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陸士 27기 출신, 8·15 저격 사건 후 경호실 개편할 때 육군 대위로 들어가 수행경호관으로 근무… 1979년 2월 부속실로 전보
⊙ 박지만 陸士 진학 앞두고 골프장 그늘집에서 陸士 생활에 대해 설명… “깍두기를 씹는데 입안에서 천둥소리가 났다”
⊙ “朴正熙 대통령, 1979년 봄 옛날 서류·책 정리시키고, 타이핑을 배워두라고 해… ‘마무리’한다고 생각”
⊙ “청와대는 정말 구중궁궐… 윤석열 대통령이 청와대 나온 것은 잘한 일”
⊙ 박정희 대통령 國葬 후 ‘언젠가는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집무실 모습 사진으로 남겨
⊙ 박지만 陸士 진학 앞두고 골프장 그늘집에서 陸士 생활에 대해 설명… “깍두기를 씹는데 입안에서 천둥소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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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대통령 國葬 후 ‘언젠가는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집무실 모습 사진으로 남겨
- 사진=조준우
1974년 10월 어느 날. 서울대 ROTC 교관이던 이광형(李光炯·육사 27기) 대위에게 육군본부에서 “지금 즉시 육군본부로 들어오라”는 구두(口頭)명령이 내려왔다. 육군본부로 달려갔더니 시험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거기서 구두 시험, 상식, 영어 시험을 치렀다. 마치 입사(入社) 시험 같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날 시험을 치른 장교는 모두 700명으로 육사(陸士)나 ROTC 출신 대위·중위급 장교들이었다. 시험이 끝나자 육군본부 장교가 말했다.
“오후 5시쯤 육군본부 중앙게시판에 합격자를 발표할 것이다. 거기에 이름이 없는 사람은 원대복귀(原隊復歸)하라.”
근처에 있는 다방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5시에 육군본부로 가니 합격자 명단이 붙어 있었다. 합격자는 모두 40명이었다. 육사 출신 대위 6명, ROTC 출신 중위 34명이었다. 이광형 대위의 이름도 거기에 있었다. 육본 장교가 나와서 훈시를 했다.
“너희는 국가의 중요한 임무를 위해서 선발되었다. 지금부터 집으로 가서 목욕하고 옷을 다려 입고 사흘 후에 다시 육본으로 나온다. 오늘 있었던 일은 부인에게도, 소속 부대장에게도 말하면 안 된다. 보안을 철저히 유지하라. 여러분의 언동은 전부 조사받고 보고될 것이다.”
이광형 대위는 바짝 얼었다. 그는 직속상관인 서울대 학군단장은 물론 1년 전에 결혼한 아내에게도 아무 소리 못 하고 사흘 내내 혼자서 고민을 했다.
‘국가의 중요한 임무라니, 도대체 무슨 일일까? 두 달 전에 영부인(육영수 여사)께서 문세광의 총탄에 돌아가셨는데, 혹시 김일성의 목을 따러 북한으로 투입되는 건 아닐까?’
대통령 경호관이 되다
사흘 후 다시 육군본부로 갔다. 장교가 나와서 한 명씩 호명(呼名)하더니 버스에 태웠다. 함께 탑승한 선임장교가 말했다.
“지금부터 청와대로 간다!”
청와대에 도착하자 직원이 나와서 명단을 체크한 후 일행을 지하실로 데리고 갔다. 경호실 연무관(演武館)이었다. 대학 강의실에서 볼 수 있는 책상과 의자가 40개 놓여 있었다. 장교들이 자리에 앉자 아무 소리도 안 하고 바로 시험지를 나누어줬다. 일반상식, 국사 등 종합시험이었다. 시험지를 거두어 가더니 다음에는 영어 시험지를 나누어줬다. 영어 시험이 끝나자 이번에는 8절지 백지 두 장을 나누어주었다. 논문 시험이었다. 누군가 나오더니 흑판에 시험 제목을 적었다.
‘대통령 경호란 무엇인가?’
나중에 알았는데 그 사람은 경호실 기획처장이었다. 대통령 경호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도, 아는 것도 없었다. 하지만 장교로서 알고 있는 경호·경비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논문을 작성했다.
필기 시험을 마친 장교들은 청와대 헬기장으로 이동했다. 체력 시험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체력 시험을 마치고 돌아오니, 그 사이에 채점이 끝나 있었다. 청와대 직원이 나와서 말했다.
“여러분은 경호실 역사상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경호실에 들어왔다.”
그제야 이광형 대위는 지금까지 치른 시험이 청와대 경호실 공채(公採) 시험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합격자들의 평균 성적은 94점.
이광형 대위 등은 집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남한산성에 있는 공수훈련장으로 보내져 4주간 공수 훈련을 받았다. 이미 육사 4학년 때 공수 훈련을 받았지만, 경호실 작전차장보 이광로(제13대 국회의원. 국회사무총장 역임) 장군은 “무조건 다 훈련시켜!”라고 명령했다. 공수 훈련을 마치고 난 후에는 30경비단 내무반에 마련된 교육장에서 5주간 대통령 경호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경호실 과장급들이 강사로 나와서 미국 대통령 경호실(Secret Service)의 교육 프로그램을 가지고 교육했다.
이광형 대위는 그해 11월 청와대 경호실 경호관으로 발령받았다. 그것도 경호실 안에서 가장 엘리트들만 간다는 수행과(隨行課) 경호관! 대통령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밀착 경호하는 자리였다.
그때는 꿈에도 몰랐다. 이후 5년 동안 경호실과 제1부속실에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을 지근(至近)거리에서 모시게 되고, 이후 50년 가까운 인생을 박정희 대통령의 자장(磁場) 안에서 살게 되리라는 것을….
‘충무계획’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시절 청와대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정리한 수기를 《월간조선》에 보내온 이광형 전 EG 부회장을 지난 5월 26일 서울 상암동에 있는 박정희대통령기념관에서 만났다.
― 육사 출신 장교가 어떻게 해서 경호실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까.
“8·15 저격 사건 후 경호실장이 된 차지철(車智澈) 실장은 경호실 시스템을 완전히 개편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종래 경호실은 무술 고단자 위주로 구성되었는데, 미국 대통령 경호실의 시스템을 도입해서 문무(文武)를 겸비한 엘리트들로 새판을 짜자는 것이었습니다. 청와대의 지시를 받은 국방부에서는 ‘충무계획’을 수립, 군(軍)의 중위~대위급 중에서 무술 유단자급을 선발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생각지도 않았는데 시험을 치르고 경호실에 들어가게 된 것이죠.”
― 육사 27기면 동기생들이 누가 있나요.
“잘 알려진 사람은 김장수 전 국방부 장관, 박승춘 전 국가보훈처장, 이희원 전 한미연합사령부 부사령관이 있습니다.”
― 박정희 대통령을 처음 뵌 것은 언제였습니까.
“1971년 3월 육사 졸업식에서였지요. 졸업식 때 사열대에 올라가 박정희 대통령, 육영수 여사와 악수를 했습니다. 그때는 나중에 청와대에 가서 박정희 대통령을 모시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지요.”
― 소대장은 어디서 했습니까.
“15사단 최전방 대성산에서 했죠. 그러다가 오자복(국방부 장관 역임) 연대장이 불러서 연대 작전장교로 일하다가 그 후 김학순 사단장 밑에서 전속 부관으로 근무했습니다.”
― 경호실의 첫 보직은 무엇이었습니까.
“수행과였습니다.”
― 대통령을 근접 경호하는 자리죠.
“네. 차도 같이 타고, 열차도 같이 타고, 비행기도 같이 타고…. 늘 대통령 옆에 있다 보니, 자잘하게 대통령 심부름도 하곤 했지요. 보통 경호1~5과에서 3~4년 정도 근무한 사람들이 수행과에서 근무했는데, 우리는 바로 수행과 근무를 하게 되니, 견제도 좀 받았어요.”
朴正熙 대통령과의 첫 대화
― 경호관으로서 박정희 대통령을 처음 뵌 것은 언제였습니까.
“1974년 12월경이었을 겁니다. 수행과에 배치된 후 차지철 실장이 새로 들어온 40명의 경호관을 선보이는 의미에서 효자동에서 중앙청으로 향하는 길에 도열하게 했어요. 그때 박 대통령을 처음 뵈었지요.”
― 그럼 박정희 대통령과 지근거리에서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눈 것은 언제였나요.
“사실 청와대 직원들이 대통령과 대화할 시간은 거의 없습니다. 맨 처음 대통령과 대화를 한 것은 1976년 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옷차림이 가벼웠으니까…. 고(高)3이던 박지만 회장(이광형 전 부회장은 박지만 EG 회장을 ‘회장’이라고 지칭했다)이 육사에 진학하기로 결정됐을 때였죠.”
― 어디서였나요.
“한양골프장이었나, 뉴코리아골프장이었나? 각하께서 골프장을 도시다가 그늘집에서 잠깐 우동을 드실 때였는데, 갑자기 골프장 경내 방송이 나오더군요. ‘이광형 대위, 어디 있나? 이광형 대위 즉시 어느 그늘집으로 오라.’ 급히 뛰어갔더니 라운드 테이블 주위를 둘러 박 대통령, 차지철 경호실장, 전두환(全斗煥) 경호실 작전차장보, 박지만 학생이 앉아 있었어요. ‘거기 앉으라’고 해서 자리에 앉았지요. 우동을 한 그릇 갖다 주더군요.”
― 박 대통령이 왜 부른 것이었나요.
“각하께서 ‘지만이가 육사를 가려고 하는데, 육사의 제도, 시험 등에 대해 이야기를 좀 해주라’고 하시더군요. 그때는 졸업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니 육사 생활에 대한 기억이 생생할 때였죠. 입학 시험, 필기 시험, 체력 시험, 신체검사 등에 대해 죽 설명을 했지요.
그랬더니 각하께서 ‘학교 생활에 대해서도 가르쳐주라’고 하셨어요. 1~4학년 동안 육사에서 공부하는 것, 학점, 3금(禁)제도가 있어서 술·담배·여자관계를 하면 퇴교(退校)된다는 것, 거짓말·커닝·도둑질을 하면 무조건 퇴교된다는 것 등을 전부 설명해줬어요. 내가 얘기하는 중간중간에 박 대통령이 간단한 질문을 하셨고, 육사 출신인 전두환 장군도 간간이 보충 설명을 했습니다. 다시 각하께서 ‘훈련하는 것에 대해 알려주라’고 하시더군요. 1·2학년 때는 기초훈련, 3학년 때는 레인저 코스(유격 훈련), 4학년 때는 공수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설명했죠.”
