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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북한核의 인질이 된 대한민국 - 파리平和협정에서 월남 패망까지

反美 폭력시위·反共인사 암살
월맹軍 남침 순간 평화협정 휴지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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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개국이 보증한 파리평화협정(1973년)·美越방위조약과 美 대통령의 안보공약에도 불구하고, 美 의회의 월남 지원거부로 1975년 월남 패망

李大鎔 前 駐베트남 대사관 공사
1925년 황해 금천 출생. 陸士(7기)·육군대학·美 육군참모大 졸업. 연대장. 駐베트남 대사관 정무공사·경제공사, 1975~1979년 공산베트남 정권에 억류, 육군준장 예편, 생명보험협회장 역임. 금성무공훈장, 충무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 수훈. 저서 「사이공 억류기」, 「국경선에 밤이 오다」 등.
쭝딘쥬,「평화적으로 남북문제 해결」호소
1975년 4월30일 월남 대통령 관저로 진입하는 공산군 戰車.
  1967년 4월1일 南베트남(이하 「월남)에서는 제2공화국 헌법이 정식으로 공포됐다. 5월1일부터 월남 전역은 대통령 선거전에 들어갔다. 이 대통령 선거는 1963년 이래 1년 8개월 동안 다섯 번의 쿠데타가 되풀이됐던 혼란을 마무리하고 정상적인 憲政(헌정)질서로 복귀하기 위한 것이었다.
 
  7월18일, 월남 임시제헌국회는 대통령 입후보자들을 適否(적부)심사해 그중 11명을 대통령 입후보자로 확정지었다. 이 11명의 입후보자 중, 쭝딘쥬(張廷裕)라는 변호사가 있었다. 그는 유권자들에게 이렇게 호소했다.
 
  『우리 월남 민족은 同族相殘(동족상잔)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 外勢(외세)까지 끌어들여 同族의 시체는 쌓여 산을 이루고, 피는 흘러 내를 이루고 있다. 우리 조상들이 하늘에서 이를 내려다보면 얼마나 슬프시겠는가. 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무고한 인명을 살상하는 北爆(북폭)을 즉각 중지시키고, 월맹 측과 대화를 통해서 평화적으로 남북문제를 해결하겠다. 나를 찍어 달라』
 
  많은 사람들은 그를 親北容共(친북용공) 인사로 의심했으나, 그는 『나는 민족주의자이자, 평화주의자다. 나는 민주주의 신봉자이며, 독실한 불교도다』라고 주장했다.
 
  9월3일 대통령 선거에서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웬반티우(阮文紹)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쭝딘쥬는 전체 유효표의 17.3%를 얻어 11명의 입후보자 중 2위를 차지했다.
 
  쭝딘쥬가 거물급 공산 프락치였다는 것이 탄로 난 것은 월남 패망 후였다. 1978년 美 FBI는 그를 미국에서 간첩혐의로 체포해 재판에 회부했다.
 
  1967년 10월1일 실시된 월남 하원의원 선거에서는 총당선자 137명 중, 공산프락치 내지는 親北容共주의자로 의심되는 의원이 24명이나 있었다. 이는 하원의원 총원의 18%에 해당한다. 이는 쭝딘쥬의 득표율인 17.3%와 거의 일치한다.
 
  1968년 1월31일은 월남의 舊正(구정)이었다. 베트콩(월남민족해방전선)은 이날만은 휴전을 하는 관례를 깨고 사이공을 비롯한 월남 전국에서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월남軍 및 연합軍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베트콩은 재기 불능의 손실을 입었다. 베트콩은 월맹공산군 7만 명을 빌려와서 겨우 무장력을 再편성을 할 수 있었다.
 
  공산 측은 「舊正공세」에서 군사적으로는 패배했지만, 정치적으로는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미국 朝野(조야)가 월남戰에서의 군사적 승리에 회의를 품기 시작한 것이다. 美 의회의 「진보적」 정치인들은 1967년 월남 대통령 선거 당시 쭝딘쥬가 내놓았던 월남평화협상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무렵 쭝딘쥬는 자신의 정체를 철저히 숨기고, 맨스필드·풀브라이트·맥거번·케네디 등 美 상원의 重鎭(중진)들과 교유하고 있었다.
 
