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일성 동생 김영주, 김정일에게 밀려난 후 18년 동안 자강도 유폐
⊙ 김일성 후처 김정애는 별장 연금
⊙ 김정일 이복동생 김평일은 대사로 30년째 해외 유랑, 영일ㆍ경진도 외국생활
⊙ 김정남ㆍ김정철도 권력 미련 버려야 살 수 있을 것
⊙ 김일성 후처 김정애는 별장 연금
⊙ 김정일 이복동생 김평일은 대사로 30년째 해외 유랑, 영일ㆍ경진도 외국생활
⊙ 김정남ㆍ김정철도 권력 미련 버려야 살 수 있을 것
- 1970년대 남북회담 당시 정홍진 중앙정보부 협의조정국장(왼쪽)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김영주(오른쪽).
북한은 지난 6월 23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결정서를 통해 2010년 9월 상순(上旬) 당대표자회를 소집한다고 밝혔다.
이번 당대표자회는 무려 44년 만에 개최되는데다가 1980년 제6차 당대회 이후 30년 만에 열리는 최대의 당 행사다. 이번 당대표자회의를 계기로 김정일(金正日)의 3남인 김정은(27세)이 어떤 식으로든 후계자로 등장할 것이라는 예상이 높다.
김정은이 김정일의 후계자가 되면, 장남 김정남(39세)과 2남 김정철(29세)은 어떻게 될까? 과거 조카 김정일에게 후계자 자리를 내준 김영주(金英柱·김일성의 동생), 김정일 등장 이후 권력의 이면(裏面)에 묻혀버린 김성애(金聖愛·김일성의 후처)와 그의 아들 김평일(金平一) 등의 사례를 통해 후계자 경쟁에서 탈락한 김정남·김정철의 미래를 가늠해 보기로 한다.
후계경쟁에서 조카에게 밀린 김영주
당초 김일성(金日成)의 후계자로 꼽혔던 사람은 그의 동생 김영주(1920년생)였다. 김영주는 소련 모스크바종합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후, 1954년 당 중앙위 조직지도부 지도원으로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이후 당 조직지도부 지도과장, 부(副)부장, 조직지도부장(1960년), 당 중앙위원(1961년), 당 비서(1962년), 당 중앙위 정치위원(현 정치국원, 1969년) 등으로 당의 핵심직책을 역임한 그는 북한정권의 실질적인 2인자였다. 1960년대에는 김일성과 당 원로들도 ‘김일성-김영주-후(後)세대’를 잠정적 후계구도로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우리 정부가 1971년 남북대화를 비밀리 진행하면서 김영주를 대화 파트너로 삼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김일성의 마음은 동생 김영주에서 아들 김정일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반면 건강이 좋지 않았던 김영주는 당 안팎에서 조직비서ㆍ조직지도부장으로서의 업무수행능력까지 의심을 받고 있었다.
북한에서 후계자 문제가 처음 공식 논의된 것은 1971년 당 중앙위 전원(全員)회의 직후 열린 정치국회의로 알려져 있다. 이 자리에서 당 원로들은 김일성의 환갑(1972년)이 다가오는데 그 이전에 후계문제를 매듭지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당시 김정일의 나이(29세)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 때문에 후계문제 결정은 뒤로 미뤄지게 되었다.
이듬해 김일성의 환갑(4월 15일) 직후 최현(崔賢ㆍ인민무력부장 역임), 오진우(吳振宇ㆍ인민무력부장, 정치국 상무위원 역임) 등 당 원로들은 김일성과 함께 후계문제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이 자리에서 김일성의 마음을 읽은 최현이 김정일을 후계자로 삼을 것을 제안했다. 이때부터 후계권력은 김영주에서 김정일로 급격히 무게중심이 이동하게 됐다.
