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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再開] 孫世一의 비교 評傳 (23)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李承晩과 金九

기독교 국가의 꿈

손세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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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晩은 예수야말로「영혼상, 정치상의 혁명주창자이며, 신약을 읽으면 不知中에 혁명사상을 얻게 되는데, 이는 진리를 얻게 되고 그 진리가 인간을 자유케 하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에 전래된 기독교가 가진 인간해방의 사명을 확신하고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독립과 건국을 꿈꾼다

李承晩은 1912년 3월26일에 두 번째 渡美길에 올랐다.
이때부터 33년 동안 그는 고국 땅을 밟지 못했다. 渡美 도중에 그는 日本에 들러서 가마쿠라(鎌倉)春令會를 주재하고 유학생 대표들을 만났다.
이때에 만난 많은 사람들이 뒷날 民族運動의 지도자가 되었다.
李承晩은 5월에 미네아폴리스에서 열린 국제감리교 총회에 韓國平信徒代表로 참석한 다음 프린스턴大學 때의 은사 우드로 윌슨을 만나, 윌슨이 民主黨 대통령후보로 지명되는
전당대회를 참관했다.
7월부터 半年동안 東部지방을 여행하면서 進路를 모색하던 李承晩은 옥중동지
朴容萬과 하와이 제일감리교회 감리사 와드먼의 초청으로 1913년 2월3일에 하와이로 갔다. 그곳에는 아버지의 사망소식을 알리는 전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李承晩은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105人 사건의 진상을 주제로 한 「한국교회핍박」을 저술했는데, 이 책은 개인구원 중심을 비판하고 社會구원을 강조하는 그의 基督敎 신앙을 잘 드러내고 있다


[편집자 注] 필자 사정으로 2003년 6월호부터 중단됐던 「孫世一의 비교 評傳」을 2004년 신년호부터 재개한다.

孫 世 一
1935년 釜山 출생. 서울大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졸업 후 美國 인디애나 대학 저널리즘 스쿨, 日本 東京大 법학부 대학원에서 修學. 思想界, 新東亞 편집장과 東亞日報 논설위원을 거쳐 1980년 「서울의 봄」 때에 政界에 투신하여, 11·14·15代 국회의원을 역임하는 동안 民韓黨 外交安保特委長, 서울시지부장, 民推協 상임운영위원, 民主黨 통일국제위원장, 國會通商産業委員長, 國民會議 정책위 의장, 원내총무, 韓日議員聯盟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주요 논문으로 「大韓民國臨時政府의 政治指導體系」, 「韓國戰爭勃發背景 연구」, 「金九의 民族主義」 등이 있고, 著書로 「李承晩과 金九」, 「人權과 民族主義」, 「韓國論爭史(編)」, 譯書로 「트루먼 回顧錄(上, 下)」, 「現代政治의 다섯 가지 思想」 등이 있다.
(1) 東京 朝鮮YMCA의 가마쿠라(鎌倉春)令會
1912년 3월30일부터 1주일 동안 가마쿠라(鎌倉)에서 열린 학생대회 참가자들. 李承晩이 중앙에 서 있고, 그의 오른쪽에 해리스(M. Harris) 감독, 왼쪽에 金貞植과 브로크만(F. Brockman)이 서 있다. 유영익,「이승만의 삶과 꿈」(1996)에서.
  李承晩은 1912년 3월26일 오전 9시35분발 부산행 열차편으로 서울을 떠났다. 李承晩은 이날부터 1913년 2월3일에 호놀룰루에 도착할 때까지의 1년 동안의 행적을 그의 「日誌」(Log Book of S. R.)에 다른 어느 해의 것보다 훨씬 자세히 적어 놓았다.
 
  李承晩은 방미길에 도쿄(東京)에 들러서 3월31일부터 4월5일까지 유학생 크리스찬들의 집회를 주관하고 4월6일에 미국으로 떠날 예정이었다. 이 유학생집회는 서울 YMCA와 도쿄의 朝鮮基督敎靑年會(朝鮮YMCA)가 공동으로 계획한 것이었다. 이 집회에 참가하기 위하여 서울YMCA의 질레트(Philip L. Gillet: 한국명 吉禮泰) 총무와 종교부 간사 李商在와 감리교선교사 크램(Willard G. Cram: 한국명 奇義男)이 李承晩과 동행했다.
 
  오후 7시에 부산에 도착한 일행은 한 시간 뒤에는 현해탄을 건너는 「메고카 마루」에 몸을 싣고 있었다. 이튿날 오전 8시에 시모노세키(下關)에 상륙할 때에는 비바람이 몰아쳤다. 일행은 오전 9시30분에 시모노세키를 떠나 낮 12시30분에 교토(京都)에 도착했다.
 
 
 
 日本YMCA 관계자들이 역에 마중나와
 
  교토역에는 YMCA 국제위원회에서 파견된 펠프스(G. L. Phelps)와 일본YMCA 총무 및 또 한 사람의 일본인이 마중나와 있었다. 도쿄(東京)로 가는 한 한국학생과 그의 가족이 호텔까지 동행했는데, 그 호텔은 일본YMCA 사람들이 일행을 위하여 잡아놓은 것이었다.
 
  李承晩 일행은 3월28일 하루 동안 교토를 관광하고 그곳 목사들과 YMCA관계자들의 친절한 대접을 받았다. 교토는 794년부터 1869년까지 천년 넘어 日本의 수도였던 유서 깊은 도시이다. 그런데 교토의 일본기독교 관계자들의 이러한 환대는 李承晩의 출국이 반드시 총독부에 검거될지 모른다는 절박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탈출이었던 것만은 아니었음을 말해 준다.
 
  오후 8시20분발 야간 열차편으로 교토를 떠나 도쿄의 신바시(新橋)역에 도착한 것은 3월29일 오전 9시.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역에는 한국학생 23명이 마중 나와 있었는데, 학생들은 李承晩이 전날 밤에 도착하는 줄 알고 100명이 넘는 학생들이 전날 밤에 역에 나왔다가 섭섭해하면서 돌아갔었다고 말했다.
 
  李承晩은 朝鮮YMCA회관 근처에 있는 「히요시캉」(日芳館)이라는 일본여관에 여장을 풀었다. 저녁에 YMCA회관에서 열린 환영회에는 67명의 한국 유학생들이 모였다. 이처럼 많은 유학생들이 모였다는 사실은 105人 사건 등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국내 사정과 함께 李承晩에 대한 유학생들의 관심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환영회는 白南薰이 사회를 하고 趙鏞殷(호는 素昻)이 환영 연설을 했다. 趙素昻(조소앙)은 뒷날 임시정부의 國務院 秘書長, 外務總長 등으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 기간 내내 李承晩과 관련을 갖게 된다.
 
 
 
 金貞植이 東京 朝鮮YMCA 발족시켜
 
  도쿄의 朝鮮YMCA는 李承晩의 옥중동지인 金貞植이 총무를 맡아 일하고 있었다. 皇城基督敎靑年會(서울YMCA)의 부총무였던 金貞植이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일본에서 YMCA를 결성하기 위하여 도쿄로 파견된 것은 乙巳條約이 늑약된 이듬해인 1906년 8월이었다. 金貞植은 한국공사관이었던 건물에 머물면서 석 달 동안 준비하여 11월5일에 東京朝鮮基督靑年會를 발족시켰다. 처음에 김정식이 역점을 두었던 프로그램은 성경연구반의 운영이었다. 성경연구반은 몇 달 사이에 큰 성과를 거두어 유학생 가운데에서 기독교신자가 급속히 늘어났다. 그리하여 日本YMCA회관의 2층 방 하나를 빌려 발족한 도쿄 조선YMCA는 1907년 8월에는 간다구(神田區) 니쇼가와쵸(西小川町)의 한 건물을 빌려 독립회관을 마련했다. 이 회관에는 교실, 성경연구실, 독서실, 운동실 등이 있어서 유학생들의 집결장이 되었다.1) 그리하여 1909년 1월에는 그때까지 이런 저런 인연에 따라 湖南契, 洛東親睦會 등 주로 친목을 목적으로 조직되어 있던 다섯 개의 유학생 단체들이 통합하여 大韓留學生會를 조직했고, 얼마 뒤에 유학생회는 이름을 大韓興學會로 바꾸었다. 도쿄 조선YMCA의 산파역을 했던 질레트는 이 무렵의 대한흥학회와 도쿄 조선YMCA의 관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종교집회는 주일 밤마다 열렸는데, 평균 81명의 유학생이 모였다. 그리고 일반 유학생단체인 大韓興學會는 매주 토요일에 모였다. … 509명의 유학생 가운데에서 213명이 기독교신자가 되었으며, 대한흥학회의 회장과 부회장, 「興學會報」의 편집인 등이 모두 크리스찬이었다.〉2)
 
  그러나 大韓興學會는 日本당국의 방해로 오래지 않아 해산되고, 유학생들은 출신 도별로 다시 친목회를 결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속에서도 도쿄 조선YMCA는 총독부의 온갖 회유와 압력을 받고 있던 서울YMCA와는 달리 활발히 성장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李承晩이 들렀을 때에는 자체 건물을 건립하는 일이 당면 과제가 되고 있었다.
 
 
 
 가마쿠라(鎌倉) 春令會의 議長이 되어
 
  도쿄의 조선YMCA가 주최한 學生春令會(Student’s Spring Conference)는 3월30일부터 1주일 동안 가마쿠라(鎌倉)에서 열렸다. 가마쿠라는 도쿄에서 남쪽으로 약 97km 떨어진 太平洋 연안의 아름다운 도시로서, 가마쿠라 바쿠후(鎌倉幕府: 1185∼1333)시대의 일본의 정치와 군사의 중심지였다.
 
  李承晩은 이때의 가마쿠라 春令會에 대해 YMCA 국제위원회에 자세히 보고하고 있다.
 
  회의는 30일 오후 7시에 개막되었다. 유학생 44명과 서울에서 참가한 질레트와 크램과 李商在, 그리고 도쿄의 朝鮮YMCA총무 金貞植과 부총무 崔相浩와 몇몇 내빈이 참석했다. 崔相浩는 서울YMCA가 1911년의 松都夏令會가 끝난 뒤에 도쿄로 파견한 청년지도자였다.
 
  李承晩은 회의의 의장으로서 개막연설을 했다. 그는 장래의 한국사회의 지도자가 될 유학생 크리스찬들을 상대로 松都夏令會 때보다도 더욱 열성적으로 집회를 이끌었다. 회의는 활기에 넘쳤다. 참석자들은 운동장에서나 식당에서나 잠자리에서나 오후에 산책을 할 때에나 신앙심을 바탕으로 한 일체감과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이 부르는 찬송가 소리에 이끌려 동리 주민들이 창가로 모여들기도 했다.
 
  집회의 가장 중요한 프로그램은 아침 성경공부였다. 학생들의 성경공부 태도는 진지했다. 그들은 성경의 요지를 노트할 뿐만 아니라 학습과제를 예습하여 다음날 아침에 대답할 수 있도록 했다.
 
