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金大中씨와 협력했고 함께 옥살이를 했던 그는 DJ의 셋째 아들이 미국에서 구입한 큰 저택을 문제삼아 집요한 공격을 계속하고 있다. 李씨는 『작은 개미 구멍이 큰 둑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또 『金대통령은 도그마에 빠지기 쉬운 성격이므로 강력한 야당의 견제가 꼭 필요하다』고 했다
「DJ 저격수」
한나라당 前 의원 李信範(이신범·51)씨는 「DJ 저격수」로 널리 알려져 있다. 金大中(김대중) 대통령은 물론, 李姬鎬(이희호) 여사, 대통령의 셋째 아들 弘傑(홍걸·38)씨 등이 그의 저격 대상이었다.
그는 미국 에모리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弘傑씨가 유학생 신분으로 高價의 주택을 산 사실을 폭로했고, 李姬鎬 여사가 샤넬 등 명품 옷을 입고 있다는 「高價 옷 의혹」을 제기했다. 그는 金大中 대통령 노벨상 수상 前 10여 명의 院外 지구당 위원장들을 규합, 「DJ 노벨상 수상 저지운동」 차원에서 노르웨이를 방문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現 정부를 공격하다 보니 그 역시 6건의 고소 고발을 당한 상태다.
李信範씨의 공세에 대해 여당에서는 『정치인이 되기 전에 먼저 인간이 돼야 할 사람』 『자신의 몸값을 올리기 위해 대통령을 상대로 오버액션을 하는 영웅주의자』로 반격을 했다. 한때는 한나라당 내부에서도 「너 죽고 나 죽자」식의 그의 투쟁방식에 부담을 느낄 정도였다고 한다.
李信範씨의 정치이력에서 金大中이라는 이름 석 자를 빼놓을 수는 없다. 金大中·李信範의 인연은 197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당시 정부는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을 만들었다.
官製因緣
중앙정보부가 서울대 학생운동권이었던 李信範, 趙英來(조영래·작고), 張琪杓(장기표·現 신문명정책연구원 원장), 沈載權(심재권·민주당 국회의원)씨 등이 서울 시내 대학생 3만~5만명을 동원, 정부 기능을 마비시킨 뒤 朴正熙를 강제로 하야시키고 각계 대표로 혁명위원회를 구성, 혁명위원장에 金大中을 추대키로 했다는 혐의를 두고 이들을 조사한 사건이다.
수사과정에서 李信範씨는 『金大中이 시켜 정권 타도하려 한 것 아니냐, 돈은 얼마 받았느냐… 동교동집 약도를 그려보라…』등의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金大中 대통령과의 관계에 대해 수없이 신문을 받았다.
李信範씨가 金大中씨를 처음 만난 것은 1979년 1월1일 양력 설날이었다. 당시 광화문에 있던 白凡사상 연구소에서 함께 활동했던 白基玩(백기완), 高銀(고은), 韓勝憲(한승헌)씨 등과 함께 새해 인사차 동교동 자택을 찾았다. 그때 金大中씨는 李信範씨를 보고 『어디서 이름을 많이 들은 기억이 난다』는 정도의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1980년 11월 「金大中 내란음모 사건」에서 그는 金大中씨와 같이 법정에 서게 된다. 李信範씨의 죄목은 내란음모 및 계엄 포고령 위반. 합동수사본부는 이 사건을 「金大中으로부터 사주를 받고 光州지역 불순분자들이 선동하여 일으킨 국가 전복을 목적으로 한 내란·폭동」이라고 발표했다.
1심 공판 때는 법정분위기가 워낙 살벌해 말 한 마디 나누지 못했고 2심 공판 休廷(휴정) 때에야 얼굴을 쳐다보며 말할 기회를 가졌다고 한다. 金大中씨가 文益煥(문익환) 목사와 자신에게 다가와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고 한다.
『수사관들이 「당신(金大中씨)이 내란음모를 했을 것으로는 우리도 생각하지 않는다. 文益煥, 李信範이라는 사람은 폭탄도 만들고 혁명을 할 수 있는 사람들 아니냐」라는 이야기를 되풀이하더라. 처음에는 그 말이 정말인 줄 알고 「두 사람 때문에 내가 사형을 당하는구나」하고 당신들을 원망했었다. 그러나 재판을 받다 보니 나와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의 케이스도 역시 고문, 조작된 것이라는 걸 알게 됐다. 한때나마 그런 생각했다는 것을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런 인연 뒤에 두 사람은 미국에서 만난다. 사형선고를 받은 金大中씨가 全斗煥(전두환)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내고 1982년 12월23일 미국으로 떠났고, 그 다음날 李信範씨도 석방됐다. 그는 이듬해인 1983년 2월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李信範은 미국 체류기간에도 金大中씨가 만든 인권문제연구소에 가입하지 않았다. 미국 체류시절, 李信範씨의 정치적 견해에 영향을 준 故 崔星一(최성일) 박사의 조언 때문이었다. 서울법대 출신으로 1960년대에 미국으로 이민와 영어에 능통했던 崔박사는 金大中씨 등 한국의 주요 정치인들이 미국에 오면 동시통역을 도맡다시피 했다. 崔박사는 『李군은 순수한 청년학생운동을 한 사람이고, 兩金씨는 정치인이기 때문에 언제 어떻게 이상한 행동을 할지 모르는 사람들이다. 특히 金大中씨한테는 돈으로 신세를 지거나 종속적인 관계를 맺지 않는 게 좋겠다』는 충고해 주었다고 한다. 그는 崔박사의 조언을 충실히 지키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李信範씨가 「金大中 안전귀국 동행단」의 책임을 맡으면서 절정에 달한다. 1983년 필리핀의 민주화운동 지도자인 베니뇨 아키노가 필리핀 마닐라 공항에 도착 직후 피살되자 金大中씨의 안전한 귀국을 위해 묘안을 짜내던 시기였다.
DJ와 마지막으로 만난 자리
金大中씨가 귀국하고 7개월 뒤인 1985년 9월 金泳三씨가 미국에 왔다. 민주화추진협의회(약칭 민추협) 공동의장 자격이었다. 李信範씨는 金泳三씨의 訪美를 돕다가 당시 韓和甲(한화갑) 비서에게서 『왜 양다리 걸치느냐』는 항의도 받았다고 했다. 심지어 金大中씨도 『왜 李동지는 왔다갔다 하냐』는 말을 했다고 한다.
『在野운동할 때는 兩金씨와 다 가까웠지만, 현실정치에서는 金泳三씨 쪽에서 정치를 시작했고, 심정적으로 金泳三씨 쪽이 편합니다. 金大中 대통령과는 정치성향이 맞질 않았어요. 분명한 사실은 金대통령과 싸우고 결별했다거나, 金大中 대통령이 저에게 뭘 섭섭하게 했기 때문에 그만 뒀거나 한 게 아닙니다. 金泳三씨와 일하는 게 훨씬 능력을 발휘하겠다는 생각에서 함께 일하기 시작한 겁니다』
계속 미국에 머물던 李信範씨는 1987년 6·29선언 후속조치로 7월10일 특별복권되자 다음날인 11일 한국에 돌아왔다. 그는 1987년 大選 때 「軍政종식 단일화쟁취 국민협의회」 실행위원으로 참가한다. 金大中씨가 폈던 「4者 필승론(盧泰愚, 金泳三 후보가 모두 영남권이어서 金大中 자신이 승리할 가능성이 높다는 논리)」에 대한 실망감으로 金大中씨와 멀어진다.
『1987년 盧泰愚씨가 당선되고 나서 제가 국내언론에 「兩金씨는 국민이 차려 준 밥상을 발로 걷어찬 사람들이다. 그들은 정치에서 물러나는 것이 옳다」는 내용의 인터뷰를 했습니다. 兩金씨가 야당을 분열시켜서 군인들이 권력을 마치 「회전문(Revolving Door)」처럼 승계를 한 데 대해 金大中씨의 책임이 더 크다고 생각했습니다』
李信範씨는 1988년 통일민주당 정책실장으로 金泳三씨와 일하게 된다. 그는 신한국당의 깃발 아래서 치른 1996년의 15代 총선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그가 金大中씨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2000년 7월23일이었다고 한다. 다름아닌 金大中 내란음모 사건 관련자들의 청와대 만찬이었다. 金大中씨와의 첫 인연도 내란음모이고, 마지막 만남도 내란음모 관련자 모임이었다.
공항서 출국금지 당해
지난 2월22일 김포공항 출국심사대. 캘리포니아 주립大 어바인캠퍼스(UCI) 객원연구원인 李信範씨는 3월13일로 예정된 강의를 위해 출국하고 있었다. 이번 여행에는 한나라당 의원 경제배우기 모임(회장 鄭義和 의원)과 弘傑씨의 「주택 불법구입 소송」일도 있었다.
李信範씨가 여권과 출국신고서에 확인도장을 받고 심사대를 통과해 몇 발자국 걸어나갔다. 갑자기 직원이 달려나와 출국신고서에 적힌 「캘리포니아大 교수」라는 직업 외에 다른 직업이 있는지를 물었다.
李信範씨가 『직업은 왜 묻느냐』며 옥신각신 하는 사이 직원은 그의 여권에 찍힌 출국확인도장 위에 「void(무효)」라고 썼다. 서울지검 형사2부(부장 金畯圭·주임검사 李光載)에 「그림로비」 폭로 등 3건의 명예훼손 혐의 고소고발 사건으로 피소된 그는 이로써 출국금지를 당했다.
