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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속의 역사 | 세계 일주 여행 최린과 이정섭

—파리에서 만난 최린·나혜석 스캔들

글 :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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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류 화가 나혜석, 1927년 7월 만주와 시베리아 대륙을 횡단해 파리行… 조선 여성 최초의 세계 일주 기록
⊙ 천도교 지도자 최린과 佛유학생 출신의 《중외일보》 기자 이정섭, 1927년 8월 태평양과 美대륙 횡단해 파리行
⊙ 최린·이정섭, 미국에서 서재필·이승만 등과 만나
⊙ 최린·이정섭이 아일랜드 독립운동가 데 벌레라와 인터뷰한 것이 문제 되어 《중외일보》 筆禍 사건 발생
⊙ 최린과 동행하던 이정섭, 1927년 11월 돌연 혼자 귀국… 최린과 나혜석의 불륜 시작
⊙ “(이정섭은) 년전 장기 여행 중에도 엇던 애인의 관게로 해서 급속히 귀국하엿다는 풍문이 돌앗스니”
  최린(崔麟·1878~1950년·납북), 나혜석(羅蕙錫·1896~1948년), 이정섭(李晶燮·1895~1950년·납북) 세 사람은 일제 강점기 사회적 관심을 끌면서 화제를 뿌리고 다녔던 인물들이다. 최린은 천도교(天道敎) 지도자로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었으나 후에 친일(親日)로 변절하여 지탄(指彈)의 대상이 되었다. 나혜석은 시대를 앞서간 여성 화가였지만, 최린과의 스캔들이 알려진 뒤에는 불우한 말년을 보냈다. 이정섭은 파리에서 대학을 마친 《중외일보(中外日報)》의 인텔리 논설기자였다.
 
  나혜석과 최린의 불륜(不倫) 관계는 이정섭과 함께 세 사람이 파리에서 만났을 무렵에 은밀하게 벌어졌다. 하지만 나혜석은 귀국 후에 남편의 요구로 이혼했다가 6년 뒤 1934년, 최린을 상대로 위자료(慰藉料) 청구 소송을 제기, 세간의 주목을 불러일으켰다. 낭만의 도시로 알려진 파리. 쉽게 갈 수 없었던 그곳까지 세 사람은 어떤 경로로 가게 되었을까. 최린, 나혜석, 이정섭이 파리에서 만나게 된 경위를 추적해보기로 한다. 최린과 이정섭의 파리행(行)은 언론 역사의 한 부분이라는 의미도 있다.
 
 
  최린 - 민족대표에서 親日派로
 
  최린은 언론 역사를 연구하는 입장에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사장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연구의 대상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사 분야에서 특별한 연구가 거의 없는 실정이다. 그래서 최린이 어떤 인물인지 먼저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그의 행적을 살펴볼 수 있는 기본적인 자료는 그의 ‘전기(傳記)’이다.
 
  최린은 전기를 두 번 저술한 적이 있다. ‘자화상, 파란중첩 50년간’(《삼천리》 1929년 9월호)이 첫 번째이고, ‘자서전(약력)’(《한국사상》 제4집, 1962년)이 두 번째이다. 두 번째 전기는 《여암문집(如菴文集)》(여암최린선생문집편찬위원회, 1971년)에도 수록되어 있다. 3·1운동 재판 기록과 광복 이후 반민특위(反民特委) 공판 때의 진술 내용도 1차 자료의 가치를 지닌다고 평가할 수 있다.
 
  최린은 함경남도 함흥 출생으로 1904년 11월 대한제국 황실에서 선발한 국비(國費) 유학생으로 도쿄부립제일중학교(東京府立第一中學校)로 유학을 떠났다. 최남선(崔南善)도 같은 유학생 50명 가운데 한 명이었다. 1906년 9월에는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과에 입학하여 1909년 9월에 졸업했다. 귀국하여 1911년부터 보성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다가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투옥되면서 사퇴했다. 형무소에서 3년간 복역한 후에 천도교 중앙 종리원(宗理院) 등 장로(長老)로 천도교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佛유학생 출신의 논설기자 이정섭
 
이정섭이 파리 유학을 마치고 귀국함을 알리는 기사(《조선일보》 1926.7.18).
  이정섭은 1920년대에 7년 동안 프랑스로 나가 파리 소르본대학 문학부에서 학사 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중외일보》 논설기자가 되었다. 처음 그는 경제학을 공부하기 시작하여 경제학원론, 경제사상사 등을 파고들었다. 그러다 경제학은 사회학의 한 부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당시 프랑스는 타르드(Jean Gabriel Tarde·1843~1904년)와 뒤르켐(Emile Durkheim·1858~1917년) 같은 사회학의 세계적인 태두(泰斗)를 배출한 바로 직후였기에 사회학은 일종의 새로운 유행 학문이 되어 있었다.
 
  이정섭은 프랑스 사회학의 영향을 받아 경제사회학과 윤리사회학을 수강하였다. 하지만 사회학은 경제학에 비해 아직 학문적으로 과학화하지 못한 상태였기에 사회학자들 사이에서 학문적 방법론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이정섭은 과학적 방법론이 무엇인가를 탐구하기 위해 논리학 연구에 착수하여 이 영역에서 당시 유명하다는 책 대부분을 독파했다. 학문은 깊이 파고들수록 새로운 분야가 전개되기 마련이다. 논리학을 연구하다 보니 심리학의 한 분야라는 사실을 깨닫고 심리학 과목까지 수강하였다.
 
