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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 李承晩과 金九(22)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손세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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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MCA 學監(李承晩)과 新民會황해도總監(金九)

李承晩은 유럽을 거쳐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6년 만에 귀국했다. 나라가 日本에 병탄되고 두 달 뒤였다. 그는 서울YMCA의 韓國人總務이자 YMCA學校 學監(校長)으로서 傳道와 2世敎育에 온 정열을 쏟았다.
海西敎育總會 學務總監이자 비밀결사 新民會의 黃海道總監이었던 金龜(九)는 新民會의 西間島 獨立運動基地건설을 위한 移住계획을 추진하다가, 安岳(安明根)事件과 新民會(梁起鐸等保安法違反)事件에 연루된 혐의로 체포되었다.
일본이 조작한 가장 혹심한 탄압사건이었던 105人(寺內總督謀殺未遂)事件 때에는 李承晩과 金龜는 모두 주동인물로 지목되었다. 李承晩은 1911년에 두 차례에 걸쳐 전국을 순회하며 傳道旅行을 했는데, 그것은 그에게「韓國의 發見」이었다.
李承晩은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귀국한 지 1년 반 만에 다시 渡美했고, 金龜는 두 번째 옥중생활을 시작했다.

孫 世 一
1935년 釜山 출생. 서울大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졸업 후 美國 인디애나 대학 저널리즘 스쿨, 日本 東京大 법학부 대학원에서 修學. 思想界, 新東亞 편집장과 東亞日報 논설위원을 거쳐 1980년 「서울의 봄」 때에 政界에 투신하여, 11·14·15代 국회의원을 역임하는 동안 民韓黨 外交安保特委長, 서울시지부장, 民推協 상임운영위원, 民主黨 통일국제위원장, 國會通商産業委員長, 國民會議 정책위 의장, 원내총무, 전당대회 의장, 韓日議員聯盟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주요 논문으로 「大韓民國臨時政府의 政治指導體系」, 「韓國戰爭勃發背景 연구」, 「金九의 民族主義」 등이 있고, 著書로 「李承晩과 金九」, 「人權과 民族主義」, 「韓國論爭史(編)」, 譯書로 「트루먼 回顧錄(上, 下)」, 「現代政治의 다섯 가지 思想」 등이 있다.
李承晩이 귀국할 때에 승선하여 뉴욕에서 리버풀까지 大西洋을 항해한 여객선 발틱號(S. S. Baltic).(유영익,「이승만의 삶과 꿈」(1996)에서).
  강연을 할 때마다 방청객이 수백 명씩 모였다는 것은「博士 李承晩」이 얼마나 젊은이들에게 흠망의 대상이 되어 있었는가를 말해 준다. 李承晩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기도를 했고, 학과시간도 기도로 시작했다. 계단을 오르다가 갑자기 멈추어서서 영어로 기도를 하기도 했다. 그는 유머감각이 풍부하여 재치 있는 농담으로 학생들을 곧잘 웃겼고, 웬만한 일을 두고도『원더풀, 정말 굉장하지…』라는 말을 잘하여, 학생들은 그를「李굉장」이라고 불렀다. 이 호칭은 그에 대한 외경의 뜻도 포함된 것이었을 것이다
 
 
  (1) 6년만의 귀국
 
  李承晩은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부터 졸업 후의 자신의 진로에 대해 서울에 있는 게일(James S. Gale)과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등 外國人 宣敎師들이나 李商在 등 옥중동지들과 상의를 하고 있었다. 선교사들은 李承晩에게 韓國에는 할 일이 많다고 강조하면서 꼭 귀국하여 함께 일을 할 것을 권했다. 게일은 李承晩이 皇城基督敎靑年會(서울YMCA)에서 일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고,1) 언더우드는 한국에 있는 宣敎部가 1910년 가을에 설립할 계획인 聯合基督敎大學(a Union Christian College)의 교수로 부임해 주기를 바랐다.2)
 
  李承晩은 1910년 3월 말에 뉴욕에 있는 YMCA國際委員會를 방문하여 총무 모트(John R. Mott) 박사를 비롯한 책임자들을 만났다. 그들은 李承晩이 졸업한 뒤에 귀국하여 서울YMCA에서 일해 줄 것을 부탁했다. 모트는 1907년에 한국을 방문하여 대규모의 전도집회를 가진 적이 있었다.
 
 
 
 反日運動이나 革命 선동할 생각 없어
 
  그러나 李承晩은 언더우드가 서울에 세우려고 하는 대학의 교수직에 더 마음이 끌렸다. 그는 4월13일에 언더우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와이에도 일자리가 있으나 자기는 귀국하여 한국민을 상대로 기독교 교육사업에 종사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인들에게 서양문명의 온갖 축복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기초한 것임을 깨우쳐 주는 설교를 하면서, 美國 대학에서 전공한 國際法, 西洋史, 美國史 등을 가르치고, 나아가 이러한 學問 및 宗敎에 관련된 책을 번역도 하고 저술도 하고 싶다는 의향을 밝혔다.
 
  그는 이어 종교와 교육사업을 통해 反日運動이나 革命을 부추길 의도는 없으나 자기의 일거일동에 대한 일본당국의 경계와 감시가 가장 우려되는 점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YMCA에서 일할 경우 자신의 비타협적인 성격 때문에 일본인들과의 마찰을 피할 수 없을 것이므로 앞으로 설립될 대학에서 일하는 것이 나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또한 韓國에 돌아가서 부흥사가 되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가난한 백성들에게 福音을 전파하는 일에 일생을 바칠 각오도 서 있다고 덧붙였다.3)
 
  언더우드의 회답을 기다리고 있을 때에 李承晩은 서울YMCA의 질레트(Philip L. Gillett: 한국명 吉禮泰) 총무로부터 5월23일자로 된 취업초청장을 받았다. 질레트는 李承晩의 취업문제로 통감부의 소네 아라스케(曾彌荒助) 부통감을 만나 상의했는데, 소네는 李承晩이 YMCA에 취업하는 것에 대해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면서, 자기와 소네는 잘 아는 사이이므로 귀국한 뒤의 李承晩의 신변에 별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4) 서울YMCA는 李承晩을 1년간 「한국인 총무」(Chief Korean Secretary)로 기용하기로 하고 월급은 150円(美貨 75달러), 곧 연봉으로 900달러를 주겠다고 제의했다. 이러한 제의는 휴가로 본국에 와 있던 그레그(G. A. Gregg: 한국명 具禮九)가 모트 박사의 편지를 가지고 李承晩을 방문해서 한 것이었다.5)
 
 
 
 학생운동 담당할 책임자로 지목돼
 
  日本統監府는 李承晩이 덴버에서 愛國同志代表會를 주재한 사실 등 그동안의 동향에 대한 정보보고를 통보받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李承晩이 쓴 反日 「논설」이 실린 「共立新報」의 국내 배포를 금지하기도 했었는데, 그러한 통감부가 李承晩이 서울YMCA의 「한국인 총무」직을 맡아 귀국하는 것에 대해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천착해 볼 만한 일이다. 李承晩이 美國에 계속 머물면서 反日活動을 하는 것보다는 일단 귀국해서 종교활동을 하게 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는지 모른다.
 
  서울YMCA가 제시한 급료는 그 당시에 한국에서 일하던 외국선교사들의 평균연봉이 600∼800달러였던 사실에 비추어 볼 때에 꽤 높은 수준의 보수였다.6) 그뿐만 아니라 YMCA의 국제위원회에서 급료를 받는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활동이 곧 국제기관의 활동임을 뜻하는 것이므로 신변안전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李承晩이 서울YMCA의 「한국인 총무」로 기용된 것은 그의 옥중동지로서 서울YMCA를 이끌고 있던 李商在가 은밀히 사전교섭을 한 결과였다. 서울YMCA 학관의 학생회는 1910년 6월22일에 서울 근교의 津寬寺(진관사)에서 열린 제1회 學生夏令會를 계기로 급속히 활성화되었고, 그에 따라 서울YMCA는 학생운동을 전담할 간사를 물색하게 되었다. 결국 李承晩을 지목하고 교섭을 벌이게 된 것이었다.7)
 
  李承晩은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수여받은 다음날인 7월19일에 그레그에게 취업초청을 수락하는 답장을 썼다.8) 그는 앞으로 받을 급료에서 180달러를 미리 지급받아서 귀국에 필요한 배표와 기차표를 구입했다.
 
 
 
 
네브래스카州의 少年兵學校 방문

 
  歸國에 앞서 李承晩은 8월에 네브래스카州 헤이스팅스市로 朴容萬을 찾아가서 2주일 동안 少年兵學校 학생들과 함께 지냈다. 소년병학교는 박용만 등이 덴버 愛國同志代表會의 결의를 거쳐 1909년에 네브래스카州 당국의 묵인 아래 한국인 청소년들에게 군사교육을 실시한 데서 비롯되었다9)(「月刊朝鮮」 2003년 4월호, 「韓國人 최초의 政治學博士」 참조). 李承晩이 방문했을 무렵에는 27명의 학생들이 독립군 사관 양성을 위한 군사교육에 열중하고 있었다.
 
  박용만은 왕복여비를 보내어 李承晩을 헤이스팅스로 초대했는데, 李承晩이 도착했을 때에는 다른 일로 헤이스팅스를 떠나고 없었다. 金玄九는 李承晩이 소년병학교에 도착하자마자 기독교 부흥회를 본떠 일주일 동안 매일 너댓 차례의 찬송과 기도의 예배시간을 마련하고 「기도춤」을 추었다고 적고 있다. 또한 그는 李承晩이 부흥회에서 첫째 스티븐스를 사살한 張仁換, 田明雲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하얼빈에서 사살한 安重根은 一國의 명예를 더럽힌 범죄적 암살자에 불과하고, 둘째 일본과 같은 강대국에 군사적으로 대적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꿈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고 적고 있다.10) 李承晩에 대한 격렬한 비판자인 김현구의 이러한 서술은 다분히 과장된 것이기는 할 것이나, 귀국하여 기독교 선교사업에 헌신하기로 결심한 李承晩의 행동으로서는 전혀 거짓말은 아닐 것 같다. 당시 김현구는 소년병학교의 학생으로서 李承晩이 인도하는 그 집회의 현장에 있었다.
 
 
 
 유럽을 거쳐 시베리아 횡단철도로 귀국
 
  李承晩이 윌슨 총장 가족과 웨스트 대학원장과 어드먼 박사 등 친지들에게 작별 인사를 한 다음 뉴욕항에서 영국의 리버풀로 향하는 발틱호(S. S. Baltic)를 탄 것은 9월3일, 곧 「한일병합」 조약이 공포된 지 닷새 뒤였다. 李承晩이 미국을 떠나기에 앞서 「병합」 소식을 들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李承晩은 귀국하고 나면 언제 다시 출국할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으므로 귀국 길에 유럽 여러 나라를 잠깐씩이나마 둘러볼 생각이었다. 발틱호로 1주일 동안 大西洋을 항해한 끝에 리버풀에 도착한 그는 런던에서 다시 배로 도버해협을 거쳐 파리, 베를린, 모스크바 등 유럽의 대도시들을 둘러본 다음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고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했다.
 
  만주 평원을 거쳐 압록강 다리를 건널 때에 일본경찰의 까다로운 입국검사를 받으면서 그는 비로소 나라를 빼앗긴 설움을 실감했다. 평양을 거쳐 서울로 오는 京義線 열차의 차창 너머로 계속 눈에 들어오는 일본 관헌의 모습을 李承晩은 수심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고, 그들의 심문에 응하는 동포들의 태도에서 무언의 적개심을 감지할 수 있었다.11)
 
  열차는 어두워진 뒤에야 南大門역에 도착했다. 10월10일 오후 8시. 미국을 향해 떠난 지 만 5년 11개월 6일만이었다. 아들을 마중나온 李敬善은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民族紙들은 이미 폐간되고 없었다. 總督府 기관지로 새로 발행되고 있던 「每日申報」는 李承晩의 귀국사실을 다음과 같이 짤막하게 보도했다.
 