  성경연구와 함께 기도시간을 엄수했다. 집회 도중에 사회자가 공동기도를 요청하면 두세 사람씩 앞을 다투어 기도를 했다.
 
  다음으로 중요한 프로그램은 토론시간이었다. 기독교 사업에 관한 여러 가지 문제가 다루어졌다. 「내가 학생들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라는 주제가 제시되자 학생들은 열띤 토론 끝에 한 주일에 몇 시간만이라도 친구들에게 기독교 운동을 권면하는 일에 바쳐야 한다는 데에 의견이 모아졌다. 한 학생이 일어서서 『나는 기독교 신앙에 초보자이지만 매 주일날 오후를 주님의 일을 위하여 바치겠다』는 결심을 피력했다. 그러자 다른 여섯 명이 이 일에 동조하고 나섰다. 그렇게 해서 學生福音傳道團(The Student’s Gospel Band)이 조직되었다.3)
 
  가마쿠라 春令會는 큰 성공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李承晩 개인으로서도 또 하나의 매우 뜻있는 성취였다. 이때부터 도쿄 조선YMCA는 해마다 봄이나 가을에 한 차례씩 정기적으로 이러한 학생 집회를 가지게 되었는데, 집회 때마다 가마쿠라 춘령회와 李承晩이 화제가 되었을 것이다.
 
 
 
 『韓國學生들에게 거는 기대』
 
  李承晩 일행은 4월6일 오전 8시에 가마쿠라를 떠나 도쿄로 돌아왔다. 도쿄에서는 유학생친목회 대표 24명이 李承晩 일행을 위한 환영회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李承晩 일행과 학생대표들은 비를 맞으면서 호텔 현관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李承晩은 연회가 끝나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왜냐하면 오후 2시에 아오야마 가쿠잉(靑山學院)에서 거행되는 혼다 요이치(本多庸一) 감독의 장례식에 참석해야 했기 때문이다. 李承晩이 일본의 한국병탄을 위해 노력했던 일본 감리교 감독의 장례식에 참석한 것은 자기의 출국을 도와준 감리교 동북아시아 책임자 해리스(Merriam C. Harris) 등 미국 선교사들의 권유에 따른 것이었을 것이나, 이 시기의 韓·日 양국의 기독교 지도자들의 미묘한 관계를 상징적으로 말해 준다. 장례식에는 李商在도 물론 참석했을 것이다.
 
  장례식에서 돌아온 李承晩 일행은 崔相浩가 준비한 저녁을 들고 나서 도쿄 조선YMCA회관으로 갔다. 그곳에서는 오후 7시부터 유학생들을 상대로 한 특별전도강연회가 열렸는데, 218명이나 되는 학생들이 모였다. 비좁은 건물이었으므로 뜰에까지 서야 할 형편이었다. 크램과 질레트의 간단한 연설에 이어 李承晩이 「韓國學生들에게 거는 기대」라는 제목으로 연설을 했다. 李承晩은 愛國과 기독교 신앙의 불가분의 관계에 대하여 설명했다. 그는 국내에서의 학생YMCA운동과 105人 사건의 실상을 자기의 체험을 곁들여 그 특유의 선동적인 웅변으로 설명했을 것이다. 장내는 구국적 신앙의 열기로 가득 차게 되었다. 李承晩의 연설에 감동하여 閔圭植 등 양반 출신 유학생들이 기독교 신자가 되기를 결심하기도 했다. 다음날 주일 아침에는 도쿄 교회에서 10명이 세례를 받았고, 36명이 학습교인이 되었다.
 
 
 
 東京YMCA會館 建立基金 모아
 
   李承晩의 연설로 고조된 분위기를 놓치지 않고 金貞植 총무는 도쿄 조선YMCA의 회관 건축을 위한 모금계획을 보고하고, 참석자들의 협조를 호소했다. 총비용으로 3만4450엔(円)을 계상하고 있었는데, YMCA국제위원회가 이미 보조금 2만엔을 책정해 놓고 있었다. 그러나 이 보조금을 타내기 위해서는 도쿄 조선YMCA 자체의 모금이 확보되어야 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167명이 기부금을 희사할 것을 신청하여 그 자리에서 1362.5엔이 모금되었다. 집회가 있고 나서 사흘 뒤인 9일에는 박태규라는 학생이 YMCA 사무실로 찾아와서 60엔을 기부하기도 했다.4) 李承晩에 의한 이러한 도쿄 조선YMCA의 자체 모금은 주저하고 있던 국제위원회의 결단을 촉구하는 큰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짧은 일본 체류기간에 보여준 李承晩의 활동과 그 영향은 놀라운 것이었다. 이때에 李承晩의 강연을 들었거나 직접 만나서 민족의 장래를 의논했던 유학생들 가운데에는 3·1 운동 때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뒤이어 임시정부 활동을 포함한 국내외의 여러 분야의 민족운동 과정에서 중추적 역할을 한 사람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한 일본 경찰 출신 인사는 이때에 李承晩이 도쿄에 있는 유학생들과 침식을 같이하면서 그들에게 反日的民族獨立思想을 고취하고, 留日中華YMCA 회관을 빌려 니토베 이나조(新渡戶稻造) 박사와 함께 강연회를 열어 민족독립운동을 선동했다고 적고 있다.5) 니토베는 미국과 독일에 유학한 기독교인이자 일본의 대표적인 자유주의 사상가로서 젊은 지식인층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었고, 일본 정부의 식민지 정책에도 비판적이었다. 李承晩이 이러한 니토베와 함께 한국인 유학생들을 상대로 강연회를 가졌던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주목할 만한 일이다. 이때에 도쿄 조선YMCA에 드나들던 유학생들은 曺晩植, 宋鎭禹, 李光洙, 安在鴻, 申翼熙, 崔麟, 趙鏞殷, 金炳魯, 玄相允, 李仁, 田榮澤, 尹白南, 金弼禮 등을 포함하여 50~6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李仁은 뒷날 이 무렵에 일본에 있던 한국유학생들은 한국이 나라를 잃은 까닭은 국제적으로 진출하지 못하여 국제적 발언권이 없는 데도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터라 국제적 인물인 李承晩에게 많은 존경을 보냈고 그에게 막연하나마 큰 기대를 걸었던 것이라고 회고했다.6)
 
  李承晩이 떠나자마자 지역별로 조직되어 있던 일곱 개의 친목회가 모여 七親睦會聯合會를 결성하고 그 해 10월에는 그 명칭을 東京朝鮮人留學生學友會로 개칭했다. 그것은 大韓興學會가 해산된 지 3년 만에 통합적인 유학생 조직이 재건된 것이었다. 그리고 도쿄 조선YMCA와 學友會는 興學會 때와 같은 긴밀한 유대관계를 되살리게 되었다.
 
 
  (2) 미네아폴리스의 감리교 총회
 
  李承晩은 해리스 감독과 함께 4월10일 오전 11시에 요코하마(橫濱) 항에서 미국행 기선 「탄바마루(丹波丸)」 1등칸에 올랐다. 예정보다 나흘 더 도쿄에 머문 셈이다. 배는 오후 2시에 출항했다. 金貞植, 崔相浩, 閔忠植이 요코하마 부두에까지 나와서 배웅했다. 서울 주재 일본 감리교회 목사도 배웅을 나왔다. 그는 李承晩에게 6개월 이내에 반드시 귀국해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미국에 머무는 동안 日本人들을 비판하는 일은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런 일은 한국인들에게 피해를 입히게 된다는 것이었다.7) 그러나 李承晩은 자신의 귀국이 그다지 쉽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귀국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내키지 않는 타협적 행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해리스와 論爭하며 고독하게 航海
 
  항해 도중에 李承晩과 해리스는 일본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매번 해리스가 말을 꺼내었다. 그는 李承晩이 일본의 한국 지배 현실을 받아들일 것을 거듭 권고했다. 李承晩은 해리스를 설득하려고 해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해리스와의 논쟁에서 번번이 먼저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을 했다는 사실 자체는 李承晩이 귀국을 포기하고 있지 않았음을 말해 준다.
 
  4월17일 수요일에 날짜변경선을 지났다. 그리하여 또 하루의 수요일을 보냈다. 〈사흘 동안 심한 폭풍을 만났다. 그러나 나는 내내 혼자 여행을 즐겼다〉8)라는 「일지」의 짤막한 문장은 두 번째로 태평양을 건너는 李承晩의 고독한 심정을 짐작하게 한다.
 
  두 수요일을 포함하여 15일을 항해하는 동안 눈에 들어오는 것이라고는 물밖에 없었다. 24일 아침에야 일본으로 돌아가는 「가마쿠라 마루(鎌倉丸)」가 보였다. 이 때에 단파 방송을 통하여 「타이타닉(Titanic)」호가 침몰했다는 뉴스를 들었다. 대형 호화 여객선 「타이타닉」호의 침몰은 사망자 1513명을 낸 20세기 최대의 비극적인 海難事件이었다.
 
  이승만과 해리스는 4월25일 오전 9시 30분에 캐나다의 빅토리아 항에 상륙했다. 연결 배편 때문에 두 사람은 거기에서 한나절을 기다려야 했다. 두 사람은 시내를 걷기도 하고 편지도 쓰고 시내의 한 호텔에서 점심을 먹었다. 배는 오후 5시에 떠나서 타운전드(Townsend) 항에 도착했으나 검역 의사가 오지 않아서 밤새껏 정박했다가 이튿날 오전 6시30분에야 시애틀을 향해 떠났다. 시애틀에 상륙한 것은 오전 10시. 두 사람은 그곳 YMCA회관에 방을 예약해 놓았었는데, 李承晩은 그곳에서 홀(Ernest F. Hall) 목사를 만났다.
 
  홀은 李承晩을 프린스턴으로 가게 주선해 주었던 선교사였다. 홀은 이곳의 한 여성 해외선교모임에 연사로 초청되어 와 있었다. 그는 李承晩을 그의 오찬장으로 초대했다. 거기에는 200여 명의 여성들이 모여 있었다. 홀은 자기 청중들에게 李承晩을 소개했고, 李承晩은 즉석연설을 했다. 어떠한 연설 기회도 소홀히 하지 않는 李承晩으로서는 오랜만에 만나는 미국인 청중, 그것도 여성 청중 앞에서 흥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집회가 끝나자 한 일본인 교회의 定礎式(정초식)이 있었다. 李承晩은 거기에서 시애틀에 사는 李昊宇를 만나 점심을 같이했다.
 
 
 
 會議시작 2시간30분 전에 도착
 
  李承晩은 오후에는 해리스와 함께 제일감리교회의 레오나드(Leonard) 목사를 방문했다. 레오나드는 두 사람을 자동차에 태워 시내를 구경시키면서 일요일 아침예배를 보고 가라고 권했다. 일요일 아침에 李承晩과 해리스는 이 교회의 주일학교에서 강연을 했다. 1000명 가량 되는 사람들이 모였는데, 두 사람은 일본인 반을 포함한 두 반에서 강연을 했다. 오전 11시 예배에는 1500명 가량의 신도들이 모였다. 두 사람은 레오나드 목사 집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 7시에 「노던 퍼시픽(Northern Pacific)」 열차 편으로 미네아폴리스를 향해 떠났다.
 
