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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인터뷰

이문열 작가

“윤석열, 잘못된 일의 뿌리를 뽑는다는 심정으로 결단해야”

글 : 장원재  장원재TV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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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5년간 不知不識간에 전체주의로 상당히 진행”
⊙ “말이 이렇게 망하면 나라도 성하지 못한다”
⊙ “DJ는 대통령으로 中上…, YS는 민간인으로서 좋은 사람”
⊙ “대한민국이 원상으로 돌아가는 것, 10년 안에는 불가능할 것”
⊙ “우익에선 자기 신념을 지키다가 감옥에 가도 상관없다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 “윤석열, 하찮게 보이는 일도 누적되면 타격이 온다”
사진=조준우
  시대(時代)와의 불화(不和)를 무릅쓰고, 신발 끈을 고쳐 매며 필마단기(匹馬單騎)로 격랑(激浪)에 맞섰던 인물이 있다. 소설가 이문열(李文烈·74)이다. 그는 한 시대의 상징이었다. 모(某) 평론가가 대하소설 《변경》을 두고 “이제 이문열은 대가(大家)의 이름으로 훨훨 돌아다녀도 무방하리라”라고 썼을 만큼 독보적인 문학적 성취를 일궜지만, 반대 진영에서 그는 공격 대상 1순위 작가이기도 했다. 누적 판매 부수만 몇천만 권이니, 과장을 보태 말하자면 그의 문장으로부터 자유로운 한국인은 없을 것이다. 좌우(左右) 모두 인정하는 그의 영향력은 불멸(不滅)이다. 몇 년째 작품 발표를 멈춘 작가는 작금의 한국 사회를 어떻게 진단하고 있을까? 경기도 이천 부악문원을 찾아 지혜를 빌리고 싶었다. 오랜만에 만난 노(老)작가의 심신은 지쳐 보였다. 실화(失火)와 실족(失足) 때문이라고 했다.
 
  지난 6월 30일, 경북 영양 광산문학연구소가 화재(火災)로 전소(全燒)되었다. 다섯 살 때 고향을 떠나 40년을 떠돌다 귀향(歸鄕)하며 지은 커다란 한옥이다. 뜻밖의 화재로 ‘작가 이문열’의 이름으로 얻은 수입 대부분을 들인 건물, 그리고 동리(東里) 선생의 진적 죽필(竹筆), 김지하(金芝河) 시인의 난초화, 외팔 화가로 유명한 박대성(朴大成) 화백의 작품 등 개인적으로 애지중지(愛之重之)하던 물건들을 모두 잃었다. 화재 2시간 전부터 드나든 사람이 없었으니, 화인(火因)은 아마도 실화일 터이다. 물건에 집착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고향의 돌아갈 곳’이 영영 사라졌다는 상실감이 작지 않다. 실족은 9월이다. 순간적으로 손발이 마비된 느낌이 들었고, 갑자기 넘어져 얼굴을 다쳤다.
 
 
  “상황에 딱 맞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괴롭다”
 
지난 6월 30일 경북 영양의 광산문학연구소가 불에 타 전소된 후 이문열 작가는 큰 상실감에 빠졌다. 사진=조선DB
  ― 이제는 괜찮아지셨는지요.
 
  “아뇨. 기억력도 자꾸 나빠지고, 상황에 딱 맞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괴롭습니다. 그래서 글을 통 못 쓰고 있어요. 아직 입술이랑 얼굴에 난 상처가 다 아물지 않아서 인터뷰 사진 찍기도 좀 무엇합니다.”
 
  실화와 실족 화제(話題)는 자연스레 실언(失言)으로 넘어갔다.
 
  “바로 오늘 아침에 그 문제로 60년 지기(知己)와 다투었습니다. 나는 우익(右翼)이지만, 그 친구는 반대 진영에서 장관도 하고 그랬죠. 그래도 그동안은 말이 통했는데, 이번 윤석열(尹錫悅) 대통령 발언 건은 의견이 아주 달랐어요.”
 
  ― 어떻게 달랐습니까.
 
  “제 친구는 윤 대통령이 무조건 사과해야 한다는 겁니다. 외교적 문제를 만들어 국익(國益)을 해쳤다는 거죠. 그 말을 할 당시 주변이 산만했었고, 그 발언이 공식적으로 한 말도 아니고 혼잣말 비슷한 것이 마이크에 잡힌 거란 말이에요. 그러면 그걸 잡아서 보도한 방송사부터 문제 삼아야죠. 더구나 MBC는 대통령의 정확한 발언도 확인하지 않았잖아요? 부주의했던 건 반성해야죠. 옆에 마이크가 있는 줄 몰랐다면 그런 말은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혼자 한 말을, 공식적으로 발표한 것도 아니고 그냥 말하다가 방송에 잡힌 걸 어떻게 공적으로 사과합니까?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면, 오히려 그걸 듣고 퍼트리는 쪽이 더 문제 아닌가요?”
 
