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總選 때 신한국당에 지원된 이른바「안기부 자금」은 신한국당이 별도로 조성한 정치자금을 안기부 계좌에 넣어 돌린 것이다.
1992년 大選 때 쓰고 남은 돈은 없다
● 신한국당에서 내 총무수석 계좌로 보내 준 5억원이 안기부의 국고수표였다. 당시 신한국당 관계자로부터 「(1996년 총선용) 자금을 용광로에 넣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돈세탁을 위해 안기부라는 용광로에 돈을 넣은 것이다
● 1988년 총선 때 盧武鉉 후보에게 10억원 이상을 지원했다. 돈을 쏟아 부었다. 해양수산부 장관 시절에 부산에 내려와 그때 신세를 갚겠다며 크게 술을 한번 샀다
● 盧武鉉 캠프는 盧武鉉 대신 돈을 받을 사람도 없어. 참모들이 3000만원 주면 3000만원 받고, 1억원 주면 1억 받고, 각설이 수준으로 한 거다
● 김현철의 정치자금을 만진 박태중에게 『태중아, 너하고 나하고 둘이는 정치자금으로 제일 먼저 감옥간다. 조심하라』고 충고했다
● 청와대 총무수석 시절 야당 사람들에게도 자금을 지원했다. 李源宗 정무수석이 『형님, 야당 아이들 간 키워 주지 마시오』라고 경고했다
●「朴智元씨에게 2억원을 주었다」는 說에 대해 『정성을 전한 것이다. 金大中 대통령에게 보여 주라고 朴智元에게 편지를 써 줬다』
● 정치자금을 쌓아 두지 않는다는 게 내 돈철학, 정치자금은 내게 3일 이상 머물지 않았다
1992년 大選 때 쓰고 남은 돈은 없다
● 신한국당에서 내 총무수석 계좌로 보내 준 5억원이 안기부의 국고수표였다. 당시 신한국당 관계자로부터 「(1996년 총선용) 자금을 용광로에 넣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돈세탁을 위해 안기부라는 용광로에 돈을 넣은 것이다
● 1988년 총선 때 盧武鉉 후보에게 10억원 이상을 지원했다. 돈을 쏟아 부었다. 해양수산부 장관 시절에 부산에 내려와 그때 신세를 갚겠다며 크게 술을 한번 샀다
● 盧武鉉 캠프는 盧武鉉 대신 돈을 받을 사람도 없어. 참모들이 3000만원 주면 3000만원 받고, 1억원 주면 1억 받고, 각설이 수준으로 한 거다
● 김현철의 정치자금을 만진 박태중에게 『태중아, 너하고 나하고 둘이는 정치자금으로 제일 먼저 감옥간다. 조심하라』고 충고했다
● 청와대 총무수석 시절 야당 사람들에게도 자금을 지원했다. 李源宗 정무수석이 『형님, 야당 아이들 간 키워 주지 마시오』라고 경고했다
●「朴智元씨에게 2억원을 주었다」는 說에 대해 『정성을 전한 것이다. 金大中 대통령에게 보여 주라고 朴智元에게 편지를 써 줬다』
● 정치자금을 쌓아 두지 않는다는 게 내 돈철학, 정치자금은 내게 3일 이상 머물지 않았다
上道洞 시절의 인연
지난 1월8일 오후 4시. 서울 광화문의 한 음식점으로 洪仁吉(홍인길·61) 前 청와대 총무수석이 성큼 들어섰다. 하늘색 세로 줄무늬 와이셔츠 때문인지 가뜩이나 장신인 그가 더욱 크게 보였다. 洪수석의 키는 187cm이다.
저녁 영업을 준비하던 식당 종업원들의 눈이 일제히 그에게 쏠렸다. 『洪仁吉이네』하는 속삭임이 들렸다. 정치자금 관리라는 비밀스런 작업을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체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오랜만이오』
그는 큰 손으로 기자의 손을 오랫동안 잡았다. 자리를 방으로 옮겼다.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은 여전했다.
기자는 1992년 한 해 동안 金泳三 민자당 대표 최고위원을 담당했다. 새벽에 상도동을 찾아가 식당에서 아침을 먹는 것으로 고단한 정치부 기자의 하루가 시작됐다. 상도동의 아침 메뉴는 소박했다. 밥 한 그릇에 우거짓국, 김치와 갈치 한 토막 정도가 나왔다.
金泳三 최고위원은 출근하려고 2층에서 내려와 응접실을 지나가면서, 陣을 치고 있는 20~30명의 기자들을 향해 『수고 많아요』라고 한마디 던지고 가 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식당에서 기자들과 어울려 아침 밥을 먹고, 응접실에서 기자들을 붙들고 상도동의 입장을 전하는 일은 李源宗(이원종) 前 정무수석의 몫이었다.
「血竹(혈죽: 핏대라는 말을 漢字化한 것임)」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李源宗 당시 민자당 副대변인은 기자들과의 言爭(언쟁)을 불사했다. 기자들을 데리고 밖에 나가서 밥 먹고 술 먹고 하는 일은 洪仁吉 비서의 몫이었다. 洪비서는 늘 여유가 있었고, 실없는 농담을 잘했다. 피튀기는 치열한 정치판을 逍遙(소요)하는 듯한 느낌을 줬다.
부잣집 외아들로 양지에서 자란 「보스」와 분위기가 흡사했다.
洪 前 수석과 한참 동안 그 시절 이야기를 했다.
『처음이자 마지막 인터뷰』
「金泳三의 자금 관리인」, 「金泳三의 금고지기」.
이런 수식어가 洪 前 수석의 이름 앞에 늘 따라 붙는다. 20代 초반부터 국회의원 金泳三의 지역구(부산 서구)를 관리했고, 「서울의 봄」이 한창이던 1980년 초 서울로 올라와 金泳三의 정치자금을 본격적으로 관리했다. 40년 가까이 「金泳三의 돈」을 주무른 것이다.
1993년 金泳三 정권 출범과 함께 총무수석 비서관으로서 청와대 살림과 金泳三 대통령의 친인척 관리를 맡았다. 1996년 4월 총선에서 정치적 고향인 부산 서구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됐지만, 좋은 날은 오래가지 못했다.
한보비리와 관련해서 1997년 2월 처음 구속됐고, 刑 집행 정지 중에 청구건설의 대구방송 인허가 비리와 관련해서 다시 한번 옥고를 치렀다. 그가 첫 구속되기 직전에 여동생이 사망(1997년 2월)하고, 옥에 갇혀 있는 동안 형님 喪(1998년 3월)과 어머니 喪(1999년 8월)을 치러야 하는 시련이 밀어닥쳤다.
2000년 광복절 사면으로 석방돼 3년6개월의 감옥살이를 마쳤다.
洪 前 수석은 지난해 연말, 거처를 부산 서구로 옮겼다. 몇몇 주간지에는 「洪仁吉 前 수석이 부산 서구에서 총선 출마를 준비하고 있다」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인터뷰는 어렵게 성사됐다. 洪 前 수석은 『국민들이 알아서 좋은 일이 있고, 모르고 그냥 가는 게 좋을 경우도 있다』, 『여러 사람에게 累(누)가 된다』며 인터뷰를 극구 사양했다. 부산으로 내려간 그를 『얼굴이라도 한번 보자』며 서울로 모시는 데 상당히 힘이 들었다.
洪 前 수석은 인터뷰에 응하게 된 심경 변화를 이렇게 설명했다.
『부산으로 내려간 건 정치를 시작하려는 게 아니고 落鄕(낙향)한 겁니다. 고향은 거제지만, 부산이 제2의 고향이거든요. 총선 출마 안 한다고 주변에 다 얘기를 했어요. 정치를 접었고, 金泳三 시대도 끝나고 金大中 시대도 끝났으니까, 한번 옛날 얘기를 정리하고 싶었어요.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 인터뷰가 될 거요』
오후 4시에 시작한 인터뷰는 오후 9시까지 이어졌다.
洪 前 수석은 1970년대 신민당을 중심으로 전개됐던 민주화 투쟁을 흥겹게 얘기했다. 金泳三씨의 40代 기수론 제창과 1971년 大選, 신민당 黨權(당권) 장악, 강력한 對與 투쟁…. 그때가 가장 순수했고, 아름다운 시절이라고 했다.
1960년대, 1970년대의 일에 대해서 그는 많은 얘기를 했다. 하지만 기자는 洪 前 수석이 金泳三 신민당 총재의 비서로 상경한 1980년 이후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인터뷰 기사를 정리했다. 가급적이면 그의 主특기였던 정치자금 문제로 주제를 압축했다.
『홍길동이가 전화 걸었다고 해도 바꿔라. 光化門이 걸었다고 하면 바꾸지 마라』
인터뷰를 하는 동안 기자를 부르는 洪 前 수석의 호칭이 『金차장』에서 『金기자』로, 그리고 『연광씨』로 변해 갔다. 洪수석의 어투를 그대로 살렸다.
―왜 부산으로 거처를 옮겼습니까.
『정치를 오래 한 선배들을 보면 마지막 에 모양이 안 좋더라고. 끝까지 뭔가 한 자리 얻어 보겠다고 서울을 떠나지 않는 게 보기가 안 좋았어요. 「정치를 끝내면 고향으로 가야겠다」는 평소 생각대로 실천했어요』
―주변에서 총선 출마하라고 권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텐데요. 소위 「열린우리당」이 洪수석에게 공을 꽤 들이고 있다는 얘기가 들리던데.
『왜 없겠어요. 작년 11월에 마음을 다 정리했어요. 참모들을 불러 모아 놓고 「나는 떠날 때가 됐다. 떠날 때를 알아야지, 그걸 모르고 계속하겠다고 난리 치는 건 내 스타일에 안 맞다」고 했어요』
―평생 정치에 몸을 담았는데, 그만두기로 결심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정치는 재미가 있어야 해요. 「오야붕」모시고 대통령까지 만들었으면 됐지, 지금 내가 국회에 가서 무슨 영화를 보겠어. 조금 있으면 홍위병 아이들이 「누구는 되고, 누구는 짤라라」고 난리를 칠 거 아니야. 내가 그 친구들 손에서 生殺與奪(생살여탈)이 결정되는 꼴이 돼야겠어요. 딱 접었지. 마음이 아주 편해요. 잘 한 것 같아』
洪 前 수석은 『달라진 시대에 이제 내 스타일은 맞질 않는 것 같다』고 했다.
『나는 평생 「안 됩니다」는 소리를 안 하고 살았어요. 누가 찾아와서 어렵다고 얘기하면 「도와드려야죠」,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고 했지, 「절대 안 된다」, 「못하겠다」고 하질 않았어요. 나는 사람을 가려서 전화를 받지 않았습니다. 내 비서들에게 「洪吉童(홍길동)이가 전화했다고 해도 바꿔라. 그렇지만 光化門(광화문)이 전화했다고 하면 바꾸지 말라」고 했어요. 아무나 다 바꾸라는 얘기지. 洪仁吉이를 찾는 사람한테 「왜 전화 걸었습니까」, 「용건이 뭡니까」 묻지 말라고 했어요. 청와대에서 일할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래서 한보비리의 주범으로 몰리기도 했지만…』
金泳三 대통령과는 친형제 같은 사이
―洪수석이 金泳三 前 대통령의 6촌 동생뻘이라는 얘기가 있는데, 정확하게 어떤 관계입니까.
『우리 할머니가 마산 金洪祚(김홍조) 어른의 제일 큰 고모입니다. 우리 할머니가 홍조翁(옹) 아버지의 누나지. 그러니까 우리 부친하고 홍조翁하고 고종사촌이에요. 金대통령이 再從兄(재종형·6촌형)이에요. 홍조翁도 외동아들이고, 우리 아버지도 외동아들이었어요. 같은 마을에서 살고, 漁場(어장)이 붙어 있어서 金대통령하고 나하고는 6촌이 아니라 친형제처럼 가까운 사이예요. 뭐든지 다 터놓고 얘기했어요』
―한보 청문회 때 야당 의원들이 「洪수석이 김홍조翁의 漁場을 관리했다」, 「오래 전부터 金泳三 집안의 재산 관리인이다」고 주장을 했죠. 金泳三 대통령 댁의 재산을 관리한 적이 있습니까.
『그때 야당 의원들이 나를 「청지기다, 집사다」하고 깎아내렸어요. 나는 스스로 金泳三 대통령의 정치적 동지라고 자부하고 살아왔어요. 정치인 金泳三의 정치자금을 관리했지, 그 댁 어장을 관리해 주고 그런 일은 없었어요. 지금은 내 조카가 홍조翁 어장을 같이 봐주고 있어요』
―金泳三 대통령 집 어장하고, 洪수석 댁 어장하고 어느 쪽이 컸습니까.
『홍조翁 어장이 컸어요. 그런데 定置網(정치망: 고기떼가 다니는 길목에 그물을 쳐두었다가 거둬들이는 방식) 어장이니까, 어획량은 얼마나 목이 좋아서 많이 잡느냐에 달렸어요. 그것 가지고 노인들이 평생 사셨어요. 1960년대에 그 재산을 팔아서 부산이나 마산으로 나갔으면 아마 큰부자가 됐을 거예요. 두 양반들이 외동이니까 고향을 못 떠난 거지』
―金泳三 대통령을 정치적으로 돕기 시작한 것은 언제 부터입니까.
『巨濟에서 부산으로 올라와서 金泳三 대통령의 사촌인 김영호씨 댁에서 학교를 다녔어요. 동아大 법학과에 다닐 때부터 金총재의 부산 서구 선거를 도왔어요. 아르바이트로 한 게 아니고 徐錫宰(前 총무처 장관) 형하고 본격적으로 뛰었어요. 金총재는 나를 완전히 믿고 다 맡긴 거지. 조개표 석유를 했던 신중달씨, 동아大 교수를 한 박규상씨(후일 공화당 사무총장을 역임)와 붙었을 때는 위태위태했어요. 정말 힘겨운 싸움이었어요. 金총재가 이 두 고비를 넘기고, 7選·8選의 거물로, 대통령으로 갈 수 있었던 겁니다』
―金泳三 대통령은 『부친이 사 준 집을 팔아서 총선 선거자금을 쓰고 나면, 아버지가 또 집을 사 주셨다』고 했습니다. 洪수석은 어땠습니까.
『나도 기본적으로 재산이 있으니까, 큰 아쉬움 없이 활동했지. 부산에서 사업하는 친구들이 성심껏 도와줬고. 남한테 「힘들다. 얼마 도와달라」고 해보지 않았어요. 민주화 투쟁한다는 명분도 있었고, YS가 20代부터 국회의원 하면서 쌓아 놓은 단단한 인맥이 있으니까, 金大中씨 돈을 마련한 노갑이 형님(權魯甲 前 민주당 고문)에 비하면 나는 별로 고생을 안 한 편이에요』
상도동 비서들에게 월급을 처음으로 지급
洪 前 수석은 1980년 봄 서울에 올라와 본격적으로 金泳三의 정치자금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金泳三 총재 생일 때 가족들이 다 모였어요. 金총재 생일 이틀 뒤가 손명순 여사 생일이어서 겸사겸사 많이 와요. 金총재가 생일날 「인길이는 이제 여기 있어라」고 해서 눌러 앉았어요. 朴正熙 대통령이 돌아가시고, 「金泳三 시대가 왔다」는 분위기가 확 돌았어요. 나도 金총재를 대통령으로 만들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洪 前 수석이 서울에 올라오고 나서 곧바로 「서울의 봄」이 깨져 버렸다. 「金泳三 대통령」의 꿈은 다시 멀어졌다. 洪 前 수석은 『오야붕이 연금되는 바람에 부산으로 갈 수도 없고, 서울에 있어도 낙이 없는 처지가 됐다』고 했다.
상도동 자택에서 연금된 金泳三의 곁을 지킨 사람은 洪仁吉과 張學魯(장학로) 두 비서뿐이었다. 집권 가능성을 보고 상도동으로 밀려들던 돈은 바짝 말라 버렸다.
『현대자동차에서 월부금을 안 낸다고, 金총재 車를 압류하겠다고 통지를 했어요. 신민당의 文正秀(문정수) 총무국장에게 「왜 자동차 월부금을 안 냈느냐」고 물었더니, 「좋은 시절에 그쪽에서 할부금을 내지 말라고 해서 안 냈다」고 해요. 꽃집, 술집 주인들이 외상을 받아야 하는데 상도동 집에 들어올 수 없으니까, 내용증명을 보냈어요. 이런 사정인데 부산으로 내려갈 수가 있겠습니까? 金총재가 제일 큰 시련을 맞고 있는데 이건 넘기고 내려가야겠다고 결심을 했지. 고생 많이 했어요』
洪 前 수석이 상도동 캠프에 합류해서 제일 첫 번째 한 일은 金총재의 개인비서들에게 월급을 주는 것이었다. 金泳三씨가 단식투쟁(1983년 5월)을 벌이고, 단식 1주년을 기념해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결성해 정치를 본격화한 이후에는 비서들에 대한 월급 지급이 자리를 제대로 잡았다고 한다.
『1980년에 上道洞에 와보니까 비서들한테 월급을 안 주고 있어요. 각자가 알아서 쓰는 거야. 내가 「월급을 줘야 한다. 주인과 고용인 관계는 아니지만, 정치지망생이라도 밥은 먹게 해줘야 한다. 그래야 걱정 안 하고 일할 수 있다. 또 비서들이 각자 돈을 만들면 말썽의 소지가 많다」고 했어요. (金泳三 대통령이) 「돈이 어디 있나」고 해요. 「돈은 만들면 됩니다. 비서들 월급은 반드시 줘야 합니다」고 했어요. 그때부터 비서들 월급을 줬어요』
―월급을 주는 비서가 몇 명이나 됐습니까.
『1980년 봄에 열 명 정도였고, 민추협할 때는 더 많았고. 제일 어려웠던 때에도 돈을 마련해서 비서들에게 월급을 줬어요』
―그 무렵 상도동의 돈 사정은 어땠습니까.
『선거를 치르면서 전국구를 팔았다가, 사기당하고 그런 험한 꼴은 안 당했어요. 金총재가 제도권 안에서 투쟁을 했고, 어려운 시기에 국민과 함께 살아왔잖아요. 그게 큰 힘이지』
―1990년의 3黨합당 전까지는 宋斗灝(송두호) 前 의원, 嚴基鉉(엄기현) 회장, 田秉奇(전병기) 사장 같은 부산 인맥들이 金泳三씨의 주된 정치자금원이었죠.
『그 양반들은 간판으로 내세운 거고. 정치하면서 맥이 닿은 사람들이 전국에서 도와줬어요. 경남高 출신들이 얼마나 돼요. 정당을 이끌면 얼마나 많은 돈이 필요합니까. 경남高, 서울大 인맥만은 아니었어요. 좀더 폭넓은 재정지원자 그룹을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YS는 돈 떨어지면 기가 팍 죽어』
―1993년 3월 청와대 총무수석이 될 때까지, 洪수석 개인명의의 은행 계좌가 하나도 없었다는 게 사실입니까.
『직원 계좌에 넣어 두고 쓰면 되지, 내 명의가 뭐하러 필요해요. 다 나눠 줄 건데』
―金泳三 대통령도 돈을 쌓아 놓고 체계적으로 지출하는 타입은 아니죠.
『돈에 대해서는 개념이 없어요. 아무 대책이 없는 양반이야. 돈을 모르고, 있으면 다 나눠 주는 스타일이에요. 주머니에 한 시간도 돈을 못 갖고 있어요. 金대통령은 약속이 오후 1시17분에 한 명, 1시23분에 한 명 이런 식으로 촘촘하게 정해져 있어요. 돈 있으면 만나는 순서대로 다 나눠줘요. 「대한민국을 다스릴 사람이 돈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는 배짱으로 살아온 분이에요. 그래도 이 양반이 돈이 떨어지면, 기가 팍 죽어요. 정치인은 힘이 있으면 돈이 따라요. 돈이 마른다는 건 세가 약해졌다는 얘기지』
―上道洞 캠프에서 돈을 만진 사람은 洪수석 하나라고 보면 됩니까.
『그래요. 1987년에 大選을 치르고, 그 후에 통일민주당을 이끌었지만, 3黨합당(1990년) 이후 (상도동의) 정치자금 규모가 커졌어요. 내가 감옥 가고 고생을 좀 했지만, 「洪仁吉이 정치자금을 다 받았다. 金泳三이는 돈 안 받는다」는 인식이 보통사람들 사이에도 박혀 있잖아요. 지금 金泳三 대통령이 돈에 대해서 얼마나 편한 위치예요. 요즈음 큰소리 빵빵 치는 게 돈에 대해서는 자신이 있으니까 그런 거예요』
―金泳三 대통령이 들어오고 나가는 정치자금의 규모를 정확하게 파악합니까. 決算(결산)을 한다고나 할까.
『누가 왔다는 건 얘길 하죠. 「오야붕」한테 반드시 얘기를 해요. 안 하면 큰일 나지. 「오늘 金회장하고 누구누구가 왔다갔다」고 하면, 돈이 들어왔겠다고 짐작하는 거지』
―金泳三 대통령은 누가 와서 돈을 주고 갔다는 정도만 파악하고 있는 겁니까.
『누가 도와줬다는 걸 다 기억하지. 고맙다는 인사도 하고. 하지만 정확한 수입·지출 내역은 알려고도 하지 않고, 나도 보고 안 하고, 모르는 거지』
『태중아, 너하고 나는 제일 먼저 감옥 간다』
―1980년대에 이미 水西(수서)사건 등으로 정치인들이 수뢰혐의로 심심치 않게 구속됐습니다. 큰 덩어리의 정치자금을 만지면서 「내가 정치자금을 만지다가 큰 사고를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까.
『내가 청와대 총무수석으로 있을 때 장모님 七旬(칠순)을 맞았어요. 金海(김해)에서 잔치를 했는데 현철이가 왔어요. 金爀珪(前 경남지사), 朴淵次(태광실업 회장, 盧武鉉 대통령의 후원회장 강금원씨의 용인 땅을 매입했다)가 오고, 현철이 친구 박태중이도 왔어요. 내가 태중이한테 「태중아, 너하고 나하고는 정치자금으로 제일 먼저 감옥에 들어간다. 조심해라」고 얘기를 했어요. 나중에 박태중이 청주교도소에서 나한테 편지를 보냈어. 「아저씨, 그때 참 기분이 나빴는데, 아저씨 말이 어찌 그리 맞았나 싶습니다. 그때 어떻게 내가 감옥에 갈 줄 알고 계셨습니까」라고』
(박태중씨는 金泳三씨의 사조직인 「나라사랑운동본부」 사무국장으로 일했고, 金泳三 前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씨의 大選殘金 120억원을 관리했다)
―정치자금을 만지는 게 위태로운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군요.
『법을 넘어섰고, 잘못된 일이니까…. 하지만 수요가 있는데 공급이 있어야 할 것 아니오. 하루 아침에 딱 끊을 수가 있나. 누군가 공급을 해야 했고, 내가 그 일을 한 거지』
YS 『인길아, 니 조심해라』
―金泳三 대통령은 1992년 12월 大選에서 승리한 후 곧 바로 『앞으로 재벌들로부터 단 한푼의 정치자금도 받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까지 與野 정당들은 大選자금 비리를 놓고 목숨을 건 싸움을 벌이고 있습니다. 金대통령이 「정치자금을 일절 안 받겠다」고 선언하면서, 洪수석에게 앞으로 정치자금에서 손을 떼라고 지시했습니까.
『(金泳三 대통령이) 「인길아, 내가 앞으로 일절 정치자금을 안 받는다」고 해요. 그래서 제가 「그러면 딴 사람은 어떡 하라는 겁니까」하고 물었어요. 金대통령이 「나 아니면 아무도 이 일을 못 한다」고 그래. 그 얘기야 맞지. 당신이야 대통령까지 됐으니까, 더 바랄 게 뭐가 있어. 그러면 金大中씨는 앞으로 어떻게 정치를 하고 大選을 치르겠어. 남 골탕 먹이는 일 비슷하게 되는 것 아니오. 金대통령은 계속 「나 아니면 아무도 못 한다」고만 그래. 그러면서 「인길아, 니 조심해라. 니가 받으면 내가 받았다고 생각한다. 니는 조심해라」고 당부를 해요』
―뭐라고 그랬습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라고 했지. 金대통령은 그때 「이 나라와 정치를 내가 깨끗하게 만들겠다」는 생각에 불타고 있었거든. 그런데 그게 하루 아침에 되나. 앞으로 선거가 수도 없이 있고, 우리 사람들을 당선시켜야 하는데…. 돈 안 쓰면 정치인들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선거판이 하루 아침에 깨끗해집니까…』
―총무수석으로 정치자금 조달을 계속한 겁니까.
『그때 대통령 기밀비가 한 해에 12억원쯤 되는데 여기서 10%쯤 가져와서 내가 썼어요. 축의금도 나가지, 조의금도 내야지, 예산으로는 되지를 않아요. 초창기에 청와대 민정수석실 비서관이 지방에 갔다왔다며, 올린 서류를 보니까 전부 여관에서 잔 걸로 돼 있어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정말 여관에서 잡니까? 호텔에서 자지. 가서 지방 유지에게 신세지는 거예요. 그러고 무슨 民情(민정) 조사가 되겠어.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어요. 「쓴 대로 다 올려라. 내가 처리한다」고 했어요. 크게 돈을 만든 건 아니고, 청와대 살림하고, 정치하는 후배들 조금 도와주는 정도였어요. 돈을 쌓아 놓고 한 건 아니고, 국정운영비하고 합쳐서 고비고비 막았어요』 』
―「정치자금을 한푼도 안 받겠다」는 金泳三 대통령 선언과 돈을 써야 하는 현실의 틈새를 洪수석이 메웠군요.
『「돈 안 쓰는 정치한다」고 말만 하면 정치가 금방 깨끗해지나. 되질 않아요. 나는 이런 비유를 종종 합니다. 「어린아이가 사탕을 맛있게 먹고 있는데, 그 손에 쥔 사탕을 뺏으려고 해봐라. 아이가 사탕을 더 세게 움켜 잡는다. 그러면 項羽(항우)장사도 펴질 못한다」. 정치자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살 달래 가면서 뺏아야 합니다』
―「金泳三 청와대」를 5년간 출입했던 선배기자로부터 『청와대의 수석들과 주요 비서관들이 洪仁吉 수석에게서 돈을 타 썼다』, 『洪수석이 돈 관리를 전담했기 때문에 다른 수석들이 검은돈의 유혹에서 벗어난 측면도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수석비서관들에게 얼마씩이나 지원했습니까.
『비서실장에게 보고도 안 하고 수석실마다 한 달에 500만~1000만원씩 보조했어요. 그래도 그거 가지고 되나. 정무수석실은 다른 수석실보다 훨씬 더 많이 지원했어요. 정무수석이 사람 만나는 자리니까. 그리고 공보수석이 멍청하게 제 방이나 지키고 앉아 있으면, 국정 홍보가 안 돼요. 내가 알아서 도왔지』
金正男 수석, 『洪수석, 미안한데 다 떨어졌다』
―경제수석실도 지원했습니까.
『韓利憲씨가 경제수석으로 왔을 때 내가 「당신 기분 나쁘겠지만 한마디 해야겠다. 재벌들이 찾아와서 용돈 쓰라고 돈 준다고 절대로 받지 마라」고 했어요. 韓수석이 「그러면 경제수석실에서 쓸 돈은 형님이 갖다 주십시오」라고 해, 「그래, 그건 내가 하겠다」고 했어요(한이헌씨는 1994년 10월부터 1996년 2월까지 경제수석으로 근무했다). 金正男 교육문화 수석은 在野 출신 아닙니까? 그 사람한테 누가 10원 한푼 갖다 주겠어요. 그 밑에 김영준이라고 비서관이 在野를 담당했는데, 내가 「在野 사람들 만나면 밥 사 주고, 차비라도 좀 주라」고 했어요. 딴 수석실이야 얻어 먹을 데라도 있지만, 교육문화수석실은 그런 형편이 아니거든. 金수석이 참 순수해. 그 양반이 누구한테 손 벌릴 사람이 아니잖아요. 수석회의 끝나고 슬며시 내 방에 내려와서 「洪수석, 미안한데 다 떨어졌어」라고 얘기해』
―上道洞의 오랜 家臣인 張學魯 부속실장이 1996년에 수뢰혐의로 구속됐죠. 金泳三 정부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힌 사건이었는데.
『참 미련한 짓을 한 거지. 지가 뭐하러 돈을 모으나』
―1992년 大選 때는 선대위원장을 맡기로 했던 朴泰俊 최고위원이 선거 직전에 탈당해서 자금 모금이 힘들었죠.
『돈도 돈이지만 마음 고생을 많이 했죠. 鄭周永(정주영), 朴哲彦(박철언), 金龍煥(김용환) 의원 등이 민자당 주변을 맴돌면서 새로 黨을 만들자고 朴泰俊씨를 집요하게 공략했어요. 鄭石謨씨가 일본에 가 있는 朴泰俊씨에게서 편지를 하나 받아 왔어요. 「마음으로 巨山을 지원하겠다」는 내용의 자필 서신이었어요. 내가 이걸 공개해 버리고, 鄭石謨 의원에게 「비밀로 하기로 했는데 하도 급해서 공개해 버렸습니다. 죄송합니다」고 했어요. 鄭의원이 「나라도 그 처지였으면 공개했겠다」고 양해를 해줬어요』
―민자당이 집행한 1992년 大選자금의 총 규모는 얼마나 됩니까.
『전부 조직 가동비로 쓰였어요. 장외 집회하면 버스 전세 내고, 사람들 1인당 점심값 얼마씩. 그런 식으로 따져 보면 얼마나 드는지 알 수 있는 거지』
―막판에 지구당별로 5억~10억씩을 내려보냈는데, 이것만 해도 민자당의 조직 가동비가 최소한 3000억~4000억원이 넘는 것 아닌가요.
『하지만 金大中·鄭周永 후보도 똑같이 조직을 동원하는 선거전을 펼쳤으니까, 상당한 돈을 썼어요. 鄭周永씨야 재벌이니까. 세 후보가 돌아다닌 유세 횟수하고, 동원한 청중 규모를 생각해 보면 金泳三 후보만 천문학적인 돈을 쓴 건 아니에요. 그때만 해도 벌써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이에요. 지금 잣대로 평가하는 건 무리입니다』
徐廷友씨가 감옥에 간 까닭
―선거대책위원장을 맡기로 한 朴泰俊씨가 탈당하는 바람에 민자당의 대선자금 조달이 난관에 봉착했고, 金泳三 후보가 직접 나선 걸로 압니다. 그래서 金泳三 후보가 지방에서 선거유세를 하다가도, 저녁이면 꼭 서울에 올라와서 재벌 오너들을 만났던 것으로 압니다. 재벌들이 정치자금을 내면서, 보스와의 對面 접촉을 반드시 원한다면서요.
『「절 모르고, 시주 안 한다」는 말이 있어요. 주지 스님이 내가 시주했다는 걸 알아야, 나중에 나를 위해 念佛(염불)해 줄 것 아닙니까. 주지 스님과 얼굴 마주치지 않고, 큰돈 시주하는 사람이 있나요. 보스를 못 만나면 그 다음 실력자라도 만나야 돈을 냅니다. 사무총장이 黨의 살림을 맡는 2인자라고 하지만, 그건 잠깐 2인자예요. 徐廷友(서정우: 李會昌 후보의 법률특보)가 왜 감옥에 갔느냐? 徐廷友씨가 李會昌 후보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니까, 평생을 함께 갈 사람이니까 재벌들이 마음 놓고 돈을 건넨 겁니다. 혹시 무슨 일이 있을 때 徐廷友를 통하면 반드시 李會昌에게 연결될 테니까.
재벌들이 盧武鉉 후보를 싫어한 측면도 있지만, 눈을 씻고 둘러봐도 盧후보 주변에 믿고 큰돈을 줄 2인자가 없는 거야. 자기들끼리는 李光宰·安熙正이를 「왼팔, 오른팔」이라고 하지만, 재벌들이 그런 어린 친구들을 어떻게 믿고 돈을 주겠어. 그래서 李光宰·安熙正이가 대선자금이라고 받은 돈이 몇천만원, 몇억 정도밖에 안 되는 거요』
―「상도동은 洪仁吉, 동교동은 權魯甲」이 정도가 돼야 큰돈이 움직이는 거군요.
『그렇지. 그래야 돈을 확실하게 주지. 지금 바빠서 (兩金을) 못 만나지만, 적어도 洪仁吉이나 權魯甲이한테 돈을 주면 나중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주지가 나를 위해 염불해 준다」는 확신이 서는 거지』
―1992년 민자당 대선자금의 全貌를 파악할 수 있는 사람으로 洪수석이 늘 지목됩니다.
『다른 게 있는지 모르지만, 黨에 모였던 건 다 알지. 총무보좌役이었으니까, 나는 선거 때 어디 가지도 않고, 돈 흐름만 챙겼으니까』
『신한국당, 1996년 총선자금 별도로 모집』
―청와대에 들어갈 때 가지고 들어간 대선잔금이 얼마나 됐습니까.
『청와대에 빈손으로 들어갔어요』
1992년과 대선자금과 관련해서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1996년 총선 직전 안기부 계좌에서 신한국당으로 넘어간 돈의 성격이다. 2003년 9월23일 서울지법은 「강삼재 의원 등이 안기부 예산을 특수 활동비 명목으로 인출해 차명계좌에 넣어 세탁한 뒤 1996년 신한국당 총선에서 사용한 점이 인정된다」고 판결했다.
당시 사무총장이었던 姜三載 의원은 판결이 나오자 『안기부 예산을 黨 자금으로 쓴 적이 없다』고 밝힌 뒤 의원직을 사퇴했다. 지난해 연말 국가정보원은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안기부 예산이 빠져나간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자체 감사결과를 보고했다.
그렇다면 1심 재판부가 「안기부 예산」이라고 판결한 856억원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政街에는 「金泳三 대통령이 1992년 때 쓰다 남긴, 대선잔금을 안기부 계좌에 넣었고, 이를 신한국당이 사용했다」는 大選잔금說에 무게를 두는 분위기였다.
한나라당 崔秉烈 대표는 『金泳三 대통령이 입을 열어야 한다』며 고해성사를 촉구하기도 했다. 洪 前 수석은 『그 돈은 우리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여러 번 못을 박았다.
―안기부 계좌에서 나온 돈이 金泳三 대통령의 大選잔금인 게 분명한 것 아닙니까? 金泳三 대통령이 月刊朝鮮 2001년 2월호 인터뷰에서 『1992년 大選 때 상당히 많은 돈이 들어왔는데 무엇 때문에 안기부 돈을 받느냐』고 밝혀, 「大選잔금설」이 정설로 굳어졌지 않습니까.
『아니지. 그건 오해예요. 1992년 大選을 치르고 남은 돈이 하나도 없었어요. 현철이가 1992년 私조직을 운영하다가 남긴 殘金 120억원은 검찰 수사에서 다 밝혀졌잖아요. 대선잔금이라고 할 수 있는 돈은 그게 전부입니다. 나하고 金榮龜(김영구) 사무총장이 관리했던 민자당 대선 자금에서는 남은 게 없어요. 끝날 때 「實彈(실탄)」을 다 썼어요. 金대통령이 정치 인생의 마지막 승부인데, 선거자금을 남겨 두겠어요. 선거 2~3일 앞두고 지역구에 내려 보낸 돈은 지구당 위원장들이 다 쓰지도 못했어요. 그 사람들이 대선잔금 재미를 봤지』
총무수석에게 온 신한국당 돈 5억이 안기부 수표
―대선用으로 모은 돈을 消盡(소진)했더라도,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서 재벌들로부터 받은 「당선 축하금」이 있었을 것 아닙니까.
『당선되고 며칠 뒤에 「정치자금을 한푼도 안 받겠다」고 선언했는데, 어떻게 재벌들한테 축하금을 받아요. 대선자금을 만진 金榮龜 사무총장이 살아 있고, 내가 있는데 대선잔금을 속일 수가 있나. 1992년 대선잔금은 절대 없습니다』
―대선잔금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런 큰돈이 안기부 계좌에 남아 있을 수 있습니까.
『내가 알기로는 신한국당이 1996년 총선을 위해 총선用으로 정치자금을 별도로 모은 겁니다. 그 돈은 절대로 안기부 예산이 아니고, 1992년 대선잔금도 아닙니다』
―정말입니까. 신한국당이 별도로 모은 정치자금이라는 얘기는 처음 듣는데요.
『총선用으로 정치자금을 모은 거지. 받아서 세탁한다고 안기부 계좌에 넣었고, 그걸 꺼내 쓴 거예요. 대통령은 안 받는다고 했지만, 黨은 선거 치를 자금이 필요했을 것 아닙니까』
―金泳三 대통령이 정치자금을 안 받는데, 신한국당이 1000억원에 가까운 정치자금을 조달할 능력이 됩니까.
『되지요. 집권당인데. 야당 후보인 李會昌씨가 맑아졌다는 2002년 大選 때도 차떼기로 수백억원씩 거둔 것 봤잖아요』
―그렇다면 金泳三 대통령이 『「안기부 총선자금」은 안기부 예산이 아니다. 대선잔금이 아니고 신한국당이 모은 돈이다』고 밝혀야 할 것 아닙니까.
『자신이 총재로 있는 黨이, 「나는 돈 안받는다」고 선언한 상황에서 불법 정치자금을 모금했다고 밝혀서 金泳三 대통령에게 무슨 보탬이 됩니까. 도덕성에 흠집만 나는 거지. 그래서 가만있는 거예요』
―洪수석도 2001년 1월 검찰에 불려가서 1996년 이른바 「안기부 예산의 총선자금 전용」과 관련한 조사를 받은 것으로 압니다. 당시 신문 보도를 보면 「1995년 안기부 자금 수억원이 청와대로 유입됐고, 총무수석실 직원 명의로 배서된 뒤 운영경비로 쓰였다」고 돼 있습니다. 어떤 점을 추궁받았습니까.
『검찰이 「당신이 청와대 근무할 때 신한국당의 돈 5억원이 총무수석 계좌로 입금됐다」고 추궁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안 나요. 총무수석 계좌에 돈이 들어오고 나간 기록이 있으니, 내가 쓴 거 아니겠어요. 그래서 「내가 받아서 썼다. 정치자금이었고 10원도 私用(사용)한 게 없다」고 했어요. 받은 5억원 가운데 1억원이 어디로 갔는지 구멍이 났는데, 검찰이 이건 신경도 쓰질 않았어요』
―그러면 신한국당에서 洪수석에게 준 5억원이 안기부의 國庫 수표였다는 얘기입니까.
『그래서 검찰이 나를 조사한 거지. 청와대 있을 때 黨에 있는 사람한테서 「용광로에 넣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신한국당이 총선 자금을 거둔 뒤에 돈세탁을 하려고, 「용광로」인 안기부 계좌에 넣었다가 꺼내 쓴 걸로 짐작하고 있어요』
―신한국당이 1996년용 총선자금을 만들 때 간여했습니까.
『그때 나는 부산에서 출마해 내 선거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한보 대출비리의 「몸통」
한국경제는 IMF 경제위기로 돌진해 가는 과정에서 여러 번 파열음을 내고 주저 앉았다. 한국경제가 만난 큰 암초 중의 하나가 한보 대출비리 사건이었다. 1997년 벽두에 신한국당은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提高하기 위한 「노동법 개정안」을 단독으로 통과시켰다.
노동법 개정안 「날치기」의 후유증으로 李洪九(이홍구) 대표가 사표를 냈고, 金泳三 정권은 레임덕에 빠졌다.
姜慶植 경제부총리는 IMF 경제위기가 올 때까지 「금융개혁 법안」 통과를 위해 종종걸음을 쳤다. 노동법 개정에, 금융개혁 법안에 저항했던 金大中씨와 야당은 金泳三 대통령을 경제위기를 초래한 주범이라고 비난했다.
1997년 한보 대출비리 사건을 보도한 신문기사들을 보면, 언론과 야당은 정태수 회장에게 5조원의 시설자금 지원을 가능케 한 「몸통」을 찾는 데 온통 정신이 팔려 있다. 우리 사회는 IMF의 긴급 구제금융을 받고 나서야, 前근대적인 한국기업과 은행의 금융관행이 한국경제를 망가뜨린 「몸통」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洪仁吉씨는 「1995년 1월부터 1996년말까지 정태수 회장으로부터 10억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대체로 시인했고, 이 죄로 대법원에서 징역 6년, 추징금 10억원을 선고받았다. 그는 검찰수사와 국회 한보청문회를 통해, 한보 대출비리의 「몸통」으로 자리를 굳혔다.
하지만 그는 왜 자신이 한보사건의 몸통으로 비난받아야 하는지 지금도 납득하지 못하고 있었다.
『은행장들 참, 웃기는 사람들이야. 돈 장사하는 사람들이 따져 보고 돈을 줘야지. 내가 뭘 알아요. 허허벌판에 말뚝 꽂을 때는 돈을 5조원이나 대줬다가, 공장 다 짓고 운영자금 3000억원을 안 주는 게 말이 됩니까. 애당초 시설자금을 주지 말던가. 한보를 부도 내서 우리 경제가 얼마나 손해를 봤어요』
―洪수석이 은행장들에게 대출 압력 전화를 한 것은 사실 아닙니까.
『도와줄 수 있으면 좀 도와주라고 한 거지. 은행장들이 검찰에서, 청문회에서 「洪수석 전화를 압력으로는 생각 안했다」고 얘기했잖아요』
―한보 청문회에서 정태수 회장이 『洪의원 외에는 누구에게도 대출을 부탁한 적이 없다. 洪의원에게 부탁해서 은행장을 통해 대출이 이뤄졌기 때문에 洪의원을 하늘같이 생각했다』고 말했죠.
『누가 와서 아쉬운 소리를 하면, 내가 「안 된다」는 소리를 못 해요. 정태수 회장 얘기를 듣고, 대출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려고 했어요. 대출 청탁 代價로 돈을 받은 게 아닙니다. 은행장들한테 「3000억원 대출을 안 해줘서, 5조원을 날리는 건 내가 생각해도 상식에 어긋난다」고 얘기했어요. 그 정도 한 거예요.
3000억원만 추가 대출하면 되는데, 李錫采 경제수석이 1997년 2월에 그대로 부도를 내버린 것 아니오. 나는 「부도내면 안 된다」고 얘기했어요. 야당은 「현철이가 한보비리의 배후다」고 물고 늘어졌어요. 李錫采 수석에게 「현철이가 결백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한보를 죽일 필요까지야 있느냐」고 했어요. 결국 나라가 풍비박산 난 거 아니오. 생각해 보세요. 한보를 그렇게 처리한 게 잘한 건지』
깃털
―1997년 2월11일 구속되기 직전에 金泳三 대통령을 만나 억울함을 호소했다면서요.
『청와대는 안 가고 신한국당 姜三載 사무총장을 만났어요. 姜총장이 「내가 책임을 지겠다」고 위로를 해요. 출두하기 전날 서울 양천구의 한 호텔로 李源宗 정무수석을 불렀어요. 「정태수한테 받은 돈 내가 썼나? 네가 더 잘 알 것 아니냐. 내가 내일 검찰에 나간다. 네가 앞장을 서라」고 하니까, 李수석이 벌벌 떨더라고. 「내가 흙탕물에 손 짚고 발 짚고 있을 때 내 등 밟고 지나간 놈은 깨끗하고, 흙탕물에 있던 나만 나쁜 놈이냐. 어른 그렇게 모시면 안 된다」고 큰 소리를 쳤지. (1999년 8월) 어머니 喪家에 찾아왔기에 다 용서했어요』
―구속되기 직전에 『나는 깃털일 뿐』이라는 말을 해서 人口에 두고두고 膾炙(회자)됐죠. 어떻게 그런 얘기를 하게 된 겁니까.
『구속되기 딱 1주일 전(1997년 2월5일)에 여동생 喪을 당해 울산으로 내려갔어요(洪 前 수석의 여동생 홍길순씨의 남편이 당시 울산시장이었던 沈完求씨다). 시신을 입관도 못 했는데 기자들이 「좀 보자」고 난리야. 기자들이 「당신이 실세로 은행들에 압력을 넣었다는데 사실이냐」고 물어요. 「난 이미 1995년 12월에 청와대를 떠났다. 그런데 무슨 實勢냐. 권력이란 내 손 안에 있을 때 힘이 있는 것이지, 내 손에서 빠져나가는 순간 깃털보다 더 가벼운 것이다」고 했어요. 그게 어떻게 「나는 몸통이 아니고 깃털이다」고 보도가 됐어요』
―깃털 얘기는 평소에 생각했던 겁니까.
『내가 고스톱하고, 포커할 때 하던 얘기예요. 친구들이 「어이 實勢가 돈 좀 풀어라」 하면, 「이 사람들아, 내가 권력 핵심에서 떠난 지가 언젠데 實勢야. 나는 지금 깃털처럼 가벼워」라고 대꾸를 했어요. 그 얘기 그대로 한 거예요』
―그 깃털 발언 때문에 「洪仁吉은 깃털이고, 몸통은 따로 있다」는 얘기가 힘을 얻었지 않습니까.
『내가 아무리 비겁하더라도 「나는 깃털이고, 實勢는 따로 있다」는 얘기를 하겠어요. 목숨이 끊어져도 그런 변명은 안 하지. 언론이 이 洪仁吉을 한없이 왜소하게 만들었어요』
―동교동에서 정치자금을 만진 사람이 權魯甲 前 고문인데, 두 분이 친하게 지냈습니까.
『인의동에 신민당 당사를 내고, 金大中씨가 (1984년) 미국에서 귀국하고 오면서 아주 가깝게 지냈어요. 仁石(李敏雨 당시 신민당 총재)에게 선물할 때 둘이 상의를 해서 비슷한 가격으로 맞췄어요. 그전에 민주화 투쟁할 때도 친했고. 처음 만났을 때 權고문이 「洪비서, 내 나이가 몇이나 돼 보이노」하고 물은 기억이 나요. 權고문이 상도동계의 黃明秀(황명수·前 신한국당 사무총장)씨하고 나이가 같은 것을 알고 깜짝 놀랐어요. 나보다 열두 살이나 나이가 많은데도, 워낙 童顔(동안)이시잖아요』
權魯甲과 朴智元
―權魯甲 前 고문이 『야당 시절 하도 정권의 탄압이 심해서, 수첩에 아무 기록을 안 하고, 정치자금 주는 사람의 전화번호, 약속장소, 약속시간을 전부 외웠다』고 하더군요. 洪수석은 어땠습니까.
『세 사람이 돈을 가져왔어요. 나 혼자 알 수 있게 세 사람 姓만 적어 놓고, 그 밑에 돈의 액수 「30」을 기록했어요. 정보기관에 끌려갔는데 「30이 뭐냐. 30억이냐」고 물어요. 「3시 약속시간」이라고 둘러댔어요. 남이 내 수첩을 보면 완전히 간첩 문서예요』
―지금도 그렇습니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는데, 버릇이 돼서 누구한테 돈을 받고 나서 절대로 흔적을 안 남겨요』
―정치자금을 낸 사람이 수표추적을 통해 다친 적이 있습니까.
『나는 한 번도 빵구가 안 났어요. 수표로 정치자금을 받았지만 사고가 안 나도록 깨끗하게 세탁을 했어요. 중림동 통일민주당 당사를 25억원에 샀어요. 정보기관에서 우리 돈을 추적했을 것 아닙니까. 안기부에서 「도대체 어떻게 이 많은 돈을 흔적없이 세탁했느냐」고 놀라. 그건 내가 9단쯤 될 거야. 「서울의 봄」이 왔을 때 崔炯佑 의원이 許完九(허완구) 회장에게서 돈을 좀 받아 썼어요. 한일관에서 밥을 먹고 낸 500만원 때문에 許完九씨가 정치자금 준 게 드러났어요. 李鶴捧(이학봉)이 학교 선배라고 봐줘서 다행이었지, 許회장이 진짜 혼났어요』
―수표추적을 피하기 위해 정치자금을 현금으로 받지는 않았습니까.
『대부분 수표로 받았어요』
―요즈음 「차떼기」가 유행어가 됐는데, 1992년 大選 때 현금으로 정치자금을 준 재벌들이 없었습니까.
『없었어요. 徐廷友식 「차떼기」는 YS가 만든 거예요. 금융실명제가 그렇게 겁나는 거예요. 10만원권 수표도 다 추적이 되니까. 그전에는 정보기관이 그렇게 악착스럽게 수표추적을 하지 않았어요. 야당에도 숨쉴 구멍을 준 거지. 이제 시대가 변했어요』
―정치자금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돈 준 사람이 불가능한 민원, 사기성 불법민원까지 해결해 달라고 들고 오면 어떻게 합니까.
『친절하게 해서 돌려 보내는 거지. 담당 부서에 연락해서 「절대로 안 되는 민원이라면, 말이라도 잘해서 돌려 보내라」, 「꼭 해줘야 하는데 죄송하다고 해라」고 부탁을 하죠』
―민원 해결을 조건으로 제공하는 정치자금도 가끔 받았을 것 아닙니까.
『돈을 줄 테니까 무얼 해결해 달라, 그런 식으로 접근해 온 사람의 돈은 한 번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이건 곧바로 감옥 가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정치자금이라는 게 급할 때 권력의 도움 받으려고 주는 거니까,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죠』
權魯甲은 2인자 욕심에 무리하게 돈 모아
―동교동계의 금고지기인 權魯甲씨는 金大中 정부 시절부터 여러 수뢰사건으로 계속 옥고를 치르고 있습니다. 金大中 정권과 현대그룹이 공모해서 5억 달러를 金正日에게 비밀 송금하는 와중에 현대로부터 200억원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金大中 총재를 대통령 만들었으면 됐지. 2인자 되면 뭐해요. 그 형님이 자기가 다음 정권에서 권력의 중심에 서겠다고 욕심을 내니까, 분수에 넘게 돈을 모으고, 여기저기 얽혀 든 거예요. 권력이라는 게 허무한 건데, 그 형님이 헛고생한 거요』
―朴智元 前 청와대 비서실장하고도 아주 가까운 사이죠.
『朴실장이 처음에는 全敬煥(전경환·全斗煥 前 대통령의 동생)씨 쪽에 줄을 댔어요. 나중에 金大中씨가 미국에 망명하면서 인연이 닿았지. 한국에 들어와서 金大中씨에게 정말 충성을 다했어요. 신문 보도를 모니터해서 새벽에 동교동에 찾아가서 보고하고. 그만큼 노력을 했으니까, 본류를 제치고 중심으로 간 거예요』
―한나라당 洪準杓(홍준표) 의원이 1998년 10월29일 대구지검 국정감사에서 『분당 차병원에서 입원 중인 洪仁吉 前 수석이 朴智元 공보수석에게 전화를 걸어서, 「내가 2억원이나 주었는데 날 죽이려고 하는가」라고 얘기한 게 감청됐다』고 폭로를 했습니다. 2억원을 줬습니까.
『야당이 얼마나 어려워요. 내가 李源宗 정무수석한테 「겁나서 야당에 돈 주는 사람이 없다. 우리가 야당도 지원해 주고 더불어 같이 가야 한다」고 자주 얘기했어요. 한번은 내가 S 한정식 집에서 야당 대변인 하던 朴智元씨를 만났더니, 李源宗 수석이 「형님, 야당 아이들 간 키워 주지 마십시오. 이게 뭐하는 겁니까」라고 해요. 내가 「이제 내 뒷조사까지 하고 다니나」 하고 들이받았지』
―정무수석실에서 洪수석을 감시한 겁니까.
『정무가 한 게 아니고, 안기부가 동태 파악했다가, 건네 준 거지』
―「2억원 지원說」이 사실에 가까운 얘기군요.
『그렇게 크게는 아니고, 작은 정성을 준 거지』
―洪準杓 의원의 폭로가 나오고 나서, 朴智元 공보수석이 청와대 안에서 곤란했겠습니다.
『그래서 내가 대구교도소에 수감돼 있을 때, 朴智元 수석에게 편지를 한 통 써줬어요』
―편지는 왜요.
『金大中 대통령한테 보여 주라고』
―어떤 내용이었습니까.
『「朴수석, 친구를 도와주려고 한 게 검은돈이나 뒷거래한 것으로 그려져서 미안하다. 어려울 때 술 한잔 나눠 먹고, 정을 준 것뿐인데, 공연한 오해를 받는 것 같다. 그 자리가 정말 어렵고 조심해야 할 자리다. 열심히 金大中 대통령 모셔라」
그런 내용이었어요』
―편지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가 있습니까.
『야당 대변인하면서 나한테 큰돈을 받아 썼다고, 洪準杓 의원이 폭로를 했으니, 金大中 대통령이 朴智元씨를 의심할 거 아니오. 「편지를 하나 써 줬으면 좋겠다」는 뜻이 간접적으로 내게 전달됐어요』
―朴啓東(박계동) 의원이 1995년 10월19일 「盧泰愚 비자금 4000억원」을 폭로하면서, 『청와대 洪仁吉 총무수석이 全貌를 파악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盧泰愚씨가 4000억원을 숨겨 놓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까.
『전혀 몰랐어요. 박계동이 한번 해본 소리지. 내가 전화를 걸어서 「어떻게 이런 거짓말을 할 수가 있나. 소송하겠다」고 했더니, 「형님, 한번 봐주소」 해서 넘어갔어요. 盧泰愚 4000억원은 금융실명제 때문에 불거진 거예요. 언젠가는 들통날 수밖에 없었던 일입니다』
『盧武鉉 선거운동에 돈을 막 갖다 부었다』
―盧武鉉 대통령이 金泳三 총재가 이끌던 통일민주당의 공천으로 국회에 진출했습니다. 盧武鉉 대통령 영입에 간여했습니까.
『내가 盧武鉉씨를 嚴회장(金泳三씨의 친구인 嚴基鉉씨) 서초동 집에 데려다 놓고, 金총재를 만나게 했어요. 공천 주고, 선거자금 챙겨 주고 다 했지』
―盧武鉉 대통령의 통일민주당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뭡니까.
『국회의원 안 한다고 사표 던지고 도망간 일이지. 우리는 한 석이 아쉬운데, 정치 못 하겠다고 튀어 버렸으니 얼마나 당황스러웠겠어요. 하여튼 특이한 사람이오』
―같은 黨 소속이었던 李仁濟 의원이 盧武鉉씨를 찾아내서 정치를 계속하라고 설득했다고 하던데.
『속리산에서 盧武鉉씨를 찾아낸 건 한국일보의 李有植(이유식) 기자였어요. 李기자가 바퀴에 껌이 붙으면 도로에 달라붙을 조그만 차를 끌고 가서 숨어 있던 盧武鉉씨를 만났어요. 李기자는 특종했다고 좋아했대. 그런데 盧武鉉씨가 「정계에 복귀하는 논리를 어떻게 만들면 되겠느냐」고 묻더라는 거야. 은퇴 선언을 번복하려고 자문을 구하니까, 李기자가 기가 찼다고 해』
―총선에 나선 盧武鉉 후보에게 자금을 얼마나 지원했습니까.
『많이 했지. 최고로 많이 지원했어요. 민정당의 許三守(허삼수) 조직이 워낙 단단하니까, 총력을 기울였어요. 최고 격전지니까 돈을 막 갖다 부었지. 10억원은 넘었을 거야. 선거 전날 밤에 YS가 한 번 더 내려가 지원유세를 했어요』
―1988년에 10억원이라면, 지금 돈으로 20억~30억원쯤 되는 것 아닌가요. 盧武鉉 대통령이 2000년 총선 때도 『돈을 원도 한도 없이 써봤다』고 얘기했는데, 돈 복이 있는 모양입니다.
『그때 내가 그렇게 도와준 걸 자기도 잘 알고, 고마워하지. 해양수산부 장관 시절에 부산에 내려와서 「옛날에 신세진 것 갚는다」며 크게 술을 한번 샀어요. 횟집에서 회 먹고, 파라다이스 호텔 지하 술집에서 한잔 했어요. 영화 「南部軍(남부군)」을 만든 정지영 감독도 자리를 같이 했어요. 盧대통령과 그 무렵 골프도 한 번 쳤어요. 그러고 나서도 「밥 먹자」, 「골프 한 번 치자」고 연락이 왔는데 「밥 한 번 먹었으면 됐다. 또 대접받을 일 없다」고 사양했어요』
―부산에서 술을 마시고 돈을 盧武鉉 장관이 냈습니까? 혹시 강금원씨나 문병욱씨 같은 기업인이 「스폰서」로 따라 나오지 않았습니까.
『자기가 냈어』
―여러 신문이 洪수석을 「盧武鉉의 부산 인맥」으로 소개했습니다. 최근에 盧대통령을 만난 것은 언제입니까.
『나하고 송기인 신부님하고 친하니까. 그렇게 연결을 시키는 모양이지. 최근에는 盧대통령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盧武鉉 진영 대선자금 모금은 각설이 수준
―2003년 봄 민주당 경선 때 盧武鉉 후보가 직접 문병욱 회장에게 도와달라고 전화를 했고, 수행비서 여택수와 함께 나가서 현금 5000만원을 받아 온 것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盧武鉉 대통령이 받았느냐, 여택수가 받았느냐가 쟁점이 되는 딱한 상황입니다. 정치자금 관리가 영 엉성하고, 질퍽댄다는 느낌을 줍니다.
『돈은 한 창구에서 들어오고 나가야지, 창구가 여러 개 되면 규율이 안 잡히고, 여러 사람이 다쳐요. 돈을 모으고 나눠 주는 게 투명해야 해요. 돈 모으고 집행하는 데 권위와 카리스마가 없으면 당근을 줘도 효과가 없어요. 그리고 내가 이번 4월 총선에 출마한다고 해도, 누가 5000만원 주겠다는 데 나가서 밥 먹고 안 합니다. 그 정도 돈이면 전화 한 통화하고 비서 내보내지. 盧武鉉 후보는 財界와 확실한 줄이 없고, 주변에 진열된 상품도 안 좋으니까, 돈을 제대로, 체계적으로 걷질 못한 거예요』
―진열된 상품이라는 게 무슨 얘기입니까.
『참모 말이오. 盧武鉉 후보를 대신해서 돈 받을 사람이 없는 거야. 李相洙(이상수·민주당 大選 선대위 총무위원장) 의원이 고려大 인맥 등을 동원해서 조금 움직였어요. 安熙正·李光宰 이런 친구들이 3000만원 주면 3000만원 받고, 1억원 주면 1억원 받고, 각설이 수준으로 한 거지』
―젊은 참모들이 너나없이 돈에 손을 댔다든지, 장수천이라는 생수회사를 만들어서 정치자금 조달을 시도했다든지 한 것은, 정치자금과 관련한 경험 부족 때문 아닐까요.
『사람들 바탕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心性(심성)이 훈련받는다고 바뀌나. 강금원이가 盧武鉉씨를 좀 도와줬다고, 「부통령」 소리를 들을 정도로 큰소리를 뻥뻥 쳤잖아. 나도 강금원씨를 잘 알지만, 이 사람은 盧武鉉 대통령을 정치 지도자가 아니라, 친한 「술친구」 정도로 여기고 있는 거요. 그러니까 함부로 하는 거지. 기업인들이 정치자금 냈다고 강금원씨처럼 떠들었으면, 金泳三·金大中씨가 숨도 못 쉬고 살았을 겁니다. 함량 미달인 사람들이 盧대통령 주변에 너무 많아』
―盧대통령은 계속 『내가 불법 모금한 자금이 한나라당의 10분의 1도 안 된다』, 『우리는 티코, 한나라당은 그랜저』라며 위기탈출에 나섰습니다. 상대적으로 깨끗하니까 별 문제가 안 된다는 자세인데.
『盧武鉉씨가 요사이 참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드는데, 불법은 불법이지 무슨 차이가 있어요. 盧武鉉 캠프가 가져온 돈 거절한 것 있습니까. 사람을 죽였는데, 90세 노인 죽인 거하고, 갓난아이 죽인 거하고 무슨 차이가 있어요. 그걸 인정하고 해결책을 찾아야지, 대통령이 그런 자세를 보이면 안 됩니다. 아들이 열 명 있으면 고무신을 열 켤레 사야 되고, 아이가 둘이 있으면 두 켤레만 사면 되는 거예요. 한나라당은 덩치가 크고 돈을 많이 소비하는 정당이고, 민주당은 야당 체질이라 돈이 덜 드는 정당 아닙니까』
―1997년 大選 때 金泳三 대통령이 李會昌씨를 좀 챙겨 줬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돈은 못 주더라도 李仁濟 의원의 탈당 출마는 막아 줄 수 있었지 않나 싶은데.
『오야붕(金泳三 대통령)이 다음 정권 생각할 처지가 아니었어요. 아들 현철이가 구속되고 나니까 정신이 없고, 완전히 기가 꺾여 버렸어요』
李會晟의 지원 요청
―李會昌씨 쪽에서 도와달라는 요청은 없었나요.
『1997년 大選 때 감옥에 있었는데, 李총재 측근이라는 황우려 의원이 변호사 자격으로 한 번 찾아왔고, 李會昌씨 동생 李會晟(이회성)씨가 한 번 찾아왔어요. YS의 직계 중 직계라고 하니까 찾아온 거야. 李會昌씨 그 사람 참 작데. 내가 李會晟씨한테 「YS를 자꾸 쳐다보는데, YS는 李仁濟를 주저 앉힐 힘이 없다. 하지만 아킬레스건을 쥐고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적어도 민주계인 韓利憲 金♥桓(김운환)이는 불러서 국민신당에서 탈당시키겠다. 열흘만 내보내 달라」고 했어요. 李會晟씨가 「알아보겠다」고 하더니 감감 무소식이야』
金泳三 대통령은 지금 빈털털이
―洪수석이 갖고 있는 李仁濟의 아킬레스건은 뭐였습니까.
『돈이지. 내가 오라고 하면, 李仁濟씨가 오게 돼 있어요. 金泳三 대통령은 10원 한푼 안 주고, 내가 李仁濟씨 선거를 다 도왔어요. 경기도지사 후보 되는 과정도 어려웠어요. 내가 가서 교통정리를 했지』
―金泳三 대통령은 지금 돈이 좀 있습니까.
『완전히 빈털털이예요. 최근에 어떤 행사를 하고 밥값 300만원이 없다고 해서, 내가 해결해 드린 적도 있으니까. 三水會(삼수회·金泳三씨의 경남高 동창 모임) 회원들이 이제 초대도 안 하고 슬슬 피해요. 金대통령만 오는 게 아니고 경호원 수행원들이 따라 오니까, 밥값이 만만치 않거든』
―金泳三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의 국정 간여가 金泳三 정부 시절 내내 말썽이었습니다. 단속이 안 됐던 겁니까.
『아들 단속을 왜 못하느냐고 하는데, 현철이는 金대통령의 정치적 동지라고 보는 게 정확해요. 대통령의 장성한 아들들이 정치에 몸을 담고 있으면 현철이처럼 돼요. 金大中 대통령 아들 홍업이, 홍걸이도 감옥에 갔잖아. 이 아들들이 아버지 선거를 얼마나 치렀어요. 홍업이는 아버지를 도와서 정치에 개입했기 때문에 감옥에 갈 수밖에 없어요. 정치자금을 받아 놓고 모른 척 할 수가 있나. 홍걸이 문제는 성격이 약간 다르고』
―현철씨는 고향인 경남 巨濟에서 출마한다고 움직이고 있는데, 돈이 있습니까.
『현철이는 돈이 좀 있는 것 같아. 추징당하고 했는데 좀 남아 있는 모양이야』
―洪수석의 재산은 지금 얼마나 됩니까.
『얼마 전에 全斗煥 前 대통령이 내지 않은 추징금이 화제가 됐을 때, MBC 「PD수첩」 취재팀이 나를 취재하러 부산 서대신동의 내 아파트에 내려왔어요. LPG 가스통을 밖에 내놓고 연결해서 쓰는 걸 보더니 별 얘기가 없더라고. 한보사건으로 구속될 무렵 주변에서 「분당집하고 거제의 선산 땅을 남의 명의로 돌려 놓으라」고 해요. 「대한민국 최고권력에 있었고, 국회의원인 사람이 돈 몇 푼에 그런 짓은 못 한다」고 했어요. 검찰이 1997년 말 대법원 판결이 나자마자 분당집, 아버지가 물려주신 巨濟 선산 세 정보를 다 가져갔어요. 나머지는 회수불능으로 면탈됐습니다. 서대신동 아파트가 全 재산입니다』
―법정에서 『내게 들어왔던 돈은 사흘을 멈춰 있지 않았다』, 『개인 치부는 안 했다』고 항변했던데….
『정치자금이 고이면 안 됩니다. 고이면 그걸 자기 걸로 생각하고, 지키려고 딴생각을 하게 되니까요. 정치자금은 내 돈이 아닙니다. 내가 정치자금을 만지면서, 내 동생들, 친척들에게 단 한푼도 돈을 준 적이 없습니다. 매제 심완구는 정치를 하니까 도와준 거고. 내가 청와대 수석할 때 밑에 비서관이 「수석님, 이제부터 총선 준비를 하십시오」라고 해요. 「돈을 좀 모아두라」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왜 선거하려고 돈을 모아 두나」라고 했어요. 1996년 총선 때 회계를 후배에게 맡겼고, 나는 정치자금 들어온 장부도 한 번 안 봤습니다. 「정치자금은 쌓아 두면 안 된다. 없으면 안 쓴다」는 생각으로 살았습니다』
시원시원하게 정치자금을 풀었다
―정치인 金泳三 밑에서 일할 때 洪수석 손을 거쳐간 돈은 얼마나 될까요. 6000억원은 넘겠죠.
『전혀 기억이 없어요(웃음). 정치자금을 시원시원하게 풀었지, 내 손이 이렇게 크잖아. 검사가 「한 호텔 수영장 여자코치에게 당신 수표 300만원이 갔다」고 추궁을 해요. 「내가 제일 존경하는 사람이 시저와 나폴레옹이다. 내가 애인이 있어 돈을 주면 많이 주지, 그렇게 쩨쩨하게는 안 준다」고 했어요. 검사가 더 묻지를 않더라고』
―수감생활 중 고혈압과 심장질환으로 여러 차례 교도소 밖의 민간병원에 입원했는데, 요즈음 건강은 어떠십니까.
『혈압이 한때 220까지 올라갔고, 지금은 정상을 유지하고 있어요. 고혈압 약을 평생 먹어야 해요』
긴 인터뷰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터뷰를 한 방 바로 옆방에 洪수석의 후배 4명이 洪수석을 기다리고 있었다. 洪수석이 『늦었으니 저녁이나 먹고 가라』며 기자를 끌어당겼다. 洪수석은 『정치를 그만두겠다고 얘기했더니, 「이제부터 진짜 잘 모시겠다」는 후배들이 줄을 섰다』며 웃었다.
洪수석은 최근 동대신동 천주교회 신도회의 부회장으로 선임됐다. 그는 『내 일생에서 가장 명예로운 일』이라며 『안양의 「나자로 마을」을 돕는 일도 계속할 것』이라고 했다. 저녁식사가 끝나고, 서울에서 사업을 하는 洪수석의 후배가 밥값을 냈다. 洪수석은 서빙한 여종업원에게 1만원짜리 한 장을 팁으로 건넸다.
헤어지면서 洪 前 수석은 『국민들은 그때그때 시대의 대세를 선택했고, 정치자금은 필요악이었다』면서 『지금 기준으로 옛날을 욕만 하지 말고, 정치인들이 변화된 현실에 빨리 적응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金泳三의 자금 관리인 洪仁吉은 3金시대가 저물어 가는 길목에서 자신의 정치인생을 서둘러 정리하고 있었다.
후배의 승용차에 올라타는 그의 발걸음이 가벼워 보였다.●
저녁 영업을 준비하던 식당 종업원들의 눈이 일제히 그에게 쏠렸다. 『洪仁吉이네』하는 속삭임이 들렸다. 정치자금 관리라는 비밀스런 작업을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체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오랜만이오』
그는 큰 손으로 기자의 손을 오랫동안 잡았다. 자리를 방으로 옮겼다.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은 여전했다.
기자는 1992년 한 해 동안 金泳三 민자당 대표 최고위원을 담당했다. 새벽에 상도동을 찾아가 식당에서 아침을 먹는 것으로 고단한 정치부 기자의 하루가 시작됐다. 상도동의 아침 메뉴는 소박했다. 밥 한 그릇에 우거짓국, 김치와 갈치 한 토막 정도가 나왔다.
金泳三 최고위원은 출근하려고 2층에서 내려와 응접실을 지나가면서, 陣을 치고 있는 20~30명의 기자들을 향해 『수고 많아요』라고 한마디 던지고 가 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식당에서 기자들과 어울려 아침 밥을 먹고, 응접실에서 기자들을 붙들고 상도동의 입장을 전하는 일은 李源宗(이원종) 前 정무수석의 몫이었다.
「血竹(혈죽: 핏대라는 말을 漢字化한 것임)」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李源宗 당시 민자당 副대변인은 기자들과의 言爭(언쟁)을 불사했다. 기자들을 데리고 밖에 나가서 밥 먹고 술 먹고 하는 일은 洪仁吉 비서의 몫이었다. 洪비서는 늘 여유가 있었고, 실없는 농담을 잘했다. 피튀기는 치열한 정치판을 逍遙(소요)하는 듯한 느낌을 줬다.
부잣집 외아들로 양지에서 자란 「보스」와 분위기가 흡사했다.
洪 前 수석과 한참 동안 그 시절 이야기를 했다.


