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초의 정당 여성 黨首, 최초 5선 여성 국회의원… 친근한 ‘박 할머니’로 알려져
⊙ 고향인 부산 기장군은 抗日의 고장… 20여 명의 독립운동가 배출
⊙ 2010년 기장군에서 박순천기념관 건립 추진하다 중단… 親日 논란 불거져
⊙ “제자 김금진을 감언이설로 근로정신대에 보냈다”는 의혹… 《친일인명사전》에 등재 안 돼
⊙ “조국의 비운을 통탄하며 그(김금진)를 보내는 모두가 서로 손을 잡고 울었다.”(《중앙70년》 중에서)
⊙ 고향인 부산 기장군은 抗日의 고장… 20여 명의 독립운동가 배출
⊙ 2010년 기장군에서 박순천기념관 건립 추진하다 중단… 親日 논란 불거져
⊙ “제자 김금진을 감언이설로 근로정신대에 보냈다”는 의혹… 《친일인명사전》에 등재 안 돼
⊙ “조국의 비운을 통탄하며 그(김금진)를 보내는 모두가 서로 손을 잡고 울었다.”(《중앙70년》 중에서)
박순천(朴順天·1898~1983년)은 부산 기장이 낳은 여걸, 한국 정치사에 뚜렷한 발자국을 남긴 인물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정당 당수(黨首)로 1966년 민중당 대표최고위원을 지냈다. 1950년 5월 2대 국회 때 서울 종로갑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된 뒤 4~7대 의원을 지낸 5선(選) 의원.
아직 이 여성 최다선 기록을 깬 이는 없다. 박근혜·이미경·추미애·김영선이 5선이지만 6선은 없다. 굳이 따지자면 최초 5선 여성 국회의원이다.
《조선일보》는 1983년 1월 11일 자 10면에 ‘격동기(激動期)에 남긴 큰 발자취’라는 제하의 기사로 박순천의 영면을 애도했다.
〈9일 밤 타계한 박순천 여사는 생존 시에 원이름보다 ‘박 할머니’란 이명(異名)으로 더 널리 통했고 본인 역시 이렇게 불리는 것을 반겨했었다.
최초의 본격적인 여성 정치인이자 최초의 여성 당수 등 여사를 가리키는 ‘기록적’ 의미의 수식어는 갖가지였지만 소박한 인품과 구수한 체취는 이런 별스런 칭호를 스스로 사양했었기 때문이었다.(하략)〉
박순천은 ‘여성’이나 ‘정치인’이란 한정된 구분을 훨씬 뛰어넘는 여걸이었다. 평소 존경하던 이승만(李承晩·1875~1965년) 대통령이 발췌개헌(1952년 7월 부산의 피란국회에서 통과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첫 헌법 개정)을 하자 결별, 장면(張勉·1899~1966년) 등과 함께 민주당을 창당했다.
자유당 시절, 반독재투쟁에 앞장섰으며 여성 본연의 부드러움과 포용력으로 민주당의 신·구파 투쟁에 완충역을 했고 당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무술(武術) 경관에게 맞아 타계할 때까지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2010년 박순천기념관 추진되다 중단
내년이면 박순천이 우리 곁을 떠난 지 40주기가 된다. 안타깝게도 그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지난 2010년 무렵 고향인 부산 기장군에서 생가 복원 및 기념관 건립이 추진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친일(親日) 논란이 빚어지면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사이 생가는 허물어지고, 생가터의 절반은 마을도로가 잘라먹었다. 기자가 찾아간 생가 주변은 그저 흔한 밭뙈기에 불과했다. 호박이 넝쿨을 틀고 고추가 익어가며 주민이 한가로이 농약을 치고 있었다.
윙윙거리는 벌과 날파리가 한국 근현대사의 호걸이 나고 자란 ‘창세기’ 공간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있었다. 기억할 만한 조그마한 표석 하나 없었다. 우물터만 그대로였다. 안타깝게도 고향에서 먼저 박순천은 무명인(無名人)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하늘이 보우하사, 아직도 박순천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있었다. 기자는 부산 기장의 대변항을 찾아갔다. 지난 6월의 일이다.
향토사학자 공태도(孔泰道·90) 선생은 부산 기장이 고향이다. 바다를 끼고 있는 기장은 조선 시대부터 기장미역, 기장갈치, 기장멸치로 명성을 떨쳤다. 정철(鄭澈·1536~1593년)의 가사(歌辭)와 더불어 조선시가의 쌍벽을 이루는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1587~1671년)가 기장에서 귀양살이를 하면서 모두 29편의 글을 남겼다. 정확히 1618년 11월 서른두 살 나이에 기장으로 유배돼 6년을 보냈다.
공 선생은 부산 《국제신문》과 《부산일보》의 부산 동래군, 양산군 주재기자로 35년 동안 일했다. 특종 중 하나가 1991년 쓴 ‘윤선도의 문헌발굴’ 기사다. 당시만 해도 고산이 기장으로 유배된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다. 고산에 대한 문헌과 사료를 찾아 백방으로 뛰어 시와 제문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기자와 만난 공 선생은 박순천 얘기에 앞서 기장이 낳은 독립운동가를 일일이 설명하기 시작했다.
“1900년대 자그마한 이 읍소재지 기장은 한글학자이며 독립운동가인 김두봉(金枓奉·1889~?) 선생을 비롯해 제헌국회 때 초대 부의장인 김약수(金若水·1892~?), 그리고 독립운동가 김종엽(金鍾燁·1897~1969년)·김도엽(金度燁·1899~1937년)·구수암(具壽巖·1901~1920년) 등과 동래고 ‘장산 횃불 사건’의 주동자인 박영출(朴英出·1907~1938년), 부산 항일학생의거(일명 ‘노다이’ 사건)의 이도윤(李道胤·1923~?) 등 20여 애국지사를 배출한 위대한 고장입니다.
그분들은 자기 목숨을 초개(草芥)와 같이 던졌어요. 기장이 인물의 고장입니다.”
― 애국지사가 많은 배경이 있나요.
“비록 ‘삼정승 육판서’ 같은 이는 없어도 나라가 어려움에 처하면 인물이 나타났어요. 지리적 여건과 바다와 싸운 강인한 정신 때문이 아닐까요? 신라 때 침입한 왜적이 1396년 배 120척을 앞세워 기장읍성과 동래읍성을 점유한 일이 있었어요. 또 임란(壬亂)을 일으켜 조상들의 코와 귀를 베어간 역사도 있지요.
시적(詩的)으로 표현하자면, 단절의 세월 속에서 불의와 맞서 피로 거름하신 선열들의 노호(怒號·성내어 소리 지름)가 산야(山野)를 적시며 대하(大河)처럼 도도히 기장을 흐르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 1910년 당시 기장의 유림들과 유지들이 항일운동의 디딤돌을 놓았다고 하더군요.
“그분들이 기장 보명학교와 여성 교육기관인 명정의숙을 설립했지요.”
1905년 전후로 설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보명학교는 기장 지역 청년들을 대상으로 민족계몽운동 교육의 산실 역할을 했다고 한다. 보명학교 출신으로 독립운동가 김두봉·김약수·김종엽 등이 있다.
여학교인 명정의숙은 1910년 기장에 세워진 민족학당이다. 기장 지역 유지들의 기부금으로 설립되어 1918년 애국지사 박세현(朴世鉉·1897~1917년) 교장의 옥사 후 해체되고 말았다.
기장이 낳은 독립운동가들
이 대목에서 공 선생의 말이다.
“명정의숙 학생 40여 명이 1919년 기장 만세 사건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고 합니다. 또 기장 3·1운동 주동의 한 사람인 구수암 의사(義士)가 옥사한 후 장례를 기장면민장으로 이끌어낸 이들이 명정의숙 출신들이에요. 장례식 때 여학생들이 조사(弔詞)를 읽고 만장기(挽章旗)를 앞세워 일경(日警)에 항의한 일도 있다고 하지요.”
공 선생은 “박순천을 이해하려면 이런 기장의 독립운동사를 이해해야 한다”며 ‘명정의숙가’ 이야기를 보탰다.
“김 기자! ‘명정의숙가’란 게 기장에 있어요. 구구절절 나라를 찾아야 된다는 가사로 엮어져 있어요. 또 학생들이 불렀던 ‘애국의 노래(꿈을 깨세)’는 오매불망 국권회복 성취를 위해 나아가자는 내용입니다.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볼 수 없는 사료가치가 높은 노래지요. ‘애국의 노래’는 1936년 안익태(安益泰·1906~1965년)가 지은 ‘애국가’보다 20년이나 앞선 1916년에 이미 기장 사람이 지어 불렀지요.
이런 일들로 볼 때 기장의 항일운동 의식이 얼마나 높게 불탔는지 알 수 있어요.”
꿈을 깨세 꿈을 깨세 얼른 꿈 깨서
어하 우리 학도(學徒)들아 얼른 꿈 깨서
들었나 못 들었나 저 새 소리
처처(處處)에서 지직이고(지저귀고) 햇빛이 비치네
들려오네 들려온다 문명의 종소리
구주(歐洲)에서 미주(美洲)에서 일본에서도
학도들아 학도들아 청년학도들아
우리들도 꿈을 깨서 얼른 배아서(배워서)
오매불망 국권회복 성취하고서
세계열강 대열 속에 전진해보세
-박우돌 작사 〈애국의 노래(꿈을 깨세)〉 전문
소를 타고 日警을 놀리다
공태도 선생은 ‘기장 독립운동 약사(略史)’ 강의를 마치고 박순천 가계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에 따르면 박순천은 1898년 음력 9월 10일 한학자인 박재형(朴在衡)과 김춘열(金春烈)의 슬하에서 태어났다. 주소는 부산 기장군 대변리 88번지. 본관은 밀양이고 본명은 명련(命連). 부모는 딸의 명줄이 길게 이어지기를 바라는 뜻에서 이름을 이렇게 지었다고 한다.
