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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투지만만」 金鍾泌, 毛澤東을 들어 金大中을 치다

조갑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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造反有理와 大亂大治
  金鍾泌 자민련 명예총재와 만나기 전에 그의 발언으로 유명해진 「毛澤東 秘錄」을 사러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 있는 교보문고의 일본책 코너를 찾았다. 이 책은 산케이신문에 연재된 기사를 두 권으로 묶은 것이다. 워낙 찾는 사람이 많아 점원들은 毛澤東 秘錄 상하권을 계산대 옆에다가 쌓아놓고 팔고 있었다. 기자는 두 권을 사갖고 와서 이틀 만에 다 읽었다. 인터뷰하기 위한 공부삼아 읽기 시작했다가 재미가 붙었던 것이다. 서울 조선호텔 1층 양식당 나인스게이트의 별실에서 점심 식사를 겸해서 만난 金총재는 몇명의 국회의원과 후보들을 데리고 나타났다. 텔레비전이나 신문에는 요사이 심술궂은 표정으로 자주 나타나는 金鍾泌 총재이지만 對面해보면 항상 여유 있고 느긋하며 자신만만한 모습인데 이날도 마찬가지였다.
 
  ―毛澤東 秘錄에서 造反有理(조반유리)와 大亂大治(대란대치)란 말을 따와서 金大中 대통령을 공격하셨는데 또 무슨 말씀을 인용하실 작정입니까.
 
  『造反有理는 毛澤東이 홍위병을 부추길 때 써먹은 말이고 大亂大治는 그런 식으로 온 나라를 大亂상태에 빠뜨려놓아야 大治가 가능하다는 毛의 말입니다. 요사이 일어나고 있는 일이 꼭 그렇지 않습니까. 실정법이 엄연히 있는데 총선연대는 그것을 어기고 選管委 말도 안 듣고 그래서 選管委가 경찰을 부르면 그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고, 도대체 여기에 무슨 논리가 있습니까. 더구나 언론은 이를 비판하지 않고 말이야. 그런 단체에 무슨 정당성이 있습니까. 더구나 그 속에는 정체불명의 사람들도 있는데. 선거는 유권자들에게 맡겨놓아야 하는 겁니다』
 
  金총재는 식사주문도 하기 전에 열을 올렸다. 그는 『도대체 환경단체가 정치운동을 하는 나라가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흥분하더니 총선연대 소속단체들이 정부 지원금을 받은 사실을 지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것이 관변단체지 뭐요? 정부 돈 받아서 그 따위 짓 하는 것이 관변단체지』
 
  웨이터가 와서 식사를 주문받을 때 金鍾泌 명예총재는 『바싹 구워줘야 돼. 나는 벌겋게 나오면 못 먹어』라고 했다. 그리고 나서 스테이크에 얽힌 이야기를 구수하게 풀어간다.
 
  『鄭一永 대사가 파리에 있을 때 함께 맥심이란 유명한 음식점에 갔어요. 스테이크에 칼을 대니 벌건 즙이 나옵디다. 질색을 하고 웨이터를 불러 웰던(Well Done)으로 해달라고 했어요. 鄭대사가 통역을 했는데 웨이터가 가지 않고 한참 들여다보면서 한 마디 해요. 「당신은 스테이크 먹을 줄 모른다, 이렇게 먹는 것이 제대로 먹는 거다」란 거야. 내가 화가 나서 소리를 버럭 질렀지. 「내가 먹지 니가 먹나. 바싹 바싹 구워와!」라고 하니 웨이터가 놀라서 가더구먼. 그 뒤로는 거기에 간 적이 없어요. 아, 한번 할 수 없이 간 적이 있구먼』
 
 
  『毛澤東은 목욕도 하지 않았대』
 
 
  金鍾泌 총재의 말은 閑談인데도 방안을 쩡쩡 울렸다. 70대 老政客의 목소리는 오페라 가수처럼 뱃속에서 우러나오고 있었다.
 
  『뒤에 주한미국 대사를 역임한 필립 하비브 대사가 1970년부터 파리의 미국대사관을 근거지로 삼아 폴란드 주재 중국대사와 비밀회담을 벌인 적이 있어요. 내가 이 무렵 스페인에 가서 프랑코 총통으로부터 명예 아카데미 회원증을 받았는데 돌아가는 길에 파리에 들렀어요. 하비브 대사와 함께 맥심에 다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보니 새파랗게 젊은 여자가 머리카락이 하얗고 바싹 마른 노인의 무릎에 앉았다가 내려왔다가 하면서 嬌態(교태)를 부리는데 가관이야. 저게 뭔가하고 물었더니 하비브가 가만히 쳐다보더니 저 老人이 피카소래. 젊은 여자가 저러는 건 피카소로부터 무슨 그림 사인을 하나 받을까 해서인데 그렇게만 되면 큰 돈이 된다는 거야. 그런데 그렇게 嬌聲(교성)만 질러도 사인 얻는 데는 대부분의 경우 실패한다더군. 피카소의 실물을 그때 봤는데 그 3년 뒤엔가 죽었어요』
 
  ―피카소가 여자들을 좋아했답니다.
 
  『젊은 여자들이 무릎에 올라와서 애교 피우고 만지고 하는데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어요, 허허』
 
  ―毛澤東 비록을 읽어보면서 하나 이상하게 생각한 것은 彭德懷(팽덕회·한국전에 개입한 중공군 사령관. 그 뒤 국방장관으로 있다가 毛澤東의 대약진 운동에 반기를 들었다가 해임됨. 그 후임이 林彪)를 빼고는 劉少奇(유소기·당시 국가주석. 文革 때 獄死), 周恩來(주은래·당시 국무원 총리), 鄧小平(등소평·당시 黨총서기)이 毛澤東한테 「안된다」란 말을 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毛澤東이 그렇게나 무서웠을까요?
 