  연구가 깊어질수록 범위 또한 넓어지며 또 다른 분야가 나타났다. 그것은 철학이었다. 다시 철학개론과 철학사를 연구해보았는데, 순수철학은 너무 추상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후 독일의 자연철학(Naturphilosophie·과학철학)까지 섭렵하며 소르본대학을 마쳤다. 이 시기에 이정섭은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공산당선언》도 열심히 읽었다. 철학부 사회학과가 《공산당선언》을 교과서로 사용했기 때문이기도 했다(이정섭, ‘학해편린(學海片鱗), 맑쓰에 대한 일 의문’, 《중외일보》 1927년 4월 28일). 제일 경탄한 저자로는 베르그송(Henri Bergson)을 꼽았다(이정섭, ‘우리가 외국에서 보고 가장 경탄한 것, 새 조선 사람의 본밧고 십흔 일들, 내가 佛國에서 본 二大驚嘆’, 《별건곤》 1927년 7월, p.95). 그는 학업을 마치자 귀국 길에 올라 지중해, 인도양을 건너 일본 고베를 경유하여 부산에서 기차를 타고 1926년 7월 17일 서울역에 도착했다. 만 40일이 걸린 긴 여행이었다.
 
  일본·미국·독일에서 공부한 언론인은 더러 있지만, 프랑스에서 정식 학사 학위를 받은 사람은 이정섭이 처음이었다. 프랑스어·영어·일어를 구사하는 능력에 첨단의 사회학을 전공하여 학문적으로도 단연 주목을 받았다. 언론계 입문 후 논설 집필과 국제 문제 기자로 활동하며 지방 강연 등 폭넓은 행보를 전개하자 일본 경찰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조선 여성 최초의 세계 일주
 
  최린과 나혜석의 은밀한 스캔들이 벌어진 프랑스 파리는 예술과 낭만, 환상적인 이미지의 도시였다. 그곳은 아무나 갈 수 있는 도시가 아니었다. 더구나 여성의 신분으로 파리 여행은 꿈꾸는 것조차 어려운 시절이었다. 거기에 두 사람의 만남도 특이하고 극적이었다. 지구를 반대 방향으로 돌아 파리에서 만나는 운명의 일치였다. 최린과 이정섭은 1927년 8월 태평양을 건너 미(美) 대륙을 횡단하고 대서양을 넘어 유럽으로 가는 일정을 소화했다. 반대로 나혜석은 한 달 먼저인 1927년 7월 2일, 만주와 시베리아 대륙을 횡단하는 코스를 잡아 파리로 향했다. 나혜석의 세계 일주는 조선 여성 최초의 기록이었다. 영친왕(고종의 손자 이은)은 나혜석보다 한 해 먼저인 1926년 5월 23일, 요코하마에서 수행원들과 함께 유럽 여행을 떠나 11개월 동안 유럽 13개국을 방문했지만 세계 일주는 아니었다(김기철, ‘모던 경성, 영친왕의 유럽 호화여행, 그는 무엇을 보았을까’, 《조선일보》 2022년 7월 29일). 영친왕 이은은 군축회의가 진행 중인 제네바에서 인터라켄을 통과하는 도중에 나혜석-김우영 부부를 만나 만찬에 초대했다. 이은은 나혜석 부부를 두 차례 만났다(나혜석, 《조선 여성 첫 세계 일주기》, 가갸날, 2018년, pp.53~55).
 
  이정섭의 입장에서 세계를 한 바퀴 돌면서 현지에서 집필한 원고를 《중외일보》로 보내어 그 여행기를 연재한다는 기획은 좀처럼 얻기 어려운 행운이었다. 국내 언론사상 첫 시도였다는 보람도 느꼈을 터이다. 세계 일주 현지에서 송고한 여행기 ‘조선에서 조선으로’는 독자들의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최린과 이정섭
 
  《중외일보》는 이상협(李相協· 1893~1957년)이 창간한 신문으로 《조선일보》 《동아일보》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3대 민간지 중 하나였다.
 
  이상협은 《동아일보》 창간의 주역이었고, 《조선일보》로 가서 ‘혁신 조선일보’를 이끌다가 《중외일보》를 창간한 언론계의 거목(巨木)이었다. 《중외일보》는 최남선이 창간한 《시대일보》의 후신(後身)으로, 《시대일보》는 참신한 편집으로 인기가 있었지만 자본 부족으로 폐간 위기에 놓였고, 이를 이상협이 인수하여 새로 총독부의 허가를 받아 제호(題號)를 《중외일보》로 바꾸어 1926년 11월 15일에 창간했다. 이정섭은 이때 입사했다.
 
  이정섭은 세계 일주 여행기를 감당할 최적의 능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당시는 세계 일주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려운 시기로, 그 기행문을 현지에서 보내고 이를 신문에 연재한다는 사실은 대단한 관심과 호기심을 끌었다.
 

  최린과 이정섭은 보성학교 사제 관계이면서 함흥 동향 출신이었다. 정확히 밝히자면 이정섭은 본적이 함경북도 함주군(咸州郡)인데 함흥과 인접한 지역이어서 함흥 출신으로 알려졌다. 20세 때인 1915년 보성중학 제5회로 졸업했고, 자유당 시절 실력자였던 이기붕(李起鵬·전 국회의장)을 비롯하여 최승만(崔承萬·전 인하대 학장)이 같은 해 졸업한 동기생이다.
 
  이정섭은 보성중학 시절부터 외국 유학을 꿈꾸어 낮에는 학교에 다니고 저녁에는 YMCA에서 영어공부를 해 졸업 후 24세쯤 되었을 때는 영어신문 《서울프레스》를 읽을 수 있는 실력이 되었다(이정섭, ‘나의 佛國 유학시대’, 《신천지》 1950년 2월, pp.168~172).
 
  나이는 이정섭이 17세 아래였다. 그러나 이정섭은 《삼천리》 1931년 4월호에 쓴 글에서 최린을 ‘고우(故友)’로 불렀다(이정섭, ‘崔麟 코-쓰 비판, 최린씨의 방향’, 《삼천리》 1931년 4월, pp.54~55).
 
