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左派들은 「대한민국의 역사는 민주주의의 정상궤도에서 일탈한 잘못된 역사」였다고 주장합니다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이라는 열차는 자유민주주의라는 궤도에서 일탈한 적이 없었습니다』
金暎浩
1959년 경남 진주 출생. 서울大 외교학과 졸업. 美 버지니아大 국제정치학 박사. 「도서출판 녹두」 대표. 現 성신女大 교수, 同동아시아연구소장, 뉴라이트 싱크넷 운영위원장, 동아일보 객원논설위원. 저서 「한국전쟁의 기원과 전개과정」, 「변화하는 세계 바로보기」, 「한국외교사와 국제정치학」 등.
金暎浩
1959년 경남 진주 출생. 서울大 외교학과 졸업. 美 버지니아大 국제정치학 박사. 「도서출판 녹두」 대표. 現 성신女大 교수, 同동아시아연구소장, 뉴라이트 싱크넷 운영위원장, 동아일보 객원논설위원. 저서 「한국전쟁의 기원과 전개과정」, 「변화하는 세계 바로보기」, 「한국외교사와 국제정치학」 등.
녹두 출판사
1980년대 대학가에는 사회과학 서점이 한두 곳씩 있었다. 이해찬 前 총리는 서울大 인근 신림동에서 「광장」이라는 사회과학 서점을 운영했다. 그곳에서는 마르크스와 엥겔스, 레닌과 스탈린, 胡志明(호지명)과 毛澤東(모택동), 그리고 「위수김동」(당시 운동권의 隱語로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를 줄인 말)을 만날 수 있었다.
사회과학 서점에서 접할 수 있는 책들을 주로 펴내는 운동권 출판사들 가운데 「도서출판 녹두」가 있었다. 「녹두장군 전봉준」을 연상케 해서일까? 이름에서부터 저항적인 냄새를 물씬 풍기는 출판사 「녹두」에서는 「세계철학사」라는 이름 아래 소련공산당의 公認(공인) 철학서를 펴냈고, 헤게모니 이론의 주창자인 이탈리아의 공산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를 처음으로 한국에 소개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흘렀다. 대학가의 사회과학 서점들은 이미 오래 전에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커피숍이나 미용실이 들어섰다. 그때 사회과학 서적들을 펴냈거나, 몰래 사 읽던 「운동권」 가운데 상당수가 금배지를 달거나 청와대로 진출했다. 그 무렵 뒤늦게 사회과학 서적들을 읽고 『피가 거꾸로 솟았다』던 젊은 변호사는 대통령이 됐다.
1980년대 중반 「녹두」를 이끌었던 청년 金暎浩(김영호·47)는 「뉴라이트」라는 깃발 아래 다시 「운동」의 길에 나섰다. 그는 뉴라이트 지식인들의 連帶體(연대체)인 「뉴라이트싱크넷」의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다. 그는 지난 2월 발간돼 화제를 모은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에 브루스 커밍스의 수정주의적 6·25 해석을 비판한 「한국전쟁 원인의 국제정치적 再해석―스탈린의 롤백 이론」을 썼다.
지난 3월24일 「反체제」가 아니라 「反재단」 투쟁으로 시끄러운 성신女大의 연구실에서 金暎浩 교수를 만났다.
― 「녹두」 대표를 지내면서 펴낸 책 가운데 기억에 남는 책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역시 소련공산당의 공식 철학서인 「철학교정」을 번역, 소개한 「세계철학사」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그 책 때문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10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안토니오 그람시를 번역, 소개한 것도 기억에 남네요. 西歐 자본주의의 특질을 살피면서 헤게모니 이론을 가지고 「왜 선진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공산혁명이 일어나지 않는가」를 탐구한 책이었죠.
한국의 자유민주주의와 지식인의 정치참여의 의미를 잘 짚었던 盧在鳳(노재봉) 교수님의 「사상과 실천」도 기억에 남는 책입니다』
『「해방전후사의 인식」 접하고 해방감에 압도돼』
金暎浩 교수는 서울大 외교학과 78학번이다. 대학가에 대한 억압이 극심했던 維新(유신) 말기에서 5共 초기에 대학을 다닌 셈이다.
― 金교수님 세대가 「해방전후사의 인식」의 세례를 받은 첫 세대였죠.
『그렇습니다. 그 책이 1979년 처음 나왔으니까요』
― 그때 느낌이 어땠습니까.
『「금기시되던 현대사의 諸 문제들이 드디어 논의의 場으로 들어오는구나」 하는 해방감이 압도하더군요. 그때까지만 해도 서클활동을 하면서 한태수씨가 지은 「한국정당사」 같은 책들을 통해 광복 당시의 현대사를 간접적으로 공부했었거든요』
― 대학 다닐 때, 학생운동을 했습니까.
『학내 서클활동을 했었습니다』
― 서울大 외교학과를 나오셨는데, 外試(외시)준비는 안 하셨나요.
『안 했습니다. 요즘은 高試(고시) 공부를 많이 하는 모양인데, 그때는 취직걱정은 안 하던 시절이었어요. 대신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죠. 우리들은 학문적으로도 불행했습니다. 수업을 제대로 한 적이 거의 없었거든요』
― 대학 2학년 때 10·26 사태가 일어났는데, 어떤 생각이 들던가요.
『「드디어 우리나라가 바른 길로 가게 됐다」고 생각했죠. 곧이어 12·12 사태가 일어났지만, 민주화로 가는 정치일정은 순탄하게 진행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光州사태가 발생하자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고, 좌절도 컸습니다. 모든 것이 부정적으로만 보이고, 사회로 나가기가 싫더군요』
『우리 세대는 386세대와는 달라』
― 브루스 커밍스 類의 수정주의가 소개되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부터죠.
『미국에서 열린 학술회의에 다녀온 金學俊(김학준) 교수님이 「미국에는 한국戰을 內戰(내전)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고 말씀하셨던 것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브루스 커밍스가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은 1981년부터였지만, 그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1975년경이었다. 그의 시각이 그때부터 소개되기 시작한 것이죠』
金暎浩 교수는 『6·25에 대한 전통주의적 시각이 취약한 상태에서 수정주의가 들어오는 바람에 역사인식에 커다란 혼란이 초래됐다』고 했다.
