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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년 만에 탄생한 가톨릭의「새 성경」

『문제 해결이 어려우면 기도로 神의 도움을 구했습니다』(鄭學根 신부)

김태완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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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역을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성경의 언어가 우리말의 어떤 어휘와 가장 적합한지를 찾아내려 고심했습니다』(故 任承弼 신부)
神과 인간이 나눈 대화
성경 번역에 평생을 바친 故 任承弼 신부.
  聖經(성경) 혹은 聖書(성서·이하 「성경」으로 통칭)란 神(신)과 인간이 나눈 對話(대화)라고 한다. 단순히 먼 옛날 中東(중동) 팔레스티나 땅에서 일어난 히브리 민족의 역사서가 아니다. 적어도 개신교나 가톨릭을 믿는 사람들은 「神이 계시한 바를 인간이 神의 영감을 받아 기록한 책의 총서」라고 믿는다.
 
  종교 색채를 지우더라도 성경은 인류의 지혜와 교훈이 담긴 大서사시다. 성경 속의 심원한 세계는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가져다 준다.
 
  중세 가톨릭 교회는 성경을 각국어로 번역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종교개혁의 선구자 마틴 루터가 新·舊約(신·구약) 원어를 독일어로 번역한 이래 각 나라마다 自國語(자국어)로 번역했다.
 
  한국 천주교회가 우리말 新·舊約 간행작업을 마무리 짓고 「새 번역 성경」을 간행한 일은 그들만의 자랑거리가 아니다. 이 시대 민중들이 쓰는 가장 아름답고 부드러운 우리말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새 번역 성경」은 가톨릭이 한국에 들어온 지 220년 만에 비로소 완전한 성경 번역본을 갖게 됐다는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1977년 文益煥(문익환·1918~1994) 목사와 宣鍾完(선종완·1915~1976) 신부 등 新·舊敎(신·구교) 신학자가 힘을 모아 「공동번역 성서」를 간행했다. 가톨릭은 이 성경책을 이용했으나, 기독교 측은 교파 간의 이해가 엇갈려 대부분의 교회가 「가라사대 성경」을 지금까지 쓰고 있다. 가톨릭 교회는 1988년부터 무려 18년이란 시간을 바쳐 「새 번역 성경」을 완성했다.
 
  천주교 주교회의는 1988년 추계 정기총회에서 舊約을 새로 번역하기로 결정했다. 번역작업은 신학자인 任承弼(임승필·1950~2003) 신부에게 맡겨졌다.
 
 
  「새 성경」의 역사
 
任承弼 신부의 선종으로 성서위원회 총무를 맡은 가톨릭교리신학원 이기락 원장.
  제주 출신인 任신부는 한국 최초로 로마 성서대학에서 성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히브리말·그리스말에다 英·佛·獨·이탈리아語는 물론, 가장 완성도 높은 언어라는 라틴어에도 능통했다.
 
  그의 작업을 가까이서 지켜본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申愛卿(신애경)씨의 회고다.
 
  『任신부님과 13년 동안 꼬박 함께 일했습니다. 본당 신부 일은 거의 하지 않으셨고, 로마에서 돌아온 뒤 성경 번역에만 매달리셨습니다. 그분은 성경과 함께 사셨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任신부님은 번역할 때 참고할 수 있는 모든 자료를 찾고 다듬고 의견을 듣고, 우리말로 옮기셨어요. 성경 번역을 자신의 소명으로 알고 다른 모든 일상사를 보류하셨던 거예요』
 
  성경 번역에 착수할 당시 주변 여건이 어려웠다고 한다. 사무실 임대에서부터 전국 각처에 흩어져 있는 번역자(대부분이 신부들)를 불러 모으는 일, 우리말로 다듬기 위해 초벌 번역을 두고 난상토론을 벌이는 일…. 번역 과정에서 때론 동료들끼리 얼굴을 붉히는 일도 있었고, 적합한 우리말을 찾기 위해 하루 종일 씨름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任신부의 생전 회고다.
 
