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집권 초에는 離괘가 위아래로 중첩된 괘(☲☲), 두 개의 해가 있는 모양
⊙ 장성택 제거 후에는 離괘와는 음양이 모두 바뀐 坎괘(☵☵)로… 坎이란 구덩이·함정·위험 의미
⊙ “동아줄로 결박해 가시나무 숲속에 가둔 채 3년이 돼도 벗어나지 못하니 흉하다”(주공)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 과정 수료 / 前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 장성택 제거 후에는 離괘와는 음양이 모두 바뀐 坎괘(☵☵)로… 坎이란 구덩이·함정·위험 의미
⊙ “동아줄로 결박해 가시나무 숲속에 가둔 채 3년이 돼도 벗어나지 못하니 흉하다”(주공)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 과정 수료 / 前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이미 우리는 《주역(周易)》으로 들어가는 다양한 방법을 살펴본 바 있다. 이제 북한 김정은의 명운(命運)을 짚어보자. 그에 앞서 김정은에 관한 개인적인 호불호는 깨끗이 접어두는 것이 필수다. 그러지 않는다면 처음부터 《주역》의 도움을 구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담담하게 북한의 권력 지형도를 바탕으로 해서 괘(卦)를 형성시킨 다음에 김정은과 관련된 효(爻)를 음미하는 가장 정통적인 방법을 쓰고자 한다. 이는 이미 앞서 문재인(文在寅) 대통령을 짚어볼 때 쓴 방법이다. 다시 말하지만 한 괘의 여섯 효는 권력서열에 해당한다. 맨 위는 상왕(上王), 그다음은 임금, 그다음은 재상이나 세자, 그다음은 판서급, 그다음은 중간관리 그리고 맨 아래는 신진그룹이나 일반 백성이다.
사실 김정은처럼 한 나라의 최고지도자에 있을 경우 《주역》을 통한 명운 살피기는 훨씬 용이하다. 전체 괘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김정은의 경우 2011년 12월 김정일 사망과 더불어 권력의 전면에 나서 2년 후인 2013년 12월 고모부이자 후견인이던 장성택을 전격 처형할 때까지와,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를 나눠서 살필 수 있다.
하늘에 태양이 두 개인 상황
2011년 처음 권좌에 올랐을 때만 해도 국내외 분석가들은 김정은의 장래를 매우 불안정하게 전망했다. 그것은 무엇보다 핵심 요직을 차지하고 있던 고모 김경희와 고모부 장성택의 존재 때문이었다. 자연스럽게 상왕은 굳세다[剛]는 점에서 양(陽)으로 봐야 하고, 상대적으로 임금인 김정은은 유약하다[柔]는 점에서 음(陰)으로 봐야 한다. 이때는 재상급도 강했고, 장관급도 발언권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이어 그와 함께할 수 있는 세력인 중간관리급은 취약했고, 백성들은 새로운 기대로 유약보다는 굳셈 쪽에 비중을 둬야 할 것으로 본다. 사실 공산주의 국가에다 폐쇄적인 독재국가에서 신진세력이나 백성을 과연 굳세다고 볼 수 있을지 의문이 들지만 그럼에도 상대적으로 보자면 이 시기는 유약보다는 굳셈 쪽으로 보는 것이 나을 듯하다.
이렇게 되면 2011~2013년 상황은 위에서부터 ‘양-음-양-양-음-양’이 된다. 이는 이(離)괘(☲)가 위아래로 중첩된 이괘(☲☲)가 된다.
이괘는 그 자체로 밝음, 즉 해를 뜻한다. 해란 임금이다. 두 개의 해가 겹쳐 있어 매우 밝다는 긍정적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하늘에 해가 두 개 있는 모양이기도 하다. 즉 임금의 자리를 넘겨주는 때인 것이다. 군주제 사회에서는 세자를 책봉한 때부터가 여기에 해당한다.