이런 수식어가 洪 前 수석의 이름 앞에 늘 따라 붙는다. 20代 초반부터 국회의원 金泳三의 지역구(부산 서구)를 관리했고, 「서울의 봄」이 한창이던 1980년 초 서울로 올라와 金泳三의 정치자금을 본격적으로 관리했다. 40년 가까이 「金泳三의 돈」을 주무른 것이다.
1993년 金泳三 정권 출범과 함께 총무수석 비서관으로서 청와대 살림과 金泳三 대통령의 친인척 관리를 맡았다. 1996년 4월 총선에서 정치적 고향인 부산 서구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됐지만, 좋은 날은 오래가지 못했다.
한보비리와 관련해서 1997년 2월 처음 구속됐고, 刑 집행 정지 중에 청구건설의 대구방송 인허가 비리와 관련해서 다시 한번 옥고를 치렀다. 그가 첫 구속되기 직전에 여동생이 사망(1997년 2월)하고, 옥에 갇혀 있는 동안 형님 喪(1998년 3월)과 어머니 喪(1999년 8월)을 치러야 하는 시련이 밀어닥쳤다.
2000년 광복절 사면으로 석방돼 3년6개월의 감옥살이를 마쳤다.
洪 前 수석은 지난해 연말, 거처를 부산 서구로 옮겼다. 몇몇 주간지에는 「洪仁吉 前 수석이 부산 서구에서 총선 출마를 준비하고 있다」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인터뷰는 어렵게 성사됐다. 洪 前 수석은 『국민들이 알아서 좋은 일이 있고, 모르고 그냥 가는 게 좋을 경우도 있다』, 『여러 사람에게 累(누)가 된다』며 인터뷰를 극구 사양했다. 부산으로 내려간 그를 『얼굴이라도 한번 보자』며 서울로 모시는 데 상당히 힘이 들었다.
洪 前 수석은 인터뷰에 응하게 된 심경 변화를 이렇게 설명했다.
『부산으로 내려간 건 정치를 시작하려는 게 아니고 落鄕(낙향)한 겁니다. 고향은 거제지만, 부산이 제2의 고향이거든요. 총선 출마 안 한다고 주변에 다 얘기를 했어요. 정치를 접었고, 金泳三 시대도 끝나고 金大中 시대도 끝났으니까, 한번 옛날 얘기를 정리하고 싶었어요.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 인터뷰가 될 거요』
오후 4시에 시작한 인터뷰는 오후 9시까지 이어졌다.
洪 前 수석은 1970년대 신민당을 중심으로 전개됐던 민주화 투쟁을 흥겹게 얘기했다. 金泳三씨의 40代 기수론 제창과 1971년 大選, 신민당 黨權(당권) 장악, 강력한 對與 투쟁…. 그때가 가장 순수했고, 아름다운 시절이라고 했다.
1960년대, 1970년대의 일에 대해서 그는 많은 얘기를 했다. 하지만 기자는 洪 前 수석이 金泳三 신민당 총재의 비서로 상경한 1980년 이후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인터뷰 기사를 정리했다. 가급적이면 그의 主특기였던 정치자금 문제로 주제를 압축했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기자를 부르는 洪 前 수석의 호칭이 『金차장』에서 『金기자』로, 그리고 『연광씨』로 변해 갔다. 洪수석의 어투를 그대로 살렸다.
―왜 부산으로 거처를 옮겼습니까.
『정치를 오래 한 선배들을 보면 마지막 에 모양이 안 좋더라고. 끝까지 뭔가 한 자리 얻어 보겠다고 서울을 떠나지 않는 게 보기가 안 좋았어요. 「정치를 끝내면 고향으로 가야겠다」는 평소 생각대로 실천했어요』
―주변에서 총선 출마하라고 권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텐데요. 소위 「열린우리당」이 洪수석에게 공을 꽤 들이고 있다는 얘기가 들리던데.
『왜 없겠어요. 작년 11월에 마음을 다 정리했어요. 참모들을 불러 모아 놓고 「나는 떠날 때가 됐다. 떠날 때를 알아야지, 그걸 모르고 계속하겠다고 난리 치는 건 내 스타일에 안 맞다」고 했어요』
―평생 정치에 몸을 담았는데, 그만두기로 결심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정치는 재미가 있어야 해요. 「오야붕」모시고 대통령까지 만들었으면 됐지, 지금 내가 국회에 가서 무슨 영화를 보겠어. 조금 있으면 홍위병 아이들이 「누구는 되고, 누구는 짤라라」고 난리를 칠 거 아니야. 내가 그 친구들 손에서 生殺與奪(생살여탈)이 결정되는 꼴이 돼야겠어요. 딱 접었지. 마음이 아주 편해요. 잘 한 것 같아』
洪 前 수석은 『달라진 시대에 이제 내 스타일은 맞질 않는 것 같다』고 했다.
『나는 평생 「안 됩니다」는 소리를 안 하고 살았어요. 누가 찾아와서 어렵다고 얘기하면 「도와드려야죠」,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고 했지, 「절대 안 된다」, 「못하겠다」고 하질 않았어요. 나는 사람을 가려서 전화를 받지 않았습니다. 내 비서들에게 「洪吉童(홍길동)이가 전화했다고 해도 바꿔라. 그렇지만 光化門(광화문)이 전화했다고 하면 바꾸지 말라」고 했어요. 아무나 다 바꾸라는 얘기지. 洪仁吉이를 찾는 사람한테 「왜 전화 걸었습니까」, 「용건이 뭡니까」 묻지 말라고 했어요. 청와대에서 일할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래서 한보비리의 주범으로 몰리기도 했지만…』