  李承晩과 해리스가 미네아폴리스에 도착한 것은 5월1일 오전 7시30분이었다. 10시에 개막된 제26차 감리교회 대표자총회(The Twenty-Sixth Delegated General Conference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는 미국의 각 지방을 포함한 135개 선교지역에서 600명이 넘는 교직자 및 평신도 대표가 참가한 방대한 규모의 국제회의였다. 외국에서는 한국, 필리핀, 멕시코, 라이베리아, 스위스 및 북유럽 3국 등과 같이 국가 단위로 대표를 파견하기도 했고, 중국, 인도, 독일 등과 같이 한 나라에서도 선교지역별로 여러 곳에서 대표를 따로 따로 파견하기도 했다. 日本에서는 대표를 파견하지 않았다. 외국 대표단은 거의가 교직자 1명과 평신도 대표 1명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美國 안에서는 州별로 교세에 따라 많게는 16명 내지 18명의 대표가 참가한 州도 있었다.
 
  회의는 감독과 선교 감독 등 다섯 분야 책임자들의 선거가 예정되어 있어서 술렁거렸다. 비밀투표가 실시되기 전에 많은 비공식적인 막후 토론이 있었다.
 
  한국의 교직자 대표로는 노블(William A. Noble: 한국명 魯普乙)이 참가했는데,9) 李承晩은 노블과 같은 방을 쓰도록 배정되어 있었다. 노블은 李承晩이 배재학당에서 맨 처음 만난 외국인 선교사였다. 李承晩이 영어를 맨 처음 배운 사람도 노블이었다. 회의는 총회와 17개 상설(분과)위원회로 개최되었는데, 회의록에는 李承晩과 노블이 司正위원회를 제외한 16개 위원회의 한국대표로 이름이 올라 있다.
 
 
 
 노블이 선교사들의 秘密作業 알려 주어
 
   李承晩과 노블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승만이 배재학당 시절에 노블에게서 처음 배운 영어문장은 “His father told him to go Pai-jai and study chemistry.(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培材學堂에 가서 化學을 공부하라고 말했다)”라는 것이었다. 적이 의아스러운 이 문장을 李承晩은 이때까지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李承晩은 노블에게 왜 처음 영어를 배우는 학생들에게 그러한 이상한 문장을 가르쳤느냐고 물어보았다. 노블도 그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그때 나는 마침 化學시간을 맡게 되어 학생들을 끌어 모으려고 그랬던 거요』10)
 
  노블은 그동안 친일적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그러나 그것은 터무니없이 잘못된 것이었다. 李承晩과 노블은 한국의 정치와 기독교회의 현황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느 날 저녁에 노블은 李承晩에게 타이프라이터로 친 비밀문서 하나를 보여 주었다. 내용은 요 몇 해 사이에 몇몇 선교사들이 中國에 파견되었는데, 표면상으로는 中國의 文盲退治를 돕기 위하여 中國人에게 간편한 한글 자모를 보급시키는 것을 표방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한국감리교회를 일본교회에 병합시키려는 기도를 저지하기 위하여 한국교회를 北中國會議(North China Conference)에 통합하는 일을 추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李承晩에게는 눈이 번쩍 뜨이는 놀라운 소식이었다. 또한 그것은 사람이 얼마나 잘못 판단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기도 했다.11)
 
  한국 감리교회가 중국에 선교사를 파견하여 한글 자모를 가르쳤다는 것은 매우 흥미 있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느 정도로 사실이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한국 감리교회가 中國에 한국인 선교사를 파견한 것은 1911년에 孫貞道 목사를 北京(베이징)에 파견하여 中國語를 배우게 했다가 이듬해에 하얼빈으로 옮겨 선교사업을 시작하게 한 것이 처음이었다.12)
 
  어느 날 저녁 회의에서 돌아오자 노블은 李承晩에게 같이 기도하자고 말했다. 기도를 마치자 노블은 해리스 감독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해리스가 일본사람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그들을 과신하고 있다면서 李承晩에게 그를 조심하라고 말했다.
 
 
 
 『한국인이 日本憲法 아래에서 살게 된 것은 축하할 일』
 
  해리스의 韓·日 양국교회의 관계에 대한 인식과 태도는 총회에서 행한 그의 보고 연설에 잘 나타나 있다. 총회에서는 유럽, 아프리카, 日本 및 韓國, 中國, 南아메리카, 南部아시아, 멕시코의 7개 외국 선교지역 감독들이 각자의 임지 상황에 대한 보고를 했는데, 해리스는 그의 보고에서 日本의 한국 병탄 이후의 양국교회 관계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지난 4년 동안에 日本과 韓國 사이에는 정치적 합병(union)이 있었습니다. 1910년 8월29일에 있었던 일인데, 두 나라는 합병하여 이제 日本憲法 아래에서 한 帝國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東北아시아와 西洋世界에 심대한 파급효과를 갖는 것이기 때문에 세계가 깊은 관심을 가졌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韓國에서의 우리 선교사의 지위에 중요한 관계를 갖는 것이므로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물으실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가 한국 감리교회와 일본 감리교회의 관계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인가?』라고. 나는 이 점에 관한 여러분의 의문에 대하여 쉽게 답할 수 있는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일본 감리교회를 조직할 때에 일본 감리교회와 우리 대표들이 협약을 맺은 것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앞으로 세 감리교 선교단은 선교사업이나 다른 어떤 사업도 일본 감리교회와 연계를 맺지 않고는 추진하지 않으며, 또 일본 교회는 일본 본국과 한국에 있는 모든 일본인에 대하여 관할권을 갖는 한편 美國과 캐나다 영내에 있는 日本人에 대해서는 선교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한국 감리교회와 우리의 관계는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며 앞으로 오랫동안 그렇게 될 것입니다.
 
  최근에 일본에서 열린 총회에서 이 문제는 어떤 새로운 토의가 필요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일본 감리교인들은 앞으로도 과거와 같은 관계가 지속되기를 희망합니다. 왜냐하면 두 감리교회가 같은 帝國 안에 있게 되더라도 별개의 것으로 존속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言語의 차이 및 또 다른 이유들 때문에 하나의 조직체로 통합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일 것입니다. 나는 이 두 교회와 선교단의 관계는 처음부터 가장 친밀하고 화기에 찬 것이었다고 총회에 보고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들은 현실적으로 가능한 한 협동해 왔고, 앞으로도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하는 사업을 해 나가는 데 실질적으로 협력해 나갈 계획들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분명히 우리는 앞으로도 마치 두 나라 사이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던 것처럼 한국에서 우리의 활동을 계속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모든 기독교인들이 같은 憲法― 완전한 종교적 자유를 보장하고 기독교인들의 활동과 예배를 보호해 주는 헌법 아래에서 살게 되었음은 축하할 만한 일입니다.〉13)
 
  아무리 선교정책상의 배려에서 한 발언이라고 하더라도 이 시기의 제국주의 일본의 헌법이 완전한 종교적 자유를 보장하고 기독교인들의 활동과 예배를 보호해주는 헌법이며, 따라서 한국인들이 일본인들과 같은 헌법 아래에서 살게 된 것이 축하할 만한 일이라고 한 것은 모멸적인 언사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때에 해리스가 日本의 憲法을 거론한 것은 憲法이 國家의 主權을 상징하는 최고의 권위라고 생각하는 美國式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李承晩을 韓國敎會의 상징적 인물로 소개
 
  해리스의 보고에서 언급한 일본 감리교회를 조직하던 때란, 1907년 5월에 아오야마 가쿠잉(靑山學院)에서 열린 감리교회 3파합동총회에서 혼다 요이치(本多庸一) 목사를 제1대 감독으로 선출하던 때를 말하는 것일 것이다.14)
 
  한편 해리스는 한국교회의 신앙운동을 자세히 소개하면서 한국은 머지않아 基督敎國家가 될 것이라고 보고했다. 그러면서 한국교회의 상징적인 존재로 李承晩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지난 3월에 열린 우리 교회의 평신도대표 선출회의에서 이 총회에 파견할 최초의 대표를 선출했습니다. 이 사람은 이 곳에 참석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은총을 입은 대표적 인물입니다. 그는 한국의 갱생을 위하여 모인 애국자 집단의 일원이었습니다. 그들은 투옥되었고, 그곳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생명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이 형제는 그의 출생지인 서울의 감옥에서 7년이라는 긴 세월을 보냈습니다. 7개월 동안 그의 발목에는 착고가 채워져 있었고, 손은 묶여 있었으며, 목에는 잔혹스러운 나무칼이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는 사형선고를 받았고, 그의 아버지는 감옥으로부터 몇 번이나 아들의 사형집행 이후에 시체를 찾아가라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다행히도 이 젊은이는 培材學堂의 학생시절에 福音을 들었고, 비록 그때에는 기독교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감옥에 있던 암담한 시기에 그의 생각은 유일한 희망으로 그리스도를 향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그와 함께 같은 죄목으로 투옥되었던 40여 명의 사람들이 기독교에 입교했습니다. 7년 뒤에 그는 감옥에서 석방되었습니다. 그는 곧 미국으로 왔고, 미국의 여러 학교에서 자기 나라를 위하여 새로운 일을 하게 될 새 사람이 되기에 적합한 학업을 이수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버드대학교의 졸업에 따른 석사학위, 프린스턴대학교의 시험에 따른 박사(Ph. D)학위를 취득해 가지고 2년 전에 귀국했습니다. 그는 고국에 돌아가자 당장 YMCA 총무로서 열성적으로 일했고, 또한 그는 우리 감리교 주일학교의 감독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한국 기독교인들은 이 회의에 참가할 평신도 대표의 선거권을 갖게 된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하고, 그들의 형제 李承晩 박사를 최초의 대표로서 만장일치로 선출했습니다.〉15)
 
 
 
 총회 분위기에 실망해
 
  이렇게 소개된 李承晩에게 회의에 참가한 여러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뒷날 李承晩의 구술을 바탕으로 하여 집필된 올리버나 徐廷柱의 李承晩傳記는, 회의에서 李承晩은 아시아의 平和를 위해서는 韓國의 自主獨立이 필요하고 世界의 기독교 교도들은 단결하여 그 일을 실천해야 한다는 요지의 연설을 했으나 그것이 일본 점령 아래에서 수행되어야 할 선교 활동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라고 하여 엄중한 비판을 받았다고 적고 있다.16)
 
  이승만이 분과위원회 같은 데에서 비슷한 취지의 발언을 한 것은 아마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회의록에는 그러한 기술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발언 내용과 관련해서는 미심쩍은 점이 없지 않다. 왜냐하면 李承晩 자신이 자서전 초록에서 노블이 해리스에 대하여 「중대한 이야기」를 들려 주면서 『그것은 당신 책임이요』라고 말했고, 자신은 총회 지도자들로부터 오해를 받았다고 적고 있기 때문이다.17)
 