정확히는 외동딸이다. 아들을 낳지 못해 양자를 들였는데 이름이 박창무(朴昌茂·1885~1938년)다. 공 선생의 말이다.
“박순천은 어릴 때 남장을 하고 ‘대변서당’에 다녔고 사내아이들과 곧잘 어울려 낚시질을 할 만큼 활달했다고 합니다. 한 번은 소를 타고 일본 주재소 앞을 다니면서 일경들을 놀려주었다고 해요. 명정의숙에 다니던 후배를 찾아가 ‘왜놈과 싸우려면 기장여성청년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한 일도 있다고 합니다.”
공 선생은 “아버지 박재형이 기장 읍내에 나갔다가 상투를 잘리고 돌아왔을 때 어머니 김춘열이 장롱 속 태극기를 꺼내 담장 밑에 묻으면서 통곡하는 모습을 보고서 딸 박순천은 나라 잃은 설움을 가슴 깊이 간직하게 되었다”고 전했다.
동래여고의 전신인 부산진 일신여학교에 입학하여 보통과와 고등과를 마쳤다. 학창 시절 학교 벽에 걸린 일본 천황의 초상화를 긁어서 우는 모양을 만들어 소동을 일으켰고, 일본어 시간에 여선생을 울게 만드는 등 민족정신이 충만한 소녀였다고 한다.
이후 마산 최초의 여학교였던 호주 선교재단의 의신(義信)여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성경 채플과 생리학 겸 동물학을 가르친 일도 있다.
“전라도 순천에 시집갔다가 소박맞고 잠시 우리 집에 와 있다”
(사)기장향토문화연구회가 펴낸 《기장의 독립운동사》(2013년)에는 1919년 3·1운동 당시의 박순천 행적이 잘 묘사돼 있다. 소개하면 이렇다.
〈1919년 3월 5일 박순천은 마산장에 나온 사람들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눠주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며 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 만세운동으로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한 달 옥살이를 한 후 보석으로 풀려났다.
이후 경찰의 가택 수색으로 태극기를 비롯한 독립선언서와 항거계획, 일기장 등이 발견되어 도피 생활을 계속하게 되었다.(하략)〉(339쪽)
겨우 20대 초반의 박순천이 마산장터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한 일을 떠올려보면 여걸이 아닐 수 없다.
― 본명은 ‘명련’이라던데 ‘순천’은 어떻게 해서 지어졌나요.
“그러니까 일경을 피해 경남 함안에 은신 중일 때 ‘만세꾼이 도망 왔다’는 소문이 나돌았다고 해요. 당시 제자의 오빠인 박용구라는 분의 집에 숨어 있었는데 그 집 부인이 이웃 사람들에게 ‘친정 조카인데 전라도 순천에 시집갔다가 소박맞고 잠시 우리 집에 와 있다’고 꾸며댔대요. 이때부터 ‘순천댁’으로 불렸다더군요.”
이후 박순천은 기생으로 변장해 일본으로 건너가 1920년 도쿄 요시오카(吉岡) 여자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기장 집에서 하숙비와 학비를 ‘박명련’이란 이름으로 송금한 것이 드러나 형무소에 수감되고 말았다.
당시 2·8독립선언을 주도했던 동경유학생 조직인 ‘학우회’에서 면회를 왔고, 모임 총무였던 게이오대 변희용(卞熙鎔·1894~1966년·훗날 성균관대 총장 역임)을 만났다. 이후 마산형무소로 이감되어 1년 4개월간 복역한 후 1921년 출옥해 고향 기장으로 돌아왔다.
“계약같이 반지니 무엇이니 정말 싫다”
이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1926년 2월 황신덕(黃信德·1898~1984년), 이현경(李賢卿·1902~?) 등과 함께 한국인 최초로 일본여자대학 사회사업부를 졸업했다.
박순천은 앞서 1924년 12월 24일 서울 무교동 요릿집 태화관에서 변희용과 결혼했다고 한다. 대학 3학년 무렵이다.
최정순(전 서울시의원)이 쓴 국민대 박사 학위 논문 〈박순천 정치리더십 연구〉에 따르면 박순천은 도쿄 유학 중에 맏아들 광호(卞光晧)를 낳고 학업을 마친 뒤 29세인 1926년, 남편 변희용과 함께 귀국하였다고 한다. 시댁이 있는 경북 고령에서 박순천은 “하도 시집살이가 고되어서 한 번은 친정에 편지를 써 보내 어머니가 편찮다는 전보를 보내달라고 부탁”하여 “겨우 친정인 기장으로 빠져나가 한동안 숨을 돌린” 일이 있을 정도로 매운 시집살이를 한 것으로 전해진다.
박순천은 ‘도쿄 유학생 티를 없애려고 시계니 구두니 모두 없애버리고 고무신으로 갈아 신고 탁아소와 야학을 열었다’고 한다. 공 선생의 말이다.
“피폐한 고령 농촌 경제의 구제를 목적으로 고령 부인소비조합을 발기(1931년 10월)하고 회장으로 활동한 일도 있고, 고령군 일대 두 곳에 야학을 개설(33년 6월)하고 자수 강습회(34년 12월)를 열기도 했죠.”
《동아일보》 1935년 1월 3일 자 11면에 박순천의 기고문 ‘신가정을 만드는 용비에 충당할 것’이 실렸는데, “결혼 피로연은 아무 의미 없는 폐풍이므로, 신가정 건설 비용이 필요한 신혼부부의 생활 보장을 위하여 당연히 폐지하자”는 주장을 폈다.
《동아일보》 1936년 1월 1일 자 33면, 1월 4일 자 11면에 실린 ‘당혼(當婚)한 딸을 위한 어머니 좌담회’에 그의 이름이 다시 등장한다. “(결혼식은) 친구한테 통지하고 간단하게 축배나 서로 올리면 그만” “계약같이 반지[指環]니 무엇이니 저는 정말 싫다”며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결혼개혁을 외쳤다.
당시 좌담회에서 “왜 남자들은 여자에게만 대하야 순결을 부르짖습니까. 바로 여자 자신이 순결을 부르짖는다면 그건 별문제이지만”이라고도 했다.
親日 논란의 실체는…
박순천은 일제 경찰의 탄압 회피와 장남의 취학을 위해서 서울행을 택한다. 뚜렷한 수입원이 없던 그는 조선공예사와 금강전구공장에서 여공으로 일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40년 10월 황신덕이 여학교인 경성가정여숙(京城家政女塾)을 설립하자 비공식 ‘부교장’으로 참여하게 된다. 그 이유에 대해 훗날 박순천은 《한국일보》에 연재된 ‘나의 이력서’(1974년 12월 4일 자)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전력 때문에 교사 인가가 나지 않아 부교장 격으로 서무를 맡게 되었다.〉
박순천은 태평양전쟁 당시 일제의 전쟁 지원을 독려했다는 의혹이 있다. 1940년 친일단체인 황도학회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1941년 12월 조선임전보국단 주최의 강연에 ‘국방가정(國防家庭)’, 1942년 1월 ‘전황뉴스를 듣고’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다만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의 강연이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또한 친일 논란에 더하여, 경성가정여숙 학생이었다가 여자 근로정신대에 자원했던 김금진(金今珍)의 증언을 근거로 ‘교장이던 황신덕과 함께 제자를 근로정신대로 보낸 스승’으로도 알려졌다.
제자 김금진은 박순천이 세상을 떠난 뒤인 1992년 6월 5일 자 《뉴스메이커》(《주간경향》 전신)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제가 18세 때 ㅈ여고 2학년 때였어요. 43년 3월경이었는데 황신덕 교장선생이 전교생을 모아놓은 조회에서 ‘우리 학교가 문 닫을 위기에 처해 있다. 여러분 중 한 학생이라도 정신대에 자원하면 학교가 살 수 있을 것이다’라고 간곡히 자원을 호소했어요. 몇 날 며칠을 조회시간마다 간곡히 호소하였는데 정작 지원 학생은 나오지 않았어요. 박순천 부교장 선생도 비슷한 내용의 말을 했어요.”〉(20쪽)
기사 전체(18~20쪽)에서 박순천이 근로정신대에 제자를 보내는 데 관여했다는 의혹은 이 인터뷰에 적힌 ‘박순천 부교장 선생도 비슷한 내용의 말을 했어요’라는 대목뿐이다.
‘박순천 부교장 선생도 비슷한 내용의 말을 했어요’
이에 대해 공 선생은 자신의 생각을 털어놨다.
“김금진이 자원한 정신대는 통상적으로 알려진 일본군 위안부와는 다른 근로여자정신대로 알고 있어요. 학교 폐교를 막기 위해 자원한 것이니 박순천에게 전적으로 책임을 묻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때마침 3선(3~5대) 부산시의원을 지낸 김유환(金有煥·72)씨가 기자를 만나러 찾아왔다. 김 전 의원은 (사)기장향토문화연구회 회장을 역임하며 박순천을 속속들이 연구했다고 한다. 친일 논란으로 좌절됐지만 10여 년 전 박순천기념관 건립추진위원장을 맡은 적도 있다. 그의 말이다.
“박순천 할머니는 장남이 학병으로 끌려가는 것을 보면서도 창씨개명을 끝까지 안 하신 분입니다. 학교(경성가정여숙)에 불이 나자 실화(失火) 혐의를 조사하던 일경(日警)이 교장 이하 교직원 모두가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것을 보고 ‘창씨개명도 안 하고 무슨 학교를 하느냐. 배를 갈라 자결하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끝까지 창씨개명하지 않았죠.