―洪수석이 金泳三 前 대통령의 6촌 동생뻘이라는 얘기가 있는데, 정확하게 어떤 관계입니까.
『우리 할머니가 마산 金洪祚(김홍조) 어른의 제일 큰 고모입니다. 우리 할머니가 홍조翁(옹) 아버지의 누나지. 그러니까 우리 부친하고 홍조翁하고 고종사촌이에요. 金대통령이 再從兄(재종형·6촌형)이에요. 홍조翁도 외동아들이고, 우리 아버지도 외동아들이었어요. 같은 마을에서 살고, 漁場(어장)이 붙어 있어서 金대통령하고 나하고는 6촌이 아니라 친형제처럼 가까운 사이예요. 뭐든지 다 터놓고 얘기했어요』
―한보 청문회 때 야당 의원들이 「洪수석이 김홍조翁의 漁場을 관리했다」, 「오래 전부터 金泳三 집안의 재산 관리인이다」고 주장을 했죠. 金泳三 대통령 댁의 재산을 관리한 적이 있습니까.
『그때 야당 의원들이 나를 「청지기다, 집사다」하고 깎아내렸어요. 나는 스스로 金泳三 대통령의 정치적 동지라고 자부하고 살아왔어요. 정치인 金泳三의 정치자금을 관리했지, 그 댁 어장을 관리해 주고 그런 일은 없었어요. 지금은 내 조카가 홍조翁 어장을 같이 봐주고 있어요』
―金泳三 대통령 집 어장하고, 洪수석 댁 어장하고 어느 쪽이 컸습니까.
『홍조翁 어장이 컸어요. 그런데 定置網(정치망: 고기떼가 다니는 길목에 그물을 쳐두었다가 거둬들이는 방식) 어장이니까, 어획량은 얼마나 목이 좋아서 많이 잡느냐에 달렸어요. 그것 가지고 노인들이 평생 사셨어요. 1960년대에 그 재산을 팔아서 부산이나 마산으로 나갔으면 아마 큰부자가 됐을 거예요. 두 양반들이 외동이니까 고향을 못 떠난 거지』
―金泳三 대통령을 정치적으로 돕기 시작한 것은 언제 부터입니까.
『巨濟에서 부산으로 올라와서 金泳三 대통령의 사촌인 김영호씨 댁에서 학교를 다녔어요. 동아大 법학과에 다닐 때부터 金총재의 부산 서구 선거를 도왔어요. 아르바이트로 한 게 아니고 徐錫宰(前 총무처 장관) 형하고 본격적으로 뛰었어요. 金총재는 나를 완전히 믿고 다 맡긴 거지. 조개표 석유를 했던 신중달씨, 동아大 교수를 한 박규상씨(후일 공화당 사무총장을 역임)와 붙었을 때는 위태위태했어요. 정말 힘겨운 싸움이었어요. 金총재가 이 두 고비를 넘기고, 7選·8選의 거물로, 대통령으로 갈 수 있었던 겁니다』
―金泳三 대통령은 『부친이 사 준 집을 팔아서 총선 선거자금을 쓰고 나면, 아버지가 또 집을 사 주셨다』고 했습니다. 洪수석은 어땠습니까.
『나도 기본적으로 재산이 있으니까, 큰 아쉬움 없이 활동했지. 부산에서 사업하는 친구들이 성심껏 도와줬고. 남한테 「힘들다. 얼마 도와달라」고 해보지 않았어요. 민주화 투쟁한다는 명분도 있었고, YS가 20代부터 국회의원 하면서 쌓아 놓은 단단한 인맥이 있으니까, 金大中씨 돈을 마련한 노갑이 형님(權魯甲 前 민주당 고문)에 비하면 나는 별로 고생을 안 한 편이에요』


