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건축가 김중업 100주년

한국 건축을 세계와 연결시킨 모더니스트

글 : 이근미  객원기자  www.rootlee.com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 서울올림픽 평화의문, 주한프랑스대사관, 삼일빌딩, 유엔기념공원 정문 등 건축
⊙ 안양 유유제약 공장 건물 자리에 2014년 김중업건축박물관 개관
⊙ 세계적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 밑에서 3년 2개월간 공부
⊙ 우회적으로 서구 모더니즘 수입하던 한국 건축을 세계 건축의 흐름과 소통시켜
⊙ 와우아파트 붕괴 사건, 도심 고가도로 건설계획, 경기도 광주 대단지 조성 비판하다 8년간 망명
  기와지붕의 날렵한 곡선이 빛나는 주한프랑스대사관, 건축과 미술이 교차하는 서울올림픽 평화의문, 한국 전통 건축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유엔기념공원 정문, 날렵하고 아름다운 비례를 뽐내는 삼일빌딩, 지붕에 구멍을 뚫어 판타지적 느낌을 살린 진해 해군 공관, 모두 건축가 김중업(金重業·1922~1988년)이 설계한 건물이다.
 
  1922년에 태어나 탄생 100주년을 맞은 건축가 김중업을 기리기 위한 행사가 올 초부터 계속 이어지고 있다. 세상을 떠난 지 34년 된 건축가를 기리고 그의 건축을 재해석하는 열기가 뜨거운 이유는 무얼까.
 
  김중업은 세계적인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1887~ 1965년)로부터 배우고 1956년 귀국하여 우리나라에 모더니즘 건축 기법을 전수한 인물이다. 전쟁 직후 국가 재건에 힘을 기울이던 시절 김중업은 건설이 아닌 건축을 말하고, 폐허와 같던 이 땅에서 건축을 예술적 위치에 올려놓고자 시도했다. 귀국 첫해인 1956년 한 해에만 명보극장, 부산대학교 정문과 본관, 건국대학교 도서관, 이화여자대학교 도서관, 충무공기념관 등의 설계를 끝냈고 이듬해 중앙공보관에서 건축가로서는 최초로 건축작품전을 개최했다.
 

  김중업의 등장은 일본을 통해 우회적으로 서구 모더니즘을 수입하던 한국 건축을 세계 건축의 흐름과 직접 소통시켰다는 의의를 갖는다. 1920~30년대 모더니즘이 전 세계적으로 성행할 당시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였고, 광복 이후 6·25전쟁으로 인해 세계 현대 건축의 흐름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형편이 아니었다.
 
  김현섭(金顯燮) 고려대 건축학과 교수는 “김중업으로 인해 한국의 건축이 세계 건축의 왕성한 활동 현장을 목격하고, 일정 부분 거기서 역할을 했으며, 그 흐름을 국내로 가져오게 된 것”이라고 평했다.
 
  한국 1세대 건축가를 논할 때 박길룡(朴吉龍·1898~1943년)과 박동진(朴東鎭·1899~1980년)이 거론되지만 이들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교육받아 서구적 관점에서 볼 때 모더니스트로 불리기에는 한계가 있다. 건축계에서도 화신백화점(박길룡), 고려대학교 본관(박동진) 같은 대표작들이 전근대적 성격을 가진 데다 독립된 지식으로서의 건축가상을 가지지 못했다고 판단한다. 진정한 의미의 ‘현대 건축가 1세대’는 한국전쟁 이후에 본격적인 활동을 펼친 김중업으로부터 출발한다는 데 이견이 없다.
 
 
  일본과 프랑스에서 공부
 
귀국 1년 만인 1957년, 중앙공보관에서 김중업은 건축가로서는 최초로 건축작품전을 개최했다.
  연안 김씨 가문의 권세가 집안 아들 김중업은 1922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군수를 지낸 아버지 덕분에 유복한 유년기를 보내며 시와 그림에 소질을 보였다. 17세 때 일본의 요코하마고등공업학교 건축과에 입학하여 파리에서 공부한 나카무라 준페이 교수에게 사사하였고, 졸업 후 도쿄의 마쓰다 히라타 설계사무소에서 근대 건축을 접했다. 1944년에 귀국하여 조선주택영단,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 등에서 일하다 1947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의 전임교수가 되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많은 대학이 부산으로 피란을 갔고 김중업은 여러 대학에서 건축을 가르치며 문필가와 화가 등 다양한 문화계 인사들과 교류했다.
 