  〈美國에 유학하던 李承晩씨는 東部 蓮洞 儆新學校 교사로 被選되야 去10日 오후 8시10분에 南大門着 열차로 入城하였다더라.〉12)
 
  경신학교 교사로 피선되어 귀국했다는 말은, 李承晩이 언더우드가 계획하고 있던 경신학교 대학부(현재의 延世大學校)의 교수로 기용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웬만큼 알려져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그러나 언더우드의 계획은 그로부터 5년이나 지난 1915년 3월에 가서야 실현되었다.
 
 
 
(2) 전국 기독교학교 의학생회 조직에 주력

 
  일본 총독부의 지배 아래 계엄령과 같은 분위기 속에서 서울YMCA는 의식 있는 청년들의 유일한 집결장소가 되고 있었다. 이때의 서울YMCA가 얼마나 강력한 조직체였던가는 尹致昊, 李商在, 金麟, 金一善, 金奎植, 安國善 등 독립협회의 자주민권운동 이래의 활동가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YMCA학교의 각종 직업교육을 담당하는 교사 등 유급 직원이 1911년 3월 현재 83명이나 되었다는 사실로도 짐작할 수 있다.13) 그것은 국제적인 YMCA 조직의 힘을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서울YMCA에서의 李承晩의 직책은 韓國人總務로서 미국인 총무 질레트와 동격이었다. 또 한 사람의 미국인 선교사 브로크만(Frank M. Brockman)은 협동총무였다. 李承晩은 또 YMCA學校의 學監(곧 校長)으로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뒤이어 전국 학생YMCA의 연락간사 일도 맡았다.
 
  李承晩이 귀국했을 때에 서울YMCA에서는 대규모의 전도강연회가 열리고 있었다. 「한일병합」이 공포되자 외국 선교사 200여 명은 서울YMCA에서 포교방침 통일에 관한 회의를 열고, 10월1일부터 한달 동안 대규모의 전도강연회를 열기로 한 것이다. 이보다 앞서 기독교에서는 1909년부터 서울YMCA를 중심으로 「백만인救靈(구령)운동」14)이 전개되고 있었다.
 
  이때의 전도강연회에 대해서 「每日申報」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기사를 싣고 있다.
 
  〈布敎方針 기타 등의 일에 대하야는 극히 秘密하므로 인하야 비록 信徒라도 이를 知키 不能한 고로 報道키 不能하나, 대략 방침은 신도 감소함에 대한 선후책으로 정신적, 물질적 敎化를 施하고 政略○에 신도는 차제에 단연 배척하야 總督政治의 시정방침에 위반되지 않도록 設力한다더라.〉15)
 
  이러한 관측이 얼마나 정확한 것이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李承晩이 정열을 쏟은 전도활동의 성격을 가늠하는 데 참고가 된다.
 
  李承晩은 귀국하고 나서 맞은 첫 주일인 10월6일에 570명이 모인 학생집회에서 전도 강연을 하고, 바이블 클라스(聖經硏究班) 회원 143명을 획득했다. 이때에 그는 귀국해 보니까 「세 가지 시원한 것」이 있다는 말을 하여 청중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가 말한 세 가지 시원한 것이란 첫째로 임금 없어진 것, 둘째로 양반 없어진 것, 셋째로 상투 없어진 것이었다.16) 前 러시아 주재공사 李範晉 등 전직 관료들을 비롯하여 「梅泉野錄」의 저자 黃玹(황현) 등 많은 사람들이 王朝의 멸망에 비분강개하여 자결하고 각지에서 義兵이 다시 일어나는 상황에서 임금 없어진 것이 시원하다고 한 李承晩의 발언은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라고 하더라도 적지 않은 충격이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만큼 李承晩이 확고한 共和主義者가 되어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토요일은 討論會, 일요일은 바이블 클라스
 
  李承晩의 강연은 곧 그의 명성과 함께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每日申報」는 그의 강연활동을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鐘路靑年會 소속학교 校(學)監 李承晩씨는 該校學生의 知識을 발전하기 위하야 硏經班을 조직하고 再昨 오후 1시부터 敎育에 관한 사항으로써 일장 연설하얏는데, 각 학교 생도 600여 명이 참석하였다더라.〉17)
 
  이 기사와 나란히 「申報」는 다음과 같은 예고 기사도 싣고 있다.
 
  〈금일 하오 1시에 鐘路靑年會館에서 강연회를 開하고 금번 美國으로 歸來한 博士 李承晩씨가 該會學監으로 각 학교의 학생을 다수히 請邀하야 연설한다 하며, 동일 오후 3시에는 전과 같이 福音會를 開하고 鄭彬씨를 請邀講道한다더라.〉18)
 
  李承晩은 처음 6개월 동안은 서울에서 학생활동을 지도하는 데 전념했다. 그는 매주일 오후에 바이블 클라스를 인도했고, 매회 평균 189명씩의 학생들을 만났다. 그리고 서울YMCA연합토론회를 토요일마다 열었다. 이는 일찍이 그가 培材學堂에 다닐 때에 학생들로 하여금 協成會를 조직하게 하고 그 토론회를 주도하던 徐載弼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李承晩의 활동은 「每日申報」에 계속해서 보도되고 있다.
 
  〈鐘路靑年會 소속 청년학교 학감 李承晩씨가 昨日 오후 7시 반에 該校 내에서 敎育에 관한 사항으로 일장 연설하였는데, 방청하기 위하야 참석한 인원이 수백 명에 달하얏다더라.〉19)
 
  강연을 할 때마다 방청객이 수백 명씩 모였다는 것은 「博士 李承晩」이 얼마나 젊은이들에게 흠망의 대상이 되어 있었는가를 말해 준다. 李承晩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기도를 했고, 학과시간도 기도로 시작했다. 계단을 오르다가 갑자기 멈추어서서 영어로 기도를 하기도 했다. 그는 유머감각이 풍부하여 재치 있는 농담으로 학생들을 곧잘 웃겼고, 웬만한 일을 두고도 『원더풀, 정말 굉장하지…』라는 말을 잘하여, 학생들은 그를 「李굉장」이라고 불렀다. 이 호칭은 그에 대한 외경의 뜻도 포함된 것이었을 것이다. 낱말 하나하나에 감정을 담아 부흥회 목사 같은 열기가 있었다.20) 이 무렵의 YMCA학교 학생들 가운데에는 이때의 인연으로 일생 동안 李承晩과 같이 활동하는 林炳稷, 許政, 李元淳, 鄭求瑛 등이 있었다.
 
  이 무렵의 그의 정열적인 활동은 그가 YMCA국제위원회에 보낸 보고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나는 주일마다 다른 교회에 가서 설교하고 있고 오후의 바이블 클라스 지도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런 한편으로 YMCA학교에서 1주일에 12∼19시간의 강의를 합니다. 다른 학교에 가서 수시로 하는 짧은 강연말고도 YMCA학교 학생만을 위해 1주일에 3회의 특강을 합니다.〉21)
 
  그의 특강에는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전공한 萬國公法(國際法) 강의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만국공법을 강의하다가도 우리나라가 힘이 없었기 때문에 나라를 잃게 되었다고 강조하곤 했다.22)
 
  각 학교의 학생YMCA를 관리하고 새로 조직하는 것도 李承晩의 임무였다. 위의 편지에는 그러한 활동성과도 포함되어 있다.
 
  〈지난 1월에 우리는 서울에 또하나의 학생YMCA를 조직했습니다. 儆新學校에서는 학생YMCA회관을 별도의 건물로 마련했습니다. 이 회관은 H. G. 언더우드 박사가 주재한 특별집회로 헌당했고, F. M. 브로크만씨와 내가 연설을 했습니다.〉23)
 
  그의 이러한 보고는 공식 보고가 아닌 편지 형식의 것이었으나, 국제위원회에서 급여를 받는 그로서는 그것이 의무이자 또한 자신의 활동을 국제적으로 알리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집을 나와 회관 3층에서 혼자 기거
 
 
 
 
  李承晩은 YMCA회관 3층의 한 방에 혼자 기거하면서도 언제나 옷차림은 말쑥하고 세련되어 매우 핸섬해 보였고,24) 〈그 중키나 되는 키에 똥똥한 몸, 근심하는 듯한 얼굴, 악물은 듯한 입모습〉25)이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李承晩이 YMCA회관 3층에 혼자 기거한 것은 불행하게도 朴씨부인과의 불화 때문이었다. 李承晩이 귀국했을 때에 李敬善과 朴씨 부인은 東大門밖 昌信洞 627번지의 駱山(낙산) 중턱 성벽 밑 法輪寺(옛 地藏庵) 아래쪽에 있는 집에서 박간난이라는 하녀와 함께 살고 있었다. 집 위쪽의 골짜기에는 복숭아 나무가 우거져 있었다. 敬善은 74세의 노령이었다. 올리버는 李承晩이 막 귀국했을 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언덕바지의 작은 집에 여장을 푼 李承晩은 며칠밤을 두고 부친과 지난 6년 동안에 있었던 일들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정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두터워졌다.〉26)
 
  부친 못지않게 李承晩의 귀국을 반긴 사람이 朴씨 부인이었을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녀는 집 근처의 넓은 터에 채소도 가꾸고 복숭아를 따서 성 안에 내다 팔면서 생계를 꾸려 오고 있었다. 그러나 올차고 괄괄한 성품의 그녀는 아집이 강한 시아버지와 크게 반목하고 있었다. 특히 朴씨 부인이 아들 泰山을 시아버지 몰래 美國에 보냈다가 디프테리아로 잃고 난 뒤로는 더욱 그랬다. 李承晩이 귀국했을 때에 敬善은 아들을 보고 말했다.
 
  『네가 저년을 여편네로 생각한다면 너는 내 자식이 아니다!』27)
 
  한편 朴씨 부인은 朴씨 부인대로 여간 불평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李承晩은 YMCA회관 3층에 방을 얻어 집을 나오고 말았다.
 
 
  (3) 西間島 獨立軍基地 건설계획에 앞장서
 
  金龜(九)는 楊山學校 교장으로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한일병합」을 맞았다. 안악의 교육계몽운동자들 사이에서는 1909년의 제3회 하계사범강습회가 끝난 뒤부터 西間島 개척문제가 거론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崔光玉의 제의에 따른 것이었다. 그리하여 김구와 함께 양산학교 교사로 있던 崔明植이 10월부터 1910년 5월 중순경까지 거의 반년 넘어 서간도 일대를 둘러보고 돌아왔다. 그러나 최명식은 婆猪江(파저강) 일대에서 목격한 동포들의 비참한 생활상과 그들의 매우 낮은 교육수준을 보고 서간도 이주를 당장 실행하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압록강 상류의 江邊7邑(의주, 초산, 창성, 벽동, 자성, 위원, 삭주)에서 생산되는 각종 농산물과 뗏목 등을 중국과 교역하는 무역업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여 거기에서 생기는 수익금으로 서간도 이주자금을 마련하는 방안을 제안했다.28)
 
 
 
 보름 안에 15만원 모금하기로
 
  일본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국외에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마련하고 군대를 양성하여 국권을 회복하겠다는 獨立軍基地建設構想은 한국독립운동사의 중요한 흐름의 하나였다. 앞에서 보았듯이, 김구 자신도 1895년에 南原의 儒生 金亨鎭과 함께 서간도 일대를 둘러보고 金利彦의 의병부대에 참가했던 적이 있으며, 장련읍에 살 때에는 柳完茂로부터 北間島 이주를 권유받은 적도 있었다(「月刊朝鮮」 2002년 11월호, 「예배당과 학교의 개설, 그리고 結婚」 참조).
 