 
  이정섭의 세계 일주 출발
 
이정섭의 세계 일주 기행 예고 기사(《중외일보》 1927.7.2).
  《중외일보》는 이정섭이 출발하는 날인 7월 2일, 1면 중앙에 ‘본보 기자의 세계 일주’라는 제목의 사고(社告)를 실었다. “세계 일주의 사명을 맡은 기자는 금춘(今春) 중국혁명의 중심지대인 호한(滬漢, 상하이-한커우) 지방에 특파되어 투철한 관찰과 명쾌한 문장으로 독자 제위(諸位)의 갈채를 박(博, 크게 얻다)한 본보 논설기자 이정섭”이라고 소개했다. 이정섭을 국제문제 전문기자로 내세운 것이다. 이어서 “각 방면의 신흥세력과 약소민족에 대하야 시찰조사”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이정섭이 7월 2일 서울역을 출발하여 세계 일주의 여행길에 올랐을 때는 30여 명이 전송하러 나왔다. 《중외일보》는 7월 3일 자 사회면 중앙에 이정섭이 어제저녁 북미로 향했다는 기사를 실었다.
 
  민족운동의 구심점인 천도교의 지도자라는 상징성을 지닌 최린의 세계 일주는 개인적인 유람이 아니었다. 조선 민족의 진로를 모색하고 국제적인 안목에서 독립운동을 이끌 것이라는 기대감도 있어서 일반의 관심은 컸다.
 
  최린은 한 해 전 1926년 9월 9일 도쿄로 가서(최린, ‘자서전’, 《여암문집(如菴文集)》 하, 여암최린선생문집편찬위원회, 1971년, p.208) 도쿄제국대학 병원에서 위장병 치료를 받다가 완쾌되자 이정섭보다 21일 앞서 6월 11일 요코하마에서 출항하는 대양환(大洋丸)편으로 미국으로 떠났다. 1년 예정으로 유럽 여러 나라와 중국을 둘러본다는 계획이었다. “우리가 조선을 알려면 조선 안에서 보는 것보다 조선 바깥에서 조선을 보아야 할 것이요. 그리고 우리의 사정을 세계 여러 나라에 널리 알리겠다”는 것이 표면에 내세운 이유였지만, 내심 독립운동의 방향을 ‘자치운동’으로 전환하는 문제를 연구하려는 목적이라는 추측이 떠돌았다(이정섭, 위의 ‘崔麟 코-쓰 비판, 崔麟씨의 방향’).
 
  세계 일주를 떠나던 무렵 최린은 아직 친일로 변절하지는 않았다. 최린은 시카고 교민들의 환영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의 이번 여행에 대하여 세상에서는 이러고저러고 말이 많으나 나의 목적은 조선 안에 있어서 조선 전체를 볼 수 없기 때문에 조선을 떠나 해외를 보고 조선 전체를 보려 합니다. 이것이 조선 전체를 관찰하는 유일한 방법이외다.”(이정섭, ‘조선에서 조선으로’, 49, 1927년 12월 5일) 미국 본토 도착 전 하룻밤 머문 하와이에서는 이승만(李承晩)을 만나 내외정세에 관한 의견을 나누었다.
 
  이정섭의 기행문 ‘조선에서 조선으로’ 첫 회가 《중외일보》 1면에 실린 날은 서울에서 출발하고 한 달이 좀 넘은 1927년 8월 20일. 앞서 떠난 최린을 미국에서 만나기로 하고 뒤를 쫓아가면서 보낸 원고였다. 여행기 첫 회에서 4회까지는 아직 최린을 만나기 전 이정섭이 서울에서 도쿄로 가는 여정을 적었다.
 
  일본 경찰은 이정섭을 감시하면서 따라다녔다. 부산에서 일본으로 향하는 배 안에서는 물론, 고베-오사카-도쿄까지 릴레이식으로 감시 형사와 동행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정섭은 “아! 창피 막심이외다! 하몽(何夢, 《중외일보》 발행인 이상협의 호) 형, 우리는 어찌하여 이따위 미행과 감시를, 혐의를 받게 되었습니까”라고 탄식했다. 도쿄에서 미국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형사의 감시와 미행이 따라다녔다.
 
 
  ‘쟁쟁한 당대 논객’ 이정섭
 
‘세계 일주 기행, 조선에서 조선으로’ 제1회(《중외일보》 1927.8.20).
  이정섭은 요코하마에서 출항하는 배를 타고 미국으로 가서 최린과 합류하기로 하였다. 《중외일보》 지면이 온전히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기행문도 중간에 빠진 회가 더러 있다. 1927년 8월 20일에 시작된 제1회부터 이듬해 2월 27일에 중단될 때까지 연재된 91회 가운데 17회분이 누락되어 74회가 남아 있다.
 
  기행문은 가벼운 필치의 에세이 문체를 구사하다가 사회 비평 시각의 논평으로 이어지는 서술로 바뀌기도 하면서 연재를 이끌어나갔다. 첫 회에서 자신이 쓰는 기행문의 성격을 이렇게 말한다.
 
  〈나의 기행문에는 스스로 ‘나’에 대한 기사가 많게 됩니다. ‘나’라는 가운데는 개인적 나, 조선인적 나도 있고 신문기자적인 나, 철학적 사회학적 나도 있습니다. 세상이 나를 보는 것과 내가 세상을 보는 것을 솔직하게 표현할 뿐이외다. 이 점을 망각하면 나를 오해하시기 쉽습니다.〉
 
  이정섭을 처음 만나는 사람은 “교만하다, 아는 체한다”는 인상이었다(강우, ‘쟁쟁한 당대 논객의 풍모, 대담한 평론가 이정섭씨’, 《삼천리》 1932년 8월). 학문적으로도 누구 못지않게 다양한 지식을 축적했다는 자신감이 있었고, 장기간 프랑스에 머무르면서 유럽의 정치·문화를 경험했다는 자부심이 그런 인상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모자를 비뚜름하게 쓰고 다니는 모습도 대단히 건방져 보였을 것이다. 미국 희극배우 버스터 키튼(Buster Keaton)의 모자 쓴 모습이 연상되는 파격적인 외관이었다(‘조선에서 조선으로’ 첫 회, 1927년 8월 20일).
 
