博士熱辯」;『自由新聞』1945년 10월 19일자,「政黨統一의 示唆, 聲淚俱下의 熱辯!」. 18) 『自由新聞』1945년 10월 20일자,「우선 三千里江山 찻고 物과 心을 祖國에 밧치자」. 19) 『自由新聞』1945년 10월 20일자,「李博士三日會見」. 20) 『自由新聞』1945년 10월 21일자,「共和國主席就任懇請에 李博士好意를 表示」. 21) 許政,『내일을 위한 證言』, 샘터, 1979, pp. 116~117.
22) 『서울신문』1949년 6월 25일자,「尹炳求翁葬禮式에 李大統領吊辭」. 23) 남광규,「해방직후(1945. 9-11) 정당협력운동의 실패와 이승만, 박헌영의 임정견제」,『國際政治論叢』제46집 1호, 韓國國際政治學會, 2006. 4, pp. 145~147. 24) 『自由新聞』1945년 10월 14일자,「民族統一戰線을 爲하야 朝鮮建國協贊會活躍」및 10월 23일자,「民族統一戰線結成目標」. 25) 『每日新報』1945년 10월 19일자,「戰線統一俄然進展, 各黨首領繼續鳩首熟議」. 26) 李革 編, 『愛國삐라全集(第一輯)』, 祖國文化社, 1946, pp. 50~51.
27) 『自由新聞』1945년 10월 20일자,「李博士歸國을 契機로 各黨首統一期成會談」. 28) 『自由新聞』1945년 10월 21일자,「獨立促成意見一致, 李博士에 各黨首共同決議傳達」. 29) 『新朝鮮報』1945년 10월 22일자,「各黨代表者 李博士와 協議」. 30) 『每日新報』 1945년 10월 21일자, 「大衆앞에 첫번 盟誓, 聯合軍歡迎會壇上을 빌어서 李博士獅子吼」, 「建國의 決意도 鞏固」. 31) 『自由新聞』 1945년 10월 21일자, 「團合하라! 하지中將紹介로 李承晩博士大熱辯」. 32) Rhee to Oliver, Oct.21, 1945, Oliver Papers,『大韓民國史資料集(28) 李承晩關係書翰資料集(1)』, 國史編纂委員會, 1996, pp. 56~57.
33) 『自由新聞』 1945년 11월 6일자, 「在美六同胞實業家 4日公路로 歸朝」. 34) 『自由新聞』1945년 10월 23일자,「한덩어리로 뭉쳐라, 李博士新聞記者團과 會見絶叫」. 35) 『每日新報』1945년 10월 23일자,「島山, 義庵墓에 李承晩博士參拜」;『自由新聞』1945년 10월 23일자,「島山, 尤庵先生山所로」. 36) 『新朝鮮報』1945년 10월 25일자,「統一戰線의 一步前進」.
37) 『每日新報』1945년 10월 25일자,「二百餘名各黨代表會合 歷史的團結熟議」.
38) 『自由新聞』1945년 10월 25일자,「四社二百五十名出席 戰鬪的言論陳構築宣言」. 39) 윤치영,「나의 이력서(44) 敦岩莊시절」,『한국일보』1981년 9월 11일자. 40) 尹致暎, 『앞의 책, p. 161. 41) 古下先生傳記編纂委員會 編,『獨立을 향한 執念-古下宋鎭禹傳記』, 東亞日報社, 1990, p. 472. 42) 宋必滿 證言, 曺圭河-李庚文-姜聲才,『南北의 對話』, 고려원, 1987, p. 94. 43) 尹致暎, 앞의 책, pp. 161~162. 44) 『自由新聞』1945년 10월 24일자,「李承晩博士 아長官과 要談」. 45) 『自由新聞』1945년 10월 25일자,「하지中將急遽渡日에 注目」. 46) 『每日新報』1945년 10월 24일자, 「虛報이기를 切望한다」. 47) 『自由新聞』1945년 10월 26일자,「信託統治反對 韓國民主黨에서 決議」. 48) 『每日新報』1945년 10월 26일자,「生命을 걸고 排擊」. 49) 『每日新報』 1945년 10월 29일자, 「信託統治反對聲明」. 50) 『自由新聞』1945년 10월 28일자,「絶對自主獨立」및 10월 31일자,「民意를 歪曲捏造하는 徒輩들의 暗躍아닌가」.
51) 『自由新聞』1945년 10월 28일자,「李博士 하지中將, 今日注目되는 會見」및 10월 30일자,「信託統治說의 暗影拂拭도 三千萬의 完全集結로 可能」. 52) 『自由新聞』1945년 11월 5일자,「朝鮮의 幸福과 自由爲하야 大衆에 浸透實踐하라」. 53) 『每日新報』1945년 10월 31일자,「信託統治說은 個人意見」. 54) 李革 編, 앞의 책, pp, 56~58. 55) 『每日新報』1945년 10월 29일자,「信託統治反對聲明, 各政黨行動統一全體委員會決議」. 56) 『自由新聞』1945년 10월 27일자,「獨立戰線統一코저 三黨一致團結決定」. 57) 宋南憲,『解放三年史Ⅰ』, 까치, 1985, p. 233. 58) 『每日新報』1945년 10월 28일자,「某處에서 秘密會談」. 59) 『新朝鮮報』1945년 10월 26일자,「獨立促成中央協議會 具體的構成案을 討議」. 60) 『自由新聞』1945년 10월 27일자,「李博士를 中心으로 各黨首往來活潑, 呂安兩氏意見一致」. 61) 남광규, 앞의 글, p. 149. 62) 『自由新聞』1945년 10월 27일자,「李博士를 中心으로 各黨首往來活潑, 呂安兩氏意見一致」.
63) 『自由新聞』1945년 11월 2일자,「李承晩博士와 呂運亨氏要談」. 64) 「박헌영 동지와 이승만 박사의 회담」(1945. 10. 31), 이정박헌영전집편집위원회,『이정박헌영전집(2)』, 역사비평사, 2004, pp. 66~68. 65) 「조선공산당 총비서 박헌영 동지와 미 제24군사령관 하지 중장의 회담」(1945. 10. 27),『이정박헌영전집(2)』, pp. 62~66. 66) 『每日新報』1945년 11월 4일자,「感激깊은 第一回獨立促成中央協議會經過」.
67) 『自由新聞』1945년 11월 3일자,「李博士起草決議書全文」. 68) 위와 같음.
69) 『每日新報』1945년 11월 4일자,「感激깊은 第一回獨立促成中央協議會經過」. 70) 金?洙 口述,『遲耘 金?洙』,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9, pp. 151~152. 71) 『新朝鮮報』1945년 11월 3일자,「李承晩博士團結을 絶叫」. 72) MacArthur to Marshall, Nov.5, 1945,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45, vol. Ⅵ, Government Printing Office, 1969, p. 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