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걸프전쟁」이 초읽기에 들어가면서 전쟁을 현장에서 지휘할 美 중부군 사령관인 토미 프랭크스(Tommy Franks·57) 대장이 뉴스의 초점으로 떠올랐다. 그는 이미 우리에게 친숙한 인물이다. 중부군 사령관으로서 2001년 9·11 테러의 주범인 오사마 빈 라덴을 검거하기 위한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지휘해 全세계에 얼굴이 알려져 있다.
중부군 사령부는 아프간을 포함, 중동과 아프리카를 관할 구역으로 하고 있어 그는 또 다시 대규모 전쟁을 치르게 됐다.
프랭크스 장군은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포병 장교 출신인 그는 1994년 韓美연합 사령부의 작전참모로 한국에 첫발을 디뎠다. 1995년부터 2년간 경기도 동두천에 있는 美 제2사단장으로 근무했다.
그는 제1차 걸프전을 지휘했던 노만 슈워츠코프 장군이 연일 언론에 화려하게 등장했던 것과 달리 대중 앞에 잘 나타나지 않고 언론과 인터뷰를 하지 않는 수줍은 성격으로 알려져 있다. 아프간 전쟁 동안에도 거의 기자회견을 갖지 않았으나,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의 손에 이끌려 회견장에 모습을 드러냈고, 이후 CNN 등 몇 개 언론과만 회견을 했다.
프랭크스 사령관은 그러나 사석에서는 솔직하며, 말을 많이 한다고 한다.
그를 잘 아는 예비역 3성장군인 리어 백스터氏는 『토미는 조용한 성격이 아닙니다. 매우 적극적이고 주관이 뚜렷합니다』고 말했다(영국 신문 옵서버紙) 그는 지난해 11월 미국의 미식 축구팀인 댈러스 카우보이즈의 치어 걸들과 컨트리 가수를 초청, 항공모함 「에이브러햄」 선상에서 장병들을 위로하는 공연을 열기도 했다.
그는 서민적인 성격으로 알려져 있다. 전쟁이 임박하면서 지난 1월 중부군 사령부가 주둔지를 미국 플로리다州 맥딜 공군기지에서 중동의 카타르에 옮긴 뒤 열린 연회에서 보인 그의 행동은 내내 화제다.
프랭크스 사령관은 고위 장성들과 헤드 테이블에 앉는 대신, 구석 한쪽의 테이블에 부사관들과 섞여 앉았다. 한 참모가 다가가 헤드 테이블에 앉을 것을 권했으나, 프랭크스 장군은 『나는 부사관들과 얘기하고 싶다』며 사양했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오클라호마州 윈느우드에서 태어난 그는 남부 텍사스의 사막도시 미들랜드에서 성장했다. 미들랜드는 부시 가문이 석유를 개발해 富를 쌓았고, 미국內에서도 부유한 도시로 알려져 있다.
나중에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부인이 된 로라 부시가 그의 고교시절 2년 후배였다. 갑부의 아들인 부시 대통령이 동부의 예일 대학교로 간 반면, 프랭크는 지역의 텍사스 대학에 입학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 軍에 사병으로 입대했으나, 군인의 길을 결심하고 포병 사관후보생 학교에 들어가 1967년 소위로 임관했다. 그는 임관 이후 베트남에 파견돼 포병 관측장교로 근무했고, 포대장(중대장) 보직은 1973년에 서독에서, 대대장은 1981년 역시 서독에서, 연대장은 1987년 텍사스 포트 후드에서, 사단장은 1994년 한국에서 지냈다.
프랭크스 장군과 럼스펠드 국방장관 두 사람이 완벽하게 호흡이 맞지는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럼스펠드 장관은 공개석상에서 프랭크스 장군을 『현명하며, 경외심을 자아내는 사령관』이라고 칭찬하나,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있다는 미국 언론보도가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다.
럼스펠드는 프랭크스 사령관을 『타협을 모르며, 상상력이 부족하고, 너무 舊式(구식)』이라고 보고 있으며, 반대로 프랭크스 사령관은 럼스펠드 장관을 『(현장을 모르는) 책상머리 장군』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알려졌다.
럼스펠드 장관은 특수부대 위주로 진행된 아프간 전쟁과 마찬가지로 이라크 전쟁 역시 舊式이며 성가시기만 한 보병과 포병 등 재래식 병력 대신 특수부대들이 주도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프랭크스 사령관은 재래식 지상 병력의 공격이 대규모로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부시 대통령은 프랭크스 사령관의 전쟁 방안을 채택했다.
