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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44년 만에 퇴임한 ‘韓美동맹의 산증인’ 김영규 주한미군 공보관

“방송을 통해 한미동맹에 기여할 수 있는 일 계속할 계획”

글 : 오동룡  조선뉴스프레스 군사전문기자·취재기획위원  goms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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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한미군의 입’으로 44년… 주한미군·한미연합사·유엔사 공보관 등 ‘3개 모자’
⊙ 연합사 선정 ‘한미동맹에 기여한 영웅 10인’에 선정
⊙ 8·18 도끼 만행 사건, 판문점 성격에 큰 변화를 준 사건
⊙ 오청성 하사 귀순 장면 생중계하듯 보도 영상 제작… 출입기자들 질문 ‘제로’
⊙ “유엔사 역할 강화는 유엔의 한반도 유사시 지원 강화를 위한 것”
⊙ “군정위 회담 사라져… 한반도의 정전 상태는 상당히 위태”
⊙ 주한미군, ‘56번 하이웨이 사고의 교훈’으로 ‘굿네이버스’ 프로그램 만들어
평택 캠프험프리의 주한미군역사관에서 김영규 공보관. 사진=김영규
  “44년간 판문점을 찾은 횟수가 1500여 정도는 될 겁니다. 반세기 가까이 한미동맹과 남북분단의 현장을 언론인들과 함께 누빈 경험은 잊지 못할 겁니다. 미군 지휘부에는 한국 사회를 올바르게 인식시키고, 한국 사회에는 미군을 올바르게 인식시킨 ‘한미의 가교 역할’을 한 것을 큰 보람으로 느낍니다.”
 
  지난 11월 9일 빨간색 티셔츠에 재킷을 걸친 편안한 차림으로 약속 장소인 용산 삼각지의 한 카페에 나타난 김영규(金永圭·76) 주한미군 공보관은 “20년 전 오 기자와 인터뷰할 때는 ‘판문점의 산증인’이라 하더니, 요즘 언론에서는 나를 ‘한미동맹의 산증인’이라 한다. 20년 만에 격이 높아진 느낌”이라며 껄껄 웃었다. 김영규 공보관과 기자는 2003년 인터뷰 이후 20년 만의 ‘재상봉 인터뷰’인 셈이다.
 
지난 10월 20일, 평택 서부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한미동맹 70주년 기념음악회에서 김영규 공보관은 한미연합사령부가 뽑은 ‘한미동맹에 기여한 영웅 10인’에 선정돼 감사패를 받았다. 사진=김영규
  지난 10월 31일 퇴임한 김영규 공보관은 44년간 주한미군 사령관의 ‘눈’과 ‘귀’ 역할을 했다. 퇴임을 앞둔 지난 10월 20일, 평택 서부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한미동맹 70주년 기념음악회에서 김 공보관은 한미연합사령부가 지정한 ‘한미동맹에 기여한 영웅 10인’에 선정돼 안병석 한미연합사부사령관에게 감사패를 받았다.
 
  김 공보관이 감사패를 받을 때 대형 화면에는 ‘1976년 카투사로 시작해 47년간(카투사 기간 포함) 탁월한 능력과 책임감으로 한국군과 미군들, KSC(한국근무지원단)에게 모범을 보였다. 김영규 공보관의 헌신과 열정은 굳건한 한미동맹에 커다란 이정표가 될 것’이라는 자막이 떴다. 이날 행사에서 한미연합사령부는 백선엽(白善燁) 장군 등 한미동맹의 영웅 10인을 선정했고, 이 중 생존한 한미동맹의 영웅은 김영규 공보관과 한미연합정보단 스티븐 킨커 실장뿐이었다.
 
 
  “최남단에서 태어나 최북단에서 일한 사람”
 
1979년 카투사 전역과 함께 미 2사단 공보실 정식 직원으로 채용됐을 당시의 김영규 공보관.
  ‘한미동맹의 산증인’인 김영규 공보관은 스스로를 “최남단(제주)에서 태어나 최북단(판문점)에서 일한 사람”이라고 했다. 제주대 영문학과 교수였던 부친의 서재에서 원서를 뒤적이며 학창 시절을 보냈고, 연세대 사학과에 진학해서는 《TIME》 등을 섭렵하며 영어에 묻혀 살았다. 서울 유학 시절엔 《조선일보》 정치부장을 지낸 작은아버지 김인호(金寅昊) 전 전주제지 사장 댁에서 학교에 다니며 글쓰기에 관심을 가졌다.
 