김영주, 18년 만에 再등장
김정일은 1972년 중앙위원(30세)이 됐고, 그해 12월 27일 열린 당 중앙위 제5기 6차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의 후계자로 내정됐다. 1973년 9월 김영주가 당 조직지도부장ㆍ조직비서에서 해임된 후, 그 자리는 김정일이 차지했다. 김정일은 당 선전선동부장과 조직지도부장, 당 조직-선전선동비서에 오르며 후계권력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1974년 2월 당 중앙위 5기 8차 전원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김일성은 직접 나서서 김영주가 사업의욕이 없고 자신을 잘 도와주지 않는다고 비판하면서, 김정일을 자신의 유일한 후계자로 공식 결정했다. 이때 김영주는 정무원 부총리로 강등되어 권력의 핵심에서 멀어지게 됐다. 이와 함께 김영주의 심복이었던 김도만 당 선전비서와 박용국 국제비서도 축출됐다.
김영주는 1976년 5월 이후 권력 전면에서 사라져 버렸다. 김정일이 후계권력 승계에 방해가 되는 삼촌인 김영주와 그 가족을 자강도 산골로 내쫓았기 때문이다. 김영주에게는 쌍둥이 아들과 딸 둘이 있었는데, 한 고위 탈북자에 의하면 김영주가 권력에서 밀려난 후 이들 가족은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
1993년 김일성은 죽음을 예감했는지 김정일을 설득하여 18년간 유폐시켰던 김영주를 평양으로 불러들였다. 김영주에게는 ‘명예 국가부주석’이라는 자리가 주어졌다. 김영주는 그해 7월 27일 이른바 조국해방전쟁 40주년 승리기념탑 준공식에 김일성 부자(父子)를 비롯한 고위 당정(黨政) 간부들과 함께 참석, 18년 만에 공식행사에 모습을 드러내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북한정치권력 무대에서 아무 의미가 없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현재 김영주는 1998년 9월 이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 직책을 맡고 있으며, 2009년 제12기 최고인민회의에서도 유임(留任)됐다.
김성애의 몰락
후계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김정일에게 제1의 적(敵)은 삼촌 김영주였고, 그다음은 계모(繼母)인 김성애였다. 김성애(86세)는 평안남도 강서군 태생으로 김일성의 서기로 일하다가 1953년 김일성과 결혼했다. 그녀와 김일성 사이에서 김경진(1952년생), 김평일(1954년생), 김영일(1955년생, 2000년 사망)이 태어났다.
김성애는 수령(首領) 김일성의 부인으로 당 중앙위원(1970년), 여성동맹(女盟)위원장(1971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5~9기)을 지내면서 세도를 부렸다. 북한 언론매체와 관공서에는 김일성 초상과 같은 크기의 김성애 사진이 나란히 내걸렸다. 특히 김일성이 1971년 1월 농업중앙대회 연설에서 “김성애의 얘기는 내 얘기와 마찬가지다”라고 말한 이후 당에서는 ‘김일성 교시(敎示)’와 ‘김성애 여사의 말씀’을 동격(同格)으로 취급했다. 김성애의 동생인 김성갑(해군사령부 정치위원)과 김성호(함북도당 비서)도 호가호위(狐假虎威)하면서 위세를 부렸다.
삼촌 김영주를 몰아낸 김정일은 계모인 김성애와 이복(異腹)동생들을 ‘곁가지’로 간주하고 제거작업에 돌입했다.
먼저 빨치산 출신으로 자신의 생모(生母) 김정숙과 가까웠고, 김성애의 권세에 반감을 갖고 있던 전문섭, 백학림, 조명록 등을 내세워 김성애와 그 일족(一族)의 비리를 조사, 비판하게 했다. 1974년 6월 열린 평양시당 전원회의와 여맹 중앙위원회에서 김성애 일족의 비행(非行)에 대한 공개비판이 행해지면서 김성애는 몰락했다. 이 사건 이후 김일성은 김성애에게 공식석상에 일절 나타나지 말라고 지시하고 그녀를 별장에 연금(軟禁)시켜 버렸다. 관공서와 신문, 방송 등에서 김성애의 사진과 ‘말씀판(어록을 적은 판)’이 사라졌다. 김성애 추종자들도 모두 축출됐다.