 
  최초의 여류 화가 나혜석의 파리행
 
  나혜석은 도쿄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하던 1921년경에 교토제국대학 출신 김우영(金雨英)과 결혼했다. 김우영은 만주 안동현(安東縣) 부영사(副領事)를 지내고 1934년 나혜석이 최린을 상대로 소송할 당시에는 변호사를 하고 있었다. 나혜석은 총독부 미술전람회에서 특선 6회, 도쿄미술전람회 1회, 파리의 일불(日佛)미술전람회에서도 입선되어 여류 미술가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나혜석은 최린-이정섭보다 한 달 먼저인 1927년 6월 19일 시댁이 있는 부산에서 출발하여 세계 일주 여행길에 올랐다. 6월 22일 서울역을 떠나 만주 펑톈(奉天)을 거쳐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일정이었다. 최린 일행이 일본에서 태평양을 건너 미국 서부에서 동부를 거쳐 대서양 너머 영국과 유럽을 일주하고 러시아, 중국을 통해 오는 일정과는 반대로 시베리아 대륙을 거쳐 유럽으로 갔다가 미국을 통해 오는 일정이었다(나혜석의 세계 일주 여행기는 다음 책에 수록되어 있다. 나혜석, 《조선여성 첫 세계 일주기》, 가갸날, 2018년).
 
  《조선일보》는 나혜석이 영국,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벨기에,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스페인, 덴마크, 노르웨이, 터키, 페르시아, 체코, 태국, 그리스, 미국을 1년 반 예정으로 여행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여류 화가 나혜석 여사의 세계 만유(漫遊). 불란서를 중심으로 동서양 각국의 그림을 시찰코저 내 22일 경성역 출발’이라는 《조선일보》 1927년 6월 21일 자 기사인데, 나혜석이 ‘아우’로 부르는 여기자 최은희가 썼을 것이다. 최은희는 나혜석이 서울역에서 떠나는 기차로 세계 여행의 길에 오르자 함께 타고 평양까지 갔다가 돌아올 정도로 친밀한 사이였다(나혜석, 《조선여성 첫 세계 일주기》, p.12).
 
  나혜석이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고 가는 도중 바이칼 호수를 지나면서 7월 9일 자로 최은희에게 보낸 편지 ‘나혜석씨 여중(旅中) 소식, 아오 추계(秋溪)에게’는 《조선일보》 7월 28일 자에 실렸는데 안동현과 하얼빈에서도 최은희(호 추계)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말이 나온다. 기사가 실린 때 나혜석은 이미 모스크바를 거쳐 폴란드로 갔다가 7월 19일 파리에 도착한 뒤였다.
 
 
  안창호 아들이 車로 관광 안내
 
  한 달 뒤에 요코하마에서 세계 일주 여행을 떠난 최린은 태평양을 건너는 데 20일이 걸려서(최린, ‘구미여행’, 《혜성》 1931년 4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날은 1927년 6월 27일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이정섭을 기다렸다. 49세였던 최린은 머리가 반백으로 거의 60대로 보인다고 《신한민보》는 보도했다. 기미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으로 투옥되었던 최린의 반백 흰머리는 관록을 더해주는 모습이었다. 이정섭은 7월 21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최린과 합류했다.
 
  11월 1일 자에 실린 기행문 제17회는 이정섭이 탄 배가 샌프란시스코에 닿은 7월 21일의 기록이다. 이날부터 이정섭은 먼저 와 있던 최린과 동행하면서 여행기를 송고했다. 처음에 밝힌 대로 개인이 보고 들은 경험의 에세이 형식 기행문과 함께 기자로서 취재한 기사 성격으로 연재를 이끌어나갔다.
 
  샌프란시스코 교포신문인 《신한민보》는 이정섭이 일어·영어·불어에 능통하고 독일어도 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소개했다. 샌프란시스코에 머무는 동안은 오클랜드에 사는 동포들이 환영회를 열어주었고(19회, 11월 3일), 안창호의 아들 필립(Philip Ahn, 必立)이 자동차로 관광 안내를 해주었다. 국민회(Korea National Association)를 방문하여 《신한민보》 편집자 백일규(白一圭)도 만났다(21회, 11월 5일).
 
  최린과 이정섭은 샌프란시스코에서 7월 27일에 기차를 타고 남쪽으로 12시간 거리인 ‘지상낙원’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했다(23회, 11월 7일). LA 거주 동포는 500여 명이었는데, 일본인은 1만여 명이나 되었다.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는 동포들도 있었지만 대개는 노동자들이었다.
 
  28일 아침에는 흥사단(興士團) 단원들과 만났다. 이날 저녁과 30일에는 동포들의 환영 만찬에 참석했다. 하지만 이들은 안창호(민족 심리통일과 산업장려)와 이승만(선전과 외교) 두 지도자를 지지하는 사람들로 심각하게 양분되어 있었다(25~27회, 11월 9~11일).
 
 
  서재필과의 만남
 
  대륙횡단 열차를 타고 중간 기착지 솔트레이크시티, 나이아가라 폭포 등을 둘러보고 동부로 가서 뉴욕과 워싱턴을 방문했다. 뉴욕에서는 《뉴욕타임스》 편집국과 논설실, 공무국을 둘러보았다(51회, 12월 8일). 뉴욕의 보성학교 교우회 8명은 8월 23일 최린 환영회를 열어주었는데, 그 가운데는 허정(許政·전 과도내각 수반), 이기붕, 김도연(金度演·초대 재무부 장관), 유태하(柳泰廈·전 주일공사)가 있었다.
 
  뉴저지에 있는 프린스턴대학을 둘러본 다음에는 윤치영의 안내로 필라델피아 교외의 자택에서 서재필을 만났다(최린, ‘서재필씨와 회견’, 〈자서전〉, pp.223~224). 이정섭은 서재필의 인상을 이렇게 묘사했다(55회, 12월 12일).
 