  김영규 공보관은 30세이던 1976년 입대해 카투사(KATUSA·미군에 배속된 한국군)로 차출되면서 주한미군과 인연을 맺었다. 그는 동두천에 있는 미 2사단 공보실에 배속돼 2사단 기관지인 《인디언 헤드(Indian Heads)》 기자로 근무했다.
 
  그는 1979년 전역과 함께 미 2사단 공보실 정식 직원으로 채용됐고, 1985년 주한미군 공보관이 된 그는 이후 44년간 주한미군사령부와 한미연합사령부, 유엔군사령부의 공보관으로 내외신 기자들의 현장 취재를 지원해왔다. 국내 주요 뉴스를 정리해 영문으로 보고서를 만들어 사령관과 참모들에게 전달했고, 1989년 임수경(林琇卿) 밀입북 사건 등 유엔사와 관련된 남북 업무도 했다.
 
  김영규 공보관은 44년간 주한미군뿐 아니라 한미연합사·유엔사 공보관 등 3개 조직의 변화에 함께했다는 데 대한 자부심이 크다. 주한미군 공보관으로 주한미군의 역할 변화를, 유엔사령부 공보관으로 판문점을 통해 남북관계를 지켜볼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한국에 부임한 주한미군사령관은 통상 모자를 3개 쓴다”며 “처음엔 미8군 공보관도 겸해 4개의 모자를 쓰다가, 1991년 미 8군사령관이 떨어져 나가 새로이 중장으로 임명되는 바람에 그때부터 나도 주한미군사령관과 똑같이 3개의 모자를 쓰게 됐다”고 했다.
 
  — 세 가지 역할을 하려면 업무의 성격을 달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주한미군 공보관은 미국의 대북 정책을 잘 알아야 하고, 한미연합사 공보관은 한미관계를 잘 알아야 하고, 유엔사령부 공보관은 세계 정세를 잘 알아야 합니다. 각국의 움직임을 늘 머릿속에 담아야 하는데, 부정적 내용이라도 지휘부가 꼭 알아야 할 내용이라면 빠짐없이 올리는 사간원(司諫院)의 관리가 돼야 합니다.”
 
 
  도끼 만행 사건 후 JSA에 군사분계선 생겨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돌아오지 않는 다리 앞에서 무장한 북한군이 미루나무 절단 작업 중이던 미군을 도끼로 습격, 보니파스 미군 대위 등 2명을 살해했다. 사진=조선DB
  1976년 8월 18일 북한군의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당시, 김영규 공보관은 미 2사단 기관지 소속 카투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미 2사단 대원들이 북한군과 대치하며 판문점의 미루나무를 잘라 제거하는 ‘폴 버니언 작전’을 현장에서 지켜보고 기록으로 남겼다.
 
  당시 나무 하나 제거하는 작전에 B-52 폭격기와 항모전단 등 미군의 전략자산이 대거 동원됐다고 한다. 미군은 미루나무 제거를 이유로 북한군이 도발하면 전면전도 불사하겠다는 각오로 임했다고 김 공보관은 회고했다. 그는 “방탄복을 입고 헬기로 현장으로 가는데, 죽으러 가는 줄 알았다”며 “북한 측이 총 한 방이라도 쏜다면 미군 측이 그대로 진격한다고 했을 정도로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고 했다.
 
  —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에서 북한군의 도발로 충돌이 발생했으니, 공동경비는 물 건너갔겠군요.
 
  “판문점은 도끼 만행 사건 전과 후로 확연히 바뀌게 됩니다. 공동경비구역 내 군사분계선 아래 북한군 초소가 3개 있었고, 미루나무 사건이 발생한 ‘돌아오지 않는 다리’ 앞에 유엔군 초소가 하나 있었어요. 유엔군은 그곳을 비워놓았죠. 대신 언덕 위 체크포인트3에서 북한 초소를 감시했는데, 미루나무 가지 때문에 시야가 가렸던 거예요. 해서 유엔군과 KSC가 미루나무 가지를 자르러 갔는데 북한군이 시비를 걸면서 공격해왔던 겁니다. 그 이후로 공동경비구역 내 또한 서로 넘나들지 말자며 시멘트로 선을 긋게 됐던 겁니다. 그때부터 JSA는 100% 공동경비구역이 아닌 거지요.”
 