황신덕 교장이 조회 시간에 ‘지금 한둘이라도 (근로정신대에 지원을) 안 하면 학교가 폐교된다’는 사실을 학생들에게 알렸대요. 어떻게 보면 자원을 권유하는 발언을 했지….
이때 박 할머니도 ‘비슷한 내용의 말을 했다’는 겁니다. 《뉴스메이커》에 실린 김 할머니의 인터뷰는 박순천 사후 9년이 지난 뒤에 나온 겁니다. 이걸 가지고 친일파로 몰아서….”
김 전 의원은 속상하다며 말을 이어갔다.
“그게 다입니다. 또 (김금진은) 종군위안부로 간 게 아니고 총알 만드는 군수공장에 갔어요. 사람들은 마치 종군위안부에 가도록 종용했다고 오해하고 있어요. 사실이 아닙니다.
박 할머니의… 역사는 우리 기장의 역사만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역사입니다. 평생 애국하신 분이고 양성평등을 가장 먼저 주장하신 분이죠. 2대 국회의원 시절, 간통 쌍벌죄를 주장, 이를 법제화(형법 1953년 9월 11일 제정)시키셨어요.”
양성평등 구현을 실현한 최초의 여성의원
여성노동자에게 생리일 유급휴가와 산전·산후 60일간 유급휴가를 허용하는 내용의 모성보호 입법을 발의한 이도 박순천이다.(근로기준법 1953년 5월 10일 제정)
― 역사적인 법을 제정했군요.
“사람들은 잊어도 역사는 기록하고 있죠. 남성 우월주의가 팽배하던 시절, 동료 의원이 여자에게만 간통제를 적용하는 법안을 발의하자 강력히 반대해 헌법 제11조에 규정된 남녀평등권에 의한 쌍벌죄로 간통죄를 입법 발의했죠. 양성평등 구현을 실현한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으로 역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한편, 박순천은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교육·학술과 친일단체 부문에 선정된 일이 있다. 그러나 최종 편찬된 《친일인명사전》에는 그의 이름이 없다. 김 전 의원의 말이다.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 조사보고서〉의 친일반민족행위가 결정된 1006명에도 박순천의 이름은 없었습니다.
제가 국회의원실을 통해 ‘국가기록원이 보유 중인 박 할머니의 친일반민족행위자 포함 명단과 반민족행위 내역 일체의 정보 공개’를 요구한 적이 있어요. 어느 쪽에도 박 할머니 이름이 없음을 확인할 수 있었죠.”
― 《친일인명사전》에 등재가 안 됐군요.
“친일 인사가 아니란 것이죠.”
곁에 있던 공태도 선생이 말을 받았다.
“한 번은 국가보훈처에서 박순천의 친지들에게 서훈 신청을 하라고 통보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친일 논란을 의식해서인지 ‘필요 없다’고 거절했다고 해요. 그분들도 큰 상처를 받았나 봅니다.”
《뉴스메이커》 기사와 《중앙70년》의 기록 검증
기자는 1992년 6월 5일 자 《뉴스메이커》 기사 원문을 국립중앙도서관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김금진 할머니는 18세 때인 경성가정여숙 2학년 때 근로여자정신대에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내 한 몸 희생해 학교를 구하자”는 결심이 솟아 교장실로 찾아갔다고 한다. 황신덕 교장이 “후회를 안 하겠느냐”고 다짐을 받은 대목도 기사에 나온다.
제자 김금진이 간 곳은 일본 도야마현(富山縣)의 총알 만드는 군수공장이었다. 김금진은 “지금 생각해도 거기서 다시 종군위안부로 끌려가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다. 2년여 동안 한 차례도 생리를 못 했을 정도로 몸이 형편없이 망가졌다. (귀국해) 그 길로 1년 반을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고 고백했다.
1940년 10월에 개교한 경성가정여숙은 광복 직전인 1945년 1월 중앙여자상과학교(4년제)로, 광복 직후인 그해 12월 중앙고등여학교로 교명이 바뀐다. 지금의 중앙여고(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로)다. 중앙여고가 개교 30주년을 맞아 1970년에 발행한 《중앙70년》이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 중이었다.
놀랍게도 《중앙70년》에 김금진이 근로여자정신대에 자원한 이야기가 비중 있게 실려 있었다. 중앙여고가 중요한 장(章)으로 ‘그 사건’을 다룰 만큼 당시에도 큰 화제였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중앙70년》에 실린 글의 일부다.
〈이때 학교장실에 김금진이란 학생이 교장실 문을 노크하며 찾아왔다.
“학교 문을 닫게 하는 일을 앉아서 볼 수도 없거니와 마침 저는 고향이 함경도라 쉽게 고향에 돌아갈 수도 없는 일이요, 부모 형제도 함께 없고 혼자이니 제가 정신대에 자원을 하겠습니다” 하며 자진하였다.
조국의 비운을 통탄하며 그를 보내는 모두가 서로 손을 잡고 울었다.
김금진의 희생적인 정신에 의해서 학교는 폐교를 면하게 된 것이다.
그는 일본의 어느 군수공장으로 파견되었다가 해방과 더불어 귀국했다. 직원과 학생들은 얼싸안고 울며 웃고, 웃으며 울면서 그를 환영했다. 돌아온 금진은 왼몸에 옴쟁이처럼 두드러기가 뒤덮였고 늑막염으로 열기가 내리지 아니하여 입원 치료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해방이 되어 귀국하게 된 기쁨으로 병은 속히 치료되어 다음 해 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체육과를 졸업하여 수도여중(首都女中)에 근무하다가 결혼하여 유자 생남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학생들은 왜 그리도 정이 두터웠던지…”(박순천)
김금진은 1945년 3월 15일 제3회 졸업생 59명 중 맨 마지막에 이름을 올렸다.
그는 《뉴스메이커》 인터뷰에서 “해방되고 귀국해 학교를 찾아가니 황 교장과 선생님들이 ‘살아서 돌아왔다’며 깜짝들 놀랐다”고 밝힌 바 있다. 《중앙70년》에도 “해방과 더불어 귀국했다”고 적혀 있다. 추정컨대 입학연도를 따져 김금진을 3회 졸업생에 포함시킨 것으로 보인다.
박순천이 ‘폐교 위협’으로 학생들을 협박했거나, 감언이설로 자원케 했다는 주장이 사실인지 여부는 하늘만이 아실지 모른다. 그러나 ‘역사적 진실’로 단정하기엔 무리가 있어 보인다.
흥미롭게도 《중앙70년》에 ‘박순천 부교장’의 회고담이 같이 실려 있다.
〈선생은 학생들을 보고 좋아서 울고, 그저 매일 울음으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또 운동장이 좁아서 학생들이 공을 치다가는 공이 전찻길에 튀어나가 공이 터지면 또 학생들은 울며 불며 애석해했습니다.
그래서 황 교장과 다른 학교에 가면 운동장이 부러워서 발길을 떼지 못했습니다. 학생들은 왜 그리도 정이 두터웠던지 방학 때가 되면 3일 전부터 울고 헤어지고, 개학만 되면 반가워서 붙들고는 울고 했습니다. -전 부교장 박순천-〉
중앙여고가 개교 80주년을 맞아 펴낸 《중앙80년사》(2020년)에는 1951년 졸업생 이옥재 할머니의 박순천에 대한 회고담이 실려 있다. 이 할머니는 “(학교에서) 군복 작업을 할 때는 감시하는 일본 여자가 있었다. 박순천 선생님께서 그 여자를 피해 귓속말로 민비 시해 사건을 알려주었다. 애국심을 잃어버리면 안 된다고 수양회 때마다 강조하셨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정신대 권유가 들어왔다. 그러다 우리 학교에 들어와 애국애족 교육을 받았으니 마음속에 깊이 박힐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누구보다 학교를 사랑하고 제자를 아꼈던 박순천이 학생을 ‘감언이설로 정신대에 보냈’을까. 《중앙70년》에는 ‘조국의 비운을 통탄하며 그(김금진)를 보내는 모두가 서로 손을 잡고 울었다’는 표현이 나온다. 어느 쪽이 더 진실에 가까울까?
물론 김금진이 스승인 황신덕·박순천에게 평생 섭섭한 마음을 가졌을 수밖에 없다는 점도 존중받아야 한다. 김금진은 1983년 박순천이 세상을 떠날 당시 같은 동네(화곡동)에 살았는데도 찾지 않았다고 한다.
기자는 박순천이 타계할 당시 살던 ‘서울 화곡5동 111-61번지’를 찾아가 보았다. 화곡5동은 현재 우장산동으로 동명(洞名)이 바뀌었다. 주변이 모두 다가구 빌라로 변해 옛집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또 누구도 박순천을 기억하는 이가 없었다.
박순천 생가를 찾아가다
김유환 전 의원, 공태도 선생과 더불어 기자는 박순천의 생가를 함께 찾아가 보기로 했다.
안타깝게도 ‘기장군 대변리 88번지’에 생가는 없었다. 도시계획에 따라 도로가 생기면서 생가를 헐어버린 것이다.
김 전 의원과 공 선생이 사진으로 남은 생가 모습을 보여주었다. 일자(一)형 평범한 한옥이었다.
일자형 한옥은 바람이 잘 통할 수 있도록 설계된 구조다. 방과 마루, 부엌이 일자형으로 이뤄졌는데 마루는 방과 방 사이 통풍을 위해 마련됐으리라. 집은 대변항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였다. 어린 시절 늘 바다와 함께 지냈음에 틀림이 없다. 망망대해 바다를 보며 어떤 꿈을 꿨을까. 때로 거친 파도를 보며 한반도의 슬픈 운명을 비관하지 않았을까.