  독립군기지 건설 구상은 「병합」 직후에 비밀결사인 新民會에 의해서 구체적으로 추진되었다. 김구와 김홍량 등 황해도의 신민회 회원들은 1910년 9월과 10월의 두차례에 걸쳐서 서울의 신민회 본부에서 보낸 儆新學校 교사 金道熙로부터 신민회의 서간도 이주사업계획의 설명을 들었다.29)
 
  이 무렵에는 李東寧과 李會榮, 그리고 이들과는 별도로 朱鎭洙 등이 각각 독립군기지건설 후보지를 물색하기 위해 南滿洲 일대를 시찰하고 돌아왔다. 그리하여 12월 중순에 서울의 梁起鐸(양기탁) 집에서 新民會의 전국 간부가 참가한 비밀회의가 열렸다. 「大韓每日申報」의 총무이던 양기탁은 국채보상의연금을 횡령했다는 혐의로 1908년 7월에 구속되었다가 사장 베델(Ernest T. Bethell: 한국명 裵說)의 변호로 무죄석방되었는데, 이듬해 5월에 베델이 죽고 나서 영국인 만함(Alfred W. Weekley Marnham: 한국명 萬咸)이 신문사를 인수하여 1910년 5월에 비밀리에 일본 통감부에 신문을 팔아버리자 신문사를 물러나와 있었다.30)
 
  김구도 이 회의에 참석했다. 그는 新民會의 黃海道總監이었다. 이때의 회의에 대해 「백범일지」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경성에서 양기탁이 주최하는 비밀회의 통지를 받고 나도 달려가 참석했다. 양기탁의 집에 출석된 인원은 양기탁, 이동녕, 안태국, 주진수, 이승훈, 김도희, 김구 등이었다. 비밀회의를 열어 지금 倭가 경성에 이른바 總督府라는 것을 설치하고 전국을 통치하니, 우리도 경성에 비밀리에 都督府를 설치하여 전국을 다스릴 것, 만주에 이민계획을 실시할 것과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장교를 양성하여 광복전쟁을 일으킬 것, 이를 준비하기 위해 李東寧을 먼저 만주에 파송하여 토지 매수, 가옥 건축과 기타 일반을 위임하고, 그 나머지 참석한 인원으로 각 지방 대표를 선정하여, 15일 이내에 황해도에서 김구가 15만원, 평남의 안태국이 15만원, 평북의 이승훈이 15만원, 강원의 주진수가 10만원, 경성의 양기탁이 20만원을 모집하여, 이동녕의 뒤를 파송하기로 의결하고 즉각 출발하였다.〉31)
 
  위의 회의 결정 사항 가운데에서 만주에 무관학교를 설립한다는 것과 그것을 실행하기 위한 자금마련을 분담했다는 내용은 新民會事件(당시의 일본당국의 호칭은 「梁起鐸等 保安法違反事件」) 공판기록 등 다른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그러나 총독부에 대항하는 한국인의 비밀통치기관으로 都督府를 설치할 것을 결의했다는 내용은 「백범일지」에만 적혀 있다.
 
 
 
 安昌浩와 梁起鐸이 新民會 조직
 
  신민회는 1907년 4월에 安昌浩, 梁起鐸, 全德基, 李東輝, 李東寧, 李甲, 柳東說 등을 중심으로 조직된 비밀결사였다. 신민회 창건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안창호였다. 1902년에 미국에 건너간 그는 1907년 1월 초에 캘리포니아州 로스앤젤레스 근교의 리버사이드에서 李剛, 林俊基 등과 함께 大韓新民會를 조직했었다. 그해 2월경에 귀국한 安昌浩는 먼저 「大韓每日申報」의 총무로서 국내 인사들 사이에서 지명도가 높은 梁起鐸을 만나서 신민회 결성문제를 상의했다. 양기탁은 안창호와 같은 평양사람이었다. 양기탁은 합법단체로 하자고 했으나 안창호는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각종 단체의 폐단을 지적하면서 그것과는 구분되는 비밀조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32) 그리하여 「大韓每日申報」를 중심으로 한 계몽운동가, 구한국 무관 출신 인사, 평안도 일대의 민족자본가, 미국의 共立協會 등 국내외의 다양한 종류의 인사들이 참여하여 신민회를 결성했다.33) 「백범일지」는 신민회의 성격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국내 국외를 통하여 정치적 비밀결사가 조직되니, 곧 신민회였다. 안창호는 미주로부터 귀국하여 평양에 大成學校를 병설하여 청년을 교육하는 것을 표면의 사업으로 내세우면서 이면에서는 양기탁, 안태국, 이승훈, 전덕기, 이동녕, 주진수, 이갑, 이종호, 최광옥, 김홍량과 그 외 몇 사람을 중심으로 하여 당시 400여 명 정수분자로 조직된 단체, 곧 신민회를 훈련하고 지도했다.〉34)
 
  安昌浩는 安重根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사살 사건이 있은 직후에 그 배후혐의로 龍山憲兵隊에 구류되었다가 석 달 만에 석방된 뒤 1910년 3월에 中國을 거쳐 다시 미국으로 갔다.
 
 
 
 海西敎育總監이자 新民會黃海道總監
 
  김구가 언제부터 신민회에 참여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서 그의 신민회 참여에는 崔光玉의 영향이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평안도 출신의 최광옥은 평안도와 황해도에 걸쳐 신교육운동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었다. 또한 그는 평안도 일대에서 신민회 조직을 처음 시작한 인물로서 안창호가 신민회의 일을 일임했을 정도로 그 조직확대에도 큰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35) 김구는 기독교에 입교했을 때부터 그와 교분을 가지고 정신적으로 큰 영향을 받아왔다. 그러한 최광옥이 김구에게 신민회에 참여할 것을 권유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김구가 海西敎育總監의 자격으로 황해도 일대를 순회할 때에는 신민회의 황해도 총감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지방 순회는 표면상으로는 교육진흥을 위한 것이었으나 내면적으로는 신민회의 비밀조직 활동의 성격도 있었다. 그가 양기탁 집에서 열린 신민회 간부회의에서 15만원이라는 거금을, 그것도 보름 안에 모금하기로 약속하고 돌아올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조직 기반을 믿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회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金龜는 양기탁의 동생 梁寅鐸 부부와 동행했다. 양인탁은 載寧재판소의 서기로 임명되어 부임하는 길이었다. 같이 사리원역에서 내려 양인탁 부부는 재령으로 갔고 김구는 안악으로 왔다. 그런데 출발에 앞서 양기탁은 김구에게 회의에서 있었던 일은 자기 동생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그것은 신민회의 활동이 얼마나 철저한 비밀 속에 추진되고 있었는가를 보여 주는 일이다.
 
 
 
 白象圭의 사랑방이 「바보 클럽」의 아지트
 
   김구가 참석한 新民會 간부회의가 열렸을 때에는 서울YMCA에서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여러 가지 집회가 열리고 있었고, 특히 귀국한 지 얼마되지 않은 「博士 李承晩」의 활동이 서울의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고 있을 때였는데, 서울YMCA의 동향에 대해 신민회 인사들, 특히 양기탁이나 김구가 어떤 관심을 가졌었는가 하는 것이 궁금하다. 양기탁은 일찍이 李承晩과 囹圄生活을 같이 하면서 李承晩이 개설한 옥중학교에서 소년수들을 맡아 가르친 적이 있었고 그가 주재하던 「大韓每日申報」에 미국에 있는 李承晩의 기사가 실리기도 했던 것으로 미루어, 李承晩이 귀국한 뒤에 두 사람 사이에 전혀 연락이 없지는 않았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어떠한 자료에도 이와 관련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흥미 있는 것은 일본 경찰이 작성한 한 新民會 관계 설명 자료에 李承晩을 「三南」 지방의 조직 책임자로 적고 있는 점이다.36)
 
  李承晩도 YMCA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지만은 않았다. 그가 감옥에 있을 때에 「제국신문」의 발행인으로서 그에게 「논설」을 쓰게 했던 李鍾一을 11월6일에 찾아가고 있는 것을 보면, 비록 선택적이기는 했더라도, 구국운동을 하고 있던 다른 지식인들과도 만나고 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李鍾一은 李承晩과 만났던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美國에서 온 李承晩이 나를 찾아왔다. 民權運動의 동지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民衆運動을 일으킬 것을 권유하고, 靑年層 소집을 의뢰했다. …… 역시 민중운동의 선봉은 宗敎人이 담당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신앙적 차원으로 구국운동을 일으켜야 하기 때문이다.〉37)
 
  이무렵에 李承晩이 가장 자주 만난 사람은 자기를 초청하게 해준 李商在였던 것같다. 李承晩은 그를 「한국의 톨스토이」라고 지칭했다.38) 그밖에도 李承晩은 YMCA의 주요간부들과 자주 어울렸다. YMCA회관에서 멀지 않은 서린동의 白象圭집 사랑방이 그들의 아지트였다. 白象圭는 중인 출신의 큰 부자로서 1901년에 도미하여 브라운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1906년에 돌아온 경제학자였다. 일본 경찰의 철저한 감시 속에서 그들은 몸조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네 모임을 「바보 클럽」이라고 했다.39) 이 「바보 클럽」 멤버들의 사진 한 장이 보존되어 있다. 1911년에 서대문 밖으로 놀러갔을 때에 찍은 것인데, 사진에 보이는 金奎植과 玄楯(현순)은 뒷날 上海臨時政府와 歐美委員部에서 李承晩과 같이 활동했고, 옥중동지였던 申興雨와 그밖의 사람들은 李承晩이 국외에서 활동하는 동안 유력한 국내인맥이 되었다.
 
 
 
 安明根이 찾아와 협조 요청
 
  안악으로 돌아온 김구는 金鴻亮(김홍량)과 상의하여 이주자금 모금을 서둘렀다. 김홍량도 가산과 토지를 정리하여 서간도로 이주할 준비를 했다. 김구는 高貞華(고정화)와 柳文馨(유문형)을 신천군 담당자로, 安允在를 송화군 담당자로 삼아 이주자 모집을 서둘렀다.40)
 
  그때에 장연의 李明瑞가 모친과 동생 明善과 함께 안악으로 김구를 찾아와서 서간도에 먼저 가서 뒤이어 도착하는 동지들의 편의를 제공하겠다고 말했다. 김구는 李明善의 가족을 인도하여 서간도로 먼저 출발시켰다. 서간도로 이주한 뒤의 이명서의 활동상황은 알려진 것이 없으나, 그는 1920년에 동지 15명을 인솔하고 국내에 들어와서 殷栗郡守를 사살하고 일본군 수비대와 격렬한 전투를 벌이다가 적탄에 맞아 사망한다.41)
 
  김구는 자기가 서울에 가 있는 동안에 信川에 있는 安明根이 안악에 와서 여러차례 자기를 찾았다는 말을 들었다. 安明根은 安重根의 사촌동생이었다. 천주교도인 安明根은 같은 교도인 元行燮의 집에 묵으면서 김홍량을 찾아가서 상의했고, 그밖의 몇몇 사람들과도 우연히 만났다.
 
  얼마가 지난 어느 날 밤중에 안명근이 다시 양산학교로 김구를 찾아왔다. 그는 자기가 각 군의 부자들을 만났는데, 모두들 독립운동자금 지원을 약속해 놓고도 내어 놓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래서 안악읍의 몇몇 부자를 총기로 위협하여 다른 지방에도 영향을 미치게 했으면 한다면서, 김구에게 응원과 지도를 요청했다.
 
 
 
 『닷새 동안은 自由天地가 될 터이니…』
 
  김구가 구체적인 계획을 묻자 안명근은 이렇게 대답했다.
 