李씨는 서울행정법원에 「출국금지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내 3월10일자로 신청이 「이유 있다」고 받아 들여졌다. 3월12일 출국한 李씨는 현재 캘리포니아주립大 어바인캠퍼스 기숙사에 머물면서 한국을 오가고 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李信範씨와 李姬鎬 여사는 한다리 건너 사돈관계다. 李信範씨의 남동생이 李姬鎬 여사의 조카사위다. 가족관계, 민주화 운동으로 얽혀있는 이들의 인간관계가 왜 이처럼 꼬여 있는 것일까.
2001년 5월9일자 조선일보 「만물상」은 李信範씨와 대통령의 셋째 아들 弘傑씨가 벌이는 소송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근교의 오렌지 카운티에 있는 「오렌지 카운티 레지스터」라는 지방신문이 있다. 창간 1세기가 가까워 오는 오랜 역사의 이 신문(4월27일자) 1면에 「한국의 분쟁, 오렌지 카운티 법정으로 비화」라는 기사가 큼지막한 인물사진과 함께 제법 비중 있게 처리됐다…. 이 사건의 원고는 야당 국회의원이었던 李信範씨, 피고는 金대통령의 3남 弘傑씨인데 이번 소송의 초점은 金씨가 어떻게 3600평방피트나 되는 랜치 스타일의 집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는가에 맞춰져 있다. … 이 신문은 우리 역대 대통령과 그 가족의 스캔들과 부정사건을 별도로 소개해 많은 한국인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
金대통령의 셋째 아들 弘傑씨는 1994년부터 7년째 부인 임미경씨 및 두 아들과 함께 로스앤젤레스에서 살고 있다. 弘傑씨가 살고 있는 집은 李信範씨가 弘傑씨와 소송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드러났다. 李信範씨는 2000년 2월9일 국회에서 在美동포 무기거래상 조풍언씨와 대통령 가족과의 관계를 밝히라고 하면서 弘傑씨의 호화 유학생활, 호화주택 거주의혹에 대해 질문을 했다.
이 발언에 대해 로스앤젤레스의 KBS 현지 법인인 KTE(Korean Television Enterprises·美洲 한국방송)가 弘傑씨 가족은 토렌스의 서민주택에 산다고 보도를 하면서 李信範씨를 「허위폭로 전문가」라고 했다고 한다(李씨 주장).
이에 대해 李信範씨는 KTE가 자신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2월23일 美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지방법원에 KTE 등을 상대로 100만 달러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소송이 시작되면서 증인신청을 한 弘傑씨가 증인출석에 응하지 않자 李信範씨는 아예 弘傑씨를 상대로 2001년 1월7일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이 과정에서 李信範씨의 변호사가 재판 관련 서류를 보내기 위해 弘傑씨의 주소지를 당국에 조회하다 弘傑씨의 집을 발견했다. 미국에서는 소송이 발생해 원고·피고 관계가 성립하면 문서 송달을 위해 집을 합법적으로 찾을 수 있다.
弘傑씨는 시민권자 사칭에 따른 이민법 위반, 직업 위장 및 수입 허위기재에 따른 융자사기, 생활비를 보조받고 있을 가능성과 관련한 연방부패방지법 위반 등 세 가지 혐의를 받고 있다. 弘傑씨 부부는 1995년 5월 토렌스 주택을 34만5000달러에 구입하면서 8만6250달러를 현금으로 내고, 나머지 25만8750달러를 워싱턴 뮤추얼뱅크(Washington Mutual Bank)에서 융자받았다. 융자서류에는 유학생으로서 합법적인 장기융자가 불가능하다는 사실 때문인지 미국 시민권자로 표시를 했다는 것이다.
학생사증을 가지고 있어 취업이 불가한데도 弘傑씨는 마이크 푸드(Mike’s Foods社)에서 일하고 월 4000달러, 부인은 아메리칸 뉴라이트(American NuLite社)에서 일하고 월 3700달러를 받고 있다고 기재하고, 현금 불입금 8만6250달러도 남에게 빌린 것이 아니라 자신이 번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약 100만 달러짜리 주택 구입 확인
弘傑씨는 1995년 34만5000달러에 구입했던 토렌스 집을 47만5000달러에 부동산에 매물로 내놓고 인근 팔로스 버디스(Palos Verdes) 허니 크릭 로드(Honey Creek Road) 22625번지에 하워드와 미셀 킴이란 假名(가명)으로 집을 구입했다.
이 집은 600평 대지에 방 5개, 욕실 3개가 딸린 2층 집이다. 팔로스 버디스는 로스앤젤레스市나 토렌스市에서 더 남쪽에 위치한 태평양 연안 지역으로 富村(부촌)으로 알려져 있다. 막다른 골목 끝, 高지대에 위치해 있는 弘傑씨 집에서는 인근 토렌스市나 로스앤젤레스市의 夜景(야경)이 내려다 보인다고 한다.
등기부 등본에 따르면 弘傑씨는 이 집에 대해서 지난해 5월16일 등기이전을 신청, 6월14일 소유권 이전절차를 마쳤으며 구입가격은 97만5000 달러였다. 이중 60만 달러를 월드 세이빙스 은행에서 융자받았으며, 나머지 40만 달러는 일시불로 지불한 것으로 밝혀졌다.
한편 이같은 사실을 확인한 李信範씨는 3월20일 弘傑씨의 팔로스 버디스 집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한국은 경제적으로 어려운데 어떻게 유학생의 신분으로 두 집(합계 134만 달러)을 유지해 왔는지 궁금하다. 본인의 눈으로 弘傑씨가 집앞에서 신문을 들고 들어가는 것을 확인했다』고 주장했다.
현재 弘傑씨는 토렌스 집이 팔리지 않은 상태로 약 7개월간 두 집을 유지한 것으로 밝혀졌다. 최소한 집 할부 상환금만 월 5000~ 6000달러이며 기타 생활비 등을 포함 매달 1만 달러씩 들어가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美 캘리포니아州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지방법원은 4월5일 弘傑씨 부부의 선서증언을 강제해 달라는 李信範씨의 신청을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4월16일과 4월17일 양일 간 弘傑씨와 부인 임미경씨의 선서증언이 李信範씨의 변호사 사무실이 있는 가든 그로브에서 있었다. 4월16일 오전 10시경 선서장소에 외국인 변호사 잔 코넬리와 한국인 방일용 변호사와 함께 도착한 弘傑씨는 하워드 킴이라는 가명을 사용한 사실은 시인했으나 대부분의 질의에 증언을 기피했다.
5월17일에는 가옥매입을 위한 은행대출금에 대해 진술을 받았다. 弘傑씨가 내놓은 융자신청서 사본에는 「나는 소루미나 스카이라이트社의 사원으로 한달에 1만8000달러씩 받고 있다」고 자금출처를 기술한 것으로 돼 있다.
『작은 개미구멍이 둑을 무너뜨릴 수 있다』
弘傑씨의 호화주택 의혹 진상규명과 관련, 李信範씨는 40만 마일이 넘게 태평양을 건너다녔다고 말한다. 미국 로스앤젤레스까지의 거리를 왕복 2만 마일로 치면 20차례나 다닌 셈이다. 항공요금만 2600만원(1회 왕복항공료 130만원 기준)이고, 소송비용은 수만 달러가 들어간 상태다.
―작년 2월23일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지방법원에 KTE 등을 피고로 100만 달러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습니다. 굳이 대통령의 가족을 상대로 소송을 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제가 요구하는 것은 제 명예를 짓밟아 놓은 것에 대해 사과하라는 겁니다. 저를 「허위 폭로 전문가」라고 몰아세웠습니다. 지역구 유권자들이 제게 대통령 아들에 대해서 허위 폭로를 했다고 비난을 합니다. 이런 오해를 풀지 않으면 제 정치생명이 지속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번 소송에서 자신이 「꽃놀이패」에 불과하다고 했다.
『클린턴 前 美 대통령이 「화이트게이트」와 「르윈스키 스캔들」에서 치명상을 입은 것은 범죄 사실보다 거짓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弘傑씨 문제는 청와대가 어느 정도로 위기관리 능력이 없는지를 말해 주고 있어요. 발단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전혀 수습하려는 의지가 없습니다. 「감히 金大中의 아들을 누가…」라는 오만은 미국에선 통하지 않아요. 고어 前 부통령의 아들이 속도제한 55마일 이하 도로에서 97마일을 달렸다고 체포돼서 재판을 받는 나라입니다. 정부는 작은 개미구멍이 둑을 무너뜨릴 수도 있다는 인식을 갖고 이 문제를 수습해야 합니다』
李信範씨는 金大中 대통령에 대해 인간적으로 섭섭한 감정은 전혀 없다고 말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지난해 4·13 총선 과정에서 제 지역구에서 집권당 이름으로 흑색선전을 해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在野 출신 李佑宰(이우재) 의원, 李在五(이재오) 의원에게 심하게 하는 것을 보고 「이건 내가 생각했던 金大中씨가 아니지 않느냐」라는 인간적인 실망을 했습니다. 1998년 국정원 요원들이 국회 529호에서 국회의원을 사찰한 사실을 폭로했을 때는 권력핵심부에서 제게 「피눈물을 흘릴 줄 알라」고 섬뜩한 표현을 써가며 협박했습니다. 제가 출국금지 당할 때 농담을 했어요. 내가 朴正熙씨, 全斗煥씨 말도 안 들은 사람인데, 지금 2년도 안 남은 金大中씨 말을 듣게 생겼냐고요』
그는 자신이 저격수로 나선 것에 대해 『여당이었던 한나라당이 野黨 경험이 없어 민주화 투쟁경력이 있는 자신이 對與투쟁의 선봉에 선 것』이라고 했다.