김정일은 1980년에서야 아버지 김일성을 배려해 김성애를 당 중앙위원(1980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여맹 위원장(1983~1998년) 등으로 복직(復職)시켰다. 하지만 이때는 이미 김성애의 정치적 영향력이 사라져 버린 뒤였다. 나중에 김영주를 ‘명예 국가부주석’으로 다시 등장시킨 것도 그렇지만, 김성애를 복직시킨 것은 권력을 장악한 김정일의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김성애는 1997년 김일성 사망3주기 추모대회 참석 이후 공식행사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다.
해외 유랑하는 김평일
김성애의 몰락은 바로 그의 아들인 김평일 형제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김정일은 자신이 장악하고 있는 조직지도부에 김성애, 이복동생(경진ㆍ평일ㆍ영일) 및 그들의 추종세력을 감시하는 ‘10호실’을 설치했다. 김정일은 국가보위부(현 국가안전보위부) 등에 ‘곁가지를 철저히 견제하라’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1982년 김병하 국가안전보위부장이 전격적으로 숙청된 것은 밖으로 알려진 것처럼 재물축적과 부화방탕한 생활 때문이 아니라, 김정일의 ‘곁가지 견제’ 명령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후 당ㆍ정ㆍ군(黨政軍)의 누구도 ‘곁가지’들과의 접촉을 극도로 회피하게 된 것은 물론이다.
김평일(56세)은 남산고등중학교와 김일성종합대학(정치경제학부), 김일성군사종합대학을 졸업했다. 이후 군관으로 임관해 호위사령부 근무를 거쳐 주(駐)유고대사관 무관(武官), 인민무력부 작전국 부국장(대좌ㆍ한국군의 대령)을 지냈다. 김평일은 통솔력과 친화력, 두뇌회전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평일은 외모가 김일성과 흡사해 김일성의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한때 김일성은 ‘당은 정일, 군은 평일, 정(내각)은 영일’에게 맡긴다는 구상을 한 적도 있다고 하지만, 결국 김정일의 철저한 ‘곁가지 치기’에 밀려나고 말았다.
결국 김평일은 김정일이 후계자로 공식화된 1980년 이후 주헝가리 대사, 주불가리아 대사, 주핀란드 대사, 주폴란드 대사(1998년 이후) 등을 맡아 해외를 전전(輾轉)하면서 정치일선에서 멀어져 갔다. 김평일은 공관장 회의가 있을 때 외에는 평양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으며, 1994년 김일성이 사망했을 때에도 국가장의위원회 위원에 이름조차 올리지 못할 정도로 견제를 받고 있다.
2008년 김정일의 건강이상 문제가 불거지자 일부 국내 대북(對北)전문가들은 김평일에게 주목하기도 했다. 인민무력부 작전국 부국장 출신으로 친화력 등이 뛰어난 김평일이라면 김정일 유고(有故)시 군부(軍部)의 지지를 받아 후계자로 부상할 수 있을 것이라는 논리였다. 하지만 김평일은 30년간의 해외생활로 인해 북한 내부에 지지세력이 없기 때문에 김정일 유고시 권력을 잡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김정일의 또 다른 이복동생인 김영일은 외교관으로 동독(東獨) 등 해외를 전전하다가 2000년 병사(病死)했다. 김경진(1952년생, 58세)은 김광섭 오스트리아 주재 북한대사의 부인이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체코ㆍ동독ㆍ오스트리아 등을 전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中, 김정남 앞세워 親中정권 세울 수도
그렇다면 김정은이 김정일의 후계자로 자리를 굳힐 경우, 이복형(異腹兄)인 김정남과 친형인 김정철은 어떻게 될까?
결론부터 말하면, 수령절대주의의 북한권력 속성상 김정남과 김정철은 정치적 야망을 버리고 해외에 머물며 낭인(浪人)생활을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앞의 김영주ㆍ김평일의 사례에서 보듯이, 정치권력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숨죽이며 사는 것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김정남이 마카오와 중국 베이징(北京)을 오가며 유랑생활을 하는 것도 이미 이러한 권력속성을 받아들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김정일이 앞으로 5년 내에 사망해 김정은이 안정적으로 후계승계를 하지 못할 경우, 권력무대에 복귀할 가능성이 남아 있다고 보는 전문가들도 있다.