 
  파리평화회담의 시작
 
  1968년 5월10일, 국내외의 反戰(반전) 여론에 밀린 미국 정부는 프랑스 파리에서 월맹을 상대로 평화회담을 시작했다. 월남內에서는 쭝딘쥬 등이 평화회담 참여를 거부하는 웬반티우 대통령을 비난하면서 평화회담 참여를 촉구했다.
 
  결국 웬반티우 대통령은 1969년 1월15일, 월남대표단을 파리평화회담에 파견했다. 베트콩(후에 「월남임시혁명정부」로 개칭) 대표단도 평화회담에 참가하면서, 파리평화회담은 미국과 월남 간의 2者회담에서 미국·월맹·월남·베트콩이 참여하는 4者회담으로 확대되었다.
 
  이 무렵 월남전에서는 美軍을 비롯한 연합군이 월맹군과 베트콩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있었다. 그 결과 1965년 말 전체인구의 57.4%에 불과했던 월남 정부군 통제인구는, 1972년 말에는 90.4%로 늘어났다. 반면에 공산군 측 통제인구는 같은 기간 22.7%에서 4.5%로, 경합지역은 19.9%에서 5%로 줄어들었다.
 
  이런 전투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월남內 反美親北(반미친북)세력의 확산으로 월남內 이념갈등은 심해지고 있었다.
 
 
  反共인사들 잇달아 被殺
 
파리평화회담 당시 회담장을 나서는 키신저 美국무장관과 레둑토 월맹 대표(왼쪽).
  파리평화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월남에서는 反美운동과 우익세력에 대한 테러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쭝딘쥬가 혜성과 같이 등장했던 1967년 대통령 선거 때부터 월남에서는 「남북인들은 같은 조상을 갖는 同族이다」,「同族을 殺傷(살상)하는 北爆 즉각 중지」, 「同族相爭의 비극적 전쟁 중지」, 「조속한 남북평화회담 개최」, 「외국軍 철수」 등의 구호를 내세운 反美親北세력의 시위가 빈발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폭력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파리평화회담이 진행되면서 시위의 양상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1971년 9월10일 사이공의 반한불교대학생들은 외국군 철수와 티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다가 USAID(美 해외원조처) 차량을 불태웠다. 9월12일에는 사이공국립대학과 반한대학의 좌익학생 30여 명이 사이공의 미국대사관으로 들어가 「양키 고 홈」, 「티우 정권 타도」 등의 내용이 담긴 「삐라(전단)」를 뿌리고, 차량 석 대를 불태웠다. 이때부터 좌익세력의 시위는 급격히 과격해지기 시작했다.
 
  월남체제 수호를 외치던 反共인사들은 얼마 안 가서 시체로 발견됐다. 깨끗한 反共지도자로 티우 대통령이 차기 총리로 지목하고 있던 웬반홍 사이공 행정대학원장이 암살당했다. 우익학생으로는 처음으로 사이공大 총학생회장으로 당선된 학생은 당선 10일 만에 암살됐다. 反共언론인들도 잇달아 암살됐다. 1973년까지 年평균 840명이 암살당했다.
 
  우익인사들에 대한 테러와 암살이 빈발하자, 지식인·언론인·중산층은 침묵을 선택했다. 투지를 상실한 「웰빙族」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1972년 10월 하순, 파리평화회담에서 키신저 美 국무장관은 월맹의 레둑토와 협정 草案(초안)에 합의했다. 닉슨 美 대통령은 이 草案을 口頭(구두) 승인한 후, 헤이그 장군을 티우 대통령에게 보내 동의를 요청했다.
 
 
  12개국이 파리평화협정 보증
 
  티우 대통령은 동의를 거부했다. 그는 『이 草案에는 美軍 철수 후 공산 측이 협정을 파기하고 침공해 올 경우 美軍이 즉각 再투입되어 침략군을 격퇴한다는 보장이 없다』고 지적했다.
 