『체험세대는 이론보다는 체험을 앞세우게 마련입니다. 우리나라에서 6·25를 겪은 세대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체험을 충실히 기록으로 남기고 그것을 이론화하는 노력이 병행됐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한 상태에서 수정주의가 들어오면서 6·25에 대한 해석이 그쪽으로 기울어 버렸어요. 이를 되돌리려면 한 세대는 걸릴 듯합니다』
― 主體사상에 관심을 가져 본 적은 없습니까.
『우리 세대는 386세대와는 다릅니다. 左派사상에 대해서는 상당히 개방적이었지만, 主體사상에 대해서는 「金日成·金正日의 통치수단에 불과한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主體사상을 받아들이기는 어려웠습니다』
― 미국 유학은 어떻게 가게 된 것입니까.
『1987년 서울구치소에서 6·10 항쟁과 6·29 선언에 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때 「이제 다시는 권위주의 시대로 되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앞으로 내가 사회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전문적인 능력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확신이 없었다면 아마 미국 유학을 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 그런 확신을 가진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람은 물질적인 요구가 충족되면 그 다음에는 認定(인정)에 대한 욕구를 갖게 마련입니다. 근대화의 결과 사회적으로 중산층이 형성되고 국민들이 자신감을 가지게 되면서 자유에 대한 요구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1987년 6월항쟁 때, 학생들뿐 아니라 「넥타이 부대」로 일컬어지는 중산층 시민들이 거리로 나오자 당시 권력 핵심부도 1980년처럼 武力(무력)으로 탄압하기보다는 타협하는 쪽을 선택한 것이라는 생각들을 하다 보니 그런 확신이 든 것이죠』
― 정부에서 보안법 위반事犯(사범)을 곱게 내보내 주던가요.
『제가 출옥한 것이 盧泰愚 정권이 출범하던 1988년 2월이었습니다. 여권이 안 나오는 것을 은사님들께서 애써 주셔서 미국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미국으로 건너간 金暎浩 교수는 보스턴大에서 국제정치학 석사학위를, 버지니아大 대학원에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유학 중 「포스트 전체주의」 이론 접하고 自省』
―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가장 충격을 받은 일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당시 제가 다니던 대학에는 체코 등 東歐(동구) 공산권 출신 교수들이 많았습니다. 그들로부터 체코의 저항지식인으로 공산체제 붕괴 후 대통령이 된 바츨라프 하벨의 「포스트 전체주의」 이론을 접했습니다.
「1980년대의 東歐 공산국가들은 겉으로는 공산당 1당 독재가 유지되고 있지만, 더 이상 종전처럼 공산당이 국민들의 삶과 사상을 속속들이 지배하는 전체주의 체제는 아니었다」는 것이 「포스트 전체주의」이론입니다.
체코의 한 푸줏간에 「萬國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는 표어가 걸려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집 주인이 철저한 공산주의자여서가 아니라, 「나는 이렇게 체제에 순응하는 사람이니까, 나를 건드리지 말아 달라」는 의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는 겁니다. 그게 「포스트 전체주의」 사회인 것이죠.
東歐 공산주의 국가들이 안에서부터 허물어져 가고 있을 때, 나는 한국에서 소련공산당의 공인 철학서나 출판하고 있었으니」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스탈린의 롤백 이론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면서 金暎浩 교수는 美 국립문서청을 드나들면서 한국현대사, 특히 6·25 전쟁을 穿鑿(천착)했다. 金교수는 『마침 그 무렵이 소련 비밀문서들이 대거 공개될 때여서, 학문적으로 운이 좋았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수정주의 학자인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은 그 이전에 남북한 간에 間斷(간단)없이 전개되던 분쟁의 연장선상에서 벌어진 內戰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비밀에서 해제된 소련문서들을 보니 그게 아니더군요. 1949년 11월초부터 이듬해 6·25가 발발하기까지 7개월여 동안은 남북한 간에 분쟁이 없었습니다. 이 시기 金日成은 끊임없이 전쟁을 원하고 있었지만, 스탈린은 이를 자제시켰습니다. 따라서 6·25를 남북한간 武力충돌의 연장선상에서 보는 커밍스의 시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 좀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죠.
『1949년 10월 말 옹진에서 남북한 간의 대규모 무력충돌이 벌어졌는데, 남북한 각각 400여 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이때 「소련군사고문단이 러시아語로 북한 포병들에게 포격 제원을 지시하는 것을 감청했다」는 사실이 美 군사고문단의 정보보고서에 나타납니다. 스탈린은 이 사건 이후 북한 당국과 소련의 군사고문관에게 자신의 동의 없이는 對南도발 하지 말라고 지시합니다』
― 스탈린이 金日成의 도발을 억제시키다가, 6·25를 지원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스탈린은 冷戰(냉전) 개시 이후 처음으로 북한군을 이용해 미국의 對蘇봉쇄선을 넘어서 남한을 赤化(적화)시킴으로써 對美의존 일변도의 정책을 펴는 일본에게 타격을 주고, 미국의 위신을 실추시키기 위한 「롤백 전략」을 구상하고 있었다고 봅니다. 이를 위해 스탈린은 金日成을 자제시키는 한편, 毛澤東에게 무기 지원을 약속하는 등 남침준비를 했던 거죠』
― 그럼 스탈린과 金日成의 한국전쟁에 대한 책임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1949~1950년 金日成은 스타트 라인에 선 육상선수가 당장이라도 달려 나가고 싶어 하는 것처럼, 전쟁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스탈린은 「내가 허락하기 전까지는 안 된다」고 金日成을 막고 있다가 毛澤東과의 협의 등 전쟁준비가 다 된 후에 남침을 승낙했습니다.
