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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칙한 미술가들

스캔들로 보는 미술사 2 / 미켈란젤로와 비토리아

슬프게 살아갈 운명

글 : 추명희  작가  vinos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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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켈란젤로, 누가 ‘화가’라고 부르면 불같이 화를 내며 ‘조각가’로 불러달라고 요구
⊙ “미켈란젤로는 여성의 몸에 대한 해부학적 지식이 형편없다”(다빈치)
⊙ 60세쯤 되었을 때 40대 중반의 미망인 비토리아 콜론나와 만나 플라토닉 러브 나눠

추명희
《월간조선》 《톱클래스》 《더 트래블러》 기자로 일했다. 미술 작품 애호가로, 꾸준히 컬렉션을 모으고 있다. 서강대학교에서 문학사와 정치학사, 서강대학교 언론대학원에서 언론학 석사를 마쳤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1475~1564년)
  디즈니 영화 〈미녀와 야수〉는 진실한 사랑에 관한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야수의 몸으로 변해 성(城)에 갇힌 왕자가 오직 진심 하나로 미녀의 마음의 문을 열고 저주에서 풀려나는 해피엔딩이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준다. 그런데 실제 현실에서 운명의 저주에 걸린 야수들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거장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1475~1564년) 역시 예술이라는 성에 갇혀 평생을 야수처럼 고독하게 살았다. 누구보다 예리한 시선을 가진 그는 자신이 고독한 운명의 저주에 걸렸음을 일찌감치 알아챘다.
 
  유년기부터 나는
  어두운 황혼 속에서
  슬프게 살아갈 운명에 처했다
  세계는 장님이고
  오직 배신자에게만 충실하다
  그렇지만 미움도 명예도 경멸하는 나는
  홀로 조용히 나의 길을 걸어간다

  …
 
 
  못생기고 성질머리 더러운 여성 혐오자
 
  미켈란젤로는 조각가, 화가, 건축가이자 시인이었다. 그가 얼마나 괴팍한 인간이었는지 안다면 섬세하고 아름다운 그의 시(詩)들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단테를 좋아했고 시도 곧잘 썼으며 조각과 그림만큼이나 문학성이 뛰어난 뇌섹남이었다. 하지만 변덕스러운 기질이라고 말하기엔 부족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감정 기복의 소유자였는데, 요즘 같았으면 아마 분노조절장애 진단을 받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였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조롱의 대가이기도 했다. 특히 젊은 시절 동료 화가들의 데생 실력을 놀리는 데서 희열을 느끼는 ‘재수 없는 인간’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성격은 결국 그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주홍글씨를 남기는 화근이 되고 말았는데, 미켈란젤로의 초상화를 보면 코가 약간 찌그러진 채 중앙부에 혹 같은 것이 불쑥 솟아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이게 바로 동료 화가 피에트로 토리지아노의 성질을 건드렸다가 두들겨 맞아 코뼈가 부러져 생긴 훈장(?)이다.
 

  피에트로는 “어찌나 약을 올리는지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그의 코를 한 방 세게 쳤는데 코뼈와 연골조직이 비스킷처럼 부서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 친구는 나의 서명을 죽을 때까지 달고 다닐 것”이라며 무척 흡족(?)해했다고 한다. 어떤 기록에는 피에트로가 주먹이 아니라 대리석으로 내리쳤다는 얘기도 있다. 어쨌거나 피에트로의 말은 현실이 됐고 미켈란젤로는 평생 추남(醜男)의 꼬리표를 달고 살았다.
 
  인체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조각가가 정작 자신의 외모는 보기 흉하게 되고 말았으니 이 얼마나 가혹한 일인가. 게다가 자신의 경쟁 상대인 다빈치는 수려한 용모를 자랑하고 라파엘로는 우아한 분위기를 풍기며 팬들을 몰고 다니는데 말이다. 자존심 강한 미켈란젤로는 이때부터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싫어했고 특히 여자 앞에는 더더욱 나서려 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심지어 그가 여자를 싫어하고 여자의 나체(裸體)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소문까지 퍼졌다. 그리고 이것은 강력한 낙인이 되어 그가 오늘날까지도 중세(中世)의 성(性) 소수자 예술가 중 하나로 거론되는 데 일조하고 있다.
 