  『황해도 일대의 부자들로부터 금전을 나누어 거두어 가지고 동지를 모으고, 電信電話를 단절하고 각 郡에 흩어져 있는 왜구는 각기 그 군에서 쳐죽이라는 명령을 발포하면 왜병 대대가 도착하기 전 닷새 동안은 自由天地가 될 터이니, 더 나아갈 능력이 없다 하여도 당장의 분을 풀 수 있지 않겠습니까?』
 
  김구는 안명근을 붙잡고 만류했다.
 
  『형이 旅順事件을 목도한 나머지, 더욱이 혈족관계로 더한층 분한 피가 끓어올라 이와 같은 계획을 생각해 낸 듯하나 닷새 동안 황해도 일대에 자유천지를 조성하더라도 금전보다 중요한 것이 동지의 결속인데, 동지는 몇 사람이나 얻었나요?』
 
  여순사건이란 安重根이 그해 3월에 여순감옥에서 사형당한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安明根은 여순감옥으로 가서 사촌형이 처형되는 것을 보고 왔었다.
 
  『나의 절실한 동지도 몇십 명은 되지만 형이 동의하신다면 인물은 쉽게 얻을 줄 압니다』
 
  안명근은 김구가 나서기만 하면 쉽게 동지는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신민회의 서간도이주계획을 은밀히 추진하고 있던 김구로서는 안명근을 간곡히 만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백범일지」는 김구가 안명근에게 대규모의 전쟁을 하려면 인재를 양성하지 않고는 성공을 기약할 수 없고 일시적인 격발로는 닷새는커녕 사흘도 기약하기 어려울 것이므로 분기를 참고 많은 청년을 북쪽지대로 데려가 군사교육을 실시하는 것이 당장 급한 일이라고 설득했다. 안명근도 김구의 말에 수긍했으나 자신의 계획과 다른 점을 발견하고는 만족스럽지 못한 표정으로 돌아갔다.42)
 
 
 
 安重根의 代父神父의 제보로 체포돼
 
  한편 「백범일지」의 서술과는 달리 이때에 安明根은 北間島로 가서 義兵을 모집하여 거사할 계획을 세우고 자금 모금을 하고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43) 북간도는 安重根도 머물렀던 곳이다. 安明根은 김구를 찾아오기 전에 이미 11월 18, 9일경에 송화의 申錫忠 진사에게서 3,000원을 받아냈었고, 이어 11월30일경에 신천의 李源植에게서 6,400여 원을 받아냈었다. 또한 11월21일에 신천의 閔泳卨에게 2,000원을 요구했었는데, 閔은 이를 거절하고 이 사실을 재령의 日本憲兵隊에 알렸다.44)
 
  安明根은 1911년 1월12일에 평양에서 일본헌병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런데 그가 체포된 것은 어처구니없게도 여순감옥에서 安重根의 마지막 고해성사를 집례한 안중근의 대부 빌렘(J. Wilherm : 한국명 洪錫九) 신부 때문이었다. 빌렘 신부는 그의 교도인 安明根의 모금운동을 서울의 대주교 뮤텔(G. C. M. Mutel : 한국명 閔德孝)에게 알렸고, 뮤텔이 이를 다시 총독부 경무총감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次郞)에게 직접 제보했던 것이다.45)
 
  서울 경무총감부로 압송된 안명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의 사촌동생이라는 점 때문에 일본 헌병들로부터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고문을 견디지 못한 안명근은 그동안의 일을 모두 자백하고 말았다.
 
 
 
 자금제공한 申進士는 江에 몸을 던져 자살
 
  1911년 정월 초닷새(음력)날이었다. 김구가 아직 잠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인 이른 아침에 일본 헌병 한 명이 그가 묵고 있는 양산학교 사무실로 들이닥쳤다. 헌병은 김구에게 헌병분견소장이 잠시 면담할 일이 있다면서 같이 가자고 말했다. 헌병대에 도착하자 金鴻亮을 비롯하여 都寅權 등 양산학교 교직원들이 불려와 있었다. 일본헌병들은 경무총감부의 명령이라면서 모두 임시구류에 처한다고 말했다. 이삼일이 지나자 체포된 사람들을 모두 재령으로 옮겨 가두고, 황해도 일대에서 애국지사로 알려진 거의 모든 사람들을 잡아들였다. 김구는 이 때에 체포된 인물 59명의 이름을 「백범일지」에 적고 있는데,46) 이들 가운데 18명은 안악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거의가 安岳勉學會나 김구와 함께 楊山學校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사람들이었다.
 
  체포된 대부분의 사람들은 안명근의 계획과 관련이 없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황해도지방 반일세력을 뿌리뽑을 좋은 기회라고 판단한 총독부는 무려 160여 명을 체포했다고 한다.47)
 
  체포된 사람들은 재령에서 사리원으로, 그리고 서울로 압송되었다. 안명근에게 운동자금을 제공한 송화의 申錫忠 진사는 압송되는 도중에 재령강 철교를 건널 때에 강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사리원에서 서울로 호송되는 기차에는 平北 定州의 李昇薰이 타고 있었다. 그는 김구 일행이 묶여 가는 것을 보고 차창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기차가 용산역에 도착할 즈음에 형사 한 사람이 이승훈에게 인사를 하고 물었다.
 
  『당신 이승훈씨 아니오?』
 
  『그렇소』
 
  『경무총감부에서 영감을 부르니 좀 갑시다』
 
  이렇게 하여 이승훈은 기차에서 내리는 즉시 김구 등과 함께 묶여서 헌병대로 연행되었다.
 
  安明根사건과 무관한 李昇薰이 이렇게 체포되었다는 것은 新民會 간부들에 대한 체포도 동시에 단행되었음을 말해 준다. 이승훈은 신민회 평안북도 총감이었다. 김구가 적은 체포자 59명의 명단에는 「梁起鐸等 保安法違反事件」, 곧 新民會事件에 연루된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된 신민회의 총감독 겸 경기도 총감 梁起鐸, 평안남도 총감 安泰國, 강원도 총감 朱鎭洙, 그밖에 주요활동가인 玉觀彬, 金道熙 등의 이름이 함께 열거되어 있다.
 
 
 
 抵抗的民族主義의 표상
 
  경무총감부는 검거된 인사들을 두 사건으로 나누어서 다루었다. 黃海道 인사들에 대해서는 安明根과 함께 권총으로 부자들을 위협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한 사실을 들어 「강도 및 강도미수사건」으로, 그리고 梁起鐸 등 신민회 간부들에 대해서는 西間島에 집단이주를 하여 新韓民村을 건설하고 武官學校를 설립하여 기회를 보아 獨立戰爭을 일으키려 기도함으로써 治安을 방해했다고 하여 「梁起鐸等 保安法違反事件」으로 다루었던 것이다.
 
  이때에 자행된 일본 헌병경찰의 잔혹한 고문은 특히 유명한데, 「백범일지」에 그려져 있는 이때의 김구의 모습은 한국의 抵抗的民族主義의 표상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먼저 조사를 받기에 앞서 김구는 다음과 같은 자기 반성과 각오를 했다.
 
  〈국가가 망하기 전 구국사업에 성의 성력을 십분 발휘하지 못한 죄를 받게 된 것으로 자인했다. 나는 깊이 생각했다. 이와 같은 위난한 때를 당하여 응당 지켜갈 신조가 무엇인가를 연구했다. 『드센 바람에 억센 풀을 알고 국가가 혼란할 때에 진실한 신하를 안다』는 옛 가르침과 死六臣, 三學士가 죽어도 꺾이지 않았다는 高後凋 선생의 가르침을 다시금 생각했다.〉48)
 
  이처럼 결정적인 순간에 김구의 행동의 준거가 되는 것은 기독교의 가르침이 아니라 儒敎의 義理思想이었던 것이다.
 
  어느 날 해가 진 뒤에 신문실로 끌려갔다. 이름, 나이, 주소를 묻고 나서 취조하는 자가 물었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에 왔는지 알겠느냐?』
 
  『잡아오니 끌려왔을 뿐 이유는 모른다』
 
  그러자 더는 묻지 않고 다짜고짜로 손발을 묶고 천장에 매어 달았다. 심한 고문에 김구는 기절했다. 저들은 얼굴과 전신에 물을 끼얹어 깨워서는 다시 신문했고, 김구는 또 기절했다. 신문하던 세 명이 김구를 들어다가 유치장에 눕힐 때에는 동창이 밝았다. 그런데 김구는 놀랍게도 이때에 심한 자괴심을 느꼈다고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처음에 성명부터 신문을 시작하던 놈이 불을 밝히고 밤을 새우는 것과 그놈들이 온 힘을 다해 사무에 충실한 것을 생각할 때에 자괴심을 견딜 수 없었다.
 
  나는 평소에 무슨 일이든지 성심껏 보거니 하는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나라를 남에게 먹히지 않게 구원하겠다는 내가, 남의 나라를 한꺼번에 삼키고 되씹는 저 왜구와 같이 밤을 새워 일한 적이 몇 번이었던가 스스로 물어보니, 온몸이 바늘방석에 누운 듯이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내가 과연 亡國奴의 근성이 있지 않은가 하여 부끄러운 눈물이 눈시울에 가득 찼다.〉49)
 
  이러한 서술은 그야말로 애국심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國家는 亡하였으나 人民은 亡하지 않아…』
 
  하루는 최고 신문실이라는 데로 불려나갔다가 뜻밖에도 15년 전에 仁川 감영에서 치하포사건 재판을 받을 때에 방청을 하다가 김구의 호령으로 『칙쇼! 칙쇼!』하면서 후문으로 나가버리던 와타나베(渡邊)와 마주 앉았다. 와타나베는 총독부 기밀과장이 되어 있었다. 그는 김구를 보고 말했다.
 
  『내 가슴에는 X광선을 대고 있어서 너의 일생 행적과 비밀을 모두 알고 있으니, 털끝만큼이라도 숨기면 이 자리에서 때려죽일 터이다!』
 
  그러나 와타나베는 김구가 치하포에서 일본인을 쳐죽인 金昌洙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느끼는 김구의 소회는 그의 동포에 대한 신뢰가 어떠했는지를 여실해 말해 준다.
 
  〈그러고 보니 국가는 망하였으나 인민은 망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나는 평소에 우리 한인 정탐을 몹시 미워해서 여지없이 공격하곤 했는데, 나에게 공격을 받은 정탐배까지도 자기가 잘 아는 그 사실만은 밀고를 하지 않고 왜놈에 대하여 비밀을 지켜준 것이 아닌가. …… 그러고 보면 각처 한인 형사와 고등정탐까지도 그 양심에 애국심이 조금이나마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50)
 
  이러한 술회는 김구의 대중표출자형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잘 말해 준다. 그리하여 김구는 『사회에서 나를 이같이 동정해 주었으니 나로서는 최후의 한 숨까지 동지를 위하여 분투하고 원수의 요구에 응하지 않으리라』하고 결심했다는 것이다. 김구의 민족에 대한 이러한 신뢰감은, 나라가 日本에 병탄된 것은 우리 민족, 특히 지도층이 무능했기 때문이며, 따라서 기독교로 교화시키지 않고는 민족의 장래가 없다고 생각한 李承晩의 경우와는 대조적인 것이었다.
 
 
 
 머리를 기둥에 들이받고 정신 잃어
 
  김구는 자신이 신세를 지고 있는 양산학교 교주 김홍량을 어떻게 해서든지 풀려나게 하고 싶었다. 김홍량은 여러 면에서 활동력과 품격이 자기보다 나으므로 신문받을 때에 그에게 유리하도록 진술하기로 결심하고, 『龜(곧 거북이)는 진흙 속에 빠지리니 鴻(곧 기러기)은 해외로 날으라』고 혼자 되뇌었다고 한다.
 