  대가의 말은 여기서부터 고백 투로 바뀌었다.
 
  “이런 식으로 싸웠습니다. 그런데 제 친구 말을 들으니 야당에서 하는 이야기랑 다를 바 없고, 제 말도 우파 신문 주장과 차이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충격을 받았죠. ‘얘 봐라’ 싶으면서도, ‘이제 우리 말이 옛날 같지 않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말이 왜 이렇게 타락했나”
 
  노작가는 요즘 세상이 정치적 견해를 두고 너무 격하게 갈라져 있다고 했다. 개선 가능성이 거의 없기에 안타깝다는 말도 덧붙였다.
 
  “예전에는 같은 진영 사이에서 정치적 견해 차이로 갈라서는 경우가 거의 없었습니다. 요즘은 달라요. 진보도 여러 갈래의 진보가 있지 않습니까? 우익도 마찬가지고요. 정치적 거리 이동이 심해서 같은 진영 사이에서도 정파(政派)가 갈라지고, 정파 사이의 견해 차이도 크죠. 반목(反目)하고 맞서 싸워야 할 대상이 다른 진영뿐만 아니라 같은 진영 내에, 그것도 복수(複數)로 존재하는 겁니다.”
 
  노작가의 말에 따르면, 과거에는 ‘문제의 그 친구’와 서로의 사상·견해를 피차간에 객관화하고 서로 존중하며 대화하곤 했다. 그런데 말의 길이 끊어진 것이다. 세상의 그런 조짐이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피부로 체험한 건 또 다른 문제다. ‘굉장히 이상한 경험’이 일상으로 들어온 것이다.
 

  “나는 말에 관심이 많은데, 지금 우리가 쓰는 말이 왜 이렇게 타락(墮落)했나 싶어요. 말이 이렇게 망하면 나라도 성하지 못합니다. 제가 보기에, 우리 말이 망한 건 요즈음이 아니고 한 1~2년 됐습니다.”
 
  ― ‘말이 망했다’는 건 무엇을 보고 판단하신 결과입니까.
 
  “정치인들이 쓰는 말을 보세요. 운동권이나 쓰던 격렬한 표현, 정치적 은어(隱語) 같은 것들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나오잖아요? 금기(禁忌)와 정도(正度)가 사라진 겁니다. 과거에는 여야(與野)를 막론하고 쓰지 않던 표현입니다. 의회주의(議會主義)를 추구하는 정상적인 정당과 체제에 적대적인 지하(地下) 운동권 세력이 섞여버린 느낌이랄까요? 말하자면, 운동권 용어가 여야 가리지 않고 정쟁에 녹아들었어요. 그래서 요즘 정치인들 발언을 듣고 있으면 지금까지 제가 보았던 국회의원들의 싸움이 아닙니다.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나 싶을 정도로 참담(慘憺)해요.”
 
 
  “말이 잔인해지면 행동도 잔인하게 변한다”
 

  ― 정치인들 말은 그렇다 치고, 아직 일상 언어는 괜찮은 것 아닙니까.
 
  “아니죠. 정치인들의 거칠고 험한 말이 받아들여지니까요. 그건 우리 국민이 그전에 없던 표현을 지어낸 사람들의 어떤 사고(思考)에 익숙해졌거나 혹은 동조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좌파가 우파를 공격하는 말이 자극적이고 원색적이잖아요. 그래서 우파의 반격하는 언어도 자연히 거칠어졌습니다. 피차 공격적인 말에 익숙해진 거죠. 정치권만 아니라 시민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례한 말을 쓰는 사람이 대접받고 그런 표현이 공식화되고…. 말을 쓰는 방식이 아주 나빠요.
 
  모 50대 국회의원이 ‘낄끼빠빠’라는 말을 기자회견 때 하는데, 무슨 말인지 몰라서 찾아보니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진다’라는 말이랍니다. 이건 국회의원이 쓸 말이 아니죠. 자기의 위치와 본분을 망각한 겁니다.
 
  말이 잔인하고 집단적으로 쓰이는 것도 문제입니다. 볼셰비키 때처럼, 독재(獨裁) 냄새나는 정치적 구호가 예사로 쓰이잖아요? 일상 언어가 구호에 상당 부분 점령당한 거죠. 그래서 우리의 국민적인 집단 사고는 많은 부분에서 상당히 마비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말이 망한 나라는 오래가기 어려워요. 그래서 걱정입니다.”
 