 
  〈다비드상〉
 
〈다비드(David)〉
다비드(다윗)는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인물로 적군의 거인 장수 골리앗을 돌팔매로 쓰러뜨린 소년 영웅. 1501년에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위원회의 위촉을 받아 시작했다. 당시 26세였던 미켈란젤로는 결이 거칠어 조각하기 어려웠던 4미터가 넘는 대리석을 이용하여 3년 만에 이 작품을 완성했다. 현재 피렌체의 아카데미아 미술관 내부에 전시되어 있다.
  〈다비드상〉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미켈란젤로가 여성보다는 남성의 신체적 아름다움을 선호하는 미적 취향을 가졌던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그가 피렌체 성당의 뜰에 놓여 있던 4m짜리 대리석으로 3년 만에 〈다비드상〉을 완성시켰을 때 피렌체 사람들은 그 완벽한 아름다움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한 번은 어떤 비평가가 괜한 트집을 잡아보고자 코가 너무 높다고 하자 웬일인지 그는 곧바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끌로 수리를 하고 내려왔다. 하지만 사실은 미리 호주머니에 넣어두었던 대리석 분말을 조금씩 아래로 떨어뜨려 수리하는 척만 한 것이었다. 그의 속임수를 상상도 못 한 비평가는 그제야 “당신의 작품에 생명이 생겼다”며 연신 “브라보!”를 외쳤다는 일화가 있다. 감히 그의 예술적 자존심을 건드리다니. 게다가 다른 부위도 아닌 하필 그가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코를!
 
  조각 〈밤〉을 비롯해 그의 대부분의 작품에서 여성은 남성의 뼈대와 튼실한 근육을 가진 모습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젖가슴 부분을 떼놓고 본다면 누가 봐도 남성의 몸으로 오해할 수밖에 없을 정도다. 다빈치가 “미켈란젤로는 여성의 몸에 대한 해부학적 지식이 형편없다”고 비난해도 할 말이 없긴 하다.
 
 
  ‘인류 최고의 예술품’
 
〈피에타(Pietà)〉
미켈란젤로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유일한 작품. 마리아가 두른 어깨띠에 그가 직접 ‘피렌체인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제작(MICHEL. AGELVS. BONAROTVS. FLORENT. FACIEBAT)’이라는 명문을 새겨 넣었다. 프랑스의 추기경 장 빌레르 드 라그롤라(Jean Bilheres de Lagraulas)의 주문으로 1499년, 그의 나이 24세 때에 완성. 〈다비드상〉 〈모세상〉과 더불어 그의 3대 작품으로 꼽힌다.
  하지만 인류 최고의 예술품이라 손꼽히는 〈피에타(Pietà)〉를 보면 얘기가 또 다르다. 성모 마리아가 무릎 위에 그리스도의 시신을 올려 안고 있는 모습을 담은 〈피에타〉가 공개되자마자 로마 시내는 온통 이 작품 이야기로 들끓었다. 성모 마리아의 옷 주름부터 구불구불 흘러내리는 예수의 머리카락까지 질감(質感)의 묘사가 마치 살아 있는 형상을 보는 듯했기 때문이다. 당시 그의 나이 스물넷. 아직 명성을 얻기 전인지라 엉뚱한 인물이 칭송을 받거나 혹은 “인간이 아니라 팔이 셋 달린 괴물이 만들었다”는 소문마저 돌 정도였다. 이에 미켈란젤로는 밤에 남몰래 숨어 들어가 성모 마리아가 어깨에 두른 끈에 〈피렌체인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제작(MICHEL. AGELVS. BONAROTVS. FLORENT. FACIEBAT)〉이라는 글을 새겨 넣기에 이르렀다.
 
  그 후 미켈란젤로는 “이 놀라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어느 곳에도 이름 하나 새기지 않으셨는데, 나는 이 하찮은 작품을 만들고 부끄럽게도 내 이름을 새겼구나”라고 곧바로 후회했고 이후 그 어떤 작품에도 자신의 서명을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의 순수하고 독실한 신앙심이 아니라 〈피에타〉에 나타난 여성을 향한 시선이다. 이 작품에선 성모 마리아의 우아하고 아름다운 자태는 물론이고 세상을 다 끌어안을 듯한 포용력과 위대함까지 느껴진다. 단언컨대 그는 결코 여자에 무관심하거나 여자를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가가지 못하는 수줍음 속에서 경외했던 것은 아닐까.
 