― 긴장이 되지 않던가요.
“대위 시절이니까 씩씩하게 설명하는데, 각하께서 ‘먹으면서 해, 먹으면서 해’ 하셨어요. 깍두기 한 알을 입에 넣고 씹었는데, 하도 긴장해서인지 입안에서 천둥소리가 나더군요. ‘아, 이 소리가 각하께 들리면 안 되겠다’ 싶어서 그냥 삼켰어요. 그걸 보고 각하께서 막 웃으시면서 당신께서 군대 생활할 때 얘기를 해주시더군요. 마지막으로 ‘그거 말고 기합 받는 거 얘기 좀 해줘 봐’라고 하시기에 육사에서의 기합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각하 일행은 다시 라운드에 들어갔고, 나는 현장으로 돌아갔지요.”
건축설계사 자격증 공부한다던 장세동
육군 대위로 청와대에 들어간 이광형 전 부회장은 1978년 6월 육군 소령으로 진급했다가 석 달 후에 예편했다. 그러고 이듬해 2월 경호실에서 제1부속실로 자리를 옮겼다.
― 예편 전에는 언젠가 군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습니까.
“그럼요. 저도 육사 출신으로 꿈을 갖고 있었어요. 육사 재학 중에는 동기 중에서 나름 선두 그룹에 속해 있었기에 프라이드도 강했습니다. 졸업할 때에는 소위 때부터 별을 달 때까지의 청사진을 도표로 작성해서 군복에 넣고 다닐 정도로 군에 대한 애착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전두환 장군 등 경호실에 있는 장군들에게 기회 있을 때마다 ‘군으로 돌아가겠다’는 얘기를 드리곤 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문홍주(12·12사태 당시 합참 본부장) 경호실 차장이 직접 불러서 ‘예편해서 여기서 경호 업무 계속 수행해’라고 지시하더군요.”
― 뭐라고 했습니까.
“‘군으로 돌려보내 주십시오’라고 했죠. 문홍주 장군은 ‘안 돼, 군인이 명령대로 하는 거지!’라고 하더군요. 여러 번 군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했습니다. 10·26 때 세상을 떠난 정인형 경호처장도 ‘여기서 대통령 모시라’고 권했어요. 내가 계속 고집을 피우자, 어느 날 육사 선배인 30경비단장 장세동(張世東·전두환 정권 시절 경호실장·안기부장 역임) 대령이 전화를 걸어왔어요. 점심때 다른 약속 없으면 단장실로 오라고 하더군요.”
― 장세동씨와는 잘 아는 사이였습니까.
“저를 무척 아껴주었습니다. 30경비단장실로 갔더니, ‘이광형, 너 예편해서 대통령 모시라고 하는데 못 하겠다고 했다며? 원대복귀 하겠다 했다며?’라고 하더군요. ‘네. 돌아가고 싶습니다’라고 했죠.”
― 장세동 단장이 뭐라고 하던가요.
“‘야, 나도 군에서 열심히 한다고 하고 있지만, 군인이라는 건 어떻게 될지 몰라. 너, 오래 한다고 해서 장군 된다는 보장 있어?’라면서 자기는 나중에 진급이 안 될 경우에 대비해, 공부를 해서 건축설계사 자격증을 따려고 한다고 하더군요. 장 단장은 ‘대통령이 필요하다면 군인이 알겠습니다라고 해야지, 군으로 돌아가겠다는 건 말이 안 돼’라며 타일렀습니다. 자꾸 그러기에 ‘선배님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라고 했더니 ‘나 같으면 명령대로 따른다. 네가 뭐 잘났다고 버티고 그러냐’고 하더군요. 그래서 ‘알겠습니다’라며 꼬리를 내렸죠.”
― 결국 육군 소령으로 예편했지요.
“전두환 장군 방에 가서 ‘제가 그래도 명색이 육사를 나왔는데, 대위로 예편하기는 싫습니다. 소령 진급은 하고 나가겠습니다’라고 했더니, 웃으면서 ‘알았어’라고 하더군요. 소령 진급하고 석 달 만에 예편, 공무원이 됐지요.”
대통령의 副官
청와대에 정책실이나 국가안보실이 생기기 이전, 청와대에는 흔히 3실(室)이 있다고 했었다. 비서실, 경호실, 부속실이 그것이다. 부속실은 다시 대통령을 모시는 제1부속실과 영부인을 모시는 2부속실로 나누어진다. 이광형 전 부회장은 경호실(1975~1979년), 부속실(1979년), 비서실(1980년)에서 모두 근무한 남다른 이력을 갖고 있다.
― 부속실로는 어떻게 해서 가게 된 건가요.
“국가재건최고회의 시절부터 박정희 대통령을 모시던 전석영 비서관이 총무비서관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부속실에 자리가 하나 비게 되었어요. 경호실 쪽에서 그 후임을 복수(複數)로 추천했는데, 각하께서 제 이름에 동그라미를 치셨다고 들었습니다. 정식 발령이 나기도 전에 ‘빨리 본관으로 올라와’ 소리를 듣고 바로 부속실에서 근무하게 되었지요.”
― 박정희 대통령의 부관(副官)이었던 걸로 아는데, 그게 정식 직책이었나요.
“정식 직책은 행정관이었는데, 부속실로 가니 부속실 사람들은 물론 경호실, 비서실에 있는 분들도 모두 저를 ‘이 부관’이라고 부르더군요.”
― 당시 부속실에는 누가 근무했습니까.
“경호실 출신인 박학봉 비서관, 저, 그리고 이혜란씨가 근무했습니다. 대통령 집무실 앞 전실(前室)에는 책상이 두 개 있었는데, 책상 하나에서 박학봉 비서관과 제가 교대로 근무했고, 다른 책상에서는 이혜란씨가 근무하면서 차(茶) 심부름이나 타이핑을 했습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 주로 하는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대통령에 대한 모든 심부름이죠. 전화 심부름부터 서류 심부름까지. 대통령께서 이발하신다고 하면 이발사 불러서 대기시키고…. 대통령에 대한 모든 수발을 들었어요.”
― 육사 나온 젊은 장교 출신으로 한창 팔팔한 나이에 그런 심부름이나 하고 있는 게 갑갑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생각은 전혀 안 했어요. 수행과에 있을 때도, 부속실에 있을 때도, ‘이분이 불편하지 않도록 내가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생각만 했지요.”
― 거의 매일 청와대에 매여 있었겠습니다.
“일주일의 3분의 2는 청와대에서 근무하고, 3분의 1은 잠깐 집에 들어가서 자고 아침에 빨리 출근했지요. 아내와 애들을 볼 시간이 별로 없었죠.”
― 집은 어디였나요.
“난지도 옆 성산동에 있는 15평짜리 시영연립주택이었습니다. 1979년 봄 부속실로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 각하께서 이 사실을 알고 제 방에 오셔서 손에 수표를 쥐여 주셨어요. 집값의 두 배쯤 되는 큰돈이었는데 ‘융자금 갚고 살림에 보태 써. 조금만 기다리면 내가 청와대 근방에 아파트 마련해줄 테니…’라고 하셨어요. 눈물이 나더군요.”
― 박정희 대통령의 편지 심부름을 했다고 했는데, 혹시 그 내용을 본 적이 있습니까.
“내용을 볼 수는 없지요. 박 대통령이 직접 봉해서 주시니까…. 그걸 담당비서관들에게 전해 주었지요. 옛날 혁명동지들이나 형편이 어려운 분에게 보내는 편지 심부름을 했던 비서관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편지를 받는 분들은 ‘대통령 각하의 친서를 가지고 왔다’고 하면 ‘잠시 기다리시라’고 한 후 안으로 들어가서 옷을 단정하게 갈아입고 나왔다 해요. 그러곤 작은 상을 하나 갖다 놓고 그 앞에 꿇어앉아서 편지를 받았다고 합니다. 옛날 사극(史劇)에서처럼 말이죠.”
집무실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
《그때 청와대에선》을 보면, 이광형 전 회장이 부속실로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오래된 기록들을 다시 정서(正書)하는 얘기, 박 대통령이 그에게 타이핑을 배워두라고 하는 얘기가 나온다.
― 당시 정서했던 서류들의 내용을 기억합니까.
“부속실로 올라간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인데, 각하께서 서류를 이만큼 안고 오시더니 내 책상 위에 놓고 ‘이게 오래되어서 잘 안 보이니 펜글씨로, 큼직큼직하게 한문 좀 섞어서 정리를 다시 하라’고 하셨어요. 쓰면서 주마간산(走馬看山) 격으로 읽어보니 5·16혁명 초기의 이야기부터 당시에 이르기까지 국가적으로 중요한 얘기들에 대한 것이었어요. 다만 그때는 그 내용을 숙지할 생각은 없이 그냥 필기하는 기분으로 썼기 때문에 내용을 기억하지는 못합니다.”
― 그 기록들은 후에 어디로 갔을까요.
“내가 다시 정서한 기록들은 각하께서 가져다가 집무실 캐비닛에 보관했는데, 아마 큰 영애(박근혜 전 대통령)께서 가져갔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국장(國葬)이 끝나고 이사 준비를 할 때 큰 영애께서 집무실 서류 정리를 직접 했습니다. 공적(公的)인 서류는 해당 비서실로 다 내줬지만, 사적(私的)인 것들은 큰 영애께서 판단해 버릴 건 버리고 보관할 건 정리해서 내놓으면 우리가 이삿짐을 쌌어요. 각하께서 쓰시던 부채, 효자손, 파리채, 슬리퍼 등등 정리해서 포장을 하고 목록을 만들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국장을 치르고, 이삿짐을 싸는 와중에, 이광형 전 부회장은 역사를 위한 기여를 하나 했다. 바로 당시 집무실에 있던 책의 리스트를 만들고, 집무실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남겨놓은 것이다.
“누가 시킨 건 아니었고, 그때 아직 젊은 나이인데도 ‘언젠가는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이 있을 것이고, 그러자면 대통령 집무실을 복원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책의 리스트를 만들고, 카메라로 사진을 찍게 했어요. 그때 찍은 사진은 거의 큰 영애에게 드렸어요. 여기 기념관(박정희대통령기념관)에 있는 달력도 당시 집무실에 있던 것입니다. 각하께서 매일 한 장씩 달력을 뜯어내셨는데, 1979년 10월 26일이 그 마지막 날짜이지요.”