『야당이 정부와 맞설 때는 강력하게 맞서고, 도와 줄 땐 흔쾌하게 도와 주는 是非(시비)가 분명한 야당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16代 국회는 저격수가 없는 맹숭맹숭한 국회가 아닌가 합니다. 저격수들이 많이 나와 是非를 분명히 가렸다면 요즘 같은 심각한 失政(실정)은 예방됐을 것 아닙니까』
대학시절「자유의 종」발간
李信範씨는 충남 예산 출신이다. 그는 예산에 있는 예덕초등학교를 다니다 5학년 때 서울 무악재에 있는 안사초등학교로 전학왔다. 용산중·고를 졸업한 그는 1967년 서울대 법학과에 진학했다. 李信範씨는 4차례에 걸쳐 5년8개월 간 투옥되는 등 우여곡절 끝에 1988년 8월30일, 21년 6개월 만에 졸업을 했다. 그는 전과 경력 때문에 사법시험 응시 자격을 박탈당했다. 학생운동을 하며 고시공부도 병행했던 그에게는 아픈 기억이었다.
李信範씨는 서울대 법대 재학시절인 1970년부터 1971년까지 「자유의 종」을 발간했다.
「자유의 종」은 3選개헌 반대투쟁 이후 중앙정보부가 언론을 극도로 탄압하자 1970년 10월3일에 창간한 학생 신문이었다. 1971년 10월 말 폐간되기까지 주간으로 36호까지 발행돼 校內는 물론 가두에서 유료로 비밀리에 판매되기도 했다.
등사기로 긁어서 만든 「자유의 종」은 현재 서울대학교 희귀자료 보관소에 보관돼 있다. 「자유의 종」은 당시 일반 신문들이 쓸 수 없는 표현인 「고문 폭력기구 중앙정보부를 해체하라」 「언론 화형식」 등으로 세인의 주목을 끌었다.
「자유의 종」이 유료로 판매될 정도로 호응이 있자 서울대 문리대에서는 「전야」, 梨大에서 「새얼」, 고려대에서는 「활화산」 등 10여 종의 「지하신문」들이 속속 발행됐다. 특히 1971년 3월에는 「언론화형식」기사를 보도해 기자들의 「자유언론 실천선언」의 도화선이 됐다. 결국 李信範씨는 이 기사로 학교에서 除籍(제적)당한다.
李信範씨는 서울법대 선배인 崔箕善(최기선) 인천시장과는 학창시절을 함께 보냈다.
『둘다 찢어지게 가난해 막걸리 집에서 술값이 없어서 저를 담보로 앉혀놓고 崔시장이 술값 구하러 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李信範씨의 서울대 법대 67학번 동기들은 법조계에 많이 진출해 있다. 宋光洙(송광수) 검사, 郭永哲(곽영철) 서울고검 차장검사, 梁東冠 (양동관) 서울고법 부장판사, 朴國洙(박국수) 서울고법 부장판사, 宋斗煥(송두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회장이 동기생이다. 경제계에 玄在賢(현재현) 동양그룹 회장 등이 있다.
李信範씨는 1996년 5월 신한국당 강서을구에서 출마, 15代 때 국회 진입에 성공한다. 이후 그는 4년 연속 통일외교통상委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국감 성적을 냈다. 1999년에는 14개 常任委 의원들이 뽑은 국감베스트 의원 중 1위를 차지했다.
李信範씨의 현실정치 참여의 辯(변).
『1987년 6·29선언으로 민주화가 제도화 될 계기가 마련됐습니다. 정당 정치가 발달해야 민주주의가 정착되는 것 아닙니까. 在野에서 청년학생운동으로 할 역할은 끝났다고 판단하고 야당에 들어가서 야당의 힘을 키워 줘야겠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한 겁니다』
―在野 민주화 투쟁과 현실정치는 어떻게 다릅니까.
『在野운동은 是是非非(시시비비)를 가려 옳지 않은 건 끝까지 투쟁을 합니다. 이것을 在野的 思考(재야적 사고)라고 하지요. 현실 정치에서는 자기의 뜻이 100% 관철되진 않잖아요. 국회 안에 있는 의석이라는 현실적인 제약도 있고 각자 입장을 어느 선에서 타협도 하고 양보도 해야 하는 것이니까. 정치라는 건 그런 의미에서 대화와 타협을 해야 하는 場(장)이라고 봅니다. 金大中 주변을 보면 在野的 사고를 가진 사람이 많습니다』
―어떤 점이 그렇습니까.
『한나라당이 어떤 정당이든, 집권당인 민주당은 한나라당을 상대로 정치를 해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한나라당을 자꾸 타도의 대상으로 설정해 놓고 깨뜨리려고 하니까 정치가 편할 날이 없죠』
『진정한 의미의 학생운동은 없다』
1970년대 학생운동을 한 李信範씨에게 오늘날 학생운동은 어떻게 비춰지고 있을까.
『지금은 학생운동이 없지 않습니까. 어떤 소규모 사상운동이나 일상화된 학내 운동은 있는지 몰라도 참된 의미의 학생운동은 없는 것 같습니다. 학생운동이라면 중요한 국민적 관심사가 있을 때 약한 쪽에 서서 정부의 不義를 질타하고 시정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는 것이 역할입니다』
―어떤 점에서 그렇다고 보십니까.
『너무 이념적으로 편향되어 있고, 대중적 지지를 잃어버린 것 같아요. 집권여당쪽으로 편향돼 公正性(공정성)이나 不偏不黨性(불편부당성)이란 측면에서 잘못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정부여당이 부정부패, 부정선거를 해도 학생들이 항의하는 것을 본 적이 없어요. 보안법을 철폐하라는 등 한나라당 앞에 와서 자꾸 데모를 합니다. 물론 보안법 때문에 불편한 사람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다른 것 때문에 불편한 사람이 더 많단 말입니다.
그런 문제에서 있어서 학생들은 왜 침묵합니까. 옷로비 사건, 한빛은행 사건 때 데모한 적 있습니까. 오늘의 학생 지식인들이 심각하게 고민해야 될 문제라고 봐요. 왜냐하면 시민운동이 발달하지 않은 상황에서 건전한 학생운동의 역할이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이 참 아쉽습니다』
―현재의 학생운동은 한총련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한총련은 정부에서도 이적단체로 규정한 사실이 있지 않습니까.
『左로 지나치게 편향된 운동은 결국은 大衆性(대중성)을 잃어버리게 되고 소수의 극렬한 행동으로 남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운동이 아니죠. 북한이라는 체제가 세계사 속에서 代案(대안)이 아니잖습니까. 만일 북한체제를 선호하고 신봉하는 행동이 있다면 시대착오적입니다』
李信範은 1989년 10월 한국논단에 「한국의 급진사상과 학생운동」이란 글을 기고했다. 그는 학생운동에 급진사상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을 대략 1970년대 말로 보고 있다.
『물론 1970년대라는 시대가 朴正熙 대통령이 유신을 선포하고 의회 민주주의를 다 파괴를 했었죠. 합법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바꾼다든가 의회 민주주의 틀 속에서 代案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아주 절망적일 때였어요. 자연히 代案으로써 革命을 해야 했고, 기성체제를 非합법적인 방법으로라도 파괴해야 한다는 이론이 퍼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1980년대라는 암흑기를 거치면서 1987년 6·29 선언이 우리나라에 의회 민주주의를 다시 한번 정착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그 후에 이념적인 혼란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봅니다. 다만 참고해야 할 것은 일본이 1990년대에 거품경제가 붕괴하면서 정당도 파편화됐지만 이익집단도 모두 파편화됩니다. 그러면서 급진 좌경적인 집단들의 영향력이 급속하게 쇠퇴했습니다. 그건 세계사적인 현상이기도 하지만, 일본이라는 나라가 겪었던 현상들이 우리에게 참고가 된다고 봅니다. 세계사적인 변화, 이익집단의 중도화 경향 등은 참고할 부분이 많다고 봅니다』
식사 빨리하는 습관
인터뷰는 여의도 한나라당사에서 했다. 점심시간이 되자 그는 『우리 뭐 좀 시켜먹자』며 점심으로 군만두와 짬뽕을 시켰다. 기자가 반 정도 먹었을까. 그는 CF촬영을 하는 배우보다도 더 맛깔스럽게 짬뽕 한 그릇을 후딱 해치웠다.
기자와 속도 차이가 너무 났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李信範씨는 『천천히 먹으라』며 『교도소 시절 설거지하던 친구가 빨리 먹으라고 난리를 피우는 통에 버릇이 돼 식사시간이 10분이 채 안 걸린다』며 웃는다.
『독방에 주로 있었죠. 1972년부터 1년4개월 정도 서울구치소에 있다가 대전교도소로 갔습니다. 한 방에 10명이 있었는데 무기수가 4명에다 통일혁명당사건으로 들어온 사람이 2명이나 있었습니다. 韓明淑(한명숙) 여성부 장관의 남편도 함께 있었습니다. 요즘은 교도소가 참 좋아졌지만 우리가 살 때는 형편이 없었거든요. 목욕을 한달에 한두 번 할까말까. 제가 치열이 고른 편인데 교도소에 의사가 없다 보니 사랑니를 못 뽑아서 아랫니가 다 비뚤어졌어요』
李信範씨는 노래를 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애창곡을 물어도 『연령에 맞춰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서너 곡은 있다』며 여유만만하다.
『레게나 힙합까지는 못 따라가겠고요. 우리 세대는 엘비스 프레슬리나 비틀즈를 좋아한 사람들이잖아요. 미국에 있을 때는 피터폴 앤 메리, 존 바에즈와도 사귀었습니다』
국회의원들은 각종 지역구 행사나 이벤트로 가수 등 연예인들과 가깝게 지내는 경우가 많다. 李信範씨는 야당이 되고 나니까 연예인들을 섭외하는 일이 상당히 어렵다고 털어놨다.