 
  야수의 플라토닉 러브
 
  미켈란젤로가 여성을 사랑하고 존중했다는 것은 수많은 시와 편지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1535년경, 그가 60세 정도 됐을 때 어느 수도원의 뜰에서 비토리아 콜론나(Vittoria Colonna)라는 한 여성을 만나게 되었다. 40대 중반의 미망인으로 인생의 의미를 종교와 문학에서 찾고 있던 그녀는 당시 전국의 부인들에게서 사랑받는 유명 시인이었다. 몇 명의 남성에게 둘러싸여 담소를 나누고 있던 비토리아는 미켈란젤로가 나타나자 인사를 하기 위해 일어섰고, 그녀를 본 순간 그는 그 자리에서 돌처럼 굳어버렸다. 그가 익히 상상했던 검은 옷을 입은 불행한 미망인이 아니라 생기 넘치는 짙은 초록색의 눈과 발그레한 볼, 아름다운 미소를 지닌 매혹적인 여성이 눈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훗날 미켈란젤로는 그 순간 그녀의 간소한 옷 밑에 감춰진 성숙한 육체를 떠올렸다고 고백하였다.
 
  두 사람은 곧 깊은 우정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고 비토리아에 대한 그의 마음은 플라토닉 러브 그 자체였다. 미켈란젤로는 그녀에게 종종 그림을 선물했고 그녀가 답례로 감사의 마음을 담아 시를 써 보내면 그 역시 답시(答詩)를 보냈다.
 
  아, 참으로 높은 이자를 탐했구나
  나는 교활한 도둑과 같았다.
  당신에게 서투른 그림을 선물하고
  그 대가로 나는,
  정말 아름다운 형상을
  마치 보시처럼 받았다.

 
  그가 ‘서투른 그림’이라고 자신의 작품을 낮춰서 표현한 것은 결코 겉치레 인사가 아니었다. 그는 항상 자기 작품에 불만족하는 대가(大家)였으니 말이다. 여하튼 비토리아를 향한 그의 순정은 그야말로 지고지순(至高至純) 그 자체였다. 1547년에 비토리아가 죽은 후 그는 한동안 실의에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는 그녀가 죽은 후에도 무려 17년이나 더 살아야 했고, 언제나 고독했던 그에게 그녀가 없는 삶은 어쩌면 형벌과도 같았을 것이다.
 
  “내가 그녀의 죽음을 지켜보아야 했다는 것과 그녀의 손에는 키스를 했지만 이마나 얼굴에는 키스를 해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생각할수록 내 마음을 괴롭힌다….”
 
  비토리아를 향한 그의 마음에서 사랑에 빠진 한 남자의 감출 수 없는 욕망이 느껴진다. 신(神)의 경지에 비견되는 실력을 가진 천재였던 그 역시도 사랑 앞에서는 한낱 미약한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아내는) 불구거나 박색만 아니면 된다”
 
  미켈란젤로는 열정적인 작품 활동과 금욕적(禁慾的)인 생활로 당대의 어떤 예술가보다도 부유해졌다. 하지만 머리에는 늘 돌가루를 묻히고 지저분한 작업복을 입고 다녔다. 작업에 몰두할 때는 심지어 잘 씻지도 않아서 지독한 악취를 풍겼다고 한다. 후사(後嗣)가 없었던 그는 상속인인 조카 리오나르도를 두고도 그가 떠벌리는 애정은 ‘이해타산’ 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며 잘 만나주지도 않았다. 그랬던 그가 비토리아와의 교감 때문인지 말년에는 상당히 누그러지고 온화해졌다고 한다. 1550년에 당시 서른한 살의 조카 리오나르도에게 보낸 편지에는 삼촌으로서 결혼에 대한 충고와 걱정이 담겨 있다.
 

  “리오나르도- 마르졸리니 치즈 열두 개 잘 받았다. 맛이 좋구나. 전에도 말했지만 내가 부탁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보내지 마라. 돈 드는 건 특히. 아내를 맞는 건 필수란다. 지참금에 까다롭게 굴진 말아라. 돈이 사람보다 위일 순 없는 법이니까. 네가 봐야 할 건 집안, 건강, 무엇보다도 착한 마음씨다. 외모에 관해서는 너도 어차피 피렌체 최고의 미남은 아니니까 지나치게 따질 필요 없고, 불구거나 박색만 아니면 된다. 결혼은 그게 다이지 싶다.”
 
  마치 봄 햇살 같은 따스함이 느껴지는 문장이다. 앞에서 말한 성질머리 더러운 고집불통 모태솔로 미켈란젤로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새로운 인물로 탈바꿈한 것만 같다.
 
