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대한민국은 뜨거웠다. 1년 앞으로 다가왔던 88서울올림픽 때문도 아니었고, 지금과 같은 월드컵 열기 때문도 아니었다. 당시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구었던 것은 ‘호헌(護憲) 철폐!’와 ‘독재(獨裁) 타도!’ 구호였다. 그 구호는 서울에서, 부산에서, 광주에서, 전국 방방곡곡에서 전두환(全斗煥) 군사정권의 종식을 염원하는 국민들의 소망을 담고 외쳐졌다.
훗날 국민들은 그때의 열기를 ‘6월 항쟁’으로 명명했다.
<다시 쓰는 그날 그 거리>는 그때의 기록이다. 글이 아닌 사진기자의 렌즈에 잡힌 기록이다. 돌멩이가 날아들고, 최루탄 가스와 화염병이 난무했던 현장을 꿋꿋하게 지켰던 사진기자의 기록이다. 그 사진기자는 사진기자 사회에서 다음과 같은 전설(傳說)을 만들었다.
1987년 6월 26일, 이날 서울을 비롯 전국 37개 시군(市郡)에서 <6·26 민주헌법쟁취 국민평화대행진>이 열렸다. 부산에서도 평화대행진이 벌어졌다. 오후 6시 넘어 평화대행진 인파가 부산 문현동 로터리에 다다르자 경찰이 최루탄을 쏘며 행진을 저지했다. 이때 한 청년이 웃통을 벗어 던진 채 “최루탄을 쏘지 말라”며 경찰 쪽으로 달려나갔다. 5초도 안되는 짧은 시간이었다. 마침 웃통을 벗어 던진 청년 뒤에는 두 청년이 대형 태극기를 마주 잡은 채 들고 있었다. 그 장면은 당시 <한국일보> 사진기자였던 고명진의 카메라에 담겼다. 고명진 기자는 그 사진에 ‘아! 나의 조국’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하지만 그 사진은 자극적이라는 이유로 게재되지 않았다. 6개월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에야 <한국일보>에 작게 게재될 수 있었지만, 그 작게 실렸던 사진은 1999년 AP통신사가 선정한 ‘금세기 100대 사진’ 중 한 컷으로 등재됐다. 이 책에 담긴 나머지 93점의 보도사진도 그런 사진들이다. 지금도 <뉴시스> 사진영상국 국장으로 현장을 누비는 고명진은 이렇게 말한다.
“사진기자에게 사진은 대중을 향한 고해성사다. 얼마나 열심히 진정성을 가지고 현장에 임했는가를 한순간에 보여주기 때문이다.”⊙
훗날 국민들은 그때의 열기를 ‘6월 항쟁’으로 명명했다.
<다시 쓰는 그날 그 거리>는 그때의 기록이다. 글이 아닌 사진기자의 렌즈에 잡힌 기록이다. 돌멩이가 날아들고, 최루탄 가스와 화염병이 난무했던 현장을 꿋꿋하게 지켰던 사진기자의 기록이다. 그 사진기자는 사진기자 사회에서 다음과 같은 전설(傳說)을 만들었다.
1987년 6월 26일, 이날 서울을 비롯 전국 37개 시군(市郡)에서 <6·26 민주헌법쟁취 국민평화대행진>이 열렸다. 부산에서도 평화대행진이 벌어졌다. 오후 6시 넘어 평화대행진 인파가 부산 문현동 로터리에 다다르자 경찰이 최루탄을 쏘며 행진을 저지했다. 이때 한 청년이 웃통을 벗어 던진 채 “최루탄을 쏘지 말라”며 경찰 쪽으로 달려나갔다. 5초도 안되는 짧은 시간이었다. 마침 웃통을 벗어 던진 청년 뒤에는 두 청년이 대형 태극기를 마주 잡은 채 들고 있었다. 그 장면은 당시 <한국일보> 사진기자였던 고명진의 카메라에 담겼다. 고명진 기자는 그 사진에 ‘아! 나의 조국’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하지만 그 사진은 자극적이라는 이유로 게재되지 않았다. 6개월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에야 <한국일보>에 작게 게재될 수 있었지만, 그 작게 실렸던 사진은 1999년 AP통신사가 선정한 ‘금세기 100대 사진’ 중 한 컷으로 등재됐다. 이 책에 담긴 나머지 93점의 보도사진도 그런 사진들이다. 지금도 <뉴시스> 사진영상국 국장으로 현장을 누비는 고명진은 이렇게 말한다.
“사진기자에게 사진은 대중을 향한 고해성사다. 얼마나 열심히 진정성을 가지고 현장에 임했는가를 한순간에 보여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