“박 대통령이 마무리 작업한다고 생각”
― 박정희 대통령이 옛날 서류나 책들을 정리시키고, 타이핑을 배워두라고 할 때,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그 어떤 마무리 작업을 하시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타이핑 연습을 하라고 하실 때 ‘아, 은퇴하시면 회고록을 쓰시려고 그러시는구나’ 싶었어요. 나폴레옹 같은 경우를 보면, 말년에 걸어 다니면서 구술(口述)하면 비서가 받아 적었다고 하잖아요.”
― 박정희 대통령이 은퇴를 염두에 둔 듯한 말씀을 한 적이 있나요.
“그렇게 말씀하시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저는 대통령에게 모든 걸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한 것이죠.”
― 주한미군 철수, 인권문제 등을 놓고 카터 미국 대통령과의 갈등이 심했는데, 박 대통령은 그렇게 심기가 불편한 문제가 있을 때에 그걸 내색하는 편이었습니까.
“내색하진 않으셔도 각하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을 늘 곁에서 지켜보니, ‘지금 어떤 심기시구나’ 하는 건 느꼈지요. 카터가 고집불통이었잖아요. 제가 느끼기에 박정희 대통령은 ‘너는 그러지만, 나는 왜 미군 철수를 하면 안 되는지에 대해 너를 교육시켜야겠다’는 의지가 확고했어요.
카터 환영행사에 나갔다가 들어오시는데, 표정은 밝으셨어요. 웃으면서 ‘아, 부자나라 손님 모시려니…’ 하면서 중얼중얼하시더군요. 그러면서 소접견실이나 집무실 집기 배치를 어떻게 할 것인지 등을 일일이 지시하셨어요.”
― 집무실에서 박 대통령이 카터와 단독회담을 할 때, 분위기가 안 좋았다는데,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까.
“안에서 하는 얘기는 제가 있는 전실에서는 안 들렸어요. 큰 소리를 내면 들리지만, 조용조용 얘기하니까. 중요한 얘기가 나오면 톤이 조금 올라가기는 했지요.”
― 박 대통령이 집무실에서 얘기할 때, 톤이 올라가는 적이 많았나요.
“제가 느끼기로는 부하들에게는 그런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카터가 한국에 대해 되지도 않을 압박을 가하는 것에 대해 보고받을 때는 단호하게 말씀하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박 대통령은 미국에 대해 굴하는 것이 없으셨어요.”
“그 연세에도 턱걸이를 10개씩 했다”
― 당시 증언들 가운데 육영수 여사가 돌아가시고 난 후 박정희 대통령이 많이 지치고 총기(聰氣)가 흐려졌다는 얘기들이 있는데,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습니까.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돌아가실 때 62세셨는데, 굉장히 강건하셨어요. 그 연세에도 턱걸이를 10개씩 하셨어요. 30대인 저하고 배드민턴을 쳐도 전혀 지치지 않으셨습니다.
지시하거나 말씀하실 때에도 흐려지셨다는 느낌이 드는 경우는 없었어요. 한번은 각하께서 어떤 기관장에게 일을 시켰는데 기대에 크게 미치지 못했어요. 다음 날 그에게 전화를 연결하라고 하시더군요. 저는 속으로 크게 질책하실 것으로 생각했는데, 껄껄 웃으시면서 ‘오, 수고했어. 괜찮아’라고 하시면서 오히려 격려하시더군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많이 배웠습니다. 박 대통령과 다른 의견을 갖고 있던 사람도 대통령을 독대(獨對)해서 30~40분만 이야기를 나누고 나오면 설득되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 박 대통령은 아랫사람에게도 말을 놓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중간 말투를 쓰셨죠. 제가 집무실 문을 열고 ‘○○ 장관 왔습니다’ 보고하면 ‘알래하게’라고 하셨죠.”
― 알래하게요?
“경상도 사투리로 ‘안내하게’를 ‘알래하게’라고 하시더군요. ‘안내해’ 이렇게 하지 않으셨어요.”
막사이다와 시바스 리갈
― 《그때 청와대에선》을 보면, 원당에서 막걸리를 받아오는 얘기가 나오더군요.
“대개 청와대에서 파티가 있으면 부속실 전속 기사를 보내 원당에서 막걸리 두 되를 받아왔어요. 그냥 거무튀튀하고 뻑뻑한, 거의 동동주에 가까운 막걸리였어요. 저도 마시면 핑 돌 정도였어요. 너무 진하니까 대통령이 사이다를 섞어서 막 저었지요. 그걸 막사이다라고 했어요. 그걸 좋아하셨지요. 안주는 청와대 본관 주방에서 만든 멸치튀김이 전부였어요.”
― 박 대통령은 술을 많이 드셨나요.
“그냥 기분 좋게, 얼큰하게 취하시는 정도였어요. 비교적 나이가 젊은 수석비서관들과 함께할 때는 덜 드셨지만, 특별보좌관들과 함께 드실 때에는 좀 드셨어요. 아무래도 특보들이 연세도 좀 있고, 장관급 커리어가 있는 분들이다 보니, 그분들과는 막역하게 이야기를 나누시다가…. 술을 드시면 부속실에 있는 화장실을 이용하셨는데, 때때로 문틀에 어깨를 부딪히시면 제가 잡아드리곤 했지요. 술을 드신 다음 날에도 흐트러지는 경우가 없었어요.”
― 10·26사태 후 시바스 리갈이 화제가 됐었지요.
“그게 시중에서 그렇게 비싼 술이 아니잖아요. 그거를 무슨 고급술인 것처럼….”
― 청와대에 근무할 때 시바스 리갈을 드셔보셨나요.
“1977년 도고관광호텔에서 박 대통령 회갑연을 했는데, 각하께서 직접 한 잔씩 따라주셨지요. 그때 시바스 리갈을 처음 마셔봤습니다.”
― 10·26사태 후 김재규 재판 과정에서 대연회니, 소연회니 하면서 궁정동 만찬에 대한 얘기가 나왔는데, 그 말대로라면 거의 매일 그런 자리가 있었다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알 생각도 안 했고, 우리도 짐작으로만 알았습니다. 다만 거의 매일같이 그런 자리가 있었다는 것은 완전히 거짓말입니다.
대통령이 퇴청(退廳)해서 물러가 계실 때는 혼자잖아요. 사모님도 안 계시고, 큰 영애도 조금 앉아서 얘기 나누다가 방으로 가고…. 그러면 혼자서 책도 읽고 글도 쓰셨어요. 제가 올라갔다가 그렇게 혼자 계시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안 좋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가끔 술 좀 마신 게 뭐 그렇게 나쁜 건가요? 그렇다고 대통령이 무교동 골목으로 갈 수도, 인사동 한정식집으로 갈 수도 없으니 가까운 데 있는 정보부 안가(安家)를 이용했던 것이죠.”
― 윤석열 대통령이 집무실을 용산으로 이전한 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잘한 일입니다. 내가 청와대에서 5년을 근무했잖아요? 정말 구중궁궐(九重宮闕)입니다. 박근혜 대통령도 그 구중궁궐에 들어갔다가 결국 그렇게 됐고…. 윤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나온 거는 정말 잘한 일입니다.”
전두환
― 당시 청와대 경호실에서 근무했던 전두환·노태우(盧泰愚) 장군과는 잘 아는 사이였습니까.
“전두환 장군은 저를 굉장히 좋아했어요. 노태우 장군은 그렇게 친근감을 표시하는 스타일은 아니었고…. 전두환 대통령은 KBS에 왔다가 저를 보곤 끌어안으면서 ‘이광형, 여기 있구나’ 하면서 좋아했어요.”
― 전두환 장군에 대해 기억나는 일이 있습니까.
“소소하게 몇 가지 있지만, 그런 것까지 얘기하기는…. 박정희 대통령의 국장을 마친 후에 보안사령부로 한번 다녀가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나중에 찾아갔더니 ‘고생 많이 했다’면서 12·12사태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줬습니다. 일어서는데 ‘애들 과자나 사주라’면서 금일봉을 주더군요.”
― 당시 하나회가 있는 줄 알았습니까.
“암암리에 알았지요. 우리 동기생 중에도 하나회 회원이 몇 명 있었어요. 김영삼 정권 시절에 대령으로 있다가 장군 진급에 탈락하고 옷을 벗었지요. 사실 동기 중에서 가장 우수한 친구들이었는데….”
― 하나회에 들어오라는 제안을 받은 적은 없습니까.
“있었지요. 그런데 하나회라는 게 알음알음으로 조금 쓸만하고 똘똘한 애들 불러서 밥 먹고 유대(紐帶)관계를 갖는 정도였지, 아주 조직적으로 뭘 한 거는 아니라고 봅니다.”
차지철
― 차지철 경호실장은 언제 만났습니까.
“경호교육을 마치고, 실장실에 올라가서 신고할 때 처음 봤지요. 훈시를 하고 나서 양복 한 벌씩 맞춰 입으라고 금일봉을 주더군요.”
― 첫 느낌이 어땠습니까.
“차지철이라고 하면 5·16 때 공수복 차림으로 나타났던 그 모습만 생각했는데, 막상 보니 틀도 좋아지고 말도 잘하더군요. ‘아, 자리가 사람을 이렇게 바꾸어 놓는구나’ 싶었습니다.”
― 경호실에서 근무하면서 보니 어떻던가요.
“당시 차 실장은 경호실이 이권(利權)에 개입하거나 특권(特權)의식을 가지고 군림하는 것을 못 하게 하고, 제대로 경호를 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고쳐나가고 있었는데, 참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청렴결백하고,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실장 방 옆에 기도실을 만들어놓고 늘 대통령을 위해 기도하는 것도 좋게 봤어요.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실망하게 됐지만요.”
― 어떤 점에 대해 실망했나요.
“경호실 조직이 점점 커져가는 데다 제가 부속실로 올 무렵에는 위력시위(威力示威)로 경호 방향이 바뀌는 걸 보고 ‘저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한 달에 한 번씩 수경사(수도경비사령부)에서 탱크까지 가져다가 30경비단에서 열병식(閱兵式)을 하는 것이나, 경호원들이 교대 근무 때 효자동 거리를 시가행진하듯 하면서 경호실가나 군가를 부르는 걸 보면서, 차 실장에게 실망했어요.”