생가가 없는 생가터를 둘러보았다. 그저 흔한 밭뙈기였다. 줄지어 고추 모종이 서 있고 호박넝쿨이랑 옥수숫대, 감나무가 보였다. 고추가 넘어지지 않게 함부로 박은 철제 막대기가 야속하게 느껴졌다.
우물이 보였다. 붉은색 덮개가 있었다. 지금도 두레박이 드리워져 있을까. 우물터 곁에 시멘트 담장이 있었다. 생가의 담장이었을까? 그나마 허물어지고 일부만 남아 있었다.
소녀 박순천, 아니 박명련은 그 담벼락에 앉아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봤을까. 그리고 그 담 뒤로 빽빽이 대나무가 들어서 있었다. 대숲 사이에서 부는 바람은 그에게 어떤 바람이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김 전 의원이 “내가 박순천기념관 건립을 밀어붙이려고 했는데…”라며 답답한 마음을 털어놨다.
“2010년도쯤이었을까. 기념관 건립을 추진했는데 생가 인근 땅이 도로에 들어가 버리니까 무슨 기념관을 짓겠어요.”
― 안타깝네요. (생가터 옆 도로가) 국도인가요, 지방도인가요.
“아뇨, 그저 마을 안길입니다. 이런 길은 군수가 도시계획 결정을 해서 변경시킬 수 있었어요. (군수가) 박 할머니 생가를 역사적 자리라고 판단해서 보존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이후 군수가 바뀌면서 할머니 생가 주변 땅 일부를 매입은 했습니다.”
박순천과 기장 남산봉수대
― 다행이네요. 어느 정도 땅인가요.
“약 170평 정도입니다. 그걸로는 턱없이 부족하고, 보상행정 차원에서 인센티브를 줘서라도 (주변 땅을) 적극 매입해야 했는데 그렇게 못 했어요. 게다가….”
― 게다가….
“박 할머니의 친일 문제가 이후 불거지면서 개 몽댕이(몽둥이) 휘두르듯 사람들이 찾아오고, 거품 물고 할머니를 막 몰아붙이는데, 제가 그것과 싸우면 오히려 할머니를 더 매도하고, 낙인을 찍는 결과를 초래하겠다 싶어서 기념관 건립을 보류할 수밖에 없었어요.”
― 기념관 건립의 꿈을 지금도 갖고 있나요.
“물론이지요. 우리 대(代)에서 지켜내지 못하면 영원히 기대하기 어렵지 않겠어요? 기장의 정체성, 그러니까 일제에 항거하던 그 정신을 못 지키는 셈이 되니까요.
(생가터 주변 뒷산을 손으로 가리키며) 저 뒤에 뭐가 있는 줄 아세요? 봉수대가 있습니다.”
― 봉수대 이름이 뭔가요.
“기장 남산봉수대입니다. 기장읍 죽성리에 있는 이 봉수대는 해안선을 따라 북상해 경북 안동을 거쳐 서울까지 이어집니다.
지금으로부터 1000년 전인 고려 성종 4년(985년)에 설치해 고종 31년(1894년) 갑오개혁 때 폐지된 역사적 공간이죠. 밤에는 불을 피웠고 낮에는 짐승의 똥 등으로 연기를 피워 왜적의 침입이나 그때그때의 위급한 상황을 임금께 보고했다고 합니다.
저 봉수대처럼 향토를 지키는 정신이 바로 기장의 정신이고, 박 할머니의 정신이 아니겠어요?”
박순천의 조카 박성조 교수의 회고
기자는 박순천의 직계 후손을 찾으려 했으나 흔적을 찾을 길이 없었다. 다행히 그의 조카 베를린자유대 박성조(朴聖祚·86) 교수와 연락이 닿았다. 현재 그는 독일에 거주하고 있다. 수십 차례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집안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박순천의 아버지 박재형은 한학자였음에도 호주 선교사 매킨지(J.N.Mackenzie)를 통해 기독교로 개종하셨어요. 향리에 월전교회(지금의 죽성교회)를 설립하셨고 뒷날 대변교회 신축 등에 많은 헌금을 내셨어요. 또 대한예수교 장로회 사기(史記)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동래군(현재 기장군으로 분리되었다-편집자 주) 월전(月田)교회가 성립하다. 선시(先時)에 최상림, 박재형이 종신(從信)하고 인가귀도(引家歸道)하야 기장읍교회에 내왕 예배하더니 지시(至是)하야 예배당을 신축하고 교회를 성립하니라.’
이 기록에 언급된 최상림(崔尙林·?~1945년) 목사는 경남교회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해 1945년 6월 옥중에서 타계한 독립지사입니다.”
박성조 교수와 공태도 선생에 따르면, 박재형은 구한말 참봉 벼슬을 하였고 당시 드문 천석꾼이었다. 소 한 마리와 당나귀 4마리를 사육하는 등 부유층에 속했다. 한학에 능통했으며 영어를 독학으로 배워 성경을 한글로 번역했다고 한다.
사재를 털어 비록 명칭은 ‘서당(대변서당)’이었으나 근대적인 의미의 학교를 세웠고 박순천도 일제가 문을 연 ‘국민학교’를 외면하고 그 ‘서당’에 다녔다. 역사, 지리, 수학, 주판, 음악, 체육, 예술 등 다양한 과목을 가르쳤으며 문맹자를 위한 성인 야간학교도 운영했다고 전한다.
계속된 박 교수의 말이다.
“박재형은 항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음에도 항상 기장 지방에 있었던 항일운동 모임을 뒤에서 음으로 양으로 지원했다고 알고 있어요.
또한 박재형의 아내 김춘열 역시 여걸이었다고 해요. 학교를 나오지는 않았으나 성경을 빨리 읽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사랑스럽지만 엄격하고 강인한 여성이었다고 해요. 처음에는 불교를 믿었으나 기독교로 개종했고 열렬한 반일사상을 지녔다고 하지요.
제 아버지(박창무)에 따르면 박순천은 어릴 때부터 아주 총명했다고 합니다. 박재형이 세운 학교에서 공부하다 14~15세 때 집을 떠나 부산에서 학교를 다녔다고 해요. 기장 3·1운동에 가담해 수배 중인 박순천이 일본으로 밀항할 때 오빠인 박창무가 자금을 마련해 전달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기회주의적인 유연성’에 철저히 반대입장”
― 조심스런 질문입니다만, 박순천의 친일 논란을 어떻게 보시나요.
“조카가 고모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긴 어렵지만, 과거엔 광복 이전의 행적을 두고 ‘박순천은 유관순’이라고 평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훗날 일본 제국주의에 동조했고, 제자를 정신대로 보냈다고 하여 친일파로 혹평했지만 아무런 증거가 없습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어느 대학교수와 통화한 일이 있습니다. 아무 증거도 없고, 전해 들은 이야기라고 주장하였어요.”
― 정치인으로서의 박순천은 어떻게 평가하나요.
“제가 대학(서울대 정치학과)에 다닐 때를 떠올리면 ‘두 젊은 정치인’(YS와 DJ)이 매주 박순천을 방문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시엔 지역 간 적대감정이 전혀 없었어요. 박순천은 호남이나 영남에서 아무런 편견 없이 환영받던 정치인이었어요.”
또 박성조 교수는 “박순천을 부정부패를 모르는 보수 지도자”라고 평했다.
“박순천은 뇌물이나 부정행위를 절대 용납하지 않았어요. 제가 동백림 사건으로 중앙정보부에 의해 한국으로 납치됐을 때의 일입니다. 제 담당 검사가 ‘박순천에게 말해 좋은 곳으로 영전시켜달라’고 부탁해달라기에 전했더니 고모가 크게 노하시며 저를 꾸중한 적도 있었어요.
늘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는데 세비와 남편 월급으로 정치하기가 빠듯했나 봅니다. 슬하에 3남 4녀를 키우는 것도 힘이 들었을 거예요. 금전적 유혹이 있었으나 늘 거부했다고 해요. 다만 친정 조카인 동양실업사장(朴聖弼·작고)이 지원하다 경찰과 검찰에 여러 번 불려가 혹독한 고문을 받은 적이 있었어요. 박성필이 바로 제 친형입니다. 결국 박성필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고 말았어요.”
“지금까지 한국에 그런 여성 지도자는 없습니다”
― 이념적인 측면에서 정치 지도자 박순천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박순천은 이념이나 특별한 신념을 따르는 맹종자는 아니었어요. 그러나 애국주의와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결의와 합의는 철두철미하게 지키는 성격이었죠. 일제 때 항일운동을 하다 수감된 전력이 애국주의를 입증하고 있어요. 광복 이후 신탁통치 논란이 일자 치열하게 반대운동을 전개했지요.
6·25 당시 인민군이 쳐들어왔을 때 국회는 ‘서울시민을 버리고 피란가지 않겠다’고 결의했음에도 다수의 국회의원이 피란을 떠났으나 박순천은 떠나지 않고 서울에서 숨어 지냈어요. 이승만·박정희 정권 때도 ‘기회주의적인 유연성’에는 철저히 반대하는 입장이었죠.”
박 교수는 덧붙여 이렇게 말했다.
“박순천은 기회주의적으로 정치 활동을 하지 않았고 시종일관 정의감과 확고한 신념으로 남성 정치세계에 큰 기여를 하였지요. 야당의 당수로 그의 리더십은 남성을 압도했습니다.