  1952년 9월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개최된 유네스코 주최 제1회 국제예술가대회에 한국 대표의 일원으로 참가한 김중업은 세계적인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와 마주하는 기회를 얻었다. “당신 사무실에서 일하고 싶다”고 요청하는 무명(無名)의 동양인에게 르 코르뷔지에는 “사무실로 찾아오라”고 답했다. 김중업은 프랑스 파리의 사무실로 직접 찾아갔고, 르 코르뷔지에는 의지가 남다른 청년을 아틀리에 직원으로 받아들였다.
 
  김중업은 1952년 10월부터 1955년 12월까지 3년 2개월 동안 르 코르뷔지에에게 배우면서 견문을 넓히기 위해 유럽 여러 지역을 답사했다.
 
 
  세계적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
 
  스위스 태생 프랑스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를 거론치 않고 현대 건축을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유럽과 미국은 물론이고 남미와 일본, 인도까지 전 세계에 그의 영향이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다. 르 코르뷔지에는 기존의 건축 관념을 깨고, 오늘날 현대 건축에 적용되는 많은 이론을 만들어낸 건축 이론의 선구자이다. 모든 집을 벽돌이나 돌로 쌓아서 짓던 시대에 혁명에 가까운 현대 건축의 5원칙, 즉 ‘필로티, 자유로운 파사드(입면), 자유로운 평면, 수평창, 옥상정원’을 창안했다. 방수시설이 발달하지 않은 시절에 1층을 주차장이나 휴식처로 사용하고, 옥상을 정원으로 가꾸며 휴식 장소로 활용하자는 발상을 한 것이다.
 
  르 코르뷔지에는 건축가뿐만 아니라 화가, 조각가, 시인, 이론가, 도시계획가로도 역량을 발휘하는 총체예술가였다. 김중업은 스승을 본받아 시를 쓰고 서적을 발간했으며, 건축과 도시에 관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공개하고, 한국 최초로 건축가 개인전을 개최했다. 조현정(曺賢禎) 카이스트 인문사회과학부 교수는 “이러한 활동을 통해 김중업은 예술가, 작가로서의 존재를 각인시킬 뿐 아니라 건축이 전문적이고 예술적인 분야라는 점을 홍보하고 계몽하는 역할을 했다”고 평했다.
 
  르 코르뷔지에 아틀리에에서 30대의 김중업은 60대 중반에 들어선 거장이 펼치는 세계적인 프로젝트에 투입되어 실전을 익혔다. 인도 샹디갈의 행정청사, 고등법원 태피스트리, 주지사관저, 의사당, 파리 국제대학촌 브라질관 등 12개의 설계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326개의 도면을 그렸다. 이러한 활동은 김중업이 르 코르뷔지에 프로젝트들의 발전과 정밀한 조정에 상당히 기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독창성 확보에 애쓰다
 
30년간 김중업건축연구소를 거쳐간 설계 담당만 50여 명. 스승을 뛰어넘으려고 발휘한 그들의 독창성이 한국 건축을 발전시켰다.
  김중업은 귀국 후 스승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건축을 찾기 위해 처절한 고투를 벌였다. 하지만 초기 작품 인천 해무청 계획안(1957)의 필로티, 서강대 본관(1958)에 적용한 모듈러, 제주대학교 본관(1964)의 ‘건축적 산책로’ 등에서 르 코르뷔지에의 영향이 드러났다. 이후 스승의 건축에 대한 직접적 차용이 점차 잦아들면서 은유적 조형성이 훨씬 부각되었다.
 
  김중업의 등장으로 수많은 건축가가 영향을 받았고, 그 과정에서 한국 건축의 기틀이 잡혔다. 30년간 운영한 김중업건축연구소를 거쳐간 설계 담당 직원만 50여 명에 이른다. 스승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건축을 추구했던 김중업처럼 그의 제자들도 각처로 뻗어나가 스승과 다른 독창성을 발휘하고자 애썼다. 1960년대 김중업건축연구소에서 근무했던 정길협 건축가는 “김중업 선생은 우리 초기 현대 건축 사회에서 유일 건축 군주였으며 그 절대자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한 전환점 마련을 위해 노력했다”고 밝혔다.
 