  “서재필 박사는 키는 커-다마하고 골격은 건장하며 행동은 매우 활발하야 능히 30 청년을 능가할 만합니다. 둥그스레하고 조금 검붉은 얼굴은 광대한 이마와 배합되어 선뜻 나타나는 무어가 보이며 두 쪽에 돌출한 관골은 고집성을 상징하는 것 같고 힘 있게 꼿꼿이 내려온 코에는 모험성이 보이며 조금 돌출한 듯한 넓은 입은 힘 있게 다물려 백절불굴의 결심과 분투욕을 표현합니다.”
 
  이정섭은 워싱턴에서 기행문 61회(12월 18일)까지 보낸 뒤 뉴욕을 거쳐 8월 3일 유럽으로 떠나는 배를 탔다. 기행문은 한 달 동안 중단되었다가 해가 바뀐 1928년 1월 21일 자 제63회부터 다시 게재되었다. 미국에서 대서양을 건너는 장면은 ‘대서양상에서’라는 부제(副題)로 시작된다. 제67회는 런던에서 마르크스의 묘를 참배하는 장면부터 3회에 걸쳐서 감회를 적을 정도로 마르크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제67~69회, 1928년 1월 26~28일).
 
 
  이정섭, 파리에서 돌연 최린보다 먼저 귀국
 
  이정섭은 여행을 떠나기 전인 4월 28일 자 《중외일보》 1면 칼럼 ‘학해편린’란에 ‘맑쓰에 대한 일 의문’이라는 글을 실은 적이 있었다. 수년 전만 해도 마르크스 신도가 아니면 시대의 낙오자라는 불미(不美)한 칭호를 얻게 되었다고 전제하면서 마르크스의 역사철학을 이해하려면 헤겔의 변증법 이론을 먼저 알아야 한다고 소개하고 공산화(共産化)된 사회 이후에는 어떤 정치제도가 들어설지 의문이라는 비판적 의문을 제기하였다.
 
  이정섭은 당시 우리나라에서 마르크스주의와 공산주의 철학을 가장 깊이 연구했던 언론인이었다. 독일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고 이정섭보다 2년 뒤 1928년 6월에 귀국한 김현준(金賢準)이 1930년 9월에 《근대 사회학》(광한서림)을 출간했다는 광고가 《중외일보》에 실려 있는데, 목차에 마르크스, 엥겔스 등 여러 사회학 사상가의 이름이 두루 올라 있지만, 필자는 그 책을 보지는 못했다.
 
  이정섭과 최린의 동행 여행은 영국·아일랜드를 돌아 파리에서 끝이 났다. 이정섭은 1927년 11월(이정섭의 회고 글에는 1928년 11월로 되어 있으나 착각이거나 오타일 것이다)에 파리에서 혼자 귀국길에 올랐다.
 
  최린과 나혜석의 불륜이 처음 있었던 날은 11월 20일이었다(《조선중앙일보》 1934년 9월 20일, 나혜석의 위자료 청구 기사). 이정섭의 경로는 독일, 폴란드, 러시아(모스크바)를 거쳐 일주일 동안 기차를 타고 만주, 그리고 서울로 오는 코스였다(이정섭, ‘莫斯科의 露西亞美人’(‘모스크바의 러시아 여인’-편집자 주), 《삼천리》 1931년 4월, p.68). 서울 도착은 이해 말이었고 서울 도착 무렵인 1927년 12월 18일에는 기행문 61회가 게재되었다.
 
  이정섭이 어째서 파리에서 최린보다 먼저 서울로 돌아왔는지 정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다. 그런데 약 5년 후 《삼천리》(1932년 8월호)에 실린 ‘쟁쟁한 당대 논객의 풍모, 대담한 평론가 이정섭씨’(강우)라는 글에서 먼저 귀국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 실마리 한 가닥을 찾을 수 있다. 강우는 이렇게 썼다.
 
  〈(이정섭은) 나이가 37~38세에 불과한 미남자다. 미남자인 그가 파리대학을 졸업하고 금의환국하자 조선 각 방면 여성들이 경쟁적으로 연애를 구하야 얼마 동안은 사랑의 무덤 속에 뭇칠번 하엿다 하며 년전 장기 여행 중에도 엇던 애인의 관게로 해서 급속히 귀국하엿다는 풍문이 돌앗스니 그 사실이 과연인지 안인지는 몰라도 그는 확실히 염복만흔 평론가인 동시에 삼미(三美)의 소유자[미남자에 미재(美才)와 미녀를 가진 이]라 하겟다.〉
 
  이정섭의 귀국의 이유는 “어떤 애인의 관계로 해서”라는 것인데, 서울에 있는 어떤 애인인지, 혹은 나혜석을 사이에 두고 최린과 갈등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대영제국의 붕괴인가’
 
총독부가 이정섭의 세계 일주 여행기를 삭제 처분한 이유를 기록한 비밀 문서(조선총독부 경무국, 《朝鮮に於ける出版物槪要》, 1929년 발행, p. 83).
  서울로 돌아온 이정섭은 해가 바뀐 1928년 1월 1일 자 문화면에 ‘독재적 민족운동을 제창함’이라는 글을 실었는데 완전히 삭제된 상태로 제목만 남아 있다. 경찰의 압수기록도 없으니 내용은 전혀 알 수 없다.
 
  이정섭은 독자들에게 귀국 사실을 공개하지 않은 채 1월 21일(63회)부터 연재를 계속했다. 제63회(1월 21일)와 64회(1월 24일)의 뉴욕에서 30여 명 동포의 환송을 받으며 떠난 머제스틱(Majestic)호는 아직 대서양에 떠 있는 상태였다. 67회(1월 26일)가 되어서야 영국에 도착하여 런던 마르크스의 묘지를 찾는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그런데 런던 기행문 제80회(2월 15일) 소제목 ‘영국민의 장래’(2)는 6단 박스 기사로 마지막 단은 삭제되어 깎인 상태로 흔적만 남아 있다. 다행히 검열 이전 온전한 지면이 보존되어 있어 삭제된 부분을 알 수 있다. 이날 1면 머리 사설 ‘신간회 창립 1주년 기념에 대하야’도 검열로 완전히 삭제되었는데, 이정섭의 기행문 가운데 삭제된 부분은 다음과 같다.
 