의경세자
《주역》에 능했던 조선의 세조(世祖)는 자신의 자리를 이을 왕세자를 책봉하는 글[敎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세조실록(世祖實錄)》 1455년(세조 1년) 7월26일자 기사다.
〈예부터 성왕(聖王)이 모두 저이(儲貳·세자)를 세웠으니 이는 대개 장차 신기(神器·왕위)를 부탁하여 종조(宗·종묘)를 받들려는 것이다. 이로써 《역경(易經)》의 이하(離下·아래의 이괘) 이상(離上·위의 이괘)의 괘상(卦象·이괘)을 드리웠고, 《예경(禮經)》의 원량(元良·세자)의 다움[德]을 나타낸 것이다.
아! 너 원자(元子) 이장(李暲)은 그 몸이 적사(嫡嗣·적자)로 태어났으니 춘궁(春宮)에 있어 합당하므로 이에 너를 왕세자(王世子)로 삼으니, 너는 힘써 배우고 태만하지 말 것이며 힘써 삼선[三善・《예기(禮記)》 문왕세자(文王世子) 편에 나오는 말로서, 아들이 아버지를 섬기고 신하가 임금을 섬기고 나이 어린 사람이 어른을 섬기는 것을 말함]을 행하면서 군병을 무애(撫愛)하고 국사를 감시하여 길이 큰 기업(基業)을 공고히 하기를 바라니 어찌 삼가지 않을 수 있으랴!〉
정확히 맥락에 맞게 이(離)괘를 인용한 것이다. 그러나 이 세자는 결국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이때 책봉된 의경세자(懿敬世子·1438~1457년)는 초명은 이숭(李崇), 이름은 이장(李暲)이다. 아버지가 세조, 어머니가 참판 윤번(尹璠)의 딸 정희왕후(貞熹王后)이다. 성종의 아버지다. 1445년(세종 27년) 도원군(桃源君)에 봉해지고, 이때인 1455년(세조 1년) 세자로 책봉됐으며,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한확(韓確)의 딸 소혜왕후(昭惠王后) 한씨(韓氏)를 비로 맞아 월산대군(月山大君)과 성종을 낳았다. 어려서부터 예절이 바르고 글 읽기를 즐겼으며 해서(楷書)에도 능했으나, 병약했다. 1457년 병이 크게 들어 결국 20세에 죽었다. 1471년(성종 2년) 덕종(德宗)으로 추존됐다.
‘눈물 줄줄 흘리며 슬퍼하는 것이니 길하다’
이괘가 겹쳐 있는 중리(重離), 즉 명양(明兩)은 그냥 세습이 아니라 연이어 밝은 임금[明主]이 왕위를 이어받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요(堯)임금에 이어 순(舜)임금, 순임금에 이어 우왕(禹王)이 이어받은 경우가 그렇다. 또 경우에 따라서는 밝은 임금과 밝은 신하의 만남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일단 단순 세습 과정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마치 상왕 태종 아래에서 임금 생활을 한 세종처럼 김정은도 처음 2년간은 고모 및 고모부 아래에서 ‘견습’생활을 한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때의 김정은에 대해 《주역》은 뭐라고 풀고 있을까? 밑에서 다섯 번째 음효인 육오(六五)에 대한 주공(周公)의 풀이부터 보자.
“육오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슬퍼하는 것이니 길하다.[出涕沱若戚嗟若 吉]”
얼핏 보아서는 좋다는 말인지 나쁘다는 말인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육오는 음유(陰柔)의 자질로 양의 자리인 제5위에 있어 자리도 바르지 못하다. 게다가 위아래 모두 강한 신하들이 에워싸고 있고, 자신과 호응해야 하는 제2위 또한 음효로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없다. 참으로 위태롭고 두려운 형세다. 다만, 사리를 밝게 알기 때문에[明] 두려움이 깊어 눈물을 줄줄 흘리고 근심이 깊어 눈물을 줄줄 흘린다. 그래서 끝내는 목숨을 보전함으로써 길할 수 있다. 즉 이때 길하다는 것은 무슨 좋은 일이 생긴다기보다 ‘목숨 보전’이 전부다. 실은 그만큼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위아래로 포위되었지만 천수를 누린 정종
조선의 두 번째 임금 정종(定宗·1357~1419년)이 이와 같다. 그는 동생 태종에게 붙어 그 자리에 있었고, 위아래로 사실상 포위된 채 있었으나 순리를 벗어나지 않아 천수를 누릴 수 있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가 전하는 그의 생애다.
