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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음악

음악인이었던 정치가들 ① 프리드리히 대왕과 파데레프스키

글 : 정은주  음악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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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이센의 정복 군주 프리드리히 대왕, 바흐와 교유하면서 오페라, 협주곡, 행진곡 등 작곡
⊙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파데레프스키, 폴란드 독립운동에 앞장섰다가 初代 총리·외무장관 지내

정은주
서양 음악가들의 음악 외적 이야기를 발굴해 소개하는 음악칼럼니스트. 카카오페이지가 주최한 신인작가 프로젝트 ‘넥스트페이지’ 2기 지적 즐거움 부문 선정작가(2020)로, 네이버 및 각종 매체와 예술의전당, 세종문화회관 월간지 등에 칼럼을 기고 중이다. 《알아두면 쓸모 있는 클래식 잡학사전》 《발칙한 예술가들》(추명희·정은주 공저), 《나를 위한 예술가의 인생 수업》을 썼다. 온라인 클래스 플랫폼 ‘클래스101’에서 〈知테크도 재테크다〉를 발표했고, 부산MBC 〈안희성의 가정 음악실〉에 출연 중이다.

[들어가는 글]
클래식 음악을 사랑했던 역사 속 여섯 명의 정치가 이야기를 소개한다. 그들은 태어나고 자랐던 시대에 따라 프로이센의 군주였고, 폴란드의 초대 수상이었으며 영국의 총리였다. 동시에 작곡가였고 플루티스트였으며 또 피아니스트였다. 클래식 음악을 사랑했던 정치가들의 알아두면 쓸모 있는 정치 외적 이야기들을 소개한다.
  
독일의 礎石 닦은 ‘군사의 神’ 프리드리히 대왕
  - 어린 시절 쌓은 음악적 호기심, 군주 철학 발현하는 통로로

  18세기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를 만들어 중부 유럽을 제패하고 독일의 기초를 닦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Frederick the Great·1712~1786년)은 당대 최고의 음악가인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가 인정한 음악가였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왕세자와 그의 아내 하노버의 소피아 도로테아의 아들로 태어난 프리드리히 대왕은 어린 시절 음악 교육에 큰 흥미를 느끼며 성장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당시 모든 왕자처럼 어린 시절부터 왕실 소속 음악 교사에게 음악을 배웠다. 이후 음악에 흥미를 느낀 그는 악기 연주 및 작곡에도 소질을 보였다. 사료(史料) 등을 통해 그에게 실제 음악적 재능이 있었는지 확인할 수 없어 아쉬울 뿐이다. 분명한 사실 중 하나는 그가 15대의 피아노포르테를 소유했고, 당대 최고의 음악가들을 후원했다는 기록이다. 물론 당시 왕실과 귀족들은 재정이 허락하는 한, 음악가들을 고용했다. 그들은 자신이 소속된 왕실과 가문의 관혼상제(冠婚喪祭) 음악을 작곡했고, 크고 작은 연주회에서 연주했다. 종종 가문의 후손을 위한 음악 교육을 맡기도 했다.
 
  한 나라의 왕으로 프리드리히 2세가 여러 음악가를 동시에 고용하고 또 후원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특히 음악가에 대한 예우와 여러 음악적 이벤트에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아마도 그가 가진 음악에 대한 열정이 특별했기에 그러했을 것이다. 그가 실제로 후원, 고용했던 음악가는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셋째 아들이자 ‘함부르크의 바흐’로 불리던 C.P.E 바흐(Carl Philipp Emanuel Bach·1714~1788년), 작곡가이자 테너 가수였던 카를 하인리히 그라운(Carl Heinrich Graun·1704~1759년), 프리드리히 대왕을 위해 평생 일했던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인 프란츠 벤다(Franz Benda·1709~1786년) 등이 있다.
 