  「백범일지」에는 이밖에도 믿기 어려울 만큼 감동적인 이야기가 몇 가지 더 서술되어 있다.
 
  김구는 수사관들이 그를 달아매고 때릴 때에도 옛날 朴泰輔(박태보)가 보습 단근질을 당할 때에 『이 쇠가 식었으니 다시 달구어 오라』고 한 구절을 암송했다. 겨울이라서 그랬는지 수사관들은 겉옷만 벗기고 洋織 속옷은 입힌 채로 결박을 하고 때렸는데, 김구는 『속옷을 입어서 아프지 않으니 속옷을 다 벗고 맞겠다』고 하여 매번 알몸으로 매를 맞아서 온전한 살가죽이라고는 남아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51)
 
  김구는 검찰로 송치될 때까지 여덟 차례 신문을 받았다. 일곱 번째가 와타나베의 신문이었는데, 이때말고는 신문받을 때마다 기절했다.
 
  여덟 번째 신문 때에는 각 과장과 主任警視 일여덟 명이 나란히 앉아서 김구를 위협했다.
 
  『너의 동류가 대부분 자백하였거늘 너 한 놈이 자백을 않으니 심히 어리석고 완고하다. 토지를 사들인 지주가 논밭의 뭉우리돌을 골라 내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냐! 네가 아무리 입을 다물고 혀를 묶어 한마디도 발설하지 않으려 해도 여러 놈의 입에서 네 죄가 발각되었으니, 지금 당장 말하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때려 죽이겠다!』
 
  김구는 安明根의 일과 西間島 이주계획의 일에 다같이 연루되어 있었으므로 두가지를 모두 실토하라는 것이었다.
 
  『나를 논밭의 뭉우리돌로 알고 파내려는 그대들의 노고보다 파내어지는 나의 고통이 더욱 심하니 내가 자결하는 것을 보라!』
 
  이렇게 말하고 나서 김구는 머리를 기둥에 들이받고 정신을 잃었다.52)
 
 
 
 『아내가 나이 젊으니 몸이라도 팔아서…』
 
  「백범일지」는 이때의 일본인들의 수사방법이 첫째 가혹한 고문, 둘째 굶기는 것, 셋째 회유의 세 가지였다고 소개하면서, 인내하기 어려운 것은 둘째와 셋째 방법이었다고 적고 있다.
 
  근 석 달 동안 아내 최준례는 매일 사식을 가지고 와서 안에까지 들리도록 큰 소리로 말했다.
 
  『김구의 밥 가지고 왔으니 들여 주시오』
 
  그러나 일본 경찰은 사식을 들여 주지 않았다.
 
  『깅카메 나쁜 말이 했소데, 사식이레 일이 없소다』
 
  「깅카메」란 「金龜」의 일본말 발음이다. 「백범일지」의 다음과 같은 구절은 굶기는 것이 얼마나 혹독한 고통이었는가를 실감하게 한다.
 
  〈그런 때에 다른 사람들이 문전에서 사식을 먹으면 고깃국과 김치 냄새가 코에 들어와서 미칠 듯이 먹고 싶어진다. …… 나도 남에게 해가 될 말이라도 하고서 가져오는 밥이나 다 받아먹을까, 또한 아내가 나이 젊으니 몸이라도 팔아서 좋은 음식이나 늘 하여다 주면 좋겠다 하는 더러운 생각이 난다.〉53)
 
  기막히는 고백이 아닐 수 없다. 김구의 지도력은 이러한 처절한 고통을 통하여 단련되었다. 그리고 이때에 느꼈던 이러한 감정을 두 아들에게 유서를 남기는 요량으로 쓴 자서전에 그대로 적고 있는 것은 김구의 정직성을 솔직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김구는 같이 검거된 사람들과 함께 경시총감부에서 1911년 4월 초순에야 검찰에 송치되어 구치감으로 옮겨졌다.54)
 
 
  (4) 37일 동안 全國巡廻傳道하며 學生YMCA 조직
 
  김구가 검찰의 조사를 받고 있던 1911년 초여름에 李承晩은 YMCA의 브로크만과 함께 전국을 순회하면서 전도여행을 했다. 여행의 목적은 전국의 모든 기독교계 학교들을 방문하여 학생YMCA를 조직하는 일이었다. 1911년도 서울YMCA의 전국학생사업비 예산이 1910년도 지출 총액 229원의 아홉 배나 되는 1,995원으로 급증하고 있는 것55)은 이때에 YMCA가 얼마나 지방의 학생YMCA를 조직하는 데에 힘을 쏟고 있었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그 일은 전국 학생YMCA 연락간사 李承晩이 주도한 것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처음이자 마지막 「韓國의 發見」
 
  李承晩은 이때의 순회여행 결과를 YMCA국제위원회에 아주 자세히 보고하고 있다.56) 여행기간은 5월16일에서 6월 21일까지 37일 동안이었다. 이 기간에 李承晩은 13개 宣敎部(mission station)를 방문했고, 33회의 집회를 열었다. 집회에는 7,535명의 학생들이 참석했다. 李承晩은 자기네가 여행한 거리를 모두 합치면 2,300마일(약 3,700km)쯤 된다고 말하고, 아홉 가지 교통수단을 이용하여 여행을 했다면서 그 아홉 가지 교통수단별 거리를 도표로 꼼꼼하게 표시했다. 기차여행이 1,418마일(약 2,282km)이었고, 선박여행이 550마일이었다. 말이나 짐실리는 나귀를 타고 이동하기도 했다. 말을 타고 124마일, 나귀를 타고 140마일을 여행했다. 두 종류의 수레를 타고 50마일, 걸어서 7마일, 인력거와 가마를 타고 2마일을 여행했다.
 
  이 여행은 李承晩 자신에게는 조국의 실정을 직접 목격하고 체험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그에게 「韓國의 發見」이었다. 여행한 거리로 보아 13개도를 두루 다닌 것이 틀림없다. 기차여행을 한 거리만 하더라도 京釜線, 京義線, 湖南線, 京元線을 합친 거리(1,405km)의 거의 두 배에 가까운 거리이다. 그러한 규모의 한국여행은 난생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때에 그의 강연을 들은 7,535명의 학생들 대부분은 그 지방의 지도자로 성장하여 나라잃은 설움을 겪는 민중들에게 「博士 李承晩」의 신화를 전파했을 것이다.
 
 
 
 私立學校들은 잇달아 폐쇄돼
 
  李承晩은 보고편지에서 〈대부분의 사립학교들은 재정난과 정치적 이유로 폐쇄 직전에 있습니다〉하고 적었다. 정치적 이유란 私立學校令에 따른 統監府 이래의 日本의 사학억제정책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때의 실정을 「每日申報」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合倂이래로 지방에 설립한 私立基督學校의 폐지가 백여 처에 달하였다더라.〉57)
 
  병탄된 지 석 달 만에 기독교 학교가 100여 곳이나 폐쇄되었다는 것은 총독부의 탄압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이 편지에는 언급하지 않았으나 李承晩은 이때에 釜山에 갔던 일을 그 뒤에 쓴 저서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초량의 어느 학교를 찾아갔더니, 주무원의 말이 그날이 학교문을 마지막으로 여는 날이라고 했다. 까닭을 묻자 주무원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팔구년 전에 동리 유지들이 자금을 염출하여 땅을 많이 사서 학교 교사를 크게 짓는 한편 그옆에 商業會議所를 설치하여 그곳에서 해마다 2,000원씩 학교경비를 지원하게 했다. 학교는 확장되어 학생이 거의 300명 가량 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일전에 學部에서 日人敎師를 보내어 교무를 총괄하게 하고, 그 교사는 상공회의소에서 보내오는 돈을 자기가 맡아 쓰겠다고 했다. 돈이야 어차피 학교경비로 쓸 것이므로 괜찮을 것이나, 이 큰 교사와 넓은 땅이 일본인에게 넘어갈 것이므로 불가불 학교문을 닫기로 결정했다는 것이었다. 이에 李承晩은 〈내가 간신히 두어 마디 말로 위로하려 하다가 그만두고〉돌아왔다고 했는데, 왜 그랬는지 딱히 알 수 없다. 경향 각처의 사립학교들이 이렇게 일본인들의 관할로 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58)
 
  李承晩의 보고편지는 이렇게 이어진다.
 
  〈따라서 기독교계 학교에는 학생들이 몰려들어 거의 모든 학교는 수용할 교실이 없어서 곤란을 겪고 있습니다. 한 학교에서는 학생 20명이 36평방피트(약 6평)밖에 안 되는 방에서 먹고 자고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남부지방에 있는 두 학교는 매달 5달러씩 지원을 받고 있을 뿐이어서 그 지방의 모든 교회지도자들이 학교 유지비를 갹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학생들은 전도정신으로 충만해 있다고 李承晩은 적었다. 그들은 다른 아이들을 교회로 데려오는 것을 자신들의 의무로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그 보기로 李承晩은 全州의 경우를 들었다. 전주에서는 열네 살난 한 학생이 지난 한 해 동안에 200명이 넘는 아이들을 바이블 클라스에 데리고 왔다고 했다.
 
 
 
 信聖學校 학생들의 車載明 환영모습
 
   또한 李承晩은 평북 宣川에 갔을 때에 목격한 일을 자세히 적었다. 선천에서는 중학생 124명이 車載明이라는 선배 졸업생을 유교가 성한 지역인 경상북도에 전도사로 파송해 놓고 있었다. 124명이라는 숫자는 전교생 숫자일 것이다. 車載明은 경상도에 가서 7개월 동안 전도활동을 했는데, 학생들은 그에게 여름 휴가에 집에 다녀 갈 수 있도록 여비를 보냈다. 그렇게 하여 귀향하는 車載明을 李承晩은 기차 안에서 우연히 만나서 동행했다. 그 학교는 선교사 맥큔(G. S. McCune: 한국명 尹山溫)이 교장인 信聖學校였다. 열차가 선천역에 도착하자 맥큔을 비롯한 모든 교사들과 전교생이 몰려와서 차재명을 뜨겁게 환영했다. 학생들은 차재명을 어깨에 태우고 행진하면서 이날을 위해 특별히 만든 환영의 노래를 불렀다. 학생들의 행진을 구경하는 군중들 속에서 한 늙은 부인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차재명의 어머니였다. 차재명은 뒤에 언더우드에 발탁되어 목사가 되었고, 해방 이후까지 서울 새문안敎會에서 시무하다가 한국전쟁 때에 납북되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李承晩과 브로크만은 開城의 韓英書院에서 열린 제2회 全國學生夏令會에 참가했다. 사실 李承晩의 전국순회의 직접적인 목적은 이 학생하령회에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전국의 학생대표들이 참석하도록 권유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하령회는 李承晩이 준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59) 이때의 서울YMCA의 학생하령회는 미국의 부흥전도사 무디(Dwight L. Moody)가 주도했던 夏令會(Summer Conference)를 본뜬 것이었는데, 李承晩은 조지워싱턴 대학교 재학시절에 매사추세츠州의 노스필드에서 열린 학생하령회(「만국학도공회」)에 참가한 적이 있었다(「月刊朝鮮」 2003년 2월호 「아들 泰山을 美國에서 잃다」 참조). 李承晩은 그때의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開城에서 열린 제2회 學生夏令會를 주도
 
   이 제2회 학생하령회에는 남북의 21개 기독교계 학교에서 93명의 학생대표가 참석했다. 이것은 전년에 津寬寺에서 열렸던 제1회 하령회 때에 참가한 학생대표 46명의 두 배가 되는 숫자였다. 하령회 대회장은 전년과 마찬가지로 尹致昊였다.
 