『金大中 정부가 들어서면 야당이든 여당이든 활성화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사람들이 더 얼어붙고, 겁에 질려 있어요. 조지오웰의 소설 「1984년」에서 사람들이 마치 원격 감시당한다는 느낌들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어요. 야당하고 행사하면 큰일 나는 줄 알고 겁을 먹습니다.
계좌추적, 세무사찰을 한다고 하니까 누구나 세무사찰과 추적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막연한 공포감을 갖게 되는 것 같습니다. 폭력은 3공화국 때처럼 노골적인 게 더 솔직한 거지, 은근한 것이 더 사람을 죽이거든요. 노골적인 폭력이 차라리 저항하기도 간단하고, 명쾌한 것인데 이건 은근히 사람을 멍들게 하니까요』
그는 도청 공포 때문에 요즘도 중요한 대화는 가급적 만나서 하고 유선상으로는 일상적 이야기만 한다. 그래서 그는 편리한 휴대전화보다 감청의 위험이 적은 공중전화를 선호한다. 그는 항상 지갑에 공중전화 카드를 가지고 다닌다.
―現 정부 국정 운영의 난맥상은 그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봅니까.
『대통령의 일인지배 때문입니다. 즉 帝王的(제왕적) 대통령제 하에서 일어난 현상입니다. 아더 슐레진저 2세의 저서 「제왕적 대통령제(Imperial Presidency)」에서 인용한 겁니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단이 심해지면 대통령이 뭐라고 말을 안 하면 아무도 일을 안 하는 겁니다.
대통령 주위에는 「예스맨」들만 있고 측근 중에 아무도 대통령 앞에서 金大中 대통령의 「자기 중심적 도그마」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고 야단을 맞아가면서 토론을 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전 金大中씨를 경험해 봐서 압니다.
측근들이 항상 敎示(교시)에 익숙해져 있고, 교시를 절대적으로 받드는 분위기 속에서 누가 감히 「이러시면 안 됩니다」라고 얘기할 수 있겠어요. 金대통령은 「자기 중심적 도그마」로 스스로 논리적 보호막을 만들어가기 때문에 한 번 빠지면 쉽게 나오지 못하는 단점이 있습니다. 이분한테는 강력한 야당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한나라당이 너무 부드럽고 점잖아서 오늘의 위기를 초래한 측면도 있다고 역설적으로 생각을 합니다』
李信範씨는 李承晩 前 대통령의 국회 내 동상 건립에 반대한 것으로 알려졌다. 1999년 12월 초대 국회의장을 지낸 李承晩 前 대통령과 申翼熙(신익희) 제2대 국회의장의 동상 건립계획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자 李信範씨를 비롯한 몇몇 의원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이유는 李承晩 前 대통령이 의회지도자로서는 사사오입 개헌, 발췌개헌 등 부정적인 일들을 많이 했었다는 것이다.
『속기록에도 나오지만 저는 건립을 반대한 것이 아니고 장소가 적당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李承晩 前 대통령은 초대 대통령으로서 받들어야 할 분이기 때문에 행정부서가 있는 정부종합청사 안에 흉상을 세우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어요. 국회 안에 세우는 것은 초대 대통령상이 아니고 「의회 지도자상」입니다. 지금까지 훌륭한 의회 지도자가 없었다면 없는 대로 놔두자는 겁니다. 난 초대 대통령 흉상을 세운다면 난 찬성했을 겁니다』
李承晩 前 대통령의 동상은 2000년 5월15일 국회에 세워졌다.
對北 先貢後得은 착각
―金大中 정부의 對北정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교류협력 확대라는 부분과 정치군사적인 부분과는 냉정하게 구분해야 합니다. 교류협력은 가능하면 많이 확대하되 정치 군사분야에서는 따질 것은 철저히 따져야 합니다. 공격용 무기의 後進배치라든가 군비통제나 군비축소 같은 문제에서 실질적인 진전이 있기 전에는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됐다고 허위선전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북한은 군부가 지배하는 나라입니다. 인민경제는 피폐했지만 군부경제는 상당히 잘 돌아가는 특이한 지배구조를 가진 나라이기 때문에 先貢後得(선공후득)이 될 것이라고 믿는 것는 순진한 생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원도 필요하지만 때론 무관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李信範씨는 작년 북한이 1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무기구매사절단을 러시아에 파견한 사실을 상기시켰다. 북한이 15억 달러를 현금으로 지불하고 무기를 구입했다는 사실, 20여 만 명을 동원한 군사기동훈련중 고장난 탱크가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을 주시해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李信範은 1998년 상임위 국정감사 때 처음으로 금강산 관광에 9억4200만 달러를 이면계약했다는 것을 공개했었다.
『북한에 대한 지원은 해 줘야 할 것과 해줘서는 안 되는 문제가 있거든요. 예컨대 북한의 농업이 워낙 피폐해 있기 때문에 종자지원을 해 주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 原種(원종)을 주면 안 되는 겁니다. 옥수수 씨앗도 매년 지원을 해 주는 체제로 해야 합니다. 원종을 줘서 북한이 자체생산을 하기 시작하면 우리가 무슨 지렛대가 있습니까. 그 다음엔 고마워하지도 않습니다.
금강산 관광 계약서를 보세요. 금강산 국제그룹에서 일일관광권을 땄을 때는 북한 정무원의 관인이 찍혔고 金日成이 서명을 했어요. 현대가 받은 계약서는 亞太평화위의 서명만 들어있지 官印(관인)이 있다거나 하는 아무런 보장이 없어요. 白某(백모)라는 북한의 무역상이 서명한 것이 하나 있는데 국제법상의 법적 의무는 아무 것도 없는 겁니다』
李信範은 통일논의를 위해 북한을 지배하는 실효적 지배집단인 金正日과 대화의 필요성은 인정했다.
『대화를 두려워해서는 안 되지만 두려움 때문에 대화를 해서는 안 됩니다. 북한이 대화를 안 하면 쳐들어올 것 같으니까 우리가 북한에 대해서 자꾸 베풀어야 한다는 소위 「체임벌린식 유화주의」는 위험하다는 겁니다. 오히려 북한에 잘못된 신호를 보내는 겁니다. 자꾸 트집을 걸면 뭔가 나온다는, 그래서 트집을 자꾸 더 걸게 만드는 것은 안 됩니다. 옛날 서독이 동독에 베풀 때 공짜가 어디 있었습니까』
美國이란 超강국만 존재
―金대통령의 외교정책에 대해 평가를 한다면.
『우리 주변에 4强이란 없습니다. 미국이란 유일 超강대국만이 존재합니다. 이것을 현실로 인정하고 외교를 해야지 「내가 주변 4强을 다 조정할 수 있다」는 妄想(망상)을 하게 되면 國益(국익)을 그르치게 됩니다. 미국에 事大(사대)하고 盲從(맹종)하자는 게 아니라 현실을 인정하고 외교를 해야지 자꾸 과대망상에 빠져서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과거 3억 인구가 현재 1억2000만이 된 러시아는 더 이상 아시아에서 변수가 아닙니다. 중국이 오히려 중요한 변수입니다. 뭣 때문에 부시를 만나기 전에 푸틴을 끌어들여서 성명을 발표합니까. 워싱턴 포스트 칼럼니스트 매리 맥그로리는 부시 행정부가 金大中 대통령을 대접한 것에 대해 「shabby」란 표현을 썼거든요. 아주 冷待(냉대)했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오죽 냉대를 받았으면 국가 미사일 방어(NMD) 체제 문제를 그곳에 가서 사과하고 말을 뒤집겠습니까』
최근 개인 계좌추적을 비롯한 언론사 세무사찰에 대해서 李信範은 『자신도 피해자』라고 했다.
『저도 사찰을 많이 받아봤지만 계좌추적처럼 기분 나쁜 일이 없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이 나라에서 계좌를 개설해서 계좌에서 수표를 넣어본 경험도 없고 꺼내본 일도 없어요. 항상 사찰을 당한다고 생각하니까요.
우리 당에서는 저를 두고 상당히 선구자적인 견해, 통찰력이 있었다고 그래요. 선의의 피해자가 얼마나 생겼겠어요.(웃음) 수표라는 것을 자꾸 그런 식으로 사찰한다고 하면 경제가 어려운 시국이라도 일반 국민이 현금을 가지고 있으려고 하죠』
그는 現 정부의 언론사 세무조사에 대해 세무사찰을 남용하기로 유명했던 미국 닉슨 대통령을 예로 들었다.
『존 레논에 대한 FBI의 사찰보고서가 공개가 됐어요. 재미있는 것이 리처드 닉슨이 자기의 재선에 존 레논이 장애가 된다고 생각을 한 거예요. FBI가 美 이민국과 함께 존 레논을 여러 해 동안 미행하고 사찰하고 도청하다가 오래 전 존 레논이 영국에 있을 때 마리화나를 피우다가 벌금을 문 경력을 발견하고서 마약사범으로 규정해서 추방하는 기록영화가 나왔습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金大中 대통령이 리처드 닉슨하고 어느 정도 다를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언론이라는 게 우파 좌파 중도파도 있는 것인데 자기 입맛에 맞는 것 외에는 다 나쁜 것으로 분류하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거지요. 우리 사회에 다양한 견해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혁명이냐 반동이냐」 이분법으로 재단하는 것은 위험한 겁니다』
지금은 미국에 건너가 있는 李信範씨는 캘리포니아주립大 어바인캠퍼스(UCI)에서 객원연구원 자격으로 오는 6월까지 학생들을 가르친다. 1970년대 민주화 운동으로 곡절 많은 학창시절을 보냈던 그가 30년 만에 「늦바람」이 났다.