  『劉少奇는 안된다고 했지요. 그래서 毛澤東의 미움을 더 산 것인데 제일 안한 사람이 周恩來야. 彭德懷는 毛澤東에 대들 정도로 반대했고. 彭德懷가 쫓겨난 틈을 타서 林彪가 등장했단 말이야. 이 자는 廣東에 주둔하고 있던 제4야전군을 이끌고 있었는데 이 부대가 만주로 이동, 압록강을 넘어와 숨어서 기다리다가 북상하는 유엔군을 쳤어요. 그때 내가 평양의 전방 CP(지휘소)에서 근무중 덕천까지 나가 있었는데 중공군이 유엔군의 옆구리를 찌르는 바람에 붕괴되어 가지고 혼이 났습니다. 이 林彪가 毛澤東에게 알랑거렸는데 林彪의 아들이 毛澤東을 제거하는 쿠데타 계획을 세웠다가 탄로가 났어요. 林彪 일행이 기름도 모자라는 비행기를 타고 탈출하다가 몽골 上空에서 추락해서 전부 죽었습니다』
 
  ―毛澤東이 주변을 그렇게 압도한 비밀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험난한 大長征을 통해서 중국을 통일했다는 것에서 우러나온 카리스마이겠지요. 그는 또 造反有理 같은 말을 만들어내는 데 아주 천재적이었습니다. 그런 語錄은 또 절대적인 교시가 되었고. 그것뿐이지요. 毛澤東의 주치의가 쓴 책을 읽어보면 毛澤東은 목욕도 하지 않았대. 양치질도 하지 않고. 시녀들이 발가벗겨 놓고 물수건으로 닦아주었다나, 모르지 그렇게 하면서 쾌감을 느꼈을지도』
 
  ―毛澤東이 문화대혁명을 한참 일으킬 때 金총재께선 공화당 의장이셨는데 그때 파악하신 것과 요사이 읽어보신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까. 당시 일본 좌파지식인들은 문화대혁명을 높게 평가했고 우리나라에서도 그 영향을 받아서 한때 文革을 좋게 본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대단한 일을 한다고 높게 평가한 사람들이 있었지. 당시엔 또 정보도 부족했고. 그런데 毛澤東이 문화대혁명을 일으킨 것은 소외감 때문이더구먼. 대약진운동(인민공사 운동)이 실패하여 그 책임을 지고 국가주석 자리를 劉少奇한테 넘겨주었단 말이에요. 이때부터 꽁하고 있었지. 그때 소련에선 흐루시초프가 스탈린 격하운동을 벌였는데 毛는 중국에서도 그런 수정주의자가 안 나타난다는 법이 없는 것 아닌가하고 생각하고 있었겠지. 그래서 대학생들을 선동해가지고 그 야단을 친 것 아닙니까. 손 안 대고 코 푸는 식으로. 걔들이 들고 일어나게 해놓고는 劉少奇 일파를 전부 숙청해버리지 않습니까』
 
 
  『金大中 대통령의 연설을 듣고 이 사람이 왜 이러나 하고 생각하다가…』
 
 
  ―毛澤東도 大亂을 일으켜 大治를 하겠다고 했지만 1970년대에 접어들면 이것이 잘못 나가고 있다고 후회하지 않습니까.
 
  『毛澤東의 주치의가 쓴 것 하고 毛澤東秘錄을 비교해서 읽어보면 후회한 것 같지 않아요. 그는 아주 교활한 수법을 썼습니다. 이렇게 하라고 해놓고는 뒤에서는 요렇게 바꾸어서 이 사람을 치고 저렇게 바꾸어서 저 사람을 치고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지금 그런 수법을 흉내내는 사람이 있어요. 그래서 내가 지랄을 친 것입니다』
 
  金鍾泌 명예총재는 포도주를 마시면서 잔이 1950년대까지 우리나라 가정에서 쓰던 「호야」라고 불린 석유등잔과 닮았다고 이야기했다. 그을음으로 새까맣게 된 호야를 닦으려고 손을 넣어도 잘 들어가지 않고 호호 입김을 불어넣어 닦다가 호야를 몇개 깬 적도 있다고 즐겁게 회상했다.
 
  『호야란 말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어. 포르투갈語가 아닌가 합니다. 비누를 사분이라고 했는데 이것도 포르투갈에서 나온 말이 아닐까. 물사분이 임진왜란 때 들어온 것이라고 해요. 옛날 인사동에 행상들이 돌아다니면서 「미나리 사령, 배추사령」하고 다니면 그 뒤에서 경상도 여인이 「물사분 사이소, 물사분 사이소」하고 따르고, 또 그 뒤에서는 충청도 양반이 벌꿀을 팔러왔는데 체면 때문에 소리지르지는 못하고 「내 꿀도, 내 꿀도」 하면서 따라다녔대요』
 
  金총재가 『물사분 사이소』와 『내 꿀도, 내 꿀도』란 말의 흉내를 워낙 실감나게 하는 바람에 웨이터도 따라 웃었다.
 
  ―수굼포란 말 아십니까. 경상도에서 쓰는 말인데.
 
  『아 그건 일본 사람들이 스쿠프(scoop=삽)를 잘못 발음한 것을 경상도 사람들이 또 잘못 듣고 그렇게 부르는 것이오. 샤블(shovel)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서 삽이란 말이 나왔어요』
 
  ―아니 삽은 한자어도 삽()으로 되어 있는데요.
 
  『우리나라엔 원래 곡괭이밖에 없었어요. 삽이 없었다니까요』
 
  ―며칠 전 金총재께선 1971년 大選 때 金大中-朴正熙 두 분이 각각 전라도와 경상도를 대표하여 대결하는 식으로 되는 바람에 지역감정이 깊어진 계기가 되었다는 말씀을 하셨는데요.
 
  『내가 그 이야기를 해야 하나 하고 고민하다가 이것은 사실대로 밝혀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부여와 논산에서 이야기했습니다. 뭐라고 했느냐 하면 3월 초하룻날 金대통령이 치사를 통해서 5·16 군사 쿠데타 이후 지역감정이 심화되었다고 마치 朴대통령만 책임이 있는 것처럼 거론을 했어요. 그걸 라디오로 들으면서 이 사람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또 권력이 거짓말을 하는구나 하는 심한 반발을 내가 느꼈어.
 