― 그 시절의 차지철 실장에 대해서는 말이 많지요.
“경호실 사람들에게 들은 얘긴데, 한번은 각하가 나갔다 돌아오시다가 경호원들이 행진하는 것을 보고 언짢아하셨답니다. 본관 앞에서 차에서 내리면서 ‘차 실장, 저런 거 하지 마. 시가행진하면서 소리 지르는 거 하지 마’라고 지시를 하셨대요. 그러고 들어가셨는데, 차 실장은 박 대통령에게 인사하고 돌아서면서 전두환 작전차장보를 부르더니 ‘그대로 해. 각하는 그러시지만, 경호를 위해 그대로 해’ 그랬다는 거예요. 그 얘기를 전해 듣고는 ‘대통령이 지시하면 들어야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무엇보다도 10·26 당일 정말 실망했어요.”
― 그렇죠.
“대통령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김계원 비서실장, 차지철 경호실장, 이렇게 네 분이 밥을 먹을 때는 차 실장이 경호원이에요. 당연히 권총을 차야지요. 차 실장이 권총을 차고 갔으면 달라졌을 거예요. 설사 총이 없더라도, 김재규가 총을 들었을 때는 육탄으로 막았어야지, 화장실로 도망가서 대통령에게 ‘각하, 괜찮습니까?’ 그러는 게 경호실장입니까?”
침실의 영부인 사진
― 최근 청와대가 개방되면서 침실이 80평이 넘는다고 해서 화제가 됐습니다.
“그때는 그렇게 넓지 않았어요. 침대 하나, 창가에 놓는 거(협탁) 하나, 그 옆에 붙박이장이 하나 있었어요. 침대 앞에는 창문이 있고, 영부인 사진이 큰 게 놓여 있었어요. 침대에서 일어나면 바로 영부인 사진이 보일 수 있게…. 침대 옆에 약간 운동할 수 있는 공간이 조금 있었지요. 옆에 화장실 겸 욕실이 있었고…. 모두 합쳐서 20평이 안 됐을 겁니다.”
《그때 청와대에선》에는 어느 날씨 좋은 날 박정희 대통령이 ‘오늘 같은 날 골프 나가면 좋겠다’ 하더니, 이내 ‘골프 나가면 경호차들이 많이 움직여 기름도 많이 들겠다. 관두자’고 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그 얘기를 꺼냈더니, 이 부회장의 목소리가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아쉬움을 꾹 누르시는 게 보였어요. 나는 속으로 ‘그렇게 치고 싶으시면, 좀 치러 나가시지…’ 했는데, 늘 그런 걱정을 하셨어요.”
비서실 근무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국장, 박정희 대통령 자녀들의 이사 등 시간이 정신없이 지나갔다. 최규하 국무총리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12·12사태가 일어났다.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최광수(체신부·외무부 장관 역임) 의전수석비서관이 최규하 대통령의 비서실장이 되었다. 최 실장은 넋을 놓고 앉아 있는 이광형 부관을 찾아왔다.
“이 부관이 충격을 받은 것은 내가 이해하는데, 그래도 대통령도, 국정(國政)도 이어가야 하니, 청와대에 남아서 최규하 대통령을 계속 모셔줬으면 좋겠다.”
“저는 싫습니다. 저는 (박정희 대통령) 각하를 대통령으로 모신 거지, 각하 밑에서 총리 하던 분을 다시 모시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는 인생을 많이 산 것은 아니지만, 인생에 회의(懷疑)를 느끼고 있습니다. 이게 뭡니까? 대통령의 가장 충성스러운 부하여야 할 정보부장이 대통령을 저격하고, 제일 가까운 경호실장이라는 사람은 화장실로 숨고, 비서실장이라는 사람은 방조한 거 아닙니까? 이런데 제가 무슨 청운의 뜻을 품고 뭐를 더 하고 싶겠습니까? 이제 공직 생활은 그만하렵니다. 여기서 끝내렵니다.”
“그럼 뭐 하면서 살려고?”
“밥이나 먹고살 수 있게 시멘트 대리점이나 하나 내주십시오. 조용히 살겠습니다.”
최광수 실장은 막 웃으면서 말했다.
“아직 젊어서 몰라서 그래. 그런 말 하지 마. 좀 더 생각해봐.”
일주일 뒤에 다시 찾아온 최광수 실장은 그만두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이광형 부관에게 “정 그러면 비서실에 내려가 있으라”면서 정무수석비서관실로 발령을 냈다. 당시 정무수석비서관은 고건(高建) 전 국무총리였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있는데, 부속실 선배인 전석영 총무수석비서관이 불렀다. 전 수석은 새로 민정수석비서관이 된 이원홍(KBS 사장·문화공보부 장관 역임)씨가 그와 함께 일하기를 원한다고 했다. “저는 조금 있다가 그만둘 생각인데 다 싫어요. 새로 뭘 하겠어요”라며 시큰둥해하는 그에게 전 수석은 “내가 보니 지금 최규하 대통령 비서실에서 제일 활발하게 움직이는 데가 민정수석실”이라면서 민정수석실로 가라고 권했다.
그를 만난 이원홍 민정수석은 그 큰 덩치에 걸맞지 않게 겸손하게 말했다.
“나로서는 박정희 대통령을 모시던 분을 이렇게 보좌관으로 같이 일하자고 하는 게 황송스럽소. 하지만 지금 긴박한 일들이 많은데 내가 잘 모르니까 날 좀 도와주시오.”
《한국일보》 편집국장 출신인 이원홍 민정수석은 주일 문화원장과 공사로 8년간 한국을 떠나 있었기 때문에 국내 사정에 어두웠다. 이광형 전 부회장은 ‘서울의 봄’에서 전두환 장군의 집권으로 이어지는 격동기 동안 이원홍 민정수석의 보좌관으로 일하면서 이 수석과 신군부 간의 가교(架橋) 역할을 했다.
KBS 시절
이원홍 민정수석은 1980년 7월 KBS 사장으로 나가면서 그를 사장 비서실장으로 데리고 나갔다. 신군부의 실세(實勢)가 된 육사 선배들은 “KBS에 가서 몇 년만 고생하고 오라”고 했다. 방송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그는 사장실을 드나드는 실·국장들에게 과외교습(?)을 받으면서 방송인이 되어갔다. 6개월쯤 지나자 방송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그를 ‘동지’로 생각한다던 이원홍 사장이 문화공보부 장관이 되어 떠날 때, 그를 요직인 경영관리실장으로 발령을 냈다. 하지만 후임 사장은 그를 자금관리국장으로, 다시 청주방송총국장으로 밀어냈다. 요로(要路)에 있는 선배들과 이원홍 장관에게 기대면 다른 기회를 노릴 수 있었지만, 그런 식으로 KBS를 떠나고 싶지는 않았다. 청주방송총국장으로 있을 때는 실적평가에서 KBS 지방총국 중 꼴찌였던 것을 1등으로 끌어올렸다.
하지만 노태우 정권 출범 이후 민주화의 물결 속에서 KBS에 노조(勞組)가 생기면서, 그는 ‘특채자(特採者) 1호’로 지목되었다. 결국 1988년 7월 KBS를 떠났다. 마흔 살의 나이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지인(知人)들의 도움으로 몇몇 회사에 들어갔지만, 잘 맞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의 아들과 함께
1991년 어린이회관을 운영하는 육영재단에서 분규가 일어났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의 둘째 영애인 박근영 이사장 체제가 자리 잡는 것을 도왔다.
1993년 박근영 이사장이 삼양산업(현 EG) 부사장으로 있는 동생을 도와주라고 했다. 포철(현 포스코)에서 나오는 산화철(酸化鐵) 부산물(副産物)을 활용한 제품들을 생산하는 삼양산업은 원래 산화철 전문회사인 삼화기업과 포철의 자(子)회사인 거양상사가 4억원씩 출자(出資)해서 설립한 회사였다. 박태준 포철 회장은 육군 대위로 예편한 후 쉬고 있던 박지만 현 회장에게 삼양산업 부사장 자리를 맡겼다. 하지만 회사 사정은 좋지 않았다. 기술력이 좋지 않아서 불량품이 쌓이고 있었다. 박태준 포철 회장은 박지만 부사장에게 동기부여를 하기 위해 회사 지분을 아예 인수하라고 권했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은의를 느끼고 있던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이 8억원을 빌려주었다. 여기에 4억원을 증자(增資)했다. 이광형 전 부회장은 “1993년에 가서 보니, 자본금이 12억인데 자본잠식이 11억8000만원, 전년도 매출이 7억원인데 결손이 6억5000만원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광형 삼양산업 상무는 박지만 사장과 머리를 맞대고 회사 회생(回生) 방안을 강구했다. 우선 박태준 회장의 도움으로 원료 구입비를 줄이고, 대금 결제 조건들을 개선했다. 포철 부사장을 지낸 김철우 박사를 고문으로 모셔온 후, 그의 도움으로 은퇴한 일본 기술자들을 초빙해 기술력을 높였다. 삼화기업 서종규 사장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렇게 2년여를 노력한 끝에 최고급 품질의 제품을 일본 시장에 내놓을 수 있었다. 그때부터 매출이 늘기 시작, 1997~1999년 사이에는 1년에 30~40%씩 성장했다. 2000년 1월에는 코스닥 상장(上場)에 성공했다. 이광형 전 부회장은 2012년 부회장이 되어 서울로 올라올 때까지 충남 금산에 있는 공장을 지켰다. 2014년 그가 대표이사를 그만둘 때 회사 매출액은 1700억원으로 200배 성장했다.
― 세간에서는 박태준 회장과 김우중 회장이 박지만 회장을 도와주기 위해 땅 짚고 헤엄칠 수 있는 회사를 만들어준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데, 그건 아니었군요.
“전혀 아니에요. 물론 현금을 빌려준 김우중 회장, 포철에서 원료를 공급받고 납품할 수 있게 도와준 박태준 회장께서 보이지 않게 혜택을 주면서 울타리가 되어주신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스스로 노력하지 않았으면 자본잠식이 됐을 때 회사는 벌써 망했을 겁니다. 박지만 회장과 직원들이 모두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죠.”