『샌드위치와 콜라를 사들고 캠퍼스를 거닐면서 20代 초반의 학생들과 어울리는 기분이 꽤 괜찮습니다. 영어로 강의하느라 고생은 안 하냐구요? 오랫동안 안 써서 녹이 슬었지만, 이번 기회에 외교통상부 장관을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마스터하렵니다』●

한나라당 前 의원 李信範(이신범·51)씨는 「DJ 저격수」로 널리 알려져 있다. 金大中(김대중) 대통령은 물론, 李姬鎬(이희호) 여사, 대통령의 셋째 아들 弘傑(홍걸·38)씨 등이 그의 저격 대상이었다.
그는 미국 에모리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弘傑씨가 유학생 신분으로 高價의 주택을 산 사실을 폭로했고, 李姬鎬 여사가 샤넬 등 명품 옷을 입고 있다는 「高價 옷 의혹」을 제기했다. 그는 金大中 대통령 노벨상 수상 前 10여 명의 院外 지구당 위원장들을 규합, 「DJ 노벨상 수상 저지운동」 차원에서 노르웨이를 방문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現 정부를 공격하다 보니 그 역시 6건의 고소 고발을 당한 상태다.
李信範씨의 공세에 대해 여당에서는 『정치인이 되기 전에 먼저 인간이 돼야 할 사람』 『자신의 몸값을 올리기 위해 대통령을 상대로 오버액션을 하는 영웅주의자』로 반격을 했다. 한때는 한나라당 내부에서도 「너 죽고 나 죽자」식의 그의 투쟁방식에 부담을 느낄 정도였다고 한다.
李信範씨의 정치이력에서 金大中이라는 이름 석 자를 빼놓을 수는 없다. 金大中·李信範의 인연은 197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당시 정부는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을 만들었다.

중앙정보부가 서울대 학생운동권이었던 李信範, 趙英來(조영래·작고), 張琪杓(장기표·現 신문명정책연구원 원장), 沈載權(심재권·민주당 국회의원)씨 등이 서울 시내 대학생 3만~5만명을 동원, 정부 기능을 마비시킨 뒤 朴正熙를 강제로 하야시키고 각계 대표로 혁명위원회를 구성, 혁명위원장에 金大中을 추대키로 했다는 혐의를 두고 이들을 조사한 사건이다.
수사과정에서 李信範씨는 『金大中이 시켜 정권 타도하려 한 것 아니냐, 돈은 얼마 받았느냐… 동교동집 약도를 그려보라…』등의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金大中 대통령과의 관계에 대해 수없이 신문을 받았다.
李信範씨가 金大中씨를 처음 만난 것은 1979년 1월1일 양력 설날이었다. 당시 광화문에 있던 白凡사상 연구소에서 함께 활동했던 白基玩(백기완), 高銀(고은), 韓勝憲(한승헌)씨 등과 함께 새해 인사차 동교동 자택을 찾았다. 그때 金大中씨는 李信範씨를 보고 『어디서 이름을 많이 들은 기억이 난다』는 정도의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1980년 11월 「金大中 내란음모 사건」에서 그는 金大中씨와 같이 법정에 서게 된다. 李信範씨의 죄목은 내란음모 및 계엄 포고령 위반. 합동수사본부는 이 사건을 「金大中으로부터 사주를 받고 光州지역 불순분자들이 선동하여 일으킨 국가 전복을 목적으로 한 내란·폭동」이라고 발표했다.
1심 공판 때는 법정분위기가 워낙 살벌해 말 한 마디 나누지 못했고 2심 공판 休廷(휴정) 때에야 얼굴을 쳐다보며 말할 기회를 가졌다고 한다. 金大中씨가 文益煥(문익환) 목사와 자신에게 다가와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고 한다.
『수사관들이 「당신(金大中씨)이 내란음모를 했을 것으로는 우리도 생각하지 않는다. 文益煥, 李信範이라는 사람은 폭탄도 만들고 혁명을 할 수 있는 사람들 아니냐」라는 이야기를 되풀이하더라. 처음에는 그 말이 정말인 줄 알고 「두 사람 때문에 내가 사형을 당하는구나」하고 당신들을 원망했었다. 그러나 재판을 받다 보니 나와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의 케이스도 역시 고문, 조작된 것이라는 걸 알게 됐다. 한때나마 그런 생각했다는 것을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런 인연 뒤에 두 사람은 미국에서 만난다. 사형선고를 받은 金大中씨가 全斗煥(전두환)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내고 1982년 12월23일 미국으로 떠났고, 그 다음날 李信範씨도 석방됐다. 그는 이듬해인 1983년 2월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李信範은 미국 체류기간에도 金大中씨가 만든 인권문제연구소에 가입하지 않았다. 미국 체류시절, 李信範씨의 정치적 견해에 영향을 준 故 崔星一(최성일) 박사의 조언 때문이었다. 서울법대 출신으로 1960년대에 미국으로 이민와 영어에 능통했던 崔박사는 金大中씨 등 한국의 주요 정치인들이 미국에 오면 동시통역을 도맡다시피 했다. 崔박사는 『李군은 순수한 청년학생운동을 한 사람이고, 兩金씨는 정치인이기 때문에 언제 어떻게 이상한 행동을 할지 모르는 사람들이다. 특히 金大中씨한테는 돈으로 신세를 지거나 종속적인 관계를 맺지 않는 게 좋겠다』는 충고해 주었다고 한다. 그는 崔박사의 조언을 충실히 지키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李信範씨가 「金大中 안전귀국 동행단」의 책임을 맡으면서 절정에 달한다. 1983년 필리핀의 민주화운동 지도자인 베니뇨 아키노가 필리핀 마닐라 공항에 도착 직후 피살되자 金大中씨의 안전한 귀국을 위해 묘안을 짜내던 시기였다.

金大中씨가 귀국하고 7개월 뒤인 1985년 9월 金泳三씨가 미국에 왔다. 민주화추진협의회(약칭 민추협) 공동의장 자격이었다. 李信範씨는 金泳三씨의 訪美를 돕다가 당시 韓和甲(한화갑) 비서에게서 『왜 양다리 걸치느냐』는 항의도 받았다고 했다. 심지어 金大中씨도 『왜 李동지는 왔다갔다 하냐』는 말을 했다고 한다.
『在野운동할 때는 兩金씨와 다 가까웠지만, 현실정치에서는 金泳三씨 쪽에서 정치를 시작했고, 심정적으로 金泳三씨 쪽이 편합니다. 金大中 대통령과는 정치성향이 맞질 않았어요. 분명한 사실은 金대통령과 싸우고 결별했다거나, 金大中 대통령이 저에게 뭘 섭섭하게 했기 때문에 그만 뒀거나 한 게 아닙니다. 金泳三씨와 일하는 게 훨씬 능력을 발휘하겠다는 생각에서 함께 일하기 시작한 겁니다』
계속 미국에 머물던 李信範씨는 1987년 6·29선언 후속조치로 7월10일 특별복권되자 다음날인 11일 한국에 돌아왔다. 그는 1987년 大選 때 「軍政종식 단일화쟁취 국민협의회」 실행위원으로 참가한다. 金大中씨가 폈던 「4者 필승론(盧泰愚, 金泳三 후보가 모두 영남권이어서 金大中 자신이 승리할 가능성이 높다는 논리)」에 대한 실망감으로 金大中씨와 멀어진다.
『1987년 盧泰愚씨가 당선되고 나서 제가 국내언론에 「兩金씨는 국민이 차려 준 밥상을 발로 걷어찬 사람들이다. 그들은 정치에서 물러나는 것이 옳다」는 내용의 인터뷰를 했습니다. 兩金씨가 야당을 분열시켜서 군인들이 권력을 마치 「회전문(Revolving Door)」처럼 승계를 한 데 대해 金大中씨의 책임이 더 크다고 생각했습니다』
李信範씨는 1988년 통일민주당 정책실장으로 金泳三씨와 일하게 된다. 그는 신한국당의 깃발 아래서 치른 1996년의 15代 총선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그가 金大中씨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2000년 7월23일이었다고 한다. 다름아닌 金大中 내란음모 사건 관련자들의 청와대 만찬이었다. 金大中씨와의 첫 인연도 내란음모이고, 마지막 만남도 내란음모 관련자 모임이었다.

지난 2월22일 김포공항 출국심사대. 캘리포니아 주립大 어바인캠퍼스(UCI) 객원연구원인 李信範씨는 3월13일로 예정된 강의를 위해 출국하고 있었다. 이번 여행에는 한나라당 의원 경제배우기 모임(회장 鄭義和 의원)과 弘傑씨의 「주택 불법구입 소송」일도 있었다.
李信範씨가 여권과 출국신고서에 확인도장을 받고 심사대를 통과해 몇 발자국 걸어나갔다. 갑자기 직원이 달려나와 출국신고서에 적힌 「캘리포니아大 교수」라는 직업 외에 다른 직업이 있는지를 물었다.
李信範씨가 『직업은 왜 묻느냐』며 옥신각신 하는 사이 직원은 그의 여권에 찍힌 출국확인도장 위에 「void(무효)」라고 썼다. 서울지검 형사2부(부장 金畯圭·주임검사 李光載)에 「그림로비」 폭로 등 3건의 명예훼손 혐의 고소고발 사건으로 피소된 그는 이로써 출국금지를 당했다.
