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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탐구] 李承晩 연구 붐

“대한민국은 李承晩이라는 천재의 작품” (유영익 연세대 교수)

배진영    ironhee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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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동구 붕괴 이후 이승만에 대한 긍정적 再조명 시작, 柳永益 교수가 <이화장문서> 정리하면서 좋은 연구 업적들 많이 나와
  대산문화재단은 지난 7월 건국 60주년을 맞아 ‘2008 대학생 동북아 대장정’ 1차 전형에 통과한 대학생 800명에게 ‘건국의 1등 공신’이 누구인가를 물어보았다. 응답자의 36.4%인 291명이 金九(김구)를 꼽았다. 응답자의 19.1%(153명)는 ‘우리 국민’이라고 답했다. ‘건국 대통령’ 李承晩(이승만)을 꼽은 사람은 응답자의 8.9%인 71명에 불과했다.
 
  대학생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작년 8월 〈조선일보〉가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전국의 성인 70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 의하면, 응답자의 37.1%가 ‘건국’하면 떠오르는 인물로 김구를 꼽았다. 이승만은 16.6%로 두 번째를 차지했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발전에 가장 큰 업적을 남긴 정치지도자’가 누군지를 묻는 질문에서도 김구에게 뒤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8월 15일 〈동아일보〉와 코리아리서치센터가 조사한 건국60년 국민의식조사에 의하면, 응답자의 56.0%가 ‘대한민국 발전에 가장 큰 업적을 남긴 지도자’로 朴正熙(박정희)를 꼽았다. 김대중(11.0%)-김구(3.9%)-이승만(2.6%)이 그 뒤를 이었다.
 
  역대 대통령에 대한 평가에서도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그리 높지 못하다. 지난 8월 14일 KBS가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에 의하면, ‘역대 대통령 중 가장 업적을 많이 남긴 대통령’을 묻는 질문에서 이승만은 박정희(73.4%), 김대중(11.5%), 노무현(4.3%)에 이어 4위에 그쳤다. 이승만을 꼽은 응답자는 전체 응답자의 2.1%에 불과했다.
 
 
  장준하, “이승만은 희대의 협잡꾼, 정치적 惡漢”
 
  4·19 이후, 아니 그 이전부터 한국 지성계에 만연했던 反(반)이승만 정서를 감안할 때 이승만에 대한 低(저)평가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언론인 宋建鎬(송건호)의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이러한 정서를 잘 보여준다(<한국현대인물사론>).
 
  “이승만은 여러 일을 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가 범한 많은 과오 중에서도 민족으로부터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은 외세의 국가이익 추구에 편승하여 이 나라를 분단하는 데 앞장섰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제시대 때 민족을 배반한 친일역적들을 싸고돌아 민족정기를 흐려놓은 점과 12년의 통치기간에 이 나라를 자주 아닌 열강의 예속으로 전락시켰다는 사실도 들어야 할 것이다. 이승만의 집권 기간 동안 그로부터 직접 간접으로 혜택 받아 영화를 누린 층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나, 오늘 한반도가 겪고 있는 민족의 수난은 다름 아닌 이승만의 지도노선에 일단 책임이 있다는 것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송건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승만은 독립운동도 제가 대통령을 해 먹으려고, 또 건국도 제가 대통령 해 먹으려고 했던 인물”이라고 극언했다. 송건호만이 아니었다. <사상계> 발행인으로 이승만과 대립했던 장준하는 이승만에 대해 “희대의 협잡꾼, 정치적 惡漢(악한)”, 언론인 신상초는 “교활하기 짝이 없는 에고이스트”라고 말했다.
 
  미국의 역사학자 존 테일러(이승만 대통령을 실각시키기 위한 ‘에버레디’ 작전을 수립했던 맥스웰 테일러 대장의 아들)는 “평생 자기 조국에 봉사한 대가로 국민들로부터 선물로 받은 권력에 의해 타락한 애국자”라고 이승만을 비난했다.
 
  거기에 더해 1980년대를 풍미했던 브루스 커밍스류의 수정주의 사관은 이승만을 ‘분단과 6·25의 책임자’로 만들어 버렸다. 1980년대 이후 좌경화의 물결 속에서 이승만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더욱 확산됐다. 노무현 정권 시절, 정연주 사장의 KBS는 <서울 1945>라는 드라마를 통해 이승만을 여운형 암살 등 白色(백색)테러의 막후 인물로 묘사했다.
 
  이에 맞서 이승만 옹호론에 앞장선 인물로는 우선 미국인인 로버트 T. 올리버 교수를 들 수 있다. 1942~1959년 이승만의 홍보자문역을 맡았던 그는 이승만의 오랜 친구이기도 했다. 그는 1954년 최초의 본격적인 이승만 전기라고 할 수 있는 <신화에 가린 인물 이승만>을 펴냈다.
 
  그는 1995년 집필한 <세계적 정치가 이승만>이라는 논문에서 이승만이 ▲건국 초기의 공산반란과 북한의 남침으로부터 신생 대한민국 수호 ▲농지개혁 완수 ▲교육투자를 통해 경제발전에 필요한 인재 육성 등의 업적을 남겼다고 높이 평가했다. 그는 특히 “신생 대한민국은 군사·경제면에서 미국과 유엔의 구조에 매달려야 하는 일개 속국에 불과했지만, 이승만은 자신의 출중한 외교력을 발휘해 미국과 국제사회에서 한국이 진정한 주권국가로 대접 받게 만들었다. 이것이야말로 그의 업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비교적 중립적인 입장에서 이승만을 연구해 온 인물로는 李庭植(이정식) 경희대 평화복지대학원 석좌교수를 들 수 있다. <한국공산주의의 기원>(공저), <한국공산주의운동사>(공저), <대한민국의 기원> 등 한국현대사와 관련된 굵직한 저작들을 남긴 그는 이승만과 관련해서도 <이승만의 청년시절>, <이승만의 구한말 개혁운동> 등의 책을 펴냈다.
 
  1963년 이정식 교수가 출간한 <한국민족운동사>에 대해 이승만의 오랜 측근이었던 로버트 T. 올리버 교수는 “독립운동 시기의 이승만에 대해서 비판적이면서도 객관적”이라고 평가했다. 이후 이정식 교수는 올리버 교수가 소장하고 있던 이승만 관련 문서들을 인계받아 정리하면서 <이승만의 구한말 개혁운동>이라는 책을 냈다. 이 책에서 이 교수는 이승만-徐載弼(서재필)-金玉均(김옥균)·朴泳孝(박영효)-朴珪壽(박규수)-朴趾源(박지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의 계속성’을 강조했다. 그의 연구는 이승만에 대한 학문적 연구의 선구로 꼽히고 있다.
 
 
  1980년대 후반 이후 이승만 재조명 활발
 
  1980년대 후반 이후 이승만을 긍정적으로 재조명하는 흐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승만 연구자인 柳永益(유영익) 연세대 석좌교수는 “1980년대 후반 소련·동구권이 붕괴하면서 이승만에 대한 재평가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냉전 종식은 무엇보다 이승만이 주장했던 자유민주주의와 반공주의의 종국적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식자들 간에 이승만에 대한 긍정적 재평가를 촉발시켰다. 특히 1991년 소련 붕괴 후 공산권 문서들이 공개됨에 따라 이승만에게 남북분단과 6·25의 책임이 있다는 수정주의 역사학자들의 주장이 무색해졌다. 다른 한편 1961~1993년 한국을 통치한 軍(군)출신 대통령들의 강도 높은 ‘군사독재’는 이승만의 ‘문민독재’를 상대화시켰다.”
 
  유영익 교수는 후술하는 바와 같이 10만여점에 달하는 <이화장문서>를 정리하는 한편, 이승만을 긍정적으로 재조명하는 데 앞장섰다. 그가 정리해 낸 <이화장문서>를 바탕으로 鄭秉峻(정병준·이화여대) 高珽烋(고정휴·포스텍) 윤대원(서울대 규장각연구소) 등 젊은 학자들의 연구가 나왔다.
 