  이문열 선생은 혼탁(混濁)해진 말이 대중의 일상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진단했다.
 
  “험한 말이 나돌기 시작하면 말은 바람보다 더 매섭게 됩니다. 오가는 대화(對話)가 사라지고, 일방적인 공격만 남죠. 요즘 들어 범죄가 전례 없이 잔인해지는 것도 예사롭지 않아요. 말이 잔인해지면 행동도 잔인하게 변합니다. 옛날엔 살인 사건이 나더라도, 시신을 난자(亂刺)한다든지, 이런 건 없었잖습니까? 대중의 심성에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겁니다. 대화가 사라진 것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해요.”
 
  ― 그렇다면 심성이 황폐해지는 건 어떻게 바로잡아야 할까요.
 
  “몸과 마음이 많이 상(傷)해야죠. 달리 뾰족한 해결책이 없어 보이네요. 말 잘못하다 사람들이 많이 다치면 말이 부드러워질 겁니다.”
 
 
 
全體主義化

 
이문열 작가는 경기도 이천에 부악문원을 열어 글 제자들을 길러내는 실험을 했다. 사진=조선DB
  ― 값을 치러야만 재생이 가능한 겁니까.
 
  “저는 그렇게 봅니다. 그런데 언어가 상한 것 말고도 더 심각한 문제가 있어요. 지난 5년 동안 이루어진 전체주의화(全體主義化) 문제입니다. 우리 사회는 부지불식(不知不識)간에 전체주의로 상당히 진행했어요. 사람들이 지금 거의 감지하지 못한다는 것이 더 심각하죠.”
 
  ― 어떤 겁니까.
 
  “제가 이천에서 37년 동안 살고 있습니다. 우리 동네는 비교적 집단화가 덜된 동네인데도 동원이 많아요. 예를 들어, 동네 방송이 나옵니다. ‘부녀회에서 숙주나물 길렀으니 받아가라’ ‘기금을 받아서 쌀 타 왔으니 필요하신 분들은 와서 받아가라’, 돈 안 내고 가져가라는 겁니다. 근데 전혀 좋아 보이지 않아요. 다 정부 돈으로 하는 일이겠지만, 누가 어떻게 길러서 왜 나눠주는 건지 알 수 없습니다. 여름에는 노인회관 방은 무조건 시원하게, 아마 온도도 어떤 기준보다 2~3도 낮추라는 규정이 있을 겁니다. 노인들이 와서 쉬고 협력하는 방들이 생기는 건 좋은 일이죠. 좋은 일인데, 하여튼 공동 식사가 많아지고 공동 행사도 늘어났습니다. 이틀에 한 번 정도는 ‘뭐 끓여놨으니 와서 드시라’고 하고, 효도 관광도 안내하고. 공동 식사가 무서운 겁니다. 주민자치법인가, 아무튼 그런 법이 있잖아요. 관(官)으로부터 자유로운 민간 부문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 배급제(配給制)의 시범적 실시일까요.
 
  “뭐 그렇게 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제가 제일 미칠 것 같은 건 또 있습니다.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동의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동의한 것으로 관이나 민이나 이해하고 일상생활이 그냥 집단주의로 흘러가는 거죠. 중앙에서만 느끼지 못할 뿐이지 지방에서 보면…. 이런 상황에선 동원하는 측 사람과 다른 의견은 말하기가 곤란해요.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반대하는 사람들을 향해 ‘반동(反動)’이란 말이 나올지도 모릅니다.”
 
 
  이문열 가족을 살린 이승만의 포고령
 
  ― 그 정도로 우리 사회가 좌경화(左傾化)되었다는 말씀이시네요. 기울어진 운동장을 어떻게 평평하게 만들 수 있을까요.
 
  “모르겠습니다. 제가 알던 대한민국은 어디에도 없고, 이미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예요. 사람들이 저보고 우파라고 그러지만, 사실상 제가 우파가 되기에는 좀 나쁜 조건이잖아요? 아무래도 태생이란 것이 있으니까요. 제 아버지는 공산당이 좋다고 어린 5남매와 30세의 마누라를 불구덩이 속에다 던져버렸죠. 당신 혼자 목숨 부지하겠다고 북한으로 도망가야 했을 정도로 다급했던 좌파란 말이에요. 그리고 어머니도 좌익 활동으로 해방 공간에서 징역(懲役)을 사셨어요. 제 본명이 이열(李烈)입니다. 어머니가 저를 가지셨을 때 아버지의 지령에 따라 부른 배에다 삐라를 감추고 효창공원 행사장에 가서 뿌렸다가 검거되셨어요. 5개월 살고 나오셨는데, 아버지가 ‘너는 엄마 배 속에서부터 옥살이하며 싸웠으니까 나중에 커서 열렬한 투사로 자라라’라며 지어준 이름입니다. 이런 저도 으스스할 정도로 세상은 변해가고 있습니다.”
 