李씨는 서울행정법원에 「출국금지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내 3월10일자로 신청이 「이유 있다」고 받아 들여졌다. 3월12일 출국한 李씨는 현재 캘리포니아주립大 어바인캠퍼스 기숙사에 머물면서 한국을 오가고 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李信範씨와 李姬鎬 여사는 한다리 건너 사돈관계다. 李信範씨의 남동생이 李姬鎬 여사의 조카사위다. 가족관계, 민주화 운동으로 얽혀있는 이들의 인간관계가 왜 이처럼 꼬여 있는 것일까.
2001년 5월9일자 조선일보 「만물상」은 李信範씨와 대통령의 셋째 아들 弘傑씨가 벌이는 소송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근교의 오렌지 카운티에 있는 「오렌지 카운티 레지스터」라는 지방신문이 있다. 창간 1세기가 가까워 오는 오랜 역사의 이 신문(4월27일자) 1면에 「한국의 분쟁, 오렌지 카운티 법정으로 비화」라는 기사가 큼지막한 인물사진과 함께 제법 비중 있게 처리됐다…. 이 사건의 원고는 야당 국회의원이었던 李信範씨, 피고는 金대통령의 3남 弘傑씨인데 이번 소송의 초점은 金씨가 어떻게 3600평방피트나 되는 랜치 스타일의 집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는가에 맞춰져 있다. … 이 신문은 우리 역대 대통령과 그 가족의 스캔들과 부정사건을 별도로 소개해 많은 한국인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
金대통령의 셋째 아들 弘傑씨는 1994년부터 7년째 부인 임미경씨 및 두 아들과 함께 로스앤젤레스에서 살고 있다. 弘傑씨가 살고 있는 집은 李信範씨가 弘傑씨와 소송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드러났다. 李信範씨는 2000년 2월9일 국회에서 在美동포 무기거래상 조풍언씨와 대통령 가족과의 관계를 밝히라고 하면서 弘傑씨의 호화 유학생활, 호화주택 거주의혹에 대해 질문을 했다.
이 발언에 대해 로스앤젤레스의 KBS 현지 법인인 KTE(Korean Television Enterprises·美洲 한국방송)가 弘傑씨 가족은 토렌스의 서민주택에 산다고 보도를 하면서 李信範씨를 「허위폭로 전문가」라고 했다고 한다(李씨 주장).
이에 대해 李信範씨는 KTE가 자신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2월23일 美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지방법원에 KTE 등을 상대로 100만 달러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소송이 시작되면서 증인신청을 한 弘傑씨가 증인출석에 응하지 않자 李信範씨는 아예 弘傑씨를 상대로 2001년 1월7일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이 과정에서 李信範씨의 변호사가 재판 관련 서류를 보내기 위해 弘傑씨의 주소지를 당국에 조회하다 弘傑씨의 집을 발견했다. 미국에서는 소송이 발생해 원고·피고 관계가 성립하면 문서 송달을 위해 집을 합법적으로 찾을 수 있다.
弘傑씨는 시민권자 사칭에 따른 이민법 위반, 직업 위장 및 수입 허위기재에 따른 융자사기, 생활비를 보조받고 있을 가능성과 관련한 연방부패방지법 위반 등 세 가지 혐의를 받고 있다. 弘傑씨 부부는 1995년 5월 토렌스 주택을 34만5000달러에 구입하면서 8만6250달러를 현금으로 내고, 나머지 25만8750달러를 워싱턴 뮤추얼뱅크(Washington Mutual Bank)에서 융자받았다. 융자서류에는 유학생으로서 합법적인 장기융자가 불가능하다는 사실 때문인지 미국 시민권자로 표시를 했다는 것이다.
학생사증을 가지고 있어 취업이 불가한데도 弘傑씨는 마이크 푸드(Mike’s Foods社)에서 일하고 월 4000달러, 부인은 아메리칸 뉴라이트(American NuLite社)에서 일하고 월 3700달러를 받고 있다고 기재하고, 현금 불입금 8만6250달러도 남에게 빌린 것이 아니라 자신이 번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弘傑씨는 1995년 34만5000달러에 구입했던 토렌스 집을 47만5000달러에 부동산에 매물로 내놓고 인근 팔로스 버디스(Palos Verdes) 허니 크릭 로드(Honey Creek Road) 22625번지에 하워드와 미셀 킴이란 假名(가명)으로 집을 구입했다.
이 집은 600평 대지에 방 5개, 욕실 3개가 딸린 2층 집이다. 팔로스 버디스는 로스앤젤레스市나 토렌스市에서 더 남쪽에 위치한 태평양 연안 지역으로 富村(부촌)으로 알려져 있다. 막다른 골목 끝, 高지대에 위치해 있는 弘傑씨 집에서는 인근 토렌스市나 로스앤젤레스市의 夜景(야경)이 내려다 보인다고 한다.
등기부 등본에 따르면 弘傑씨는 이 집에 대해서 지난해 5월16일 등기이전을 신청, 6월14일 소유권 이전절차를 마쳤으며 구입가격은 97만5000 달러였다. 이중 60만 달러를 월드 세이빙스 은행에서 융자받았으며, 나머지 40만 달러는 일시불로 지불한 것으로 밝혀졌다.
한편 이같은 사실을 확인한 李信範씨는 3월20일 弘傑씨의 팔로스 버디스 집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한국은 경제적으로 어려운데 어떻게 유학생의 신분으로 두 집(합계 134만 달러)을 유지해 왔는지 궁금하다. 본인의 눈으로 弘傑씨가 집앞에서 신문을 들고 들어가는 것을 확인했다』고 주장했다.
현재 弘傑씨는 토렌스 집이 팔리지 않은 상태로 약 7개월간 두 집을 유지한 것으로 밝혀졌다. 최소한 집 할부 상환금만 월 5000~ 6000달러이며 기타 생활비 등을 포함 매달 1만 달러씩 들어가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美 캘리포니아州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지방법원은 4월5일 弘傑씨 부부의 선서증언을 강제해 달라는 李信範씨의 신청을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4월16일과 4월17일 양일 간 弘傑씨와 부인 임미경씨의 선서증언이 李信範씨의 변호사 사무실이 있는 가든 그로브에서 있었다. 4월16일 오전 10시경 선서장소에 외국인 변호사 잔 코넬리와 한국인 방일용 변호사와 함께 도착한 弘傑씨는 하워드 킴이라는 가명을 사용한 사실은 시인했으나 대부분의 질의에 증언을 기피했다.
5월17일에는 가옥매입을 위한 은행대출금에 대해 진술을 받았다. 弘傑씨가 내놓은 융자신청서 사본에는 「나는 소루미나 스카이라이트社의 사원으로 한달에 1만8000달러씩 받고 있다」고 자금출처를 기술한 것으로 돼 있다.

弘傑씨의 호화주택 의혹 진상규명과 관련, 李信範씨는 40만 마일이 넘게 태평양을 건너다녔다고 말한다. 미국 로스앤젤레스까지의 거리를 왕복 2만 마일로 치면 20차례나 다닌 셈이다. 항공요금만 2600만원(1회 왕복항공료 130만원 기준)이고, 소송비용은 수만 달러가 들어간 상태다.
―작년 2월23일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지방법원에 KTE 등을 피고로 100만 달러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습니다. 굳이 대통령의 가족을 상대로 소송을 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제가 요구하는 것은 제 명예를 짓밟아 놓은 것에 대해 사과하라는 겁니다. 저를 「허위 폭로 전문가」라고 몰아세웠습니다. 지역구 유권자들이 제게 대통령 아들에 대해서 허위 폭로를 했다고 비난을 합니다. 이런 오해를 풀지 않으면 제 정치생명이 지속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번 소송에서 자신이 「꽃놀이패」에 불과하다고 했다.
『클린턴 前 美 대통령이 「화이트게이트」와 「르윈스키 스캔들」에서 치명상을 입은 것은 범죄 사실보다 거짓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弘傑씨 문제는 청와대가 어느 정도로 위기관리 능력이 없는지를 말해 주고 있어요. 발단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전혀 수습하려는 의지가 없습니다. 「감히 金大中의 아들을 누가…」라는 오만은 미국에선 통하지 않아요. 고어 前 부통령의 아들이 속도제한 55마일 이하 도로에서 97마일을 달렸다고 체포돼서 재판을 받는 나라입니다. 정부는 작은 개미구멍이 둑을 무너뜨릴 수도 있다는 인식을 갖고 이 문제를 수습해야 합니다』
李信範씨는 金大中 대통령에 대해 인간적으로 섭섭한 감정은 전혀 없다고 말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지난해 4·13 총선 과정에서 제 지역구에서 집권당 이름으로 흑색선전을 해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在野 출신 李佑宰(이우재) 의원, 李在五(이재오) 의원에게 심하게 하는 것을 보고 「이건 내가 생각했던 金大中씨가 아니지 않느냐」라는 인간적인 실망을 했습니다. 1998년 국정원 요원들이 국회 529호에서 국회의원을 사찰한 사실을 폭로했을 때는 권력핵심부에서 제게 「피눈물을 흘릴 줄 알라」고 섬뜩한 표현을 써가며 협박했습니다. 제가 출국금지 당할 때 농담을 했어요. 내가 朴正熙씨, 全斗煥씨 말도 안 들은 사람인데, 지금 2년도 안 남은 金大中씨 말을 듣게 생겼냐고요』
그는 자신이 저격수로 나선 것에 대해 『여당이었던 한나라당이 野黨 경험이 없어 민주화 투쟁경력이 있는 자신이 對與투쟁의 선봉에 선 것』이라고 했다.