  세계적인 대 건축가의 가르침에서 자신만의 독창성을 확보하려 애쓴 김중업과 그에게서 벗어나고자 했던 제자들의 노력에 대해 김현섭 고려대 교수는 “예술가로서의 건축가에 대한 뚜렷한 자의식과 더불어 조형적이고 표현주의적인 낭만성으로 계승됐다”는 견해를 밝혔다.
 
 
  주한프랑스대사관의 기와지붕
 
기와지붕의 날렵한 곡선을 살린 주한프랑스대사관 설계로 김중업은 프랑스에서 국가공로훈장(슈발리에급)을 받았다.
  르 코르뷔지에의 영향을 극복했다고 평가받는 첫 건축물은 1962년에 설계한 주한프랑스대사관으로 ‘모던 건축의 문법으로 한국의 전통성을 추구했다’는 갈채가 이어졌다. 둥근 정원을 품은 4동의 건물이 조화롭게 배치된 가운데 사무동 건물 기와지붕의 날렵한 곡선이 우리 전통의 멋을 한껏 자랑한다. 김중업은 생전에 “한국의 얼이 담긴 것을 꾸미려고 애썼고 프랑스다운 엘레강스를 나타내려고 한, 피눈물 나는 작업이 나에게 엄청난 행운을 안겨주었다”며 만족감을 표했다. 독창적인 작품성을 인정받아 김중업은 프랑스 국가공로훈장과 슈발리에 칭호까지 받았다.
 
  최원준 숭실대 건축학부 교수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주한프랑스대사관은 여러 채로 구성된 전통적 건축 방식을 반영했고, 그러면서 내부 공간만이 아닌 외부와의 연계를 고려한 작품이다. 건물 하나하나의 조형도 뛰어나지만 정문에서부터 대사관저 옥상에 이르기까지 순차적으로 공간을 경험하도록 하는 ‘건축적 산책’을 잘 구현했다”고 분석했다.
 
1965년에 설계한 서병준산부인과(현 아리움 사옥)는 다양한 곡선을 사용한 조형적 건물로 지금도 연구대상이다.
  1965년에 설계한 서울 중구 장충동의 지하 1층 지상 5층 규모의 서병준산부인과 건물(현 아리움 사옥)은 대로변의 좁고 세모진 땅이라는 열악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곡선을 사용해 조형적으로 독특하면서 기능적이다. 김중업 건축 모티프의 하나인 ‘증식하는 원’의 구성 방식으로 지어진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 지금도 연구가 이뤄지고 있는 건물이다.
 
  조현정 카이스트 교수는 이 건물에 대해 “천편일률적인 상자형 건물이 지배적이던 시대에 김중업은 유기적인 곡선에 바탕을 둔, 조형성이 강조된 작품을 선보였다. 기술력, 자본력이 부족했던 1960~1970년대 지어진 것을 고려하면 이런 건물이 갖는 가치나 위상은 독보적”이라고 극찬했다. 1960년대에 제주대학교 본관, 뉴욕박람회 한국관, 유엔묘지 정문 등에서도 역동적인 선의 이미지를 구현했다.
 
  김중업은 개인 주택 또한 여러 채 설계했는데 하나하나가 독특한 모양으로 지어졌다. ‘집을 지을 때 아무도 설명서를 주지 않습니다. 피카소의 그림에도 설명문은 없지요. 마음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라는 자신의 메모처럼 각각의 주택에 각기 다른 울림을 배정했다.
 
 
  정부 정책 비난으로 추방
 
층간 두께가 매우 얇아 날렵하고 아름다운 삼일빌딩은 기본설계부터 완공까지 한국건축가가 책임진 첫 대형건물이다.
  1990년대까지 대부분의 우리나라 초고층 건물의 건물주들은 외국인에게 설계를 맡겼다. 삼일빌딩은 기본 설계부터 완공까지 한국 건축가에 의해 지어졌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1969년 설계 당시 31층 건물을 올리는 것은 큰 도전이었는데 당초 140m 높이로 지으려 했으나 풍압으로 인해 115m로 설계가 변경되었다. 그로 인해 층간 두께가 매우 얇게 처리되면서 더욱 날렵하고 아름다운 비례가 도출되었다. 삼일빌딩은 김중업 오피스 빌딩 중 가장 수작이라고 평가받지만 미스 반 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가 지은 뉴욕 시그램 빌딩과 유사하다는 비판도 따른다.
 