  이문열은 어쩌면 북에서 삶을 보냈을 수도 있다. 1950년 겨울, 할머니와 만삭의 어머니, 그리고 3세 이문열이 북행(北行)길에 올랐다. 퇴각하는 괴뢰군을 따라 움직이던 민간인 집단에 합류한 것이다. 북에 연고가 있거나, 가족 중 좌익 활동가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중학교 2년생 큰형과 초등학교 고학년 둘째 형은 영천 외가로 내려가 있어 동행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미동행(未同行)이 식구들의 목숨을 살렸는지도 모른다. 경기도 연천(漣川)까지 갔는데, 마을 사람들의 신고로 산중에서 붙잡혔다. 연천초등학교 창고로 끌려갔는데 이미 ‘부역자(附逆者) 가족’이 100명 넘게 잡혀 있었다.
 
  ‘살아남을 길’을 마련해준 건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임시포고령이다. ‘월북 기도자(越北企圖者)라도 노약자와 임신부는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 했다. 수용소에서 태어난 여동생의 생일은 1950년 12월 29일. 이 기구한 출산에 대해서는 대하소설 《영웅시대(英雄時代)》에 자세히 묘사했다. 어머니의 증언을 글로 옮긴 결과다.
 
  이문열의 가족은 며칠 후 풀려나 서울 친척집으로 이동했고, 친척들이 피란할 때 함께 무개차(無蓋車) 열차로 고향까지 남하(南下)했다. 어른들이 기차를 타고 가며 핏덩이 신생아를 두고 “아직 초칠일(初七日)도 지나지 않았네”라고 하시던 말씀을 기억한다. 수용소에 남아 있던 사람들의 생사(生死)는 모른다. 60대 중반의 노파, 막 출산한 여인과 세 살, 신생아 가족은 어느 모로도 위협적이지 않으니 풀려난 것이다. 형님들이 같이 있었다면 가족의 운명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고 믿는 이유다.
 
 
 
“싸우려면 제대로 싸워야”

 
  ― 현 상황이 그 정도로 위기 상황입니까.
 
  “이번에 윤석열 대통령 당선으로 대한민국이 제도적으로 망하는 것은 간신히 막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원상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10년 안에는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내가 늙고 근력도 떨어져서 하는 얘기일 수도 있습니다만, 대한민국이 박정희(朴正熙)·김일성(金日成) 시대 정도의 균형점이라도 회복할 수 있다면 그건 기적일 것 같습니다.”
 
  ― 문화적·사상적으로 밀리고 있는 건가요? 그렇다면 자유 시민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개념적으로 우익적이고 자유나 문화를 즐기는 사람은 아직도 다수(多數)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구체적 행동이 필요하거나 무슨 조직을 만들고 지원받는 일을 할 때는 우익은 좌익에 어림도 없이 밀려요.”
 
  ― 문화예술계 사정도 그렇습니까.
 
  “그럼요. 조금 과장을 보태서 말하자면, 가까운 시일 안에 어쩌면 북한식 작가동맹(作家同盟) 비슷한 구조가 태동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단체에 가입하지 않은 사람은 글 못 쓰고 작품 활동 못 하게 만드는 거죠. 입회 자격, 가입 조건은 단체를 장악한 사람들이 결정하고요. 정부 지원은 전부 단체를 통해서만 가능하게 하고 지원 대상도 단체에서 정한다고 상상해보세요.
 
  제가 듣기로는 아프리카 하이에나의 전투력은 사자의 7분의 1 정도랍니다. 그런데 온갖 수단 다 쓰고 집단으로 움직여서 결국 살아남잖아요? 좌익의 전투력(戰鬪力)과 야성(野性)은 보기보다 강합니다. 주사파(主思派)로 수십 년 쫓겨다니면서 감옥에서부터 익힌 야성과 전투력이니까요. 우익에선 자기 신념을 지키다가 감옥에 가도 상관없다, 기꺼이 십자가를 짊어지겠다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저는 그게 좀 답답합니다. 싸우려면 제대로 싸워야죠.”
 
  이야기할수록 아득하고 처연(凄然)했다. 지금 이 상황이, 그리고 우리 미래가 이토록 비관적이란 말인가? 절망감이 필자를 삼키기 전에 주제를 돌리고 싶었다. 과거지사(過去之事)로 말머리를 튼 이유다.
 