 
  오페라를 통해 국민 계몽
 
화가 아돌프 멘젤 작 〈상수시의 플루트 연주회〉(1852년). 이 작품은 1747년 포츠담의 상수시 궁전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이 플루트를 연주하는 모습을 담았다. 하프시코드 연주자는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셋째 아들인 C.P.E 바흐, 그림 속 맨 오른쪽은 왕의 플루트 교사인 요한 요아힘 크반츠, 바이올린 든 어두운 옷의 남자는 프란츠 벤다이다. 사진=위키피디아
  1747년 5월경 프리드리히 대왕은 프랑스어(語)로 ‘번민이 없다’는 뜻의 상수시 궁전에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를 초대했다. 당시 바흐의 셋째 아들인 C.P.E 바흐가 대왕의 궁정에서 음악가로 일하고 있었는데, 겸사겸사 음악 애호가인 대왕과 당대 최고의 음악가인 바흐가 만난 것이다. 이날 둘은 서로 깊은 교감을 나눴고, 라이프치히로 돌아간 바흐는 프리드리히 대왕이 즉석에서 지어낸 선율을 주제로 한 〈음악의 헌정(獻呈)〉을 작곡,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헌정했다. 재미있는 것은 프리드리히 대왕이 끝내 이 작품을 따로 듣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매일 2~4시간씩 음악을 연습했다는 프리드리히 대왕은 실제로 여러 편의 작품을 남겼다. 〈플루트와 콘티누오를 위한 소나타〉 〈플루트와 현을 위한 4개의 협주곡〉, 3곡의 〈군대 행진곡〉, 일곱 편의 아리아 등이다. 그중 〈호엔프라이드베르거 행진곡〉은 그가 2차 슐레지엔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작품이다. 그가 작곡한 음악들은 바로크 양식으로 구분하는데, 아리아, 레치타티보, 오페라 양식 등을 모방한 흔적도 보인다.
 

  또한 프리드리히 대왕은 음악, 문학, 철학이 함축되어 있다는 이유에서 오페라를 무척 중요하게 여겼다. 그는 기악 작품뿐만 아니라 오페라의 줄거리와 등장 인물의 대본 등도 썼다. 부분적으로 그가 참여한 오페라는 〈코리올라노〉 〈실라〉 〈몬테주마〉 등이 있다. 그는 계몽철학을 보급하는 데 오페라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없다고 판단했다. 특히 당시 프로이센을 지배하고 있던 미신(迷信)을 오페라를 통해 비난했다. 그는 무료 입장 제도를 통해 오페라를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자 했다.
 
  오늘날의 독일을 만드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던 프로이센. 그곳은 예술을 통해 세상을 이롭게 만들 수 있다 굳게 믿었던 프리드리히 대왕의 희망이 서린 나라였다. 음악과 철학에서 태어난 바른 삶의 가치가 선율과 함께 어우러져 보다 더 많은 사람, 그의 왕국에서 살았던 모든 이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왕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그 옛날 프리드리히 대왕이 닦아놓은 예술의 터전 덕분에 지금까지도 독일이 클래식 음악과 철학, 문학의 중심으로 기억되는 것은 아닐까.
 
 
 
폴란드의 초대 총리 파데레프스키
  - 오직 조국을 위해 음악과 정치 넘나들던 비르투오소

  1919년 폴란드 초대(初代) 총리이자 외무장관을 지낸 이그나치 얀 파데레프스키(Ignacy Jan Paderew-ski·1860~1941년). 그는 전형적인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동시에 전형적인 정치가로 살았다. 그의 인생에 정치가 들어간 사연은 그의 나라 사랑하는 순수한 마음에서 출발한다. 세계적인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로 활동했던 그는 120여 년 이상 자유를 잃고 외세의 지배 아래 있던 조국 폴란드를 위해 깊이 고민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유명세를 이용해 폴란드의 독립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까지 그가 세상과 소통하던 방식인 연주가 아닌 바로 말, 입 밖으로 쏟아내는 연설을 통해서다.
 
  그가 정치에 참여한 방법은 어렵지 않았다. 정치가들이 모이는 곳에서 마이크를 통해 폴란드의 억울함을 호소하면 되었다. 그는 연설 이외에도 모금 행사, 각종 회의에 참석했는데, 이러한 일들을 계기로 연주자의 활동을 중단하고 그는 정치에 입문했다.
 
  1919년 폴란드가 120여 년 만에 독립을 회복한 후, 그는 약 10개월간 총리로 재임하면서 신생 조국의 기틀을 닦았다. 총리 퇴임 이후에도 2년 정도 더 정치 활동을 이어갔다. 이 시기에 그는 제1차 세계대전 종전을 마무리 지은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했다.
 