  〈대영제국의 붕괴인가
 
  이와 같이 대영제국의 각 자주적 단체가 행정상 입법상 외교상으로 거의 독립국가의 권한과 체재(體裁)를 가지게 되었으니 이것을 영제국의 붕괴로 볼까, 혹은 식민지의 이익과 편의를 도모하는 독립 권한의 부여이므로 이로써 영제국의 결속은 더 견고하여진 것으로 볼까 함에 대하여는 학자의 이론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만 이론이요 사실에 있어서는 자주단체의 권한이 확장되면 확장될수록 독립에 가까우며 각 자주적 단체가 독립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영제국의 결속은 해이(解弛)될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자주적 단체가 과거의 성적으로 장래에도 그 독립적 보조로 진행한다면 불원간 독립에 정절(正切)되어 결국 영제국의 붕괴를 볼 것이요 그리하야 일몰부지(日沒不知)의 대제국은 일몰을 알게 될 소도(小島) 왕국으로 변하지 않을까 합니다.〉
 
  영국의 식민지 자치제 허용 정책을 소개한 이정섭의 글은 조선을 발판으로 식민지를 넓혀 대제국을 구축하려 했던 일본으로서는 경계하지 않을 수 없는 기사였다. 조선에서도 자치제 요구가 이어질지 모른다는 우려가 있었을 것이다. 해가 지지 않는(日沒不知) 대영제국이 결국은 해가 지는 광경을 보는 작은 섬나라(小島) 왕국으로 변할 것이라는 이정섭의 예언은 오늘날 영국의 모습으로 잘 나타나 있다.
 
 
  아일랜드 독립운동가 벌레라와의 인터뷰
 
검열에 걸린 아일랜드 독립운동가 에이먼 데 벌레라 인터뷰 기사(《중외일보》 1928.2.21).
  검열을 담당하는 총독부 경무국 도서과(圖書課)는 영국과 아일랜드 기행문에 특별히 신경을 썼다. 2월 16일 자(81회) ‘영경(英京)을 떠나면서’는 전문(全文)을 삭제했고,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에서’라는 부제를 단 21일 자(86회)도 전면 삭제 처분했다. 총독부는 아일랜드(에이레)의 독립운동을 다룬 기사들을 특히 문제 삼았다.
 
  최린과 이정섭은 9월 20일 8시30분에 런던에서 출발하여 오후 2시 홀리헤드(Hollyhead)항에 도착하여 아일랜드의 더블린으로 건너갔다(최린, 〈자서전〉, p.237).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에서 정치가이자 독립운동가 에이먼 데 벌레라(Eamon de Valera·1882~ 1975년)와 만난 날은 9월 22일이었다(〈자서전〉, p.240). 그를 만난 장면은 해를 넘겨 1928년 2월 21일 자(제86회)에 실렸다.
 
  데 벌레라는 영국에 대항하여 아일랜드의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20세기 아일랜드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독립운동가였다. 아일랜드 임시정부 수반(1932~1948년), 아일랜드 자유국 대통령과 아일랜드 공화국 대통령을 역임했고 아일랜드 제헌의회 의장이었다. 1926년에는 피아나 페일(Fianna Fail·아일랜드공화당)을 창당했다.
 
 
  ‘자치에 만족 말고 최후 목적을 달하라’
 
삭제 처분에 대한 불만을 직설적으로 토로한 이정섭의 글(1928.2.26).
  이정섭은 최린과 함께 데 벌레라를 만나 “최린은 조선의 데 벌레라”라고 소개하였다. 데 벌레라와의 인터뷰는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최린이 “당신의 과거 민족운동을 벌인 경험 가운데 조선 민족의 장래를 위해 참고될 만한 것이 있으면 말해달라”고 청하자, 벌레라의 답변은 이랬다.
 
  “일 민족이 해방되어가는 과정상에는 필연적으로 자치당과 독립당의 2당으로 분열되는 법이외다. 결코 자치주의로 다러나지 말고 최후의 목적을 달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기행문 중간 제목은 ‘자치에 만족 말고 최후 목적을 달하라’였다. 총독부는 이 기행문의 전문 삭제를 명했기 때문에 《중외일보》는 조판했던 기사를 모두 깎아내고 발행하였다. 이튿날인 2월 22일 자에 게재된 기행문(제87회) 중간 제목 ‘애란 공화국 선언, 자치로부터 독립에로’라는 부분도 검열에서 삭제 처분이었다. 이어서 2월 25일 자(제88회)도 흔적이 남지 않을 정도로 완전 삭제였다. 이정섭은 26일 자 제89회 서두에 이런 글을 적어 검열에 대한 불만을 직설적으로 토로했다.
 
  〈영국 기행문 중 대영제국 장래에 대한 과학적 견해와 애란(아일랜드-편집자 주) 사정 서술은 혹은 삭제 혹은 압수의 비운에 처하야 오다가 지금 와서는 애란 기행문은 일절 본 지상에 발표 말라는 당국자의 최후 제재를 바덧습니다. 붓을 집어던지고 십흔 생각이 잇스나 그래서는 기행문의 자살행위가 됨니다. 다시 집필하려 합니다. 혹 독자가 필자의 답답한 가슴을 촌탁(忖度)하신다면!〉
 
 
  경찰의 《중외일보》 조사 후 연재 중단
 
전문 삭제된 《중외일보》 1928년 2월 25일 자 세계 일주 기행.
  89회(2월 26일)는 영국을 떠나 이정섭이 정들었던 파리 도착이다. 그러나 총독부가 이정섭의 공개적인 저항을 묵과할 리 없었다. 제90회가 실린 2월 27일 오전 10시30분,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차석검사 나가노(中野俊助)와 마쓰마에(松前謙助) 검사의 지휘 아래 종로경찰서 형사들이 자동차 두 대에 나누어 타고 《중외일보》로 들이닥쳤다.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소속 검사 다섯 명 가운데 두 명이 출동한 것은 사건을 매우 중대하게 취급하고 있음을 의미했다. 수사진은 《중외일보》 편집국과 주간 이상협(편집 겸 발행인), 논설반 기자 이정섭의 가택도 수색하여 원고 등을 압수했다. 이들은 이상협, 이정섭과 편집국장 민태원(閔泰瑗·1894~1934년)을 연행하여 오후 5시까지 조사한 후에 다시 소환하겠다면서 일단 돌려보냈다.
 
