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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마르크스주의자’였던 北 인권운동가, 오가와 하루히사 도쿄대 명예교수

“침묵하는 당신, 공범입니다”

글 : 김광주  월간조선 기자  kj961009@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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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의 ‘자주성’ 강조 사상에 깊은 감명… 김일성 신격화에 돌아서”(오가와 교수)
⊙ “탈북민들의 증언을 다룬 책들은 많습니다. 꼭 공부해주세요”
⊙ “1970년대 ‘北 인권’ 하면 ‘빨갱이’ 소리 들을 만큼 생소했던 개념”(김상헌 ‘북한인권 제3의 길’ 대표)
⊙ “군사 정권 당시 민주화 탄압에 앞장섰던 이들이 북한 공격하기 위한 도구로 北 인권 이용해 걸림돌”(김영자 북한인권시민연합 이사)
⊙ “북송 사업 참가 재일동포들이 김정은 상대로 낸 소송에서 이길 수 있었던 건 ‘증언’ 덕분”

小川晴久
1941년생. 일본 도쿄대학 동양학과 졸업 / 도쿄여자대학 조교수, 연세대 국학연구소 객원연구원, 도쿄대 교양학부 교수, 도쿄대 명예교수, 북조선 귀국자의 생명과 인권을 지키는 모임 대표, No Fence 대표 / 저서 《北朝鮮の人權問題にどう向きあうか(북한 인권 문제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北朝鮮いまだ存在する強制收容所(북한에 아직도 존재하는 강제 수용소》 등
사진=조의환
  “당신은 북한의 무서운 인권 유린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방금까지만 해도 서글서글한 미소를 짓고 있던 노인이 불같이 화를 냈다. 허리가 굽어 오래 앉아 있는 것도 버거워 보이던 그의 불호령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오가와 하루히사(小川晴久·84) 도쿄대 명예교수는 북한 강제 수용소를 경험한 이들의 수기(手記), 《대왕의 제전》 《수용소의 노래》 《평양의 어항》을 한 번이라도 읽어본 적 있느냐고 물었다. ‘없다’고 실토하자 통역의 말을 끊은 오가와 교수는 “아이고”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오가와 교수는 지난 5월 22일 북한 인권단체 사단법인 물망초(이사장 박선영)로부터 제3회 물망초인(人) 상을 받았다. 30년째 ‘북한 인권운동가’로 활동한 공로를 인정받아서다. 3일 뒤인 5월 25일, 오가와 교수가 일본으로 귀국하기 전날 밤 그가 머무는 호텔에서 만남을 가졌다.
 
 
  ‘북송 사업’ 지지했던 過去
 
  1959년 도쿄대학 동양학과 입학 당시만 해도 정치에 관심이 없었던 오가와 교수는 점차 마르크스주의자로 변해갔다. 그것도 모자라 ‘자주성’을 강조한 북한의 사상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공부도 많이 했다. 지금도 그는 공산당 관련 서적과 논문들의 이름과 내용, 발행 시기까지 정확하게 줄줄 꿰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패망한 일본에 남은 한국인들을 북한으로 돌려보내는 ‘재일(在日) 한국인 북송(北送) 사업’까지 지지하던 그였다.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제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 일본에선 ‘안보 조약 개정 반대 운동’이 굉장히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어요. 일본의 안보 조약은 소련과 중국을 ‘적’으로 전제하고 있는데, 왜 중국이 적대국인지를 알고 싶어서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아그네스 스메들리라는 미국인이 쓴 《위대한 길》을 읽으며 중국 근현대사를 처음 공부했고, 이를 통해 마르크스주의자가 됐습니다. 중국 공산당의 주더(朱德) 장군을 인터뷰하고 그의 일대기를 다룬 책이죠.”
 
  ― 책 한 권으로요?
 