『金泳三 총재 생일 때 가족들이 다 모였어요. 金총재 생일 이틀 뒤가 손명순 여사 생일이어서 겸사겸사 많이 와요. 金총재가 생일날 「인길이는 이제 여기 있어라」고 해서 눌러 앉았어요. 朴正熙 대통령이 돌아가시고, 「金泳三 시대가 왔다」는 분위기가 확 돌았어요. 나도 金총재를 대통령으로 만들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洪 前 수석이 서울에 올라오고 나서 곧바로 「서울의 봄」이 깨져 버렸다. 「金泳三 대통령」의 꿈은 다시 멀어졌다. 洪 前 수석은 『오야붕이 연금되는 바람에 부산으로 갈 수도 없고, 서울에 있어도 낙이 없는 처지가 됐다』고 했다.
상도동 자택에서 연금된 金泳三의 곁을 지킨 사람은 洪仁吉과 張學魯(장학로) 두 비서뿐이었다. 집권 가능성을 보고 상도동으로 밀려들던 돈은 바짝 말라 버렸다.
『현대자동차에서 월부금을 안 낸다고, 金총재 車를 압류하겠다고 통지를 했어요. 신민당의 文正秀(문정수) 총무국장에게 「왜 자동차 월부금을 안 냈느냐」고 물었더니, 「좋은 시절에 그쪽에서 할부금을 내지 말라고 해서 안 냈다」고 해요. 꽃집, 술집 주인들이 외상을 받아야 하는데 상도동 집에 들어올 수 없으니까, 내용증명을 보냈어요. 이런 사정인데 부산으로 내려갈 수가 있겠습니까? 金총재가 제일 큰 시련을 맞고 있는데 이건 넘기고 내려가야겠다고 결심을 했지. 고생 많이 했어요』
洪 前 수석이 상도동 캠프에 합류해서 제일 첫 번째 한 일은 金총재의 개인비서들에게 월급을 주는 것이었다. 金泳三씨가 단식투쟁(1983년 5월)을 벌이고, 단식 1주년을 기념해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결성해 정치를 본격화한 이후에는 비서들에 대한 월급 지급이 자리를 제대로 잡았다고 한다.
『1980년에 上道洞에 와보니까 비서들한테 월급을 안 주고 있어요. 각자가 알아서 쓰는 거야. 내가 「월급을 줘야 한다. 주인과 고용인 관계는 아니지만, 정치지망생이라도 밥은 먹게 해줘야 한다. 그래야 걱정 안 하고 일할 수 있다. 또 비서들이 각자 돈을 만들면 말썽의 소지가 많다」고 했어요. (金泳三 대통령이) 「돈이 어디 있나」고 해요. 「돈은 만들면 됩니다. 비서들 월급은 반드시 줘야 합니다」고 했어요. 그때부터 비서들 월급을 줬어요』
―월급을 주는 비서가 몇 명이나 됐습니까.
『1980년 봄에 열 명 정도였고, 민추협할 때는 더 많았고. 제일 어려웠던 때에도 돈을 마련해서 비서들에게 월급을 줬어요』
―그 무렵 상도동의 돈 사정은 어땠습니까.
『선거를 치르면서 전국구를 팔았다가, 사기당하고 그런 험한 꼴은 안 당했어요. 金총재가 제도권 안에서 투쟁을 했고, 어려운 시기에 국민과 함께 살아왔잖아요. 그게 큰 힘이지』
―1990년의 3黨합당 전까지는 宋斗灝(송두호) 前 의원, 嚴基鉉(엄기현) 회장, 田秉奇(전병기) 사장 같은 부산 인맥들이 金泳三씨의 주된 정치자금원이었죠.
『그 양반들은 간판으로 내세운 거고. 정치하면서 맥이 닿은 사람들이 전국에서 도와줬어요. 경남高 출신들이 얼마나 돼요. 정당을 이끌면 얼마나 많은 돈이 필요합니까. 경남高, 서울大 인맥만은 아니었어요. 좀더 폭넓은 재정지원자 그룹을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1993년 3월 청와대 총무수석이 될 때까지, 洪수석 개인명의의 은행 계좌가 하나도 없었다는 게 사실입니까.
『직원 계좌에 넣어 두고 쓰면 되지, 내 명의가 뭐하러 필요해요. 다 나눠 줄 건데』
―金泳三 대통령도 돈을 쌓아 놓고 체계적으로 지출하는 타입은 아니죠.
『돈에 대해서는 개념이 없어요. 아무 대책이 없는 양반이야. 돈을 모르고, 있으면 다 나눠 주는 스타일이에요. 주머니에 한 시간도 돈을 못 갖고 있어요. 金대통령은 약속이 오후 1시17분에 한 명, 1시23분에 한 명 이런 식으로 촘촘하게 정해져 있어요. 돈 있으면 만나는 순서대로 다 나눠줘요. 「대한민국을 다스릴 사람이 돈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는 배짱으로 살아온 분이에요. 그래도 이 양반이 돈이 떨어지면, 기가 팍 죽어요. 정치인은 힘이 있으면 돈이 따라요. 돈이 마른다는 건 세가 약해졌다는 얘기지』
―上道洞 캠프에서 돈을 만진 사람은 洪수석 하나라고 보면 됩니까.
『그래요. 1987년에 大選을 치르고, 그 후에 통일민주당을 이끌었지만, 3黨합당(1990년) 이후 (상도동의) 정치자금 규모가 커졌어요. 내가 감옥 가고 고생을 좀 했지만, 「洪仁吉이 정치자금을 다 받았다. 金泳三이는 돈 안 받는다」는 인식이 보통사람들 사이에도 박혀 있잖아요. 지금 金泳三 대통령이 돈에 대해서 얼마나 편한 위치예요. 요즈음 큰소리 빵빵 치는 게 돈에 대해서는 자신이 있으니까 그런 거예요』
―金泳三 대통령이 들어오고 나가는 정치자금의 규모를 정확하게 파악합니까. 決算(결산)을 한다고나 할까.
『누가 왔다는 건 얘길 하죠. 「오야붕」한테 반드시 얘기를 해요. 안 하면 큰일 나지. 「오늘 金회장하고 누구누구가 왔다갔다」고 하면, 돈이 들어왔겠다고 짐작하는 거지』
―金泳三 대통령은 누가 와서 돈을 주고 갔다는 정도만 파악하고 있는 겁니까.
『누가 도와줬다는 걸 다 기억하지. 고맙다는 인사도 하고. 하지만 정확한 수입·지출 내역은 알려고도 하지 않고, 나도 보고 안 하고, 모르는 거지』