  1970년대 들어서면서 대규모 건설붐이 일었다. 시인으로 활동할 정도로 문필에도 뛰어났던 김중업은 신문에 와우아파트 붕괴 사건, 도심 고가도로 건설계획 등 정부의 건설 정책 비판 칼럼을 자주 기고했다. 와중 1971년 8월 경기도 광주 대단지 조성에 대한 비난 칼럼이 그에게 일대 시련을 안겼다. 때마침 철거민들이 폭동을 일으켰고, 그들과 전혀 관련이 없음에도 김중업은 수사기관에 끌려가 거기서 감옥에 갈 것인지, 해외로 나갈 것인지 선택하라는 강요를 받게 된다.
 
  해외 추방을 선택한 그는 1971년부터 8년간 망명 생활을 했다. 그 기간 프랑스 르 코르뷔지에 재단 이사로 재임했으며 미국 하버드대학과 로드아일랜드대학 교수로도 활동했다. 해외에서 아프리카 니제르 도자기 공장, 나이지리아 에분올루 스포츠호텔, 대한성공회 제1회관(현 세실극장), 설악파크호텔 등의 건물을 설계했다.
 
 
  유작 서울올림픽 평화의문
 
김중업의 유작인 서울올림픽 평화의문은 ‘건축과 미술의 교차점’이라는 새로운 시도로 연구가치가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중업은 1979년 말 귀국했으며, 그의 설계에서 르 코르뷔지에의 영향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1980년대 한국교육개발원 신관, 국제방송센터 등은 불규칙한 매스(mass)로 되어 있지만 외관이 유리로 처리되어 세련된 감각을 발산한다.
 
  김중업은 1980년대 지방 도시의 방송국이나 아트센터 같은 문화시설의 대다수를 설계했다. 병원이나 쇼핑센터 등 전에 없던 새로운 기능을 담은 건물들도 작업했다. 김중업의 그 당시 설계에 대해 ‘급변하는 한국의 여러 도시 안에서 사회적 변화를 이겨내는 힘을 가진 이상적인 공동체 공간을 만들고자 했다’는 평가가 따른다.
 
  1980년대에 김중업은 부산 충혼탑과 서울올림픽 평화의문을 선보였다. 그의 유작이 된 평화의문은 ‘새로운 시대로의 진입’이라는 의미를 담아 지붕을 한옥 처마의 굵은 곡선과 날렵한 예각의 대비로 표현했다. 서울올림픽 평화의문에 대해서는 ‘건축과 미술의 교차점이라는 새로운 시도가 돋보인다’라는 평가와 함께 연구가 더 이뤄져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김현섭 고려대 교수는 김중업을 “20세기 건축사조의 주요한 층위(層位)를 한 몸에 축적했던 인물”로 규정하면서 “보자르식 고전주의 교육으로부터 시작한 건축 이력이 서구 모더니즘과 한국 전통성의 융합을 이룬 뒤 은유적 조형성을 거쳐 미래주의적 디자인으로까지 확장했다. 이는 20세기 건축사의 주도적 경향을 압축적으로 포괄한다”고 말했다.
 
  비오토피아 제주박물관을 설계한 세계적인 건축가 이타미 준(伊丹潤·1937~2011년)은 “김중업만큼 한국에서 아방가르드 의식을 가지고 그것을 목표로 행동한 건축가는 드물다”는 찬사를 보냈다.
 