  티우 대통령의 반대에 부딪힌 닉슨 美대통령은 1972년 11월17일, 다시 헤이그 장군을 보내 티우 대통령에게 親書(친서)를 보냈다. 親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협정의 문구보다도 훨씬 중요한 것은, 敵이 침략을 재개할 경우에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노이가 협정을 위반할 경우, 신속한 보복조치를 취하는 것이 本職(본직)의 의도임을 절대 확약하는 바입니다. (中略) 하노이의 협정위반이 있을 경우, 미국은 강력히 그리고 신속히 대응할 것이라는 本職의 직접 보장을 다시 반복합니다>
 
  닉슨 대통령은 이듬해 1월5일에 『협정 체결 후에도 베트남공화국(월남)에 원조를 계속할 것과 월맹 공산 측이 협정을 위반할 경우 미국은 전력으로 대응할 것을 보장한다』는 내용의 親書를 다시 한 번 보냈다. 닉슨 대통령은 이어 키신저 국무장관과 헤이그 장군을 통해 『월맹군이 再侵(재침)할 경우, 미국은 B52폭격기와 함대를 보내 월남軍을 지원하겠다. 단, 地上戰(지상전)은 월남軍이 맡아 주기 바란다』는 뜻을 전했다.
 
  닉슨 대통령의 거듭된 다짐에 티우 대통령은 마지못해 협정에 동의했다.
 
  1973년 1월27일 미국·월맹·월남·월남임시혁명정부(베트콩)의 외무장관들이 휴전협정에 서명했다.
 
  파리평화협정은 ▲월남 내부적으로는 월남 정부 측과 월남임시혁명정부(베트콩·민족해방전선) 측이 총선을 실시해 평화적으로 통일하고 ▲월남과 월맹도 적절한 미래에 총선을 통해 평화적 통일을 달성하며 ▲평화적 통일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서로가 상대방을 존중하면서 共存共榮(공존공영)한다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이는 1971년 7월 공산 측이 제안한 내용을 그대로 수용한 것이었다.
 
  키신저 美 국무장관은 좀더 확실하게 평화협정을 擔保(담보)하기 위해 국제휴전감시위원단을 파견하기로 한 캐나다·이란·헝가리·폴란드의 4개국 외무장관과, 영국·소련·프랑스·중국의 4개국 외무장관까지 서명에 참여시켰다. 12개국이 파리평화협정의 효력을 보증한 것이다.
 
  미국은 월맹에 파리평화협정을 성실히 이행하는 조건으로 40억 달러(미국의 직접 無償원조 20억 달러, 국제은행 長期低利차관 20억 달러)를 제공하기로 약속했다. 월남에 대해서는 80억 달러(無償원조 40억 달러, 국제은행 長期低利차관 40억 달러)를 제공하기로 했다.
 
  파리평화협정 체결의 주역인 키신저와 레둑토에게는 1973년 10월 노벨평화상이 수여됐다.
 
 
 
티우 대통령, 『미국의 安保공약이 유지되는 한 월맹은 침공하지 못한다』

 
  1974년 10월 월남에서는 200억t 이상 규모의 油田(유전)이 발견됐다. 1975년 2월, 미국은 월남 정부에 제공하기로 약속한 80억 달러 규모의 戰後복구 및 경제개발 원조를 위한 事前조사단을 월남에 파견했다.
 
  油田 발견과 미국의 대규모 원조 약속에 월남 국민들은 「월남은 곧 부자나라가 될 것」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혔다. 월남 국민들은 「국제휴전감시위원단의 감시활동과 미국과의 군사동맹으로 월남의 안보는 확고부동하다」고 믿었다.
 
  월남 군인들마저 1967년 쭝딘쥬의 등장 이래 親北容共 사조가 확산되면서 점차 「主敵(주적)개념」을 상실해 가던 터에, 평화협정까지 체결되자 완전히 對北·對共 경각심을 잃어버렸다.
 
  신중하기로 정평이 난 티우 대통령마저 이렇게 얘기했다.
 