타고난 웅변술에 수많은 관중이 환호한 일도 있어요. 그가 한강에서 연설을 하면 100만 명이 운집했다고 하지요. 지금까지 한국에 그런 여성 지도자는 없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정당 당수(黨首)로 1966년 민중당 대표최고위원을 지냈다. 1950년 5월 2대 국회 때 서울 종로갑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된 뒤 4~7대 의원을 지낸 5선(選) 의원.
아직 이 여성 최다선 기록을 깬 이는 없다. 박근혜·이미경·추미애·김영선이 5선이지만 6선은 없다. 굳이 따지자면 최초 5선 여성 국회의원이다.
《조선일보》는 1983년 1월 11일 자 10면에 ‘격동기(激動期)에 남긴 큰 발자취’라는 제하의 기사로 박순천의 영면을 애도했다.
〈9일 밤 타계한 박순천 여사는 생존 시에 원이름보다 ‘박 할머니’란 이명(異名)으로 더 널리 통했고 본인 역시 이렇게 불리는 것을 반겨했었다.
최초의 본격적인 여성 정치인이자 최초의 여성 당수 등 여사를 가리키는 ‘기록적’ 의미의 수식어는 갖가지였지만 소박한 인품과 구수한 체취는 이런 별스런 칭호를 스스로 사양했었기 때문이었다.(하략)〉
박순천은 ‘여성’이나 ‘정치인’이란 한정된 구분을 훨씬 뛰어넘는 여걸이었다. 평소 존경하던 이승만(李承晩·1875~1965년) 대통령이 발췌개헌(1952년 7월 부산의 피란국회에서 통과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첫 헌법 개정)을 하자 결별, 장면(張勉·1899~1966년) 등과 함께 민주당을 창당했다.
자유당 시절, 반독재투쟁에 앞장섰으며 여성 본연의 부드러움과 포용력으로 민주당의 신·구파 투쟁에 완충역을 했고 당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무술(武術) 경관에게 맞아 타계할 때까지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2010년 박순천기념관 추진되다 중단
‘박 할머니’ 박순천은 빼어난 대중연설로 수많은 청중을 사로잡았다. 사진은 1969년 10월 16일 서울 효창구장이다. |
그사이 생가는 허물어지고, 생가터의 절반은 마을도로가 잘라먹었다. 기자가 찾아간 생가 주변은 그저 흔한 밭뙈기에 불과했다. 호박이 넝쿨을 틀고 고추가 익어가며 주민이 한가로이 농약을 치고 있었다.
윙윙거리는 벌과 날파리가 한국 근현대사의 호걸이 나고 자란 ‘창세기’ 공간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있었다. 기억할 만한 조그마한 표석 하나 없었다. 우물터만 그대로였다. 안타깝게도 고향에서 먼저 박순천은 무명인(無名人)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하늘이 보우하사, 아직도 박순천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있었다. 기자는 부산 기장의 대변항을 찾아갔다. 지난 6월의 일이다.
향토사학자 공태도(孔泰道·90) 선생은 부산 기장이 고향이다. 바다를 끼고 있는 기장은 조선 시대부터 기장미역, 기장갈치, 기장멸치로 명성을 떨쳤다. 정철(鄭澈·1536~1593년)의 가사(歌辭)와 더불어 조선시가의 쌍벽을 이루는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1587~1671년)가 기장에서 귀양살이를 하면서 모두 29편의 글을 남겼다. 정확히 1618년 11월 서른두 살 나이에 기장으로 유배돼 6년을 보냈다.
공 선생은 부산 《국제신문》과 《부산일보》의 부산 동래군, 양산군 주재기자로 35년 동안 일했다. 특종 중 하나가 1991년 쓴 ‘윤선도의 문헌발굴’ 기사다. 당시만 해도 고산이 기장으로 유배된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다. 고산에 대한 문헌과 사료를 찾아 백방으로 뛰어 시와 제문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기자와 만난 공 선생은 박순천 얘기에 앞서 기장이 낳은 독립운동가를 일일이 설명하기 시작했다.
“1900년대 자그마한 이 읍소재지 기장은 한글학자이며 독립운동가인 김두봉(金枓奉·1889~?) 선생을 비롯해 제헌국회 때 초대 부의장인 김약수(金若水·1892~?), 그리고 독립운동가 김종엽(金鍾燁·1897~1969년)·김도엽(金度燁·1899~1937년)·구수암(具壽巖·1901~1920년) 등과 동래고 ‘장산 횃불 사건’의 주동자인 박영출(朴英出·1907~1938년), 부산 항일학생의거(일명 ‘노다이’ 사건)의 이도윤(李道胤·1923~?) 등 20여 애국지사를 배출한 위대한 고장입니다.
그분들은 자기 목숨을 초개(草芥)와 같이 던졌어요. 기장이 인물의 고장입니다.”
― 애국지사가 많은 배경이 있나요.
“비록 ‘삼정승 육판서’ 같은 이는 없어도 나라가 어려움에 처하면 인물이 나타났어요. 지리적 여건과 바다와 싸운 강인한 정신 때문이 아닐까요? 신라 때 침입한 왜적이 1396년 배 120척을 앞세워 기장읍성과 동래읍성을 점유한 일이 있었어요. 또 임란(壬亂)을 일으켜 조상들의 코와 귀를 베어간 역사도 있지요.
시적(詩的)으로 표현하자면, 단절의 세월 속에서 불의와 맞서 피로 거름하신 선열들의 노호(怒號·성내어 소리 지름)가 산야(山野)를 적시며 대하(大河)처럼 도도히 기장을 흐르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 1910년 당시 기장의 유림들과 유지들이 항일운동의 디딤돌을 놓았다고 하더군요.
“그분들이 기장 보명학교와 여성 교육기관인 명정의숙을 설립했지요.”
1905년 전후로 설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보명학교는 기장 지역 청년들을 대상으로 민족계몽운동 교육의 산실 역할을 했다고 한다. 보명학교 출신으로 독립운동가 김두봉·김약수·김종엽 등이 있다.
여학교인 명정의숙은 1910년 기장에 세워진 민족학당이다. 기장 지역 유지들의 기부금으로 설립되어 1918년 애국지사 박세현(朴世鉉·1897~1917년) 교장의 옥사 후 해체되고 말았다.
기장이 낳은 독립운동가들
기장군의 독립운동사를 설명하는 공태도 선생이다. 20여 명의 애국지사가 기장에서 배출되었다. |
“명정의숙 학생 40여 명이 1919년 기장 만세 사건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고 합니다. 또 기장 3·1운동 주동의 한 사람인 구수암 의사(義士)가 옥사한 후 장례를 기장면민장으로 이끌어낸 이들이 명정의숙 출신들이에요. 장례식 때 여학생들이 조사(弔詞)를 읽고 만장기(挽章旗)를 앞세워 일경(日警)에 항의한 일도 있다고 하지요.”
공 선생은 “박순천을 이해하려면 이런 기장의 독립운동사를 이해해야 한다”며 ‘명정의숙가’ 이야기를 보탰다.
“김 기자! ‘명정의숙가’란 게 기장에 있어요. 구구절절 나라를 찾아야 된다는 가사로 엮어져 있어요. 또 학생들이 불렀던 ‘애국의 노래(꿈을 깨세)’는 오매불망 국권회복 성취를 위해 나아가자는 내용입니다.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볼 수 없는 사료가치가 높은 노래지요. ‘애국의 노래’는 1936년 안익태(安益泰·1906~1965년)가 지은 ‘애국가’보다 20년이나 앞선 1916년에 이미 기장 사람이 지어 불렀지요.
이런 일들로 볼 때 기장의 항일운동 의식이 얼마나 높게 불탔는지 알 수 있어요.”
꿈을 깨세 꿈을 깨세 얼른 꿈 깨서
어하 우리 학도(學徒)들아 얼른 꿈 깨서
들었나 못 들었나 저 새 소리
처처(處處)에서 지직이고(지저귀고) 햇빛이 비치네
들려오네 들려온다 문명의 종소리
구주(歐洲)에서 미주(美洲)에서 일본에서도
학도들아 학도들아 청년학도들아
우리들도 꿈을 깨서 얼른 배아서(배워서)
오매불망 국권회복 성취하고서
세계열강 대열 속에 전진해보세
-박우돌 작사 〈애국의 노래(꿈을 깨세)〉 전문
소를 타고 日警을 놀리다
공태도 선생은 ‘기장 독립운동 약사(略史)’ 강의를 마치고 박순천 가계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에 따르면 박순천은 1898년 음력 9월 10일 한학자인 박재형(朴在衡)과 김춘열(金春烈)의 슬하에서 태어났다. 주소는 부산 기장군 대변리 88번지. 본관은 밀양이고 본명은 명련(命連). 부모는 딸의 명줄이 길게 이어지기를 바라는 뜻에서 이름을 이렇게 지었다고 한다.
정확히는 외동딸이다. 아들을 낳지 못해 양자를 들였는데 이름이 박창무(朴昌茂·1885~1938년)다. 공 선생의 말이다.
“박순천은 어릴 때 남장을 하고 ‘대변서당’에 다녔고 사내아이들과 곧잘 어울려 낚시질을 할 만큼 활달했다고 합니다. 한 번은 소를 타고 일본 주재소 앞을 다니면서 일경들을 놀려주었다고 해요. 명정의숙에 다니던 후배를 찾아가 ‘왜놈과 싸우려면 기장여성청년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한 일도 있다고 합니다.”
공 선생은 “아버지 박재형이 기장 읍내에 나갔다가 상투를 잘리고 돌아왔을 때 어머니 김춘열이 장롱 속 태극기를 꺼내 담장 밑에 묻으면서 통곡하는 모습을 보고서 딸 박순천은 나라 잃은 설움을 가슴 깊이 간직하게 되었다”고 전했다.