〈이름은 경(曔)이고, 초명은 방과(芳果)이다. 태조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 韓氏)이다.
정종의 비 정안왕후(定安王后)는 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 김천서(金天瑞)의 딸이다. 성품이 순직, 근실하고 행실이 단엄, 방정하면서 무략이 있었다. 일찍부터 관계에 나가 1377년(우왕 3년) 5월 이성계(李成桂)를 수행해 지리산에서 왜구를 토벌했다.
조선 왕조가 개창되자 1392년(태조 1년) 영안군(永安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의흥삼군부중군절제사로 병권에 관여했다. 1398년 8월 정안군 방원(靖安君 芳遠)이 주도한 ‘1차 왕자의 난’이 성공하면서 세자 책봉 문제가 제기됐다. 방과는 “당초부터 대의를 주창하고 개국해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업적은 모두 정안군의 공로인데 내가 어찌 세자가 될 수 있느냐”고 하면서 완강하게 거절했으나, 정안군이 양보해 세자가 됐다.
1개월 뒤 태조의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태조의 양위는 자의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 반강제로 이뤄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 정종은 자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정안군의 양보로 즉위했으므로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정종조의 정치는 거의 정안군의 뜻에 따라 전개됐다.
1399년(정종 1년) 3월 개경으로 천도했다. 같은 해 8월 분경금지법(奔競禁止法)을 제정했다. 이로써 관인(官人)이 권귀(權貴)에 의존하는 것을 금지해 권귀의 세력을 약화시켰다. ‘2차 왕자의 난’을 계기로 1400년 2월 정안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그해 4월 정당문학 겸 대사헌 권근(權近)과 문하부좌산기상시 김약채(金若采) 등의 소를 받아들여 사병(私兵)을 혁파하고 내외의 병권을 의흥삼군부로 집중시켰다.
문하시랑찬성사 하륜(河崙)에게 명해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를 의정부로 고치고 중추원을 삼군부(三軍府)로 고치면서, 삼군의 직장(職掌)을 가진 자는 의정부에 합좌하지 못하게 했다. 이로써 의정부는 정무를 담당하고, 삼군부는 군정을 담당하는 군·정 분리체제를 이뤘다. 이러한 개혁은 왕권 강화를 위한 것으로 방원의 영향력 아래에서 이뤄진 것이라 하겠다.
1399년 3월 집현전을 설치해 장서(藏書)와 경적(經籍)의 강론을 맡게 했다. 그해 5월 태조 때 완성된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을 편찬했다. 재위 시에도 정무보다는 격구 등의 오락에 탐닉하면서 보신책으로 삼았다. 왕위에서 물러난 뒤에는 상왕(仁文恭睿上王)으로 인덕궁(仁德宮)에 거주하면서 격구·사냥·온천·연회 등으로 유유자적한 생활을 했다. 태종의 우애를 받으면서 천명을 다했다.〉
‘괴수’ 장성택을 쳐낸 김정은
김정은은 정확히 2년 동안, 즉 아버지의 상중(喪中)을 핑계로 인고(忍苦)의 시간을 보냈음이 분명하다. 3년상이 끝나자마자 장성택을 제거한 사실에서 그의 절치부심했던 시간을 얼마든지 읽어낼 수 있다.