“지금 생각해도 늘 고맙지요”
― 이번에 1979년에 부속실에서 경험한 일들과 10·26사태 전후의 이야기들을 기록으로 남겼는데,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다른 이야기들도 기록으로 남겨놓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조금 생각을 해봐야겠어요.”
― 부회장님에게 박정희 대통령은 어떤 분이었습니까.
“부모 같고, 스승 같은 분이었지요. 늘 인자하시고, 늘 친절하게 대해주셨고…. 평생 고맙지요. 늘 고맙지요. 지금 생각해도… 늘 고맙지요.”
이렇게 말하는 노(老)신사의 목소리는 젖어 있었다. 먼 훗날 그가 저세상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게 되면, 박 대통령은 아마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이광형, 고맙다! 열심히 나를 섬겨줘서 고맙고, 내 아들을 잘 도와줘서 고맙다. 넌 정말 열심히 살았다! 정말 수고했다!”⊙
“오후 5시쯤 육군본부 중앙게시판에 합격자를 발표할 것이다. 거기에 이름이 없는 사람은 원대복귀(原隊復歸)하라.”
근처에 있는 다방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5시에 육군본부로 가니 합격자 명단이 붙어 있었다. 합격자는 모두 40명이었다. 육사 출신 대위 6명, ROTC 출신 중위 34명이었다. 이광형 대위의 이름도 거기에 있었다. 육본 장교가 나와서 훈시를 했다.
“너희는 국가의 중요한 임무를 위해서 선발되었다. 지금부터 집으로 가서 목욕하고 옷을 다려 입고 사흘 후에 다시 육본으로 나온다. 오늘 있었던 일은 부인에게도, 소속 부대장에게도 말하면 안 된다. 보안을 철저히 유지하라. 여러분의 언동은 전부 조사받고 보고될 것이다.”
이광형 대위는 바짝 얼었다. 그는 직속상관인 서울대 학군단장은 물론 1년 전에 결혼한 아내에게도 아무 소리 못 하고 사흘 내내 혼자서 고민을 했다.
‘국가의 중요한 임무라니, 도대체 무슨 일일까? 두 달 전에 영부인(육영수 여사)께서 문세광의 총탄에 돌아가셨는데, 혹시 김일성의 목을 따러 북한으로 투입되는 건 아닐까?’
대통령 경호관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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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11월 24일 문경새재를 찾은 박정희 대통령. 이광형 경호관(뒤)은 박정희 대통령을 밀착 경호하는 수행경호관으로 4년간 근무했다. 사진=이광형 제공 |
“지금부터 청와대로 간다!”
청와대에 도착하자 직원이 나와서 명단을 체크한 후 일행을 지하실로 데리고 갔다. 경호실 연무관(演武館)이었다. 대학 강의실에서 볼 수 있는 책상과 의자가 40개 놓여 있었다. 장교들이 자리에 앉자 아무 소리도 안 하고 바로 시험지를 나누어줬다. 일반상식, 국사 등 종합시험이었다. 시험지를 거두어 가더니 다음에는 영어 시험지를 나누어줬다. 영어 시험이 끝나자 이번에는 8절지 백지 두 장을 나누어주었다. 논문 시험이었다. 누군가 나오더니 흑판에 시험 제목을 적었다.
‘대통령 경호란 무엇인가?’
나중에 알았는데 그 사람은 경호실 기획처장이었다. 대통령 경호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도, 아는 것도 없었다. 하지만 장교로서 알고 있는 경호·경비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논문을 작성했다.
필기 시험을 마친 장교들은 청와대 헬기장으로 이동했다. 체력 시험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체력 시험을 마치고 돌아오니, 그 사이에 채점이 끝나 있었다. 청와대 직원이 나와서 말했다.
“여러분은 경호실 역사상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경호실에 들어왔다.”
그제야 이광형 대위는 지금까지 치른 시험이 청와대 경호실 공채(公採) 시험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합격자들의 평균 성적은 94점.
이광형 대위 등은 집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남한산성에 있는 공수훈련장으로 보내져 4주간 공수 훈련을 받았다. 이미 육사 4학년 때 공수 훈련을 받았지만, 경호실 작전차장보 이광로(제13대 국회의원. 국회사무총장 역임) 장군은 “무조건 다 훈련시켜!”라고 명령했다. 공수 훈련을 마치고 난 후에는 30경비단 내무반에 마련된 교육장에서 5주간 대통령 경호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경호실 과장급들이 강사로 나와서 미국 대통령 경호실(Secret Service)의 교육 프로그램을 가지고 교육했다.
이광형 대위는 그해 11월 청와대 경호실 경호관으로 발령받았다. 그것도 경호실 안에서 가장 엘리트들만 간다는 수행과(隨行課) 경호관! 대통령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밀착 경호하는 자리였다.
그때는 꿈에도 몰랐다. 이후 5년 동안 경호실과 제1부속실에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을 지근(至近)거리에서 모시게 되고, 이후 50년 가까운 인생을 박정희 대통령의 자장(磁場) 안에서 살게 되리라는 것을….
‘충무계획’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시절 청와대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정리한 수기를 《월간조선》에 보내온 이광형 전 EG 부회장을 지난 5월 26일 서울 상암동에 있는 박정희대통령기념관에서 만났다.
― 육사 출신 장교가 어떻게 해서 경호실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까.
“8·15 저격 사건 후 경호실장이 된 차지철(車智澈) 실장은 경호실 시스템을 완전히 개편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종래 경호실은 무술 고단자 위주로 구성되었는데, 미국 대통령 경호실의 시스템을 도입해서 문무(文武)를 겸비한 엘리트들로 새판을 짜자는 것이었습니다. 청와대의 지시를 받은 국방부에서는 ‘충무계획’을 수립, 군(軍)의 중위~대위급 중에서 무술 유단자급을 선발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생각지도 않았는데 시험을 치르고 경호실에 들어가게 된 것이죠.”
― 육사 27기면 동기생들이 누가 있나요.
“잘 알려진 사람은 김장수 전 국방부 장관, 박승춘 전 국가보훈처장, 이희원 전 한미연합사령부 부사령관이 있습니다.”
― 박정희 대통령을 처음 뵌 것은 언제였습니까.
“1971년 3월 육사 졸업식에서였지요. 졸업식 때 사열대에 올라가 박정희 대통령, 육영수 여사와 악수를 했습니다. 그때는 나중에 청와대에 가서 박정희 대통령을 모시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지요.”
― 소대장은 어디서 했습니까.
“15사단 최전방 대성산에서 했죠. 그러다가 오자복(국방부 장관 역임) 연대장이 불러서 연대 작전장교로 일하다가 그 후 김학순 사단장 밑에서 전속 부관으로 근무했습니다.”
― 경호실의 첫 보직은 무엇이었습니까.
“수행과였습니다.”
― 대통령을 근접 경호하는 자리죠.
“네. 차도 같이 타고, 열차도 같이 타고, 비행기도 같이 타고…. 늘 대통령 옆에 있다 보니, 자잘하게 대통령 심부름도 하곤 했지요. 보통 경호1~5과에서 3~4년 정도 근무한 사람들이 수행과에서 근무했는데, 우리는 바로 수행과 근무를 하게 되니, 견제도 좀 받았어요.”
朴正熙 대통령과의 첫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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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3월 2일 박지만 생도의 육사 입교식을 마치고. 왼쪽부터 이광형 경호관, 박지만 생도, 박근혜 큰 영애, 박근영 작은 영애. 사진=이광형 제공 |
“1974년 12월경이었을 겁니다. 수행과에 배치된 후 차지철 실장이 새로 들어온 40명의 경호관을 선보이는 의미에서 효자동에서 중앙청으로 향하는 길에 도열하게 했어요. 그때 박 대통령을 처음 뵈었지요.”
― 그럼 박정희 대통령과 지근거리에서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눈 것은 언제였나요.
“사실 청와대 직원들이 대통령과 대화할 시간은 거의 없습니다. 맨 처음 대통령과 대화를 한 것은 1976년 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옷차림이 가벼웠으니까…. 고(高)3이던 박지만 회장(이광형 전 부회장은 박지만 EG 회장을 ‘회장’이라고 지칭했다)이 육사에 진학하기로 결정됐을 때였죠.”
― 어디서였나요.
“한양골프장이었나, 뉴코리아골프장이었나? 각하께서 골프장을 도시다가 그늘집에서 잠깐 우동을 드실 때였는데, 갑자기 골프장 경내 방송이 나오더군요. ‘이광형 대위, 어디 있나? 이광형 대위 즉시 어느 그늘집으로 오라.’ 급히 뛰어갔더니 라운드 테이블 주위를 둘러 박 대통령, 차지철 경호실장, 전두환(全斗煥) 경호실 작전차장보, 박지만 학생이 앉아 있었어요. ‘거기 앉으라’고 해서 자리에 앉았지요. 우동을 한 그릇 갖다 주더군요.”
― 박 대통령이 왜 부른 것이었나요.
“각하께서 ‘지만이가 육사를 가려고 하는데, 육사의 제도, 시험 등에 대해 이야기를 좀 해주라’고 하시더군요. 그때는 졸업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니 육사 생활에 대한 기억이 생생할 때였죠. 입학 시험, 필기 시험, 체력 시험, 신체검사 등에 대해 죽 설명을 했지요.
그랬더니 각하께서 ‘학교 생활에 대해서도 가르쳐주라’고 하셨어요. 1~4학년 동안 육사에서 공부하는 것, 학점, 3금(禁)제도가 있어서 술·담배·여자관계를 하면 퇴교(退校)된다는 것, 거짓말·커닝·도둑질을 하면 무조건 퇴교된다는 것 등을 전부 설명해줬어요. 내가 얘기하는 중간중간에 박 대통령이 간단한 질문을 하셨고, 육사 출신인 전두환 장군도 간간이 보충 설명을 했습니다. 다시 각하께서 ‘훈련하는 것에 대해 알려주라’고 하시더군요. 1·2학년 때는 기초훈련, 3학년 때는 레인저 코스(유격 훈련), 4학년 때는 공수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설명했죠.”
― 긴장이 되지 않던가요.
