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9일 취임한 李八浩(이팔호·57) 신임 경찰청장은 종종 官運(관운)을 타고났다는 말을 듣는다. 그에 얽힌 일화가 적잖다.
서울 아시안게임이 열리기 직전인 1986년 9월 김포공항 국제선 청사에서 폭발물 사건이 터졌을 때 그는 공항분실장(경정)을 맡고 있었다. 당시 全斗煥(전두환) 대통령은 직접 공항에서 상주 기관장 대책회의를 소집했는데, 李청장은 사고 수습을 하느라 회의 참석이 늦었다고 한다. 회의실에서는 벌써 대통령이 호통을 치는 소리가 터져나오고 있었고 『이 방에 있는 사람은 모두 옷을 벗어라』는 엄명이 떨어졌다. 李청장은 회의에 지각하는 바람에 가까스로 화를 모면했다는 것이다.
지난해 12월 치안정감으로 승진해 경찰대학장에 취임했을 때는 동기인 朴金成(박금성)씨에 밀렸다. 전남 영암 출신의 朴씨는 李청장에 비해 진급이 늦었지만 서울경찰청장이 됐다. 하지만 취임 3일 만에 학력 위조가 문제가 돼 물러나면서 이 자리는 李청장에게 돌아왔다.
전임 李茂永(이무영) 청장에 이어 신임 경찰청장 자리에 오른 이번 인사 직후에도 『역시 대단한 관운』이라는 평가들이 많았다.
지난 8월 이후 나돌기 시작한 경찰청장 후보 下馬評에서 그는 늘 뒷전이었다.
능력으로는 이미 「검증된 경찰청장감」으로 통했지만 충남 보령 출신인 그가 차기 경찰청장이 될 가능성이 있겠느냐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자 결과는 의외로 나타났다. 이번에는 마침 민주당 쇄신 바람을 타고 金大中(김대중) 대통령이 총재직을 사퇴하며 국정에 전념할 것임을 천명하는 「상황 변수」가 작용했다. 대통령은 이같은 의지를 경찰청장 인사에서 입증하겠다는 듯, 「非호남 경찰청장」을 발탁했다.
그러나 그의 발탁을 「관운」으로만 보는 것은 지엽적인 분석이 되기 쉽다. 李청장 자신이 독특한 리더십으로 경찰內에서 一家를 이룬 인물이기 때문이다.
李청장의 가장 큰 장점으로는 조용하고 부드러운 리더십이 꼽힌다.
부하 직원들에 대해서도 일 이외의 문제로 번거롭게 하는 일이 거의 없어 합리적인 德將(덕장)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번 인사 직후 경찰內 분위기가 환영 일색이었던 것도 이런 평가 덕분이었다.
겉으로는 부드럽지만 대신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 철저한 信賞必罰(신상필벌)로 부하들의 軍紀(군기)를 잡는다. 야구로 치면 감독의 카리스마보다 데이터를 중시하는 섬세한 「관리야구」를 구사하는 타입이다. 그의 책상 서랍에는 각 부서와 부하 직원들에 대한 데이터가 늘 수북이 쌓여 있다. 이 자료들은 부하직원들의 보직과 승진을 가늠하는 기준이 된다.
그는 경찰청장 부임 후 첫 소감을 밝히는 자리에서도 『민생 치안은 경찰의 기본이다. 기본에 힘쓰겠다』고 말했다. 그는 경찰 생활의 상당 부분을 수사 파트에서 보낸 대표적인 경찰內 수사통이다. 치안본부 폭력과, 경찰청 광역수사단장, 형사국장 등을 거쳤다. 그 때문인지 그의 오랜 지론은 『도둑 잡는 게 경찰』이다.
반면 정치적 외풍이 휘말리기 쉬운 정보 파트 근무 경력은 거의 없다. 이런 정치적 무색무취가 이번 발탁의 한 배경이었다는 후문이다.
자기 관리도 깔끔해서 지금도 20여년 전 구입한 서울 용산구 후암동의 25평짜리 아파트가 재산목록 1호일 정도로 청빈하다.
李청장은 전형적인 「자수성가형」이다. 1944년 충남 보령의 貧農 집안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여덟 번째 손자라는 뜻으로 「팔호」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한다. 시골의 주산농高를 졸업한 李청장은 軍복무를 끝낸 뒤 1968년 순경으로 처음 경찰에 입문했다.
군대 생활 도중 지금은 없어진 고려大 재단의 우석大 행정학과 야간 과정에 등록했지만 생업을 위해 휴학을 해야 했다. 하지만 순경 생활 틈틈이 학교를 다녔고, 졸업반이었던 1970년에는 간부후보생 19기 시험에 도전해 이듬해 꿈에도 그리던 「경위」 계급장을 달 수 있었다.