  “안보 조약 반대 운동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동양학과에 많이들 진학했어요. 저는 지방에서 도쿄로 진학한 보통의 학생이었어요. 그런데 도쿄에서 나고 자란 대학 동급생들 중에 한 명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공산주의자로 활동했다고 해요. 그를 통해 도쿄는 지방보다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도가 높은 곳이라고 느꼈어요.”
 

  ― 젊었을 적 목격한 일본의 좌파 운동은 어떤 모습이었나요.
 
  “제가 직접 좌파 운동에 나섰던 사람은 아니기 때문에 이 질문에 답하기는 어려워요.”
 
  ― 그렇다면 북한 체제를 우호적으로 봤던 이유는 뭔가요.
 
  “저는 고등학생 시절부터 ‘서양 콤플렉스(complex)’가 있었어요. 뭐냐면, 아시아는 유럽보다 과학적·비판적 사고에 아주 약하다는 관념입니다. 그런데 1966년 북한 조선노동당이 〈자주성을 옹호하자〉라는 논문을 발표했어요. 이때 소련과 중국은 싸움을 시작했어요. 중소(中蘇) 논쟁이죠. 북한은 중국과 소련의 도움을 받아 존재하죠. 이 상황에서 ‘자주성’을 내세운 북한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어요. ‘공산주의자는 자신의 머리로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었죠. 지금 봐도 굉장히 좋은 내용이에요.”
 
  오가와 교수는 색안경을 끼는 법이 없었다. 좌파든 우파든 그가 생각하기에 논리에 맞는 말을 하는 쪽이라면 사회주의도 좇았다는 얘기다. 그렇기에 ‘북한식 사회주의’에 대한 환상이 깨진 시기도 그만큼 앞당겨졌다.
 
 
  “김일성 신격화에 돌아섰다”
 
2010년 8월 KBS를 통해 보도된 북한의 20대 ‘꽃제비’ 모습. 처참한 몰골의 이 여성은 굶주림에 결국 숨졌다고 한다. 사진=연합뉴스
  ― 북한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 계기가 있습니까.
 
  “북한은 1967년 5월 ‘김일성 신격화’를 시작했습니다. 1974년엔 〈당의 유일 사상 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이라는 문서를 냈어요. 이걸 보면 기분이 나빠질 정도로 김일성 신격화 선언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북한에 대한 견해가 달라졌죠.”
 
  오가와 교수는 북한 인권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계기를 꺼냈다. 정확한 날짜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1993년 8월 21일 도쿄에 있는 불고기 집에서 열린 ‘북조선 귀국자 모임’에 참가한 적이 있어요. 여기서 식당 여주인이 ‘북송선을 탄 아들 셋이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가 고생하다 한 명은 죽었다는 소식을 한참 뒤에야 들었다’고 말했어요. 또 다른 참석자는 ‘오빠가 정치범으로 체포돼 숨진 사실을 알고 나서 조총련에 2000만 엔을 바치고 올케를 구출했다’고 했어요. 그의 오빠는 북한의 대외(對外) 선전 방송 ‘평양방송’의 일본어 아나운서로 활동하던 재일동포였어요. 북송 사업을 지지했는데, 현실은 충격적이었어요. ‘지상 천국’이라는 북한으로 떠났던 북송자들의 일본 가족들로부터 들은 얘기도 다 비슷했어요. 그 식당에서 모임을 만든 사람은 박수남(朴壽南)씨입니다. 지금 90세가 넘었지만 살아 계세요.”
 
  이렇게 시작된 오가와 교수의 북한 인권 운동의 목표는 국제사회의 관심을 모으는 것이었다. 북한의 인권 침해 실태를 알리는 계간지 《생명과 인권》을 발행한 게 대표적이다. 오가와 교수는 1996년 가을 이 계간지에 ‘북송 사업 초기 2~3년 동안 건너간 사람들의 태반은 남한이 고향인 사람들’이라며 이런 글을 남겼다.
 