마치 심판이 총을 쏴서 출발신호를 하듯이, 金日成에게 나가도 좋다고 권총의 방아쇠를 당긴 것이죠. 전쟁을 실제로 일으킨 金日成과 세계전략 구상에 따라 金日成의 전쟁도발을 승인한 스탈린 모두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 6·25에 대한 종전의 전통주의적 해석과 교수님의 「스탈린의 롤백 이론」 간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종래의 전통주의적 해석은 대개 金日成의 남침이 스탈린의 全세계 赤化전략의 일환이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저는 스탈린이 한반도內에서 전쟁의 범위가 국한되는 제한戰을 통해 소련의 세계전략적 목표들을 달성하려 했다고 봅니다. 제 주장을 「新전통주의적 해석」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盧武鉉 대통령은 포퓰리스트』
6·25 얘기에만 계속 매달려 있을 수는 없어 화제를 돌렸다.
― 얼마 전 盧武鉉 대통령은 네티즌들과의 대화에서 자신에 대해 「左派 新자유주의자」라는 말을 썼습니다. 盧武鉉 정권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시겠습니까.
『다른 것은 모르겠고, 盧武鉉 대통령이 포퓰리스트인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盧武鉉 대통령은 민주화 이후의 이념적 지표와 국가적 비전을 제시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뚜렷한 이념이나 철학적 기반이 없다 보니, 정책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죠. 이념과 비전의 空白(공백)을 지역감정이나 수도이전 같은 포퓰리즘이 메우고 들어가는 겁니다.
「1주일이면 귀가 뚫린다」는 식의 영어교재 광고를 흔히 봅니다. 사실 그렇게 쉽게 영어를 익힐 수 없는 데도, 사람들은 그 거짓말에 속아 넘어갑니다. 인간이 그만큼 나약한 존재인 데다가, 영어를 배우겠다는 욕망이 강하기 때문이죠. 포퓰리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금만 따져 보면 그게 될 얘기가 아닌 데도 거기에 속아 넘어가거든요』
― 盧武鉉 정부는 신문 공동배달에서부터 兩極化(양극화) 해소까지 정부가 모두 해결해 주겠다면서 공공연히 「큰 정부」를 지향하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국가주도의 시대는 갔습니다. 지금은 조달청의 구매 규모가 1개 대기업의 구매규모보다도 작은 시대입니다. 국가가 민간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시스템으로 가야 합니다』
― 盧武鉉 정권 사람들은 當爲(당위)와 현실이 곧잘 헷갈리는 것 같습니다. 「과거 민주화 운동을 한 사람들의 정권 아래서 도청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합니다만, 실제로는 도청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처럼 말이죠.
『그건 결국 정권이 국민들을 호도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민주화 이전 정권이든 이후 정권이든, 「권력의 魔性(마성)」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매디슨은 「인간은 천사가 아니다」라면서 권력 상호 간의 견제와 균형을 강조했던 것이죠. 권력을 감시하기 위해서는 언론과 지식인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 신문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민주화 세력」이라는 사람들이 신문법을 만들어 언론을 탄압하는 것은, 그들 자신이 「얼치기 민주화 세력」이라는 것을 自認(자인)하는 것입니다』
『戰時작전통제권은 유사시 美軍 자동개입 보장 장치』
― 盧武鉉 정권이 추진하는 戰時작전통제권 회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촛불시위와 反美정서를 업고 집권한 盧武鉉 정권은 「自主」를 모토로 내세우는데, 非현실적인 경우가 많아요. 예컨대 韓美동맹下에서는 미국에서 정보를 가져오지만, 戰時작전통제권을 우리가 가져오면 그런 일들을 엄청난 돈을 들여 우리가 해야 합니다.
정책은 재정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제대로 된 지도자라면 「우리가 自主국방을 위해 戰時작전통제권을 가져오려면 정보능력을 갖춰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국방비를 크게 늘려야 하고, 국방비를 늘리려면 국민들이 세금을 더 많이 내야 한다」고 얘기해야 합니다』
― 미국은 제1, 2차 세계대전을 비롯해 어떤 전쟁에서도 작전통제권을 넘겨준 적이 없습니다. 한국이 戰時작전통제권을 가져온다면, 韓美동맹은 와해되는 것 아닙니까.
『韓美상호방위조약에는 NATO의 경우와는 달리 美軍의 자동개입 조항이 없습니다. 韓美연합사령관의 戰時작전통제권은 유사시 美軍의 자동개입을 보장하는 유일한 장치입니다.
북한의 核보유가 이미 기정사실로 굳어졌습니다. 미국의 「核우산」 없이 북한의 核위협을 견딜 수 있겠습니까? 북한은 앞으로 우리를 상대로 核공갈을 칠 것입니다. 그런데도 戰時작전통제권은 가져오면서, 남북한 군사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주장은 문제가 있습니다.
19세기 말~20세기 전반기에 東北亞에서는 淸日전쟁, 러일전쟁, 만주사변, 中日전쟁, 6·25 등 전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난 50년 동안은 다소 위기는 있었지만, 전쟁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는 東北亞에 근대 국제질서가 移植(이식)된 이래 처음 있는 일입니다. 그 중심에는 韓美동맹과 駐韓美軍이 있었습니다.
국제질서의 유일한 낙오자가 북한입니다. 이 안정적인 국제질서를 유지하려는 나라들이 북한을 견제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누가 국가지도자가 되건, 우리나라의 국가지도자라면 이 질서를 꼭 유지해야 합니다』
『북한인권 외면으로 과거 민주화 세력은 도덕적 치명상 입어』
― 盧武鉉 정권의 「東北亞 균형자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마디로 虛張聲勢(허장성세)입니다. 균형자가 되려면 주변국을 압도하는 힘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에게 그런 힘이 있습니까? 東北亞 균형자론은 韓美동맹에서 벗어나 주변 4强에 대한 등거리 외교를 하겠다는 얘기입니다.