첫째, 김정일 사후(死後) 권력을 승계한 김정은이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해 집단지도체제로 갈 수밖에 없을 경우, “‘혁명전통의 계승’이라도 해야 한다”는 김일성-김정일 맹종(盲從)분자들에 의해 추대되어 권력무대에 등장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정일 사후 북한 주민들이 김씨왕조체제에 염증을 느끼고, 군부를 중심으로 한 집단지도체제가 김씨왕조의 혁명전통을 부정할 경우에는 김정남의 복귀 가능성도 그만큼 낮아질 것이다.
둘째, 김정일 사후 권력불안정으로 북한에 급변사태가 발생, 권력공백이 장기화될 경우다. 이 경우 중국이 나서서 김일성 왕조의 혁명전통의 계승을 보장하는 의미로 친중적(親中的)이면서 상대적으로 조종이 용이한 김정남을 등장시켜 친중정권을 수립할 수도 있다.
건강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 김정철의 경우, 정치적 꿈을 버리고 요양하면서 김정은을 지원하는 식으로 비정치적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다. 김정일의 요리사였던 일본인 후지모토 겐지에 의하면 어린 시절 김정은과 김정철은 사이가 좋았다고 증언한 바 있다. 그러나 성인이 된 후에도 그런 관계가 유지될 것인지는 의문이다. 김정철이 정치적 야망을 가지려 든다면, 불행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북한식 수령절대주의사회에서는 후계구도를 둘러싼 권력투쟁은 무의미하다. 사실 권력투쟁이란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후계자는 절대통치권자인 수령이 지목하면 끝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의(異議)를 달 수 없는 것이 수령유일지배체제인 북한의 속성이다. 30대 초반에 불과한 김정일이 당내에서 잔뼈가 굵은 삼촌 김영주를 밀어낼 수 있었던 것은 후계결정권자인 수령 김일성이 김정일을 선호했기 때문이었다. 김정남ㆍ김정철이 발버둥을 쳐도 수령인 김정일이 건재하는 한 후계구도를 넘볼 수 없는 것이다.
향후 북한의 후계구도는?
김정일의 건강상태를 감안할 때, 향후 김정은의 권력승계 작업은 매우 빠른 속도로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후계절차는 크게 5단계로 진행되는데, 1단계 당의 영도(領導)절차(당대표자회 개최에서 확정) 이후, 2단계 후계자 중심의 당 체제정비(인사재편 등), 3단계 대대적 우상화(偶像化)사업 전개, 4단계 당 이데올로기인 주체(主體)사상이나 선군(先軍)사상에 대한 해설권 장악, 5단계 대남(對南)사업에 대한 지도권 행사 등이 진행될 것이다. 특히 2단계 당체제 정비 시 어떤 인사들이 당ㆍ정ㆍ군의 주요 직책에 선임되는지를 지켜봐야 한다.
김정일은 1964년 당사업을 시작한 이래 절대통치자인 김일성의 지원 아래 무려 30년 동안 후계자 연습을 했다. 그 결과 김정일은 김일성 사후 권력을 안정적으로 승계할 수 있었다.
김정은의 경우 김정일의 건강상태를 감안할 때 여러 변수(變數)가 등장할 것이다. 향후 5년 이상 김정일이 건강을 유지한다면 비교적 안정적으로 김정은이 권력을 승계할 것이다. 그 이전에 김정일이 사망한다면 김정은이 권력을 승계하더라도 오래가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김정일이 권력승계를 서두르면서 장성택(張成澤)을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해 김정은의 후견인 역할을 맡기려 하는 것이다.⊙
이번 당대표자회는 무려 44년 만에 개최되는데다가 1980년 제6차 당대회 이후 30년 만에 열리는 최대의 당 행사다. 이번 당대표자회의를 계기로 김정일(金正日)의 3남인 김정은(27세)이 어떤 식으로든 후계자로 등장할 것이라는 예상이 높다.