“대위 시절이니까 씩씩하게 설명하는데, 각하께서 ‘먹으면서 해, 먹으면서 해’ 하셨어요. 깍두기 한 알을 입에 넣고 씹었는데, 하도 긴장해서인지 입안에서 천둥소리가 나더군요. ‘아, 이 소리가 각하께 들리면 안 되겠다’ 싶어서 그냥 삼켰어요. 그걸 보고 각하께서 막 웃으시면서 당신께서 군대 생활할 때 얘기를 해주시더군요. 마지막으로 ‘그거 말고 기합 받는 거 얘기 좀 해줘 봐’라고 하시기에 육사에서의 기합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각하 일행은 다시 라운드에 들어갔고, 나는 현장으로 돌아갔지요.”
육군 대위로 청와대에 들어간 이광형 전 부회장은 1978년 6월 육군 소령으로 진급했다가 석 달 후에 예편했다. 그러고 이듬해 2월 경호실에서 제1부속실로 자리를 옮겼다.
― 예편 전에는 언젠가 군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습니까.
“그럼요. 저도 육사 출신으로 꿈을 갖고 있었어요. 육사 재학 중에는 동기 중에서 나름 선두 그룹에 속해 있었기에 프라이드도 강했습니다. 졸업할 때에는 소위 때부터 별을 달 때까지의 청사진을 도표로 작성해서 군복에 넣고 다닐 정도로 군에 대한 애착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전두환 장군 등 경호실에 있는 장군들에게 기회 있을 때마다 ‘군으로 돌아가겠다’는 얘기를 드리곤 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문홍주(12·12사태 당시 합참 본부장) 경호실 차장이 직접 불러서 ‘예편해서 여기서 경호 업무 계속 수행해’라고 지시하더군요.”
― 뭐라고 했습니까.
“‘군으로 돌려보내 주십시오’라고 했죠. 문홍주 장군은 ‘안 돼, 군인이 명령대로 하는 거지!’라고 하더군요. 여러 번 군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했습니다. 10·26 때 세상을 떠난 정인형 경호처장도 ‘여기서 대통령 모시라’고 권했어요. 내가 계속 고집을 피우자, 어느 날 육사 선배인 30경비단장 장세동(張世東·전두환 정권 시절 경호실장·안기부장 역임) 대령이 전화를 걸어왔어요. 점심때 다른 약속 없으면 단장실로 오라고 하더군요.”
― 장세동씨와는 잘 아는 사이였습니까.
“저를 무척 아껴주었습니다. 30경비단장실로 갔더니, ‘이광형, 너 예편해서 대통령 모시라고 하는데 못 하겠다고 했다며? 원대복귀 하겠다 했다며?’라고 하더군요. ‘네. 돌아가고 싶습니다’라고 했죠.”
― 장세동 단장이 뭐라고 하던가요.
“‘야, 나도 군에서 열심히 한다고 하고 있지만, 군인이라는 건 어떻게 될지 몰라. 너, 오래 한다고 해서 장군 된다는 보장 있어?’라면서 자기는 나중에 진급이 안 될 경우에 대비해, 공부를 해서 건축설계사 자격증을 따려고 한다고 하더군요. 장 단장은 ‘대통령이 필요하다면 군인이 알겠습니다라고 해야지, 군으로 돌아가겠다는 건 말이 안 돼’라며 타일렀습니다. 자꾸 그러기에 ‘선배님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라고 했더니 ‘나 같으면 명령대로 따른다. 네가 뭐 잘났다고 버티고 그러냐’고 하더군요. 그래서 ‘알겠습니다’라며 꼬리를 내렸죠.”
― 결국 육군 소령으로 예편했지요.
“전두환 장군 방에 가서 ‘제가 그래도 명색이 육사를 나왔는데, 대위로 예편하기는 싫습니다. 소령 진급은 하고 나가겠습니다’라고 했더니, 웃으면서 ‘알았어’라고 하더군요. 소령 진급하고 석 달 만에 예편, 공무원이 됐지요.”
대통령의 副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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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4월 12일 청와대 정원에서 벚꽃을 구경하는 부속실 직원들. 왼쪽부터 이광형 부관, 이혜란, 박학봉 비서관.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찍은 사진이다. 사진=이광형 제공 |
― 부속실로는 어떻게 해서 가게 된 건가요.
“국가재건최고회의 시절부터 박정희 대통령을 모시던 전석영 비서관이 총무비서관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부속실에 자리가 하나 비게 되었어요. 경호실 쪽에서 그 후임을 복수(複數)로 추천했는데, 각하께서 제 이름에 동그라미를 치셨다고 들었습니다. 정식 발령이 나기도 전에 ‘빨리 본관으로 올라와’ 소리를 듣고 바로 부속실에서 근무하게 되었지요.”
― 박정희 대통령의 부관(副官)이었던 걸로 아는데, 그게 정식 직책이었나요.
“정식 직책은 행정관이었는데, 부속실로 가니 부속실 사람들은 물론 경호실, 비서실에 있는 분들도 모두 저를 ‘이 부관’이라고 부르더군요.”
― 당시 부속실에는 누가 근무했습니까.
“경호실 출신인 박학봉 비서관, 저, 그리고 이혜란씨가 근무했습니다. 대통령 집무실 앞 전실(前室)에는 책상이 두 개 있었는데, 책상 하나에서 박학봉 비서관과 제가 교대로 근무했고, 다른 책상에서는 이혜란씨가 근무하면서 차(茶) 심부름이나 타이핑을 했습니다.”
― 주로 하는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대통령에 대한 모든 심부름이죠. 전화 심부름부터 서류 심부름까지. 대통령께서 이발하신다고 하면 이발사 불러서 대기시키고…. 대통령에 대한 모든 수발을 들었어요.”
― 육사 나온 젊은 장교 출신으로 한창 팔팔한 나이에 그런 심부름이나 하고 있는 게 갑갑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생각은 전혀 안 했어요. 수행과에 있을 때도, 부속실에 있을 때도, ‘이분이 불편하지 않도록 내가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생각만 했지요.”
― 거의 매일 청와대에 매여 있었겠습니다.
“일주일의 3분의 2는 청와대에서 근무하고, 3분의 1은 잠깐 집에 들어가서 자고 아침에 빨리 출근했지요. 아내와 애들을 볼 시간이 별로 없었죠.”
― 집은 어디였나요.
“난지도 옆 성산동에 있는 15평짜리 시영연립주택이었습니다. 1979년 봄 부속실로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 각하께서 이 사실을 알고 제 방에 오셔서 손에 수표를 쥐여 주셨어요. 집값의 두 배쯤 되는 큰돈이었는데 ‘융자금 갚고 살림에 보태 써. 조금만 기다리면 내가 청와대 근방에 아파트 마련해줄 테니…’라고 하셨어요. 눈물이 나더군요.”
― 박정희 대통령의 편지 심부름을 했다고 했는데, 혹시 그 내용을 본 적이 있습니까.
“내용을 볼 수는 없지요. 박 대통령이 직접 봉해서 주시니까…. 그걸 담당비서관들에게 전해 주었지요. 옛날 혁명동지들이나 형편이 어려운 분에게 보내는 편지 심부름을 했던 비서관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편지를 받는 분들은 ‘대통령 각하의 친서를 가지고 왔다’고 하면 ‘잠시 기다리시라’고 한 후 안으로 들어가서 옷을 단정하게 갈아입고 나왔다 해요. 그러곤 작은 상을 하나 갖다 놓고 그 앞에 꿇어앉아서 편지를 받았다고 합니다. 옛날 사극(史劇)에서처럼 말이죠.”
집무실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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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1월 21일 16년간 살았던 청와대를 떠나는 박근혜 큰 영애. 왼쪽에 최광수 의전수석비서관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조선DB |
― 당시 정서했던 서류들의 내용을 기억합니까.
“부속실로 올라간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인데, 각하께서 서류를 이만큼 안고 오시더니 내 책상 위에 놓고 ‘이게 오래되어서 잘 안 보이니 펜글씨로, 큼직큼직하게 한문 좀 섞어서 정리를 다시 하라’고 하셨어요. 쓰면서 주마간산(走馬看山) 격으로 읽어보니 5·16혁명 초기의 이야기부터 당시에 이르기까지 국가적으로 중요한 얘기들에 대한 것이었어요. 다만 그때는 그 내용을 숙지할 생각은 없이 그냥 필기하는 기분으로 썼기 때문에 내용을 기억하지는 못합니다.”
― 그 기록들은 후에 어디로 갔을까요.
“내가 다시 정서한 기록들은 각하께서 가져다가 집무실 캐비닛에 보관했는데, 아마 큰 영애(박근혜 전 대통령)께서 가져갔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국장(國葬)이 끝나고 이사 준비를 할 때 큰 영애께서 집무실 서류 정리를 직접 했습니다. 공적(公的)인 서류는 해당 비서실로 다 내줬지만, 사적(私的)인 것들은 큰 영애께서 판단해 버릴 건 버리고 보관할 건 정리해서 내놓으면 우리가 이삿짐을 쌌어요. 각하께서 쓰시던 부채, 효자손, 파리채, 슬리퍼 등등 정리해서 포장을 하고 목록을 만들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국장을 치르고, 이삿짐을 싸는 와중에, 이광형 전 부회장은 역사를 위한 기여를 하나 했다. 바로 당시 집무실에 있던 책의 리스트를 만들고, 집무실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남겨놓은 것이다.
“누가 시킨 건 아니었고, 그때 아직 젊은 나이인데도 ‘언젠가는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이 있을 것이고, 그러자면 대통령 집무실을 복원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책의 리스트를 만들고, 카메라로 사진을 찍게 했어요. 그때 찍은 사진은 거의 큰 영애에게 드렸어요. 여기 기념관(박정희대통령기념관)에 있는 달력도 당시 집무실에 있던 것입니다. 각하께서 매일 한 장씩 달력을 뜯어내셨는데, 1979년 10월 26일이 그 마지막 날짜이지요.”
“박 대통령이 마무리 작업한다고 생각”
― 박정희 대통령이 옛날 서류나 책들을 정리시키고, 타이핑을 배워두라고 할 때,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그 어떤 마무리 작업을 하시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타이핑 연습을 하라고 하실 때 ‘아, 은퇴하시면 회고록을 쓰시려고 그러시는구나’ 싶었어요. 나폴레옹 같은 경우를 보면, 말년에 걸어 다니면서 구술(口述)하면 비서가 받아 적었다고 하잖아요.”
― 박정희 대통령이 은퇴를 염두에 둔 듯한 말씀을 한 적이 있나요.
“그렇게 말씀하시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저는 대통령에게 모든 걸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한 것이죠.”