최근 그는 부인 캐트린 여사와 관련한 잘못된 처신으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부인에게 여군 한 명을 배치해 개인적인 심부름을 시켰고, 전용 경호병을 붙이는 등 관련 규정을 위반한 혐의로 軍 감찰 당국의 조사를 받았다.●
중부군 사령부는 아프간을 포함, 중동과 아프리카를 관할 구역으로 하고 있어 그는 또 다시 대규모 전쟁을 치르게 됐다.
프랭크스 장군은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포병 장교 출신인 그는 1994년 韓美연합 사령부의 작전참모로 한국에 첫발을 디뎠다. 1995년부터 2년간 경기도 동두천에 있는 美 제2사단장으로 근무했다.
그는 제1차 걸프전을 지휘했던 노만 슈워츠코프 장군이 연일 언론에 화려하게 등장했던 것과 달리 대중 앞에 잘 나타나지 않고 언론과 인터뷰를 하지 않는 수줍은 성격으로 알려져 있다. 아프간 전쟁 동안에도 거의 기자회견을 갖지 않았으나,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의 손에 이끌려 회견장에 모습을 드러냈고, 이후 CNN 등 몇 개 언론과만 회견을 했다.
프랭크스 사령관은 그러나 사석에서는 솔직하며, 말을 많이 한다고 한다.
그를 잘 아는 예비역 3성장군인 리어 백스터氏는 『토미는 조용한 성격이 아닙니다. 매우 적극적이고 주관이 뚜렷합니다』고 말했다(영국 신문 옵서버紙) 그는 지난해 11월 미국의 미식 축구팀인 댈러스 카우보이즈의 치어 걸들과 컨트리 가수를 초청, 항공모함 「에이브러햄」 선상에서 장병들을 위로하는 공연을 열기도 했다.
그는 서민적인 성격으로 알려져 있다. 전쟁이 임박하면서 지난 1월 중부군 사령부가 주둔지를 미국 플로리다州 맥딜 공군기지에서 중동의 카타르에 옮긴 뒤 열린 연회에서 보인 그의 행동은 내내 화제다.
프랭크스 사령관은 고위 장성들과 헤드 테이블에 앉는 대신, 구석 한쪽의 테이블에 부사관들과 섞여 앉았다. 한 참모가 다가가 헤드 테이블에 앉을 것을 권했으나, 프랭크스 장군은 『나는 부사관들과 얘기하고 싶다』며 사양했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오클라호마州 윈느우드에서 태어난 그는 남부 텍사스의 사막도시 미들랜드에서 성장했다. 미들랜드는 부시 가문이 석유를 개발해 富를 쌓았고, 미국內에서도 부유한 도시로 알려져 있다.
나중에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부인이 된 로라 부시가 그의 고교시절 2년 후배였다. 갑부의 아들인 부시 대통령이 동부의 예일 대학교로 간 반면, 프랭크는 지역의 텍사스 대학에 입학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 軍에 사병으로 입대했으나, 군인의 길을 결심하고 포병 사관후보생 학교에 들어가 1967년 소위로 임관했다. 그는 임관 이후 베트남에 파견돼 포병 관측장교로 근무했고, 포대장(중대장) 보직은 1973년에 서독에서, 대대장은 1981년 역시 서독에서, 연대장은 1987년 텍사스 포트 후드에서, 사단장은 1994년 한국에서 지냈다.
프랭크스 장군과 럼스펠드 국방장관 두 사람이 완벽하게 호흡이 맞지는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럼스펠드 장관은 공개석상에서 프랭크스 장군을 『현명하며, 경외심을 자아내는 사령관』이라고 칭찬하나,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있다는 미국 언론보도가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다.
럼스펠드는 프랭크스 사령관을 『타협을 모르며, 상상력이 부족하고, 너무 舊式(구식)』이라고 보고 있으며, 반대로 프랭크스 사령관은 럼스펠드 장관을 『(현장을 모르는) 책상머리 장군』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알려졌다.
럼스펠드 장관은 특수부대 위주로 진행된 아프간 전쟁과 마찬가지로 이라크 전쟁 역시 舊式이며 성가시기만 한 보병과 포병 등 재래식 병력 대신 특수부대들이 주도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프랭크스 사령관은 재래식 지상 병력의 공격이 대규모로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부시 대통령은 프랭크스 사령관의 전쟁 방안을 채택했다.
최근 그는 부인 캐트린 여사와 관련한 잘못된 처신으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부인에게 여군 한 명을 배치해 개인적인 심부름을 시켰고, 전용 경호병을 붙이는 등 관련 규정을 위반한 혐의로 軍 감찰 당국의 조사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