  李承晩은 이 하령회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뉴욕에서 온 캠프벨 화이트(Campbell White)씨와 인도에서 온 셔우드 에디(Sherwood Eddy)씨가 중요한 연사였습니다. 하령회는 큰 축복이었으며, 우리는 모든 비기독교 학교는 기독교학교 학생들에 의해서만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을 이전보다 더욱 확실히 깨닫고 돌아왔습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이 땅의 많은 젊은이들이 다가오는 다음 학년 동안에는 그리스도를 위해 승리하도록 기도해 주십시오.〉60)
 
  셔우드 에디는 李承晩이 한성감옥에 있을 때에 영어 「신약성서」를 차입해 주었던 순회 선교사였다(「月刊朝鮮」 2002년 6월호, 「基督敎人이 되어 獄中傳道」 참조). 그러나 이 하령회는 어처구니없게도 총독부 경무총감부가 악명높은 105人事件(이른바 데라우치(寺內)總督謀殺未遂事件)을 날조하는 빌미가 되었다.
 
  李承晩은 그 바쁜 일정 속에서도 그의 지론인 번역사업에도 힘을 썼다. 그는 1911년에 세 권의 번역서를 출판했다. 세 권 다 YMCA국제위원회 총무 모트 박사의 저서로서 YMCA 활동과 관련된 내용을 서술한 간략한 책들이었다. 순회여행을 떠나기 전인 5월에 먼저 「학생청년회의 종교상 회합」(Religious Department of the Student Association)이라는 책을 출판했고, 여행에서 돌아온 뒤 10월에는 「학생청년회 회장」(The President of the Student 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 「신입학생 인도」(Work for New Students)라는 두 가지의 책을 출판했다. 모두 분량은 많지 않으나 YMCA의 학생활동에 직접 활용할 수 있는 내용들이었다. 이무렵의 李承晩을 가리켜 「온몸이 온통 정열덩어리」(渾身都是熱)였다고 한 표현이 과장이 아니었음을 실감하게 한다.
 
 
 
 열네 살난 교직이 아들 불러다 증거 조작
 
  김구가 安明根과 공모했다는 사실을 날조하기 위한 억지 신문은 검찰로 송치된 뒤에도 계속되었다. 일본인 검사는 안명근이 안악에 와서 안악부자들을 습격할 모의를 한 자리에 김구도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열네 살난 양산학교 교직이 아들 金元亨을 잡아 올렸다.
 
  김구는 검사 신문을 받다가 벽 너머 방에서 원형의 말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안명근이 양산학교에 왔을 때에 김구도 그 자리에 있었지?』
 
  『나는 안명근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김구 선생님은 어디 가고 그날 없었습니다』
 
  모의가 있었다고 일본인들이 주장하는 날짜는 김구가 상경하여 梁起鐸집에서 열린 신민회 비밀회의에 참석했던 것과 같은 날짜였다.
 
  일본인 신문관은 원형을 죽일 듯이 협박했고, 조선인 수사관은 그를 달랬다.
 
  『이 미련한 놈아. 안명근이도 김구도 같이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고 대답만 하면 네가 지금이라도 아버지를 따라 집으로 가도록 해줄 터이니 시키는 대로 말을 하여라』
 
  겁에 질린 원형이 대답했다.
 
  『그러면 그렇게 말하리다. 때리지 마셔요』
 
  검사가 초인종을 눌러 원형을 문 안으로 들이세우고 물었다.
 
  『양산학교에서 안명근이 김구와 같이 앉아 있는 것을 네가 보았느냐?』
 
  『예』
 
  말이 끝나자마자 원형은 문 밖으로 끌려나갔다. 조작은 이런 식이었다.
 
 
 
 모친과 아내 생각하며 좌절감 느끼기도
 
  김구가 좀처럼 풀려날 수 없다고 생각한 곽씨 부인과 최준례는 안악의 가산과 세간을 모두 팔아 상경하기로 했다. 최준례는 두 살배기 딸을 데리고 평산의 언니집에 묵다가 공판에 맞추어 오기로 하고 곽씨 부인 혼자 서울에 먼저 와서 김구의 사식 수발을 했다. 이때의 감회를 김구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어머님이 손수 담은 밥그릇을 열고 밥을 먹으면서 생각하니, 어머님의 눈물이 밥에 점점이 섞이었을 것이다. 18년 전 해주 옥바라지로부터 인천의 옥바라지하실 때까지는 슬프고 황망한 중에도 내외분이 서로 위로하고 의논하시며 지냈으나, 지금은 과부의 몸으로 어느 누구 살뜰하게 위로하여 줄 사람도 없다. 준영 삼촌과 재종형제가 있으나 대부분 토착 농민이라 거론할 여지도 없고, 약한 아내와 어린아이가 어머님에게 무슨 위안을 할 능력이 있을까! 또한 아내가 어린아이를 데리고 자기 모친이 얹혀 사는 처형 집에 갔다는 소식에는 무한의 느낌이 생긴다.〉61)
 
  모친과 아내의 참담한 처지를 생각하면서 김구는 마침내 큰 좌절감에 빠졌다. 「백범일지」의 술회는 이때의 그의 고뇌가 얼마나 컸던가를 보여준다.
 
  〈이제 내가 주장하던 것과 힘써 온 것은 대부분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칠 때에도 학생들이 나를 숭배함보다 내가 학생들에게 천배만배의 숭배와 희망을 두고 있었다. 나는 일찍이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하여 망국민이 되었으나, 학생들은 후일 건국영웅이 될 것을 바라던 마음도 헛된 것으로 돌아갔다. 또한 아내도 자기 언니가 헌병의 첩질 한다는 말을 들은 뒤로는 영구히 만나지 않기로 결심하였건만, 내가 이 지경이 되니 하는 수 없이 찾아갔을 것이다.〉62)
 
 
 
 日本人 변호사는 檢事와 한통속
 
  7월 들어서야 공판이 시작되었다. 安岳(安明根)事件 및 新民會(梁起鐸等保安法違反)事件에 연루된 혐의로 검거된 사람들은 모두 125명이었고, 그 가운데에서 검찰에 송치된 사람은 63명이었다.63) 안악(안명근)사건은 7월10일, 신민회(양기탁등 보안법위반)사건은 이튿날인 7월11일로 공판일이 정해졌다.64)
 
  곽씨 부인은 아들을 위해 나가이(永井)라는 변호사를 고용했다. 그러나 일본인 변호사는 검사와 한통속이었다. 예심 신문 때에 나가이가 물었다. 예심이란 일본 점령기에 있었던 형사소송절차로서 공판에 앞서 필요한 증거확보 등을 위해 마련된 것이었다.
 
  『경시총감부 유치장에 있을 때에 나무판자벽을 두드리며 梁起鐸과 무슨 말을 했는가?』
 
  이런 질문은 피의자의 변호를 위한 질문이 아니었다. 김구는 나가이를 노려보며 대답했다.
 
  『이것은 신문관을 대리한 것인가? 그 사실은 이미 신문기록에 상세히 기재했으니까 나에게 더 물을 것이 없다』
 
  그러자 나가이와 검사는 서로 눈을 끔벅였다.
 
  이윽고 공판날이 되었다. 종로거리는 교통이 통제되고 삼엄한 경계망이 펴졌다. 김구는 동료들과 함께 죄수마차에 실려 경성재판소에 도착했다. 법정에 들어서자 입구에 화경이를 업은 곽씨 부인과 최준례가 서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검사의 긴 기소장 낭독이 있은 뒤에 피고들에 대한 재판관의 심문이 시작되었다. 安明根은 재판관에게 말했다.
 
  『나 이외에 모든 사람은 아무 관련도 없고 죄도 없는데, 무엇 때문에 새로 유치장을 건설해 가면서까지 이 많은 사람들을 무고히 잡아 왔느냐? 책임은 나에게만 있다』
 
  김구도 공소사실을 강력히 부인하면서 항의했다.
 
  『양산학교에서 모의했다는 그날이나 수박재에서 부잣집 습격계획을 했다는 그날이나 다 나는 서울에 있었지 그 장소에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의를 했다니 이 웬말이냐!』
 
  그러나 재판관은 피고들의 주장을 묵살했다. 김구와 김홍량은 이튿날 열린 신민회(양기탁 등 보안법위반)사건 공판에도 출정했다.
 
 
 
 강도미수죄로 15년형 선고받아
 
   두 사건에 대한 선고공판은 7월22일에 한꺼번에 열렸다. 안악(안명근)사건과 관련해서는 安明根에게 종신형, 김구와 김홍량을 비롯한 7명에게는 징역 15년, 都寅權, 楊星鎭 두 사람에게는 징역 10년, 崔明植 등 8명에게는 징역 7년으로 모두 18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65) 이러한 형량은 「刑法大典」의 강도 및 강도미수죄의 규정에 근거한 것이다.
 
  신민회(양기탁 등 보안법위반)사건과 관련해서는 梁起鐸, 安泰國 등 6명에게는 징역 2년, 玉觀彬 등 4명에게는 징역 1년 6개월, 그밖의 6명에게는 징역 1년내지 6개월로 모두 16명에게 유죄가 선고되었다.66) 이들에게 비교적 가벼운 형량이 선고된 것은 「保安法」의 치안방해죄의 형량이 그만큼 가벼웠기 때문이다. 김구와 김홍량 두 사람에게 치안방해죄가 같이 적용되어 징역 2년씩이 추가되었다.
 
  판결문에서 김구에 대해 〈피고 金龜는 黃海道에서 학도간에 큰 세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항상 舊韓國에 뻗친 帝國의 세력을 배척해야겠다는 사상의 보급을 고취하고 있는 자이다〉67)라고 기술하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일본당국은 김구에 대해 이러한 인식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安明根 등이 부잣집을 습격할 모의를 했다는 현장에 없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억지로 강도미수죄를 적용하여 중형을 선고했던 것이다.
 
  피고들이 판결에 불복하고 상고함에 따라 두 사건을 하나로 묶어 9월 4일에 上訴審이 열렸다. 이 상소심에서 김구와 김홍량은 「보안법」 적용부분이 기각되어 형량이 15년으로 확정되었다.68)
 
  日本이 한국을 병탄한 이후에 발생한 사건을 다루면서 일본의 刑法을 적용하지 않고 이미 멸망한 大韓帝國의 법률인 「刑法大典」을 적용한 것은 형량을 많이 책정하기 위해서였던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렇게 하여 김구의 두 번째 옥중생활이 시작되었다.
 