『내가 청와대 총무수석으로 있을 때 장모님 七旬(칠순)을 맞았어요. 金海(김해)에서 잔치를 했는데 현철이가 왔어요. 金爀珪(前 경남지사), 朴淵次(태광실업 회장, 盧武鉉 대통령의 후원회장 강금원씨의 용인 땅을 매입했다)가 오고, 현철이 친구 박태중이도 왔어요. 내가 태중이한테 「태중아, 너하고 나하고는 정치자금으로 제일 먼저 감옥에 들어간다. 조심해라」고 얘기를 했어요. 나중에 박태중이 청주교도소에서 나한테 편지를 보냈어. 「아저씨, 그때 참 기분이 나빴는데, 아저씨 말이 어찌 그리 맞았나 싶습니다. 그때 어떻게 내가 감옥에 갈 줄 알고 계셨습니까」라고』
(박태중씨는 金泳三씨의 사조직인 「나라사랑운동본부」 사무국장으로 일했고, 金泳三 前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씨의 大選殘金 120억원을 관리했다)
―정치자금을 만지는 게 위태로운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군요.
『법을 넘어섰고, 잘못된 일이니까…. 하지만 수요가 있는데 공급이 있어야 할 것 아니오. 하루 아침에 딱 끊을 수가 있나. 누군가 공급을 해야 했고, 내가 그 일을 한 거지』