  총회는 폐막에 앞서 앞으로 東아시아 중앙회의(Central Conference for Eastern Asia)가 구성되면 한국교회와 일본교회를 합쳐서 이 기구에 소속시킨다고 결의했던 것 같다.18) 이 문제와 관련하여 이듬해 봄에 서울에 있는 한국 감리교회의(Korean Methodist Conference) 소속 세 감독이 北중국 교회와 일본교회의 합동회의라는 이름으로 회합을 가졌다고 한다.19)
 
  이러한 총회의 분위기가 李承晩으로서는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었을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회의가 끝날 때까지 실질적으로 후견인격인 해리스와 행동을 같이하고 있는 것은 귀국 문제 등을 두고 李承晩이 많은 고심을 하고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 올리버는 이때에 서울에서 연희전문 학장 언더우드(Horace Underwood) 목사가 교수 자리를 제안하는 편지를 보내와서 李承晩은 언더우드에게 일본당국이 안전을 보장한다면 귀국할 의사가 있다는 답장을 보냈으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적고 있다.20)
 
 
 
 떠나는 날 젊은 女性과 테니스 즐겨
 
  회의 도중인 5월11일 토요일에 李承晩은 해리스와 함께 미네아폴리스에서 190km 가량 떨어진 위노우너(Winona)에 가서 주말을 보냈다. 위노우너는 미시시피 강가에 위치한 아름다운 도시인데, 그곳 제일감리교회의 초청을 받은 것이었다. 이튿날인 12일 주일에 두 사람은 아침 예배부터 시작하여 주일학교와 저녁 예배와 엡워드협회 모임에서 잇달아 연설을 했다. 그리고 월요일에 미네아폴리스로 돌아왔다.
 
  또 두 주일 뒤인 5월25일에는 李承晩은 미네아폴리스에서 5km 가량 떨어진 단디스(Dundes)라는 조그마한 도시의 두 교회에서 설교를 하도록 초청받았다. 그를 초청한 사람은 로버츠(G.W. Roberts)라는 젊은 영국인 목사였다. 李承晩은 26일 주일에 설교를 하고 그 날로 미네아폴리스로 돌아와서 저녁에는 아동복음전도회(Children’s Gospel Mission)에서 또 설교를 하고 있다.
 
  李承晩은 총회에 참가한 미국인들 가운데에서도, 학창시절에 그랬듯이, 특히 젊은 여성들의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던 모양이다. 총회는 29일에 폐막되었고, 李承晩은 해리스와 함께 그 날 오후 7시55분발 「노스웨스턴」기차 편으로 시카고로 떠났는데, 바로 그 날 미네아폴리스에 사는 앤드루스(A.C. Andrews)라는 사람의 딸과 테니스를 치고 자동차 드라이브를 하고 있다.21)
 
 
  (3) 시거트의 州知事별장에서 윌슨 만나
 
  李承晩이 미국으로 떠날 때부터 가장 기대했던 일은 프린스턴 대학시절의 은사인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을 만나는 것이었다. 1910년에 民主黨에 영입되어 뉴저지州 知事로 당선된 윌슨은 과감한 革新政治를 실행함으로써 전국적인 평판을 얻어 일약 1912년 대통령선거의 유력한 후보로 급부상했다.
 
  시카고에서 나흘 밤을 묵은 李承晩은 6월3일에 시카고를 떠나 4일 오후에 필라델피아에 도착했다. YMCA에 숙소를 정한 그는 다음날 윌슨의 딸 제시 윌슨(Jessie Wilson)을 만나서 윌슨 지사와의 면담을 주선해 줄 것을 부탁했다. 이승만과 제시는 프린스턴 대학시절에 연애감정에 빠진 일이 있을 만큼 서로 친하게 지냈었다고 한다.22) 윌슨은 6월25일로 박두한 민주당 대통령후보 지명대회를 앞두고 몹시 분주한 때였으나, 제시는 면담을 주선해 보겠다고 약속했다.
 
 
 
 출판된 博士學位논문 들고 윌슨 찾아가
 
   李承晩은 제시의 회답을 기다리는 동안 여행을 계속했다. 6월8일에는 필라델피아를 떠나 메릴랜드의 포우크머크 시티로 갔다. 머클로(W.J. MacCullough)가 역에 마중을 나왔고, 이튿날 주일에는 그곳 장로교회에서 강연을 했다고 그의 「일지」는 적고 있다.
 
  필라델피아에서 2주일 동안 머문 李承晩은 6월18일에는 프린스턴으로 갔다. 첫날 저녁은 「알렉산더 홀」의 게스트 룸에서 자고, 이튿날 같은 홀의 A룸으로 옮겼다. 이 때부터 이듬해 1월에 하와이로 떠날 때까지 프린스턴은 그의 활동 근거지가 되었다. 李承晩이 프린스턴으로 간 것은 그의 학위논문 「美國의 영향을 받은 중립(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이 대학 출판부에서 출판되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120쪽밖에 되지 않는 얄팍한 책이었으나 학위논문이 출판된 것은 거취문제로 고민하던 李承晩에게 크게 용기를 주는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도착한 이튿날인 19일에 출판을 주선해준 웨스트(Andrew F. West) 학장으로부터 책 50부를 받아 든 李承晩은 그 길로 뉴저지州의 시거트(Sea Girt)로 갔다. 시거트는 주지사의 여름별장이 있는 곳인데, 그곳에 머물고 있던 윌슨이 이승만을 그곳으로 오라고 한 것이었다.
 
  李承晩은 그 날 저녁에 윌슨을 만났다. 윌슨이 대통령후보 지명대회를 앞둔 바쁜 일정 속에서도 李承晩을 만난 것은 李承晩 개인에 대한 호의도 호의지만 대통령후보로서의 외교정책 공약 등과 관련하여 東아시아 정세에 대한 李承晩의 견해를 한번 들어보겠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의 대화 내용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徐廷柱의 「李承晩博士傳」이 유일하게 대화 내용을 기술하고 있는데, 서정주는 李承晩의 두 번째 미국行의 동기 자체가 감리교 총회에 참가하는 것보다도 윌슨을 만나서 한국의 실정을 설명하고 한국의 해방을 위하여 그의 협력을 얻는 데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었다고 했다. 그리하여 李承晩은 윌슨을 만나자 한국의 해방을 세계에 호소하는 성명서를 만들고자 하니 거기에 同意署名을 해달라고 요청했고, 이승만의 이러한 요청에 대하여 윌슨은 다음과 같은 말로 정중히 거절했다는 것이다.
 
  『나 개인으로서는 거기에 물론 서명해드리고도 싶소. 서명할 뿐만 아니라 당신의 일을 도와주려고도 하오. 그렇지만 미국의 정치를 위해서는 아직도 내가 당신의 성명에 도장을 찍을 때는 아니오. 그러나 이제 우리가 같이 일할 때는 반드시 올 것이니 그것을 믿으시오. 그렇지 않아도 나는 벌써부터 당신의 조국 한국을 포함한 모든 약소민족 국가들의 일을 생각해 오고 있는 중이오』
 
  이러한 윌슨의 대답에 대하여 李承晩은 한번 더 그의 요구를 간청했다고 한다.
 
  『현상유지의 정치보다 正義人道의 미래를 위하여 나의 편이 되어 주시오』
 
  그러자 윌슨은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물론이오. 그렇지만 모든 일의 해결에는 그 적당한 때가 있는 것이오. 하여간 내 당신의 갸륵한 뜻을 명심해 두리다』23)
 
  그러나 이러한 기술은 비록 그것이 이승만의 구술을 토대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윌슨이 이때에 美國 大統領이었다고 적고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많이 과장된 것이다. 徐廷柱는 윌슨이 李承晩에게 지방 순회 강연을 할 수 있도록 여러 사람을 소개해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덧붙였다.
 
  『이승만씨! 당신은 나 한 사람의 도장을 받을 생각을 하지 말고, 미국 국민들의 마음의 도장을 모두 받도록 하시오』
 
 
 
 볼티모어에서 열린 民主黨 대통령후보 지명대회
 
  이튿날 李承晩은 제시 윌슨을 다시 만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李承晩이 프린스턴 대학교를 졸업한 뒤에 고국으로 돌아가 일본의 무단통치 아래에서 고통받는 한국을 기독교 국가로 만들기 위하여 열성적으로 활동했던 이야기는 제시 윌슨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시거트를 떠나 프린스턴으로 돌아온 李承晩은 바로 뉴욕을 거쳐 노스필드로 향했다. 노스필드는 그가 조지워싱턴대학교 재학시절에 「만국학도공회」(국제학생회의)가 열렸을 때에 유일하게 한국 학생대표로 참가하고 그 참가기를 「帝國新聞」에 기고했던 감개어린 곳이었다(「月刊朝鮮」2003년 2월호, 「李承晩, 외아들 泰山을 미국에서 잃다」 참조).
 
  李承晩은 노스필드에서 1주일 동안 머문 다음 매사추세츠州의 스프링필드로 갔다. 그곳의 YMCA 트레이닝 스쿨에 와 있는 조남복을 잠시 만나본 다음, 뉴욕을 거쳐 일요일인 6월30일 아침에 뉴저지州의 애즈베리파크(Asbury Park)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 날 저녁에는 시거트 별장으로 다시 윌슨 가족을 방문했다. 볼티모어에서 열린 민주당 대통령후보 지명대회가 치열한 접전으로 말미암아 끝나지 않고 있는 주말 저녁을 윌슨 가족이 李承晩과 같이 지냈다는 사실은 매우 주목할 만한 일이다. 李承晩은 밤 1시39분에야 애즈베리파크를 떠나 새벽 2시30분에 프린스턴 역에 도착했다. 그리고 4시14분까지 연결 열차가 없었으므로 하는 수 없이 숙소인 프린스턴 신학교까지 철길을 따라 걸었다.
 
  볼티모어 지명대회는 7월 초까지 투표가 계속되다가 46번째 투표 끝에 윌슨으로 결정되었는데, 李承晩은 지명대회 동안 윌슨과 같이 있었다.24) 그것은 李承晩이 美國式民主政治의 극적인 장면을 직접 목격한 값진 체험이었다.
 
  李承晩은 윌슨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지명대회가 있고 난 뒤에 李承晩은 또다시 시거트를 찾아갔다. 그는 7월6일 아침에 프린스턴을 떠나 오전 11시30분에 뉴저지州의 벨머(Belmar)에 도착했다. 그리고 시거트에서 또다시 윌슨 후보의 딸 제시 윌슨을 만났다. 이러한 윌슨 가족과의 교분은 이때 이후로 李承晩의 정치 행로에 압도적인 권위를 지닌 정치적 자산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휴양지에서 에디의 가족들과 함께
 
   벨머에 있는 친지의 별장에서 열흘 동안 머물다가 프린스턴으로 돌아온 李承晩은 동부지방 여행을 계속했다. 그것은 새로운 할 일을 찾는 번민과 모색의 시간이기도 했을 것이다.
 