 
  김중업건축박물관 개관
 
1959년 설계한 유유제약 공장 건물이 김중업건축박물관으로 거듭났다. 손때 묻은 기록물부터 첨단 기법을 활용한 실감 콘텐츠까지 다양한 전시물을 볼 수 있다.
  김중업건축박물관은 경기도 안양시 옛 유유제약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유유제약 공장 건물은 구조적 명확성이 두드러져 근대 건축의 원칙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김중업 초기 건축물이다. 1959년에 설계한 공장 건물 4개 동이 남아 있는데 김중업건축박물관, 안양박물관, 교육관, 경비실로 활용하고 있다. 산업 건축물임에도 출입문, 손잡이는 물론 건물 외벽의 조각품 배치와 같은 세밀한 부분까지 디자인했다. 특히 조각 작품을 연상시키는 조형적 기둥이나 건물 상층부 모서리에 조각가 박종배의 모자상 등이 접목되어 멋스러우면서도 심플하다.
 
  2006년 유유제약이 충북으로 이전할 때 김중업이 설계한 공장 건물이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자, 안양시가 매입하면서 박물관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안양시는 인근에 역사 유적이 다수 자리하고 있어 2009년에 발굴조사를 시행했다. 그 과정에서 안양사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와 안양사의 전탑지와 전탑의 유적이 발굴되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세웠다고 문헌으로만 전해지던 안양사의 실체가 드러나 역사학계와 불교계의 관심을 모았다. 당시 출토된 유물은 안양박물관이 보관하고 있으며 절터도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근대문화유산인 김중업건축박물관과 안양사라는 역사적 가치가 공존하는 공간, 공장시설이 1000년의 시간을 품에 안은 문화공간이라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곳이다.
 
 
  미래기술로 동적 박물관 구현
 
  김중업건축박물관은 그가 타계한 지 26년 만인 2014년 3월에 개관했다. 현재 박물관이 보유하고 있는 자료의 대다수는 장남 김희조씨가 기증한 것이다. 건축모형, 사진과 필름, 수첩과 공책 등의 기록물, 도면, 영화필름과 비디오테이프, 녹음테이프, 상장과 상패, 사무실에서 생산된 문서, 신문 스크랩 등 다양하다. 또한 김중업건축연구소에서 오래 근무했던 홍기창 건축가가 기계식 계산기를 비롯해 김중업 친필 서명과 메모가 기입된 작품집과 잡지 등을 기증했다.
 
  이러한 기증품을 바탕으로 김중업건축박물관은 근·현대 건축에 관계된 모형, 사진, 도면, 소품, 스케치, 영상 등 관련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고, 꼼꼼하게 기록한 수첩과 각종 도면을 통해 건축가의 숨결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건축뿐 아니라 삶을 대하는 자세, 역사의식, 수첩에 그리는 건축 메모와 스케치하는 습관까지도 스승 르 코르뷔지에를 닮았기에 가능한 전시물이다. 다양한 전시물 중에서 특히 눈에 띄는 건 김중업이 만든 서병준산부인과와 제주대학교 본관의 모형이다. 그야말로 한 땀 한 땀 손으로 직접 정교하게 제작한 모형만 봐도 김중업이라는 건축가의 꿈과 재능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국내 유일의 건축박물관인 김중업건축박물관은 그동안 소장 자료를 활용한 건축 전시와 콘퍼런스, 어린이 건축학교 및 교육 프로그램 등을 다양하게 운영해왔다. 탄생 100주년을 맞아서는 정적인 전시가 동적으로 구현되어 눈앞에 실감 나는 영상으로 펼쳐졌다. 4월부터 9월까지 〈미디어 아키텍처:김중업, 건축예술로 이어지다〉라는 특별전시를 통해 첨단 기법을 활용한 전시를 선보인 것이다.
 

  1만여 명의 관람객이 찾을 정도로 김중업의 건축예술 세계를 디지털미디어와 미래기술로 새롭게 해석한 국내 최초의 건축 실감 콘텐츠는 각광을 받았다. 전시가 끝난 뒤 실감 콘텐츠는 박물관으로 이관됐으며, 김중업 건축의 과거, 현재, 미래를 누구나 무료로 생생하게 관람할 수 있다.
 