―金泳三 대통령은 1992년 12월 大選에서 승리한 후 곧 바로 『앞으로 재벌들로부터 단 한푼의 정치자금도 받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까지 與野 정당들은 大選자금 비리를 놓고 목숨을 건 싸움을 벌이고 있습니다. 金대통령이 「정치자금을 일절 안 받겠다」고 선언하면서, 洪수석에게 앞으로 정치자금에서 손을 떼라고 지시했습니까.
『(金泳三 대통령이) 「인길아, 내가 앞으로 일절 정치자금을 안 받는다」고 해요. 그래서 제가 「그러면 딴 사람은 어떡 하라는 겁니까」하고 물었어요. 金대통령이 「나 아니면 아무도 이 일을 못 한다」고 그래. 그 얘기야 맞지. 당신이야 대통령까지 됐으니까, 더 바랄 게 뭐가 있어. 그러면 金大中씨는 앞으로 어떻게 정치를 하고 大選을 치르겠어. 남 골탕 먹이는 일 비슷하게 되는 것 아니오. 金대통령은 계속 「나 아니면 아무도 못 한다」고만 그래. 그러면서 「인길아, 니 조심해라. 니가 받으면 내가 받았다고 생각한다. 니는 조심해라」고 당부를 해요』
―뭐라고 그랬습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라고 했지. 金대통령은 그때 「이 나라와 정치를 내가 깨끗하게 만들겠다」는 생각에 불타고 있었거든. 그런데 그게 하루 아침에 되나. 앞으로 선거가 수도 없이 있고, 우리 사람들을 당선시켜야 하는데…. 돈 안 쓰면 정치인들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선거판이 하루 아침에 깨끗해집니까…』
―총무수석으로 정치자금 조달을 계속한 겁니까.
『그때 대통령 기밀비가 한 해에 12억원쯤 되는데 여기서 10%쯤 가져와서 내가 썼어요. 축의금도 나가지, 조의금도 내야지, 예산으로는 되지를 않아요. 초창기에 청와대 민정수석실 비서관이 지방에 갔다왔다며, 올린 서류를 보니까 전부 여관에서 잔 걸로 돼 있어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정말 여관에서 잡니까? 호텔에서 자지. 가서 지방 유지에게 신세지는 거예요. 그러고 무슨 民情(민정) 조사가 되겠어.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어요. 「쓴 대로 다 올려라. 내가 처리한다」고 했어요. 크게 돈을 만든 건 아니고, 청와대 살림하고, 정치하는 후배들 조금 도와주는 정도였어요. 돈을 쌓아 놓고 한 건 아니고, 국정운영비하고 합쳐서 고비고비 막았어요』 』
―「정치자금을 한푼도 안 받겠다」는 金泳三 대통령 선언과 돈을 써야 하는 현실의 틈새를 洪수석이 메웠군요.
『「돈 안 쓰는 정치한다」고 말만 하면 정치가 금방 깨끗해지나. 되질 않아요. 나는 이런 비유를 종종 합니다. 「어린아이가 사탕을 맛있게 먹고 있는데, 그 손에 쥔 사탕을 뺏으려고 해봐라. 아이가 사탕을 더 세게 움켜 잡는다. 그러면 項羽(항우)장사도 펴질 못한다」. 정치자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살 달래 가면서 뺏아야 합니다』
―「金泳三 청와대」를 5년간 출입했던 선배기자로부터 『청와대의 수석들과 주요 비서관들이 洪仁吉 수석에게서 돈을 타 썼다』, 『洪수석이 돈 관리를 전담했기 때문에 다른 수석들이 검은돈의 유혹에서 벗어난 측면도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수석비서관들에게 얼마씩이나 지원했습니까.
『비서실장에게 보고도 안 하고 수석실마다 한 달에 500만~1000만원씩 보조했어요. 그래도 그거 가지고 되나. 정무수석실은 다른 수석실보다 훨씬 더 많이 지원했어요. 정무수석이 사람 만나는 자리니까. 그리고 공보수석이 멍청하게 제 방이나 지키고 앉아 있으면, 국정 홍보가 안 돼요. 내가 알아서 도왔지』


『韓利憲씨가 경제수석으로 왔을 때 내가 「당신 기분 나쁘겠지만 한마디 해야겠다. 재벌들이 찾아와서 용돈 쓰라고 돈 준다고 절대로 받지 마라」고 했어요. 韓수석이 「그러면 경제수석실에서 쓸 돈은 형님이 갖다 주십시오」라고 해, 「그래, 그건 내가 하겠다」고 했어요(한이헌씨는 1994년 10월부터 1996년 2월까지 경제수석으로 근무했다). 金正男 교육문화 수석은 在野 출신 아닙니까? 그 사람한테 누가 10원 한푼 갖다 주겠어요. 그 밑에 김영준이라고 비서관이 在野를 담당했는데, 내가 「在野 사람들 만나면 밥 사 주고, 차비라도 좀 주라」고 했어요. 딴 수석실이야 얻어 먹을 데라도 있지만, 교육문화수석실은 그런 형편이 아니거든. 金수석이 참 순수해. 그 양반이 누구한테 손 벌릴 사람이 아니잖아요. 수석회의 끝나고 슬며시 내 방에 내려와서 「洪수석, 미안한데 다 떨어졌어」라고 얘기해』
―上道洞의 오랜 家臣인 張學魯 부속실장이 1996년에 수뢰혐의로 구속됐죠. 金泳三 정부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힌 사건이었는데.
『참 미련한 짓을 한 거지. 지가 뭐하러 돈을 모으나』
―1992년 大選 때는 선대위원장을 맡기로 했던 朴泰俊 최고위원이 선거 직전에 탈당해서 자금 모금이 힘들었죠.
『돈도 돈이지만 마음 고생을 많이 했죠. 鄭周永(정주영), 朴哲彦(박철언), 金龍煥(김용환) 의원 등이 민자당 주변을 맴돌면서 새로 黨을 만들자고 朴泰俊씨를 집요하게 공략했어요. 鄭石謨씨가 일본에 가 있는 朴泰俊씨에게서 편지를 하나 받아 왔어요. 「마음으로 巨山을 지원하겠다」는 내용의 자필 서신이었어요. 내가 이걸 공개해 버리고, 鄭石謨 의원에게 「비밀로 하기로 했는데 하도 급해서 공개해 버렸습니다. 죄송합니다」고 했어요. 鄭의원이 「나라도 그 처지였으면 공개했겠다」고 양해를 해줬어요』
―민자당이 집행한 1992년 大選자금의 총 규모는 얼마나 됩니까.
『전부 조직 가동비로 쓰였어요. 장외 집회하면 버스 전세 내고, 사람들 1인당 점심값 얼마씩. 그런 식으로 따져 보면 얼마나 드는지 알 수 있는 거지』
―막판에 지구당별로 5억~10억씩을 내려보냈는데, 이것만 해도 민자당의 조직 가동비가 최소한 3000억~4000억원이 넘는 것 아닌가요.
『하지만 金大中·鄭周永 후보도 똑같이 조직을 동원하는 선거전을 펼쳤으니까, 상당한 돈을 썼어요. 鄭周永씨야 재벌이니까. 세 후보가 돌아다닌 유세 횟수하고, 동원한 청중 규모를 생각해 보면 金泳三 후보만 천문학적인 돈을 쓴 건 아니에요. 그때만 해도 벌써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이에요. 지금 잣대로 평가하는 건 무리입니다』

―선거대책위원장을 맡기로 한 朴泰俊씨가 탈당하는 바람에 민자당의 대선자금 조달이 난관에 봉착했고, 金泳三 후보가 직접 나선 걸로 압니다. 그래서 金泳三 후보가 지방에서 선거유세를 하다가도, 저녁이면 꼭 서울에 올라와서 재벌 오너들을 만났던 것으로 압니다. 재벌들이 정치자금을 내면서, 보스와의 對面 접촉을 반드시 원한다면서요.
『「절 모르고, 시주 안 한다」는 말이 있어요. 주지 스님이 내가 시주했다는 걸 알아야, 나중에 나를 위해 念佛(염불)해 줄 것 아닙니까. 주지 스님과 얼굴 마주치지 않고, 큰돈 시주하는 사람이 있나요. 보스를 못 만나면 그 다음 실력자라도 만나야 돈을 냅니다. 사무총장이 黨의 살림을 맡는 2인자라고 하지만, 그건 잠깐 2인자예요. 徐廷友(서정우: 李會昌 후보의 법률특보)가 왜 감옥에 갔느냐? 徐廷友씨가 李會昌 후보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니까, 평생을 함께 갈 사람이니까 재벌들이 마음 놓고 돈을 건넨 겁니다. 혹시 무슨 일이 있을 때 徐廷友를 통하면 반드시 李會昌에게 연결될 테니까.
재벌들이 盧武鉉 후보를 싫어한 측면도 있지만, 눈을 씻고 둘러봐도 盧후보 주변에 믿고 큰돈을 줄 2인자가 없는 거야. 자기들끼리는 李光宰·安熙正이를 「왼팔, 오른팔」이라고 하지만, 재벌들이 그런 어린 친구들을 어떻게 믿고 돈을 주겠어. 그래서 李光宰·安熙正이가 대선자금이라고 받은 돈이 몇천만원, 몇억 정도밖에 안 되는 거요』
―「상도동은 洪仁吉, 동교동은 權魯甲」이 정도가 돼야 큰돈이 움직이는 거군요.
『그렇지. 그래야 돈을 확실하게 주지. 지금 바빠서 (兩金을) 못 만나지만, 적어도 洪仁吉이나 權魯甲이한테 돈을 주면 나중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주지가 나를 위해 염불해 준다」는 확신이 서는 거지』
―1992년 민자당 대선자금의 全貌를 파악할 수 있는 사람으로 洪수석이 늘 지목됩니다.
『다른 게 있는지 모르지만, 黨에 모였던 건 다 알지. 총무보좌役이었으니까, 나는 선거 때 어디 가지도 않고, 돈 흐름만 챙겼으니까』