盧武鉉 대통령의 외교 행태 중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외교 얘기를 인터넷에 올리는 것입니다. 외교문제는 국가 신인도, 국민의 생명과 재산이 걸린 문제입니다. 「말은 부드럽게 하되, 등 뒤에는 몽둥이를 감추고 있어야 하는 것」이 외교입니다』
― 미국이 북한의 위조지폐 제조 의혹을 제기하고 있는 데 대해, 盧武鉉 정권은 오히려 북한의 역성을 드는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자유무역으로 먹고 사는 나라가 基軸通貨(기축통화)인 달러貨 위조문제에 대해 그렇게 안이하게 대처하는 것은, 국가안보 담당자들이 직무를 유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 人權을 주장하던 민주화 운동가들의 정권인 盧武鉉 정권이 북한人權 문제에 소극적인 데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現 정부는 「남북한 화해협력을 위해 북한인권을 제기하면 안 된다」면서, 「참여정부」답게 UN 인권위원회 등에 「참여」는 하지만, 표결에는 「기권」한다는 방침을 고수하더군요.
과거 민주화 운동 세력은 북한인권 문제에 침묵하면서 도덕적인 치명상을 입게 됐습니다. 옛날에 운동권 세력들이 뭐라고 말했습니까? 「남한이 민주화되어야 통일이 된다」고 했습니다. 이제 한국은 민주화되었지만, 북한은 여전히 수용소 群島(군도)의 참상 아래 있습니다. 이 참상에 억지로 눈을 감는 것은 정치적·도덕적으로 잘못된 일입니다.
이념의 차이를 떠나 북한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누구라도 목소리를 높여야 합니다. 근래 「뉴레프트」를 표방하는 일부 「진보」 지식인들이 북한인권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역사에 대한 인식에서나, 現 정권에 대한 평가에서나 金暎浩 교수에게서는 과거 左派 지식인으로서의 「의식의 片鱗(편린)」을 거의 발견할 수 없었다. 그 이유를 물어보았더니, 金교수는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대학에서 국제정치학을 공부했던 것이 한 원인일 것입니다. 국제정치학은 국제정치를 권력의 논리가 지배하는 정글로 보는 현실주의적 성향이 강합니다. 낭만주의와는 거리가 멀죠』
『뉴라이트 운동, 이제 總論에서 各論으로 들어가야』
인터뷰를 시작한 것이 오전 9시였는데, 어느덧 11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뉴라이트 운동으로 화제를 돌렸다.
― 뉴라이트 운동이 시작된 지 벌써 1년 반이 되어 갑니다. 뉴라이트 운동을 지도하는 인사들이 하는 말을 들어 보면, 아직 原論的(원론적)인 얘기에 그치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뭔가 중간 결과물이 나올 때가 된 것 아닙니까.
『저도 그런 문제들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이제는 總論(총론)에서 各論(각론)으로 들어가야 할 때입니다.
우선 뉴라이트재단이 추진 중입니다. 뉴라이트재단은 뉴라이트 사상 傳播(전파)·교육·정책개발 등 뉴라이트 운동의 허브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아마 安秉直(안병직) 교수님께서 뉴라이트재단을 맡으실 것입니다. 6월에는 북한민주화네트워크에서 발간하던 「시대정신」을 뉴라이트 운동 계간지로 再창간할 예정입니다』
― 뉴라이트 싱크넷의 활동을 좀 소개해 주시죠.
『뉴라이트 싱크넷은 盧武鉉 정권의 과거사 청산 작업으로 대한민국의 正體性이 흔들리는 것을 보면서, 뜻있는 少壯(소장) 학자들이 지식인들의 허브를 만들어 뉴라이트 운동을 뒷받침하자는 생각에서 출발했습니다.
뉴라이트 싱크넷은 「자유주의의 再발견」 내지 「자유주의적 보수주의」를 모색하고 있습니다. 작년 5월에는 「한국의 자유주의 전통」이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열었습니다. 자유주의연대의 요청으로 지방순회강연도 진행할 예정입니다.
운동사적 관점에서 쓰인 현행 교과서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대한민국의 성장과 발전사」라는 관점에 입각한 代案(대안) 교과서를 모색하는 작업도 진행 중입니다. 많은 싱크넷 회원들이 자신의 위치에서 칼럼이나 저술 등을 통해 뉴라이트 이념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 지식인들의 느슨한 連帶體(연대체) 성격을 띠면서 세미나·강연이나 하는 것은, 너무 소극적인 것 아닐까요.
『원래 「진보주의자」들은 「정치가 사회를 바꾼다」고 생각하지만, 「보수주의자」들은 「문화가 정치와 사회를 바꾼다」고 생각하는 법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보수주의자들은 문화를 너무 소홀히 해 왔습니다.
大選(대선)에서 정권을 되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국민의 의식의 흐름을 바꾸는 것입니다. 「해방전후사의 인식」과 그 책을 읽고 의식화된 사람들이 지난 한 세대 동안 우리 사회를 어떻게 바꾸어 놓았습니까?
마찬가지로 뉴라이트 싱크넷의 활동이 30년, 50년, 100년이 흐른 뒤에 知性史的으로 의미 있는 일이었다고 평가된다면, 그 자체로서 큰 보람이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얼마 전 나온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이 준 충격파는 작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궤도에서 일탈한 적 없어』
― 뉴라이트 운동이 등장하면서 「올드 라이트」들과의 차별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右派(우파) 진영 내부의 갈등을 조장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건국-호국-근대화로 이어지는 대한민국의 역사를 일구어 온 기존 保守(보수)세력이 없었다면, 민주화도 없었을 것입니다. 기존 保守의 노고와 성취에 대해서는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만 기존 保守는 두 차례의 大選에서 패배하면서 「차떼기 保守」의 이미지가 덧씌워졌습니다. 이러한 保守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保守」, 「젊은 保守」들이 등장한 것이고, 그 과정에서 초기에는 차별성을 강조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안보보수주의」는 여전히 유효한 개념이지만, 인류보편의 가치인 자유주의와의 결합을 통해 「자유주의적 보수주의」로 거듭나야 합니다. 궁극적으로는 기존 보수나 뉴라이트 모두 하나의 큰 텐트 아래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대한민국의 역사를 매우 긍정적으로 보시는군요.
『光復(광복) 이후 이 땅에 자유민주주의가 移植(이식)된 것은 혁명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우리가 언제 자유 투표를 해 봤습니까? 북한에서는 아직도 그걸 못 하고 있잖습니까?