  — 2018년 4월 27일 북한 김정은이 문재인(文在寅) 대통령과 함께 북쪽 군사분계선을 넘은 적이 있지요.
 
  “문재인 대통령도 그때 넘어갔고, 2019년 6월 30일 트럼프 미 대통령도 북쪽 지역으로 넘어갔지요. 지금도 JSA의 캠프 보니파스를 방문하면 군사분계선에 해당하는 시멘트 장벽을 설치하는 영상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도끼 만행 사건은 판문점에 엄청난 변화를 준 사건입니다.”
 
 
  “지금 판문점은 회담 ‘제로’ 상태”
 
  김영규 공보관은 자신이 근무한 44년간의 판문점의 변화를 이렇게 요약했다.
 
  “군사정전위원회 회담으로 유엔군과 북한군·중국군 대표들이 모여 으르렁거렸던 ‘대결의 장소’였던 판문점은 1985년 남북이산가족이 상봉하고, 1998년 정주영(鄭周永)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500마리의 소떼를 몰고 판문점을 통과하면서 ‘교류의 장소’로 바뀝니다. 1990년 북한이 범민족대회를 판문점 북측에서 개최하면서 집회도 하고 예술제도 하는 ‘행사의 장소’로 탈바꿈했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체육회담·경제회담·국회회담이 성사되면서 활발한 ‘대화의 장소’로 변모하고요. 그러다 유엔사령부가 군사정전위원회 수석대표로 한국군 장성을 임명하자, 북한은 정전협정 일방 파기를 선언하고 판문점을 다시 ‘대결의 장소’로 만듭니다. 지금 판문점은 회담 ‘제로’ 상태입니다.”
 
  김 공보관은 군사분계선(MDL)이 판문점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바뀌는 것도 특이하다고 했다. “군사분계선 철조망이 판문점에 들어오면 1m 높이의 하얀 시멘트 기둥으로 바뀌고요, 군사정전위 회담장으로 들어가면 시멘트로 된 문지방으로, 회담 테이블 위에서는 마이크선으로 바뀝니다.”
 
  김영규 공보관은 내외신 기자들을 이끌고 남북 회담 등이 진행된 판문점을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김 공보관은 “1980년대 이전에는 판문점을 출입하는 정치부 기자들이 나의 파트너였었는데, 1990년대 들어서면서 미군 범죄·매향리사격장·노근리 사건 등으로 사회부 기자들이 파트너가 됐다”고 했다. 외신기자들이 오면 판문점 경비대대에서 군인 가이드가 따라 나서지만, 국내 기자들이 갈 때는 공보실에서 김영규 공보관이 직접 나서야 했다. 기자들에게 판문점의 정확한 ‘팩트’를 전달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기자들의 질문이 있으면 공보관으로서 유엔사의 공식 입장을 현장에서 즉각적으로 알려줘야 했기 때문이다.
 
 
  ‘북한 측하고 가장 많이 이야기한 사람’
 
판문점 군사정전위 회담이 열리고 있을 때 하늘색 기자 완장을 착용한 김영규 공보관이 북한 기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김영규
  — 1953년 정전협정 체결 이후 군사정전위원회 회담은 얼마나 열렸나요.
 
  “군정위는 본회의와 비서장 회의를 포함, 1000여 차례 열렸습니다. 제가 판문점을 드나들 때는 유엔사 공보관 자격으로 가는 것입니다. 군사정전위 회담이 열릴 때는 셀 수 없이 드나들었어요. 북한이 정전협정을 무력화시키는 바람에 군정위 회담도 없어졌고, 비상설 회담인 유엔사와 북한 간의 장성급 회담도 북한 측의 거부로 열리지 않습니다. 여하튼 1990년 기록을 보면 많을 때는 회담을 1년에 30여 차례 한 적도 있으니까요. 시간적으로 따지면 우리나라에서 북한 측하고 가장 많이 이야기한 사람인 셈이죠(웃음).”
 
  — 그렇게 많이 만났다면 군정위에서 굵직굵직한 합의사항들은 나왔나요.
 
  “그게 바로 판문점의 허와 실이에요. 군정위는 양측, 특히 북측의 정치선전장으로 전락했습니다. 본회담에서 합의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김 공보관은 “판문점 회담 취재를 지원하면서 《로동신문》 등 북한 기자도 많이 만났다. 만나서 이야기해보면 70년 이상 떨어져 살면서 남북한 사람들의 생각이 너무 달라져 다시 합친다는 게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안타까워했다.
 