  『「번역은 반역이다」라는 말이 있어요. 본문을 잘못 옮김으로써 그것이 의도하는 바와는 전혀 다른, 또는 반대되는 뜻이 전달되기도 합니다. 더군다나 성경의 히브리말과 그리스말은 오래 전부터 쓰이지 않은 말이기에 번역은 특수한 난제들을 많이 안고 있었어요. 한마디로 완전한 번역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근본인 성경은 가능한 한 본문의 뜻하는 바대로 번역해야 합니다』
 
구텐베르크 성서의 모습

1913년판「신·구약 라틴어」의 일부
 
  「공동번역 성서」의 한계
 
  한국 천주교회의 첫 공식 성경은 1977년 간행된 「공동번역 성서」다. 왜 「공동번역」이란 말을 붙였을까. 이는 1965년 선포된 로마 가톨릭의 「바티칸 제2공의회 정신」, 이른바 교회일치 정신에 따라 新·舊敎 신학자가 함께 모여 성경을 번역했기 때문이다.
 
  당시 번역에는 세계적 신학자였던 宣鍾完 신부와 민중 신학자로 이름이 높았던 文益煥 목사, 성공회 신학大 김진만 신부, 감리교 신학大 이근섭 목사, 계명大(성결교) 정요섭 교수 등이 참여했다. 우리말로 다듬는 「문장위원」으로 아동문학가이자 수필가인 감리교 이현주 목사, 당시 현실참여적인 시집 「겨울공화국」으로 교사직에서 파면됐던 양성우씨가 가세했다.
 
  아름다운 민중 언어를 구사하며 자유로운 의역과 과감한 해석으로 당시 교계에서 상당한 반향을 낳았다.
 
  「공동번역 성서」는 세상에 나오자마자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바티칸 정신을 이어받아 세계에서 두 번째로 「新·舊敎 공동번역 성서」를 펴냈지만, 여러 교파와 교단으로 분리된 개신교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공동번역 성서」는 개신교에서는 쓰지 않고 가톨릭에서만 사용됐다. 명칭만 「공동」이지 실상은 「반쪽」 성경이었다. 「공동번역 성서」가 마뜩지 않았던 개신교 측에선 새 번역 작업에 착수, 독자적인 성경을 펴내기도 했다.
 
19세기 유대인들이 양피지에 잉크로 써서 만든 두루마리 구약성서

구약성서 중 모세 관련 사항을 다룬「토라 두루마리」
 
  가톨릭의 새 성경 착수
 
신·구교가 힘을 모아 1977년「공동번역 성서」를 완성하는 데 힘을 쏟은 文益煥 목사(왼쪽)와 宣鍾完 신부.
  세월이 흐르면서 「공동번역 성서」의 번역이 지닌 오류와 표현의 문제점 등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커졌고, 가톨릭 내부에서 독자적인 번역작업에 대한 요구가 커졌다. 가톨릭大 신학과 교수 金永男(김영남) 신부의 설명이다.
 
  『「공동번역 성서」는 의미일치 번역, 의역에 치중했어요. 신자들이 듣거나 읽을 때 빨리 이해할 수 있는 것이 큰 장점입니다. 하지만 성경 원문이 지닌 의미를 너무 축소하거나 원문의 뜻에서 벗어난 번역이 많다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성서위원회는 1988년 7월과 이듬해 2월 성서학자 회의를 열고 任承弼 신부를 번역 전담 총무로 선임하면서 성서 번역진을 구성했다.
 
  번역위원들은 성경의 여러 전서를 나눠 개별적으로 번역했다. 任신부를 중심으로 丁太鉉(정태현)·李基洛·鄭學根(정학근)·辛敎善(신교선)·金永男 신부 등이 힘을 모았다. 번역자가 여럿 참여하면서 번역자의 주관적인 견해나 해석을 조정하는 것이 難題(난제)로 등장했다.
 
  신학자적 양심에 따라 자신의 소신을 고집하면 번역 작업이 더딜 수밖에 없다. 권위를 인정받은 다수의 외국 번역본들을 한 구절, 한 구절 빠짐없이 대조하고 고대 문헌을 찾아 확인하는 중립적이며 객관적인 작업이 선행돼야 했다.
 
  BC 1200~200년까지 기록된 히브리말 성경(舊約)과 BC 30~AD 200년에 걸쳐서 이루어진 그리스말 성경(新約)을 우리 시대에 우리말로 정확하게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옮기는 작업이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대구 가톨릭大 교수인 鄭學根 신부의 회고다.
 