순경 입문 3년 뒤에 간부로 다시 경찰에 再입문한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몽둥이 들고 순찰까지 해 본 드문 경력의 청장』이 됐다. 가족은 부인 이혜숙씨(49)와 사이에 2남.●
서울 아시안게임이 열리기 직전인 1986년 9월 김포공항 국제선 청사에서 폭발물 사건이 터졌을 때 그는 공항분실장(경정)을 맡고 있었다. 당시 全斗煥(전두환) 대통령은 직접 공항에서 상주 기관장 대책회의를 소집했는데, 李청장은 사고 수습을 하느라 회의 참석이 늦었다고 한다. 회의실에서는 벌써 대통령이 호통을 치는 소리가 터져나오고 있었고 『이 방에 있는 사람은 모두 옷을 벗어라』는 엄명이 떨어졌다. 李청장은 회의에 지각하는 바람에 가까스로 화를 모면했다는 것이다.
지난해 12월 치안정감으로 승진해 경찰대학장에 취임했을 때는 동기인 朴金成(박금성)씨에 밀렸다. 전남 영암 출신의 朴씨는 李청장에 비해 진급이 늦었지만 서울경찰청장이 됐다. 하지만 취임 3일 만에 학력 위조가 문제가 돼 물러나면서 이 자리는 李청장에게 돌아왔다.
전임 李茂永(이무영) 청장에 이어 신임 경찰청장 자리에 오른 이번 인사 직후에도 『역시 대단한 관운』이라는 평가들이 많았다.
지난 8월 이후 나돌기 시작한 경찰청장 후보 下馬評에서 그는 늘 뒷전이었다.
능력으로는 이미 「검증된 경찰청장감」으로 통했지만 충남 보령 출신인 그가 차기 경찰청장이 될 가능성이 있겠느냐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자 결과는 의외로 나타났다. 이번에는 마침 민주당 쇄신 바람을 타고 金大中(김대중) 대통령이 총재직을 사퇴하며 국정에 전념할 것임을 천명하는 「상황 변수」가 작용했다. 대통령은 이같은 의지를 경찰청장 인사에서 입증하겠다는 듯, 「非호남 경찰청장」을 발탁했다.
그러나 그의 발탁을 「관운」으로만 보는 것은 지엽적인 분석이 되기 쉽다. 李청장 자신이 독특한 리더십으로 경찰內에서 一家를 이룬 인물이기 때문이다.
李청장의 가장 큰 장점으로는 조용하고 부드러운 리더십이 꼽힌다.
부하 직원들에 대해서도 일 이외의 문제로 번거롭게 하는 일이 거의 없어 합리적인 德將(덕장)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번 인사 직후 경찰內 분위기가 환영 일색이었던 것도 이런 평가 덕분이었다.
겉으로는 부드럽지만 대신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 철저한 信賞必罰(신상필벌)로 부하들의 軍紀(군기)를 잡는다. 야구로 치면 감독의 카리스마보다 데이터를 중시하는 섬세한 「관리야구」를 구사하는 타입이다. 그의 책상 서랍에는 각 부서와 부하 직원들에 대한 데이터가 늘 수북이 쌓여 있다. 이 자료들은 부하직원들의 보직과 승진을 가늠하는 기준이 된다.
그는 경찰청장 부임 후 첫 소감을 밝히는 자리에서도 『민생 치안은 경찰의 기본이다. 기본에 힘쓰겠다』고 말했다. 그는 경찰 생활의 상당 부분을 수사 파트에서 보낸 대표적인 경찰內 수사통이다. 치안본부 폭력과, 경찰청 광역수사단장, 형사국장 등을 거쳤다. 그 때문인지 그의 오랜 지론은 『도둑 잡는 게 경찰』이다.
반면 정치적 외풍이 휘말리기 쉬운 정보 파트 근무 경력은 거의 없다. 이런 정치적 무색무취가 이번 발탁의 한 배경이었다는 후문이다.
자기 관리도 깔끔해서 지금도 20여년 전 구입한 서울 용산구 후암동의 25평짜리 아파트가 재산목록 1호일 정도로 청빈하다.
李청장은 전형적인 「자수성가형」이다. 1944년 충남 보령의 貧農 집안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여덟 번째 손자라는 뜻으로 「팔호」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한다. 시골의 주산농高를 졸업한 李청장은 軍복무를 끝낸 뒤 1968년 순경으로 처음 경찰에 입문했다.
군대 생활 도중 지금은 없어진 고려大 재단의 우석大 행정학과 야간 과정에 등록했지만 생업을 위해 휴학을 해야 했다. 하지만 순경 생활 틈틈이 학교를 다녔고, 졸업반이었던 1970년에는 간부후보생 19기 시험에 도전해 이듬해 꿈에도 그리던 「경위」 계급장을 달 수 있었다.
순경 입문 3년 뒤에 간부로 다시 경찰에 再입문한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몽둥이 들고 순찰까지 해 본 드문 경력의 청장』이 됐다. 가족은 부인 이혜숙씨(49)와 사이에 2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