김정은이 김정일의 후계자가 되면, 장남 김정남(39세)과 2남 김정철(29세)은 어떻게 될까? 과거 조카 김정일에게 후계자 자리를 내준 김영주(金英柱·김일성의 동생), 김정일 등장 이후 권력의 이면(裏面)에 묻혀버린 김성애(金聖愛·김일성의 후처)와 그의 아들 김평일(金平一) 등의 사례를 통해 후계자 경쟁에서 탈락한 김정남·김정철의 미래를 가늠해 보기로 한다.
후계경쟁에서 조카에게 밀린 김영주
당초 김일성(金日成)의 후계자로 꼽혔던 사람은 그의 동생 김영주(1920년생)였다. 김영주는 소련 모스크바종합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후, 1954년 당 중앙위 조직지도부 지도원으로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이후 당 조직지도부 지도과장, 부(副)부장, 조직지도부장(1960년), 당 중앙위원(1961년), 당 비서(1962년), 당 중앙위 정치위원(현 정치국원, 1969년) 등으로 당의 핵심직책을 역임한 그는 북한정권의 실질적인 2인자였다. 1960년대에는 김일성과 당 원로들도 ‘김일성-김영주-후(後)세대’를 잠정적 후계구도로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우리 정부가 1971년 남북대화를 비밀리 진행하면서 김영주를 대화 파트너로 삼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김일성의 마음은 동생 김영주에서 아들 김정일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반면 건강이 좋지 않았던 김영주는 당 안팎에서 조직비서ㆍ조직지도부장으로서의 업무수행능력까지 의심을 받고 있었다.
북한에서 후계자 문제가 처음 공식 논의된 것은 1971년 당 중앙위 전원(全員)회의 직후 열린 정치국회의로 알려져 있다. 이 자리에서 당 원로들은 김일성의 환갑(1972년)이 다가오는데 그 이전에 후계문제를 매듭지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당시 김정일의 나이(29세)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 때문에 후계문제 결정은 뒤로 미뤄지게 되었다.
이듬해 김일성의 환갑(4월 15일) 직후 최현(崔賢ㆍ인민무력부장 역임), 오진우(吳振宇ㆍ인민무력부장, 정치국 상무위원 역임) 등 당 원로들은 김일성과 함께 후계문제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이 자리에서 김일성의 마음을 읽은 최현이 김정일을 후계자로 삼을 것을 제안했다. 이때부터 후계권력은 김영주에서 김정일로 급격히 무게중심이 이동하게 됐다.
김영주, 18년 만에 再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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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주는 1993년 이후 명예 국가부주석,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명예부위원장 등을 맡고 있다. |
1974년 2월 당 중앙위 5기 8차 전원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김일성은 직접 나서서 김영주가 사업의욕이 없고 자신을 잘 도와주지 않는다고 비판하면서, 김정일을 자신의 유일한 후계자로 공식 결정했다. 이때 김영주는 정무원 부총리로 강등되어 권력의 핵심에서 멀어지게 됐다. 이와 함께 김영주의 심복이었던 김도만 당 선전비서와 박용국 국제비서도 축출됐다.
김영주는 1976년 5월 이후 권력 전면에서 사라져 버렸다. 김정일이 후계권력 승계에 방해가 되는 삼촌인 김영주와 그 가족을 자강도 산골로 내쫓았기 때문이다. 김영주에게는 쌍둥이 아들과 딸 둘이 있었는데, 한 고위 탈북자에 의하면 김영주가 권력에서 밀려난 후 이들 가족은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
1993년 김일성은 죽음을 예감했는지 김정일을 설득하여 18년간 유폐시켰던 김영주를 평양으로 불러들였다. 김영주에게는 ‘명예 국가부주석’이라는 자리가 주어졌다. 김영주는 그해 7월 27일 이른바 조국해방전쟁 40주년 승리기념탑 준공식에 김일성 부자(父子)를 비롯한 고위 당정(黨政) 간부들과 함께 참석, 18년 만에 공식행사에 모습을 드러내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북한정치권력 무대에서 아무 의미가 없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현재 김영주는 1998년 9월 이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 직책을 맡고 있으며, 2009년 제12기 최고인민회의에서도 유임(留任)됐다.