이 땅에 자유민주주의라는 레일이 깔린 이래 대한민국은 그 길을 달려왔습니다. 左派들은 「대한민국의 역사는 민주주의의 정상 궤도에서 일탈한 잘못된 역사」였다고 주장합니다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비록 기차 안에서 힘 센 사람이 행세하거나, 승객들끼리 치고받으면서 시끄럽고 유리창이 깨진 적은 있지만, 대한민국이라는 열차가 자유민주주의라는 궤도에서 일탈한 적은 없었습니다.
「역사 바로세우기」니 「제2의 건국」이니 하면서, 마치 민주화 운동의 결과로 이 나라가 달리는 철길이 새로 깔린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오만한 얘깁니다』●
사회과학 서점에서 접할 수 있는 책들을 주로 펴내는 운동권 출판사들 가운데 「도서출판 녹두」가 있었다. 「녹두장군 전봉준」을 연상케 해서일까? 이름에서부터 저항적인 냄새를 물씬 풍기는 출판사 「녹두」에서는 「세계철학사」라는 이름 아래 소련공산당의 公認(공인) 철학서를 펴냈고, 헤게모니 이론의 주창자인 이탈리아의 공산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를 처음으로 한국에 소개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흘렀다. 대학가의 사회과학 서점들은 이미 오래 전에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커피숍이나 미용실이 들어섰다. 그때 사회과학 서적들을 펴냈거나, 몰래 사 읽던 「운동권」 가운데 상당수가 금배지를 달거나 청와대로 진출했다. 그 무렵 뒤늦게 사회과학 서적들을 읽고 『피가 거꾸로 솟았다』던 젊은 변호사는 대통령이 됐다.
1980년대 중반 「녹두」를 이끌었던 청년 金暎浩(김영호·47)는 「뉴라이트」라는 깃발 아래 다시 「운동」의 길에 나섰다. 그는 뉴라이트 지식인들의 連帶體(연대체)인 「뉴라이트싱크넷」의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다. 그는 지난 2월 발간돼 화제를 모은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에 브루스 커밍스의 수정주의적 6·25 해석을 비판한 「한국전쟁 원인의 국제정치적 再해석―스탈린의 롤백 이론」을 썼다.
지난 3월24일 「反체제」가 아니라 「反재단」 투쟁으로 시끄러운 성신女大의 연구실에서 金暎浩 교수를 만났다.
― 「녹두」 대표를 지내면서 펴낸 책 가운데 기억에 남는 책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역시 소련공산당의 공식 철학서인 「철학교정」을 번역, 소개한 「세계철학사」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그 책 때문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10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안토니오 그람시를 번역, 소개한 것도 기억에 남네요. 西歐 자본주의의 특질을 살피면서 헤게모니 이론을 가지고 「왜 선진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공산혁명이 일어나지 않는가」를 탐구한 책이었죠.
한국의 자유민주주의와 지식인의 정치참여의 의미를 잘 짚었던 盧在鳳(노재봉) 교수님의 「사상과 실천」도 기억에 남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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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暎浩 교수가「도서출판 녹두」대표 시절 펴낸 책들. |

金暎浩 교수는 서울大 외교학과 78학번이다. 대학가에 대한 억압이 극심했던 維新(유신) 말기에서 5共 초기에 대학을 다닌 셈이다.
― 金교수님 세대가 「해방전후사의 인식」의 세례를 받은 첫 세대였죠.
『그렇습니다. 그 책이 1979년 처음 나왔으니까요』
― 그때 느낌이 어땠습니까.
『「금기시되던 현대사의 諸 문제들이 드디어 논의의 場으로 들어오는구나」 하는 해방감이 압도하더군요. 그때까지만 해도 서클활동을 하면서 한태수씨가 지은 「한국정당사」 같은 책들을 통해 광복 당시의 현대사를 간접적으로 공부했었거든요』
― 대학 다닐 때, 학생운동을 했습니까.
『학내 서클활동을 했었습니다』
― 서울大 외교학과를 나오셨는데, 外試(외시)준비는 안 하셨나요.
『안 했습니다. 요즘은 高試(고시) 공부를 많이 하는 모양인데, 그때는 취직걱정은 안 하던 시절이었어요. 대신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죠. 우리들은 학문적으로도 불행했습니다. 수업을 제대로 한 적이 거의 없었거든요』
― 대학 2학년 때 10·26 사태가 일어났는데, 어떤 생각이 들던가요.
『「드디어 우리나라가 바른 길로 가게 됐다」고 생각했죠. 곧이어 12·12 사태가 일어났지만, 민주화로 가는 정치일정은 순탄하게 진행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光州사태가 발생하자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고, 좌절도 컸습니다. 모든 것이 부정적으로만 보이고, 사회로 나가기가 싫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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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운동권과 지식인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준「해방전후사의 인식」. |
『미국에서 열린 학술회의에 다녀온 金學俊(김학준) 교수님이 「미국에는 한국戰을 內戰(내전)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고 말씀하셨던 것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브루스 커밍스가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은 1981년부터였지만, 그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1975년경이었다. 그의 시각이 그때부터 소개되기 시작한 것이죠』
金暎浩 교수는 『6·25에 대한 전통주의적 시각이 취약한 상태에서 수정주의가 들어오는 바람에 역사인식에 커다란 혼란이 초래됐다』고 했다.
『체험세대는 이론보다는 체험을 앞세우게 마련입니다. 우리나라에서 6·25를 겪은 세대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체험을 충실히 기록으로 남기고 그것을 이론화하는 노력이 병행됐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한 상태에서 수정주의가 들어오면서 6·25에 대한 해석이 그쪽으로 기울어 버렸어요. 이를 되돌리려면 한 세대는 걸릴 듯합니다』
― 主體사상에 관심을 가져 본 적은 없습니까.
『우리 세대는 386세대와는 다릅니다. 左派사상에 대해서는 상당히 개방적이었지만, 主體사상에 대해서는 「金日成·金正日의 통치수단에 불과한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主體사상을 받아들이기는 어려웠습니다』
― 미국 유학은 어떻게 가게 된 것입니까.