동래여고의 전신인 부산진 일신여학교에 입학하여 보통과와 고등과를 마쳤다. 학창 시절 학교 벽에 걸린 일본 천황의 초상화를 긁어서 우는 모양을 만들어 소동을 일으켰고, 일본어 시간에 여선생을 울게 만드는 등 민족정신이 충만한 소녀였다고 한다.
이후 마산 최초의 여학교였던 호주 선교재단의 의신(義信)여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성경 채플과 생리학 겸 동물학을 가르친 일도 있다.
부산 기장군 대변리 88번지 박순천의 생가 모습이다. 지금은 허물어지고 없다(사진 왼쪽). 박순천은 고향인 부산 기장에서 3·1운동을 하다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사진=독립기념관 제공 |
〈1919년 3월 5일 박순천은 마산장에 나온 사람들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눠주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며 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 만세운동으로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한 달 옥살이를 한 후 보석으로 풀려났다.
이후 경찰의 가택 수색으로 태극기를 비롯한 독립선언서와 항거계획, 일기장 등이 발견되어 도피 생활을 계속하게 되었다.(하략)〉(339쪽)
겨우 20대 초반의 박순천이 마산장터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한 일을 떠올려보면 여걸이 아닐 수 없다.
― 본명은 ‘명련’이라던데 ‘순천’은 어떻게 해서 지어졌나요.
“그러니까 일경을 피해 경남 함안에 은신 중일 때 ‘만세꾼이 도망 왔다’는 소문이 나돌았다고 해요. 당시 제자의 오빠인 박용구라는 분의 집에 숨어 있었는데 그 집 부인이 이웃 사람들에게 ‘친정 조카인데 전라도 순천에 시집갔다가 소박맞고 잠시 우리 집에 와 있다’고 꾸며댔대요. 이때부터 ‘순천댁’으로 불렸다더군요.”
이후 박순천은 기생으로 변장해 일본으로 건너가 1920년 도쿄 요시오카(吉岡) 여자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기장 집에서 하숙비와 학비를 ‘박명련’이란 이름으로 송금한 것이 드러나 형무소에 수감되고 말았다.
당시 2·8독립선언을 주도했던 동경유학생 조직인 ‘학우회’에서 면회를 왔고, 모임 총무였던 게이오대 변희용(卞熙鎔·1894~1966년·훗날 성균관대 총장 역임)을 만났다. 이후 마산형무소로 이감되어 1년 4개월간 복역한 후 1921년 출옥해 고향 기장으로 돌아왔다.
“계약같이 반지니 무엇이니 정말 싫다”
《동아일보》 1936년 1월 1일 자에 실린 박순천의 사진. |
박순천은 앞서 1924년 12월 24일 서울 무교동 요릿집 태화관에서 변희용과 결혼했다고 한다. 대학 3학년 무렵이다.
최정순(전 서울시의원)이 쓴 국민대 박사 학위 논문 〈박순천 정치리더십 연구〉에 따르면 박순천은 도쿄 유학 중에 맏아들 광호(卞光晧)를 낳고 학업을 마친 뒤 29세인 1926년, 남편 변희용과 함께 귀국하였다고 한다. 시댁이 있는 경북 고령에서 박순천은 “하도 시집살이가 고되어서 한 번은 친정에 편지를 써 보내 어머니가 편찮다는 전보를 보내달라고 부탁”하여 “겨우 친정인 기장으로 빠져나가 한동안 숨을 돌린” 일이 있을 정도로 매운 시집살이를 한 것으로 전해진다.
박순천은 ‘도쿄 유학생 티를 없애려고 시계니 구두니 모두 없애버리고 고무신으로 갈아 신고 탁아소와 야학을 열었다’고 한다. 공 선생의 말이다.
“피폐한 고령 농촌 경제의 구제를 목적으로 고령 부인소비조합을 발기(1931년 10월)하고 회장으로 활동한 일도 있고, 고령군 일대 두 곳에 야학을 개설(33년 6월)하고 자수 강습회(34년 12월)를 열기도 했죠.”
《동아일보》 1935년 1월 3일 자 11면에 박순천의 기고문 ‘신가정을 만드는 용비에 충당할 것’이 실렸는데, “결혼 피로연은 아무 의미 없는 폐풍이므로, 신가정 건설 비용이 필요한 신혼부부의 생활 보장을 위하여 당연히 폐지하자”는 주장을 폈다.
《동아일보》 1936년 1월 1일 자 33면, 1월 4일 자 11면에 실린 ‘당혼(當婚)한 딸을 위한 어머니 좌담회’에 그의 이름이 다시 등장한다. “(결혼식은) 친구한테 통지하고 간단하게 축배나 서로 올리면 그만” “계약같이 반지[指環]니 무엇이니 저는 정말 싫다”며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결혼개혁을 외쳤다.
당시 좌담회에서 “왜 남자들은 여자에게만 대하야 순결을 부르짖습니까. 바로 여자 자신이 순결을 부르짖는다면 그건 별문제이지만”이라고도 했다.
1992년 6월 5일 자 《뉴스메이커》에 실린 기사 〈故 박순천·황신덕 말못할 사연〉. |
그러다가 1940년 10월 황신덕이 여학교인 경성가정여숙(京城家政女塾)을 설립하자 비공식 ‘부교장’으로 참여하게 된다. 그 이유에 대해 훗날 박순천은 《한국일보》에 연재된 ‘나의 이력서’(1974년 12월 4일 자)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전력 때문에 교사 인가가 나지 않아 부교장 격으로 서무를 맡게 되었다.〉
박순천은 태평양전쟁 당시 일제의 전쟁 지원을 독려했다는 의혹이 있다. 1940년 친일단체인 황도학회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1941년 12월 조선임전보국단 주최의 강연에 ‘국방가정(國防家庭)’, 1942년 1월 ‘전황뉴스를 듣고’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다만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의 강연이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또한 친일 논란에 더하여, 경성가정여숙 학생이었다가 여자 근로정신대에 자원했던 김금진(金今珍)의 증언을 근거로 ‘교장이던 황신덕과 함께 제자를 근로정신대로 보낸 스승’으로도 알려졌다.
제자 김금진은 박순천이 세상을 떠난 뒤인 1992년 6월 5일 자 《뉴스메이커》(《주간경향》 전신)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제가 18세 때 ㅈ여고 2학년 때였어요. 43년 3월경이었는데 황신덕 교장선생이 전교생을 모아놓은 조회에서 ‘우리 학교가 문 닫을 위기에 처해 있다. 여러분 중 한 학생이라도 정신대에 자원하면 학교가 살 수 있을 것이다’라고 간곡히 자원을 호소했어요. 몇 날 며칠을 조회시간마다 간곡히 호소하였는데 정작 지원 학생은 나오지 않았어요. 박순천 부교장 선생도 비슷한 내용의 말을 했어요.”〉(20쪽)
기사 전체(18~20쪽)에서 박순천이 근로정신대에 제자를 보내는 데 관여했다는 의혹은 이 인터뷰에 적힌 ‘박순천 부교장 선생도 비슷한 내용의 말을 했어요’라는 대목뿐이다.
‘박순천 부교장 선생도 비슷한 내용의 말을 했어요’
《중앙70년》에 실린 경성가정여숙 시절 황신덕 교장(뒷줄 왼쪽)과 박순천 부교장(뒷줄 오른쪽). |
“김금진이 자원한 정신대는 통상적으로 알려진 일본군 위안부와는 다른 근로여자정신대로 알고 있어요. 학교 폐교를 막기 위해 자원한 것이니 박순천에게 전적으로 책임을 묻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때마침 3선(3~5대) 부산시의원을 지낸 김유환(金有煥·72)씨가 기자를 만나러 찾아왔다. 김 전 의원은 (사)기장향토문화연구회 회장을 역임하며 박순천을 속속들이 연구했다고 한다. 친일 논란으로 좌절됐지만 10여 년 전 박순천기념관 건립추진위원장을 맡은 적도 있다. 그의 말이다.
“박순천 할머니는 장남이 학병으로 끌려가는 것을 보면서도 창씨개명을 끝까지 안 하신 분입니다. 학교(경성가정여숙)에 불이 나자 실화(失火) 혐의를 조사하던 일경(日警)이 교장 이하 교직원 모두가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것을 보고 ‘창씨개명도 안 하고 무슨 학교를 하느냐. 배를 갈라 자결하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끝까지 창씨개명하지 않았죠.
황신덕 교장이 조회 시간에 ‘지금 한둘이라도 (근로정신대에 지원을) 안 하면 학교가 폐교된다’는 사실을 학생들에게 알렸대요. 어떻게 보면 자원을 권유하는 발언을 했지….
이때 박 할머니도 ‘비슷한 내용의 말을 했다’는 겁니다. 《뉴스메이커》에 실린 김 할머니의 인터뷰는 박순천 사후 9년이 지난 뒤에 나온 겁니다. 이걸 가지고 친일파로 몰아서….”
김 전 의원은 속상하다며 말을 이어갔다.
“그게 다입니다. 또 (김금진은) 종군위안부로 간 게 아니고 총알 만드는 군수공장에 갔어요. 사람들은 마치 종군위안부에 가도록 종용했다고 오해하고 있어요. 사실이 아닙니다.
박 할머니의… 역사는 우리 기장의 역사만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역사입니다. 평생 애국하신 분이고 양성평등을 가장 먼저 주장하신 분이죠. 2대 국회의원 시절, 간통 쌍벌죄를 주장, 이를 법제화(형법 1953년 9월 11일 제정)시키셨어요.”