  — 회담장에 가면 하루 종일 기자들이 취재하나요.
 
  “한 번 회담하면 두세 시간 걸리고, 그 시간 동안 《로동신문》 《인민일보》, 중앙통신 소속의 북한 고참 기자들과 주로 대화를 나누는 거죠. 1년에 60시간 이상 얘기하는 셈이었습니다.”
 
  — 북한 기자들과 사적으로 만나면 속 깊은 이야기를 합니까.
 
  “인사하고 날씨를 화제 삼다가 그날의 회담 이야기를 하고, 나중에는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해요. 예를 들어 1990년대에는 핵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많아요. 경제적으로 남조선이 잘살고, 강력한 미군이 주둔하고 있기 때문에 방어를 위해선 오로지 핵을 가져야 한다는 논리였어요.”
 
  — 대화에 금기도 있습니까.
 
  “국가원수에 대한 비방인데, 그런 이야기가 은연중 나오면 이야기가 깨집니다.”
 
 
  ‘남조선 기자단장’
 
1991년 2월 13일 군사정전위 본회의장에서 악수를 나누는 양측 대표. 1953년 휴전 이래 줄곧 대치로 일관해온 정전위에서 유엔 측 수석대표 제임스 레코드 공군소장이 내민 손을 북측 수석대표인 최의웅 소장이 어정쩡하게 앉은 채 굳은 표정으로 맞잡고 있다. 사진=조선DB
  — 처음 판문점에 출입했을 때 공보관님을 어떻게 알고 있던가요.
 
  “하늘색 기자 완장(PRESS)을 차고 들어가지만, 저는 유엔사 공보관이라고 제 신분을 밝혀요. 북측 기자들이 유엔사 공보관이라는 직책을 알지 못하니까 자기들이 ‘김 선생’이라고 부르면서 ‘남조선 기자단장’으로 여겼어요. 기자들을 인솔하고, 회담 때는 양측의 발언문을 받아서 양측 기자들에게 줬으니까요. 제가 정부 기관원도 아니고 언론사 기자도 아닌 신분이니까 좀 더 자유스럽게 저와 얘기하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김영규 공보관은 “여의치 않은 판문점 취재 여건 속에서도 우리 기자들이 질서 있게 잘 협조해준 게 항상 기억에 남는다”며 “당시 판문점 출입기자들은 서로 의리도 있었다”고 했다.
 
  — 취재 현장에서 의리라니요?
 
  “군사정전위원회 회담은 유엔사 측과 북한군·중공군 측이 각 5명씩 참석하는데, 6·25전쟁 때 휴전회담처럼 수석대표만 발언권이 있습니다. 물론 악수도 하지 않고요. 그래서 사진기자들은 양측이 악수하는 사진을 찍는 것이 꿈이에요. 1991년 군정위 회의(459차) 때인데, 유엔군 측 수석대표 제임스 레코드 공군소장이 북한 측 수석대표 최의웅 소장에게 악수를 건네니 최 소장이 얼떨결에 손을 잡았어요. 갑자기 벌어진 일이라 유리창에 붙어 있던 기자 한두 명만 촬영하고 나머지 기자들은 ‘물’을 먹은 겁니다. 난리가 났지요. 못 찍은 기자들이 회담 끝날 때 악수할지 모른다고 카메라를 대고 있었지만, 이날 ‘팀스피리트 훈련 즉각 중지하라’며 목소리를 높였던 북측 최 소장은 레코드 소장의 악수를 거부했습니다. 휴전 후 처음으로 악수를 나눈 이 역사적 사진을 사진기자들끼리 나눠 갖는 걸 보고 흐뭇했습니다.”
 
  — 회담장에 들어가서 취재할 수 없는데, 어떻게 취재를 하나요.
 
  “사진기자들은 창문을 통해 촬영하고, 펜 기자들은 T-2 중감위 회담장 건물 남측과 북측 의자에 앉아서 회담장 내부의 마이크를 통해 스피커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듣습니다. 나중에 보도자료도 받지요. 그런데 남측 기자들이 압도적으로 많아서 제비 뽑기를 해서 질서를 잡았어요. 우선 남측에 자리를 잡고 나머지는 북측 지역 의자로 가서 취재를 합니다. 기자들이 스스로 룰을 정해서 취재를 하는 게 너무 고마웠어요. 북한 기자들이 경쟁하는 건 딱 한 번 봤어요.”
 