『야당이 정부와 맞설 때는 강력하게 맞서고, 도와 줄 땐 흔쾌하게 도와 주는 是非(시비)가 분명한 야당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16代 국회는 저격수가 없는 맹숭맹숭한 국회가 아닌가 합니다. 저격수들이 많이 나와 是非를 분명히 가렸다면 요즘 같은 심각한 失政(실정)은 예방됐을 것 아닙니까』

李信範씨는 충남 예산 출신이다. 그는 예산에 있는 예덕초등학교를 다니다 5학년 때 서울 무악재에 있는 안사초등학교로 전학왔다. 용산중·고를 졸업한 그는 1967년 서울대 법학과에 진학했다. 李信範씨는 4차례에 걸쳐 5년8개월 간 투옥되는 등 우여곡절 끝에 1988년 8월30일, 21년 6개월 만에 졸업을 했다. 그는 전과 경력 때문에 사법시험 응시 자격을 박탈당했다. 학생운동을 하며 고시공부도 병행했던 그에게는 아픈 기억이었다.
李信範씨는 서울대 법대 재학시절인 1970년부터 1971년까지 「자유의 종」을 발간했다.
「자유의 종」은 3選개헌 반대투쟁 이후 중앙정보부가 언론을 극도로 탄압하자 1970년 10월3일에 창간한 학생 신문이었다. 1971년 10월 말 폐간되기까지 주간으로 36호까지 발행돼 校內는 물론 가두에서 유료로 비밀리에 판매되기도 했다.
등사기로 긁어서 만든 「자유의 종」은 현재 서울대학교 희귀자료 보관소에 보관돼 있다. 「자유의 종」은 당시 일반 신문들이 쓸 수 없는 표현인 「고문 폭력기구 중앙정보부를 해체하라」 「언론 화형식」 등으로 세인의 주목을 끌었다.
「자유의 종」이 유료로 판매될 정도로 호응이 있자 서울대 문리대에서는 「전야」, 梨大에서 「새얼」, 고려대에서는 「활화산」 등 10여 종의 「지하신문」들이 속속 발행됐다. 특히 1971년 3월에는 「언론화형식」기사를 보도해 기자들의 「자유언론 실천선언」의 도화선이 됐다. 결국 李信範씨는 이 기사로 학교에서 除籍(제적)당한다.
李信範씨는 서울법대 선배인 崔箕善(최기선) 인천시장과는 학창시절을 함께 보냈다.
『둘다 찢어지게 가난해 막걸리 집에서 술값이 없어서 저를 담보로 앉혀놓고 崔시장이 술값 구하러 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李信範씨의 서울대 법대 67학번 동기들은 법조계에 많이 진출해 있다. 宋光洙(송광수) 검사, 郭永哲(곽영철) 서울고검 차장검사, 梁東冠 (양동관) 서울고법 부장판사, 朴國洙(박국수) 서울고법 부장판사, 宋斗煥(송두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회장이 동기생이다. 경제계에 玄在賢(현재현) 동양그룹 회장 등이 있다.
李信範씨는 1996년 5월 신한국당 강서을구에서 출마, 15代 때 국회 진입에 성공한다. 이후 그는 4년 연속 통일외교통상委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국감 성적을 냈다. 1999년에는 14개 常任委 의원들이 뽑은 국감베스트 의원 중 1위를 차지했다.
李信範씨의 현실정치 참여의 辯(변).
『1987년 6·29선언으로 민주화가 제도화 될 계기가 마련됐습니다. 정당 정치가 발달해야 민주주의가 정착되는 것 아닙니까. 在野에서 청년학생운동으로 할 역할은 끝났다고 판단하고 야당에 들어가서 야당의 힘을 키워 줘야겠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한 겁니다』
―在野 민주화 투쟁과 현실정치는 어떻게 다릅니까.
『在野운동은 是是非非(시시비비)를 가려 옳지 않은 건 끝까지 투쟁을 합니다. 이것을 在野的 思考(재야적 사고)라고 하지요. 현실 정치에서는 자기의 뜻이 100% 관철되진 않잖아요. 국회 안에 있는 의석이라는 현실적인 제약도 있고 각자 입장을 어느 선에서 타협도 하고 양보도 해야 하는 것이니까. 정치라는 건 그런 의미에서 대화와 타협을 해야 하는 場(장)이라고 봅니다. 金大中 주변을 보면 在野的 사고를 가진 사람이 많습니다』
―어떤 점이 그렇습니까.
『한나라당이 어떤 정당이든, 집권당인 민주당은 한나라당을 상대로 정치를 해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한나라당을 자꾸 타도의 대상으로 설정해 놓고 깨뜨리려고 하니까 정치가 편할 날이 없죠』

1970년대 학생운동을 한 李信範씨에게 오늘날 학생운동은 어떻게 비춰지고 있을까.
『지금은 학생운동이 없지 않습니까. 어떤 소규모 사상운동이나 일상화된 학내 운동은 있는지 몰라도 참된 의미의 학생운동은 없는 것 같습니다. 학생운동이라면 중요한 국민적 관심사가 있을 때 약한 쪽에 서서 정부의 不義를 질타하고 시정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는 것이 역할입니다』
―어떤 점에서 그렇다고 보십니까.
『너무 이념적으로 편향되어 있고, 대중적 지지를 잃어버린 것 같아요. 집권여당쪽으로 편향돼 公正性(공정성)이나 不偏不黨性(불편부당성)이란 측면에서 잘못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정부여당이 부정부패, 부정선거를 해도 학생들이 항의하는 것을 본 적이 없어요. 보안법을 철폐하라는 등 한나라당 앞에 와서 자꾸 데모를 합니다. 물론 보안법 때문에 불편한 사람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다른 것 때문에 불편한 사람이 더 많단 말입니다.
그런 문제에서 있어서 학생들은 왜 침묵합니까. 옷로비 사건, 한빛은행 사건 때 데모한 적 있습니까. 오늘의 학생 지식인들이 심각하게 고민해야 될 문제라고 봐요. 왜냐하면 시민운동이 발달하지 않은 상황에서 건전한 학생운동의 역할이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이 참 아쉽습니다』
―현재의 학생운동은 한총련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한총련은 정부에서도 이적단체로 규정한 사실이 있지 않습니까.
『左로 지나치게 편향된 운동은 결국은 大衆性(대중성)을 잃어버리게 되고 소수의 극렬한 행동으로 남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운동이 아니죠. 북한이라는 체제가 세계사 속에서 代案(대안)이 아니잖습니까. 만일 북한체제를 선호하고 신봉하는 행동이 있다면 시대착오적입니다』
李信範은 1989년 10월 한국논단에 「한국의 급진사상과 학생운동」이란 글을 기고했다. 그는 학생운동에 급진사상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을 대략 1970년대 말로 보고 있다.
『물론 1970년대라는 시대가 朴正熙 대통령이 유신을 선포하고 의회 민주주의를 다 파괴를 했었죠. 합법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바꾼다든가 의회 민주주의 틀 속에서 代案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아주 절망적일 때였어요. 자연히 代案으로써 革命을 해야 했고, 기성체제를 非합법적인 방법으로라도 파괴해야 한다는 이론이 퍼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1980년대라는 암흑기를 거치면서 1987년 6·29 선언이 우리나라에 의회 민주주의를 다시 한번 정착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그 후에 이념적인 혼란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봅니다. 다만 참고해야 할 것은 일본이 1990년대에 거품경제가 붕괴하면서 정당도 파편화됐지만 이익집단도 모두 파편화됩니다. 그러면서 급진 좌경적인 집단들의 영향력이 급속하게 쇠퇴했습니다. 그건 세계사적인 현상이기도 하지만, 일본이라는 나라가 겪었던 현상들이 우리에게 참고가 된다고 봅니다. 세계사적인 변화, 이익집단의 중도화 경향 등은 참고할 부분이 많다고 봅니다』

인터뷰는 여의도 한나라당사에서 했다. 점심시간이 되자 그는 『우리 뭐 좀 시켜먹자』며 점심으로 군만두와 짬뽕을 시켰다. 기자가 반 정도 먹었을까. 그는 CF촬영을 하는 배우보다도 더 맛깔스럽게 짬뽕 한 그릇을 후딱 해치웠다.
기자와 속도 차이가 너무 났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李信範씨는 『천천히 먹으라』며 『교도소 시절 설거지하던 친구가 빨리 먹으라고 난리를 피우는 통에 버릇이 돼 식사시간이 10분이 채 안 걸린다』며 웃는다.
『독방에 주로 있었죠. 1972년부터 1년4개월 정도 서울구치소에 있다가 대전교도소로 갔습니다. 한 방에 10명이 있었는데 무기수가 4명에다 통일혁명당사건으로 들어온 사람이 2명이나 있었습니다. 韓明淑(한명숙) 여성부 장관의 남편도 함께 있었습니다. 요즘은 교도소가 참 좋아졌지만 우리가 살 때는 형편이 없었거든요. 목욕을 한달에 한두 번 할까말까. 제가 치열이 고른 편인데 교도소에 의사가 없다 보니 사랑니를 못 뽑아서 아랫니가 다 비뚤어졌어요』
李信範씨는 노래를 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애창곡을 물어도 『연령에 맞춰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서너 곡은 있다』며 여유만만하다.
『레게나 힙합까지는 못 따라가겠고요. 우리 세대는 엘비스 프레슬리나 비틀즈를 좋아한 사람들이잖아요. 미국에 있을 때는 피터폴 앤 메리, 존 바에즈와도 사귀었습니다』
국회의원들은 각종 지역구 행사나 이벤트로 가수 등 연예인들과 가깝게 지내는 경우가 많다. 李信範씨는 야당이 되고 나니까 연예인들을 섭외하는 일이 상당히 어렵다고 털어놨다.
『金大中 정부가 들어서면 야당이든 여당이든 활성화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사람들이 더 얼어붙고, 겁에 질려 있어요. 조지오웰의 소설 「1984년」에서 사람들이 마치 원격 감시당한다는 느낌들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어요. 야당하고 행사하면 큰일 나는 줄 알고 겁을 먹습니다.