 
  ‘역사의 구경꾼’
 
  ― 예전에는 정치적 견해가 달라도 반대파와 대화했다고 하셨는데, 역대 대통령과도 교분이 있었죠.
 
  “전두환(全斗煥) 대통령부터 김대중(金大中) 대통령 때까지는 교분이 있었고,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때부터는 대통령을 공식적인 자리 외에서 만난 일은 없습니다.”
 
  ― 대통령들이 왜 선생님을 만나자고 했을까요.
 
  “그분들이 저를 뭐랄까, ‘역사의 구경꾼’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 정책이나 사건을 저에게 설명한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전두환, 김영삼(金泳三), 김대중 등 대통령 여러분이 회고록을 써달라고 청했죠. JP 등 여러 인사도 부탁했고요. 다 거절했습니다.”
 
  ― 김대중 대통령과는 정치적으로 진영이 다른데, 어떻게 만났습니까.
 
  “1987년 대선 전에, 《신동아》에서 원고 청탁이 왔어요. 동교동 가서 하루 자고, 상도동 가서 하루 자면서 DJ랑 YS 관찰해서 70매씩 써달라고. 재미있을 것 같아서 하겠다고 했습니다.”
 
  ― 동교동을 먼저 갔나요?
 
  “네. 언제 가면 좋겠냐니까 김옥두 비서가 ‘이왕 오시는 것 일찍 오세요’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아침 7시에 도착했습니다. 직경이 2미터가 넘는 큰 원탁에서 아침을 먹는데, 국회의원도 5~6명 오고 외신 기자도 소개하고, 꼭두새벽부터 사람들을 왜 이렇게 불러 모았나 싶었죠. DJ가 ‘요놈이 오늘 네 시간 전까지 목포 앞바다에서 헤엄치던 놈이요’라면서 회도 권하고, 현안 이야기하다가 외신 기자와는 영어로 대화하고, ‘망명 정객’이 귀향한 느낌이 나서 조금 감동했습니다. 동교동 측에서 《신동아》 인터뷰에 맞춰서 철저하게 준비한 겁니다.”
 
 
  “DJ와 동병상련”
 
  ― 네 시간 전까지 목포 앞바다에서 헤엄치던 횟감이라니, 보낸 사람 정성이 대단하군요.
 
  “목포에서 서울 수산시장으로 올라오면서 동교동에 매일 새벽 해산물을 배달하고 가는 겁니다. 호남에서 DJ는 거의 신(神)적인 존재였으니까요. 호남인들의 염원이 모인 상징이었죠. 한번은 DJ 강연을 취재하는데, 웬 사람이 한겨울인데도 외투가 없어요. 추위를 견디느라고 소주를 마시는데 저한테도 ‘이문열 작가님 아니냐?’라며 한 잔 주더라고요. 제가 ‘안 추워요?’ 하니까 ‘우리 선생님 오시는데 춥지 않아야 얘기 잘 들을 것 아니오. 그래서 한잔하는 중’이라고 하더군요. 옷도 홑겹에 벌벌 떨면서도 DJ를 기다리는 겁니다.”
 
  ― DJ하고는 뭐 이런저런 논쟁이나 토론은 안 했습니까.
 
  “안 했어요. 왜냐하면 DJ가 책을 많이 읽어서 화제가 풍부합니다. 정치 얘기 말고도 서로 할 말이 많고, 또 서로 동병상련(同病相憐)이 있습니다. 자기나 나나 뭐 배운 거 없이, 책 읽은 것으로 살아온 거니까요. 《신동아》 인터뷰 전에 여성지 《여원(女苑)》 같은 잡지의 의뢰로 80매 내외의 인터뷰를 두 차례 한 적이 있는데, 동교동 지하 서재에서 단둘이 만났죠. 그때 서로 통한 점이 있습니다.”
 
  ― 역사적 인물로서의 DJ는 어떻게 평가합니까.
 
  “고생 많이 한 분인데, 인품이라든가 인격 뭐 이런 식으로 성인군자 자격을 따진다면 다른 말이 나올 수 있지만, 대통령으로는 그래도 중상(中上)은 안 될까요? 실제 한 것도 그랬고, 큰 실수는 안 했다고 봅니다. 좀 엉뚱한 짓을 하기는 했지만. 그런데 엉뚱한 짓이야 어느 대통령이나 다 하지 않았나요? 전 그렇게 생각해요. 그렇게 나쁘진 않습니다. 저는 최소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 ‘엉뚱한 짓’이란 햇볕 정책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햇볕 정책이 북핵(北核) 개발로 이어졌다고 비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건 해석이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찬성하는 편은 아니지만, 다른 측면도 있죠. 박정희·김일성 시대처럼 격하게 경화(硬化)된 게 아니라, 햇볕을 비추든 뭘 자꾸 집어넣어서 저쪽을 늦춘 건 분단된 국가에서의 책략으로서는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었다고 봅니다.”
 