 
  “중립국감독위원회도 유명무실”
 
1993년 한국에서 북으로 보낸 비전향장기수 이인모를 접견하는 김일성. 2014년 7월 16일 《로동신문》이 보도한 사진이다.
  — 딱히 특종도 없을 텐데 신기하네요.
 
  “6·25 때 북한군 종군기자로 내려왔던 비전향장기수 이인모(李仁模)씨를 1993년 3월 김영삼 정부에서 판문점을 통해 송환할 때였어요. T-1 중립국감독위원회 건물을 통해 나가서 북측 앰뷸런스로 이동하는 그 짧은 순간, 북한 기자들끼리 ‘비켜’ ‘죽여’라는 소리가 쏟아졌어요. 특종도 아닐 텐데 왜 그랬을까. 아마 이인모씨를 환영한다는 제스처를 남측에 의도적으로 보이려는 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판문점에는 중립국감독위원회(NNSC·중감위)도 존재한다. 중감위는 1953년 정전협정 준수사항을 감시·감독하기 위해 군사정전위원회와 함께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에 만들어진 상설군사기구다. 중감위 국가는 6·25전쟁에 파병하지 않은 국가 중 남북이 각각 2개국을 선정했다. 유엔군사령부에서는 스위스와 스웨덴을, 북측에서는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를 각각 선임해 1953년 8월 1일부터 활동을 시작했다.
 
  —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알려진 판문점 도보다리 앞 중감위는 현재 활동을 하고 있나요.
 
  “유엔사가 1991년 군정위 수석대표를 한국군 장성인 황원탁(黃源卓) 당시 소장으로 임명하자 북한은 반발해 중감위 불참을 통보했어요. 게다가 1994년 동구권 붕괴 과정에서 체코슬로바키아가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되면서 체코의 중감위 승계를 북한이 거절하면서 체코는 철수했고, 폴란드는 북한이 1995년 폴란드 캠프의 전기와 수도를 끊으면서 어쩔 수 없이 철수하게 됐습니다. 북측의 중감위는 현재 작동하지 않고 있고, 유엔사 측의 스웨덴과 스위스 대표단만 판문점에 상주하며 두 나라 대표들만 일주일에 한번 T-1에서 머리를 맞대고 있어요. 회의를 마치고 회의 결정사항을 문 앞 우편함에 넣어둬요. 찾아가지도 않지만요.”
 
  — 군정위 회담이 1990년 초에 사라졌는데, 휴전선에서의 분쟁은 어떻게 처리하나요.
 
  “회담이 사라졌으니 한반도의 정전 상태는 상당히 위태로운 거죠. 그러다가 2018년 4월 27일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사이에 ‘판문점 선언’이 나오면서 투어 개방 등 해결책을 찾는가 했는데, 결국 안내초소 설치 과정에서 북한이 유엔군 측의 초소 진입을 거부하는 바람에 깨져버리고 말았습니다. 판문점은 남북관계를 민감하게 반영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인 셈입니다.”
 
 
  ‘오청성 귀순 사건’ 생중계하듯 공개
 
유엔사 공보실은 오청성 귀순 사건을 생중계하듯 공개해 사건의 실상을 리얼하게 언론에 알렸다. 사진은 오청성씨가 2019년 5월 10일 TV조선 〈모란봉 클럽〉에 출연해 당시 상황을 설명하는 모습이다. 사진=조선DB
  김 공보관 재직 기간 판문점에선 콜 중위 헬기 추락 사건, 8·18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비무장지대 총격 사건 등 국제적 관심이 쏠리는 사건 등이 많이 터졌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으로는 1989년 임수경씨가 방북 후 판문점을 통해 남쪽으로 내려오던 모습을 꼽았다.
 
  “당시 임수경과 문규현(文奎鉉) 신부가 군사분계선에서 연설했습니다. 임수경은 정권에 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어요. 젊은이의 열정을 가지고 통일을 이뤄야 한다는 취지의 연설을 한 것으로 기억해요. 젊은이의 열정을 가지고 통일을 이야기하는 것이 제게는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 2017년 총상을 입은 채 귀순했던 북한군 오청성 하사의 귀순 사건도 있었지요?
 