『1987년 서울구치소에서 6·10 항쟁과 6·29 선언에 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때 「이제 다시는 권위주의 시대로 되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앞으로 내가 사회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전문적인 능력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확신이 없었다면 아마 미국 유학을 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 그런 확신을 가진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람은 물질적인 요구가 충족되면 그 다음에는 認定(인정)에 대한 욕구를 갖게 마련입니다. 근대화의 결과 사회적으로 중산층이 형성되고 국민들이 자신감을 가지게 되면서 자유에 대한 요구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1987년 6월항쟁 때, 학생들뿐 아니라 「넥타이 부대」로 일컬어지는 중산층 시민들이 거리로 나오자 당시 권력 핵심부도 1980년처럼 武力(무력)으로 탄압하기보다는 타협하는 쪽을 선택한 것이라는 생각들을 하다 보니 그런 확신이 든 것이죠』
― 정부에서 보안법 위반事犯(사범)을 곱게 내보내 주던가요.
『제가 출옥한 것이 盧泰愚 정권이 출범하던 1988년 2월이었습니다. 여권이 안 나오는 것을 은사님들께서 애써 주셔서 미국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미국으로 건너간 金暎浩 교수는 보스턴大에서 국제정치학 석사학위를, 버지니아大 대학원에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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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유학 시절 국립문서청에서 연구하는 金暎浩 교수. |
『당시 제가 다니던 대학에는 체코 등 東歐(동구) 공산권 출신 교수들이 많았습니다. 그들로부터 체코의 저항지식인으로 공산체제 붕괴 후 대통령이 된 바츨라프 하벨의 「포스트 전체주의」 이론을 접했습니다.
「1980년대의 東歐 공산국가들은 겉으로는 공산당 1당 독재가 유지되고 있지만, 더 이상 종전처럼 공산당이 국민들의 삶과 사상을 속속들이 지배하는 전체주의 체제는 아니었다」는 것이 「포스트 전체주의」이론입니다.
체코의 한 푸줏간에 「萬國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는 표어가 걸려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집 주인이 철저한 공산주의자여서가 아니라, 「나는 이렇게 체제에 순응하는 사람이니까, 나를 건드리지 말아 달라」는 의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는 겁니다. 그게 「포스트 전체주의」 사회인 것이죠.
東歐 공산주의 국가들이 안에서부터 허물어져 가고 있을 때, 나는 한국에서 소련공산당의 공인 철학서나 출판하고 있었으니」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면서 金暎浩 교수는 美 국립문서청을 드나들면서 한국현대사, 특히 6·25 전쟁을 穿鑿(천착)했다. 金교수는 『마침 그 무렵이 소련 비밀문서들이 대거 공개될 때여서, 학문적으로 운이 좋았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수정주의 학자인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은 그 이전에 남북한 간에 間斷(간단)없이 전개되던 분쟁의 연장선상에서 벌어진 內戰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비밀에서 해제된 소련문서들을 보니 그게 아니더군요. 1949년 11월초부터 이듬해 6·25가 발발하기까지 7개월여 동안은 남북한 간에 분쟁이 없었습니다. 이 시기 金日成은 끊임없이 전쟁을 원하고 있었지만, 스탈린은 이를 자제시켰습니다. 따라서 6·25를 남북한간 武力충돌의 연장선상에서 보는 커밍스의 시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 좀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죠.
『1949년 10월 말 옹진에서 남북한 간의 대규모 무력충돌이 벌어졌는데, 남북한 각각 400여 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이때 「소련군사고문단이 러시아語로 북한 포병들에게 포격 제원을 지시하는 것을 감청했다」는 사실이 美 군사고문단의 정보보고서에 나타납니다. 스탈린은 이 사건 이후 북한 당국과 소련의 군사고문관에게 자신의 동의 없이는 對南도발 하지 말라고 지시합니다』
― 스탈린이 金日成의 도발을 억제시키다가, 6·25를 지원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스탈린은 冷戰(냉전) 개시 이후 처음으로 북한군을 이용해 미국의 對蘇봉쇄선을 넘어서 남한을 赤化(적화)시킴으로써 對美의존 일변도의 정책을 펴는 일본에게 타격을 주고, 미국의 위신을 실추시키기 위한 「롤백 전략」을 구상하고 있었다고 봅니다. 이를 위해 스탈린은 金日成을 자제시키는 한편, 毛澤東에게 무기 지원을 약속하는 등 남침준비를 했던 거죠』
― 그럼 스탈린과 金日成의 한국전쟁에 대한 책임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1949~1950년 金日成은 스타트 라인에 선 육상선수가 당장이라도 달려 나가고 싶어 하는 것처럼, 전쟁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스탈린은 「내가 허락하기 전까지는 안 된다」고 金日成을 막고 있다가 毛澤東과의 협의 등 전쟁준비가 다 된 후에 남침을 승낙했습니다.
마치 심판이 총을 쏴서 출발신호를 하듯이, 金日成에게 나가도 좋다고 권총의 방아쇠를 당긴 것이죠. 전쟁을 실제로 일으킨 金日成과 세계전략 구상에 따라 金日成의 전쟁도발을 승인한 스탈린 모두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 6·25에 대한 종전의 전통주의적 해석과 교수님의 「스탈린의 롤백 이론」 간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종래의 전통주의적 해석은 대개 金日成의 남침이 스탈린의 全세계 赤化전략의 일환이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저는 스탈린이 한반도內에서 전쟁의 범위가 국한되는 제한戰을 통해 소련의 세계전략적 목표들을 달성하려 했다고 봅니다. 제 주장을 「新전통주의적 해석」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6·25 얘기에만 계속 매달려 있을 수는 없어 화제를 돌렸다.
― 얼마 전 盧武鉉 대통령은 네티즌들과의 대화에서 자신에 대해 「左派 新자유주의자」라는 말을 썼습니다. 盧武鉉 정권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시겠습니까.