  1995년에는 조선일보가 1년간 <거대한 생애 이승만 90년>을 연재하면서 ‘건국대통령’ 이승만을 본격적으로 조명했다. 金一榮(김일영·성균관대) 全相仁(전상인·서울대) 車相哲(차상철·충남대) 교수 등 젊은 학자들은 이승만의 정치·경제·외교적 업적들을 조명하면서 이승만을 ‘남북한 분단정부 수립의 主犯(주범)’으로 매도해 오던 수정주의적 관점을 깨뜨리기 시작했다.
 
  언론인이자 정치인인 孫世一(손세일) 전 의원은 2001년부터 月刊朝鮮에 근대 한국민족주의의 양대 巨木(거목)인 이승만과 김구 두 사람을 대비하는 <비교평전-이승만과 김구>를 연재하고 있다.
 
  반면에 이승만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도 여전히 존재한다. 徐仲錫(서중석) 성균관대 교수 등은 이승만 정권에 대해 ‘파시즘’이라고까지 비난하고 있다. <우남 이승만 연구>를 낸 정병준 이화여대 교수, <이승만과 한국독립운동>을 낸 고정휴 포스텍 교수, 윤대원 등 젊은 학자들은 이승만에 대해 비판적 내지 중립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내가 한 일이 헛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올 것” (柳永益 연세대 교수)
 
  유영익
  ⊙ 1936년 경남 진주 출생.
  ⊙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美하버드대 역사 및 동양언어 박사.
  ⊙ 美 휴스턴대 사학과 부교수, 고려대 사학과 교수, 한림대 사학과 교수,
  同 대학 부총장, 대학원장, 국사편찬위원,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한국학 석좌교수 역임.
  現 연세대 현대한국학연구소장.
  ⊙ 저서: <갑오경장연구> <한국근현대사론> <이승만의 삶과 꿈>
  <젊은 날의 이승만-한성감옥생활과 옥중잡기 연구> 등.
  ⊙ 수상: 제9회 하성학술상, 제13회 성곡학술문화상, 옥조근정훈장, 제2회 경암학술상.
 
 
柳永益 연세대 교수
  柳永益 연세대 석좌교수가 창립한 연세대 현대한국학연구소는 李承晩(이승만) 연구의 메카다.
 
  현대한국학연구소는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인 李仁秀(이인수) 교수가 기증한 이승만 대통령 관련 문서 10여만 점을 소장하고 있다. 현대한국학연구소에서는 이를 정리해 1998년 <이화장 소장 雩南(우남) 이승만 문서 東文篇(동문편)>(전18권), 2000년에는 <우남 이승만 문서 電文篇(전문편)>(전4권)을 펴냈다. 올 가을에는 <우남 이승만 문서 西文篇(서문편)>을 펴낼 예정이다.
 
  현대한국학연구소에서는 <수정주의와 한국현대사> <이승만 연구-독립운동과 대한민국 건국> <농지개혁의 역사적 재조명> <한국과 6·25전쟁> <이승만과 한국독립운동> <1950년대 한국사의 재조명> <이승만 대통령 재평가> 등의 학술 총서도 냈다. 유영익 교수도 이승만 문서를 바탕으로 <이승만의 삶과 꿈-대통령이 되기까지> <젊은 날의 이승만-한성감옥 생활(1899~1904)과 옥중잡기 연구> 등의 책을 냈다.
 
  특히 현대한국학연구소에서 펴낸 <우남 이승만 문서>는 이승만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月刊朝鮮에 <비교평전-李承晩과 金九>를 연재한 孫世一(손세일) 前 의원은 “현대한국학연구소에서 펴낸 <우남 이승만 문서>가 없었다면, <이승만과 김구>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독립정신> 읽고 이승만 재평가

 
  유영익 교수도 젊은 시절에는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강했다. 여기에는 어린 시절 6·25 당시 목격했던 국민방위군 사건에 대한 기억이 크게 작용했다.
 
  “청주에서 부산까지 걸어서 피란을 갔습니다. 국민방위군으로 징집된 장정들과 함께 내려갔는데, 마을마다 부모들이 마을 어귀까지 배웅 나와 자식을 눈물로 보내는 것을 봤습니다. 부산 동래에서 피란 생활을 하는데, 인근에 있던 야전병원에서 매일 아침 5~6구씩 국민방위군 병사의 시신이 들것에 실려 나오더군요. 못 먹고 못 입은 병사들이 몽유병 환자처럼 헤매는 것도 봤습니다. ‘자기 집에서는 다 귀한 자식들인데, 저들을 저렇게 죽이는 이 정부는 도대체 어떻게 된 정부인가? 이런 정부가 세상에 어디 있나?’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1960년 4·19가 일어났을 때, 유영익 교수는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를 갓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준비 중이었다.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며 거리로 뛰쳐나가는 후배들을 유 교수는 뒤에서 응원했다.
 
  유영익 교수가 이승만을 새롭게 평가하게 된 것은 하버드대에서였다. 한국현대사를 개척하겠다고 생각한 그는 하버드대 ‘하버드·옌칭(燕京) 도서관’에 소장된 한국학 관련 논저들을 찾아 읽다가 이승만이 1904년 지은 <독립정신> 초판본을 발견했다.
 
  “19세기 말~20세기 초 출간된 한국인의 저서들 가운데 <독립정신>은 단연 白眉(백미)였습니다. 이승만은 淸末(청말) 중국의 량치차오(梁啓超)나 쑨원(孫文), 혹은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나 후쿠자와 유기치(福澤諭吉)에 못지않은, 아니 오히려 그들 이상 가는 당대 최고의 언론인이자 개혁가, 독립운동가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유 교수는 이승만의 구한말 독립협회에서 펼친 개혁운동-일제하의 독립운동-해방 후의 건국운동-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서의 활동 등을 연결하는 논문을 써 보기로 결심했지만, 여러 가지 사정상 이를 포기하고 甲午更張(갑오경장) 연구로 발길을 돌렸다. 이후 한동안 그의 연구는 ‘19세기 후반’이라는 울타리를 넘지 못했다.
 
  1994년 겨울 어느 날,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인 이인수 박사 내외가 유 교수 내외를 이화장으로 초청했다. 그때까지 이인수 박사와는 학술 행사 등에서 인사를 나눈 적이 있는 정도였다.
 
  “이인수 박사는 ‘이승만 관련 자료들이 있는데 한번 보겠느냐’고 했습니다. 물론 보겠다고 했죠. 그날 이화장 내 2층 서재 한 모퉁이에 마련된 특수 서고에 간직돼 있던 이승만의 영문 일기, ‘하버드 앨범’이라는 사진첩, 草書(초서)로 쓰여진 한문 簡札(간찰) 등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그 자료들을 보는 순간 한국현대사 연구에 필수적인, 국보적 가치를 지닌 자료임을 직감했습니다.”
 
 
  <이화장 문서>와의 만남
 
  유영익 교수는 “이승만 관련 자료들을 정리해 달라”는 이인수 교수의 제안을 그 자리에서 받아들였다. 유 교수는 “그때까지 이승만 관련 논문은 한 편도 쓰지 않았지만, ‘역사가로서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인수 교수는 왜 유영익 교수를 선택했을까? 유 교수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전에도 이인수 교수께서 다른 국사 연구자들을 초청해 이승만 문서를 보여줬지만, 큰 관심을 표명한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이승만 자료의 3분의 2 이상이 英文(영문) 자료인데, 국사 연구자들 가운데는 영문 자료를 정리할 만한 사람이 드물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한 데다가 미국 대학에서 가르친 적도 있어 이승만 문서를 정리하기에 적임자라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이후의 삶에 대해 유 교수는 “이승만 자료와 함께 살았다”고 표현했다.
 
  1996년 연세대 국제대학원 석좌교수로 자리를 옮긴 유영익 교수는 1997년 현대한국학연구소를 설립한 후, 이인수 교수를 설득해 <이승만 문서>를 연세대에 기증하도록 했다.
 