  〈(재일동포들이) 어째서 북한으로 건너갔는가 하면, 일본 생활에 대한 절망 때문이었다. 극심한 차별로 인해 일본에서 살아봤자 앞날에 아무런 희망이 없고, 그럴 바에는 사회주의 건설에 참가하는 게 보람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중략) 그러나 막상 북한으로 건너가 보니 또 다른 차별이 기다리고 있었다. 북한에서는 노동당원이 돼야 사람대접을 받는데, 귀국자가 노동당원이 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웠다. 자본주의 사회인 일본에서 오래 살았다고 해서 배제당한 것이다. 북한의 성분표에 따르면 귀국자는 51등급 중 32등급에 속한다.〉
 
  북송 사업은 1959년 12월에 시작돼 1984년까지 25년간 진행됐다. 그 수는 9만3000명. 그런데 북송 사업에 참여한 재일동포 대다수는 초반 2년에 몰려 있다. 당시 조총련(재일조선인총연합회)의 주장처럼 북한이 지상 낙원이 아니라, 오히려 일상생활조차 어려운 곳이라는 사실이 갖가지 경로를 통해 북한의 검열을 뚫고 일본까지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25년간 진행된 북송 사업의 절정기는 1959년부터 1961년까지 2년에 그쳤다. 이 시기에만 7만여 명의 재일동포가 북송선에 몸을 실었다. 얼마 안 가 귀국열(熱)은 식었다.
 
 
  생소했던 ‘北 인권’
 
  《생명과 인권》은 한국어, 영어, 일본어로 발행했다. 처음엔 영문판(版)으로 900부를 인쇄해 전 세계를 대상으로 돌렸다. 미국의 북한 인권 운동가 수잰 숄티는 이 계간지를 2000년 10월부터 미국 의회 관계자들에게 배포했다.
 
  이 밖에도 오가와 교수는 1993년 11월 7일 도쿄도 간다구에서 탈북민 증언 집회를 열고 이듬해 2월 20일 ‘북조선 귀국자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모임’을 출범시켰다. ‘북조선 귀국자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모임’은 1995년 12월 한국·미국·일본·독일 4개국이 서울에서 연 북한 인권 국제회의에 초청받기도 했다. 앞서 말했듯 오가와 교수가 이 단체를 만든 건 1994년 2월 20일이다. 한국 최초의 북한 인권 단체인 ‘사단법인 북한인권시민연합’이 설립된 시기는 1996년이다. 한국보다 2년 앞선 것이다. 두 단체는 1996년 5월 11일 도쿄대에서 협력 각서를 체결, 계간 《생명과 인권》을 공동 출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북한 인권 문제는 생소하기만 했다. 《생명과 인권》의 영어 번역을 맡았던 김상헌(93) ‘북한인권 제3의 길’ 대표가 오가와 교수와 동석했다. 김 대표는 “군사 독재 시절 대한민국은 인권 탄압을 하는 나라로 인식됐다”며 “그땐 북한 인권이라는 개념에 대해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옆에 있던 김영자 북한인권시민연합 이사는 “‘북한 인권’을 얘기하면 ‘빨갱이 아니냐’ ‘잡혀가는 거 아니냐’는 말을 들었을 정도였다”고 했다. 김상헌 대표는 “그때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은 적도 있다”며 “사무실로 나올 땐 등골이 서늘했다”고 덧붙였다.
 
  오가와 교수는 자신의 역할에 대해 “체험자의 증언을 모아 북한 인권 유린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책으로 만들고자 했다”며 “그것을 일본에선 일본어로, 그리고 세계를 대상으론 영어로 만들어 널리 알리고자 활동해왔다”고 설명했다. 다만 북한 인권 문제를 공론화하는 방식에 대해선 이들의 의견이 갈렸다.
 