―청와대에 들어갈 때 가지고 들어간 대선잔금이 얼마나 됐습니까.
『청와대에 빈손으로 들어갔어요』
1992년과 대선자금과 관련해서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1996년 총선 직전 안기부 계좌에서 신한국당으로 넘어간 돈의 성격이다. 2003년 9월23일 서울지법은 「강삼재 의원 등이 안기부 예산을 특수 활동비 명목으로 인출해 차명계좌에 넣어 세탁한 뒤 1996년 신한국당 총선에서 사용한 점이 인정된다」고 판결했다.
당시 사무총장이었던 姜三載 의원은 판결이 나오자 『안기부 예산을 黨 자금으로 쓴 적이 없다』고 밝힌 뒤 의원직을 사퇴했다. 지난해 연말 국가정보원은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안기부 예산이 빠져나간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자체 감사결과를 보고했다.
그렇다면 1심 재판부가 「안기부 예산」이라고 판결한 856억원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政街에는 「金泳三 대통령이 1992년 때 쓰다 남긴, 대선잔금을 안기부 계좌에 넣었고, 이를 신한국당이 사용했다」는 大選잔금說에 무게를 두는 분위기였다.
한나라당 崔秉烈 대표는 『金泳三 대통령이 입을 열어야 한다』며 고해성사를 촉구하기도 했다. 洪 前 수석은 『그 돈은 우리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여러 번 못을 박았다.
―안기부 계좌에서 나온 돈이 金泳三 대통령의 大選잔금인 게 분명한 것 아닙니까? 金泳三 대통령이 月刊朝鮮 2001년 2월호 인터뷰에서 『1992년 大選 때 상당히 많은 돈이 들어왔는데 무엇 때문에 안기부 돈을 받느냐』고 밝혀, 「大選잔금설」이 정설로 굳어졌지 않습니까.
『아니지. 그건 오해예요. 1992년 大選을 치르고 남은 돈이 하나도 없었어요. 현철이가 1992년 私조직을 운영하다가 남긴 殘金 120억원은 검찰 수사에서 다 밝혀졌잖아요. 대선잔금이라고 할 수 있는 돈은 그게 전부입니다. 나하고 金榮龜(김영구) 사무총장이 관리했던 민자당 대선 자금에서는 남은 게 없어요. 끝날 때 「實彈(실탄)」을 다 썼어요. 金대통령이 정치 인생의 마지막 승부인데, 선거자금을 남겨 두겠어요. 선거 2~3일 앞두고 지역구에 내려 보낸 돈은 지구당 위원장들이 다 쓰지도 못했어요. 그 사람들이 대선잔금 재미를 봤지』

―대선用으로 모은 돈을 消盡(소진)했더라도,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서 재벌들로부터 받은 「당선 축하금」이 있었을 것 아닙니까.
『당선되고 며칠 뒤에 「정치자금을 한푼도 안 받겠다」고 선언했는데, 어떻게 재벌들한테 축하금을 받아요. 대선자금을 만진 金榮龜 사무총장이 살아 있고, 내가 있는데 대선잔금을 속일 수가 있나. 1992년 대선잔금은 절대 없습니다』
―대선잔금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런 큰돈이 안기부 계좌에 남아 있을 수 있습니까.
『내가 알기로는 신한국당이 1996년 총선을 위해 총선用으로 정치자금을 별도로 모은 겁니다. 그 돈은 절대로 안기부 예산이 아니고, 1992년 대선잔금도 아닙니다』
―정말입니까. 신한국당이 별도로 모은 정치자금이라는 얘기는 처음 듣는데요.
『총선用으로 정치자금을 모은 거지. 받아서 세탁한다고 안기부 계좌에 넣었고, 그걸 꺼내 쓴 거예요. 대통령은 안 받는다고 했지만, 黨은 선거 치를 자금이 필요했을 것 아닙니까』
―金泳三 대통령이 정치자금을 안 받는데, 신한국당이 1000억원에 가까운 정치자금을 조달할 능력이 됩니까.
『되지요. 집권당인데. 야당 후보인 李會昌씨가 맑아졌다는 2002년 大選 때도 차떼기로 수백억원씩 거둔 것 봤잖아요』
―그렇다면 金泳三 대통령이 『「안기부 총선자금」은 안기부 예산이 아니다. 대선잔금이 아니고 신한국당이 모은 돈이다』고 밝혀야 할 것 아닙니까.
『자신이 총재로 있는 黨이, 「나는 돈 안받는다」고 선언한 상황에서 불법 정치자금을 모금했다고 밝혀서 金泳三 대통령에게 무슨 보탬이 됩니까. 도덕성에 흠집만 나는 거지. 그래서 가만있는 거예요』
―洪수석도 2001년 1월 검찰에 불려가서 1996년 이른바 「안기부 예산의 총선자금 전용」과 관련한 조사를 받은 것으로 압니다. 당시 신문 보도를 보면 「1995년 안기부 자금 수억원이 청와대로 유입됐고, 총무수석실 직원 명의로 배서된 뒤 운영경비로 쓰였다」고 돼 있습니다. 어떤 점을 추궁받았습니까.
『검찰이 「당신이 청와대 근무할 때 신한국당의 돈 5억원이 총무수석 계좌로 입금됐다」고 추궁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안 나요. 총무수석 계좌에 돈이 들어오고 나간 기록이 있으니, 내가 쓴 거 아니겠어요. 그래서 「내가 받아서 썼다. 정치자금이었고 10원도 私用(사용)한 게 없다」고 했어요. 받은 5억원 가운데 1억원이 어디로 갔는지 구멍이 났는데, 검찰이 이건 신경도 쓰질 않았어요』
―그러면 신한국당에서 洪수석에게 준 5억원이 안기부의 國庫 수표였다는 얘기입니까.
『그래서 검찰이 나를 조사한 거지. 청와대 있을 때 黨에 있는 사람한테서 「용광로에 넣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신한국당이 총선 자금을 거둔 뒤에 돈세탁을 하려고, 「용광로」인 안기부 계좌에 넣었다가 꺼내 쓴 걸로 짐작하고 있어요』
―신한국당이 1996년용 총선자금을 만들 때 간여했습니까.
『그때 나는 부산에서 출마해 내 선거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노동법 개정안 「날치기」의 후유증으로 李洪九(이홍구) 대표가 사표를 냈고, 金泳三 정권은 레임덕에 빠졌다.
姜慶植 경제부총리는 IMF 경제위기가 올 때까지 「금융개혁 법안」 통과를 위해 종종걸음을 쳤다. 노동법 개정에, 금융개혁 법안에 저항했던 金大中씨와 야당은 金泳三 대통령을 경제위기를 초래한 주범이라고 비난했다.
1997년 한보 대출비리 사건을 보도한 신문기사들을 보면, 언론과 야당은 정태수 회장에게 5조원의 시설자금 지원을 가능케 한 「몸통」을 찾는 데 온통 정신이 팔려 있다. 우리 사회는 IMF의 긴급 구제금융을 받고 나서야, 前근대적인 한국기업과 은행의 금융관행이 한국경제를 망가뜨린 「몸통」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洪仁吉씨는 「1995년 1월부터 1996년말까지 정태수 회장으로부터 10억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대체로 시인했고, 이 죄로 대법원에서 징역 6년, 추징금 10억원을 선고받았다. 그는 검찰수사와 국회 한보청문회를 통해, 한보 대출비리의 「몸통」으로 자리를 굳혔다.
하지만 그는 왜 자신이 한보사건의 몸통으로 비난받아야 하는지 지금도 납득하지 못하고 있었다.
『은행장들 참, 웃기는 사람들이야. 돈 장사하는 사람들이 따져 보고 돈을 줘야지. 내가 뭘 알아요. 허허벌판에 말뚝 꽂을 때는 돈을 5조원이나 대줬다가, 공장 다 짓고 운영자금 3000억원을 안 주는 게 말이 됩니까. 애당초 시설자금을 주지 말던가. 한보를 부도 내서 우리 경제가 얼마나 손해를 봤어요』
―洪수석이 은행장들에게 대출 압력 전화를 한 것은 사실 아닙니까.
『도와줄 수 있으면 좀 도와주라고 한 거지. 은행장들이 검찰에서, 청문회에서 「洪수석 전화를 압력으로는 생각 안했다」고 얘기했잖아요』
―한보 청문회에서 정태수 회장이 『洪의원 외에는 누구에게도 대출을 부탁한 적이 없다. 洪의원에게 부탁해서 은행장을 통해 대출이 이뤄졌기 때문에 洪의원을 하늘같이 생각했다』고 말했죠.
『누가 와서 아쉬운 소리를 하면, 내가 「안 된다」는 소리를 못 해요. 정태수 회장 얘기를 듣고, 대출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려고 했어요. 대출 청탁 代價로 돈을 받은 게 아닙니다. 은행장들한테 「3000억원 대출을 안 해줘서, 5조원을 날리는 건 내가 생각해도 상식에 어긋난다」고 얘기했어요. 그 정도 한 거예요.
3000억원만 추가 대출하면 되는데, 李錫采 경제수석이 1997년 2월에 그대로 부도를 내버린 것 아니오. 나는 「부도내면 안 된다」고 얘기했어요. 야당은 「현철이가 한보비리의 배후다」고 물고 늘어졌어요. 李錫采 수석에게 「현철이가 결백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한보를 죽일 필요까지야 있느냐」고 했어요. 결국 나라가 풍비박산 난 거 아니오. 생각해 보세요. 한보를 그렇게 처리한 게 잘한 건지』


『청와대는 안 가고 신한국당 姜三載 사무총장을 만났어요. 姜총장이 「내가 책임을 지겠다」고 위로를 해요. 출두하기 전날 서울 양천구의 한 호텔로 李源宗 정무수석을 불렀어요. 「정태수한테 받은 돈 내가 썼나? 네가 더 잘 알 것 아니냐. 내가 내일 검찰에 나간다. 네가 앞장을 서라」고 하니까, 李수석이 벌벌 떨더라고. 「내가 흙탕물에 손 짚고 발 짚고 있을 때 내 등 밟고 지나간 놈은 깨끗하고, 흙탕물에 있던 나만 나쁜 놈이냐. 어른 그렇게 모시면 안 된다」고 큰 소리를 쳤지. (1999년 8월) 어머니 喪家에 찾아왔기에 다 용서했어요』
―구속되기 직전에 『나는 깃털일 뿐』이라는 말을 해서 人口에 두고두고 膾炙(회자)됐죠. 어떻게 그런 얘기를 하게 된 겁니까.
『구속되기 딱 1주일 전(1997년 2월5일)에 여동생 喪을 당해 울산으로 내려갔어요(洪 前 수석의 여동생 홍길순씨의 남편이 당시 울산시장이었던 沈完求씨다). 시신을 입관도 못 했는데 기자들이 「좀 보자」고 난리야. 기자들이 「당신이 실세로 은행들에 압력을 넣었다는데 사실이냐」고 물어요. 「난 이미 1995년 12월에 청와대를 떠났다. 그런데 무슨 實勢냐. 권력이란 내 손 안에 있을 때 힘이 있는 것이지, 내 손에서 빠져나가는 순간 깃털보다 더 가벼운 것이다」고 했어요. 그게 어떻게 「나는 몸통이 아니고 깃털이다」고 보도가 됐어요』
―깃털 얘기는 평소에 생각했던 겁니까.
『내가 고스톱하고, 포커할 때 하던 얘기예요. 친구들이 「어이 實勢가 돈 좀 풀어라」 하면, 「이 사람들아, 내가 권력 핵심에서 떠난 지가 언젠데 實勢야. 나는 지금 깃털처럼 가벼워」라고 대꾸를 했어요. 그 얘기 그대로 한 거예요』
―그 깃털 발언 때문에 「洪仁吉은 깃털이고, 몸통은 따로 있다」는 얘기가 힘을 얻었지 않습니까.
『내가 아무리 비겁하더라도 「나는 깃털이고, 實勢는 따로 있다」는 얘기를 하겠어요. 목숨이 끊어져도 그런 변명은 안 하지. 언론이 이 洪仁吉을 한없이 왜소하게 만들었어요』
―동교동에서 정치자금을 만진 사람이 權魯甲 前 고문인데, 두 분이 친하게 지냈습니까.
『인의동에 신민당 당사를 내고, 金大中씨가 (1984년) 미국에서 귀국하고 오면서 아주 가깝게 지냈어요. 仁石(李敏雨 당시 신민당 총재)에게 선물할 때 둘이 상의를 해서 비슷한 가격으로 맞췄어요. 그전에 민주화 투쟁할 때도 친했고. 처음 만났을 때 權고문이 「洪비서, 내 나이가 몇이나 돼 보이노」하고 물은 기억이 나요. 權고문이 상도동계의 黃明秀(황명수·前 신한국당 사무총장)씨하고 나이가 같은 것을 알고 깜짝 놀랐어요. 나보다 열두 살이나 나이가 많은데도, 워낙 童顔(동안)이시잖아요』


『세 사람이 돈을 가져왔어요. 나 혼자 알 수 있게 세 사람 姓만 적어 놓고, 그 밑에 돈의 액수 「30」을 기록했어요. 정보기관에 끌려갔는데 「30이 뭐냐. 30억이냐」고 물어요. 「3시 약속시간」이라고 둘러댔어요. 남이 내 수첩을 보면 완전히 간첩 문서예요』
―지금도 그렇습니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는데, 버릇이 돼서 누구한테 돈을 받고 나서 절대로 흔적을 안 남겨요』
―정치자금을 낸 사람이 수표추적을 통해 다친 적이 있습니까.
『나는 한 번도 빵구가 안 났어요. 수표로 정치자금을 받았지만 사고가 안 나도록 깨끗하게 세탁을 했어요. 중림동 통일민주당 당사를 25억원에 샀어요. 정보기관에서 우리 돈을 추적했을 것 아닙니까. 안기부에서 「도대체 어떻게 이 많은 돈을 흔적없이 세탁했느냐」고 놀라. 그건 내가 9단쯤 될 거야. 「서울의 봄」이 왔을 때 崔炯佑 의원이 許完九(허완구) 회장에게서 돈을 좀 받아 썼어요. 한일관에서 밥을 먹고 낸 500만원 때문에 許完九씨가 정치자금 준 게 드러났어요. 李鶴捧(이학봉)이 학교 선배라고 봐줘서 다행이었지, 許회장이 진짜 혼났어요』
―수표추적을 피하기 위해 정치자금을 현금으로 받지는 않았습니까.
『대부분 수표로 받았어요』
―요즈음 「차떼기」가 유행어가 됐는데, 1992년 大選 때 현금으로 정치자금을 준 재벌들이 없었습니까.
『없었어요. 徐廷友식 「차떼기」는 YS가 만든 거예요. 금융실명제가 그렇게 겁나는 거예요. 10만원권 수표도 다 추적이 되니까. 그전에는 정보기관이 그렇게 악착스럽게 수표추적을 하지 않았어요. 야당에도 숨쉴 구멍을 준 거지. 이제 시대가 변했어요』
―정치자금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돈 준 사람이 불가능한 민원, 사기성 불법민원까지 해결해 달라고 들고 오면 어떻게 합니까.
『친절하게 해서 돌려 보내는 거지. 담당 부서에 연락해서 「절대로 안 되는 민원이라면, 말이라도 잘해서 돌려 보내라」, 「꼭 해줘야 하는데 죄송하다고 해라」고 부탁을 하죠』
―민원 해결을 조건으로 제공하는 정치자금도 가끔 받았을 것 아닙니까.
『돈을 줄 테니까 무얼 해결해 달라, 그런 식으로 접근해 온 사람의 돈은 한 번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이건 곧바로 감옥 가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정치자금이라는 게 급할 때 권력의 도움 받으려고 주는 거니까,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죠』