  “처음엔 국방부 출입기자들을 상대로 짧게 영상을 공개하려다가 밤늦게까지 다시 제작했죠. 오청성이 차를 몰고 ‘72시간 다리’를 건너 판문점까지 접근하는 것부터 우리 군이 포복해서 오씨를 구하는 영상까지 생중계하듯 공개했어요. 발표할 때 국방부 출입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질 줄 알았는데, 질문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영상이 워낙 생생하다 보니 의문 가질 게 하나도 없었던 거죠. 오해와 거짓말이 퍼지는 것을 막았고, 잘한 공보 활동으로 평가받았습니다.”
 
  — 지난 7월 18일 판문점 견학(투어) 프로그램 중 미군 병사 트래비스 킹이 무단으로 군사분계선을 넘어 월북한 사건이 발생하면서 판문점 견학이 100일 이상 중단되고 있다고 합니다.
 
  “주한미군은 이런 사건이 터지면 ‘개인적 일탈’로 보고 공식 입장을 내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현재 미 2사단은 순환부대이기 때문에 미국 현지의 사단 본부에서 언급할 일이지, 주한미군에서 언급할 사안은 더더욱 아닙니다.”
 
 
  “주한미군은 보조 역할”
 
1990년대 무렵, 김영규 공보관이 기자들을 인솔하고 방탄복을 착용한 채 비무장지대에 멈춰 선 경의선 열차를 취재 지원하는 모습이다. 사진=김영규
  김영규 공보관은 한반도에서 미군 주도에서 국군 주도로 역할이 변경되고 있다고 했다. 그는 1990년대 평시 작전권이 주한미군에서 한국군으로 넘어갔고, 비무장지대(DMZ)에서 미군이 완전히 철수했으며, 군사정전위원회 수석대표가 미군에서 한국군으로 바뀐 것을 대표적인 사례로 꼽았다.
 
  — DMZ에서 미군이 완전 철수하면서 국군이 휴전선을 주도적으로 방어하고 있습니다.
 
  “JSA 경계부대인 캠프 보니파스에서 남방한계선을 따라 1km쯤 진행하면 길 옆 양쪽으로 초소가 나타나요. 콜리어(Collier·도로 왼쪽) 초소와 오울렛(Ouellette·도로 오른쪽) 초소인데요, 이곳이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하면 미군에 자동개입 명분을 주는 ‘인계철선(trip wire)’으로 알려졌지요. 그런데 이 두 초소(241초소, 240초소)가 1991년 10월 1일자로 국군 1사단과 유엔사 관할로 넘어갔습니다. 비무장지대의 경계가 완전히 한국군에 의해 이뤄지는 것을 의미하는 ‘사건’이었죠.”
 
  김 공보관은 “1990년대 전후로 주한미군의 역할이 크게 변했다”며 “1990년 전에는 주한미군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지만, 그 이후 여러 역할이 한국군 주도로 넘어갔고, 주한미군은 보조적 역할을 수행하게 됐다”고 했다. 김 공보관은 기자가 “해외 주둔 미군은 연합작전 때 외국군의 지휘를 받지 않는다는 미군의 ‘퍼싱 원칙’을 생각할 때, 미국은 전작권을 한국에 넘겨줄 의사가 없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내가 지켜본 바로는 분명히 전시작전권 전환 계획이 있다”며 “전작권 전환 이후 미래 연합사령부가 구성되면 한국군 장성이 사령관이 되고 미군이 부사령관을 맡는 구도로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했다.
 
  김 공보관은 “미군은 어떻게 하면 한반도 안보를 강력히 지켜낼 수 있냐에 초점을 맞춘다”며 “그 일환으로 추진하는 것이 유엔군사령부 재활성화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유엔사의 역할이 커져 최근 유엔사 전담 한국 공보관 자리가 따로 생겼다고도 했다.
 
 
  유엔사 재활성화 계획
 
  — 유엔사 재활성화는 한국군 장성이 미래연합사령관을 맡게 된 이후 미군이 계속 한국군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요. 전시에는 한미가 연합사 체제로 싸우고, 유엔사의 역할은 유사시 국제적 지원을 받아내는 것에 집중한다는 것이에요. 이런 점에서 연합사와 유엔사는 기능이 엄연히 다릅니다. 다시 말해 한미연합사는 유사시 싸우는 군대이고, 유엔사는 전력지원국을 중심으로 병력과 물자를 지원받는 역할을 활발히 하겠다는 겁니다.”
 