김성애의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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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의 후처 김성애. |
김성애는 수령(首領) 김일성의 부인으로 당 중앙위원(1970년), 여성동맹(女盟)위원장(1971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5~9기)을 지내면서 세도를 부렸다. 북한 언론매체와 관공서에는 김일성 초상과 같은 크기의 김성애 사진이 나란히 내걸렸다. 특히 김일성이 1971년 1월 농업중앙대회 연설에서 “김성애의 얘기는 내 얘기와 마찬가지다”라고 말한 이후 당에서는 ‘김일성 교시(敎示)’와 ‘김성애 여사의 말씀’을 동격(同格)으로 취급했다. 김성애의 동생인 김성갑(해군사령부 정치위원)과 김성호(함북도당 비서)도 호가호위(狐假虎威)하면서 위세를 부렸다.
삼촌 김영주를 몰아낸 김정일은 계모인 김성애와 이복(異腹)동생들을 ‘곁가지’로 간주하고 제거작업에 돌입했다.
먼저 빨치산 출신으로 자신의 생모(生母) 김정숙과 가까웠고, 김성애의 권세에 반감을 갖고 있던 전문섭, 백학림, 조명록 등을 내세워 김성애와 그 일족(一族)의 비리를 조사, 비판하게 했다. 1974년 6월 열린 평양시당 전원회의와 여맹 중앙위원회에서 김성애 일족의 비행(非行)에 대한 공개비판이 행해지면서 김성애는 몰락했다. 이 사건 이후 김일성은 김성애에게 공식석상에 일절 나타나지 말라고 지시하고 그녀를 별장에 연금(軟禁)시켜 버렸다. 관공서와 신문, 방송 등에서 김성애의 사진과 ‘말씀판(어록을 적은 판)’이 사라졌다. 김성애 추종자들도 모두 축출됐다.
김정일은 1980년에서야 아버지 김일성을 배려해 김성애를 당 중앙위원(1980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여맹 위원장(1983~1998년) 등으로 복직(復職)시켰다. 하지만 이때는 이미 김성애의 정치적 영향력이 사라져 버린 뒤였다. 나중에 김영주를 ‘명예 국가부주석’으로 다시 등장시킨 것도 그렇지만, 김성애를 복직시킨 것은 권력을 장악한 김정일의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김성애는 1997년 김일성 사망3주기 추모대회 참석 이후 공식행사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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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주재 북한대사로 나가 있는 김평일(오른쪽)과 그의 자녀들. |
김평일(56세)은 남산고등중학교와 김일성종합대학(정치경제학부), 김일성군사종합대학을 졸업했다. 이후 군관으로 임관해 호위사령부 근무를 거쳐 주(駐)유고대사관 무관(武官), 인민무력부 작전국 부국장(대좌ㆍ한국군의 대령)을 지냈다. 김평일은 통솔력과 친화력, 두뇌회전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평일은 외모가 김일성과 흡사해 김일성의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한때 김일성은 ‘당은 정일, 군은 평일, 정(내각)은 영일’에게 맡긴다는 구상을 한 적도 있다고 하지만, 결국 김정일의 철저한 ‘곁가지 치기’에 밀려나고 말았다.
결국 김평일은 김정일이 후계자로 공식화된 1980년 이후 주헝가리 대사, 주불가리아 대사, 주핀란드 대사, 주폴란드 대사(1998년 이후) 등을 맡아 해외를 전전(輾轉)하면서 정치일선에서 멀어져 갔다. 김평일은 공관장 회의가 있을 때 외에는 평양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으며, 1994년 김일성이 사망했을 때에도 국가장의위원회 위원에 이름조차 올리지 못할 정도로 견제를 받고 있다.