『다른 것은 모르겠고, 盧武鉉 대통령이 포퓰리스트인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盧武鉉 대통령은 민주화 이후의 이념적 지표와 국가적 비전을 제시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뚜렷한 이념이나 철학적 기반이 없다 보니, 정책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죠. 이념과 비전의 空白(공백)을 지역감정이나 수도이전 같은 포퓰리즘이 메우고 들어가는 겁니다.
「1주일이면 귀가 뚫린다」는 식의 영어교재 광고를 흔히 봅니다. 사실 그렇게 쉽게 영어를 익힐 수 없는 데도, 사람들은 그 거짓말에 속아 넘어갑니다. 인간이 그만큼 나약한 존재인 데다가, 영어를 배우겠다는 욕망이 강하기 때문이죠. 포퓰리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금만 따져 보면 그게 될 얘기가 아닌 데도 거기에 속아 넘어가거든요』
― 盧武鉉 정부는 신문 공동배달에서부터 兩極化(양극화) 해소까지 정부가 모두 해결해 주겠다면서 공공연히 「큰 정부」를 지향하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국가주도의 시대는 갔습니다. 지금은 조달청의 구매 규모가 1개 대기업의 구매규모보다도 작은 시대입니다. 국가가 민간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시스템으로 가야 합니다』
― 盧武鉉 정권 사람들은 當爲(당위)와 현실이 곧잘 헷갈리는 것 같습니다. 「과거 민주화 운동을 한 사람들의 정권 아래서 도청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합니다만, 실제로는 도청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처럼 말이죠.
『그건 결국 정권이 국민들을 호도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민주화 이전 정권이든 이후 정권이든, 「권력의 魔性(마성)」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매디슨은 「인간은 천사가 아니다」라면서 권력 상호 간의 견제와 균형을 강조했던 것이죠. 권력을 감시하기 위해서는 언론과 지식인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 신문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민주화 세력」이라는 사람들이 신문법을 만들어 언론을 탄압하는 것은, 그들 자신이 「얼치기 민주화 세력」이라는 것을 自認(자인)하는 것입니다』

― 盧武鉉 정권이 추진하는 戰時작전통제권 회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촛불시위와 反美정서를 업고 집권한 盧武鉉 정권은 「自主」를 모토로 내세우는데, 非현실적인 경우가 많아요. 예컨대 韓美동맹下에서는 미국에서 정보를 가져오지만, 戰時작전통제권을 우리가 가져오면 그런 일들을 엄청난 돈을 들여 우리가 해야 합니다.
정책은 재정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제대로 된 지도자라면 「우리가 自主국방을 위해 戰時작전통제권을 가져오려면 정보능력을 갖춰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국방비를 크게 늘려야 하고, 국방비를 늘리려면 국민들이 세금을 더 많이 내야 한다」고 얘기해야 합니다』
― 미국은 제1, 2차 세계대전을 비롯해 어떤 전쟁에서도 작전통제권을 넘겨준 적이 없습니다. 한국이 戰時작전통제권을 가져온다면, 韓美동맹은 와해되는 것 아닙니까.
『韓美상호방위조약에는 NATO의 경우와는 달리 美軍의 자동개입 조항이 없습니다. 韓美연합사령관의 戰時작전통제권은 유사시 美軍의 자동개입을 보장하는 유일한 장치입니다.
북한의 核보유가 이미 기정사실로 굳어졌습니다. 미국의 「核우산」 없이 북한의 核위협을 견딜 수 있겠습니까? 북한은 앞으로 우리를 상대로 核공갈을 칠 것입니다. 그런데도 戰時작전통제권은 가져오면서, 남북한 군사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주장은 문제가 있습니다.
19세기 말~20세기 전반기에 東北亞에서는 淸日전쟁, 러일전쟁, 만주사변, 中日전쟁, 6·25 등 전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난 50년 동안은 다소 위기는 있었지만, 전쟁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는 東北亞에 근대 국제질서가 移植(이식)된 이래 처음 있는 일입니다. 그 중심에는 韓美동맹과 駐韓美軍이 있었습니다.
국제질서의 유일한 낙오자가 북한입니다. 이 안정적인 국제질서를 유지하려는 나라들이 북한을 견제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누가 국가지도자가 되건, 우리나라의 국가지도자라면 이 질서를 꼭 유지해야 합니다』

― 盧武鉉 정권의 「東北亞 균형자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마디로 虛張聲勢(허장성세)입니다. 균형자가 되려면 주변국을 압도하는 힘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에게 그런 힘이 있습니까? 東北亞 균형자론은 韓美동맹에서 벗어나 주변 4强에 대한 등거리 외교를 하겠다는 얘기입니다.
盧武鉉 대통령의 외교 행태 중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외교 얘기를 인터넷에 올리는 것입니다. 외교문제는 국가 신인도, 국민의 생명과 재산이 걸린 문제입니다. 「말은 부드럽게 하되, 등 뒤에는 몽둥이를 감추고 있어야 하는 것」이 외교입니다』
― 미국이 북한의 위조지폐 제조 의혹을 제기하고 있는 데 대해, 盧武鉉 정권은 오히려 북한의 역성을 드는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자유무역으로 먹고 사는 나라가 基軸通貨(기축통화)인 달러貨 위조문제에 대해 그렇게 안이하게 대처하는 것은, 국가안보 담당자들이 직무를 유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 人權을 주장하던 민주화 운동가들의 정권인 盧武鉉 정권이 북한人權 문제에 소극적인 데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現 정부는 「남북한 화해협력을 위해 북한인권을 제기하면 안 된다」면서, 「참여정부」답게 UN 인권위원회 등에 「참여」는 하지만, 표결에는 「기권」한다는 방침을 고수하더군요.
과거 민주화 운동 세력은 북한인권 문제에 침묵하면서 도덕적인 치명상을 입게 됐습니다. 옛날에 운동권 세력들이 뭐라고 말했습니까? 「남한이 민주화되어야 통일이 된다」고 했습니다. 이제 한국은 민주화되었지만, 북한은 여전히 수용소 群島(군도)의 참상 아래 있습니다. 이 참상에 억지로 눈을 감는 것은 정치적·도덕적으로 잘못된 일입니다.