  김 공보관은 유엔사가 존재하는 것은 한반도가 아직도 엄연히 ‘정전 상태’라는 뜻이라고 했다. 6·25전쟁은 분명히 유엔군의 이름 아래 전쟁을 치렀고, 유엔군의 이름으로 정전협정을 체결했다. 1978년 이전까지 작전지휘권을 갖고 있던 유엔사가 1978년 한미연합사가 창설되면서 작전지휘권을 한미연합사령부로 이전하면서 유엔사의 ‘기능’이 작전지휘권과는 거리가 먼 비무장지대 관리와 정전협정 관련 업무만 하게 됐다는 설명이다.
 

  — 현재 참전국은 몇 나라나 한국에 남아 있습니까.
 
  “유엔사령부는 6·25전쟁 때 유엔 안보리가 대북 군사 제재와 통합사령부 설치 결의에 따라 창설한 군사기구로, 참전국 16개국과 의료지원국 5개국을 합쳐 21개국입니다. 현재 유엔사 참전국 대표단은 당시 병력과 물자를 제공한 18개국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대표단은 서울 용산구 동빙고동의 미군기지 내 유엔컴파운드(UNC)에 있다가 평택 캠프 험프리 기지로 옮겼습니다. 대표 중 대다수가 해당국 무관을 겸하고 있어요. 우리가 장성급 회담을 할 때도 한국·미국·영국 대표를 상임으로 하고, 교체대표로 프랑스·호주·뉴질랜드·태국을 임명해 참석시킵니다.”
 
 
  유엔사 후방사령부
 
  — 유엔사령부의 후방사령부(UNC Rear Command)는 일본에 위치하고 있지요?
 
  “물론 실제 병력은 아니고 스태프 요원들로 봐야지요. 유엔사령부도 15개국 병력이 아닌 ‘UNC 의장대’ 하나를 상징적으로 갖고 있습니다. 문재인 정부가 전력 제공을 하겠다는 덴마크의 요청을 무려 17차례 거절한 사실이 얼마 전 밝혀졌습니다. 이처럼 전임 정부에서 유엔사 전력 제공국 확대에 대해 불가 입장을 분명히 했던 것과 달리 윤석열 정부는 한미일 안보 협력을 강화하고 있어 일본의 유엔사 전력 제공국 참여까지 거론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일본은 유엔사 전력 제공 국가는 아니지만, 유엔사 후방기지 7곳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고 있어서 일본을 옵서버 자격으로 참가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습니다.”
 
  김영규 공보관은 “평택 캠프 험프리에서 회의를 갖는 유엔사 전력 제공국들의 숫자가 계속 늘고 있다”며 “참석자들이 과거 대사관의 무관이 아니라 해당국 현역 군인들이 참석하는 실질적 회의가 이뤄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유엔사 병력 제공국들의 국방장관급 회담이 올해 말 국방부 주관으로 서울에서 처음 개최되는 것은 의미가 크다”며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보듯, 미국을 포함해 연합전력의 지원에 따라 전세가 바뀐다”고 했다.
 
 
  ‘56번 하이웨이 사고의 교훈’
 
김영규 공보관은 포항시 북구 송라면 화진리 일원에서 대규모 연합 상륙·돌격훈련을 벌일 때마다 기자들과 함께 현장을 찾았다. 김영규 공보관이 UH-60 헬기에 올라 엄지를 들어 보이고 있다.
  기자가 2003년 1월 김영규 공보관을 인터뷰했을 때는 2002년 6월 13일 미군 장갑차에 의해 숨진 ‘효순·미선이 사건’으로 한미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을 때였다. 2003년 1월 설연휴 직전, 꽁꽁 얼어붙은 자유로를 달려 판문점으로 가는 길에 김 공보관으로부터 “미군들은 좋은 일 하고도 욕먹는 ‘바보짓’을 많이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이 말은 당시 기사의 제목이 됐다.
 
  — 그때 그 말을 한 이유는요?
 
  “우리 경제도 발전했고, 한미관계도 명실상부하게 동반자 관계에 들어섰잖아요. 그럼, 우리의 시각도 동반자적 관계로 출발해야죠. 미군들도 변해 우리를 동반자로 생각하고 있는데, 우리 스스로 1960~70년대 미군의 모습만을 보고 그들이 우리를 나무라고 얕잡아 본다고 생각한다면 시대착오적입니다.”
 