이괘의 맨 위에 있는 양효, 즉 상구(上九)는 적어도 김정은 입장에서는 그가 나아가야 할 처방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상구에 대해 공자는 ‘왕이 그로써[用] 출정을 한다는 것은 나라를 바로잡는 것이다’라고 풀었다. 주공의 효사는 ‘상구는 왕이 그로써[用] 출정을 하면 아름다움이 있다. 괴수를 죽이고 잡아들인 자들이 추악한 무리가 아니라면 허물은 없다[王用征伐 有嘉. 折首 獲匪其醜 无咎]’이다. 먼저 효사에 대한 정이천(程伊川)의 풀이다.
“양효가 위에 있으면서 이괘의 맨 끝에 있으니 굳세고 눈 밝음[剛明]이 지극한 자다. 밝으면 비추고 굳세면 결단할 수 있으니 비추면 간악함을 살필 수 있고 결단하면 위엄과 형벌을 행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임금다운 임금이 마땅히 이와 같이 굳셈과 눈 밝음을 써서 천하의 간악함을 구별해 정벌을 행한다면 아름다운 공로가 있다.
그리고 천하의 악을 제거할 적에 만약 물들어 그릇된 것들을 끝까지 구명한다면 어찌 이루 다 벨 수 있겠는가? 상하고 해치는 바가 참으로 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다만 괴수만을 꺾어 취할 것이요 잡은 것이 일반 무리가 아니면 잔혹한 허물은 없는 것이다. 《서경(書經)》 윤정(胤征)편에 이르기를 ‘큰 괴수를 섬멸하고 위협으로 인해 따른 자들은 다스리지 말라’고 했다.”
김정은에게는 장성택이 큰 괴수였던 것이다.
감괘는 ‘함정·위험’ 의미
사실 명운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운명보다는 정치적 역학(力學)관계로 보는 것이 현대적으로 더 적실성이 있다. 2013년 장성택 전격 처형과 이어진 고모 김경희의 칩거는 곧 김정은에게 더 이상 상왕(上王) 역할을 하는 사람이 없어졌음을 뜻한다. 이렇게 되면 괘상(卦象)은 바뀌게 될 수밖에 없다.
상왕은 음, 임금은 양, 재상은 음이 된다. 장관급 또한 자세를 낮췄으니 음이 되고 장성택 제거의 뒷배가 돼준 군부는 양이 되고 백성들은 다시 고분고분해져 음이 됐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렇게 되면서 이괘와는 음양이 모두 바뀐 감(坎)괘(☵☵)로 옮겨갔다. 감(坎)이란 구덩이·함정·위험이다. 괘만 놓고 보면 전반적으로 좋지 않은 상황을 말한다. 어쩌면 그런 상황은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인지도 모르다. 그러면 먼저 임금에 해당하는 구오(九五)에 대한 주공의 풀이부터 보자.
“구오는 구덩이가 가득 차지 않은 것은 중(中)이 아직 크지 못하기 때문이다.[坎不盈 中未大也]”
모호하다. 공자(孔子)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공자는 ‘구덩이가 가득 차지 않은 것은 중(中)이 아직 크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풀었다. 구오는 강(剛)으로 중정(中正)을 얻었다. 효만 놓고 보면 이보다 좋을 수가 없다. 게다가 임금 자리에 있다. 그럼에도 주공의 효사에서 ‘구덩이가 가득 차지 않았으니 이미 평평함에 이르면 허물이 없다’라고 했다. 구덩이가 가득 차지 않았으니 평평할 수가 없는데 그 이유는 바로 이 구오가 아직 크지 못해서라는 것이다. 이유는 밑에 호응하는 이가 없기 때문이다. 함께할 만한 사람이 없는 것이다. 구이(九二)는 아직 험한 곳에서 빠져나오지 못했고 나머지는 모두 음효라 세상을 구제할 만한 재주가 없다. 결국 구덩이가 가득 차야 허물이 없어지게 된다는 말은, 그전까지는 임금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해 허물이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효종(孝宗)이나 현종(顯宗)은 모두 여기에 해당되는 인물이라 하겠다. 평평하게 되는 것은 숙종(肅宗) 때에 이르러서였다. 임금이 본래의 권위를 되찾고 마침내 백성을 위한 일을 할 수 있게 됐다는 말이다.