 
 
 學生夏令會에서 總督暗殺모의했다고 조작
 
   가혹한 고문으로 허위 자백을 받아내어 두 사건을 일단락시킨 총독부는 같은 방법으로 韓國人을 탄압할 수 있다는 자신이 생겼던 것 같다.69)
 
  위의 두 사건을 다룰 때까지는 일본경찰은 新民會를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9월 들어서부터 平安南北道를 중심으로 700여 명이 갑자기 체포되었다.70) 혐의 사실은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 총독이 전년 12월27일에 압록강 철교개통식에 참석하고 서북지방을 시찰했을 때에 그를 암살하려고 기도했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악명 높은 이른바 「데라우치(寺內)總督謀殺未遂事件」이다. 이 사건으로 기소된 사람이 123명에 이르고, 1심에서 有罪가 선고된 사람만도 105명이었다고 하여 흔히 이 사건을 「105人事件」이라고 부른다. 앞의 두 사건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105인사건은 경무총감부가 서북지방의 기독교 세력을 뿌리뽑고 나아가 그들의 배후인 그곳의 외국인 선교사들을 추방하려는 의도에서 전혀 근거없이 날조한 사건이었다.71) 그러나 야만적인 고문을 통한 수사 과정에서 新民會의 존재가 밝혀졌다. 그리하여 이 사건을 가리켜 「新民會事件」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日本警察은 李承晩과 김구가 이 사건과 깊이 관련된 것으로 인식했는데, 이 점은 여러 가지로 숙고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그것은 두 사람이 이제 韓國現代史의 중심부에 위치하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일본경찰은 사건의 주동적 인물로 YMCA의 부회장(역대 회장은 외국인 선교사)으로서 실질적으로 YMCA운동을 이끄는 동시에 新民會 회장을 맡고 있던 尹致昊를 지목했다. 李承晩은 윤치호와 함께 6월에 개성에서 열린 제2회 학생하령회에서 한 활동 때문에 주목을 받았다. 서울YMCA의 미국인 총무 질레트는 YMCA국제위원회에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모든 피고인들이 혹독한 고문에 못 이겨 이른바 自白書라는 것을 썼는데, 그 자백서의 내용은 1911년에 YMCA국제위원회 간사들이 조직한 학생하령회가 尹致昊와 그밖의 주모자들이 모여서 음모를 꾸민 중요한 장소의 하나라는 것이다. 당국은 그 증거물로 질레트 총무에게서 입수한 그때의 참가자 명단을 제시하고 있다. 윤치호는 그 하령회의 대회장이었으며, 에디, 화이트, 라이언, 李承晩, 브로크만과 그밖의 명사들이 여기에 참석한 사실이 중요하다. 마지막 세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학생들과 숙식을 같이하면서 모의했다는 것이다.〉72)
 
  질레트는 다른 글에서도 이때의 학생하령회가 총독암살음모를 계획하기 위한 행사였다고 일본경찰이 주장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73)
 
 
 
 宣川으로 가서 總督暗殺 지휘했다고 조작
 
   김구는 105인사건의 판결문에 그의 이름이 무려 스물일곱 번이나 언급될 정도로 핵심적인 인물의 하나로 지목되었다.74) 판결문과 관련 피고인들의 여러 신문조서가 조금씩 다르기는 하나 요컨대 김구는 다음과 같은 행동을 했다는 것이었다.
 
  1910년 12월에 윤치호는 총독이 서북지방을 순회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김도희를 서북지방으로 보내어 그 곳 인사들에게 대표를 서울로 보내라는 뜻을 전했다. 이 소집통보에 따라 김구는 신민회 황해도 총감의 자격으로 상경하여 임치정의 집에서 양기탁, 안태국, 이승훈 등 신민회 간부들과 함께 총독암살 계획을 논의했다. 안악으로 돌아온 그는 양산학교에서 김홍량, 도인권 등에게 서울에서 협의한 내용을 알렸다. 이 자리에서 암살실행을 위해 宣川으로 갈 것을 결정하고, 23일에 동지 30여 명과 함께 사리원을 거쳐 선천으로 갔다. 그날 밤 선천의 동지들과 황해도에서 간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김구는 『국가를 위해 총독을 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면서 총독이 오는 날짜를 물었다. 선천의 동지들은 준비는 다 되었으나 아직 총독이 오는 날짜를 모른다고 했다. 김구는 평양에 가서 알아보고 오겠다면서 다음날 일행 몇 명과 평양으로 가서 태극서관에서 安泰國, 李昇薰 등과 총독암살문제를 협의했다.75) 태극서관에는 칠팔십 명이 모였는데, 총독 암살은 평양역과 선천역 두 곳에서 실행하기로 하고 평양역은 車利錫 등 4명이, 선천역은 이승훈과 안태국이 관장하기로 분담했다. 단총과 칼이 지급되었다. 김구는 안태국 일행과 함께 26일에 다시 선천으로 갔다. 다음날 일행은 단총을 휴대하고 역으로 나갔으나 총독이 탄 열차가 선천역을 그냥 통과하는 바람에 일을 성사시키지 못했다. 그날 밤에 신성중학 2학년 8반 교실에서 모여서 다음 계획을 논의했다. 이때에 김구는 『오늘은 실패했으나 그것은 총독이 하차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득이했다. 내일은 반드시 하차할 것이니 반드시 실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음날 총독이 신의주 방면에서 돌아올 때에 다시 역에 나갔으나 이번에는 경비가 너무 엄중하여 총독암살을 실행하지 못했다――.
 
  김구는 물론 선천에 간 사실조차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결문에서까지 이처럼 아주 그럴듯하게 서술되고 있는 것은 이 사건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날조였는가를 말해 준다.
 
  사건 초기에 미국 선교부는 정치적이라는 이유로 대책에 소극적이었으나 선교사들의 강력한 항의에 따라 유능한 변호인단을 구성하여 적극적인 법정투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공판과정에서 피의자들에 대한 고문사실이 폭로되고, 사건의 조작사실이 드러났다. 1912년 9월28일에 열린 선고공판에서는 윤치호, 양기탁, 이승훈, 안태국, 임치정, 유동열에게는 징역 10년, 옥관빈, 장응진, 차이석 등 18명에게는 징역 8년, 그밖에 39명에게 징역 6년, 42명에게 징역 5년의 실형이 선고되었다. 1913년 7월15일의 공소심 공판에서는 윤치호, 양기탁, 이승훈, 임치정, 안태국 5명에게 징역 6년, 옥관빈에게 징역 5년이 선고되고, 나머지 99명에게는 무죄가 선고되었다. 양기탁, 안태국, 옥관빈 등 신민회(양기탁등 보안법위반)사건 주동자들은 105인사건에도 관련된 혐의로 기소되어 거듭 유죄판결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김구는 105인사건에 같이 기소되지 않았다. 그것은 김구에게는 이미 훨씬 무거운 형량이 선고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000리 길을 걸어서 산골 전도
 
  105人事件과 관련된 검거선풍이 불고 있던 1911년 가을에 李承晩은 다시 지방 순회 여행을 했다. 이때의 여행에 대해서도 李承晩은 YMCA국제위원회에 보고를 하고 있으나,76) 정확한 여행목적은 알 수 없다. 대부분 산골마을을 걸어서 다녔다고 하므로, 어쩌면 일시적인 피신을 겸한 전도여행이었는지 모른다. 일본경찰은 서울YMCA 회관도 수색하여 학생하령회 관계서류를 조사해 갔었다.77) 말이나 어떤 종류의 탈 것도 없는 지방을 李承晩은 하루에 27마일(43km)내지 28마일씩 280마일(450km), 곧 1000리 남짓한 거리를 걸어서 다녔다.
 
  보고 편지에는 여행기간이나 여행지역이 명시되어 있지 않다. 하루에 걸었다는 거리로 추산해 보면 한 열흘 동안 주로 中部 내륙지방을 여행했던 것 같다. 편지에는 유일한 지명으로 「쉽로크」(Shiprock; 船岩 또는 배바위)라는 작은 마을의 이름이 보인다. 京畿道 始興에 있는 李承晩의 처가마을 이웃이 「배바위골」(京畿道 始興郡 南面 堂井里)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그는 처가마을도 방문했던 것이 틀림없다.
 
  李承晩은 편지에서 이번 여행에서 여러 가지로 대단히 흥미 있는 일들을 발견했다면서 배바위골 이야기를 자세히 적고 있다.
 
  〈나는 짐과 접는 침대를 운반시키기 위해 한 사람을 고용했습니다. 나는 아주 흥미 있는 사람과 길동무가 되었는데, 그는 성씨가 申씨입니다. 申씨는 배바위골에 있는 작은 교회의 오래된 신자입니다. 그곳은 내가 18년 전에 방문한 적이 있는 곳입니다. 그때에 나는 申씨와 그의 부친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낯익은 곳들이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 내게는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그곳 사람들의 생활이 아주 달라진 것입니다. 전에는 그 마을에 교인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나도 교인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申씨 부자가 모두 교인입니다. 申씨네는 집 한쪽을 교회로 내어놓았고, 그 교회는 이제 교인이 26명이나 됩니다. 申씨는 자주 이웃마을로 설교를 하러 다닙니다.〉78)
 
 
 
 배바위골 申씨 父子의 信仰
 
  18년 전이라면 李承晩이 투옥되기 직전인 1899년의 일이다. 李承晩은 결혼한 뒤에 처가마을에 자주 갔었는데, 그럴 때면 배바위골에도 들렀었다. 그곳에 처고모가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처고모의 시댁이 바로 申씨였다. 李承晩은 같은 연배의 申씨집 사위 등과 윷놀이를 하며 놀았었다고 한다.79)
 
  李承晩은 申씨네집 교회에서 마을사람들과 함께 특별예배를 보았다. 申씨 부친은 낡은 신약성서를 들어보이며 李承晩에게 말했다.
 
  『5년 전에 내가 선생 댁에 찾아갔을 때에 어르신께서 이 책을 가져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지고 와서 읽어보니까 그안에 구세주가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에게 감사합니다』
 
  李敬善이 국문성경을 가지고 있었고, 또 그것을 며느리의 친척뻘인 申씨에게 주었다는 이야기는 흥미롭다. 아들 申씨의 고백도 간단했다.
 
  『아시다시피 저는 무식해서 한문도 국문도 읽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성경을 읽으시고 저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부자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나는 혼자 단어를 공부해서 이제 읽을 수 있고, 설교도 조금 합니다. 정말 어떻게 하나님에게 감사해야 할지!』
 
  李承晩은 가는 곳마다 그와 함께 찬송가를 부르고 설교를 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李承晩은 11월13일에 서울YMCA 회관에서 주일 오후 바이블 클라스의 초급반 특별집회를 열었다. 서울시내 소학교 22개교에서 온 1,200명 아동이 강당에 모였다.
 
  〈그것은 참으로 놀라운 광경이었습니다. 1,200명의 젊은 목소리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노래는 감격스러웠습니다. 지금 우리 바이블 클라스에는 성인부를 포함하여 아이들이 400명 가량 됩니다. 이들 가운데 많은 아이들이 강력한 기독교 지도자가 되도록 하나님께 축원해 주소서!〉80)
 
  李承晩의 편지는 이렇게 끝맺고 있다. 이처럼 李承晩도 김구와 마찬가지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던 것이다.
 
 
 
 YMCA국제위원회의 개입으로 체포 면해
 
   1912년 2월4일에 이르러 尹致昊마저 체포되었다. 윤치호가 체포되는 것을 본 李承晩은 자신도 무사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運命의 손이 자기의 방문을 두드리는 것을 기다리면서 초조한 나날을 보냈다. 올리버는 이때에 李承晩이 체포를 모면한 것은 질레트 총무 등 YMCA 인사들과 특히 때맞춰 한국을 방문한 YMCA국제위원회 총무 모트 박사의 신속한 개입 때문이었다고 적고 있다. 그들은 일본인들에게 李承晩은 미국에도 잘 알려져 있는 사람인데, 그를 체포하면 심각한 말썽이 빚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는 것이다.81) 李承晩이 YMCA국제위원회에서 봉급을 받기로 한 것도 이런 경우에 대비해서 취한 조치였다.
 
  일본에 있던 감리교 동북아시아 총책 해리스(Merriam C. Harris) 감독과 장로교 해외선교부 총무 브라운(Arthur J. Brown) 박사도 서둘러 한국에 왔다.
 
  1912년은 기독교 감리회 제4년 총회(The Quadrennial General Conference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가 미국 미네아폴리스에서 열리는 해였다. YMCA국제위원회 인사들과 감리교회 간부 등은 李承晩을 이 회의에 참석할 한국대표로 정하여 출국시키기로 했다. 그 목적을 위해 3월19일에 서울에서 감리교 각지방 평신도 제14기 회의가 소집되었고, 거기에서 李承晩은 한국 감리교 平信徒代表로 선출되었다. 그런데 李承晩은 그때까지 미국 교회에 교적을 두고 있었으므로 한국의 평신도 대표가 되기 위해서는 한국교회로 교적을 옮겨야 했다. 이 일은 종로 중앙감리교회의 李景稙(이경직) 목사가 맡아서 해결해 주었다. 그는 李承晩의 교적이 있는 미국 매사추세츠 케임브리지의 엡워드(Epworth) 감리교회와 연락하여 교적을 자기 교회로 옮겨 주었다.82)
 
 
 
 귀국한 지 17개월 만에 다시 出國
 
  여권은 해리스 감독이 일본 정부와 교섭하여 마련해 주었다. 李承晩의 출국 움직임에 대해 「每日申報」가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는 것이 눈길을 끈다.
 