― 주한미군 철수, 인권문제 등을 놓고 카터 미국 대통령과의 갈등이 심했는데, 박 대통령은 그렇게 심기가 불편한 문제가 있을 때에 그걸 내색하는 편이었습니까.
“내색하진 않으셔도 각하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을 늘 곁에서 지켜보니, ‘지금 어떤 심기시구나’ 하는 건 느꼈지요. 카터가 고집불통이었잖아요. 제가 느끼기에 박정희 대통령은 ‘너는 그러지만, 나는 왜 미군 철수를 하면 안 되는지에 대해 너를 교육시켜야겠다’는 의지가 확고했어요.
카터 환영행사에 나갔다가 들어오시는데, 표정은 밝으셨어요. 웃으면서 ‘아, 부자나라 손님 모시려니…’ 하면서 중얼중얼하시더군요. 그러면서 소접견실이나 집무실 집기 배치를 어떻게 할 것인지 등을 일일이 지시하셨어요.”
― 집무실에서 박 대통령이 카터와 단독회담을 할 때, 분위기가 안 좋았다는데,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까.
“안에서 하는 얘기는 제가 있는 전실에서는 안 들렸어요. 큰 소리를 내면 들리지만, 조용조용 얘기하니까. 중요한 얘기가 나오면 톤이 조금 올라가기는 했지요.”
― 박 대통령이 집무실에서 얘기할 때, 톤이 올라가는 적이 많았나요.
“제가 느끼기로는 부하들에게는 그런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카터가 한국에 대해 되지도 않을 압박을 가하는 것에 대해 보고받을 때는 단호하게 말씀하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박 대통령은 미국에 대해 굴하는 것이 없으셨어요.”
“그 연세에도 턱걸이를 10개씩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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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경호실 연무관에서 배드민턴을 치는 박정희 대통령. 박 대통령은 10·26 당일 아침에도 이광형 비서와 배드민턴을 쳤다. 사진=조선DB |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돌아가실 때 62세셨는데, 굉장히 강건하셨어요. 그 연세에도 턱걸이를 10개씩 하셨어요. 30대인 저하고 배드민턴을 쳐도 전혀 지치지 않으셨습니다.
지시하거나 말씀하실 때에도 흐려지셨다는 느낌이 드는 경우는 없었어요. 한번은 각하께서 어떤 기관장에게 일을 시켰는데 기대에 크게 미치지 못했어요. 다음 날 그에게 전화를 연결하라고 하시더군요. 저는 속으로 크게 질책하실 것으로 생각했는데, 껄껄 웃으시면서 ‘오, 수고했어. 괜찮아’라고 하시면서 오히려 격려하시더군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많이 배웠습니다. 박 대통령과 다른 의견을 갖고 있던 사람도 대통령을 독대(獨對)해서 30~40분만 이야기를 나누고 나오면 설득되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 박 대통령은 아랫사람에게도 말을 놓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중간 말투를 쓰셨죠. 제가 집무실 문을 열고 ‘○○ 장관 왔습니다’ 보고하면 ‘알래하게’라고 하셨죠.”
― 알래하게요?
“경상도 사투리로 ‘안내하게’를 ‘알래하게’라고 하시더군요. ‘안내해’ 이렇게 하지 않으셨어요.”
막사이다와 시바스 리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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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회갑연에서 이광형 부관에게 술을 따라주는 박정희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은 주로 막걸리와 사이다를 섞은 막사이다를 마셨지만, 양주 시바스 리갈이 나오기도 했다. 사진=이광형 제공 |
“대개 청와대에서 파티가 있으면 부속실 전속 기사를 보내 원당에서 막걸리 두 되를 받아왔어요. 그냥 거무튀튀하고 뻑뻑한, 거의 동동주에 가까운 막걸리였어요. 저도 마시면 핑 돌 정도였어요. 너무 진하니까 대통령이 사이다를 섞어서 막 저었지요. 그걸 막사이다라고 했어요. 그걸 좋아하셨지요. 안주는 청와대 본관 주방에서 만든 멸치튀김이 전부였어요.”
― 박 대통령은 술을 많이 드셨나요.
“그냥 기분 좋게, 얼큰하게 취하시는 정도였어요. 비교적 나이가 젊은 수석비서관들과 함께할 때는 덜 드셨지만, 특별보좌관들과 함께 드실 때에는 좀 드셨어요. 아무래도 특보들이 연세도 좀 있고, 장관급 커리어가 있는 분들이다 보니, 그분들과는 막역하게 이야기를 나누시다가…. 술을 드시면 부속실에 있는 화장실을 이용하셨는데, 때때로 문틀에 어깨를 부딪히시면 제가 잡아드리곤 했지요. 술을 드신 다음 날에도 흐트러지는 경우가 없었어요.”
― 10·26사태 후 시바스 리갈이 화제가 됐었지요.
“그게 시중에서 그렇게 비싼 술이 아니잖아요. 그거를 무슨 고급술인 것처럼….”
― 청와대에 근무할 때 시바스 리갈을 드셔보셨나요.
“1977년 도고관광호텔에서 박 대통령 회갑연을 했는데, 각하께서 직접 한 잔씩 따라주셨지요. 그때 시바스 리갈을 처음 마셔봤습니다.”
― 10·26사태 후 김재규 재판 과정에서 대연회니, 소연회니 하면서 궁정동 만찬에 대한 얘기가 나왔는데, 그 말대로라면 거의 매일 그런 자리가 있었다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알 생각도 안 했고, 우리도 짐작으로만 알았습니다. 다만 거의 매일같이 그런 자리가 있었다는 것은 완전히 거짓말입니다.
대통령이 퇴청(退廳)해서 물러가 계실 때는 혼자잖아요. 사모님도 안 계시고, 큰 영애도 조금 앉아서 얘기 나누다가 방으로 가고…. 그러면 혼자서 책도 읽고 글도 쓰셨어요. 제가 올라갔다가 그렇게 혼자 계시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안 좋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가끔 술 좀 마신 게 뭐 그렇게 나쁜 건가요? 그렇다고 대통령이 무교동 골목으로 갈 수도, 인사동 한정식집으로 갈 수도 없으니 가까운 데 있는 정보부 안가(安家)를 이용했던 것이죠.”
― 윤석열 대통령이 집무실을 용산으로 이전한 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잘한 일입니다. 내가 청와대에서 5년을 근무했잖아요? 정말 구중궁궐(九重宮闕)입니다. 박근혜 대통령도 그 구중궁궐에 들어갔다가 결국 그렇게 됐고…. 윤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나온 거는 정말 잘한 일입니다.”
전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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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1월 16일 신임 경호실 작전차장보 노태우 소장에게 계급장을 달아주는 박정희 대통령. 왼쪽 끝이 전두환 전임 작전차장보. 사진=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
“전두환 장군은 저를 굉장히 좋아했어요. 노태우 장군은 그렇게 친근감을 표시하는 스타일은 아니었고…. 전두환 대통령은 KBS에 왔다가 저를 보곤 끌어안으면서 ‘이광형, 여기 있구나’ 하면서 좋아했어요.”
― 전두환 장군에 대해 기억나는 일이 있습니까.
“소소하게 몇 가지 있지만, 그런 것까지 얘기하기는…. 박정희 대통령의 국장을 마친 후에 보안사령부로 한번 다녀가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나중에 찾아갔더니 ‘고생 많이 했다’면서 12·12사태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줬습니다. 일어서는데 ‘애들 과자나 사주라’면서 금일봉을 주더군요.”
― 당시 하나회가 있는 줄 알았습니까.
“암암리에 알았지요. 우리 동기생 중에도 하나회 회원이 몇 명 있었어요. 김영삼 정권 시절에 대령으로 있다가 장군 진급에 탈락하고 옷을 벗었지요. 사실 동기 중에서 가장 우수한 친구들이었는데….”
― 하나회에 들어오라는 제안을 받은 적은 없습니까.
“있었지요. 그런데 하나회라는 게 알음알음으로 조금 쓸만하고 똘똘한 애들 불러서 밥 먹고 유대(紐帶)관계를 갖는 정도였지, 아주 조직적으로 뭘 한 거는 아니라고 봅니다.”
차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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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11월 15일 강릉 오죽헌을 둘러보는 박정희 대통령. 오른쪽 끝이 이광형 경호관, 왼쪽에서 두 번째가 차지철 경호실장. 사진=이광형 제공 |
“경호교육을 마치고, 실장실에 올라가서 신고할 때 처음 봤지요. 훈시를 하고 나서 양복 한 벌씩 맞춰 입으라고 금일봉을 주더군요.”
― 첫 느낌이 어땠습니까.
“차지철이라고 하면 5·16 때 공수복 차림으로 나타났던 그 모습만 생각했는데, 막상 보니 틀도 좋아지고 말도 잘하더군요. ‘아, 자리가 사람을 이렇게 바꾸어 놓는구나’ 싶었습니다.”
― 경호실에서 근무하면서 보니 어떻던가요.
“당시 차 실장은 경호실이 이권(利權)에 개입하거나 특권(特權)의식을 가지고 군림하는 것을 못 하게 하고, 제대로 경호를 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고쳐나가고 있었는데, 참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청렴결백하고,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실장 방 옆에 기도실을 만들어놓고 늘 대통령을 위해 기도하는 것도 좋게 봤어요.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실망하게 됐지만요.”
― 어떤 점에 대해 실망했나요.
“경호실 조직이 점점 커져가는 데다 제가 부속실로 올 무렵에는 위력시위(威力示威)로 경호 방향이 바뀌는 걸 보고 ‘저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한 달에 한 번씩 수경사(수도경비사령부)에서 탱크까지 가져다가 30경비단에서 열병식(閱兵式)을 하는 것이나, 경호원들이 교대 근무 때 효자동 거리를 시가행진하듯 하면서 경호실가나 군가를 부르는 걸 보면서, 차 실장에게 실망했어요.”
― 그 시절의 차지철 실장에 대해서는 말이 많지요.
“경호실 사람들에게 들은 얘긴데, 한번은 각하가 나갔다 돌아오시다가 경호원들이 행진하는 것을 보고 언짢아하셨답니다. 본관 앞에서 차에서 내리면서 ‘차 실장, 저런 거 하지 마. 시가행진하면서 소리 지르는 거 하지 마’라고 지시를 하셨대요. 그러고 들어가셨는데, 차 실장은 박 대통령에게 인사하고 돌아서면서 전두환 작전차장보를 부르더니 ‘그대로 해. 각하는 그러시지만, 경호를 위해 그대로 해’ 그랬다는 거예요. 그 얘기를 전해 듣고는 ‘대통령이 지시하면 들어야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무엇보다도 10·26 당일 정말 실망했어요.”