흉함이 지극하다
감괘의 맨 위에 있는 음효에 대해 공자는 ‘도리를 잃어 흉함이 3년이나 간다’라고 풀었다. 주공은 효사에서 ‘동아줄[徽纆]로 결박해 가시나무 숲속에 가둔 채 3년이 돼도 벗어나지 못하니 흉하다[係用徽纆 寘于叢棘 三歲不得 凶]’고 했다. 동아줄이란 감옥에서 쓰는 포승줄이다. 가시나무 숲속은 감옥을 나타낸다. 감옥을 총극(叢棘)이라고 했다. 이는 곧 감옥에 붙잡혔다는 뜻이다. 그 험난함이 극에 이르렀다.
음유의 자질로 스스로 지극히 험난한 곳에 처하게 됐는데 벗어날 가망도 없다. 감옥에서 3년이란 너무나도 긴 기간이기 때문이다. 흉함이 정말로 지극하다.
이것이 김정은의 미래일 수도 있다. 보기에 따라서는 김정은의 작은아버지 김평일에 해당할 수도 있지만….⊙
담담하게 북한의 권력 지형도를 바탕으로 해서 괘(卦)를 형성시킨 다음에 김정은과 관련된 효(爻)를 음미하는 가장 정통적인 방법을 쓰고자 한다. 이는 이미 앞서 문재인(文在寅) 대통령을 짚어볼 때 쓴 방법이다. 다시 말하지만 한 괘의 여섯 효는 권력서열에 해당한다. 맨 위는 상왕(上王), 그다음은 임금, 그다음은 재상이나 세자, 그다음은 판서급, 그다음은 중간관리 그리고 맨 아래는 신진그룹이나 일반 백성이다.
사실 김정은처럼 한 나라의 최고지도자에 있을 경우 《주역》을 통한 명운 살피기는 훨씬 용이하다. 전체 괘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김정은의 경우 2011년 12월 김정일 사망과 더불어 권력의 전면에 나서 2년 후인 2013년 12월 고모부이자 후견인이던 장성택을 전격 처형할 때까지와,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를 나눠서 살필 수 있다.
하늘에 태양이 두 개인 상황
2011년 12월 26일 금수산기념궁전에서 열린 김정일 장의행사 때의 김정은. 두려워하고 조심스러워하는 기색이 보인다. 사진=AP/뉴시스 |
이렇게 되면 2011~2013년 상황은 위에서부터 ‘양-음-양-양-음-양’이 된다. 이는 이(離)괘(☲)가 위아래로 중첩된 이괘(☲☲)가 된다.
이괘는 그 자체로 밝음, 즉 해를 뜻한다. 해란 임금이다. 두 개의 해가 겹쳐 있어 매우 밝다는 긍정적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하늘에 해가 두 개 있는 모양이기도 하다. 즉 임금의 자리를 넘겨주는 때인 것이다. 군주제 사회에서는 세자를 책봉한 때부터가 여기에 해당한다.
의경세자
《주역》에 능했던 조선의 세조(世祖)는 자신의 자리를 이을 왕세자를 책봉하는 글[敎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세조실록(世祖實錄)》 1455년(세조 1년) 7월26일자 기사다.
〈예부터 성왕(聖王)이 모두 저이(儲貳·세자)를 세웠으니 이는 대개 장차 신기(神器·왕위)를 부탁하여 종조(宗·종묘)를 받들려는 것이다. 이로써 《역경(易經)》의 이하(離下·아래의 이괘) 이상(離上·위의 이괘)의 괘상(卦象·이괘)을 드리웠고, 《예경(禮經)》의 원량(元良·세자)의 다움[德]을 나타낸 것이다.