이념의 차이를 떠나 북한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누구라도 목소리를 높여야 합니다. 근래 「뉴레프트」를 표방하는 일부 「진보」 지식인들이 북한인권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역사에 대한 인식에서나, 現 정권에 대한 평가에서나 金暎浩 교수에게서는 과거 左派 지식인으로서의 「의식의 片鱗(편린)」을 거의 발견할 수 없었다. 그 이유를 물어보았더니, 金교수는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대학에서 국제정치학을 공부했던 것이 한 원인일 것입니다. 국제정치학은 국제정치를 권력의 논리가 지배하는 정글로 보는 현실주의적 성향이 강합니다. 낭만주의와는 거리가 멀죠』

인터뷰를 시작한 것이 오전 9시였는데, 어느덧 11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뉴라이트 운동으로 화제를 돌렸다.
― 뉴라이트 운동이 시작된 지 벌써 1년 반이 되어 갑니다. 뉴라이트 운동을 지도하는 인사들이 하는 말을 들어 보면, 아직 原論的(원론적)인 얘기에 그치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뭔가 중간 결과물이 나올 때가 된 것 아닙니까.
『저도 그런 문제들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이제는 總論(총론)에서 各論(각론)으로 들어가야 할 때입니다.
우선 뉴라이트재단이 추진 중입니다. 뉴라이트재단은 뉴라이트 사상 傳播(전파)·교육·정책개발 등 뉴라이트 운동의 허브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아마 安秉直(안병직) 교수님께서 뉴라이트재단을 맡으실 것입니다. 6월에는 북한민주화네트워크에서 발간하던 「시대정신」을 뉴라이트 운동 계간지로 再창간할 예정입니다』
― 뉴라이트 싱크넷의 활동을 좀 소개해 주시죠.
『뉴라이트 싱크넷은 盧武鉉 정권의 과거사 청산 작업으로 대한민국의 正體性이 흔들리는 것을 보면서, 뜻있는 少壯(소장) 학자들이 지식인들의 허브를 만들어 뉴라이트 운동을 뒷받침하자는 생각에서 출발했습니다.
뉴라이트 싱크넷은 「자유주의의 再발견」 내지 「자유주의적 보수주의」를 모색하고 있습니다. 작년 5월에는 「한국의 자유주의 전통」이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열었습니다. 자유주의연대의 요청으로 지방순회강연도 진행할 예정입니다.
운동사적 관점에서 쓰인 현행 교과서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대한민국의 성장과 발전사」라는 관점에 입각한 代案(대안) 교과서를 모색하는 작업도 진행 중입니다. 많은 싱크넷 회원들이 자신의 위치에서 칼럼이나 저술 등을 통해 뉴라이트 이념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 지식인들의 느슨한 連帶體(연대체) 성격을 띠면서 세미나·강연이나 하는 것은, 너무 소극적인 것 아닐까요.
『원래 「진보주의자」들은 「정치가 사회를 바꾼다」고 생각하지만, 「보수주의자」들은 「문화가 정치와 사회를 바꾼다」고 생각하는 법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보수주의자들은 문화를 너무 소홀히 해 왔습니다.
大選(대선)에서 정권을 되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국민의 의식의 흐름을 바꾸는 것입니다. 「해방전후사의 인식」과 그 책을 읽고 의식화된 사람들이 지난 한 세대 동안 우리 사회를 어떻게 바꾸어 놓았습니까?
마찬가지로 뉴라이트 싱크넷의 활동이 30년, 50년, 100년이 흐른 뒤에 知性史的으로 의미 있는 일이었다고 평가된다면, 그 자체로서 큰 보람이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얼마 전 나온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이 준 충격파는 작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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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라이트 싱크넷 창립대회. 앞줄 왼쪽부터 김종석(홍익大)·김영호(성신女大)·박영아(명지大)·조성환(경기大)·제성호(중앙大)·조전혁(인천大) 교수. 뒷줄 왼쪽부터 강석훈(성신女大)·전상인(서울大)·김일영(성균관大)·김용직(성신女大)·전홍찬(부산大) 교수. |

― 뉴라이트 운동이 등장하면서 「올드 라이트」들과의 차별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右派(우파) 진영 내부의 갈등을 조장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건국-호국-근대화로 이어지는 대한민국의 역사를 일구어 온 기존 保守(보수)세력이 없었다면, 민주화도 없었을 것입니다. 기존 保守의 노고와 성취에 대해서는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만 기존 保守는 두 차례의 大選에서 패배하면서 「차떼기 保守」의 이미지가 덧씌워졌습니다. 이러한 保守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保守」, 「젊은 保守」들이 등장한 것이고, 그 과정에서 초기에는 차별성을 강조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안보보수주의」는 여전히 유효한 개념이지만, 인류보편의 가치인 자유주의와의 결합을 통해 「자유주의적 보수주의」로 거듭나야 합니다. 궁극적으로는 기존 보수나 뉴라이트 모두 하나의 큰 텐트 아래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대한민국의 역사를 매우 긍정적으로 보시는군요.
『光復(광복) 이후 이 땅에 자유민주주의가 移植(이식)된 것은 혁명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우리가 언제 자유 투표를 해 봤습니까? 북한에서는 아직도 그걸 못 하고 있잖습니까?
이 땅에 자유민주주의라는 레일이 깔린 이래 대한민국은 그 길을 달려왔습니다. 左派들은 「대한민국의 역사는 민주주의의 정상 궤도에서 일탈한 잘못된 역사」였다고 주장합니다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비록 기차 안에서 힘 센 사람이 행세하거나, 승객들끼리 치고받으면서 시끄럽고 유리창이 깨진 적은 있지만, 대한민국이라는 열차가 자유민주주의라는 궤도에서 일탈한 적은 없었습니다.
「역사 바로세우기」니 「제2의 건국」이니 하면서, 마치 민주화 운동의 결과로 이 나라가 달리는 철길이 새로 깔린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오만한 얘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