  나는 역사도 권력의 기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틀리는 이야기를 하는데 참고 있을 수가 없어서 어느 기회에 이 소리를 할까 했다가 고향에 가서 이 소리를 했어. 「1963년 제5대 대통령 선거 개표에서 朴후보가 尹潽善 후보에게 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곳이 島嶼(도서) 지방이었다. 이곳의 개표를 해보니 朴후보에게 몰표가 쏟아져 나와 15만 표 차로 이겼다. 바로 金대통령의 고향인 목포, 신안, 무안 표로 朴대통령이 당선된 것이다」 이건 뭘 이야기하려고 하는고 하니 당시는 대한민국이 있었지 영호남이 없었어요.
 
  그런데 영호남의 지역감정이 왜 결정적으로 생기게 되었느냐 하면 호남에서 金大中씨가 대통령 후보로 나오면서 우리 고장에서 대통령을, 우리 고장에서 대통령을 하고 나서는 바람에 지역감정이 첨예하게 되고 말았다. 이게 진상인데 언제 朴대통령이 지역감정을 선동했느냐 말이야. 盧泰愚 대통령이 1987년 전라도 지역에 유세할 때는 방탄유리를 앞세워야 했고 金泳三씨는 유세를 중단하고 도망해야 했다. 그때도 영남에선 호남사람이 왔을 때 돌멩이 던진 적이 없단 말이야. 朴대통령이 지역감정을 선동했다고 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그러나 지금 당장 지역감정이 해소될 것 같지 않다. 영호남이 만난다고 해소될 것 같지 않다. 그러니 중재자가 있어야 하는데 가장 적당한 것이 자민련이다 말이야. 그래서 자민련 의원들을 국회에 많이 진출시켜주면 좋겠다고 한 것입니다. 이게 어떻게 지역감정을 유발한 것이 됩니까. 언론들이 내가 지역감정을 유발시킨다고 하는데 갓뎀… 그러고 보니 갓뎀이란 소리 잘 배웠어』
 
 
  『金대통령이 지난 2년간 한 일은 언론의 중요 포스트에 자기 사람 넣는 일이었어』
 
 
  ―사실 1980년대 민주화운동할 때는 지역감정이 겉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1987년 6월사태 때 광주에서도, 부산에서도 똑같이 시위를 했고 특히 경상도에서도 경상도 대통령을 맹렬히 규탄했습니다. 그러다가 兩金씨가 각기 대통령 출마를 강행하는 바람에 지역감정이 재발한 면이 있습니다.
 
  『내가 하는 말은 지역감정의 始發이 어디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1971년 大選 때 金大中, 朴대통령 두 사람이 나오니까 전라도, 경상도에서 우리 고장에서 대통령을, 하는 바람에 시발되었다는 것입니다. 金대통령 자신도 거기에 원인을 제공한 사람인데 왜 남 이야기를 하고 앉았느냐 말이오. 이걸 정당하게 국민들이 알아야 하는데 지금까지 한번도 그런 이야기를 한 사람이 없어. 그런데 날보고 지역감정 유발했다니 말도 안되는 소리하고 있어』
 
  ―이번 선거에선 아마도 자민련이 가장 언론자유를 많이 누릴 수 있는 입장인 것 같은데요. 그렇다면 지역감정도 중요하지만 국가보안법 개정문제, 체제, 안보, 이념문제에 대해서 확실한 이야기를 하여 국민들이 투표할 때 결심을 잘하도록 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일부에선 이번 선거에서 여당인 민주당이 다수당이 되면 국가보안법을 개정하여 사실상 북한을 反국가단체로 보지 않도록 함으로써 국군과 함께 안보의 2대 장치인 이 법을 死文化시켜 버리고 金正日과 회담을 추진하여 연방제를 논의하는 식의 헌법위반 또는 국체변경으로까지 가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좌파혁명인가, 보수혁명인가 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우리도 그 문제를 제기할 겁니다』
 
  ―형식상 몇번 제기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줄기차게 해야 하고 헌법과 법률에 비추어 이야기해야 힘이 생기는 것 아닙니까. 保守, 보수하는데 보수란 결국 헌법질서를 보수하자는 것 아니겠습니까.
 
  『글쎄 이런 일이 있었어요. 내가 전방을 시찰한 자리에서 물었어요. 「귀관들, 적이 누구야」하고 물으니 「인민군이다」고 해요. 그렇다 그것 잊지 마라, 북한주민들이 우리의 적이 아니고 인민군이 우리의 主敵(주적)이다, 이랬단 말입니다. 이게 신문에 나니까 아, 그 사회단체라고 하는 자들이 나를 공격하고 나왔어요. 그런 사람들이 지금 무슨 연대니 시민운동이니 하는 데 참여하고 있단 말입니다. 이것 아셔야 됩니다』
 
  ―이번 선거에서는 지엽적인 것은 李漢東 총재한테 맡기고 金鍾泌 명예총재께선 그런 체제문제에 대해서만 집중적으로 말씀하실 생각이십니까.
 
  『할 거예요. 너무 한꺼번에 많은 것을 말하기도 그렇고, 또 헤어지고 나서 그런 말 한다는 말도 듣기 싫어서 좀 두고보고 있어요. 근데 내가 보기에 金대통령이 크게 과오를 범하고 있는 게 노벨평화상 받으려고 하는 것 같애. 그런 생각을 너무 많이 해. 그래서 마치 북한하고 마치 평화적으로 북한에서 들어온 놈들 다 석방해주고 뭐하고 하는 거, 이것이 마치 평화에 공헌한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저 야단들을 하는데 다른 것 없어. 그게 다 노벨평화상 타려고 그러는데 사실 이 사람 머리 속에는 나라가 통일되고 하는 것도 없는 겁니다. 사실은. 그동안 DJ가 한 일이 뭐야. 각 신문사의 중요 포스트에 자기 사람들 다 넣는 짓을 했어. 이제 다 되었다 싶으니 엉뚱한 짓을 시작하는 거요』
 
 
  『나도 자존심이 있어 속았다는 말은 아직 안해』
 
 
  ―그래도 자민련이 2년 동안 한 일 중에 가장 큰 것이 주민등록증 이름에 漢字를 병기하도록 한 것과 국가보안법 개정을 저지한 것 아닙니까.
 