  “이승만 박사는 프린스턴에서 박사학위를 딴 후 1910년 선교사 언더우드가 기독교대학을 설립하려 한다는 얘기를 듣고, 그 대학의 교수가 되고 싶다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승만은 귀국 후 YMCA 학감을 하다가 105인 사건으로 신변이 위험해지자 미국으로 망명했지만, 만일 105인 사건만 아니었다면 언더우드가 설립한 연희전문의 국제법 교수, 어쩌면 학장이 됐을지도 모릅니다. 그 인연을 살려 <이승만 문서>를 연세대에 기증하도록 했습니다.”
 
  유영익 교수는 東文(한글·한문 문서) 편집을 위해 한국 근현대사 사료 편찬 경험이 많은 宋炳基(송병기) 명예교수, 한문의 대가 李明來(이명래)옹, 한문·국한문·영문에 두루 능한 동양사학자 金基赫(김기혁) 교수 등을 자문위원 등으로 모셨다. 韓哲昊(한철호)·吳瑛燮(오영섭)·李相勳(이상훈) 등 신예 학자들도 참여했다.
 
 
 
“대한민국은 이승만이란 천재의 작품”

 
  지난 14년 동안 이승만 연구에 천착해 온 유영익 교수의 눈에 비친 이승만은 어떤 사람일까? 유영익 교수는 “이승만 박사는 한마디로 기가 막힌 천재”라고 말했다.
 
  “이승만은 5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조지워싱턴대, 하버드대, 프린스턴대에서 학사 학위부터 박사 학위까지 받았습니다.
 
  <이승만 문서>를 보면, 대한민국은 이승만이라는 천재의 작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미국의 명문대에서 정치학과 국제법을 공부한 이승만은 일찍부터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지에 대한 구상을 가지고 있었고, 그 구상은 제헌국회에서 의장직을 맡아 국가의 틀인 헌법을 만드는 과정에서 그대로 반영되었습니다. 대통령제, 농지개혁, 의무교육 등이 그 예입니다.”
 
  유영익 교수는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을 찬양하면서도, “장기집권은 잘못이었다”고 비판했다.
 
  “73세 때 대통령이 된 이승만 박사가 85세 때까지 집권한 것은 인간의 생물학적 한계를 무시한 것이었습니다. 80세 정도에서 물러났으면 본인을 위해서나, 나라를 위해서나 좋았을 것입니다. 이 박사가 올리버 박사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장면이나 조병옥에게 이 위태한 나라를 맡길 수 없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그런 생각이 결국 禍(화)를 부른 것이죠.”
 
  ―이승만 대통령의 장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수한 두뇌, 不撓不屈(불요불굴)의 집념, 그리고 투철한 애국심입니다. 배재학당 시절부터 죽을 때까지 그는 자신의 전 생애를 독립운동에 바쳤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이 점만은 인정해 줘야 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단점은 무엇일까요?
 
  “비타협적이고 포용력 없는 성격을 들 수 있겠죠. 하지만 독선적이라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리더십이나 자신감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집안의 6대 독자로 금지옥엽으로 자랐고, 서당이나 신식교육을 받으면서는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발견하지 못한 점, 젊은 시절 <제국신문> 등에 기고하면서 늘 사람들로부터 갈채를 받은 점 등이 그런 성격을 더욱 강화시켰을 것입니다.”
 
  1917년 러시아에서 공산혁명이 성공한 후,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는 공산주의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졌다. 이는 약소민족의 해방운동가들이나 세계 각국의 ‘진보적’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공통된 현상이었다. 하지만 이승만은 반공주의를 분명히 했다. 자신이 발행하던 <태평양잡지> 1923년 3월호에 실린 글에서 ▲재산을 나누어 가지자 함 ▲자본가를 없애자 함 ▲지식계급을 없애자 함 ▲종교단체를 혁파하자 함 ▲정부도 없고 군사도 없으며 국가사상도 다 없애자 함이라는 다섯 가지 이유를 들어 공산주의의 부당함을 논박했다.
 
 
  “미국식 공화제도를 최고의 정치제도라고 생각”
 
  ―이승만 박사가 당시 시대 조류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에 대해 일관되게 반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기독교 신앙과 미국식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의 우수성에 대한 확신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승만은 한성감옥에 있을 때부터 미국식 공화제도를 인류 역사상 최고의 정치제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받아들여 한국을 일본·중국을 앞지르는 아시아의 최선진국으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동안, 한국 독립에 대한 지지와 임시정부에 대한 승인을 얻어내기 위해 분투했지만,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에는 미국정부의 親日(친일)정책 때문에, 전쟁 발발 후에는 美(미)국무부 내의 親蘇(친소)세력 때문에 냉대를 받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그가 미국에 대한 믿음을 놓지 않았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유영익 교수는 그 이유에 대해 “이승만은 미국 정부와 미국 국민을 분리해 생각할 줄 알았다”고 말했다.
 
  “사실 배재학당에 다닐 때만 해도 이승만은 외국인 선교사들을 경계했어요. 미국인 선교사들이 하와이에 들어가 하와이 왕국을 顚覆(전복)하는 데 일조했던 사례를 들어 선교사들을 ‘제국주의의 척후병’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펜젤러와 애비슨 등 선교사들과 접하면서 이승만은 그들의 선량함과 인도주의, 한국인에 대한 헌신 등을 좋게 보게 되었습니다.
 
  한성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한국인 친지들은 아버지나 아내, 친지 중에는 주시경 정도가 찾아왔을 뿐, 다른 사람들은 이승만을 외면했습니다. 이때 미국 선교사들이 정기적으로 찾아와 책을 넣어 주고 예배를 올리며 성의껏 보살펴 주는 것을 보면서, 이승만은 거기에 감동을 받게 됩니다.
 
  이후 이승만은 미국 정부는 國益(국익) 때문에 자신의 호소를 외면하더라도, 정의감이 강한 미국인들이 있다는 것을 믿게 됐습니다. 독립운동을 하는 동안에도 이승만은 한국친우회 등을 만들어 목회자·상원의원·변호사·언론인·교수 등 각계각층의 미국인과 유대관계를 맺어 나가면서, 언젠가는 선량한 미국인들이 한국의 독립을 도와줄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동안 해 오신 이승만 연구 결과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내가 기여한 것의 제일은, 이승만 자료를 정리해서 편집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펴낸 <이승만 문서 동문편>(전18권)을 바탕으로 우수한 박사 학위 논문이 세 편 나왔습니다. 고정휴 포스텍 교수, 정병준 이화여대 교수, 윤대원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의 논문들이 그것입니다. 윤대원 교수의 ‘상해 시기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구’라는 논문은 독립운동사 연구의 이정표적인 논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승만 연구에 대해 외부의 지원이 있습니까?
 
  “연구소 창립시 삼성에서 도움을 줬고, 작년에 연세대에서 校費(교비)를 지원해 줘 <이승만 영문 서한집>을 완결했습니다. 국가기록원에서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유 교수는 “이승만 연구에 매달리면서 집안을 제대로 돌보지 못해 가정적으로는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지식인들에게 한국 역사를 새롭게 보도록 했다고 자부한다”고 말했다.
 
  “이제 이승만에 대한 국내외 학자들의 인식이 조금씩 바뀌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언젠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승만이 옳았다고 인식하게 되고, 내가 한 일이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날이 오리라고 믿습니다.”
 
 
  ◈ “이승만은 엘리트 의식이 강한 노력형 인물” (孫世一 전 의원)
 
  손세일
  ⊙ 1945년 부산 출생.
  ⊙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美 인디애아대 저널리즘스쿨·日도쿄대 법학부 수학.
  ⊙ <사상계>편집장, 동아일보 신동아부장, 同 논설위원, 국회의원,
  새정치국민회의 정책委 의장, 同 원내총무 역임.
  ⊙ 저서: <이승만과 김구> <인권과 민족주의> <한국전쟁 발발 배경 연구> 등.
  ⊙ 수상: 청조근정훈장 등.
 