아! 너 원자(元子) 이장(李暲)은 그 몸이 적사(嫡嗣·적자)로 태어났으니 춘궁(春宮)에 있어 합당하므로 이에 너를 왕세자(王世子)로 삼으니, 너는 힘써 배우고 태만하지 말 것이며 힘써 삼선[三善・《예기(禮記)》 문왕세자(文王世子) 편에 나오는 말로서, 아들이 아버지를 섬기고 신하가 임금을 섬기고 나이 어린 사람이 어른을 섬기는 것을 말함]을 행하면서 군병을 무애(撫愛)하고 국사를 감시하여 길이 큰 기업(基業)을 공고히 하기를 바라니 어찌 삼가지 않을 수 있으랴!〉
정확히 맥락에 맞게 이(離)괘를 인용한 것이다. 그러나 이 세자는 결국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이때 책봉된 의경세자(懿敬世子·1438~1457년)는 초명은 이숭(李崇), 이름은 이장(李暲)이다. 아버지가 세조, 어머니가 참판 윤번(尹璠)의 딸 정희왕후(貞熹王后)이다. 성종의 아버지다. 1445년(세종 27년) 도원군(桃源君)에 봉해지고, 이때인 1455년(세조 1년) 세자로 책봉됐으며,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한확(韓確)의 딸 소혜왕후(昭惠王后) 한씨(韓氏)를 비로 맞아 월산대군(月山大君)과 성종을 낳았다. 어려서부터 예절이 바르고 글 읽기를 즐겼으며 해서(楷書)에도 능했으나, 병약했다. 1457년 병이 크게 들어 결국 20세에 죽었다. 1471년(성종 2년) 덕종(德宗)으로 추존됐다.
‘눈물 줄줄 흘리며 슬퍼하는 것이니 길하다’
이괘가 겹쳐 있는 중리(重離), 즉 명양(明兩)은 그냥 세습이 아니라 연이어 밝은 임금[明主]이 왕위를 이어받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요(堯)임금에 이어 순(舜)임금, 순임금에 이어 우왕(禹王)이 이어받은 경우가 그렇다. 또 경우에 따라서는 밝은 임금과 밝은 신하의 만남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일단 단순 세습 과정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마치 상왕 태종 아래에서 임금 생활을 한 세종처럼 김정은도 처음 2년간은 고모 및 고모부 아래에서 ‘견습’생활을 한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때의 김정은에 대해 《주역》은 뭐라고 풀고 있을까? 밑에서 다섯 번째 음효인 육오(六五)에 대한 주공(周公)의 풀이부터 보자.
“육오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슬퍼하는 것이니 길하다.[出涕沱若戚嗟若 吉]”
얼핏 보아서는 좋다는 말인지 나쁘다는 말인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육오는 음유(陰柔)의 자질로 양의 자리인 제5위에 있어 자리도 바르지 못하다. 게다가 위아래 모두 강한 신하들이 에워싸고 있고, 자신과 호응해야 하는 제2위 또한 음효로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없다. 참으로 위태롭고 두려운 형세다. 다만, 사리를 밝게 알기 때문에[明] 두려움이 깊어 눈물을 줄줄 흘리고 근심이 깊어 눈물을 줄줄 흘린다. 그래서 끝내는 목숨을 보전함으로써 길할 수 있다. 즉 이때 길하다는 것은 무슨 좋은 일이 생긴다기보다 ‘목숨 보전’이 전부다. 실은 그만큼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조선의 두 번째 임금 정종(定宗·1357~1419년)이 이와 같다. 그는 동생 태종에게 붙어 그 자리에 있었고, 위아래로 사실상 포위된 채 있었으나 순리를 벗어나지 않아 천수를 누릴 수 있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가 전하는 그의 생애다.
〈이름은 경(曔)이고, 초명은 방과(芳果)이다. 태조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 韓氏)이다.
정종의 비 정안왕후(定安王后)는 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 김천서(金天瑞)의 딸이다. 성품이 순직, 근실하고 행실이 단엄, 방정하면서 무략이 있었다. 일찍부터 관계에 나가 1377년(우왕 3년) 5월 이성계(李成桂)를 수행해 지리산에서 왜구를 토벌했다.