  『그런 건 아니고 국가보안법은 손질 안하기로 애당초 약속했던 겁니다. 그것보다는 대통령 중심제의 여러 모순을 시정한 내각제를 하기로 굳게 약속했기 때문에 우리가 지지하기로 했던 것 아닙니까.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이건 예상을 했지만 역대 대통령이 다 그랬지만 2년이 한계야. 2년이 지나면 권력의 과욕을 부리기 시작해. 이야기를 해도 안돼』
 
  金鍾泌 명예총재의 목소리는 이 대목부터 더욱 쩡쩡 울리기 시작했다. 이 별실 바깥의 홀에서 식사하는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한 배석자가 金대통령이 소위 시민단체들에게 불법화되어 있는 낙천 낙선운동을 사실상 허용한 점을 비판하고 나서자 金총재는 『(그건) 탄핵요건이 되는 거지요. 그런데 언론이 왜, 왜』 라고 했다. 이 대목에서 기자가 말문을 막았다.
 
  ―아니 언론을 탓하시기 전에 정치인들이 먼저 탄핵 이야기를 해서 언론이 쓰도록 해야지요.
 
  『세상에 저들이 사회의 목탁이라고 한다면 언론이 나서야지요. 뭐하는 것입니까. 솔직하게 이렇게 말하든지. 「우리는 상업회사니까 거추장스런 이야기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다」고 말하든지. 말도 안되는 소리 하고 있어. 지금도 봐요, 내가 언제 지역감정 유발하는 이야기를 했어요. 사실대로 이야기했는데 엉뚱하게 내가 지역감정을 유발했다고 대서특필하는 그런 놈의 언론이 어디 있어? 내 어머니 고향이 전주인데 제발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말리고 돌아다닌 놈인데. 말도 안되는 소리야. 여기 기자 한 사람 있지만 말이야, 갓뎀이야 다』
 
  ―金총재님 말씀을 듣고 있으면 결국 金大中 대통령한테 속았다는 이야기인데 속은 사람의 책임도 있는 것 아닙니까.
 
  『속았다 소리는 아직 내가 안해. 나도 자존심이 있는 놈인데 남을 공격하면서 제 자존심을 절단내면 안되니 속았다고 한 일이 없어요. 며칠 전 李漢東 총재가 그러더구먼. 여기 李仁濟란 사람이 왔다갔다하는 모양인데, 金대통령이 우리 金총재를 속였어. 李仁濟도 지금 金대통령한테 속고 있는데 본인은 속는 줄 몰라. 그래서 李仁濟가 여러분을 속이려고 하는데 그러면 다 속는다. 이렇게 해도 언론이 이건 하나도 보도 안해. 그러면서 왜 따라다녀. 내가 나라에 해를 끼친 것도 아닌데 언론은 지금 말도 아닌 짓을 하고 있어요. 언론에는 正義도 없어요? 하긴 諸葛孔明도 정의가 없는 세상이 되었다고 한탄했다지만』
 
  ―金총재께서 그동안 金대통령의 신원보증자 역할을 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내가 말을 못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그 신원보증을 해소해버리시지요.
 
  『그것은 그래도 IMF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뜻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이번에 공개적으로 말한 것은 5·16 쿠데타 때문에 지역감정이 생겼다고 대통령이 이야기하는 데 화가 났기 때문입니다. 이건 꼭 놀부사상 아닌가 말이야. 내가 죽게 생겼으면 네가 죽고 네가 죽게 생겼으면 물론 네가 죽어라, 내 잘못은 네 잘못이고 네 잘못은 네가 임마 혼자 다 짊어져라, 이게 놀부지 이게 흥부야. 그런데도 제대로 탓하지 못하는 언론이 뭘한다는 거야. 조선일보는 그렇지 않는가. 정의를 구현하고 있는가. 그러지 말아, 그러지 말아, 차라리 목탁이란 말은 빼고 우리도 상업회사니까 권력에 잘못 보이면 안된다고 자백을 하든지』
 
  ―金총재의 지금 말을 국민들이 믿으려면 총선 이후에도 金대통령과는 절대로 共助하지 않는다는 말씀을 확실히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 절대 안할 거요. 그렇게 말하는데도 저쪽에선 구리니까 아 뭐, 정치적 공조는 남아 있느니 뭐니 그러는데 참 후안무치한 사람들이여, 그런 일이 어디 있어, 그런 소리가. 한마디로 갓뎀밖에 없어, 지금』
 
  ―국가보안법 개정에 대해서는 반대한다는 말씀을 대통령한테 했습니까.
 
  『했어요. 다만 남용과 오해의 소지가 있는 부분은 고칠 수 있지만 기본적인 성격을 바꾸는 것은 절대로 안된다는 것이 자민련과 나의 입장이라고 분명히 했어요, 국회답변에도 했어요. 그래서 그 사람이 강력하게 추진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내가 거기에 있을 때는 견제할 것은 견제했어요. 모가 나지 않게. 내가 나오자마자 들고 나온 게 저 홍위병 아닙니까. 말도 안되는 소리. 사실 홍위병이란 말을 나는 쓴 적이 없어. 다만 어디서 터무니없는 논리를 가져와서 造反有理를 하고 있나 이랬지』
 
  造反有理란 말의 유래: 1966년 북경의 대학생들이 劉少奇와 鄧小平을 중심으로 한 당의 실권파에 대항하여 시위를 벌이자 공산당이 이들을 단속했다. 이에 대해서 毛澤東이 「그들의 반대에는 이유가 있다」는 의미로서 造反有理라고 했다. 이 말이 젊은 학생·노동자들로 구성된 홍위병을 부추겨 당과 정부의 기득권세력과 사회의 기성세력을 뒤엎는 지령처럼 되었다.
 
  金총재는 『실정법이 분명히 있는데 그 법을 어기는 일을 어떻게 두둔하느냐 말이야』라고 계속해서 金大中 대통령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불법을 두둔한다는 건 造反有理다, 아, 이런 말을 하면 金大中 대통령이라고 지칭하지 않아도 국민들은 다 알아들을 것이다, 그래서 했는데 국민들은 알아듣는데 기자들만 못 알아듣더군. 말이 안되잖아, 말이』
 
 
  『기본적으로 바탕이 틀리니 안되더만』
 
 
  ―제가 곁에서 보니까 金鍾泌 총재께선 金泳三 전 대통령과는 원래 잘 맞지 않았던 것 같고, 金大中 대통령과는 잘 맞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두 분의 생각은 상호보완적이기도 하고 知的 수준도 대등하게 대화할 정도이고 나이도 그렇고, 그런데 결국 이렇게 되셨는데.
 