양성평등 구현을 실현한 최초의 여성의원
여성노동자에게 생리일 유급휴가와 산전·산후 60일간 유급휴가를 허용하는 내용의 모성보호 입법을 발의한 이도 박순천이다.(근로기준법 1953년 5월 10일 제정)
― 역사적인 법을 제정했군요.
“사람들은 잊어도 역사는 기록하고 있죠. 남성 우월주의가 팽배하던 시절, 동료 의원이 여자에게만 간통제를 적용하는 법안을 발의하자 강력히 반대해 헌법 제11조에 규정된 남녀평등권에 의한 쌍벌죄로 간통죄를 입법 발의했죠. 양성평등 구현을 실현한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으로 역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한편, 박순천은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교육·학술과 친일단체 부문에 선정된 일이 있다. 그러나 최종 편찬된 《친일인명사전》에는 그의 이름이 없다. 김 전 의원의 말이다.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 조사보고서〉의 친일반민족행위가 결정된 1006명에도 박순천의 이름은 없었습니다.
제가 국회의원실을 통해 ‘국가기록원이 보유 중인 박 할머니의 친일반민족행위자 포함 명단과 반민족행위 내역 일체의 정보 공개’를 요구한 적이 있어요. 어느 쪽에도 박 할머니 이름이 없음을 확인할 수 있었죠.”
― 《친일인명사전》에 등재가 안 됐군요.
“친일 인사가 아니란 것이죠.”
곁에 있던 공태도 선생이 말을 받았다.
“한 번은 국가보훈처에서 박순천의 친지들에게 서훈 신청을 하라고 통보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친일 논란을 의식해서인지 ‘필요 없다’고 거절했다고 해요. 그분들도 큰 상처를 받았나 봅니다.”
《뉴스메이커》 기사와 《중앙70년》의 기록 검증
기자는 1992년 6월 5일 자 《뉴스메이커》 기사 원문을 국립중앙도서관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김금진 할머니는 18세 때인 경성가정여숙 2학년 때 근로여자정신대에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내 한 몸 희생해 학교를 구하자”는 결심이 솟아 교장실로 찾아갔다고 한다. 황신덕 교장이 “후회를 안 하겠느냐”고 다짐을 받은 대목도 기사에 나온다.
제자 김금진이 간 곳은 일본 도야마현(富山縣)의 총알 만드는 군수공장이었다. 김금진은 “지금 생각해도 거기서 다시 종군위안부로 끌려가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다. 2년여 동안 한 차례도 생리를 못 했을 정도로 몸이 형편없이 망가졌다. (귀국해) 그 길로 1년 반을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고 고백했다.
1940년 10월에 개교한 경성가정여숙은 광복 직전인 1945년 1월 중앙여자상과학교(4년제)로, 광복 직후인 그해 12월 중앙고등여학교로 교명이 바뀐다. 지금의 중앙여고(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로)다. 중앙여고가 개교 30주년을 맞아 1970년에 발행한 《중앙70년》이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 중이었다.
놀랍게도 《중앙70년》에 김금진이 근로여자정신대에 자원한 이야기가 비중 있게 실려 있었다. 중앙여고가 중요한 장(章)으로 ‘그 사건’을 다룰 만큼 당시에도 큰 화제였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중앙70년》에 실린 글의 일부다.
〈이때 학교장실에 김금진이란 학생이 교장실 문을 노크하며 찾아왔다.
“학교 문을 닫게 하는 일을 앉아서 볼 수도 없거니와 마침 저는 고향이 함경도라 쉽게 고향에 돌아갈 수도 없는 일이요, 부모 형제도 함께 없고 혼자이니 제가 정신대에 자원을 하겠습니다” 하며 자진하였다.
조국의 비운을 통탄하며 그를 보내는 모두가 서로 손을 잡고 울었다.
김금진의 희생적인 정신에 의해서 학교는 폐교를 면하게 된 것이다.
그는 일본의 어느 군수공장으로 파견되었다가 해방과 더불어 귀국했다. 직원과 학생들은 얼싸안고 울며 웃고, 웃으며 울면서 그를 환영했다. 돌아온 금진은 왼몸에 옴쟁이처럼 두드러기가 뒤덮였고 늑막염으로 열기가 내리지 아니하여 입원 치료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해방이 되어 귀국하게 된 기쁨으로 병은 속히 치료되어 다음 해 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체육과를 졸업하여 수도여중(首都女中)에 근무하다가 결혼하여 유자 생남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학생들은 왜 그리도 정이 두터웠던지…”(박순천)
경성가정여숙이 1944년 3월 서울 견지동 교사로 이전할 당시 교직원들이다. 앞줄 왼쪽 끝이 박순천 부교장. 왼쪽에서 세 번째가 황신덕 교장. |
그는 《뉴스메이커》 인터뷰에서 “해방되고 귀국해 학교를 찾아가니 황 교장과 선생님들이 ‘살아서 돌아왔다’며 깜짝들 놀랐다”고 밝힌 바 있다. 《중앙70년》에도 “해방과 더불어 귀국했다”고 적혀 있다. 추정컨대 입학연도를 따져 김금진을 3회 졸업생에 포함시킨 것으로 보인다.
박순천이 ‘폐교 위협’으로 학생들을 협박했거나, 감언이설로 자원케 했다는 주장이 사실인지 여부는 하늘만이 아실지 모른다. 그러나 ‘역사적 진실’로 단정하기엔 무리가 있어 보인다.
흥미롭게도 《중앙70년》에 ‘박순천 부교장’의 회고담이 같이 실려 있다.
〈선생은 학생들을 보고 좋아서 울고, 그저 매일 울음으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또 운동장이 좁아서 학생들이 공을 치다가는 공이 전찻길에 튀어나가 공이 터지면 또 학생들은 울며 불며 애석해했습니다.
그래서 황 교장과 다른 학교에 가면 운동장이 부러워서 발길을 떼지 못했습니다. 학생들은 왜 그리도 정이 두터웠던지 방학 때가 되면 3일 전부터 울고 헤어지고, 개학만 되면 반가워서 붙들고는 울고 했습니다. -전 부교장 박순천-〉
중앙여고가 개교 80주년을 맞아 펴낸 《중앙80년사》(2020년)에는 1951년 졸업생 이옥재 할머니의 박순천에 대한 회고담이 실려 있다. 이 할머니는 “(학교에서) 군복 작업을 할 때는 감시하는 일본 여자가 있었다. 박순천 선생님께서 그 여자를 피해 귓속말로 민비 시해 사건을 알려주었다. 애국심을 잃어버리면 안 된다고 수양회 때마다 강조하셨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정신대 권유가 들어왔다. 그러다 우리 학교에 들어와 애국애족 교육을 받았으니 마음속에 깊이 박힐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누구보다 학교를 사랑하고 제자를 아꼈던 박순천이 학생을 ‘감언이설로 정신대에 보냈’을까. 《중앙70년》에는 ‘조국의 비운을 통탄하며 그(김금진)를 보내는 모두가 서로 손을 잡고 울었다’는 표현이 나온다. 어느 쪽이 더 진실에 가까울까?
물론 김금진이 스승인 황신덕·박순천에게 평생 섭섭한 마음을 가졌을 수밖에 없다는 점도 존중받아야 한다. 김금진은 1983년 박순천이 세상을 떠날 당시 같은 동네(화곡동)에 살았는데도 찾지 않았다고 한다.
기자는 박순천이 타계할 당시 살던 ‘서울 화곡5동 111-61번지’를 찾아가 보았다. 화곡5동은 현재 우장산동으로 동명(洞名)이 바뀌었다. 주변이 모두 다가구 빌라로 변해 옛집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또 누구도 박순천을 기억하는 이가 없었다.
박순천기념관과 박태준기념관 역대 기장군의회 회의록을 살펴보니, 박순천 생가 복원과 기념관 건립을 두고 의원들 간 찬반 논란이 있었다. 일부 반대 의원은 박순천의 ‘친일 행적’을 거론했다. 2010년 12월 7일 기장군의회 예결특위. K의원은 박순천을 “사랑하는 제자를 정신대에 보내서 한 여성의 인권을 완전히 유린한 인물”로 묘사하며 기념관 건립에 반대했다. 결국 예결위원 6명이 표결에 부쳐 박순천기념관 건립 여부를 물었다. 그 결과 4명이 찬성, 추진이 이뤄졌다. 그러나 기장군 측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아 이후 동력을 잃어버렸다. 친일 논란이 계속 불거졌기 때문이리라. 반면, 박순천기념관과 비슷한 시기에 추진됐던 ‘철의 사나이’ 박태준(朴泰俊·1927~2011년) 포스코 명예회장의 기념관은 82억원을 들여 지난 2015년부터 공사를 시작해 작년 12월 공식 개관했다. |
박순천 생가를 찾아가다
김유환 전 市의원이 박순천의 생가터(기장군 대변리 88번지)를 설명하고 있다. 생가터가 밭뙈기로 변해 있다. |
안타깝게도 ‘기장군 대변리 88번지’에 생가는 없었다. 도시계획에 따라 도로가 생기면서 생가를 헐어버린 것이다.
김 전 의원과 공 선생이 사진으로 남은 생가 모습을 보여주었다. 일자(一)형 평범한 한옥이었다.
일자형 한옥은 바람이 잘 통할 수 있도록 설계된 구조다. 방과 마루, 부엌이 일자형으로 이뤄졌는데 마루는 방과 방 사이 통풍을 위해 마련됐으리라. 집은 대변항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였다. 어린 시절 늘 바다와 함께 지냈음에 틀림이 없다. 망망대해 바다를 보며 어떤 꿈을 꿨을까. 때로 거친 파도를 보며 한반도의 슬픈 운명을 비관하지 않았을까.