  검찰 수사는 아일랜드 독립운동 관련 부분이었다. 아일랜드의 독립 문제를 다루면서 은연중에 조선도 독립해야 한다고 비유했기 때문이었다(조선총독부 경무국, 《朝鮮に於ける出版物槪要》, 1929년, p. 83). 경찰의 강도 높은 수사를 받으면서 세계 일주 기행문은 3월 1일 자 제91회를 마지막으로 중단되었다. 이정섭과 이상협은 불구속 수사를 받다가 3월 4일에 기소되었다. 《중외일보》는 3월 1일 자 1면에 다음과 같은 사고를 게재하고 연재를 중단하였다.
 
  〈근고 본지에 련재 중이든 리정섭씨 집필의 세계 일주 기행은 당국의 기휘(忌諱)에 저촉되야 더 계속키 곤난한 사정에 봉착하얏슴으로 91회로써 중지하게 되엇기 자에 근고함. 중외일보사〉
 
 
  ‘妻權 침해에 의한 위자료’ 1만2000원
 
나혜석이 최린을 상대로 ‘처권(妻權) 침해에 의한 위자료’ 1만2000원을 청구한 소송에 대한 기사(《동아일보》 1934.9.20).
  이정섭이 떠난 뒤에도 최린은 약 한 달간 파리에 머물면서 천도교 발행 잡지 《별건곤》(1927년 12월호)에 근황을 알리는 짧은 글을 게재하였다. 파리를 떠난 날은 12월 8일, 오후 1시에 출발하여 벨기에 수도 브뤼셀에 도착한 시각은 5시15분이었다. 이튿날은 국가독립반제국주의국제연맹(세계약소민족회의)에 옵서버 자격으로 참가해 연설했다. 통역은 이정섭과 같은 때에 파리 유학생이었던 김법린(金法麟·1899~1964년. 초대 원자력원장, 동국대 총장 역임)이었다.
 
  최린은 이어 스위스, 스페인, 이태리, 오스트리아, 독일,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폴란드, 러시아와 중국을 거쳐 1928년 4월 1일 서울로 돌아왔다(‘다수인사 환영리 최린씨 재작 귀국’, 《동아일보》 1928년 4월 3일, ‘조선을 떠나서는 조선인은 무행복, 세계는 양대 세력의 대치, 세계 만유한 최린씨 담’, 《조선일보》 1928년 4월 3일). 배와 기차를 이용한 대장정이었다. 이처럼 여러 나라를 고루 둘러본 사람은 그때까지 조선에는 없었을 것이다. 이정섭과 《중외일보》 주간 이상협이 필화(筆禍)로 재판받고 있는 바로 그때였다.
 
  나혜석이 최린을 상대로 ‘처권(妻權) 침해에 의한 위자료’ 1만2000원 청구소송을 제기한 날은 1934년 9월 19일이었다. 최린이 파리와 독일 쾰른에서 나혜석과 벌였던 애정행각이 6년이 지난 뒤에 아름다운 로맨스가 아닌 불륜으로 만천하에 공개된 것이다. 4년 전인 1930년 11월 20일에는 남편 김우영으로부터 법적 이혼을 당한 상태였다.
 
  나혜석의 소송은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나혜석에게는 사회적 냉대와 지탄이 돌아왔다. 이 사건은 《동아일보》와 《조선중앙일보》가 크게 보도하였으나 총독부가 압수했다(‘여류 화가 나혜석(羅蕙錫)씨, 최린씨 상대 제소, 처권(妻權) 침해에 의한 위자료 1만2000원 청구’, 《동아일보》 1934년 9월 20일, ‘도교 신파 대도정(大道正) 최린씨 걸어 제소, 원고는 여류 화가 나혜석 여사, 정조유린, 위자료 청구’, 《조선중앙일보》 1934년 9월 20일, 《언문신문차압기사집록》, 조선총독부 경무국 도서과, 1937년 5월, pp.18~21). 두 신문이 최린과 나혜석의 불륜을 대서특필한 것은 그의 변절을 응징한다는 의미도 있었다.
 
 
  중추원 참의 최린
 
  나혜석은 소송과는 별도로 《삼천리》에 ‘이혼 고백장, 청구(靑邱)씨에게’라는 글을 2회 게재(1934년 8~9월호), 결혼 생활과 이혼에 이르게 된 경과를 상세히 서술했다. 소송에 앞서 나혜석은 남편이 자기를 다시 받아주도록 설득했고 중간에 소설가 이광수에게도 중재를 요청해보았으나 허사였다. 이혼 사실의 공개는 신여성이라도 결코 쉽지 않은 결단이었다.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글의 중간 제목 ‘C와 관계’의 부분에 파리에서 최린과 처음 만났으며 독일 쾰른에서도 만났던 사실을 밝히고 있다. 최린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은 소(訴) 취하 조건으로 수천원을 받았다는 설이 있다(《정월 나혜석전집》, 국학자료원, 2001년, p.748). 소송 관련 기사는 총독부가 삭제 처분을 내렸기 때문에 일제 강점기 언론사의 한 부분으로 남았다.
 
  최린은 소송당하기 직전인 1934년 4월 중추원 참의로 들어가면서 공개적인 친일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8월 30일 시중회(時中會)라는 단체를 조직하고 창립식을 거행하였다(‘최린씨를 중심한 신단체 時中會, 현재는 정치적 색채가 업스나 금후 동향이 주목처’, 《조선일보》 1934년 9월 2일).
 