  — 얼마 전 미선양의 아버지 심수보씨가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미선이가 살아 돌아올까 봐 1년간은 대문도 못 잠갔다”는 인터뷰를 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주한미군사령부는 ‘효순·미선이 사건’을 ‘Highway 56 Incident Lesson(56번 국도 사고의 교훈)’이라면서 이 비극적 사건을 마음속 깊이 새기고 있습니다. 이 사고를 계기로 한국민들과 어울리고 상호 이해를 증진하는 ‘굿네이버스 프로그램’으로 발전시켰고요. 공보 담당자의 입장에서 보면 ‘효순·미선이 사건’으로 미군들이 한국 측과 ‘협의’를 하기 시작했다고 느꼈습니다. 한국에 부임하는 장교들마다 ‘하이웨이 레슨’에 대해 물어보았고, 저는 그때마다 상세하게 설명해주었습니다.”
 
  — 한미연합군사령부가 44년의 용산 시대를 마무리하고 지난해 11월 15일 평택으로의 이전을 완료했습니다. 평택에서 생활해보시니까 어떻습니까.
 
  “서울시민들에게는 녹지가 생겼고, 미군들은 90여 개 기지가 통폐합돼 한곳에 모이니까 업무효율이 높아서 좋아합니다.”
 
  — 2020년 로버트 에이브럼스 주한미군사령관은 “실탄 훈련을 하지 않는 것은 실전에서 부하들의 피를 부르는 일”이라고까지 말하면서 9·19 남북군사합의에 따라 훈련을 중단한 것에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군인은 훈련을 통해 강해집니다. 권투 선수가 연습하지 않고 어떻게 링에 오르겠습니까. 윤석열 정부 들어 한미연합훈련이 재개되고 있는 등 각종 훈련이 활성화돼 다행입니다. 그런데 주민들의 반발로 로드리게스 사격장이나 포항 수성사격장을 사용하지 못해 헬기 조종사들이 해외로 나가 훈련하는 등 비행 경력 관리에 애를 먹고 있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한국민은 너무 감정적”
 
  김영규 공보관은 외신기자들의 판문점 취재를 지원할 때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 ‘언제 통일이 될 것 같냐’는 질문이며, 그때마다 일관되게 “가까운 장래에는 안 될 것(not in the near future)”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김 공보관은 “주한미군지위협정(SOFA)과 관련한 오해가 제대로 해소되지 않은 점이 아쉽다”고 했다.
 
  “한국군도 외국에 파병되면 똑같이 주재국과 SOFA(주둔군지위협정)를 맺습니다. 몇 년 전 SOFA에 따라 형사재판권이 한국에서 미국으로 넘어간 100건의 미군 범죄 사건이 어떻게 처벌됐는지 정리해 보도 요청을 했는데, 어디서도 다루지 않았어요. 2002년 효순·미선이 사건 때도 초기부터 미 장병들이 촛불 집회를 열었는데, 《월간조선》에서만 보도해주었지 다른 언론들은 보도하지 않는 등 이러한 미군들의 노력은 거의 부각되지 않았습니다.”
 
  — 주한미군을 바라보는 우리 국민들의 잘못된 시각이 있나요.
 
  “한국민은 너무 감정적이에요. 민족의 자존심과 주권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어느 민족이 자존심을 잃고 주권을 빼앗기는 것을 좋아하겠습니까. 우리가 미군 문제를 해석할 때 잘못하는 점이 민족의 자존심과 주권만을 앞세워요. 그렇다고 민족의 자존심을 버리라는 것은 아니에요. 해석을 자존심에 맞추다 보면 본질이 왜곡되지요.”
 
  김영규 공보관은 며칠 전 고향 제주를 다녀왔다. 대북감청부대장 출신 한철용(韓哲鏞) 장군(예비역 육군소장) 등 고교 동창들이 모인 자리에서 “제주가 천국인데 왜 빨리 안 내려오냐”고 아우성들이라고 했다. 퇴임을 앞두고 진로를 고민하다가 은퇴 후에도 한미동맹의 발전을 위한 일을 할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그는 “주한미군의 활동을 소개하는 등 한미동맹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을 계속할 계획”이라며 “FAST(무료광고기반스트리밍서비스)에서 제 얼굴을 보실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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