  7월20일 토요일에 그는 필라델피아로 가서 그곳에 있는 김창호와 주말을 같이 지내고, 23일에는 뉴저지州의 브리지튼으로 바우언(Bowen) 부인을 방문하고 있다. 이어 27일 토요일에는 뉴저지州의 스탁튼으로 울버튼(William H. Woolverton)을 찾아가서 이튿날 그곳 장로교 교회에서 예배를 보고 오후를 울버튼의 가족과 함께 보냈다.
 
  7월29일 아침에 프린스턴으로 돌아온 李承晩은 그 날로 뉴욕을 향해 출발했다. 가는 길에 뉴억(Newark)에 잠깐 내려 팸리(Pamly)를 만났다.
 
  뉴욕에 도착한 李承晩은 배를 타고 실버 베이(Silver Bay)로 갔다. 실버 베이에는 선교사 휴양소가 있었다. 그는 셔우드 에디(Sherwood Eddy)로부터 그곳 레이크 조지(Lake George)에서 일주일 동안 에디의 가족들과 함께 지내도록 초청을 받은 것이었다. 에디는 일찍이 이승만이 한성 감옥서에 투옥되었을 때에 그에게 작은 성경책을 넣어 주어서 李承晩이 기독교에 입교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 국제적인 부흥전도사였다.
 
  李承晩은 그곳에서 1주일 동안 에디의 가족들뿐만 아니라 다른 선교사들과 테니스도 치고 기념 촬영도 하면서 지냈다. 8월2일 토요일에는 저녁식사를 한 뒤에 에디와 함께 글렌 이러커스(Glen Iroquos)캠프로 갔다. 티비트(Tibit)라는 이가 150명 가량 되는 젊은이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에디와 李承晩은 일요일 아침에 그들을 상대로 강연을 하고 월요일 아침에 실버 베이로 돌아왔다.
 
 
  (4) 옥중동지 朴容萬을 만나러 헤이스팅스로
 
  동부 지방을 여행하는 동안에도 李承晩은 네브래스카州의 헤이스팅스에 있는 옥중동지 朴容萬과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朴容萬은 8월16일에 있을 少年兵學校 졸업식에 맞추어 李承晩이 헤이스팅스를 방문하도록 초청했다. 그리하여 李承晩은 8월8일 오후에 실버 베이를 떠났다. 李承晩은 4시30분에 레이크 조지에 도착했는데, 그때까지 그곳으로 보내기로 되어 있는 여비가 도착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실버 베이의 윌컥스(Wilcox)라는 장로교 목사 집에서 그 날 밤을 보냈다. 11일 일요일 아침에는 윌컥스와 함께 11km쯤 떨어진 시골 교회에서 예배를 보고 그 교회와 또 다른 한 교회의 주일학교에서 강연을 했다.
 
  李承晩은 8월12일 오후에 레이크 조지를 출발하여 이튿날 점심 나절에 시카고에 도착했고, 시카고에서 몇 시간 머문 다음 오후 5시발 기차편으로 헤이스팅스로 향했다.
 
  李承晩이 헤이스팅스역에 도착한 것은 14일 오전 9시30분. 헤이스팅스 시내에서 6.4km쯤 떨어진 기차역으로 朴容萬과 소년병학교 학생들이 마중나와 있었다. 李承晩은 역에서 군복을 입고 총을 멘 34명의 학생들의 경례를 받았다.
 
 
 
 少年兵學校 졸업식에서 연설
 
  네브래스카의 韓人 소년병학교와 관련해서는 李承晩에게도 특별한 감회가 있었다. 2년 전에 프린스턴대학교를 졸업하고 귀국에 앞서 그곳에 들러 2주일 동안 27명의 학생들과 부흥 사경회를 가지기도 했었다(「月刊朝鮮」2003년 5월호,「YMCA學監과 新民會黃海道摠監」 참조). 소년병학교는 1911년 8월19일에 첫 졸업식을 갖고 세 여름학기를 이수한 13명에게 졸업장을 수여했었는데, 그 해의 등록된 학생 수는 44명이었다. 그러나 1912년에 들어와서는 등록 학생수가 34명으로 줄어 있었다.25)
 
  졸업식은 8월16일에 거행되었다. 졸업생 수는 전년과 같은 13명이었다. 「新韓民報」는 이날의 졸업식은 외국인 100여 명과 한국인 50여 명의 내빈이 참가한 가운데 〈박사 리승만씨의 연설과 외국인 모모 명사의 연설이 있어서 자못 성대한 예식으로, 빈객이 환락으로 지내었다더라〉라고 보도하고 있다.26)
 
  저녁에는 축하 만찬회가 열렸다. 한 내빈이 일어나서, 한인 소년병학교 학생들이 씩씩하고 강직하고 인생목적에 진지한 성품을 가졌다면서 자신들의 자제들에게도 그러한 성품을 본받도록 노력해 보았으나 잘 되지 않더라고 치하했다. 李承晩이 일어나서 다음과 같이 화답했다.
 
  『미국의 또 딴 곳에 망명한 우리 젊은이들은 자기들이야말로 사랑하는 조국의 거울이 된다는 가르침과 훈계를 항상 받아왔습니다. 우리를 통하여서만 외국인들은 한국을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한국 전체를 대표하고 있습니다』27)
 
  그런데 李承晩의 「日誌」에는 이상하게도 8월16일자에 아무런 기록도 적혀 있지 않다.
 
  이튿날인 17일은 토요일이었다. 李承晩은 朴容萬과 함께 헤이스팅스에서 12.5km쯤 떨어진 더니븐(Doniphan)으로 갔다. 일요일 아침에 그곳에 있는 한 작은 교회에서 설교를 하도록 그 교회의 영국인 목사 킬번(Kilburn)의 초청을 받았던 것이다. 두 사람은 일요일 오후에 헤이스팅스로 돌아와 헤이스팅스 대학에서 한국인 학생들과 예배를 보았다.
 
  소년병학교 교장인 朴容萬은 그 동안 네브래스카 주립대학교에서 정치학을 공부하는 한편으로 1911년 2월부터 9월까지는 샌프란시스코의 「新韓民報」 주필을 맡아 「國民皆兵說」, 「無形國家建設論」 등의 논설을 통하여 동포들의 정치의식을 고취하고 大韓人國民會를 실질적인 자치정부 역할을 할 수 있는 기관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의욕적인 활동을 해왔다. 그리고 李承晩이 도착했을 때에는 1주일 전(8월9일)에 네브래스카 주립대학교에서 학사학위를 받은 직후였다.
 
 
 
 朴容萬과 진로문제 상의해
 
  李承晩과 朴容萬이 자신들의 진로문제와 관련하여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朴容萬은 네브래스카에 머물면서 여름에만 문을 여는 소년병학교에 전념하기보다는 동포들이 많은 지역에 가서 활동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 대한제국 군인이었던 사람들이 수백명 살고 있는 하와이로 가서 더 큰 규모의 軍隊를 육성하고 5000여 명의 하와이 동포들을 그 후원단체로 조직하여 하와이를 해외독립운동의 핵심기지로 만들고자 하는 큰 꿈을 지니고 있었던 것 같다.28) 朴容萬은 자기의 이러한 포부를 털어놓으면서 李承晩에게 같이 하와이로 가기를 권했을 것이다.
 
  그러나 李承晩은 그때까지도 자신의 거취문제에 대하여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귀국하여 국내에서 활동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이었으나 그것은 일본당국과의 타협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徐載弼처럼 동부지방에서 대학교수로 안정된 생활을 하면서 주로 미국사람들을 상대로 독립운동을 하는 방안도 진지하게 고려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李承晩은 자서전 초록에서 〈나는 大學敎授職을 얻는 것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獨立運動를 포기하고는 행복할 수 없었다〉29)라고 적고 있다. 그는 朴容萬에게 外交와 出版事業을 하고 싶다는 이야기도 했다고 한다.30) 물론 朴容萬과 같이 하와이로 가서 동포사회를 기반으로 하여 독립운동과 관련된 사업을 벌이는 것도 한 선택일 수 있었다.
 
  李承晩은 헤이스팅스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는 19일 월요일 아침에 헤이스팅스를 떠나 오마하, 시카고, 얼버니를 거쳐 22일에 실버 베이로 돌아왔다. 실버 베이의 휴양소에서 1주일 동안 묵은 그는 그곳에 와 있던 선교사들과 함께 28일 아침에 뉴욕으로 갔다. 일행 가운데에는 한국에 있을 때에 서울 YMCA의 협동총무로서 李承晩과 함께 전국 순회 여행을 했던 브로크만(Frank M. Brockman)도 있었다.
 
  李承晩은 계속해서 동부지방을 여행했다. 그리고 동부지방을 여행하는 동안 그는 방문하는 도시마다 그곳 YMCA 회관에서 묵었는데, 그것은 그의 여행이 YMCA가 주선한 강연 여행이었음을 뜻한다. 그는 8월29일에 뉴저지州의 캠던(Camden)으로 갔다. 캠던은 델러웨어(Delaware)강을 사이에 두고 필라델피아와 마주보고 있는 항구도시로서 시인 월터 휘트먼(Walter Whitman)이 만년에 살던 곳으로 유명하다. 캠던에서는 1주일 동안 머물렀다.
 
 
 
 아펜젤러의 故鄕에서 說敎
 
  李承晩은 9월7일에 펜실베이니아州의 랭커스터(Lancaster)로 갔다. 獨立戰爭 때에 한동안 미국의 수도이기도 했던 랭커스터는 한국에 온 첫 선교사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의 고향이었다. 아펜젤러 부인집에서 묵은 그는 이튿날인 일요일에 그곳 제일감리교회의 아침예배와 저녁예배에서 설교를 했고 주일학교에서도 강연을 했다. 李承晩은 아펜젤러가 한국에서 얼마나 열성적으로 전도와 봉사활동을 했는가를 설명했다. 그날 저녁에 담임목사 바로든(Baroden)은 李承晩의 설교를 들은 교인들이 아펜젤러 기념교회의 설립을 위하여 200달러를 헌금했다고 보고했다.
 
  李承晩은 9월16일부터 3일 동안은 애틀랜틱 시티에서 열린 YMCA 총회에 참석했고, 뒤이어 노블 목사의 전보를 받고 10월22일에는 뉴욕州의 빙햄턴(Binghamton)을 방문했다.
 