  1938년 4월 15일 《경성일보》에서 《매일신보》가 분리하여 독립된 주식회사를 설립하면서 사장에 취임하여 3년간 재임했다(1938년 4월 15일~1941년 5월 31일). 부사장은 《중외일보》에 최린-이정섭의 세계 일주 기행을 연재했던 이상협이었다.
 
 
  《중외일보》 筆禍
 
  《중외일보》 필화는 조선인 발행 신문이 인도와 아일랜드의 독립운동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상황에서 총독부가 식민지 치하 약소국의 독립운동을 조선의 독립운동과 결부하는 기사를 싣지 못하도록 하였던 검열 기준에 저촉되어 일어난 사례였다. 이상협은 신문지법 위반, 이정섭은 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어 4월 4일에 열린 재판에서 이상협은 금고 4개월(발행인 책임 2개월, 편집인 책임 2개월), 이정섭은 징역 6개월의 판결이 났다. 6월 6일에 열린 2심도 동일한 판결이었다. 그러나 최종심인 고등법원은 이해 11월 1일 원심을 파기하고 이상협 벌금 200원, 이정섭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이정섭, 〈‘정치가 변절’과 ‘회견기’, 최근 10년간 필화, 舌禍史〉, 《삼천리》 1931년 4월, p.18).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이를 “관대한 언도”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총독부의 탄압은 끝나지 않았다. 같은 해 12월 6일에 《중외일보》에 정간(停刊)을 명했다. 문제 된 사설은 ‘직업화와 추화(醜化)’로 중국의 배일(排日)운동이 주제였다. 배일운동이 직업화되면 그 순수함을 잃고 사회적 손실도 크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도 중국의 배일이 “애국심의 발로”이며 “경의를 표할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사실 총독부는 이 사설 한 편만이 아니라 이정섭의 아일랜드 기행문을 비롯하여 전반적인 편집 태도에 불만이 누적되어 있다가 이 사설을 문제 삼아 정간을 명한 것이었다. 총독부는 《중외일보》가 《시대일보》를 인수하여 1926년 11월 15일에 창간한 이후 1928년 12월까지 2년 남짓한 짧은 기간에 행정처분 63회, 사법처분 1회의 처벌을 받았다고 말했다. 특히 문예란이나 사회시사 보도를 통해서 학생은 학교 내에서 투쟁을 쌓아 나가라고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그 논조는 총독의 시정을 비난·공격하고 세계 약소민족의 독립운동을 빙자하여 조선이 독립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풍자하고, 매사를 편견과 중상을 바탕으로 집필을 감행함으로써 멋모르는 민중으로 하여금 총독정치를 오해하게 하였다”고 정간 이유를 설명했다.
 
  총독부는 《중외일보》에 발행 정지를 명하는 동시에 편집 겸 발행인 이상협과 편집국장 민태원을 신문지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취조하여 1929년 1월 12일에 기소했다. 경성지방법원은 1월 31일 발행인 이상협에게 벌금 200원, 사설 집필자이자 편집국장인 민태원에게는 징역 3개월에 집행유예 3년 판결을 내렸다. 이상협은 판결에 승복했으나, 민태원은 공소(控訴·항소)했는데, 3월 27일 경성복심(覆審)법원은 민태원에게 원심대로 징역 3개월에 집행유예 3년 판결을 내렸다. 총독부는 조선의 독립운동을 연상시키는 보도를 극력 경계, 기사의 삭제, 정간과 같은 행정처분과 언론인을 구속 기소하는 등의 사법처분까지 병행하며 탄압했다.
 
  《중외일보》는 정간된 지 42일 만인 1929년 1월 18일 정간이 해제되었으나 2월 10일에 이르러서야 속간(續刊)했다. 1929년 9월 1일에는 이상협이 물러나고 안희제가 사장에 취임했는데 경영권을 둘러싼 분쟁과 재정난을 이겨내지 못하고 1930년 10월 자진 휴간하고 말았다. 그 후신으로 1931년 11월 27일 창간한 신문이 《중앙일보》(후일 《조선중앙일보》)였다.
 
 
  이정섭·최린·나혜석의 그 후
 
  이정섭은 1932년 6월 《조선일보》에 논설반 겸 정경부장으로 입사했으나 오래 근무하지는 않았고, 1938년 5월 1일 경성방송국에 입사하여 강연·강좌 부문을 담당하다가 제2방송부 보도과장(1941년 11월)이 되었다. 1943년 6월 조선어 방송 제2방송부가 폐지된 뒤 기획과장으로 재직 중에 해방을 맞았다.
 
  미군이 서울에 진주한 직후 9월 15일 경성방송국 한국인 직원들은 임원진을 선출했는데 이정섭은 회장에 선출되어 1948년 10월까지 재임했다. 1946년 8월에는 조선무선초급중학교를 고급중학으로 승격시키기 위한 후원회장을 맡았다. 이 학교는 현 광운대학교의 전신이다. 1947년 8월에 결성된 ‘국제정세연구회’의 사무를 방송협회에 두기로 한 것을 보면 이 조직을 이정섭이 실질적으로 운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6·25전쟁 후 이정섭은 7월 17일 돈암동 256의 12 자택에서 납북되었다. 그 이후의 소식은 알 길이 없다. 나이는 55세였다.
 
  최린은 1941년 6월 《매일신보》 사장에서 물러나 다시 중추원 참의가 되었다. 광복 후에는 반민특위에 기소되었다가 6·25 후 종로구 명륜동 3가 67-17 자택에서 납북되었다.
 
  나혜석은 1948년 사망했으며 정확한 날짜와 장소는 알려지지 않았다. 1970년대 이후부터 그의 글과 그림이 소개되었고, 기념사업회가 결성되었다. 2000년에는 수원시 인계동에 ‘나혜석거리’가 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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