 
孫世一 전 의원
  손세일 전 의원은 요즘 나남출판사에서 출간될 <비교평전-이승만과 김구> 제1부(전3권)의 마무리 작업에 여념이 없다. <이승만과 김구>는 月刊朝鮮 2001년 8월호부터 시작해 올 2월까지 모두 71회가 연재됐다. 이번에 나오는 제1부는 이승만과 김구의 출생에서부터 시작해 3·1운동 직전까지의 이야기가 실린다. 3·1운동에서부터 8·15 광복까지를 담은 제2부(전4권)도 금년 중으로 나온다. 내년 1월부터는 광복에서 6·25 발발까지를 다룬 <이승만과 김구> 제3부가 약 30회 분량으로 연재될 예정이다.
 
  예정대로라면 <이승만과 김구> 연재가 끝나는 것은 2011년 중반이 된다. 손세일 전 의원으로서는 66세 때 시작한 연재를 10년 만에 마치게 되는 것이다. 가히 ‘라이프 워크(life work)’라고 할 만하다.
 
  <이승만과 김구>에 대해 최근 <우남 이승만, 대한민국을 건국하다>를 펴낸 李翰雨(이한우) 조선일보 기자는 “출생에서 해방 직전까지 이승만의 활동을 프랑스의 아날학파 못지않은 놀라운 사실성과 엄밀성으로 복원하고 있다”면서 “저널리즘과 아카데미즘의 변증법적 종합”이라고 평했다.
 
  손세일 전 의원은 1970년에도 같은 제목의 한 권짜리 책을 낸 적이 있다. 이 책의 서문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역사는 개인에 의하여 빚어지는 동시에 인간은 역사 속의 개인이다. 오늘날 이 나라의 얄궂은 정치문화는 ‘박사’와 ‘선생’이라는, 원래의 뜻보다는 엄청난 권위로 확대된 존칭이 아주 걸맞게 어울렸던 이 두 사람과 그들의 관계로부터 영향된 바 크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나라의 그러한 정치문화가 그들로 하여금 결국 정치적 패배의 쓴잔을 들게 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이 땅의 정치적 운명이 국제정치 질서에 의해 크게 제약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 비극적인 요소는 더욱 심각한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국민들에게 공통적인, 혹은 지배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킬 만한 ‘삶의 방식’을 제시하기가 지극히 어려운 처지에서 이 나라의 지도자들은 고심해 왔다. 이러한 형편을 나는 퍽 동질적인 바탕이면서도 대조적인 모습으로 나타났던 이 두 사람의 정치 행태를 견주어 봄으로써 다만 문제제기라도 해 보려고 했다.”
 
  이 책을 두고 ‘한국 헌정사 연구의 선구적 성과’(노재봉), ‘정치전기학의 시발’(이정식·김학준),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구의 본격적인 출발점’(김희곤·윤대원 등)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하지만 손 전 의원은 “1970년 나온 <이승만과 김구>는 의욕에 비해 크게 미치지 못하는 작품이었다. 두 사람의 생애를 총괄하여 정치적 패배라고 평가한 것은 젊은 저널리스트의 오만과 시대적 에토스의 소산이었다”고 말했다.
 
  1970년에 나온 <이승만과 김구>는 원래 1968~1969년 <신동아>에 연재했던 것이다. 손세일 전 의원은 당시 <이승만과 김구>를 연재하게 된 계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3·1운동 50주년 기념논문집에 임시정부의 改憲史(개헌사)에 관한 논문을 쓴 것이 계기가 됐습니다. 爲人設官(위인설관) 개헌의 성격이 짙었던 임시정부의 개헌사에 대해 글을 쓰면서 마침 3선 개헌을 추진하던 박정희 정부에 대한 경계의 의미도 담으려 했습니다.”
 
  손세일 전 의원은 “1970년 <이승만과 김구>를 쓰고 난 후에도 늘 아쉬움이 남았다”고 말했다.
 
  “1970년에 나온 <이승만과 김구>는 국내적인 얘기, 독립운동 진영 내부의 이야기들만 담고 있었습니다. ‘국제정치 속의 한국’이라는 관점에서 <이승만과 김구>를 다시 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언론인·정치인으로 활동하는 동안에도, 외국에 나갈 기회가 있으면 관련 자료들을 수집했습니다.”
 
 
  이승만과 김구의 반공주의
 
  ―젊은 시절에는 이승만과 김구 가운데 누구에게 더 끌렸습니까?
 
  “그때는 아무래도 김구에게 더 끌렸죠. 이승만에 대해서는 <사상계>를 하는 동안 이승만의 失政(실정)과 비민주적 행태들을 보면서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점도 있고.”
 
  손 전 의원은 김구에게 끌렸던 이유로 ‘김구의 지극한 애국심’을 들었다.
 
  “안명근 사건에 연루되어 잡혀가 고문을 받을 때, 밤새워 자신을 고문하는 일본인들을 보면서 ‘나라를 남에게 먹히지 않게 구원하겠다는 내가, 남의 나라를 한꺼번에 삼키고 되씹는 저 왜구와 같이 밤을 새워 일한 적이 몇 번이었던가?’라고 自問(자문)하는 얘기가 <백범일지>에 나오죠? 그 대목을 읽으면서 ‘애국심의 극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30년 만에 <이승만과 김구>를 다시 쓰면서, 이승만과 김구에게서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것을 다시 느꼈을 법도 하다. 손 전 의원은 이에 대해 “이승만과 김구 두 사람 모두 공산주의에 대해 철저한 인식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 눈에 들어오더라”고 말했다.
 
  “김구는 임정 국무총리 李東輝(이동휘)가 함께 공산주의 운동을 하자고 권유했을 때 ‘우리 독립운동이 우리 한민족의 독자성을 떠나서 어느 제3자(제3인터내셔널을 말함)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자존심을 크게 상실한 의존성 운동’이라며 거부합니다.
 
  이승만은 <태평양잡지> 1923년 3월호에 실린 ‘공산주의의 當 不當(당 부당)’에서 공산주의의 기본 원리를 하나하나 비판했습니다.”
 
  ―연구하면서 느낀 이승만은 어떤 인물이었습니까?
 
  “엘리트 의식이 강한 노력형 인물이었습니다. 배재학당을 나오고 미국 유수의 대학을 나온 그는 ‘노력하면 나처럼 될 수 있는데 왜 그렇게 못하나?’하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이승만은 스스로를 ‘예수 동생’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강한 選民(선민)의식의 소유자이기도 했습니다.”
 
  손 전 의원은 이승만의 특장점으로 ▲자금을 잘 끌어들이고 투명하게 관리했던 점 ▲각종 자료·문서 등을 잘 보관하고 기록을 많이 남긴 점 ▲인도주의자로서 폭력적 투쟁을 반대했던 점 ▲지지자들에게 지속적으로 낙관적인 전망을 제시했던 점 등을 꼽았다.
 
 
  ◈ “농지개혁과 反共 통해 한국민으로서의 정체성 형성” (金一榮 성균관대 교수)
 
  김일영
  ⊙1960년 강원 동해 출생.
  ⊙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同 대학원 정치학 박사.
  ⊙ 美 하버드대 옌칭연구소 초빙교수, 동아일보 객원논설위원,
  바른사회시민회의 운영위원 역임. 現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 저서: <건국과 부국> <맑스주의와 민족주의>(編) <주한미국-역사·쟁점·전망>(共)
  <1960년대의 정치사회의 변동>(共) 등.
 
 
金一榮 성균관대 교수
  2004년 방일영문화재단에서 펴낸 <建國(건국)과 富國(부국)>에서 이승만의 대한민국 건국과 박정희의 산업화를 긍정적 시각으로 조명했던 金一榮(김일영)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젊은 시절 자신이 ‘마르크스주의자’였다고 스스럼없이 고백한다. ‘소련식 마르크스-레닌주의나 주체사상은 아니지만, 서방 사회주의 가운데는 가장 좌측에 있는 ‘네오 오소독스(Neo Orthodox)’라고 하는 그룹에 속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 김일영 교수는 마르크스주의와 결별했다.
 