조선 왕조가 개창되자 1392년(태조 1년) 영안군(永安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의흥삼군부중군절제사로 병권에 관여했다. 1398년 8월 정안군 방원(靖安君 芳遠)이 주도한 ‘1차 왕자의 난’이 성공하면서 세자 책봉 문제가 제기됐다. 방과는 “당초부터 대의를 주창하고 개국해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업적은 모두 정안군의 공로인데 내가 어찌 세자가 될 수 있느냐”고 하면서 완강하게 거절했으나, 정안군이 양보해 세자가 됐다.
1개월 뒤 태조의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태조의 양위는 자의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 반강제로 이뤄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 정종은 자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정안군의 양보로 즉위했으므로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정종조의 정치는 거의 정안군의 뜻에 따라 전개됐다.
1399년(정종 1년) 3월 개경으로 천도했다. 같은 해 8월 분경금지법(奔競禁止法)을 제정했다. 이로써 관인(官人)이 권귀(權貴)에 의존하는 것을 금지해 권귀의 세력을 약화시켰다. ‘2차 왕자의 난’을 계기로 1400년 2월 정안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그해 4월 정당문학 겸 대사헌 권근(權近)과 문하부좌산기상시 김약채(金若采) 등의 소를 받아들여 사병(私兵)을 혁파하고 내외의 병권을 의흥삼군부로 집중시켰다.
문하시랑찬성사 하륜(河崙)에게 명해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를 의정부로 고치고 중추원을 삼군부(三軍府)로 고치면서, 삼군의 직장(職掌)을 가진 자는 의정부에 합좌하지 못하게 했다. 이로써 의정부는 정무를 담당하고, 삼군부는 군정을 담당하는 군·정 분리체제를 이뤘다. 이러한 개혁은 왕권 강화를 위한 것으로 방원의 영향력 아래에서 이뤄진 것이라 하겠다.
1399년 3월 집현전을 설치해 장서(藏書)와 경적(經籍)의 강론을 맡게 했다. 그해 5월 태조 때 완성된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을 편찬했다. 재위 시에도 정무보다는 격구 등의 오락에 탐닉하면서 보신책으로 삼았다. 왕위에서 물러난 뒤에는 상왕(仁文恭睿上王)으로 인덕궁(仁德宮)에 거주하면서 격구·사냥·온천·연회 등으로 유유자적한 생활을 했다. 태종의 우애를 받으면서 천명을 다했다.〉
‘괴수’ 장성택을 쳐낸 김정은
김정은은 2013년 12월 자신의 후견인이자 고모부인 장성택을 제거했다. 사진=《로동신문》 캡처 |
이괘의 맨 위에 있는 양효, 즉 상구(上九)는 적어도 김정은 입장에서는 그가 나아가야 할 처방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상구에 대해 공자는 ‘왕이 그로써[用] 출정을 한다는 것은 나라를 바로잡는 것이다’라고 풀었다. 주공의 효사는 ‘상구는 왕이 그로써[用] 출정을 하면 아름다움이 있다. 괴수를 죽이고 잡아들인 자들이 추악한 무리가 아니라면 허물은 없다[王用征伐 有嘉. 折首 獲匪其醜 无咎]’이다. 먼저 효사에 대한 정이천(程伊川)의 풀이다.
“양효가 위에 있으면서 이괘의 맨 끝에 있으니 굳세고 눈 밝음[剛明]이 지극한 자다. 밝으면 비추고 굳세면 결단할 수 있으니 비추면 간악함을 살필 수 있고 결단하면 위엄과 형벌을 행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임금다운 임금이 마땅히 이와 같이 굳셈과 눈 밝음을 써서 천하의 간악함을 구별해 정벌을 행한다면 아름다운 공로가 있다.