  ― 오히려 햇볕 정책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한류(韓流)가 북한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렇게 보는 건가요.
 
  “그렇죠. 햇볕 때문에 아마 북한이 내부적으로 불리해진 것도 많을 겁니다. 사실 북한 청소년들이 옛날에는 다 ‘김일성 백성’이었다면, 지금은 한류 때문에 사정이 확 달라졌다고 봅니다. 북 당국이 보기에는 ‘아이들 다 버려놓은’ 것일 수도 있겠지요.”
 
 
  《삼국지》와 ‘노벨상’
 
  DJ와는 ‘날 선’ 농담을 주고받은 일도 있다. 《삼국지》와 ‘노벨상’ 논쟁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문인들과 밥 먹는 자리에서 저보고 ‘《삼국지》 몇백만 권 팔려서 요새 살 만하죠?’라고 해요. 기분 상했죠. 사실 작가한테는, 특히 소위 순수문학 한다는 저 같은 사람한테는 통속 소설이 많이 팔린다는 건 좀 창피한 얘기거든요. ‘나관중 《삼국지》’의 원래 제목이 ‘통속 삼국지연의(通俗三國志演義)’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얘기를 문인 여럿 있는 데서 하니까 뭐라고 할 수는 없고…. 그래서 저도 뻣뻣하게 받았습니다. ‘아이고, 저도 축하합니다. 제가 스웨덴 갔더니만, 그 나라에서 아직까지 한국 책은 단 한 권도 번역 출판된 적이 없었는데, 《김대중 옥중서신(金大中 獄中書信)》 스웨덴어 판이 막 나와서 서점 매대에 쫙 깔려 있더군요’라고 했죠.”
 
  DJ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 전의 일이다. ‘처음에는 DJ가 문학적인 야심이 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웨덴의 경우, 회고록 등 정치 관련 저술은 매대에 잘 안 올린다고 했다. 책을 홍보하기 위해 누군가 ‘노력한 흔적’이 보였다. DJ가 농을 던졌고, 이문열도 농과 날을 섞어 응수한 것이다.
 
  “DJ가 만족해하며 웃는데, 자기는 제가 정말로 칭찬한 줄 알았을 겁니다. 알아들은 사람도 있고, 못 알아들은 사람도 있었겠죠.”
 
 
  어머니와 아버지
 
이문열 작가는 1999년 1월 《조선일보》의 지면을 빌려 ‘북에 계신 아버님께’ 편지를 보냈다. 사진=조선DB
  ― 김영삼 대통령은 어떤 인물이었습니까.
 
  “악의 없고, 계략 모르고 순수한 분이죠. 민간인으로서 좋은 사람인데 정치가로서는 그렇게 능력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 기억할 만한 YS와의 인연이 있나요.
 
  “있습니다. 1994년 7월에 김영삼 대통령이 평양 가서 김일성이랑 회담하기로 했잖아요? 그 자리에 배석해 현장 분위기며 대화 내용 등등을 기록하기로 했었습니다. 《조선일보》에서 특별기자 비슷하게 자리를 마련해주겠다고 했고, 청와대에서도 오케이 했는데 김일성이 죽는 바람에 기회가 사라졌어요.
 
  평양에 못 가서 어머니가 많이 아쉬워하셨죠. ‘가면 네 아버지 만나라’ ‘만날지 못 만날지 모르지만 한번 애를 써보죠’ ‘원망 안 한다 카더라, 캐라’, 그때가 어머니 돌아가시기 두 달 전입니다. ‘가면 혹시 아버지를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셨던 겁니다.”
 
  ― 아버지 소식은 들으셨습니까.
 
  “그때는 아니고, 나중에 편지도 교환했습니다. 중국에서 만나 뵙기로 날짜까지 잡았는데 돌아가셨습니다.”
 
  ― 소설 《아우와의 만남》 이야기가 사실이었군요.
 
  “소설처럼 남동생은 아니고, 여동생을 만났습니다. 아버지는 도쿄대 농대를 나오셨는데, 그런 분이 회령 농장에서 평농장원으로 18년을 보냈다고 해요. 평농장원이란 말은, 아오지 탄광 광원하고 똑같다 생각하면 됩니다. 숙청당하신 거죠. 그러니 어떤 꼴을 당하셨는지 짐작이 갑니다.”
 
 
  전두환과 《둔주곡》
 
이문열 작가는 2021년 11월 24일 전두환 전 대통령의 빈소를 찾아 조문했다. 사진=조선DB
  ― 전두환 대통령은 어떤 인물입니까.
 