  “1980년대 말~1990년대 초를 거치면서 마르크스주의로는 ‘박정희’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1995년 잡지 <계간사상>에 쓴 ‘박정희 시대 18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논문에서 ‘박정희는 현재 적용할 수는 없지만, 당시로서는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 산업화를 이룩했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박정희를 다시 보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그 전 시대인 이승만 시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생각이 미치게 됐습니다.”
 
  김 교수가 이승만을 다시 보게 된 것은 1996~1997년 美(미) 하버드대 옌칭연구소 초빙교수로 나갔다가 돌아온 후 유영익 교수의 이승만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부터였다. 그 결과가 <농지개혁을 둘러싼 신화의 해체>라는 논문이었다. 이 논문은 이승만이 지주계급을 옹호하여 농지개혁에 소극적이었다는 주장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김일영 교수의 설명.
 
  “이승만은 하루빨리 농민에 대한 한민당과 남로당의 영향력을 차단하고, 그들을 자신의 지지기반으로 끌어들이기를 원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농지개혁이 급선무였습니다. 이승만은 6·25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농지개혁을 단행하여 농지의 70~80% 정도를 농민에게 분배했습니다.
 
  이승만 정부로부터 농지를 분배받은 농민은 이승만의 지지기반이자, 동시에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구성원으로 포섭되어 갔습니다. 각 호당 분배된 토지는 3500여m2(1080평)에 불과했지만, 작으나마 ‘땅’을 분배받았다는 것은 농민들, 특히 종전의 소작농들에게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습니다. ‘땅’을 갖게 되면서 그들은 잃을 것이 없던 계급에서 小(소)소유 계급으로 변모하게 됐고, 종전의 급진성을 잃고 점차 小農(소농)의 보수성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국민의 형성
 
  김일영 교수는 이승만의 가장 큰 업적으로 ‘국민의 형성’을 꼽았다.
 
  “정부 수립 당시 남북한에 살던 주민들은 ‘한국’과 ‘북한’이 아니라 아직 ‘조선’에 속하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각각 ‘한국’과 ‘북한’의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속한 국가의 존재와 행동을 체험하는 대내외적 계기가 필요했습니다.
 
  ‘한국’의 국민적 정체성 형성은 이승만이 주도한 농지개혁으로 그 단초가 마련됐고, 전쟁과 반공으로 가속화됐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가장 비판을 받는 부분은 부산정치파동(발췌 개헌)과 사사오입 개헌 등을 통해 막 출발하려는 한국의 민주주의를 유린했다는 점이다. 김 교수는 “부산 정치파동의 경우는 단순히 ‘민주 대 독재’라는 관점으로만 볼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부산정치파동은 내각제와 대통령제 중 어느 것이 당시의 우리나라 여건에 더 적합한가 하는 문제, 전쟁정책을 둘러싼 미국과 이승만의 대립이라는 문제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전쟁 속에서 국가를 형성해 가고 있던 상황, 의회 내의 정치세력들이 쉴 새 없이 이합집산할 정도로 정당정치가 뿌리 내리지 못하던 상황 속에서 내각제가 과연 적합했을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미국은 휴전으로 전쟁을 마무리하려 했고,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주장하며 이에 저항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은 자신들의 영향력이 미치는 국회를 이용해 이승만을 몰아내려 했습니다.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을 일본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과 재분단을 겨냥한 미국의 한반도 정책에 대한 약소국 지도자 이승만의 견제수단이자 협상수단으로 이해한다면, 이승만이 당시 추진했던 직선제 개헌은 단순한 집권연장책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당시 야당에게는 내각제 개헌을 통해 권력을 쟁취하겠다는 생각만 있었지, 국내정치를 전쟁정책과 어떻게 연결시켜 풀어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없었습니다. 이 점에서 이승만은 당시 국내 정치가들 가운데 유일하게 정치를 전쟁정책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고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 “이승만은 철저한 用美主義者” (車相哲 충남대 교수)
 
  차상철
  ⊙ 1949년 대구 출생.
  ⊙ 연세대 사학과 졸업, 美 마이애미대 미국사학 박사.
  ⊙ 청주대·숭전대 강사 역임. 現 충남대 사학과 교수.
  ⊙ 저서: <해방 전후의 미국의 한반도 정책> <한미동맹 50년> <미국외교사>(공저) 등.
 
 
車相哲 충남대 교수
  서양사, 특히 미국 외교사를 연구하면서, <해방 전후의 미국의 한반도 정책> <이승만과 하지: 犬猿(견원)의 동반자> <한미동맹 50년> 등 이승만과 미국과의 관계에 대한 많은 논저들을 남긴 車相哲(차상철) 충남대 교수는 1980년대 미국 유학 시절, 미 군정 시기 미국의 한국 점령정책에 대해 연구하면서 이승만에 대해 눈을 뜨게 됐다.
 
  1990년대 후반, 차 교수는 유영익 교수의 요청으로 英文으로 된 <이승만 문서>들을 검토하는 작업에 참여했다. 차 교수는 당시 받은 느낌을 이렇게 말했다.
 
  “‘이승만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승만 박사는 일찍부터 최고지도자가 되겠다는 생각 아래 끊임없이 공부하고 노력하고 준비해 온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특히 미국을 다루는 데 있어 이승만만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을 재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승만 비판자들이나 좌파는 곧잘 이승만을 崇美事大主義者(숭미사대주의자)로 묘사한다. 이에 대해 차상철 교수는 “태어날 신생 독립국가의 최고 지도자가 되려는 커다란 야망을 품어온 이승만은 맹목적인 친미주의자는 결코 될 수 없었다”고 반박했다.
 
  “수십년 동안 미국 유학과 망명 생활을 하면서, 미국이 저질렀던 배신행위와 기만, 무관심으로 이승만이 겪어야 했던 쓰라린 경험들은 그로 하여금 맹목적인 親美(친미)주의자가 아니라, 미국의 정치와 외교 속성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철저한 知美主義者(지미주의자)로 만들었습니다. 강대국에 의한 약소국의 희생이 다반사처럼 자행되는 냉혹한 국제정치의 현실에서, 이승만은 미국이 지닌 힘과 영향력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은 한국이 독립과 생존의 확보를 위해서는 반드시 붙잡아야 하는 유일한 나라’라고 굳게 믿었던 철저한 用美主義者(용미주의자)였습니다.”
 
  지미주의자이자 용미주의자였던 이승만 외교의 절정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이다. 차 교수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이승만의 생각이었지, 미국이 원하는 바는 아니었다. 미국과 밀고 당기면서 국제상황을 이용해 결국 미국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과정을 보면, ‘이승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 일을 해냈을까 싶다”고 말했다.
 
  “‘부모가 나무를 심으면, 자식이 그늘 덕을 본다’는 외국 속담이 있습니다. 이승만은 한국의 장래를 위해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는 ‘나무’를 심어야 한다고 믿었고, 마침내 그것을 심는 데 성공했습니다. 한국민은 그 ‘나무’의 그늘 덕을 아직도 보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 이승만의 한미상호방위조약에 필적할 만한 외교적 업적은 없었습니다.”
 
 
  “美 대통령 중 우드로 윌슨과 유사”
 
  ―미국의 역대 대통령 가운데서 이승만과 비견할 만한 사람이 있다면?
 
  “이승만이 프린스턴대를 졸업할 때, 그 대학 총장이었던 윌슨 대통령의 외교 스타일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다.
 
  두 사람 모두 젊은 시절부터 ‘역사적 인물’임을 자처했고, 자신이 누구보다도 知的(지적)으로 뛰어나다고 믿었을 뿐만 아니라, 권력을 향한 야망도 매우 높았습니다. 두 사람 모두 자만과 독선이 강한 인물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외무부를 무시하고 자신이 직접 외교를 관장하는 ‘개인외교’에 치중했다는 점에서도 흡사했습니다.”
 