 
 
대표적 수정의 예_원문에 충실

 
  『神의 도움 없이는 결코 불가능했을 겁니다. 기도 안에서 번역진 전원이 한 마음이 되어 18년 동안 최대한 노력을 해왔어요. 번역을 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점은, 번역자 자신들이 「세상적 지식(언어 실력)」이 아니라 서로 간의 협동심이었던 것 같아요. 서로 이해하고 양보하고 돕고 하나되는 마음의 일치였던 것 같습니다. 어떤 경우 한 단어, 한 구절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데 며칠이 걸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문제 해결이 어려울수록 우리는 기도했고 神의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공동번역 성서」 창세기 1장에는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는 표현이 여러 번 등장한다. 그런데 히브리말 원문에는 「참」이란 표현이 꼭 한 군데 나온다. 창조의 여섯째 날 인간을 지은 다음 「참 좋았다」고 한 것이다. 인천 가톨릭大 교수인 辛敎善 신부의 지적이다.
 
  『인간 창조 이후 비로소 「참(매우)」이라는 부사를 사용하여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피조물 안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존엄성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동번역 성서」에서는 「참」이라는 부사를 원문에 없는데 여러 곳에 첨가했어요. 성경의 섬세한 의미 차이도 진지하게 생각하고 깊이 묵상하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이러한 차이점이 중요한 것이지요』
 
  「공동번역 성서」 창세기 1장 1절에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내셨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새 성경에는 「지어내셨다」를 「창조하셨다」로 고쳐 썼다. 굳이 한글을 버리고 한자인 「창조」라는 표현으로 바꾼 이유는 뭘까. 鄭學根 신부의 설명이다.
 
  『「지어내셨다」라는 우리말 표현도 좋지만 성경의 히브리말 원문에는 神만이 쓸 수 있는 동사 「바라(bara)」가 사용됐습니다. 그래서 神만이 쓸 수 있는 「창조했다」는 표현을 골라 쓴 것입니다』
 
1990년 2월 서울 광진구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 회의실에서 신학자들로 구성된 번역위원들이 히브리어 본문을 독회하고 있다. 왼쪽에서 두 번째가 성서위원회 총무인 故 任承弼 신부.
 
  신학적 의미와 「존칭」의 문제
 
  마지막까지 논란을 빚은 것이 「존칭」의 문제였다고 한다. 「예수가 한국에 와서 우리말로 복음을 선포한다면 과연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반말로 이야기했겠는가」 하는 문제에 봉착한 것이다. 참으로 다루기 어려운 「뜨거운 감자」였다. 가톨릭교리신학원 원장인 李基洛 신부의 설명이다.
 
  『논란이 많았습니다. 무엇보다 일관성의 문제에 부딪혔습니다. 우리말이 애매해서 누구에게 낮추고, 높여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어요. 예수님이 말씀 상대에 따라 「하십시오」 혹은 「하시오」, 「해라」를 골라 썼을까 하는 문제입니다.
 
  일부 신부님들은 때로는 높임말을 쓰고, 때로는 낮추는 식으로 번역을 하자고 제안했습니다만 쉽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권위를 가지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이해하여 「하라」체로 下待(하대)하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공동번역 성서」에서 간간이 쓰인 우리말 속담도 가급적 원문에 충실하려 굳이 의역을 하지 않았다. 「낮 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전도서 10장 20절)」는 우리 속담은 「하늘의 새가 소리를 옮기고 날짐승이 말을 전한다」로 바뀌었다. 李基洛 신부의 말이다.
 
  『한마디로 가급적 의역을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의역이나 풀어서 번역하는 것은 해설자의 몫이라는 생각에서입니다. 결론적으로 성경의 언어가 우리말의 어떤 어휘와 가장 적합한지를 찾아내려고 고심했습니다』
 
  任신부를 비롯한 번역위원들은 1990년부터 2002년까지 26차례의 히브리말과 그리스말 본문 대조 독회와 34차례의 신·구약 우리말 독회를 거쳤다. 1차적으로 성경 전체를 읽고 다듬는 데 12년이 걸린 셈이다.
 