2008년 김정일의 건강이상 문제가 불거지자 일부 국내 대북(對北)전문가들은 김평일에게 주목하기도 했다. 인민무력부 작전국 부국장 출신으로 친화력 등이 뛰어난 김평일이라면 김정일 유고(有故)시 군부(軍部)의 지지를 받아 후계자로 부상할 수 있을 것이라는 논리였다. 하지만 김평일은 30년간의 해외생활로 인해 북한 내부에 지지세력이 없기 때문에 김정일 유고시 권력을 잡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김정일의 또 다른 이복동생인 김영일은 외교관으로 동독(東獨) 등 해외를 전전하다가 2000년 병사(病死)했다. 김경진(1952년생, 58세)은 김광섭 오스트리아 주재 북한대사의 부인이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체코ㆍ동독ㆍ오스트리아 등을 전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中, 김정남 앞세워 親中정권 세울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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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계경쟁에서 탈락한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은 외국을 떠돌고 있다. |
결론부터 말하면, 수령절대주의의 북한권력 속성상 김정남과 김정철은 정치적 야망을 버리고 해외에 머물며 낭인(浪人)생활을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앞의 김영주ㆍ김평일의 사례에서 보듯이, 정치권력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숨죽이며 사는 것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김정남이 마카오와 중국 베이징(北京)을 오가며 유랑생활을 하는 것도 이미 이러한 권력속성을 받아들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김정일이 앞으로 5년 내에 사망해 김정은이 안정적으로 후계승계를 하지 못할 경우, 권력무대에 복귀할 가능성이 남아 있다고 보는 전문가들도 있다.
첫째, 김정일 사후(死後) 권력을 승계한 김정은이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해 집단지도체제로 갈 수밖에 없을 경우, “‘혁명전통의 계승’이라도 해야 한다”는 김일성-김정일 맹종(盲從)분자들에 의해 추대되어 권력무대에 등장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정일 사후 북한 주민들이 김씨왕조체제에 염증을 느끼고, 군부를 중심으로 한 집단지도체제가 김씨왕조의 혁명전통을 부정할 경우에는 김정남의 복귀 가능성도 그만큼 낮아질 것이다.
둘째, 김정일 사후 권력불안정으로 북한에 급변사태가 발생, 권력공백이 장기화될 경우다. 이 경우 중국이 나서서 김일성 왕조의 혁명전통의 계승을 보장하는 의미로 친중적(親中的)이면서 상대적으로 조종이 용이한 김정남을 등장시켜 친중정권을 수립할 수도 있다.
건강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 김정철의 경우, 정치적 꿈을 버리고 요양하면서 김정은을 지원하는 식으로 비정치적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다. 김정일의 요리사였던 일본인 후지모토 겐지에 의하면 어린 시절 김정은과 김정철은 사이가 좋았다고 증언한 바 있다. 그러나 성인이 된 후에도 그런 관계가 유지될 것인지는 의문이다. 김정철이 정치적 야망을 가지려 든다면, 불행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북한식 수령절대주의사회에서는 후계구도를 둘러싼 권력투쟁은 무의미하다. 사실 권력투쟁이란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후계자는 절대통치권자인 수령이 지목하면 끝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의(異議)를 달 수 없는 것이 수령유일지배체제인 북한의 속성이다. 30대 초반에 불과한 김정일이 당내에서 잔뼈가 굵은 삼촌 김영주를 밀어낼 수 있었던 것은 후계결정권자인 수령 김일성이 김정일을 선호했기 때문이었다. 김정남ㆍ김정철이 발버둥을 쳐도 수령인 김정일이 건재하는 한 후계구도를 넘볼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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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중반 김일성(가운데)의 현지지도를 수행한 김정일(왼쪽 끝). |
김정일은 1964년 당사업을 시작한 이래 절대통치자인 김일성의 지원 아래 무려 30년 동안 후계자 연습을 했다. 그 결과 김정일은 김일성 사후 권력을 안정적으로 승계할 수 있었다.
김정은의 경우 김정일의 건강상태를 감안할 때 여러 변수(變數)가 등장할 것이다. 향후 5년 이상 김정일이 건강을 유지한다면 비교적 안정적으로 김정은이 권력을 승계할 것이다. 그 이전에 김정일이 사망한다면 김정은이 권력을 승계하더라도 오래가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김정일이 권력승계를 서두르면서 장성택(張成澤)을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해 김정은의 후견인 역할을 맡기려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