  “친화력 대단하고 유능한 처세가죠. 군인으로선 같은 정보라도 핵심을 체크하고 대처하는 능력이 뛰어났다고 들었습니다. 땅굴을 처음 발견한 사람도 전두환 대통령 아닌가요? 땅에서 연기가 풀썩 피어오르는 걸 보고 감이 와서 파기 시작했다는 거죠.”
 
  ― 역사적으로는 어떤 인물로 평가하십니까.
 
  “저는 나쁘게만은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때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이 원인이겠지요. ‘10·26만 조사하고 원대 복귀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은 합니다.”
 
  ― 2017년부터 《신동아》에 연재하던 자전적 대하소설 《둔주곡(遁走曲) 80년대》는 2018년에 1980년 5월 직전까지 다루고 연재가 끊겼습니다. 어떤 사정이 있는 겁니까?
 
  “외압(外壓)은 전혀 없었고, 제 건강 때문입니다. 갑자기 몸 상태가 나빠지고 기력도 떨어져서 집필이 힘들었어요. 그때부터 글을 못 쓰고 있습니다. 건강 회복하는 대로 다시 쓰고 싶은데, 가능할지는 모르겠습니다.”
 
  ― 1980년 광주(光州)라면 어떤 기억이 있으십니까.
 
  “그때 제가 대구 《매일신문》 편집국 기자였는데, 공무국 직원 아들이 전남대 학생이었어요. 운동부원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이분이 활자 뽑는 문선공(文選工)이니까 저랑 자주 마주치는데, 한동안 얼굴이 어둡다가 어느 날 갑자기 괜찮아졌어요. 며칠 동안 아예 연락이 끊겼다가, 아들이 그날 새벽 집에 왔다는 겁니다. 아들이랑 친구 몇몇이 밤새 무등산을 넘어 겨우 광주에서 벗어났다고 했어요. 5월 18일? 19일? 그즈음이었어요. 그래서 ‘야, 이거 큰일이 벌어지고 있구나’라고 생각했죠.”
 
 
  “전두환과 3金 중 선택하라면…”
 
  ― 노무현 대통령 때부터는 국가 원수들과 교류가 없으신 거죠?
 
  “네, 교류가 없어요. 공적인 행사장 말고는 만난 일이 없죠. 노무현 대통령은 제 또래인데, 저보다 한 살 많습니다. 젊어서는 소설도 썼다고 해요. 신춘문예에 응모한 적도 있고요. 그 작품을 누가 보여줘서 제가 본 적이 있습니다.”
 
  ― 본인을 우익이라고 하셨는데, 우익은 어떤 사람입니까.
 
  “공과(功過)를 다 인정하고, ‘먼저 산 사람들의 수고를 잊지 않는 것’이 우익이죠. 제가 보기엔, 문명(文明)은 축적의 산물입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뭔가가 뚝 떨어지는 일은 없어요. 우리 현대사엔 박정희에서 신군부로 이어지는 30년이 자리합니다. 그들을 절대악(絶對惡)으로 취급하잖아요? 하지만 그 시대를 거쳐 도착한 곳이 오늘이고, 그 시대를 살아간 분들의 공도 적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필요악(必要惡)이었어요. 제가 언젠가 다른 인터뷰에서도 말했지만, 우리가 다시 전두환과 3김(金) 중에서 선택하라면 누굴 골라야 할까요? 솔직히 말해서 누가 최선일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그 시절을 다 겪고도 이렇게 판단이 어려운데, 과거의 사람들을 지금 우리 시각으로 단죄(斷罪)하는 건 곤란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역사가 어떻게 흘러갔는지를 알고, 당대 사람들은 그걸 몰랐잖아요.”
 
  ― 역대 대통령 이야기를 하셨으니까, 현 대통령에 대해서도 질문하겠습니다. 윤석열 정부에 대해 충고랄까 조언해주신다면.
 
  “답답하기는 해도, 저는 윤 대통령이 가는 방향에 대해서는 별로 불만이 없습니다. 큰 원칙을 정할 때는 과단성도 있고 결연함도 보이는데, 과단성도 시기를 놓치면 소용이 없습니다. 답답한 이유는 과단성이 발휘되는 시기가 좀 늦기 때문입니다. 시차(時差)가 있어요. 지지했던 사람으로서 걱정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잔 매에 넘어간다’라고 하잖아요? 하찮게 보이는 일도 누적되면 타격이 와요. 이 상태에서 바로잡아 보려고 고함을 칠 때 저쪽에서 그만두면 도움이 되는데, 이쪽에서는 소리 지르는데 상대가 도망가면서도 계속 돌아보고 맞대응하면 그냥 싸움같이 보이거든요. 하여튼 테크닉은 영 마음에 안 듭니다. 어떤 계기가 왔을 때, 잘못된 일의 뿌리를 뽑는다는 심정으로 결단해야 합니다. 거짓 선동에는 타협하면 안 됩니다.”
 