 
  “국내 여론이 안 따라주니…”
 
왼쪽부터 김영자 북한인권시민연합 이사, 오가와 하루히사 도쿄대 명예교수, 김상헌 북한인권 제3의 길 대표가 《생명과 인권》을 들고 있다. 사진=월간조선
  김영자 이사는 “북한 인권 문제는 국내보단 국제사회에서 공론화시키는 게 중요하다”며 “처음 활동을 시작할 때도 외국을 상대로, 유엔을 타깃으로 해서 국제 회의도 연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국제사회에서 공론화가 되니 그제야 국내에서도 관련 단체들이 생겨났다. 유엔에서 북한인권결의안이 통과되고 특별보고관도 임명되고 북한인권조사위원회 및 관련 조사 보고서도 나온 데 이어 한국에 유엔 인권사무소가 설립되니 국내 여론도 움직이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제사회의 지지를 불씨로 국내 여론이 타오를 수 있다는 게 김 이사의 생각이다.
 
  반면 김상헌 대표는 “내 생각은 다르다”고 했다. 국내에서 북한 인권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국제사회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 시각이다. 듣고 보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와 같은 차이지만 결국 국내 여론을 쉽게 바꿀 수 없어서 나라 밖을 대상으로 호소했다는 얘기다. 김 대표는 한국이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낼 때 국제사회의 냉담한 반응을 느꼈다고 토로했다. 그의 얘기다.
 
  “한국에 있는 우리가 국제사회에 아무리 목소리를 내봤자 기대했던 것만큼 반응이 오질 않아요. 관심도 주지 않아요. 해외 기관이나 단체와 접촉해보면 ‘너희 잘 먹고 잘사는 한국에서도 (북한 인권 문제를) 가만히 두는데, 왜 우리가 총대를 메냐’는 정서가 느껴져요.”
 
  오가와 교수도 “그래서 침묵은 또 다른 죄를 짓는 것”이라며 “침묵은 공범”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북한 인권에 대한 기록물은 많으니 한국 사람들이 꼭 공부해주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국내에서 활동하는 이들은 국제사회에서 오해를 받기도 했다. 남북이 분단된 상황에서 이들이 ‘북한을 공격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한다’는 시선이었다. 김 이사와 김 대표도 ‘일정 부분은 사실이다’라고 했다.
 
 
  “민주화 탄압 인사들, 인권을 北 공격 수단으로 이용”
 
김상헌 북한인권 제3의 길 대표는 《타임지》 아시아판이 선정한 ‘2003년 아시아의 영웅’으로 뽑혔다. 당시 한국인으로는 유일했다. 사진=조선DB
  김영자 이사는 “반공(反共)주의자들도 북한 인권 운동을 했다”며 “1970년대 군사 정권에 부역하며 민주화 탄압에 앞장섰던 이들이 북한 인권을 운운하니 국제사회에서 용납될 수 없었던 것”이라고 했다. 그의 얘기다.
 
  “사실 미국의 인권 운동가 수잰 숄티 여사가 윤현(尹玄·1929~2019년) 전 북한인권시민연합 이사장에게 편지를 보낸 적이 있어요. 우리가 《생명과 인권》을 미국 의회에 전달해달라는 부탁을 하니까 수잰 숄티 여사가 윤 전 이사장에게 편지를 보내 ‘미국 의회에선 당신이 군사 정권 시절에 무엇을 했는지 반응을 보였다’고 전한 거죠. 기분이 나빴죠. 그래서 우리가 해온 활동을 소개했더니 나중에 서울에 방문한 수잰 숄티 여사가 ‘미안하다’고 말했어요.”
 
  ― 이런 반응이 나올 만했다고 봅니까.
 
  “국내에서 가장 처음 북한 인권 문제를 꺼냈던 이들 중엔 민주화 인사들을 고문한 사람도 있었어요. 군사 정권 때 잘 살던 사람들이었죠. 북한 체제를 공격하는 데 북한 인권을 도구로 삼았으니 지금까지도 그 부분이 발목을 잡고 있어요. 그런 의심을 받을 때마다 저희와 구성원의 활동들을 하나하나 설명하고 있죠.”
 