  李承晩이 워싱턴에 도착한 것은 11월5일이었다. 이 날은 미국대통령 선거의 일반투표가 실시되는 날이었다. 이때의 입후보자는 현직 대통령인 태프트, 전직 대통령인 시어도어 루스벨트, 美國社會民主黨(뒤의 美國社會黨)의 창설자이며 노동운동 지도자인 유진 뎁즈(Eugene V. Debs), 그리고 윌슨의 네 사람이었다. 루스벨트는 공화당 대통령후보 지명대회에서 태프트에게 패배하자 탈당하여 進步黨(Progressive Party)을 결성하고, 「뉴 프리덤(New Freedom)」이라는 윌슨의 선거구호에 맞서서 「뉴 내셔널리즘(New Nationalism)」을 표방하고 나왔다. 3파전으로 경합한 치열한 선거전의 결과 윌슨은 일반투표에서 41.6%의 지지율을 얻었는데, 그것은 링컨 대통령 이래로 가장 낮은 지지율이었다. 그러나 12월의 選擧人團 투표에서 윌슨은 435표의 압도적인 다수표를 얻어(루스벨트 88표, 태프트 8표), 博士학위를 가진 최초의 미국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서울은 신시내티와 구별하기 어려워』
 
  李承晩은 워싱턴에 머물면서도 여러 교회의 초청을 받았다. 11월30일에는 필라델피아州의 메어리에터(Marietta)에 있는 한 장로교회의 초청을 받고 가서, 이튿날인 일요일의 오전예배와 저녁예배에서 설교를 했다. 오전예배 때에는 300명 가량, 저녁예배 때에는 350명 가량의 청중이 모였다.
 
  李承晩이 워싱턴에 머물고 있던 11월18일자 「포스트(the Post)」지에 李承晩의 인터뷰 기사가 보도되었다. 기자가 李承晩이 묵고 있던 월러드 호텔로 찾아와서 그를 인터뷰한 것이었는데, 李承晩은 이 인터뷰에서 日本의 점령 아래 있는 한국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매우 긍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지난 3년 동안에 韓國은 인습에 젖은 느릿느릿한 나라로부터 생기 있고 부산한 산업의 중심지로 변모했다.… 오늘날 서울은 주민들의 얼굴 생김새말고는 신시내티와 구별하기 어렵다.〉31)
 
  올리버는 이 기사가 李承晩이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고 트러블메이커라는 비난을 피하려는 진지한 노력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서술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때까지도 李承晩이 귀국 가능성을 단념하지 않고 있었음을 뜻한다.
 
  李承晩은 12월21일에 메릴랜드의 타코마 파크(Takoma Park)에 있는 해외선교신학교(Foreign Mission Seminary)로 갔다. 그곳에서 크리스마스와 신년 휴일을 보내기 위해서였다.
 
 
  (5) 하와이에서 들은 아버지의 訃音
 
  李承晩은 헤이스팅스를 다녀온 뒤에도 朴容萬과 계속해서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그 동안 朴容萬은 헤이스팅스를 떠나 샌프란시스코로 가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실제로 해외 한인의 「無形政府」로 발족시키는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11월8일부터 페리가에 있는 국민회관에서 열린 중앙총회 제1차 대표원대회에는 북미지방총회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가했다. 이 대회에는 북미지방총회 대표와 하와이지방총회 대표뿐만 아니라 시베리아지방총회와 만주지방 총회의 대표도 대리로 참석했는데, 참석자들은 자신들의 회의가 「無形政府」의 대의기관임을 천명했다.
 
  20일에 발표된 「중앙총회 선포문」은 朴容萬이 기초한 것이었는데, 그것은 1)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해외한인의 최고 기관으로 인정하고 자치제도를 실시할 것, 2) 각지에 있는 해외동포는 국민회의 지도를 받을 의무가 있으며, 3) 국민회의 입회금이나 회비를 없애고 그 대신에 해외동포는 거주지의 경제형편에 따라 지정되는 의무금을 국민회로 보낼 것을 규정했다.32) 말하자면 국민회가 해외 동포들의 「무형정부」로서 자치를 시행하고 政府로서 필요한 租稅權을 행사하겠다는 것이었다. 총회는 22일 동안의 회의를 마치고 11월30일에 폐회했다. 폐회에 앞서 尹炳求를 새 총회장으로 선출하고 尹炳求가 지명한 6명의 임원을 승인했는데, 朴容萬은 외교책임자로 선임되었다.
 
 
 
 朴容萬이 「新韓國報」 主筆 맡아 하와이로
 
   그런데 이 회의기간 동안 朴容萬은 하와이 지방총회 대표로 참석한 朴相夏로부터 하와이 국민회의 기관지 「新韓國報」의 주필을 맡아 달라는 제의를 받았다. 그것은 하와이로 가기로 마음먹고 있던 朴容萬으로서는 여간 고마운 제의가 아니었다. 朴相夏의 제의를 받아들인 朴容萬은 회의가 끝나는 날인 11월30일에 곧바로 朴相夏와 함께 「몽골리아」호 편으로 샌프란시스코를 떠나서 12월6일에 하와이에 도착했다.
 
  큰 포부와 의욕을 가지고 하와이에 도착한 朴容萬은 무엇보다도 먼저 李承晩을 하와이로 오게 하는 작업을 서둘렀다. 그는 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를 하와이동포들의 실질적인 자치정부로 기능하게 하고 군대도 양성하면서 하와이 동포사회를 독립운동 기지로 만들기 위해서는 李承晩의 명성과 지도력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朴容萬은 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로 하여금 李承晩을 초청하게 하는 한편, 「新韓國報」 지상을 통하여 李承晩을 〈찬란하게 소개하여 일반 동포의 동정심을 환기〉33) 시켰다고 한다.
 
  이때의 「新韓國報」가 보존되어 있지 않아서 그러한 기사 내용을 알 수는 없으나, 일찍이 獨立協會의 萬民共同會를 주도한 民權運動家였고, 高宗이 임명한 中樞院議官이었고, 7년(실제로는 5년 7개월) 동안이나 獄苦를 치르면서 「帝國新聞」의 논설을 집필하고 「독립정신」을 저술했고, 尹炳求와 함께 한국 국민과 하와이 동포들을 대표하여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났고, 미국 동부의 명문대학에서 수학하고 한국인 최초로 프린스턴 大學校에서 博士學位를 취득했고, 고국에 돌아가서 서울YMCA에서 한국인 총무로 활동했고, 오는 3월4일에 제28代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우드로 윌슨은 그의 은사로서 각별한 사이라는 사실은 특별한 과장을 하지 않더라도 하와이 동포들에게 환상적인 지도자의 출현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하와이로 가는 길에 同胞들 만나
 
   타코마 파크의 해외선교학교에서 연말연시를 보내는 동안 李承晩은 이후의 그의 운명을 결정짓게 되는 중대한 결심을 했다. 하와이로 가기로 한 것이다. 그가 그러한 결심을 한 것은 박용만의 초청에 따른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하와이 제일감리교회의 감리사 와드먼(John W. Wadman)의 초청도 있었기 때문이다. 와드먼은 李承晩이 1904년에 처음으로 미국으로 오면서 하와이에 들러 동포들을 상대로 긴 연설을 한 저녁집회를 주관했던 사람이다.
 
  1913년 1월6일에 워싱턴으로 돌아온 李承晩은 케니(Kenny)의 가족들과 저녁을 같이 지낸 다음 그곳에 사는 鄭基煥의 집에서 잤다. 그리고 이튿날은 필라델피아로 가서 徐載弼을 만났다. 이때에 두 사람은 앞으로의 활동과 관련된 긴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다.
 
  李承晩은 10일 오후에 프린스턴을 떠나 시카고로 향했다. 「日誌」에는 도중에 오하이오州의 컬럼버스에 들러 金氏 세 사람을 만났다고 적혀 있으나, 그들이 누구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곳에서 우연히 安定洙도 만났다. 安定洙는 李承晩이 처음 미국에 왔을 때에 샌프란시스코에서 그를 안내한 뒤로 李承晩과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12일 저녁에 시카고에 도착하여 스타크(Stark) 부인 집에서 사흘 동안 묵고 나서 1월15일 오전에 로스앤젤레스로 떠날 때에는 朴處厚와 金承濟가 역으로 배웅나왔다. 육체노동을 하면서 朴容萬과 함께 少年兵學校 운영에 참여했던 朴處厚는 이때에는 커니사범대학에 재학하고 있었다.
 
  1월20일 아침 8시에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한 李承晩은 그곳에서 閔燦鎬와 다른 네 사람의 동포를 만났다. 황해도 平山 태생인 閔燦鎬는 李承晩과 함께 배재학당을 다녔고, 1905년에 전도사로 하와이에 갔다가 이때에는 로스앤젤레스의 南加州大學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있었다. 李承晩과 閔燦鎬는 이후로도 평생동안 친분관계를 유지했다.
 
  李承晩은 1월22일 아침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미국에서 활동하기로 결심한 이상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국민회 관계자들과 만났을 법한데도, 그의 「日誌」에 아무런 언급이 없다. 그리고 「新韓民報」는 이때에 재정곤란으로 정간 중이어서 이때의 李承晩의 동정에 관한 기사를 찾아볼 수 없다. 이 무렵에는 安昌浩도 샌프란시스코에 있었다. 李承晩은 1월24일 아침에 샌프란시스코 가까이에 있는 샌안셀모(San Anselmo)신학교로 가서 랭던(Langdon) 학장과 그 학교에 와 있는 평양 태생의 학생 李光潤을 만났다. 그곳에서 주말을 보내고 1월27일 월요일에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왔다.
 
 
 
 아버지의 죽음을 알리는 電報
 
  李承晩이 1월28일 오후에 「시에라」(Sierra)호 편으로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호놀룰루에 도착한 것은 2월3일 아침 8시. 이른 시간인데도 부두에는 많은 동포들이 나와서 그를 환영했다.
 
  또한 호놀룰루에는 그의 가슴을 덜컹 내려앉게 하는 기별이 기다리고 있었다. 서울 집으로부터 아버지의 별세를 알리는 전보가 와 있었던 것이다. 李敬善은 한 달이나 전인 12월5일에 사망해 있었다.
 
  李承晩이 다시 미국으로 떠나온 뒤로 李敬善과 朴씨 부인의 불화는 더욱 격렬해졌다. 그리하여 李敬善은 창신동 집을 나와서 서울YMCA 건물 바로 뒤에 있는 里門敎會(지금의 勝洞敎會인 듯)의 구석방 하나에서 거처했다. 몇몇 아이들을 모아 글을 가르친다고는 했으나 그것은 명목뿐이었고, 병든 몸으로 끼니마저 제대로 챙겨먹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그나마 이 敎會에서 기거할 수 있게 해준 것은 YMCA의 李商在였다(현재 종로구 인사동 137번지에 있는 勝洞敎會에는 李承晩이 귀국한 뒤에 이 교회에 와서 예배를 보았고 기념식수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李敬善의 최후는 더욱 처참했다. 그의 시신은 짐꾼의 지게에 지워져 고향인 황해도 平山으로 옮겨졌다. 그의 부의록 끝에 平山郡新岩面에 있는 2정보의 그의 묘역 지도와 함께 「山主 李承晩」 「緣故者 朴承善」이라고 적혀 있는 것이 눈길을 끈다. 「朴承善」은 朴씨 부인이다. 李承晩이 두 번째로 渡美한 뒤에 朴씨 부인은 남편과 시아버지의 이름에서 「承」자와 「善」자를 한 자씩 따서 자기의 이름을 「承善」으로 지어 사용했다고 한다.34)
 
  이러한 李敬善의 최후는 李承晩의 가슴에 크나큰 상처로 남았다. 그가 자서전 초록에 자기 아버지에 대하여 〈아버지는 만년에 나 때문에 얼마나 고생하셨는지 모른다. 나는 그때의 아버지를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35)라고 애끓는 회오를 하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6) 한 달 동안 「한국교회핍박」 저술
 
  李承晩을 환영한 것은 동포들만이 아니었다. 하와이에 있는 백인들도 李承晩에 대하여 큰 관심을 표명했다. 1931년 2월8일자 「호놀룰루 스타 뷸리튼(Honolulu Star-Bulletin)」지의 다음과 같은 보도는 그러한 사정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스타 뷸리튼」은 하와이에서 발행되는 두 유력지 가운데 하나였다.
 