 
  “주사파는 사이비 종교”
 
  ― 요즘 젊은 세대에게도 한 말씀 해주십시오.
 
  “우리 젊은이들이 영혼(靈魂)을 찾았으면 싶습니다. 우리한테는 영혼이란 것이 있어요. 짐승들이 가지고 있는 인식 말고, 사람으로서의 어떤 특징을 짓는 것을 말하죠. 사려(思慮), 판단력(判斷力) 같은 부분입니다. 그냥 들개처럼 우 하고 몰려가는 게 아니라, 시류(時流)나 역사(歷史)에 휩쓸려서 몰려가더라도 몰려갈 때 내가 왜 몰려가는지 생각해본다는 것. 그것이 인간이더라고요.
 
  요새 보면, 누군가 ‘저 사람이 목표다’라고 지시하면 반대 진영 군중이 마치 하이에나 떼처럼 다 달려들고 깨무는 것 같습디다. 그래서 제가 젊은 사람들을 보면 속상해요. 영혼은 여러 가지 이유로 없어집니다. 러시아혁명 이전 농노(農奴)들은 무지(無知)와 가난 때문에 영혼이 닳았죠. 역사적, 사회적 환경 때문에 인간의 영혼이 이상하게 되는 수도 있습니다만, 지금 우리 국민들, 젊은이들의 영혼이라는 건 러시아 농노들의 그것과는 다릅니다. 학력도 높고, 기본적인 사유력(思惟力)도 있으니까요. 주사파는 마르크스주의도 아닙니다. 좌익(左翼)도 아니고 사이비 종교죠. 그런 종교가 우리 사회에 퍼지는 건 정말 겁나고 싫고 그렇습니다. 근데 지금 보니까, 젊은이들이 거의 무사하지 못할 것 같아요. 그래서 걱정이 많습니다.”
 
  노작가의 예언은 비관론(悲觀論)이었다. 한때 공산주의(共産主義)라는 유령이 유럽을 떠돌았듯이, 지금 주체사상이라는 유령이 대한민국에 떠도는 것은 혹시 아닐까. 유령이 득세한 곳에선 인간이 설 자리가 없을 터이다. 인간성(人間性)이 절멸하고 이상론(理想論)의 허울 아래 수많은 생명이 허망하게 사라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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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ames.park@iname.com    (2022-11-05) 찬성 : 8   반대 : 0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하지요? 전교조가 그렇게 80년대 초부터 국민들을 좌파 교육시켰습니다. 그게 벌써 40년이 넘은 것이지요. 민노총은 노동계를 좌파 선동대로 만들어서 마음대로 산업계를 흔들었습니다. 이젠 더이상 노동자를 위한 조직이 아닙니다. 이 두 단체가 나라를 40년 넘는 세월동안 좌파국민들을 생산했습니다. 그 규모가 국민의 40%입니다. 이렇게 뿌리가 깊은데 윤대통령 5년 임기로 다시 진정한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탈바꿈 할수 있을까요? 어림없다고 봅니다. 윤대통령에게서 확고하게 전교조와 민노총을 손 볼 능력과 의지도 안보입니다. 대한민국은 속으로 썩어너거는 참으로 암울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서울 시내에서 9000명의 좌파 개돼지들이 모여 데모할때 우파는 600명 모였다고 합니다. 암울한 정도가 아니라 희망이 꺼져갑니다...
  puge2005@naver.com    (2022-10-31) 찬성 : 19   반대 : 0
이런 작가를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든든합니다.주사파가 얼마나 위험한가를 이 글을 읽고 한 번 더 느꼈습니다.편견이 없는 역대 대통령의 평가를 높이 삽니다.계속 나라를 젊은이를 구한다는 마음으로 글을 써주시길 바랍니다.감사합니다.
  book1376    (2022-10-31) 찬성 : 18   반대 : 0
윤석열,이문열님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르고포리    (2022-10-28) 찬성 : 21   반대 : 0
인간에게는 영혼 - 사려와 판단력 같은 것 - 이 있다는 말에 공감하게 되네요. 서양 고대 철학에서 강조했던 것 같아요.
  zeus16604    (2022-10-28) 찬성 : 28   반대 : 0
광산문학연구소가 전소되어 안타까웠습니다. 본인으로서는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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