그리고 천하의 악을 제거할 적에 만약 물들어 그릇된 것들을 끝까지 구명한다면 어찌 이루 다 벨 수 있겠는가? 상하고 해치는 바가 참으로 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다만 괴수만을 꺾어 취할 것이요 잡은 것이 일반 무리가 아니면 잔혹한 허물은 없는 것이다. 《서경(書經)》 윤정(胤征)편에 이르기를 ‘큰 괴수를 섬멸하고 위협으로 인해 따른 자들은 다스리지 말라’고 했다.”
김정은에게는 장성택이 큰 괴수였던 것이다.
사실 명운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운명보다는 정치적 역학(力學)관계로 보는 것이 현대적으로 더 적실성이 있다. 2013년 장성택 전격 처형과 이어진 고모 김경희의 칩거는 곧 김정은에게 더 이상 상왕(上王) 역할을 하는 사람이 없어졌음을 뜻한다. 이렇게 되면 괘상(卦象)은 바뀌게 될 수밖에 없다.
상왕은 음, 임금은 양, 재상은 음이 된다. 장관급 또한 자세를 낮췄으니 음이 되고 장성택 제거의 뒷배가 돼준 군부는 양이 되고 백성들은 다시 고분고분해져 음이 됐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렇게 되면서 이괘와는 음양이 모두 바뀐 감(坎)괘(☵☵)로 옮겨갔다. 감(坎)이란 구덩이·함정·위험이다. 괘만 놓고 보면 전반적으로 좋지 않은 상황을 말한다. 어쩌면 그런 상황은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인지도 모르다. 그러면 먼저 임금에 해당하는 구오(九五)에 대한 주공의 풀이부터 보자.
“구오는 구덩이가 가득 차지 않은 것은 중(中)이 아직 크지 못하기 때문이다.[坎不盈 中未大也]”
모호하다. 공자(孔子)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공자는 ‘구덩이가 가득 차지 않은 것은 중(中)이 아직 크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풀었다. 구오는 강(剛)으로 중정(中正)을 얻었다. 효만 놓고 보면 이보다 좋을 수가 없다. 게다가 임금 자리에 있다. 그럼에도 주공의 효사에서 ‘구덩이가 가득 차지 않았으니 이미 평평함에 이르면 허물이 없다’라고 했다. 구덩이가 가득 차지 않았으니 평평할 수가 없는데 그 이유는 바로 이 구오가 아직 크지 못해서라는 것이다. 이유는 밑에 호응하는 이가 없기 때문이다. 함께할 만한 사람이 없는 것이다. 구이(九二)는 아직 험한 곳에서 빠져나오지 못했고 나머지는 모두 음효라 세상을 구제할 만한 재주가 없다. 결국 구덩이가 가득 차야 허물이 없어지게 된다는 말은, 그전까지는 임금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해 허물이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효종(孝宗)이나 현종(顯宗)은 모두 여기에 해당되는 인물이라 하겠다. 평평하게 되는 것은 숙종(肅宗) 때에 이르러서였다. 임금이 본래의 권위를 되찾고 마침내 백성을 위한 일을 할 수 있게 됐다는 말이다.
흉함이 지극하다
감괘의 맨 위에 있는 음효에 대해 공자는 ‘도리를 잃어 흉함이 3년이나 간다’라고 풀었다. 주공은 효사에서 ‘동아줄[徽纆]로 결박해 가시나무 숲속에 가둔 채 3년이 돼도 벗어나지 못하니 흉하다[係用徽纆 寘于叢棘 三歲不得 凶]’고 했다. 동아줄이란 감옥에서 쓰는 포승줄이다. 가시나무 숲속은 감옥을 나타낸다. 감옥을 총극(叢棘)이라고 했다. 이는 곧 감옥에 붙잡혔다는 뜻이다. 그 험난함이 극에 이르렀다.
음유의 자질로 스스로 지극히 험난한 곳에 처하게 됐는데 벗어날 가망도 없다. 감옥에서 3년이란 너무나도 긴 기간이기 때문이다. 흉함이 정말로 지극하다.
이것이 김정은의 미래일 수도 있다. 보기에 따라서는 김정은의 작은아버지 김평일에 해당할 수도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