  차상철 교수는 “과거에는 나도 이승만을 독재자, 민주주의 발전의 걸림돌로 생각한 적이 있지만, 이제는 당시 시대적 상황에 대한 이해 없이 지금의 잣대로 평가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한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인 이상 흠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언론인이자 사학자인 천관우 선생은 ‘한 인물에 대해서 조그만 흠이라도 찾아서 부정적인 결론을 내리기로 말하면, 성하게 살아날 사람이 우리 역사상에 몇 있을 것 같지 않다. 되도록이면 좋은 점을 발견하는 아량과 관용으로, 플러스와 마이너스를 총결산해서 플러스 편이 크면 우선 긍정적으로 평가해 놓고, 그 테두리 안에서 흠을 말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이 지적은 이승만 박사에 대한 평가에도 그대로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 “이승만에게 분단의 책임을 묻는 것은 잘못” (全相仁 서울대 교수)
 
  전상인
  ⊙ 1958년 대구 출생.
  ⊙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美 브라운대 사회학 박사.
  ⊙ 민족통일연구원 책임연구원,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 同 사회교육원장,
  연세대 현대한국학연구소 객원연구원, 한국미래학회 회장 역임, 現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 저서: <농지개혁연구> <고개 숙인 수정주의> <한국과 6·25전쟁>
  <한국현대사 진실과 해석> 등.
 
 
全相仁 서울대 교수
  全相仁(전상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고개숙인 수정주의> <수정주의와 한국현대사>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 이해> 등을 통해 브루스 커밍스류의 수정주의 사관을 비판해 왔다. 그 연장선상에서 그는 <이승만과 5·10총선거> <이승만의 사회사상 사회운동 사회개혁> 등의 논문을 발표했다.
 
  1984~1991년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면서 전상인 교수는 당시 트렌드에 따라 ‘국가론’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에서 국가는 언제 생기고 어떤 역할을 했나?’하는 문제에 천착하기 시작했다. 그의 박사 학위 논문은 <美 군정기 한국의 국가건설>이었다. 이승만과의 만남은 여기서 시작됐다. 이어 당시 한림대에 있던 유영익 교수가 “한국현대사 연구를 같이 하자”면서 이승만 문서 연구에 그를 불러들였다. 전 교수는 “그때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저도 미국 유학 시절, 브루스 커밍스의 책을 통해 한국현대사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제법 ‘진보적’ 생각을 가지기도 했죠. 남들처럼 이승만이라고 하면 분단 책임자, 독재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유영익 교수님과 함께 이승만 자료를 보면서, 경이로움을 느꼈습니다. ‘이런 거인이 살다가 갔구나. 우리가 이런 큰 인물을 너무 잊고 방치했구나’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전상인 교수는 1980년대 우리나라 지식인 사회를 풍미했던 브루스 커밍스의 수정주의를 이렇게 비판했다.
 
  “이승만에게 분단의 책임을 묻는 것은 잘못입니다. 북한은 당이 국가에 우선하는 사회주의 체제입니다. 따라서 1945년 10월 14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조직한 것을 눈여겨봐야 합니다.
 
  커밍스는 ‘6·25는 해방 이후 계속되어 온 좌우 투쟁, 남북간 군사 충돌의 연장이며, 누가 먼저 방아쇠를 당겼느냐는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데, 혁명과는 달리 전쟁에서는 開戰(개전)의 주체가 있기 마련입니다. 內戰(내전)논리로만 6·25를 설명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이 두 가지는 커밍스가 확실히 틀렸습니다.”
 
  ―일부 이승만 비판자들은 이승만 체제를 ‘파시즘 체제’로 규정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규칙적으로 선거가 실시됐고, 기본권과 일상적 자유가 상당한 수준으로 보장됐다는 점에서 이승만 체제를 파시즘으로 규정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유교적·가부장제적 권위주의’ 정도로 규정할 수 있겠죠.”
 
  ―이승만 대통령의 다양한 면모 가운데, 어느 측면이 가장 인상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독립운동과 건국과 전쟁을 거치면서 보여준 외교가·국제정치가로서의 얼굴이 가장 빛났다고 생각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본인이 훌륭한 외교관이기도 했지만, 외교관들을 기용하고 훈련시키기도 잘했어요. 장면을 주미대사로 기용한 것도 그렇고, 이승만 대통령 시절 외교관 생활을 시작한 분들을 보면 훌륭한 분들이 많아요.”
 
 
  ◈ “이승만은 대한민국이라는 학교의 교장” (李翰雨 朝鮮日報 기자)
 
  이한우
  ⊙ 1961년 부산 출생.
  ⊙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 중앙일보 뉴스위크국 기자, 문화일보·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조선일보 논설위원 역임. 現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 저서: <우리의 학맥과 학풍> <거대한 생애 이승만 90년> <한국은 난민촌인가> <태종> <세종> <성종> <선조> <숙중> <정조> 등.
 
 
李翰雨 朝鮮日報 기자
  광복 50주년인 1995년 조선일보에 1년간 <거대한 생애 이승만 90년>을 연재했던 李翰雨(이한우) 조선일보 기자는 건국60주년을 맞는 지난 8월 15일 <우남 이승만, 대한민국을 세우다>를 펴냈다.
 
  이 책의 서문에서 그는 “13년 전 허허벌판을 혼자 헤매는 듯했던 고립감은 더 이상 없다. 한국 사회는 이승만을 담담하게 이야기할 만큼 성숙했다”면서 “누가 뭐래도 조선과 대한제국의 멸망 그리고 식민지라는 공백을 거쳐 1948년 대한민국이 탄생하기까지 근대 혁명의 정통을 이은 사람은 이승만”이라고 썼다.
 
  이한우 기자는 1961년생. 이른바 386세대의 앞머리에 해당한다. 또래들처럼 그도 대학시절 좌파이념에 기울었던 경험이 있다. 대학 2학년 때까지는 운동권 서클에서 활동했고, 그 이후부터는 본격적으로 헤겔과 마르크스를 연구했던 그는 대학원에 진학해 철학을 공부하면서 좌파이념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가 이승만과 만나게 된 것은 1994년 문화일보에서 조선일보로 옮겨와 <거대한 생애 이승만 90년> 기획을 맡게 되면서부터였다. 그는 “이 기획을 준비하면서 1975년 한국일보에서 나온 <인간 이승만> 등을 읽게 됐는데, 무척 감동적이었다”고 말했다.
 
  “혁명가들은 대개 선각자이자 교육자잖아요? 저는 이승만에게 그런 모습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특히 구한말에서 유학가기 전까지 이승만의 모습이 충격적이었습니다. 종래 저는 우리에게 자유민주주의의 자생적 뿌리가 없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승만이 대한제국 말기 고종과 싸우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던 것을 보면서 우리에게도 자유민주주의의 뿌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조선일보에 <거대한 생애 이승만 90년>을 연재하면서 그는 옛날 운동권 시절의 선·후배, 동료들로부터 “이한우가 변절했다”는 얘기를 들어야 했다고 한다. 그를 만나면 “본심이냐?”고 걱정스럽게 묻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먹고 살자니 그러는 것일 것이다”라는 사람들도 있었다는 것이다. 1년간의 연재가 끝난 후 이한우 기자는 그동안 연재한 내용들을 묶어 책으로 냈다.
 
 
  “<한국교회핍박>은 1류 인간개조론”
 
  이한우 기자가 이번에 책을 내면서 보강한 부분은 이승만의 구한말 행적과 기독교인으로서의 이승만의 모습이다. 이 기자는 이승만이 1913년 지은 <한국교회핍박>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이 책은 결국 한 나라나 민족의 흥망은 인종 문제가 아니라 정신의 문제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일종의 ‘인간개조론’인데,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이 일본의 세례를 받은 2류 내지 2.5류 사상이라면, 이승만의 ‘인간개조론’은 정말 1류입니다. ‘이승만은 어떤 문제를 천착하면 본질을 바로 꿰뚫고 가는구나’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승만의 연설이나 저술을 보면 조선 민중에 대해 절망한 서재필·윤치호·이광수 등과는 달리 민중에 대한 희망과 신뢰를 놓지 않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 생각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이승만의 생각은 ‘좋은 엘리트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나라든 지도자가 제대로 하면 백성이 깨어나고 지도자가 잘못하면 안 되는 것인데, 우리나라는 지도자의 잘못으로 나라가 쇠락하게 됐다는 것이죠.
 