구자명 소설가
  번역위원들이 작성한 성경 초안은 「우리말 위원회」를 거쳐 다시 수정되는 과정을 겪었다. 여기에는 시인 李海仁(이해인) 수녀와, 시인 具常(구상)의 딸이자 소설가인 具紫明(구자명)씨, 외화 번역가 민병숙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鄭良婉(정양완) 교수, 한글학자 이승화씨 등 10여 명이 참여했다.
 
  우리말로 다듬는 작업은 어땠을까. 李海仁 수녀의 설명이다.
 
  『종종 전문적인 국어학자와 다른 위원들 사이에 이견이 생기면 서로 양보하지 않고 강하게 주장하느라 시간이 걸렸고, 저는 저러다 서로 마음 상하면 어쩌나… 아슬아슬한 느낌이 들기도 했어요. 그래도 다들 성경이라는 것 때문에 자부심을 가지고 기쁘게 일했습니다. 다만, 舊約 「시편」 같은 본문을 제가 원어로 읽었으면 좀더 시적으로 다듬고 정리하는 일에 도움이 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소설가 具紫明씨 역시 고되지만 즐거운 일로 기억된다고 했다.
 
  『2002년 봄부터 시작했는데 한 달에 1주일 정도는 매일 만나 쉬지 않고 성경을 읽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예스런 표현들을 현대어로 고치니 연로한 신자들이 「경건한 맛이 떨어진다」고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어요.
 
  제가 소설을 쓰니 시제를 맞추거나 문학적 표현이 가미될 수 있게끔 다듬었어요. 그러나 원문에 충실해야 하고 신학적 뉘앙스를 해치지 않아야 했기에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이 과정에 20代의 젊은 국어학도가 참가했다. 서울大 국문과 박사과정을 밟고 있던 이광호씨는 「젊은이의 언어감각」이 필요하다는 요청에 따라 당시 서울大 국문과 교수이던 沈在箕(심재기) 前 국립국어연구원 원장의 추천을 받아 참여했다. 李씨는 현재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서울大 조교로 있다.
 
  『당시 저는 석사논문을 막 마치고 박사과정 첫 학기에 입학한 상태였어요. 20代의 聖召的(성소적) 고민이 많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권위 있는 여러 성경과 가톨릭용 영어성경 전체를 면밀하게 통독·묵상하고, 매 독회 때 각 구절마다 任신부님의 고견을 들었던 체험은 신앙인이면서 국어 연구자인 저에게는 인생의 새로운 지평이 열리는 경험이었어요』
 
  그는 軍에 입대하는 바람에 우리말로 다듬는 작업을 매듭짓지 못한 채 2002년 번역작업을 떠나야 했다. 대신 함께 박사과정을 밟고 있던 후배 이안구씨가 가세한다. 현재 李씨는 일본 교토大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한국 가톨릭의 새 번역 성경은 1988년부터 18년이 걸려 완성됐다. 사진은 출판기념회에서 김수환 추기경이 축사를 하고 있다.
 
 
任承弼 신부의 善終

 
  神의 뜻은 어디에 있을까?
 
  2002년 12월은 任신부가 신약의 마지막 권인 「요한묵시록」을 막 출간하던 때였다. 낱권으로 출간된 성경전서를 전체 한 권으로 묶는 합본 작업을 앞둔 시기였다. 任신부는 어느 날 소화가 잘 안 돼 작은 동네병원을 찾았다고 한다. 앓던 배가 낫지 않자 종합병원인 강남성모병원을 다시 찾았다. 놀랍게도 任신부는 위암 3기말의 상태였다.
 
  간병을 맡았던 任신부 여동생의 회고다.
 
  『아직 할 일이 남았다며 희망을 버리지 않으셨어요. 하지만 한 달이 채 남지 않았다는 가혹한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오빠는 무의식 상태에서도 한 손으로 사전을 찾는 시늉을 하곤 했어요』
 
  그는 위암수술을 받았으나 일어서지 못한 채 2003년 3월24일 선종했다. 그의 시신은 고향인 제주 황사평 성직자 묘소에 묻혔다. 장례미사에서 任신부의 동기이자 원주교구 총대리 정인준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27년 전 「공동번역 성서」 마무리 단계에서 시간이 모자라 안타까워하며 성모병원에서 임종하신 宣鍾完 신부님이 생각납니다. 성경 번역을 하면 神께서 너무 사랑하셔서 급하게 데려가신다고 투정을 부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任신부 역시 사후에야 새 성경이 세상에 나왔으니 같은 운명이 아닐 수 없다.
 