 
  神이시여, 굽어살펴주옵소서
 
〈최후의 심판(Last Judgement)〉
로마 교황청 안의 시스티나 예배당(Sistine Chapel) 천장화. 167.14㎡의 면에 인간이 취할 수 있는 모든 모습을 한 총 391명의 인물상이 그려져 있다. 1533년 중순 교황 클레멘스 7세의 명으로 시작되었고 1534년 교황의 사망으로 일시 중지되었다가 이듬해 파울루스 3세가 다시 명령을 내려 1541년에 완성되었다. 한복판에 당당한 풍채를 자랑하는 그리스도가 있고 그리스도의 발아래 있는 노인이 손에 든 것은 미켈란젤로 자신의 초상이라고 알려져 있다.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에서 그리스도가 죽는 장면을 암시했다면, 미켈란젤로는 〈최후의 심판〉에서 그리스도의 강렬한 부활을 표현했다.
  미켈란젤로 하면 떠오르는 작품으로 〈최후의 심판〉을 빼놓을 수 없다. 시스티나 대성당의 천장에 그린 〈최후의 심판〉은 무려 6년여에 걸친 대작으로 예순을 넘긴 그가 천장 아래에 거대한 발판을 놓고 그 위에 올라선 채로 팔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려 작업을 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관절염과 신경통은 물론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감 안료 탓에 지독한 눈병까지 얻고 말았다.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그는 자신을 화가로 부를 때마다 노발대발하며 조각가로 부를 것을 강요했던 사람 치고는 정말이지 믿을 수 없을 만큼 훌륭한 작품을 완성했다.
 
  그는 죽기 엿새 전까지도 〈론다니니의 피에타〉를 망치로 두드려서 조각하다가 89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청년 시절 그의 출세작이었던 〈피에타〉는 추기경의 주문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이었지만 〈론다니니의 피에타〉는 오직 그 자신과 신(神)을 위해 한 성(聖)스러운 작업이었다.
 
〈론다니니의 피에타(Pietà Rondanini)〉
미켈란젤로의 마지막 작품. 높이 1.95m. 그가 죽기 직전까지 작업을 계속했지만 끝내 미완성으로 남았다. 마리아가 의자에 앉아 있는 좌상이 아닌 몸을 세운 입상 조각이다. 1564년 미켈란젤로 사망 후 예술품 수집가이던 마르키스 론다니니(Marquis Rondanini)에게 넘어갔다가 이후 밀라노로 팔려갔다. 1950년대 초까지 밀라노 스포르자성(Sforza Castle)에 보관돼 있던 것을 시 정부가 구입하면서 1956년부터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
  피에타는 이탈리아어로 슬픔, 비탄이라는 뜻으로 라틴어 ‘파이어티(Piety)’에서 따온 말이다. 라틴어 원래 뜻은 성스러운 상태나 신에 대한 경외감에서 출발했다. 기독교 미술에서는 그리스도의 시체를 무릎 위에 놓고 애도하는 마리아를 표현한 작품들을 〈피에타〉라고 명명하는데, 미켈란젤로는 특히 이 주제에 천착했다. 평생 자신을 따라다닌 절대고독과 영광에 대해 ‘신이시여 부디 굽어살펴주옵소서’라며 간절한 기도를 올린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어려서 일찍 어머니를 여읜 그가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갈구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병약한 어머니의 품 대신 시골에 있는 석수장이집 유모의 손에서 자란 그에게 돌 깨는 소리는 어머니의 자장가와도 같았을 터. 그런 그가 조각가가 되어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성모 마리아의 모성으로 구현하는 것은 어쩌면 숙명이었을지도 모른다.
 
 
  빗속의 미켈란젤로
 
  그는 죽기 전에 친구에게 “이제 나는 죽을 때가 된 것 같네. 왜냐하면 이제야말로 예술 속에서 태초(太初)의 울림을 연주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네”라는 감동적인 말을 남겼다. 피렌체에서 온 그의 옛 친구 하나는 그가 죽기 직전에 줄기차게 내리는 빗속을 마치 망령(亡靈)처럼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고 전했다. 마지막으로 피렌체 거리에 설치된 자신의 작품들을 만나러 다녔던 것일까?
 
  조각가를 천직(天職)으로 여겼던 그에게 있어 작품들은 인생 그 자체 어쩌면 자식(子息) 이상의 의미였을 것이다. 보통 사람들의 DNA는 종족 번식을 통해 영원히 이어지지만 그의 DNA는 그의 조각들 속에 아로새겨진 채 지금도 살아 숨 쉬는 것만 같다. 분명 인류 역사상 가장 섬세하고 우아한 DNA일 것이다.⊙
 
  - 필자의 공저(共著) 《발칙한 예술가들 - 스캔들로 보는 예술사》에서 발췌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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