― 그렇죠.
“대통령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김계원 비서실장, 차지철 경호실장, 이렇게 네 분이 밥을 먹을 때는 차 실장이 경호원이에요. 당연히 권총을 차야지요. 차 실장이 권총을 차고 갔으면 달라졌을 거예요. 설사 총이 없더라도, 김재규가 총을 들었을 때는 육탄으로 막았어야지, 화장실로 도망가서 대통령에게 ‘각하, 괜찮습니까?’ 그러는 게 경호실장입니까?”
침실의 영부인 사진
― 최근 청와대가 개방되면서 침실이 80평이 넘는다고 해서 화제가 됐습니다.
“그때는 그렇게 넓지 않았어요. 침대 하나, 창가에 놓는 거(협탁) 하나, 그 옆에 붙박이장이 하나 있었어요. 침대 앞에는 창문이 있고, 영부인 사진이 큰 게 놓여 있었어요. 침대에서 일어나면 바로 영부인 사진이 보일 수 있게…. 침대 옆에 약간 운동할 수 있는 공간이 조금 있었지요. 옆에 화장실 겸 욕실이 있었고…. 모두 합쳐서 20평이 안 됐을 겁니다.”
《그때 청와대에선》에는 어느 날씨 좋은 날 박정희 대통령이 ‘오늘 같은 날 골프 나가면 좋겠다’ 하더니, 이내 ‘골프 나가면 경호차들이 많이 움직여 기름도 많이 들겠다. 관두자’고 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그 얘기를 꺼냈더니, 이 부회장의 목소리가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아쉬움을 꾹 누르시는 게 보였어요. 나는 속으로 ‘그렇게 치고 싶으시면, 좀 치러 나가시지…’ 했는데, 늘 그런 걱정을 하셨어요.”
비서실 근무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국장, 박정희 대통령 자녀들의 이사 등 시간이 정신없이 지나갔다. 최규하 국무총리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12·12사태가 일어났다.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최광수(체신부·외무부 장관 역임) 의전수석비서관이 최규하 대통령의 비서실장이 되었다. 최 실장은 넋을 놓고 앉아 있는 이광형 부관을 찾아왔다.
“이 부관이 충격을 받은 것은 내가 이해하는데, 그래도 대통령도, 국정(國政)도 이어가야 하니, 청와대에 남아서 최규하 대통령을 계속 모셔줬으면 좋겠다.”
“저는 싫습니다. 저는 (박정희 대통령) 각하를 대통령으로 모신 거지, 각하 밑에서 총리 하던 분을 다시 모시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는 인생을 많이 산 것은 아니지만, 인생에 회의(懷疑)를 느끼고 있습니다. 이게 뭡니까? 대통령의 가장 충성스러운 부하여야 할 정보부장이 대통령을 저격하고, 제일 가까운 경호실장이라는 사람은 화장실로 숨고, 비서실장이라는 사람은 방조한 거 아닙니까? 이런데 제가 무슨 청운의 뜻을 품고 뭐를 더 하고 싶겠습니까? 이제 공직 생활은 그만하렵니다. 여기서 끝내렵니다.”
“그럼 뭐 하면서 살려고?”
“밥이나 먹고살 수 있게 시멘트 대리점이나 하나 내주십시오. 조용히 살겠습니다.”
최광수 실장은 막 웃으면서 말했다.
“아직 젊어서 몰라서 그래. 그런 말 하지 마. 좀 더 생각해봐.”
일주일 뒤에 다시 찾아온 최광수 실장은 그만두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이광형 부관에게 “정 그러면 비서실에 내려가 있으라”면서 정무수석비서관실로 발령을 냈다. 당시 정무수석비서관은 고건(高建) 전 국무총리였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있는데, 부속실 선배인 전석영 총무수석비서관이 불렀다. 전 수석은 새로 민정수석비서관이 된 이원홍(KBS 사장·문화공보부 장관 역임)씨가 그와 함께 일하기를 원한다고 했다. “저는 조금 있다가 그만둘 생각인데 다 싫어요. 새로 뭘 하겠어요”라며 시큰둥해하는 그에게 전 수석은 “내가 보니 지금 최규하 대통령 비서실에서 제일 활발하게 움직이는 데가 민정수석실”이라면서 민정수석실로 가라고 권했다.
그를 만난 이원홍 민정수석은 그 큰 덩치에 걸맞지 않게 겸손하게 말했다.
“나로서는 박정희 대통령을 모시던 분을 이렇게 보좌관으로 같이 일하자고 하는 게 황송스럽소. 하지만 지금 긴박한 일들이 많은데 내가 잘 모르니까 날 좀 도와주시오.”
《한국일보》 편집국장 출신인 이원홍 민정수석은 주일 문화원장과 공사로 8년간 한국을 떠나 있었기 때문에 국내 사정에 어두웠다. 이광형 전 부회장은 ‘서울의 봄’에서 전두환 장군의 집권으로 이어지는 격동기 동안 이원홍 민정수석의 보좌관으로 일하면서 이 수석과 신군부 간의 가교(架橋) 역할을 했다.
KBS 시절
이원홍 민정수석은 1980년 7월 KBS 사장으로 나가면서 그를 사장 비서실장으로 데리고 나갔다. 신군부의 실세(實勢)가 된 육사 선배들은 “KBS에 가서 몇 년만 고생하고 오라”고 했다. 방송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그는 사장실을 드나드는 실·국장들에게 과외교습(?)을 받으면서 방송인이 되어갔다. 6개월쯤 지나자 방송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그를 ‘동지’로 생각한다던 이원홍 사장이 문화공보부 장관이 되어 떠날 때, 그를 요직인 경영관리실장으로 발령을 냈다. 하지만 후임 사장은 그를 자금관리국장으로, 다시 청주방송총국장으로 밀어냈다. 요로(要路)에 있는 선배들과 이원홍 장관에게 기대면 다른 기회를 노릴 수 있었지만, 그런 식으로 KBS를 떠나고 싶지는 않았다. 청주방송총국장으로 있을 때는 실적평가에서 KBS 지방총국 중 꼴찌였던 것을 1등으로 끌어올렸다.
하지만 노태우 정권 출범 이후 민주화의 물결 속에서 KBS에 노조(勞組)가 생기면서, 그는 ‘특채자(特採者) 1호’로 지목되었다. 결국 1988년 7월 KBS를 떠났다. 마흔 살의 나이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지인(知人)들의 도움으로 몇몇 회사에 들어갔지만, 잘 맞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의 아들과 함께
1991년 어린이회관을 운영하는 육영재단에서 분규가 일어났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의 둘째 영애인 박근영 이사장 체제가 자리 잡는 것을 도왔다.
1993년 박근영 이사장이 삼양산업(현 EG) 부사장으로 있는 동생을 도와주라고 했다. 포철(현 포스코)에서 나오는 산화철(酸化鐵) 부산물(副産物)을 활용한 제품들을 생산하는 삼양산업은 원래 산화철 전문회사인 삼화기업과 포철의 자(子)회사인 거양상사가 4억원씩 출자(出資)해서 설립한 회사였다. 박태준 포철 회장은 육군 대위로 예편한 후 쉬고 있던 박지만 현 회장에게 삼양산업 부사장 자리를 맡겼다. 하지만 회사 사정은 좋지 않았다. 기술력이 좋지 않아서 불량품이 쌓이고 있었다. 박태준 포철 회장은 박지만 부사장에게 동기부여를 하기 위해 회사 지분을 아예 인수하라고 권했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은의를 느끼고 있던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이 8억원을 빌려주었다. 여기에 4억원을 증자(增資)했다. 이광형 전 부회장은 “1993년에 가서 보니, 자본금이 12억인데 자본잠식이 11억8000만원, 전년도 매출이 7억원인데 결손이 6억5000만원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광형 삼양산업 상무는 박지만 사장과 머리를 맞대고 회사 회생(回生) 방안을 강구했다. 우선 박태준 회장의 도움으로 원료 구입비를 줄이고, 대금 결제 조건들을 개선했다. 포철 부사장을 지낸 김철우 박사를 고문으로 모셔온 후, 그의 도움으로 은퇴한 일본 기술자들을 초빙해 기술력을 높였다. 삼화기업 서종규 사장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렇게 2년여를 노력한 끝에 최고급 품질의 제품을 일본 시장에 내놓을 수 있었다. 그때부터 매출이 늘기 시작, 1997~1999년 사이에는 1년에 30~40%씩 성장했다. 2000년 1월에는 코스닥 상장(上場)에 성공했다. 이광형 전 부회장은 2012년 부회장이 되어 서울로 올라올 때까지 충남 금산에 있는 공장을 지켰다. 2014년 그가 대표이사를 그만둘 때 회사 매출액은 1700억원으로 200배 성장했다.
― 세간에서는 박태준 회장과 김우중 회장이 박지만 회장을 도와주기 위해 땅 짚고 헤엄칠 수 있는 회사를 만들어준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데, 그건 아니었군요.
“전혀 아니에요. 물론 현금을 빌려준 김우중 회장, 포철에서 원료를 공급받고 납품할 수 있게 도와준 박태준 회장께서 보이지 않게 혜택을 주면서 울타리가 되어주신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스스로 노력하지 않았으면 자본잠식이 됐을 때 회사는 벌써 망했을 겁니다. 박지만 회장과 직원들이 모두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죠.”
“지금 생각해도 늘 고맙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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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조준우 |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조금 생각을 해봐야겠어요.”
― 부회장님에게 박정희 대통령은 어떤 분이었습니까.
“부모 같고, 스승 같은 분이었지요. 늘 인자하시고, 늘 친절하게 대해주셨고…. 평생 고맙지요. 늘 고맙지요. 지금 생각해도… 늘 고맙지요.”
이렇게 말하는 노(老)신사의 목소리는 젖어 있었다. 먼 훗날 그가 저세상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게 되면, 박 대통령은 아마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이광형, 고맙다! 열심히 나를 섬겨줘서 고맙고, 내 아들을 잘 도와줘서 고맙다. 넌 정말 열심히 살았다! 정말 수고했다!”⊙