―동교동계의 금고지기인 權魯甲씨는 金大中 정부 시절부터 여러 수뢰사건으로 계속 옥고를 치르고 있습니다. 金大中 정권과 현대그룹이 공모해서 5억 달러를 金正日에게 비밀 송금하는 와중에 현대로부터 200억원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金大中 총재를 대통령 만들었으면 됐지. 2인자 되면 뭐해요. 그 형님이 자기가 다음 정권에서 권력의 중심에 서겠다고 욕심을 내니까, 분수에 넘게 돈을 모으고, 여기저기 얽혀 든 거예요. 권력이라는 게 허무한 건데, 그 형님이 헛고생한 거요』
―朴智元 前 청와대 비서실장하고도 아주 가까운 사이죠.
『朴실장이 처음에는 全敬煥(전경환·全斗煥 前 대통령의 동생)씨 쪽에 줄을 댔어요. 나중에 金大中씨가 미국에 망명하면서 인연이 닿았지. 한국에 들어와서 金大中씨에게 정말 충성을 다했어요. 신문 보도를 모니터해서 새벽에 동교동에 찾아가서 보고하고. 그만큼 노력을 했으니까, 본류를 제치고 중심으로 간 거예요』
―한나라당 洪準杓(홍준표) 의원이 1998년 10월29일 대구지검 국정감사에서 『분당 차병원에서 입원 중인 洪仁吉 前 수석이 朴智元 공보수석에게 전화를 걸어서, 「내가 2억원이나 주었는데 날 죽이려고 하는가」라고 얘기한 게 감청됐다』고 폭로를 했습니다. 2억원을 줬습니까.
『야당이 얼마나 어려워요. 내가 李源宗 정무수석한테 「겁나서 야당에 돈 주는 사람이 없다. 우리가 야당도 지원해 주고 더불어 같이 가야 한다」고 자주 얘기했어요. 한번은 내가 S 한정식 집에서 야당 대변인 하던 朴智元씨를 만났더니, 李源宗 수석이 「형님, 야당 아이들 간 키워 주지 마십시오. 이게 뭐하는 겁니까」라고 해요. 내가 「이제 내 뒷조사까지 하고 다니나」 하고 들이받았지』
―정무수석실에서 洪수석을 감시한 겁니까.
『정무가 한 게 아니고, 안기부가 동태 파악했다가, 건네 준 거지』
―「2억원 지원說」이 사실에 가까운 얘기군요.
『그렇게 크게는 아니고, 작은 정성을 준 거지』
―洪準杓 의원의 폭로가 나오고 나서, 朴智元 공보수석이 청와대 안에서 곤란했겠습니다.
『그래서 내가 대구교도소에 수감돼 있을 때, 朴智元 수석에게 편지를 한 통 써줬어요』
―편지는 왜요.
『金大中 대통령한테 보여 주라고』
―어떤 내용이었습니까.
『「朴수석, 친구를 도와주려고 한 게 검은돈이나 뒷거래한 것으로 그려져서 미안하다. 어려울 때 술 한잔 나눠 먹고, 정을 준 것뿐인데, 공연한 오해를 받는 것 같다. 그 자리가 정말 어렵고 조심해야 할 자리다. 열심히 金大中 대통령 모셔라」
그런 내용이었어요』
―편지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가 있습니까.
『야당 대변인하면서 나한테 큰돈을 받아 썼다고, 洪準杓 의원이 폭로를 했으니, 金大中 대통령이 朴智元씨를 의심할 거 아니오. 「편지를 하나 써 줬으면 좋겠다」는 뜻이 간접적으로 내게 전달됐어요』
―朴啓東(박계동) 의원이 1995년 10월19일 「盧泰愚 비자금 4000억원」을 폭로하면서, 『청와대 洪仁吉 총무수석이 全貌를 파악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盧泰愚씨가 4000억원을 숨겨 놓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까.
『전혀 몰랐어요. 박계동이 한번 해본 소리지. 내가 전화를 걸어서 「어떻게 이런 거짓말을 할 수가 있나. 소송하겠다」고 했더니, 「형님, 한번 봐주소」 해서 넘어갔어요. 盧泰愚 4000억원은 금융실명제 때문에 불거진 거예요. 언젠가는 들통날 수밖에 없었던 일입니다』

―盧武鉉 대통령이 金泳三 총재가 이끌던 통일민주당의 공천으로 국회에 진출했습니다. 盧武鉉 대통령 영입에 간여했습니까.
『내가 盧武鉉씨를 嚴회장(金泳三씨의 친구인 嚴基鉉씨) 서초동 집에 데려다 놓고, 金총재를 만나게 했어요. 공천 주고, 선거자금 챙겨 주고 다 했지』
―盧武鉉 대통령의 통일민주당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뭡니까.
『국회의원 안 한다고 사표 던지고 도망간 일이지. 우리는 한 석이 아쉬운데, 정치 못 하겠다고 튀어 버렸으니 얼마나 당황스러웠겠어요. 하여튼 특이한 사람이오』
―같은 黨 소속이었던 李仁濟 의원이 盧武鉉씨를 찾아내서 정치를 계속하라고 설득했다고 하던데.
『속리산에서 盧武鉉씨를 찾아낸 건 한국일보의 李有植(이유식) 기자였어요. 李기자가 바퀴에 껌이 붙으면 도로에 달라붙을 조그만 차를 끌고 가서 숨어 있던 盧武鉉씨를 만났어요. 李기자는 특종했다고 좋아했대. 그런데 盧武鉉씨가 「정계에 복귀하는 논리를 어떻게 만들면 되겠느냐」고 묻더라는 거야. 은퇴 선언을 번복하려고 자문을 구하니까, 李기자가 기가 찼다고 해』
―총선에 나선 盧武鉉 후보에게 자금을 얼마나 지원했습니까.
『많이 했지. 최고로 많이 지원했어요. 민정당의 許三守(허삼수) 조직이 워낙 단단하니까, 총력을 기울였어요. 최고 격전지니까 돈을 막 갖다 부었지. 10억원은 넘었을 거야. 선거 전날 밤에 YS가 한 번 더 내려가 지원유세를 했어요』
―1988년에 10억원이라면, 지금 돈으로 20억~30억원쯤 되는 것 아닌가요. 盧武鉉 대통령이 2000년 총선 때도 『돈을 원도 한도 없이 써봤다』고 얘기했는데, 돈 복이 있는 모양입니다.
『그때 내가 그렇게 도와준 걸 자기도 잘 알고, 고마워하지. 해양수산부 장관 시절에 부산에 내려와서 「옛날에 신세진 것 갚는다」며 크게 술을 한번 샀어요. 횟집에서 회 먹고, 파라다이스 호텔 지하 술집에서 한잔 했어요. 영화 「南部軍(남부군)」을 만든 정지영 감독도 자리를 같이 했어요. 盧대통령과 그 무렵 골프도 한 번 쳤어요. 그러고 나서도 「밥 먹자」, 「골프 한 번 치자」고 연락이 왔는데 「밥 한 번 먹었으면 됐다. 또 대접받을 일 없다」고 사양했어요』
―부산에서 술을 마시고 돈을 盧武鉉 장관이 냈습니까? 혹시 강금원씨나 문병욱씨 같은 기업인이 「스폰서」로 따라 나오지 않았습니까.
『자기가 냈어』
―여러 신문이 洪수석을 「盧武鉉의 부산 인맥」으로 소개했습니다. 최근에 盧대통령을 만난 것은 언제입니까.
『나하고 송기인 신부님하고 친하니까. 그렇게 연결을 시키는 모양이지. 최근에는 盧대통령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2003년 봄 민주당 경선 때 盧武鉉 후보가 직접 문병욱 회장에게 도와달라고 전화를 했고, 수행비서 여택수와 함께 나가서 현금 5000만원을 받아 온 것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盧武鉉 대통령이 받았느냐, 여택수가 받았느냐가 쟁점이 되는 딱한 상황입니다. 정치자금 관리가 영 엉성하고, 질퍽댄다는 느낌을 줍니다.
『돈은 한 창구에서 들어오고 나가야지, 창구가 여러 개 되면 규율이 안 잡히고, 여러 사람이 다쳐요. 돈을 모으고 나눠 주는 게 투명해야 해요. 돈 모으고 집행하는 데 권위와 카리스마가 없으면 당근을 줘도 효과가 없어요. 그리고 내가 이번 4월 총선에 출마한다고 해도, 누가 5000만원 주겠다는 데 나가서 밥 먹고 안 합니다. 그 정도 돈이면 전화 한 통화하고 비서 내보내지. 盧武鉉 후보는 財界와 확실한 줄이 없고, 주변에 진열된 상품도 안 좋으니까, 돈을 제대로, 체계적으로 걷질 못한 거예요』
―진열된 상품이라는 게 무슨 얘기입니까.
『참모 말이오. 盧武鉉 후보를 대신해서 돈 받을 사람이 없는 거야. 李相洙(이상수·민주당 大選 선대위 총무위원장) 의원이 고려大 인맥 등을 동원해서 조금 움직였어요. 安熙正·李光宰 이런 친구들이 3000만원 주면 3000만원 받고, 1억원 주면 1억원 받고, 각설이 수준으로 한 거지』
―젊은 참모들이 너나없이 돈에 손을 댔다든지, 장수천이라는 생수회사를 만들어서 정치자금 조달을 시도했다든지 한 것은, 정치자금과 관련한 경험 부족 때문 아닐까요.
『사람들 바탕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心性(심성)이 훈련받는다고 바뀌나. 강금원이가 盧武鉉씨를 좀 도와줬다고, 「부통령」 소리를 들을 정도로 큰소리를 뻥뻥 쳤잖아. 나도 강금원씨를 잘 알지만, 이 사람은 盧武鉉 대통령을 정치 지도자가 아니라, 친한 「술친구」 정도로 여기고 있는 거요. 그러니까 함부로 하는 거지. 기업인들이 정치자금 냈다고 강금원씨처럼 떠들었으면, 金泳三·金大中씨가 숨도 못 쉬고 살았을 겁니다. 함량 미달인 사람들이 盧대통령 주변에 너무 많아』
―盧대통령은 계속 『내가 불법 모금한 자금이 한나라당의 10분의 1도 안 된다』, 『우리는 티코, 한나라당은 그랜저』라며 위기탈출에 나섰습니다. 상대적으로 깨끗하니까 별 문제가 안 된다는 자세인데.
『盧武鉉씨가 요사이 참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드는데, 불법은 불법이지 무슨 차이가 있어요. 盧武鉉 캠프가 가져온 돈 거절한 것 있습니까. 사람을 죽였는데, 90세 노인 죽인 거하고, 갓난아이 죽인 거하고 무슨 차이가 있어요. 그걸 인정하고 해결책을 찾아야지, 대통령이 그런 자세를 보이면 안 됩니다. 아들이 열 명 있으면 고무신을 열 켤레 사야 되고, 아이가 둘이 있으면 두 켤레만 사면 되는 거예요. 한나라당은 덩치가 크고 돈을 많이 소비하는 정당이고, 민주당은 야당 체질이라 돈이 덜 드는 정당 아닙니까』
―1997년 大選 때 金泳三 대통령이 李會昌씨를 좀 챙겨 줬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돈은 못 주더라도 李仁濟 의원의 탈당 출마는 막아 줄 수 있었지 않나 싶은데.
『오야붕(金泳三 대통령)이 다음 정권 생각할 처지가 아니었어요. 아들 현철이가 구속되고 나니까 정신이 없고, 완전히 기가 꺾여 버렸어요』

―李會昌씨 쪽에서 도와달라는 요청은 없었나요.
『1997년 大選 때 감옥에 있었는데, 李총재 측근이라는 황우려 의원이 변호사 자격으로 한 번 찾아왔고, 李會昌씨 동생 李會晟(이회성)씨가 한 번 찾아왔어요. YS의 직계 중 직계라고 하니까 찾아온 거야. 李會昌씨 그 사람 참 작데. 내가 李會晟씨한테 「YS를 자꾸 쳐다보는데, YS는 李仁濟를 주저 앉힐 힘이 없다. 하지만 아킬레스건을 쥐고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적어도 민주계인 韓利憲 金♥桓(김운환)이는 불러서 국민신당에서 탈당시키겠다. 열흘만 내보내 달라」고 했어요. 李會晟씨가 「알아보겠다」고 하더니 감감 무소식이야』

―洪수석이 갖고 있는 李仁濟의 아킬레스건은 뭐였습니까.
『돈이지. 내가 오라고 하면, 李仁濟씨가 오게 돼 있어요. 金泳三 대통령은 10원 한푼 안 주고, 내가 李仁濟씨 선거를 다 도왔어요. 경기도지사 후보 되는 과정도 어려웠어요. 내가 가서 교통정리를 했지』
―金泳三 대통령은 지금 돈이 좀 있습니까.
『완전히 빈털털이예요. 최근에 어떤 행사를 하고 밥값 300만원이 없다고 해서, 내가 해결해 드린 적도 있으니까. 三水會(삼수회·金泳三씨의 경남高 동창 모임) 회원들이 이제 초대도 안 하고 슬슬 피해요. 金대통령만 오는 게 아니고 경호원 수행원들이 따라 오니까, 밥값이 만만치 않거든』
―金泳三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의 국정 간여가 金泳三 정부 시절 내내 말썽이었습니다. 단속이 안 됐던 겁니까.
『아들 단속을 왜 못하느냐고 하는데, 현철이는 金대통령의 정치적 동지라고 보는 게 정확해요. 대통령의 장성한 아들들이 정치에 몸을 담고 있으면 현철이처럼 돼요. 金大中 대통령 아들 홍업이, 홍걸이도 감옥에 갔잖아. 이 아들들이 아버지 선거를 얼마나 치렀어요. 홍업이는 아버지를 도와서 정치에 개입했기 때문에 감옥에 갈 수밖에 없어요. 정치자금을 받아 놓고 모른 척 할 수가 있나. 홍걸이 문제는 성격이 약간 다르고』
―현철씨는 고향인 경남 巨濟에서 출마한다고 움직이고 있는데, 돈이 있습니까.
『현철이는 돈이 좀 있는 것 같아. 추징당하고 했는데 좀 남아 있는 모양이야』
―洪수석의 재산은 지금 얼마나 됩니까.
『얼마 전에 全斗煥 前 대통령이 내지 않은 추징금이 화제가 됐을 때, MBC 「PD수첩」 취재팀이 나를 취재하러 부산 서대신동의 내 아파트에 내려왔어요. LPG 가스통을 밖에 내놓고 연결해서 쓰는 걸 보더니 별 얘기가 없더라고. 한보사건으로 구속될 무렵 주변에서 「분당집하고 거제의 선산 땅을 남의 명의로 돌려 놓으라」고 해요. 「대한민국 최고권력에 있었고, 국회의원인 사람이 돈 몇 푼에 그런 짓은 못 한다」고 했어요. 검찰이 1997년 말 대법원 판결이 나자마자 분당집, 아버지가 물려주신 巨濟 선산 세 정보를 다 가져갔어요. 나머지는 회수불능으로 면탈됐습니다. 서대신동 아파트가 全 재산입니다』
―법정에서 『내게 들어왔던 돈은 사흘을 멈춰 있지 않았다』, 『개인 치부는 안 했다』고 항변했던데….
『정치자금이 고이면 안 됩니다. 고이면 그걸 자기 걸로 생각하고, 지키려고 딴생각을 하게 되니까요. 정치자금은 내 돈이 아닙니다. 내가 정치자금을 만지면서, 내 동생들, 친척들에게 단 한푼도 돈을 준 적이 없습니다. 매제 심완구는 정치를 하니까 도와준 거고. 내가 청와대 수석할 때 밑에 비서관이 「수석님, 이제부터 총선 준비를 하십시오」라고 해요. 「돈을 좀 모아두라」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왜 선거하려고 돈을 모아 두나」라고 했어요. 1996년 총선 때 회계를 후배에게 맡겼고, 나는 정치자금 들어온 장부도 한 번 안 봤습니다. 「정치자금은 쌓아 두면 안 된다. 없으면 안 쓴다」는 생각으로 살았습니다』

―정치인 金泳三 밑에서 일할 때 洪수석 손을 거쳐간 돈은 얼마나 될까요. 6000억원은 넘겠죠.
『전혀 기억이 없어요(웃음). 정치자금을 시원시원하게 풀었지, 내 손이 이렇게 크잖아. 검사가 「한 호텔 수영장 여자코치에게 당신 수표 300만원이 갔다」고 추궁을 해요. 「내가 제일 존경하는 사람이 시저와 나폴레옹이다. 내가 애인이 있어 돈을 주면 많이 주지, 그렇게 쩨쩨하게는 안 준다」고 했어요. 검사가 더 묻지를 않더라고』
―수감생활 중 고혈압과 심장질환으로 여러 차례 교도소 밖의 민간병원에 입원했는데, 요즈음 건강은 어떠십니까.
『혈압이 한때 220까지 올라갔고, 지금은 정상을 유지하고 있어요. 고혈압 약을 평생 먹어야 해요』
긴 인터뷰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터뷰를 한 방 바로 옆방에 洪수석의 후배 4명이 洪수석을 기다리고 있었다. 洪수석이 『늦었으니 저녁이나 먹고 가라』며 기자를 끌어당겼다. 洪수석은 『정치를 그만두겠다고 얘기했더니, 「이제부터 진짜 잘 모시겠다」는 후배들이 줄을 섰다』며 웃었다.
洪수석은 최근 동대신동 천주교회 신도회의 부회장으로 선임됐다. 그는 『내 일생에서 가장 명예로운 일』이라며 『안양의 「나자로 마을」을 돕는 일도 계속할 것』이라고 했다. 저녁식사가 끝나고, 서울에서 사업을 하는 洪수석의 후배가 밥값을 냈다. 洪수석은 서빙한 여종업원에게 1만원짜리 한 장을 팁으로 건넸다.
헤어지면서 洪 前 수석은 『국민들은 그때그때 시대의 대세를 선택했고, 정치자금은 필요악이었다』면서 『지금 기준으로 옛날을 욕만 하지 말고, 정치인들이 변화된 현실에 빨리 적응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金泳三의 자금 관리인 洪仁吉은 3金시대가 저물어 가는 길목에서 자신의 정치인생을 서둘러 정리하고 있었다.
후배의 승용차에 올라타는 그의 발걸음이 가벼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