  당시 그가 어느 정도로 유명한 음악가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기록을 소개한다. 그가 출연하는 연주회는 약 2만 석의 청중이 입장할 수 있는 공연장임에도 앉을 자리가 없었고, 미국 연주 투어를 다닐 때는 개인용 기차를 빌려 타고 다녔다고 한다. 요즘으로 치면 BTS급 인기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얼굴이 널리 알려지고 사랑받던 피아니스트가 폴란드 사람으로 폴란드의 억울함을 호소하니, 누구라도 한 번 더 귀담아듣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정치가 시절에도 작곡에 힘써
 
폴란드의 초대 총리이자 외무장관을 지낸 이그나츠 얀 파데레프스키는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이기도 했다. 사진=위키피디아
  어린 시절부터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던 그는 1872년 열두 살의 나이에 폴란드 바르샤바 음악원에 피아노 전공으로 입학했다. 이후 독일로 자리를 옮겨 작곡의 여러 기술과 학문을 익혔다. 이에 만족하지 않고 그는 유럽 여러 곳에서 끊임없이 음악을 배웠다. 그러다 스트라스부르 음악원 교수로 임용되었다. 1887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피아니스트 정식 데뷔 무대를 열었는데, 이 무대를 시작으로 그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 첫걸음을 떼었다. 그의 연주회는 늘 만석이었고, 사랑받는 피아니스트의 삶을 살았다. 1909년에는 모교인 폴란드 바르샤바 음악원 원장이 되었다. 1913년에는 미국 투어 연주를 했다. 이러면서 그는 차곡차곡 명성을 쌓았다.
 
  그는 작곡에도 열심이었는데, 평생 70여 편의 기악, 성악 작품을 남겼다. 정치가로 활동하는 동안 피아니스트로 무대에 오르지 못한 대신, 작곡을 했던 것이다. 음악가로서 참 성실했다고 할 수 있다. 그중 오페라 〈만루〉는 미국 메트로폴리탄에서 135년 만에 처음으로 공연된 폴란드 작곡가의 작품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교향곡 B단조〉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 〈피아노 소품곡〉 〈폴로니아 교향곡〉 〈미뉴에트〉 등이 대표 작품이다.
 
 
  다시 조국을 위해 나서다
 
  파데레프스키는 약 10개월간의 임기와 이후 2년간의 정치 생활을 마친 후 다시 연주자로 복귀했다. 정치라는 어색한 세계에서 그가 얼마나 무대와 청중을 그리워했을까. 그의 간절한 바람대로 다시 피아니스트의 활동을 시작했고, 큰돈을 벌었다. 미국 맨해튼의 카네기홀에서 미국 데뷔 연주회를 시작으로 세계 곳곳을 누비며 청중을 만났다. 이렇게 모은 그의 재산은 미국, 폴란드, 유럽 등지에서 그의 이름을 따거나 혹은 기부된 형식의 장학금, 기부금, 재단기금 등으로 사용되었다. 시대의 큰 음악가 파데레프스키의 마음 덕분에 크고 작은 선물을 받은 예비 음악가들은 무척 행복했을 터이다.
 
  그러나 그의 조국 폴란드는 다시금 어려운 정세에 휘말렸다. 1939년 나치 독일과 소련의 침공을 받아 분할 점령당한 것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지내며 연주 활동 등을 이어가고 있던 그는 다시 마이크를 잡고 미국·캐나다를 포함한 세계 각국의 라디오 방송국을 통해 폴란드를 도와달라고 간절하게 호소했다.
 

  연주자로서의 활동도 접지 않았다. 그는 미국 투어 50주년을 기념해 꾸준히 연주회를 가졌다. 예전처럼 기금을 모으고 어려운 음악가와 소외 계층을 위한 자선 활동을 벌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1941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참 성실하게 또 부지런히 살았던 폴란드의 일등공신이자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파데레프스키. 그의 정치는 예술에서 우러나온 아름다운 터전에서 피어났다. 대부분 ‘폴란드’ 하면 쇼팽을 떠올리지만, 이제 우리는 쇼팽과 함께 그의 이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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