  『기본적으로 바탕이 틀리니까 안되더만. 나는 철두철미 保守야. 심지어 나는 골프를 쳐도 훅을 내는 일이 없단 말이야. 슬라이스가 나오지. 누구는 훅 마음대로 내고 슬라이스 마음대로 내고 그러더구먼』
 
  ―바탕이 다르다는 것은 세상을 보는 눈이 다르다는 것입니까.
 
  『내가 이런 이야기는 어디서 했어요. 분명히 金大中 대통령은 공산주의자는 아니더라, 나보다 훨씬 진보주의자더라, 이런 표현을 누차에 걸쳐서 했어요. 우리는 급진 진보주의도 반대한다, 어떤 경우에도 급한 것은 부작용을 낸다, 그러면 국민들이 손해본다, 그러니 시간이 걸리더라도 국민을 설득해가면서 개혁을 해나가는 것이다, 개혁을 해야 할 것은 개혁해야 한다, 단 속도를 유지해라 이겁니다』
 
  ―지금 金총재께선 진보라고 하셨는데 진보라고 불리는 세력 안에는 좌파도 있습니다. 좌파까지 진보라고 부르면 保守는 지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進步란 말 자체가 좋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진보란 말만 볼 것이 아니라 거기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를 보아야지요. 좌파들도 이제는 소련공산주의가 살아 있을 때와는 많은 변화를 가져왔어. 그러니 이들을 좌익이니 공산주의니하고 부르는 것보다는 급진진보세력이다, 이렇게 부르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진보라고 부르지 마시고 急進이라고 부르십시오.
 
  『그래요 급진주의자들이야. 이 놈의 낱말 하나 가지고 따지는 게 참』
 
 
  『희랍의 소피스트들도 그런 엉터리 같은 소리는 안했어』
 
 
  ―그러나 남북대결이 기본적으로 이념대결이고 이념대결은 말의 대결입니다. 이번에 李會昌 총재가 공천파동을 겪는 것을 가만히 보니까 우리 국민들이 정치에 대해서 기대하는 것이 두 가지인 것 같아요. 하나는 정치에 대해 청렴성을 기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義理도 기대한다는 것이지요. 총재님 어떻습니까. 정치와 의리는 융화가 됩니까.
 
  『어렵지만 노력해야지요. 지켜야지요. 서로 믿고 해야 주고받고 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것이 깨지면 엉망진창 사회가 되는 것이지요. 뭐 정치는 원래 이런 식이다고 하는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신용 지켜야 합니다. 속된 말로 변을 눌 때는 급하니까 종이 가져와라, 뭐 해라, 빨리 나와라, 문 열어라 하더니 변을 다 눈 다음에는 급할 게 없으니까 심지어는 변소문도 안 닫고 나오면 이래 가지고 세상이 성립되겠어요?
 
  나는 그런 엄청난 거짓말을 한 적이 없어. 별짓 다해도 거짓말이 탄로나면 신뢰성 상실로 정치가는 지지기반을 유지할 수 없는 거요. 일본의 2·26 사건 때 청년장교들로부터 참살당한 이누카이 수상이 아들한테 「네가 정치하고 싶거든 거짓말하는 법부터 배워라」라고 했다는 거요. 그 아들은 거짓말하면서까지 정치할 생각이 없다고 하면서 정치에 몸을 담지 않았어요. 저 서양사람들이 한 이야기를 배워가지고 거짓말도 되풀이하면 참말이 된다고?』
 
  ―金大中 대통령은 그러나 거짓말과 약속을 안 지키는 것은 구별해주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 궤변이 어디 있어. 희랍의 소피스트들도 그런 거짓말은 안했어. 그런 엉터리 같은 소리 안했어』
 
  ―처칠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정치인은 약속을 못 지킬 수도 있다, 그럴 경우엔 왜 약속을 지키지 못했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요.
 
  『설명한 적이 있어요?』
 
  ―그렇다면 작년 여름에 金大中 대통령과 내각제 담판을 할 때 金총재께선 너무 쉽게 양보하신 것이군요.
 
  『그렇지 않아요. 金대통령이 그 이야기를 하기 전에 합당을 제의하더군. 나는 문득 3당 합당 생각이 나더군요. 그때 盧泰愚 대통령이 여소야대 상황에서 되는 일이 없어, 그래서 우리 신민주공화당하고 합당하기로 했어요. 그래도 과반수가 되는데 나중에 보니 (金泳三의) 민주당도 들어와 있더군요. 이것이 盧泰愚 대통령의 과욕이었어요. 신민주공화당하고만 손잡아도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데 과욕을 부린 거지. 이 과욕이 점점 이상하게 되는 것의 단초가 된 거지요.
 
  언제나 이 과욕이 세상을 절단내는 거야, 왜 과욕을 부리나. 金대통령도 나에게 그랬어. 「이제 내가 대통령이 되었는데, 나이가 이제 80을 내다보는데 무슨 과욕을 부릴 게 있느냐」고 말이야. 경제위기를 잘 극복해서 국민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나라 만드는 데 여생을 바치겠다고 그랬어. 그런데 한 2년이 되니까 생각이 달라진 거야. 민주당은 왜 만들어. 그 당에서 쫓겨나온 金相賢 의원이 그러대, 「나도 왜 민주당을 새로 만들었는지 모르겠다」고 그러대.
 
  사실은 국민회의 잘 다독거려서 가고 자민련 잘 다독거려서 가고 이렇게 했었어야지. 그래야 국민들이 안심할 거고. 이건 내가 그 韓光玉 비서실장한테 金대통령에게 이야기하라고 그랬어요. 밥 같이 먹자는 것 안 먹고, 가서 그 이야기나 전하라고 했어요. 난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민주당을 만들어가지고 과욕부리는 건 결국 지역감정을 더 심화시킬지 모른다. 잘못하면 호남당으로 전락할 가능성도 있는데 뭣하러 이렇게 하느냐, 그랬어요』
 
  ―金총재께선 金正日이를 어떻게 보십니까.
 