  『하루에 두 끼밖에 못 먹고, 반찬으로는 소금만을 먹을 때가 많을 정도로 월맹의 경제난은 심각하다. 경제난 해결을 위해 미국의 40억 달러 戰後 복구원조를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에 월맹은 파리평화협정을 준수할 것이다. 월맹은 美 B52 폭격기의 소름끼치는 공포를 처절하게 경험했기 때문에 미국의 對越 안보공약이 유지되는 한, 앞으로 최소한 10년간은 再侵(재침)하지 못할 것이다』
 
  上下할 것 없이 안보 불감증이 확산되는 가운데, 부정부패는 개선의 징후가 보이지 않았다. 1975년 9월로 예정된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면서 정치인들의 泥田鬪狗(이전투구)는 더욱 심해졌다.
 
  1974년 10월, 월맹 하노이에서는 공산당 정치국과 중앙군사위원회 합동 비밀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레준 서기장은 『월맹공산군이 남침 총공세를 감행하더라고, 미국은 닉슨 사임 후의 정치적 불안 때문에 월남에 대한 방위협정을 지킬 수 없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1975년 1월8일, 월맹 공산당 정치국 회의는 『월맹軍 18개 사단과 기타 전투부대를 총동원해 무력으로 赤化(적화)통일을 달성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對北 정보기능이 거덜 난 월남 당국은 이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1975년 3월10일 새벽 2시, 월맹군 대병력이 南侵을 개시했다. 전쟁 준비가 전혀 안 된 월남軍은 도처에서 고립되어 각개 격파당했다. 월맹軍 南侵 일주일 만에 월남軍은 중부 高原지대의 요충지를 모두 상실했다. 3월26일에는 월남의 두 번째 도시인 「다낭」이 함락됐다. 휴전협정의 이행감시 임무가 있던 국제휴전감시위원단은 월맹軍의 南侵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美 의회, 對越 군사원조 거부
 
  티우 대통령은 포드 美 대통령에게 「美越방위협정」의 이행을 요구했다. 포드 대통령은 웨얀드 육군참모총장을 월남에 보내 상황을 파악하게 했다. 월남에서 돌아온 웨얀드 육참총장은 이렇게 보고했다.
 
  『地上戰을 맡고 있는 월남군이 월맹공산군의 전진을 저지해야 美 공군과 美 해군을 월남에 再투입할 수 있다. 그렇지 못하면 美 공군과 해군의 再투입은 무의미하다. 이를 위해서는 7억2200만 달러 규모의 긴급 군사원조를 월남軍에 제공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군사원조가 제공되면, 월남軍은 달라트-판랑線에서 월맹軍의 진격을 저지하고 반격을 개시할 수 있다』
 
  포드 대통령은 「월남 긴급 군사원조」 승인을 美 의회에 요청했다. 4월19일 美 의회는 「월남 긴급 군사원조案」을 부결시켰다. 미국 의회에서 외면당한 월남공화국은 1975년 4월30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월남 패망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교훈을 남겨 주었다. 그것은 引繼(인계)철선 역할을 하는 美軍이 한반도에 주둔하지 않을 경우, 미국 의회가 美軍 파병을 승인하지 않는 한 미국과의 방위조약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유사시 미국 대통령이 美軍을 해외에 파병하거나 증원하려면, 반드시 美 의회에서 승인을 받아야 한다. 美 의회의 승인을 받지 못하면, 미국이 다른 나라와 맺은 방위조약이나 행정부의 안보 공약은 휴지조각이 되어 버리고 만다.
 
  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한강 以北(이북)에 배치되어 인계철선 역할을 하던 美 지상군이 평택으로 이동하거나 한반도에서 철수하고, 戰時 작전통제권 단독행사로 韓美연합사가 해체될 경우 對北억지력은 결정적으로 훼손된다.
 
  설사 남북한이 평화선언을 하거나, 현행 휴전협정이 美北 평화협정 또는 남북한과 미국·중국이 참여하는 평화협정으로 대체된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선언이나 협정이 우리의 평화를 보장해 주지 않는다. 韓美상호방위조약이 있다지만, 유사시 美 의회가 美軍 파병을 거부하면,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우리의 평화와 안전을 보장해 온 韓美연합사를 해체하고, 북한과 평화협정을 맺어 평화를 얻겠다는 對北유화정책은 나라의 안보를 포기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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