 
  인간 任承弼
 
이해인 수녀
  오랫동안 任신부와 함께 성경 번역에 참가했던 鄭學根 신부의 회고다.
 
  『이번 새 성경 번역 과정에서 거의 대부분, 신약은 전체가 고인의 번역이에요. 번역이 다 끝났을 때 神께서 함께 하고자 任신부님을 데려가신 것 같아요. 그분은 우리말 번역을 위해 특별히 神이 선택한 분이셨습니다』
 
  李海仁 수녀는 고인에 대한 남다른 기억을 떠올렸다.
 
  『1950년생으로 저보다 다섯 살이나 아래지만 어쩌면 오빠처럼 든든하게 여겨졌다고 할까요? 과묵함과 온후한 성품, 몸에 밴 겸손이 향기로운 여운을 남기는 분이셨어요. 제가 있는 수녀원을 찾으실 때는 제 작업실이 춥다고 난로도 사 주시고, 같이 어딜 다녀오다 제가 택시 안에서 지갑을 분실했다고 하니 잃어버린 만큼의 금액을 슬그머니 주기도 하셨어요』
 
  李海仁 수녀는 任신부의 1주기 때 그를 추모하는 「3월의 바람 속에」라는 詩를 썼다.
 
  <3월의 바람 속에/그리운 이름으로 살아오시는/임승필 요셉 신부님//신부님이 떠나신 3월엔/요셉 성인과 함께 신부님을/더 많이 기억합니다/3월의 제주 바다는/오늘도 초록빛으로 출렁이고/3월의 들판에는 우리의 기도처럼/노란 유채꽃이 바람에 흔들립니다…>
 
  소설가 具紫明씨는 『불교에 殺身供養(살신공양)이란 말이 있지만 그야말로 그런 표현이 적용될 수 있는 몇 안 되는 현대인이 아닐까 싶다』고 했다.
 
  『任신부님께서 병원에서 위암말기 진단을 받았을 때는 성서의 마지막 책인 「요한묵시록」에 대한 註解(주해) 작업 교정을 끝낸 직후였는데, 병석에서조차 성서 합본 편찬 작업을 염려하고 지도하기를 멈추지 않으셨어요』
 
 
  합본작업
 
유만근 성균관大 명예교수
  任신부가 선종한 지 2개월 뒤인 2003년 5월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는 합본위원회를 꾸린다. 그동안 낱권으로 간행된 신·구약 복음서를 한데 묶는 작업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任신부의 뒤를 이어 가톨릭교리신학원 원장인 李基洛 신부가 「성서위원회 번역 총무」로 바통을 이어받았다. 金永男·鄭學根·辛敎善·홍승모 신부 등 5명이 합본위원으로 위촉된다. 李基洛 신부의 회고다.
 
  『거목이 돌아가셔서 5명의 신부가 중심이 돼 합본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고인이 계셨다면 이건 이렇게 매듭지었을 텐데…」 하며 아쉬워했지만 우리는 그런 의미에서 더욱 진지하게 고민하고 치열한 논쟁을 벌이곤 했습니다』
 
  못 다 이룬 任신부의 유지를 잇기 위해 더욱 진지하게 고민하고 한 구절, 한 단어에 몰입했다. 辛敎善 신부의 회고다.
 
  『주교회의 사무처장이셨던 조규만 주교께서 우리를 「드림팀」이라고 불렀습니다. 때론 격론을 벌이고 신학자적 양심에 서로 맞선 경우도 종종 있었어요. 그러나 神의 말씀에 손을 대야 한다는 중압감이 더 컸습니다. 돌이켜 보니, 동료 신부님에게 많이 배웠습니다. 누가 무슨 이야기를 해도 귀를 기울였습니다』
 
심재기 前 국립국어연구원 원장
  2003년 7월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는 이른바 「새 번역 성서 합본 실무반」을 구성해 新·舊約 성경의 용어통일 작업을 맡겼다. 성경 전체 통독은 당대 국어학의 大家(대가)로 꼽히는 沈在箕 서울大 명예교수와 「우리말 위원」으로 참여한 서울大 국문과 박사과정의 이안구씨에게 맡겨졌다. 이들은 우리말 어법과 예법에 맞는 성경이 되도록 애썼다.
 