  『그동안 그 과정을 보면 저 체제를 유지하는 능력은 평가해야지요. 그러나 옛날엔 敵將을 칭찬하는 것이 하나의 덕목이었다고 합니다만 저들은 하나 변한 것 없는데 그걸 어떻게 칭찬해요. 칭찬한다는 건 말이 안됩니다. 국가원수가 그러면 곤란해요』
 
 
  『가정교육을 제대로 못 받은 자들이 사회를 어지럽힌다』
 
 
  ―레이건 대통령은 현직에 있을 때 소련을 공식석상에서 「악의 제국」(Evil Empire)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정치인들은 왜 북한정권에 대해서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합니까.
 
  『그러면 언론은 왜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하지요?』
 
  ―아니, 정치인들이 먼저 이야기를 해야 언론이 쓰지요. 우리가 만들어 쓸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내가 이야기했는데 언론이 안 쓰대. 내가 이야기했어요. 어떻게 金正日이를, 적의 총수를 찬양고무할 수 있는가 말이야 라고 내가 그랬어요. 그런데 언론이 안 써요. 이 나라가 正義가 있는가 묻고 싶어. 있기는 있겠지만, 시간이 걸리겠지만. 중국의 先人들도 天網, 하늘의 그물이 있어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고 다스릴 것이다 라고 이야기했어요. 나도 當代에 정의가 구현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天網에 희망을 걸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지요. 하늘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것 같지만 網이 있어요』
 
  金鍾泌 총재의 閑談은 아주 구수하고 상황묘사가 실감나기 때문에 많은 웃음을 자아내었다. 성공한 정치인들이 다 그렇지만 人名의 기억력이 비상한 그는 일제 시대 이웃집 아저씨의 이름까지 들먹이면서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집 앞에 모 회사의 지배인이던 이석태씨가 살았어요. 이분이 오토바이를 몰고 부여에서 회사가 있는 논산까지 통통거리면서 타고 다녔습니다. 우리 부락의 여인네들이 공동우물가에서 일하다가 오토바이 소리가 나면 「야, 저 통통 소리 한번 나는데 저분은 5전씩 번다고 하더라. 그러니 논산까지 가는데 몇천 번 통통 소리가 날 텐데 얼마나 벌까」하고 부러워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는 야 나도 공부를 열심히 하여 훌륭하게 된 다음에 저런 오토바이, 아니 자동차를 타고 다녀야겠다는 그런 의욕이 어려서부터 생겼습니다. 그래서 나보다 잘난 사람이나 잘하는 사람을 존경하면서 닮아보려고 애를 쓰게 된 것이오. 그런데 요즘은 누가 통통 소리 내면서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면 당장 「야, 저 자는 내가 못하는 것을 하고 있구나」 하면서 「저 자가 어디서 오토바이를 훔쳐서 다니는 게 아닐까」라고 배아파한단 말입니다. 이게 될 말입니까.
 
  세상을 이런 식으로 전부 거꾸로 해 놓고는 개혁한다고 하는데 개혁대상을 스스로 만들어놓고 개혁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내가 이렇게 悲憤해도 워낙 미력하니. 하긴 나도 적잖이 잘못을 많이 한 사람입니다. 교육을 할 때 人性에 치중해야 합니다. 사람이 되지 않는 놈이 인터넷 잘 움직인들 무엇합니까. 사람을 가르쳐야 돼. 가정교육 제대로 받지 못한 자들이 지금 세상을 어지럽게 하고 있어요』
 
 
  『베라먹을 것들』
 
 
  ―자민련이 잘못한 것이 있습니다. 지난 국회에서 4·3 제주도 공산폭동으로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보상이나 명예회복을 규정한 법률이 통과되었는데 이 법률을 읽어보면 이 사건이 대한민국의 건국을 방해하기 위해서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것이라는 定義가 없고 오히려 국군이 정의로운 민중봉기를 일으킨 제주도 양민들을 학살했다는 식으로 오해될 소지마저 있고 일부 세력에선 그런 방향으로 이 법을 악용하고 있습니다. 자민련도 이 법이 통과되는 데 찬성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내용 모르고 젊은이들이 그렇게 하는데 이런 것을 언론이 바로잡을 의무도 있는 것 아닙니까』
 
  ―아니 정치가 잘못해놓고 언론이 바로잡아달라고 하십니까.
 
  『정치가 잘못해도 견제하고 옳게 따져야 할 임무를 띤 것이 언론이야. 정치는 사회의 한 반영체이기 때문에 사회가 돌아가는 것과 뚝 떨어진 게 아닙니다. 그런 정치가 잘못해도 객관적인 입장에 있는 언론이 사회의 목탁으로서 이를 바로잡아달라는 겁니다.
 
  웬 녀석이 내가 4·3 사건에 관계가 있다고 떠들며 돌아다니는 미친 놈이 있었어. 내가 불렀어. 너 왜 물귀신도 아닌데 나를 물고 들어가냐하고 물었더니, 내가 그때 정보국의 북한반장을 했으니 책임이 있다는 거야. 내가 말하기를 당신은 북한반이 뭘 하는 줄 아는가라고 물으니 뭐 그런 것 하는 곳이 아닌가라고 해. 북한반은 38선 이북에 있는 군사력을 바라보는 곳이야 이 사람아. 북한 게릴라들이 6·25 남침을 준비하기 위해 남한으로 나와서 후방교란을 하고 点에서 線으로, 線에서 面으로 확대해 나가는 것을 담당한 것이 남한반이다. 북한반은 북쪽을 바라보는 곳이야 그런데 왜 내가 책임이 있다고 그러느냐. 이 사람이 한다는 말이 그래도 당시의 인물 중에 내가 고위층에 있는 인물이니까 4·3 사건에 책임이 있다는 거야.
 