  김상헌 대표는 “지금까지도 국제사회에서 우리나라의 북한 인권 활동이 죽을 쑤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라고 토로했다. 북한인권시민연합은 중국을 수십 번 드나들며 탈북자를 구출하는 등 현장에서 뛰기 때문에 후원이 절실했다. 하지만 재정 지원을 받을 때도 이러한 해명을 해야 했다. 이들은 현재까지 1180명의 탈북민을 구출했고, 이 중엔 두 명의 국군 포로도 포함돼 있다고 밝혔다. 한국의 북한 인권 단체가 갖는 제약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정부의 무관심도 한몫했다. 김영자 이사가 2003년 있었던 일화를 소개했다.
 
 
  팩스까지 보낸 국군 포로, 관련 부처는 ‘뺑뺑이’
 
  “국군 포로 두 명이 북한에서 중국으로 탈출한 적이 있어요. 이 사람들은 한국으로 오려고 했죠. 그런데 도움을 받을 곳이 없으니까 이 사람들이 우리(북한인권시민연합) 팩스 번호로 연락을 해온 거예요. 자기의 이력을 상세히 적어서요. 어느 지역 출신이며, 군번이며 어떻게 끌려갔는지까지요. 그래서 우리는 그 팩스를 복사해서 공문의 형태로 ‘이 사람을 구해주세요’라고 통일부에 보냈어요. 그랬더니 통일부에선 ‘우리 담당이 아니다’라면서 국방부로 가라고 했어요. 그래서 국방부로 공문을 보냈지만 소식이 없었어요. 그래서 국방부에 전화했더니 ‘여기엔 이 문제를 다룰 수 있는 부서가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어요. 그래서 외교부로 갔어요. 그러느라 한 달이 지나갔어요. 이 사람은 중국에서 눈 빠지게 기다리며 얼마나 피 마르는 시간을 보냈겠어요.”
 
  ― 어떻게 구출했나요.
 
  “마침 윤현 이사장이 참석한 북한 관련 모임에서 윤영관(尹永寬) 당시 외교부 장관이 강연을 했어요. 강연이 끝나고 가진 좌담회에서 윤현 이사장이 윤영관 장관에게 ‘국군 포로가 이렇게 중국에 있는 상황이다, 이 사람을 도와야 하는데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이게 나라냐’라고 토로했어요. 그랬더니 윤영관 장관이 ‘그건 내가 책임지겠소’라고 대답했어요. 그렇게 어떤 루트를 통해 우리가 구출할 수 있게 됐어요.”
 

  ― 어떤 루트인가요.
 
  “그건 공개할 수 없습니다. 그 국군 포로들은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저에게 전화를 해서 ‘저희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국정원에서 조사 끝나면 찾아뵙겠습니다’라고 했어요. 그렇게 윤 장관에게 얘기한 것을 계기로 2003년부터 국군 포로를 데리고 올 수 있는 통로가 생겼어요.”
 
 
  “당사국이 관심 안 갖는데, 국제사회가 나서겠나”
 
재일동포를 북한으로 데려갈 북송선이 일본 니가타(新潟) 항구에 정박해 있다. 사진=조선DB
  국내 북한 인권 운동 방식에 대해 ‘적극적이지 않다’는 외부의 지적도 있다. 김영자 이사가 말을 이었다.
 
  “1998년 5월 1일 한국에서 강연을 연 적이 있는데 미국의 언론사인 《저널 오브 데모크라시(Journal of democracy)》의 래리 다이아몬드(Larry Diamond) 편집장이 왔어요. 그때 래리 편집장이 저희에게 ‘NGO(비정부 조직)가 이렇게 한가롭게 활동해서야 되겠느냐’고 하더군요. 저희는 이런 활동도 필요하다고 얘기했더니 래리 편집장은 ‘북한의 강제 수용소를 경험한 탈북민들의 증언을 듣고 싶다’고 말했어요. 즉시 래리 편집장이 묵고 있던 조선호텔 로비에서 강철환, 안혁, 이순옥, 이민복, 최동철씨 등 탈북민들을 만나 증언을 모았어요. 그래서 그때 사실상 처음으로 북한의 강제 수용소 문제가 미국에 제대로 알려지기 시작했죠.”
 