  2005년 3월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는 춘계 정기총회에서 새 번역 성경을 「가톨릭 공용 성경」으로 채택했다.
 
  그러나 천주교회 일각에서 「새 번역 성경에 대한 철저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요구와 함께 『우리말 표현이 다소 어색하다』는 지적이 일었다. 「공동번역 성서」에 익숙한 이들로서는 새 성경의 번역이 「파격」으로 느껴졌다.
 
  결국 최종 윤문 작업을 한 차례 더 하기로 하고 별도의 「윤문위원회」가 꾸려졌다. 윤문위원들로는 沈在箕 명예교수와 음성학의 세계적 권위자인 兪萬根(유만근) 성균관大 명예교수가 참여했다. 兪교수는 번역에 참여한 유일한 非(비)가톨릭 신자였다.
 
성경 합본위원인 가톨릭大 교수인 김영남 신부(왼쪽)와 가톨릭교리신학원 이기락 원장신부.
 
  새 성경의 완성
 
  시인이자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인 成贊慶(성찬경) 성균관大 명예교수, 소설가 具紫明씨, 성서위원회 姜大仁·申愛卿씨 등이 가세했다.
 
  윤문위원들은 성경 전서를 모두 펴놓고 지난해 4월7일부터 5월24일까지 12차례 회의를 열어 또다시 수정 작업에 들어갔다. 좀더 유려하고 완성된 우리말을 찾기 위해서였다. 이들이 수정본을 내놓자 5人의 신부로 구성된 합본위원회는 다시 검토, 일부 수정 사항들을 舊約에까지 적용해 최종 성경 번역문을 확정했다. 沈在箕 명예교수의 회고다.
 
  『국어학자로서 부자연스러운 표현은 없는지, 문법적으로 잘못된 용어는 없는지 전체 성경을 통독한 뒤 발표했습니다. 윤문위원 모두 나름의 특성이 있었습니다. 成贊慶 교수는 시인이시고, 兪萬根 교수는 서울 토박이 음성학자셨습니다. 具紫明 선생은 소설가셨는데, 각자 자신이 생각하는 바른 우리말을 젊은 사람의 언어감각에, 전통적인 어감에 맞추려 노력했습니다. 윤문위원들이 다듬고 고친 부분을 100% 다 받아 주었다고 할 순 없지만 70~80%는 존중됐다고 생각합니다』
 
  성서위원회 姜大仁씨는 이렇게 말했다.
 
  『성경 본문에만 충실하고 우리말에서 멀어진다면, 혹은 성서 본문에 충실하지 못한 채 우리말만 번지르르하게 다듬는다면, 번역의 의의를 찾지 못했을 겁니다. 우리말이 아주 부드럽지는 못하다 해도 성경 본문의 뜻을 제대로 옮기고, 아무리 본문에 짜 맞추어도 우리말이 되지 않을 때에는 최소한의 가감으로 의미를 살리려 노력했어요』
 
  成贊慶·兪萬根 명예교수는 군소리 「~라」를 뺐다는 점을 뚜렷한 성과로 꼽았다. 예컨대 「옳다는 생각」 혹은 「그르다는 의견」이면 됐지, 「옳다 라는 생각」「그르다 라는 의견」 같은 어색한 「~라」는 과감하게 삭제했다.
 
  兪교수는 『서양어 구문 직역투 (「~함으로써」, 「~함에 있어서」) 같은 일본어 차용 번역투를 쓰지 않았고, 「~의」라는 일본어 직역투도 순화대상이었다』며, 『우리말로 귀화해 굳어진 어형과 교과서용 외래어 표기법이 충돌하는 경우 때문에 골치가 아팠다』고 했다. 그의 말이다.
 
  『「예수」·「베드로」 같은 인명에 어울리는 지명은 차라리 「애굽(애귑또스)/에집트」입니다. 그러나 현행 외래어 표기법에는 「이집트」로 쓰기 때문에 새 성경에서도 이를 채택했는데, 엄밀히 따지면 「이집트」는 「예수·베드로」가 아니라, 「지저스·피터」에 어울리는 어형입니다』
 
윤문위원들. 왼쪽부터 소설가 구자명씨, 성균관大 유만근 명예교수, 성서위원회 신애경씨, 서울大 심재기 명예교수, 성균관大 성찬경 명예교수(시인), 성서위원회 강대인씨.
 