  이런 베라먹을 놈이 있나 싶었지만 참았어요. 김달삼이가 총사령관이 되어 일으킨 폭동을 요새 와서 잘한 거다 하고 있으니 말이 안되는 거다. 더구나 나를 물고들어가고 있는데 그러지 말라하고 타일렀습니다. 이 자가 신문사마다 돌아다녔던 모양인데 한 신문에서만 취급했어. 아주 가방을 들고 다니면서 이 속에 다 있다고 그러는 미친 놈이 있었어. 이 세상이 그럴 수가 있어, 그런 것이 하나도 따져지지도 않고 말이야』
 
  이날 金鍾泌 총리는 「베라먹을 것들」이란 말을 자주 썼다. 지역감정에 金大中 대통령도 책임이 있다고 한 자신의 말을 언론이 비판한 데 대해서도 그런 용어를 썼다.
 
  『내가 지역감정을 자극하기 위해 그런 말을 쓰지 않았음을 잘 알면서도 큰 제목으로 나를 비판하는 것은 분명히 의도적이야. 베라먹을 것들, 아 그런데 베라먹을 것들이란 말은 표준어에 없습니다. 내가 강조하기 위해 그러는 거요. 빌어먹을 것들이란 뜻이지』
 
 
  『그런 게 무슨 학자야?』
 
 
  ―毛澤東 비록을 읽으면서 느낀 것이 있습니다. 동양정치사상을 저는 두 갈래로 봅니다. 戰國시대 齊나라 재상 管仲에서 劉少奇-鄧小平-李光耀로 이어지는 실용주의 노선이 있는가 하면 毛澤東으로 상징되는 명분론-선동노선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朴正熙 대통령은 아시아적인 실용주의 노선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맞아요. 劉少奇는 정신적으로 아주 건강했어요. 그러니 毛澤東에게 대든 거야. 毛澤東이 홍위병을 선동하여 나라를 절단내니까 안된다고 했어요. 그러니 毛澤東이가 한다는 말이 大亂大治. 大亂을 일으켜야 大治할 수 있다고 했다는 거야. 그러면서 劉少奇를 숙청해버렸잖아』
 
  ―싱가포르 전 수상 李光耀는 毛澤東보다 鄧小平을 더 높이 평가하면서 그를 20세기를 대표하는 중국의 지도자로 꼽았습니다.
 
  『그것이 옳게 보는 거지요. 鄧小平은 오뚝이 인생이야』
 
  ―周恩來가 文革 때 劉少奇와 鄧小平 편을 들어 毛澤東에 맞설 수 없었다고 생각하십니까.
 
  『周恩來는 좋게 이야기하면 中庸的인 사람이고 나쁘게 이야기하면 요령이 좋았던 사람이야. 그러나 周恩來는 양쪽에서 미움을 안 받았어요. 그러면서 鄧小平을 보호하고 결국은 毛澤東의 후계자로 만들었어. 그러니까 보통사람이 아니었어』
 
  ―周恩來는 毛澤東의 허가가 떨어지지 않았다고 암수술도 미루며 참았다던데요.
 
  『본인도 암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아프면서도 이야기 안하고 정상집무를 했으니 중국사람다운 모습이에요. 毛澤東이가 周恩來를 미워했어요. 그래도 워낙 사람이 완벽하니 건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金총재께선 주로 일본책을 통해 독서를 하십니까.
 
  『우리나라 책은 내용도 별것 없지만 漢字가 없으니 읽는 데 너무 시간이 많이 걸려요. 요사이 한자를 외국어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한자는 우리 것이란 말이야. 우리말의 語源이 거의 다 한자인데 그런데도 외국어라고 하니 도대체가…. 어느 날 한글전용주의자가 찾아와서 나한테 항의를 제기했어요. 저들이 주민증의 이름을 한글로 표기하도록 해두었는데 내가 나서서 한자를 倂記하도록 했다고 따지더라고.
 
  이런 게 무슨 학자야. 동양의 같은 문화권을 파괴하고 고립을 자초하자는 게 이게 무슨 학자여. 그런 者가 왜 두루마기를 입고 돌아다니나. 한글로는 우리말의 뜻을 반도 전달하지 못해!(기자注-이 대목에서 金鍾泌 총재의 목소리는 거의 절규 수준으로 높아졌다) 「표」자를 한글로 써놓으면 무슨 소리인지 모르잖아요. 버스푠지, 기차푠지, 출사푠지 누가 알아. 쉬운 것만 찾으면 안돼. 컴퓨터가 발달되어 이제는 漢字를 써도 불편이 없어요. 우리말을 반신불수로 만들어놓고 말이야. 아이구 일찍 죽어버려야지』
 
 
  『오래 살라는 말은 욕이라 그랬어요』
 
 
  ―金총재께서 이런 말을 하시지 않았습니까, 나이 70을 넘으면 부끄럼도 두려움도 느끼지 않는다고.
 
  『그런 느낌이 있지요. 그런데 난 70을 넘은 게 두렵고 죄송스러울 뿐입니다. 내가 뭘했나. 70이 되고 보니 내가 69년 동안 뭘하고 살았는가 하는 후회밖에 없어요. 잘난 사람 많아서 내 같은 사람 꼼짝 못하지요』
 
  ―그래도 오래 사셔야죠.
 
  『오래 살라는 말은 욕이라 그랬어요. 다만 꼭 해놓고 싶은 게 있는데 잘 안되어서 용을 좀 써보고 싶다고 그러는데』
 
  ―형 되시는 金鍾珞씨가 우리 기자한테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朴대통령은 金총재한테 열등감 비슷한 걸 갖고 계셨다고요.
 
  『그런 거 없어요. 다만 초기와는 달리 중기 이후엔 신경을 쓸 만한 사람들을 주위에 두는 것을 싫어하셨어요. 그래서 죽으라 하면 죽는 시늉을 하는 車智澈 같은 이를 중용하셨지만 콤플렉스 같은 걸 느끼실 분이 아니세요』
 
  ―朴대통령의 모습을 보면 1960년대의 모습이 훨씬 소탈하고 당당하고 좋은 것 같습니다.
 
  『1960년대는 차-암 잡념이 없으셨어요. 나라를 일으켜세우는 데 전력을 다하고 역사의 심판을 달게 받겠다는 생각으로 순수하셨어요. 1970년대 후반으로 가면서 달라졌어요. 그래서 권력을 10년 이상 잡지 말라는 게 5000년 동양 역사의 가르침이지, 權不十年(권불십년)이란 게 허튼 소리가 아니오. 그런데 朴대통령께서는 그래도 10년 지나니까 달라지셨다고 하지만 요즘에 저 뭣하는 사람들은 2년이면 달라지대, 이것도 갓뎀이여.
 