  이승만은 혁명가·계몽가·정치인이었습니다. 백성들을 올바르게 이끌지 못하면 그것은 지도자인 자신의 책임이고, 절대로 백성 탓을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반면에 서재필·윤치호·이광수 등은 문인·학자·선비일 뿐이었기 때문에 조금 문제점을 지적해 보다가 그게 잘 안 되면 ‘우리는 안 돼’라면서 포기했던 것이라고 봅니다.”
 
  이 기자는 “이승만은 전통적인 조선 사람의 틀로는 설명할 수 없는 특이한 존재”라면서, “운 좋게 이승만 박사가 나왔기 때문에 우리가 글로벌 물결을 탄 것이지, 그가 아니었다면 우리나라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고 늪에 빠져 끊임없이 내분에 휩쓸리다가 내려앉고 말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승만은 ‘대한민국이라는 학교의 교장이었다”고 평했다.
 
  “이승만이 권위주의적이었다지만, 문맹률이 70%를 넘는 상황에서 그런 ‘교장’이 있어야 했습니다. 전 오히려 이승만이 권위주의적으로 잘 끌고 간 것은 칭찬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민주주의를 한다고 다 풀어놨으면 나라는 더욱 엉망이 됐을 것입니다.
 
  올리버 박사는 ‘이승만은 민주주의의 기초는 교육에 있다고 보았다’고 술회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승만은 이중적 의미에서 4·19를 불러온 장본인이었습니다. 부패와 무능으로 국민을 일어서게 했지만, 동시에 그렇게 일어설 수 있는 정신적 자양분, 즉 민주의식을 전 국민적 차원에서 교육시켰기 때문입니다.”
 
 
  ◈ “‘위기극복의 리더십’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승만은 성공한 리더” (金忠男 美하와이대 동서센터 객원연구위원)
 
  김충남
  ⊙ 1940년 경북 영양 출생.
  ⊙ 육사 졸업. 서울대 문리대 졸업. 美미네소타주립대 정치학 박사.
  ⊙ 육사 부교수, 대통령비서실 사정비서관, 同 정무비서관, 공보비서관,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역임. 現 美하와이동서센터 객원연구위원.
  ⊙ 저서: <현대공산주의의 분석> <성공한 대통령 실패한 대통령>
  <대통령과 국가경영> 등.
  ⊙ 수상: 보국훈장 삼일장, 홍조근정훈장.
 
 
金忠男 美하와이대 동서센터 객원연구위원
  陸士(육사) 출신의 정치학자인 金忠男(김충남) 박사는 1984~1994년 전두환·노태우·김영삼 세 정권에 걸쳐 청와대에 근무하면서 司正(사정)·정무·공보비서관을 지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대통령이란 어떤 자리인가, 또 어떻게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는가’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990년 잠시 청와대비서관직을 그만두고 미국에 건너가 있으면서 그는 역대 미국 대통령들의 리더십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가 이승만과 처음 만나게 된 것도 이때였다.
 
  1992년 김 박사는 그때까지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들의 리더십을 다룬 <성공한 대통령 실패한 대통령>을, 2006년에는 이를 보완해 <대통령과 국가경영-이승만에서 김대중까지>를 펴냈다. 지난 7월 건국6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주최 국제학술대회에서는 <국가건설의 도전과 응전: 건국과 이승만>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같은 달 그는 이승만이 구한말 한성감옥서에서 지은 <독립정신>을 현대어로 쉽게 고쳐 쓴 <풀어쓴 독립정신>을 펴냈다.
 
  김충남 박사는 “1948년 대한민국 건국과 함께 취임한 이승만 대통령은 오늘날의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과 비슷한 최악의 상황에서 나라를 이끌게 되었다. 그의 리더십은 ‘건국과 국가생존의 리더십’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흔히 비민주적이었던 것으로 비판 받는 이승만 대통령의 리더십도 이런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의 역사학자인 로시터는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세 가지 위기로 전쟁, 반란, 경제위기를 꼽았습니다. 건국 이후 1950년대의 한국은 이 같은 세 가지 위협에 동시에 직면하고 있었습니다. 이승만은 원래 민주정부만이 국가의 생존과 안전, 발전을 가져올 수 있다고 믿었지만, 민주주의의 理想(이상)을 위해서 나라의 안전을 희생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김충남 박사는 비상시 위기극복의 리더십이라는 측면에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비견할 만한 미국 대통령으로 링컨 대통령을 꼽았다.
 
  “링컨은 연방 해체를 가져올 수 있는 남북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국가우선 안보우선’의 논리에 따라 과감하게 행동했습니다. 그는 헌법에 보장된 인신보호영장 제도를 일시 중단시켰고, 남부를 지원하거나 호의적으로 대한 사람, 징집 기피자들을 군사재판에 회부했습니다. 야당의원들을 의회에서 추방하거나 감금했고, 비판적인 신문사 발행인들을 체포했습니다. 언론에서는 그를 독재자라고 비난했지만, 그는 ‘국가를 보위하고 헌법을 수호하기 위해 불가피한 조치’라고 주장했습니다.”
 
 
  “개인적 리더십 의존”
 
  ―이승만 대통령의 인사스타일이나 정부운영은 어떠했습니까?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기까지 권한을 위임하고 관료 제도를 통해 조직을 운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독립운동을 하면서도 전적으로 자신의 능력에 의지해 일을 처리했습니다.
 
  건국 후, 인재가 부족한 상황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사람을 쓸 때 능력보다 개인적 친분이나 충성심에 큰 비중을 두었습니다. 대부분의 장관들이 자신의 직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지 못했고, 부정부패에 대한 언론보도와 소문이 더해져 그는 장관들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산부족 때문에 ‘작은 정부’를 강조하면서 행정조직과 인력을 최소한으로 유지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결국 失政(실정)과 부정선거 끝에 4·19로 下野(하야)하고 말았다. 이승만 대통령의 리더십을 ‘성공한 리더십’으로 볼 수 있을까? 이에 대해 김충남 박사는 “그렇다”고 단언했다.
 
  “‘위기극복의 리더십’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대만의 장제스(蔣介石)나 월남의 고딘디엠은 실패했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성공했습니다.
 
  이승만은 국가건설 초기에 닥친 미증유의 國難(국난)을 극복했고, 교육혁명·농지개혁·戰後(전후)복구, 현대식 행정·경제·사회 제도 도입 등을 통해 현대국가의 기본인프라를 구축했습니다. 그와 같은 기초가 있었기에 이후 역대 대통령들은 경제발전과 민주화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 “이승만의 대한민국 건국은 문명사적 선택” (이주영 건국대 명예교수)
 
  이주영
  ⊙ 1942년 평북 용천 출생.
  ⊙ 서울대 사학과 졸업, 서강대 서양사학 박사.
  ⊙ 서원대 조교수, 건국대 사학과 교수, 건국대 문과대학장, 同 부총장, 대학원장,
  역사학회장 역임.
  ⊙ 저서: <미국사> <미국 현대사의 흐름> <미국의 좌파와 우파> <격동의 유럽현대사> 등.
 
 
이주영 건국대 명예교수
  이주영 건국대 명예교수는 2006년부터 우남이승만연구회 회장을 맡고 있다. 2003년 설립된 우남이승만연구회는 금년 8월까지 36차례에 걸쳐 이승만 콜로키엄을 개최했다.
 
  이주영 교수는 현재 중·고등학생도 읽을 수 있는 수준의 이승만 전기인 <이승만의 생애와 교훈>(假題)을 집필 중이다. 금년 말에는 이승만의 측근인 올리버 박사가 쓴 <건국의 내막>을 상세한 脚註(각주)를 붙여 再(재)번역, 출간할 예정이다.
 
  이주영 건국대 명예교수는 원래 미국사 전공이다. 대대로 기독교가 성했던 평북 선천에 살다가 용천으로 이주했던 그의 가족은 1948년에 38선을 넘었다. 이 기억은 오래도록 그의 思考(사고)를 지배했다.
 