생가가 없는 생가터를 둘러보았다. 그저 흔한 밭뙈기였다. 줄지어 고추 모종이 서 있고 호박넝쿨이랑 옥수숫대, 감나무가 보였다. 고추가 넘어지지 않게 함부로 박은 철제 막대기가 야속하게 느껴졌다.
우물이 보였다. 붉은색 덮개가 있었다. 지금도 두레박이 드리워져 있을까. 우물터 곁에 시멘트 담장이 있었다. 생가의 담장이었을까? 그나마 허물어지고 일부만 남아 있었다.
소녀 박순천, 아니 박명련은 그 담벼락에 앉아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봤을까. 그리고 그 담 뒤로 빽빽이 대나무가 들어서 있었다. 대숲 사이에서 부는 바람은 그에게 어떤 바람이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김 전 의원이 “내가 박순천기념관 건립을 밀어붙이려고 했는데…”라며 답답한 마음을 털어놨다.
“2010년도쯤이었을까. 기념관 건립을 추진했는데 생가 인근 땅이 도로에 들어가 버리니까 무슨 기념관을 짓겠어요.”
― 안타깝네요. (생가터 옆 도로가) 국도인가요, 지방도인가요.
“아뇨, 그저 마을 안길입니다. 이런 길은 군수가 도시계획 결정을 해서 변경시킬 수 있었어요. (군수가) 박 할머니 생가를 역사적 자리라고 판단해서 보존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이후 군수가 바뀌면서 할머니 생가 주변 땅 일부를 매입은 했습니다.”
박순천과 기장 남산봉수대
월남 파병 군인을 만난 박순천 여사. |
“약 170평 정도입니다. 그걸로는 턱없이 부족하고, 보상행정 차원에서 인센티브를 줘서라도 (주변 땅을) 적극 매입해야 했는데 그렇게 못 했어요. 게다가….”
― 게다가….
“박 할머니의 친일 문제가 이후 불거지면서 개 몽댕이(몽둥이) 휘두르듯 사람들이 찾아오고, 거품 물고 할머니를 막 몰아붙이는데, 제가 그것과 싸우면 오히려 할머니를 더 매도하고, 낙인을 찍는 결과를 초래하겠다 싶어서 기념관 건립을 보류할 수밖에 없었어요.”
― 기념관 건립의 꿈을 지금도 갖고 있나요.
“물론이지요. 우리 대(代)에서 지켜내지 못하면 영원히 기대하기 어렵지 않겠어요? 기장의 정체성, 그러니까 일제에 항거하던 그 정신을 못 지키는 셈이 되니까요.
(생가터 주변 뒷산을 손으로 가리키며) 저 뒤에 뭐가 있는 줄 아세요? 봉수대가 있습니다.”
― 봉수대 이름이 뭔가요.
“기장 남산봉수대입니다. 기장읍 죽성리에 있는 이 봉수대는 해안선을 따라 북상해 경북 안동을 거쳐 서울까지 이어집니다.
지금으로부터 1000년 전인 고려 성종 4년(985년)에 설치해 고종 31년(1894년) 갑오개혁 때 폐지된 역사적 공간이죠. 밤에는 불을 피웠고 낮에는 짐승의 똥 등으로 연기를 피워 왜적의 침입이나 그때그때의 위급한 상황을 임금께 보고했다고 합니다.
저 봉수대처럼 향토를 지키는 정신이 바로 기장의 정신이고, 박 할머니의 정신이 아니겠어요?”
박순천의 조카 박성조 교수의 회고
박순천의 조카 베를린자유대 박성조 종신교수. |
“박순천의 아버지 박재형은 한학자였음에도 호주 선교사 매킨지(J.N.Mackenzie)를 통해 기독교로 개종하셨어요. 향리에 월전교회(지금의 죽성교회)를 설립하셨고 뒷날 대변교회 신축 등에 많은 헌금을 내셨어요. 또 대한예수교 장로회 사기(史記)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동래군(현재 기장군으로 분리되었다-편집자 주) 월전(月田)교회가 성립하다. 선시(先時)에 최상림, 박재형이 종신(從信)하고 인가귀도(引家歸道)하야 기장읍교회에 내왕 예배하더니 지시(至是)하야 예배당을 신축하고 교회를 성립하니라.’
이 기록에 언급된 최상림(崔尙林·?~1945년) 목사는 경남교회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해 1945년 6월 옥중에서 타계한 독립지사입니다.”
박성조 교수와 공태도 선생에 따르면, 박재형은 구한말 참봉 벼슬을 하였고 당시 드문 천석꾼이었다. 소 한 마리와 당나귀 4마리를 사육하는 등 부유층에 속했다. 한학에 능통했으며 영어를 독학으로 배워 성경을 한글로 번역했다고 한다.
사재를 털어 비록 명칭은 ‘서당(대변서당)’이었으나 근대적인 의미의 학교를 세웠고 박순천도 일제가 문을 연 ‘국민학교’를 외면하고 그 ‘서당’에 다녔다. 역사, 지리, 수학, 주판, 음악, 체육, 예술 등 다양한 과목을 가르쳤으며 문맹자를 위한 성인 야간학교도 운영했다고 전한다.
계속된 박 교수의 말이다.
“박재형은 항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음에도 항상 기장 지방에 있었던 항일운동 모임을 뒤에서 음으로 양으로 지원했다고 알고 있어요.
또한 박재형의 아내 김춘열 역시 여걸이었다고 해요. 학교를 나오지는 않았으나 성경을 빨리 읽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사랑스럽지만 엄격하고 강인한 여성이었다고 해요. 처음에는 불교를 믿었으나 기독교로 개종했고 열렬한 반일사상을 지녔다고 하지요.
제 아버지(박창무)에 따르면 박순천은 어릴 때부터 아주 총명했다고 합니다. 박재형이 세운 학교에서 공부하다 14~15세 때 집을 떠나 부산에서 학교를 다녔다고 해요. 기장 3·1운동에 가담해 수배 중인 박순천이 일본으로 밀항할 때 오빠인 박창무가 자금을 마련해 전달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기회주의적인 유연성’에 철저히 반대입장”
1974년 8월 19일 육영수 여사 국민장 영결식에서 여성계를 대표해 박순천이 조사를 읽고 있다. 사진=조선일보DB |
“조카가 고모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긴 어렵지만, 과거엔 광복 이전의 행적을 두고 ‘박순천은 유관순’이라고 평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훗날 일본 제국주의에 동조했고, 제자를 정신대로 보냈다고 하여 친일파로 혹평했지만 아무런 증거가 없습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어느 대학교수와 통화한 일이 있습니다. 아무 증거도 없고, 전해 들은 이야기라고 주장하였어요.”
― 정치인으로서의 박순천은 어떻게 평가하나요.
“제가 대학(서울대 정치학과)에 다닐 때를 떠올리면 ‘두 젊은 정치인’(YS와 DJ)이 매주 박순천을 방문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시엔 지역 간 적대감정이 전혀 없었어요. 박순천은 호남이나 영남에서 아무런 편견 없이 환영받던 정치인이었어요.”
또 박성조 교수는 “박순천을 부정부패를 모르는 보수 지도자”라고 평했다.
“박순천은 뇌물이나 부정행위를 절대 용납하지 않았어요. 제가 동백림 사건으로 중앙정보부에 의해 한국으로 납치됐을 때의 일입니다. 제 담당 검사가 ‘박순천에게 말해 좋은 곳으로 영전시켜달라’고 부탁해달라기에 전했더니 고모가 크게 노하시며 저를 꾸중한 적도 있었어요.
늘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는데 세비와 남편 월급으로 정치하기가 빠듯했나 봅니다. 슬하에 3남 4녀를 키우는 것도 힘이 들었을 거예요. 금전적 유혹이 있었으나 늘 거부했다고 해요. 다만 친정 조카인 동양실업사장(朴聖弼·작고)이 지원하다 경찰과 검찰에 여러 번 불려가 혹독한 고문을 받은 적이 있었어요. 박성필이 바로 제 친형입니다. 결국 박성필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고 말았어요.”
“지금까지 한국에 그런 여성 지도자는 없습니다”
박순천이 살던 서울 화곡5동 111-61번지에는 현재 다가구 빌라가 들어섰다.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
“박순천은 이념이나 특별한 신념을 따르는 맹종자는 아니었어요. 그러나 애국주의와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결의와 합의는 철두철미하게 지키는 성격이었죠. 일제 때 항일운동을 하다 수감된 전력이 애국주의를 입증하고 있어요. 광복 이후 신탁통치 논란이 일자 치열하게 반대운동을 전개했지요.
6·25 당시 인민군이 쳐들어왔을 때 국회는 ‘서울시민을 버리고 피란가지 않겠다’고 결의했음에도 다수의 국회의원이 피란을 떠났으나 박순천은 떠나지 않고 서울에서 숨어 지냈어요. 이승만·박정희 정권 때도 ‘기회주의적인 유연성’에는 철저히 반대하는 입장이었죠.”
박 교수는 덧붙여 이렇게 말했다.
“박순천은 기회주의적으로 정치 활동을 하지 않았고 시종일관 정의감과 확고한 신념으로 남성 정치세계에 큰 기여를 하였지요. 야당의 당수로 그의 리더십은 남성을 압도했습니다.
타고난 웅변술에 수많은 관중이 환호한 일도 있어요. 그가 한강에서 연설을 하면 100만 명이 운집했다고 하지요. 지금까지 한국에 그런 여성 지도자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