  세상에 나온 새 번역 성경
 
  세상에 나온 새 성경은 한창 가톨릭 신자들에게 보급되고 있다. 그러나 쉽고 문학 작품처럼 잘 읽히는 「공동번역 성서」를 선호하는 이들이 아직은 많은 듯하다. 『왜 새삼스레 번역해서 혼란을 주느냐』, 『기존 「공동번역 성서」는 내다버려야 하느냐』는 불평이 나온다. 낯섦이 친근함으로 바뀌기 위해선 다소 시간이 흘러야 할 것으로 보인다.
 
  「神과 인간의 영감」이 담긴 새 성경은 이 시대 품위 있고 유려한 우리말의 寶庫(보고)다. 권위 있는 신학자와 국어학자·음성학자, 시인·소설가·번역가가 수십 년간 참여해 만든 결정체가 아닐 수 없다. 더 부드럽고 아름다운 우리말을 찾기 위해, 고치고 지우고 뒤지며 흘린 땀이 새 성경에 고스란히 배어 있다. 李基洛 신부의 말이다.
 
  『일반 책이라면 이렇게 번역할 수도 있고, 저렇게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경전은 神의 말씀뿐만 아니라 삶의 지침이자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내용의 원천인데, 토씨 하나 소홀히 할 수 없었어요. 한 구절, 한 단어를 바라보는 시각차를 좁히고 고민하며 토론하는 과정에서 神의 섭리를 느꼈습니다』●
 
 

  ▣ 한국의 성경 번역 小史
 
   한국의 최초 성경 번역은 역관 출신인 최창현이 1790년대에 붓으로 쓴 가톨릭 기도문 필사본이 최초로 알려지고 있으나 본격적인 우리말 번역은 개신교가 들어오면서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스코틀랜드 연합장로회 선교사 로스와 평신도 이응찬·백홍준이 1883년에 누가(루가)복음을 번역했다. 그리고 선교사 아펜젤러, 언더우드, 스크랜턴 등이 신약성경을 부분 번역해, 구한말 성경 보급에 앞장섰다.
 
  1887년에는 최초 한글 번역 성경인 「예수셩교젼셔」가 완간됐다. 이와 함께 번역된 성경의 개역작업도 활발히 이뤄져 개신교 측 성서공회에서는 1912년 「개역위원회」를 조직, 舊約의 번역개정을 시작으로 1927년에 「개역성서」를 간행하기에 이른다. 이 번역판은 1956년 한글맞춤법 통일안에 따라 수정을 거쳐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한글학자들의 노력 이후 계속 부분 개역 작업이 이뤄져 1967년 「새 번역 신약성경」을 냈고 이를 다시 고치고 再번역해서 1993년 「표준 새 번역 성경」이 발행됐다.
 
  한편 「생명의 말씀」社에서는 영어판 리빙 바이블을 기초로 1977년에 「현대인의 신약성경」, 1985년에 「현대인의 성경」을 발행했다.
 
  천주교에서는 1910년 경향잡지 주필을 지냈던 한기근 신부가 <샤셔셩경>(四書聖經)을 번역한 것이 최초 4복음서(마태오·마르코·루가·요한복음)인데, 라틴어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었다. 1922년에는 사도행전이 「종도행전(宗徒行傳)」이라는 이름으로 간행됐다.
 
  평양 감옥에서 순교한 독일인 슐라이헤르 신부(1906~1952)의 노력으로 1938년 천주교회 최초로 新約 성경을 갖게 됐다.
 
  이후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예루살렘성서연구대학원에서 성서학을 연구한 宣鍾完 신부가 舊約 16권과 제2경전(외경)을 번역했으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新·舊敎 공동번역을 장려하자 자신의 번역작업을 접고 文益煥 목사 등과 함께 1968년 「신·구약 성서 공동번역위원회」를 조직했다. 이어 1971년 新約, 1977년 新·舊約 및 제2경전(외경)을 포함한 「공동번역 성서」가 간행됐다.
 
  (참고문헌: 파스칼 세계대백과 사전·2002년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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