  1999년 12월엔 ‘북한 인권 난민 문제 국제회의’가 개최됐다. 이 행사는 서울, 일본 도쿄, 체코 프라하, 폴란드 바르샤바, 노르웨이 베르겐, 영국 채텀하우스, 캐나다 토론토, 호주 멜버른, 스위스 제네바, 독일 베를린,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등에서도 이어서 열렸다.
 
  이처럼 국제사회의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한 관심을 높이려면 국내에서 적극적인 노력에 나서야 한다고 북한 인권 운동가들은 입을 모은다. 하지만 한국은 지난 정부에서 유엔 북한인권결의안 공동제안에 4년 연속 불참했다. 박근혜 정부 때 설립한 법무부 북한인권기록보존소는 문재인 정부 때 용인에 있는 법무연수원 분원으로 옮겨져 쪽방 신세를 면치 못했다. 당시 북한인권기록보존소장을 지낸 최기식 전 검사는 2024년 《월간조선》 3월호 인터뷰에서 문재인 정부의 북한 인권 도외시 경향에 대해 “몸소 느꼈다”며 구체적인 사례들을 세세히 밝혔다. 나라 안팎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북한 인권 운동을 하는 이들로선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김영자 이사는 이에 대해 “정말 웃기는 일”이라며 허탈해했다. 오가와 교수도 당사국이 관심을 안 갖는 문제를 국제사회에서 신경 쓸 리 없다는 데 공감했다.
 
  오가와 교수는 나아가, 한국과 일본 가릴 것 없이 한일 양국이 ‘납북(拉北)’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당부했다. 그는 60년 전 북송선에 제 발로 오른 재일 한국인도 “납치된 것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증언의 힘’
 
  이와 관련해 지난해 일본에서 의미 있는 판결이 나왔다. 그해 10월 30일 도쿄고등재판소(고등법원)는 북송 사업으로 북한에 갔다가 탈출한 재일동포들이 김정은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원고 승소 취지의 판결을 내렸다. 어려운 소송을 이기게 한 건 재일동포들의 ‘증언’이었다. 앞서 이들은 북한 정부를 상대로 4억 엔 규모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북한은 재일동포들에게 ‘충분한 식량을 제공하고 주거와 일도 있다’며 북한을 ‘지상 낙원’이라고 속였고 이들이 북한으로 건너온 뒤엔 출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1심 판결을 내린 도쿄지방재판소(지방법원)는 2022년 3월 북한의 ‘이주 권유’ 행위와 ‘북한 내 유치’ 행위를 별개로 봤다. 따라서 북송 사업을 위해 속인 행위는 일본에 재판 관할권이 있지만 20년의 제척 기간이 지나 소멸했고, 북한에서 일어난 일들은 재판 관할권이 없다며 원고 패소 판결했다. 하지만 2심 재판부는 두 가지를 ‘하나의 행위’로 보고 “이 일체의 불법행위로 발생한 침해의 관할권은 일본 재판소에 있다”며 다시 심리하도록 도쿄지방재판소에 사건을 돌려보냈다. 북한에서 탈출하지 못한 재일동포들이 북한에 남아 있으므로 관할권도 인정됐다.
 
  김 이사는 “그만큼 북한 인권 문제는 증언밖에 입증할 수단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서 증언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 사건과 관련해 들은 증언을 전했다.
 
  “재일동포들 중엔 한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문서에 서명하고 ‘북한이 지상 낙원이다’라는 조총련의 말만 믿고 속아서 간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그걸 납치라고 봐요. 그렇게 납치된 사람들이 북한 청진항에 도착했는데, 냄새부터 이상하더래요. 찌든 냄새가 진동하고, 사람들은 못 먹어서 몰골이 말이 아니었고. 이상함을 느껴서 북송선에서 내리지 않고 발버둥 치고 버티니까 북한에선 이들을 정신병원이나 정치범 수용소에 가두기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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