계좌추적, 세무사찰을 한다고 하니까 누구나 세무사찰과 추적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막연한 공포감을 갖게 되는 것 같습니다. 폭력은 3공화국 때처럼 노골적인 게 더 솔직한 거지, 은근한 것이 더 사람을 죽이거든요. 노골적인 폭력이 차라리 저항하기도 간단하고, 명쾌한 것인데 이건 은근히 사람을 멍들게 하니까요』
그는 도청 공포 때문에 요즘도 중요한 대화는 가급적 만나서 하고 유선상으로는 일상적 이야기만 한다. 그래서 그는 편리한 휴대전화보다 감청의 위험이 적은 공중전화를 선호한다. 그는 항상 지갑에 공중전화 카드를 가지고 다닌다.
―現 정부 국정 운영의 난맥상은 그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봅니까.
『대통령의 일인지배 때문입니다. 즉 帝王的(제왕적) 대통령제 하에서 일어난 현상입니다. 아더 슐레진저 2세의 저서 「제왕적 대통령제(Imperial Presidency)」에서 인용한 겁니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단이 심해지면 대통령이 뭐라고 말을 안 하면 아무도 일을 안 하는 겁니다.
대통령 주위에는 「예스맨」들만 있고 측근 중에 아무도 대통령 앞에서 金大中 대통령의 「자기 중심적 도그마」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고 야단을 맞아가면서 토론을 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전 金大中씨를 경험해 봐서 압니다.
측근들이 항상 敎示(교시)에 익숙해져 있고, 교시를 절대적으로 받드는 분위기 속에서 누가 감히 「이러시면 안 됩니다」라고 얘기할 수 있겠어요. 金대통령은 「자기 중심적 도그마」로 스스로 논리적 보호막을 만들어가기 때문에 한 번 빠지면 쉽게 나오지 못하는 단점이 있습니다. 이분한테는 강력한 야당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한나라당이 너무 부드럽고 점잖아서 오늘의 위기를 초래한 측면도 있다고 역설적으로 생각을 합니다』
李信範씨는 李承晩 前 대통령의 국회 내 동상 건립에 반대한 것으로 알려졌다. 1999년 12월 초대 국회의장을 지낸 李承晩 前 대통령과 申翼熙(신익희) 제2대 국회의장의 동상 건립계획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자 李信範씨를 비롯한 몇몇 의원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이유는 李承晩 前 대통령이 의회지도자로서는 사사오입 개헌, 발췌개헌 등 부정적인 일들을 많이 했었다는 것이다.
『속기록에도 나오지만 저는 건립을 반대한 것이 아니고 장소가 적당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李承晩 前 대통령은 초대 대통령으로서 받들어야 할 분이기 때문에 행정부서가 있는 정부종합청사 안에 흉상을 세우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어요. 국회 안에 세우는 것은 초대 대통령상이 아니고 「의회 지도자상」입니다. 지금까지 훌륭한 의회 지도자가 없었다면 없는 대로 놔두자는 겁니다. 난 초대 대통령 흉상을 세운다면 난 찬성했을 겁니다』
李承晩 前 대통령의 동상은 2000년 5월15일 국회에 세워졌다.

―金大中 정부의 對北정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교류협력 확대라는 부분과 정치군사적인 부분과는 냉정하게 구분해야 합니다. 교류협력은 가능하면 많이 확대하되 정치 군사분야에서는 따질 것은 철저히 따져야 합니다. 공격용 무기의 後進배치라든가 군비통제나 군비축소 같은 문제에서 실질적인 진전이 있기 전에는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됐다고 허위선전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북한은 군부가 지배하는 나라입니다. 인민경제는 피폐했지만 군부경제는 상당히 잘 돌아가는 특이한 지배구조를 가진 나라이기 때문에 先貢後得(선공후득)이 될 것이라고 믿는 것는 순진한 생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원도 필요하지만 때론 무관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李信範씨는 작년 북한이 1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무기구매사절단을 러시아에 파견한 사실을 상기시켰다. 북한이 15억 달러를 현금으로 지불하고 무기를 구입했다는 사실, 20여 만 명을 동원한 군사기동훈련중 고장난 탱크가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을 주시해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李信範은 1998년 상임위 국정감사 때 처음으로 금강산 관광에 9억4200만 달러를 이면계약했다는 것을 공개했었다.
『북한에 대한 지원은 해 줘야 할 것과 해줘서는 안 되는 문제가 있거든요. 예컨대 북한의 농업이 워낙 피폐해 있기 때문에 종자지원을 해 주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 原種(원종)을 주면 안 되는 겁니다. 옥수수 씨앗도 매년 지원을 해 주는 체제로 해야 합니다. 원종을 줘서 북한이 자체생산을 하기 시작하면 우리가 무슨 지렛대가 있습니까. 그 다음엔 고마워하지도 않습니다.
금강산 관광 계약서를 보세요. 금강산 국제그룹에서 일일관광권을 땄을 때는 북한 정무원의 관인이 찍혔고 金日成이 서명을 했어요. 현대가 받은 계약서는 亞太평화위의 서명만 들어있지 官印(관인)이 있다거나 하는 아무런 보장이 없어요. 白某(백모)라는 북한의 무역상이 서명한 것이 하나 있는데 국제법상의 법적 의무는 아무 것도 없는 겁니다』
李信範은 통일논의를 위해 북한을 지배하는 실효적 지배집단인 金正日과 대화의 필요성은 인정했다.
『대화를 두려워해서는 안 되지만 두려움 때문에 대화를 해서는 안 됩니다. 북한이 대화를 안 하면 쳐들어올 것 같으니까 우리가 북한에 대해서 자꾸 베풀어야 한다는 소위 「체임벌린식 유화주의」는 위험하다는 겁니다. 오히려 북한에 잘못된 신호를 보내는 겁니다. 자꾸 트집을 걸면 뭔가 나온다는, 그래서 트집을 자꾸 더 걸게 만드는 것은 안 됩니다. 옛날 서독이 동독에 베풀 때 공짜가 어디 있었습니까』

―金대통령의 외교정책에 대해 평가를 한다면.
『우리 주변에 4强이란 없습니다. 미국이란 유일 超강대국만이 존재합니다. 이것을 현실로 인정하고 외교를 해야지 「내가 주변 4强을 다 조정할 수 있다」는 妄想(망상)을 하게 되면 國益(국익)을 그르치게 됩니다. 미국에 事大(사대)하고 盲從(맹종)하자는 게 아니라 현실을 인정하고 외교를 해야지 자꾸 과대망상에 빠져서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과거 3억 인구가 현재 1억2000만이 된 러시아는 더 이상 아시아에서 변수가 아닙니다. 중국이 오히려 중요한 변수입니다. 뭣 때문에 부시를 만나기 전에 푸틴을 끌어들여서 성명을 발표합니까. 워싱턴 포스트 칼럼니스트 매리 맥그로리는 부시 행정부가 金大中 대통령을 대접한 것에 대해 「shabby」란 표현을 썼거든요. 아주 冷待(냉대)했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오죽 냉대를 받았으면 국가 미사일 방어(NMD) 체제 문제를 그곳에 가서 사과하고 말을 뒤집겠습니까』
최근 개인 계좌추적을 비롯한 언론사 세무사찰에 대해서 李信範은 『자신도 피해자』라고 했다.
『저도 사찰을 많이 받아봤지만 계좌추적처럼 기분 나쁜 일이 없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이 나라에서 계좌를 개설해서 계좌에서 수표를 넣어본 경험도 없고 꺼내본 일도 없어요. 항상 사찰을 당한다고 생각하니까요.
우리 당에서는 저를 두고 상당히 선구자적인 견해, 통찰력이 있었다고 그래요. 선의의 피해자가 얼마나 생겼겠어요.(웃음) 수표라는 것을 자꾸 그런 식으로 사찰한다고 하면 경제가 어려운 시국이라도 일반 국민이 현금을 가지고 있으려고 하죠』
그는 現 정부의 언론사 세무조사에 대해 세무사찰을 남용하기로 유명했던 미국 닉슨 대통령을 예로 들었다.
『존 레논에 대한 FBI의 사찰보고서가 공개가 됐어요. 재미있는 것이 리처드 닉슨이 자기의 재선에 존 레논이 장애가 된다고 생각을 한 거예요. FBI가 美 이민국과 함께 존 레논을 여러 해 동안 미행하고 사찰하고 도청하다가 오래 전 존 레논이 영국에 있을 때 마리화나를 피우다가 벌금을 문 경력을 발견하고서 마약사범으로 규정해서 추방하는 기록영화가 나왔습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金大中 대통령이 리처드 닉슨하고 어느 정도 다를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언론이라는 게 우파 좌파 중도파도 있는 것인데 자기 입맛에 맞는 것 외에는 다 나쁜 것으로 분류하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거지요. 우리 사회에 다양한 견해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혁명이냐 반동이냐」 이분법으로 재단하는 것은 위험한 겁니다』
지금은 미국에 건너가 있는 李信範씨는 캘리포니아주립大 어바인캠퍼스(UCI)에서 객원연구원 자격으로 오는 6월까지 학생들을 가르친다. 1970년대 민주화 운동으로 곡절 많은 학창시절을 보냈던 그가 30년 만에 「늦바람」이 났다.
『샌드위치와 콜라를 사들고 캠퍼스를 거닐면서 20代 초반의 학생들과 어울리는 기분이 꽤 괜찮습니다. 영어로 강의하느라 고생은 안 하냐구요? 오랫동안 안 써서 녹이 슬었지만, 이번 기회에 외교통상부 장관을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마스터하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