  “‘왜 부모님은 평생 살아온 고향을 등지고 越南(월남)을 했나? 1차적으로는 부모님이 기독교인이었던 데 원인이 있지만, 공산주의자들과는 생활방식이 달라서 그 땅에 남아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막연하게 문화와 문명의 문제에 대해 생각했던 셈입니다. 역사를 공부하게 된 것도 그런 문제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980년대말 이후 이주영 교수는 ‘한미관계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한미관계사’라고 하지만 ‘우리에게 미국은 무엇인가?’ ‘미국은 우리의 생활방식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나?’라는 문명사적 관점에서의 관심이었지요.
 
  1980년대 후반 민주화 이후 매일같이 데모가 이어지는 등 사회혼란이 계속됐습니다. 이를 보면서 ‘이렇게 살면 안 된다. 이렇게 가면 우리나라가 부강한 나라가 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저는 우리나라가 잘되려면 ‘미국식 생활방식(American way of life)’을 도입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주영 교수가 말하는 ‘미국식 생활방식’이란 뉴딜 이전의 미국인들의 전통적 생활방식, 즉 개인주의·자유주의에 기초해 자신의 삶을 자기 책임 아래서 개척해 나가면서 정부의 간섭은 최소화하는 것을 말한다. 그는 “여기서 이승만을 다시 만나게 됐다”고 말했다.
 
  이해가 가는 말이다. 이승만이 구한말 <독립정신> 등에서 되풀이 강조하고 있는 것이 바로 미국으로 대표되는 기독교 문명을 받아들여 문명개화된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으니까.
 
  ―국사학자들의 역사인식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역사학계는 민족·계급의 관점에서 역사를 보지만, 저는 ‘문명’ 내지 ‘생활방식’이라는 관점에서 역사를 봅니다. 우리에게 미국은 ‘민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남이지만, ‘문명’이나 ‘생활방식’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북한보다 더 가까운 존재입니다.”
 
 
  “이승만은 시장주의자”
 
  ―미국사를 전공하셨는데, 역대 미국 대통령들 가운데 이승만과 비슷한 사람이 있다면 누구일까요?
 
  “‘자유주의자’라는 점에서 우드로 윌슨과 가장 비슷하다고 봅니다. 자유방임주의자라는 점에서는 제퍼슨과도 흡사했습니다. 올리버 박사는 이승만을 ‘제퍼슨적 자유주의자’라고 했죠.”
 
  하지만 이승만을 ‘제퍼슨적 자유주의자’라고 칭하는 것은 그가 만들었던 정당의 이름이 ‘자유당’인 것만큼이나 어딘지 어색하게 느껴진다. 부산정치파동과 四捨五入(사사오입) 개헌, 4·19 때문이다.
 
  이러한 괴리에 대해 이주영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개인적으로는 ‘제퍼슨적 자유주의자’였다고 해도 이쪽을 죽이려는 공산주의자들과의 대결 상황 속에서는 실천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고 봅니다.
 
  하지만 이승만은 분명히 자유주의자였습니다. ‘시장주의’라는 것은 경제적으로는 계획경제·통제경제에 반대하고 시장에 의존하는 것을 말하고, 정치적으로는 자유선거를 실시해 유권자의 지지를 많이 얻은 정치인이 승리하는 시스템을 보장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주영 교수는 “이승만 대통령의 머릿속에는 ‘계획’이라는 개념이 없었다”고 말했다.
 
  “건국 초기의 혼란과 전쟁을 거치면서 ‘통제경제’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건 소련식이 아닌가’라며 못마땅해했습니다.
 
  1953년 2월 화폐개혁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들이 갖고 있던 舊(구)화폐 중 일부만을 新(신)화폐로 바꾸어 주고 나머지는 강제저축을 시키자는 경제 관료들의 주장에 완강히 반대했습니다. ‘우리나라가 사회주의 국가도 아닌데 국가가 남의 예금을 함부로 못쓰게 할 수 있느냐’는 것이 이승만 대통령의 생각이었습니다.”
 
  ―‘정치적 시장주의’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승만 정권 시절의 부정선거는 ‘정치적 시장’을 왜곡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자유선거를 대원칙으로 채택하고, 그 자유선거가 전쟁 중에도 중단되지 않았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어린 시절 북한에 있을 때, 흑백선거를 목격했어요. 어머니가 출산 직후라서 운신하지 못하자, 투표함을 집으로 들고 와서 투표를 강요하더군요. 찬성하면 흰색 투표함, 반대하면 검은색 투표함에 투표하게 했죠.
 
  우리는 때로 부정선거가 시비가 있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자유선거였어요. 부족하기는 해도 우리는 1948년 건국 당시부터 민주주의를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흑백선거와 자유선거, 이게 바로 제가 말하는 ‘문명의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주영 교수는 “1987년 이후 민주화의 핵심은 직선제였다. 직선제는 이미 이승만 대통령때부터 실시한 것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승만·파시즘·공산주의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는 <이승만과 제1공화국>에서 건국 초기 이승만 체제를 가리켜 ‘자유민주주의 헌법과 파시즘적 두령체제의 同寢(동침)’이라고 표현했다. 그런 주장에 대해 이주영 교수는 “파시즘을 몰라서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일제 군국주의를 거치면서 우리 사회 내부에 파시즘적 요소가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독일에서 헤겔 철학을 공부했던 安浩相(안호상) 초대 문교부 장관이 주장했던 一民主義(일민주의)에 국가주의적 요소가 강했고, 조선민족청년단을 이끌었던 李範奭(이범석) 초대 국무총리에게 민족주의적 요소가 강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이들이 이승만 대통령의 권력유지에 일정한 역할을 했지만, 그들의 주장은 이승만의 본질과는 거리가 멉니다. 일민주의 등을 예로 들면서 이승만 체제를 파시즘 운운하는 것은 이승만과 안호상·이범석을 혼동하는 것입니다.
 
  파시즘에는 지도자를 민족 전체의 의지를 알고 실천하는 상징적 존재로 보는 ‘영웅숭배’가 존재하는데, 이승만 정권 시절 그런 게 있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권위주의로 흘렀던 것은 결국 그에게 내재해 있던 동양적·가부장제적 성향이 미국적·민주주의적 성향을 압도했기 때문 아닐까요?
 
  “그런 점도 있겠지요. 하지만 저는 이승만의 캐릭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산주의와의 관계였다고 생각합니다. 독립운동 시절이나 건국 과정, 집권 기간 중 이승만을 제약했던 가장 큰 올가미는 공산주의였습니다. 독립운동 시절에도 이승만은 이동휘 등 공산주의자나 안창호 등 좌우합작주의자·용공주의자들과 끊임없이 갈등을 겪었습니다. 이런 경험에다가 미국적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 기독교 신앙 등이 더해져 이승만은 철저한 반공주의자가 됐고, 6·25를 거치면서 ‘공산주의만은 절대로 안 된다’고 확신하게 됐습니다.”
 
  이주영 교수는 이승만에 대한 몰이해도 그 연장선상에서 해석했다.
 
  “한국 사람들은 6·25를 겪고도 무감각한 풍토 때문에 이승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한국이 미국과 같은 상황인 줄 알고 이승만을 비판하는 미국인들의 시각을 그대로 들여다가 이승만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6·25는 우리의 생존을 걸고 공산주의와 싸운 것이었다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고 이승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승만의 건국은 문명사적 선택”
 
  ―금년은 건국 6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이승만의 대한민국 건국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이승만의 대한민국 건국은 집단주의적인 대륙문명권 대신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해양문명권을 선택한 문명사적 선택이었습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누리고 있는 자유와 번영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 자유와 번영을 우리가 계속해서 누리기 위해서는 결코 대륙문명권으로 회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주영 교수는 “이승만 대통령이 추구했던 자유주의는 당시 여건상 우리에게 너무 빨랐다. 그의 통치는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이 따라가기에 너무 어려웠다. 이승만은 그 시대 대중의 수준에 맞추지 못해 외로워진 지도자다”라면서 “하지만 우리가 해양문명권으로 갈수록 이승만 대통령을 높게 재평가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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