  김중업건축박물관 김태원(金泰源) 관장은 “김중업건축박물관은 연구자들을 위해 자료를 제공하고 재생건축, 주거, 건축 사진, 유휴 공간, 조경 등의 주제로 전시와 강연, 교육 체험 답사 프로그램을 운영해왔으며 앞으로도 건축을 기본으로 그 외연을 확장해나가는 프로젝트를 지속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안양예술공원과 연계
 
  김중업건축박물관은 국내 유일의 건축박물관인 만큼 건축 관련 인사들과 관련 전공 학생들, 일반 관람객의 발길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안양예술공원 초입이라는 지리적 이점도 한몫한다. 관악산과 삼성산 사이 삼성천 물길을 따라 조성한 안양예술공원은 국내외 유명 예술가들의 퍼블릭 아트 작품 60여 점이 군데군데 자리하고 있어 ‘지붕 없는 미술관’으로 불린다. 해마다 여름이면 안양유원지를 찾는 피서객들로 김중업건축박물관과 안양박물관도 덩달아 북적인다.
 
  김태원 관장은 두 개의 박물관과 예술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예술공원 운영은 세계적으로도 드문 케이스라고 말했다.
 
  “폐수가 흐르던 안양천을 20여 년 동안 개선하고, 안양예술공원을 조성해 3년마다 국제퍼블릭아트전을 개최하고 있습니다. 그때마다 공공예술품을 더 확보하여 공원에 설치합니다. 국내 유일의 건축박물관과 국보급 유물을 보유한 박물관, 예술공원을 지자체 예산 100%로 운영하는 안양시에 대해 해외에서까지 놀라움을 표할 정도입니다. 예술문화도시를 배우고 싶다는 발길이 국내외에서 끊이지 않고 있어요.”
 
  2014년에 개관한 김중업건축박물관은 김중업 타계 30주기였던 2018년에도 기념 책자를 펴내고 전시와 세미나를 여는 등 여러 행사를 개최했다. 김중업 건축의 의미를 되새기고 연구를 활발히 시작했으나 현재 그의 건축물들은 중대 기로에 서 있다. 일반적인 건축물의 수명이 30년 정도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평가받을 만한 소수의 건축물을 제외하고 김중업이 설계한 건물들도 사라지거나 변형되는 일이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 파괴되더라도 설계 당시 건축가의 생각을 잘 읽을 수 있는 아카이브나 도면 등을 후대에 전수하고 연구할 기회를 남겨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제언이다.
 
 
  아카이브 자료 수집
 
1969년에 완공된 제주대학교 본관 건물은 ‘21세기 건축’으로 칭송받았지만 누수와 안전성 문제로 아쉽게 철거되었다.
  1969년에 완공된 제주대학교 본관은 지속적인 누수 발생과 구조 안전성 문제가 제기되면서 1996년에 철거되어 아쉬움을 남긴다. 유기적 형태의 램프를 활용하여 세심하게 동선을 처리한 점을 들어 건축계가 ‘21세기 건축’이라 평한 건물이었다.
 
  김중업의 대표적 작품에 속하는 삼일빌딩과 주한프랑스대사관도 리모델링을 하면서 변형이 불가피해졌다. 삼일빌딩과 주한프랑스대사관은 리모델링 과정을 촬영하여 박물관에 전달하고 중요한 자재들을 수습하여 박물관에 기증했다. 김태원 관장은 “앞으로도 허물거나 리모델링하는 건물이 계속 나오겠지요. 건축물의 주요 자재를 수습하고 영상 촬영을 하여 아카이브 자료를 충실히 수집할 계획입니다”라고 밝혔다.
 
  ‘건축은 예술’이라는 자세로 일관했던 김중업, 그의 작품을 오늘도 많은 사람이 드나들며 애용하고 있다. 국제방송회관, 경상남도문화예술회관, 안국빌딩, 한국외환은행 본점, 중소기업은행 본점 등 바로 주변에서 김중업의 작품이 우리를 반기고 있다. 김중업이 건축을 대하는 마음은 대한성공회 제1회관 설계를 마치며 남긴 글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건축이란 주어진 조건에 절대적으로 대응하기 마련이다. 환경 속에 어떻게 잘 어울리며, 쓸모가 많아야 하며, 고르게 밝아야 하며, 싸게 지어져야 하면서도 값비싸게 보여야 한다. 즉 기념성이 부여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주어진 조건에 가장 적합한 안이란 하나밖에 있을 수 없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202403

지난호
전자북
별책부록
북스토어
프리미엄결제
2020년4월부록
  • 지난호
  • 전자북
  • 별책부록
  • 정기구독
  • 월간조선 2018년 4월호 부록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