  세상을 망치건 개인을 망치건 사회를 망치건 국가를 망치건 민족을 망치건 그것은 과욕에서 와요. 공자께서도 70세가 되어서야 세상을 경우에 어긋나지 않고 지내겠다고 말씀하셨는데 난 75세가 되었는데 정말 욕심없어. 그러고 보니 과욕투성이야. 터무니없는 과욕들을 부려』
 
  金鍾泌 총재는 여기서 금년 초에 揮毫(휘호)로 쓴 「洋洋天讓 悠悠古今」이란 말을 꺼냈다.
 
  『이 참 도도하게 흐르는 끝이 없는 세상 섭리 속에서 요만한 게 왜 과욕을 부리는가 그걸 이야기한 것이야. 趙형은 그걸 몰라요? 이것 야단났네, 그러면 써드릴까』
 
 
  『어디 한 5년 가지고 세상을 내 것으로 만들려고 그래?』
 
 
  金총재가 백지 위에 만년필로 쓴 「洋洋天讓 悠悠古今」은 달필이었다.
 
  『이런 우주의 섭리 속에서 과욕을 부리지 말란 뜻이에요. 나 자신에 대한 계율도 되겠지만 권력을 가진 사람들보고 과욕 부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터무니없는 이야기지, 그야말로 갓뎀이지. 어디 한 5년 가지고 세상을 내 걸로 만들려고 그래. 어림도 없는 이야기지. 정치가란 건 별 하자 없이 국민을 편하게 모셔가는 일꾼이면 되는 거요. 國民에게 왜 고통을 주고 불안을 주고 하는 거야.
 
  국민들은 한결같이 어제보단 오늘이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나은 세상이기를 바라는 거요. 이게 바로 개혁정신이라구. 그래서 先賢들이 日日新 又日新이라고 했어. 이런 것도 욕심을 버리면 다 해석이 나와. 국민들이 그런 의지로 살아가기 때문에 세상은 개혁되고 변화 발전이 되는 거지, 정치하는 놈이 선두에서 고함친다고 되는 일이 아니에요. 정치하는 사람이 개뿔이고 뭐고 뭘 더 알아. 국민들이 훨씬 현명하다고.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을 만들기 위해 허리가 아프도록 노력하는 의지력, 이게 발전의 원동력이야. 그걸 안다면 국민들에게 부담주고 고통주면 안돼. 이게 그 소리야, 이게』
 
  ―일본 나카소네 前 수상 같은 분하고 만나서 대화하면 우리 정치인들하고 이야기하는 것보다도 더 마음이 통하시는 것 같던데 통하는 바탕이 뭡니까. 동양문화입니까.
 
  『나카소네 같은 사람은 禪을 해요. 아침에 일어나면 내가 잘못 생각한 일이 없는지 自問自答하면서 반성을 합니다. 나카소네는 일본의 현존하는 다른 정치인들이 따라가지 못하는 인물이야. 이런 사람은 책을 많이 읽고 연구도 많이 하고, 이런 사람과 이야기해보면 나를 포함해서 우리나라의 정치하는 사람들이 왜 공부 않나 하고 안타까워져요. 특히 기자들이 공부 안해. 공부 안하니 말귀를 못 알아듣고 그런 말귀 못 알아듣는 사람들이 쓴 기사를 근거로 논설을 써대니 그것 또 뭐야. 맞는 게 하나도 없어』
 
  金鍾泌 명예총재는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보수층의 불만과 걱정을 건드려 지지표로 동원하는 것을 자신의 선거전략으로 삼고 있다고 실토했다.
 
  『보수세력들은 걱정을 하면서 말도 별로 안해요. 행동도 안해요. 그러니 이상한 몇 사람만 있어도 그들에게 휘둘려져요. 그러나 어떤 여론조사에서도 60%가 입을 다물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돼. 이 사람들이 말하고 싶은 건 뭐요. 제발 좀 우리를 괴롭게 하지 마라. 우리 나름대로 지혜도 의지도 능력도 있고 갈 길을 안다, 그러니 제발 내버려다오. 누가 널보고 나를 끌어달라고 했느냐 말이야.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거요. 이걸 이번 선거에서 동원해야 해. 그래서 내가 한 마디 했더니 언론에서는 아, 내가 지역감정 선동한다고 말이야. 자, 이제 이야기 그만하고 갑시다, 하하』
 
 
  선동가 역할
 
 
  金鍾泌 총재는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나면서 『이번엔 싸울 거요』라고 혼잣말처럼 다짐했다. 지난해 8월 중순에 총리공관에서 만났을 때보다 金총재의 표정은 맑아보였고 목소리엔 훨씬 힘이 실렸다. 대통령을 모셔야 하는 총리직을 그만두고, 또 공동정부 탈퇴를 선언한 뒤여서 그런지 조심하지 않고 거침이 없었다.
 
  이 대화록을 읽어본 독자들은 느끼겠지만 金鍾泌 총리의 인생관과 생활철학, 그리고 정치소신은 생활 속에서 우러나오는 일견 평범한 것이고 그것은 우리 역사와 미풍양속에 뿌리박은 흐름이기도 하다. 溫故知新, 日日新 又日新 같은 말들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는 옛것과 기성세대를 거쳐 이어져오는 가치를 기초로 해야 진정한 개혁도 가능하다고 믿는 온건론자이다. 어떻게 보면 동양의 역사와 漢字문화를 교양의 토양으로 가진 마지막 世代의 마지막 정치인인 셈이다.
 
  그는 16代 총선의 성격을 기본적으로 좌파혁명이냐, 보수혁명이냐로 보고 있는 듯했다. 金鍾泌의 존재가치와 自民聯의 성패는 그의 말대로 침묵하는 다수의 보수층을 깨워 일으키고 그들의 애국심을 지지표로 동원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金鍾泌 총재는 이번 선거에서 그런 의미의 선동가 역할을 自任하고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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