  「스타 뷸리튼」은 李承晩의 하와이 도착 뉴스를 『李承晩博士는 韓國의 위대한 지도자』라는 두터운 활자체의 표제 아래 博士가운을 입은 그의 사진과 함께 머릿기사로 다루었다. 기사는 〈오늘날 한국에 李承晩博士보다 더 위대한 종교지도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 그는 제일감리교회의 한국인 및 일본인 관계 사업 책임자 와드먼 박사의 초청으로 호놀룰루를 방문하고 있다〉라는 서두로 시작하여, 그의 젊은 改革家로서의 활동과 그로 인한 囹圄生活 및 美國에서의 학문적 성취 등을 자세히 설명했다. 같이 실린 다른 한 기사는 다음 날인 일요일에 중앙 연합교회에서 있을 李承晩의 강연계획을 알리면서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李承晩博士는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韓國人이다. 그는 7년 동안 감옥에서 복역했고, 2년 동안 韓國YMCA의 총무로 활동했다. 그러한 그가 오전 예배시간에 그의 경험에 대한 흥미 있는 이야기를 할 것이다. 많은 참석자들이 李承晩씨를 환영할 것이 기대된다.〉36)
 
  이처럼 李承晩은 하와이에 도착하자마자 백인사회에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韓國人」으로 소개되었고, 하와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교회에서 강연을 할 수 있게 초청을 받은 것이었다. 그것은 다른 어떤 韓國人도 기대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이었다.37)
 
  李承晩은 朴容萬을 비롯한 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간부들과 와드먼 등 백인 기독교 관계자들을 만나고 주일에 교회에 나가서 동포들을 상대로 인사를 겸한 강연을 하면서 자신이 할 일이 무엇인가를 신중하게 생각했다. 그러는 한편으로 그는 먼저 동포들이 궁금해하는 105人 사건에 관한 책을 저술하기로 했다.
 
  이 책은 4월에 新韓國報社에서 발행되었는데, 「서문」을 쓴 날짜가 1913년 3월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李承晩은 이 책을 쓰는 데 한 달 남짓밖에 걸리지 않았던 것 같다. 미국 동부지방의 교회들을 방문하면서 한 강연이 내용의 뼈대가 되었을 것이고 분량도 그다지 많지는 않으나, 그토록 짧은 시일에 저술을 마친 것은 역시 그의 특출한 필재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 책은 105人 사건의 경위와 배경, 재판 과정, 사건에 대한 美國과 英國의 여론 등을 자세히 소개한 것이나 그와 아울러 이 무렵의 李承晩의 基督敎信仰과 敎會와 사회의 관계, 基督敎를 중심으로 본 韓-日關係 등에 대한 그의 생각을 잘 드러내고 있어서 자세히 천착해 볼 가치가 있다.
 
 
 
 「동양에 첫 예수교 나라를 만들고…」
 
   李承晩은 짤막한 서문에서 먼저 〈대저 바라는 것이 있는 자는 일을 하고자 하며, 일을 하고자 하는 자는 사실을 알려 하나니, 이는 다름 아니오 일을 알아야 바로 행할 수 있으며, 바로 행하여야 소망을 이룰 수 있음이라〉라고 사실의 정확한 파악이 중요한 것임을 강조한 다음, 이 책의 집필 목적을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이 글 쓰는 뜻은 일본의 잘못함을 알리자는 것이 아니오 우리의 잘할 것을 알리려 함이니, 이 뜻을 알고 행하기를 힘쓰며, 이 글이 혹 우리 한인 전체에 유조(有助)함이 될지라〉38)
 
  이처럼 李承晩은 이 책을 단순히 그가 「한국교회 핍박사건」이라고 지칭한 105인사건의 진상보고로 집필한 것이 아니라 하와이 동포들에게 자기의 정치적 비전을 천명하는 메시지로 집필한 것이다.
 
  李承晩은 먼저 韓國에 기독교가 급속히 흥왕하는 실상을 소개하면서, 그것은 하나님이 한국 백성으로 하여금 東洋에 첫 基督敎國家를 건설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본이 한국교회를 핍박하는 것은 바로 그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렇듯 굉장히 진취된 교회는 실로 고금에 희한한 바이로다. 각국 교회에서 말하기를 하나님이 한국 백성을 이스라엘 백성같이 특별히 택하야 동양에 처음 예수교 나라를 만들어 가지고 아시아주에 예수교 문명을 발전시킬 책임을 맡기심이라. 그러므로 이때에 한국교회를 돕는 것이 일후(日後:닥쳐올 뒷날) 일본과 청국을 문명시키는 기초가 된다 하야 각 교회에 속한 신문, 월보, 잡지에는 한국교회 소문이 그칠 때가 없으며, 교회 유람객들의 연설이나 혹 보고에 한국교회 일을 칭찬 아니한 자가 드문지라. 이대로 얼마 동안만 계속하면 한국 백성의 장래 문명, 자유, 복락을 손꼽고 기다리겠거늘, 지금 일본이 이것을 저희 하는 자리에 무심히 보지 못하는 것이 또한 자연한 형세이며…〉39)
 
  그리하여 일본과 한국의 교회를 제대로 시찰하고 간 서양사람들은 한국은 몇 해 안에 기독교 국가가 될 것이라고 보고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설명은 그 자신도 韓國을 기독교국가로 만드는 일을 가장 가치 있는 사업이라고 생각하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韓國人을 다섯 부류로 나누어
 
  李承晩은 이 책에서 일본에 병탄된 뒤의 한국인들을 다섯 가지 부류로 매우 독특하게 분류하고 있다. 1) 우선 무식하고 양순하여 官人을 범같이 두려워하는 나머지 비록 속마음으로는 나라 생각이 가득할지라도 감히 표명하지 못하는 다수의 백성들, 2) 李完用, 宋秉畯 등과 一進會員들처럼 드러내어 놓고 日本의 충성스러운 노예노릇을 하는 패들, 3) 주색잡기에 빠져서 저녁마다 패를 지어 연회를 한다, 화투를 한다 하며 세월을 보내는 부패한 대관들과 상류층 사람들, 4) 다음은 아주 드러내어 놓고 排日하는 사람들인데, 이들은 국민들로부터 은근히 앙망과 추종을 받고 있으나 그 수효가 많지 않을 뿐 아니라 대부분 외국에 나가 있거나 옥중에 있거나 귀양살이를 하고 있다. 그러므로 위의 네 부류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일본 당국이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다. 5) 이들과는 달리 일본 당국이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각 지방의 基督敎會 지도자들이 그들이다. 李承晩은 이 다섯째 부류의 사람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아주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수효도 많고 또한 다 자기 지방에서는 다소간 명망이 있는 자들이니, 가장 긴요한 부분이라. 어찌 보면 일본 주권을 복종하는 듯도 하고, 어찌 보면 피위피 아위아(彼爲彼我爲我: 너는 너 나는 나)로 여기는 듯도 하야 남과 잘 섞이지도 아니하며, 혹 일본 주권자들이 청하야 벼슬을 하라하면 공손히 사양하고 물러가 교회 속에 몸이 묻혀 혹 교육이나 전도에 종사하는데, 혹 일인들이 월급을 얼마씩 주며 비밀히 정탐을 하여 달라 하여도 듣지 아니하고, 혹 주색잡기로 유혹시켜도 빠지지 아니하며…〉40)
 
  그러므로 日本당국은 이러한 기독교 세력을 그냥 두고는 식민지 통치를 제대로 실시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 105人事件을 날조하게 되었다고 李承晩은 주장했다.
 
  李承晩은 韓國敎會의 존재가 日本의 한국 점령에 저해되는 점을 「외교상 관계」와 「내치상 관계」의 두 가지로 나누어 서술했다. 먼저 외교적인 면에서 일본 정부의 목적은 서양 각국과 한국의 관계를 단절하는 것인데, 기독교 때문에 서양인들의 관심이 한국에서 떠날 수 없다는 것이었다.
 
  李承晩은 미국 기독교인들의 한국교회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다 내 눈으로 본 것〉이라면서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서술한 다음 이렇게 요약했다.
 
  〈그런즉 한국교회 인도자들이나 서양선교사들이나 외국 교회 유람객들이 실상은 정치상 간섭이 있다든지 日人을 배척하는 사상을 포함함은 아니로되 한국에 교회 하나 있는 까닭을 인연하야 한국정치상 정형을 외국에서 알게 되며 외국의 정의(情誼)를 한국에 연락하는지라. 일본 당국자들이 어찌 이것을 모르며, 어찌 이것을 즐겨하리오. 이 형편이 점점 자랄진대 日後 일본에 한 후환이 될 염려도 없지 아니한지라. 그러므로 일본이 외교상 관계로 인연하야 한국교회를 싫어하는 것이며…〉41)
 
  「내치상 관계」, 곧 한국교회가 대내적인 면에서 일본의 정책에 방해가 되는 점은 외교적 측면보다 훨씬 더 영향력이 큰 것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李承晩은 일본인들이 韓國敎會의 다음과 같은 여덟가지 기능이 자기네의 정책을 저해하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분석했다.
 
 
 
 韓國敎會가 日本政策을 저해하는 여덟 가지 이유
 
  첫째로 교회는 한국인들이 자유로이 會集하는 장소라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누구나 일본 당국의 허가 없이는 단체의 조직을 할 수 없으나 敎會만은 종교의 자유를 내세워 남녀노소가 자유로이 모일 수 있으므로 獨立協會를 비롯한 이전의 모든 정치단체 지도자로서 명망 있는 이들이 敎會로 들어감에 따라 敎會가 큰 단체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로 敎會 안에 活動力이 많은 점을 들었다. 나라가 일본에 병탄된 이후에 한국인들이 모두 낙심 낙망하여 아무것도 하고자 하는 것이 없어짐에 따라 국민의 활동력이 쇠퇴하고, 그로 말미암아 부패한 행위와 骨肉相殘하는 폐단이 생겨났으나, 〈특별히 예수교회에 이르러서는 한량없는 자동력이 스스로 생겨서…〉 〈사람이 행치 못할 것을 행하게 하며, 없는 데서 생기게 하며, 죽는 데서 살기를 바라는 것이 다 예수교의 오묘한 이치라. 이런 이치가 마음속에 든 후에는 모든 사람이 다 낙심하여도 나 혼자 굳센 마음이 생기며, 슬퍼하는 중에서 낙이 생기며, 핍박 중에서 힘이 나는지라…〉라고 그는 설명했다.
 