  〈종로 기독청년회 소속학교 학감 리승만(李承晩)씨는 일간 미국에 건너가기 위하야 소관 경찰서에 청원서를 제출하고 여행권을 내어달라 하얏다더라.〉83)
 
  李承晩은 창신동의 자기 집을 저당잡혀 여비를 마련했다.84) 그는 출국하기에 앞서 朴씨 부인과 사실상의 이혼과 같은 결별을 했다. 그것은 朴씨 부인에게 여간 원망스럽지 않은 결별이었을 것이다. 이때에 李承晩은 재력이 있던 고종사촌 형 韓士健으로부터 200원을 받아서 100원으로 朴씨에게 창신동에 있는 복숭아밭을 사주었다고 한다.85)
 
  李承晩은 3월26일에 서울을 떠났다. 귀국한 지 17개월 16일 만이었다. 공교롭게도 이날은 그가 서른일곱 살이 되는 생일날이었다. 일행은 선교사 두 사람과 한국인 목사 한 사람이었다.
 
  떠나던 날 李承晩은 부친과 눈물로 작별했다. 그는 집을 나와 YMCA 3층에서 기거하면서도 아침마다 집으로 가서 몸져 누워 있는 李敬善에게 아침문안을 드렸다고 한다. 그리하여 YMCA 안에서 孝子라는 소문이 나 있었다.86)
 
  李敬善은 방문께까지 나와서 아들을 전송했다. 그는 차마 아들의 얼굴을 바로 보지 못하고 손만 흔들었다.87)
 
  「每日申報」는 그의 출국을 이렇게 보도했다.
 
  〈종로기독청년회 소속학교 학감 리승만(李承晩)씨가 미국에 건너가기 위하야 모처에 청원하고 여행권을 청구하얏다는 말은 이미 기재하였거니와, 그 여행권의 하부를 승인하얏으므로 작일 오전 9시 30분에 남대문발 경부선 열거(차)로 발정하야 미국으로 향하야 갔는데, 그 돌아올 기한은 6개월로 예정하얏다더라.〉88)
 
  그러나 6개월 예정으로 떠났던 李承晩이 귀국하는 것은 그로부터 33년의 세월이 흐른 뒤였다.●
 
 
 

 
  1) 「게일이 이승만에게 보낸 1908년 3월12일자 및 7월22일자 편지」(延世大 現代韓國學硏究所 所藏). 유영익, 「이승만의 삶과 꿈」, 1996, 중앙일보사, 70쪽. 2) 「언더우드가 1910년 2월16일에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延世大 現代韓國學硏究所 所藏). 유영익, 같은 책. 3) 「이승만이 1910년 4월13일에 언더우드 박사에게 보낸 편지」(延世大 現代韓國學硏究所 所藏).
 
  4) 「1910년 5월23일에 질레트가 서울에서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延世大 現代韓國學硏究所 所藏). 5) 「1910년 5월27일에 그레그가 뉴욕의 YMCA국제위원회에서 이승만에게 전한 편지」(延世大 現代韓國學硏究所 所藏). 6) 유영익, 앞의 책, 74쪽. 7) 전택부, 「한국 기독교청년회 운동사」, 1994, 범우사, 149∼150쪽. 8) 「1910년 7월19일에 이승만이 그레그에게 보낸 편지」(延世大 現代韓國學硏究所 所藏). 9) 尹炳奭,「國外韓人社會와 民族運動」, 1990, 一潮閣, 403∼404쪽. 10) 金鉉九,「又醒遺傳」(筆寫本), 186쪽, 263쪽. 方善柱, 「在美韓人의 獨立運動」, 1989, 翰林大學校 아시아文化硏究所, 36쪽.
 
  11) Robert T. Oliver, Syngman Rhee ― The Man Behind the Myth, 1960, Dodd Mead & Company, p.116. 12) 「每日申報」, 1910년 10월16일자, 「雜報: 李承晩氏의 歸國」. 13) P. L. Gillett-s Report on March, 1911. 전택부, 앞의 책, 149쪽. 14)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한국기독교의 역사(Ⅰ)」, 1998, 기독교문사, 276∼282쪽. 15) 「每日申報」 1910년 10월2일자, 「雜報: 耶蘇敎大擧傳道」. 16) 金一善, 「李承晩博士는 渾身都是熱」, 「開闢」 1925년 8월호, 19쪽. 17) 「每日申報」 1910년 11월6일자, 「雜報: 靑年會硏經班組織」. 18) 「每日申報」 1910년 11월6일자, 「雜報: 李鄭兩氏講演」.
 
  19) 「每日申報」 1910년 11월 9일자, 「雜報: 靑年會演說」. 20) 鄭求瑛 證言, 「한국일보」 「人間李承晩百年(65)」, 1975. 6. 19. 21) Syngman Rhee-s Letter to Friends, Feb. 13, 1911. 이 자료는 전YMCA 총무 전택부씨가 뉴욕의 YMCA 국제위원회 도서관에서 찾아낸 것이다. 22) 林炳稷 證言, 「한국일보」 「人間李承晩百年(65)」, 1975. 6. 19. 23) Syngman Rhee-s Letter to Friends, Feb. 13, 1911. 24) 林炳稷 證言. 25) 金一善, 앞의 글. 26) Oliver, op. cit. p.116.
 
  27) 沈鐘哲 부인의 말을 토대로 한 曺惠子 證言. 28) 崔明植, 「安岳事件과 三一運動과 나」(打字本), 1970, 兢虛傳記編纂委員會, 26∼38쪽. 29) 「梁起鐸等 保安法違反事件判決文」, 「白凡金九全集(3)」, 1999, 대한매일신보사, 415쪽. 30) 鄭晉錫, 「大韓每日申報와 裵說」, 1987, 나남, 453∼462쪽. 31) 「백범일지」, 216쪽. 32) 「第22回公判始末書」(京城覆審法院, 1912. 12. 20), 「雩崗梁起鐸全集(제3권)」, 2002, 동방미디어, 405쪽.
 
  33) 愼鏞廈, 「韓國民族獨立運動史硏究」, 1985, 乙酉文化社, 18∼20쪽. 34) 「백범일지」, 215쪽. 35) 尹慶老, 「105人事件과 新民會硏究」, 1990, 一志社, 199쪽, 211∼212쪽. 36) 國友尙謙, 「不逞事件ニ依ッテ觀タル朝鮮人」(1912), 尹慶老, 앞의 책, 208쪽. 37) 「沃波備忘錄(飜譯文)」 卷三, 1984, 沃波文化財團, 473쪽. 38) Oliver, op. cit. p.116.
 
  39) 전택부,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1993, 종로서적, 139쪽. 40) 「梁起鐸等 保安法違反事件判決文」, 「白凡金九全集(3)」, 414∼418쪽. 41) 「백범일지」, 216쪽 ; 黃海道誌編纂委員會, 「黃海道誌」, 1982, 262쪽. 42) 「백범일지」, 217쪽. 43) 崔明植, 앞의 책, 39쪽. 44) 「安岳(安明根)事件判決文」, 「白凡金九全集(3)」, 360∼361쪽. 45) 「Mutel일기」 1911년 1월11일자, 한국기독교사연구회, 앞의 책, 352쪽.
 
  46) 「백범일지」, 219∼220쪽. 47) 崔明植, 앞의 책, 40쪽. 48) 「백범일지」, 220쪽. 49) 「백범일지」, 221쪽.
 
  50) 「백범일지」, 225쪽. 51) 「백범일지」, 227∼228쪽. 52) 「백범일지」, 226쪽. 53) 「백범일지」, 228쪽. 54) 崔明植, 앞의 책, 42쪽. 55) P. L. Gillett-s Annual Report for the Year 1913, p.1∼2. 전택부, 앞의 책, 143쪽. 56) Syngman Rhee-s Letter to Friends, July 22, 1911.
 
  57) 「每日申報」 1910년 11월 25일자, 「雜報: 基督敎學校多廢」. 58) 이승만, 「한국교회핍박」, 「雩南李承晩文書: 東文篇(二)」, 1998, 延世大 現代韓國學硏究所, 462∼468쪽.
 
  59) 유동식, 「한국감리교회의 역사 1884-1992(Ⅰ)」, 1994, 기독교 대한감리교회, 340쪽. 60) Syngman Rhee, op. cit.
 
  61) 「백범일지」, 234∼235쪽. 62) 「백범일지」, 236쪽. 63) 小森德治, 「明石元次郞」, 1967, 原書房 影印版, 475쪽. 「每日申報」는 검찰에 송치된 사람이 70여 명이라고 보도했다. (1911년 4월29일자, 「雜報: 安明根事件의 被告數」). 64) 「每日申報」, 1911년 7월4일 및 12일자, 65) 「安岳事件判決文」, 「白凡金九全集(3)」, 305∼364쪽. 66) 「梁起鐸等保安法違反事件判決文」, 「白凡金九全集(3)」, 365∼419쪽. 67) 「安岳事件判決文」, 「白凡金九全集(3)」, 362쪽. 68) 「安岳-梁起鐸事件上訴審判決文」, 「白凡金九全集(3)」, 478∼479쪽.
 
  69) 崔明植, 앞의 책, 47쪽. 70) 鮮于燻, 「民族의 受難 ― 百五人事件眞相」, 1955, 獨立精神普及會, 24쪽. 71) 윤경로, 앞의 책, 18∼60쪽 참조. 72) P. L. Gilletts Report(date unknown). 전택부, 앞의 책, 156쪽에서 재인용. 73) P. L. Gillett, “The Student-s Summer Conference”, The Korean Mission Field, September, 1912. p.272. 74) 「寺內總督謀殺事件判決文 해제」, 「白凡金九全集(3)」, 32쪽. 75) 「梁濬熙신문조서」 및 「姜奎燦신문조서」, 國史編纂委員會,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3)」, 1987, 18쪽 및 119쪽.
 
  76) Syngman Rhee-s Letter to Friends, Nov. 25th. 1911. 77) 「한국교회핍박」, 「雩南李承晩文書: 東文篇(二)」, 504쪽. 78) Syngman Rhee-s Letter to Friends, Nov. 25th. 1911. 79) 李承晩의 처조카 朴貫鉉 證言. 「한국일보」, 「人間李承晩百年(66)」 1975. 6. 20.
 
  80) Syngman Rhee-s Letter to Friends, Nov. 25th. 1911. 81) Oliver, op. cit. p.118∼119. 82) 「李景稷목사가 1912년 3월14일에 케임브리지의 엡워드 감리교회 목사 앞으로 보낸 편지」 및 「엡워드 감리교회의 A. L. Squire 목사의 1912년 4월10일자 회신」, 延世大 現代韓國學硏究所 所藏, 유영익, 앞의 책, 230쪽. 83) 「每日申報」 1912년 3월13일자, 「李氏의 渡美請願」. 84) 「1912년 3월25일자 李承晩의 편지(수신자 불명)」 및 「1912년 7월16일자 감리교 탑동신학교 교장 E. M. Cable이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 延世大 現代韓國學硏究所 所藏, 유영익, 앞의 책, 230쪽. 85) 沈鍾哲 부인의 말을 토대로 한 曺惠子 證言; 韓士健의 손녀사위 全載範 證言, 유영익, 앞의 책, 229∼230쪽. 86) YMCA학교 工學科 학생이었던 金弘植 證言, 「한국일보」, 「人間李承晩百年(67)」 1975. 6. 21. 87) Oliver, op. cit. p.119. 88) 「每日申報」 1912년 3월 27일자, 「李承晩의 渡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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