  셋째로는 敎會의 합심되는 능력을 강조했다. 李承晩은 한국인들이 단합하지 못하는 오랜 폐단을 설명한 다음 교회의 단합심을 특유의 비유법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예수 앞에 나와서 참 감화력을 얻은 자들은 전일에 제 몸만 위하여 살려 하던 바와 남의 살을 베어다가 제 배를 불리려 하며 남의 목숨을 끊어다가 제 목숨을 이으려 하던 모든 죄악을 회개하고, 남의 이해와 남의 화복을 먼저 생각하려 하며, 성경의 말씀을 의지하여 형제자매가 서로 사랑하기를 힘쓰며 전도하는 말이, 예수는 포도나무요 우리는 다 가지이니 가지가 나무에 붙지 아니하면 결실하지 못할지라, 우리가 다 한 주에게 속하였은즉 한 몸의 지체와 같고 한 집의 식구와 같다 하야 동서남북을 물론하고 다 일심으로 단체가 되어 일하는 지라…〉42)
 
  일본인들이 한국교회의 움직임을 경계하는 것이 그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넷째로는 敎會가 國民保健을 보호하는 점을 들었다. 李承晩은 일본 당국이 한국인들에게 모르핀과 담배를 보급시키고 있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敎會가 금연운동 등을 통하여 국민의 도의심을 진작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다섯째로 敎會가 靑年들의 敎育에 힘쓰고 있는 사실을 들었다. 李承晩은 日本의 민족교육 억압정책을 비판하면서 敎會學校의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여섯째로 敎人들은 우상을 섬기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했다. 李承晩은 日本佛敎와 神道가 한국에 들어옴에 따라 각 학교 등에서 발생하고 있는 비극적인 사례를 소개하면서 우상숭배의 폐해를 비판하고 있다.
 
  일곱째는 宣敎師들의 도덕적 영향력이 한국에서 확장되고 있는 점이라고 했다. 李承晩은 1904년에 자기가 미국무장관 존 헤이(John Hay)를 방문했을 때에 헤이가 러-일전쟁 직전에 평안도 지방에 가 있는 미국선교사들을 철수시키려 했으나 그들이 반대했었다는 말을 자랑스럽게 하던 일을 소개하면서, 선교사들과 한국 기독교인들의 각별한 신뢰관계를 일본인들이 질시하여 선교사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비방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
 
  〈외교상이나 신문상으로 자주 설명하기를, 선교사들이 기왕부터 한국에서 정치상 간섭을 많이 하던 습관이 되어 지금도 한국정치에 간섭한다 하며, 혹은 한인의 애국사상을 길러 배일운동을 격동한다 하며, 혹은 이등박문을 암살한 일은 선교사 아무가 시켰다 하며, 서울서 일인이 발간하는 국문신문에는 선교사를 종종 비평하며 혹은 말하기를 선교사들이 미국에 가서 허장성세로 한국 예수교회를 팔고 돈을 얻어다가 肥己之慾(비기지욕)을 채운다 혹은 선교사로 한국 여인들을 첩으로 둔 자가 있다 하야, 모든 이런 말로 공박하야 미인이 아무 세력없는 것을 한인에게 보이려 하니, 그 이유를 모르는 자들은 교회를 비방하며 가까이 아니하지마는 기왕부터 다 자세히 아는 사람들은 선교사들과 더욱 친밀히 지내니, 무슨 특별한 사건을 일으키기 전에는 어찌할 수가 없는 줄을 일본 관리들이 더욱 깊이 깨달을러라.〉43)
 
  일본 당국이 105人 사건을 조작하고 그 배후에 선교사들이 있다고 주장한 것이 그 때문이었다는 뜻이다.
 
 
 
 基督敎는 東洋에 革命思想을 전파
 
  李承晩의 분석 가운데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마지막 여덟 번째로 든 내용이다. 그것은 기독교가 東洋社會에 革命思想을 전파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대저 혁명이라 하는 것은 백성들이 일어나서 정부를 번복하고 저의 뜻대로 다시 조직하는 것을 이름이니, 동양 史記(사기)에는 없는 일이라〉하고 革命을 정의한 다음, 동양사람들은 몇 천년 동안 專制政治에 습관이 되고 노예성질에 고질이 되어서 革命이 무엇인지 모를 뿐만 아니라 西洋革命史에 대해서는 三綱五倫에 벗어나는 오랑캐의 악습이라고 비판하며 배척하기에 이르렀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그것은 동양사람들이 基督敎를 몰랐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세상 사람들이 항상 비평하는 말이, 동양사람은 천생 성질이 전제정치에 합당한 고로 정치혁명이라는 것은 당초에 이름도 모르거늘 앵글로색슨(英·美 인종을 통칭함)은 자유 동등의 사상을 가지고 난고로 서양역사에만 혁명이 있다고 하는지라. 그러나 나는 이것을 연구하여 본 지 오랬으니, 이는 인종의 성질을 인연함이 아니요 종교의 성질을 인연함이라. 동·서양 종교의 구별을 연구하는 자는 다 나의 보는 바를 옳게 여기리로다.〉44)
 
  이 책의 여러 대목에서 볼 수 있는 李承晩의 이러한 자기현시적인 言說도 하와이동포들을 상대로 한 의식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李承晩은 예수는 역사상 최초의 革命思想家이며 그의 가르침은 곧 革命思想이라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수는) 우리의 영혼상 관계는 물론하고 정치상 관계로만 볼지라도 전고(前古)에 처음되는 혁명 주창자이라.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동등 자녀되는 이치와 사람의 마음이 악한 풍속과 어리석은 습관과 모든 죄악에서 벗어나서 자유 활동하는 이치를 다 밝게 가르치셨으니, 신약을 공부하는 사람은 부지중에 스스로 혁명사상을 얻는 것은 과연 그 책이 진리를 가르치며 진리는 사람의 마음을 자유시키는 연고이로다.〉45)
 
  이러한 敎會의 혁명사상은 마틴 루터(Martin Luther)의 宗敎改革을 낳았고, 그로부터 200년 뒤에는 政治制度를 개혁하기에 이르러 英國과 프랑스와 美國에서 정치상 대혁명이 거기에서 발생했다고 李承晩은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동양에서 최초로 共和國을 건설한 1911년의 中國의 辛亥革命도 基督敎를 통하여 西洋文明을 수입하고 自由思想을 발달시킨 결과라고 주장했다.
 
 
 
 韓國敎會 지도자들은 영혼구원에만 注力해
 
  그런데 한국에 있는 서양 선교사들이나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政治的革命運動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한 바 없고 基督敎를 장래 한국의 혁명의 기초가 되게 하자는 사상은 꿈에도 없으며, 한국교인들은 基督敎와 政治革命이 관계가 있는 줄도 모르고 있다고 李承晩은 말했다. 그에 따르면 한국교회의 기본방침은 沈淪(침륜)한 백성들의 영혼을 죄악에서 구원하여 영생을 얻게 한다는 이른바 個人救援의 신앙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日本 당국자들은 한국교회를 獨立思想을 배양하는 곳이며 한국 교인은 앞으로 革命을 주창할 자들이라고 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日本 당국은 西洋의 革命思想이 中國을 통하여 東洋에 밀려와서 아시아大陸을 풍미하고 있어서 日本人들도 이 풍조를 받아들여 革命內亂을 일으킬 위험이 없지 않다는 판단 아래 中國의 혁명운동이 韓國을 통하여 日本으로 전파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한국교회를 제압하려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위와 같은 분석은 李承晩이 한국교회의 사회적 역할을 얼마나 중요시하고 있었는지를 말해 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基督敎信仰의 본질은 社會救援에 있다고 믿는 그의 基督敎觀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한 사정은 흥미롭게도 그가 일찍이 한성감옥서에서 囹圄生活을 할 때에 「신학월보」에 기고한 글에서 인용했던 『병인이 있어야 의원이 쓸 데 있느니라』라는 예수의 말을 이 책에서도 인용하고 있는 것으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李承晩은 자기의 지금까지의 활동도 基督敎의 이러한 召命과 일치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와이 同胞社會를 「基督敎國家」로
 
  한국교회의 역할을 분석한 데 이어 李承晩은 한국 기독교청년회의 일을 설명했다. 그는 〈세계 모든 청년회 중에서 한국청년회가 영혼상 일에 가장 유력하다는 칭찬을 받는 바이더라〉46)라고 자기가 관여했던 서울YMCA의 국제적 평가를 소개한 다음, 서울YMCA를 일본YMCA에 통합시키려는 日本政府의 책동과 그러한 책동에 줏대없이 부화뇌동하는 일부 한국교인들의 작태를 질타했다.
 
  끝으로 李承晩은 105人 사건의 발단이 된 선천학교와 105人 사건의 재판 경위를 美國의 신문보도를 인용하여 자세히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마무리하고 있다.
 
  〈믿는 자의 피는 예수교의 씨요 의로운 자의 핍박은 예수교 문명의 기초라. 오늘날 우리의 당하는 곤란은 장래의 행복을 위함이니, 어린 양이 이리의 무리에게 나아가는 것같이 순종하는 중에서 하나님의 大義(대의)를 세워서 장차 세상의 모든 권세를 이기리로다.〉47)
 
  성경구절, 특히 그가 革命思想의 原典이라고 설파한 新約의 어떤 구절을 연상시키는 이러한 문장은 이 무렵에 그가 얼마나 新約에 통달해 있었는가를 말해 준다.
 
  그러나 李承晩이 日本의 한국교회 핍박을 고발한 이 책을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맺고 있는 것은 이후의 그의 하와이에서의 활동과 그곳에 있는 日本人들에 대한 그의 태도를 이해하는 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는 진실로 일본과 권세를 다투자든지 日人(일인)을 배척하자는 것이 조금도 아니요, 다만 바라기는 일본이 우리의 종교 자유를 방해하지 말아서 조선 인종이 장래에 생존을 유지하며 자유 복락을 누릴 희망이 있게 하면 우리는 日人의 정치 자유를 조금도 방해롭게 아니할지니, 어찌 피차에 다행이 아니리오.〉48)
 
  日本이 韓國人의 宗敎의 自由를 방해하지 않는다면 日本의 政治의 自由를 방해하지 않겠다는 李承晩의 이러한 말은 하와이 동포들, 특히 朴容萬을 포함한 동포사회 지도자들의 일반적인 정서와는 부합되지 않는 것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李承晩은 이러한 간극에 구애되지 않고 하와이 동포사회를 「基督敎國家」로 만드는 사업에 착수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王國이자 자기 자신의 王國이 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하여 李承晩은 5월14일부터 동포들이 흩어져 사는 섬들의 답사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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